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이야기지만 컨테이너 박스가 줄줄이 늘어선 부둣가에는 짠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사진 한 장을 들고서 창고를 돌아다니는 사이, 제이드는 소금 냄새에 금방 익숙해졌다.
햇볕은 없었지만 날씨는 묘하게 찜통이었다. 제이드가 만난 인부들은 친절한 사람도 있었고 퉁명스러운 사람도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소금기 때문인지 시원하다기보다는 꿉꿉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스테판을 찾느라 몇 시간을 돌아다닌 제이드는 녹이 슬어 가는 자판기에서 콜라를 사 마셨다. 갈매기 몇 마리가 푸드덕 날아와 쓰레기통에 버려진 과자를 쿡쿡 쪼아 먹었다. 애처롭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하는 광경이었다.
미적지근한 탄산음료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 안에 털어 넣은 후 탐문 활동을 재개했다. 셔츠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이리 고생스러울 게 뻔했던 의뢰를 왜 수락했을까, 하고 살짝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한 번 손을 댄 일을 어중간한 선에서 포기하는 것도 찜찜했다. 만약의 경우 끝내 스테판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봐야 했다.
“이 녀석을 본 적 있냐고? 글쎄, 매춘부들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처럼 생겨서 말이야.”
안전모를 쓴 현장 관리인에게 사진을 보여 주자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서는 제이드가 안쓰러웠는지 현장 관리 반장은 홈리스 매춘부들이 자주 기웃거리는 버려진 창고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제이드는 현장 관리인이 알려 준 구역으로 달려갔다. 현장 관리인의 말대로 창고 안에 들어가 보니 가방을 침낭 삼아 늘어져 있는 남자들이 몇몇 보였다. 어깨를 흔들어 한 명씩 사진을 보여 주었다. 어찌어찌 스테판과 닮은 사람을 발견하긴 했지만 스테판 본인은 아니었다. 문득 피터가 보았다는 남자가 방금 만난 홈리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쉰내가 나는 창고 밖으로 나오자 해 질 녘 하늘이 그를 반겼다. 시계를 확인하니 여섯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빨갛게 타오르는 지평선이 장관을 이루었다. 하지만 오늘도 허탕만 친 제이드는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인 낙조 때문에 더 기운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고작 이 정도로 좌절하면 안 되지. 사람 찾는 일이 쉬울 리가 없잖아.”
제이드는 울적한 기분을 쫓아내기 위해 세수하듯 얼굴을 찰싹찰싹 쳤다.
“좋아. 힘내자!”
제이드는 기합을 넣었다. 그의 장점 중 하나가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때로는 바보 같을 정도로 낙천적이기도 했지만 제이드의 전우들은 전부 그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좋아했다. 전멸 직전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 보려는 제이드의 노력에 구원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활짝 웃는 제이드의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꼭 죽으라는 법은 없잖아?’라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묘한 힘이 있었다.
제자리에서 기지개를 쭉 켠 제이드는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풀 죽어 있으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평소 신념이라 더 반듯하게 허리를 폈다.
웬 신부님이지.
석양을 따라 선착장을 지나치다 작은 승용차에 올라타는 나이 든 사제를 발견했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란 것 같은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신부님은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렌터카의 액셀을 밟았다. 꼭 범죄라도 저지르고서 황급히 자리를 뜨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관광차 선착장에 들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신부님이라고 선착장에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제이드는 그저 속으로 의외라고 중얼거리며 관심을 끊었다.
신부가 탄 차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던 제이드의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누군가 기척 없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엉덩이가 근사하네. 부둣가의 싸구려들의 처진 엉덩이랑은 차원이 달라. 삼십 분에 얼마지?”
언젠가 한 번 겪어 봤던 기분 나쁜 기시감이 등줄기를 관통했다. 잠깐만, 설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제이드는 눈을 부릅뜨고서 홱 뒤를 돌아봤다.
“너 이 자식!”
“으악!”
혹시나 했는데 찝찝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언젠가 매음굴 골목에서 제이드가 남창인 줄 알고 스멀스멀 접근했던 대머리였다. 놈도 제이드를 기억하고 있는지 별 볼 일 없는 빈곤한 낯짝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또 너냐?”
으드득 이가 갈렸다. 제이드의 얼굴은 악귀 탈처럼 살기등등해졌다. 열네 살짜리가 좋다는 둥의 말을 지껄였던 변태 성욕자 자식과 다시 조우하게 되다니, 분노가 솟구쳤다. 게다가 그를 또! 남창으로 오해하다니, 이보다 더 기분이 더러울 순 없었다.
“평생 잇몸으로만 밥 먹게 해 줄까, 엉?”
전에 손봐 주지 못하고 넘어갔던 울분까지 새록새록 되새김질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저 자식은 예외였다. 오늘은 기필코 저 변태 놈을 성한 몸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굳은 각오를 다졌다.
“허, 허허… 무슨 말씀인지.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일단 진정하시고 대화로 풀지요, 선생.”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을 치던 대머리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위험을 감지한 제이드는 본능적으로 움찔 뒤로 물러났다. 보기보다 잽싼 백인 변태는 후춧가루를 제이드의 얼굴에 한 움큼 뿌린 후 줄행랑을 쳤다.
“으하하! 내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해 뒀지. 다신 만나지 말자, 이 악당!”
악당은 누가 악당이냐.
“에취! 에취. 제길.”
제이드는 계속 기침을 하며 변태 놈의 등을 노려봤다. 바로 고개를 돌린 덕분에 직접적인 공격은 피했다. 그렇지만 코로 후추를 들이마시는 2차 피해를 속수무책으로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다. 뭔가를 뿌린다고만 생각했지 그게 후춧가루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렇게 또 어처구니없게 변태 놈을 놓치고 말다니 부아가 치밀었다. 체격이 왜소한 일반인이라고 방심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전장으로 치면 생화학 무기를 무방비하게 호흡기로 들이마신 것과 흡사한 실수였다.
변태 놈 때문에 기분을 잡친 제이드는 인근 놀이터에서 철봉 운동을 하며 울화를 다스렸다. 땅거미가 진 시간이라 놀이터의 주인인 어린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놀이터 옆 농구코트에서 삼 대 삼 게임을 하던 고등학생들이 철조망 앞으로 다가와 그를 구경했다.
구경꾼들을 의식해서 한 손으로만 체중을 지탱했다. 속도는 아까보다 느려졌지만 십 대 소년들은 망아지들처럼 흥분했다.
턱걸이를 20분쯤 하고 나서 철봉에서 내려왔다. 손바닥에 코를 가져갔더니 고약한 쇠 비린내가 풍겼다.
철없는 고등학생들이 왜 더 하지 않느냐며 그를 불러 세웠다. 팔뚝 좀 보여 달라고 외치는 녀석이 있어서 제이드는 말없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소년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막 운동을 마치고 난 뒤라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힘줄도 불거진 게 제가 봐도 꽤 탐스러워 보여서 제이드의 입가에 우쭐한 미소가 번졌다.
사실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은 아니라서 마초 보디빌더처럼 우락부락한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깔끔하고 선명하게 각이 잡혀 있어서 체육관에서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공중화장실에서 얼굴과 손을 씻은 제이드는 바니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오늘은 의뢰인인 바니에게 조사 경과를 보고하는 날이었다. 바니를 만나도 순 허탕을 친 이야기밖에 들려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제이드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버스에서 내려 약속 장소인 델리커트슨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라서 사람들이 꽤 북적였다. 제이드는 빈자리를 찾아 실내를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유리창 쪽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였다.
좀 일찍 도착했네.
그는 시계를 확인하며 메뉴판을 펼쳤다. 2.5달러짜리 커피를 주문한 뒤에도 메뉴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종일 돌아다녀서 배가 고픈 데다가 이 가게는 델리 중에서도 음식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다.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음식을 수북이 쌓아 놓고 식사를 했다. 콘비프 샌드위치, 호밀 흑빵에 양념을 듬뿍 얹은 훈제 쇠고기와 딜 피클을 곁들인 접시, 볼 한가득 든 치킨 샐러드, 부드러운 치즈를 넣고 사워크림을 바른 크레페 등등. 주먹을 두 개 합친 것보다 큰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침이 고였다.
“으음….”
바니가 오기 전에 핫도그라도 시켜서 후딱 먹을까, 하는 유혹이 일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 메뉴판을 덮었다.
“일행이 오면 또 주문할게요.”
커피를 내려놓는 웨이트리스에게 메뉴판을 돌려주려는 찰나였다. 길 건너편에서 어떤 남자와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바니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무슨 일이지?
“금방 돌아올 거니까 치우지 마세요!”
제이드는 허둥지둥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커피 값을 지불했다. 유리벽 너머의 상황을 확인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덩치 큰 백인 남자가 이젠 급기야 주먹으로 바니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게 밖으로 뛰쳐나온 제이드가 바니를 구타하는 팔을 움켜잡았다. 상대가 일반인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방심했다가 선착장에서 변태 대머리를 놓쳤던 것처럼 두 번 실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 제이드 씨.”
“넌 또 뭐야! 니네 둘이 서로 아는 사이야? 앙?”
우람한 체격의 남자가 인상을 쓰며 제 팔을 비틀었다. 호리호리한 동양 놈 따위는 금방 밀쳐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목을 옥죄는 악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젠장, 이거 안 놔?”
제이드에게 팔을 붙잡힌 남자가 이를 갈았다. 눈앞의 동양인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깨달은 그는 주머니에서 대뜸 접이식 칼을 꺼냈다.
제이드는 신속한 손길로 놈의 어깨를 탈골시켰다. 조금 섬뜩한 소리가 났지만 그에겐 익숙한 소음이었다. 쨍그랑, 하고 나이프가 떨어졌다. 날붙이를 제거한 제이드는 백인 남자의 발목을 가격해서 중심을 무너트렸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공격이었다.
“크윽, 너 이 새끼. 아으읏!”
건물 벽돌에 밀어붙여진 백인 남자가 식은땀을 흘렸다. 럭비 선수 같은 몸집을 가진 그는 바니를 노려보며 꽥꽥 고함쳤다. 단순한 분풀이에 지나지 않은 행동이었다.
“내 좆으로 만족을 못 해서 그새 또 딴 놈이랑 놀아난 거냐. 이 발정 난 암캐 같은, 아윽!”
“입에 걸레를 쳐 물었나. 똥내 나는 입 좀 다물지?”
제이드가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덩치의 어깨를 다시 제자리로 끼워 맞췄다. 우드득, 하고 삭막한 소리가 났다. 탈골되는 통증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체벌이었다.
“크으윽!”
“바니, 이 작자 누굽니까. 아니, 일단 경찰부터 부르죠.”
간단하게 백인 쓰레기를 제압한 제이드의 말투가 살벌했다. 바니를 공격한 남자가 덩칫값도 못 하고 엄살 심한 꼬마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눈앞이 노랗게 변한 사내에게 반항할 기력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안 돼요. 이 사람, 내 애인이에요!”
바니가 폭력을 휘두른 상대를 감싸며 외쳤다.
“애인?”
어안이 벙벙했다. 애인이란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처음에는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네. 애인이니까 얼른 놔줘요. 부탁이에요.”
바니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맥이 풀린 제이드는 덩치의 팔을 스르륵 놓아주었다. 결박이 풀리자 엉덩이처럼 턱이 갈라진 놈팡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제 어깨를 붙들고서 씩씩대며 사람들을 밀치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아무리 애인이라고는 하지만 제게 주먹을 휘두른 쓰레기를 감싸다니, 그는 바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바니와 함께 약속 장소인 델리로 돌아갔다. 웨이트리스에게 얼음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주먹질을 당한 바니의 얼굴에 댈 얼음이었다.
“그럭저럭. 아, 이거 맛있겠네요.”
얼굴에 주근깨가 촘촘히 박힌 바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연하게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주문했다. 제이드의 걱정과 달리 애인… 에게 맞아서 충격을 받았다거나 울적해하는 기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제이드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갑게 식어 버린 커피는 뜨거울 때보다 훨씬 쓴맛이 났다.
인상을 쓰고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대체 왜 그딴 쓰레기를 만나는 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바니가 처한 상황도 잘 모르면서 타인이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는 건 오만한 짓이었다. 바니를 위한답시고 던진 말이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
멋모르던 십 대 후반 때에는 시야가 좁아서 잘 몰랐지만 요즘은 사람마다 각자 말 못 할 사정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까 그 쓰레기 자식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딴 놈은 자기 코뼈가 주저앉고 정강이뼈가 부러져 봐야 남도 아프다는 걸 깨닫고 조심할 새끼였다.
“어, 음. 혹시 아까 그 남자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긴다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연락해요.”
바니가 상처 받거나 기분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말을 골랐다.
“…그럴게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케이크를 먹던 바니가 멈칫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는 속으로 폭소하고 있었다. 하도 웃겨서 아랫배가 당기고 입꼬리가 씰룩씰룩 경련을 일으켰다. 자신을 불쌍하고 힘없는 존재로 인식시키려고 연기한 보람이 있었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마음에 쏙 든단 말이야.
바니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입술을 핥았다. 흡혈의 욕구가 치솟았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극상의 먹잇감이 제 눈앞에 앉아 있는데 자제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제이드는 음식으로 따지자면 먹음직스러운 초콜릿 케이크 같았다. 한 입 베어 물기만 해도 찐득찐득하고 부드러운 초콜릿이 입 안에 가득 퍼질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제이드를 철창에 가둬 두고서 두고두고 피를 짜 마시고 싶었다.
그가 처음 제이드에게 접근하게 된 계기는 오서독스 때문이었다. 얼마간 관찰한 결과 제이드의 성향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됐는데 그게 바니의 흥미를 끌었다.
제이드는 딱히 정의감이 투철하거나 준법정신이 강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 기준에서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이라 판단되면 과격해졌다. 무심한 성격인 것 같아도 노인, 어린애, 여자에게는 은근히 약했다. 성가시기 짝이 없는 친구에겐 퉁명스럽게 행동해도 결국엔 군소리 없이 도와주거나 배려할 건 다 배려해 줬다. 한마디로 평범한 것 같지만 뒤돌아서 자세히 뜯어보면 평범하지 않은,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친절하고 인간적이며 따뜻한 사람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리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바니는 종종 도움이 절실한 사회적 약자인 척 접근해서 ‘좋은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고 비난받게 만들곤 했다. 궁지로 몰아넣은 다음 짜잔, 하고 자기가 그의 삶을 짓밟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순간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그리고 자신을 저주하고 절망하는 한때 선량했던 남자의 피를 빨며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람’인 제이드는 바니의 먹잇감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이드의 피를 마실 순 없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매력적이었지만 타인의 성배이기에 흡혈의 욕구를 자제해야 했다. 저 새하얀 목을 물어뜯는 순간, 타나토스와 제가 은밀히 계획한 일들은 어그러지고 말 것이다.
변덕스러운 타나토스는 언제나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내려 자신의 숭배자들을 시험에 빠트렸다.
바니는 시계를 찬 제이드의 오른쪽 손목에 눈길을 붙박았다. 시계 아래로 뱀 문신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섬세하기 짝이 없는 저 뱀 문신을 보고 있노라면 바니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원래 저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었다. 몇백 년 묵은 서번트는 물론이고, 아벤 굴드와 똑같은 계급인 오서독스라 하더라도 저 문신은 볼 수 없었다. 이질적인 존재인 바니도 정신을 집중해야만 간신히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권위적이고 요사스럽고 섬뜩했다. 어찌 보면 권능이 절정에 다다른 자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남긴 낙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제이드의 피부에 새겨진 문신은 그것을 새긴 자의 계급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였다.
아까 가게 앞에서 애인이라는 작자와 승강이를 벌이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저 문신 때문이었다. 아벤 굴드는 자기 눈에 보기 좋으라고 문신을 새겨 둔 게 아니었다.
제이드에게 접근하는 배교자가 나타나면 반드시 저 뱀 문신이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덤으로 정신을 지배하는 주술이나 환영 마법도 튕겨 내고 말이다. 바니는 제이드의 머릿속을 주무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벤 굴드에게 꼬리를 밟히면 곤란한 바니는 제이드를 만나는 날이면 제 몸에서 나는 시체 냄새를 지우기 위해 인간들과 성관계를 가졌다. 인간의 체취를 훔쳐 죽은 자의 기운을 감추는 것이다.
오늘도 그는 질펀하게 뒹굴다 나왔다. 하지만 모텔에서 관계를 가진 머저리가 끈질기게 쫓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길거리에서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게 된 건 정말이지 유감이었다. 그래서 바니는 다시는 이런 짜증 나는 일이 없도록 오늘 밤 그 자식을 고기 다지는 분쇄기에 밀어 넣기로 마음먹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힘이 없어서 근육질 머저리에게 맞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그 멍청이는 바니가 만나는 수많은 상대 중 하나에 불과했다. 자신은 그저 폭력적인 관계를 좋아할 뿐이었다. 멀쩡하고 착한 족속들은 절대 그의 취향이 될 수 없었다.
바니는 섹스 중독자였다. 단 하루도 남자 없이는 견디지 못했다. 영감탱이의 시들시들한 물건이든 9인치짜리 대물이든 성기의 크기는 상관없었다. 그는 남자의 물건이 매일 같이 자신의 헐렁헐렁한 구멍을 쑤셔 주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거리로 나와 남창 행세를 하는 이유도 그게 취미이기 때문이었다. 제 취향에 맞는 사냥감도 고르고 이 좆 저 좆 가리지 않고 맛볼 수 있는 직업은 매춘만 한 게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섹스 중에 학대받는 걸 몹시 좋아했다. 그래서 일부러 쓰레기 같은 놈들만 점찍어 손님으로 받았다. 다짜고짜 벨트로 손목을 침대 기둥에 묶고서 목을 졸라 브레스 컨트롤을 하려고 달려드는 남자만큼 그를 흥분시키는 것도 없었다.
바니는 손님이든 애인이든 저를 마음껏 모욕하고 때리고 짓밟고 지배자처럼 군림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래야 의기양양하던 희생양들이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더 절망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칠 테니까 말이다.
포식자는 그들이 아니라 바니였다. 그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그를 걸레 취급하던 병신들이 벌벌 떨며 똥오줌을 지릴 때였다. 육체적으로 우월하다고 착각하던 놈팡이들이 피해자 처지가 되어 굴욕감에 물든 표정을 보여 줄 때, 바니는 극도의 희열을 느꼈다.
누누이 말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자신이었다. 누가 얼마나 더 강한지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타나토스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손님을 기다리는 일은 복권을 긁는 것과 비슷했다. 대부분은 꽝이지만, 간혹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웨인 시티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난 찌질이 사진작가 장도, 루테니아 가문의 정신이상자도 전부 뒷골목에서 장사를 하다 만난 인간들이었다.
장은 희대의 살인마 놀이에 심취한 한심한 종자였다. 그를 살려 둔 건 심심풀이였을 뿐, 바니의 삶에 영향을 끼치거나 할 인물은 아니었다. 먹이로 고른 손님이 연쇄 살인마란 사실에 흥미를 느꼈고, 머릿속을 들여다봤다가 마음에 들어서 살인 파트너가 되었다. 비록 볼품없는 당나귀 같은 작자지만 장은 여러모로 바니와 취향이 비슷했다.
반면 아이작 루테니아는…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졌다. 사람들 앞에선 신실한 신학자인 척 가증을 떨었지만, 가면을 벗겨 낸 본성은 가학적인 변태였다. 뭐, 성적 취향은 자신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별 불만은 없었다.
아이작 루테니아는 금지된 연구에 손을 댔다가 가문에서 쫓겨난 망나니였다. 그 망할 자식은 자신을 실험 쥐 삼아 저택 지하실에서 별 해괴한 짓들은 다 저질렀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지만 늙어 죽을 일 없는 뱀파이어로 만들어 준 점만은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이작이 가문에서 추방당할 때 훔쳐 낸 문서들도 꽤 쓸모가 많았다.
한동안 바니의 주인 노릇을 하며 거만을 떨던 아이작도 결국엔 비참한 산 제물이 되어 뒈져 버렸다. 온갖 착한 척은 다 하며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들었던 찰스와 함께 말이다. 자신을 벌레 취급하던 아이작이 사지를 비틀며 죽어 가던 순간은 정말이지 통쾌했다. 아직도 그 광경을 떠올리면 오르가슴 같은 전율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저기, 바니. 내 이야기 듣고 있어요?”
제이드의 목소리가 추억에 잠겨 있던 바니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응. 듣고 있어요.”
바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로 된 제이드의 커피 잔을 주시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비닐에 든 알약을 만지작거렸다. 아까처럼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제이드의 목소리에 집중할 생각은 여전히 없었다. 그는 커피 잔에 수면제를 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수면제로 제이드를 잠시 잠재울 작정이긴 하지만 어딘가로 납치하거나 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그저 앞으로의 계획 때문에 제이드의 피가 조금 필요할 따름이었다. 약 말고 정신 지배를 사용하면 더 편하게 피를 채취할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이드에게는 강도 높은 피의 속박이 걸려 있었다.
‘성가시네.’
문제는 수면제를 탈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잠깐 화장실에 들를 법도 한데 제이드는 좀처럼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허술한 것 같으면서도 제이드는 도무지 빈틈이랄 만한 구석이 없었다. 바니는 커피 잔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하기를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
제이드는 저에게 다가오는 기척이나 손길을 거의 본능적으로 감지해 냈다. 언뜻 별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 같아도 사실은 냉정하게 실내의 전체적인 동태를 분석하고 있었다. 치열한 전장을 거친 경력과 오랜 훈련 탓에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습관이 몸에 밴 모양이었다.
바니는 가게에 있는 인간들을 조종해서 소란을 피워 주의를 돌려 볼까, 라는 생각을 해 봤다. 하지만 제이드는 쓰게 식어 버린 커피 따위는 관심이 없는지 이젠 더 이상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가지 않았다. 간신히 빈틈을 만든다 하더라도 제이드가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피곤한가 보네요. 이만 일어날까요?”
제이드는 불안정해 보이는 바니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니가 제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바니가 넋을 빼고 있는 이유를 거리에서 벌어진 치정 폭력 사건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약을 쓰는 것보다는 역시 다른 쪽으로 피를 구해 보는 게 낫겠어.
바니는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수면제에서 손을 떼어 냈다. 생각해 보니 제이드가 바보도 아니고 약을 쓰면 뭔가 눈치를 챌 것이 분명했다. 벌써부터 제이드가 저에게 의혹을 품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바니에게 깃든 타나토스의 의지 또한 서두를 것 없다고 나직이 속삭였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선 인내심이 필요했다. 변변한 보호자도 없던 그가 80년 가까이 헌터들에게 잡히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신중함 덕분이었다.
바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유리로 된 제이드의 커피 잔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이드의 커피 잔엔 반 정도 커피가 남아 있었다.
“바니? 여기 더 있을 겁니까.”
“아뇨. 곧 나가요. 이것 좀 마저 다 마시고요.”
바니는 순진한 얼굴로 자신의 커피 잔을 가리켰다.
제이드가 납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바니는 지문이 묻지 않도록 손수건을 꺼내 손잡이를 감싼 후 제이드의 커피 잔에 남아 있는 커피를 제 머그컵에 버렸다.
제이드는 아무것도 모른 채 테이블 사이를 지나치며 그보다 앞서 나갔다. 바니는 주근깨가 도드라지게 웃으며 묵직해진 가죽 재킷 주머니를 두드렸다. 그 안에는 식당에서 슬쩍한 커피 잔이 들어 있었다. 유리컵 표면에는 제이드의 지문이 잔뜩 묻어 있을 게 분명했다.
***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는 웨인 시티답지 않게 날씨가 화창했다. 구름도 없고 한여름처럼 햇살이 강했다.
2층짜리 주택 뒤뜰에 ‘Happy Birthday’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생일 파티의 주인공은 올해 여섯 살인 해리의 조카 미쉘이었다.
“저리 가! 이 쪼끄만 악마 놈들아.”
세서미 스트리트에 나오는 캐릭터 인형 옷을 입은 해리가 진저리를 치며 인형 탈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혈기왕성한 일곱 살짜리 꼬마들의 등쌀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달리고 발로 차고 북슬북슬한 인형 털을 잡아당기는 꼬마 손님들은 해리에게 있어서 재앙과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으아앙. 엘모 머리가 없어졌어.”
“저 아저씨가 엘모를 잡아먹은 거야! 악당을 물리치자.”
“나 아저씨 아니거든!”
몇몇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고 아저씨 소리를 들은 해리는 발끈해서 아이들을 상대로 버럭 소리쳤다.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그나마 ‘빌어먹을’이라든지 ‘젠장’이라고 욕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진짜 못 해 먹겠네. 난 정말 애들이 싫어.”
인형 옷을 벗고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된 해리가 제이드 옆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제이드는 스텔라의 홈 비디오카메라로 미쉘과 친구들을 촬영 중이었다.
“한창 뛰어놀 때니까 다루기가 힘들긴 하지. 그래도 귀엽잖아. 난 애들이랑 놀아 주는 거 즐겁고 좋던데.”
공주님처럼 금빛 왕관을 쓴 미쉘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제이드가 말했다. 괜히 하는 빈말이 아니라 그는 정말 아이들과 놀아 주는 걸 좋아했다. 꼬맹이들을 다루는 것도 능숙했고 애들 눈높이에 맞춰 칼싸움을 하거나 축구 등의 공놀이를 하는 것도 잘했다.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를 하자고 매달리면 조금 곤혹스러워서 멈칫하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귀엽긴 뭐가 귀여워! 난폭하고 시끄럽고, 뻑하면 울어 대고. 애들은 죄다 괴물이야. 난 예쁘게 생긴 놈이든 못생긴 놈이든 애들은 공평하게 다 싫어.”
해리는 동성 결혼이 법으로 허용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입양 따위는 죽어도 하지 않을 거라며 치를 떨었다.
“그럼 조카인 나도 싫겠네? 엄마한테 일러야지.”
딸기가 얹어진 생일 케이크 조각을 접시에 담아 온 미쉘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해리와 해리의 누나인 스텔라를 닮아 금발인 꼬마 숙녀는 새치름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야, 인마. 안 돼. 내가 언제 네가 싫다고 했어.”
해리가 매우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해리는 제 누나를 끔찍하게 무서워했다. 어렸을 때 하도 맞고 자란 탓인지 성인이 된 지금도 스텔라의 말이라면 찍소리도 못하고 찌그러지곤 했다.
“됐거든? 제이드, 이거 먹어요. 제이드 주려고 내가 직접 담은 거예요.”
미쉘이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제이드에게 내밀었다. 외삼촌을 상대할 때와 달리 그녀의 얼굴엔 수줍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쉘뿐만이 아니라 어지간한 어린애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제이드를 좋아했다.
“고마워, 미쉘.”
무릎을 굽혀 미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들고 있던 카메라는 해리에게 넘겼다. 사이좋은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으며 해리는 사람 차별하는 거냐며 연신 투덜거렸다.
“차별하는 게 당연하지. 애들도 보는 눈이 있거든? 제이드, 도대체 왜 저런 망나니랑 친구 해 주는 거예요?”
제이드의 팔에 안긴 미쉘은 자기 한 입, 제이드 한 입 번갈아 가며 케이크를 먹었다.
“미쉘, 네 삼촌 정도면 정말 괜찮은 친구야. 그래서 사람들한테 인기도 많은 거고.”
제이드는 미쉘을 안은 채로 한 바퀴 빙 돌며 해리를 두둔했다. 수다스럽고 엉뚱한 데다, 가끔씩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녀석이긴 하지만 해리만큼 유쾌한 친구도 드물었다. 조금 눈치가 없을 뿐이지 사람은 좋았다.
미쉘과 놀아 주는 그의 입가에 싱글벙글한 미소가 걸렸다. 인형처럼 깜찍하게 생긴 미쉘이 정말 귀여웠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아들들과 잔디밭에서 공놀이를 하는 게 꿈이긴 하지만 공주님 같은 딸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야! 마녀 주니어, 들었지? 응? 나보고 괜찮은 놈이라잖아.”
“어휴, 시끄러워. 삼촌은 왜 여섯 살짜리보다 눈치가 없어?”
미쉘이 한심해 죽겠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그럼 칭찬을 하지, 친구 조카 앞에서 친구 욕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참, 삼촌. 제이드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삼촌이 게이인 건 상관없어. 엄마가 성적 지향은 자유라고 했으니까. 근데 제이드는 건들지 말아 줘. 미쉘이 크면 꼭 제이드랑 결혼할 거니까.”
미쉘은 자기가 찜해 놨다고 주장하듯 제이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제이드는 맹랑하지만 귀여운 폭탄선언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쟨 내 취향 아니거든?! 그리고 제이드가 왜 너랑 결혼해. 얘가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네. 너 제이드 의견은 무시하냐?”
해리가 분통이 터진다는 얼굴로 펄펄 뛰었다. 애를 상대로 진지하게 아옹다옹하는 해리가 제이드는 조금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거야 물어보면 되지. 제이드도 내가 좋죠?”
미쉘이 제 딴에는 심각한 얼굴로 제이드를 바라봤다.
“당연하지. 내가 아는 숙녀 중에서 미쉘이 제일 예뻐.”
제이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들이 제 마음에 든 어른에게 청혼하는 건 곧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몇 년만 지나면 자신이 그런 청혼을 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말이다.
“미쉘, 비행기 태워 줄까?”
영차, 하며 미쉘을 고쳐 안았다.
“나 그렇게 어린애 아닌데요. 하지만 굳이 해 주고 싶다면 거절하진 않을게요.”
입가에 생크림을 잔뜩 묻힌 미쉘이 도도하게 허락했다. 제이드는 꼬마 아가씨가 들고 있는 그릇을 내려놓은 다음 그녀를 높이 들어 올려 비행기를 태워 줬다.
“제이드 오빠, 나도 비행기 태워 줘요.”
“나도 나도!”
미쉘의 친구들은 제이드에게 공주님처럼 안겨 있는 그녀를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왜 난 아저씨고 쟨 오빠야!”
호칭에 민감한 해리가 아이들의 노골적인 차별에 분통을 터트렸다.
“이리 와. 비행기는 내가 태워 주지.”
해리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얼굴로 미쉘의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꼬마 숙녀들은 ‘변태!’라고 외치며 도망쳐 버렸다.
“젠장. 애들 따위 정말 싫어!”
순수하지만 잔혹하기 짝이 없는 어린애들에게 상처 입은 해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선심을 쓰는데도 잔인한 말로 거절하는 미취학 아동들이 얄미웠다.
“애들 앞에선 점잖은 말만 쓰라고 했지?”
미쉘의 엄마인 스텔라가 동물 쿠키를 쟁반에 담아 뒤뜰로 나왔다.
“그리고 아까 마녀 주니어 어쩌고 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의미지? 내가 마녀란 뜻인가?”
스텔라가 생긋 웃으며 해리의 귀를 잡아당겼다. 유치원 놀이터처럼 아이들이 득시글대고 있어서 차마 동생의 정강이를 걷어차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으아아, 아으. 마녀 주니어라뇨? 잘못 들으신 겁니다, 누님.”
해리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와 제이드의 등 뒤에 숨었다.
“약삭빠른 놈.”
스텔라가 동생을 노려보며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바쁠 텐데 오늘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이드. 애들도 재미있어 하고, 제이드가 없었다면 준비하느라 애를 먹었을 거예요.”
스텔라는 언제 눈을 치떴냐는 듯 상냥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제이드는 맞벌이를 하느라 바쁜 스텔라를 대신해서 해리와 함께 미쉘의 생일 파티 준비를 도왔다. 뒤뜰을 장식한 풍선과 리본, 조립식 미끄럼틀과 붕붕이라 불리는 대형 트램펄린 등의 장비를 빌려다가 설치한 사람도 바로 제이드였다.
“뭘요. 저도 즐거웠는데요.”
제이드는 감사 인사를 받는 게 쑥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였다.
“제이드, 같이 사진 찍어요. 응?”
화장실에 간 줄 알았던 미쉘이 폴짝폴짝 달려왔다. 그녀의 손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와 종이 왕관이 들려 있었다.
커플 왕관을 쓰고서 미쉘과 사진을 찍은 제이드는 스텔라의 집에서 나왔다. 해리는 애들에게 시달리느라 진이 빠졌는지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택시를 잡았다.
두 사람은 점심을 먹기 위해 택시를 타고 번화가로 향했다. 스텔라가 오늘 고마웠다며 제이드에게 밥을 사라고 동생에게 돈을 챙겨 줬다. 대가를 바라고 스텔라를 도와준 게 아니었던 터라 제이드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상대방이 고마워서 보인 성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뭘 먹을까 고심하다가 브릭 오븐으로 피자를 굽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애피타이저로 볶은 양파를 곁들인 홍합 요리를 시키고 메인 요리로 파스타와 모차렐라 치즈에 루꼴라를 얹은 피자를 시켰다. 오래간만에 해산물을 본 제이드는 게 눈 감추듯 홍합을 뽑아 먹었다.
화덕에서 구웠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던 피자는 생각보다 그저 그랬다. 담백한 건 나쁘지 않았지만 도우가 너무 얇고 양이 적었다. 먹성 좋은 제이드로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표정이다? 돈도 남았겠다, 여기서 더 시키지 말고 딴 데 가 볼까.”
“나일버거 어때?”
“살찌는 데 나일버거만 한 게 없지.”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길거리 음식 투어에 나섰다. 제이드는 기본적으로 레스토랑에서 파는 음식보다 길거리 음식 쪽이 더 입맛에 맞았고, 해리는 숀 때문에 한동안 길거리 음식에 굶주려 있었다. 숀이 잡지에 나오는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은 탓이었다.
제이드는 햄버거 세 개에 감자튀김, 핫도그, 스테이크 샌드위치, 케밥을 먹은 후, 후식으로 치즈 케이크 및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다시 할랄 푸드를 파는 트럭에 들러 양고기 플래터 두 접시를 해치웠다.
“너… 원래 잘 먹긴 했지만 오늘따라 심하게 많이 먹는다?”
30분 만에 길거리 음식을 줄줄이 다 먹어 치운 제이드는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차이나 패스트푸드점인 판다 익스프레스를 기웃거렸다.
“그런가? 요새 좀 식욕이 왕성하긴 해. 먹어도 먹어도 허전하고.”
제이드가 배를 문지르며 판다 익스프레스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비가 늘 부족한 탓에 오늘처럼 마음껏 영양을 섭취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배가 고파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 돼도 샌드위치 하나로 버틴 날이 적지 않았다.
“진짜 또 먹으려고? 너 애라도 들어섰냐? 우리 누나가 미쉘 임신했을 때 무서울 정도로 폭식했는데.”
해리는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서 제이드의 뒤를 따라갔다
“스텔라가 폭식하는 광경은 왠지 상상이 안 가는데.”
제이드는 해리의 말을 우스갯소리로 넘겨들었다. 당연히 해리도 진지하게 꺼낸 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마. 장난 아니었어. 한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두 통씩 해치웠다고.”
제이드는 볶음면과 새우튀김 한 세트를 골랐다. 위가 더부룩할 정도로 배가 부른 해리는 콜라 한 잔만 시켜 놓고서 제이드가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제이드, 팔에 그 쪼끄만 멍 자국은 뭐냐?”
해리가 제이드의 팔을 흘끔거렸다. 제이드는 더위 탓에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아침에 피 뽑은 자국.”
제이드는 흘끔 멍 자국을 바라보며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아, 헌혈했냐?”
해리가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이드가 매달 꼬박꼬박 헌혈 버스에서 헌혈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에 헌혈을 할 때 간호사가 바늘을 잘못 뽑았거나 한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헌혈을 했다. 빵도 주고, 가끔은 영화표를 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헌혈하고 받은 증서는 관리하기가 귀찮아서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소아암 단체에 기증했다.
“요즘엔 피 뽑으면 뭐 주냐?”
“스니커즈 주던데?”
제이드가 우물우물 볶음면을 씹으며 대꾸했다.
“영화표 안 줘? 참 나. 그래도 초콜릿 바면 맛대가리 없는 공장 빵이나 것보다 낫긴 하네.”
해리가 툴툴거리며 턱을 괴었다. 그도 종종 제이드를 따라 헌혈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주삿바늘이 무서워서 버스 앞까지 갔다가 걸음을 되돌리곤 했다. 오늘따라 제이드가 무시무시한 식탐을 보인 건 아침에 한 헌혈의 영향이 없진 않은 것 같았다.
“다 먹었으면 얼른 포춘 쿠키나 깨 봐.”
해리가 쪼르륵 빨대를 빨며 포춘 쿠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정 궁금하면 네가 깨서 확인해.”
제이드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비닐 포장된 포춘 쿠키를 앞으로 밀어냈다.
“안 돼! 네가 받은 걸 다른 사람이 쪼개면 효험이 떨어진다고.”
미신에 무관심한 제이드와 달리 해리는 점성술이니 별자리 운세니 하는 것들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제이드는 친구의 닦달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비닐을 뜯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 혹시 연애운?”
포춘 쿠키를 쪼개자 돌돌 말린 종이가 나왔다. 글귀를 읽은 제이드는 이맛살을 찌푸렸고, 해리는 궁금해 죽겠다는 듯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고개를 길게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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