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공기가 찼다. 잠시 비가 왔었는지 도로가 번들번들 젖어 있었다.
큰길에는 핼러윈 분장을 한 남녀가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다. 흐느적거리며 유명 관광 코스를 도는 좀비 행렬도 보였다. 특수 효과를 방불케 할 만큼 리얼한 좀비 분장을 한 사람부터 물감을 대충 묻히고서 ‘우어, 우워’ 하며 팔을 휘저어 대는 남자까지, 좀비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다들 즐거워 보였다.
경찰복을 입은 사람과 슈퍼맨, 스파이더맨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사나웠다. 버스와 지하철 안에도 코스튬을 입고서 어디론가 놀러 가는 시민들이 넘쳤다.
핼러윈 파티 장소는 강이 내다보이는 야외였다. 깜빡깜빡 빛나는 선박의 불빛과 거대한 만월, 강 건너 보이는 도시의 야경이 화려했다.
제이드는 친구들을 찾기 위해 북적거리는 인파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플라스틱 호박 등이 머리 위에서 전구와 함께 반짝거렸다. 간이 천막에선 섹시한 마술사 코스튬을 입은 아가씨들이 음료와 술을 팔았다.
제이드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가면에 모자를 쓰고 분장을 한 사람들이 넘쳐 나서 행사장에서 친구들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이드! 여긴 웬일이야.”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이동식 화장실 앞에서 간신히 세르게이를 발견했다. 소변을 보고 나온 세르게이는 반가운 얼굴을 하고서 성큼성큼 제이드에게 다가왔다.
“TV에서 철 지난 영화밖에 안 틀어 주더라고. 근데 다른 녀석들은 어디 있어?”
괜히 머쓱해진 제이드가 뒷목을 문질렀다.
“나오길 잘했어. 물이 완전 끝내주거든.”
카우보이 복장을 한 세르게이가 어깨에 팔을 두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체크 셔츠에 웨스턴 부츠, 가슴엔 보안관 배지까지 달았다. 출신지 악센트가 강해진 걸 보니 흥이 오를 대로 오른 기색이었다.
“벤이랑 그렉은 저기 간이 바 앞에.”
세르게이가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친구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벤은 실연의 상처 따위는 깨끗이 잊었는지 헤벌쭉 웃고 있었다. 몸매가 미끈한 흑인 여성이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의 귓가에 바람을 불었기 때문이었다. 그렉도 스타트렉 코스튬을 입은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계속 이 부근에 있을 거지?”
“으음… 아마도.”
몸에 쫙 달라붙는 표범무늬 옷을 입은 아가씨가 세르게이 앞을 지나갔다. 세르게이는 긴 꼬리를 휘두르는 표범 아가씨의 엉덩이를 훔쳐보느라 한 박자 느리게 대꾸했다.
“그럼 난 해리 좀 만나고 올게.”
제이드가 픽 웃으며 세르게이의 등을 툭 쳤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작업을 걸라는 의미였다.
“어, 어. 그래. 고마워. 갔다 와.”
표범 아가씨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어 낼 줄 모르던 세르게이가 허둥지둥 인사를 건넸다. 카우보이모자가 벗겨지지 않도록 꾹 누르며 그녀를 쫓아가는 모습이 실소를 자아냈다.
제이드는 벤과 그렉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보냈다. 그들은 제이드의 얼굴을 보고 놀라면서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마음에 든 여성에게 작업을 거느라 바빠서 다른 데 주의를 돌릴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해리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꽤 쌀쌀했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리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코스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꼭 거창하게 코스튬을 챙겨 입진 않았어도 프랑켄슈타인의 마스크를 쓰거나 광대 화장에 미키 마우스 머리띠, 마법사 모자에 망토를 두르는 식으로 가볍게 분위기를 낸 사람들이 많았다. 제이드처럼 청바지에 셔츠만 덜렁 입고 온 사람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다.
두리번거리며 해리를 찾다가 뭘 좀 마실까 싶어 간이 상점으로 다가갔다. 물 한 병에 5달러가 넘었고 콜라도 4달러나 했다. 맥주는 가장 저렴한 브랜드가 9달러였다. 칵테일이나 다른 술은 얼마인지 확인할 엄두도 나질 않았다.
제이드는 입맛을 다시며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맥주가 마시고 싶긴 했지만 바가지가 심해서 살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 돈을 주고 마시느니 차라리 조금 참았다가 집에 가는 길에 캔 맥주를 대여섯 개 사가는 게 나았다.
“제이드 씨?”
다시 해리를 찾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데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누구지? 라는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았다. 인파가 하도 많아서 그의 이름을 부른 사람을 발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저, 웨일리입니다. 기억하시죠?”
드라큘라 백작 분장을 한 남자가 가짜 송곳니를 빼며 제이드에게 악수를 청했다. 제이드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아, 웨일리 씨. 오래간만이네요.”
제이드는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했더니 전에 가구를 만들어 준 적이 있는 해리의 동창이었다. 딱 한 번 만난 사람인데다가 머리카락도 빈틈없이 기름으로 죄 넘기고, 가짜 송곳니까지 끼고 있어서 바로 알아보질 못했다.
“와,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왠지 인연이 느껴지는데요. 혼자 오신 건가요? 해리가 추천한 파티라 혹시 제이드 씨를 마주치진 않을까 기대하긴 했지만, 정말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웨일리가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콧김을 뿜어냈다. 양쪽 손으로 제이드의 오른손을 꽉 붙잡은 그는 좀처럼 악수를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손 좀….”
제이드는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참으며 입가에 애매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손목이며 손가락을 은근슬쩍 더듬어 대는 웨일리의 손길이 거북했다.
남자들끼리는 아무리 친해도 악수 이상의 신체 접촉을 꺼리는 편이었다. 운동 경기를 할 때는 예외지만 일상생활에선 실수로라도 동성의 피부가 닿으면 질색하며 물러서는 게 보통이었다. 제이드도 그런 면에선 여타 평범한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웨일리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손을 놓았다. 그의 왼쪽 손목에 걸린 큼지막한 고급 시계가 전깃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조명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여섯 자리 연봉을 받으며 증권가에서 일하는 그는 고가의 명품 시계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단순한 제이드는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네, 라고 생각했다. 연애 쪽으로는 둔감하기 짝이 없어서 웨일리가 저에게 시답지 않은 작업 멘트를 던진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핼러윈 파티에 참여한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행사장 곳곳에 무덤 및 핼러윈 몬스터 조형물과 마녀의 집이 세워져 있어서 사진 찍기가 좋았다. 인파 저편에선 음악 소리가 들렸다. 만월은 점점 지상과 가까워졌고 파티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 혹시 해리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네.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습니다. 이쪽이에요.”
웨일리가 싱글싱글 웃으며 앞장서다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전엔 변변한 감사 인사도 못했네요.”
웨일리는 깜빡했다는 듯 맥주 두 개를 사서 그중 하나를 제이드에게 건넸다. 제이드는 얼떨결에 맥주를 받았다. 갈색 유리병은 물기로 축축해서 표면이 미끄러웠다.
“감사 인사?”
제이드는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이 뭐가 있지? 라고 생각하며 눈썹을 비틀었다.
“고생해서 가구를 만들어 주셨잖아요.”
“고생이랄 것까지야.”
제이드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돈 받고 한 일인데, 누가 보면 공짜로 가구를 만들어 주기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뭐,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입에 발린 말이라 하더라도 가구 제작 의뢰인에게 감사 인사를 들어서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제이드 씨, 다음 주쯤 시간 괜찮으세요?”
웨일리는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는 제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새하얀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광경이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그러나 제이드는 제 모습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알지 못했다.
“글쎄요. 그런데 시간은 왜?”
제이드는 맥주병에서 입술을 떼어 내며 대꾸했다. 그의 얼굴엔 의아해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아, 그게 다름이 아니라… 제가 키, 키친 테이블과 의자를 바꿀 예정이거든요. 옷장도 새로 짜고 싶고.”
도자기처럼 미끈한 제이드의 쇄골과 젖어 드는 입술을 훔쳐보던 웨일리는 말을 더듬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웨일리는 아까부터 사회 초년생처럼 덜떨어진 모습을 보이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좀 더 근사하고 능숙한 방식으로 제이드의 관심을 사려고 했는데, 평소처럼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얼떨떨했다. 그는 원래부터 누구 앞에서든 자신감을 잃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델들만 골라 사귀며 가벼운 남자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아, 혹시 이번에도 나한테 제작을 맡기고 싶은 겁니까.”
“네. 제이드 씨에게 제작을 부탁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웨일리는 콩닥거리는 심장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폼을 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동경의 대상인 치어리더를 눈앞에 둔 소극적인 범생이 같은 얼굴빛을 띠고 있었다.
‘어?’
제이드를 곁눈질하던 웨일리는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사람들이 북적댄다는 이유로 제이드와 밀착한 웨일리는 곧게 뻗은 목덜미에 코를 가져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이드의 몸에서 향수인지 체취인지 모를 부드러운 냄새가 났다. 보송보송한 강아지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살집은 없지만 자꾸 부딪치는 어깨가 생각보다 넓어서 제이드가 남자란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얼굴만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생겼을 뿐, 제이드의 몸 자체는 잡지 모델처럼 탄탄했다.
“당장은 힘들 것 같은데.”
제이드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한동안 다른 일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수고비가 짭짤한 일거리를 거절하자니 주머니 사정이 너무 뼈아팠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급한 건 아니니까 기다릴 수…?”
손을 내젓던 웨일리가 흠칫 말을 멈췄다. 제이드가 차고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혹시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에 힘을 주고서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파텍 필립 로고를 본 그는 하마터면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배터리 없이 수동식으로 작동하는 파텍 필립은 시계 수집이 취미인 웨일리뿐만이 아니라 투자회사 동료도 꿈의 시계라고 커피 타임마다 가슴앓이를 하는 고가의 작품이었다.
양산 제품은 수십에서 수백만 불을 호가하고 맞춤 제작은 그보다 더 엄청난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백화점이나 매장에서 판매하는 저가 라인이라면 모를까, 매년 한정 생산하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워치는 본사 인터뷰를 통해야만 구할 수 있었다. 즉, 일반인들에겐 아예 팔지도 않는다는 소리였다.
잠깐만, 상식적으로 저게 진짜일 리 없잖아.
당황해서 꿀꺽 생침을 삼키던 웨일리는 그가 너무 앞서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모조품인 게 당연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브랜드긴 하지만 가짜가 아예 없진 않았다.
하지만 진품의 미닛 리피터, 뚜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 기능은 절대 흉내 낼 수 없었다. 시간을 종소리로 표현하고, 천문을 계절별로 나타내고, 뒷면에 달의 위상 변화를 저절로 표현하는데다가 윤년까지 계산하는 복잡한 기능 중 하나만 들어가도 시계의 품격과 가격이 달라졌다.
“웨일리 씨?”
제이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웨일리가 갑자기 말을 멈춘 이유가 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흠흠, 죄송합니다. 시계가 멋져 보여서요.”
웨일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가짜냐고 물어보는 건 실례겠지? 라고 중얼거렸다. 웨일리는 제이드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제이드의 환심을 사도 모자랄 판에 시계가 가짜라고 지적해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래요?”
제이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흘끔 시계를 내려다봤다. 입가에는 쑥스러워하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여자 친구가 준 선물을 타인에게 칭찬받은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웨일리는 제이드에게 여자 친구가 없다는 해리의 말을 곱씹으며 미간을 가운데로 모았다. 생각해 보니 해리에게 그 말을 들은 게 벌써 꽤 오래전 일이었다. 제이드에게 여자가 생겼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제이드 같은 사람이 혼자인 게 이상했다.
더불어 어쩌면 현재 사귀고 있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일 가능성도 있었다. 증권시장에서 트레이더로 일하는 웨일리의 감이 그렇게 외쳤다. 언젠가 해리가 제이드와 그 작자가 가깝게 지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흘리기도 했었다.
“선물 받으셨나 보네요. 미닛 리피터 기능은 잘 작동하나요?”
웨일리는 시계가 가짜란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래야 제이드가 지금 사귀는 사람에게 정이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물론 대놓고 가짜라고 꼬집으면 제이드에게 반감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웨일리는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대신 제이드가 스스로 가짜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에둘러 말하는 화법을 선택했다.
“미닛 리피터?”
처음 듣는 용어인 모양인지 제이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 음. 간단하게 말해서 현재 시각을 소리로 알려 주는 기능이죠.”
웨일리는 당황했다. 파텍 필립 모조품을 차고 있는 제이드가 미닛 리피터 기능을 모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탓이다. 파텍 필립 하면 미닛 리피터 기능이 가장 먼저 떠올라야 했다.
아무래도 제이드가 파텍 필립이란 브랜드 자체를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웨일리는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파텍 필립에 대해 모르면 가짜란 소리를 들어도 충격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웨일리는 속으로 ‘어떤 자식인지는 몰라도 더럽게 약았네’라고 투덜거렸다.
“아, 그거 말입니까. 귀찮아서 꺼 두고 다니는데.”
제이드는 시계 테두리에 달린 용두를 조작해서 타종 소리가 나도록 했다. 그 순간 웨일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닛 리피트 기능이 작동한다는 건 저 파텍 필립이 진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웨일리는 눈을 부릅뜨고서 숨을 헐떡거렸다. 목구멍에선 비명이 맴돌았다. 너무 충격적이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시계에서 나는 우아한 종소리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시죠?”
제이드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계를 바라보는 웨일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 시계를 선물한 사람, 도대체 뭐 하는 분입니까.”
웨일리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질 않아서 눈앞이 아찔했다. 제이드에게 파텍 필립을 선물한 작자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최소 몇백만 달러짜리 시계를 별다른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덜렁 채워 주다니, 정말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웨일리 씨, 혹시 이 시계가 엄청 비싼 겁니까?”
제이드가 조금 필사적인 얼굴로 웨일리에게 물었다. 왠지 웨일리가 굴드가 선물한 시계 브랜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잖아도 제이드는 고가의 물건임이 분명한 시계를 선물로 받아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웨일리가 제 시계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로서는 도대체 얼마나 비싼 시계기에 고 연봉을 받는 금융업 종사자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걸까, 라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뇨. 전혀 안 비싼 물건입니다.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네요. 그냥 선물 받은 거니까 싼 건 아니겠지, 라고 넘겨짚은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들부들 잔경련을 일으키던 웨일리는 주먹을 꽉 쥐며 시치미를 뗐다. 그는 저 물건이 몇백만 불을 호가하는 시계란 사실을 알려 줘서 제이드가 사귀는 사람을 기쁘게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어떤 별세계 갑부인지는 몰라도 제이드에게 가격도 말해 주지 않고 파텍 필립을 채워 준 심보가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오메가나 롤렉스는 유명해도 일반인들은 파텍 필립에 대해 잘 몰랐다.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설혹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제이드의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조금 전 그의 반응처럼 진품일 거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즉, 어마어마한 가격의 물건이지만 강도당할 위험은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죄송한데, 제가 좀 피곤해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안색이 환자처럼 칙칙해진 웨일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중력에 짓눌린 듯한 탈력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구 제작을 핑계로 제이드와 가까워져 보려던 마음은 깨끗이 접었다. 감당 못할 작자가 제이드에게 붙어 있다는 해리의 혼잣말을 한 귀로 흘려들은 게 후회가 됐다. 제이드가 사귀는 사람에게 질투심을 품을 기운도 나질 않았다. 경쟁이 되지도 않을 만큼 차이가 심하게 나는 작자라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먼저 들었다.
“웨일리, 인마. 맥주 사러 간다던 녀석이 왜 여기 있어.”
웨일리가 비틀대며 제이드에게서 멀어지려는 찰나였다.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낸 해리가 웨일리를 발견하고서 걸음을 옮기는 속도를 높였다.
“어라? 제이드도 같이 있었네. 네가 여긴 웬일이냐?”
뒤늦게 웨일리 옆에 있는 제이드를 발견한 해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제이드는 핼러윈 파티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몇 번이고 같이 가자고 권해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해리로서는 제이드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 형, 오래간만이네요.”
고대 이집트인 복장을 한 숀 테일러가 해리를 밀치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제이드를 발견하자마자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도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해졌다. 허공에 매달린 호박 장식이 바람에 흔들려 덜컥덜컥 소리를 냈다.
“여전히 인기가 많으시네. 이 남자 저 남자 홀리고 다니는 버릇은 아직 못 고쳤나 봐요?”
눈꼬리를 강조한 화장을 한 숀이 제이드와 웨일리를 훑어보며 이죽거렸다.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앙칼지고 적대적인 눈빛이었다.
홀리고 다닌다고? 도대체 뭘.
제이드는 설핏 이맛살을 찌푸렸다. 숀이 그를 싫어하는 만큼 그도 숀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해리에게 쪼르르 달려와 단물만 빨아먹는 녀석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너 제정신이냐.”
제이드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숀이 무슨 뜻으로 홀리고 다닌다는 말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숀이 시비를 걸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단순한 편이긴 해도 숀이 던진 말이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한편 웨일리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정쩡한 자세로 눈을 껌뻑거렸다.
“당연히 제정신이죠. 무슨 말이 그래요?”
제이드의 기세에 숀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표정을 정돈했다. 저딴 녀석에게 졸았다는 티를 내느니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았다. 숀은 약한 개가 더 시끄럽게 짖듯, 온 힘을 다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제이드의 말을 받아쳤다.
“저기, 숀. 왜 그래….”
예감이 좋지 않았는지 해리가 발끈한 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내가 틀린 말했어?”
혈기왕성한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은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냐는 얼굴로 해리를 째려보았다. 배알도 없는지 해리는 깨갱, 하고 꼬리를 말았다.
제이드는 여전히 숀에게 약한 해리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은 숀 테일러지 해리가 아니었다. 딴 남자랑 해리를 저울질하다가 돌아온 녀석이 어떻게 저리 당당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마지막 공연 날 제이드 형이 굴드 씨를 채 갔다면서요? 계단에서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는 얘기도 잘 전해 들었습니다. 목격자가 꽤 되더라고요.”
숀은 신경질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아득바득 이가 갈렸지만 주위 이목을 생각해서 언성을 높이진 않았다. 쪽팔린 건 딱 질색이었다.
숀은 격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연장 앞에서 굴드와 키스를 한 사람이 제이드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너무 허탈하고 어이가 없어서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솔직히 말해서 굴드와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도 분통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아벤 굴드를 쫓아다녔다. 이렇게 몸이 달아오른 건 처음이었다. 굴드가 자신을 철저히 무시해서 한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위안하고 넘어갔다. 아벤 굴드는 숀이 넘보기에 너무 벅찬 상대였다.
숀은 무대 위에 선 굴드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전율이 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봤다.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서 떠받들어 줘서 나름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데, 굴드는 아예 격이 달랐다. 정말 소름 끼치게 아름다워서 사인해 달라는 말조차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
굴드가 만나는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수준이 맞는 사람일 거라 예상했다. 상·하의원 같은 유력 인사와 가깝게 지내는 상류층에 격식 있는 저택과 값비싼 리무진,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만이 굴드와 어울릴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촌스럽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동양인을 굴드가 선택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돈, 명예, 외모,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상대여야 납득을 할 텐데, 제이드는 그보다 잘난 게 없었다. 심지어 그는 고아에 전쟁터에서 온갖 추잡하고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한 특수부대 출신이기까지 했다.
달이 뜬 밤하늘 위로 먹구름이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공기는 점점 거칠고 불온한 기운을 띠었다. 이상하게도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뒤로 굴드 씨랑 어떻게 됐어요? 뭐, 오늘 같은 날 혼자 나온 걸 보니까 안 들어도 대충 알 만하네.”
숀은 제이드를 업신여기듯 위아래로 훑었다. 제이드가 굴드와 잘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결단코 인정할 수 없었다.
“혹시 만나자는 전화도 없었나? 와, 되게 자존심 상하겠다. 사귄 지 얼마 안 됐으면 같이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바쁜 게 보통 아닌가? 특히 핼러윈 같은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있고 싶어 하기 마련인데? 그런데도 만나자는 소리가 없었던 걸 보면 제이드 형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 보다.”
제이드가 유리 조각을 밟은 것처럼 움찔했다.
숀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도 내심 마음에 걸려 하던 부분을 숀이 헤집어 버렸다.
“해리 친구시죠? 제이드 형이랑 만나는 사람은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곧 흐지부지하게 끝날… 읍! 뭐야, 왜 이래.”
해리는 웨일리에게 시선을 던지는 숀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까지는 계속 눈치만 봤지만, 더 이상 숀이 망아지처럼 날뛰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하하! 숀, 추워서 예민해졌구나. 차에서 몸 좀 녹이다 올래? 아니면 근처 식당에서 뜨거운 커피라도 마시고 올까?”
“이거 안 놔? 나 하나도 안 춥거든?”
숀 테일러가 빽 소리를 치며 해리의 팔을 뿌리쳤다. 그 손에 얼굴을 맞은 해리가 ‘이건 너무하잖아’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드드드, 드드드-.
덜컹, 덜컹.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가로등과 가판대 천막이 흔들렸다. 전깃줄에 줄줄이 꿰인 호박 등도 출렁출렁 널을 뛰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람들이 당황했다. 해리에게 사과하기는커녕 ‘표정이 왜 그따위야. 불만이라도 있어? 그러게 왜 끼어들어!’라고 적반하장으로 굴던 숀도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가판대에 마련된 술과 음료가 죄 풀밭으로 떨어졌다. 화려하게 분장한 주류 판매원들은 맥주 상자가 쓰러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행사장 구석에 비치된 간이 화장실이 기우뚱 기울어져 그 주변에서 소란이 빚어졌다.
“제, 제이드 씨, 대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손님이 우왕좌왕했다. 웨일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황이 더 악화될까 봐 주차장을 향해 뛰는 손님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지진은 당최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더 드세졌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마저 지직, 지직, 끊어져서 사람들의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다.
“피하죠.”
안절부절못하는 웨일리를 향해 제이드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놀이 기구에 올라탄 것처럼 발밑을 흔드는 지진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는 해리를 챙기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지진이 뚝 멈췄다.
제이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핼러윈 파티 참가자들은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뜬금없이 왜 땅이 흔들린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진은 지나간 게 분명했다.
“사, 살았다. 제이드, 이제 끝났나 봐!”
겁에 질려 있던 해리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숀은 그런 해리를 쪽팔린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까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꽥꽥 소리 질렀던 건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래저래 밉상인 자식이라 제이드는 표정을 구겼다.
혼자 앞서 나간 웨일리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머뭇거렸다. 이만 가 보겠다는 말을 꺼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침묵이 두텁게 깔려 있던 행사장에 어느덧 웅성웅성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분위기였다. 다만 스피커가 여전히 지지직, 지지직, 하는 불길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지진의 여파로 전기 회선이 망가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지지직대는 소음을 무시했다.
귀청을 먹먹하게 만들 만큼 강렬한 폭발음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쿠구궁, 펑!
잔디가 깔린 땅이 높게 솟구쳤다. 지하에서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으아악!”
사방으로 잔디가 튀었고 흙의 비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해리와 숀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지진에 이어 폭발까지 일어나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머리를 보호했다. 핼러윈 축제 직원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전을 보내거나 탁자 아래로 숨었다. 폭발 장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던 웨일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몰고 도망쳤다.
축제 참가 손님들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밀치며 흩어지는 사이, 제이드는 지금 자신이 뭘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부릅떴다. 허공에 붕 뜬 흙더미 사이로 거대한 검은 물체와 사람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쿵!
거대한 검은 물체가 흙먼지를 불러 일으키며 땅에 떨어졌다. 굉음이 공기를 흔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저, 저게 뭐야!”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바닥으로 추락한 검은 물체는 괴물의 형태를 띠었다.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난 꼬리, 정체 모를 맹수처럼 생긴 머리, 사람보다 더 큰 앞발. 제이드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는 저것과 비슷한 괴물을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다. 피터가 죽을 뻔했던 날 밤, 굴드가 불러낸 괴수가 딱 저렇게 생겼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 저 괴물을 또 보게 될 줄은 알 수 없었다. 제이드는 긴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단순히 닮은 종種인지, 아니면 정말 그때 본 괴물이 맞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는 검은 마수가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놈은 건물 하나쯤은 우습게 무너트리고도 남았다. 무슨 목적으로 마물이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건지는 몰랐다. 문제는 놈이 인간을 공격하면 막을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장담하건대 경찰도 상대가 안 될 것이 분명했다.
“해리, 일어나.”
넋 나간 해리를 일으켜 세우며 폭발이 일어났던 자리를 곁눈질했다.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있던 곳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시커먼 구멍을 들여다보자 현기증이 일었다. 심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깊고 아득했다.
“으악, 젠장. 내가 지금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게 아니지?”
“카메라 가진 사람 없어? 누가 저것 좀 찍어 봐!”
우르르 도망치던 사람 중에서 몇몇이 뛰는 속도를 늦추며 뒤를 돌아봤다.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가져온 카메라로 괴물을 촬영하는 남자도 있었다.
핼러윈 축제 한복판에 처박힌 검은 괴수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놈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댔다. 괴물이 노려보고 있는 것은 프로레슬러처럼 덩치 좋은 노숙자였다. 폭발이 일어날 때 괴수와 함께 땅 위로 등장한 남자였다.
“어이, 어이. 남자가 너무 끈질기게 쫓아다니면 매력 없어. 서로 적당히 하자고.”
금발 노숙자가 검은 마물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거대한 마수가 그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크르릉-.
검은 마물이 꼬리를 붕붕 휘두르며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괴물은 몹시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새까만 몸뚱이가 너덜너덜했다. 노숙자가 놈을 공격해서 깊숙한 상처를 입힌 모양이었다.
“흠,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었나?”
금발 노숙자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괴물이 땅을 박차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마물이 움직이자 사진을 찍으려고 주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거참, 꼭 끝을 보려는 모양이군. 골치 아픈 성격이야.”
아이슬러가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흔드는 그의 손바닥에 파르스름한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이슬러가 시선을 들어 올려 괴물을 바라봤다. 그 순간 파란빛이 번뜩였고, 앞발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검은 괴물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파수꾼의 발을 묶은 아이슬러가 근육을 부풀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얼음덩어리가 된 파수꾼이 쩌억,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성가신 추격자를 해치운 아이슬러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는 음험하고 교활한데다 성격까지 나쁜 작자에게 쫓기고 있었다. 어제는 운 좋게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번에 잡힌다면 도망칠 자신이 없었다.
머리 위에 달이 높게 떠올랐다. 몸속에 흐르는 피가 달의 영향을 받았는지 가파른 속도로 혈관을 내달렸다. 흥분한 아이슬러는 킁킁 냄새를 맡으며 신경을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머리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하찮은 날벌레들 사이에 섞여 있었지만 남자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저기 있군.”
지저분한 손가락장갑을 낀 아이슬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네발짐승처럼 훌쩍 도약했다.
쿵, 소리를 내며 지상에 착지하자 눈을 부릅뜬 청년의 얼굴이 정면에 보였다.
아이슬러는 제이드를 위아래로 훑으며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을 때도 체취가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서 냄새를 맡으니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갓 연기를 피운 아편만큼이나 달콤하고 요사스러운 체취였다.
“헉! 뭐, 뭐야!”
해리가 자지러질 듯 놀랐다. 눈앞에 갑자기 사람이 뚝 떨어졌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제이드는 해리가 옆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기척을 들으며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그렇잖아도 최근 비현실적인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딱 봐도 수상쩍은 남자가 불쑥 길을 가로막았으니 제이드로서는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저 노숙자는 아까 검은 마물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흉포하기 짝이 없는 적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이동했다. 이 상황은 금발 노숙자가 마물을 해치웠음을 의미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제압한 것이다. 금발 노숙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노숙자 몰골을 한 남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제이드는 정글에서 맹수라도 마주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번뜩이는 모습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굶주린 들짐승의 눈빛이었다.
“윽.”
문신이 있는 자리가 따끔거렸다. 제이드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시계를 찬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며칠 전 이상한 안개에 쫓길 때도 문신이 있는 자리가 뜨겁고 욱신거렸다. 아무래도 위험을 알리는 경고가 분명했다.
“당신 뭐하는 작자야.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제이드는 여차하면 바로 도망칠 수 있도록 해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문제는 해리가 제이드의 의중을 알아채느냐였다. 불행하게도 그의 친구 놈은 더럽게 눈치가 없었다. 어쩌면 숀 테일러에게 신호를 주는 게 나을지 몰랐다. 성격이 나쁜데다 주변에 적이 많아서 그런지 눈치 하나만큼은 남들 몇 배로 비상했다.
“이런, 내 소개가 늦었군. 아이슬러다.”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름을 밝혔다. 멋쩍어하는 표정이 능청스러웠다. 식인 곰처럼 불온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리고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내가 용건이 있는 건 그쪽 하나뿐이야.”
아이슬러가 막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제이드를 응시하는 시선이 금방 진지해졌다.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검은 괴물을 해치운 남자가 그에게 볼일이 있다고 말하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손목을 휘감은 문신이 견디기 힘들 만큼 뜨거운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도망쳐!”
꿀꺽 생침을 삼키며 아이슬러를 경계하던 제이드가 돌연 해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약삭빠른 숀은 이미 꽁무니를 내빼고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해리를 버리고 혼자서 도주한 것이다.
“자, 잠깐만. 무슨 일인데!”
해리가 헐레벌떡 달리며 외쳤다. 그는 제이드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다리를 놀렸다.
“나도 몰라!”
멀리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인근 주민이나 축제 참가자가 땅이 폭발하는 소리를 듣고 911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었다. 경찰이나 소방관이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무작정 달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중이었지만 그는 아이슬러를 피해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검은 괴물을 해치운 아이슬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해리가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갈라지자! 넌 저쪽으로 가.”
제이드는 갈림길에서 해리를 오른쪽으로 밀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려오는 방향이었다. 만에 하나 아이슬러가 해리를 뒤쫓는다 하더라도 그쪽에선 경찰이나 소방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
해리가 무사히 그 자리를 떠났길 바라며 제이드는 나무가 우거진 공원 쪽으로 뛰어들었다. 가로등이 없어서 사위가 컴컴했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린 탓에 달도 잘 보이지 않았다.
서펜타인 산림공원은 말만 공원이지 숲을 방불케 할 만큼 녹지 면적이 방대했다. 제이드는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 사이를 달리고 또 달렸다. 굵직한 나무뿌리가 트랩처럼 곳곳에 널렸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이끼가 미끄러웠다. 그는 숨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오밤중에 도대체 왜 죽자 살자 전력질주를 하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꼭 경찰에게 쫓기는 범죄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도망치는 걸 그만둘 마음은 없었다. 아이슬러에게 붙잡히면 안 된다고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린 이유는 단순한 신세 한탄에 불과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숲 속을 달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저편에 공터가 보였다. 누군가 그를 뒤쫓아 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안심하긴 이르지만 어느 정도 아이슬러를 따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서서히 달리는 속도를 줄였다. 제이드는 공터를 몇 발자국 남겨 놓고서 호흡을 골랐다. 나뭇가지가 비명을 내지르듯 거세게 흔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휴우, 쫓아오는 데 힘들었어.”
아이슬러가 쿵, 소리를 내며 제이드 앞에 떨어졌다. 부러진 나뭇가지도 낙엽과 함께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빌어먹을!
모골이 송연해진 제이드가 눈을 부릅떴다.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슬러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길. 지금 이해 안 가는 일이 한두 개야?’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슬러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손목이 또다시 화끈거렸다. 마치 누군가 인두로 살을 지지는 느낌이었다.
“어이! 숨바꼭질은 그만하자고. 딱히 널 해치려는 게 아니라 뭘 좀 확인하려는 것뿐이란 말이야.”
아이슬러가 인상을 찡그리며 제이드의 등에 대고 외쳤다. 모함이라도 당한 것처럼 퍽 억울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해칠 마음이 없다는 그의 말은 병아리 눈물만큼도 진심이 아니었다.
사실 아이슬러의 입장에서는 제이드를 반드시 죽일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제이드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체취가 그를 흥분시킨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동양인 청년의 새하얀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싶어서 몸이 잔뜩 달아올랐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킁킁 반복해서 냄새를 맡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피부의 체취만으로도 그를 이리 뒤흔드는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 냄새는 얼마나 달콤할지 상상도 되질 않았다.
아이슬러는 제이드가 자신이 찾는 사람인지 아닌지만 확인하고서 바로 피를 빨 작정이었다. 눈앞에 차려진 만찬을 먹지 않고 썩히는 행위는 악마도 구제하지 못할 큰 죄였다.
“허억, 헉. 제길.”
제이드는 울창한 숲을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흩어졌다. 거뭇한 숲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아이슬러가 그를 쫓아오는 소리가 지척에서 느껴졌다. 있는 힘껏 도망쳐도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기만 할 뿐이었다.
마음이 급한 탓인지 하필이면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빌어먹을!”
미끄덩한 이끼 위를 대차게 구른 제이드가 욕설을 내뱉었다. 발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슬러가 얼음으로 그의 발을 묶어 버린 탓이었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제이드의 머리 위로 체구가 우람한 아이슬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흠, 이제 좀 차분히 대화를 나눌….”
아이슬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이드에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새하얀 기류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제이드의 몸을 휘감았다. 이변을 감지한 제이드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머리카락이 사납게 나부꼈다. 문신이 새겨진 제이드의 손목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윽!”
돌풍에 휩쓸린 아이슬러가 10여 미터 떨어진 나무에 처박혔다. 마치 누군가 묵직한 해머를 휘둘러 그를 날려 버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쿵, 하고 나무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공원에 울려 퍼졌다. 아이슬러와 부딪친 나무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부러진 것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이 흘러들었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은은한 빛을 뿌리는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았다. 피부로 파고들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번에도 뱀 형상을 띤 문신이 그를 보호한 것이 분명했다.
아이슬러가 어둠 저편에서 비틀비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마음이 다급해진 제이드는 족쇄처럼 발을 옥죄고 있는 얼음을 주먹으로 마구 내려쳤다. 어떤 물체가 그의 주변을 뒤덮고 있는 건지 시야가 조금 흐릿했다.
“쿨럭, 레오폴트 놈이 왜….”
아이슬러가 입가의 피를 훔치며 눈알을 부라렸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것은 제이드를 휘감은 투명하고 새하얀 뱀이었다. 저 거대하고 불길한 공허의 피조물이 조금 전에 아이슬러를 날려 버린 것이다.
검고 끈적끈적한 레오폴트의 마력이 숲을 짓눌렀다. 마력을 방출하는 진원지는 뱀처럼 생긴 공허의 피조물이었다. 레오폴트가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제이드에게 투명한 공허의 괴물을 심어 놓은 것이다.
“어이, 타나토스의 대리자 나으리.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냐.”
아이슬러는 손가락장갑을 낀 손으로 금발을 거칠게 헝클었다. 교활하고 치밀한 작자인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레오폴트가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건지 그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이드에게 처음 접근했던 날 밤도 아이슬러는 레오폴트의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뭘 착각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밤거리에 퍼트렸던 안개를 거둬들였다. 아이슬러는 그때 성자의 관에서 갓 일어난 상태였다. 아편을 잔뜩 피운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서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동양인 청년의 몸에 레오폴트의 체취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슬러는 고약한 비밀을 알아낸 사람처럼 왈칵 표정을 구겼다. 자신이 레오폴트를 너무 의식하고 있어서 놈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게 아니었다.
“레오폴트와 무슨 관계지?”
아이슬러가 사납게 으르렁댔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것처럼 나뭇잎이 부산하게 몸을 비벼 댔다. 아이슬러는 제이드를 보호하는 공허의 피조물 때문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감정적으로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레오폴트가 부리는 거대한 뱀 새끼에게 팔을 물어뜯길 게 분명했다. 저 흰 뱀은 파수꾼과 달리 실체가 없는 마력의 응집체라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웠다.
“빌어먹을, 레오폴트란 자식이 누구야.”
얼음을 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제이드의 이마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얼음이기에 온 힘을 다해 충격을 가해도 실금 하나 생기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동소총과 MP5 기관단총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하다못해 소구경 권총이나 접이식 나이프라도 소지하고 다닐 걸 그랬다는 후회가 솟구쳤다. 인간이 아닌 상대에게 총이 얼마나 통할지 미지수였지만 빈손인 것보다는 나았다. 성당 지하실에서 적군에게 에워싸인 이후로 지금만큼 무기가 아쉬운 적이 없었다.
“시치미를 떼는 솜씨가 일품이군, 성배. 깜빡하면 속아 넘어가겠어.”
옷을 겹겹이 주워 입은 아이슬러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새하얀 소용돌이 같은 것을 견제하느라 제이드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배?
어금니를 깨물고서 얼음을 내리치던 제이드가 불쑥 손을 멈췄다.
지잉, 하고 귓가에 이명이 들렸다. 그의 눈앞으로 어두컴컴한 성당 지하실에서 적군이 몰살당한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붉은 글씨가 주문처럼 그려진 벽, 지하실 중심부에 못 박혀 있던 미라, 총을 맞아 바닥에 쓰러진 제 몸 위로 올라탄 검은 인영.
‘성배’는 기억에서 사라진 마지막 전투를 회상할 때마다 누군가 그에게 속삭였던 단어였다.
“당신 누구야. 지금 날… ‘성배’라고 불렀어?”
제이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 울려 퍼졌다. 발목을 옥죄고 있는 얼음만 아니라면 당장 아이슬러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성배라는 단어가 아이슬러의 입에서 나왔다. 자신을 성배라고 부를 사람은 성당 지하실에 나타났던 정체 모를 남자밖에 없었다.
드디어 실마리를 발견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악몽의 사슬을 끊어 낼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제이드는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자신을 성배라고 부른 저 남자라면, 성당 지하실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의 진상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네가 성배라는 걸 알고 있었나? 아아, 레오폴트가 알려 준 모양이군.”
아이슬러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감이 오는군. 레오폴트 이 악랄한 자식. 그 녀석이 네가 성배라는 사실을 의심하도록 뒤에서 수작을 부린 거였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이슬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손바닥에 영력을 집중하는 그의 어깨 위로 파르스름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성배의 피가 눈앞에 있는데 더 이상 꾸물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는 제이드를 감싸고 있는 소용돌이의 장벽을 단번에 돌파할 작정이었다. 공허의 괴물을 해치우지 않는 이상 성배에게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젠장, 누군지도 모르는 레오폴트 타령은 그만하고 성배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나 말해!”
제이드가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아이슬러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 수중에 총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는 레오폴트라는 작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레오폴트라는 이름도 오늘 처음 들었다.
“이봐, 끝까지 모른 척할 속셈인가 본데, 그래 봤자 안 통해.”
아이슬러가 제이드에게 한심하다는 눈길을 보내며 쯧쯧 혀를 찼다. 제이드는 아이슬러의 밉살맞은 표정 때문에 욱하는 감정이 솟구쳤다. 할 수만 있다면 주먹으로 얼굴을 갈겨 주고 싶을 정도였다.
“혹시 그 녀석이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건가? 흠,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
본의 아니게 제이드를 약 올렸던 아이슬러가 제법 그럴싸한 추측을 입에 올렸다. 레오폴트가 제이드에게 다른 이름을 댔다면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했다.
“뭐,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아이슬러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더니 공허의 피조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 덩어리인 남자가 낸 속도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제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이슬러가 소용돌이 장벽을 좌우로 잡아 벌렸다. 공허의 피조물이 펄펄 날뛰며 그를 공격했지만 노숙자 차림을 한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슬러는 새파란 불꽃을 일으켜 그의 육체를 보호했다.
아이슬러가 장벽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이드는 이를 악물며 놈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인간에 불과한 그는 아이슬러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뼈 있는 부분을 팔꿈치로 정확히 가격해서 콧잔등을 주저앉게 만드는 정도가 다였다.
제이드에게 주먹질을 당하면서도 아이슬러는 히죽 웃었다. 네 주먹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제이드가 부러트렸던 콧대는 벌써 원 상태로 돌아왔다.
공허의 뱀이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아이슬러가 뿜어내는 푸른 화염이 뱀의 몸에 옮겨붙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슬러를 공격할수록 공허의 괴물만 피해를 입었다.
제이드는 얼음에 붙들린 발을 잡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사이 푸른 화염이 소용돌이도 집어삼켰다. 제이드를 지키던 방벽은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
잔바람이 연기처럼 서서히 흩어졌다. 제이드와 아이슬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노숙자 몰골을 한 아이슬러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며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발목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이드는 뒷걸음치지도 못한 채 생침을 꿀꺽 삼켰다. 나뭇가지가 손끝에 닿았다. 제이드는 그것을 사선으로 꺾어 원시적인 창을 만들었다. 축축한 식은땀이 맺혀서 손바닥이 미끄덩했다.
만월을 등지고 있는 아이슬러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갓 무덤에서 일어난 흡혈귀가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뱀파이어? 혹시 굴드와 동족인 걸까. 빌어먹을, 심장을 공격하면 놈을 쓰러트릴 확률이 얼마나 되지?’
제이드가 가쁜 숨을 내쉬며 저를 향해 달려드는 아이슬러의 목을 찌를지, 아니면 심장을 찌를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날갯짓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새 같은 것이 공원 상공에 나타났다. 헬리콥터가 지상에 내려올 때처럼 공터를 둘러싼 수풀이 휘청거렸다.
“젠장, 크롤리잖아! 저 망나니 자식도 풀려났단 말이야?”
제이드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하던 아이슬러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도 날갯짓 소리가 나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괜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정신이 아득해졌다. 굴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 그는 어지간한 일엔 놀라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그건 저의 오만이자 착각이었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제이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반인반조였다. 환상동물도감에 등장하는 괴물과는 생김새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인간은 아니었다. 등에 달린 커다란 날개와 피부를 뒤덮은 비늘, 조류의 발톱을 연상케 하는 손가락. 제이드는 이 모든 것이 핼러윈이 불러들인 악몽처럼 느껴졌다.
“아이슬러,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마 네놈도 레오폴트와 한패인 거냐!”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크롤리의 목소리를 들은 제이드는 흠칫 놀랐다. 다시 고개를 들어 크롤리의 얼굴을 살폈다. 비늘이 피부를 뒤덮고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앳된 분위기가 흘렀다. 그뿐만 아니라 날개가 버거워 보일 만큼 체구도 작았다. 잘 쳐 봐야 열다섯쯤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레오폴트와 한패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아이슬러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시끄러워! 네놈이 내 성배 옆에 있다는 게 레오폴트와 한패라는 증거다.”
크롤리가 파르르 주먹을 떨며 악을 썼다. 반인반조 소년은 영역을 침범당한 수컷처럼 눈알을 부라리며 아이슬러를 공격했다. 체구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파괴력이 어마어마했다.
“윽, 젠장!”
날개를 퍼덕이며 달려드는 크롤리에게 아이슬러가 속절없이 밀렸다. 크롤리는 몸놀림이 가벼운데다 날카로운 손톱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반격은 시도도 할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크롤리가 불러 일으키는 돌풍이 아름드리나무를 서걱서걱 베어 냈다. 나무가 쿵쿵 쓰러질 때마다 숲이 뒤흔들렸다. 방어하기에만 급급한 아이슬러의 몸 여기저기에 깊숙한 자상과 생채기가 생겼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거지?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제이드는 눈을 부릅뜨고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나무창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이슬러가 쩔쩔매고 있는 틈을 타 달아나야 했다. 도망치려면 이보다 더 완벽한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발목을 구속하고 있는 얼음 때문에 그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속이 타들어 갔다.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며 아이슬러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자신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반인반조 소년이 아이슬러를 몰아내길 기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 편하게 크롤리를 응원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했다. 크롤리가 제 편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아이슬러의 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반인반조 소년이 제이드를 해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크롤리의 입에서도 ‘내 성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제이드의 입장에서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크롤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해지기 전까지 제이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 빌어먹을 성배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크롤리도 자신을 노리고 있을지 몰랐다. 목에 현상금이 걸린 탈주범도 아니고, 정말이지 거지 같은 상황이었다.
“잠깐만 진정해! 네 성배라니,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야.”
크롤리와 아이슬러가 양손을 맞잡고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근육이 부풀어 오른 두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땅이 깊게 파였다. 계속 수세에 몰리기만 하던 아이슬러가 이번엔 역으로 크롤리를 밀어붙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근력만큼은 그가 우위였다.
“내 눈앞에서 성배를 건드리려고 해 놓고 발뺌할 셈이냐?”
빨강 머리 소년이 깃털을 부풀리며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니까 네 성배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설마, 투명 인간이라고 지껄여 댈 생각이냐.”
아이슬러가 크롤리를 바닥에 쓰러트리며 고함쳤다. 하지만 그가 크롤리의 몸에 올라타 주먹을 날리기 전에 크롤리가 날갯짓을 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저 검은 머리! 네놈이 피를 마시려고 했던 저 남자가 내 성배다.”
먼지투성이가 된 크롤리가 제이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제길.
제이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성배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불안했는데 결국 크롤리도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게 맞았다. 둘 중 누가 성당 지하실에 있던 남자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크롤리와 아이슬러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제단에 바쳐지길 기다리는 염소와 다를 바 없었다. 크롤리와 아이슬러 둘 중 누가 이기든 제이드에겐 절망적인 결과만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발목을 잘라 도망치려 해도 그의 수중엔 날붙이가 없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크롤리. 번지수를 잘못 잡았어. 저 녀석은 내 성배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아이슬러가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라 화도 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번지수를 잘못 잡은 건 네놈이겠지! 성배가 겹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크롤리가 이를 드러내며 마력을 증폭시켰다. 그의 주변에 파지직, 파지직, 하고 전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꺼져라, 아이슬러.”
턱을 쳐든 크롤리가 고압적인 태도로 명령했다. 마지막 경고라도 통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웃기지 마! 어떻게 찾아낸 성배인데, 고분고분 포기할 것 같으냐.”
부아가 치밀었는지 아이슬러도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새파란 화염이 솟구쳤다. 마치 그의 팔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불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어두컴컴하던 숲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푸른 불꽃이 화르르, 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당장에라도 나무에 옮겨붙을 것 같았다.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재격돌했다. 두 사람의 마력이 부딪친 순간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공기가 진동했다. 돌풍에 휩쓸린 부러진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이드는 후드득 날아드는 자갈과 흙먼지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제이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를 북북 갈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마지막 전투가 있던 날, 성당 지하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인생이 꼬였다.
게릴라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가 생각났다. 제이드는 두 괴물이 그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생살여탈권을 타인이 쥐고 있는 것처럼 기분 더러운 일도 없었다.
숲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이드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이 하나 더 나타나는 건가 싶어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빽빽한 어둠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웬 신부님이었다.
“어?”
제이드는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님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인텔리 같은 인상의 신부님도 그를 알아봤는지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전에 편의점에서 포르노 잡지를 당당하게 들춰 보다가 제이드와 눈이 마주쳤던 신부님이었다.
“당신이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제이드 씨!”
망가진 안경을 쓴 신부님이 제이드의 멱살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다그쳤다. 새까만 수단이 펄럭, 펄럭 소리를 내며 바람에 나부꼈다. 단정하게 고정시켰던 잿빛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이었다.
“예?”
제이드가 얼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겨우 두 번째 마주친 신부님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것을 기억하고서 알은척을 하는 거라면 이해가 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통성명을 한 적이 없었다.
“저기, 신부님.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태평하게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었지만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그런 사소한 문제를 설명하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신부님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얼버무렸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발목의 그거, 지금 풀어 드릴 테니까 도망치십시오. 그 사람이 나타나면 몹시 골치 아파질 테니까.”
눈동자도 회색빛인 신부님이 제이드의 시선을 피하며 권총을 꺼냈다. 제이드는 신부님의 품 안에서 십자가가 아닌 콜트 45구경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숨을 흡, 들이마셨다. 포르노 잡지를 들춰 보는 신부님의 탈선을 목격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탕, 탕, 탕!
익숙한 총성이 수차례 귓가를 때렸다. 제이드는 총구에서 불이 번뜩이는 모습을 주시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반적인 콜트 45가 아니라 특수 제작되었거나 커스텀을 거친 제품인 것 같았다.
발을 구속하고 있던 얼음이 산산조각 났다. 제이드는 풀 위로 떨어진 탄피를 흘끗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종교나 컬트 쪽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모양이 꼭 마법진 같았다. 마법진 안에 새겨진 깨알 같은 글씨는 밀폐된 성당 지하실에서 본 글귀와 아주 흡사했다.
“크롤리, 이 멍청아. 그만해. 성배가 도망친다고!”
총성을 들은 아이슬러가 크롤리의 공격을 막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맹수처럼 사나워진 반인반조 소년은 아이슬러의 절박한 외침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흥분할 대로 흥분해서 이성이 마비된 게 분명했다. 오서독스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크롤리는 공격을 멈추기는커녕, 빈틈을 보인 아이슬러를 한층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빌어먹을! 크롤리 이 망나니 자식아! 내 말 안 들려? 성배가 도망친다니까.”
아이슬러가 포효했다. 그의 외침은 숲의 공터를 뒤흔들 만큼 쩌렁쩌렁 울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슬러의 경고는 크롤리뿐만이 아니라 제이드와 신부님의 귀에도 들어갔다.
“젠장, 어서 도망치십시오!”
펠릭스 신부가 욕설을 내뱉으며 제이드의 등을 떠밀었다. 안경 낀 신부는 오서독스들이 제이드에게 달려들 때를 대비해 아이슬러에게 권총을 겨눴다.
“신부님은요!”
제이드가 신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는 신부님에게 도움을 받았다. 비겁하게 신부님을 남겨 놓고 저 혼자만 도망칠 순 없었다.
“난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내 임무가 저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는 거란 말입니다.”
인상이 차가운 신부가 자꾸만 덜렁거리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대꾸했다.
제이드는 뱀파이어란 단어를 곱씹었다. 신부님의 입을 통해 자신을 공격한 자들이 뱀파이어란 사실을 확인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슬러의 정체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울 것 없었다. 제이드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반인반조의 모습을 한 크롤리까지 뱀파이어일 줄은 몰랐다.
제이드가 묘한 기분을 느낀 이유는 굴드 때문이었다. 굴드도 저들과 마찬가지로 뱀파이어였다. 물론 저치들이 굴드와 친구이거나 아는 사이일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도와주겠다거나 함께 싸우겠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펠릭스 신부가 눈동자만 굴려 흘끔 제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당신이 옆에 있으면 더 거치적거린다고 말하는 듯한 말투였다.
“…….”
제이드는 조금 상처 받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놈들은 괴물입니다.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뱀파이어들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신부님의 말이 맞았다. 십여 년간 군인으로 복무하긴 했지만 그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어쭙잖게 나서 봤자 방해만 됐다. 훈련은커녕 총도 잡아 보지 않은 민간인이 전쟁터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뱀파이어들이 노리는 건 제이드였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빌어먹을 성배인지 나발인지기 때문이었다. 제이드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걸 보면 성배는 아마도 뱀파이어들의 만능 영양제쯤 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문제로 열을 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이슬러와 크롤리가 싸우는 동안 그는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신부님을 보조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제이드는 비장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뱀파이어 헌터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큰 성당의 문부터 두드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느닷없이 뱀파이어 이야기를 꺼내면 미친놈 취급받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말이다.
제이드는 공원 출구를 찾기 위해 어둑한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창 전투 중이던 아이슬러가 목격했다.
“좀 떨어지지 못해? 크롤리, 이 거머리 같은 자식!”
아이슬러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투견처럼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크롤리를 떼어 내기 위해 두툼한 두 손을 모아 놈의 머리를 내려쳤다.
“큭.”
해머처럼 묵직한 주먹이 머리를 강타하자 크롤리가 주춤 뒷걸음쳤다. 골이 흔들리는지 ‘으으’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놓칠 것 같으냐.”
간신히 크롤리를 떼어 내는 데 성공한 아이슬러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제이드를 뒤쫓았다. 그는 울창한 나무숲을 통과하는 성배의 등을 주시한 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몇 걸음만 더 내디디면 성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가 불쑥 그의 시야에 뛰어들었다. 성배의 뒷모습을 가린 남자는 어젯밤 레오폴트와 함께 아이슬러를 추격한 교황청의 개였다.
깨진 안경알 너머로 회색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사격 자세를 취한 신부는 침착하게 아이슬러의 이마를 겨눴다.
“어이, 신부님. 그딴 장난감 가지고 날 상대하려면 턱도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아이슬러가 펠릭스를 향해 피식 웃었다. 노숙자 무리를 비집고 돌아다닌 덕분에 그도 이젠 총이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탕!
“큭!”
묵직한 총성이 허공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이슬러를 노렸던 탄환은 목표물을 명중시키지 못하고 애먼 나무에 박혔다. 아이슬러가 펠릭스를 공격하기 전에 크롤리가 한발 먼저 펠릭스의 어깨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아 넣은 것이다.
“크롤리?”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자 아이슬러가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크롤리가 그의 적을 가로채 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퍼덕퍼덕, 날갯짓하는 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크롤리 녀석도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에게 원한이 있는 건지 신부의 길쭉한 몸뚱이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네놈 주인인 레오폴트는 어디 가고 네깟 놈이 날 따라온 거냐. 엉? 오호라, 레오폴트 이 약삭빠른 놈. 날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부하만 보내고 꼬리를 만 게로군! 맞지? 어서 그렇다고 말해.”
반인반조의 모습을 취한 크롤리가 날갯짓 한 번으로 나무 사이를 통과하며 펠릭스를 윽박질렀다. 아이슬러에게 정신이 팔려 뒤늦게 펠릭스를 발견한 그는 타나토스의 대리자가 나타날까 봐 초조해하고 있었다.
“크윽. 내 주인은… 그자가 아니야!”
크롤리의 손톱에 어깨를 꿰뚫린 펠릭스가 허공에서 몸부림을 쳤다. 나뭇가지가 신부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는 자신을 사냥감처럼 움켜쥐고서 비행하는 크롤리를 권총으로 조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야가 정신없이 흔들리는데다가 어깨의 통증이 심해서 좀처럼 총구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크롤리, 너 이 자식 거기 서!”
아이슬러가 무서운 속도로 크롤리를 추격했다. 몸놀림이 사슴 사냥꾼처럼 민첩한 성배가 저 앞에서 숲을 헤치며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크롤리가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으려 하고 있었다. 팔만 뻗으면 손끝이 목덜미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지옥에나 떨어져!”
성배를 쫓아 숲을 저공비행하던 크롤리가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슬러가 그의 날개를 공격하기 위해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을 허공에 결정화하고 있었다.
“이 비겁한 자식, 누가 네놈 따위에게 성배를 빼앗길까 보냐!”
크롤리는 후방이 무방비 상태였다. 격투에 미친 크롤리라 해도 이대로 아이슬러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으면 타격이 컸다. 단일 살상력과 파괴력만큼은 레오폴트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대신, 그는 다른 오서독스에 비해 기본적인 방어 능력이 떨어졌다.
성배의 등이 코앞에 보였다. 하지만 크롤리는 성배를 덮치는 것을 포기하고 이를 갈며 방향을 선회했다. 그는 아이슬러의 공격을 무산시키기 위해 펠릭스를 힘껏 내던질 작정이었다.
탕! 탕-!
“큭… 너 이 자식!”
크롤리가 눈을 부릅뜨고서 날갯짓을 멈췄다. 펠릭스 신부가 쏜 탄환이 그의 심장을 연속해서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목표물을 명중시킨 콜트의 총구에서 흰 연기가 흘러나왔다. 펠릭스 신부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헌터의 공격이 오서독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해도 잠시 주춤할 정도의 충격은 줄 수 있었다.
“제기랄, 네까짓 버러지 놈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격분한 크롤리가 펠릭스를 시커먼 전기 통구이로 만들려던 찰나였다. 아이슬러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종유석 형태의 얼음 창을 산발적으로 투척했다.
“크악!”
복부와 날개에 뾰족한 얼음 결정을 맞은 크롤리가 여기저기 부딪치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아이슬러는 경쟁자가 비참하게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성배가 제 놈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크롤리를 따돌렸으니 동양인 청년의 피를 마시는 것은 이제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만면에 핀 아이슬러의 미소는 얼마 못 가 무너져 내렸다.
“꺼져라, 아이슬러! 성배는 내 것이다.”
복부와 날개에 부상을 입은 크롤리가 광기에 찬 목소리로 포효하며 강력한 전하를 방출한 것이다.
만월이 뜬 밤하늘 아래로 낙뢰가 떨어졌다.
“크윽!”
시퍼런 번개가 아이슬러를 강타했다. 평소 같았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못했다. 경쟁자를 제거했다고 방심한 상태인 데다가 제이드에게 정신이 팔려, 크롤리가 역공을 펼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까맣게 그을린 아이슬러의 몸이 풀밭 위에 철퍼덕 쓰러졌다. 군데군데 구멍이 난 귀마개 모자와 손가락장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가 쓰러진 자리 주변으로 지지직, 지직, 하고 방전된 전기가 떠돌며 사물을 파괴했다.
한편, 날카로운 손톱에 어깨를 붙들렸던 펠릭스 신부는 크롤리의 손아귀를 벗어나 비탈길을 구르고 있었다.
비탈길 표면은 시커먼 흙과 나무뿌리, 암석 일부분이 암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그 위를 데굴데굴 구르느라 신부가 쓰고 있던 안경이 벗겨졌다. 여분의 권총도 옷 밖으로 빠져나와 경사면을 주르륵 미끄러졌다. 하지만 돌부리에 몸을 부딪치는 와중에도 펠릭스 신부는 손에 쥐고 있던 콜트를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신부님!”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가 비탈길을 구르는 소리를 들은 제이드가 뒤를 돌아봤다. 그는 경사면을 내려와 나무뿌리가 부비 트랩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평지를 달리던 중이었다.
제일 먼저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온 것은 신부의 베레타였다. 흙투성이가 된 젊은 신부는 의식을 잃은 건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직 손가락만이 경련을 일으키듯 움찔거렸다.
제길.
제이드는 발걸음을 되돌렸다. 적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차마 혼절한 사람을 버리고 갈 순 없었다. 하물며 신부님은 단순히 기절만 한 게 아니라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검은 수단과 로만 칼라가 진홍색 피로 축축하게 물들 만큼 상처가 깊었다. 서둘러 지혈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군 복무 시절, 제이드가 가장 혐오했던 상관은 부상당한 동료를 버리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린 개자식이었다. 그는 작전 효율성과 시간을 핑계로 손만 뻗으면 구할 수 있는 아군을 버리고 가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부상당한 부하를 들쳐 메고 헬기에 올라타느라 전투 수행 중 명령 불복종으로 영창에 처박힌 일도 있었다.
“신부님, 내 목소리 들립니까?”
잿빛 머리카락의 신부님 앞에 당도한 제이드는 셔츠를 이로 찢었다. 만신창이가 된 신부님을 지혈할 붕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찌이익,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그때 날개 달린 반인반조 소년이 제이드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몸에 박힌 얼음 창을 제 손으로 뽑아낸 뱀파이어는 제이드를 차지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잡았다아아!”
아이슬러를 완벽하게 따돌리는 데 성공한 크롤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제이드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알아? 네 피만 마시면 레오폴트 놈도 이길 수 있어! 네 영혼을 내게 귀속하고 나면 넌덜머리나는 순례도 이제 끝이라고.”
비늘로 뒤덮인 갈퀴 같은 손으로 제이드의 얼굴을 붙잡았다. 놈의 뾰족한 송곳니가 당장에라도 제이드의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큭!”
제이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한쪽 팔로 크롤리를 밀어냈다. 그의 오른쪽 손은 신부님이 떨어트린 권총을 잡으려고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커스텀된 베레타가 간신히 손끝에 닿았다. M9으로 불리기도 하는 권총을 움켜쥐자 익숙한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오래간만에 총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난 일 년의 공백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베라군의 제식 화기인 베레타는 제이드에게 있어서 지긋지긋한 악우 같은 존재였다.
“잘 먹겠습니다! 난 원래 입맛이 싸구려라 다른 녀석들처럼 꼬장꼬장하게 식감이나 맛 따윈 따지지 않거든? 그러니까 내가 네 피를 천천히 음미하지 않더라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진 마.”
크롤리가 제이드를 식탁 위에 오른 생선 대하듯 말하며 입을 쩍 벌렸다.
“이 빌어먹을 괴물 자식아! 사람을 먹을 것 취급하지 말란 말이다.”
제이드가 크롤리의 목구멍 안에 베레타의 총구를 들이밀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 탕, 탕-! 탕, 탕탕!
탄환을 열다섯 발까지 장전할 수 있는 반자동 권총이 쉴 새 없이 불을 뿜었다. 뱀파이어인 크롤리의 재생 속도는 경이적이었지만, 제이드는 놈에게 회복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아악!”
크롤리가 악을 쓰며 피가 흐르는 얼굴을 부여잡았다.
근 열 발을 연사한 제이드는 반동 때문에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마법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진 탄피가 그의 머리맡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제이드가 흐트러진 호흡을 골랐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총을 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크롤리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놈이 쓰러질 리 없었다.
그는 욱신거리는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고서 검게 구멍이 난 크롤리의 복부를 워커 굽으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몸집이 작은 크롤리가 벌러덩 뒤로 자빠졌다. 제이드는 재빨리 일어나 놈의 머리를 군화로 짓밟았다.
아직 탄환이 다섯 발 남아 있었다. 제이드는 두 손으로 권총을 받치고서 조금씩 조직을 재생하고 있는 크롤리의 상처에 남은 총알을 전부 쏟아 부었다. 신부님과 함께 도망칠 시간을 벌려면 놈이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혀 놔야 했다.
방아쇠를 당기자 총성이 다시 한 번 숲에 울려 퍼졌다. 은색 탄피가 돌 위로 떨어지면서 짤그랑 소리를 연달아 냈다.
“크아악! 너 이 새끼!”
반인반조 소년은 인간의 무기로 복부의 상처를 헤집는 제이드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간질 환자처럼 어깨와 등을 들썩거리는 그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혔다. 제이드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굴욕감과 증오심, 그리고 살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크롤리는 사춘기 소년처럼 자존심이 강했다. 오서독스 중에서 레오폴트를 제외하면 가장 강하다고 자신했다. 격투 중에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천하의 크롤리 님께서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남자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끄으으으, 으으.”
크롤리가 신음하는 동안 제이드는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신부님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까맣게 탄 거대한 남자가 경사면에서 비틀비틀 일어나 펠릭스 신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까맣게 죽어 버렸던 피부가 되살아나고 있는 남자는 바로 아이슬러였다. 그는 마치 잘못된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운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제이드에게 달려들거나 크롤리를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놈은 펠릭스 신부가 흘린 피 냄새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제길, 산 넘어 산이군.
제이드는 아이슬러를 경계하며 재빨리 펠릭스 신부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다시 옷을 찢어 상처를 묶은 후 신부님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같은 남자긴 하지만 성직자의 몸을 허락도 받지 않고 뒤진다는 게 조금 죄스러웠다.
그러나 여분의 탄창을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신부님이 손에 쥐고 있는 콜트는 탄창이 비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콜트 45구경은 최대 일곱 발까지만 장전할 수 있는 총이기 때문이었다.
찾았다!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이드가 반색하며 신부님의 품 안에서 탄창을 꺼냈다. 텅 빈 탄창을 빼내는 그의 손놀림이 신속하고 능숙했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권총을 분해 및 재조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초 단위로 재며 누가 더 빠른지 부대 내의 동료와 내기를 하곤 했었다.
탄창을 끼워 넣으려던 순간, 제이드의 등 뒤로 섬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슬라이드만 당기면 되는데 날개 달린 그림자가 제이드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것이다.
깡!
크롤리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권총이 어두컴컴한 숲 저편으로 튕겨져 나갔다.
젠장!
베레타를 주우러 움직일 틈도 없이 반인반조 소년이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윽!”
크롤리는 무방비 상태가 된 제이드의 목을 졸랐다. 소년의 손은 비늘로 덮였을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다랬다.
“크윽, 컥.”
“버러지 주제에!”
크롤리의 이마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분노를 주체하기 힘든지 놈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제이드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컥, 크윽.”
제이드는 크롤리의 손을 떼어 내려 애쓰다가 놈의 복부에 난 상처를 다시 한 번 공격하려고 했다. 제이드가 권총으로 쏜 자리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닭대가리냐, 똑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당하게?”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크롤리가 버럭 고함치며 제이드를 나무가 우거진 북쪽 방향으로 내던졌다.
“어윽!”
나무에 부딪혔다가 튕겨 나온 제이드가 풀밭 위에 엎어졌다. 그의 목 위로 밧줄로 졸린 듯한 검붉은 자국이 생겼다. 팔꿈치로 땅을 짚는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성배라서 특별히 시신만은 온전하게 남겨 줄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인간.”
크롤리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제이드를 노려봤다. 그의 눈동자엔 살기가 맺혀 있었다. 반인반조 소년은 성격이 극단적이었다. 빨리 성배의 피를 마셔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은데 자꾸 일이 꼬이자 눈이 뒤집혔다. 지금 저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두고두고 밤잠을 설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이드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산 채로 팔다리를 하나씩 잡아 뜯어 주마!”
반인반조 소년이 광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손가락을 뾰족하게 세우고서 달려오는 모습이 꼭 지옥을 묘사한 판화에 등장하는 악마 같았다.
“젠장….”
제이드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크롤리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할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이 모든 게 핼러윈 밤의 광기가 불러들인 지독한 악몽이길 바랐다. 자신은 평소처럼 TV를 보다 잠들었고 이곳은 무의식이 만들어 낸 세계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갈비뼈와 발목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통증이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를 다그쳤다. 구름에 반쯤 가려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만월은 쇠 비린내가 날 것 같은 핏빛을 띠고 있었다.
“끈질긴 쥐새끼 같은 놈!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도 이제 끝이다.”
크롤리가 제이드를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놈은 금속보다 단단한 손톱을 휘두르며 제이드에게 돌진했다.
빌어먹을.
숨이 턱까지 차오른 제이드는 무의식적으로 나이프를 찾았다. 위기가 찾아오자 몸에 밴 오래된 습관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곱게 죽어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어떻게든 저 망할 땅꼬마 놈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허리춤을 더듬어도 손에 닿는 게 없었다. 여기는 전장이 아니었고, 제이드 역시 이젠 군인이 아니었다. 평범한 시민이 살상용 나이프 같은 걸 소지하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제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악이군.
제이드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질끈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챙! 끼이이이익-.
그의 코앞에서 날카로운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온 신경을 자극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놀란 제이드가 번쩍 눈을 떴다.
“크윽, 너… 이 개자식!”
크롤리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금속성을 띤 검은 그림자였다. 수탉처럼 머리털이 새빨간 크롤리는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괜찮은 겁니까?”
등 뒤에서 제이드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남자가 물었다.
“어떻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이드는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틀 동안 전화 한 통 없던 굴드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여기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이드를 보호할 목적으로 품에 안은 굴드가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며 크롤리를 주시했다. 굴드의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살기 때문에 제이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굴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큭!”
굴드의 등장으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건 바로 크롤리였다. 반인반조 소년은 정신없이 쇄도하는 검은 그림자의 공격을 튕겨 내며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크롤리의 손톱과 물질화한 그림자가 마찰할 때마다 검은 전기가 지지직, 소리를 내며 방전됐다. 때로는 금속이 갈릴 때나 용접할 때 볼 수 있는 미세한 주홍빛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했다.
“크아악!”
채찍처럼 들이닥치는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하던 크롤리가 비명을 질렀다. 생명체처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를 움켜잡은 순간, 다른 방향에서 날아든 그림자 칼날에 오른손이 썩둑 잘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크롤리는 오른손을 잃자마자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높게 날아올랐다. 굴드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검은 칼날의 공격을 더 이상 막아 낼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빌어먹을!”
성치 않은 날개로 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인반조 소년은 악에 받쳐 울부짖었다. 성배를 제 암컷처럼 품고 있는 타나토스의 대리자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수탉처럼 머리털이 새빨간 크롤리는 호전적인 성격이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보기보다 머리 회전이 빨랐다. 어떤 면에선 계산적이기까지 한 그는 절대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탓에 레오폴트에게 덤벼봤자 승률은 2할 미만에 불과했다. 오른손을 잃었고 아이슬러의 비열한 암습에 당한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다.
뱀파이어 헌터나 팬저 기사단, 혹은 서번트에게 공격을 받았다면 삽시간에 회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크롤리와 동등한 존재인 오서독스에게 당한 상처는 재생이 더뎠다.
빌어먹을 아이슬러 놈은 혼이 나간 얼굴로 신부 주변을 얼쩡거리더니 어느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오폴트가 나타나자마자 잽싸게 튄 게 분명했다. 덩치는 곰 같은 주제에 아이슬러는 은근히 예민하고 섬세했다.
“이게 끝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레오폴트! 내 오른손과 성배를 빼앗은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줄 테니까!”
크롤리가 격렬한 증오심을 내비치며 날갯짓을 했다.
“성배?”
달이 떠오른 밤하늘 저편으로 멀어지는 크롤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굴드가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등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크롤리는 분명 성배를 찾기 위해 지하실을 벗어났다. 그런데 놈은 엉뚱하게도 제이드를 공격하고 있었다.
애초에 제이드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성배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던 아이슬러도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석연치 않은 기분에 휩싸여 있던 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제이드의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묻기 위해 제이드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제이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기색이었다.
“저기, 굴드.”
제이드가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서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으으….”
비탈길 근처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신부님!”
굴드에게 뭔가 말을 하려던 제이드가 흠칫 어깨를 튕기며 비탈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굴드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제이드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풀밭 위에 쓰러져 있는 교황의 개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슬러와 크롤리 둘 중 누구에게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잿빛 머리카락의 신부는 엉망진창으로 구겨져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병원이 어딥니까?”
제이드가 한걸음에 펠릭스 신부 앞으로 달려갔다.
굴드는 펠릭스의 상처를 지혈하는 제이드를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왜 저자를 챙겨야 하는 거냐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교황의 개가 죽든 말든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굴드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는 제이드 한 명뿐이었다. 제이드를 제외한 다른 인간은 가축이나 벌레에 불과했고, 별생각 없이 그들을 죽인다 하더라도 아무런 죄책감이 일지 않았다. 식탁 위를 가로지르는 작은 개미를 무심코 짓눌러 죽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위였다.
“아까 그 이상한 뱀파이어에게 공격당할 때 이분이 날 도와주셨단 말입니다.”
제이드가 펠릭스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신부를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을 본 굴드의 표정이 삽시간에 험악해졌다. 아무리 기절했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제이드와 밀착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이리 주십시오. 내가 병원까지 데리고 가겠습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제이드를 내려다보던 굴드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뒤늦게 인정이 생긴 게 아니라 펠릭스 놈이 제이드에게 달라붙어 있는 꼴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탓이다.
생각해 보니 교황의 개를 살려 둬야 할 이유도 있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서펜타인 공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놈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크롤리, 아이슬러.
숲을 빠져나가는 굴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크롤리가 제이드를 바라보며 성배를 언급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더불어 성배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던 아이슬러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황급히 몸을 내빼긴 했지만 아이슬러도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성자의 관에서 일어나자마자 성배 운운했던 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수상쩍은 음모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벤 굴드는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건방진 루테니아 놈들이 은밀히 반역을 도모하던 때만큼이나 뒤통수가 찜찜했다.
성자의 관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들은 이후로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누군가 준비한 계획에 철저히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제이드까지 이 사건에 휘말리자 그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침착한 얼굴을 하고서 중세 시대에 행해졌던 잔인하고 기괴한 고문들을 떠올렸다. 그는 이 모든 일을 꾸민 배후를 잡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형벌을 내릴 작정이었다.
마녀와 이교도들, 그리고 이단 심문관이 등장하는 오래된 삽화를 들춰 보면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무한하고 독창적인지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을 한낱 하루살이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의 위대한 업적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범인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면 일은 좀 더 수월해졌다. 쉽게 죽어 버릴까 봐 걱정하는 일 없이 고문의 과정을 물릴 때까지 즐길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 갈망하는 불사의 육체가, 범인에겐 축복이 아닌 참혹한 저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