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8/27)

꿈속에서 중위는 폭발로 흔들거리는 성당의 긴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총성과 폭음이 울릴 때마다 복도를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편편이 부서져 내렸다. 성모와 아기의 모습이 담긴 그림 또한 비스듬히 기울어져 흔들거렸다.

사방에 아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지금보다 머리카락이 짧은 제이드는 적군을 피해 폭발로 드러난 비밀 통로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꿈이라서 그런지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보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소용돌이 같은 계단을 끊임없이 내려갔다. 빽빽하게 벽돌 벽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글씨 때문에 소름이 돋았지만 걸음을 늦출 순 없었다. 머리 저 위에서 적군이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적군이 던진 수류탄이 지하 밑바닥에서 터졌다. 폭발의 여파로 제이드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방에서 돌이 튀고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소매로 입을 막고서 기침을 했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제이드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통증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 전투만 끝나면 그는 지긋지긋한 군 생활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절망뿐이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살아서 부대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허억, 허억.’

제이드는 캄캄한 밀실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다 틀렸다. 마지막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 그가 들어온 곳은 죄인을 감금할 때 사용한 듯한 밀실이었다. 퇴로는 무장한 적군이 막고 있었다.

군용 나이프를 고쳐 잡고서 뒤를 돌았다. 그 순간 과거의 영상에 노이즈가 끼면서 기억이 드문드문 끊어졌다.

‘씨발, 저게 뭐야.’

‘대충 죽여 버리고 빨리 나가자. 여기는 어쩐지 재수가 없어.’

‘사, 사령부 나와라. 여기는 31사단… 빌어먹을! 무전이 안 통해!’

‘젠장, 알 게 뭐야, 그냥 쏴.’

‘하, 하느님 맙소사.’

적군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귓가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꿈인데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LSD라도 복용한 느낌이었다. 구세주처럼 벽에 못 박힌 미라의 형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시야가 일그러져서 미라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은빛 창이 구불구불해 보였다.

어렴풋하게 총성이 연달아 들렸다. 제이드는 비틀거렸다. 총에 맞았는지 온몸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총을 맞은 부위에서 꿀럭꿀럭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이상했다. 이 기억이 진짜라면 그는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생환한 그의 몸에 총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엉망으로 뒤엉켰던 영상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제이드는 과거를 보여 주는 꿈속에서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사위가 어두컴컴해서 제대로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다량의 피를 흘리며 지하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등에 닿은 바닥의 감촉이 딱딱했다. 추운 날씨도 아닌데 으슬으슬 떨렸다. 제이드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란스러웠다. 이 정도 출혈이면 즉사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죽지 않고 군 병원에서 눈을 뜰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딱딱한 돌바닥에 드러누운 제이드는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를 위협했던 적군들은 사지가 토막 난 채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전에도 몇 차례 보았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전등이 데굴데굴 구르며 벽에 빛의 흔적을 남겼다. 제이드의 시선도 손전등의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피가 많이 흘러 정신이 혼미했다.

‘나의 성배.’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이 불완전해서 언제부터 그가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겁에 질려 있었다. 어쩌면 저를 성배라고 부른 남자가 적군을 몰살한 것일지도 몰랐다.

전신에 총상을 입은 제이드는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어둠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 기괴한 목소리 주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정체 모를 남자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제이드는 아득바득 이를 갈며 남자를 향해 괴물이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술만 달싹였을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중위는 자신도 적군처럼 처참하게 사지가 찢겨 나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설혹 놈의 손에 살해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곧 죽을 목숨이었다. 적이 발포한 탄환 때문에 몸이 넝마가 되었다. 이젠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가엽게도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군.’

어둠 속에서 제이드의 뺨을 어루만지던 남자가 속삭였다. 잡음이 끼지 않은 정상적인 목소리를 그는 오늘 처음으로 기억해 냈다.

깊게 잠들어 있던 제이드는 흠칫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그는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자신을 까맣게 짓누르고 있는 남자에게 신경이 온통 쏠려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체 모를 남자가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하지 마….

뭘 하지 말라는 건지 저도 알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운 제이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잇새로 조금씩 신음을 흘리는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육체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의 무의식이 남자가 꿈속에서 제게 하려는 행동을 저지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었다.

제발 하지 마.

제이드의 애원은 목구멍 안쪽에서 맴돌기만 할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질 못했다. 새카만 중력에 짓눌려 꼼짝도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손목에서 일었다. 그는 격렬한 거부감을 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몸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 감각이 너무 또렷해서 제가 느끼는 감각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차가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제이드는 단전 부근이 뒤틀리는 통증에 시달렸다. 그는 혈관을 타고 단전으로 모인 이질적인 기운으로 인해 자신의 육체가 재구성되고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출혈이 멈추고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종합병원에서 간호사와 조이가 떠들어 대던 것처럼 세포가 기형적으로 분화하는 것 같았다.

눈앞에 수많은 문자로 이루어진 결계가 어른거렸다. 그 너머에 간교한 뱀과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나무, 뱀이 탐내는 독이 든 선악과가 있었다. 처음 보는 형상들이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섬뜩한 감각이 그를 난도질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매던 제이드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거 놔! 빌어먹을 개자식아. 내 몸에서 떨어지란 말 안 들려?”

옴짝달싹 못하던 제이드가 몸서리를 치며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검은 망령의 형상이 미로 정원에 낀 안개처럼 흩어졌다.

“제이드?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위가 캄캄했다.

제이드는 어둠 속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귓가에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제이드는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 굴드란 사실을 한참 후에야 인식했다.

식은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젖은 제이드는 먹먹한 어둠 속에서 굴드가 붙들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굴드의 입술이 손목에 닿았던 감촉이 아직 피부에 남아 있었다. 꿈인데도 어쩐지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꿈과 현실이 묘하게 겹쳐져서 과거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왜 자고 있는 사람 손목을 깨물고 그래요….”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리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심장이 펄떡거리는 감각이 버거웠다. 어두워서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굴드가 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긴장이 풀렸다.

“많이 놀랐습니까? 일어나라고 장난을 좀 쳤는데, 나 때문에 가위에 눌린 모양이군요.”

굴드가 지친 얼굴로 항의하는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스탠드 불을 켰다. 침대 언저리에 불빛이 들어오자 제이드는 조금 전보다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제집보다는 덜하지만 제법 익숙해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곳은 굴드가 거주하는 너른 지하 공간이었다.

“그냥… 잠꼬대였어요. 좀 이상한 꿈을 꿨거든요.”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치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 건 과거의 기억 때문이지, 가위에 눌린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손목을 깨문 굴드의 장난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가 손목을 깨물지만 않았어도 몸서리를 치며 깨어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원망 탓이었다.

하지만 침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난 굴드가 자신을 더듬거나 성적으로 자극하는 상황은 노상 벌어졌다. 평소에는 아무리 지분거려도 별말이 없다가 갑자기 화를 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꿈자리가 사납지 않았다면 애초에 기분 나쁘게 생각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땀을 흘려서 그런지 목이 심하게 말랐다. 제이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이드가 목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리자 굴드가 찬물을 가져다주었다. 제이드는 사막에서 구원자라도 만난 사람처럼 꿀꺽꿀꺽 냉수를 삼켰다.

미처 마시지 못한 물방울이 하얗고 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실내를 밝히고 있는 스탠드의 주홍빛 조명이 그 광경을 더욱 관능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굴드는 제이드의 하얀 피부에 남은 물줄기의 흔적을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이제 좀 진정이 됐습니까.”

굴드가 빈 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제이드는 어두운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간헐적으로 손끝이 떨렸다. 진정은 됐지만 꿈속에서 느꼈던, 뭔가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들던 섬뜩한 감각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흉물스럽게 말라비틀어진 채로 벽에 못 박힌 미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꿈속에서 본 장면도 아닌데 자꾸만 그 미라가 스스로 은색 창을 뽑아내고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환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런 가정은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제가 망각하고 있던 기억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씻고 나오십시오.”

굴드가 제이드에게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여섯 시 반이었다. 제이드는 꿈의 잔상을 쫓아 버리기 위해 비틀비틀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샤워 부스 안에 수증기가 가득 찼다. 제이드는 비누를 쥐고서 배와 겨드랑이, 가슴 등에 벅벅 비누칠을 했다. 바디 클렌저와 거품을 내는 샤워 타월이 눈앞에 있었지만, 군 재직 시절부터 몸에 익은 습관 때문인지 잘 손이 가지 않았다.

“성배. 그게 도대체 뭘까.”

구석구석 비누를 문지르던 제이드는 손을 멈추고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미라, 적군을 몰살시킨 정체불명의 남자, 그리고 노예 낙인 같은 수상쩍은 문신.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 가지 모두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확실한 연결 고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제이드의 속눈썹을 타고 물방울이 쉴 새 없이 낙하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수돗물을 잠갔다. 귓가를 때리던 물소리가 사라지자 샤워 부스 안이 고요해졌다. 똑, 똑, 하고 샤워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제이드는 복부와 쇄골, 그리고 어깨를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성당 지하실에서 적군에게 총을 맞았던 부위였다. 허벅지도 탄환이 뚫고 지나가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하지만 총상은 현재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도 총을 맞았다는 소리는 군의관에게 듣지 못했다.

잃어버렸던 과거의 파편이 떠오르자 혼란스러웠다. 제 기억이 잘못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성당 지하실에서 자신은 분명 죽어 가고 있었다.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헐떡거리던 순간이 손에 잡힐 듯 선했다. 생명이 빠져나가던 서늘한 감각을 떠올린 제이드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기억이 잘못된 건 절대 아니었다.

제가 어떻게 살아난 건지 궁금했다. 혹시 손목에 낙인을 찍은 자가 기이한 힘을 사용해서 자신을 살려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몇 달 전에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면 그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자신이 세운 가설을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굴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제이드는 가치관이 바뀌었다. 비현실적인 현상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둘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성당 지하실에서 들러붙은 형체 없는 망령에 이리저리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제이드는 수증기가 자욱한 샤워 부스 안에 서서 자신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가 늘 차고 다니는 시계는 스탠드 아래 풀어 두었다. 예전이었다면 타인 앞에서 시계를 푸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굴드에게 손목의 문신을 보여 준 이후로, 제이드는 굴드 앞에서만큼은 필사적으로 문신을 가리려 하지 않았다. 혼자 집에 있을 때처럼 시계를 풀고 잠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고약한 주술에서 해방된 것처럼 홀가분했다.

더구나 제이드는 예전처럼 뱀 문신이 끔찍하고 꺼림칙하지만은 않았다. 어젯밤, 수상쩍은 안개가 쫓아왔을 때 손목에 휘감긴 문신이 그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복잡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 낙인이 못마땅하긴 했다. 그렇지만 뱀 문신이 불행을 불러오거나 그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제이드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다가 불투명한 샤워 부스 문을 열었다. 그가 발걸음을 내딛자 안에 고여 있던 수증기가 함께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굴드에게 제가 겪은 일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굴드는 문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혼자서 끙끙 앓는 것보단 저보다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이에게 지식을 구하는 쪽이 백번 나았다.

샤워 부스 밖으로 나가자 온도 차이 때문에 팔뚝에 닭살이 일었다. 서둘러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새 속옷을 꿰입었다. 하도 자주 드나든 탓에 굴드의 아파트에는 칫솔은 물론이고 그가 갈아입을 속옷이며 셔츠 등이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제이드가 가져다 둔 것도 몇 개 있었지만 대부분은 굴드가 사다 정리해 놓은 물품들이었다. 열쇠만 주고받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기실 동거 상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제이드는 욕실 러그 위에 서서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대충 털었다. 욕실 바닥 재질이 대리석이라 러그를 벗어나면 발바닥이 시렸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불쑥 문신이 휘감긴 오른쪽 손목에 시선을 던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문신에서 풍기는 기운이 달라진 느낌이 든 탓이었다.

착각이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수건을 목에 걸쳤다. 문신의 형태는 어제 보았던 형태 그대로였다. 고대 벽화가 색이 바랜 것처럼 윤곽이 흐릿해진 것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문신이 주는 느낌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 건 단순한 기분 탓인 게 분명했다. 밤새 그를 괴롭힌 과거의 기억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반숙과 완숙 중에서 어떤 게 좋습니까.”

뺨이 발그족족해져서 나오는 제이드에게 굴드가 물었다.

“반숙이요.”

제이드는 두 번 고민할 것 없이 바로 대꾸했다. 굴드는 피식 웃으며 저를 향해 다가오는 제이드의 오른쪽 손목에 시선을 던졌다.

그는 오늘 아침, 제이드가 잠들어 있는 동안 원래 있던 낙인 위에 새로운 주술을 덧씌웠다. 정신을 통제하는 힘은 통하지 않았지만, 보호의 인장은 제이드의 육체가 거부하는 일 없이 받아들여졌다.

굴드가 주술을 덮어씌운 이유는 유예가 다 되어감에 따라 힘없이 바래 가고 있는 문신을 보강하기 위함이었다. 노파심이기는 하지만 ‘놈’이 세상으로 나왔는데 제이드를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번 낙인은 최초의 것과 달리, 제이드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문신을 남긴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제이드의 눈에만 문신이 보이도록 새긴 이유는 기억이 지워진 상태에서도 자신의 소유라는 사실을 잊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젠 일부러 표식을 보이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굴드는 제이드의 오른쪽 손목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어젯밤 결정한 사안을 통보했다.

“…네?”

제이드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굴드를 바라봤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왜? 라는 물음이 목구멍을 맴돌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습니다, 제이드. 그냥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생긴 것뿐이니까요.”

굴드가 피식 웃으며 뻣뻣하게 얼어붙은 제이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헤어지자는 이야기인 줄 알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던 제이드는 동요를 가라앉히는 데 꽤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문신에 대해 굴드에게 물어보려 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저기, 혹시 공연 준비에 들어가는 건가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스무 번째 실연을 당할까 봐 긴장했던 탓에 무릎이 후들거렸다. 제이드는 주저앉듯이 의자에 풀썩 엉덩이를 붙였다.

한동안 보지 못할 거라는 소리는 이번 핼러윈을 같이 보낼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크게 실망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핼러윈이니 하는 번잡스러운 행사에 딱히 흥미가 없었다. 민간인으로서 처음 맞이하는 핼러윈을 굴드와 함께 보내지 못하게 된 게 전혀 아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뇨.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입니다.”

굴드가 고개를 저었다.

“가능한 빨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건처럼 성가신 부탁을 받을 일은 앞으로 없을 테니까요.”

급하게 타인이 저지른 일의 뒷수습을 하게 됐는지 굴드의 눈빛에 잠시 짜증이 스쳤다. 그러나 그 성가신 부탁이 무엇인지는 제이드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굴드가 여전히 선을 긋는 것 같아 제이드는 조금 섭섭했다.

“어제 가져왔던 호박 파이는 뭐가 잘못된 건지 상해 있더군요.”

굴드는 아침을 준비하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상했다고요?”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패류도 아니고 파이가 하룻밤 사이에 상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소피가 만든 호박 파이는 굴드가 분명 냉장고에 넣어 놨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굴드가 태연한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그는 유감스럽지만 냄새가 심해서 호박 파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벌써 쓰레기를 내다 버렸는지 호박 파이는 주방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밤사이 냉장고에 문제가 생긴 건가?

제이드는 시무룩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피가 기껏 만들어 준 호박 파이를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굴드가 버리지만 않았다면 상해도 꾸역꾸역 먹었을 텐데, 안타까웠다.

물론 굴드는 못마땅해하겠지만 쉰 호박 파이 정도로 탈이 날 리 없었다. 고아원 생활과 군 복무를 거친 덕분에 철벽에 가까운 위와 장을 가지게 된 그는 유통기한이 열흘쯤 지나서 요구르트화 된 우유나 살짝 곰팡이가 핀 베이컨을 먹어도 멀쩡했다.

“또 제대로 씻지 않았군요.”

굴드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제이드에게 손을 뻗었다. 말랑말랑한 제이드의 귓등에 비누 거품이 남아 있었다.

“거울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제이드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그는 굴드의 손이 귀에서 떨어지자 수건으로 얼굴 이곳저곳을 벅벅 문질렀다. 어쩐지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한 철없는 어린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쎄요, 거울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만.”

굴드가 코웃음을 치며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랐다. 토스트 기계가 달칵, 하며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을 토해 냈다.

“욱.”

갑자기 속이 메슥거려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어, 아니에요.”

미간을 모으고 있던 제이드가 표정을 폈다. 구운 식빵 냄새 때문에 잠시 속이 울렁거리긴 했지만 이젠 괜찮았다.

“밥 먹을 때라서 위액이 활발하게 분비됐나 봐요.”

제이드는 위 부근을 문지르며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그는 메스꺼움을 느낀 이유가 허기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런 거였습니까.”

굴드가 피식 웃으며 버터로 볶은 브로콜리와 당근을 접시에 담았다. 제이드가 요새 유난히 식욕이 왕성하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제이드가 속이 쓰리다고 착각한 현상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

아침 식사를 하고서 굴드의 집에서 나온 제이드는 공중전화로 바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은 경황이 없어서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바니가 저지른 행동은 제이드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의뢰를 부탁한 고객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은 있었다. 제이드에게는 바니의 경우 없는 행동들을 받아 줄 의무가 없었다.

뚜르르, 뚜르르.

한참 동안 수화기 너머로 발신음만 들렸다. 제이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바니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새벽 늦게 귀가해서 깊게 잠들었거나 둘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밤에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생활이 불규칙했다. 억지로 깨운다고 해도 비몽사몽 할 테니까 차라리 오후쯤에 다시 전화를 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응? 잠깐만. 왜 동전이 안 나오는 거지?”

제이드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서 동전 반환 레버를 몇 번이고 눌렀다. 하지만 덜컥, 덜컥, 하는 허망한 소리만 들릴 뿐 공중전화는 동전을 뱉어 내지 않았다.

“제길.”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강탈당한 제이드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마음 같아선 동전을 뱉어 낼 때까지 공중전화를 마구 흔들고 싶지만 참았다. 경찰이 길 건너편에 경찰차를 세워 두고서 우물우물 도넛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이드는 시 소유의 공공재를 파손하는 대신 선량하고 아량 넓은 모범 시민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오늘도 일진이 꼬일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제이드는 애꿎은 돌을 차며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거리의 가로수들이 알록달록하게 단풍이 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광경이 제법 장관이었다.

모처럼 본업인 가구 제작 일이 몇 건 들어와서 제이드는 교외의 목공소로 향했다. 하나는 고양이가 놀 커다란 캣타워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래된 서랍장을 리폼해 달라는 의뢰였다.

친분이 있는 목공소에서 목재를 구매하고, 고객이 요구한 사이즈로 재단한 제이드는 사장님에게 트럭을 빌려 그것들을 직접 실어 날랐다. 가구 제작 의뢰는 잘 들어오지 않지만 중고로 1톤짜리 트럭을 하나 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월세 내기도 바쁜 처지라 말 그대로 욕심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쪼들리는 주머니를 생각하니 괜히 또 복권이 사 보고 싶어졌다. 어차피 안 될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복권 당첨금으로 뭘 할까, 하고 공상을 한 적은 몇 번 있었다. 굴드를 만나기 전에는 미래에 결혼할 부인과 아이들이 함께 살 주택을 가장 먼저 구입하려고 했었다. 물론 지금은 여러 가지 의미로 그 꿈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주택을 산 다음엔 공방을 차리고 싶었다. 그는 원목으로 만든 놀이터를 저렴한 가격에 맞춤 제작으로 공급하는 게 꿈이었다. 특히 고아원에, 무상으로.

어렸을 때 지냈던 허름한 고아원이 비좁은데다 시설이 변변치 않아서 그는 친구들과 툭하면 공사장에서 놀곤 했다. 그러다 다친 적도 부지기수였다. 공사장 자재가 널린 공터는 어린아이들이 장난을 치기엔 위험한 공간이었다. 신나게 놀기엔 좋지만 사고가 나기 쉬웠다.

더 큰 포부가 있다면 그가 만든 맞춤 놀이터가 정식 상품으로 자리매김해서 유명해지는 거였다. 전문 잡지에서 기자가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찾아오는 유치한 상상도 왕왕 했는데, 그때마다 너무 낯간지러워서 킬킬 웃음이 나왔다.

점심은 일이 바빠서 식빵 몇 조각과 콜라로 때웠다. 사실은 일이 바쁜 것도 있었지만, 힘든 작업을 하는데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해치운 것은 속이 썩 좋지 않은 탓이 더 컸다.

목공소 아저씨가 인부들과 함께 피자를 먹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같이 먹자는 주인아저씨의 제안도 머쓱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평소 같았다면 냉큼 끼어들었겠지만, 오늘은 피자를 먹으면 왠지 체할 것 같았다.

후각도 예민해져서 누군가 몇 걸음 뒤에서 햄버거를 먹어도 쇠고기 패티 냄새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제이드는 당혹스러웠다. 힘쓰는 일을 해서 배는 무지 고픈데 입맛이 뚝 떨어져서 아무것도 먹기가 싫었다. 평생 편식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치킨 샐러드 앞에서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그는 식빵을 깨작거리는 걸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반나절 내내 목공소에서 톱밥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온 제이드는 샤워를 한 후 바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가 떨어진 시간이었지만 이번에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시 외출을 한 건지, 며칠 친구네 집에서 머물 작정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타이밍을 계속 잘못 맞추고 있는 듯했다.

제이드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대신 소피가 사는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어제 음식을 챙겨 줘서 감사했다는 인사도 하고 쓰러졌던 소피의 상태도 물어볼 겸해서 전화를 건 것이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간병인 아주머니였다.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소피의 상태는 악화되거나 하진 않은 듯했다. 다만 어젯밤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소피는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벌어졌던 사건이나 대화 등은 다음 날이면 깨끗이 잊어버렸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소피를 바꿔 줬다. 어제 제이드가 들렀다는 이야기를 로사에게 들었는지 그녀가 우아하고 밝은 목소리로 호박 파이는 잘 먹었냐는 질문을 던졌다.

제이드는 가슴이 뜨끔했다. 제가 버린 건 아니지만 소피가 애써 만든 호박 파이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기 때문이었다. 죄책감이 인 제이드는 호박 파이를 먹었다고 거짓말하는 대신, 다른 요리들을 칭찬하며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소피는 호박 파이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숨 돌린 제이드는 소피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서 통화를 끝냈다. 갑자기 공허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분명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까지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정적이 싫어서 TV를 틀어 놨다. 제이드는 저녁을 먹기 위해 소피와 간병인 아주머니가 만들어 준 요리들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그런데 반찬 통 뚜껑을 열자 또 속이 메슥메슥했다. 제이드는 다급하게 입을 가렸다. 아까 점심때 먹었던 빵과 콜라가 되넘어 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뭐야, 왜 이러지?’

제이드는 당황한 얼굴을 하고서 얼른 반찬 통 뚜껑을 닫았다. 냄새가 사라지자 구역질 날 듯 울렁거리던 속도 가라앉았다. 아까 낮에도 속이 안 좋더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단단히 체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배 속에 블랙홀이 생긴 것처럼 식욕이 넘쳤다. 그런데 오늘은 과식은커녕, 뭘 좀 입에 대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제이드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하고 한숨을 내쉬며 반찬 통을 냉장고에 도로 집어넣었다.

저녁도 빵 몇 조각으로 부실하게 해결했다. 제이드는 소파 위에서 빈둥거리다 밀린 청소를 시작했다. 왁자그르르한 쇼 프로의 소음이 무의미하게 귓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때르릉, 때르릉.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서 양말을 빠는데 전화가 울렸다. 제이드는 ‘혹시?’라고 생각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둥지둥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오느라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그는 TV를 끄고서 거품이 잔뜩 묻은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제이드, 우리 집에 놀러 와라. 내가 밥 살게.

굴드의 전화가 아닐까, 내심 기대하고 있던 제이드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해리였다. 제이드는 기운이 빠진 얼굴을 하고서 비누 거품 묻은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질렀다.

“또 핼러윈 의상 골라 달라고 하는 거면 안 가.”

제이드는 해리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뭔지 훤히 짐작이 가서 냉담하게 거절했다. 바로 내일이 핼러윈이었다. 파티에 목숨을 거는 해리의 성격이라면 아직도 핼러윈 코스튬을 정하지 못했을 것이 빤했다.

- 쳇, 치사하게.

밥으로 제이드를 꼬셔 보려고 했던 해리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제이드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해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입을 툭 내밀고 있는 것을 훤히 알 수 있었다.

-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코스튬 좀 골라 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쇼핑처럼 피곤한 일도 아니잖아. 내가 맛있는 거 사 준다니까?

“끊는다.”

어렵지 않기는 개뿔. 제이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쇼핑을 나선 해리를 따라다니는 것보다 육체적으로는 덜 힘들겠지만 정신력이 소모되는 건 똑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제이드는 이미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 잠깐만! 코스튬 안 골라 줘도 되니까 일단 와. 혼자 밥 먹기 싫단 말이야.

해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전화를 끊지 말라고 말하는 해리의 목소리에 필사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제이드와 달리 혼자 밥을 먹지 못했다. 밖이든 집이든 혼자서 밥을 먹을 바에는 아예 굶어 버리는 타입이었다.

제이드는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손빨래를 하느라 접어 올렸던 바지 밑단을 내렸다. 저녁 식사는 했지만 혼자 있기 무료했다. 기분 전환 겸 해리네 집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제이드는 재킷을 챙겨 입고서 거리로 나왔다. 부엉이가 점잖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잎사귀가 얼마 남지 않은 나뭇가지 위로 만월이 가까워진 달이 보였다. 내일이 핼러윈이라 부쩍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올해는 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제이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영 실없는 생각이라고 단정 짓긴 어려웠다. 뱀파이어도 실재하는데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가 존재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제이드는 나중에 혹시 늑대 인간이나 마녀도 존재하는 거냐고 굴드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이드를 태운 버스가 환락가 앞을 지나갔다.

헐벗은 차림을 한 남녀들이 차에 탄 손님과 흥정을 벌였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건너, 건너 아는 동료가 납치되어도 남창과 매춘부들은 매일 밤 어김없이 지저분한 거리로 장사를 하러 나왔다.

밑바닥 인생은 차고 넘쳤다. 누군가 하나 사라져도 그게 누구인지 알아채기 어려웠고, 다른 이가 빈자리를 금방 대신하는 게 저 바닥의 생리였다.

제이드는 버스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리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해리의 집은 난장판이었다. 사방에 옷이 널려 있었다. 코스튬을 고르고 고르다 자포자기했는지 해리는 옷더미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어이, 맛있는 거 사 준다며.”

제이드는 쯧쯧 혀를 차며 옆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친구에게 다가갔다. 진짜 밥을 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장 일어나란 뜻이었다.

“네가 배달되는 걸로 시켜 줘. 훌쩍, 판다 익스프레스나 피자, 둘 중에 아무거나 상관없어. 콜라는 펩시로 주문하는 거, 훌쩍, 잊지 마.”

금발 머리를 가진 해리가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무선전화기를 내밀었다.

코를 훌쩍거리는 해리의 뺨 위에는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코스튬을 갈아입어 보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기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명 제이드와 통화를 끝낸 직후에 속상한 일이 벌어졌고, 청승맞게 엎어져서 지금까지 질질 짜고 있다가 간신히 울음을 멈춘 분위기였다.

“또 숀하고 싸운 거냐?”

제이드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해리에게 휴지를 건넸다. 배달 음식을 주문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크~~응, 팽! 숀이… 꼴도 보기 싫다고 이제 연락하지 말래. 내일 축제 행사장까지 차 태워 줄 사람도 따로 구했나 봐.”

휴지로 코를 길게 푼 해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지 그는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해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요샌 둘이서 곧잘 지내는 것 같더니 숀이 제 버릇 개 못 주고 또 딴 남자에게 한눈을 팔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같이 핼러윈 파티를 가기로 한 전날에 헤어지자고 통보하다니, 심보가 고약했다.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

그는 티슈를 몇 장 더 뽑아 해리에게 내밀었다. 기분이 착잡했다. 도대체 왜 그딴 쓰레기 같은 자식에게 목을 매는 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겉모습만 예쁘장하지 숀 테일러는 엉덩이가 비둘기 깃털처럼 가벼운 데다가 인성까지 글러 먹은 녀석이었다.

제이드는 침울해하는 해리를 데리고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단골 멤버인 그렉, 세르게이, 톰슨 씨, 올리비아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여자 친구가 생긴 벤은 오늘도 데이트 중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래간만이네.”

“요새 좀 바빴어요.”

턱수염이 복슬복슬한 톰슨 씨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제이드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톰슨 씨의 말대로 그는 한동안 술집에 발길이 뜸했다.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굴드와 함께 보내느라 혼자서 술을 마시러 올 일이 줄어들었던 탓이다.

“어이, 해리. 무슨 일 있어? 눈이 말도 못하게 퉁퉁 부었는데.”

우중충한 낯빛을 한 해리를 발견한 세르게이가 병맥주를 입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M자형 탈모가 진행 중인 그렉도 스도쿠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해리를 바라봤다. 해리는 이곳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다들 제이드를 통해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딱 보면 모르겠어? 실연당한 거잖아. 동지가 생겼구나, 벤.”

본래 나이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올리비아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술집 가수인 그녀는 나태한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해리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은 감정사처럼 날카로웠다.

벤? 벤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올리비아는 마치 술집 안에 벤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무리 실내를 둘러봐도 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엎어져 있는 게 벤이야.”

그렉이 검고 칙칙한 물체를 가리켰다. 제이드는 그렉이 볼펜으로 가리킨 방향 끝을 바라보고서도 한참 동안 벤을 찾지 못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잠깐만, 저게… 벤이야?”

간신히 가게 구석에 엎어져 있는 벤을 발견했다. 손님들이 벗어 놓은 옷더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등을 웅크린 벤은 어둡고 부정적인 오라를 잔뜩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술주정뱅이처럼 테이블에 엎드린 채 술을 홀짝거렸다. 간헐적으로 어깨가 들썩이는 건 그가 숨죽여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리의 등장으로 술집의 분위기가 몇 배는 더 우중충해졌다. 성인 남자 둘이 죽을상을 하고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데 밝고 건강한 분위기가 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실연이라는 공통분모를 껴안은 벤과 해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잔을 부딪쳤다.

“덤 앤 더머끼리 모여서 잘들 한다. 처음부터 그 여잔 너랑 한번 놀아 보려고 접근한 거야.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그리고 너. 페라가모 구두를 안 사 줘서 딴 남자랑 여행을 가 버렸다고? 미련 떨지 말고 깨끗이 헤어져. 걘 널 물주로 보고 있는 거니까.”

올리비아는 둘이서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심드렁하게 독설을 내뱉었다. 벤과 해리는 상처 받은 얼굴로 서로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어떻게 저렇게 심한 말을!’이라고 외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해리나 벤이나, 올리비아의 발언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기에 눌린 그들은 감히 겉으로 불만을 표출할 수가 없었다.

제이드와 해리가 압생트에 들어온 이후로, 손님이 두세 팀 정도 더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가게에 들어온 무리는 안주로 블루치즈와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헤헤헤, 제이드으으- 놰가 마리야아, 쇼늘 무지무지 조아하는데 이제 포기하까 봐. 여락도 자 안 바꼬! 투카면 바람이고! 나도 지쳐쒀!”

거침없이 술을 마셔 댄 해리는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만취 상태가 됐다.

“이해해. 다른 사라믄 모롸도! 놔는! 돠아~ 이해하 수 이써!”

벤도 혀가 꼬일 대로 꼬여서 발음이 불분명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주변 사람들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두 사람끼리는 대화가 통하는 모양이었다. 둘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꺼낼 때마다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저 녀석들 슬슬 위험한데.”

세르게이가 팔꿈치로 제이드를 쿡쿡 찔렀다. 병맥주를 반병쯤 비운 제이드는 해리의 상태를 흘끗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벤과 해리 두 녀석 모두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다. 여기서 더 술을 먹도록 내버려 뒀다간 뒷감당이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특히 해리는 술버릇이 좋지 않아서 옷을 모두 벗어젖히는 소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주문하신 블루치즈와 감자튀김 나왔습니다.”

해리와 벤을 각자의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찰나였다. 등 뒤에서 감자튀김의 기름 냄새와 블루치즈 특유의 고약한 악취가 코 속으로 한꺼번에 끼쳐 들었다.

제이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음식 냄새를 맡자 느닷없이 또 속이 메스꺼워진 것이다.

“웁!”

숨을 꾹 참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침에 토스트 냄새를 맡았을 때, 그리고 목공소에서 햄버거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을 때보다 강도가 심했다. 당장에라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위기에 빠진 제이드는 입을 틀어막고서 가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제이드?”

세르게이와 그렉, 톰슨 씨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제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스터와 올리비아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술이 꼭지까지 취해서 해롱거리는 벤과 해리,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우욱, 욱!”

제이드는 변기 커버를 열고서 헛구역질을 했다. 침이 길게 늘어졌다. 아까 맡았던 블루치즈와 감자튀김 냄새를 떠올리자 또 격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먹은 게 변변치 않아서 나오는 거라고는 몇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맥주와 시큼한 위액뿐이었다.

“어이, 괜찮아?”

제이드와 가깝게 지내는 단골손님들이 화장실로 몰려들었다. 세르게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약간의 결벽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렉은 변기에 대고 헛구역질하는 제이드의 등을 두드려 줬다. 카운터를 떠날 수 없는 마스터는 가게 서랍에 구비하고 있던 위장약을 조용히 꺼냈다.

“어… 이제 괜찮아.”

안색이 파리해진 제이드가 변기 물을 내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나 수돗물로 입을 헹궜다. 하도 헛구역질을 해 댔더니 위가 거꾸로 뒤집힌 것처럼 괴로웠다.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생긴 거야? 맥주도 얼마 안 마셨잖아.”

톰슨 씨가 곰 앞발 같은 손으로 냉수를 내밀며 말했다. 톰슨의 기준에선 맥주는 술이 아니었다. 맥주를 음료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건 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들기 전에 TV를 보면서 맥주 한두 캔씩은 곧잘 따 먹곤 했다.

“잘 모르겠어요. 기름 냄새랑 블루치즈 냄새를 맡았는데 그게 역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제이드는 물을 마시다 말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점막에 상처가 생겼는지 물을 넘길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감자튀김 기름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

톰슨 씨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블루치즈야 원래 냄새가 고약하니까 그렇다 쳐도, 어떻게 감자튀김 냄새가 기분 나쁘게 느껴질 수 있냐고 따지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제이드도 지금 이 상황이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평소 같았다면 그도 감자튀김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군침을 삼켰을 것이다. 제이드는 자신이 기름 냄새에 속이 메슥거리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침부터 조짐이 이상하긴 했지만 헛구역질까지 하게 되다니, 정말 당혹스러웠다.

“첫째 딸 임신했을 때가 생각나네. 입덧 때문에 엄청 고생했는데.”

톰슨과 제이드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하던 올리비아가 턱을 괴고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감자튀김 냄새에 고역스러워하는 제이드의 모습을 보고 제 과거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잠깐만, 올리비아한테 애가 있었어?”

맥주를 마시던 톰슨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마스터를 바라봤다. 올리비아에게 딸이 있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뭘 그리 놀라? 첫째가 열셋이고, 둘째 딸이 다섯 살이야. 둘 다 날 닮아서 미인이지.”

올리비아가 흥, 하고 코를 울리며 풍성한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 넘겼다. 톰슨은 충격을 받았는지 마스터에게 급하게 술을 한 잔 더 주문했다.

벤과 해리는 그새 의식을 잃었는지 소파 자리에 사이좋게 구겨져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았다. 세르게이는 짐을 실어 나르듯 고주망태가 된 해리와 벤을 골목에 세워 둔 사륜구동 차에 던져 넣었다.

“병원에 가 보는 게 어때. 위염이거나 위궤양의 초기 증상일 수도 있어.”

세르게이가 고주망태가 된 벤을 업으며 제이드에게 충고했다. 제이드의 어깨를 턱 붙잡는 그의 눈빛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요즘은 젊은 나이라고 방심하면 안 돼.”

그렉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각종 건강 보조제와 탈모에 좋다는 비타민을 소지하고 다니는 그는 내시경 검사를 추천했다.

말수 적은 마스터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기에 바로 병원에 가지 않고 미적거리면 큰 병을 불러오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 그런가?”

다들 짠 것처럼 한목소리를 내자 제이드는 덜컥 겁이 났다. 워낙 건강 체질이라 약국에서 위장약을 사 먹을 생각만 했지 병원을 떠올리진 못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일 당장 병원에 가 봐야겠다는 경각심이 생겼다. 요새 이유도 없이 살도 빠지고, 배앓이도 종종 했다는 사실까지 한꺼번에 떠올라서 제이드는 더 불안해졌다.

세르게이가 벤과 해리를 동시에 수거해 간 덕분에 제이드는 술주정뱅이와 씨름하는 일 없이 곧바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아파트로 들어온 제이드는 가장 먼저 자동 응답기부터 확인했다. 혹시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굴드에게서 전화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녹음된 메시지는 ‘0’ 건이었다. 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토악질을 하느라 지쳐 있었는데 자동 응답기를 확인하고 나니 한층 더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바쁠 거라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제이드는 아직도 쓰라린 위를 문지르며 벌러덩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웠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굴드에게서 전화가 와야 하는데 덩그러니 혼자 있으려니 낯설었다. 제이드는 굴드의 집에서 하루 묵고 올 때를 제외하곤 늘 잠들기 전까지 그와 통화를 했었다.

굴드가 부탁받았다는 일이 도대체 뭘까.

자기 전에 양치를 빼먹은 것처럼 허전한 기분을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극단이나 극장에 관계된 일은 분명 아니었다. 연극에 관한 일이었다면 굳이 숨기지 않고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따로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이드는 굴드가 무슨 일 때문에 바빠진 건지 간략하게라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섭섭함을 느꼈다. 굴드 앞에선 그런 감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혹시 성황국 신부님들과 힘을 합쳐서 악령들이라도 퇴치하러 돌아다니는 걸까.

제이드는 팔짱을 낀 채로 뒤척거리다가 불쑥 그런 생각을 했다. 굴드가 의외로 성직자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마침 핼러윈이라 실없는 상상이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영화 <엑소시스트>와 <셜록 홈즈>가 짬뽕이 된 광경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었다.

제이드는 굴드에게 받은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저도 뭔가 굴드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뭘 사야 할지 고민이 됐다. 굴드에게 꼭 필요하거나 좋아하는 걸 준비하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굴드가 관심을 보이는 분야는 책과 와인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와인은 왠지 의미 있는 선물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미술품 수집도 그의 취미 중 하나였지만 제이드에겐 예술품을 고르는 안목이 없었다.

책갈피를 직접 만들까, 라는 생각도 진지하게 해 봤다. 그렇지만 너무 소소하고 저렴해서 선물로 주기가 민망했다. 정확히 얼마짜린지는 몰라도 비싼 시계를 받았는데 자신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책갈피를 선물로 내민다는 게 너무 염치없게 느껴졌다. 그는 최소한 제가 받은 시계에 준하는 물건을 선물로 마련하고 싶었다.

백화점에 가 볼까. 제이드는 벅벅 머리를 긁으며 넥타이나 커프스를 선물 리스트에 올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자신의 패션 센스가 조악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백화점에 가려면 아무래도 명품이나 옷에 관심이 많은 해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제가 내민 촌스러운 넥타이나 커프스 때문에 굴드가 난감해하는 표정은 보고 싶지 않았다.

뭘 살지 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제이드는 불을 끄고서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제방이 무너진 것처럼 피로가 일시에 밀려들었다. 종일 식사를 부실하게 한데다 헛구역질로 기운까지 빼서 온몸이 노곤했다.

창 밖에서 달빛이 흘러들었다. 제이드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지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었다.

두근, 두근.

옆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운 제이드의 아랫배에서 작은 고동이 일었다. 제이드는 까무룩 잠이 든 탓에 꿈틀, 하고 제 배를 걷어차는 미세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

고가도로 기둥 밑은 노숙자들의 구역이었다.

손가락장갑을 낀 할머니가 카트를 밀며 가로등 주변을 배회했다. 카트 바구니 안에는 때가 시커멓게 탄 잡종 개와 망가진 잡동사니들, 그리고 알루미늄 캔이 쌓여 있었다.

노숙자들 몇몇이 드럼통 주변에 모여 앉아 술을 마셨다. 그들은 헌 옷가지와 공사장에 굴러다니는 나무토막을 넣어 불을 피웠다. 드럼통 위에는 꼬챙이에 꿰인 시궁쥐와 비둘기가 숯처럼 구워지고 있었다.

“어이,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지 않아?”

용변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흠칫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름진 손으로 바지 지퍼를 내리는데 새카맣고 커다란 뭔가가 벽을 타고 지나갔다.

“난 아무것도 못 봤는데. 취해서 헛것을 본 거 아니야?”

랍비처럼 구불구불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대꾸했다. 거칠고 갈라진 그의 손에는 남이 먹다가 버린 햄버거가 들려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주운 놈이라 딱딱하고 누린내가 났지만 그의 입맛에는 딱 맞았다. 다만 햄버거에 곁들일 감자튀김이 없어서 아쉬웠다.

“아냐, 내가 분명히 봤어. 엄청 커다란 그림자였다고.”

“얼마나 컸는데? 이 녀석 어미만 했나.”

앞니가 죄 썩은 노인이 킬킬 비웃으며 까맣게 탄 쥐 꼬치를 뒤집었다. 다들 노숙자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어이, 진짜라니까! 진짜로 내가 똑…!”

노숙자가 깡통을 차며 버럭 성을 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다. 아까 휙 지나쳤던 덩치 큰 그림자가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화톳불이 화르르 물결쳤다. 담벼락 위로 드리워진 노숙자의 그림자가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엔 기다란 송곳 같은 물체가 꽂혀 있었다.

“으어어!”

“뭐야, 살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노숙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단단한 얼음 창에 등을 꿰뚫렸다. 박스로 집을 만들어 그 속에서 잠을 자던 노숙자도, 카트에서 유리병을 꺼내 정리하던 할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고가도로 밑에 혼자 멀쩡하게 서 있는 남자가 크게 팔을 휘둘렀다. 노숙자들 몸에 꽂힌 창이 시체를 반으로 조각내며 허공에서 흩어졌다.

내장이 후드득 모랫바닥 위로 떨어졌다. 시체가 여러 갈래로 찢겼음에도 불구하고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마치 사격 과녁으로 사용한 마네킹을 분리해서 바닥에 우르르 쏟아 버리는 광경 같았다.

“더럽게 맛이 없군. 뭐, 맛을 따질 때가 아니지만.”

벌목꾼처럼 어깨가 딱 바라진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하도 오래 잠들었다 일어났더니 몸도 찌뿌듯하고 피를 갈구하는 충동도 한층 심해졌다.

“맞는 신발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군.”

곰 같은 덩치를 가진 남자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시체가 된 노숙자들의 소지품을 뒤적거렸다. 밑창이 다 닳은 신발을 벗겨서 제 발에 대봤다. 그럭저럭 맞는 것 같아 억지로 발을 욱여넣었다.

“그나저나 성자의 관에서 날 꺼내 준 놈의 면상을 보고 싶은데, 그 자식을 어디서 찾는담?”

죽은 노숙자들에게서 빼앗은 넝마를 걸친 남자가 만월 직전까지 차오른 달을 올려다보며 뒷목을 벅벅 긁었다. 몇백 년 만에 봉인에서 풀려난 그는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지하실이었다. 수백 년을 심연에 묶여 있다가 간신히 자유를 찾은 것이었다. 그는 성자의 관을 스스로 열고 나왔다. 하지만 아편이라도 피운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는 강렬한 갈증을 느끼며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에 각인된 타나토스의 의지였다. 그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을 쟁취하라는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는 몽유병 환자처럼 한 청년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건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와 가장 상극인 작자가 남겨 놓은 표식 덕분에 번쩍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말이다.

“찜찜하단 말이지.”

남자는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턱을 만지작거렸다. 남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것처럼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음모의 기운이 느껴졌다. 시기로 보나 정황으로 보나,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최소한 성자의 관을 훔치고 봉인을 깬 작자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전까진 귓가에 들려오는 타나토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게 좋을 성싶었다.

문제는 그를 성자의 관에서 꺼내 준 놈이 꼭꼭 숨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은혜를 갚으라고 유세를 떨어도 모자랄 판에 자취를 감췄다.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하려 해도 구린내가 진동을 했다.

“볼텐슈테른 가문 놈과도 담판을 지어야 하는데, 시기를 언제쯤으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남자는 그를 성자의 관에 처넣은 작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에게서 느껴진 서늘한 기운은 분명 그 밥맛없는 작자의 것이었다. 놈도 이 도시 어딘가에 있었다.

“그 고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아이슬러.”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섬뜩한 공격이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는 다급하게 몸을 옆으로 굴리며 얼음의 벽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콰직, 하고 날카로운 것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노숙자 몰골을 한 아이슬러는 꿀꺽 침을 삼키며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올려다봤다. 검은 금속이 닿은 목젖에서 피가 흘렀다. 얼음 방벽이 적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내지 못한 것이다. 적이 검은 기운을 회수하자 파직, 콰지직, 하며 얼음이 부서져 내렸다.

“여어, 생각보다 내가 성자의 관에서 벗어났다는 걸 빨리 알아냈는데. 역시 볼텐슈테른 대공이라고 해야 하나?”

체구가 엄장한 아이슬러가 예의라도 취하듯 군밤 모자를 벗으며 빈정거렸다. 19세기 사교 파티에서나 볼 수 있을, 과장된 인사법이었다.

“그렇게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고서 알아채지 못하리라 기대하다니, 발상이 놀랍군, 아이슬러.”

뱀보다 차가운 남자가 비스듬하게 웃으며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달을 등지고 선 그의 모습이 마치 사냥에 나선 귀족 같아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생긴 것 하나만큼은 더럽게 잘생긴 작자였다.

“이봐, 난 성자의 관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 낯선 곳에서 몇백 년 만에 눈을 떴다는 점을 고려해 줘야지. 사실은 아직도 여기가 어디 붙어먹은 대륙인지도 모른다고.”

아이슬러가 으쓱 어깨를 추어올리며 능청을 부렸다. 겉으로는 일단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이슬러는 예상치 못한 적의 등장으로 인해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살짝 스쳤을 뿐인데 목의 상처에서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불리했다. 그는 저 오만한 사내를 제대로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레오폴트 폰 볼텐슈테른은 타나토스의 대리자임과 동시에 오서독스들의 정점에 선 사내였다.

“안됐군, 아이슬러. 이제 곧 성자의 관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아스팔트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 위로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입꼬리만 슬쩍 끌어 올린 볼텐슈테른의 눈빛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성가신 일을 빨리 끝내 버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어이, 아무리 그래도 쉽게 당하진 않아.”

프로레슬러 같은 몸집을 가진 아이슬러가 근육을 부풀렸다. 늘 싸늘한 가면 같은 표정만 짓던 오만한 사내가 처음으로 사람 같은 감정을 내비쳤다. 놀라운 일이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성자의 관이 하나만 없어진 게 아니지? 나머지 두 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

아이슬러의 눈동자 색깔을 닮은 파르스름한 얼음이 허공에 하나둘씩 떠올랐다. 세로로 떠 있는 수백 개의 얼음 창들은 타나토스의 대리자를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당장에라도 전면전에 돌입할 기세였다.

“허튼수작을 부리는군.”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악령이 부활하듯 대지를 뒤덮은 그림자가 높게 솟구쳤다. 붉은 눈이 달린 그것들은 악마의 사생아처럼 기괴하고 흉측했다. 어둠의 영역에 속한 물질들이 스스로 날카로운 발톱을 만들었다. 놈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검고 사악한 기운이 아이슬러의 머리털을 쭈뼛 곤두서게 만들었다.

“후회하게 될걸? 그 녀석들도 곧 봉인에서 풀려날 테니까.”

아이슬러가 예언이라도 하듯 경고했다.

필멸의 법칙을 거스르는 기운 때문에 그의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얼음 창들이 공명하며 새파란 불꽃을 표면에 휘감았다. 아이슬러의 주변은 아스팔트 바닥부터 고가도로 기둥까지 삽시간에 얼어붙고 있었다.

성자의 관에 봉인된 나머지 오서독스들이 깨어난다는 건 그의 지레짐작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될 가능성이 컸다. 지하실에 성자의 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피로 그린 마법진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루테니아 놈들이 새긴 봉인을 깨는 주술이 분명했다.

“주절주절 말이 많아졌군, 아이슬러.”

“몇백 년이나 감금되어 있었는데 당연하지. 입이 근지러워 죽겠다고.”

아이슬러가 이를 드러내며 눈을 부라린 순간이었다.

탕! 탕!

총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총알이 박힌 곳은 아이슬러의 발치였다. 한 발은 그의 팔뚝을 스치긴 했지만 벌겋게 벌어졌던 상처가 금방 아물어 버렸다.

“뭐야, 이건?”

아이슬러가 갑자기 찢어진 옷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니 옥상에서 뭐가 번쩍거렸다. 웬 신부 하나가 엎드려 있다가 몸을 뒤로 물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펠릭스.”

저격 소총을 들고 있는 신부를 보고 굴드가 왈칵 표정을 구겼다. 왜 네 녀석이 나서냐는 눈빛이었다.

“죄송합니다. 신앙교리성에서 심혈을 기울여 강화시킨 탄환이라 통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 유감입니다.”

차가운 인상을 가진 신부가 안경을 콧잔등 위로 밀어 올렸다. 특수 제작된 M82 바렛을 아무런 미련 없이 휙 내던졌다. 민망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오서독스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한 눈치였다.

루테니아 가문 놈인가? 아이슬러는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를 눈여겨봤다. 왠지 재미있는 놈 같았다.

그나저나 주변에 대기한 팬저가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 의아했다. 그를 봉인진으로 밀어 넣을 루테니아의 예언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몇 명이 몰려 있든 팬저는 오서독스의 상대가 될 수 없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좋은 기회다.

아이슬러는 눈을 번뜩이며 몸을 날렸다.

푸른 불꽃을 휘감은 얼음 창이 타나토스의 대리자를 공격했다. 펠릭스 신부가 비장한 얼굴로 몸을 낮췄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레오폴트는 절대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리라 확신한 표정이었다. 아이슬러는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푸른 화염에 휩싸인 얼음 파편이 검은 장막과 충돌했다. 폭발음이 허공을 흔들었고 충돌의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기습은 실패했다. 그의 공격은 타나토스의 대리자를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을 뿐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그러나 아이슬러의 계획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격을 퍼부은 직후, 레오폴트가 버티고 서 있는 곳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아이슬러는 불리한 싸움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이슬러.”

줄행랑을 치는 아이슬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타나토스의 대리자가 눈썹을 비틀었다. 활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시야를 방해했다. 삽시간에 사방으로 옮겨 붙은 불은 노숙자들의 시체와 버려진 건축자재를 녹였다. 마치 고열의 용광로 속에서 금속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광경 같았다.

“너무 열심히 날 뒤쫓을 것 없어, 레오폴트! 성배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 나면 곧바로 성자의 관에 집어 처넣은 보답을 하러 네 앞에 다시 나타날 테니까.”

우렁우렁한 아이슬러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남자가 정말 내 성배인지 아직 확신이 서질 않거든.”

큰 소리로 외치던 아이슬러가 돌연 목소리를 줄이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성자의 관에서 벗어난 이후로 줄곧 느껴오던 의심을 되새김질하는 혼잣말이었다. 그는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이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우람한 아이슬러의 뒷모습이 지하 터널로 연결된 배수구로 사라졌다. 푸른 불꽃은 모든 사물을 일그러트릴 기세로 타올랐다. 실제 화염과는 성질이 달랐기에 불길이 번져도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성배?”

화염에 휩싸인 아벤 굴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푸른 불꽃의 열기가 그의 뺨을 할퀴었다. 아이슬러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놈은 분명 성배를 언급했다. 마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제 놈의 성배가 있다고 확신하는 투였다.

어떻게 성배가 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건지 의아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아이슬러의 성배가 실제로 나타난 게 맞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루테니아 놈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않고 몰살시킨 것이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성배의 출현을 예지하는 루테니아를 멸족시킨 탓에 아이슬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그 남자가 정말 내 성배인지 아직 확신이 서질 않거든.’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벤 굴드는 살기 어린 눈을 하고서 아이슬러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봤다.

“뒤쫓지 않으실 겁니까?”

부상을 입은 펠릭스가 발을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언제나 단정하던 잿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수단은 엉망에, 안경에도 금이 갔다. 아이슬러의 공격에 휩쓸려 죽은 줄 알았는데 꿋꿋하게 살아남다니, 의외였다.

“아이슬러는 이 녀석이 쫓을 거다.”

아벤 굴드의 등 뒤로 기척 없이 거대한 검은 마물이 등장했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펠릭스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움찔 턱을 긴장시켰다. 달을 등진 검은 괴수는 아벤 굴드의 건물을 지키는 검은 파수꾼 중 한 놈이 분명했다.

“이런 걸 결계 밖에 풀어놔도 되는 겁니까.”

펠릭스 신부가 반사적으로 총을 찾으며 파수꾼을 경계했다.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마수를 올려다보는데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아벤 굴드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9번가에 위치한 건물 현관문이 열리면 벽지 무늬 대신 검은 파수꾼이 어슬렁거리는 1층 복도가 보였다. 결계 때문에 문턱을 넘지 못하고 어둠 속에 웅크린 괴수는 꼭 지금처럼 저를 노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빠른 해결을 원한 것 아니었나.”

아벤 굴드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직접 아이슬러를 잡아 올 게 아니라면 닥치라는 의미였다.

“물론 이 일이 빨리 수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펠릭스가 유리에 금이 간 안경을 고쳐 쓰며 대꾸했다. 아무리 오서독스를 추적하기 위해서라지만 저런 흉측한 마수를 지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놓은 아벤 굴드의 뻔뻔함에 기가 막혔다. 자기만 편하면 다냐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파수꾼이 아까 그 노숙자를 쫓는 동안에 대리자께선 성자의 관이라도 찾으실 겁니까.”

깨진 안경을 쓴 펠릭스가 빈정대는 말투로 물었다.

“아아.”

아벤 굴드가 딴생각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 위로 흉흉한 기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예상 밖의 대답을 들은 펠릭스가 눈을 부릅떴다. 성자의 관을 찾는 일 따위는 팬저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던 남자가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이슬러를 잡는 것보다 성자의 관을 빼돌린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게 먼저다.”

아벤 굴드가 눈썹을 비틀고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자코모 주교에게 성자의 관을 빼돌리도록 지시한 자가 아이슬러의 발목에 채워져 있던 심연의 사슬을 깬 범인일 것이 틀림없었다.

성배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아이슬러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곧 나머지 봉인도 깨질 거라는 경고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처음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여겼지만, 아이슬러는 괜한 말을 주워 삼키는 작자가 아니었다.

어째서 성배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코모라는 늙은 주교가 성자의 관을 훔쳤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루테니아를 따르던 세력이 소란을 피우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젠 루테니아의 잔당이 이 일의 배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슬러도 자신을 성자의 관에서 꺼내 준 이가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범인이 루테니아였다면 애초에 아이슬러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밤거리를 떠도는 일도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이 들어서 석연치가 않았다. 곳곳에 암초가 숨은 안개 낀 섬을 향해 다가가는 기분이었다. 봉인을 깬 범인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오서독스들을 세상에 풀어놓음으로써 범인이 어떤 이득을 얻게 되는지 지금으로선 짐작이 가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

카 오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변장용 뿔테 안경에 모자를 푹 눌러 쓴 장은 느릿하게 차를 몰았다. 길가에는 손님을 잡기 위해 서성거리는 매춘부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장의 눈에는 그들이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오래간만에 사냥을 나온 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반반하고 젊은 양아치들이 다들 간절한 눈을 하고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클럽이나 술집에선 외모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맞았지만 이 거리에선 그가 왕이었다. 몇십 달러만 눈앞에서 흔들어 대도 남창들이 오늘 밤 끝내주게 서비스를 해 주겠다며 아양을 떨어 댔다. 해가 떠 있을 땐 저를 벌레 보듯 바라보던 것들이 말이다.

암퇘지들.

장은 거만하게 중얼거렸다.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고르기 위해 차를 몰고 윤락가 주변을 빙빙 돌았다. 라디오에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He's never early, he's always late. First thing you learn is you always gotta wait. I'm waiting for my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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