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잠들어 있던 항구가 부산해졌다. 유리창을 코팅한 검은 세단과 사륜구동 지프가 속속들이 도착했고,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조등이 어둠을 밝혔다.
새까만 바다가 전조등의 불빛을 반사하며 고요하게 굽이쳤다. 어디 소속인지 모를 험상궂은 요원들이 귀에 인이어를 꽂고서 자리를 지켰다. 분위기가 긴박했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항구에 정박한 한 개인 요트였다.
범죄가 일어난 모양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해양 경비대나 경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라 밤공기가 싸늘했다. 불필요한 소음은 일절 들리지 않았다.
검은 양복 차림을 한 요원들 말고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신부님들이 서넛, 독특한 무기를 소지한 용병 같은 남자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윗선에서 잔뼈가 굵은 헌터들을 배치했다. 그러나 정작 이 상황을 수습할 팬저 기사단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택시가 현장에 나타났다. 요원 두세 명이 택시를 돌려보내기 위해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나 요원들은 곧 걸음을 멈췄다. 안경을 낀 신부가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요트 주변을 서성이던 신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서 오시오, 펠릭스 형제.”
“성자의 관은 발견했습니까?”
은행 직원처럼 3 대 7 가르마를 탄 젊은 신부가 요트에 오르며 물었다. 새벽에 연락을 받자마자 부랴부랴 비행기에 오른 펠릭스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성자의 관은 없었다네.”
안토니오 신부가 침통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고개를 저었다. 펠릭스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는 눈빛을 하고서 요트의 계단을 내려갔다.
가파르고 좁은 통로를 내려가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생물이 부패하면서 뿜어내고 있는 악취였다. 법의학 해부실이나 시체 안치소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냄새이기도 했다.
펠릭스가 눈짓을 보내자 검은 양복을 입은 요원들이 그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자리를 비켰다. 선실 바닥에는 갓 무덤에서 파낸 것처럼 심하게 훼손된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펠릭스는 장갑을 끼고서 시체를 슬쩍 뒤집었다. 물에 불린 쌀 같이 보이는 새하얀 구더기들이 시체의 옷과 마룻바닥에 달라붙어 굼실거렸다. 자해를 시도한 것 같긴 했지만 둔기나 날붙이로 인한 상해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몸 안쪽에서 작은 벌레가 부드러운 장기를 파먹은 후 피부를 뚫고 나온 흔적들이 대부분이었다. 안구와 혀를 벌레들이 파먹어서 얼굴이 푹 꺼져 있었다. 시체에서 멀쩡한 부분은 하얗게 센 머리카락 정도가 다였다.
“자코모 라이몬디.”
무릎을 꿇고서 주검을 관찰하던 펠릭스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측하게 훼손이 되었지만 벌레에 파묻힌 채로 그의 눈앞에서 썩어 가고 있는 남자는 신앙교리성의 전 차관이 맞았다. 내부 소행일 것이라는 아벤 굴드의 말이 맞아떨어져서 입맛이 썼다.
자코모는 돌연 휴가를 냈다가 교구로 귀환하지 않고 연락 두절이 된 상태였다. 단순한 실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코모가 차관 시절에 확보했던 정보들을 유용해서 성자의 관을 외부로 빼돌린 동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자의 관을 어느 지역에서, 누구에게 넘겨줬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자코모를 이용하고 버린 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법이 악랄했다. 선실에는 자코모가 괴로움에 몸부림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부서진 시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물건들, 벽에 길게 남아 있는 손톱자국. 바다 위였기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벌레가 몸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뇌까지 타고 올라갔을 땐 고통만 느낄 뿐 사고란 걸 할 수도 없었을 테지만.
펠릭스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담뱃재를 시체 위에 털었다. 자코모를 동정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놈이 뒈지기 전에 붙잡아서 관련 정보를 자백 받지 못한 게 짜증이 날 뿐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성자의 관을 회수해 총명하고 고귀하신 교황 성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싶었다. 펠릭스를 양자로 들인 건 기네비어였지만 몸도 마음도 병든 그녀를 대신해 실제로 어린 펠릭스를 돌보고 관심을 쏟아 준 사람은 요제프님이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며 금고와 쓰레기통 따위를 뒤졌다. 언젠가 잡힐 날을 대비해서 증거를 인멸했는지 정보가 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옷장을 열자 드라이클리닝 된 사제복이 걸려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 어딘가 정박해서 며칠을 머물렀다는 의미였다. 펠릭스는 세탁소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제복을 끄집어내 침대 위에 던졌다.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냉장고를 열자 블루베리 파이가 담긴 상자가 보였다. 자코모는 단 음식을 좋아했다. 저녁때 간식으로 먹으려고 샀으나 그 전에 죽은 모양이었다.
펠릭스는 장갑 낀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밑바닥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빙고.”
그는 종이 상자에 낀 영수증을 떼어 내며 담배를 개수대에 던졌다. 영수증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는 저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찼다. 자코모가 블루베리 파이를 구매한 베이커리의 주소지가 웨인 시티였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철수해.”
영수증을 구긴 펠릭스는 서둘러 요트를 빠져나왔다. 자동차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셨다.
항구에 들를 때와 달리 요원들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또 비행기를 탈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지만, 한시가 급했다. 성자의 관은 웨인 시티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리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더위 때문에 한동안 가을 같지가 않더니 비로 인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신호등엔 빨간불만 켜져 있었고 교통 체증은 심각했다. 병원 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버스에서 내린 제이드는 병원을 방문하기 전에 음료 세트를 샀다.
비가 와서 그런지 병원 복도가 복작복작했다. 휠체어를 탄 입원 환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고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걸음을 재우쳤다. 너스 스테이션을 지나친 제이드는 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찾아간 병실에는 피터가 누워 있었다.
“젠장,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이면 뺑소니라니.”
온몸에 깁스를 한 피터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목에 보호대를 찬 제이드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피터에게 빨대를 물려 줬다. 괴물처럼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피터는 고개를 까딱 움직이는 것도 힘겨워했다.
“…뺑소니 당한 건 확실해?”
제이드는 피터가 이리저리 내팽개쳐지던 광경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날 밤 피터를 만신창이로 만든 사람은 굴드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피터는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짐작이 가는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도 굴드가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도대체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굴드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나야 모르지. 술에 취해서 기억이 없었으니까. 뭐, 목격자 말에 따르면 트럭에 치여서 붕 날아갔다고 하더라고.”
피터는 트럭에 치였는데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자신이 목에 깁스를 한 상태라는 사실을 잊고 있던 피터는 어깨를 들썩이자마자 ‘아으으’ 신음을 흘리며 낯을 찌푸렸다.
“저기, 제이드. 나 지금 엄청 흉측하지?”
피터가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제이드가 병문안을 온 건 정말 기뻤다. 하지만 추한 몰골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피터는 속으로 붓기라도 빠졌을 때 오면 좀 좋아, 라며 투덜댔다.
“병원에는 얼마나 있어야 돼?”
간병인이 쓰는 간이 의자에 앉은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금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였고, 백인이었다. 나이는 한 스물쯤 되어 보였다. 제이드가 오기 전부터 피터 옆에 있던 걸 보면 꽤 친한 친구인 듯싶었다.
“몰라. 몇 달은 꼼짝없이 병원에 붙들려 있어야겠지, 뭐.”
피터는 저절로 약을 끊게 생겼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럼 너 병원에 있는 동안 스쿠터 내가 쓰면 안 돼?”
갈색 머리 청년이 침대 쪽으로 의자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제이드는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갈색 머리 청년은 마치 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꺼져. 기껏 병문안 와서 한다는 소리가 스쿠터 빌려 달라는 거냐!”
“에이, 그러지 말고. 어차피 너 병원에 있는 동안 놀리는 거잖아. 열쇠고리도 안 떼고 공주님처럼 잘 모실게.”
피터의 친구가 앵앵대며 애교를 피웠다.
“싫어. 넌 보험도 가입 안 했잖아.”
두 사람은 스쿠터를 빌려주네 마네, 하며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이 친구는 누구야? 소개를 못 받은 거 같은데.”
제이드가 갈색 머리 청년을 가리켰다. 분명 어디서 본 거 같긴 한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응? 전에 봤잖아. 기억 안 나? 나 조이야.”
피터가 대답하기 전에 갈색 머리 청년이 먼저 대꾸했다.
“조이?”
제이드가 눈썹을 비틀었다. 클럽에서 제일 시끄럽게 난동을 부렸던 여장 남자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평범하고 키 작은 남자와 짙은 화장에 수다스러웠던 조이를 매치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 미안. 화장을 지워서 못 알아봤어.”
제이드가 멋쩍은 얼굴로 사과했다.
“너무해! 내 화장이 그렇게 두꺼워? 남들은 다 알아본단 말이야!”
조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 상처 받았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는지 손수건을 꺼내 우는 시늉도 했다.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걸 보니 확실히 동일인물이 맞구나 싶었다. 병실이 소란스러워지자 건너편 침대에서 환자를 돌보던 가족이 커튼을 들추며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다.
“참, 내가 되게 징그러운 이야기 해 줄게. 내가 아까 자판기 커피 뽑으러 갔다가 간호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조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괴담이라도 들려줄 것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피터가 귀를 쫑긋 세우며 흥미를 드러냈다. 제이드는 흥미 위주의 괴담에 맞장구를 쳐 줄 기분이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생각해서 조이의 이야기에 억지로 귀를 기울였다.
“어제 어떤 환자가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글쎄, 그 사람 장기에 머리카락이랑 이빨이 달려 있었대.”
“야! 뻥 치지 마. 그게 말이 되냐?”
피터가 머릿속으로 종양의 모습을 상상했는지 진저리를 쳤다. 제이드도 피터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사람 몸속에서 머리카락이나 치아 따위가 자라난다는 소리는 여태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분명 시체 안치소의 시체가 벌떡 일어났다는 둥의 근거도 없는 헛소문이 분명했다.
“어허,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진짜라니까? 나도 대빵 신기해서 의사한테 확인까지 해 봤어. 겸사겸사 연락처도 받았지, 히히. 여하튼, 그걸 뭐라고 부른다더라. 테라… 토, 테마토. 에이 씨, 뭐였지?”
조이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피터는 그런 친구를 흰 눈으로 쳐다봤다. 의사에게 물어봤다는 말도 다 뻥이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테라토마Teratoma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흔치는 않은데 실제로 일어나는 케이스기는 해요.”
체온을 재러 병실에 들른 간호사가 시큰둥한 태도로 한마디 툭 던졌다. 제이드와 피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맞아요. 그거예요.”
조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는 거봐, 내 말이 맞지? 라는 표정으로 우쭐거렸다.
“둘이서 짜고 사기 치는 거 아니에요?”
피터가 똥 씹은 얼굴로 간호사에게 물었다.
“내가 왜 쓸데없이 환자한테 거짓말을 해야 하죠? 정 못 믿겠으면 담당 선생님이 회진 도실 때 물어보든가 하세요.”
간호사가 체온계를 할아버지 환자에게 꽂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저기, 간호사 선생님. 테라토마가 정확히 뭡니까.”
제이드가 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몸속에서 머리카락과 치아가 자라기도 한다는 게 진짜라니, 충격이 컸다. 그의 뱃속에도 막 괴생명체가 기생하고 있을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팔꿈치 안쪽도 근질근질해서 벅벅 긁고 싶은 기분이었다.
“종양이고 비정상적으로 분화한 체세포예요. 기형종이라고도 불리는데, 모든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어서 머리카락과 치아뿐만이 아니라 손톱도 종양 표면에 생기기도 하죠.”
제이드와 피터는 꿀꺽 생침을 삼키며 간호사의 설명을 경청했다. 두 사람 모두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기형종은 생식세포에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주로 정소나 난소에서 치아나 손톱이 자라난 테라토마가 발견돼요.”
의학 지식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이드는 종양이 모든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다는 말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머리카락 정도로 끝나지 않고 안구나 손가락 같은 것도 몸 어딘가에서 자라날 수 있다는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 종양이 장기로 변할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면 인간이 되다 만 괴물로 진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의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비웃음을 당하겠지만 제이드는 진지했다. 혹시 제 몸속에서도 눈, 코, 입이 달린 괴물이 자라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목덜미에 닭살이 돋았다.
세상엔 별의별 사건이 다 벌어졌다. 과학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불가사의한 현상이나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던 일도 실제로 일어나곤 했다.
마치 굴드가 검은 괴물을 불러냈던 것처럼 말이다.
제이드는 병실에 한 시간 정도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상에 미라처럼 누워 있는 피터를 보고 있으려니 입맛이 썼다.
“제이드, 다음에 또 같이 클럽 가자. 이 녀석은 병원에 처박혀 있어야겠지만.”
조이가 깁스에 낙서하며 손을 흔들었다.
제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건 곤란할 것 같다고 거절했다.
무의식적으로 손목 보호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날 클럽에 같이 가지만 않았어도 피터가 저렇게 누워 있을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술에 취해 억지로 키스를 하려고 한 피터에게도 잘못은 있었지만 과실에 비해 벌이 너무 혹독했다.
병원 입구로 나온 제이드는 우산을 펼쳤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인해 기분이 한층 더 우중충해졌다. 엊그제 사건 때문에 그는 격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망상이고 현실인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병실에 누워 있는 피터를 만나고 나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사실 피터는 정말 교통사고를 당한 거고, 그날 밤 있었던 일은 전부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제이드는 버스에 앉아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굴드와 감정싸움을 벌인 이후로 계속 가슴에 납덩이가 얹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굴드가 인간과는 조금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덤덤하다기보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쪽이 맞을지도 몰랐다.
제이드는 경찰이 한꺼번에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몰려든 날 아침을 떠올렸다. 밤사이 건물 유리창과 가로등, 자동차 유리가 전부 다 깨져 있어서 아침부터 큰 소동이 벌어졌다.
유리창 아래로 펼쳐진 거리 풍경이 어수선했다. 연달아 들리는 사이렌 소리가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었다. 유리창을 등진 제이드는 굴드에게 며칠 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동안 굴드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 그가 알고 지내던 아벤 굴드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문제가 아니었다. 제이드는 굴드가 그날 밤 해명은 들을 생각도 않고 자신을 강간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를 가장 실망케 한 것은 굴드가 제 기억을 지우려 했다는 점이었다. 제이드가 두려워할까 봐 손을 썼다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굴드는 기억을 지우려고 하기 전에 저와 대화해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굴드는 그저 자신을 설득하는 게 귀찮았던 것뿐이었다.
허탈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제이드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빗물로 흐릿해진 창밖을 멍하니 내다봤다.
그는 굴드가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워서 이젠 제가 굴드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진짜인지조차 의심이 갔다. 굴드를 좋아한다는 감정도 사실은 굴드가 심어 놓은 거짓된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싹터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굴드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정말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 감정이 거짓이라면 굴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신뢰가 무너져 버렸다. 제이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굴드를 볼 자신이 없었다.
버스 운전기사가 히터를 틀었는지 실내에 따뜻한 공기가 돌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완전히 낯설었다. 제이드는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딴 데 정신을 두고 있던 탓이었다.
그는 벨을 누르고서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산을 펼치며 버스에서 내리는데 얕은 물보라가 그의 신발을 덮쳤다. 오토바이가 도로에 고인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면서 솟구친 물보라였다.
오토바이가 사과도 없이 저만큼 멀어졌다. 등 뒤에 대고 욕을 해 봤자 들릴 것 같지도 않았다. 제이드는 짜증을 느끼며 집으로 향했다. 옷이 많이 젖은 건 아니지만 흙탕물이 튀어서 새로 꺼내 입은 바지를 또 빨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욕실에서 빨랫비누로 바지를 빨았다. 바지 밑단만 지저분해진 거라서 세탁기에 돌릴 정도는 아니었다. 물기를 꾹 짜서 바지를 너는데 벨 소리가 들렸다.
“제이드! 할로윈 코스튬 좀 골라 줘. 뭘 입을지 도저히 모르겠어.”
해리가 거대한 여행용 캐리어를 질질 끌며 제이드의 아파트로 난입했다. 비도 오는데 바리바리 짐을 싸서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집념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리창이 왜 저래. 무슨 공사라도 해?”
빵빵하게 부푼 캐리어를 내려놓고서 한숨 돌리던 해리가 발코니 유리창을 가리켰다. 유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두꺼운 공업용 비닐이 덮어씌워져 있었다. 제이드가 날카롭게 조각난 유리를 죄 떼어 내고 창틀에 비닐을 테이프로 고정해 둔 것이다.
“그런 건 아니고. 사고가 좀 있었어.”
제이드는 해리의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이긴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믿어 주지 않을 게 빤했다. 제이드가 해리 입장이었어도 무슨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거냐고 인상을 찌푸렸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약이라도 한 거냐고 해리를 추궁하거나.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유리창을 깨고 튀었구만. 하여간 이 동네 치안은 개떡 같다니까. 경찰에 신고는 했지? 어떤 새낀지는 모르겠지만 잡으면 꼭 유리값 다 받아라. 요새 통유리가 얼마나 비싼데!”
해리는 자기가 봉변이라도 당한 것처럼 분개하며 캐리어에서 코스튬을 꺼냈다. 활짝 입을 벌린 캐리어 안에는 스타워즈의 등장인물인 다스베이더 헬멧에 스톰트루퍼, 사탄의 인형 처키, 제이슨의 전기톱(당연히 모형이었다), 가위손 등등, 별의별 분장 소품이 다 들어 있었다. 제이드는 해리의 여행용 가방이 터질 것처럼 빵빵해져 있던 이유를 비로소 납득했다.
“어떤 게 나아? 카우보이는 식상한가. 터미네이터 T-10000은 데이빗이 한다고 했으니까 패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우 씨, 그건 재작년에 했는데.”
해리는 온갖 의상을 집 안에 늘어놓고서 패션쇼를 벌였다. 뱀 껍질처럼 벗어 던진 코스튬이 바닥에 쌓여 갔다. 제이드는 부산하게 이 옷을 입었다 저 옷으로 갈아입는 해리를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해리의 머리는 정전기 때문에 엉망진창으로 뒤집어져 있었다. 오래 걷는 것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녀석인데 저럴 체력이 어디서 난 건지 궁금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 하지그래? 재작년에 네가 뭘 입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 같은데.”
제이드는 식탁 의자를 거꾸로 뒤집어 앉은 채로 지킬 박사를 추천했다. 해리를 보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굴드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자신을 기만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상처 받았지만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를 억지로 덮쳤던 사람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굴드와 끝내는 건 더 괴로웠다. 질질 끌어 봤자 저만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이드는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이번 사건과는 별개로 그는 굴드와의 관계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섹스 파트너도,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사이 때문에 그는 줄곧 혼란을 느꼈다. 자주 만나고 가깝게 지냈지만 감정적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느낀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저 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매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굴드는 자신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신기하고 진기한 애완동물 취급하고 있었다.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상대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데에 지쳤다. 굴드는 제이드에게 잘 대해 주기는 했지만 마음을 전부 허락한 적은 없었다. 그는 굴드에게 있어서 첫 번째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기억 못 하긴! 야,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5년 전에 입었던 의상이 구렸다고 뒤에서 두고두고 씹히는 게 이 바닥이야.”
해리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냐며 삿대질했다. 그러고는 다시 코스튬을 집어 들어 어느 게 낫냐고 물었다.
“왼쪽. 아까 게 더 나은 거 같아.”
제이드는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해리는 왜 이리 건성이냐며 그를 닦달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제이드의 시선이 아득해져 버렸다. 제이드의 몰골은 실연을 당해 넋이 나간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너 무슨 일 있냐. 혹시 굴드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해리가 팔짱을 끼고서 제이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녀석인데 꼭 이럴 때만 예리해졌다.
“아무 일 없어.”
정곡을 찔린 제이드는 움찔 어깨를 튕겼다.
“아무 일도 없기는 개뿔. 표정 보면 사이즈 나와, 인마.”
해리가 혀를 차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치 수금을 하러 나온 조직의 똘마니 같은 포즈였다.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그냥 속 시원히 털어놔. 우리 사이에 뭐 어때. 나도 숀이랑 문제 생길 때마다 너 붙잡고 상담하잖아.”
제이드는 입을 꾹 다물고서 시선을 피했다. 평범한 연인 사이의 다툼이라면 그도 해리에게 조언을 구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굴드와 그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정말 별일 없어. 그보다 할로윈 코스튬 말이야. 정 할 게 없으면 셜록 홈즈는 어때?”
제이드는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이, 말 돌리지 마.”
해리가 눈썹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잠깐만, 셜록 홈즈? 그거 나쁘지 않은데?’라고 중얼거리며 미끼를 물었다.
“내가 홈즈 하고 숀이 왓슨 박사를 하면…. 으음. 숀이 왓슨 박사를 하려고 할까? 튀는 걸 좋아하는 애라 분명 싫다고 할 텐데.”
다시 코스튬 쪽으로 관심이 쏠린 해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캐리어 주변을 서성거렸다. 어떻게 하면 숀과 세트로 코스튬을 입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해리가 제게서 흥미를 거두자 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투둑, 투두둑 하고 빗방울이 비닐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제이드는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빗물이 흘러내리는 비닐을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성당 지하실에서 목격했던 단편적인 영상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피로 쓴 글씨로 뒤덮여 있던 벽, 지옥까지 닿아 있을 것 같았던 나선형 계단, 그를 추격하던 적군의 군홧발 소리. 그날 일이 전부 생각난 건 아니지만, 그림 퍼즐의 조각처럼 단편적이고 무질서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흩어져 버렸다.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일 년 전 사건이 갑자기 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기억이 되살아난 타이밍이 석연치 않았다. 굴드와 일 년 전 전투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상했다.
제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의 손목에 기묘한 문신이 생긴 건 마지막 전투를 겪고 난 다음이었다. 그는 빌어먹게 섬세한 문신의 존재가 항상 꺼림칙했다. 꼭 노예의 낙인처럼 느껴져서 불길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 데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지울 방법도 마땅치 않은 문신이 달갑게 느껴질 리 없었다.
해리는 할로윈 코스튬 후보를 엄선하는 데 지쳤는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던 해리는 옆으로 길게 누운 채로 제이드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뭔가 달라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 제이드, 시계 어디 갔어? 노상 차고 다니더니, 없어졌네.”
해리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시선은 소매 아래로 보이는 손목 보호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뭐가 달라진 건지 한참 고민했는데 싸구려 시계가 사라졌다. 제이드와 알고 지낸 이래로 시계를 차지 않은 모습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잃어버렸어.”
제이드는 해리가 던져 놓은 옷들을 정리하다 말고 타월 재질의 손목 보호대를 만지작거렸다. 공중화장실에서 시계를 잃어버렸지만 경황이 없어서 새 시계를 사지 못하고 있었다.
급한 대로 손목 보호대를 끼긴 했는데 예전과 다르게 꼭 필사적으로 가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굴드 때문에 딴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문신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지워 버리고 싶었던 문신이 사라지고 있는 건 분명 잘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 년 전 사건의 기억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구궁-.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비닐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제이드는 장대비가 폭우로 바뀔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테이프로 단단히 막아 놓긴 했지만 그래 봤자 임시방편이었다. 밤새 강한 바람이 불거나 하면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군대에서 입던 제복 아직도 가지고 있어? 이상한 무늬 있는 전투복 말고 왜 행사 때 입는 거 있잖아. 넥타이에 훈장이랑 휘장이 주렁주렁 달려서 뽀대 나는 옷!”
비가 샐까 봐 창틀에 붙인 테이프를 확인하고 있는데 해리가 멋대로 옷장을 열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게 성가신 부탁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건 또 왜. 할로윈 때 빌려 달라고?”
“야, 날 뭐로 보고! 내가 그 정도로 개념 없진 않거든?”
해리가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부정했다. 내심 그런 생각을 해 보긴 했던 모양이었다.
“하여튼 있어, 없어?”
해리가 졸졸 쫓아다니며 캐물었다. 해리가 자꾸 귀찮게 굴자 제이드는 인상을 찡그리고서 창고에 쌓아 둔 상자를 뒤졌다. 엄청 끈질긴 녀석이라 찾아 주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때까지 달달 들볶을 게 빤했다. 왜 군복 타령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차라리 한 번 보여 주고 마는 게 나았다.
제이드가 먼지가 쌓인 상자를 꺼냈다. 해리는 두근두근하는 얼굴로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상자를 열자 퀴퀴한 나프탈렌 냄새가 콧속으로 끼쳐 들었다. 제대 후 군복을 꺼내 본 건 제이드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 이게 진짜구나. 숍에서 파는 가짜랑 느낌이 완전 틀린데?”
해리는 차분한 녹색 빛이 감도는 육군 정복이 신기한지 연신 탄성을 흘렸다. 호기심 많은 고양이처럼 휘장과 부대 마크, 계급장을 요리조리 찔러보고 안쪽 주머니를 뒤집어서 주기표를 살펴보기도 했다.
주기표에 정복을 지급받은 날짜와 번호가 적혀 있어서 제이드는 괜스레 옛 생각이 떠올랐다. 딱히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만.
“제이드, 이거 훈장이지? 혹시 TV에 나오거나 한 적은 없어?”
“없어.”
해리는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다. 약장과 기장의 차이가 뭐냐, 이 배지는 무슨 의미냐, 등등. 제이드는 괜히 보여 줬다는 생각을 하며 뒤늦게 후회했다. 수류탄을 다룰 때 무섭지 않았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캐물어 대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입어 보고 싶으면 입어 봐.”
제이드는 어떻게 하면 해리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군복을 입어 보게 해 주면 거기에 주의가 쏠려서 질문이 쏙 들어갈 거라 예상한 것이다.
“뭐? 진짜 그래도 돼?”
해리가 눈을 부릅뜨며 제이드를 쳐다봤다. 목소리 톤이 올라간 것이 꽤 흥분한 기색이었다.
“어.”
제이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에게 있어서 군복은 옛 직장의 작업복일 뿐, 별다른 의미 따위는 두고 있지 않았다.
“…음, 아냐. 그냥 안 입을래.”
당장에라도 재킷을 걸쳐 볼 것처럼 들떴던 해리가 제이드의 눈치를 살피더니 손에서 제복을 내려놓았다. 정작 제이드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지만 해리는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입고 싶으면 입어. 진짜 괜찮으니까.”
제이드는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하고 커피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퍽 쌀쌀했다.
“잠깐만! 나도 괜찮으니까 대신 네가 입어 봐.”
해리가 제이드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제이드는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난 왜 또 걸고넘어져. 알았어. 빌려줄 테니까 가지고 가.”
“아,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 어차피 내가 입어 봤자 태도 안 날 게 뻔한데. 그냥 궁금해서 그래. 네가 군인이었을 때 사진은 한 번도 안 보여 줬잖아.”
해리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정말 군복을 빌려 달라고 이러는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안 보여 줬었나?”
제이드는 기억을 더듬으며 턱을 긁적거렸다. 하긴 군대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군 복무 시절에 찍은 사진들은 전부 상자 안에 집어넣어 놨다. 게다가 그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어! 안 보여 줬어. 그러니까 얼른 입어 봐.”
해리가 장난감 사 달라고 생떼를 부리는 어린애처럼 제복이 든 상자를 들이밀었다. 제이드는 그냥 사진이나 보여 줄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디에 처박아 뒀는지도 알 수 없는 사진을 찾겠다고 또 창고를 뒤지기가 귀찮았다.
더군다나 해리 성격이면 사진을 보여 주고 난 뒤에도 군복을 입어 보라고 졸라 댈 가능성이 컸다. 해리는 보기보다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숀에게 그렇게 호구 취급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만 봐도 해리가 얼마나 끈덕진 성격인지 알 수 있었다. 제이드는 두 번 귀찮아지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군복을 입어 주고 끝내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제이드는 셔츠를 벗고서 상자 안에 든 제복을 집어 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군복이라면 지긋지긋했는데 이젠 꽤 낯설게 느껴졌다. 근무복이나 전투복과 달리 정복은 별로 입을 일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미 그린색 와이셔츠를 입은 제이드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단추를 채웠다. 상자에 처박아 놓고 관리를 안 해서 그런지 와이셔츠가 조금 구깃구깃했다. 군 복무 시절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셔츠든 바지든 일과가 끝나면 칼같이 다려서 옷장에 걸어 놓곤 했으니까.
넥타이를 매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해리가 상자 안에 든 구두까지 신어 보라며 설쳐 댔다. 정말이지 성가시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제이드는 짜증이 났지만 기왕 해리 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제대로 차려입기로 마음먹었다. 해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랍에서 양말까지 찾아와 들이밀었다.
“이제 됐냐?”
상자에서 굴러다니느라 찌그러진 베레모를 쓰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머리가 길어서 그런지 베레모를 쓴 모습이 어색했다. 별생각 없이 기르고 있었는데 조금 자를 때도 된 것 같았다.
“…어, 어, 응….”
해리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친구라는 사실도 잊고 예복 차림을 한 제이드에게 설레고 말았다. 셔츠에 구김이 가긴 했지만 그의 예상보다 훨씬 멋있었다. 몸매가 죽여주는 데다가 각이 딱 잡혀 있어서 무지 섹시했다.
“역시 남자는 제복이 최고구나.”
해리는 곧은 자세로 서 있는 제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방정맞게 가슴이 뛰었다. 저 혼자만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드는 늘어진 셔츠를 입고 있어도 사람 홀리는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녀석이긴 했지만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격식에 맞게 제복을 갖춰 입자 남자다운 느낌이 한층 강해졌다. 해리가 제이드를 처음 만났을 때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숀은 깨끗이 잊고 그에게 반했을지 몰랐다.
“제이드. 너 할로윈 때 뭐 입을지 아직 안 정했지?”
“어, 왜.”
제이드는 베레모를 벗어 상자에 던지며 대꾸했다. 해리의 말대로 그는 할로윈 의상 같은 건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그럴 정신도 없거니와 할로윈이라고 해서 딱히 파티나 퍼레이드에 참여할 마음도 없었다. 단골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이나 마시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할로윈 때 이대로 입고 나와라.”
“싫어.”
제이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해 달라는 대로 해 줬으니 이제 좀 조용해지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제이드는 이대론 끝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엔 강하게 나갔다.
“쳇, 치사하게.”
억지를 부려도 통하지 않자 해리가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제이드가 진짜 화를 내면 무서웠기 때문에 군복을 코스튬 대용으로 입히겠다는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어쩌다 제대하게 된 거냐. 근속 기장을 보니까 꽤 오래 근무한 것 같은데, 경력이 아깝지 않아?”
해리는 제복을 입은 채로 커피를 마시는 제이드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제이드가 군복을 입은 모습을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몰랐기에 지금 실컷 감상해 두어야 했다. 연인도 아닌 그냥 친구지만 쫙 빼입은 제이드를 보고 있으려니 괜히 흐뭇했다.
“떠도는 게 지겨워서. 한군데 정착하고 싶었거든.”
제이드는 속내를 절반만 털어놨다. 제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여러 가지로 사정이 복잡했다. 민간인 사살이나 전쟁의 참상에 염증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남들에게 떠벌릴 만한 게 못 되었다.
“아, 맞다. 너 얼른 결혼하고 싶어 했지.”
해리가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은 아벤 굴드를 만나고 있었지만 제이드는 원래 스트레이트였다. 제이드는 아벤 굴드와 그렇고 그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입버릇처럼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해리는 제이드가 굴드와 거시기한 관계가 된 게 신기했다. 제이드는 남자를 연애 상대로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자가 저를 이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제이드가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해리를 비롯한 제이드의 지인들 입장에선 오스웰 UFO 사건과 맞먹을 세기의 미스터리였다. 아벤 굴드가 제이드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한번 만나 보라고 부추기긴 했지만 정말 두 사람이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
“심부름 서비스 말고 경력을 살리는 쪽으로 직업을 바꿔 보는 건 어때? 기왕이면 양복이나 제복 입는 일들로.”
해리가 흑심이 담뿍 담긴 충고를 슬쩍 흘렸다. 제이드가 만날 청바지나 주워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오늘 보니 제복이 무서울 정도로 잘 받았다. 남자나 여자나 제복을 입으면 호감도가 올라가기 마련이긴 하지만 저 정도로 잘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다. 해리는 제이드가 근사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자주 보고 싶어졌다.
“글쎄, 난 지금이 편하고 좋아.”
제이드가 제복 재킷을 벗으며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제대 후 이대로 실력을 썩히긴 아깝지 않느냐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한 탓이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퇴역 군인은 어디서든 환영받았다. 특히 체첸이나 세르비아 출신 마피아들이 그에게 눈독을 들였다.
불법적인 일에 손대기 싫은 거라면 경호 업체로 들어와도 된다고 진지하게 권유한 마피아 간부도 있었다. 의료보험도 되는 합법적인 회사였다.
마피아의 제안대로 경호 업체에 들어갔다면 지금처럼 월세 걱정하며 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능한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탄창을 확인하고, 화약 냄새와 기름 냄새를 달고 사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제대 후 경찰이나 용병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결혼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안정된 직업이 있는 게 좋지 않아? 지금이야 혼자 살고 있지만.”
“그건 그렇지.”
제이드는 검은빛을 띤 커피를 내려다보며 힘없이 대꾸했다. 그의 표정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렇잖아도 기분이 심란했는데 해리의 말을 듣고 나니 저 아래로 끝없이 침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었는데 굴드를 만나는 동안엔 결혼의 ‘결’ 자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굴드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던 모양이었다. 잔디가 깔린 2층짜리 주택, 건강한 아이들, 마당에서 뛰어노는 개, 가정주부인 아내. 이 모든 것이 어렸을 때부터 그가 꿈꿔온 평생의 소망이었는데 굴드만 옆에 있다면 전부 포기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제이드는 해리 때문에 다시 한 번 감정의 깊이를 자각했다.
우르릉 쾅!
바닥이 울릴 정도로 크게 천둥이 쳤다. 그 소리에 놀란 해리가 커피를 쏟았다. 제이드는 걸레를 찾기 위해 빨래 통을 뒤졌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열어 줄게. 누구세…!”
해리가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그 순간 번개가 번뜩 허공을 갈랐다. 문턱을 가운데 두고 방문객과 마주 선 해리는 눈을 부릅떴고, 실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굴드가 음산하리만치 서늘한 눈으로 해리를 내려다봤다. 중저음의 목소리에선 반가운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리는 뱀 앞의 쥐처럼 사색이 되었다. 오래간만에 뵙는다는 간단한 인사말이 당장 꺼지라는 협박보다 위협적으로 들렸다.
“하, 하하. 마침 나가 보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제이드, 난 이만 가 볼게. 둘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뒷걸음질 치던 해리가 급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행 가방 지퍼가 잘 올라가지 않아 옷이 삐져나왔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벤 굴드에게서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서 어물쩍거리다간 거대한 횡액이 들이닥칠지도 몰랐다.
“갈게! 다음에 보자.”
쾅!
해리가 도망치듯 문을 닫고 나갔다. 실내에는 제이드와 굴드 두 사람만 남았다. 어색한 침묵이 길어졌다. 굴드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밤처럼 캄캄했다. 비닐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와 쏴아아, 하고 줄기차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왜 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겁니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굴드가 비닐로 막아 둔 창틀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는 지금 당장 유리를 바꿔 끼우라는 듯 품 안에서 지갑을 꺼냈다.
“유리는 내가 알아서 할 겁니다. 그보다 연락도 없이 여기는 왜 온 겁니까.”
지갑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는 굴드의 손을 제지했다. 커다랗고 건장한 손목이 손아귀 안에 들어오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굴드와 시선을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굴드가 제이드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제이드는 자신을 벽으로 몰아붙이는 굴드의 존재감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굴드가 고압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게 뚜렷하게 느껴졌다.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잖아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는 피터를 보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제이드가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굴드가 그의 턱을 난폭하게 움켜잡았다.
“시간? 도대체 왜 그런 게 필요한 건지 모르겠군요.”
억지로 시선을 맞추게 한 굴드가 낮게 웃었다. 당황한 제이드가 시선을 옆으로 굴렸다. 그를 응시하는 굴드의 눈동자에 흉흉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기회를 봐서 도망칠 작정이었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이 어디로 달아나든 금방 잡을 수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줄곧 딴 곳만 바라보던 제이드가 욱해서 굴드의 손을 쳐 냈다. 도망친다는 생각 따위는 해 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굴드와 깨끗이 헤어질 수 있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멋대로 오해하고 자기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굴드에게 화가 났다. 굴드는 제이드가 느끼고 있는 혼란이나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헤아려 줄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날 거부하려고 하지 말아요. 당신이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굴드가 제이드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굴드에게 양쪽 손목을 붙들린 제이드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당신은 날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굴드가 연락도 없이 나타났을 땐 당황했다. 아직 굴드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를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품었다. 그런데 기대가 무너져 내렸다. 굴드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적당히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장난감? 아니면 당신 편할 때 안을 수 있는 손쉬운 상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답답한 감정들을 음산한 말투로 읊조렸다. 며칠 시간을 가지자는 말조차 묵살해 버렸다. 굴드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을 존중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었다.
“되는 대로 내뱉는군요.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벽에 밀어붙인, 제이드의 하얀 손목을 움켜잡은 손아귀에도 힘이 더 들어갔다.
“내가 거부하든 말든 어차피 당신 마음대로 할 거잖습니까. 좋아하지 않으니까 함부로 대하는 거고, 내 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거 아닙니까? 당신이 날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았겠죠.”
제이드가 씹어 내뱉듯 말했다. 목소리를 빼앗긴 채로 굴드에게 억지로 범해지던 기억을 곱씹었다. 굴드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제 예전처럼은 될 수 없었다. 이건 기본적인 신뢰의 문제였다. 굴드는 수가 틀리면 또 저번처럼 힘으로 자신을 억누르려 할 것이 빤했다.
“웃기지 마. 함부로 말하고 있는 건 당신이야, 제이드.”
굴드의 눈동자 위로 불똥이 튀었다. 제이드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피를 갈망하는 욕망을 억눌러 가면서까지 그를 살려 두지도 않았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제이드가 잇새로 거친 말을 쏟아 내며 굴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굴드를 사납게 노려보는 제이드의 눈시울이 붉었다.
“…….”
굴드는 흠칫 어깨를 경직시켰다. 그의 얼굴 위로 두려움 비슷한 당혹감이 스쳤다. 가슴 안쪽에선 찌릿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굴드는 제이드의 뺨 근처에서 손을 멈칫거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제이드의 눈가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질까 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당신이 나한테 솔직해져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긴 한 겁니까?”
감정이 격해진 제이드의 검은 눈동자가 굴드의 얼굴을 담은 채 흔들렸다. 빌어먹게도 이런 순간조차 굴드가 지독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굴드가 유디트로서 제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에 골목에서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제이드는 굴드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는 굴드가 좋았다. 아무리 그와 끝낼 마음을 먹는다 하더라도 결국 제이드는 굴드를 떠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내가 누군지 알고 싶습니까.”
제이드의 젖은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굴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두 눈은 어둡고 음험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마치 후회하게 될 거라고 경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굴드가 제이드를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어둑한 주홍빛 조명이 들어왔다. 굴드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제이드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굴드를 바라봤다.
“잘 보십시오.”
굴드가 경직된 제이드를 붙잡고서 거울 앞에 섰다. 그가 팔뚝을 움켜잡고 있는 제이드의 숨소리가 멎었다. 얼룩덜룩한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은 아미 그린색 군용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을 한 제이드밖에 없었다.
“……?”
제이드는 무릎이 휘청 꺾이는 것을 느꼈다. 굴드가 등 뒤에서 그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뒷걸음질을 치다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제이드는 말문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눈을 질끈 감고서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굴드가 제 등 뒤에 서 있는데도 거울에 비치는 건 자신뿐이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제이드가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며 뒤를 돌아봤다. 굴드를 경계하면서 다시 거울을 곁눈질했다. 거울 속에는 굴드의 모습 대신 수건걸이와 욕실 타일 위에 전 세입자가 붙여 놓은 스티커만이 보였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한 것 아니었습니까?”
굴드가 제이드를 세면대 앞에 가두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거울과 마주 선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는 제이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물때가 낀 거울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제이드와 마찬가지로 굴드는 거울 속에서 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거랑 거울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제이드가 반박하려는 순간 굴드가 거울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쨍, 하고 거울이 깨지는 소리가 좁은 욕실 안에 울렸다.
“보시다시피 거울에 비치지 않기 때문에 난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굴드가 제이드의 턱을 움켜잡고서 으르렁거렸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똑똑히 확인하라는 듯 제이드가 다시 깨진 거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그림자가 욕실 벽을 가득 채웠다. 붉은 눈동자들은 주인과 마찬가지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백열등 불빛이 불길한 기운을 풍겼다. 제이드는 등을 긴장시키고서 거울 위로 보이는 광경을 지켜봤다. 똑똑, 하고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굴드의 손길이 또렷하게 느껴지는데 거울 속에선 와이셔츠가 저절로 벌어졌다.
제이드는 거울 속의 제 모습에서 눈을 떼어 내지 못한 채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시선을 내리면 와이셔츠의 단추를 푸는 굴드의 하얀 손이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드라큘라 백작이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뿔뿔이 흩어져 있던 퍼즐이 제자리에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멀쩡한 건물을 내버려 두고 지하실에서 지내는 생활, 그 흔한 가족사진 하나 보이지 않던 장식장, 해 질 녘에만 외출을 나오던 습관,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로 싸늘한 체온.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굴드의 집에 머무를 때마다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본 일도 많았다. 하지만 사진이나 거울은 취향의 문제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시체처럼 차가운 피부도 처음엔 거부감이 일었지만 흔치 않은 체질인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제이드는 머리를 흔들며 뇌리에 떠오른 생각을 내쫓으려 애썼다.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굴드의 정체가 뱀파이어라니, 상상이 지나쳤다.
상식적으로….
제이드는 거기까지 되뇌다가 사고를 멈췄다. 화장실을 점령하다시피 한 붉은 눈동자들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며칠 전 그가 겪은 일들도 비현실적인 체험들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 따위를 운운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난 어떻게 생겼습니까? 당신이 말해 보십시오.”
와이셔츠 안에 손을 넣어 피부를 더듬던 굴드가 제이드의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코와 뺨, 입술이 차례로 손끝에 닿았다. 시체를 만지는 것처럼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울을 볼 수 없으니 내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도 잊어버릴 것 같더군요. 물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일그러진 형체만 필름 위에 남으니까요.”
주홍빛 조명을 받은 굴드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그는 죽은 자가 된 이후로 거울을 통해 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심장이 뛰던 시절에 남겼던 초상화는 그가 직접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제이드의 눈동자에 비친 어렴풋한 윤곽을 들여다보는 것뿐이었다.
“혹시 흡혈… 귀 같은 겁니까.”
제이드는 비웃음을 당할 각오로 입술을 달싹였다. 굴드를 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나 같은 존재를 보통은 그렇게 부르더군요.”
굴드가 차가운 손으로 넥타이를 풀며 제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긴장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던 제이드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굴드의 입술을 더듬던 손가락도 움직임을 멈췄다. 굴드가 담담하게 긍정하자 그랬구나, 라고 납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자에게 얼굴과 이름은 아무런 가치도 없죠. 나라고 좋아서 당신에게 솔직해질 수 없었던 게 아닙니다.”
제이드의 셔츠를 활짝 벌린 굴드가 매끄러운 피부를 가슴부터 복부까지 쓸어내리며 말했다. 농염한 굴드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면 허리에 휘감기는 냉기 때문인지 제이드의 유두가 쫑긋 곤두서 있었다.
“지금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압니까?”
굴드가 깨진 거울 위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책망이 짙게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제이드가 지금처럼 겁먹은 눈으로 저를 경계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실을 들려줄 수 없었던 거라고 화를 내는 느낌이었다.
“난….”
제이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가슴 안쪽이 욱신거리며 죄책감이 일었다. 굴드의 입장을 헤아려 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감상을 말해 보십시오. 괴물이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치고 싶은데 겁이 나서 움직이질 못하는 겁니까.”
굴드가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빈정거리는 기색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제이드의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굴드의 정체에 잠시 충격을 받긴 했지만 감정이 흔들릴 만큼은 아니었다.
멋모르던 꼬맹이 시절부터 품어 왔던 바람조차 포기할 만큼 굴드를 좋아했다. 굴드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좀처럼 마음을 접지 못했다. 그런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젠장, 멋대로 넘겨짚지 좀 말란 말입니다.”
제이드는 홱 뒤를 돌며 굴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진실을 밝히면 자신이 멀어질 거라 생각한 굴드에게 화가 났다. 저를 믿지 않았을 뿐더러 감정의 깊이까지 얕봤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눈초리를 사납게 뜬 제이드가 굴드의 멱살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굴드는 제이드의 행동에 놀랐는지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제이드는 필사적으로 굴드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문질렀다. 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제이드의 입맞춤을 받아 주지 않았다. 초조해진 제이드가 굴드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굴드가 목으로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전세가 역전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굴드가 제이드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벌렸다.
굴드의 난폭한 기세에 밀린 제이드의 손이 세면대에 닿았다. 화장실에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체중이 실린 세면대가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붉은 혀가 노골적으로 마찰했다. 음탕하고 질척한 소리가 흥분을 고조시켰다. 제이드는 굴드의 셔츠를 풀며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등 뒤에서 창틀에 덧씌운 비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굴드가 앞섶이 풀어헤쳐진 제이드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유두를 손가락으로 비볐다. 축 늘어진 넥타이가 거추장스러울 텐데도 굴드는 넥타이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 평소와 다르게 정장을 차려입은 제이드의 모습이 자극적인 눈요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제이드의 단단한 복부를 더듬던 손이 바지까지 내려왔다. 비는 잦아들었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굴드는 윙윙대는 바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무의 강도를 높였다. 고개를 돌리는 움직임은 느릿했지만 혀가 맞닿은 곳은 충분히 질척질척했다.
제이드는 등줄기가 오싹오싹해졌다. 그가 움찔대는 사이 혀의 얽힘이 좀 더 깊어졌다. 굴드에게 쾌락을 배운 제이드의 견고한 몸은 피부를 어루만지는 차가운 손에 이끌려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좋아합니다.”
제이드가 굴드에게서 입술을 떼어 내며 말했다. 공연 마지막 날 굴드의 집에서 처음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고백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좋아해요. 아주 많이.”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재차 말했다. 연애 방면으로는 어수룩해서 고백의 말을 세련되게 표현할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제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다. 굴드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란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굴드가 제이드를 빤히 응시하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예전처럼 다정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제이드는 굴드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아름답지만 불온한 빛깔이 그의 눈동자 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창틀에 걸터앉은 제이드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굴드의 단단한 팔뚝을 움켜잡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직접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건 아니지만 가슴이 벅찼다.
제이드는 큰 결심을 한 얼굴을 하고서 손목 보호대를 벗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숨기는 건 아무래도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굴드의 비밀까지 들었는데 저만 문신의 존재에 대해 감추는 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
제이드가 꿀꺽 침을 삼키며 진지하게 입술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속옷 안으로 굴드의 손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흠칫 전율이 일었다. 제이드는 목소리를 삼키며 목을 움츠렸다. 고환과 샅 밑으로 파고든 굴드의 손은 곧바로 제이드의 그곳을 공략했다.
“아흣….”
문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이드는 불안정한 자세로 굴드에게 희롱당했다. 아직 젖지 않은 상태라 따끔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굴드에게 길들여진 몸은 금세 달콤한 소리를 내며 젖어 들기 시작했다. 팬티 속에 갇힌 페니스도 맑은 애액을 흘리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등 뒤에서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잿빛 하늘이 도시를 짓누르고 있었다.
굴드가 제이드의 성기를 꺼내 입 안에 머금었다.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밖에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비닐 너머로 제 목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신경이 쓰였다. 마치 공사가 덜 끝난 건물에 숨어들어 정사를 벌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읏!”
굴드가 손가락으로 그곳을 거칠게 찔러 올리자 제이드는 허리를 뒤틀었다. 굴드와 처음으로 감정적 교감을 나누었다는 생각에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물며 그는 손목에 문신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그것을 타인에게 드러낸 채 몸을 맡기고 있었다. 마치 발가벗은 상태로 굴드와 마주 선 기분이었다.
“구, 굴드. 빨리… 못 참, 하윽!”
제이드가 목을 움츠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굴드가 그의 물건을 강하게 빨아올림과 동시에 도톰하게 튀어나온 전립선을 건드린 탓이었다.
느끼는 곳을 자극받은 탓에 제이드의 상체가 허물어졌다. 굴드는 제이드가 사정하기 직전,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정말 음란하군요. 며칠 상대해 주지 않았을 뿐인데.”
굴드는 제이드의 손을 두툼하게 곤두선 제 물건으로 가져갔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흐트러진 호흡과 이를 앙다무는 기척이 굴드의 가학적인 성향을 부추겼다.
“그런 게 아니라. 난, 읏!”
굴드는 아미 그린색 셔츠 위로 잘근잘근 유두를 씹었다. 양손으로는 새하얀 둔부를 잡아 벌렸다. 이미 노글노글하게 풀어진 그곳은 손가락 한두 개쯤은 쉽게 받아들였다.
“으응.”
손가락이 드나들던 제이드의 비부에 길고 굵직한 물건이 밀고 들어왔다. 제이드의 애널은 질척질척했지만 삽입은 늘 버겁고 부담스러웠다. 체위 탓인지 오늘은 한층 더 아랫도리가 빡빡한 느낌이 들었다.
“굴드… 흣.”
뿌리까지 천천히 채워지는 감각에 제이드는 무심결에 숨을 꾹 참았다. 아랫배뿐만이 아니라 가슴까지 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제이드가 힘겹게 숨을 토해 낼 때마다 그곳이 뻐근하게 굴드의 양물을 조였다.
“조금 거칠게 굴 겁니다.”
굴드가 그르릉 목을 울리며 제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과장이나 협박이 아니었다. 그는 굶주린 흑표범 같은 눈빛으로 제이드의 쇄골에 이를 세웠다. 하필이면 제이드가 광택이 나는 구두에 제복 차림을 하고 있어서 그의 자제력은 거의 닳아 없어지기 직전이었다.
“괘, 괜찮아요.”
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굴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도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격렬하게 굴드를 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뒷골목에서 남몰래 정사를 벌이는 것처럼 격정적이고 은밀하게 관계를 가졌다. 등 뒤에서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까지 차오른 신음 소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벽 너머에 사람이 있는 양 귀엣말을 속삭였다. 오직 추삽질하는 소음만 눈치 없이 비닐을 타고 번졌다. 거칠어진 호흡 소리가 간간이 잇새로 흘러나올 때마다 제이드의 등이 흠칫 경련을 일으켰다.
여기가 제집이라는 사실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등 뒤가 불안하다 보니 분위기를 탔다. 서서 하는 섹스도, 하의만 내리고서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는 상황도, 굴드에게 아직 말하진 못했지만 문신을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제이드를 그 어느 때보다 흥분시킬 만한 요소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며칠 전의 일 때문에 제이드는 밥이 잘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다. 오래간만에 굴드를 받아들인 그의 몸은 탐욕스럽게 굵직한 물건을 빨아들였다. 좋아한다는 말까지 한 상황이라 제이드는 더 깊숙하게 굴드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왜 이렇게 적극적인 겁니까. 현기증이 날 만큼 뜨겁게 조이고 있잖습니까.”
굴드가 벌을 주듯 강하게 찔러 넣었다가 빠른 허리 짓으로 제이드를 몰아붙였다. 제이드는 숨도 쉬지 못하고 굴드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정상위가 아닌 탓에 체중이 아래로 쏠린 상태인 데다가 굴드가 사정없이 그의 애널을 찔러 올려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그야. 하읏. 당신을 좋… 헉!”
한계에 다다른 제이드의 입술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 속에 굴드의 물건이 가득 차자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찌걱찌걱하고 마찰하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이 음탕하게 들렸다. 굴드는 성인 남자를 가뿐하게 지탱했다.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제이드는 굴드의 거친 허릿짓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굴드가 그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지만 자세가 불안정해서 필사적으로 굴드의 등에 매달렸다. 애널이 빠듯하게 벌어져 있었다. 두껍고 묵직한 페니스가 내벽을 찔러 올릴 때마다 눈앞이 아찔했다.
휘몰아치듯 정사가 끝났다. 제이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굴드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굴드는 손목을 타고 흐르는 제이드의 정액을 날름날름 혀로 핥았다. 배불리 식사를 한 맹수가 털을 고르는 모습 같았다.
으으, 왜 저런 걸 핥는 거야…. 제이드는 민망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액이 맛있는 것도 아니고 비리기만 할 텐데 할짝할짝 음미하는 굴드가 괴짜처럼 느껴졌다.
귓불이 불그스름해진 제이드는 난감한 얼굴로 굴드를 흘끔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먹지 말라고 말린다고 해서 들을 사람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굴드의 손에 정액을 방사한 제 잘못이었다. 토정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너무 느끼는 바람에 갈 것 같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굴드가 손수건을 꺼낼 틈도 없었다.
바닥에 속옷과 바지가 내던져져 있었다. 정갈하게 주름이 잡혀 있던 정복 바지가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생소했다.
제이드는 노곤한 얼굴로 굴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불편한 체위로 섹스를 한 탓에 피곤하긴 했지만 제이드는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비록 굴드와 한동안 감정적으로 멀어질 뻔했지만 결국엔 잘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굴드가 뱀파이어란 사실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제 몸을 어루만지는 차가운 손이 평범한 사람과는 많이 다르다는 건 충분히 인지했다. 괴물의 형태를 띤 그림자와 거울에 비치지 않던 굴드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제이드는 불안한 감정을 떨쳐 버리기 위해 굴드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사정을 한 지 꽤 됐는데도 아직 호흡이 가빴다. 전력 질주를 하고 난 것처럼 심장이 펄떡거렸다. 하지만 굴드의 가슴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서 귀를 기울여도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제이드는 굴드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어 내고서 그 자리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자신은 죽은 사람이라던 굴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제이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뱀파이어면… 피를 마시거나 해야 하지 않아요?”
그의 목덜미에 잘근잘근 잇자국을 남기는 굴드에게 물었다. 혹시 곤란한 질문을 던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긴장이 됐다.
“그런 욕구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참을 수 있으니까 겁낼 것 없습니다.”
굴드가 피식 웃으며 제이드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마치 내가 목을 물까 봐 무서운 거냐고 짓궂게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커다랗고 차가운 그의 손은 제이드의 허리와 골반을 맴돌았다. 후희 치고는 피부를 쓰다듬는 손길이 지나치게 농밀했다.
“피를 마셔야 하긴 한다는 소리네요.”
제이드는 머뭇머뭇 제 목을 쓰다듬었다. 혹시 갈증을 견딜 수 없으면 자신의 목을 물라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굴드가 꼭 피를 마셔야 한다면 다른 사람보단 제가 그 대상이 되는 쪽이 나았다. 매달 헌혈도 하고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피 좀 내주는 일쯤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날 유혹하지 말아요, 제이드. 아직은 당신의 피를 마시고 싶지 않으니까.”
굴드가 버릇없는 망아지를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제이드의 목을 깨물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이를 세운 게 아니라 피부에 피멍이 들 정도로 세게 잇자국을 남겼다.
“윽!”
강한 통증을 느낀 제이드가 굴드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굴드는 긴장을 풀라는 듯 피멍이 든 자리를 부드럽게 혀로 핥아 올렸다.
“저기, 그럼 마늘이나 십자가는 괜찮아요?”
제이드가 굴드의 품 안에서 꾸물거리며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굴드는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제이드의 모습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소설과 현실은 많이 다릅니다.”
굴드는 일부러 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쩔쩔매는 제이드의 표정이 그를 흥분시켰다. 굴드는 제이드를 고쳐 안은 다음, 불뚝 선 물건을 애널에 비벼 댔다. 빠끔 벌어진 곳이 끈적끈적하고 뜨거웠다.
“그, 그래요?”
굴드의 페니스가 입구에 닿자 제이드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굴드의 물건이 또 몸속으로 들어올까 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햇볕을 쬐어도 영화에서처럼 타 죽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습니다. 전에 당신 집에서 아침을 같이 맞았던 것, 벌써 잊었습니까?”
제이드가 곤란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니까 더 짓궂게 굴고 싶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그는 제이드의 엉덩이며 허벅지 안쪽 살집을 우악스럽게 비틀었다. 애널에서 흘러나온 정액이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읏, 굴드. 자, 잠깐만요. 할 이야기가 있단 말입니다.”
그는 여차하면 이대로 2라운드에 돌입할 기세였다. 제이드는 필사적인 얼굴로 굴드의 가슴을 밀어냈다.
“할 이야기?”
굴드가 눈썹을 비틀다가 제이드의 손목에 시선을 던졌다. 제이드가 오른쪽 손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제이드가 시계 대신 차고 있던 손목 보호대가 사라진 것을 그제야 제대로 인식했다.
제이드는 단추를 풀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차피 굴드의 눈에는 문신이 보이지 않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제대하기 직전에 전투에 참여를 했는데, 부상을 입은 건 아니고…. 어쨌든 군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타인에게 처음 꺼내는 이야기라 두서가 없었다. 제이드는 어떤 경위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신이 생겼는지 되도록 차분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굴드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제이드가 더듬더듬 이야기를 들려주자 굴드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좀 이상한 이야기죠?”
제이드가 겸연쩍어하며 굴드의 반응을 살폈다.
“아뇨.”
굴드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제이드의 손목을 제 입술로 가져갔다. 그 순간 제이드는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길한 감각이 올가미처럼 그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불편한 기시감이 들이닥쳤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손목에 입을 맞췄던 영상이 언뜻번뜻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성당 지하실에서 잃어버렸던 과거의 한 조각이 분명했다.
“제이드.”
정신이 아득해진 찰나, 굴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제이드는 퍼뜩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가 넋을 빼고 있는 사이 굴드가 잠시 부엌 쪽에 다녀왔는지 손에 시계를 들고 있었다.
시계?
제이드는 제 손을 붙잡고서 시계를 채워 주는 굴드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부엌 쪽으로 흠칫 시선을 던지니 시계가 들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케이스와 종이봉투가 보였다. 글씨가 작아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파텍 필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시계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사 왔습니다.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듭니까?”
굴드가 싱긋 웃었다. 그는 어물거리는 제이드를 지그시 바라보며 시계 디자인이 취향이 아니면 바꾸러 가자는 말을 덧붙였다. 제이드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기색이었다. 그의 눈에는 제이드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 보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이드는 부담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손목에 채워진 시계와 굴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시계 브랜드에 대해선 아는 게 없음에도 고가의 제품이라는 게 느껴졌다. 비행기 조종석 계기판처럼 시곗바늘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시계 테두리에 새겨진 음각도 섬세했다.
“혹시 롤렉스만큼 비싼 겁니까?”
파텍 필립이라고 적힌 시계 로고가 생소했다. 제이드는 불안한 표정으로 굴드를 바라봤다. 군 복무 시절, 순금에 다이아가 박힌 롤렉스를 슬쩍 보여 주며 자랑했던 연대장이 떠올랐다. 가격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싸도 천 달러는 가뿐히 넘고, 비싼 건 만 달러도 한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아뇨. 롤렉스와 비슷한 가격은 아닙니다.”
굴드가 웃음기 가득한 눈을 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 때문에 제이드가 미심쩍어하는 눈빛을 보냈다. 굴드는 정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실제로 굴드는 결백했다. 파텍 필립과 롤렉스의 가격 차이가 심하게 나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단지 파텍 필립 쪽에 숫자 ‘0’이 몇 자리 더 붙어 있는 게 문제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제이드가 그걸 물어본 게 아니니 일부러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비싸긴 하죠?”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제이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롤렉스 급은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몇백 달러짜리도 부담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태껏 2~30달러보다 비싼 시계를 차 본 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가격을 물어서 정도 이상으로 비싸면 못 받겠다고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격을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선물을 준 사람에게 실례라 차마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롤렉스만큼 비싼 게 아니라서 싫은 겁니까?”
굴드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연기였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제이드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에요! 이것도 충분히 과분한데.”
당황한 제이드가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는 절대 그런 의미로 비싼 제품이냐는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었다. 불현듯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에게 머리핀을 선물했던 일이 떠올랐다. 선물로 줄 거면 좀 그럴듯한 걸 마련하지 뭐 이런 걸 주느냐며 면박을 당했다. 그 상황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본의 아니게 굴드를 실망시킨 것 같아 제이드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별문제 없군요.”
굴드는 제이드가 시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굴드의 태도가 너무 단호했다. 제이드는 어버버, 거리다 이내 체념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절대 몸에서 떼지 마십시오.”
굴드가 협박이라도 하듯 음산하게 귓가에 속삭이며 제이드를 안아 올렸다. 그는 매트리스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가 제 소유물이라는 표식을 손목에 채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신은 저와 제이드의 눈에만 보이지만 시계는 달랐다.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다.
제이드의 검은 머리카락이 매트리스 위에 흩어졌다. 활짝 벌어진 셔츠와 발목까지 올라오는 정장 양말이 선정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새하얗고 탄탄한 허벅지를 타고 정액이 흐르는 모습은 숨이 멎을 정도로 뇌쇄적이었다.
굴드는 제이드의 넥타이로 손목을 결박했다. 제이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잠깐만요!’라고 항의했지만 모른 척했다. 제가 직접 채워 준 시계가 수갑처럼 보여서 참을 수 없이 흥분이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내 것으로 남아 있으십시오.”
굴드는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제이드의 뺨을 쓰다듬었다. 유예 따위는 무시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제이드의 알몸도, 쾌락에 못 이겨 허리를 비트는 모습도 앞으로 몇십 년은 더 즐길 수 있었다.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건 찝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벤 굴드’라는 가짜 신분이 아닌, 자기 자신을 제이드가 그대로 받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굴드의 눈동자가 희열과 소유욕으로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제이드는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다. 제이드의 의사나 성배라는 사실 따위는 관계없이 태어날 때부터 제 소유였다. 그는 제이드를 제 것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드가 좋아한다는 말을 꺼냈을 땐 참을 수 없이 기뻤다. 굴드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를 떠올렸다. 환하게 웃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제이드가 뭔가 느꼈는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굴드는 타르처럼 질척거리는 감정을 저 안으로 감추며 담백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는 자신이 감지한 불길한 예감을 착각이라고 생각했는지 곧 긴장을 풀었다.
기억을 통제할 수 없었던 건 아마도 성배의 숨겨진 특성 탓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사례가 기록된 적은 없었지만, 성배에 대한 정보 자체가 극히 부족했다. 타나토스가 배교자에게 전수한 지식은 불완전했고, 적의 서에 적힌 성배에 대한 정보도 단편적이었다. 간교한 타나토스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누락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지난 며칠간 성배에 대해 연구한 저술들을 확인했다.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구절은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성배가 꼭 평범한 인간이라고 단정 지을 이유도 없었다.
그는 저주받은 성소에서 제이드를 처음 만난 날, 제힘을 불어넣어 죽어 가던 제이드를 되살렸다. 제이드가 기억 변조에 내성이 생긴 건 그가 흘려보낸 힘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피의 세례를 약식으로 내려 준 것과 다름없기에, 어느 정도 신체에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아니면 원래 정신계 저항력이 강한 체질이거나.
어쨌든 중요한 건 이젠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에게 질리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문제 따위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우르릉, 쾅! 쿠구궁.
굴드가 제이드에게 입을 맞춘 순간,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천둥·번개가 번뜩였다. 폭우로 바뀐 비가 사납게 비닐을 두드렸다. 소란스럽게 펄럭거리는 비닐은 금방이라도 바닥에 내팽개쳐질 것 같았다. 창틀에 붙인 테이프도 불안하게 덜렁거렸다.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지만, 비닐이 무너져서 실내로 빗물이 쏟아지는 건 거의 시간문제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