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9/27)

조악한 결계가 덧칠된 현관문이 쿵,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졌다.

실내에는 어둠의 속성을 띤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아벤 굴드는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누군가 급히 짐을 싼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펠릭스 신부가 파수꾼과 함께 아벤 굴드를 뒤따랐다. 탁한 안개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펠릭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팔등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안개도 안개지만 실내가 성당의 지하 무덤처럼 캄캄해서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못질이 되어 있었다.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은테 안경을 낀 신부는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며 온몸을 긴장시켰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걸어 나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남자가 사신처럼 비틀비틀 거실로 걸어 나왔다. 퀭한 눈을 하고서 벽을 짚은 오서독스는 중세 수도회의 수사처럼 밧줄로 허리를 동여맨 수도복을 입고 있었다.

“라스푸틴.”

아벤 굴드가 스카풀라를 입은 남자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발치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벽 위로 부풀어 오르며 붉은 눈을 떴다. 수도사 차림을 한 남자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 낌새였다.

“넌 레오폴트로군….”

뺨이 움푹 들어간 수도사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벤 굴드를 발견한 라스푸틴의 눈동자 위로 증오가 스쳤다. 아예 이성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가 통할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이성이 없는 쪽보다 상황이 더 나빴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가구들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장발의 오서독스가 뿜어내는 기운이 폭발적으로 거세진 탓이었다.

“큭.”

펠릭스가 이를 악물며 지하실을 향해 뛰었다.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파수꾼이 그를 쫓아왔다. 오서독스가 아벤 굴드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그는 성자의 관을 회수해야 했다.

“눈을 뜨자마자 네놈과 만나다니, 주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군.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셨어.”

라스푸틴이 음산하게 웃으며 허리를 폈다. 깐깐한 이단 심문관처럼 생긴 오서독스가 성호를 긋는 모습을 보고 펠릭스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그도 딱히 신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타나토스를 추종하는 배교자와는 경우가 달랐다.

눈빛으로 보나, 하는 짓으로 보나 저 오서독스는 제정신과는 거리가 먼 작자였다. 어젯밤 만난 아이슬러라는 남자는 노숙자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광신도 교주인 양 구는 라스푸틴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펠릭스는 가파른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성자의 관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두 개는 속이 텅 비어 있었다.

봉인이 풀린 관은 무시하고 마지막 하나 남은 성자의 관을 향해 달려갔다. 피로 그린 문장과 글씨가 표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젠장! 봉인이 깨지기 직전이잖아.”

펠릭스는 은은한 빛을 흘리는 성자의 관을 내려다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급박했다.

루테니아 가문의 예언자들이 힘을 불어넣은 봉인진이 무서운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피로 쓴 글씨가 성자의 관에 걸린 봉인 주문으로 스며들어 결계 자체를 파괴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마지막 하나 남은 관을 열고 오서독스가 밖으로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성자의 관이 사라진 이후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루테니아 가문의 봉인 술식에 대해 연구하긴 했다. 하지만 문제는 봉인을 파괴하는 또 다른 피의 문장이었다. 술식이 어떤 원리로 구성되고 작동하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어 눈앞이 깜깜했다.

수많은 마법진과 봉인 술식을 배우고 익혔지만 이 피의 문장은 난생처음 보는 형태였다. 그 어떤 연구서에 기록된 패턴과도 달랐다.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태평하게 피의 문장을 분석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펠릭스는 금이 간 안경 너머로 저주받은 술식을 노려보며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심장이 펄떡대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했다. 성자의 관에 손을 가져가자 파직, 하고 전기가 튀었다.

“큭.”

펠릭스의 손톱이 시뻘건 살을 내보이며 갈라졌다. 깨진 손톱 사이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막막하고 답답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는 파수꾼의 존재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두 마법진이 얼기설기 섞여 있어서 섣부르게 건드렸다간 붕괴가 가속화될지 몰랐다. 성자의 관을 지탱하는 봉인진은 다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펠릭스 신부가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성자의 관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아벤 굴드에 의해 지상으로 소환된 파수꾼은 불길한 냄새를 맡았는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올이 몇 가닥 남지 않은 동아줄처럼 봉인 마법진이 뚝뚝 파괴됐다. 봉인은 간신히 명맥만 남은 상태였다. 여기서 더 침식되면 끝장이었다. 당장에라도 관 뚜껑이 벌컥 열릴 것 같았다.

“빌어먹을!”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펠릭스가 루테니아의 마법진에 힘을 불어넣었다. 손끝에서 태동이 느껴졌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든 시도해 봐야 했다.

“크윽!”

파직, 파지직하며 전기가 튀었다. 피의 문장을 그린 범인이 성자의 관에 저항 마법을 걸어 둔 모양이었다. 펠릭스는 내장을 휘젓는 고통을 참으며 계속 마력을 주입했다. 이미 봉인 해제가 마지막 단계까지 진행된 상황이라 피의 문장을 파괴한다고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다 끊어져 가는 마법진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쪽이 나았다.

펠릭스가 지하에서 성자의 관과 고군분투하는 사이, 1층에선 오서독스의 싸움이 벌어졌다.

“날 좁디좁은 관 속에 처박아 놓고 편하게 잘 지냈나?”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른 수도사가 아벤 굴드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성자의 관에서 풀려난 라스푸틴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폭주하고 있었다. 무차별하게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힘이 이젠 한곳에 집중된 것이었다.

“물론 잘 지냈겠지. 아마 축배도 들었을 거야. 네놈은 악마보다 잔혹한 괴물이니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심연의 밑바닥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네놈은 절대 모를 거다.”

까마귀 같은 목소리로 증오를 토해 내는 라스푸틴의 어깨 위로 핏빛 수증기가 퍼져 나갔다. 수증기가 가구며 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그 자리가 녹아내렸다. 한때 수도사였던 라스푸틴은 수분을 독과 산성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입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네 고통 따위를 내가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아벤 굴드가 싸늘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붉은 눈알이 수백 개 달린 그림자가 굶주린 짐승처럼 솟구쳐 라스푸틴을 덮쳤다. 밤은 짧았다. 그는 라스푸틴이 지껄여 대는 수다를 가만히 들어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이 마귀 같은 놈!”

수도사가 속절없이 그림자에 휩쓸렸다. 시멘트에 파묻힌 것처럼 심연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라스푸틴은 이를 악물며 육신을 기체로 바꿨다. 붉은 눈을 가진 그림자는 연기 형태로 흩어졌다 다시 결집한 수도사를 쫓아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기화한 라스푸틴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달려드는 그림자의 공격을 유연하게 피했다. 언뜻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육신은 미세한 물방울들의 집합이었다.

그림자와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 라스푸틴이 흩뿌린 핏빛 수증기는 천장에 꿈틀꿈틀 응집했다. 구름을 형성한 붉은 수증기는 곧 철골까지 녹이는 강력한 산성비를 실내에 뿌렸다. 마치 스프링클러에서 녹슨 물이 터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1층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핏빛 폭우로 인해 금세 엉망진창이 되었다. 곳곳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사물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옷소매를 녹이는 핏빛 비를 맞으며 아벤 굴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스푸틴의 공격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같은 오서독스라 하더라도 그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었다. 그러나 이기는 것과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류하고 제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육체를 수증기로 바꾸는 라스푸틴의 능력이 그를 성가시게 만들었다. 잡힐 것 같으면서도 간발의 차로 빠져나갔다. 깊은 밤, 윙윙대며 귓가를 맴도는 모기에게 시달리는 느낌과 비슷했다.

아벤 굴드는 산성비 속에서 정면을 노려봤다. 어둡고 차가운 색채를 띤 그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의 팔에 검고 불투명한 마력의 응집체가 휘감겼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새벽이 밝아 오기 전까지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아이슬러를 추적하고 성자의 관을 훔친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하는데 여기서 발목을 잡힐 순 없었다.

아벤 굴드가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의 손에서 피어오른 검은 화염이 안개로 옮겨붙었다. 산성을 띤 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심연에서 생성된 검은 불꽃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크아아아!”

미세한 안개 형태로 정신 사납게 허공을 휘젓고 다니던 라스푸틴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벤 굴드에게 붙잡힌 팔이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중력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검은 불꽃 앞에선 안개로 변화하는 능력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 놔! 크으윽, 으아아!”

아벤 굴드에게 팔을 잡힌 수도사가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오른팔을 제외한 그의 육신은 여전히 안개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불길에 휩싸인 고통은 뇌리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널 성자의 관에서 꺼낸 자가 누군지 알고 있나?”

아벤 굴드가 수도사의 팔을 거칠게 비틀었다.

“크으, 흐흐흐. 궁금한가? 아마도 네놈의 적이겠지. 나에겐 은인이지만 말이야.”

라스푸틴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꾸했다.

아벤 굴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쓸데없이 길게 지껄여 댔지만 라스푸틴의 대답은 결국 ‘모른다’였다. 아이슬러의 선례가 있어서 변변한 정보를 얻지 못할 것이라 예상은 했다. 그렇지만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부러 감추는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고문해서 실토하게 만들면 될 테니까. 그러나 아이슬러와 라스푸틴 둘 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벤 굴드는 자신이 성자의 관을 훔친 배후에게 철저히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적의 목적은 오서독스의 부활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몰랐다. 아이슬러와 라스푸틴을 비롯한 오서독스들은 그저 체스 판의 폰이자 수단에 불과할 뿐이고, 배후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머지않아 심판의 날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널 단죄할 테니 지금 이 순간의 승리를 만끽해라, 레오폴트. 계시가 내려왔다. 신의 힘을 거머쥔 내가 세상을 정화할 것이다. 마귀인 네놈이 발붙일 땅은 이제 없다.”

라스푸틴이 예언자 같은 말투로 떠들어 댔다. 숨을 헐떡거리는 그의 모습은 궁지에 몰린 광신도를 연상시켰다.

“망상 장애가 더 심해졌군.”

알아낼 정보도 없는데 더 이상 놈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심판의 날, 단죄, 선동적인 말투. 라스푸틴은 자신을 메시아라 생각하는 미친놈이었다. 기나긴 순례에 지쳐 정신을 놓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사상이 이상했다.

아벤 굴드는 거대한 구체를 허공에 띄웠다. 성자의 관이 마련되기 전까지 그곳에 놈을 가둬 두기 위해서였다.

“네놈! 내가… 이대로, 끝이….”

수도사 복장을 한 오서독스가 새카맣게 입을 벌린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놈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진흙덩이 같은 구체 속에 파묻혔다.

검은 구체가 라스푸틴을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그 순간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하에서 차가운 기운이 역류해 올라왔다.

아벤 굴드의 얼굴이 굳었다. 방금 성자의 관을 옭매고 있던 봉인이 파괴되는 기척이 느껴졌다. 교황의 개가 오서독스의 부활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탕, 탕!

아벤 굴드가 지하로 내려오는 동안 펠릭스는 관을 열고 나온 오서독스를 향해 총을 발포했다.

“뭐야, 이건.”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배교자가 총을 맞은 부위를 벅벅 긁어 댔다. 총알이 이마를 관통했지만 상처는 삽시간에 아물어 버렸다. 놈의 이마는 멍이 든 것처럼 빨갛게 부어올라 있을 뿐이었다.

“네놈 짓이냐?”

펠릭스와 권총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오서독스의 눈동자에 짜증이 서렸다. 성질 더러운 인상에 앳된 외모를 가진 오서독스는 키까지 작아서, 잘 쳐줘 봤자 열다섯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탕, 탕, 탕!

펠릭스는 저를 노려보는 오서독스에게 계속 총을 쐈다. 키가 작은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탄피가 바닥을 굴렀다.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지하에 가득 울려 퍼졌다.

철컥, 철컥.

“빌어먹을.”

탄환이 다 떨어졌다. 펠릭스는 탄창이 빈 베레타를 내던지고서 콜트를 꺼냈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오서독스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 그만해.”

펠릭스가 계속 총을 쏘자 다혈질로 보이는 남자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독기가 올랐는지 오서독스가 펠릭스에게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검은 파수꾼이 움직였다. 몸집이 거대한 파수꾼은 놈을 들이박았다. 이어서 마수는 벽에 등을 부딪친 오서독스의 팔을 물어뜯었다.

“크윽, 젠장! 이거 레오폴트 자식이 키우는 개잖아.”

덩치 큰 검은 마수에게 팔을 물린 오서독스가 격분했다. 키가 작은 남자는 눈알을 부라리며 마수를 발로 걷어찼다. 지하실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몸집이 큰 마물이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숨을 고르던 펠릭스는 눈을 부릅떴다. 애송이처럼 보이는 외모와 달리 빨간 머리카락의 오서독스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어려 보인다고 해서 방심했던 건 아니지만, 오서독스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오서독스는 씩씩대며 제 손을 거대한 갈퀴처럼 변형시켰다. 놈은 검은 피를 왈칵 쏟아 내며 비틀대는 파수꾼의 머리를 갈퀴로 후려갈겼다. 빨강 머리는 펠릭스가 만난 오서독스 중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성질이 급했다.

거대한 파수꾼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성배는 어디 있지? 성배의 피 냄새로 날 깨웠잖아.”

소년처럼 앳된 얼굴을 가진 오서독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펠릭스는 아랫배에 단단히 힘을 넣으며 놈의 이마를 향해 권총을 겨눴다. 나사가 풀렸는지 안경다리가 헐거웠다. 아무리 오서독스를 상대로 덤볐다고는 하지만 그를 전율하게 만든 파수꾼이 이리 쉽게 당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어이, 또 그 이상한 물건으로 날 맞출 셈이야?”

어디 쏘기만 해 보라고 으르렁대던 오서독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코를 킁킁대며 펠릭스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까 관을 만지다 상처를 입은 손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길, 목말라.”

오서독스가 험상궂은 표정을 풀며 입술을 핥았다.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키 작은 소년은 곧장 성배를 찾으러 움직일지, 아니면 눈앞에 보이는 간식으로 목부터 축일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좋아, 일단 배부터 채우고 생각하자.”

결정을 내린 오서독스가 피를 섭취하기 위해 펠릭스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하다가 어떤 섬뜩한 기척을 느끼고 방향을 꺾었다. 몸집이 작은 오서독스의 몸놀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콰직, 콰지직-.

날카롭게 벼려진 검은 그림자가 벽을 꿰뚫었다. 붉은 글씨가 가득한 벽에 굵직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간발의 차로 아벤 굴드의 공격을 피한 오서독스는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았다. 아벤 굴드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잽싸게 피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대처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는 순교자처럼 벽에 못 박히고 말았을 것이다.

“방금 성배라고 말한 것 같은데, 틀린가, 크롤리?”

아벤 굴드의 묵직한 저음이 계단 쪽에서 들려왔다. 어둠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의 눈동자 위로 음산한 기운이 흘렀다.

아이슬러에 이어 크롤리의 입에서도 성배란 단어가 나왔다. 불쾌한 예감이 아벤 굴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몇 세기 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성배가 동시에 둘이나 나타났다. 제이드까지 포함하면 무려 셋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우연으로 받아들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성배는 어디 있지? 성배의 피 냄새로 날 깨웠잖아.’

‘그 남자가 정말 내 성배인지 아직 확신이 서질 않아.’

두 사람 모두 성자의 관에서 일어나자마자 성배를 찾았다. 제아무리 오서독스라 하더라도 루테니아의 예언이 없으면 성배의 존재를 알아채기 어려웠다. 성배와 같은 공간에 있거나 지척에서 피 냄새를 맡지 않은 이상 성배를 감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답은 하나였다. 누군가 성자의 관에 잠들어 있던 그들에게 장난을 쳤다. 성자의 관을 훔친 자가 아이슬러와 크롤리에게 농간을 부린 게 확실했다. 어쩌면 라스푸틴도 성배라고 생각되는 존재를 찾기 위해 눈을 뜬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몸집이 작은 크롤리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아벤 굴드를 경계했다.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가 성배에 대한 화제를 꺼내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타나토스의 세례를 받은 배교자들에게 있어서 성배에 대한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예민한 주제였다. 특히 오서독스들은 낮은 계급의 배교자들보다 몇 배는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몇 세기 동안 성배를 찾아 헤맨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질문을 하는 건 나다, 크롤리. 성배의 피 냄새를 어떻게 맡은 건지 설명해.”

아벤 굴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다. 그러나 크롤리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흉포한 기운을 흘렸다.

크롤리의 성배라는 자를 만나봐야 했다. 오서독스를 부활시킨 자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 모든 일은 성배와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루테니아의 혈족이 모두 사라졌는데 성배의 출현을 예지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상쩍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

크롤리가 버럭 고함을 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난폭한 기류가 지하실에 휘몰아쳤다. 아벤 굴드가 이맛살을 찌푸렸고 펠릭스는 살갗을 찢는 날카로운 돌풍을 견뎌 내지 못하고 벽에 처박혔다.

크롤리가 방출하는 힘 때문에 천장이 드드드, 흔들렸다. 균열이 간 자리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허름한 주택은 이미 여러 차례 충격을 받은 탓에 폭격을 맞은 건물처럼 폭삭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내가 너보다 먼저 완벽한 존재가 될까 봐 방해하려는 속셈인 거지? 망할 자식, 내가 허튼수작에 넘어갈 것 같아?”

잔뜩 흥분한 크롤리의 몸이 괴수처럼 변했다. 등 뒤로 날개가 돋아났고 비늘이 피부를 뒤덮었다. 공기의 밀도와 압력이 높아져서 실내 곳곳에서 파르스름한 전기가 튀었다.

크롤리는 아벤 굴드의 말을 곡해해서 받아들였다.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반항기 소년만큼이나 사고방식이 단순하고 유치했다. 배교의 잔을 움켜쥠과 동시에 육체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크롤리의 정신도 성장을 멈췄다.

크롤리가 제 몸집보다 큰 날개를 퍼덕였다. 당장에라도 아벤 굴드를 공격할 것처럼 기세가 흉흉했다. 빠른 속도로 천장과 기둥이 붕괴하는 지하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펠릭스가 아벤 굴드의 눈치를 살폈다. 아벤 굴드는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를 걸고서 검은 덩어리 같은 그림자들을 지하실 바닥에 소환했다. 심연에서 불러들인 검은 물체들이 저희끼리 꿀렁꿀렁 한 덩어리로 뭉쳤다. 붉은 눈을 번쩍 뜬 아벤 굴드의 종복은 언뜻 원혼의 집합체처럼 보였다. 놈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로테스크한 생김새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이제 오서독스끼리 격돌할 일만 남았다. 펠릭스는 숨을 죽이며 망가진 안경을 콧잔등 위로 밀어 올렸다.

아벤 굴드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펠릭스는 차갑게 가라앉은 아벤 굴드의 눈동자를 곁눈질했다. 어쩐지 그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아이슬러나 라스푸틴을 상대할 때완 달리, 크롤리와는 싸울 마음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펠릭스가 눈썹을 비틀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타나토스의 대리자에게 달려들 것 같던 크롤리가 돌연 천장을 부수며 날아올랐다. 시멘트 가루와 먼지를 뒤집어쓴 펠릭스는 눈을 부릅떴다. 잠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아벤 굴드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대신 몸을 내빼는 쪽을 선택한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크롤리는 몸집만 작을 뿐 라스푸틴보다 훨씬 강했다.

“저 녀석을 추격해. 곧장 성배에게 달려갈 거다.”

아벤 굴드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명령했다. 마치 크롤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상이라도 한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뻥 뚫린 지붕에서 깃털이 떨어졌다. 펠릭스는 아벤 굴드가 차가운 얼굴로 뭔가 생각하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묘하게 싸울 마음이 없어 보였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아벤 굴드는 계획적으로 크롤리를 자극한 게 분명했다. 단순한데다 다혈질인 크롤리로서는 아벤 굴드가 저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교자에게 성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였다. 성배가 그들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 줄 선악과이자 열쇠이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뿐인 성배가 사라진다면 삶의 목적도 없어졌다. 살아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배교자들은 죽음보다 성배를 잃는 상황을 더 두려워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오서독스에겐 재앙 그 이상의 공포였다.

크롤리의 성배는 이 모든 사건의 배후를 밝혀낼 중요한 단서였다. 그러나 루테니아의 혈족이 사라진 탓에 아벤 굴드가 크롤리의 성배를 찾기란 요원했다. 배교자들은 오직 자신의 성배에게만 반응했다. 오서독스라 하더라도 다른 배교자의 성배를 감지할 방법이 없었다. 아벤 굴드는 크롤리의 성배를 확보하기 위해 붉은 머리카락의 오서독스가 달아나도록 내버려 둔 것이었다.

무턱대고 크롤리를 봉인해 버리면 오서독스를 깨운 자가 누구인지 알아낼 단서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아이슬러는 도주 중이었고 라스푸틴은 아벤 굴드가 뒤틀린 차원에 감금했다. 지금 당장 크롤리를 포획하는 것보다는 성배를 찾게 내버려 두는 쪽이 이득이었다.

“크롤리가 오늘 밤 안에 성배를 찾을 수 있길 빌어 줘야겠군요.”

펠릭스가 소매를 찢어 안경다리를 보수하며 말했다. 밤새도록 크롤리를 추격해야 하는 데다가 안경점도 문을 닫아서 안경다리를 수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까 포획한 오서독스는 성자의 관이 마련되기 전까지 대리자께서 관리하실 생각입니까.”

펠릭스는 뻥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벤 굴드에게 물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공간이라 달을 반쯤 가리고 있는 먹구름이 사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앙교리성 놈들은 지금 어디 있지? 주교좌성당에서 대기 중인가.”

아벤 굴드가 라스푸틴을 집어삼킨 검은 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일단은.”

펠릭스가 매듭을 질끈 동여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는 아까 바닥에 내던졌던 베레타를 회수해 탄창을 갈았다.

오서독스들을 성자의 관에 봉인하는 대신 그냥 죽여 버리면 편할 텐데.

펠릭스는 아벤 굴드를 흘끗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신부가 바라는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오서독스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은 오서독스를 살해하지 않았다. 뭔가 복잡한 문제가 끼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일개 팬저에 불과한 펠릭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럼 지금 넘겨주고 오는 게 낫겠군.”

아벤 굴드가 결정을 내렸다. 일그러진 차원 저편에 오서독스를 장시간 묶어 두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가 억지로 빈틈을 만들어 낸 시공간 자체가 불안정한 속성을 띠고 있는 탓이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라스푸틴이 언제 검은 구체를 찢고 나올지 몰랐다. 불안정한 상태로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인간들에게 맡기는 게 합리적이었다. 꼭 항구적인 봉인이 아니더라도 성자의 관이 마련되기 전까지 버틸 수만 있으면 됐다.

어차피 오서독스를 봉인하는 건 교황청의 몫이었다. 룽기누스의 창을 만드는 기술도, 성자의 관을 만드는 것도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펠릭스가 날갯짓하며 멀어지는 크롤리를 쫓아 움직였고 아벤 굴드는 웨인 시티에 소재한 주교좌성당으로 향했다. 나이가 지긋한 고위 사제들은 아벤 굴드의 등장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성자의 관 때문에 웨인 시티를 방문하긴 했지만 타나토스의 대리자와 직접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장시간의 비행으로 노인들은 반송장 상태였다. 펠릭스의 연락을 받고 성황국에서 부랴부랴 출발한 게 어제 아침이었다. 웨인 시티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노령인 탓에 아직 여독이 가시지 않은 것이다. 개중엔 멀미가 떨어지지 않아 고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들은 서둘러 노구를 이끌고 나와 봉인진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시차 적응이나 피로 따위를 핑계로 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서독스의 지배자인 아벤 굴드 앞에서 앓는 소리를 꺼낼 만큼 정신 나간 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교황청의 고위 사제들이 대성당 지하로 모였다. 그들은 초췌한 표정으로 오서독스를 속박한 검은 구체를 에워쌌다. 돔 형태의 지하실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웅장했다. 노쇠한 주교들에겐 긴 밤이 될 터였다. 봉인진을 설계하는 작업은 육체적으로 고된데다가 술자에게 초인적인 집중력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성황국에서 나온 높으신 분들이 밤을 지새워야 하는 탓에 젊은 신부들과 수녀님도 덩달아 부산스러워졌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복도를 서성거렸다. 벽을 장식한 양초가 녹아내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소란이 대성당을 잠식했다. 성직자들이 봉인을 제어하는 동안 누군가 J. S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하며 어둠을 몰아냈다. 갑작스럽게 진혼의 성소로 선택된 대성당은 밤새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밝아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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