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장 폴 앙티오슈는 짜증에 찬 얼굴을 하고서 부둣가의 작업실로 향했다. 한밤중이라 사위가 어둑했다. 창고 문에 달린 큼지막한 공업용 자물쇠를 딴 그는 발전기를 가동시켰다. 우우웅, 하고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다 허물어져 가는 창고에 불이 들어왔다.
“우욱, 빌어먹을 짐승 새끼!”
장은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에 인상을 구겼다. 장은 스테판이 감금된 동물 우리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스테판이 싸지른 대소변 때문에 창고에는 이동식 화장실에서나 날 법한 악취가 고여 있었다. 어디서 기어 들어왔는지 파리 떼가 허공을 날아다니며 장의 머리와 뺨을 맴돌았다.
“씨발. 도대체 언제까지 저 짐승 놈을 살려 둬야 하는 거야?”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가린 장이 먼지 쌓인 나무 상자를 걷어찼다. 떡 진 머리를 한 스테판은 숨을 죽이고서 몸을 웅크렸다. 그의 발치에는 지저분한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스테판은 이틀에 한두 번씩 찾아오는 장이 챙겨 주는 식사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말이 식사지, 유통기한이 다 된 우유에 시리얼을 탄 꿀꿀이죽과 딱딱한 빵 조각이 그가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의 전부였다. 스테판은 개처럼 엎드려서 시리얼을 먹어 치워야 했다. 겁이 많은 장이 그에게 무기가 될지도 모르는 숟가락을 쥐여 줄 리 없었던 것이다.
“젠장, 이놈의 똥오줌 냄새.”
장은 헛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수도에 호스를 연결했다. 화풀이를 하러 왔는데 이대론 스트레스만 더 쌓일 것 같았다.
실내에 가득한 지린내 때문에 짜증이 치민 장의 머릿속에는 로드리고 형사의 얼굴이 가득했다. 그 배불뚝이 형사 놈이 장이 가명으로 빌려 놓은 사서함까지 찾아왔다. 편지를 챙기러 사서함을 방문했던 장은 로드리고 형사를 보고 간이 떨어질 뻔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능청스럽게 인사를 나눴지만 그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 정도로 끈질기게 추적하는 걸 보면 뭔가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다.
장은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작품 활동까지 멈춘 상황이라 그는 극도로 정신이 불안한 상태였다. 그에게 있어서 스테판은 구더기가 들끓어서 손도 대기 싫은 음식물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바니가 스테판을 죽여도 된다고 허락해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살아 있는 인간을 장기간 관리하고 사육하는 것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굶겨 죽이지 않으려면 밥을 먹여야 하는데 배설물이 문제였다. 스테판이 싸질러 놓은 똥오줌 때문에 장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물론 직접 치우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악취가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스테판에게 손도 못 대게 한 장본인인 바니는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아예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촤아아!
호스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어푸, 흡. 어푸!”
장은 물고문이라도 하듯 스테판의 얼굴에 집중적으로 물을 뿌려 댔다. 배설물이 물에 휩쓸려 우리 밖으로 흘러나오는 광경이 역겨웠다.
물로 씻기긴 했지만 스테판의 몸에 직접 손을 대기는 싫었다. 장은 흠뻑 젖은 채로 어깨를 덜덜 떨고 있는 스테판을 내려다보다가 끝을 송곳처럼 다듬은 쇠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추운 것 같은데 모닥불을 피워 줄까? 이것도 시뻘겋게 달구고 말이야.”
장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히죽 웃으며 전기난로에 불을 켰다. 스테판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장은 그 모습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앗뜨, 앗뜨!”
그는 달궈진 쇠꼬챙이에 천을 휘감았다. 그러고는 추위에 떨고 있는 스테판의 허벅지며 얼굴을 사정없이 찔렀다. 바니는 스테판을 죽이면 안 된다고만 말했지 고문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전에도 몇 차례 고문과 폭력을 가한 적이 있었다.
읍읍, 비명을 지르며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반항하지 못하는 생물을 괴롭히는 짓만큼 즐거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졌던 것도 잠시, 장은 로드리고의 존재를 떠올렸고 또다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는 씩씩대며 쇠꼬챙이를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스테판을 우리 밖으로 끄집어냈다. 손발을 결박해 둔 상태라 스테판이 도망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썩을! 개 같은! 하등한 벌레 주제에!”
장은 손에 쇠사슬을 휘감고서 스테판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 스테판의 얼굴은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앞니가 죄 나간 스테판이 입에 피를 머금고서 헐떡거렸다. 살려 달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짜증을 불러 일으켰다. 장은 스테판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서 그를 다시 우리에 처넣었다.
불안할 때마다 스테판을 학대하는 것도 지겨웠다. 마약에 취한 것처럼 잠시 동안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도피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장은 혼자서 끙끙 앓는 대신 바니에게 로드리고의 존재를 알리기로 했다. 바니는 지하실에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느라 그에게 관심도 없었지만, 이대로 바니의 눈치만 보고 있다간 크게 사달이 날 것 같았다. 장은 경찰에게 붙잡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늘은 기필코 결판을 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바니를 찾아갔다. 그는 바니의 거처로 들이닥치기 전에 유명 제과점에 들러서 조각 케이크를 샀다. 바니와 담판을 짓겠다며 씩씩하게 창고를 나섰지만 괴물의 심기를 거슬러서 비명횡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바니는 오랜만에 취미 생활을 하러 나갈 생각이었는지 지하실에서 올라와 옷을 고르고 있었다. 바니에겐 뒷골목에서 질 나쁜 남자를 골라 몸을 파는 취미가 있었다. 개중에 마음 약해 보이거나 선량해 보이는 남자가 있으면 정신을 조종해서 중범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다. 그는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구속되게 만드는 과정을 몹시 좋아했다.
“저기, 바니. 할 말이 있는데 시간 괜찮아? 에헤헤.”
장은 케이크 상자를 열어 보이며 한껏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다행히 기분이 좋은 편인지 바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꾸했다. 피부에 주근깨가 잔뜩 핀 그는 가죽 반바지와 각종 피어싱으로 몸을 치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기온이 부쩍 떨어졌는데도 바니는 핫팬츠를 고집했다. 보는 사람이 다 닭살이 돋을 것 같은데 저 새끼는 아무렇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저 자식은 인간이 아니지. 장은 납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뱀파이어가 추위를 탄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게 말이야…. 경찰이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것 같아.”
장은 손가락을 맞대고서 꾸물꾸물 이야기를 꺼냈다. 바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성격 더러운 바니라면 그딴 일로 성가시게 굴지 말라고 대뜸 장의 목을 조를지도 몰랐다.
“아, 슈퍼마리오를 닮은 형사.”
치렁치렁한 체인 피어싱을 코에 끼우던 바니가 뒤를 돌았다. 바니가 짜증을 낼까 봐 노심초사하던 장은 흠칫 어깨를 튕겼다. 마치 그 형사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름이 아마 로드리고였지?”
바니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는 뱀 같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장을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네 머릿속을 들여다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뭘 그리 새삼스럽게 놀라는 거냐고 비꼬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 염려할 것 없어, 장. 경찰이 널 수사 선상에 올렸으면 좀 어때. 다른 용의자를 만들어서 형사에게 던져 주면 간단한 일인걸.”
바니가 음흉하게 웃으며 장의 뺨을 툭툭 쳤다. 장의 무의식은 바니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의지는 남겨 두었지만, 사실상 꼭두각시라 봐도 무방했다. 헌터들이 성가셔서 구울은 더 이상 만들지 못했지만, 인간들은 얼마든지 숙주로 삼을 수 있었다.
“다른 용의자?”
눈을 부릅뜬 채로 얼어붙어 있던 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바니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바로 알아들었다. 가짜 범인을 내세워서 안전을 도모하라는 뜻이었다. 자신의 죄를 멀쩡하고 평범한 소시민에게 덮어씌우다니… 정말 환상적이었다.
장은 전율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매드 버쳐가 체포되면 엄청난 반향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매스컴들이 매일 재판장 앞에서 진을 치고, 재판 과정도 TV로 중계될 가능성이 컸다. 자기 대신에 죄수복을 입은 채 피고인석에 서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무고한 회사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5센티도 안 되는 성기가 불뚝 일어서 바지를 찔렀다.
예술가로서의 타이틀을 타인에게 빼앗기는 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자신은 안전한 방청석에서 재판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 눈앞에서 성실한 가장이었던 남자가 1급 살인죄로 종신형, 아니, 사형을 언도받는 광경을 상상하자 참을 수 없이 흥분이 되었다.
“넌 천재야, 바니.”
장은 감격한 얼굴로 바니의 손등에 키스를 퍼부었다. 바니가 신발을 핥으라고 명령하면 당장에라도 넙죽 엎드려 혀를 내밀 기세였다. 경찰에게 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동안 작품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해 목구멍까지 쌓였던 욕구불만도 일시에 해소됐다.
“누명은 어떻게 씌울 거야? 네가 직접 기억을 조작한다든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장이 손바닥을 비비며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엄한 사람을 전기의자에 보낼 생각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평범한 게 가장 좋아. 내가 손을 쓰면 결과가 너무 빤해서 시시해질 테니까.”
앞머리로 눈을 가린 바니가 케이크를 우적우적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가짜 범인으로 내세울 사람의 얼굴을 뇌리에 그렸다.
장이 꼴사납게 징징대는 바람에 계획을 앞당기게 됐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약간의 수정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불쾌한 감정은 일지 않았다. 궤도를 살짝 틀어줌으로써 앞으로의 일들을 한층 더 흥미롭게 진행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을 망치지 않는 수준이라면 약간의 변수 정도는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었다. 너무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것도 재미가 없는 법이었다. 바니는 모처럼 마음에 든 장난감을 쉽게 망가트릴 마음이 없었다.
***
핼러윈 때문인지 거리가 떠들썩했다. 주홍빛 호박 장식물과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카페 앞에 세워 둔 녹색 칠판에도 호박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빗자루를 탄 마녀와 몽실몽실한 꼬마 유령 캐스퍼 및 기기묘묘한 괴물 캐릭터 인형들을 쇼윈도에 쌓아 둔 상점이 여럿 눈에 띄었다.
핼러윈 대목을 노린 장난감 가게는 세일 팻말을 붙여 놨고, 쇼핑센터는 호박을 파서 만든 잭 오 랜턴을 천장에 줄줄이 달아 놨다. 섹시한 마녀 코스튬을 입고서 도심 한복판에서 사탕과 판촉물을 나눠 주는 아가씨들은 관광객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어 주었다.
갑갑한 지하철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제이드는 전광판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거리 풍경을 뒤로하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정숙한 편이었다. 두꺼운 전공 서적을 살펴보는 대학생들과 경제지를 훑어보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자발적으로 서점을 찾은 건 정말 오래간만이라 제이드는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느닷없이 서점에 들른 이유는 무료하고 지루한 병원 생활을 하고 있을 피터에게 잡지를 사다 주기 위함이었다.
핼러윈 특수를 노렸는지 어린이 코너가 크게 마련되어 있었다. 박쥐 모빌과 꼬마 흡혈귀 동화책을 본 제이드는 찔끔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전이라면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텐데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보니 흡혈귀라는 문구만 봐도 절로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아동용 동화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이드는 살금살금 동화책 코너로 다가갔다. 페이지를 주르륵 훑어보는데 삽화들이 앙증맞았다. 마늘을 들이밀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꼬마 흡혈귀를 보고 나니 역시 그냥 동화책이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게 됐다.
흡혈귀가 마늘을 두려워한다는 건 말 그대로 속설에 불과했다. 제이드가 제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틀림없었다. 굴드가 어젯밤 지중해풍 갈릭 스파게티를 만들겠다며 마늘을 써는 모습을 직접 보여 줬다. 마늘을 볶는 냄새가 고소했다. 내심 마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게 정말일까 미심쩍어하던 제이드는 굴드의 말이 사실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잡지 코너로 향했다. 늘씬한 20대 여성들이 잡지를 고르고 있어서 그 사이에 끼어들기가 멋쩍었다. 패션 잡지를 살펴보던 여자가 제이드에게 게슴츠레한 시선을 던졌다. 명백한 유혹이었다. 제이드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섰다. 그는 아무 잡지나 황급히 집어 들고서 자리를 피했다.
잡지를 고른 제이드는 계산대로 향하는 대신 서점을 빙빙 돌아다녔다. 그는 호러 소설과 불가사의한 현상을 다룬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코너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제이드는 잡지를 옆구리에 끼고서 손가락으로 책 제목을 훑었다. 모처럼 서점까지 왔으니 뱀파이어에 관한 책들을 뒤져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흡혈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관에서 잠을 잔다든지 심장에 말뚝을 박으면 죽는다든지 하는 신빙성 없는 이야기 정도가 전부였다. 호러 마니아나 악마 숭배자가 아닌 이상 뱀파이어는 일반인에게 피상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이드는 뱀파이어에 대해 일말의 흥미도 없었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굴드가 뱀파이어란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게 당연했다.
솔직히 말하면 굴드가 뱀파이어란 사실이 아직 실감 나진 않았다. 그러나 피터를 내동댕이치는 거대한 그림자 괴물도 봤고, 손도 대지 않은 유리창이 한꺼번에 깨지는 광경도 직접 겪었다. 그의 경험은 환각이나 망상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미친놈 취급을 받을까 봐 차마 자신의 체험을 남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같은 이유로 해리나 단골 술집 친구인 그렉 일당에게 굴드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어려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물어봤자 친구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뜬소문이나 괴담 같은 것 따위를 농담 삼아 들려줄 것이 분명했다.
사실 뱀파이어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방법은 굴드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했다. 제이드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굴드는 제이드가 그의 과거에 대해 물어보는 게 그리 마뜩잖은 듯했다. 그렇다고 굴드가 제이드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거나 불쾌한 내색을 내비치거나 한 적은 없었다. 다만 굴드는 어쩌다 뱀파이어가 됐는지, 몇 살인지 하는 사소한 질문들을 차차 알게 될 거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겨 버리곤 했다.
결국 제이드는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굴드에게 궁금한 점들을 묻지 않게 됐다. 굴드와 크게 싸웠다가 관계가 회복된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것저것 알고 싶은 게 많아도 제이드로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두 시간가량 책들을 들춰 보다가 도로 책꽂이에 꽂았다. 제이드가 알고 싶은 정보는 책에 적혀 있지 않았다. 오래된 판화나 삽화가 들어 있다 싶으면 드라큘라 백작이나 바토리 부인 이야기부터 나왔다. 종교 코너로 한번 가 볼까 싶었지만 신화나 교리 쪽은 쥐약이라 포기했다.
그는 잡지를 계산하기 위해 계산대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언제나 그랬듯 매연 탓에 칙칙했다. 계산대 위에는 핼러윈 특수를 노린 열쇠고리와 책갈피가 진열되어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점원이 갈색 재생 봉투에 잡지를 넣었다. 제이드는 이빨이 삐죽 나온 드라큘라 백작 그림이 그려진 책갈피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굴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너무 조바심을 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제이드는 여유를 가지자고 마음을 다독이며 굴드가 선물한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굴드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 서로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 될 터였다.
사소한 오해로 크게 다투기 전까지만 해도 제이드는 굴드와의 관계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다정하긴 하지만 때로는 남보다 못할 정도로 딱 잘라 선을 긋는 굴드의 진심이 뭔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당최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굴드와 금방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비록 사귀자는 이야기가 나온 건 아니었지만 굴드가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눈빛에서 느껴졌다. 그를 대하는 태도도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전에는 꺼낸 적이 없던 둘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꺼내곤 했다.
모든 게 안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드는 가끔씩 등 뒤에 적군이 매복하고 있는 것처럼 불길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가 인식하지 못한 시한폭탄이 저 밑바닥에서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불현듯 들이닥치는 막연한 불안감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굴드도 그도 뭔가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렇게나 던져둔 면도날에 언젠가 혈관을 깊게 베일 것 같은 불길함이었다.
서점을 나온 제이드는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다. 신호등이 온통 빨간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성당 지하실에서 목격했던 광경이 현기증처럼 그를 덮쳤다.
‘나의 피, 나만을 위한 제물.’
제이드는 이마를 짚고서 머리를 흔들었다.
‘성배.’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 제물이여.’
기괴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얼굴에 뜨거운 피가 끼얹어지던 감촉과 그를 추격하던 적군이 발포한 총소리, 그리고 손전등의 불빛이 어렴풋하게 비춘 시체.
제이드는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언제 불이 바뀌었는지 초록 불이 깜빡깜빡 사그라지고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제이드가 비틀대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발걸음을 내딛는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빵빵!
자동차 경적이 시끄럽게 울렸다. 제이드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일그러진 영상이 눈앞에서 흩어졌다. 제이드는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음침한 성당 지하실이 아니라 인파로 북적대는 번화가였다.
“제길.”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운 감각이 가시질 않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제이드는 잇새로 욕설을 내뱉으며 가드레일 위에 걸터앉았다. 굴드와의 관계는 공고해져 가는데 기괴한 기억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눈꺼풀 안쪽이 뻑뻑했다. 제이드는 머릿속을 떠도는 음산한 목소리를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혼란이 가중됐다. 영상을 되새김질하면 할수록 출구가 없는 질척질척한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기억은 불완전했다. 그래서 더 꺼림칙하고 찝찝했다. 지하실에서 적군을 몰살시킨 존재. 아득한 비명 소리. 차라리 속 시원하게 모든 기억이 돌아왔으면, 하고 바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적군에 쫓겨 지하실로 들어갔을 땐 분명 아무도 없었다. 한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적군을 죽이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 남자는 제이드를 성배라고 불렀다. 제이드는 성배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이라고 치부하려고 해도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성배라는 단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의 인생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꼬르륵, 꼬르륵.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처럼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는데 배 속에서 위가 쪼그라드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목도 말랐다. 제이드는 신문 가판대에서 파는 싸구려 초콜릿과 고칼로리 과자를 충동적으로 샀다. 너무 허기가 져서 음식점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근래 들어 서너 시간마다 폭식을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배 속에 아귀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팠다. 이상한 점은 무지막지하게 칼로리를 섭취하는데도 살이 빠진다는 사실이었다.
단숨에 초콜릿과 과자를 먹어 치운 제이드는 피터가 입원한 종합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접수처는 피난민들을 수용한 관공서처럼 대기표를 받은 환자들로 바글거렸다. 병원 특유의 싸한 냄새와 다양한 인종들의 체취가 뒤섞인 탓인지 실내 공기가 다른 곳보다 텁텁했다.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멈춰 섰다. 제이드는 계단을 이용할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5층은 어린이 병동인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환자복을 입은 아이들이 스케치북을 들고서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제이드는 스케치북으로 핼러윈 가면을 만든 아이들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 둘이 보호자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체구가 작은 쪽은 이동식 링거를 끌고 있었다. 가녀린 팔뚝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게 안쓰러워서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키 작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Trick or Treat! 형, 사탕 있어요?”
크레파스로 엉성하게 색칠한 호박 가면을 쓴 소년이 제이드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링거를 맞고 있는 꼬맹이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이드를 올려다봤다.
“미안. 사탕은 없는데….”
제이드는 잡지를 옆구리에 끼고서 반사적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아까 초콜릿과 과자를 신문 가판대에서 사긴 했지만 다 먹고 난 후였다. 제이드는 결국 빈 손바닥을 내보이며 꼬맹이들에게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사탕 안 주면 핼러윈 때 괴물이 잡아가는데.”
“응! 맞아.”
꼬맹이 둘이서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볼살이 통통한 것이 정말 귀여웠다.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긴 하지만 나중에 입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를 빼닮은 건강한 사내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서 캐치볼을 하는 게 제이드의 오랜 꿈 중 하나였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귀여운 애들을 보면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만 굴드를 좋아하게 된 뒤로는 상황이 변했다. 굴드를 만나고 있는 이상 가족을 만들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싶다는 소망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애들이 철이 없어서.”
두 꼬마의 보호자가 곤란한 얼굴로 사과했다.
“아니에요, 귀엽기만 한데요, 뭘.”
제이드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애들이 Trick or Treat!을 외치며 사탕을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핼러윈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11층에 불이 들어왔다. 피터가 입원한 병동에 도착한 제이드는 아이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병실 안으로 들어간 제이드는 피터가 씩씩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해서 죽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빌어먹을, 조이 녀석이 내 스쿠터 키를 들고튀었어! 뺑끼 부리기 좋아하는 놈이 웬일로 조신하게 병간호를 하는가 싶어서 난 내심 감동했단 말이지? 근데 망할 자식, 처음부터 스쿠터가 목적이었던 거야. 조이가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서 완전히 방심했어!”
목에 깁스를 두른 피터는 이를 박박 갈며 분개했다. 그는 조이가 얼마나 간교하고 치사했는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장황하게 설명해 댔다. 혼자 있다가 대화할 사람이 생겨서 한층 더 흥분한 기색이었다.
제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친구에게 배신당한 피터를 위로했다. 조이가 피터의 스쿠터를 탐내는 눈길이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간호하는 척하다가 주인 몰래 슬쩍 훔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제이드, 길에서 그 녀석을 만나면 꼭 내 앞으로 끌고 와 줘.”
피터는 불평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이에게 뒤통수를 맞은 분노로 눈이 뒤집힌 그는 제이드에게 돈을 주고 의뢰라도 맡길 기세였다.
“영업 구역은 나나 그 자식이나 별반 차이 없으니까 뒷골목에 가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영업 구역이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니 조이도 피터와 마찬가지로 매춘으로 돈을 버는 모양이었다. 여장 남자나 트랜스젠더가 몸을 팔기 위해 밀집해 있는 동네는 남창들이 활동하는 지역과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조이는 남자 차림을 하고서 밤일을 하러 나가는 듯했다.
“만나게 되면 그렇게 할게.”
제이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종이봉투에서 꺼낸 잡지를 병실 개인 서랍 위에 내려놓으며 이만 가 보겠다고 피터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기…, 제이드!”
방금까지만 해도 험악한 기세로 조이의 욕을 하던 피터가 필사적인 눈을 하고서 제이드를 불러 세웠다. 흔들리는 그의 갈색 눈동자에는 제이드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 왜.”
제이드는 용변이 급한 건가? 라고 생각하며 피터에게 다가갔다.
“혹시 말이야….”
아직도 괴물처럼 얼굴에 울긋불긋한 멍이 든 피터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주제 파악은 처음부터 하고 있었다. 자신은 제이드에게 어울리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병문안을 와 주는 제이드의 친절하고 다정한 태도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그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만 같다는 엄한 기대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뭐?”
제이드가 염려하는 얼굴로 피터의 안색을 살폈다. 제이드의 얼굴이 바짝 다가오자 피터는 속이 타들어 갔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둔감한 거냐는 원망이 치솟았다.
피터는 사고가 일어났던 밤, 자신이 제이드에게 키스했던 걸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로 까맣게 필름이 끊겨서 어쩌다 사고를 당하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제이드는 피터의 행위에 대해 그리 의식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피터의 키스를 그저 술에 취해서 주사를 부린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냐, 아무것도.”
피터는 결국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눌러 삼켰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를 찬 제이드의 하얀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색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괜히 말을 돌렸다.
“시계 바뀌었네?”
“아, 응. 원래 가지고 있던 걸 잃어버렸거든.”
제이드가 머쓱한 얼굴로 대꾸했다. 피터가 토사물을 쏟아 내는 바람에 시계를 분실했다는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는 피터가 어쩌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지 잊지 않았다.
“선물 받은 거야?”
“어….”
제이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피터의 시선을 피했다. 멋쩍어하는 그의 귓불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기가 빠지질 않아서 얼굴이 퉁퉁 부은 피터가 눈을 내리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통제를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가슴에서 통증이 일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제이드가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에게서 시계를 선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준 거지?”
피터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자폭 내지는 확인 사살과 다름없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상처를 헤집었다. 제이드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응.”
제이드가 뺨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수선하게 딴청을 부리는 게 여간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이드는 흡사 여자 친구를 다른 이에게 처음 소개하는 남자처럼 들떠 있었다. 피터는 제이드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푹 빠져 있다는 괴로운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피터는 허탈한 감정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속이 쓰렸다. 그를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준 상대를 떠올리고 있는 제이드의 까만 눈동자가 안타까울 정도로 예뻤다. 잔인할 정도로 둔한 제이드는 피터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불에 덴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렸다. 제이드의 마음에 그가 끼어들 틈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에 피터는 좌절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젠 더 이상 밤마다 헛물을 켜며 부질없는 기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이드에게 직접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빠르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쁠 텐데 자주 와 줘서 고마워. 잡지 잘 읽을게.”
피터는 씁쓸한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고백도 못 해보고 차였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자신이 주제도 모르고 제이드를 좋아하게 된 벌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물론 교통사고를 당한 건 그저 우연이었다. 하지만 깨끗한 사람을 건드렸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가 피터를 남겨 두고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피터는 착하고 친절하지만, 그래서 더 잔혹하기도 한 제이드의 등을 바라보며 실연을 되새김질했다.
내 마음 좀 알아 달라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볼까, 하는 충동이 일기도 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비록 남창이긴 하나 그도 자존심이 있었다. 아니, 자존심이 있는 것 정도가 아니라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자존심이 셌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하고 꼴사나운 인간으로 기억되느니 차라리 그저 그런 주변인으로 남는 쪽이 훨씬 나았다.
“피터 씨, 일어나 있죠?”
몸집이 투실투실한 간호사가 유리 소변기를 들고서 나타났다. 짧은 파마머리에 어머니뻘 되는 그녀는 거칠게 커튼을 쳤다. 울적한 기분에 잠겨 있던 피터는 목을 움츠렸다. 굴욕을 맛봐야 하는 시간이 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피터는 간호사가 들이닥치기 전에 제이드가 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울상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남의 손을 빌려 용변을 해결하는 모습 따위는 절대 제이드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베테랑 간호사의 무덤덤한 시선을 의식하며 피터가 쪼르륵, 쪼르륵 소변을 봤다. 수치심 때문인지 물줄기가 시원치 않았다. 간호사가 소변이 가득 찬 유리병을 들고서 병실을 나갔다. 침대에 홀로 남은 피터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무기력한 어린애라도 된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을 곱씹었다.
***
병원을 나오자 땅거미가 진 어둑한 하늘이 제이드를 맞이했다. 병원을 방문한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켰고, 주차장에 심어진 나무 저편에서 도심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제이드는 허름한 재킷의 옷깃을 세우며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완연한 가을이라 날씨는 겨울을 연상시킬 만큼 추웠다. 실내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밤공기가 한층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바닥에 쌓인 낙엽이 팔락팔락 흔들렸다. 제이드는 손바닥으로 팔뚝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저녁에 소피의 집에 들르기로 약속했다. 제이드를 찰스라고 여기고 있는 소피가 핼러윈 특제 파이를 만들었다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파이를 평가해 달라는 건 그저 핑계고, 아마도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싶어서 제이드를 부른 것이 분명했다. 소피를 친할머니처럼 좋아하는 제이드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녀의 제안을 승낙했다.
제이드는 굴드가 준 시계를 이리저리 만져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받은 시계는 시, 분, 초 간격으로 종소리가 나도록 설정할 수 있었다. 15분, 1분을 나타내는 종소리가 달라서 몇 시 몇 분인지도 구분이 가능했다.
15분마다 종소리가 나는 건 성가셔서 그 기능을 꺼 두긴 했지만,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가 시간을 알려 준다는 사실이 제이드는 적잖이 신기했다. 흡사 시계를 선물 받은 게 아니라 고풍스러운 무전기나 19세기 기계를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제이드는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해 터널처럼 긴 지하도로 들어갔다. 전구의 불빛이 희미했고, 벽엔 낙서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 으슥한 지하도를 이용하는 행인은 제이드 한 사람뿐이었다.
지하도는 불길하리만치 고요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 터널은 공포 영화의 촬영지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이드는 별생각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설혹 총을 든 강도의 표적이 된다 하더라도 가뿐하게 해치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깡, 깡-.
네모진 지하도에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버린 음료수 캔이 혼자서 바닥에 부딪히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터널에 희뿌연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걷는 속도를 늦추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엔 연기가 차오르는 건가 싶었다. 노숙자나 불량배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터널 입구에서 종종 모닥불을 피우곤 했다.
하지만 시야를 부옇게 가린 연기에는 타는 냄새가 섞여 있지 않았다. 게다가 피부에 휘감기는 수증기가 축축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긴 하나 슬그머니 그의 발목 아래로 고여 넘실거리는 연기는 안개가 분명했다.
제이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서 안개 저편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령이 속삭이듯 굼실거리는 공기가 제이드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터널을 빠져나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지하 미로를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라서 기분이 나빴다. 누군가 수십 대의 감시 카메라를 통해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제이드는 이를 악물고서 안개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계 초침이 더디게 움직였다. 심장박동 수가 빨라졌다. 그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내달리는 소리가 터널을 타고 울렸다. 시야가 가파르게 흔들렸다.
체감상 몇 분은 흐른 것 같은데 시계 초침은 고작 다섯 칸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제이드는 간신히 지하도를 빠져나가는 계단 앞에 당도했다. 하지만 탈출했다는 안도감은 느낄 수 없었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에도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안개 때문에 달빛이 허공에서 흐리멍덩하게 번졌다. 사위가 불길하리만치 조용했다. 심지어 행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지?
숨을 헐떡이며 좌우를 살피는 제이드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모든 게 정체되어 있었다. 굴드가 그림자 괴물을 불러냈을 때처럼 불안했다. 제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대한 존재가 그의 숨통을 물어뜯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랫배가 아파 왔다. 제이드는 지끈거리는 통증을 견디며 허리를 굽혔다. 문신이 있는 자리도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그의 손목을 휘감고 있는 문신이 어둠 저편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를 감지하고서 사납게 날뛸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빵빵!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덩치 큰 지프가 연달아 도로를 내달렸다. 취객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골목으로 꺾어 드는 소리도 들렸다. 거리의 정적은 깨졌고, 자욱했던 안개 또한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이드는 눈을 뜬 채로 꿈이라도 꾼 건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쇠 비린내가 날 것 같은 붉은 달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설마 이게 날 지켜 준 건가…?’
한참 동안 멍하니 바람이 부는 어둠 저편을 바라보던 제이드가 불쑥 제 손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문신이 반응을 보인 순간 안개가 성큼 뒤로 물러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이드를 살펴보던 존재의 기척도 사라졌다. 마치 숲 저편에서 넘실거리는 수십 개의 횃불을 발견한 늑대가 황급히 도망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제이드는 난폭하게 검은색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꺼림칙하다고만 여겼던 문신의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심경이 복잡했다. 그렇잖아도 성당 지하실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가 아픈데, 또다시 이상한 일을 겪어서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단순한 환각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 굴드 때문에 비상식적이고 불가사의한 경험을 했다. 자신은 지금 그때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문신의 존재도 제가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드는 굴드에게 손목을 보여 줄 때 내심 그가 문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결국 굴드도 뱀 문신은 보지 못했다.
인간이 아닌데다가 특별한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굴드의 눈에도 문신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불편한 진실을 시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제이드로서는 손목을 휘감고 있는 뱀 문신이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서 현실로 돌아오라는 듯 청소차가 덜컹덜컹 악취를 뿌리며 멀어졌다. 제이드는 뻣뻣해진 어깨에서 억지로 힘을 빼며 걸음을 옮겼다. 친할머니 같은 소피에게 잔뜩 굳은 얼굴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주변 풍경이 변했다. 행인이 늘어나고 건물이 점점 허름해졌다. 뒷골목에 기생하는 밑바닥 인생들이 밤거리를 방랑했다. 건들건들한 20대 초반 청년들이 자동차를 탄 고객들과 화대를 두고 협상을 벌였다.
문득 조이를 잡아 달라던 피터의 부탁이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소피의 집에 당도하기 위해 슬럼가를 가로지르던 제이드는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쓱 둘러본다고 조이를 바로 발견할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혹시 몰라서 주변을 살피게 됐다.
밤거리가 어두운데다가 다들 엇비슷해 보여서 누가 누구인지 잘 구분이 되질 않았다. 차림새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다 거기서 거기인 느낌이었다. 인도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제이드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슬럼가 어디선가 사건이 벌어졌는지 경찰차가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내달렸다.
조이를 찾는 건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제이드는 발걸음을 내딛는 속도를 높이며 건물 귀퉁이를 돌았다.
까마귀 떼가 골목에서 동물 사체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별 감흥 없이 골목을 지나치던 제이드는 움찔 어깨를 튕겼다. 까마귀 중 한 마리가 돌연 머리를 쳐들고서 제이드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까마귀의 눈동자가 벌레처럼 새빨갰다. 아무래도 돌연변이인 것 같았다.
까악, 까악.
기분이 나빴지만 제이드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새까만 새가 위협적으로 울어 대기 시작했다. 대장 격인 까마귀가 소란을 피우자 다른 놈들도 일제히 고개를 돌려 제이드를 바라봤다.
십여 마리의 까마귀와 눈이 마주쳤다. 제이드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우두머리 한 마리만 눈이 빨간 게 아니라 무리 전체가 핏빛을 띤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덩치도 일반적인 까마귀보다 두 배쯤 컸다.
새빨간 눈동자 수십 개가 어둠 속에서 번뜩번뜩 빛을 뿜어냈다. 그 광경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름 끼쳤다.
“젠장, 오늘 일진이 왜 이따위지?”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며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까마귀들이 홰를 치며 자신을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까 안개 낀 지하도에서 벌어졌던 일도 있고 해서 그는 참을 수 없이 불쾌해졌다.
까악, 까악-!
커다란 새들이 낮게 비행하며 제이드의 머리 위를 선회했다. 놈들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까만 깃털이 우수수 떨어졌다. 신호등 위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이드를 내려다보는 놈도 있었다.
까마귀 무리는 한적한 주택가까지 제이드를 쫓아왔다. 저녁 시간이라 집집마다 불이 들어와 있었다. 행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제이드의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까마귀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한데 등 뒤에서 살금살금 미행하는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제이드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택과 나란히 붙어 있는 차고 외벽에 몸을 숨겼다. 제이드의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작은 그림자가 차고 쪽으로 다가왔다. 제이드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자신을 미행한 남자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
“너, 뭐하는 자식이야. 지하도에서 이상한 수작을 벌인 것도 혹시 네놈 짓이냐?”
제이드가 눈초리를 사납게 뜨고서 낮게 윽박지른 순간이었다.
“제, 제이드. 나예요. 바니!”
등 뒤로 팔을 붙들린 남자가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제이드는 흠칫 놀라 눈을 부릅떴다. 덥수룩한 앞머리로 눈을 가린 음침한 인상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손등을 덮은 긴 소맷자락. 괴한이 밝힌 대로 그는 바니가 틀림없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제이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바니는 잡아 뽑힐 듯 당겨졌던 팔이 아픈지 어깨를 주물렀다. 까악, 까악 허공에 울려 퍼지던 까마귀 울음소리가 자취를 감췄다.
“미안해요. 아까 제이드가 슬럼가를 지나는 걸 우연히 봤는데, 조금 놀래 주고 싶어서….”
바니가 고개를 떨어트리고서 우물우물 변명했다.
“그냥 알은체를 하지 그랬어요.”
제이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헝클었다. 몰래 뒤를 밟은 것은 기분이 나빴지만 화를 내기엔 상황이 애매모호했다. 신경이 날카롭지 않았다면 그냥 웃고 넘길 해프닝이었다.
“알은체를 하려고 하긴 했어요. 근데 말을 걸기엔 거리가 너무 먼 데다가 제이드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서… 미안해요. 그냥 제이드를 봤다고 이야기할걸.”
바니가 괜한 짓을 했다고 중얼거리며 거듭 사과했다. 잔뜩 주눅이 들어 땅이라도 파고들어 갈 기세였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긴장이 풀린 제이드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쫓아 온 사람이 바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됐다. 울상을 지으며 시무룩해하는 바니의 모습을 보니 그가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바니의 왜소한 겉모습은 무력하고 힘없는 작은 동물을 연상케 했다.
제이드는 바니와 함께 남의 집 차고를 벗어나 인도로 향했다. 더 이상 까마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끈질기게 그를 쫓아왔던 까마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재수 없는 까마귀들이 갑자기 왜 자취를 감췄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가신 놈들이 사라져 줘서 다행이었다.
가로등 아래 SUV와 중형 세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주택들이 어깨를 붙이고 있었고 정갈하게 정돈된 잔디밭이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반대편 차선에선 동네 주민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어요?”
코와 입술에 피어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바니가 물었다. 이미 한 차례 손님을 받았는지 머리끝이 젖어 있었다.
“이 근처에 아는 분이 있는데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해서요.”
“그래요?”
바니가 흐음, 하며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제이드는 슬쩍 시간을 확인하며 소피의 집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저 앞에 간병인의 낡은 소형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택이 바로 소피의 집이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어요. 식사 초대를 해 준 분의 집에 다 와서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네요.”
그는 이만 먼저 가 보겠다고 바니에게 말하며 걸음을 떼었다. 제이드는 소피가 차려 놓았을 따끈한 저녁 식사와 호박 파이를 머릿속에 그렸다. 좋아하는 사람과 밥을 먹으며 오늘 하루 찜찜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스테판을 찾는 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저번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로 뭔가 진전이 있나요?”
바니가 음습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제이드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제이드는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아뇨….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꼭 좋은 소식을 들려 드릴게요.”
뒤를 돌아본 제이드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스테판이 실종된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는데 그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바니의 속은 말이 아닐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스테판이 시체로 발견되거나 하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는 매일 아침마다 연고지가 없는 사망자들의 목록을 확인하러 발로 뛰어다녔다.
요새 개인적인 일 때문에 경황이 없긴 했지만, 스테판을 찾는 의뢰를 등한시한 적은 없었다. 틈만 나면 정보를 모으고 스테판과 닮은 사람이 나타난 곳을 뒤지고 다녔다. 자발적으로 사라진 건지, 아니면 납치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그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러들 건 없어요, 제이드. 쉽게 찾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바니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대꾸하며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목적지까지 말동무가 되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제이드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바니의 등을 쫓아 움직였다.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특별한 징후가 나타나진 않았나요?”
바니는 연극배우처럼 빙글 뒤를 돌아 뒤꿈치로 걸었다. 그의 게슴츠레한 시선은 제이드의 납작한 아랫배 쪽에 붙박여 있었다.
“아뇨, 딱히….”
제이드는 왜 그런 걸 묻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종종 배가 아프긴 했지만 남들에게 떠들어 댈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건강을 걱정해 주는 것치고는 바니의 말투가 좀 이상했다.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눈빛도 수상쩍었다. 마치 실험 쥐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흐~응. 아직 육안으로 티가 날 때는 아닌가.”
바니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실실 웃었다. 한동안 성자의 관 때문에 바빴지만 주술이 완성된 지금은 무척 한가해졌다. 그는 제물인 제이드의 몸 상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뭐가 티가 안 난다는 겁니까.”
제이드는 바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설핏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찝찝하고 불길한 예감이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앞머리가 무성한 바니는 여전히 히죽거리며 대꾸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자꾸 아랫배를 쳐다보는 행위가 제이드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는 사람끼리 장난을 치는 거라기보다는 마치 조롱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심지어 바니는 저학년 때 키우던 샬레 속 강낭콩이라도 들여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요리조리 돌렸다. 잘하면 제이드의 복부에 코를 박을 기세였다.
“다음에 뵙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제이드는 딱딱하게 말하며 바니를 지나쳤다.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아까 미행 건도 그렇고 제이드가 언짢아할 요소는 충분했다.
제이드는 바니를 길에 남겨 두고서 성큼성큼 현관으로 다가갔다. 바니가 멋대로 자신을 따라온 거라 혼자 남겨지는 상황까지 배려해 줄 필요는 없었다.
걸음을 옮기며 마당을 휘 둘러봤다. 소피가 직접 돌보는 작은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소피의 성품대로 꽃과 식물들이 소담스럽게 가꿔져 있었다.
“누구세요, 제이드 씨?”
벨을 누르자 문 너머에서 간병인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네, 저예요.”
귀에 익숙한 간병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던 제이드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기대감이 차올랐다. 현관문이 열리면 수줍게 웃고 있는 소피와 크리스마스처럼 온화하고 따뜻한 풍경이 그를 맞아 줄 터였다.
“허드슨 부인이 손이 크셔서 식사 준비를 좀 많이 했는데 딱 맞춰서 오셨네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가볍게 제이드를 포옹하며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제이드의 몫까지 저녁이 차려져 있는 분위기였다.
“어서 와요, 제이드.”
90세가 넘었음에도 여전히 고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소피가 수줍게 웃으며 인사했다. 간병인 아주머니와 포옹을 끝낸 제이드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는 게 기뻤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소피는 제이드를 첫사랑인 찰스가 아닌 제이드 본인으로 인식하는 일이 드물었다.
“소피가 만들었다는 특제 호박 파이, 무척 기대하고 있어요.”
제이드는 소피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그 어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뺨에 입술을 가져갈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기대라니,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 걸요. 생각보다 별로라고 실망하면 안 돼요.”
기대했다는 말 때문에 부담이 되었는지 소피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제이드는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구십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소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소피가 귀여웠다.
“어휴, 춥네. 두 분 다 현관에서 이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앞치마에 두툼한 카디건을 걸친 간병인 아주머니가 현관문을 붙잡고서 재촉했다. 그녀는 간병뿐만이 아니라 가사까지 돌보고 있었다.
제이드는 ‘아, 맞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소피의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현관에서 사람 서넛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웃집에 폐가 될 수 있었다.
“어머, 근데 저 남자는 누구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보내던 간병인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이드는 설마? 하며 다급하게 뒤를 돌았다. 제이드를 첫사랑인 찰스로 인식하고 있는 소피도 살짝 발돋움을 해 두 사람의 어깨 너머로 마당을 내다보았다.
“바니…?”
제이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드는 바니를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도대체 왜 아직도 안 가고 거기 서 있는 거냐는 말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제이드 씨랑 아는 사이에요? 많이… 특이한 친구분이네.”
간병인 아주머니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바니를 위아래로 훑었다. 윤락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니의 너저분한 옷차림과 피어싱이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런 한적한 주택가에선 바니처럼 입고 다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네! 제이드랑 아는 사이에요.”
제이드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간병인 아주머니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바니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쪼르르 계단 앞으로 다가왔다.
“Trick or Treat.”
바니가 뻔뻔하게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탕을 달라는 의미였다. 그의 입가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바니는 제이드가 이맛살을 찌푸린 표정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더욱 곤란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바니, 당신이 애도 아니고 지금 뭐하는 겁니까.”
제이드는 기가 막혔다. 바니가 연달아 벌이는 경우 없는 행동에 이젠 슬슬 화가 날 것 같았다. 심지어 오늘은 핼러윈도 아니었다. 하마터면 험한 말이 나올 뻔했지만 옆에 있는 소피와 간병인 아주머니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바니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이드는 눈에 힘을 줬다. 바니가 또 이상한 돌발 행동을 보이기 전에 어서 돌려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부인? 허드슨 부인? 왜 그러세요.”
제이드가 계단을 내려가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간병인 아주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 당신…!”
소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노기를 담은 그녀의 시선은 바니에게 붙박여 있었다.
“소피, 괜찮아요? 날 좀 봐요.”
제이드가 고목처럼 앙상하게 마른 소피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바니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간병인도 제이드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무래도 소피가 발작을 일으킨 것 같았다.
“흐음.”
바니는 팔짱 낀 자세로 입술에 박은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소피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뭔가 생각이 날듯 말 듯해서 괜히 짜증이 났다.
“소피? 내 말 들려요?”
“제이드 씨, 허드슨 부인 좀 봐주세요. 내가 약을 가져올게요.”
제이드와 간병인은 가슴을 움켜쥐고서 숨을 헐떡거리는 소피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들 혼비백산한 가운데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건 바니 한 사람뿐이었다.
“나쁜 놈! 사, 살인자! 당신만 아니었더라도 찰스 오라버니가 죽는 일은 없었어.”
분노로 부들부들 어깨를 떨던 소피가 힘겹게 소리쳤다.
바니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히죽거리던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소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이드는 당황해서 소피와 바니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계단 아래 서 있는 바니의 뺨이 씰룩씰룩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뭔가 떠올린 사람처럼 섬뜩한 눈을 하고서 소피를 노려보고 있었다.
“찰스 오라버니, 부탁이니까 토드랑 가까이 지내지 말아요.”
소피가 눈을 부릅뜨고서 제이드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바니를 경계하는 그녀의 얼굴에 절박함이 떠올랐다.
“진정해요, 소피. 저 사람은 토드가 아니에요.”
제이드가 주름진 손을 꼭 움켜잡으며 소피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다행히 발작까진 아닌 듯했지만 소피는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소피는 고령이라서 크게 흥분하거나 충격을 받으면 위험했다.
“찰스 오라버니, 속지 말아요! 모르시겠어요? 저 악마 같은 남창이 또 찰스 오라버니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옛날 모습 그대로 돌아온 거라고요.”
소피의 혼탁한 눈동자에 두려움과 증오가 가득 차올랐다.
“허드슨 부인, 잘 보세요, 네? 토드가 저렇게 젊을 리가 없잖아요.”
허둥지둥 소피의 약을 찾아온 간병인이 소피의 입술에 물컵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녀는 치매를 앓고 있는 소피가 또 정신이 헝클어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인상이 음침한 청년을 향해 토드라고 부르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소피는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친지라고 착각하는 일이 잦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제이드를 찰스라고 여기고, 자신을 어머니로 부르는 것처럼 옷차림이 천박한 청년을 보고 남창이었던 토드를 연상한 게 분명했다.
“망할 계집. 어쩐지 어디서 본 거 같더라니.”
한참 동안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던 바니가 음산한 목소리로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침을 퉤 뱉었을 것이다. 소피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던 제이드는 그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도도한 척 굴던 새파란 계집이 그새 쭈그렁 할망구가 됐군. 하긴 80년도 더 됐으니까.
으드득 이를 갈던 바니가 소피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자신에게 삿대질하는 노파의 얼굴에서 앳된 소녀를 떠올렸다. 자꾸 신경에 거슬려서 누군가 했더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며 찰스를 쫓아다니던 그 꼬마 계집이었다.
그는 온갖 선량한 척은 다 해서 사람 배알을 꼴리게 만들었던 찰스만큼이나 소피가 눈에 거슬렸었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녀의 등에 대고 흑인들에게 강간이나 당해 버리라고 저주를 퍼부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역시 자신은 승리자였다.
바니는 피부에 검버섯이 핀 소피를 바라보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장밋빛 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폭삭 늙어 버린 꼴이 유쾌했다. 90세 노파가 된 그녀와 달리 자신은 80년 전과 똑같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연이란 것은 참으로 놀라웠다. 80년이나 흘렀는데 이렇게 소피와 재회하게 됐다는 사실이 바니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가 아직 인간이던 시절에 알고 지냈던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도 오래전이라 그 마을에 모여 살던 인간들은 다들 뒈졌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혹 살아 있더라도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생존자가 웨인 시티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어차피 길에서 마주쳐도 소피처럼 이 빠진 노인네가 돼서 알아보지도 못할 테지만 말이다.
제이드만 이 자리에 없다면 소피를 실컷 비웃어 줄 텐데 아쉬웠다. 늙어 빠진 소피의 눈앞에 거울을 들이밀고 싶었다.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 바스러질 것처럼 메마른 피부, 백내장으로 흐리멍덩한 눈동자. 구십이 훌쩍 넘은 노파의 얼굴에선 그 옛날의 도도한 미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네 말대로 내가 바로 토드라고 귓가에 속삭이면 소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소피가 그렇게 좋아하던 찰스의 비참한 최후를 들려주는 상상을 하자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늙은 몸뚱이로 추하게 울부짖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정체가 노출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고 지껄이든 사람들은 치매 걸린 노파의 헛소리로 치부할 테니까 말이다. 소피는 파르르 떨며 억울해하겠지만, 그 모습 또한 바니에겐 즐거운 유희거리가 되어 줄 터였다.
아아, 자신은 정말 운이 좋았다. 심심해서 제이드의 뒤를 밟았을 뿐인데 이런 즐거운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징조가 좋았다. 곧 이루어질 그와 타나토스의 원대한 숙원을 축하하기 위해 전야제가 벌어진 느낌이었다.
아니지, 전야제 치고 이건 너무 조촐해.
바니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빛났다. 그의 머릿속에는 음흉한 계략이 무궁무진하게 샘솟고 있었다. 이미 세워 둔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떠오른 생각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쯤에서 슬슬 퇴장하는 게 좋겠군.
“나 때문에 소란이 벌어진 것 같네요. 죄송해요.”
바니는 계단 위에서 소피를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제이드와 인간 여자를 향해 외쳤다.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안하단 감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토드! 이 살인자. 해충! 다시는 찰스 오라버니 주변에 얼쩡거리지 마.”
점점 멀어지는 바니의 등에 대고 소피가 외쳤다.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이마 위에서 춤을 췄다.
바니는 가로등이 점점이 늘어선 거리를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기만 할 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가 살인자인 건 맞았다. 그리고 바니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소피에게 살인자 소리를 들으니 심기가 뒤틀렸다. 게다가 찰스를 죽인 건 아이작 루테니아지 바니가 아니었다. 미치광이 아이작에게 찰스를 던져 준 건 그였으니 영 관련이 없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말이다.
돼지 멱따는 것처럼 꽥꽥 시끄러운 할망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바니는 걸음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봤다. 난동을 부리던 소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담한 주택의 현관문도 닫혀 있었다. 제이드와 뚱뚱한 인간 여자가 노파를 어르고 달래서 집 안으로 데려간 것이다.
주택가가 고요해졌다. 바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피가 맺힌 것처럼 불그스름한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푸드덕, 푸드덕.
자취를 감췄던 까마귀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바니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까만 깃털이 커튼콜의 꽃가루처럼 떨어졌다.
원래는 서너 명 정도 남자를 상대할 생각으로 외출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을 겪어서 더 이상 여흥이 필요 없었다. 그는 지하실에 얌전히 누워 있는 성자의 관들을 떠올렸다.
바니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서 제 팔 위에 내려앉은 까마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까마귀의 새빨간 동공이 굼실굼실 물결쳤다. 작고 꿈틀대는 것이 까마귀의 눈에서 툭 떨어졌다가 원래 있던 자리로 기어 올라갔다. 눈이 있어야 할 부위에 박혀 있는 것은 안구가 아니었다. 날개가 달린 시뻘건 벌레들이 저희끼리 몸을 부딪치며 눈구멍 안에 우글우글 뭉쳐 있었다.
근래에 바니가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바로 성자의 관이었다. 역 봉인진을 완성한 그는 알을 보살피는 어미 새의 마음으로 성자의 관을 지켰다. 아니, 어미 새라기보다는 일개미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여왕개미의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맞을 듯했다.
조만간 오서독스들이 긴 잠에서 깨어날 터였다. 심연에 감금되어 있던 시체들이 일어나 이 도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광경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두근두근했다. 자신의 거처로 향하는 바니의 발걸음은 날아갈 것처럼 유쾌하고 가뿐했다.
***
커튼이 드리워진 아담한 주택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집주인의 성격을 반영하는 아담하고 단아한 집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실내 분위기는 어둑했다.
“허드슨 부인이 잠드셨어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안방의 문을 닫고 나오며 말했다. 그녀는 약을 먹고 간신히 잠든 소피가 깰까 봐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엉거주춤하게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제이드는 침통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니를 보고 진저리를 친 소피는 결국 기진맥진해서 쓰러지고 말았다. 식사를 할 기력이 남아 있기는커녕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증세가 악화되면 병원 응급실에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잠들었다니 다행이었다.
“요리는 접시에 담기만 하면 되는데… 혼자서라도 식사하고 가는 게 어때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제이드와 소피는 풍족한 식탁 앞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녀는 간간이 대화에 끼어들며 접시를 나르고 말이다.
“아뇨.”
제이드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단순히 배를 채울 생각으로 소피의 집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밥은 어디서든 먹을 수 있었다. 제이드가 기대했던 건 소피와 함께하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저녁 식사였다. 소피가 만든 요리를 좋아하긴 했지만, 너른 식탁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밥을 먹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소피는 한 번도 가족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제이드에게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럼 싸 줄 테니까 챙겨 가요. 아시다시피 이 집에 사는 사람은 허드슨 부인과 나뿐이라 먹을 사람도 없고, 상하면 죄 버려야 되니까.”
간병인 아주머니가 조금만 기다리라는 듯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녀는 제이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방으로 총총 들어가 버렸다.
넉살 좋고 인심 많은 간병인 아주머니는 소피만큼 제이드에게 신경을 써 주곤 했다. 어머니뻘인 그녀는 제이드가 조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제이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부산하게 음식을 싸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기가 민망해서 제이드는 소파에 앉는 대신 주방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라도 도와 드릴게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싱크대에 다가갔다. 덜그럭덜그럭하고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쏴아아 하고 그릇을 씻어 내는 소리가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번잡하기 짝이 없는 식당 주방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가서 앉아 있어요, 제이드 씨.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부산하게 요리를 반찬 통에 옮겨 담으며 간병인 아주머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자에게 설거지를 맡겨 봤자 제대로 하는 법이 없어서 못 미덥다는 표정이었다.
“저 설거지 잘해요.”
제이드는 간병인 아주머니의 말은 못 들은 척하고 수세미에 세제를 뿌렸다. 그는 고등학생 때 레스토랑에서 하루에 수백에서 수천 개씩 접시를 닦는 아르바이트를 숱하게 해 본 경력자였다. 그릇을 깨 먹거나 기름기를 남기는 등, 간병인 아주머니가 걱정하는 사태는 벌어질 턱이 없었다.
“어머, 정말 잘하네. 우리 집 아들이 제이드 씨 반만큼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제이드가 빠른 속도로 접시를 닦는 모습을 보고 간병인 아주머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착착, 접시를 쌓는 손놀림은 군더더기 없이 능숙하고 신속했다.
“치킨 샐러드에 뿌릴 소스는 이 작은 병에 담았어요. 매쉬드 포테이토는 까먹지 말고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하고요, 이 볶음 요리는 따끈한 게 맛있으니까 데워서 먹으세요. 그리고 파이는 상온에 보관해도 괜찮긴 하지만 차게 먹는 게 맛있을 거예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쇼핑백에 반찬 통을 담으며 당부했다. 소피가 직접 구운 빵도 꾸역꾸역 밀어 넣어서 제이드의 두 손은 금방 묵직해졌다. 이삼일은 밖에서 밥을 사 먹지 않고 거뜬하게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참, 아까 그 청년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혹시 친군가?”
제이드를 현관문까지 배웅 나온 간병인 아주머니가 슬쩍 물었다. 요란한 차림새에 인상도 나빠서 그녀는 토드로 오해를 산 청년이 썩 마뜩잖았다. 마약 살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전형적인 정키 같은 외모였다.
“제 의뢰인 중 한 명이에요….”
제이드는 고개를 떨어트리고서 대답했다. 바니 때문에 충격을 받은 소피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소피의 행동에 바니도 놀랐겠지만, 제이드로서는 바니에게 원망스러운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바니가 몰래 따라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니의 성격이 조금 특이한 건 알고 있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비상식적인 대답이 돌아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바니가 이 정도로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인 성격일 줄은 몰랐다.
이번 일을 통해 바니가 사뭇 다르게 보였다. 제이드는 보통 일이 끝나도 의뢰인들과 친구로 지내거나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바니는 연락하고 지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반찬 통이 가득 든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붉은 달은 구름에 가렸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열쇠로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간 제이드는 냉장고에 반찬 통을 채워 넣었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집에 가서 바로 먹으라고 당부했던 요리를 식탁에 차렸다.
포크로 깨작깨작 생선 요리를 건드렸다. 꼬르륵 소리가 멈추지 않을 정도로 배가 고프긴 한데 도통 식욕이 나질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상황이 싫었던 탓이다.
제이드는 꾸역꾸역 배를 채우고서 포크를 놓았다. 허기는 사라졌지만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무기력하게 접시를 들고 일어서던 그는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싱크대 옆에 내려놓은 호박 파이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소파에 던져뒀던 재킷을 후다닥 챙겨 입었다. 호박 파이를 도로 상자에 집어넣은 제이드는 그걸 들고 곧장 집 밖으로 나갔다. 파이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서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얼굴엔 걱정과 설렘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마음이 급한 제이드는 낙엽이 소복하게 쌓인 밤거리를 전력 질주했다. 상자 속에서 파이가 이리저리 쏠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파이가 찌그러질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며 팔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제이드가 뛰는 이상 상자가 흔들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제이드는 뛰다가 멈춰 서서 파이가 무사한지 종이 상자를 열어 보고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마치 첫 배달을 나온 피자 배달부라도 된 기분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거리를 내달리는 제이드의 몸에선 땀이 났다. 굴드가 사는 동네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엔 춥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굴드가 집에 있어야 할 텐데.
제이드는 횡단보도에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거라 굴드가 부재중일까 봐 걱정이 됐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전화를 걸지 않은 건 굴드를 깜짝 놀래 주고 싶어서였다. 벨을 눌렀을 때 문을 열고 나온 굴드의 표정이 기대됐다. 굴드가 아파트 복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제이드도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집에 없으면 뭐 어때. 기다리면 되지.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제이드는 허리를 좌우로 돌린 후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굴드가 사는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건물들은 유리창에 띄엄띄엄 불이 들어와 있지만 굴드의 거주지는 완벽한 어둠이라 밤이면 더욱 도드라졌다.
어?
제이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신부님이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버리는 모습을 본 것이다. 바닥에 버려진 꽁초가 가느다란 흰 연기를 흘리며 깜빡깜빡 점멸했다. 신부님이 쓰고 있는 안경의 유리가 가로등 불빛을 날카롭게 반사했다.
신부님의 비행을 목격한 제이드는 당황해서 어버버거렸다. 신부님이 저렇게 당당하게 담배를 길거리에 버려도 되나? 거리가 멀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이 회색빛인 걸 보니 나이가 지긋한 신부님인 게 분명했다.
태연하게 담배꽁초를 버린 신부님이 검은 세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대사관의 대사가 타는 승용차처럼 번호판이 특이했다. 하지만 대사관이나 정부, 군 소속의 차는 아니었다. 정부나 군 장성들이 타는 차의 번호판이라면 어디 소속인지 바로 식별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기관의 번호판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신부님이 이 시간에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좀 이상했다. 혹시 친구나 친지의 집을 개인적으로 방문한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배기량 큰 검은 세단이 매연을 뿌리며 출발했다. 제이드는 자동차의 빨간 미등이 잔상을 남기고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내디뎠다. 전에 편의점에서 본 젊은 신부님도 그렇고, 담배를 피우는 성직자분이 은근히 많은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 앞에 섰다. 굴드의 집 앞에 도착한 제이드는 파이 상자를 고쳐 들며 벨을 눌렀다. 두근두근했다. 굴드의 목소리가 언제쯤 들려올지 궁금했다. 지하층에서 책을 읽거나 연극 대본을 읽는 중이라면 금방 인터폰으로 대답할 테지만, 다른 층에 있다면 굴드가 계단을 내려오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는 느긋하게 두 번째 벨을 울렸다. 그런데 현관문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둑? 아니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제이드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인터폰을 받은 것도 아닌데 굴드가 벌써 현관까지 올라왔을 리는 없었다.
“안에 누구 있…?”
혹시 굴드를 방문했던 손님이 밖으로 나오는 건가 싶었다. 제이드는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며 문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면서 짜증 섞인 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무슨 일이지? 성자의 관 말고도 아직 용건이 남아 있는 건가.”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린 굴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이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굴드가 이렇게 빨리 문을 열어 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무래도 그를 다른 사람으로 오해한 눈치였다.
“벨을 누른 사람이 당신이었습니까?”
굴드가 제이드를 보고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제이드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 한 얼굴이었다.
“넵. 누가 왔었나 봐요?”
굴드가 무방비하게 놀란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왠지 재미있었다. 제이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잡상인이 귀찮게 굴어서 말입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굴드는 금세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잡상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제이드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부드러웠다. 굴드가 반겨 줘서 제이드는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굴드를 만나러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찜찜했던 일들을 전부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언제 찾아와도 자신을 환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었다.
“이 시간에 외판원이라니, 특이하네요.”
굴드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굴드가 예상보다 일찍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제이드보다 먼저 방문했던 잡상인 때문인 모양이었다. 굴드는 문을 걸어 잠그고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벨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되돌린 게 분명했다.
“아마도 실적에 쫓기는 잡상인이었나 봅니다.”
굴드가 낮게 웃으며 제이드가 들고 있는 상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건 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노부인이 곧 있으면 핼러윈이라고 만들어 주신 호박 파이에요.”
제이드는 함빡 미소를 지으며 얼른 상자를 열어 보였다. 파이 가장자리 부분이 조금 갈라지긴 했지만 늙은 호박을 갈아 만든 퓌레가 탐스러운 황금빛을 띠었다. 파이 두께도 한 뼘 가까이 될 정도로 두꺼웠다.
“맛있어 보이는군요.”
굴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죠? 소피가 평소에도 과자나 케이크를 자주 구워 주는데 유명 제과점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그렇습니까.”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굴드의 눈빛은 점점 험악해졌다. 타인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다람쥐처럼 받아먹으며 헤프게 미소 짓고 있는 제이드의 모습을 상상하자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제이드, 커피 좀 내려 주시겠습니까.”
지하층으로 내려온 굴드는 서랍에서 베이커리 나이프를 꺼내며 그렇게 말했다. 제이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그는 다정하게 웃고 있는 굴드가 호박 파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위잉, 위잉, 하고 에스프레소 머신이 흑갈색 액체를 흘려보냈다. 제이드는 컵을 갖다 대고서 두 사람 분량의 커피를 받았다.
“그런데 이 파이는 차갑게 식혀서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군요.”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섞는데 굴드가 파이를 조각내던 손을 멈추며 말했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차게 식혀서 먹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낸 건 제이드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굴드는 제이드가 노파가 만들었다는 파이를 먹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로사 아주머니가 냉장고에 넣었다가 먹으라고 했었지.”
제이드는 간병인 아주머니가 했던 조언을 떠올리며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파이와 함께 마실 커피까지 준비가 다 된 상황이었지만, 기왕이면 가장 맛있는 상태로 먹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한 시간 정도 있다가 꺼내면 되겠죠?”
제이드가 긍정의 의사를 내비치자 굴드는 미련 없이 호박 파이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네, 아마도.”
제이드가 들고 있는 커피 잔 두 개를 빼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가 잠들고 나면 눈에 거슬리는 호박 파이를 치워 버릴 작정이었다. 내일 아침, 제이드가 왜 버렸냐고 그에게 묻겠지만 곰팡이가 피어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면 그만이었다.
“참, 아까 요 앞에서 신부님을 봤어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제이드가 말했다.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이 지긋한 신부님이 담배꽁초를 버리던 모습이 제이드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편의점에서 보았던 회색 머리카락의 신부님도 그에게 충격을 주긴 했지만 지금과는 경우가 달랐다. 그때는 젊어서 아직 번뇌를 다 떨치지 못했나 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습니까.”
커피 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굴드가 설핏 눈썹을 찌푸렸다.
제이드는 굴드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보고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드가 뱀파이어란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굴드와 떨어져 있을 땐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고민도 하고 이런저런 상상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정작 굴드와 함께 있으면 그의 얼굴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굴드가 오컬트의 영역에 속한 존재란 사실을 잊어버렸다.
“어두워서 잘못 본 걸 수도 있어요. 곧 핼러윈이라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닌 사람이었겠죠.”
제이드는 허둥지둥 상황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뱀파이어 영화나 소설을 보면 신부님 중에 엑소시스트가 많았다. 가십지에 실린 기사긴 하지만 교황청에는 불가사의한 존재들을 퇴치하는 부서가 실존한다는 내용을 읽은 적도 있었다. 굴드는 십자가를 만져도 아무런 타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신부들과는 상극일 가능성이 컸다.
“가톨릭 신부들에게 퇴마당할 일은 없으니까 긴장 풀어요, 제이드.”
물끄러미 제이드를 바라보던 굴드가 피식 웃었다. 마치 제이드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은 대답이었다. 제이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떻게 알았지? 라는 표정을 하고서 펄쩍 엉덩이를 떼었다.
“그들과 난 적대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깝게 지내는 편이죠. 꽤 오랫동안 교류해서 서로의 고충도 들어줄 정도로 말입니다.”
굴드는 싱긋 웃으며 제이드의 반응을 즐겼다. 제이드가 저 조막만 한 머리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권능을 쓸 필요도 없었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제이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제이드가 사고하는 흐름이 단순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게 진짜입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켜서 움찔했던 제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굴드의 말이 사실인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뱀파이어와 신부가 친하게 어울린다니, 선뜻 상상이 가질 않았다. 꼬꼬마 때부터 상식이라 믿어 왔던 어떤 것이 와르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은폐한 각종 음모론의 실체를 지구상에서 혼자서만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굴드가 퇴마사 신부님들에게 쫓기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다행이었다. 제이드는 굴드가 뱀파이어란 사실을 알고 나서 내심 뱀파이어 헌터가 나타나서 굴드를 죽이려고 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네. 진짜니까 안심해도 됩니다.”
굴드는 크게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커피 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자신이 헌터들에게 쫓길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제이드 때문에 자꾸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나중에 뱀파이어가 악당으로 나오는 액션 영화를 제이드와 함께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드는 영화 내용에 당황해서 스크린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굴드는 극장에 앉아 있는 내내 저를 흘끔거리며 노심초사하는 제이드를 상상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를 찾아와 징징거리던 성황국 소속 잡상인의 존재 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왠지 놀림당한 것 같은데?
제이드는 이마를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오디오 시스템이 정지 상태로 켜져 있었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기자 탁자에 펼쳐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외판원 때문에 굴드가 읽다가 내려놓은 책인 듯했다. 제목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집어 들었다. 두껍고 고풍스러운 표지에 <맥베스>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만 들어 봤지 맥베스를 책으로 접한 건 처음이었다. 제이드는 굴드가 읽다가 중단한 페이지부터 한 장씩 뒤로 넘겼다. 일반적인 서적과 달리 대사와 지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제이드는 눈으로 대사를 읽으며 굴드의 차기작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연극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연극을 본 건 굴드의 무대가 처음이었지만, 그는 굴드의 연기에 한눈에 반했다. 흡사 뭐에 홀린 것처럼 그 넓은 무대 위에서 오로지 굴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굴드의 공연을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제이드는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까마귀도 이 성에 들어오는 던컨 왕의 운명을 알리러 쉰 목소리로 울어 대는구나. 자, 너희 악령들아, 여자의 여린 마음을 없애다오.”
굴드의 듣기 좋은 중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제이드가 눈으로 대충 훑고 있던 부분이었다.
“더 읽어 드릴까요.”
굴드가 제이드의 손에서 책을 가져가며 물었다. 제이드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굴드가 굵은 저음으로 대사를 낭독하는 것을 더 듣고 싶었다. 제대로 연기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짤막하게 대사를 읊어 준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대극장에서 공연을 보고 있는 것처럼 발끝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설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서운 잔인성으로 가득 채워다오. 전신의 피를 혼탁하게 하여 회한의 길을 틀어막고, 연민의 정이 잔악한 계획을 동요시키지 않게 해다오. 그리고 내가 실행과 계획 사이에서 타협하지 않게 해 다오.”
조금 전에 읽다가 중단한 맥베스 부인의 대사를 굴드가 다시 읊기 시작했다. 나른하면서도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제이드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굴드의 얼굴에 눈길을 붙박았다. 눈을 내리뜬 굴드의 속눈썹을 만지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눈앞에서 책을 읽어 주는 굴드가 심각하게 아름다웠다. 굴드와 알게 된 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드는 그의 완벽한 외모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앞으로도 그의 잘생긴 얼굴이 지겹게 느껴지거나 익숙해지는 날은 올 것 같지 않았다.
굴드의 저음은 맹인들을 대상으로 만든 오디오 북처럼 단조로웠지만, 그럼에도 맥베스 부인의 광기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눈을 내리뜨고서 책을 읽던 굴드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제이드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소파 팔걸이에 머리가 닿아 있었다. 제이드는 굴드를 올려다보며 꿀꺽 생침을 삼켰다. 굴드의 새파란 눈동자 때문에 주박이라도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굴드가 고개를 숙여 제이드에게 키스했다. 쪽쪽 쪼는 듯 가벼웠던 입맞춤은 금세 농염해졌다. 굴드의 차가운 손이 셔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는 움직임은 느릿했지만 혀가 맞닿은 곳은 충분히 질척질척했다.
제이드가 소파에 있는 리모컨을 팔꿈치로 잘못 눌렀는지 오디오가 재생 상태로 바뀌고 스피커에서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이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No.17 in D minor, Op.31-2 ‘템페스트’ 1악장이었다. 템페스트라는 부제는 마법사 프로스페로의 이야기를 다룬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The Tempest> 때문에 붙여졌다. 골드문트 사社의 음향 기기는 3층 높이의 지하 공간을 섬세한 피아노 소리로 가득 채웠다.
“살이 좀 빠졌군요.”
정성 들여 제이드의 허리를 쓰다듬던 굴드가 입술을 떼어 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래요? 난 잘 모르겠는데.”
격정적인 키스 때문에 숨을 헐떡이던 제이드가 제 허리와 복부를 더듬었다. 그가 보기엔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확실히 허리 사이즈가 줄었습니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나 윤곽이 예전보다 허전했다. 허벅지도 더 가늘어졌다. 원래 마른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허리가 한 줌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뭐지? 요새 하도 많이 먹어서 살이 쪘으면 쪘지, 빠질 일이 없는데.
제이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체중계가 없는 탓에 몸무게를 재 본 지 오래됐다. 제이드도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체중에 무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굴드의 말을 듣고 보니 청바지가 부쩍 헐렁해진 것 같기도 했다.
“어디가 아프거나 한 건 아닙니까?”
굴드가 좀 더 집착적으로 제이드의 골반이며 허벅지를 더듬었다. 불시 검문이라도 하는 헌병 같은 손길이었다. 제이드의 식욕이 왕성하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잘 먹고 있는데도 살이 빠진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뇨, 없는데.”
제이드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도 이 상황이 의문스러웠다. 근래에 그의 칼로리 섭취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 영양분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배 속에 살로 갈 영양분을 악착같이 빼앗아 가는 블랙홀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흠, 이상한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회충약은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먹고 있는데 뭐가 문제인 거지?”
굴드에게 애무 아닌 애무를 받으며 제이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쩐지 세기의 미스터리와 직면한 기분이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엉뚱한 겁니까.”
제이드가 턱을 문지르며 곰곰이 고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굴드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내가 뭘요?”
소파에 드러누운 제이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회충 운운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성배는 놀랄 만큼 육감이 날카롭다가도 간혹 지금처럼 맹하고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 사소한 간극이 굴드를 제이드에게 미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굴드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며 다시 제이드에게 입을 맞췄다. 제이드의 체중이 준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앞으로 더 잘 먹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바지 지퍼를 내려 제이드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제이드가 얕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제이드의 목을 더듬었다. 가늘고 긴 목이 그의 색욕을 자극했다. 새하얀 피부 위로 봉긋 솟은 목젖이 숨을 쉴 때마다 작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 또한 선정적이었다.
제이드의 아담스 애플을 잘근잘근 깨물며 상의를 벗기던 굴드는 돌연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이드의 소매 끝에서 희미하게 축축한 안개 냄새가 났다.
잉크 냄새처럼 텁텁하고 불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증발되어 날아가기 직전인 안개 조각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굴드는 이 안개 냄새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굴드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성자의 관이 웨인 시티에 있다며 필사적으로 협조를 요청하던 성황국의 잡상인 놈의 면상이 떠올랐다. 굴드는 차분하게 으드득 이를 갈며 문전박대했던 펠릭스를 내일 다시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
제이드의 옷깃에 배교자의 안개 냄새가 밴 것은 단순한 우연일 가능성이 컸다. 죽은 자들이 자신의 성배인 제이드의 주변을 얼쩡거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제가 아닌 다른 존재의 흔적이 그을음 냄새처럼 제이드 옷에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불쾌하고 찝찝했다.
LP의 트랙이 바뀌고, 빗소리 같은 잡음이 섞인 고요가 잠시 스쳤다. 하지만 정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거대한 스피커에서 <템페스트 3악장>이 흘러나왔다. 소나타 선율은 폭풍우라는 이름 그대로 거침없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붉은 달이 구름에 가렸다가 다시 일그러진 얼굴을 내밀었다.
어둑한 거리는 바람 한 점 없이 괴괴했다. 바니는 피 묻은 입술을 혀로 날름거리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가 피를 빨고 버린 여성의 시체가 눈을 부릅뜬 채 바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나 싸늘한 시신이 된 그녀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어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두둑하게 배까지 채우고 나니 기분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횡단보도 앞에 선 바니는 아까 죽인 여자의 지갑에서 돈만 쏙 빼고 잡다한 신분증과 카드 등을 하수구에 버렸다. 가짜 샤넬 지갑 따위나 들고 다니는 여자라 돈도 몇 푼 들어 있지 않았다.
바니는 춤이라도 추듯 겅중겅중 걸음을 내디디며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마치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 나오는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관 속에 처박힌 체스 말들은 언제쯤 부화할까. 늦어도 주말까지는 관에서 기어 나오겠지?
앞머리가 덥수룩한 바니는 병정개미가 끈적끈적한 알을 까고 나오는 광경을 상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성자의 관에 봉인된 오서독스들은 그에게 있어서 킹과 퀸을 잡는 데 이용할 병정개미에 불과했다. 고고하신 오서독스들은 자신이 한낱 서번트에 불과한 바니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거처에 도착한 바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잡이를 잡았다. 문고리를 돌리던 바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굳게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열려 있었다.
장, 그 병신 새끼가 또 문을 잠그는 걸 잊어버린 건가.
바니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중인데도 마치 낯선 곳에 침입하는 것처럼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불온한 기운이 실내에 감돌았다.
설마?
바니가 입술을 깨물며 다급하게 지하실로 향했다. 그는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직접 공들여 쳐 놓은 방사형의 거미줄이 누군가의 거친 손길에 찢겨져 나간 느낌이었다.
지하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빈틈없이 피로 쓴 붉은 글씨 때문에 지하실에선 역한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지금은 피 냄새 따위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도미노처럼 나란히 놓인 성자의 관 중 하나가 열려 있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이런 일이….”
충격을 받은 바니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뚜껑이 열린 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속을 들여다보는 바니의 눈동자에 짜증이 스쳤다. 역시나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봉인이 풀릴 때가 안 되었는데 오서독스가 깨어나 버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하루 이틀 안에 깨어날 예정이었으니까.”
바니는 동요를 억누르며 입술에 달고 있는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오서독스를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봉인이 풀릴 때가 다 되긴 했지만 오서독스가 혼자 힘으로 심연의 쇠사슬을 끊고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참 동안 성자의 관을 감시하듯 주시하던 바니는 주근깨가 가득한 콧잔등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너무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와 타나토스가 함께 준비한 계획이 이까짓 일에 틀어질 리 만무했다.
쿵-.
벽이 울리며 지하실 문이 닫혔다. 복잡한 피의 봉인진 위에 위치한 두 개의 관은 쥐죽은 듯 잠잠했다. 세 번째 관처럼 예정일 전에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간 바니는 제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거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두 마리는 잠들어 있지만 한 마리가 깨어났다. 꼬리가 잡히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는 오서독스들을 풀어놓기만 하면 될 뿐, 놈들과의 접점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귀찮은데 확 불을 질러 버릴까?
위선자 찰스가 아이작에게 피를 빨려 뒈지고, 아이작도 숨을 헐떡거리며 제 눈앞에서 죽어 가던 그날 밤도 바니는 방화로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불을 지르고서 재빨리 도망치던 그의 입가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진지하게 건물에 불을 지르려고 했던 바니는 잠시 고민을 하고 나서 생각을 접었다. 팔십 년 전하고는 상황이 달랐다. 지하실이 불탈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성자의 관이 그깟 불에 타 훼손될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건물이 잿더미가 된 다음이었다.
화재가 일어나면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인간들이 몰려들 테고, 지하실의 문을 억지로 열려고 들 것이 빤했다.
바니는 덥수룩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성가시지만 짐을 싸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물건들을 죄다 가방에 쓸어 넣던 그는 천으로 감싼 커피 잔을 집어 들며 빙그레 웃었다. 유리잔에는 입술 자국과 지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꼼꼼하게 짐을 정리한 그는 물리적인 결계를 현관문에 걸었다. 도둑이나 강도 같은 침입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밖으로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장의 집이었다. 이 시간에 가방을 질질 끌고서 들이닥치면 장은 크게 당황할 테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