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7)

대부분의 사람들은 굴드와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낮에는 잠을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뱀파이어를 다루는 영상 매체나 소설들이 일반인들의 착각을 부추겼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흡혈귀들은 하나같이 낮에 활동을 멈추고 관 속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인간의 뇌리에 본능적, 혹은 공통적으로 뿌리내린 편견과 달리 소위 뱀파이어로 분류되는 망자들은 낮에 잠을 자지 않았다. 낮뿐만이 아니라 밤에도, 신대륙을 찾아 떠나는 선박에 누워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자는 잠을 잘 수 없었다.

하등 동물인 구울, 혹은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서번트들은 잠과 비슷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태양이 떠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는 그들은 필히 햇빛이 닿지 않는 깊은 땅속에 몸을 숨겨야 했다.

완숙기에 접어든 서번트들이 낮 동안 관 속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 것도 기실 잠을 자는 게 아니었다. 과거를 추억하며 향수에 젖어서, 인간이었던 시절의 습관을 되새기는 공허한 행위에 불과했다.

무덤에 누운 송장들에겐 깨어 있는 시간과 잠을 자는 시간의 경계가 모호했다. 그들이 떠돌아다니는 공간 자체가 영면을 의미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였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의식은 항상 그 자리에 위치했다. 눈꺼풀을 닫고 있어도 그 순간이 휴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수면은 산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침대에 누워도 잠을 잘 수 없는 탓에, 서품을 받은 서번트도 종종 정신적으로 한계에 내몰렸다. 그들은 육체적인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된 대가가 가혹하다고 느꼈다.

절망에 빠진 맥베스 부인처럼 돌변하는 일도 흔했다. 산업혁명기의 사치도, 향락도 그들의 몰락을 멈추지 못했다.

그들은 제 발로 태양이 드리워진 환한 낮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시도 자신의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고통과 중압감을 버티지 못하고 미쳐 버렸다. 대낮의 거리에 남은 건 헝클어진 가발, 값비싼 레이스를 비롯한 사치품들뿐이었다.

십몇 년, 혹은 몇십 해까지는 어찌 견뎌 낸다 하더라도 그 뒤가 문제였다. 자신이 인내해 온 시간의 곱절에 달하는 세월을 더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든 걸 포기해 버렸다. 가장 끔찍한 진실은 이 지긋지긋한 순례를 언제 끝낼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다는 현실이었다.

깨달음은 언제나 잔혹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황금 길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나약한 자들은 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들의 발치에 도사리고 있는 천형을 떨쳐 버리는 데 혈안이 되어 서슴없이 자신을 파멸시켰다.

한 줌의 재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린 그들은 맹목적으로 태양 속으로 뛰어들었다. 굴드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감성이었다.

배교자들의 정점에 선 굴드 또한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잊었다.

가장 고귀한 핏줄, 역 십자가를 숭배하는 타락한 대사제, 한낮에 대지를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오서독스라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그러나 굴드는 서번트들과 달리 불면으로 지새워야 하는 길디긴 시간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를 즐겼다.

아르케arche를 추구하는 구도자에게 있어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과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은 저주가 아니라 혜택이었다. 남자는 타나토스의 세례를 받기 전부터 고대의 서책을 수집하던 독서가였다.

다만 성당 지하실에 봉인되어 있던 시간은 아주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멸족시킨 루테니아 가문의 예언은 거짓이 아니었다. 시간차는 존재했지만 남자는 결국 루테니아의 수장이 예견한 대로 붉은 방에서 성배를 만났다. 하지만 그의 심장에 룽기누스의 창을 꽂은 반역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는 한 번도 잠을 이뤄 본 적이 없었다.

나체인 제이드를 자신의 팔 안에 품었을 때도 굴드의 의식은 깨어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그는 밤새도록 제이드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제이드가 일어날 즈음이 되면 눈꺼풀을 감고서 수면을 취하는 척 연기했다. 유예가 끝나기 전까진 제이드에게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길 원했다.

서걱, 서걱.

빛 한 점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페이퍼 나이프가 종이를 자르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손을 가진 남자는 나이프를 내려놓고서 편지를 개봉했다. 새하얀 편지봉투 위에는 붉은 밀랍 인장이 찍혀 있었다. 반지 크기의 인장은 배를 탄 성자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형태를 띠었다.

“성가시게 구는군.”

편지를 읽은 굴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붉은 밀랍에 찍힌 인장을 보았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편지를 보낸 자가 안부 인사나 하자고 자신에게 만남을 청한 건 아닐 터였다.

편지봉투와 편지지가 빛을 뿌리며 불타올랐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 굴드의 얼굴이 잠시 불길에 비쳤다.

희미한 의무감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남자가 성가시다고 중얼거린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굴드는 한참 동안 인상을 쓰다가 결국 건물 밖으로 나갔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거리에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혼잡한 도시는 택시와 인파로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가전제품 판매장에 진열된 TV 브라운관 위로 인자하게 손을 흔드는 교황의 모습이 언뜻 지나갔다.

***

촛불이 켜진 성당은 장엄한 분위기를 흘렸다. 굵은 촛농이 굳은 모습은 종유석을 연상시켰다. 빛이 사라진 시간이라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채가 어둑했다.

해가 진 시간이라 그런지 회중석의 자리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다. 특이한 건 미사포를 두른 나이 든 여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길쭉한 나무의자에 드문드문 떨어져 앉은 이들은 전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건장한 남자 신자 대여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예배당의 공기는 싸늘했다. 신자들의 수에 비해 예배당의 크기가 광활하게 넓었다. 양복을 걸친 신도들의 뒷모습은 예배당의 황량함을 부각시키는 역할만 했다.

예배당 안에는 수단 위에 금색 십자가를 길게 늘어트린 신부도 있었다.

테두리 없는 작은 보라색 모관을 쓴 사제는 손수건으로 연방 땀을 훔쳤다. 늙은 신부의 시선은 이 성당을 처음 방문한 오십 대 남성에게 쏠려 있었다. 성직자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높으신 분을 방석이 다 해진 의자에 앉히기라도 한 것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사제가 안절부절못하며 회랑을 서성이자 양복을 입은 남자 중 하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서로 모른 척 앉아 있던 사내들이 짤막하게 눈짓을 교환했다. 양복들은 훈련받은 전문가의 냄새를 풍겼다. 무리 중 하나가 조용히 일어나 신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보라색 주케토를 쓴 주교가 끌려 나간 예배당 안에 누군가 발을 들였다. 붉은 카펫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혀를 날름거리듯 흔들렸다. 남자를 발견한 양복들이 반사적으로 움찔 어깨를 뒤틀었다. 등줄기가 굳었다. 본능이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시끄러운 경보를 보냈다.

늦은 밤, 성당을 찾은 남자는 독실한 신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키가 큰 남자는 심장이 뛰지 않는 죽은 자였다.

어떤 이들은 타나토스의 세례를 받은 자가 예배당에 발을 들이는 행위 자체를 독신瀆神으로 여겼다. 그러나 붉은 카펫을 밟는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 신은 그에게 감흥을 주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거부하는 건 오로지 낮 동안 떠 있는 태양뿐이었다.

끼이익-.

회중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오십 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낀 그는 잔뜩 위축되어 있는 양복들에게 나가도 좋다는 눈짓을 보냈다. 더 이상의 경호는 무의미했다.

인간이 아닌 자들로 구성된 근위대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팬저로 이루어진 로트와일러를 의도적으로 경호에서 배제했다. 어차피 눈이 먼 맹견들은 그를 지켜 주지 못했다. 수백의 로트와일러에게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개들은 오히려 굴드의 신경을 거스르는 결과만 낳았다. 오서독스를 경계해서 겹겹의 경호를 세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경호원들이 외부 경비를 위해 밖으로 나가자 예배당 안에는 굴드와 남자, 단둘만이 남았다.

금으로 주조된 반지를 낀 남자는 굴드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오지 않으실까 봐 마음을 졸였습니다.”

정갈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대성당에서 성사를 집전할 것 같은 청아한 목소리였다.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는 남자의 인상은 선했다. 뉴스를 보는 사람이라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잠시 할지도 몰랐다.

근래에 방송사는 교황의 이례적인 웨인 시티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루에 한 번쯤은 꼭 교황 니콜라오 11세의 얼굴이 브라운관에 비쳤다. 그러니 양복을 걸친 중년 남자가 눈에 익어 보인다고 해서 의아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다만 손가락에 두툼한 반지를 끼고 있는 저 중년 남성과 뉴스 속의 인물을 연관 지을 가능성은 낮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적이었다. 손에 닿지 않는 까마득한 지위를 가진 높은 자가 자신과 같은 곳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분위기가 닮은 사람이겠거니, 하며 으쓱 어깨를 추어올리기 마련이었다.

“삼중관이 지겨워졌나 보군.”

굵직한 저음이 예배당을 울렸다. 굴드는 교황에게 부복하듯 자신의 손끝에 입을 맞추는 남자를 담담하게 내려다봤다. 남자가 그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설마요. 붉은 수단에서 흰 수단으로 갈아입게 된 지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순에 가까운 나이인 초로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남자는 어부의 반지로 인장을 찍는 데 이제 막 재미를 붙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물을 던지는 성자를 형상화한 어부의 반지. 남자가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는 교황의 고유한 상징물이었다.

“그나저나 여전히 낮을 싫어하시는군요.”

오래간만에 수단을 벗은 남자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남자는 오후 무렵부터 지금까지 내내 굴드를 기다렸다. 그가 만남을 청한 시간대는 지금과 같은 완연한 밤이 아니었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저 오서독스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외출하는 법이 없었다. 교활한 배신자인 루테니아의 핏줄을 세상에서 지울 때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낮을 틈타 그들이 달아나리란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굴드는 햇볕 아래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껏 도망치게 내버려 둔 뒤 암흑 속에서 그들의 숨통을 뜯었다. 낮에 굴드가 산책을 나오는 경우는 오직 해가 완벽하게 가려졌을 때뿐이었다.

“취향이 바뀌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요제프?”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던 굴드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성배의 피로 완벽한 존재가 되셨잖습니까. 그래서 혹시나 했던 것뿐입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갈증이 치유된 것처럼 태양을 싫어하는 성향도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요.”

본명을 불린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굴드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앉게 된 사도좌였다. 즉위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서거하게 된다면 막심한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요제프의 소망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교황으로서 선종하는 것이었다.

“습관이고 취향이다. 성배와는 관계가 없는 사안이야.”

굴드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가 햇볕을 좋아하지 않는 건 단순한 기호의 문제였다. 요제프의 추측처럼 성배의 피를 마신다고 해서 성향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남자는 불쑥 생각을 달리했다. 그는 아직 성배의 피를 마시지 않았다. 완벽한 존재가 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굴드를 속여 성소 지하실에 봉인한 예지자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삭아 없어지기 직전인 양피지에는 성배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극도로 형이상학적이고 중의적인 표현을 써가며.

“요즘 고약한 취미에 흥미를 붙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다소곳한 자세로 앉은 남자가 화제를 바꿨다.

“고약한 취미?”

생각에 잠겨 있던 굴드가 그를 흘끗 내려다봤다.

“평범한 존재처럼 지내고 계시잖습니까. 양 떼와 다름없는 인간들과 섞여서.”

마음씨 좋은 우편배달부 같은 얼굴을 한 요제프가 작게 한숨을 흘렸다. 기껏 완벽한 존재가 되고 나서 하는 일이 고작 인간처럼 지내는 거라니…. 특이하다 못해 고약한 취미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출퇴근을 하기 위해 시민들이 종종걸음을 치는 지하철 승강장. 그곳에 포식자인 오서독스가 태연하게 줄 서 있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그로테스크했다. 거대한 흑표범이 토끼 사육장 안을 어슬렁거리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광경이었다. 물론 태생이 귀족인 작자가 실제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서?”

굴드가 비스듬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자신에게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초로의 남자가 건방졌다. 하지만 그것이 요제프의 장점이자 매력이었다.

그가 평범한 인간으로서 웨인 시티에 머무는 목적을 아는 이는 없었다. 아마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오서독스가 성배를 흡수하지 않고 곁에 두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만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성배의 피를 마시면 광활한 사막을 홀로 횡단하는 것보다 고독한 순례가 끝났다. 눈앞에 감로수가 보이는데 입술을 적시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오서독스는 탐욕스럽고 참을성이 없는 존재였다. 지독하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만큼 성배의 피를 마시고자 하는 욕망이 강렬했다. 더군다나 그들에겐 성배를 앞에 두고 인내를 발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굴드는 상식 밖의 일을 저질렀다. 본능을 거슬러가며 제이드의 곁을 빙빙 탐색하듯 맴돌았다.

요제프는 굴드가 아직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성배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배를 느낄 수 있는 건 성배와 저주의 끈으로 묶인 당사자뿐이었다.

굴드는 제이드를 처음 본 순간 본능적으로 자신의 성배임을 알아봤다. 하지만 굴드 이외의 존재에게 제이드는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만 보였다. 제이드가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다 해도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굴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의 피를 마셔 봤자 영원한 목마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왕 조용조용 지내시기로 한 거, 팬저도 못 본 척 보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곧 예순을 앞둔 남자가 한탄 조로 말했다. 언뜻 선량해 보이는 요제프의 눈동자는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헌터를 죽인 굴드를 은근히 매도하고 있었다.

“아, 그 일을 말하는 건가.”

굴드는 비 오던 날 카페에서 있었던 사건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유리창 너머로 재가 되어 흩어지던 구울의 파편과 빗줄기 사이로 낙하하는 썩은 피.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팬저들이 그의 기분을 망쳤다. 놈들이 일 처리를 똑바로 하지 못한 탓에 남자는 커피를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내가 비난을 들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억울하군. 원인을 제공한 건 그 녀석들이었으니까.”

흠,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나 어조는 딱히 억울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요제프가 선량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표정만 본다면 나이 차이 나는 청년에게 긍정적인 기운을 한껏 북돋아 주는 모습으로 착각하기 딱 좋았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군. 이런 시답지 않은 수다나 떨려고 날 찾아온 게 아닐 텐데?”

굴드가 요제프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제 슬슬 본론을 말하라고 압박을 주는 눈빛이었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요제프의 편지를 무시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할 도리를 다했다. 남자는 원래 교황의 청에 응답하는 이가 아니었다.

“…….”

요제프는 잠시 어두운 눈을 하고서 침묵을 지켰다. 커다란 성당 안에 적막이 흘렀다. 굴드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일주일 전에 기네비어 양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곧 노년에 접어들 남자가 말문을 떼었다. 그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려 애썼다. 그러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무릎 위에 포갠 손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단을 무심하게 비추던 촛불이 흔들렸다. 굴드는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랬군.”

충격은 느끼지 않았다. 다만 착잡한 감정이 가슴께에 머물렀다 흩어졌다. 기네비어는 굴드가 인간이었던 시절에 속했던 가문의 피를 이은 직계 혈통이었다. 그녀가 숨을 거둠으로써 굴드의 피가 섞인 후손은 이 땅에서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가 몇백 년간 잠들지도, 죽지도 못한 상태로 유폐되어 있는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 시대도, 사람도, 그리고 쇠락해 버린 그의 핏줄도.

남자가 요제프를 처음 만난 건 1년 전이었다. 무덤에서 일어난 굴드는 추기경이었던 그를 교황으로 만들어 주었다. 일면식도 없는 요제프를 다음 교황으로 지목한 이유는 오로지 기네비어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 소식은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제가 직접 전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요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색채 짙은 상실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굴드가 성소 지하실에 봉인된 이후, 마지막 남은 후손인 기네비어를 루테니아의 손에서 빼내 보호한 건 그였다. 그는 열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연하의 여성을 연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기네비어가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비밀스러운 감정을 숨겼다.

“루테니아 가문의 비밀 서고에서 재미있는 문서를 발견했습니다.”

요제프가 한숨을 내쉬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비탄에 빠진 노인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습관적으로 소회를 감춰 버린 그는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교황 성하 소리를 듣는 이다운 처신이었다.

“재미있는 문서?”

기네비어를 돌본 요제프에게 미약하게나마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굴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고압적인 태도로 교황들 위에 군림하던 남자가 요제프에게만큼은 아량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적의 서를 독특한 관점에서 재해석한 필사본인데, 흥미롭더군요. 읽어 보신 적 있습니까?”

적赤의 서. 혹은 타나토스의 밀서로도 표현되는 배교자의 성서는 성배에 대해 최초로 기록한 양피지였다.

“아아.”

굴드는 설핏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테니아 가문의 모든 재산과 소장품은 교황에게 넘어갔다. 적의 서 재해석본도 그중 하나였다. 굴드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라 교황청에서 루테니아의 사재를 몰수해 가든 말든 신경을 끄고 있었다.

요제프가 말한 필사본을 만든 건 뜻밖에 음충맞은 루테니아 놈들이 아니었다. 누가 작성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딱히 작자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절규하듯 손으로 휘갈긴 듯한 글씨를 머릿속에 그리자 실소가 나왔다. 성배의 본질이 사실은 녹슨 피라는 발상을 떠올린 걸 보면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이런, 이미 알고 계셨군요.”

요제프는 역시, 라는 긍정과 실망감이 동시에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굴드가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퍽 아쉬운 모양이었다.

“갑자기 적의 서를 들여다보는 게 심상치 않군.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다른 교황들처럼 아직 죽음을 두려워할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굴드가 물끄러미 요제프를 바라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적의 서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대개 죽을 때가 다 되면 타나토스의 교리에 관심을 가지곤 했다.

“설마요.”

요제프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단순히 루테니아 가문에게서 몰수한 자료들을 훑어본 것뿐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평범하게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죽을 겁니다. 지긋지긋한 불사의 삶보다 연모하는 사람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히는 쪽이 훨씬 더 좋으니까요.”

“…….”

나이 든 남자는 성당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무거운 나무 문에 손을 뻗었다.

“몇백 년이나 홀로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그것도 먼저 떠나보낸 연정의 대상을 그리워하면서,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군요.”

흘끗 굴드를 올려다보는 요제프의 시선이 도발적이었다. 굴드는 원인 모를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물론 완벽한 존재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문제란 건 알고 있습니다.”

덜컹, 하고 문이 열리자 캄캄한 하늘이 쏟아졌다. 그새 밤이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성당 바깥에 설치된 가로등의 불빛이 잎사귀로 까마득한 조경수를 비추었다. 검은 차량을 대기시켜 놓은 요제프의 경호원들은 주인이 성당 문밖으로 걸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끼이익-.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굴드는 촛불이 일렁거리는 예배당에 남아 상념에 잠겼다. 핏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이젠 남아 있지 않았다. 기네비어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의 혈통이 사멸했다. 어차피 몇백 년 동안 대를 이어 내려오느라 흐려질 대로 흐려진 피였지만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이 혈연에 집착하는 것처럼 타나토스의 사제가 된 이들에게도 종족 번식의 욕구가 있었다. 그러나 온갖 수단을 다 써도 그들의 차디찬 죽은 몸뚱이로는 인간처럼 자손을 남길 수 없었다.

자신과 피를 나눈 존재를 갖고 싶어 하는 본능이 구울과 서번트를 증식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스스로의 피를 들이부어 창조한 피조물이 조악하다는 사실이었다. 배교자들은 자신이 배양한 저급한 결과물에 절망하고 증오심을 느꼈다. 그들이 원한 건 뜨거운 피가 흐르는 혈육이지, 쓰레기만도 못한 육괴가 아니었다.

굴드는 스테인드글라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성녀의 모습이 유리에 새겨져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완벽한 존재가 되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품에 안은 그녀가 싸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남자는 붉은 카펫 위로 걸음을 내디뎠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혈연에 연연하는 것이 우스워졌다.

회랑에 파이프오르간처럼 늘어선 양초가 화르륵 흔들렸다. 반대편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사납게 나부꼈다. 성당의 문을 열고 나가는 굴드의 눈동자가 촛불을 반사하며 차갑게 번들거렸다.

밤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대도시는 여전히 혼잡했다. 거대한 옥외 간판들과 영상 광고를 내보내는 멀티비전이 홍수를 이뤘다. 네온사인의 빛이 어둠을 밝혔지만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던 행인들이 발을 옮기던 자세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인상을 쓰고서 경적을 울리는 운전자의 모습은 역동적인 박제처럼 보였다.

정지 화면처럼 멈춰 버린 세계에서 홀로 걸음을 옮기던 굴드는 비좁은 꽃집 앞에 불쑥 멈춰 섰다. 안개꽃이 파란색 철제 물통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차갑게 식은 눈을 하고 있던 남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거실에 장식해 둔 안개꽃다발을 떠올렸다. 제이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줌도 안 되는 안개꽃을 등 뒤로 숨기려 했던 일도 뇌리에 그려졌다.

갑자기 제이드를 만나고 싶어졌다. 정확하게는 그가 자신에게 해사하게 웃어 주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굴드에게는 지금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제이드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아까 느꼈던 불쾌한 감정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까만 눈동자를 가진 제이드는 언뜻 보기에 평범했다. 하지만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마치 호기심 많은 이리가 애교를 부리며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배회하는 느낌이다. 다른 생각은 접어 둔 채 손을 뻗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긴장감을 해제시켰다.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셔츠를 팔랑거리는 제이드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뜨거운 살결, 익숙한 체취, 살아 있는 자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심장 소리.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갈증이나 성적 욕망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굴드는 정확하게 자신이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접시에 코를 박고서 허겁지겁 식사하는 제이드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함께 TV를 보는 것도 좋았다. 오늘은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기보다 제이드를 곁에서 지켜보는 걸 원했다.

빵빵!

“택시!”

“왜 이렇게 늦었어. 엄청 기다렸다고.”

일시 정지 상태였던 소음이 한꺼번에 풀려 났다. 도미노처럼 바뀌는 전광판의 영상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꽃집 앞에서 풍성한 안개꽃을 내려다보던 건장의 체격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지된 시공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누군가 발걸음을 멈추고서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

터벅, 터벅.

전구가 흐릿한 계단통에 군홧발 소리가 울렸다. 제이드는 녹초가 된 얼굴로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스테판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아 윤락가를 돌아다니느라 진이 빠졌다. 군화를 신은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셔츠에선 말라붙은 땀 냄새가 진동했다.

열쇠를 따고 집에 들어온 제이드가 간이침대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목이 칼칼했다. 부엌으로 갈 힘도 없어서 어젯밤 마시다 남긴 김빠진 페트병 콜라로 목을 축였다.

낮 동안에 무슨 놈의 매연과 황사가 그리 심한지 머리카락이 모래로 푸석푸석했다. 탁자 위에 머리를 털면 먼지가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모래바람을 정통으로 뒤집어쓴 얼굴도 갑갑하긴 매한가지였다.

“…맛없네.”

달기만 한 밍밍한 콜라를 억지로 삼킨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몇 걸음 더 가서 수돗물을 마실 걸 그랬다. 갈증이 가시기는커녕 입 안이 훨씬 더 텁텁했다. 양치질을 해도 형언하기 힘든 이 미묘한 맛이 혀끝에서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귀찮아도 페트병에 물을 채워 다녀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갑갑한 군화를 벗었다. 제이드는 피아노 치듯 발가락을 활짝 펼쳤다. 언제 구멍이 났는지 엄지발가락이 양말 밖으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제이드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비닐 재질의 노란 봉투를 꺼냈다. 구깃구깃한 봉투 안에는 바니가 제공한 스테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피곤이 쌓인 어깨를 주무르며 봉투 속에 든 사진을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약과 매춘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는지 스테판의 가장 최근 사진은 경찰서에서 찍은 머그샷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몇 장 섞여 있었다. 한껏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따돌림당하는 바니를 형제처럼 보살펴 준 따스한 성품과는 동떨어진 외모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꽤 되는데 바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절친한 사이인데 왜 둘이서 같이 찍은 사진이 없는 건지 의아했다.

‘사진 찍는 걸 싫어해요. 얼굴이 이상하게 나오거든요.’

음울한 인상의 바니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투로 해명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을 한 남자에게선 오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언뜻 순종적이고 소심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들 것 같은 꺼림칙한 이미지였다.

“내일은 좀 단서가 나와야 할 텐데.”

오늘 방문했던 장소를 볼펜으로 지우며 사진을 정리했다. 바니가 목격한 차종을 기반으로 탐색을 벌였지만 아직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목격자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정보도 빈약했다. 흡사 안갯속에서 바닥을 더듬는 것처럼 막막했다.

“으, 씻어야겠다.”

제이드는 코를 킁킁거리며 점퍼를 훌러덩 벗었다. 셔츠며 바지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샤워를 끝내고 지하실에 내려가 밀린 빨래를 돌려야 할 듯싶었다. 구멍 난 양말도 잊어 먹기 전에 깁고 말이다.

찬물로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설렁설렁 머리를 말리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건물 지하실로 빨래를 하러 내려가기 위해 바구니에 옷들을 모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그런데 세탁해야 할 빨랫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한동안 집안일을 게을리한 여파였다. 방구석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방치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곰팡이가 필지도 몰랐다.

빨래 바구니에 몇 벌 없는 의복을 죄다 쓸어 담았다. 문제는 당장 입을 옷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드는 속옷 바람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상자에서 반바지를 꺼냈다. 수영복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바지 기장이 심하게 짧았다.

평소에 그는 집에서도 반바지를 입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제이드가 핫팬츠를 구매한 건 순전히 해리 때문이었다. 친구인지 원수인지 모를 친구 놈은 여름에 바닷가에 가자고 그를 들들 볶으며 핫팬츠를 사라고 강요했다.

썩 마뜩잖았지만 제이드는 고무줄 바지를 주섬주섬 꿰입었다. 셔츠 밑으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기장이 하도 짧아서 웃옷이 반바지를 거의 뒤덮다시피 했다.

음. 외출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지하실에 다녀오는 건데, 뭐.

자신의 맨다리를 내려다보던 제이드가 이마를 긁적거렸다. 아무래도 남자다 보니 노출에 둔감했다. 그리고 남들 눈에 짧아 보인다 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기도 했다. 그가 입고 다니는 긴 바지는 죄다 빨래 바구니 안에 들어간 상태였다. 막 씻고 나왔는데 냄새나는 옷을 다시 걸치고 싶진 않았다.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서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짝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혹시 좀도둑이 기웃거리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한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도어체인을 걸어 둔 채로 문을 열었다. 빠끔 열린 문틈 너머로 굴드의 얼굴이 보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조명이 어둑한 복도에 굵은 저음이 울렸다. 너른 어깨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당연하죠. 잠깐만요.”

제이드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는 반가운 얼굴을 하고서 얼른 도어체인을 걷어 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굴드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건 꽤 오래간만이었다. 비록 한밤중이기는 했지만 곤란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 시간엔 어쩐 일입니까. 어디 들렀다가 오는 길이에요?”

“…제이드, 옷차림이.”

현관문 너머에 서 있던 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남자는 안녕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정숙한 귀부인의 외도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반면 그의 시선은 탱탱하고 매끈한 제이드의 허벅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빨래가 밀려서 여름옷을 꺼냈어요. 먼저 들어가 있을래요? 난 잠깐 지하 세탁실에 다녀올 테니까.”

제이드가 활기차게 대꾸했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는 그의 목덜미에서 짙은 비누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은 촉촉하게 젖었고 하의는 짧았다. 갓 샤워를 마치고 나온 덕분에 피부는 아기처럼 보송보송했다. 허리를 깊게 숙이면 며칠 전 굴드가 남긴 울긋불긋한 멍 자국까지 보였다. 포르노 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아찔하리만치 선정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제이드는 자신의 옷차림이 야하다는 자각이 없었다. 훤히 드러난 허벅지와 젖은 머리카락이 타인의 성적 욕망을 미치도록 자극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군대까지 다녀온 탓에 그는 상·하의 탈의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곳이 흠뻑 젖어서, 벌렁벌렁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굴드와 몸을 섞었었다. 남자와 갈 데까지 간 사이가 되었음에도 제이드의 인식은 예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 꼴로 가기는 어딜 간다는 겁니까.”

굴드가 음산한 목소리를 흘리며 제이드의 손목을 낚아챘다. 숨결이 거칠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굶주린 짐승처럼 흉흉한 빛을 띠었다.

“지하 세탁실에 간다니까요?”

상황 판단이 안 됐는지 제이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곧게 도드라진 쇄골을 타고 물방울이 셔츠 안으로 사라졌다.

몸은 다 자란 성인인데 정신 연령이 아이인 청년이 눈앞에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순진무구함이 더러운 욕망을 깊숙이 자극했다. 잘못을 깨우칠 때까지 밤새도록 몸으로 가르치고 싶은 위험한 욕구를 품게 만들었다.

“내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남자가 싸늘하게 웃었다. 오늘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평범하게 대화만 나눌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도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유감스러웠다. 하지만 먼저 유혹을 해 온 건 제이드였다.

어… 라?

제이드의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제야 자신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남자는 멀끔하게 웃고 있었지만 이미 이성이 나간 상태였다.

“으앗!”

남자는 막무가내로 제이드를 현관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플라스틱 빨래 바구니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빨랫감도 왕창 미끄러졌다.

“자, 잠깐만! 갑자기 왜 이래요.”

빨랫감 위에 드러눕게 된 제이드가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의 몸 위로 올라탄 남자가 성급하게 셔츠를 말아 올렸다. 고무줄 바지를 끄집어 내리는 난폭한 손길은 고등교육을 받으며 자란 우아한 신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뭘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르는군요. 당신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입니다.”

제이드의 손목을 하나로 모아 짓누르는 손아귀의 힘이 우악스러웠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남자는 화가 나 있었다. 자신을 시험에 빠트린 제이드 때문에 커피만 마시고 돌아가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다.

굴드가 원했던 건 차분하고 평온한 시간의 공유였다. 남자는 그저 자신에게 집중한 제이드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음욕을 풀기 위해 들이닥친 것처럼 상황이 변질되고 말았다.

“천박한 옷을 입고 돌아다녔으면 그에 걸맞은 벌을 받아야죠.”

단정하게 다린 면바지를 입은 남자가 귓가에 속삭였다. 낮게 갈라진 음성이 도발적이었다. 굴드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제이드의 젖꼭지를 바라봤다. 사타구니는 이미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내가 도대체 뭘 어쨌다… 읍, 으읍.”

굴드가 제이드의 입을 키스로 틀어막았다. 혀부터 들어오는 성급한 입맞춤에 제이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와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욕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칠게 파고드는 손길이 자극적이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그도 덩달아 흥분이 되었다.

“하아, 하아.”

눈빛이 흐트러졌다. 제이드는 촉촉하게 달아오른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굴드가 짐승처럼 목을 울리며 제이드의 가슴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무릎을 넓게 잡아 벌리는 손길이 거칠었다. 가슴 쪽에 얼굴을 묻은 굴드는 젤리 같은 젖꼭지를 깨물었다. 말캉한 감촉이 사랑스러웠다. 굴곡이 없는 가슴에 거친 숨을 뿌리며 살살 혀를 굴렸다. 그러다 쫄깃한 유두를 입술로 빨아들였다. 짜릿한 전류가 남자의 고간을 자극했다.

“으응, 읏. 응!”

제이드의 가슴이 타액으로 범벅이 되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젖꼭지가 지조도 없이 꼿꼿해져 있었다. 새하얗고 늘씬한 배가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셔츠는 겨드랑이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고 짧은 반바지는 무릎에 걸려 있었다. 그 덕분에 제이드의 몸은 거의 전라와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맛있어 보이는군요.”

굴드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통통해진 제이드의 페니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가 맛있어 보인다고 말하는 건지는 자명했다.

“윽.”

귓가에 들리는 그윽한 음성이 자극적이었다. 제이드의 페니스가 굴드의 눈앞에서 꿈틀하고 움직였다. 마치 어서 먹어 달라고 유혹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굴드의 얼굴이 퇴폐적으로 느껴졌다. 제이드는 숨을 헐떡이며 시선을 피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덮쳐져서 경황이 하나도 없었다. 굴드가 초인종을 누를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정기를 맞은 짐승처럼 서로를 격하게 원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흥분한 굴드와 눈이 마주치자 그도 덩달아 몸이 달아올랐다.

성적으로는 나름 담백했던 제이드는 자신의 상태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굴드가 자신을 원하면 머릿속이 혼곤해졌다. 온몸으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잠식당하는 느낌이었다.

굴드가 덥석 제이드의 페니스를 입 안에 머금었다.

“아…! 굴드. 하윽.”

굴드의 혀가 성기를 휘감자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제이드는 무릎을 세우며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방음이 약한 낡은 아파트라 현관문 너머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게 분명했다.

츄릅, 츕, 하는 젖은 마찰음을 들으며 제이드는 절정을 느꼈다. 하지만 막 사정을 하려는 찰나에 굴드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체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굴드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의 허리를 지탱하고 있는 건 굴드의 커다란 손이었다. 빼도 박도 못할 기승위 자세가 되었다. 남자는 제이드의 골반을 양손으로 붙들고서 자신의 성기에 그곳을 갖다 맞췄다. 두툼한 귀두가 입구를 간질간질 문지르는 감각이 선정적이었다.

“아읏, 잠깐. 흐읍, 읍!”

엉덩이를 내민 자세로 굴드의 굵직한 물건을 받아들였다. 억지로 주저앉혀진 제이드는 자신의 그곳이 뻐근하게 벌어지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머리가 과부하 상태가 되었다. 수동적으로 굴드의 물건을 받아들일 때와는 느낌이 판이했다.

“아… 아읏. 흣. 응.”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의 몸속으로 굴드가 들어오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했다. 길고 긴 삽입이 끝나고 제이드의 엉덩이가 굴드의 복부에 닿았다. 따끈하고 비좁은 제이드의 점막에 커다란 성기가 빠듯하게 들어찼다.

“움직여 봐요, 제이드.”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린 굴드가 점막을 안에서 휘젓듯 피스톤질을 하며 속삭였다. 아랫도리 사이로 굵직한 물건이 빠져나갔다 들어오자 제이드는 발끝이 짜릿해졌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졌다.

“아… 굴드.”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제이드가 몸을 위아래로 들썩들썩 흔들었다. 짧은 반바지는 왼쪽 발목에 걸쳐져 있었고 셔츠도 여전히 가슴께에 말려 올라간 상태였다.

뾰족하게 곤두선 유두가 자극적인 빛깔을 띠었다. 하얀 크림 위에 얹힌 장식물 같았다. 제이드가 스스로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기우뚱 기립한 성기가 출렁거렸다.

“아읏. 응.”

허릿짓이 힘겨웠다. 흥분할 대로 흥분했는데 움직임이 서툴러서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제이드는 애가 타는 얼굴을 하고서 굴드를 바라봤다.

“예뻐요, 제이드.”

굴드가 제이드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 가져갔다. 힘겹게 휘청거리는 제이드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내 물건을 꼭꼭 조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얼마나 야한지 압니까? 당신 표정이 너무 예뻐서 잡아먹어 버리고 싶어요.”

굴드는 흥분되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제이드의 가슴과 허리를 손바닥으로 연방 문질렀다. 혼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요염한 제이드를 보고 있노라면 입 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굴드는 제이드의 피부에 코를 박다시피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제이드의 등에 닿은 서늘한 체온이 낙인처럼 번졌다가 사라졌다. 얼음이 온기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굴드의 손바닥에도 열기가 번졌다.

제이드의 곧은 등을 어루만지던 굴드는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버찌 같은 빛깔을 띤 앙증맞은 과실이 그를 유혹했다. 남자는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끼며 혀를 갖다 댔다. 새콤한 자극이 혀끝에 번졌다.

“하윽, 윽! 못 하겠….”

젖꼭지를 깨물린 제이드가 진저리를 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굴드를 끌어안았다. 그와 마주 보고 있던 남자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곧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제이드의 오목한 허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처럼 매달려 오는 제이드가 귀여웠다. 한편으론 제이드가 좀 더 적극적으로 허리 짓을 하기 바랐지만 이쯤에서 양보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너무 무리를 시켜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그만 손해였다.

제이드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늘씬하고 긴 다리를 어깨에 걸친 그는 자신의 물건을 좁고 뜨거운 곳에 밀어 넣었다. 치명적이게 달콤한 향기가 굴드의 후각을 자극했다. 복숭아의 과즙이 손목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살을 섞을 때마다 제이드의 몸에서 나는 달짝지근한 체취가 더욱 짙어졌다.

“…읏.”

제이드가 신음을 흘리며 억지로 그의 몸짓에 박자를 맞췄다. 그를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하아, 하. 제이드.”

굴드는 제이드의 몸을 반으로 접다시피 하며 깊숙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자신의 가슴에 닿는 제이드의 심장 소리에 관능을 느꼈다. 분명 합의하에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겁탈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서투르게 허리를 흔들고, 박자를 맞추고, 따끈한 점막으로 성기를 조였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흐트러진 표정이나 어딘지 모르게 소극적인 몸짓이 억지로 당하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윽. 읏.”

“좀 더 소리를 내 봐요.”

제이드에겐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폭력성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었다. 순박하고 정결한 뭔가를 정복하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애쓰는 제이드를 짓누르고 마구 휘젓는 행위가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벽이 얇아서 밖에… 아윽! 읏! 좋아. 굴드.”

굴드가 힘으로 밀어붙이자 제이드는 결국 울음을 토해 내듯 교성을 흘렸다.

머릿속이 혼곤했다. 또 그 감각이었다. 시야가 먹먹해진 제이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쾌감과는 다른 낯선 박동이 결합 부위에서 느껴졌다.

두렵고 불안했다. 굴드의 물건이 깊숙하게 닿은 곳에서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과즙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뱃속에 액체가 차올랐다. 굴드가 첫 남자인 제이드는 동성끼리의 섹스가 원래 이렇게 오묘한 느낌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나도 좋아요, 제이드. 이런 내가 무서울 정도로.”

거칠게 기둥의 뿌리 부분을 밀어 넣으며 제이드를 꽉 끌어안았다. 현악기처럼 앓는 소리를 내는 달콤한 목소리가 그를 미치도록 황홀하게 했다. 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흑. 흣!”

“제이드. 당신이 날 미치게 만들어.”

절정에 다다른 굴드가 진득한 액체를 뿜어냈다. 쾌감을 주체하기 힘들어진 굴드는 난폭하게 제이드의 피부에 잇자국을 새겼다. 성배의 몸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 그만!”

목덜미가 섬뜩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제이드가 필사적으로 굴드를 밀어냈다. 쾌락으로 인해 고인 눈물로 눈앞이 흐려졌다. 하지만 굴드가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체중으로 제이드를 짓눌렀다.

“굴드… 부탁이니까 그만. 나 이상, 아읏!”

제이드는 울먹거리며 몸을 들썩였다. 자신의 아랫배가 굴드의 분신으로 울컥울컥 차오르는 감각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제이드는 이 순간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쾌감이 등줄기를 치달았지만 원인 모를 불안감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얌전히 있어요. 당신이 내 것으로 흠뻑 젖는 걸 느끼고 싶어.”

굴드가 으르렁거리며 제이드의 골반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그는 결합 부위가 느슨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불가능한 일인 걸 알면서도 제이드의 몸속으로 정액이 전부 흘러들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읏, 읏.”

점막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걸 느끼며 제이드도 토정했다. 굴드의 물건을 물고 있는 아랫도리가 잔뜩 수축했다. 격렬한 관능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의 몸속에서 굴드의 페니스가 거칠게 펄떡거리는 감각이 그의 머릿속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하아.”

길디긴 사정을 마친 굴드가 부들 어깨를 떨었다. 심장을 제 손으로 죽인 뒤로 줄곧 느껴왔던 허전함이 사라졌다. 정체 모를 충족감이 그의 공허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자손을 가지지 못하는 저주받은 자라는 사실도 제이드의 몸속에 자신을 묻은 순간만큼은 잊어버릴 수 있었다. 제이드와의 섹스는 그에게 있어서 완벽한 도피였다.

소파가 좁았다. 제이드는 꿉꿉한 냄새가 나는 소파에 얼굴을 묻고서 엉덩이를 높게 들어 올렸다. 자칫하면 바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여유가 없었다.

실내가 캄캄했다. 창밖에 뜬 달이 소파 위에서 엉겨 붙은 두 남자를 비췄다. 짐승이 교미하듯 굴드가 등 뒤에서 제이드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아윽. 흣.”

탄탄하고 너른 체격을 가진 사내가 등 뒤에서 제이드의 배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굴드가 아랫배를 누르자 압박감이 한층 더 강해졌다. 제이드의 몸속에는 돌덩이처럼 단단한 남자의 물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새빨갛게 부풀어 오른 결합 부위에서 찌걱, 찌걱 하고 난잡한 마찰음이 났다. 두꺼운 성기가 난폭하게 그곳을 드나들 때마다 제이드는 목구멍으로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뱉었다.

길게 한 번에 뺐다가 얕게 찌르고, 푹 쑤시고 들어오는 야만적인 허리 짓이 쉴 새 없이 반복됐다. 새하얀 몸 위에서 피스톤질하는 딱 벌어진 어깨와 너른 등의 움직임이 외설적이었다.

“굴드, 하윽. 아파….”

굴드의 육신에 혹사당한 하반신이 정액과 애액으로 질척질척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정사에 제이드는 녹초가 되었다. 다리가 풀려서 그곳을 조일 힘도 없었다. 하지만 굴드의 물건이 푹푹 박혀 들어올 때마다 입구에서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제이드의 그곳이 비좁은 탓도 있었지만 굴드의 양물이 지나치게 크고 두꺼웠다.

“제이드, 나보다 먼저 가면 안 됩니다.”

굴드가 제이드의 목덜미와 어깨에 이를 세우며 명령했다. 입술과 혀를 사용해 피부를 핥는 움직임이 게걸스러웠다. 유리창을 통해 흘러드는 달빛 때문에 제이드의 피부가 한층 더 투명해 보였다.

“흑, 그런 게 어디, 아읏.”

굴드는 아직도 빡빡한 애널에 힘껏 파고들며 제이드의 물건을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앞뒤로 자극을 가하면서 사정하지 말라는 건 너무 가혹한 주문이었다. 허름한 아파트에는 거친 숨소리와 신음, 그리고 수컷들의 체액 냄새가 가득 떠돌았다.

“하아, 하아. 흐읏.”

제이드는 굴드의 손에서 파정을 맞았다. 손바닥을 적신 정액의 양은 보잘것없었다. 색깔도 무료 급식소에서 나눠주는 죽처럼 묽었다. 연달아 이어진 정사의 여파로 사타구니에 달린 둥그런 주머니가 텅 빈 상태였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소파에 얼굴을 묻고서 축 늘어졌다.

“제이드, 많이 힘들어요?”

굴드가 목덜미에 달라붙은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기며 물었지만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제이드의 늘씬한 등이 달빛을 받으며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척추를 따라 맺힌 땀이 엉덩이를 향해 흘러내렸다.

“당신 여기가 정말 섹시해. 또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을 만큼.”

굴드가 땀투성이가 된 제이드의 등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남자의 입술은 미끌미끌한 피부를 섬세하게 더듬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 역시 제이드의 몸속에 토정했음에도 건장한 성기는 부피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톰한 엉덩이를 잘근잘근 이로 긁는 감촉이 심상치 않았다. 쪽쪽 입을 맞추는 소리가 갈수록 농염해졌다.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이드의 팔뚝을 주물럭거리는 손길에도 집착이 가득했다.

설마.

위기감을 느낀 제이드가 힘겹게 뒤를 돌아보았다. 굴드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는 반쯤 감기다시피 했다.

“젠… 장. 또 건들면 흐읏, 다시는 못 하게… 할 겁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감기에 걸린 것보다 지독했다. 윗집 아랫집 할 것 없이 오늘 밤 그가 얼마나 거칠고 정열적인 섹스를 했는지 다 들었을 게 분명했다. 이웃들과 복도에서 마주칠 생각을 하니 제이드는 굴드가 몹시 원망스러워졌다.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여운이 아직 가시질 않아서요.”

축축한 그곳에 실하기 그지없는 성기를 문지르던 굴드가 낮게 웃으며 움직임을 멈췄다. 제이드는 속으로 입에 침이나 바르고서 거짓말을 하라는 생각을 하며 푹 쓰러졌다. 그의 몸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은 절대 후희를 즐기던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참다못해 협박을 하지 않았다면 남자는 틀림없이 성에 찰 때까지 자신을 괴롭히려고 들었을 것이다.

“씻어야겠군요. 잠시만 기다려요.”

굴드가 이제 쉬라는 말을 덧붙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욕실에서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곤했다. 당장 잠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지칠 대로 지친 제이드는 소파 위에 뻗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얼마쯤 지나자 굴드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빨리 씻고 나왔네, 라고 생각한 순간 뜨끈하고 축축한 천이 그의 피부에 닿았다.

“어…?”

축 늘어져 있던 제이드가 부스스 눈을 떴다. 수건에 물을 적셔 온 굴드가 보였다. 씻으러 욕실에 들어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고 있어요.”

뜨거운 물은 어디서 난 걸까. 알몸 상태인 제이드는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체액과 땀을 닦아 주는 물수건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그러나 굴드의 손이 둔부 쪽으로 향할 땐 어깨가 움찔했다. 남자가 엉덩이 살을 잡아 벌리자 미끄덩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뒤처리를 해 준 굴드가 제이드를 품에 안고서 소파에 누웠다. 성인 남자 둘이 동시에 잠을 자기엔 공간이 조금 부족했다. 그 탓에 제이드와 굴드는 거의 밀착하듯 피부를 맞대야 했다.

허리에 감긴 굴드의 단단한 팔이 안온한 기분을 들게 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과 벌거벗은 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가슴이 설렜다. 굴드와 한 침대를 쓴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제이드의 집에서 관계를 가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굴드의 차가운 몸에서 자신의 체온이 느껴졌다. 제이드는 자신이 늘 잠을 청하던 소파에 굴드가 누워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굴드와 공유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은 초주검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잠이 오질 않았다. 자신과 소파에 나란히 누운 굴드에게 신경이 쏠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소중한 걸 만지듯 자신의 피부를 덧그리는 손길이 그를 들뜨게 했다.

왠지 모를 충족감이 차올랐다. 굴드와 만나면서 알게 모르게 느껴왔던 허전함이 사라졌다. 어쩌다 보니 몸은 겹쳤지만 그는 줄곧 미묘한 거리감을 느껴야 했다. 사귀는 사이냐는 해리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서로의 몸을 탐해도 감정이 닿지 않는 느낌이라 초조했다. 다정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냉정하게 선을 긋는 굴드 때문에 제이드는 관계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손에 닿지 않는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굴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 계속 갈팡질팡했는데 오늘은 조금이나마 틈을 보여 준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도 자신을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제이드의 안에서 싹텄다.

“왜 안 자는 겁니까. 피곤하다면서요.”

굴드가 제이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중량감이 느껴지는 굵직한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성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 숨결도 거칠었다. 제이드가 잠들지 않고 그의 품 안에서 계속 꼬물거린다면 다시금 덮칠 기세였다.

“…….”

제이드는 눈을 번쩍 뜨고서 등을 긴장시켰다. 굴드의 손이 스멀스멀 아랫배 쪽으로 다가왔다. 제이드는 굴드가 자신의 성감대를 자극할까 봐 더럭 무서워졌다.

“어서 자요.”

잔뜩 겁을 줬던 굴드가 피식 웃으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어깨에 닿는 숨결이 다정했다. 제이드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아랫배에서 멈춘 굴드의 팔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다시 수마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굴드가 흐음,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제이드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커다랗고 털이 복슬복슬한 짐승에게 안겨 있는 느낌이라 기분 좋았다.

굴드가 자신에게 몸을 비벼 오는 감각을 조금 더 깊숙하게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쳐서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머릿속이 몽롱한 탓에 생각이 드문드문 끊겼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

제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식의 끈을 놓았다. 너무 조바심 낼 건 없었다. 어차피 내일 눈을 뜨자마자 굴드의 얼굴이 보일 터였다. 굴드의 체취에 휘감겨 있는 상황은 그때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는 남자가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자신과 함께 있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제이드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굴드는 그의 곁에 없었다. 실내 공기가 싸늘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아직 파르스름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잠깐 나간 걸까.

제이드는 부쩍 허전해진 소파를 더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위가 불길하리만치 조용했다. 그의 어깨를 덮고 있던 모포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젯밤 격렬한 정사를 몇 번이나 가진 여파로 허리가 아릿했다.

불안한 얼굴을 하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욕실은 문이 열린 채 비어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발바닥에 닿는 냉기가 차가웠다.

한참을 기다려도 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이라도 사러 나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남자가 돌아오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우두커니 서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제이드는 뒤늦게 탁자에 놓인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어젯밤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잘 자요. - A. Gou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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