‘ER’이라고 적힌 빨간 간판이 붙은 종합병원 응급실의 풍경은 언제 방문해도 늘 비슷했다.
응급실 입구에선 911구조대원이 앰뷸런스에서 급히 뛰어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고, 비좁은 복도로 발을 들이면 의사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복 경찰이 눈에 띄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침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커튼으로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닭장 같은 느낌을 지우긴 어려웠다.
응급실 내부도 소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온 환자 가족과 임종을 앞두고 있는 지저분한 부랑자, 접수처에서 도대체 언제 진료를 받을 수 있냐고 큰 소리를 내는 남자는 응급실의 단골손님이었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며 환자를 살폈다. 환자는 넘치는데 인력이 부족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응급실 상황은 한창 전투 중인 야전병원 막사를 연상케 했다.
핼러윈의 여파 때문인지 오늘은 독특한 옷차림을 한 환자들이 많았다. 호모포비아 갱단에게 린치를 당해 얼굴에 울긋불긋한 멍이 든 후크 선장과 피터팬 커플, 술집에서 드잡이를 벌이다 머리가 깨져 병원으로 실려 온 풍채 좋은 대머리 소크라테스, 핼러윈 퍼레이드에 참여했다가 발작을 일으킨 백설공주의 계모 등등.
굴드가 병원 관계자에게 미리 연락을 취했는지 제이드는 응급실에서 대기하는 일 없이 한적한 일반 병실에서 진료를 받았다. 출혈이 심한 펠릭스 신부는 이동 침대에 실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신부님의 피가 옷에 묻어서 그런지 제이드는 폭력 사건에 휘말린 중환자 취급을 받았다. 곁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굴드 때문에 담당 의사의 오해는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러나 제이드의 부상은 경미한 편이었다. 검붉은 빛을 띤 갈비뼈 위의 멍을 손가락으로 누르면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오긴 했지만 타박상 수준에 불과했다.
제이드는 괜찮다고 하는데 굴드가 자꾸 의사에게 정밀 검사를 요구했다. 목소리나 몸짓은 전형적인 상류층 백인처럼 신사적인데 의사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제이드가 재채기만 해도 변호사를 불러들여 소송을 준비할 기세였다.
제이드는 무심결에 뱀파이어와 고층 빌딩에 사무실을 차린 악덕 변호사의 조합을 상상했다. 나름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굴드가 실제로 자산 관리 및 투자 문제로 대형 로펌의 파트너와 자주 면담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크게 아픈 곳이 없어서 바로 병원을 나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이드는 병실에 붙들려 온찜질을 받았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복사뼈의 붓기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인 병실은 차분하고 조용했다.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진 창문 너머로 점멸해 가는 도시의 야경이 보였고, 히터에서 나오는 열기가 공기를 데웠다.
“고마워요.”
병실 침대에 앉은 제이드가 고개를 떨어트린 채 말했다. 그의 발목 위에 얹어진 찜질 수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뭘 말입니까.”
울림이 풍부한 바리톤의 목소리가 병실의 공기를 나직하게 흔들었다.
“당신이 날 구해 줬잖습니까.”
제이드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침대 시트를 움켜잡았다. 뒤늦게 목이 메었고 손끝이 떨렸다. 만약 굴드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분명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가장 절박하고 위급한 상황일 때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사실이 제이드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전멸 직전의 순간에 지원 병력이 투입된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가슴이 벅차서 굴드가 어떻게 그 자리에 나타난 건지 의문조차 품을 정신이 없었다.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왜 공원에 있었던 겁니까.”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어색한지 굴드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질문을 던지는 말투가 달라졌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제이드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범인을 추궁하는 사람처럼 가라앉았다.
“금발 노숙자가 날 쫓아와서 공원으로 도망친 겁니다. 크롤린지 뭔지 하는 날개 달린 녀석은 그다음에 나타났고요.”
해리와 함께 숨을 헐떡거리며 도로를 달리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람 많은 곳으로 도주했다면 인명 사고가 크게 났을지 몰랐다. 아이슬러와 크롤리 둘 다 상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작자들이라 주변 사람이 휘말리든 말든 멋대로 날뛰어 댔을 것이 분명했다.
핼러윈 행사장과 서펜타인 공원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을 떠올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돌덩이를 집어삼킨 것처럼 가슴께가 묵직해진 제이드는 개인 병실의 전화기를 흘끔 바라봤다. 해리가 잘 도망쳤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벤 일행도 전부 무사한 건지 염려가 됐다.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휘말린 게 아니었던 겁니까.”
이맛살을 찌푸린 굴드의 눈빛이 삽시간에 흉포해졌다. 저 깊은 곳까지 가라앉은 굴드의 굵은 목소리도 음산한 기운을 띠었다. 그의 이마 위에 힘줄이 불거졌다. 제이드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기세였다.
“핼러윈 행사장에 해리와 함께 있었는데 폭발이 일어났어요. 그때 아이슬러와 전에 굴드가 불러들였던 괴물과 비슷한 녀석이 나타났죠.”
제이드는 괴물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시선을 침대 시트 쪽으로 떨어트렸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굴드가 자신을 구해 준 건 정말 고마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정체를 알 수 없는 의혹이 쌓여갔다.
괴물 이야기가 나오자 굴드의 낯빛이 달라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괴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가 부리는 검은 괴물과 그렇게 닮았냐는 질문조차 던지지 않았다.
“신부님은 괜찮으실까요.”
병실에 드리워진 불편한 침묵을 깨기 위해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주홍빛 가로등 불빛이 방 안의 열기로 맺힌 물방울 때문에 부옇게 번져 보였다.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만 금방 회복될 겁니다.”
굴드가 미지근해진 찜질 수건을 제이드의 발목 위에서 걷어 내며 대꾸했다. 어쩐지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제이드는 굴드가 펠릭스 신부와 안면이 있는 사이일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느낌이 그랬다. 만약 그의 짐작이 맞는다면 어째서 아는 사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지 의문스러웠다.
“그 날개 달린 남자애가 당신을 레오폴트라고 부르던데, 혹시 예전에 사용하던 이름인 겁니까?”
제이드는 찜질을 하기 위해 접어 올렸던 바지 밑단을 잡아당겼다. 그의 시선은 굴드를 바라보지 못하고 발등 위를 헤맸다.
크롤리가 굴드를 가리키며 레오폴트라고 외치는 걸 들었다. 아까 공원에서 제이드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굴드를 올려다봤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아이슬러가 레오폴트와 무슨 사이냐고 노래를 불러 댈 때 그는 깊은 짜증을 느꼈다. 레오폴트라는 사람이 누군지 몰랐던 탓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엄한 추궁을 당한 게 아니었다.
미묘한 관계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굴드를 레오폴트라고 지칭한 사람은 둘이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 공교롭게도 세 사람은 뱀파이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펠릭스 신부에게 아이슬러가 뱀파이어란 소리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제이드는 그가 굴드와 아는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혹, 연결 고리가 있다 하더라도 이름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라고 여겼다.
그러나 제이드의 예상이 빗나갔다. 뱀파이어인 세 사람은 오래 알고 지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사이였다. 셋의 관계야 그렇다 치더라도 뱀파이어 헌터인 펠릭스 신부와 제이드를 관계도에 끼워 넣으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굴드가 급히 해결해야 한다던 일이 그 뱀파이어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슬러를 뒤쫓느라 핼러윈 축제 행사장에 나타난 검은 괴물도 굴드가 부리는 녀석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창가에 놓인 가습기에서 새하얀 수증기가 눈처럼 뿜어져 나왔다. 가습기를 틀었는데도 병실 공기가 답답하고 건조했다.
“네. 예전에 사용하던 이름입니다.”
굴드가 설핏 눈썹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기색이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굴드를 바라보던 제이드가 입을 꾹 다물고서 신발을 신었다.
그는 굴드의 옛 이름이 레오폴트가 맞는지 확인이나 받자고 그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그는 아이슬러나 트롤리, 그리고 굴드가 처리해야 한다는 일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굴드는 아무런 부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마치 알려 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라고 딱 잘라 선을 긋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의 풀 네임에 대해서도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이드는 굴드의 태도에 적잖이 실망했다. 그는 굴드의 과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본명은 뭔지, 줄곧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일부러 캐묻거나 하지 않고 기다렸다. 뱀파이어라는 사실 말고도 숨기는 게 많다는 걸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관계가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싸우기 전보다는 둘의 관계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굴드의 반응을 보고 나니 제 생각에 회의가 들었다. 제이드는 또다시 벽을 느꼈다.
중대한 비밀을 알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이름이 맞느냐고 물어봤을 뿐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내키지 않는다는 듯 떨떠름한 태도로 알려 주는 사람이 과연 제이드에게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굴드는 제이드가 그의 영역 안으로 깊게 발을 들이는 걸 허락할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관계가 발전한 게 아니라 제이드를 가둬 둔 새장이 조금 확장된 것뿐이었다.
새장 안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제이드가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둘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방적이었다. 새장의 창살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이상 핵심적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었다.
“기분이 상한 것 같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굴드가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제이드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뇨.”
제이드는 굴드의 손을 밀어낼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 뒀다. 사소한 일로 굴드와 감정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이드는 오늘 겪었던 일련의 사건 때문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과부하가 걸린 건지 사고가 헛돌기만 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한숨 자고 난 다음에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성배’란 단어만 떠올려도 제이드는 골이 지끈거렸다. 성당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성배와 관련해서 여태껏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제이드가 오늘 뱀파이어들에게 쫓긴 이유도 그가 빌어먹을 성배란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을 뻔했지만 약간의 소득도 있었다. 그동안 성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는데, 아이슬러와 크롤리 덕분에 대충 감이 잡혔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썩 내키진 않지만 뱀파이어에게 성배는 별미이거나 힘을 키워 주는 어떤 특별한 존재인 듯했다.
제이드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만지던 굴드의 손이 목으로 내려왔다. 단정한 손가락이 멍 자국을 더듬었다. 줄곧 시선을 외면하던 제이드가 옆에서 비스듬히 그의 표정과 눈빛을 살폈다.
크롤리가 남긴 손자국을 노려보는 굴드의 눈동자가 빙점으로 떨어졌다. 안으로 갈무리하려고 해도 자꾸만 밖으로 흘러나오는 증오심과 살기 때문에 제이드는 그도 모르게 긴장했다.
비록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굴드가 저 깊은 곳에서 분노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런 표정을 전장에서 몇 차례 목격한 적이 있었다.
적군의 손에 심하게 훼손된 포로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부대원들이 내비치던 살기와 비슷했다. 평소처럼 식당 식탁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지만, 농담은 한마디도 오가지 않고 폭풍 전야처럼 불온한 침묵이 실내에 감돌았다.
다들 생각하고 있는 바는 똑같았다. 다음 날 적군을 진압하기 위해 시가지 전투에 투입되면 상관이 불같이 화를 낼 정도로 잔혹해졌다. 자신의 행위가 복수인지 화풀이인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
제이드는 검붉은 멍을 쓸어내리는 굴드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감촉이 그의 긴장을 누그러트렸다.
굴드의 손이 피 묻은 셔츠 안쪽으로 들어와 제이드의 쇄골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심장이 쇄골 부근에서 쿵쿵, 뛰고 있는 것 같았다.
굴드는 성배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까.
불현듯 의문이 생긴 제이드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는 금방 결론을 내렸다. 굴드가 성배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컸다. 크롤리가 성배 이야기를 꺼냈을 때 굴드가 내비쳤던 반응을 생각하면 거의 확실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자신이 성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마에 성배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최초로 그를 성배라고 부른 남자가 뱀파이어들에게 정보를 흘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적군이 쏜 총에 맞아 죽어 가던 제이드를 이상한 힘으로 살려 낸 건 바로 그 남자였다. 제이드의 피를 마실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정보를 누설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지금까지 제이드를 성배라고 부른 사람은 성당 지하실에서 적군을 몰살시킨 남자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숙자 몰골을 한 아이슬러가 어두컴컴한 성당 지하실에 나타났던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제이드가 기억을 잃어버렸던 일 년 전 사건 이후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성배라는 단어를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제이드를 성배라고 부르는 뱀파이어가 아이슬러 말고도 하나가 더 나타났다. 크롤리의 등장으로 아이슬러가 성당 지하실에서 만났던 남자라고 확신할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 그를 성배라고 부르며 피를 노리는 뱀파이어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같은 날 제이드를 습격한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무리가 따랐다. 누군가에 의해 성배에 대한 정보가 뱀파이어들에게 뿌려졌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내가 성배라는 걸, 뱀파이어들은 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겁니까.”
제이드는 눈을 내리뜬 굴드의 속눈썹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손을 뻗어 굴드의 속눈썹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
제이드가 질문을 던지자 상아처럼 매끄러운 쇄골을 손가락으로 더듬던 굴드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이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서랍 깊은 곳에 숨겨 둔 역모의 편지를 실수로 책상 위에 꺼내 놓은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놈들이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당신은 놈들의 성배가 아닙니다.”
제이드의 피부에서 손을 떼어 낸 굴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시간 내비쳤던 동요의 흔적은 이제 그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안정적이고 묵직한 저음은 마치 연단에 선 독재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처럼 듣는 이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제이드는 굴드가 입을 열기 전에 주먹을 꽉 움켜쥐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굴드가 딱히 거짓말을 입에 올린 건 아니었지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굴드는 감추고 있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제이드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푸른 수염 공작처럼 자신만의 음산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을 마련해 둔 채 제이드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그렇다고 해서 굴드가 어떤 비열한 저의를 가지고 그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굴드는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이드를 생각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굴드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이라고 해도 마음은 조금도 편치 않았다. 굴드가 제이드를 전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제이드는 입맛이 썼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자신이 굴드를 괴롭히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괴로워졌다.
***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굴드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새벽이라 공기가 축축했다. 뺨을 따끔따끔하게 만드는 비가 내렸다. 병원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 앞 유리에 분무기로 물을 뿌린 것처럼 입자가 미세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제이드는 길 건너편에서 택시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한동안 내 집에서 지내십시오.”
불이 바뀌어서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굴드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이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굴드의 집에서 머무는 건 둘째 치고 그는 내일도 일을 나가야 했다.
백수도 아닌 제이드에게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건 무리한 요구였다. 생업을 포기하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굴드가 강경한 태도로 제이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동차 한 대가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을 뿌리며 그들 곁을 지나쳤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굴드의 눈빛이 형형해서 제이드는 흡사 협박이라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놈들이 또 당신을 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것도 내가 당신 곁에 없을 때.”
빗소리에 녹아든 중저음의 목소리가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굴드가 말한 ‘놈들’은 아이슬러와 크롤리였다. 제이드는 꼴깍 생침을 삼키며 뱀파이어들이 제 주변을 맴도는 광경을 상상했다.
손끝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혼자 있을 때 놈들과 마주친다면 제이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는 제이드에게 집요한 집착을 보였다. 그들은 성배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굴드 때문에 뱀파이어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물러나긴 했지만, 그를 습격하는 게 오늘 한 번으로 끝날 리 없었다.
인간이 아닌 위험한 자들이 자신을 노리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혼자 지낸다는 건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장 오늘 밤 놈들이 그의 집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아니면 으슥한 골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척도 없이 제이드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지도 몰랐다.
제이드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굴드뿐이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를 막을 수 있는 사람 또한 굴드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헌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명을 재촉하기만 하는 저급한 발상이었다. 마치 영화 시작 5분 만에 삽질만 하다가 죽어 버리는 공포 영화의 조연처럼 말이다.
우선 하룻밤 사이에 뱀파이어 헌터를 찾아낼 방법도 없었고, 설혹 운이 좋게 연락이 닿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제이드를 위해 움직여 줄지 미지수였다. 어떤 집단이든 나름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뱀파이어 헌터들이 과연 아이슬러와 크롤리를 상대할 능력이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반인이라 뱀파이어나 뱀파이어 헌터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논리나 지식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놈들을 직접 보고 나면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강한 뱀파이어 헌터라도 놈들과 대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정적으로 놈들과 싸우다 초주검이 돼 수술실로 실려 간 펠릭스 신부님도 뱀파이어 헌터였다. 그것도 상당히 노련하고 강한 축에 속하는.
아이슬러의 존재를 제이드에게 경고해 주었던 뱀 모양의 문신도 이젠 더 이상 그를 지켜 주지 못했다. 아이슬러와 싸우다 완전히 소멸한 건지 아니면 힘을 모으기 위해 동면에 들어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후자라면 한동안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굴드가 소유한 건물에서 며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느닷없이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에 저항감을 느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성배라는 이유로 뱀파이어들에게 노려지고 있는 판국이었다. 자신이 왜 그놈들 때문에 외출을 금지당해야 하는 거냐고 억울해해 봤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제이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서서히 뭉개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택시에 탄 제이드는 굴드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굴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의 온기 없는 차가운 손은 제이드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단단함이 느껴졌다. 제이드는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의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지금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정의 내릴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묘했다.
제이드는 한참 동안 굴드를 바라보다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받은 의뢰들을 전부 취소해야 했다.
일일이 전화를 돌리고 사과할 생각을 하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몇몇 의뢰는 시간을 좀 더 달라고 양해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금을 받은 일들은 돈을 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위약금까지 물어야 했다.
잔고가 바닥나기 직전인 통장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돈보다는 목숨이 중요했다. 살고 싶으면 위약금 문제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택시가 언뜻 보기엔 평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택시를 타고 9번가로 오는 중에 비는 그쳤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수상쩍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여기서 얼마나 지내야 하는 걸까.
제이드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벽돌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 전구를 갈 때가 다 된 가로등, 불 꺼진 유리창.
익숙한 풍경인데 평소처럼 굴드를 만나러 이 건물을 방문한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굴드가 열쇠를 꺼내며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제이드는 굴드의 널찍한 등을 흘끔거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아파트에 들러서 짐이라도 싸 왔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짐까지 싸서 굴드의 집으로 들어간다면 정말 말도 못하게 기분이 이상했을 것이다.
“현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건 당신과 나뿐입니다.”
열쇠로 문을 딴 굴드가 손잡이를 돌리며 말했다. 기름칠할 때가 됐는지 철커덕, 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현관문이요?”
한 걸음 뒤에서 얼쯤하게 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제이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이드의 검은 눈동자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물음을 담고 있었다.
“아이슬러나 크롤리가 여길 찾아낸다 하더라도 한동안은 안전할 거라는 뜻입니다.”
굴드가 제이드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막이 하나 걷힌 것처럼 지금까지 제이드가 볼 수 없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새카맣고 끈적끈적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빠끔 열린 현관문 너머에서는 붉은 눈을 가진 괴수들이 제이드를 노려봤다. 흡사 어두컴컴한 동굴에 군집한 박쥐들이 일제히 낯선 자를 쳐다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 이게 뭡니까. 도대체 이런 게 언제부터….”
제이드가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끝은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아지랑이를 가리켰다.
현관문도 검은 아지랑이 저편에 존재해서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손을 쑥 밀어 넣으면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습니다. 침입자를 걸러 내는 결계일 뿐이니까요.”
굴드가 제이드의 어깨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제이드나 평범한 인간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 뿐, 결계는 굴드가 이 건물에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존재해 왔다.
“으….”
굴드에게 붙들린 제이드는 목을 움츠리며 현관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아파트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확실히 안전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마치 지옥의 입구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 심경이 복잡했다.
천장이며 벽에 달라붙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새빨간 눈동자들 때문에 꺼림칙한 감정은 한층 더 짙어졌다.
“불편한 모양이군요. 예전처럼 당신 눈에 띄지 않도록 조절하겠습니다.”
제이드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자 굴드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복도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벽을 타고 움직이던 붉은 눈동자의 괴물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제이드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늘 촌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던 벽지와 침침한 빛을 뿌리는 전구뿐이었다.
“눈에만 안 보이는 거지 아까 그 녀석들, 그대로 있는 거죠?”
주변을 둘러보던 제이드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알아봤자 괴롭기만 한 진실에 눈떠 버린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괴물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을 쳐다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 복도를 드나들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정말 오묘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 당신을 공격할 일은 없을 테니까.”
굴드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제이드는 한숨을 삼키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복도를 지날 때마다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마치 유령을 목격했다는 괴담을 들은 이후로 한밤중에 화장실에 갈 때마다 긴장이 되는 것처럼.
“근데 아까 그 녀석들, 혹시 지하층에 내려오기도 하나요?”
제이드가 가파른 철제 계단을 내려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이드보다 먼저 계단을 내려가던 굴드가 불쾌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마당을 지키는 사냥개라고 설명하는 쪽이 더 적합하겠군요.”
짐승은 절대 침실에 들이지 않는다고 딱 잘라 못을 박는 듯한 말투였다.
굴드의 답변에 마음의 위안을 얻은 제이드는 소파에 앉으려다가 멈칫했다. 제 옷이 말도 못하게 지저분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신부님의 피 때문에 셔츠가 얼룩덜룩했다. 섬유에 코를 갖다 대고서 숨을 들이마시면 페인트칠이 벗겨진 놀이터 손잡이 냄새가 났다.
“우선 씻고 나오십시오.”
제이드가 코를 킁킁대며 곤란해하고 있으니까 굴드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그에게 다가왔다.
굴드가 머무는 지하층에는 제이드가 편하게 입을 만한 옷가지가 몇 벌 갖춰져 있었다. 반 동거 상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제이드가 자주 드나들다 보니 그가 쓸 물건들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그리고 이건 버리겠습니다.”
굴드가 제이드의 셔츠를 벗겼다. 정전기가 일어서 머리카락이 뻗친 제이드가 앗, 하고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굴드가 셔츠를 둥글게 구긴 다음 쓰레기통에 가차 없이 던졌다.
“설마, 남의 피가 묻은 옷을 또 입을 생각이었습니까?”
당황해하는 제이드에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의 행동에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묻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그런 건 아닌데….”
굴드의 지적대로 손빨래를 한 뒤 다시 입을 생각이었던 제이드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생각해 보니 화장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빨래하는 것 정도로는 핏자국을 지우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커다란 냄비에 넣고 팔팔 끓여야 얼룩이 남지 않을 텐데, 남의 집에서 할 짓은 절대 아니었다.
피가 덜 빠져서 흉물스러운 옷을 욕실에 널어놓는 것도 민폐였다. 그의 집이었다면 별문제가 안 될 일이었지만, 어쨌든 셔츠는 그냥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시큼털털한 냄새가 나는 옷을 탈의 바구니에 벗어 놓고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어깨에 축적된 피로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옆구리에 넓게 자리 잡은 총천연색의 멍은 옅어지려면 족히 열흘은 필요할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오른쪽 손목에 흘끗 시선을 던졌다. 손목을 앞뒤로 뒤집어 가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문신의 상태는 어제와 비슷했다.
아이슬러의 공격을 막아 냈던 거대하고 새하얀 뱀을 떠올렸다. 흡사 소용돌이 같았던 하얀 뱀은 아이슬러의 손에 찢겨 허공으로 흩어졌다.
문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가.
한참 동안 문신을 살펴보던 제이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새하얀 뱀은 형체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었다. 당연히 문신에도 영향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딱히 달라진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문신이 흐릿하긴 했지만, 그건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
제이드는 갑자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킨 새하얀 뱀과 문신의 뱀의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둘 다 뱀인 데다가 그땐 워낙 정신이 없어서 막연히 같은 존재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형태도, 비늘의 무늬도, 색깔도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풍기는 분위기까지 아예 달랐다. 문신이 치밀하고 섬세하다면 새하얀 뱀 쪽은 좀 더 듬직하고 단순한 느낌이었다.
제이드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혼란스러웠다. 문신에 깃들어 있던 존재가 아니라면 그 새하얀 소용돌이 덩어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새하얀 뱀이 거센 바람을 불러 일으키며 나타났을 때 오른쪽 손목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걸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냥 생긴 것만 다른 거겠지. 옛날 사람들이 그린 사자 그림이랑 실제 사자랑 다른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뱀 문신이나 하얀 뱀의 존재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이해하려고 해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수건으로 대충 머리카락의 물기만 턴 제이드가 빨랫감을 옆구리에 끼고서 욕실 밖으로 나갔다.
“또 머리를 다 안 말리고 나왔군요.”
“아.”
반사적으로 머리를 만졌다. 머리카락에 맺힌 물기가 툭툭, 쇄골 위로 떨어졌다. 샤워를 하고 나올 때마다 굴드에게 핀잔을 듣곤 했지만, 오래된 버릇이라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이리 와 보십시오.”
굴드가 제이드에게 다가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말려 주기 시작했다.
키 차이가 현격했기 때문에 제이드는 굴드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이는 동안 자세를 낮출 필요가 없었다.
두툼한 수건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흡수했다. 마주 본 채로 굴드에게 머리를 맡긴 제이드는 마치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애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제가 처한 상황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굴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제이드가 입술을 열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는 굴드의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예.”
“혹시… 나 때문에 입장이 곤란해지거나 곤경에 처할 가능성이 얼마나 됩니까.”
고개를 들어 올린 제이드가 진지한 눈빛으로 굴드를 바라봤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이드가 진심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지켜 주려 하는 사람이 그의 인생에 나타났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굴드가 저 때문에 피해를 입거나 불행해지는 사태가 벌어질까 봐 걱정이 됐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굴드뿐이었다. 뱀파이어들을 상대로 제이드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굴드가 그로 인하여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제이드는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날 것 같았다. 아니, 그런 상황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언제나 혼자 힘으로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살아온 환경 탓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의지해 본 적이 없었다.
제이드가 유년기를 거치며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것은 자립심이었다. 그에겐 심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가족도 가져 보지 못한 채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작 서너 살 때부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물조물 빨래를 하고 혼자 힘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저보다 어린 원생들의 이부자리를 정리한 다음 옷을 챙겨 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고아원 선생님들은 관리자일 뿐이지 아이들을 돌봐 주고 부모가 주지 못한 애정과 사랑을 대신 쏟아 주는 성인군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많은 아이를 동시에 돌볼 수 없었기에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원생들 개개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원생들을 학대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제이드보다 나이 많은 고아원의 형, 누나들 또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들도 아직 어린애였기에 저 자신을 책임지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기실 선배 원생들이 그를 포함한 동생들을 돌봐 주거나 챙겨 주는 일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몇몇 악질적인 녀석들처럼 나이 어린 원생들을 괴롭히거나 갈취의 대상으로 삼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이 천성으로 자리 잡았다. 몸에 깊숙이 밴 습관 때문인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많이 어색했다.
“무슨 뜻입니까.”
굴드의 눈빛이 갑자기 흉흉해졌다.
“말 그대로….”
“그딴 말 지껄이지 마십시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굴드가 벽을 주먹으로 쳤다. 그의 눈동자 위로 광기가 일렁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굴드는 제이드가 오서독스들에게 노려졌다는 사실로 인해 극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굴드는 제이드 앞에서 최대한 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가 광분해서 날뛰면 제이드가 더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차분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감정을 억누른 보람도 없이, 제이드가 그의 이성을 나가게 만들었다. 그의 성배가 마치 죄인처럼 제 눈치를 보자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당신 때문에 곤란해지는 일 따윈 절대 없습니다. 곤란해진다 하더라도 당신이 걱정할 바가 아니란 말입니다!”
격분한 굴드가 제이드의 양쪽 손목을 벽에 밀어붙이며 윽박질렀다. 제이드의 새하얀 목을 휘감고 있는 거뭇한 손자국 때문에 도저히 이성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는 굴드의 푸른빛 눈동자 위로 불꽃이 튀었다.
크롤리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놈의 오른쪽 손을 자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놈의 남은 왼쪽 손과 양쪽 다리, 날개까지 전부 절단해서 사지가 뭉툭해지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그래도, 읍!”
제이드가 뭐라고 항변하려고 했다. 그러나 굴드가 제이드에게 강제로 키스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굴드가 잡아먹을 기세로 제이드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입 안으로 거칠게 혀가 파고들었다.
송곳니로 입술을 잡아 뜯는 난폭한 행동 때문에 제이드는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따갑고 화끈한 통증이 입술에서 일었다.
찢어져서 붉게 갈라진 틈새 사이로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안쪽 점막에도 상처가 생겼다. 짭짜름한 맛이 나는 피는 굴드의 혀에 굴려지면서 입 안에 가득 퍼졌다.
“흡, 으읍.”
제이드가 인상을 찡그리고서 굴드를 밀어냈다. 그러나 굴드는 빈틈을 내주기는커녕 제이드를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소량이긴 하지만 제이드의 피를 혀끝으로 맛본 굴드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황홀한 기분에 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달콤한 액체가 그의 자제력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굴드가 입술을 핥으며 제이드를 새하얀 양털 카펫 위로 쓰러트렸다. 늘씬한 몸 위로 올라타 바지를 벗기는 그의 눈빛은 순박한 시골 처녀를 겁탈하는 비열하고, 타락한 기사를 연상시켰다.
“하아, 하아….”
양털 위로 쓰러진 제이드가 숨을 헐떡이며 굴드를 올려다봤다. 뺨에 닿은 하얀 양털 때문에 피부가 간질간질했다. 목을 움츠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그의 입술에선 흰 양털과 대비되는 붉은 피가 계속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굴드는 푹신한 양털 위로 흐트러진 제이드의 젖은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갔다. 제이드가 손등으로 피를 훔치는 광경이 묘하게 색욕을 자극했다.
마치 전쟁 포로가 형형한 눈을 하고서 적군의 장교를 바라보는 듯한 섹시함이었다.
손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군.
굴드는 제이드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제이드의 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작은 과실 같은 유두, 그리고 납작한 아랫배를 한꺼번에 만지고 싶었다.
굴드는 제이드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서 깊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앞섶은 이미 불룩하게 팽창해 있었다.
제이드의 입술에 맺혀 있던 피가 툭툭 떨어지며 새하얀 양털을 붉게 물들였다. 등줄기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그 광경이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굴드의 검푸른 눈동자가 탐욕으로 물들었다. 굴드는 사냥에 성공한 재규어처럼 거칠게 달려들어 제이드의 입술을 빨았다.
“읏.”
속수무책으로 또다시 입맞춤을 당한 제이드가 꿈틀 어깨를 뒤틀었다. 굴드가 그의 입술을 재차 물어뜯자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지면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굴드의 커다란 손이 제이드의 골반에 걸쳐진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를 치골 아래로 끌어당겼다. 회색빛 트레이닝 바지 다음으로 속옷이 벗겨지자 체모가 옅은 제이드의 사타구니가 드러났다.
굴드가 제이드의 성기를 자극하며 셔츠 위로 유두를 깨물었다. 작은 씨앗 같은 젖꼭지가 딱딱하게 곤두섰다.
발톱이 단정하게 손질된 맨발이 푹신푹신한 양털 위에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성감대를 자극하는 굴드의 손길 때문에 제이드의 페니스가 서서히 열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으….”
제이드가 허리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을 하면서도 육체가 쾌락을 좇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굴드가 절실하게 자신을 원하면 목덜미에 전율이 일면서 덩달아 흥분이 되었다. 가끔은 이런 자신이 고약한 저주에 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진지하게 저를 갈구하는 굴드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같이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를 만지는 손길은 약탈자를 떠올릴 만큼 난폭하지만, 한편으로는 성물을 다루는 사제처럼 경건했다.
아니, 다른 건 다 제쳐 두고서라도 제이드가 굴드의 서늘한 체온을 온몸으로 느끼길 원했다. 오늘,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다 간신히 귀환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살을 맞대는 것으로 이제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굴드가 제이드의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눕힌 다음 한쪽 무릎을 들어 올렸다. 그 자세 그대로 삽입을 감행하자, 제이드가 힘겨운지 어금니를 깨물었다.
셔츠 한 장만 입은 제이드가 통증을 참기 위해 바닥에 깔린 양털을 꽉 움켜잡았다. 타인에 의해 다리가 활짝 벌어진 상태로 바르르 어깨를 떠는 광경이 포르노 비디오처럼 선정적이었다.
“아윽, 읏.”
“제이드.”
굴드가 제이드의 몸속에 제 성기를 깊숙이 박아 넣으며 무릎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강하게 눌러 비비자 무릎뼈의 감촉이 이까지 전해졌다. 갓 샤워를 하고 나와서 그런지 원래도 상아처럼 매끄러운 피부가 유난히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제이드의 턱을 움켜잡아 정면을 보게 만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무릎을 잡아 벌리고 있어서 굴드의 성기를 물고 있는 제이드의 그곳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애널이 페니스를 오물오물 조이는 광경이 지독하게 음란했다.
“읏.”
사타구니와 음부를 다 드러낸 노골적인 체위가 부끄러운지 제이드가 굴드의 시선을 피했다.
굴드는 코웃음을 치며 제이드가 다시 저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제이드가 곤혹스러워하는 체위를 유지한 채 입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키스를 하려고 허리를 굽히는데 제이드의 목에 생긴 검붉은 손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
굴드의 얼굴이 삽시간에 험악해졌다.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혔는데, 제이드의 피부를 휘감은 시커먼 멍 자국을 보자 다시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크롤리를 찾아내 놈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윽. 굴드….”
제이드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신음을 흘렸다.
이런.
굴드는 흠칫 손바닥을 펼쳤다. 자신이 제이드를 움켜잡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제이드의 몸에 또 멍이 생길까 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성행위 도중에 새기는 키스마크라면 모를까, 그는 자신이 실수로 만든 멍 자국도 용납할 수 없었다.
“제이드, 당신이 날 미치게 만들어.”
굴드가 허리를 거칠게 흔들며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제이드가 아프다고 항의하듯 윽, 하고 신음을 흘리자 목에 집착적으로 잇자국을 남겼다.
멍 자국을 키스마크로 덮어 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굴드는 이러한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하읏, 읏!”
결합 부위에서 찌걱찌걱, 하고 음탕한 소리가 났다. 양털 카펫에 등을 대고 있던 제이드는 어느새 네발짐승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퍽퍽 난폭하게 허리를 앞뒤로 놀리는 굴드 때문에 그의 머리카락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차가운 바닥이었다면 무릎이 배겼겠지만 푹신한 양털 카펫 덕분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굴드의 성기가 예민한 점막을 마구잡이로 긁어 대고, 깊게 찌르고, 기둥으로 문질러 댔다. 한꺼번에 페니스를 길게 찔러 넣어 입 속에서 혀를 굴리듯 휘저어 대기도 했다.
“으아, 앗! 흐윽!”
배 속에서 굴드의 페니스가 움직이는 게 노골적으로 느껴져 제이드는 아이처럼 울먹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읏, 그만. 나 갈 것….”
제이드가 양털 카펫에 뺨을 문지르며 진저리를 쳤다. 굴드의 물건이 정확하게 그가 느끼는 곳만 찔러 올리는 바람에 당장 사정할 것 같았다.
“상관없어요, 제이드.”
굴드가 제이드의 유두를 손톱으로 비비며 허리를 시계 방향으로 크게 움직였다. 페니스와 교접한 애널이 입구 부분부터 깊은 곳까지 휘저어졌다.
“으…!”
번지점프를 하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리가 풀린 제이드는 더 이상 혼자 힘으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구, 굴드. 나… 아읏! 가, 악!”
절정에 다다른 제이드가 사정하며 양털 카펫 위에 무너졌다. 굴드가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쏟아 낸 정액 위에 배를 문지르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제이드는 숨을 헐떡거리며 자괴감에 빠졌다. 값비싼 양털 카펫을 정액으로 더럽히고 말았다. 전문 업체에 맡기기 민망할 뿐만 아니라 세탁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나올 것이 분명했다.
빨리 닦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반신은 벌거벗었지만 셔츠는 아직 그대로 입고 있는 제이드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는 휴지를 가지고 오겠다는 말조차 굴드에게 꺼내지 못했다. 굴드가 자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제이드의 그곳을 성기로 마구 찔러 댔기 때문이다.
“아응, 읏. 카펫이, 흣!”
“카펫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나한테 집중해, 제이드.”
굴드가 으르릉 이를 드러내며 제이드의 몸을 뒤집었다. 그는 제이드가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양쪽 무릎 안쪽을 붙잡고서 빠르게 허리를 놀렸다.
체액이 쏟아진 탓에 양털 카펫의 숨이 조금 죽었다. 침대 시트처럼 면이 아니라서 흡수도 느렸다. 하지만 거실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널찍한 카펫이라 제이드가 질척질척한 정액 위를 뒹굴 일은 없었다.
“아아, 아읏!”
천장을 바라보는 제이드의 눈꼬리가 젖어 들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기가 다시 일어섰다. 아랫도리가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자신이 흘린 애액과 정액이 회음부를 타고 뚝뚝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 때문에 허리가 뒤틀렸다.
굴드가 허벅지를 찍어 누르듯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제이드는 무방비할 정도로 활짝 다리를 벌린 채 굴드의 묵직한 물건을 받아들였다.
“으, 으읏.”
쾌감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제이드는 팔을 비틀어 양털을 움켜잡았다. 무의식적으로 굴드의 허리 짓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앞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페니스가 벌써 맑은 애액을 흘려 대며 두 번째 사정을 준비했다.
유두가 꼿꼿하게 일어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점막과 애널이 제이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드의 성기 전체를 조였다.
엉덩이를 스스로 들썩이는 제이드의 그곳은 빠듯하게 벌어져 있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굴드의 성기로 그의 몸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굴드가 제이드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피가 멎은 제이드의 입술을 핥았다. 탁한 빛깔의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려 거듭 카펫을 더럽혔다.
어차피 굴드에게 카펫의 가격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제이드가 새하얗고 푹신한 양털 카펫 위에서 허리를 뒤틀며 신음한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의 골반을 커다란 두 손으로 감싸고서 허리를 혀로 핥았다. 성기를 뽑아내어 허전한지 제이드는 붉게 물든 눈으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광경이 지독하게 선정적이었다.
굴드는 제이드의 아랫배에 입술을 가져갔다. 귀를 갖다 대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미세한 고동이 느껴졌다.
작고 연약한 기운이 제이드의 아랫배에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굴드는 제가 착각한 것이라 치부해 버렸다.
한 치의 의혹도 품을 여지가 없었다. 제이드는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이 탄탄하고 늘씬한 육체엔 저주받은 생명을 잉태할 기관 같은 게 없었다.
제이드의 그곳이 물을 머금은 것처럼 질척질척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굴드는 격렬한 갈증을 느끼며 제이드의 페니스를 입에 머금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정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제이드의 그곳을 가운뎃손가락으로 휘저었다.
“아… 아읏, 굴드.”
절정에 다다른 제이드가 허리를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애플캔디에 입힌 시럽을 녹여 입 안에 머금는 감각보다 달콤했다.
***
“으….”
굴드에게 시달리다가 간신히 놓여난 제이드가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정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그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아랫도리가 질척질척해서 찝찝했다. 하지만 제이드는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를 짓누르고서 거칠게 박아 넣던 굴드에게 혹사당하느라 허리와 허벅지 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길.
팔꿈치로 체중을 지탱하고 있던 제이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카펫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다리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하반신이 흐물흐물했다. 마치 연체동물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대자로 뻗은 제이드는 꼼짝도 하기 싫어서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등을 받치고 있는 양털이 따뜻해서 이대로 잠들어도 감기에 걸릴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씻지도 않고 잠들어 버리면 내일 아침에 배앓이를 심하게 하게 될 테지만.
“자고 있는 겁니까.”
제이드가 누워 있는 동안 먼저 샤워를 한 굴드가 다가왔다.
“아뇨. 씻어야죠.”
눈을 감고 있던 제이드가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잘 생각은 없었는데 하도 노곤해서 깜빡 졸고 말았다.
어금니를 깨물고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유격 훈련이라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드는 흐느적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또 샤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았지만 안에 머금고 있는 정액을 빼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욕실 문을 열다가 무심결에 머리를 만져 보니 뒤통수가 엉망진창이었다. 머리카락이 덜 마른 상태로 바닥에 등을 문댔으니 수세미 꼴이 되는 게 당연했다.
가뜩이나 샤워하는 게 귀찮았던 제이드는 머리를 감는 건 생략하기로 했다. 보기에 좀 안 좋긴 하겠지만 어차피 밖에 나갈 일도 없었다.
성배라는 이유로 뱀파이어에게 목숨이 노려지고 있는 그는 한동안 굴드의 건물에서 연금 생활을 해야 했다.
비누칠을 하는 둥 마는 둥 찬물로 샤워를 했다. 멍하니 욕실 벽을 바라보며 몸을 씻느라 그는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가느다란 핏줄기를 보지 못했다.
설혹 피가 흘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굴드가 난폭하게 굴어서 안쪽에 생채기가 생긴 것이겠거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을 터이다.
수돗물을 잠근 제이드는 옷 바구니를 더듬다가 혀를 찼다. 걸칠 옷을 챙기는 걸 깜빡했다. 벌거벗은 채로 욕실에 들어온 그는 커다란 타월로 하반신만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의 체액으로 지저분해진 양털 카펫은 굴드가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굴드는 부엌에서 우유를 끓이고 있었다. 제이드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브랜디를 섞은 따듯한 우유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마침 따끈한 음료가 마시고 싶었던 제이드는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굴드가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에 외출이라도 하려는 건지 머그 컵에 우유를 따르는 그의 뒷모습은 집에서 입는 편안한 옷차림이 아니었다.
“밖에 나가는 겁니까.”
제이드가 우유가 담긴 머그 컵을 손에 쥐며 물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이 뜨거웠다. 눈을 내리뜬 그의 얼굴에 불안이 떠올랐다.
“펠릭스 신부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에 가 볼 생각입니다.”
“아, 병원에서 연락이 온 건가요?”
제이드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굴드가 그를 여기에 감금해 두고서 한동안 들어오지 않을까 봐 긴장했는데 그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병원에 간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펠릭스 신부가 마취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연락이 온 건 아닙니다. 병원엔 혼자서 다녀올 테니까 당신은 집에 계십시오.”
굴드가 허튼 생각하지 말라는 듯 냉랭한 눈빛으로 제이드를 바라봤다.
펠릭스 신부를 만나러 같이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던 제이드는 머쓱해졌다. 같이 나가는 것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굴드의 반응이 너무 싸늘했다.
“혹시 모르니까 공허의 피조물을 복구해 놓는 게 낫겠군요.”
계단을 향해 다가가던 굴드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걸음을 되돌렸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는 색깔이 바래져 가는 뱀 문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공허의 피조물? 그게 뭐지.
굴드에게 손목을 붙들린 제이드가 눈을 커다랗게 벌렸다.
단순한 혼잣말일 수도 있었지만, 오른쪽 손목의 문신을 바라보며 꺼낸 이야기라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굴드는 전에 뱀 문신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아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문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잠깐만. 설마.
제이드의 머릿속에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증거는 없지만 공허의 피조물이라는 단어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그를 감쌌던 새하얀 뱀과 연관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제이드는 뱀 문신과 저를 보호하기 위해 소용돌이를 일으킨 새하얀 뱀의 생김새가 달라서 의구심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샤워를 하면서 억지로 둘이 같은 존재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은 여전히 께름한 기분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아이슬러를 공격했던 그 새하얀 뱀, 혹시 굴드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제이드가 다급하게 굴드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은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제이드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억지로 투여한 약물이 혈관을 타고 역류하는 것처럼 느낌이 고약했다.
며칠 전 그가 악몽에 시달릴 때 진저리치며 잠에서 깨어나도록 만든 감각과 흡사했다.
“윽.”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까 긴장 푸십시오.”
제이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내려 하자, 굴드가 그의 손목을 한층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잠시 끊겼던 검고 차가운 기운이 제이드의 몸속으로 꾸역꾸역 흘러들었다.
제이드는 눈을 부릅뜨고서 제 손목을 관찰했다. 겉보기에는 별다른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공허의 피조물인지 뭔지, 그거….”
굴드의 손에서 놓여난 제이드가 손목을 움켜잡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새하얀 뱀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 대충 알 것 같았다. 소용돌이처럼 생긴 새하얀 뱀은 굴드가 그에게 붙여 준 경호원 같은 존재였다.
“전에 내가 잠들었을 때 당신이 심어 놓은 거 맞죠? 도대체 왜 나한텐 아무런 말도 안 해 준 겁니까.”
가슴이 답답했다.
굴드가 새하얀 뱀을 붙인 건 제이드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방식이 잘못됐다.
왜 새하얀 뱀을 제이드에게 붙여야 하는지 뒤늦게라도 이유를 설명했어야 했다. 더군다나 제이드가 지하실에서 겪었던 일을 기억해 낸 날이면 이미 굴드가 뱀파이어란 사실을 알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당신이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굴드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이드를 바라보는 그의 검푸른 눈동자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차피 아이슬러가 제이드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공허의 피조물에 대해 알게 될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고 말하는 투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제이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일인데 왜 알 필요가 없냐는 말이 목구멍을 찔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막막했다. 제이드는 굴드의 사고방식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굴드의 애정 표현 방식은 어딘지 모르게 잔뜩 비틀려 있었다.
결과적으로 굴드가 그에게 붙여 준 피조물의 도움을 받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굴드가 제이드의 의사도 묻지 않고 멋대로 새하얀 소용돌이 뱀을 그의 몸속에 심어 두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노파심에 한 번 더 말하겠습니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건물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마십시오.”
굴드가 계단을 올라가기 직전, 걸음을 멈추고서 말했다. 허튼짓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그의 눈빛이 몹시도 고압적이었다.
철제 계단 저 위에서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제길.”
혼자 남겨진 제이드가 입술을 깨물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우유가 담긴 머그 컵이 쓰러졌다. 따끈하게 데워진 우유가 테이블 모서리를 타고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굴드 때문에 화가 난 제이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빌어먹을….”
분하고 답답해서 찔끔 눈물이 나왔다. 제이드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슷한 일이 연속적으로 반복되다 보니 굴드에게 화가 나는 건 둘째 치고, 이젠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굴드의 본심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굴드가 그에게 애정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하지만 굴드는 자기중심적인데다가 은근히 강압적이었다. 그와 크게 다투고 나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중저음과 격식을 갖춘 말투, 몸에 밴 귀족적인 태도만 보면 굴드는 언뜻 친절하고 배려 넘치는 신사 같았다.
제이드도 처음엔 깜빡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같이 지내다 보면 굴드의 오만한 성격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겐 타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굴드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그에게선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특유의 위압적이고 비인간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어쩌면 절대군주나 독재자 같은 위치에 있던 사람일지도 몰랐다.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떠나서 굴드에겐 포식자처럼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층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 한다거나 배려하지 않았다. 권력자들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데 익숙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어깨에 별을 단 장성이 일개 병사의 개인 사정이나 의견 따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굴드는 설득하는 것보다 명령하는 일이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 의도 등에 대해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제이드의 의사를 무시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심지어 굴드는 그의 기억을 마음대로 지워 버리려 한 적도 있었다.
그에게 의견을 물을 생각도 않고 멋대로 새하얀 뱀을 경호로 붙인 문제도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더군다나 굴드는 감추고 있는 것이 있었다. 알려 주기 싫어하는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제이드에 대해 뭐든 알려고 들면서,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했다.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꾹꾹 누르는데 발가락에 뭔가 미지근한 것이 닿았다.
뭐지?
발치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 머그 컵에서 쏟아진 우유가 식탁 아래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제이드의 발을 적신 액체의 정체도 바로 브랜디를 탄 우유였다.
허리에 타월만 두른 제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식탁에 냅킨이 있기에 우선 발바닥부터 닦았다. 걸레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키친타월을 둘둘 풀어 우유를 가운데로 모았다.
“으으.”
제이드는 식탁과 바닥에 엎질러진 우유를 닦아 내다 말고 숨을 꾹 멈췄다. 비릿한 우유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린 탓이다.
우유 비린내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브랜디 냄새까지 섞여서 더욱 고역스러웠다.
“젠장, 좀 참아 달라고.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우유를 닦은 키친타월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계란에 이어 우유까지 마실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망할. 왜 이러는 거냐고.”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섭취 가능한 목록을 누군가 연필로 하나씩 찍찍 그어 없애 버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제이드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풀떼기와 크래커, 바게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그는 혐오 식품도 가리지 않고 뭐든 다 잘 먹었다. 어렸을 때도 편식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당근은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 햄버거 하나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처지가 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까 응급실에 갔을 때 위 검사도 받아 볼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일었다. 하지만 그때는 신부님의 생사와 뱀파이어들에 대한 문제들로 머릿속이 꽉 들어차서 다른 생각을 할 경황이 없었다.
머그 컵을 설거지한 제이드는 옷장을 열어 굴드의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굴드의 것이라 어른 옷을 입은 것처럼 품도 크고 기장도 길었다. 그의 몸에 맞는 사이즈의 옷이 어딘가에 있긴 했지만 옷장을 살펴볼 기력이 없었다.
“고작 우유 비린내에 이 꼴이 되다니….”
셔츠 소매와 바짓단을 접어 올린 제이드는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며칠 동안 밤을 새운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귓가에 위잉, 하는 이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오만 가지 고민과 상념이 공동묘지에서 사악한 축제를 벌이는 악령들처럼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제길.”
제이드는 오늘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호텔 침대처럼 강박적으로 시트를 표백한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청결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지가 않았다.
매트리스도, 이불도 전부 다 푹신푹신한 굴드의 침대가 묘하게 불편했다. 끝에서 끝까지 몇 바퀴씩 뒹굴어도 충분할 만큼 넓은데 제이드는 좁은 상자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모서리 쪽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장이 너무 높아서 기차역 광장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굴드와 함께 있을 땐 침대가 넓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딱히 추운 것도 아니건만 허전해서 그런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이슬러에게 쫓기던 순간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제이드는 젖은 나무 냄새가 나는 광활한 숲을 달리고 또 달렸다.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뺨을 때렸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 따끔거렸지만 등 뒤에서 그를 추격하는 아이슬러의 존재 때문에 달아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침대 시트를 쥔 제이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 전투 때 적군에게 쫓겨 나선형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일도 떠올라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는 손등의 관절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후우, 후우. 제길.”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제이드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호흡을 골랐다. 숲을 내달리던 순간을 머릿속에서 간신히 쫓아냈다.
하지만 이번엔 아이슬러와 검은 파수꾼이 폭발을 일으키며 핼러윈 축제 행사장에 난입하던 광경이 눈꺼풀 안쪽에 떠올랐다.
열두 시가 지나 이젠 핼러윈도 아닌데 그는 여전히 무덤에서 일어난 망자들에게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자死者인 뱀파이어들에게 목숨이 노려지고 있다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핼러윈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게 맞긴 했다.
핼러윈 축제 행사장에 폭발을 불러 일으킨 검은 괴물.
붉은 눈을 빛내며 복도를 배회하던 파수꾼들.
제이드는 이 둘을 번갈아 가며 떠올렸다.
아이슬러를 끈질기게 추격하던 검은 괴물은 정황상 굴드가 소환한 파수꾼이 분명했다. 신부님도 검은 파수꾼과 마찬가지로 뱀파이어를 추격하다 나무가 우거진 공원에 나타났다.
성배인 제이드.
성배를 노리는 뱀파이어.
제이드에 대해 예전부터 알고 있는 듯 보이던 수상한 신부.
그리고 뱀파이어들에게 레오폴트라고 불린 굴드.
굴드가 말했던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은 아마도 아이슬러, 크롤리 이 두 뱀파이어와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선후 관계가 너무 자명해서 추측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댈 것도 없었다. 이 정도는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유추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제이드는 굴드가 이번 일을 계기로 그간 그에게 숨기고 있던 것들에 대해 설명해 주리라 기대했다.
복잡한 사정을 전부 다 알려 주긴 어려워도 뱀파이어들 간에 알력 다툼이 있다는 이야기 정도는 꺼내리라 믿었다.
그러나 굴드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마치 기밀 유지를 핑계로, 비밀 임무의 진정한 목적을 손짓으로 은폐해 버리는 부패하고 권위적인 군사령관 같은 태도였다.
버려진 지하 무덤처럼 실내가 고요했다. 저 높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적막이 제이드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답답했다. 제이드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사람처럼 어깨와 등을 들썩거렸다. 땀이 날 때까지 밤거리를 뛰며 머리를 식히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바깥바람을 쐬기 위해 현관까지만 나갔다가 들어오는 것조차 위험했다. 현관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 매복하고 있던 크롤리나 아이슬러가 그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지 모를 일이었다.
제이드가 처한 상황은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안전 가옥에서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받는 사람과 비슷했다. 신변을 구속당하거나 감금 상태에 놓인 것은 아니지만 행동에 제약이 따랐다.
그러나 굴드의 집 밖으로 아예 나가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발적인 구금 상태라고 설명하는 쪽이 더 적합할지 몰랐다.
한참 동안 침대에 엎드려 꿈쩍도 하지 않던 제이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겉보기엔 굴드가 손을 쓰기 전과 별다른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공허의 피조물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제이드는 새하얀 뱀 괴물을 불러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굴드가 공허의 괴물을 경호로 붙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숲에서 마주쳤을 때 굴드는 제이드를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뱀파이어들이 제이드를 노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기색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제이드는 몸을 뒤집으며 푹신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의문을 해소할 방법은 없었다. 멱살을 잡고 따져 봤자 굴드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아이슬러나 크롤리에게 굴드에 대해 물으면 더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보를 얻는 대가로 제이드가 그들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어린애처럼 이불 밖으로 머리카락만 쏙 내놓은 제이드가 등을 웅크렸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 건지 위가 따끔거렸다.
통증이 심한 건 아니었지만 아픈 부위가 야금야금 넓어지는 느낌이라 신경이 쓰였다.
복통을 참으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불현듯 그를 최초로 성배라고 부른 괴한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뇌리에 떠올랐다.
괴한은 제이드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목에 문신까지 남겼다. 그런데 놈이 여태껏 제이드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뭔가 이상했다. 제이드 앞에 나타나려면 진즉에 나타났어야 정상이었다.
어쩌면 괴한이 죽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는 놈이 제이드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제이드야 기억이 사라져서 얼마 전까지 놈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괴한의 기억까지 사라졌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괴한이 제이드를 죽이지 않고 풀어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가 성배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그 자리에서 피를 마시지 않은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괴한은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 가던 제이드를 살려 주기까지 했다.
그냥 번거로운 걸 좋아하는 독특한 변태인 걸까.
아니면 성배에 대한 흥미가 갑자기 식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가정하면 놈이 왜 제이드를 살려 주었는지, 그리고 문신을 새긴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설명이 가능해졌다.
괴한은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을 때 제이드를 쉽게 찾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문신을 새긴 게 분명했다. 그러나 괴한이 결정적인 순간에 변덕을 부린 이유까지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제길, 난 바보인가?”
쿡쿡 쑤시는 아랫배를 움켜잡고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요 며칠 뱀 문신을 좋게 보려고 노력했던 제이드는 자신이 뼛속까지 단순한 인간이란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뱀 문신은 제이드를 지키려고 위험을 경고해 준 게 아니라 다른 뱀파이어에게 그를 빼앗기는 불상사를 막으려고 했던 거였다. 그런데 자신은 순진하게 지금까지 문신을 너무 나쁘게만 본 건 아닐까, 하며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정말이지 바보 같았다. 뱀 문신의 도움을 받았을 때 오해를 품었다고 미안해할 게 아니라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그를 도와준 것이라고 의심해 봤어야 했다. 노예 낙인과 다를 바 없는 뱀 문신은 괜히 꺼림칙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뱀파이어들에게 성배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인간으로 치면 아마 불로불사의 영약쯤 되는 걸까? 하지만 뱀파이어들은 원래 늙지도, 쉽게 죽지도 않았다.
아이슬러와 크롤리는 제이드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 댔다. 반면 성당 지하실에 나타났던 괴한은 성배인 제이드를 눈앞에서 포기했다. 문신을 새김으로써 미련을 남겨 두긴 했지만, 당장 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절실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결론적으로 성배를 갖고자 하는 욕망은 뱀파이어마다 다른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져도 그만, 안 가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뱀파이어와 눈이 시뻘겋게 뒤집혀서 성배를 손에 넣으려고 하는 뱀파이어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제이드로서는 알 수 없었다.
굴드는 어느 쪽이었을까.
이불 속에서 동굴을 만든 채 웅크리고 있던 제이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굴드도 뱀파이어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자신의 피를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한두 번쯤은 느껴 봤을 가능성이 컸다.
굴드는 제이드가 성배라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된 건지도 궁금했다.
“혹시 나한테 관심을 보인 이유가….”
제이드는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머리를 흔들었다. 안 좋은 일이 겹쳐서 너무 과민해진 것 같았다.
굴드가 성배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에게 접근했다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피를 마시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장난으로라도 제이드의 피를 탐낸 적이 없었다. 제이드가 피를 마시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도 유혹하지 말라며 여유롭게 웃기만 했다.
자신이 성배란 사실을 굴드가 언제 알게 되었든 그게 뭐 대술까. 중요한 건 굴드가 그를 성배로서 대하는 게 아니라 제이드라는 인간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상쩍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긴 했지만 굴드는 제이드를 기만할 성격이 아니었다.
“성배에 관한 건 이제 그만 생각하자. 머리 아파서 죽을 거 같네.”
한숨을 내쉬며 벌러덩 뒤로 드러누웠다. 엄한 곳에 기운을 뺐더니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의 무게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은 그의 신경을 깨작깨작 갉아먹었다.
해리한테 전화를 해 봐야 하는데.
제이드는 이상할 정도로 차가운 아랫배에 손을 얹고서 천장을 바라봤다. 친구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지금쯤이면 다들 잠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굴드의 전화를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쓰기도 조금 그랬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건 내일 아침에 하기로 결정하고서 눈을 감았다. 누군가 그의 몸을 쑥 잡아당기는 것처럼 팔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아이슬러와 거대한 검은 파수꾼이 일으킨 폭발은 과연 어떻게 수습될지 신경이 쓰였다. 고작 폭발 사고 하나 때문에 뱀파이어의 존재가 세간에 노출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엔 충분한 사건이었다.
어지간한 건물보다 더 큰 검은 파수꾼의 존재는 미지의 괴물이니 어쩌니 하며 매스컴에서 호들갑을 떨 것이 분명했다. 파수꾼의 시체는 CIA나 FBI가 수거해 가서 해부하려나.
반듯한 자세로 이불을 덮은 제이드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내일 아침 TV를 틀면 어떤 뉴스가 나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숲에서 벌어진 사건이야 그렇다 쳐도 핼러윈 축제 행사장의 일은 어떤 식으로든 보도가 될 것이 확실했다.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닌 데다가 비디오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한 사람도 있었다.
“제이드, 신경 꺼. 네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눈을 질끈 감은 제이드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설 속에나 존재할 법한, 교황청에 소속된 뱀파이어 헌터도 현실에 있는 마당이었다. 외계인과 음모론을 다루는 유명한 TV 드라마처럼, 불가사의한 현상이 벌어지면 일반인과 매스컴을 상대로 은폐 공작을 펼치는 기관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특수한 기관에서 은폐하려 들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시끄러운 것은 잠시뿐이었다. 몇 번 신문에 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겠지만, 곧 일상에 매몰되어 UFO나 미스터리 서클, 설인처럼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로 전락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현상에 대해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있었다.
***
펠릭스 신부가 입원한 병실엔 주교원 소속 팬저들이 설치한 결계가 겹겹으로 둘러져 있었다. 아벤 굴드는 파지직, 하고 피어오르는 저항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서 문고리를 돌렸다.
“누, 누구냐!”
“컥!”
병실을 지키고 있던 팬저들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벤 굴드는 검은 그림자로 펠릭스의 부하들을 공간 저편으로 쓸어 버렸다. 새카만 그림자에게 집어삼켜져 병실 밖으로 내던져진 그들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마치 메두사의 얼굴을 본 병사들처럼 살아 있는 석상이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쾅, 하고 문이 저절로 닫혔다. 아벤 굴드의 발치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의 소행이었다.
벽과 천장에서 새까만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굼실굼실 피어올랐다. 아무도 병실에 들어올 수 없도록 출입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어나라, 펠릭스. 물어볼 게 있으니까.”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잿빛 머리카락의 신부는 한 시간 전에 수술실에서 나온 환자였다. 그러나 그런 사정 따위는 아벤 굴드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방금 잠들었는데.”
녹색 환자복에 링거를 꽂고 있는 펠릭스 신부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목소리가 꽉 잠긴 그의 어깨엔 두툼한 붕대가 칭칭 휘감겨 있었다.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빼먹지 말고 전부 다 보고해. 놈들이 왜 제이드를 노린 거지? 왜 제이드를 성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냔 말이다.”
아벤 굴드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펠릭스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엔 미친 짐승 같은 광기가 번들거렸다.
“저도 모릅니다. 루테니아의 잔당이, 큭. 성자의 관에 누워 있던 오서독스들에게 피의 정보를 흘렸나 보지요.”
안경이 없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펠릭스가 갈비뼈 부근을 손으로 짚으며 대꾸했다.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한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마취에서 덜 깼나 보군. 제이드는 놈들의 성배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아벤 굴드가 눈썹을 찌푸리고서 펠릭스의 멱살을 내던졌다. 펠릭스에게서 등을 돌리는 그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남자가 성배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성배의 출현을 예지할 수 있는 건 루테니아뿐이잖습니까. 뭐, 배교자 둘이 인간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성배라고 주장하는 건 퍽 이상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펠릭스 신부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반박했다. 꽤 특별하게 여기던 인간이 다른 오서독스의 성배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종용하는 듯한 말투였다.
“네가 아는 얄팍한 지식이 모든 상황에 부합하는 진리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벤 굴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벽을 짚어 펠릭스를 두 팔 안에 가뒀다. 신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 위로 살기가 일렁거렸다.
제이드는 절대 아이슬러와 크롤리의 성배가 될 수 없었다. 제이드는 오직 자신만의 것이었다.
아벤 굴드는 그의 성배가 다른 놈들에게도 성배로 불리며 노려진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쾌했다. 감히 그의 것을 탐낸 자들을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벤 굴드의 하얗고 곧은 손이 펠릭스 신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윽!”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상체를 숙이며 신음을 흘렸다. 아벤 굴드가 크롤리의 발톱에 꿰뚫린 상처를 손가락으로 헤집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큭… 혹시 완전한 존재는, 윽. 다른 배교자의 성배도 알아볼 수 있는 겁니까?”
펠릭스가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말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아벤 굴드의 눈치를 살폈다. 아벤 굴드의 기분 여하에 따라 그는 반항 한번 못해 보고 시체가 되어 영안실로 옮겨질 수도 있었다.
아벤 굴드는 기존의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루테니아의 혈족은 아니지만 성배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는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한 건지 답답했다. 굴드의 말대로 마취가 덜 풀려서 긴장의 끈도 함께 놓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 두지.”
아벤 굴드가 싸늘한 눈을 하고서 펠릭스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가 허리를 펴자 펠릭스 신부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던 짙은 그림자도 사라졌다.
간신히 오서독스의 손에서 놓여났지만 펠릭스 신부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상처를 봉합한 자리가 화끈거렸다. 왠지 피가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아까 투두둑, 하고 상처가 붉게 벌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아벤 굴드의 성격에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긴 했지만, 의사를 불러 또 마취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성가셨다.
“절 병원까지 직접 데려다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펠릭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악마보다 악랄한 작자긴 하지만 목숨을 주워 준 일에 대한 감사 인사는 해야 했다.
아벤 굴드가 숲에 나타나도 분명 그를 방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든 말든 숲에 버려둘 거라 생각했던 남자가 그를 챙기다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벤 굴드가 타인을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감사 인사라면 필요 없어. 살려 주고 싶어서 살려 준 게 아니라 제이드가 널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챙기게 된 것뿐이니까.”
제이드가 아니었더라면 내일 아침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을 것이란 뜻이다. 펠릭스 신부는 그럼 그렇지, 라고 중얼거리며 습관적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숲에서 안경을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기억해 냈다.
“오서독스들이 힘을 회복할 때까지 한동안 꼭꼭 숨을 테니 찾는 데 시간이 걸리겠군요. 어쩌면 아예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난시라 안경이 없으면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보이는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제이드라는 남자를 미끼로 내세우자고 말하고 싶었다.
배교자들이란 성배라면 눈이 뒤집히는 족속들이니, 함정이란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기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눈치 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간 이번에야말로 아벤 굴드의 손에 의해 몸통과 목이 분리될 것이다.
펠릭스는 아직 지옥의 불구덩이에 안착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니콜라오 성하께서 서거하시기 전까진 거머리처럼 끈덕지게 살아남아 그분을 모셔야 했다.
그나저나 아벤 굴드가 인간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본인 딴에는 그 동양인 남자를 애지중지하는 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양인데, 옆에서 보면 사정없이 티가 났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오서독스는 인간을 가축이나 노예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족속이었다.
특히 타나토스의 대리자인 아벤 굴드는 오서독스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더럽고 오만한 작자였다. 루테니아나 팬저 기사단의 기록을 뒤져 보면 욕 아닌 욕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 거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던 오서독스가 평범한 남자에게 빠져 허우적댄다, 라.’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그는 제이드에게 쩔쩔매는 게 맞았다.
처음엔 아벤 굴드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제이드를 직접 보고 난 다음엔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그가 제이드에게 푹 빠진 이유를 말로는 표현하긴 어렵지만 본능적으로 납득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사실 제이드는 아벤 굴드에 비하면 엄청나게 잘생기거나 한 건 아니었다. 아벤 굴드에 비하면 누가 감히 잘생겼다 나서겠냐만은.
어쨌든, 새까만 머리카락이 인상적이고 생김새가 단정한 편이지만 그뿐이었다.
그런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소년처럼 매끈한 피부와 낭창한 허리가 사람의 시선을 저절로 끌어당겼다.
제이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거나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눈꺼풀을 깜빡거리면 알폰스 무하나 클림트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부드럽게 나붓거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뚫어져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는 느낌이었다.
교황 성하에게 영혼을 바치지 않았다면 펠릭스도 제이드란 남자에게 혹하는 감정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놈들이 숨는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진 않아. 성자의 관만 제때 갖춰지면 일주일 이상 시간을 끌 일도 없을 거다.”
아벤 굴드가 입꼬리를 비틀며 누군가 가져다 놓은 성물을 손가락으로 툭 밀쳐 쓰레기통으로 떨어트렸다.
과거에 비해 전반적으로 성직자들의 질이 떨어진 건지 루테니아들을 멸절해 버린 것이 문제였는지, 교황청에 소속된 녀석 중에 쓸모 있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 그가 오서독스들을 봉인할 땐, 사제들이 빈틈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이제 늙은이들은 성자의 관을 만들어 내는 일조차 버거워했다.
무능한 성황청 놈들 때문에 오서독스를 제압하는 일부터 봉인까지 굴드가 전부 도맡아야 할 판이었다. 사도 궁전에 엉덩이를 붙인 요제프가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겠지만 말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단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바로 퇴원해서 꼬장꼬장한 노인들과 면담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쳤다고 해서 한동안 편히 누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에 쫓기게 될 줄은 몰랐다.
“파괴된 성자의 관이라도 뜯어다가 재활용할 생각인가 보지?”
“네….”
중간 관리직이란 참 여러모로 피곤했다. 위에서 쪼이고 아래에서 치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우는소리와 협박을 번갈아 가며 쏟아 낼 주교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쟁쟁했다. 무능력한 데다가 권위적이기만 한 노인네들은 언제나 힘없는 아랫사람부터 들들 들볶아 댔다.
아벤 굴드가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석상처럼 굳어 있던 팬저들이 목을 움켜잡고서 기침을 해 댔다. 펠릭스는 오서독스가 헤집어 놓은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너스 콜을 눌렀다.
붕대를 풀고 거즈를 떼어 내자 그가 예상했던 대로 상처를 꿰맨 자리가 벌어져 있었다. 펠릭스는 담당 의사와 간호사에게 잠도 자지 않고 도대체 뭘 한 거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꼭두새벽에 상처를 다시 봉합한 펠릭스 신부는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들었다. 병실을 지키고 있던 팬저들은 모두 물렸다. 호위가 서 있을 이유가 없거니와 설혹 적들이 펠릭스를 급습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저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전력이라 할 수도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들이었다.
유리창 위로 검은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는 잠결에 눈썹을 꿈틀 움직였지만 결국 일어나진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예민하게 반응했겠지만, 깊게 잠이 든 상태인 데다가 약 기운 때문에 누군가 밖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끼이익, 끽.
프로레슬러를 연상케 할 만큼 체구가 건장한 남자가 유리창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열린 유리창 사이로 흘러드는 바람 때문에 커튼이 부풀어 오르고 펠릭스 신부의 잿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몸집이 거대한 남자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조심조심 유리창을 닫았다.
사위가 고요했다.
펠릭스 신부가 내뱉는 고른 숨소리만이 병실에 울려 퍼졌다. 몸집이 거대한 침입자는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펠릭스 신부가 누워 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안색이 창백한 신부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잿빛 머리카락의 신부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노숙자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노숙자 특유의 시큼한 냄새를 풍겼지만 악취의 근원지는 그의 몸이 아니라 쓰레기통에서 주워 입은 넝마였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풍채 좋은 노숙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펠릭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펠릭스 신부의 병실에 침입한 사내는 바로 아벤 굴드와 크롤리가 싸우는 동안 숲에서 도망친 아이슬러였다.
크롤리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던 팔이며 얼굴이 아직도 화상을 입은 것처럼 새까맣게 문드러져 있었다.
“흠.”
회복이 더뎌서 금발이 듬성듬성해진 아이슬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성배는 분명 제이드라는 동양인 남자였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신부의 피 냄새를 맡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치 아편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 느꼈던 불쾌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었다.
아이슬러는 숲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딴 데 정신을 팔 때가 아닌데 자꾸 펠릭스의 피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맛있을 것 같은 냄새도 아니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성직자 특유의 쉰내가 나서 입에 머금어 봤자 인상만 쓰게 될 것 같았다.
제이드라는 동양인 남자는 성배라는 점을 떠나, 체취가 잘 익은 포도주처럼 향긋했다.
펠릭스 신부의 피는 파충류의 것처럼 먹어 봤자 입맛만 버릴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발톱 끝이 쿡쿡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아이슬러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짜증 나는 냄새를 코끝에서 떨쳐 내려고 밤에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시를 끝에서 끝까지 뛰었다. 하지만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방황해도 도무지 효과가 없었다. 이 상황이 지긋지긋해진 그는 ‘차라리 피를 마시고 나면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겠지’라는 마음으로 펠릭스를 찾아왔다.
“으으, 어쩌지.”
아이슬러가 펠릭스의 목덜미에 손을 뻗었다 거두길 반복하다가 듬성듬성한 금발을 쥐어뜯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은 빨리 해치워 버릴 작정으로 병원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막상 펠릭스 신부를 눈앞에 두고 나니 선뜻 혈관에 이를 가져가기가 망설여졌다. 마치 인간이었던 시절, 당근이라면 질색했던 그에게 어머니가 머리통을 후려치며 당근 요리를 먹으라고 강요하던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눈매가 앙칼진 신부의 피를 마시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먹기 싫었다. 누가 보면 자의로 병실에 침입한 게 아니라 남에게 끌려온 거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젠장. 피 냄새도 그렇고, 머리카락이랑 옷 조합이 딱 스컹크네.”
아이슬러가 환자복을 들춰 그 안을 흘끗 들여다보며 투덜거렸다. 전형적인 미식축구부 주장처럼 생긴 오서독스는 펠릭스 신부의 옷차림을 스컹크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엄한 트집이었다. 현재 신부가 걸치고 있는 옷은 로만 칼라를 끼운 까만 수단이 아니라 병원에서 지급하는 녹색 환자복이었다.
“거참.”
붕대를 감고 있는 펠릭스 신부의 속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보던 아이슬러가 쩝 입맛을 다셨다. 벌칙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맛없는 피를 꾸역꾸역 마셔야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헛걸음만 했군.”
결국 펠릭스의 피를 마시지 않기로 결정한 아이슬러가 금발을 긁적거리며 뒤를 돌았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신부를 죽일까, 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레오폴트와 함께 움직이며 교황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펠릭스 신부는 그의 적이었다.
하지만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를 선뜻 죽여 버리기엔 뭔가 꺼림칙했다. 나중에 미각이 회까닥해서, 스컹크 같은 신부의 피를 간절히 마시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 않은가!
“고작 해봐야 인간이기도 하고.”
쇳덩이를 들고 설치지만 펠릭스는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펠릭스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아이슬러 입장에선 딱히 유리해질 것도 없었다.
“다음에 보자고, 스컹크 씨.”
창턱에 발을 걸친 아이슬러가 중얼거렸다. 침상에 누운 펠릭스 신부는 깊게 잠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 맞다.”
아이슬러가 유리창을 닫기 전에 품 안에서 주섬주섬 망가진 안경을 꺼냈다. 펠릭스가 숲에서 잃어버린 안경이었다.
안경을 탁자에 내려놓은 덩치 큰 뱀파이어가 지상을 향해 훌쩍 뛰어내렸다. 9층 높이였지만 월등한 신체적 능력을 가진 아이슬러에겐 그 정도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이슬러가 미련 없이 창밖으로 뛰어내리자 병실이 조용해졌다.
“빌어먹을!”
혼자 남겨진 펠릭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아이슬러는 잿빛 머리카락의 신부가 곤히 잠들어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아이슬러가 도둑처럼 살금살금 침대로 다가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어렴풋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의식은 깨어 있었지만 섣불리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베개 밑에 숨겨 둔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주변에 없었다.
온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팬저들을 물린 결정을 뼛속 깊이 후회했다. 펠릭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숨을 죽인 채 아이슬러가 자신을 덮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펠릭스는 또 상처가 터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고 마음을 졸였는데, 오서독스가 변덕을 부려서 간신히 살아났다.
그런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아이슬러가 그를 바라보며 지껄인 말 때문이었다.
“스컹크?”
아이슬러의 면상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정말 제 몸에서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겨드랑이며 환자복에 코를 갖다 댔다. 소독약 냄새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개자식.
안심한 펠릭스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서 부하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이슬러가 또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라 산탄총인 레밍턴도 챙겨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까 수중에 총이 없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긴 했지만 놈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잘하면 아벤 굴드의 도움 없이도 오서독스를 잡을 수 있었을지 몰랐다.
베개 밑에 온갖 무기를 수납한 펠릭스는 눈을 시뻘겋게 뜨고서 아이슬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새벽이 부옇게 밝아 올 때까지 유리창이 열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허탕을 친 펠릭스는 아이슬러가 남기고 간 자신의 안경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묘하게 신데렐라가 떠올라서 기분이 나빴다. 기실 신데렐라와 유사한 점이라고는 그가 떨어트린 제품이 유리로 된 물건이라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아이슬러가 저딴 걸 주워 온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딱 봐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고칠 수도 없는 몰골이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아이슬러가 그에게 안경을 가져다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분실물을 습득한 집배원이 아니라 펠릭스의 적이었다.
오서독스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이 심각하게 부족한 작자들 같았다. 한숨도 자지 못한 펠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옷장에서 신부복을 꺼냈다.
아직 걸어 다닐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성당에 모여 있는 늙은이들을 닦달하려면 그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펠릭스는 수하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빠져나왔다. 백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이 못 봐 줄 만큼 해쓱했다. 수면 부족과 피로 누적 탓이었다.
그는 까끌까끌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동차 뒷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이번 일만 해결되면 남쪽 섬으로 멀리 휴가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