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실된 기록에 대한 회고 (15/27)

막시밀리안은 늘 형님이 두려웠다.

소름 끼치게 냉정하고 잔혹하며 피에 젖어도 아름다운 볼텐슈테른 대공. 그 사람이 바로 막시밀리안의 형님이었다.

그는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날씨가 화창했던 어느 여름날, 막시밀리안은 황제가 주최한 여우 사냥에 참석했다. 둘째 황자와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모두 모인 그곳에 형님도 있었다.

사냥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리기 직전에 막시밀리안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웃는 법이 없는 형님이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고삐를 그러쥔 채로 얼어붙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 자리에서 벗어나면 너도 죽는다는 형님의 눈빛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피의 대주교라 불리는 볼텐슈테른 대공을 거역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탐욕스럽기만 한 황제도.

결국 여우 사냥이 벌어져야 할 숲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햇살에 반짝이는 신록이 무상했다. 숲을 적신 황태자파 귀족들의 피가 더욱 선명해 보였다. 둘째 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 중에서도 무사한 이는 몇 없었다. 살해당한 이들은 둘째 황자 내에서도 알게 모르게 볼텐슈테른 가문을 견제하는 세력들이었다.

둘째 황자는 겁먹은 눈으로 형님을 보았다. 검은 말에 올라탄 볼텐슈테른 대공의 발치에는 늙은 황제의 시체가 짐승처럼 늘어져 있었다. 형님의 등 뒤로 황태자의 목을 창끝으로 찔러 올리는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귀족들의 시체가 꼬챙이에 꿰어졌다. 십자군 전쟁터만큼이나 참혹한 광경이었다.

“즉위를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형님은 피로 물든 하얀 손을 내밀어 둘째 황자에게 담담하게 축하를 건넸다. 둘째 황자가 형님의 손을 잡았는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혼절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역겨운 피 냄새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건 막시밀리안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볼텐슈테른 대공이 왜 직접 권좌에 오르지 않는지에 대해서. 형님에게는 황위를 찬탈할 힘도, 권력도, 명분도 충분히 존재했다. 백성들은 잔인하지만 능력 있고 아름다운 볼텐슈테른 대공을 황제보다 존경했다.

막시밀리안은 형님이 황제 자리에 관심이 없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형님의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 권태에 찌들어 있었다. 그 무엇도 형님을 진심으로 즐겁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볼텐슈테른 대공이 되기 전부터 형님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황제 다음으로 고귀한 핏줄, 재기와 부, 권력. 인간의 땅에서 그의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거의 없었다. 세속적인 영락은 형님에게 무가치하고 무의미했다.

형님은 늘 권위적이고 차가웠으며, 마음 저 깊은 곳이 메말라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형님의 혈육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남들보다 볼텐슈테른 대공을 자주 대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님 앞에 서면 오금이 저리고 불안해서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심장이 멈춰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형님과 마주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으니까.

대공 자리에 오른 뒤에도 형님은 대공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딱히 색을 멀리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침소에 들르는 여자가 매일 밤 바뀐다는 이야기는 비밀도 아니었다.

그러나 형님은 여자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여인에게 밀어를 속삭이지 않는 냉혹한 성품 때문에 미소년을 좋아하는 취향이 아니냐는 소문이 종종 돌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성교 중에 침소에 든 여인을 학대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 또한 진실과 달랐다.

그다지 물욕이 없는 형님이었지만 서책은 달랐다. 형님이 사라센 왕국에서 탈취해 온 전리품 속에는 난해한 언어로 필사된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르토스의, 프롤레마이오스의 , 알 킨디의 , 무하마드 이븐자카리야 아르라지의 ….

핏빛을 머금은 궤짝을 형님이 손에 넣은 것도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였다.

지식과 진리에 탐닉하는 형님은 범상치 않은 핏빛 궤짝에 한동안 푹 빠져 지냈다. 궤짝을 내놓으라고 고상하게 협박하는 교황과 마찰을 빚었다. 피를 흘린 건 형님이 아니라 교황 쪽이었다. 볼텐슈테른 대공은 파문이라는 비장의 카드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일기를 뒤적거렸다. 삭은 종이가 당장에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로웠다. 창문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양초의 심지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막시밀리안의 침실은 황혼만큼이나 어두웠다.

일기장을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그래, 이날이다.

막시밀리안은 드디어 찾았다는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얼굴을 하고서 종이에 코를 박았다. 형님이 손수 적은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공인 형님보다 먼저 혼인한 막시밀리안은 그 당시 부인과 두 아이를 데리고 영지 외각으로 분가한 상태였다.

당시의 불안감이 필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는 형님이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부른 건지 몰라 초조하다는 기록을 종이에 남겼다. 일기장에 펜을 놀린 글씨가 물 밖으로 건져진 물고기처럼 흔들거렸다. 형님은 속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눈 밖에 나면 가족이라 하더라도 가차 없이 숨통을 끊고도 남았다.

그는 하룻밤을 꼬박 설치고 대공이 머무는 성으로 향했다. 아내와 어린 두 아들에게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은연중에 남겼다. 마차에 오르는데 손이 덜덜 떨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볼텐슈테른 성은 언제 봐도 웅장했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임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풍요롭고 질서 정연하지만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막시밀리안을 짓눌렀다.

장엄한 성 곳곳에서 형님의 기운이 배어 나왔다. 대공의 취향은 고상하고 탐미적이었다. 아치형 창문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막시밀리안의 얼굴 위로 기둥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너른 회랑과 복도에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옥의 입구로 인도하는 사신 같았다.

제발… 무사히 이 문턱을 걸어 나올 수 있기를.

막시밀리안은 생침을 삼키며 대공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하고 경첩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차마 형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그의 심장을 비틀어 쥐었다. 막시밀리안은 유리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보다 형님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형님이 무슨 말을 꺼낸다 한들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났다. 막시밀리안은 어젯밤부터 마차를 타고 성까지 오는 내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정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죽음과 고문, 유폐. 혹은 어린 두 아들을 볼모로 바치라는 명령. 볼텐슈테른 대공에게는 가솔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막시밀리안.”

하지만 형님이 입술을 열었을 때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었다. 혼란에 빠진 그는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에게 대공 자리를 물려주겠다니, 함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 번 더 말하지. 오늘부터 네가 볼텐슈테른의 통치자다.”

형님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팔을 비틀어 쥐었다. 막시밀리안은 숨을 삼켰다. 햇살이 훤히 비치는 유리창 때문에 눈이 부셨다. 하지만 형님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형님이 웃는다는 건 아주… 그리고 몹시 나쁜 징조였다.

“어, 얼마나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실 겁니까.”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형님은 평생 네 직분을 다하라는 말만 남기고서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막시밀리안은 순수하게 이 상황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을 짓누르는 공기가 버거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건 전부 핏빛을 띤 성궤 때문이었다. 이단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양피지가 형님을 타락시키고 어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막시밀리안은 볼텐슈테른 대공이 인간의 이름을 버렸다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문밖으로 뛰쳐나가 형님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만류한다고 해서 냉혹한 대공이 한 번 내린 결정을 되돌릴 리 만무했다. 형님에게 중요한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 누구도 저 오만한 남자의 심장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끼이익-.

시종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와 양초를 바꿨다.

침침한 눈으로 일기를 읽어 내려가던 막시밀리안은 책장을 덮었다. 웅크린 그의 어깨 너머로 두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대공 자리를 계승한 이후 다시 그린 자신의 초상화였고, 다른 하나는 형님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일기장을 서랍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끗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침울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낀 늙은 손등은 고목나무 껍질처럼 메마르고 푸석푸석했다.

“내 아우. 막시밀리안.”

회한에 잠긴 채 거울을 들여다보던 노인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기척도 없이 누군가 대공의 방에 침입한 것이다.

“형님.”

막시밀리안이 눈을 부릅뜨고서 뒤를 돌았다.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운 얼굴이 정면에 보였다.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인물은 막시밀리안 한 사람뿐이었다.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초상화 속의 젊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남자는 산 자와 달리 거울에 인영을 비춰 볼 수 없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죽음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노인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는 차갑게 식은 손끝을 움켜잡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볼텐슈테른 대공으로서 반평생을 살아왔건만 그는 아직도 형님이 두려웠다.

“너는 몰라보게 달라졌군.”

여전히 아름다운, 아니,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진 그의 형님이 담담하게 감회를 털어놓았다. 메마르고 냉정한 성품은 예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형님에게 영생과 고대의 지식을 약속한 자는 신이 아니라 악마였다. 성정이 더 차가워졌으면 차가워졌지 시간이 흘렀다 해서 만인을 따스하게 품는 성자가 될 일은 없었다.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노쇠한 몸이라 공무도 이미 제 아들들이 수행하고 있습니다. 형님은 성배를 찾는 순례를 마치신 겁니까?”

막시밀리안은 주름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오서독스는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까마득한 존재였다. 하지만 형님은 타나토스의 대리자가 아닌 타나토스 자체가 되길 갈망했다. 한 차원 높은 지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선 성배의 피가 반드시 필요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막시밀리안은 형님의 대답에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안도와 안타까움.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님이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삶을 벗어난 형님은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홀로 방랑해야 하는 걸까. 늙어 버린 막시밀리안은 눈가가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형님은 자신이 고독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만나러 와 주신 겁니까.”

덧창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촛불이 휘청거리며 막시밀리안의 늙은 얼굴을 비췄다. 형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공 자리를 버린 남자가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동생의 물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터였다.

“감사합니다. 가문을 통솔할 능력이 부족한 절 줄곧 뒤에서 돌봐 주고 계셨다는 것, 알고 있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한숨 쉬듯 중얼거리며 조용히 웃었다. 비록 혈육에 대한 정은 없어도 형님은 가족에게 의무를 다했다. 동생의 장례식이 치러진 이후에도 형님은 계속 가문이 몰락하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 줄 것이 분명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는 건 막시밀리안의 후손이 아닌 형님이 될 테니까.

부디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방에 혼자 남은 막시밀리안은 일기장을 태웠다. 먼 훗날 형님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생기길 기도하면서. 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인간이던 시절에도 형님은 누군갈 사랑해 본 적 없는 황폐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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