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전이라 석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이동식 유원지가 한산했다. 풀밭에 설치된 놀이 기구는 손님을 한두 명만 태운 채 빙빙 돌았다. 회전목마는 임시휴업 상태였다.
제이드는 간이 천막이 드리워진 곳으로 걸어갔다. 깜빡깜빡 빛나는 아케이드 기계들이 경쾌한 음악을 울려 댔다. 펀치 머신을 지나치자 자동차경주 게임을 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빌어먹을! 비켜, 비키라고.”
게임 화면에 열중한 남자가 거칠게 핸들을 비틀었다. 큼지막한 등받이 의자에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거기서 ‘위잉, 윙’ 하고 경주차가 달리는 리얼한 효과음이 나왔다.
“피터?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인데.”
경기가 끝나고 순위 화면이 올라왔다. 제이드는 정보 제공자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남방계 혼혈인지 피터의 피부는 짙은 갈색이었다.
“젠장, 4등이잖아. 아, 당신이 제이드?”
한 판 더 할 생각이었는지 주머니에서 50센트짜리 동전을 꺼내던 피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돈이 부족할 때마다 아르바이트 식으로 거리로 나온다는 그는 남창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학생처럼 보였다.
“꽤 귀엽게 생겼네. 해결사라고 하기에 우락부락한 형씨일 줄 알았는데.”
피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제이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4등이라는 비참한 게임 순위는 이미 안중에서 없어진 눈빛이었다.
젊고 매력적인 남자를 상대한 게 얼마 만이지? 배 나온 아저씨를 상대하는데 신물이 난 피터는 맛있는 디저트가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날름 입술을 핥았다.
“납치될 뻔했다가 간신히 도망친 적이 있다고 했지? 그 손님의 인상착의를 알려 줬으면 하는데. 번호판을 기억하고 있으면 더 좋고.”
제이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실종된 스테판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발로 뛰어다니다가 남창인 피터를 소개받았다. 손님에게 이상한 곳으로 끌려갈 뻔했다는 친구였다. 그날 밤 피터가 탔던 차는 스테판이 실종됐을 때 바니가 목격한 차종과 동일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일단 돈부터.”
자리에서 일어난 피터가 척, 하고 손을 내밀었다. 제이드가 취향인 건 취향인 거고 사례비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누구에게든 공짜로 정보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 그래야지.”
제이드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지갑을 꺼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가벼워질 지갑을 생각하니 위가 따끔거렸다. 바니에게 받은 착수금을 생각하면 꽤 출혈이 큰 지출이었다.
“현금 말고 다른 걸로 지불해도 되는데. 가령 키스라든가….”
피터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입술을 벌렸다. 제이드는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피터의 팔을 물리쳤다.
“자, 여기 50달러.”
“쳇.”
제이드가 황급히 지폐를 쥐여 주자 피터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왜건을 몰고 와서 나한테 수작을 건 새끼는 지 이름이 빌이라고 지껄였어. 뭐, 가명이겠지. 백인에 덩치는 컸고, 머리가 벗겨졌더라고.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지.”
바지 주머니에 지폐를 쑤셔 넣은 피터가 설렁설렁 걷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사격 게임 코너 쪽으로 다가갔다. ‘SHOOT!!’ 이라고 칠해진 간판이 얼룩덜룩했다. 가게 주인은 심드렁하게 앉아 도넛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등장하는 움파룸파족 같은 과녁들이 정신 사납게 레일을 달렸다.
“어떻게 생겼는지 좀 더 자세히 묘사해 줬으면 좋겠는데.”
“기억 안 나. 날 죽이려고 했던 새끼의 얼굴 따위 기억하기도 싫고.”
피터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며 가짜 공기총을 골랐다. 집시처럼 보이는 가게 주인과 안면이 있는지 그는 가격도 물어보지 않고 지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제이드가 오기 전에 혼자서 몇 차례 도전해 본 낌새였다.
“그래도 특징이라든가, 향수 냄새라든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걸 떠올려 줘.”
제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50달러나 지불했는데 백인, 건장한 체격, 대머리란 정보는 너무 막연했다.
“내가 그 새끼에 대해 기억나는 건 눈, 코, 입 다 달려 있고 나이는 40대 중반쯤이라는 것뿐이야. 원래 손님 얼굴 따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차에 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 새끼가 내 몸에 올라타 목을 졸랐단 말이야. 젠장, 반항을 하는데 그 개새끼가 어찌나 세게 주먹을 휘둘렀는지 코뼈가 주저앉았어!”
피터가 공기총을 집어 들었다. 밉살맞게 생긴 과녁들은 철컥, 철커덩 소리를 내며 뒤로 드러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이런.’
생생한 경험담에 제이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피터가 신중하게 과녁을 조준했다. 제이드는 피터의 기분이 나아지길 기다리듯 피터의 옆모습을 잠자코 바라봤다. 탕, 탕 하고 폭죽 같은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유감스럽게도 총알은 과녁을 거의 다 빗나갔다. 총에 맞아 쓰러진 과녁은 점수가 낮은 맨 아랫줄의 돼지 그림뿐이었다.
“가방에 스턴 건을 넣어 다녔기에 망정이지, 그게 없었다면 난 정말 죽었을 거야. 아, 젠장. 더럽게 안 맞네. 아까도 7달러 넘게 날렸는데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총 다섯 번의 기회를 모두 써 버린 피터가 공기총을 내던졌다. 사격 코너 주인이 ‘어이, 살살 다뤄’라며 성을 냈다.
“내가 한번 해 볼까?”
씩씩대며 멀어지는 피터의 등에 대고 말했다.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다른 게임 기계를 살펴보고 있었지만 피터는 사격 코너에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제이드는 무서운 일을 당할 뻔했던 경험을 털어놓은 피터에게 대단한 건 아니더라도 뭔가 해 주고 싶었다.
“네가 해 보면 뭐 달라질 줄 알아? 참나. 내가 갖다 바친 돈이 얼만데.”
피터가 코웃음을 쳤다. 과녁 움직이는 속도가 변칙적인 저 사격 기계는 악마의 물건이었다. 조준하고 있을 땐 분명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면 무서운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낱 기계인데 사람을 우롱하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이동식 유원지가 웨인 시티를 방문한 이래, 사격 코너 주인은 손님들에게 지폐를 날름 받아먹기만 할 뿐 뭔가를 내놓은 적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다가 짜증을 내며 떠나갔다. 간혹 점수를 딴다 하더라도 30점 이상이 되지 않으면 그 아래 점수로 받을 수 있는 건 싸구려 유원지 기념품이나 스낵 할인권 따위가 전부였다.
경품 꼬리표를 단 인형들은 그저 장식에 불과했다. 30점 이상을 획득해 열쇠고리라도 받아 간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하드 모드 도전 때만 얻을 수 있는 120점짜리 특등 상품은 여태껏 타인의 손에 넘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뭐, 시도는 자유니까 한번 해 보셔.”
피터가 다시 한 번 콧방귀를 뀌며 머리에 두건을 두른 주인장에게 1달러짜리 지폐를 던졌다. 자신 있게 나섰으니 어디 얼마나 하는지 볼까, 라는 경쟁 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물론 저 허술해 보이는 해결사 친구가 성공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다.
가게 주인이 설탕 묻은 손을 셔츠에 닦으며 기계를 작동시켰다. 경박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우뚝 정지해 있던 과녁들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기계 작동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제이드는 뺨을 긁적거리며 가짜 공기총과 과녁을 살펴봤다. 그의 옆에 짝다리를 짚고 선 피터는 권투경기라도 지켜보는 관객처럼 팔짱을 꼈다.
‘가짜인데도 꽤 묵직한걸.’
공기총을 들어 무게를 확인한 제이드가 신기하다는 듯 장총을 이리저리 만져 보다 다리를 벌려 사격 자세를 취했다.
염세주의자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피터가 ‘어라, 제법인데?’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의 포즈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본격적이었다. 다리를 벌린 간격, 무게중심, 팔을 들어 올린 위치가 영화나 뉴스에 나오는 특수부대원을 떠올리게 만들 만큼 그럴듯했다.
피터는 제이드가 과녁을 향해 총구를 겨누자 꿀꺽 침을 삼켰다. 과녁을 주시하는 제이드의 눈빛이 매처럼 차분했다. 어딘지 모르게 느슨하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인상이라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수컷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위잉, 위잉. 덜커덩.
움직이는 목표물의 속도와 간격을 충분히 가늠한 제이드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총을 잡은 건 오랜만이었지만 몸에 밴 습관이 여전히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총의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감각을 떠올리며 검지를 움직였다.
아차.
탕!
제이드가 자신의 실수를 인식한 건 이미 방아쇠가 당겨진 이후였다. 사격 게임장의 장총은 진짜와 다르게 방아쇠가 많이 헐거웠다. 늘씬한 동양인 청년은 생경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흠칫했고, 총알은 보기 좋게 과녁을 빗나갔다.
“쳇, 뭐야.”
피터가 팔짱을 풀며 김이 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의 폼이 하도 그럴듯해서 잠시 기대를 했는데 멍텅구리 같은 짓이었다.
‘내가 이러니까 매번 쓰레기 마권이나 사지.’
그는 아까 제법이라고 생각했던 제이드에 대한 평가를 망설임 없이 수정했다.
“어디서 본 건 많아 가지고.”
피터가 제이드를 흘겨보며 빈정댔다.
“아, 이런. 장난감은 확실히 느낌이 다르구나.”
제이드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곧 감을 잡았다는 듯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터는 다시 총구를 겨누는 제이드를 보고 ‘참나, 실패하면 다들 꼭 저런다니까’라고 속으로 잔뜩 비아냥거렸다. 자기 실력을 인정 못 하는 것들이 장비나 컨디션 탓을 했다. 다음번에는 잘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변명을 늘어놓는 치들 치고 별 볼 일 있는 놈은 보기 드물었다.
“어차피 안 될 것 같은데 일찌감치 포기하지그래? 또 시도해 봤자 시간 낭….”
피터가 잔뜩 빈정거리던 와중이었다.
탕! 소리와 함께 늑대 악당 그림이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한껏 의기양양해져 있던 피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놀라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전광판 위에 15라는 점수가 떠올랐다. 피터는 기를 쓰고 도전해도 20점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제이드가 단숨에 자신의 최고점 언저리에 도달했다. 하물며 늑대 그림 과녁이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 제법이잖아.”
주인장도 놀랐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탕, 탕, 탕!
제이드는 남은 세 발을 연달아 쐈다. 우스꽝스러운 그림들이 누가 명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거의 동시에 벌러덩 뒤집어졌다. 15, 20, 25. 전광판에 한 박자 늦게 빨간색 불이 들어왔다. 어떤 순서로 목표를 노린 건지 빤히 보이는 숫자였다.
‘이게 무슨….’
피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뒤로 쓰러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고득점짜리 과녁을 봐도, 번쩍이는 전광판의 숫자를 봐도, 이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았다. 털보 주인장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는지 쉴 새 없이 도넛을 집어 먹던 손이 허공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동이 없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제이드가 장총을 요리조리 뒤집어 본 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들이 놀란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75점이면 뭘 받을 수 있지?”
그는 걸어 둔 지 족히 10년은 넘은 듯한 오래된 경품 안내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이드는 어린애처럼 기대감에 찬 얼굴로 안내판 점수를 손가락으로 일일이 확인했다.
“어, 도날드 덕이네….”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상품이 아니었다.
제이드가 실망한 표정을 지은 걸 보고 피터는 ‘저 인간이 뭘 모르네’라고 중얼거렸다. 여태껏 할인 쿠폰이나 받아 가던 손님들, 그리고 피터에 비하면 손바닥만 한 도날드 덕 인형은 꿈의 경품이라 해도 무방했다.
주인장이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파란색 세일러복을 입은 오리 인형을 꺼냈다. 이어서 그는 도날드 덕 인형 엉덩이에 붙은 새하얀 태그에 펜으로 날짜와 도시를 적었다.
“여깄수다.”
피터는 왠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남의 돈을 받아먹기만 하던 악마 같은 주인장이 드디어 경품을 뱉은 것이다.
“받아. 네가 낸 돈으로 맞춘 거니까.”
제이드는 경품으로 받은 인형이 대단치 않아서 미안하단 얼굴로 도날드 덕을 내밀었다.
“운이 좋아서 성공한 것 가지고 재기는.”
피터는 툴툴거리면서도 인형을 잽싸게 채 갔다. 인형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짜를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한 번 더 해 볼까. 이 정도로 만족하기엔 조금 아쉬운데.”
제이드가 몸을 풀듯 어깨를 크게 돌렸다. 가짜 공기총에 적응도 됐고,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해 보려고? 두 번은 힘들 텐데.”
피터가 손에 든 인형을 조물거리며 우려를 표했다. 제이드의 실력이 저보다 낫다는 건 인정했다. 그렇지만 제이드가 대번에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어느 정도 운이 따라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 봐.”
제이드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묘하게 어린애 같은 표정이라 허세를 부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청바지를 뒤적거려 1달러짜리 지폐를 꺼내는 모습이 섹시했다. 베이비 페이스에 핫 바디라니, 오늘 아주 제대로 눈이 호강하는 날이었다.
“이번엔 한 단계 어려운 걸로 돌릴 거요.”
주인장은 언짢은 표정으로 제이드가 내민 1달러를 받았다. 마땅히 줘야 할 경품을 손님에게 건넨 거지만, 장사를 날로 먹기만 하던 그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임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이드는 언제 헬렐레 웃고 있었냐는 듯 곧바로 과녁을 조준했다. 마음의 준비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피터가 너무 성급한데, 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그림판 다섯 개가 뒤로 넘어갔다.
“뭐야… 당신, 밥 먹고 사격 게임만 했어?”
점수판을 보고 피터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한 발쯤은 빗나가는 게 정상인데 모두 명중했다. 심보가 고약한 사격 코너 주인이 재앙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탕탕탕, 하는 총소리가 피터의 귓가에 맴돌았다. 이렇게 쉽게 고득점을 올린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에겐 항상 패배만 안겨 줬던 악마의 기계가 제이드 앞에서 순한 양치기 개처럼 굴고 있었다. 게다가 연속으로 적중시켰으니 이제는 운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피터가 얼을 빼고 있는 사이, 제이드가 경품을 챙겼다.
이번에 획득한 상품은 가게 물건 중에서 제일 비싼 축에 속하는 닌텐도 게임팩이었다. 피터는 게임팩과 제이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이젠 슬슬 제이드가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어렸을 때 생각이 나네.”
게임팩을 손에 쥔 제이드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종목은 다르지만 게임 센터를 주름잡던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마 생일인 고아원 동생들을 위해 인형 뽑기 기계에서 인형을 뽑아다 주었던 게 시작이었을 것이다. 인형 낚는 솜씨가 유명해지자 학교 친구들이 모형 자동차나 장난감 권총을 뽑아 달라고 그를 게임 센터로 데려갔다. 경품을 낚는 데 성공할 때마다 친구들에게 25센트짜리 동전이나 과자를 보수로 받았다. 나름 짭짤한 아르바이트였다.
“다, 다음 단계! 제일 어려운 레벨이 아직 남았어.”
이제 갈까, 하는데 사격 코너 주인이 제이드를 붙들었다. 볼살이 푸들푸들 떨리는 것이 억울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눈치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떻게든 손해를 만회해야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됐습니다.”
깔끔하게 사양했다.
재미는 충분히 즐겼다. 사격 게임에 참여한 소기의 목적도 이미 달성했다. 그에겐 더 이상 돈을 쓸 이유가 없었다.
“하나도 못 맞출까 봐 겁이 나? 불알 달린 남자라면 1등을 노려봐야지. 명예의 전당에 올려 줄게.”
“죄송하지만 관심 없습니다.”
주인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제이드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뭔가를 놓친 사람처럼 경품 선반을 샅샅이 살폈다. 특등상이라고 적힌 표지판 아래에 무식하게 큰 곰 인형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다.
“해 보죠, 도전자 레벨.”
제이드가 번쩍 눈을 빛내며 지갑을 꺼냈다.
피터는 제이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고 주인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바라던 대로 되기는 했지만 그가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집시 남자는 총자루를 집어 드는 제이드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쥐락펴락했다.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제 장사 밑천을 털어먹은 악당이 좌절할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고소했다.
“흐흐흐.”
이번에는 절대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할 것이다. 도전자 모드는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는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사격 코너 주인이 기계를 작동시키자 과녁들이 눈이 돌아갈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목표물을 탐색하는 저격수 같은 눈빛으로 총을 받쳐 들었다. 뜸을 들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탕, 탕, 탕, 탕, 탕!
덜컹,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순식간에 게임이 끝났다. 자신만만했던 주인장은 넋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맨 윗줄에 위치한 과녁과 그 아랫줄 과녁 하나가 사이좋게 드러누웠다. 피터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25, 25, 25, 25, 20.
전광판에 뜬 숫자는 딱 120점이었다. 125점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제이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25점짜리를 연달아 다섯 개 맞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과시나 기록 달성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점수는 120점이면 충분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몇 년째 자리만 차지하던 특등 상품이 드디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 집시 남자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곰 인형을 테이블 너머로 내밀었다. 손님이 많은 시간대였다면 난리가 났을 텐데, 아쉽게도 유원지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네가 가져가. 난 게임기가 없어서 쓰지도 못하거든.”
사격 게임장에서 멀어진 제이드가 게임팩을 피터에게 넘겼다. 딱히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고 애초에 피터 때문에 사격 게임을 하게 됐으니 그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
“당신 바보야? 게임기가 있든 없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게임팩은 중고로 팔면 되잖아.”
피터가 뭐 이런 얼간이를 다 봤나, 라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이드가 근사하고 대단해 보였는데 이미지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제이드는 충격을 받았다. 게임팩을 팔면 된다는 발상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다. 게임기도 없는데 게임팩만 덜렁 가지고 있어 봤자 짐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한심하기는. 돌려 달라는 말은 꺼낼 생각도 하지 마. 줬다 뺏는 것만큼 치사한 짓도 없다? 한 번 줬으면 끝이야.”
피터가 얼른 가방의 지퍼를 채웠다.
“그래… 한 번 줬으면 끝이지.”
제이드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좌절감과 서글픔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1달러를 열 배, 스무 배로 불릴 기회를 놓친 게 아까워서 오늘 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너무 낙담할 것 없어. 받기만 하고 입을 싹 닦을 생각은 없으니까.”
사람 몸집만 한 커다란 곰 인형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제이드의 등에 대고 피터가 말했다.
그가 제이드에게 받은 건 게임팩을 제외하면 팔지도 못하는 허섭스레기였다. 게임팩도 사실 크게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른 누군가에게 아무런 사심도 없는 선물을 받은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결정적으로 제이드가 마음에 들었다. 섹슈얼한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이성적인 관심을 완전히 배제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
어쨌든 잠깐 본 것뿐인데도 제이드에겐 잘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어떤 매력이 있었다.
“스테판이라는 애를 찾고 있다고 했지?”
피터는 귀가 쫑긋해져서 뒤를 돌아보는 제이드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확실히 걔인지는 모르겠지만 올드 타운 부둣가 쪽에서 어떤 남자랑 함께 있는 걸 봤어.”
“언제! 정확히 위치가 어디였는지 말해 봐.”
제이드가 다급하게 피터의 양쪽 팔을 붙들었다. 어리바리하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니의 의뢰를 수락한 이후 처음으로 스테판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잡은 것이다.
“저번 주 화요일쯤. 같이 있던 남자는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어. 키는 스테판 정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꽤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아.”
“왜 스테판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여태껏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지?”
제이드가 안타까워했다.
스테판이 살아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피터가 조금만 더 일찍 타인에게 이 사실을 말했더라면 지금쯤 스테판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을지도 몰랐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성가신 일에 엮이기도 싫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피터가 죄책감 없는 얼굴로 으쓱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는 원래 계산적인 성격이었다. 금전적인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한 어떤 일이든 철저히 방관했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제이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털어놓은 것이 오히려 그에게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납치범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어. 제 발로 그 남자와 동행하고 있었다고.”
피터가 잠시 머뭇대다 말을 덧붙였다.
“약이라도 했는지 좀비처럼 눈이 좀 풀려 있긴 했지만.”
“끌려가는 게 아니었다고?”
제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니의 말에 따르면 스테판은 정황상 납치·감금을 당한 상태였다. 그런데 스테판이 수상쩍은 남자를 얌전하게 따라갔다는 목격담을 들으니 혼란이 왔다.
“내가 보기엔 실종된 게 아니라 고의적으로 잠적한 거야.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끝까지 모른 척했거든.”
피터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제이드는 팔짱을 낀 채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피터의 추측도 아주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곰 인형은 누구 주려고 챙겨가는 거야? 여자?”
제이드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자 화제를 바꿨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면서 왜 저 집채만 한 곰 인형만 따로 빼놓은 건지 아까부터 궁금했다.
“아, 응!”
생각에 잠겨 있던 제이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닐에 담긴 곰 인형이 바닥에 끌리고 있는 걸 뒤늦게 깨닫고 얼른 곰 인형을 고쳐 안았다.
“흐-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받으면 좋아하겠네. 여자라고 전부 인형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피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좋아할 거야. 귀여운 소품에 관심이 많은 소녀 같은 사람이거든.”
제이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비닐 속에 담긴 곰 인형을 발견한 순간 가장 먼저 그녀가 떠올랐다. 곰 인형만큼은 피터에게 주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곰 인형을 가져다줄 생각으로 도전자 레벨에 도전했다. 설혹 곰 인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제이드가 가져온 선물을 보고 순수하게 기뻐해 줄 성품이었다.
“예, 예. 그러시겠죠.”
눈치 한번 더럽게 없네.
피터는 제이드를 흘겨보며 이동식 유원지 주차장에 세워 둔 스쿠터에 올라탔다.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건 유감이었다. 그래도 뭐, 눈요기는 충분히 했으니 미련은 없었다. 제이드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 볼 마음을 진지하게 품을 정도로 주제를 모르진 않았다.
“피터, 정보 고마웠어!”
멀어지는 피터의 등에 대고 제이드가 외쳤다. 헬멧을 쓴 피터는 사이드미러로 제이드의 모습을 확인하며 피식 웃었다. 위협적일 만치 커다란 곰 인형을 둘러업은 제이드가 당장에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지하철에 탄 승객들이 한 청년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은 등 뒤에 거구의 곰 인형을 짊어지고 있었다. 시꺼먼 화장을 한 펑크족 여자가 ‘귀여운데’라고 중얼거렸다. 배낭을 멘 관광객 커플도 쿡쿡 웃으며 외국어로 수군거렸다. 제이드는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제가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덜컹, 덜컹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피터와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었다. 스테판이 끝까지 시선을 외면했다는 피터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수상쩍은 남자를 순순히 따라갔다는 대목도 의혹을 키웠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그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스테판이 부둣가에서 목격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스테판이 자발적으로 모습을 감춘 건지, 아니면 납치를 당한 것인지에 대한 추리는 그를 발견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망망대해와 다름없는 부둣가를 뒤지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곰 인형에 놀라 뒤를 돌아보는 시선은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도 계속 쫓아왔다. 거리에선 몇몇 여자들이 그를 불러 세우며 말을 붙였다.
“고백하러 가는가 보다. 힘내요!”
“여자 친구 생일 선물 맞죠?”
뭐라 대답할 말이 없는 제이드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거리가 지독하게 멀게 느껴졌다.
주택가에 당도한 제이드는 아담한 주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제이드가 곰 인형을 선물하려고 마음먹은 ‘그녀’는 바로 6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소피였다.
“어서 와요, 제이드. 세상에, 이게 뭐예요?”
오늘은 평소보다 상태가 좋은지 소피가 이름을 똑바로 불러 주었다. 노령인 데다 치매를 앓고 있어서 그녀는 소녀 시절로 퇴행하는 일이 잦았다.
“이렇게 큰 곰 인형은 처음 봐요, 허드슨 부인.”
간병인이 비닐을 벗기며 감탄했다.
“게임 센터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소피 생각이 나서 가져왔어요.”
제이드는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요, 제이드. 이 나이에 인형 선물을 받다니, 정말 행복하네요.”
백발의 노부인이 온화하게 웃으며 곰 인형의 팔을 쓰다듬었다. 정신이 열여섯에 머물던 때나 지금이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소녀 같았다.
간병인이 제이드가 들고 온 곰 인형을 아기자기한 패브릭 소파에 앉혔다. 색감이 따뜻한 꽃무늬 소파 커버와 곰 인형이 제법 잘 어울렸다.
“조만간 이 아이에게 어울리는 리본을 만들어 줘야겠네요.”
진심으로 기뻐하는 소피를 보니 뿌듯했다. 거추장스러운 곰 인형을 내팽개치지 않고 여기까지 들고 온 보람이 있었다.
“이 사진들은 다 뭐죠?”
평소와 다르게 거실 테이블이 어수선했다. 제이드는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앨범과 흑백사진들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앨범이 낡아서 사진을 바꿔 끼우고 있는 중이었어요.”
간병인이 부엌에서 차와 과자를 내오며 대답했다. 어깨에 숄을 두른 소피는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간병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병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확실히 앨범이 오래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가 누렇게 삭아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곰팡이가 필 위험도 있어 보였다.
“이 꼬마 아가씨가 혹시 소피예요?”
제이드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앨범을 들여다보다가 세피아 톤을 띤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그 사진 안에는 토끼 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마 다섯 살 때 즈음인 것 같네요. 아주 천방지축이었죠.”
소피가 홍차에 우유를 따르며 웃었다.
“안 그래 보이는데요. 귀엽기만 한데.”
“말이라도 귀엽다고 해 주니 고맙네요. 하지만 어렸을 땐 정말 동네 남자애들을 때리고 다니는 말괄량이였어요. 사진 한 번 찍으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진땀을 빼야 했죠.”
사진 기사였던 소피의 아버지는 딸아이의 성장을 갓난아기 때부터 결혼식까지 차곡차곡 기록했다.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사진들이었다.
제이드는 추억과 역사가 깃든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소피의 아버지처럼 중요한 순간을 전부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의 사진이 거의 없었다. 각 가정에 하나씩은 있기 마련인 갓난아기 사진이라든가 베이비 샤워 사진은 애초에 찍어 보질 못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사진들은 대부분 고아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단체 사진이었고, 독사진은 고아원 원생 기록부에 실린 증명사진이 전부였다.
“증조모님이랑 사촌 언니네. 이게 언제지? 아, 사촌 언니가 아이를 낳아서 가족들이 다 모였었지.”
소피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호호 웃었다.
사진 정리는 잠시 미뤄 둔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서 앨범을 들여다봤다. 소피의 부모님이 꼼꼼하게 사진을 남긴 덕분에 볼거리가 풍성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 풍경과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을 비교해 가며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분이 증조할머니라고요?”
사진 속 여인을 두고 막연히 노인이구나 생각했던 제이드는 증조모라는 이야기에 입을 헤 벌렸다. 소피가 올해 아흔일곱 살이니까 그녀의 증조모는… 음. 정신이 아득해졌다.
증조할머니가 몇 년도 생이시냐고 물어볼 엄두는 나지도 않았다. 어쨌든 엄청 옛날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백 년 전에도, 이백 년 전에도 사람이 살긴 했을 테지만 왠지 역사 체험관에라도 방문한 것처럼 신기한 기분이었다.
“근데 이 사람은 누구죠.”
두꺼운 성경책을 안고 있는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왠지 느낌상 친인척은 아닌 것 같았다. 흑백사진이긴 하지만 머리 색의 명암도 다르고 풍기는 분위기도 소피의 가족과는 사뭇 달랐다.
“이웃에 살던 찰스 오라버니예요. 사춘기 때 내가 많이 좋아했답니다. 그 시절이 그립네요.”
소피가 추억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것, 그리고 제이드를 찰스로 부르곤 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곤 했다.
흠. 이 사람이 찰스구나.
제이드는 사진 속의 검은 머리 남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피의 첫사랑이라는 말만 들었지 찰스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짐작했던 대로 머리만 검을 뿐 자신과 닮은 점은 없었다.
“반듯하게 생기셨네요.”
사진 속 찰스는 어린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며 따를 것 같은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음, 어쩐지 신학교를 다녔을 것 같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이야기를 꺼냈더니 소피가 어떻게 안 거냐며 깜짝 놀랐다.
“찰스 오라버니는 선교사가 되고 싶어 했답니다.”
소피가 앨범을 쓰다듬으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찰스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제이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사가 되고 싶어 했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제이드는 소피와 찰스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에 비해 찰스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치매에 걸린 환자들이 대체적으로 그렇듯 소피도 늘 비슷한 이야기만 반복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어요. 토드랑 가깝게 지내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찰스가 일찍 죽었다니, 적잖이 충격이었다. 제이드는 지금껏 소피의 짝사랑이 흐지부지 끝났을 것이라고만 추측했다. 자연스레 관심이 멀어진다거나 찰스가 이사를 가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토드라면 찰스의 사촌 동생 맞죠?”
토드에 대해선 소피가 전에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토드를 원망하는 걸 보니 찰스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촌이 아니었어요. 어른들은 아마 토드가 누군지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나에게 사촌 동생이라고 둘러댄 거겠지요. 부둣가 노동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남자였으니까요.”
제이드도 어른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감수성이 예민한 십 대 소녀에게 저 남자는 매춘부라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 찰스는 토드의 자립을 도우려고 꾸준히 노력했던 모양이었다. 평범하게 돈을 벌 수 있도록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글을 가르치고, 집으로 데려와 함께 식사도 했다. 소피로서는 토드가 찰스의 사촌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드는 질 나쁜 사람들하고 어울리길 좋아했어요. 범법자, 알코올중독자, 인종차별 주의자…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었죠.”
소피는 주름진 손으로 앨범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사진을 제대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이드도 사진보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이 더 쏠렸다. 소피에게 자주 찰스라고 불려서 그런지, 옛날 일이지만 찰스의 과거사가 매우 흥미롭게 들렸다.
“토드가 루테니아 씨를 데리고 왔을 땐 다들 놀랐답니다. 의외라고 생각했죠. 정말 번듯한 신학자 분이었으니까요.”
처음 듣는 이름이 나오자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는 루테니아가 누구냐고 묻는 대신 홍차를 홀짝이며 소피가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노부인은 보기 드문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반짝 정신이 났다가도 금세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일이 잦았다. 제이드는 괜히 끼어들어서 소피의 집중력을 흩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아흔일곱 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루테니아 씨는 성황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셨대요. 찰스 오라버니는 그분과 금방 가까워졌지요. 아무래도 관심사가 비슷하다 보니 대화가 잘 통했을 테니까요.”
소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드는 노부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야기의 흐름상 분위기가 심각해질 대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찰스 오라버니가 행방불명이 되었답니다. 혹시나 해서 집안 어른들이 루테니아 씨의 저택을 찾아갔죠. 깊은 밤인데도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봤더니 지하실에 루테니아 씨와 찰스 오라버니가 살해당한 채로 쓰러져 있었다더군요.”
제이드는 이마를 긁적이며 목구멍으로 신음을 삼켰다. 소피의 낯빛이 왜 어두워졌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신학자의 집에서 찰스가 살해당했으니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게 당연했다.
“살인범은 잡혔나요.”
노부인은 제이드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시체를 발견한 어른들이 경찰을 부르러 간 사이, 저택에 불이 났어요. 불길은 삽시간에 저택을 집어삼켰답니다. 화재를 알리는 종소리에 깨어나서 나도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갔지요. 정말 큰 화재였어요. 저택이 화염에 휩싸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해요.”
소피는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는 듯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과거를 회상했다.
그날 밤 왜 화재가 발생했는지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까지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꽃 때문에 건축물은 완전히 소실됐다. 지하실도 새카만 잿더미가 되어 유해 발굴에 어려움을 겪었다. 간밤의 소란을 틈타 도주한 범인을 붙잡을 단서는 화염과 함께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화재를 전후로 해서 토드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그는 찰스의 장례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토드에게도 입에 담지 못할 불행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시내에 나갔던 윌리엄이 시청 부근에서 토드를 목격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춘부들과 음담패설을 나누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소피의 부모님은 침음을 흘렸고 소피는 어깨를 떨었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충격이 컸다. 찰스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녀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토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짐승도 이렇게 배은망덕하진 않았다.
얼마 후 토드가 서부행 대륙 횡단 기차를 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토드에 대한 소식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다시는 웨인 시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돌아온다 하더라도 반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토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잊혀 갔다. 소피도 언젠가부터 그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찰스에 대한 감정도 빛바랜 추억이 되었다.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 세월 속에는 망각이라는 고약한 저주가 걸려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노부인은 제이드를 미소 띤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반세기도 더 된 먼지 쌓인 유물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녀 옆에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녀조차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오래된 기억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도록 곁에서 기운을 북돋아 준 것이다.
화려한 언변이나 과장스러운 맞장구보다 더욱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진심으로 경청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눈빛이었다. 비록 늙고 노쇠했지만 그녀에게는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제이드는 말재주가 뛰어나진 않았다. 그렇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검은 머리 청년은 어딜 가도 사랑받을 사람이었다. 언뜻 평범해 보일지 몰라도 그에겐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신비한 분위기가 있었다.
“긴 이야기를 들어 줘서 고마워요. 무화과 파이를 구울까 하는데, 괜찮다면 조금 들고 가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제이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입 안에 침이 고이는지 쓰읍, 하고 뭔가를 삼키는 소리를 내고 눈빛도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했다. 소피는 모처럼만에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간병인과 제이드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당신은 꼭 좋은 짝을 만날 거예요, 제이드.
소피는 아끼는 손자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이드를 남편으로 데려갈 신붓감은 그 누구보다 가정적이고 현명하며, 품위 넘치는 피스위버Peace Weaver일 것이 분명했다. 미래를 보는 능력은 없지만 그녀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경험과 통찰을 통해 자신의 직감을 확신할 수 있었다.
***
끼익, 끼이익.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 내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날씨 한번 변덕스럽군.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슈퍼 마리오를 닮은 형사는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모처럼 해가 난다 싶었는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계절 내내 음습한 안개를 두르고 있는 웨인 시티의 일조량은 전국에서 최하위를 달렸다.
로드리고 형사는 에어컨도 돌아가지 않는 낡은 포드에 앉아 미트 파이 상자를 열었다. 요즘 들어 부쩍 동맥경화를 걱정하는 어머니 때문에 그는 간식으로 섭취하던 나초와 감자튀김을 자제하고 있었다.
양파에 베이컨, 치즈를 추가해서 고기의 풍미가 깊고 진했다. 다만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으로 된 파이 부스러기가 불룩한 와이셔츠 위로 떨어질 때마다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로드리고 형사는 파이 부스러기가 셔츠나 운전자 시트에 떨어지는 게 싫었다.
따끈한 미트 파이로 혈당치를 올린 로드리고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사진작가 장 폴 앙티오슈의 거주지가 메모 되어 있었다. 계약직 종군기자로 일하던 장이 행방불명되기 전에 살던 주소라 그와 마주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보는 게 좋았다.
장 폴 앙티오슈는 왜 자취를 감춘 것일까. 슈퍼 마리오를 닮은 형사는 열쇠로 운전석 문을 잠그며 생각했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종군기자라는 습성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쩌면 그는 지금쯤 소리 소문도 없이 분쟁 지역에 잠입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대고 있을지 몰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살인 사건은 현재 잠잠해졌다.
한동안은 TV를 틀면 어김없이 매드 버쳐에게 살해당한 피해자에 관한 뉴스가 나오곤 했는데 이젠 아무도 관련 뉴스를 보도하지 않았다. 미디어의 변덕이었다. 매드 버쳐가 활약을 해 줘야 시청률이 오르는데 더 이상 시체가 발견되지 않으니 다들 흥이 식어 버렸다. 오직 경찰만이 범인을 찾아 지루하고 반복적인 수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건물 주인과 대화를 나눈 로드리고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장은 현재 이곳에 머물고 있지 않을 뿐, 여전히 아파트를 임대 중이었다. 월세는 임대계약 때 1년 치를 선불로 지불했다. 건물 주인은 402호 안으로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장의 짐들은 아마 고스란히 남아 있을 거라고 말했다.
“최근에 앙티오슈 씨가 돌아온 적 있습니까?”
“글쎄요, 그런 건 제가 알 수 없지요. 매일 세입자들을 확인하러 오는 건 아니니까요.”
나이 지긋한 건물 주인은 형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로드리고는 402호의 이웃들을 방문했다. 딱히 소득이 될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외출 중인 세대가 대부분이었고, 혹 집에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비협조적이었다.
계단을 내려간 로드리고 형사는 402호의 우편함을 확인했다. 세입자가 장기 부재중임을 알려 주듯 새하얀 우편물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로드리고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주변을 살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빽빽이 꽂힌 우편물들을 손가락으로 슬쩍 들춰 보았다. 가장 오래된 소인이 5개월 전 것이었다. 즉, 사진작가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방문한 게 5개월 전이라는 의미였다.
로드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거주지를 정리하거나 이사를 간 건 아니니 밀림에서 비명횡사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돌아올 터였다. 형사는 수첩을 꺼내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그는 종이를 찢어 402호 문틈으로 밀어 넣으며 사진작가가 가능한 한 빨리 쪽지를 확인하길 기도했다. 기왕이면 매드 버쳐가 활동을 재개하기 전에 말이다.
매스컴 덕분에 유명 인사가 된 연쇄 살인마 놈은 갑자기 꼬리를 감췄다. 경찰은 계속 미치광이 푸줏간 주인을 뒤쫓고 있었지만 뾰족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놈은 나타나지 않고 조잡한 모방 범죄자 놈들만 기승을 부렸다. 살인을 은폐하려고 매드 버쳐가 저지른 짓처럼 꾸민 사건들도 경찰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다.
섣부르게 그 남자를 들쑤시지 말았어야 했다. 로드리고는 제가 용의자로 점찍은 전직 군인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놈의 주변을 맴돌 때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형사가 뒤를 캐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제이드란 작자가 몸을 사리는 것도 당연했다.
“후우, 힘들군.”
두 차례나 계단을 오르내린 로드리고 형사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얼음이 가득 든 콜라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누군가 우산을 털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로드리고는 천천히 등을 폈다. 건물 안에 발을 들인 남자를 관찰했다. 인상착의는 평범했다. 피부가 탄 흔적도 없었고 멀리 여행을 갔다 온 사람의 행색은 아니었다. 낯선 남자는 우편함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로드리고는 남자의 등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상대방은 뒤를 돌아 꾸벅 묵례를 보냈다. 하지만 성가셔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한 달 동안 담배를 손에 대지 못해 히스테리가 절정에 다다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형사는 402호에 대해 아는 바가 있냐고 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웃 따위엔 한 톨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우편함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걸로 봐선 이 건물 주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로드리고는 건물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와 마주친 남자는 4층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우산에서 떨어진 물기가 복도에 점점이 이어졌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 곳은 402호 앞이었다.
남자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가 볼까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무단 침입을 하는 건 아니었다. 이 아파트를 임대한 장 폴 앙티오슈 본인이기 때문이었다.
폭우로 인해 실내가 어두컴컴했다. 5개월 만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사진작가는 카펫에 끼어 있는 쪽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불을 켜는 대신 창문으로 깃드는 흐릿한 빛에 의지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집에 들렀다는 사실을 타인이 알게 되면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장은 작업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5개월 동안 방치해 뒀더니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서랍을 뒤졌다. 실내에는 살해당한 민간인과 어린아이, 목을 자른 적군의 시체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게릴라의 사진 따위가 큼지막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그게 어디 있지? 분명! 여기 있을 텐데.”
노란색 서류 봉투와 자료 파일을 죄다 끄집어냈지만 그가 원하는 명함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장은 신경질적으로 서류철을 밀쳐 버렸다. 촤르륵, 하고 서류철의 내용물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이게 다 바니 그 자식 때문이야. 제까짓 놈이 뭐라고!”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장이 사진과 종이를 짓밟고 북북 찢었다. 눈동자에 시뻘겋게 실핏줄이 불거졌다. 그는 자신을 통제하려 드는 파트너 때문에 욕구불만이 한계까지 다다랐다. 흘끗 본 것뿐이지만 스트레스가 심해 보인다는 로드리고의 평가는 정확했다.
“스테판은 내 소유물이야! 왜 손대지 못하게 하는 거냐고.”
한바탕 발작을 일으킨 장은 씩씩대며 취재 수첩을 넘겼다. 스테판을 살려 두느라 그는 하마터면 곤경에 처할 뻔했다. 스테판을 감금해 놓았던 창고 옆 건물에 갱단이 드나들기 시작한 탓이다.
장은 주인 없는 빈 건물에 둥지를 튼 갱단이 신경 쓰여서 며칠 동안 편히 잠들지 못했다. 비를 피해 단체로 이동한 들쥐 떼가 침대 밑에서 득시글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결국 다른 창고를 알아본 다음 스테판을 옮겼다. 바니의 도움을 받아 스테판이 제 발로 새 창고로 걸어가게 만들 수 있었지만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애초에 바니가 스테판을 살려 두라는 명령만 하지 않았어도 갱단의 동태를 살피며 가슴을 졸일 필요가 없었다.
장이 찾고 있는 물건은 스너프 필름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브로커의 연락처였다. 특별하고 고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브로커는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페이크 다큐가 아니라 조직범죄단의 주도하에 실제 납치 및 절단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라 품질은 확실했다. 장 폴 앙티오슈도 바니를 만나기 전까진 브로커의 주요 고객 중 하나였다.
직접 작품 활동을 하게 된 이후로 스너프 필름 따위는 졸업했다. 그런데 이제 와 다시금 브로커가 유통하는 신작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바니 그 자식이 스테판을 건들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대체품으로라도 욕구를 충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매스컴의 관심이 제게서 멀어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준 낮은 살인자로 경력을 마감할 뻔했던 장은 바니와 엮이게 된 이후로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았다. 신문 기사와 영상 매체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희대의 살인마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모든 TV 채널에서 자신의 작품을 헤드라인 뉴스로 내보낼 때의 희열은 그 무엇보다 짜릿했다.
겉보기엔 소심했지만 장은 어렸을 때부터 열렬한 고어물 마니아였다. 어른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떠돌이 개나 새를 심심풀이로 죽이며 성장했다. 종군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사람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덤으로 심하게 훼손된 시체 사진도 마음껏 찍고 말이다.
“피나 빨아먹는 괴물 새끼. 내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제길!”
취재 수첩을 탈탈 뒤집어도 명함은 나오지 않았다. 거처를 옮길 때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버린 모양이었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장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머릿속으로 바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광경을 상상했다. 성적으로 유린하고 고문하는 망상도 빠지지 않았다.
“까불고 있어. 남자 좆이라면 환장하고 달려드는 남창 주제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 현실은 비참했다. 표면상으로는 협력 관계였지만 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바니였다. 폭력을 휘두르기는커녕 그는 일방적으로 바니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힘으로는 바니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의 예술적 감성과 미학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조력자인 바니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였다.
바니를 처음 만난 곳은 불법 이민자들이 매춘을 하기 위해 드나드는 으슥한 뒷골목이었다.
비정상적인 취미를 가진 사진기자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남창을 샀다. 신분이 불안정한 불법 체류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하더라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골목에서 장은 가장 병약해 보이는 남자에게 접근했다. 몸집이 작아야 반항을 해도 제압하기가 쉬웠다. 프리랜서 종군기자는 그린텔발트에서 돌아온 후로 이미 두 사람이나 살해한 상태였다. 경찰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위조 신분증으로 새로운 거처까지 마련했다.
흥정은 순조로웠다. 지폐를 꺼내 보이며 조금 거친 플레이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창백한 뺨에 주근깨가 가득한 남창은 주춤했지만, 돈에 혹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은 가벼운 마음으로 병약해 보이는 남창을 자신의 차에 태웠다. 줄곧 다른 도시에서 살다 왔는지 남창은 시골 쥐처럼 웨인 시티를 낯설어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름을 물어보자 앞머리가 덥수룩한 청년은 ‘바니’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은 조수석에 앉아 굼뜨게 안전벨트를 매는 청년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저를 비웃듯 비스듬히 끌어올린 입꼬리가 조금 꺼림칙하다고 생각했다.
‘뭐 별거 있겠어? 어차피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살려 달라고 울부짖을 텐데.’
불길한 예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화근이었다. 음침한 조명이 켜진 지하실에서 험한 꼴을 당한 건 다름 아닌 장이었다. 스스로의 감을 무시한 대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가 직접 정성스럽게 준비한 장비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순간은 지금 떠올려도 아찔하다 못해 끔찍했다.
소리 없이 번개가 쳤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음이 한층 더 거세졌다. 장은 어질러진 서류철에 다시 손을 뻗었다. 아직 포기하기는 일렀다. 명함은 버렸더라도 어딘가 옮겨 적어 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딜 갔나 했는데 여기 있었네요. 장, 한참 찾았잖아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종이를 뒤지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장은 비명을 지를 것처럼 놀랐다. 기척도 없이 집 안으로 사람이 들어와서 겁에 질린 게 아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의 목소리였다.
“바, 바니….”
심장이 불안하게 펄떡거렸다. 내가 지껄인 혼잣말을 들었을까? 아냐, 못 들었을 거야. 장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유리창을 등지고 있는 바니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실내가 어두워서 바니의 몸은 온통 그림자로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뭘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도와줄까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왜소한 체구의 바니가 바닥에 어질러진 서류를 툭툭 발로 찼다.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더욱 선명해졌다. 바니의 옷차림은 거리를 떠도는 그 어떤 매춘부보다 천박했다.
“아, 아냐. 괜찮아. 그보다 날 찾았다며. 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장은 손사래를 치며 화제를 돌렸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뒤에서 바니를 욕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끔찍한 보복을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겉보기엔 무기력하고 소심해 보였지만 바니의 성깔머리는 시체에 알을 낳는 독거미처럼 고약했다.
“왜 그렇게 긴장해?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겁에 질려 있네.”
덥수룩한 앞머리로 눈을 가린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니의 발치에는 어느새 기괴한 형태의 벌레들이 그림자처럼 몰려 있었다. 꾸물꾸물 떼를 지어 물결을 이루는 움직임이 징그러웠다.
혐오스러운 광경에 질겁한 장은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숨을 쉬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그를 지배했다. 더듬이를 움직이며 조용히 자신을 주시하는 벌레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소용없어, 장. 입과 코를 막아도 이 녀석들이 파고들어 갈 곳은 많거든.”
팔다리가 앙상하게 마른 바니가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켰다. 장은 황급히 양쪽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배 속이 쥐어짜이는 것처럼 따끔거렸고 무릎이 덜덜 떨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바니는 그가 뒤에서 씹은 걸 들은 게 분명했다.
“바니, 난 그저….”
“장, 나는 당신이 ‘남자 좆이라면 환장하고 달려드는 남창’이라고 지껄이며 날 모욕했다 하더라도 화내지 않아. 욱해서 한번 해 본 소리였겠지.”
“마, 맞아! 진심이 아니었어. 바니, 우리는 취미가 잘 맞는 한 팀이잖아.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너와 나밖에 없어. 용서해 주는 거지?”
장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바니의 발치에 매달리고 싶었지만 스스스, 하고 날개를 비비는 곤충들 때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물론이야. 그런데 ‘피나 빨아먹는 괴물 새끼’라고 떠들어 댄 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바니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발치에 얌전히 운집해 있던 벌레 떼가 장을 향해 새까맣게 달려들었다.
“아아악!”
장의 얼굴이 벌레로 뒤덮였다. 코와 입, 귓구멍으로 몰려드는 벌레들을 떨치기 위해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자그마하고 징그러운 것들이 식도를 제집처럼 기어 다니는 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역겨웠다.
“아악, 억!”
“쉿. 시끄럽게 굴면 이웃에게 들키잖아.”
음침한 인상의 청년이 나지막하게 장을 타일렀다.
“어흐으, 아윽. 우웩!”
입 속에 벌레가 가득해서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장은 피부를 손톱으로 긁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바니는 장이 웩웩대는 동안 각종 명함과 메모지로 뒤섞인 종이들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
“장, 당신이 찾던 게 이거지?”
바니가 영수증과 메모지로 뒤엉킨 서류 더미 속에서 명함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벌레로 뒤덮인 장은 사지를 뒤틀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성가시게 굴기는.”
바니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칫, 혀를 찼다. 그 순간 장의 육신을 갉아먹던 벌레들이 사라졌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장은 다급히 팔다리를 더듬었다. 깨끗했다. 목구멍 안에 득시글거리던 벌레들도 자취를 감췄다.
“이제 좀 정신이 나?”
바니가 명함으로 장의 뺨을 툭툭 쳤다. 처음부터 벌레는 없었다. 그가 보고 느낀 모든 감각은 전부 바니가 불러일으킨 환각이었다.
“흐으, 흐으읏….”
장은 몸을 웅크리고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입가에 거품이 맺힌 침이 흘러내렸다. 환영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뇌에 전달된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엄살 부리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바니는 짜증 섞인 눈으로 장을 내려다보았다. 위협을 느낀 장은 흠칫 어깨를 떨며 흐릿해진 눈동자에 초점을 모았다.
“마, 말해.”
“내 부탁을 들어줘야겠어. 어려운 일은 아니야.”
창백한 피부 위로 주근깨가 가득한 청년이 장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어렴풋하게 종이에 인쇄된 글씨가 보였다. 그가 발광하며 찾아 댈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브로커의 연락처였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장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이 뭘 찾고 있는지 어떻게 알았냐는 말 따윈 꺼내지 않았다. 새삼스레 놀랄 이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바니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타인의 생각을 읽어 내는 일쯤은 그에게 별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의 눈에 비친 바니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악마 추종자, 그 자체였다.
“내가 국외에서 뭘 좀 들여오려고 하는데 시간이 애매해. 그러니 한가한 네가 나 대신 다녀와야겠어.”
번쩍, 하고 유리창 너머로 번개가 쳤다. 바니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알았어….”
겁에 질린 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해가 졌는지 어슴푸레하던 하늘이 어느새 새까만 빛으로 타락해 있었다. 불 꺼진 실내도 암흑으로 물들었다. 어둠 속에 완벽히 녹아든 두 사람의 모습은 번개가 칠 때만 유일하게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넌 그냥 선착장에 가서 사인만 하면 돼. 참, 아주 중요한 물건이니까 실수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뼈다귀처럼 마른 바니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경고했다. 어두워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드디어 내 오랜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됐어. 새로운 장난감도 발견한 데다가 들러리가 될 장기짝도 곧 있으면 전부 모일 테고. 난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
헐벗은 옷차림을 한 청년은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피어싱이 짤랑거리는 소리에 오한을 느낀 장은 목을 움츠렸다. 참을 수 없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니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뭔가 터무니없는 흉계를 꾸미고 있을 때였다.
알 게 뭐야. 저 자식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나한테 피해만 오지 않으면 돼. 장은 몸뚱이를 끌어안고서 고개를 숙였다. 바니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경찰에게 붙잡히지 않고 살인이라는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느냐’였다. 목숨을 부지하는 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지만 말이다.
***
57번가에 위치한 화랑 ‘프랭크 앤드 컴퍼니’는 현대추상미술과 설치미술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갤러리였다.
실내·외는 흰색과 유리, 철골 구조물로 꾸며져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보다 정제되고 날이 선 엄격한 이미지를 방문객들에게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폐관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화랑에는 이례적으로 전 층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정규 개관 시간과 마찬가지로 에어컨이 돌아갔고, 전시관마다 작품을 비추는 조명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를 위해 야간 개관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실내를 둘러보고 있는 고객은 단 한 명뿐이었다.
수석 큐레이터인 제시카와 부관장인 카터도 퇴근하지 않고 전시관에 남았다. 이 모든 상황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혼자서’ 특별 기획전을 감상하고 싶다고 요구한 한 고객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전화를 받은 게 다른 경쟁 화랑이었어도 저 남자의 한마디면 ‘프랭크 앤드 컴퍼니’와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천천히 둘러보십시오, 아벤 굴드 씨.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고요.”
부관장 카터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서너 발자국 뒤에서 고객을 따라다녔다.
19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장신의 남자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기이한 형태의 오브제를 감상했다.
실내는 소곤거리는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잔뜩 긴장한 부관장과 큐레이터는 구둣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의 고객은 작은 소리에도 민감했다.
새하얀 전시관 벽 위에 조명이 여럿 교차했다. 카터의 고객은 고요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고객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관점에 따라 독특하고 괴상해 보이기만 하는 레디메이드 오브제보다 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크기의 미술품 사이를 거니는 남자는 마치 새벽안개가 낀 자신의 정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카터는 주요 고객이긴 하지만 아벤 굴드가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둘째 치고 전신에서 은은히 배어 나오는 어떤 기운 때문에 자꾸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이런 자신이 중세시대에 고문실로 끌려갈까 봐 잠을 설치는 비루한 농민처럼 느껴졌다.
수석 큐레이터인 제시카 양도 눈앞의 고객을 어려워하긴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그를 처음 봤을 땐 고대 대리석 조각상만큼이나 아름답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고객과 직접 마주하고 난 뒤로는 안색이 바뀌었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만큼이나 감이 빠른 여자였다.
카터는 언젠가 커피를 마시다 농담으로 설마 차인 거냐고 물었다. 제시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건 아니라고 부정했다. 자신이 예쁘긴 하지만 유혹할 엄두는 나지 않을 뿐더러, 그의 곁에 다가가면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진다는 게 큐레이터의 설명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아벤 굴드의 이미지는 지독하게 매력적인 푸른 수염 공작인 듯했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긴 해도 아벤 굴드는 격조 있는 안목을 가진 미술품 애호가이자 자금이 풍부한 너그러운 콜렉터였다. 소문으로는 주로 카라바조와 렘브란트 등의 고미술품을 수집한다고 들었는데 얼마 전부터 현대미술 쪽에도 흥미가 생긴 듯했다.
“이쪽의 연작 같은 경우는 신진 작가의 작품이라 아직 인지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빠른 속도로 마니아층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전시를 시작했는데 벌써 구매 의사를 내비친 분도 나오셨지요. 제2의 데미안 허스트가 될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카터는 조심스럽게 한 작품을 추천했다.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제 쓰레기통 속에 말랑말랑한 공룡 장난감을 가득 채운 조형물이었다. 작품명은 . 그 옆에 전시된 은 유리병 안에 공룡 장난감 대신 바비 인형 머리가 수십 개 들어차 있었다.
굴드는 아무런 감흥 없이 카터가 추천한 작품을 살펴보았다. 부관장은 몇 년 안에 가격이 배로 뛸 것이라며 슬그머니 투자를 권했지만 그는 예술품 투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가치 평가가 어떨지 몰라도 어차피 5년 안에 쓰레기로 전락할 물건들이었다.
불쑥 제이드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제이드를 이곳에 데려왔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잠시 지루해할지도 몰랐다. 역시 예술은 어렵다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중장비의 팔을 뚝 떼어내 바닥에 세워 둔 조형물을 지나쳤다. 공사장에서 쓰다 버린 페인트 통을 겹겹이 쌓아 만든 작품도 굴드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피복 전선을 인간의 근섬유 다발처럼 엮어 만든 거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작품명은 <골리앗의 비명>이다. 저건 제이드에게 보여 주면 흥미를 드러낼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좋았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성배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신기해한다면 그는 어떤 작품이건 간에 고민 없이 구매할 것이다.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을 집에서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가장 하이라이트인 대목은 그가 구매한 작품의 가격을 귓가에 소곤거려 줄 때일 것이다. 제이드의 반응을 혼자서 추측해 보았다. 아마도 그게 진짜일 리 없다고 기함하면서도 손을 번쩍 뗄 것이다. 어디 망가지진 않았을까, 제이드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짜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히익!’
‘윽.’
아벤 굴드가 소리 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카터와 제시카가 동시에 움찔 어깨를 튕겼다. 그들은 아벤 굴드가 진심으로 미소 짓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인사를 나눌 때면 신사적으로 웃어 주긴 했지만 감정이 담긴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아름답지만 무서운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고객이 기분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이게 좋은 징조인 건지 나쁜 징조인 건지 도통 판단이 서질 않았다.
“참, 아벤 굴드 씨. 전에 칸딘스키의 초기작 수집에 흥미가 있다고 하셨지요?”
전시관 2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며 카터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약간 초조한 상태였다. 고객이 ‘프랭크 앤드 컴퍼니’가 준비한 기획전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기 때문이었다. 아까 잠깐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정말 잠시뿐으로, 그 이후로는 계속 무미건조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아.”
흘끗 시계를 확인하던 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칸딘스키의 작품을 언급하자 카터의 이야기에 집중할 마음이 생긴 듯했다. 남자는 카터의 짐작대로 딱히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 없어서 이제 그만 돌아가 볼까, 생각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어떤 개인 소장자분께서 조만간 칸딘스키를 시장에 내놓으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여기 제시카 양과 아는 사이라, 개인 딜러나 경매보다는 저희 ‘프랭크 앤드 컴퍼니’를 통해 매각하시도록 설득 중이지요.”
아벤 굴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카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스 제시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좋은 소식이군요. 내가 매입할 수 있다면 더 좋을 테고.”
성의 없이 2층 전시관을 둘러보던 아벤 굴드가 제시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카터가 그녀를 언급해서 한 번 쳐다본 것일 뿐, 별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제시카는 얼굴이 빨개졌다. 어딘지 모르게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우아하고 잘생긴 얼굴 때문에 속절없이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오페라 리골레토에 등장하는 꼽추의 딸 질다라도 된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가,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거래가 성사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시카가 허둥지둥 손바닥으로 뺨을 식히며 웅얼거렸다. 그녀는 속으로 ‘날 마음에 들어 하기라도 하면 곤란한데’라고 생각했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점은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관건은 자신보다 아름다운 저 남자에게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고 잘해 볼 수 있느냐였다.
하지만 제시카의 우려는 망상으로 끝났다.
아벤 굴드는 카터의 안내를 받으며 그녀를 지나쳤다. 그녀에겐 전시실의 먼지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완전히 헛물을 들이켰다. 아벤 굴드가 저를 공기 취급하자 제시카는 많이 민망해졌다. 그래도 나름 미모에 자신이 있었는데 깨끗이 무시당한 것이다.
허무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수상쩍은 고객이 자신을 여자로 보기는커녕 무생물 보듯 한다는 사실에 울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벤 굴드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질 일은 결단코 없다는 사실이었다.
접객실로 향한 굴드는 부관장 카터와 칸딘스키의 매입 가격에 대해 논의했다. 구체적인 상한선은 두지 않았다. 아주 터무니없는 금액만 아니라면 가격 협상은 전적으로 카터와 큐레이터의 재량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최근 현대미술 시장의 불황으로 영업 실적에 목말라 있던 카터에겐 연말 보너스만큼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고미술품만이 아니라 고서적 수집도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화랑의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이번에 우연치 않게 꽤 희귀한 서적을 입수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기분이 좋아진 카터는 큐레이터인 제시카에게 보관실에서 ‘그것’을 꺼내 오라고 지시했다. 모 수집가의 유산을 대신 처분하면서 손에 들어온 물건이었다. 정확한 감정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쪽 권위자의 말로는 장물 시장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수집품인 듯했다.
굴드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큐레이터가 곧 고서적을 가지고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희귀 서적 따위엔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책 수집벽이 있어서 무심결에 한번 보겠노라 수락했을 뿐이다.
중요한 건 지금쯤 제이드가 집으로 귀가했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였다. 그는 여기서 볼일이 끝나면 제이드가 살고 있는 9번가의 허름한 아파트를 방문할 생각이었다.
제시카가 19세기쯤 물건으로 보이는 궤짝을 가지고 나타났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걸음걸이가 성체를 나르는 신부처럼 조심스러웠다.
“제가 보여 드리려고 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허허, 이 궤짝만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느낌이 팍팍 오지 않으십니까?”
딴생각에 빠져 있던 굴드가 궤짝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비록 내색하진 않았지만 뭔가 대단한 비보라도 발견한 것처럼 수선을 피우는 카터가 한심했다. 궤짝 속에 뭐가 들어 있든지 간에 동서고금의 고서적을 몇백 년 넘게 수집하고 있는 그의 감탄을 이끌어 내긴 어려웠다.
“잠시만 장갑을 좀 끼겠습니다.”
카터가 궤짝을 열어 보였다. 오래된 것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자주색 공단 위에는 가죽 장정의 서책이 반듯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보나 마나 별 볼 일 없는 허섭스레기이리라. 굴드는 성가신 기분을 느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카터가 자랑스레 들이민 책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생소한 문자이실 겁니다. 라틴어이니까요. 라틴어를 아는 사람에게 해석을 의뢰했는데 타나토스의 밀서라고 읽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이 보낸 밀서라니, 굉장히 고혹적이고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이단의 냄새도 좀 나고요.”
카터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고서를 조심조심 들어 올렸다. 그는 굴드에게도 어서 장갑을 드리라는 듯 제시카에게 눈짓을 보냈다.
굴드는 실소를 참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식긴 했지만 향은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적의 서를 보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비록 두루마리 형태의 양피지가 아닌 흔해 빠진 필사본이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14세기에서 16세기 때까지만 해도 루테니아 가문 소속 수도승들은 적의 서를 연구하기 위해 활발히 필사하곤 했다. 필사본에 접근할 권한을 가진 이들은 루테니아의 가솔이거나 교황청의 인가를 받은 소수의 성직자뿐이었다. 교황은 적의 서를 금서로 지정해서 엄격하게 유출을 막았다.
그러나 금제도, 이단 심문관의 채찍도 인간의 호기심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억압은 열망에 들이붓는 기름이 되어 주었다. 결국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리고 혁명의 혼란을 틈타 몇 권 정도는 일반인들에게 흘러들게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카터 부관장이 적의 서 필사본을 내밀었다고 해서 크게 놀랄 것 없다는 뜻이었다.
기실 적의 서 유출에 유독 민감하게 굴었던 것은 루테니아 놈들과 머리 굳은 늙은 성직자들뿐이었다. 오히려 굴드는 인간들이 적의 서를 읽어도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적의 서는 복잡한 암호와 난해한 시구, 이제는 소실되어 버린 언어들로 기록된 구절이 많아서 관련 학자라 하더라도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일반인들의 기준으로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은 삼류 예언서에 불과했다.
“이건 믿거나 말거나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망한 전 소유주의 조부가 프리메이슨의 고위 간부였다고 하더군요.”
카터가 기밀이라도 누설하듯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말했다. 어차피 들을 사람이라고는 굴드와 큐레이터인 제시카밖에 없었지만 고객의 흥미를 부추기기 위한 연출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군.”
굴드는 점잖게 웃으며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카터의 얄팍한 상술이 그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 겪은 일을 사도궁전에서 서류와 씨름하고 있을 요제프에게 들려주면 아주 유쾌한 반응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올 듯했다. 요제프는 교황 전용의 흰색 주케토가 머리에서 미끄러지도록 웃어 대다가 궁무처장에게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요제프가 웨인 시티를 방문했을 때 적의 서 재해석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서가 제 앞에 나타나다니, 우연치고는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요제프가 말한 해석본과 굴드 앞에 있는 필사본은 본질이나 갈래가 완전히 달랐다. 루테니아 놈들이 제작한 필사본과 달리 그것은 두루마리 양피지에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고, 거기에 적힌 내용도 독특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양피지의 연대로 추정하건대 그 해석본은 적어도 5~6세기의 물건이라는 사실이었다.
굴드는 커피를 마시며 해석본의 글귀를 떠올렸다. 하도 해괴한 소리를 적어 놓아서 설렁설렁 읽었음에도 내용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광기에 휩싸인 저술가는 타나토스에 대한 저주와 경고, 그리고 녹슨 피의 존재에 대해 장황하게 기술했다.
그는 서고에 보관된 해석본을 펼쳤을 때 이맛살을 찌푸렸다. 글귀에 녹아든 절망과 절규가 지독하게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타나토스의 거짓된 가르침이 결정적인 순간에 독이 되어 그대의 등을 찌르리라. 가장 잔혹한 배신이 숨통을 조르고, 가슴을 적시는 검은 피를 내려다보며 소멸의 순간을 맞이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