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9화 (10/27)

보슬비가 내려서 바깥 공기가 촉촉했다.

“우산을 가지고 와야겠군요.”

건물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보고 있는데 굴드가 그렇게 말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것도 아닌데, 라고 제이드가 만류할 틈도 없었다. 굴드가 성큼성큼 고요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현관 앞에 홀로 남은 제이드는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남의 집에서 며칠씩 지내다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묘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기 전에 굴드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우산이 하나밖에 들려 있지 않았다. 제이드는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당혹스러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톡톡, 톡톡.

빗방울 소리가 느릿하게 계단을 두드렸다.

“가죠.”

굴드가 우산을 펼쳤다. 제이드는 머뭇머뭇 계단을 내려갔다. 검은 장우산을 들고 있는 굴드의 손이 참 고혹적이었다.

그는 우산살이 활짝 펼쳐진 검은 천 아래로 들어갔다. 굴드가 먼저 걸음을 내디디자 제이드는 뺨을 긁적였다. 굴드와 함께 걷는데 괜히 긴장이 되었다. 타인과 우산을 나눠 쓰는 게 처음도 아닌데 어색했다.

행인이 얼마 보이지 않아서 거리가 차분했다. 제이드는 우산 아래의 공간이 비좁게 느껴졌다. 객관적으로 검은 장우산이 작은 건 아니었지만 성인 남자 둘이 비를 맞지 않으려면 어깨를 붙이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해서 신경이 쓰였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서 질펀하게 뒹굴다 나온 사이인데도 입이 메말랐다. 어쩌면 사흘 넘게 격정적으로 몸을 겹친 상대가 옆에 있어서 더 긴장이 되는 걸지도 몰랐다.

점점이 세워진 주홍빛 가로등이 비 때문에 몽롱해 보였다. 노란 택시 한 대가 그들 곁에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두 사람 중 아무도 택시에 손을 들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굴드의 집에서 자신의 아파트까지 도보로 2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아 제이드는 택시를 탈 마음이 없었다.

“보내지 말고 잡을 걸 그랬군요.”

굴드가 차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미 지나가 버린 택시에 미련을 두고 있는 듯한 옆모습이었다.

“왜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걸음을 옮기던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 건너편 작은 찻집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 오는 날에 딱 맞는 조곤조곤한 연주곡이었다.

“20분이나 걸어야 하는데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니까요.”

굴드가 시선을 맞추며 다정하게 웃었다. 제이드는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멀뚱히 눈꺼풀을 껌뻑거렸다.

“나 때문에 이 부근이 불편한 것, 아니었습니까?”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제이드가 의미를 파악한 것은 굴드가 허리께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제, 제길.

그렇지 않아도 엉덩이 쪽이 뻐근했던 제이드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며칠간 굴드가 침대에서 자신을 혹사시켰던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실 집에서 나오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이드는 굴드의 품에 안겨 달짝지근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그에게 옷을 입혀 준 건 바로 눈앞에서 비스듬히 웃고 있는 남자였다.

“됐으니까 빨리 가기나 하죠. 음식물 쓰레기 때문에 초파리가 싱크대를 점령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귀까지 빨개진 제이드가 굴드의 손에서 우산을 홱 낚아챘다. 그는 굴드가 비를 맞든 말든 혼자서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집에 데려다줄 필요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삐친 겁니까. 난 당신을 걱정해서 한 말인데.”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굴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 제이드라서 굴드는 천장 낮은 다락방에 들어선 것처럼 허리를 숙여야 했다.

“3~4마일쯤 걷는다고 쓰러지진 않습니다.”

제이드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우산 손잡이를 높게 들어 올렸다. 투둑, 톡 하고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했군요.”

옆에서 등을 구부리고 있던 굴드가 자세를 바로잡는 기척이 들렸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지만 기분은 상하지 않았다. 굴드의 몸에서 제이드와 똑같은 비누 냄새가 풍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거리가 벌어졌던 두 사람의 보폭이 다시 비슷해졌다.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던 카페의 음악 소리가 가로수와 함께 등 뒤로 멀어졌다. 발치에 시선을 둔 제이드는 팔꿈치에 닿았다 떨어지는 굴드의 옷깃을 의식했다. 키보다 더 높게 우산을 들고 있으려니 어깨가 경직되었다.

가로수의 나뭇가지에서 잎사귀가 소복소복 떨어졌다. 간간이 자동차가 지나갔지만 밤거리는 비교적 소박했다.

비에 젖은 잎사귀는 제이드의 어깻죽지 위에도 내려앉았다. 제이드는 옷에 잎사귀가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우산을 고쳐 잡았다. 옆 사람을 잔뜩 의식하느라 우산을 들고 있는 팔이 저렸다.

“나뭇잎이 묻었습니다.”

덩굴이 표면을 뒤덮고 있는 담벼락을 지날 즈음 굴드가 입술을 열었다.

“어디요?”

제이드가 나뭇잎을 찾으려고 반사적으로 어깨를 더듬었다.

“거기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제이드 쪽으로 몸을 기울인 굴드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우산을 가져갔다. 굴드의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제이드는 허공에 붕 떠 버린 오른손을 쥐락펴락했다. 눈앞에 보이는 쇄골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 낼 즈음 굴드가 걸음을 내디뎠다.

“왜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제이드가 양손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물었다. 구식 캐딜락 한 대가 전조등 불빛을 뿌리며 도로를 달렸다. 자동차 불빛은 우산을 나눠 쓴 굴드와 제이드를 차례로 훑으며 밤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당신을 보내기가 아쉬워서요.”

굴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언뜻 듣기엔 달콤하기 짝이 없는 고백 같았다. 하지만 굴드의 속을 알 수 없는 서늘한 눈빛 때문에 제이드는 그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쉬울 게 뭐가 있습니까. 며칠이나 같이 있었는데.”

제이드의 워커가 찰박찰박 소리를 냈다. 입속말을 웅얼거리듯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아직도 굴드가 그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아랫배가 묵직했다. 나흘 가까이 커다란 침대 위에서 그와 관계를 가진 여파였다.

“열흘을 채우지 못했잖습니까.”

뭐?

굴드의 대꾸에 제이드는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열흘 동안 그의 집에 잡아 둘 생각이었느냐는 말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굴드의 얼굴이 하도 담담해서 방금 한 말이 농담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진심입니까?”

그간 지하 공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나흘도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제이드는 몸을 씻으러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곤 침대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체액으로 범벅이 된 그는 거의 24시간 내내 굴드와 엉겨 붙어 있었다.

“글쎄요.”

굴드가 빙글빙글 웃었다. 당연하다고 대답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심장하고 진심 같았다.

“당신을 더 안고 싶은 건 확실합니다.”

굴드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번들거렸다. 빌미만 준다면 지금 당장, 골목이라 해도 사양하지 않고 제이드를 덮칠 기색이었다.

그렇게 해 대 놓고도 또? 라는 말이 목구멍을 찔렀다. 또 한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기초 체력은 남들보다 월등했지만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허리가 녹진녹진해서 더 이상은 굴드의 물건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어젯밤만 해도 눈만 뜨고 있었다 뿐이지 거의 실신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이 남자 위험해.

제이드는 입을 뻐끔거리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엮이면 안 될 사람에게 덥석 발목을 붙들린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발을 빼기엔 너무 늦어 버린 시점이라는 사실이었다.

관계를 가진 게 딱 한 번이라면 나름… 간단하게 끝낼 수 있었다. 성욕과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랬거니 하고, 서로 잊으면 됐다. 그게 가능할지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런데 현 상황은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이드의 기준에선 수습이 불가능했다.

나흘 동안 몇 번이나 섹스를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섯 번까지는 셌는데 그 뒤론 포기했다. 굴드가 거칠게 밀어붙이는데 한가롭게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세고 있을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어쨌든 하룻밤의 불장난이라고 치부할 만한 수준은 명백하게 넘었다.

도대체 굴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성적인 화제를 꺼내는 굴드의 의중이 궁금했다. 서먹서먹한 분위기인 것보다야 지금이 백 배 낫긴 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너무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굴드가 의뭉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뭐, 실수였다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게 어디야.

굴드와 나란히 우산을 쓴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달리 생각해 보니 굴드가 침착하게 행동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굴드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대하지 않았다면 제이드는 더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게이라거나 바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덜컥 남자와 섹스를 해 버렸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터부를 깨 버렸는데 상대방이 곤란해하는 기색을 내비친다면 그는 자신을 추스르지 못할 게 빤했다.

빗줄기는 가늘지만 끊임없이 도로를 적셨다.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도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지은 지 족히 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낡아빠진 벽돌 건물이 보였다. 외벽에 나 있는 비상계단은 관리 소홀로 페인트가 죄다 벗겨져 있었다. 낙후된 동네 분위기를 반영하듯 옆 건물에는 온갖 외설적인 그래피티가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다 왔어요.”

제이드는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 계단을 흘끗 바라봤다. 빗속을 얼마 걸은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집 앞이다. 벌써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불현듯 압생트에서 식사를 하고서 굴드가 택시로 데려다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굴드와 이런 사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괜찮은 친구가 하나 생겼다고 즐거워했는데, 사람 일이란 참 묘하고 알 수가 없었다.

“어, 음. 조심해서 가요. 그때처럼 강도당하지 말고요.”

거뭇하게 젖은 굴드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성인 남자 둘이서 우산을 나눠 쓰느라 옷이 공기 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아마 제이드도 어깨 가장자리가 비에 젖었을 것이 분명했다.

커피 마실 생각이 있냐고 물어볼까.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를 돌아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오늘은 신발 밑창에 껌이라도 붙은 건지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비 오는 날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굴드를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강도와 마주칠 확률보다 길을 잃을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릅니다.”

굴드가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굴드와 마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몸까지 섞었는데 이 정도 가지고 설렌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아직도 길을 못 외웠어요? 그럼 전에는 어떻게 찾아왔는데요.”

제이드가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물었다. 잠깐 올라갔다 가라는 말을 꺼낼 생각이었는데, 어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당신 냄새를 쫓았죠.”

굴드의 넉살에 제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당최 구분할 수가 없는 진지한 말투였다.

굴드도 제이드를 따라 빙긋 웃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굴드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들렀다 가라고 청하지 않을 겁니까.”

우산을 든 남자가 5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아, 그게.”

제이드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굴드에게 선수를 뺏겼다. 원래는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자신이 없거든요.”

제이드가 뒤늦게 자신의 아파트로 올라가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굴드가 제이드의 손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려던 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귓가를 간질이는 굴드의 목소리에는 성적 욕망이 짙게 배어 있었다.

“잘 자요.”

제이드의 뺨에 손을 얹으며 굴드가 속삭였다.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섹시했다. 농담이 오가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제이드를 둘러싼 공기가 어느새 농염해져 있었다.

제이드는 어깨를 긴장시키며 꿀꺽 생침을 삼켰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굴드의 입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는 우산을 비스듬히 기울이는 대신 허리를 숙였다. 서늘한 입술이 제이드의 것에 닿았다. 그의 손가락이 꿈틀 움직였다. 비가 내리는 거리 한복판에 있는데도 빗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내일 전화하겠습니다.”

입술을 살짝 떼어 내고서 굴드가 말했다. 제이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남자가 곁에서 계속 우산을 씌워 줬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굴드의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꾸물꾸물 건물 출입문 열쇠를 꺼냈다. 굴드는 우산을 접고서 그를 지켜봤다. 아마도 아파트 창문에 불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돌아갈 작정인 듯했다.

부스럭.

도로변에서 무언가를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가로수 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벌어졌다. 목구멍에선 억, 소리가 맴돌았다. 우산을 반쯤 흘린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으악! 네가 왜 여기 있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를 발견한 제이드가 기겁하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친숙한 얼굴도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꽥 소리를 쳤다.

“제, 제이드?! 정말 너였어?”

키스를 목격한 사람은 바로 해리였다. 눈을 부릅뜬 친구 놈은 제이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제이드가 맞아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전에 분장실에서 뵈었던 친구분이군요.”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굴드뿐이었다. 남자는 상큼하게 웃으며 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친구 녀석은 어버버거리며 고개만 까닥였다. 완전히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친구분이랑 이야기 잘 나눠요.”

해리를 흘끗 바라본 굴드가 제이드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어쩐지 과시라도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제이드는 뺨에 손을 대고서 멀어지는 굴드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 인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굴드의 뒷모습이 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굴드의 눈치만 살피던 해리가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며칠 동안 집에도 안 들어오더니, 저 작자랑 같이 있었던 거냐?”

해리 놈은 인정사정없이 제이드의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하지만 친구를 닦달하는 기세와 달리 목소리는 잔뜩 억눌려 있었다. 굴드가 사라진 길 건너편을 흘끔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켁, 켁!”

급습을 당한 제이드는 반격할 생각도 못 하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호러 영화의 출연진처럼 해리의 흰자가 벌겋게 충혈됐다. 녀석이 훅훅, 내뿜는 거친 콧숨이 끈적끈적했다.

“젠장, 숨 좀 쉬자!”

결국 참다못한 제이드가 실력 행사에 나섰다. 그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면상에 박치기를 가하는 것으로 해리를 응징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대로 된 응징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해리의 머리가 철옹성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단단해서 박치기를 당한 사람보다 박치기를 한 사람의 피해가 더 컸다.

잘못된 선택을 한 제이드는 머리를 감싸 쥐고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헬멧도 안 쓰고 장갑차에 머리를 들이박았을 때보다 더 골이 지끈거렸다.

반면 해리는 ‘뭐야’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해리의 모습은 멀쩡 그 자체였다. 제이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타격을 입었어야 할 사람이 뒤바뀐 서글프고도 웃긴 광경이었다.

***

드르륵, 드르륵.

전동 드릴 소리가 천장이 높은 아파트의 벽을 타고 울렸다. 정오에 일을 시작했는데 일감이 많아서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제이드는 두툼한 목장갑을 끼고서 목재를 조립했다. 실내에는 나무 자재 냄새와 톱밥 냄새가 가득했다. 신문지를 몇 겹씩 깔아 놓은 거실 모서리에는 갓 페인트칠을 한 서랍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객이 디자인한 그림을 바탕으로 동양인 청년이 손수 만든 서랍장이었다.

“어우, 냄새 한번 독하네. 유독성 성분이 빠지려면 일주일은 걸리겠는데?”

해리가 빗자루로 바닥을 쓸며 종알거렸다.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는데도 뭐가 그리 불만인지 설렁설렁 빗질을 하며 코를 비틀어 쥐었다.

“일주일은 무슨, 하루 이틀이면 충분해.”

제이드가 공구를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곱게 자란 도련님 아니랄까 봐 엄살이 심했다. 옆에서 도와주려는 건 기특하고 고마운데 시시콜콜 불평을 토해 내는 입은 좀 꿰매 주고 싶었다.

“어때, 웨일리. 이 녀석 실력 괜찮지?”

공방으로 변해 버린 아파트의 주인이자 가구 제작 의뢰인인 남자에게 해리가 으스댔다.

“정말 대단해. 내가 원하던 형태 그대로야. 아니, 내가 디자인한 것보다 훨씬 멋진 것 같아!”

증권가에서 일하는 웨일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제이드를 응시하는 남자는 해리의 기숙학교 동창이었다. 즉, 해리가 웨일리에게 제이드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에헴, 고맙지? 고마우면 나한테 한턱 쏴.”

제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친구에게 해리가 말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엄한 놈이 챙긴다는 속담이 제이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해리 녀석은 제이드에게도 생색을 잔뜩 냈다. 양쪽에게 소개비를 뜯어내려는 친구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할머니 덕분에 부유하게 자란 놈이 왜 이리 좀스러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제이드 씨가 만들어 준 가구, 정말 마음에 들어요. 손재주가 대단하십니다. 다음에 또 부탁드리고 싶네요.”

제이드의 손을 거친 완성품을 보고 감탄을 거듭하던 웨일리가 건물 입구까지 배웅을 나왔다.

휴일인 도시에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토요일을 즐기기 위해 외출을 나온 차량으로 도로가 혼잡했다. 손님을 태운 택시들도 노란 물결을 이루었다.

“뭘요, 과찬이십니다. 망가지거나 수리할 일이 생기면 부담 없이 연락 주세요. 책임지고 A/S해 드리겠습니다.”

제이드는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웨일리가 치켜세워 줘서 겸연쩍은 기분이 들면서도 입가가 헤벌쭉 벌어졌다.

“해리. 저 제이드란 사람, 완전 귀여운데? 엉덩이도 섹시하고.”

증권가 사람 특유의 사근사근한 미소로 제이드를 상대하던 웨일리가 해리를 확 끌어당겨 속닥속닥 귀엣말을 했다. 제이드는 친구끼리 할 말이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그들 곁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바이? 헤테로? 여자 친구 있어? 밤일은 잘해? 아니, 잘 못 해도 상관없겠군.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귀여울 것 같으니까.”

흘끔흘끔 제이드를 곁눈질하는 웨일리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는 그의 모습은 상식적인 이성애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숙학교 시절, 웨일리는 한 때의 불장난으로 남자와 즐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남색에선 손을 뗐다. 미소년보다 잘빠진 여자 쪽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이드를 보자 그의 정체성이 단숨에 흔들렸다. 웨일리는 막 성에 눈을 뜬 소년 같은 달뜬 눈빛으로 제이드의 뒤태를 살폈다. 잘 익은 복숭아를 연상케 하는 탄력 넘치는 엉덩이와 허벅지 라인이 환상적이었다.

“피부가 끝내주네. 동양인이라서 그런 건가. 아까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는데 셔츠를 벗겨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내 안의 헐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고!”

웨일리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창의 멱살이라도 흔들 기세였다. 제이드가 일하는 동안에는 마음에 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성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며. 하지만 헤어질 때가 되자 꾹 억눌렀던 본심을 주체하기 힘들어졌다.

“참나. 아까 내가 취향이냐고 물었을 땐 관심 없는 척, 점잔을 빼더니만.”

해리는 내 이럴 줄 알았지, 라고 생각하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를 직접 만난 인간들의 반응은 늘 한결같았다. 헤테로든 바이든, 그리고 게이든 다들 똑같았다. 꼼짝없이 한눈에 반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제이드를 주변인에게 소개해 주면 해리는 한동안 그들의 등쌀에 시달려야 했다.

제이드는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요염한 분위기를 흘렸다. 긴 다리와 착 달라붙은 엉덩이에 저절로 시선이 갔고, 눈길을 주다 보면 마음까지 빼앗기게 되었다.

남녀 불문하고 사람을 홀리는 주제에 본인은 자각이 없었다. 업보라면 업보인데, 그런 무심한 면모가 사람들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이쪽은 제이드의 눈웃음 하나에 애간장이 녹아나는데 상대방은 별다른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고 생각해 보라. 반한 게 죄인이라고, 어떻게든 제이드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기만 한데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냐고 빈정거리는 작자들도 가끔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실제로 제이드가 눈앞에 지나가면 당최 눈길을 떼어 내질 못했다. 코웃음 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늘씬한 제이드의 뒷모습을 따라 고개가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좀 전과는 태도가 180도 바뀌어, 내가 언제 별로라고 말했느냐고 발끈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여자 친구는 없는데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꿈 깨셔.”

해리는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창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다른 걸 다 떠나서 요새 저 녀석한테 진짜 위험한 작자가 들러붙었어. 한동안은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고였다. 해리는 잠시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제이드에게 반한 피해자에게 인사를 고했다. 순진한 낯으로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친구를 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심을 밝히는 전광판이 휘황찬란했다. 웨일리의 집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제이드는 해리와 함께 지하철로 향했다. 할로윈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거리엔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마녀 모자를 쓴 호박 장식이 가로등과 가로수에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남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비좁은 인도에 좌판을 벌였다. 원색 실로 뜨개질한 모자를 쓴 그들은 히죽 이를 내보이며 기념품을 팔았다. 호객 행위를 벌이는 잡상인, 관광객 인파를 헤치며 걷는데 해리가 옆구리를 찔렀다.

“맥주 안 쏠 거야?”

제이드는 행인과 어깨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흘끗 친구를 바라봤다. 해리의 눈빛이 뾰족했다. 지금 당장 맥주를 사지 않으면 단단히 삐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한 잔 살게. 오래 있진 못하겠지만.”

제이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전광판 시계를 올려다봤다. 사실 그는 해리가 곁에서 쪼아 대지 않아도 술을 살 생각이었다. 단,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나 모레쯤. 조금 있다가 또 다른 예비 고객을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시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뭐, 저녁도 먹어야 하니까.

제이드는 혼자서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좋게 말해 감성적이고 나쁘게 말해 유리 멘탈인 친구분께서는 뒤끝이 길었다. 그리고 어쩐지 따로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문제는 어떤 화제일지 빤히 예상이 된다는 거였다. 되도록 피하고 싶은 주제인지라 제이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되었다.

두 사람은 사람 많은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알록달록한 간판이 골목을 밝혔다. 주말이라 술집도 북적거렸다. 천장에 매달린 TV에선 프로 농구 중계방송이 흘러나왔다. 원정에 나선 연고지 팀을 응원하느라 앞뒤 테이블이 죄다 시끌벅적했다.

메뉴판을 펼친 제이드는 생맥주와 폭립, 치즈 감자 프라이, 샌드위치, 치킨 샐러드를 시켰다. 메뉴판의 사진을 보니 식욕이 왕성해졌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배가 출출했다. 웨일리가 점심을 사 주긴 했지만 나름 힘쓰는 작업을 한 탓이었다.

요리는 금방 나왔다. 제이드는 거품이 풍성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폭립을 잘랐다. 싸구려 술집이라 그런지 육질이 퍼석퍼석했다. 하지만 제이드와 해리 둘 다 배가 고픈 터라 군말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접시 위에 깨끗하게 발린 뼛조각이 쌓였다. 치킨 샐러드도 바닥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제이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배를 문질렀다.

해리가 허를 찌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너, 그 남자랑 잤지?”

“풉!”

제이드가 맥주를 뿜었다. 제이드를 지그시 관찰하는 해리의 눈빛에는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켈룩, 켈룩!”

당황할 대로 당황한 제이드는 연방 기침을 했다. 사레가 거하게 들린 그는 좀처럼 등을 펴지 못했다. 해리가 굴드에 대해서 물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집 앞에서 키스하는 모습을 봤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굴드의 집에서 며칠을 묵고 집으로 돌아왔던 날, 제이드는 해리가 어떤 연유로 키스까지 하게 된 건지 자초지종을 낱낱이 실토하라고 자신을 괴롭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해리는 그날 콩 들볶듯 닦달하기는커녕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가 던진 말이라고는 ‘요 며칠 집에 없더라니. 그 작자랑 같이 있었냐?’가 전부였다.

제이드는 그 뒤로 해리가 언제 기폭 스위치를 누를까 마음을 졸였다. 솔직히 말하면 해리 성격에 지금껏 별말 하지 않고 있었던 게 신기했다. 해리는 궁금한 게 있으면 절대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물론 그냥 넘어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닥칠 것이라 짐작했다. 제이드는 해리가 입을 다물고 있던 지난 며칠간이 폭풍 전야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 며칠 덕분에 마음의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앞뒤 다 잘라먹고 대뜸! 단도직입적으로! 섹스했냐고 물을 줄은 몰랐다. 제이드는 기껏해야 어쩌다 눈이 맞게 됐는지 물을 것이라고만 예상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열심히 커닝 페이퍼를 작성했는데 시험 범위가 갑자기 바뀌어서 모범 답안이 쓸모없어진 기분이었다.

“자, 잤냐니?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네.”

제이드는 필사적으로 딴청을 피웠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다 죽어 가는 금붕어처럼 비실비실 헤엄쳤다. 유리잔을 쥔 손도 심적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흐응, 정말 안 잤어? 진짜?”

해리가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다. 그의 시선은 제이드의 새하얀 목덜미에 못 박혀 있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표정이 거만했다. 비아냥거리는 콧소리도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윽, 설마.

흠칫한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목을 가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굴드가 자국을 남겼나? 아침엔 왜 못 봤지? 다른 사람들도 봤을까? 그의 머릿속은 혁명 시위가 일어난 어느 도시처럼 공황 상태에 빠졌다.

“목은 왜 가리실까. 찔리는 거라도 있나 보지?”

뻣뻣하게 굳은 제이드를 바라보며 해리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제길, 당했다.

제이드는 그제야 자신이 고전적인 수법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랑 까진 열여섯 살짜리도 콧방귀를 뀔 유도신문이었다. 그런데 이딴 유치한 수작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 이 자식, 치사하게.”

“치사할 게 뭐가 있어. 네 목에 떡하니 시뻘건 잇자국이 찍혀 있는데.”

해리가 귓구멍을 파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누가 같은 수법에 또 당할까 보냐. 제이드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친구를 노려보았다.

“정 못 믿겠으면 화장실 가서 확인해 봐. 아니다, 나한테 거울 있으니까 지금 확인해 보면 되겠네.”

해리가 크로스백을 뒤적거렸다. 누가 게이 아니랄까 봐 빗, 거울, 입술 보호제, 선크림 등등을 상비약처럼 지참하고 다녔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거울을 비춰 본 제이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런 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가 아니라 좀 더 아래. 셔츠를 내려 봐.”

제이드는 쳇, 하며 목둘레가 후줄근한 셔츠를 끄집어 내렸다. 흘끗 해리를 노려보는 제이드의 눈빛은 ‘없기만 해 봐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해리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촉새 같은 친구 놈에게 더 이상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해리에게 놀아나지 않으려면 번거롭긴 해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이 깨끗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윽!”

제이드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자신만만하던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불행히도 해리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울긋불긋한 멍이 역병의 흔적처럼 짙게 남아 있었다.

“고개를 깊게 숙이면 보이더라고.”

제이드의 하얀 피부에 찍힌 검붉은 자국을 외면하며 해리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로 확인 사살까지 당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위치라는 점이 다행이긴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둘이 얼마나 심각한 사이야?”

해리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하이톤이던 목소리도 낮게 깔렸다. 그 덕분에 제이드는 퍼뜩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제이드는 미간을 모으고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평소 성격답지 않게 분위기를 잡는 친구가 낯설게 느껴졌다. 무게 잡는 해리라니, 외계인에게 납치라도 당했다가 돌아온 건가 하는 의구심이 샘솟았다. 제이드는 의외로 음모론 소설의 마니아였다.

“얼른 말해 봐.”

해리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과년한 딸자식의 입에서 결혼하겠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버지 같은 눈빛이었다.

어라?

제이드는 눈꺼풀을 한 박자 느리게 껌뻑거렸다.

솔직히 그는 해리가 희희낙락할 줄 알았다. 자신을 놀려먹을 건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굴드랑 친해지라는 둥, 잘해 보라는 둥 옆에서 치어리더처럼 제이드를 부추겨 댔던 사람이 바로 해리였다.

드디어 해리의 소원대로 되었다. 제이드는 해리가 아니꼬운 연적을 해치웠다며 쌍수 들고 환영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해리 본인에겐 잘된 일이 분명한데 어째서 심경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왜 자꾸 뜸을 들여. 말하기 힘들 정도야? 벌써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 거냐고.”

해리가 안달복달하며 제이드의 대답을 재촉했다.

“글쎄. 아직 뭐라고 정의할 만한 단계가 아니라서…….”

제이드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어물쩍 넘어가는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굴드와 여가 시간에 개인적으로 만나고, 밤마다 전화하고, 성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연애라는 건 어느 한쪽의 의사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굴드의 의견도 들어 봐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사귀는 거냐고 굴드에게 묻기엔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이드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굴드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무엇보다 앞서 가졌던 열아홉 번의 교제처럼 굴드와의 관계도 엉망으로 끝나게 될까 봐 불안했다.

첫 데이트의 저주.

제이드는 공식적으로 사귄 사람과 잘된 적이 없었다. 꼭 연인 사이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고,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물론 굴드는 여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겪었던 제이드로서는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굴드와 섹슈얼한 관계가 된 것이 아직 며칠 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보름이 지난 것도 아니고, 한 달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제이드는 일상에서 벗어난 사건들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든 게 폭풍 같았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변화를 받아들이기도 벅찬데 친구 사이인가, 아니면 연인인가 하는 관념적이고 피상적인 문제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봤을 리 없었다.

“깊은 관계는 아닌가 보네.”

해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오묘한 음성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며칠 전 제이드와 굴드가 우산 속에서 키스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해리의 얼굴에 드리워진 번민이 더욱 짙어졌다.

내심 바랐던 대로 라이벌인 굴드와 제이드가 정분이 났다. 굴드에게 목매는 숀을 생각하면 백 번 잘된 일이었다. 처음엔 그도 얼씨구나 하며 마음속으로 팡파르를 울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사랑도 중요하긴 했지만 제이드는 그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옆에서 굴드 좀 꼬셔 봐라. 너만 믿는다, 친구! 라는 소리를 지껄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되길 바란 건 아니었다.

제이드가 게이, 아니, 바이이기만 했어도 시대를 풍미하는 치정 스캔들을 일으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이드는 여자만 좋아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남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할 만큼 둔감했다.

제이드는 남자들이 추파를 던져도 친근감의 표시겠거니, 하며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리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모두 제이드가 남자와 자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헤테로인 제이드가 어떻게 굴드와 섹스까지 하게 된 거지?

취침 때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최전선을 십 년 가까이 전전한 반동인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 건지, 제이드에겐 맹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절대 아니었다. 생활력도 강하고, 제 할 일은 빈틈없이 처리했다. 다만 간혹 소년 같은 순수한 면모를 내비칠 때가 있었다. 냉철하고 현실적인 주제에 가끔씩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 주다니, 반칙이었다. 하지만 그 간극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배시시 웃는 제이드의 얼굴은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게이고 헤테로고 가릴 것 없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과 성적 취향이 바뀌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어쩌다 그 작자와 섹스까지 하게 된 거냐. 응?

키스 정도로 그쳤다면 이렇게 마음이 무겁지 않았을 텐데.

해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빼도 박도 못할 스트레이트였던 제이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복숭앗빛 피부에 남은 키스 마크가 재앙의 징표처럼 불길했다.

제이드의 피부가 남자치고는 얇은 편이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인 표식을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굴드가 작정하고 새긴 잇자국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집념과 집착의 기운을 느꼈다. 지금 당장 엑소시스트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절대 그 남자한테 빠지면 안 된다. 적당히 놀다 버려.

굴드는 위험했다. 남녀, 아니, 남남 관계에 있어서 그의 촉은 늘 100퍼센트의 확률을 자랑했다. 숀만 연관되지 않았다면 굴드랑 엮이지 말라고 뜯어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굴드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속이 시커먼 작자일 게 분명했다.

술집에서 해리와 헤어진 제이드는 고객을 만나러 가기 위해 지저분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옆구리에 신문을 낀 남자가 노숙자들이 갈긴 오줌 냄새에 코를 틀어막았다. 객차의 조명이 어슴푸레했다. 전구를 갈 때가 한참 지났는지 천장의 형광등이 파직, 파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거렸다.

지하 터널을 달리는 창밖 너머에서 철컹, 철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좌석에 앉은 제이드는 어슴푸레하게 얼굴을 비추는 유리창을 바라보다 시계를 확인했다. 다소 빠듯하긴 했지만 약속 시각에 늦진 않을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내린 제이드는 낙서와 그래피티가 절반인 통로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갔다. 낡고 허름한 건물이 허물어질 듯 사방을 에워쌌다. 철조망 너머의 공터에서 수상쩍은 무리가 잭나이프를 던지며 시시덕거렸다. 천막처럼 드리워진 고가도로 위로 트럭이 달렸다.

길 건너편에서 노숙자가 박스로 잠자리를 마련하는 광경이 보였다. 제이드가 사는 9번가보다 치안이 나쁜 동네였다.

점퍼를 걸친 남자 둘이 골목에서 흥정을 벌였다. 한쪽은 나치즘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빡빡머리였고 눈빛이 흉흉한 남미계는 틈만 나면 주변을 경계했다. 아무래도 약을 거래하는 분위기였다.

워커를 신은 동양인 청년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주변 광경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오롯이 의뢰인에게 쏠려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에게 전화를 건 고객은 입이 거친 남자였다. 의뢰 내용은 실종된 동생을 찾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어째 목소리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사이가 나쁜 형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종자의 사진과 인상착의에 관한 정보는 곧 만날 의뢰인에게서 받기로 했다.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남자의 이름은 스테판이었다. 유괴와 실종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도시라 스테판이란 이름은 신문 기사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지도 나붙지 않았다. 형이라는 작자가 경찰에게 실종 신고를 하긴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스테판이 없어진 날짜?”

새빨간 가죽 바지를 입은 남자가 사타구니를 긁적거렸다. 때가 시커멓게 탄 벨벳 소파에 앉은 그가 바로 스테판의 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내였다. 싸구려 퍼 재킷이 까마귀 깃털 같았다.

남자의 옆에는 피어싱을 주렁주렁 단 펑크족이 있었다. 약으로 맛이 간 동태 눈깔이라든지 추저분한 인상, 매부리코가 서로 똑 닮았다. 단언컨대 이 둘은 확실히 혈연관계였다.

“어이, 그 새끼가 언제부터 안 나타났는지 알아?”

머리를 감지 않은 지 한 달은 족히 된 것 같은 펑크족이 체인을 덜렁거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약을 할 때가 되었는지 흰자에 실핏줄이 두드러졌다. 턱도 정신 산만하게 흔들었다. 징이 박힌 가죽점퍼를 벗기면 팔뚝에 주사 자국이 가득할 것 같았다.

“…….”

구석에 찌그러져 눈치만 살피던 남자들이 움찔 어깨를 튕겼다. 포주 밑에서 일하는 남창들이 분명했다.

“젠장, 그 밥버러지가 장사 안 하고 언제 토꼈냐고 묻잖아.”

참을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지 피어싱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모, 몰라요.”

“왜 몰라! 혹시 너희들이 숨겨 준 거 아니야? 스테판 새끼가 진 빚을 네년들이 사이좋게 나눠 가질래?”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이 한심했다.

제이드는 팔짱을 낀 채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전화를 받을 때부터 찜찜하더니 역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역겹게 생긴 두 형제는 실종자의 가족 같은 게 아니었다. 사라진 남자는 남창이었고 저 자식들은 착취 계급이었다. 거짓말을 지껄인 형제들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의뢰인이 미성년자를 남창으로 부리는 포주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순히 말 안 해? 장사 못 할 정도로 쥐어 터져야 불래?”

“됐습니다. 의뢰는 거절합니다.”

다행히 아직 선수금은 받지 않았다. 제이드는 혐오감 가득한 눈을 하고서 뒤를 돌았다. 아무리 돈이 궁하고 집세 낼 돈이 없다 하더라도 포주의 개가 되어 남창을 잡아들이는 지저분한 일 따위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이, 형씨. 기다려. 보수가 마음에 안 들어?”

“됐어, 형. 붙잡지 마, 씨발. 저 새끼 너무 건방져. 저딴 동양인 자식 말고도 일 시킬 인간은 차고 넘친다고.”

피어싱이 제이드의 등에 대고 욕설을 내뱉었다. 제이드는 귀를 후비적거리만 할 뿐 놈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무시했다. 개가 짖어 대는 소리는 귀담아듣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건물을 나온 제이드는 지하철을 향해 걸었다. 불현듯 그 매부리코 형제 놈들에게 출장비를 받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스쳤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 낭비한 시간과 지하철 비가 몸서리쳐지게 아까웠다.

쳇, 됐어. 그딴 돈은 받아 봤자 기분만 더러워지지.

머리를 벅벅 긁는데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잠깐만요.”

제이드를 불러 세운 이는 가녀린 체구의 남자였다. 야시시한 옷차림과 분위기를 보아하니 몸을 파는 부류가 분명했다. 제이드가 방금 나온 포주의 아지트에 저런 행색을 한 사내들이 잔뜩 있었다.

그 녀석들이 보낸 건가.

걸음을 멈춘 제이드는 눈썹을 비틀었다. 포주의 심부름꾼 따위는 상대하기 싫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 절박해 보였다.

매몰찬 성격이 못 되는 제이드는 결국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세요. 무슨 조건을 내세운다 해도 포주들이 시킨 일은 하지 않….”

삐쩍 마른 남자가 덥석 제이드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에요. 게일 형제들하고는 관계없어요. 제가 의뢰를 요청하려는 거예요.”

남자의 기세에 놀란 제이드는 흠칫 뒷말을 삼켰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인데 어디서 저런 기력이 나온 건지 궁금했다.

잠깐만. 매부리코 형제의 명령으로 쫓아온 게 아니라고?

남창의 외침을 곱씹어 보던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진지했다.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절대 아니었다.

“무슨 의뢰를 하려는 건데요?”

음침한 인상의 남자는 딱 봐도 제이드보다 나이가 어렸다. 한 스물하나에서 스물둘쯤? 하지만 자신에게 의뢰를 부탁하려는 사람이니만큼 그는 가냘파 보이는 남자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사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는 쭈뼛쭈뼛하는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윽박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주눅 든 표정, 소심해 보이는 몸짓, 주근깨 가득한 두 뺨. 그리고 가학적인 변태들이 좋아할 것 같은….

아 맞다!

제이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언젠가 미성년자를 밝히는 변태에게 남창으로 오인당했던 사건을 기억해 냈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맥주로 손이 끈적끈적했을 때 화장실을 알려 준 사람이었다.

“전에 뒷골목에서 만났었죠? 그땐 인사를 못 했네요. 정말 고마웠어요.”

오컬트 마니아처럼 음험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제이드는 남자의 죽은 물고기 같은 우중충한 눈빛이 계속 마음에 남았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데 자신이 그냥 보낸 건가 싶어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재회했다. 인연이라는 건 어떻게든 다 만나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뭘요. 근데 이 손은 놓고 말하면 안 될까요.”

제이드의 반응이 곤혹스러운지 남자가 어깨를 비틀었다. 푹 고개를 숙인 남창의 눈동자 위로 깊은 짜증이 스쳤다. 조금 전까지 제이드에게 보였던 가련한 모습과 달리 표독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미안해요. 반가운 마음에.”

자신이 너무 흥분한 모양이다. 제이드는 나무처럼 마른 남자의 손을 얼른 놓아주었다.

손이 무척 차네. 냉장고 정리라도 하다 나온 건가.

제이드는 싸늘해진 자신의 손을 쥐락펴락했다. 방금까지 얼음이라도 쥐었던 것 같았다. 그의 손끝이 갑자기 차가워진 건 남자의 손에 감도는 냉기 때문이었다. 뼈마디가 앙상한 남창의 손은 냉동고에서 일하는 노동자처럼 온기가 없었다.

불현듯 굴드 생각이 났다. 그도 저 나약해 보이는 남창만큼이나 체온이 낮았다. 굴드에게 적응이 되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제이드는 남자의 차가운 손에 흠칫 놀라 어깨를 튕겼을 것이다. 비닐 팩에 보관된 변사체를 만진 것처럼 감촉이 께름칙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난 제이드입니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창백한 것까지 닮았다. 하지만 남창의 안색이 굴드보다 더 파리했다. 포르말린에 푹 담갔다 나온 것처럼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물끄러미 남창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흡사 생물실에 죽 늘어놓은 유리병 속 표본이 연상되었다. 문득 철없던 시절, 불 꺼진 학교 담을 넘어 담력 테스트를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여기선 바니라고 통해요.”

가명 냄새가 풀풀 나는 이름이었다.

제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짜 이름을 댄 남자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됐다. 이런 험한 동네에 사는 데다, 포주 밑에서 일하는 남창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친한 사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에게 본명을 밝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저는.”

바니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느릿하게 순찰을 도는 경찰차가 그들 곁을 지나쳤다. 왜소한 체격의 바니가 경찰차를 보고 움찔 겁을 집어먹었다. 순찰차에서 내린 경찰들에게 체포라도 당할까 봐 두려운 기색이었다. 음지에서 몸을 파는 일을 하는 만큼 경찰이 가까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이드는 안쓰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남들에게 이용당하기 쉽고 소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포주들뿐만이 아니라 경찰, 동료들, 변태 손님들에게 치이고 살았을 것이 분명했다.

“자리를 옮기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골목을 가리켰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길거리에 서 있는 것보다는 인적 없는 장소가 더 나았다. 바니의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 달라거나 차고 페인트칠을 도와 달라는 평범한 의뢰는 아닐 게 분명했다.

“이제 말해 봐요.”

골목에 발을 들인 제이드는 상자 더미 속에 노숙자가 자고 있는지 확인한 후 바니를 바라봤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았다.

“스테판을 찾아 주세요.”

고개를 숙인 바니가 입술을 달싹였다.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건지 앙상한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스테판을?”

제이드의 머릿속에 ‘어째서’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역시 게일 형제의 사주를 받은 건가, 하는 의심이 스쳤다. 하지만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바니의 눈은 간절했다. 단순히 포주의 명령 때문에 자신을 쫓아온 거라면 저런 슬픔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스테판은 제 유일한 친구예요. 가족 같은 존재기도 하고요.”

바니는 죽은 자를 연상시키는 보랏빛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음침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가족처럼 의지하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상실감 때문에 몹시 괴로운 기색이었다.

“게일 형제들은 스테판이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스테판은 납치당했어요. 그 이상한 놈에게 끌려가 감금당한 게 분명하다고요.”

바니가 제이드의 팔에 매달렸다. 참아 왔던 불안과 초조, 두려움이 둑처럼 무너져 내린 얼굴이었다.

“납치당한 게 확실해요?”

제이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이상한 놈’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네. 제가 봤어요. 번호판을 일부러 뭉갠 왜건에 올라탄 이후로 스테판이 돌아오지 않았다고요. 내가 수상하다고, 예감이 좋지 않으니까 따라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바니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몄다. 제이드의 팔을 움켜잡았던 서늘한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스테판을 끝까지 만류하지 못한 게 한이 된 모양이었다.

“경찰에는 알리지 않았어요?”

제이드는 미간을 모았다. 실종 직전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동행을 목격했다는 건 꽤 중요한 정보였다.

“상대해 줄 리가 없잖아요.”

바니가 힘없이 코웃음 쳤다.

“남창 하나가 사라졌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시체가 발견됐다면 또 모르겠지만.”

제이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바니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서를 찾아간다 하더라도 진지하게 수사해 줄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단순 가출 사건으로 치부할 게 빤했다. 결국 바니가 스테판의 행방을 알아내려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가진 돈은 얼마 없지만 부탁드려요. 스테판을… 구해 주세요. 네?”

바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했다. 연민을 자극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리고 섬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의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빛을 흘렸다. 백 살 넘게 산 노인처럼 괴팍하고 음험한 뭔가가 깃들어 있었다.

기묘하게 번뜩이는 바니의 눈을 바라보던 제이드가 갑자기 비틀거렸다. 머리가 혼곤했다. 마치 수면제를 탄 탄산음료라도 마신 것 같은 감각이었다.

시계를 찬 손목이 화끈거렸다. 동공이 확장된 제이드는 경련을 일으키듯 턱을 흔들었다. 노이즈가 잔뜩 낀 흑백 영상이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내달렸다. 총성과 폭발음이 들렸다. 초토화가 된 수도원, 곳곳에 널브러진 아군의 시체, 편편이 부서지는 스테인드글라스. 그는 붕괴 직전인 성당 복도를 내달렸다. 자신이 겪은 일임에도 무엇을 기록한 광경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토감이 치밀었다. 누군가 그의 뇌를 멋대로 주무르는 느낌이었다. 눈꺼풀도 깜빡거리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 소리와 함께 심연보다 짙은 검은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제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강렬한 피 냄새, 기괴한 목소리, 자신을 삼킬 듯 노려보는….

“거절하실 건가요.”

바니의 목소리가 환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제이드는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반면 입 안은 바싹 메말랐다.

“네. 아, 아뇨! 맡을게요, 그 일. 스테판을 찾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제이드는 황급히 손바닥을 바지에 훔치며 대답했다. 문신이 있는 자리가 욱신거렸다. 손목을 휘감고 있는 뱀이 난동을 부리며 살갗을 찢어 놓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뭐지, 취했나?’

자신의 상태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순간이긴 하지만 얼을 빼고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취기가 올라오기라도 한 건지 의심했다. 하지만 그가 해리와 마신 술은 맥주 한 잔이 전부였다.

“억지로 의뢰를 받아 주실 것 없어요. 제가 제이드 씨라도 곤란할 테니까.”

바니가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래로 떨어트린 그의 눈빛이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스산한 기운을 풍겼다. 집으로 돌아가면 전깃줄로 목을 매기라도 할 기세였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조금 딴생각을 했던 것뿐이니까 오해 마세요. 진짭니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제이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대답을 한 박자 느리게 하긴 했다. 하지만 바니가 그걸 부정적인 의사 표현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우중충한 기운을 풍기는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비관적이고 어두운 모양이었다.

“바니, 내가 스테판을 찾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인이었던 시절처럼 눈빛이 강렬했다. 신뢰감이 절로 드는 따뜻한 기운도 풍겨 나왔다.

그는 처음부터 바니의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가슴 저릿해지는 절절한 사연을 들었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포주들의 감시를 받느라 바니는 운신의 폭이 좁을 게 분명했다. 경찰을 찾아가기도 껄끄러운 바니로서는 제이드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이드는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를 찾고 싶다며 간곡히 부탁하는 이를 뿌리칠 만큼 비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스테판이 납치당했다는 주장, 바니의 지레짐작이 아닐지도 몰랐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바니가 어깨에서 힘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적으로 많이 지친 탓인지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안색이 시체처럼 파리해졌다. 역시 제이드의 짐작대로 몸이 약한 게 분명했다.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봐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질병의 종류에 따라 다른 이에게 알리기 싫을 가능성이 있었다. 가령 에이즈라든지 하는….

“바니가 봤다는 그 왜건, 운전자의 특징이나 인상착의를 설명해 줄 수 있어요?”

“아뇨. 거리가 워낙 먼데다 창문에 선팅까지 해서….”

그늘진 인상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게일 형제에게 돌아가 봐야 하는지 그는 연방 골목 출구 쪽을 흘끗거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연락처를 적어 줄게요.”

제이드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영수증과 펜을 꺼냈다.

“네.”

바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잠시 오싹한 미소가 걸렸다. 영수증 뒷면에 전화번호를 적는 데 정신이 팔린 제이드는 바니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다음번에 만날 때 스테판의 사진을 받기로 약속하고서 바니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제이드는 씻기 위해 손목시계를 풀었다.

“어?”

제이드가 손목을 움켜쥐고서 눈썹을 비틀었다. 갓 문신을 새긴 것처럼 뱀의 주변이 불그스름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마치 샤프 끝으로 피부를 긁은 것 같기도 했다. 아까 손목이 욱신거렸던 게 이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바셀린을 바르면 낫겠지, 뭐.”

제이드는 깊게 고민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문신에 관해선 과학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는 문신 때문에 도통 귀찮은 게 아니었다. 제이드는 이런 게 왜 자신의 몸에 생긴 걸까, 생각하며 수도꼭지 손잡이를 돌렸다. 끼릭, 끼릭,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앗, 차거!”

분명 빨간색 손잡이를 돌렸는데 찬물이 쏟아졌다. 눈을 부릅뜬 제이드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제길. 뜨거운 물 나오는 시간이 아니었지.”

그제야 지금이 몇 시인지 기억해 낸 제이드가 이마를 쳤다. 요새 하루가 멀다고 굴드의 집을 들락거리느라 이 낡은 아파트의 상태를 깜빡 잊어버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는 찬물을 맞으며 멍하니 욕실 바닥을 바라봤다. 이리저리 깨지고 낡은 타일이 낯설었다. 일 년 가까이 산 집인데도 이젠 굴드의 욕실이 더 익숙했다.

비누로 머리를 감다가 거울을 쳐다봤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서 쭉 뻗은 쇄골을 응시했다. 해리가 지적했던 붉은 멍 자국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제이드는 면도라도 하듯 요리조리 고개를 돌렸다. 굴드가 언제 이런 걸 만들었을까, 기억을 뒤져 보는 중이었다.

윽, 맞다. 그때…!

제이드의 머릿속에 민망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필이면 멍 자국을 만든 장소가 바로 욕실이었다.

굴드가 발목을 움켜잡고서 그의 몸을 반으로 접었다. 주홍빛 욕실 조명 아래서 남자가 허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굴드의 몸에 짓눌린 제이드는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굵직한 성기를 받아들였다. 등과 꼬리뼈가 아픈데도 정신없이 허리를 들썩거린 기억이 생생했다.

‘음란한 아이군요.’

굴드가 속삭였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읏.”

제이드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관능적인 굴드의 저음을 떠올리자 아랫도리에 반응이 왔다.

뭐, 뭐야.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단 표정으로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며칠 새 애널 섹스에 익숙해진 그곳이 뜨끈한 열을 머금었다. 굵직한 성기를 품었던 감촉을 상기하며 음탕하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네가 십 대냐? 어떻게 절제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그는 자신의 몸 상태가 당혹스러웠다. 제이드는 수줍게 고개를 들어 올린 페니스를 향해 삿대질했다. 하지만 샤워 중에 훈계를 늘어놓는다고 해서 성욕이 식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그를 가장 괴롭히는 건 성기가 아니라 뒤쪽이었다.

도대체 왜….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는데도 하반신에 번진 미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제이드는 첫 몽정을 저질렀을 때처럼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페니스를 만지고 싶은 게 아니었다. 엉덩이 안쪽이 욱신거렸다.

감당하기 힘든 쾌락을 배웠다. 이젠 더 이상 평범한 수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아랫도리가 녹진녹진했다. 그의 몸이 적나라하게 굴드를 원하고 있었다.

어쩌지.

굴드의 얼굴이 눈앞에 번졌다. 너른 가슴팍과 단단한 허리의 감촉이 떠올랐다. 제이드는 꿀꺽 침을 삼켰다. 샤워기 물이 닿지 않는 둔부 사이로 손을 가져가고 싶었다.

쏴아아, 뚝.

잘만 쏟아져 나오던 물이 느닷없이 끊겼다. 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수도꼭지를 바라봤다. 욕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쏴아아!

공회전을 하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펄펄 끓는 물을 상수도관에 붓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온수였다.

“으악! 뜨거! 아뜨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을 뒤집어쓴 제이드가 팔을 퍼덕거렸다. 급한 마음에 찬물이 나오는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자 뜨거운 물과 찬물이 번갈아 가며 그의 머리를 때렸다.

간신히 수도꼭지를 잠그는 데 성공한 제이드는 욕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빨갛게 익은 어깨며 등이 욱신거렸다. 그의 머리카락엔 여전히 비누 거품이 남아 있었다.

“젠장, 이 시간에 왜 뜨거운 물이 나온 거지.”

멍텅구리 보일러 같으니라고. 제이드는 찔끔 눈물을 흘리며 피부에 후후 찬바람을 불었다. 뜨거운 물벼락을 맞은 소동 덕분에 반쯤 일어섰던 성기가 시들시들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고맙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머리에 새하얀 거품이 생크림처럼 얹어져 있었다. 비누를 씻어 내야 하는 제이드는 폭발물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조심조심 물을 틀었다. 또 뜨거운 물세례를 받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샤워기에서 나오는 건 찬물이었다.

안도 반 실망 반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서 물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 온수로 샤워하는 건 포기해야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싶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서 캔 맥주를 땄다. TV에선 엊그제 베라를 방문한 교황의 영상을 뉴스로 내보내고 있었다.

브라운관 속에서 손을 흔드는 교황의 모습은 생각보다 젊었다. 백발이 성성한 호호 할아버지일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장면이 바뀌었다.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교황 니콜라오 11세는 오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종교에 관심 없는 제이드는 금방 채널을 돌렸다. 시답지 않은 쇼핑 광고가 스피커를 울렸다. 약 상자를 뒤적여 바셀린을 꺼냈다. 그러나 바셀린을 꺼낸 보람도 없이 손목의 빨간 기운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하여간 이놈의 뱀 문신은 늘 상식을 뛰어넘었다.

오늘은 굴드한테서 전화가 안 오려나.

제이드는 절반쯤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전화기를 바라봤다. 시계를 확인하니 노상 전화가 걸려 오던 시간대가 훌쩍 지났다. 그는 요즘 사나흘에 한 번 굴드를 만나고, 거의 매일 밤 통화했다.

하루 이틀쯤은 건너뛸 수도 있지, 뭘.

그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벌러덩 소파에 드러누웠다. 각자 일이 있는데 매일 전화를 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과 굴드는 딱히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 굴드가 제이드에게 밤마다 전화를 걸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시멘트 결이 굳은 천장의 무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시원하던 맥주는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제이드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서 뒤척였다. 아까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굴드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하루를 보내려니 허전했다. 가장 중요한 일과를 빼먹은 느낌이었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굴드의 전화에 길들여진 것 같았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굴드와 전화를 하는 게 영 쑥스럽고 어색했다. 굴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이드는 특정 상대와 매일 전화로 대화를 나눠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자 친구가 있을 때도 매일 밤 통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매일 전화를 하는 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굴드의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다. 전화가 걸려 올 즈음이 되면 당연하다는 듯 수화기 쪽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보통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수화기를 붙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선을 타고 오가는 대화 내용은 별것 없었다. 듣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시시하고 단조로운 화제가 주를 이뤘다.

아침에 뭘 먹었는지, 점심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길을 가다가 웃긴 사람을 봤다든지. 그저 소소한 일상을 서로에게 들려주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제이드는 아이처럼 전화를 기다렸다.

특별히 정해진 화제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침묵이 길어질 때도 있었다. 정적은 괴로웠다. 하지만 그 순간이 딱히 싫진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굴드가 무슨 말을 꺼낼까 고심하는 기척이 묘하게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제이드는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 돌아누웠다. 발끝이 시려서 발가락으로 이불을 잡아당겼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TV가 아스라하게 그의 등을 비췄다. 전원을 꺼야 했지만 움직이기가 귀찮았다.

때르릉, 때르릉!

굴드다.

눈이 번쩍 떠졌다. 제이드는 이불을 걷어찰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는데 졸음이 일시에 달아났다. 그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수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보세요?”

- 여, 제이드. 나야, 벤. 혹시 바빠?

전화를 건 사람은 벤이었다.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니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부리나케 전화를 받으면서도 굴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렇지만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바쁘진 않아.”

제이드는 아쉬운 감정을 억지로 수습하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굴드 때문에 어깨가 처지긴 했지만 친구의 전화는 반가웠다. 무슨 일 때문에 이 시간에 전화를 건 건가, 하는 호기심도 생겼다.

- 시간 괜찮으면 같이 클럽이나 가자. 그렉이랑 세르게이도 옆에 있어.

프로레슬러처럼 가슴팍이 두터운 흑인 친구는 이미 클럽 앞인지 목소리가 우렁찼다. 쿵쿵거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수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다.

단골 술집의 멤버들이 오랜만에 의기투합해서 화끈한 밤 나들이를 즐기기로 한 모양이다. 벤은 술만큼이나 클럽도 사랑했다. 벌써부터 흥에 겨워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을 광경이 눈에 선했다.

“셋이서 재밌게 놀다 와. 난 막 자다 일어나서 가기가 좀 그래.”

제이드는 수화기를 고쳐 잡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면 솔깃했겠지만 이상하게도 클럽에 놀러 갈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원래도 클럽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 에이, 그러지 말고 나와. 바쁜 것도 아니라며.

옆에서 ‘흠. 제이드, 여자 친구 생긴 거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는 세르게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렉이 ‘내 생각에도 그래. 이 시간이라면 여자 친구랑 같이 있는 걸지도’라고 긍정하는 소리도 수화기를 타고 들렸다.

- 뭐야, 애인이랑 있던 거였어? 미리 말을 하지.

벤이 두툼한 목소리로 두다다 랩을 쏟아 냈다. ‘어이, 우리가 입장할 차례야’라고 세르게이가 주의를 주는 소리가 벤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저기, 벤!”

제이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벤의 말이 하도 빨라서 중간에 말을 자를 틈 따윈 없었다.

- 이번에는 잘해 봐. 괜찮은 사람이란 확신이 들면 우리한테 소개시켜 주는 것 잊지 말고!

어어, 하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뚜-, 뚜-.

제이드는 귀신에게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서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 냈다. 여자 친구와 같이 있다는 엄한 오해를 사 버렸다. 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단골 술집 멤버들의 착각을 정정할 기회조차 없었다.

다음에 만날 때 이야기하지, 뭐.

곤란한 기분에 휩싸인 제이드는 이마를 긁적였다. 벤 무리가 왜 뜬금없이 자신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짐작한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 덕분에 클럽에 끌려 나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왠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에겐 여자 친구는커녕 연락을 주고받는 특정한 여자도 없었다. 데이트라든지 연인 비슷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는 남자인 굴드뿐이었다. 하지만 굴드 역시 자신과 만나는 걸 데이트라고 여기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날 때마다 몸을 겹치기 바빠서 데이트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굴드의 얼굴을 떠올리자 묘하게 가슴이 조여들었다. 굴드와 만난 뒤로 감정 기복이 불안정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실실 웃을 만큼 기분이 좋다가도 갑자기 어깨에 원인 모를 근심이 내려앉았다. 그도 자신이 땅을 파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선실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때르릉-.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TV를 그림 감상하듯 멀거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또 전화가 울렸다. 제이드는 누구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분명 벤 일당 중 하나가 다시 공중전화를 집어 든 것이라 생각했다.

벤 무리가 왜 또 전화를 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잘됐다. 다음번에 만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제이드는 수화기 쪽으로 손을 뻗으며 여자 친구 건부터 바로잡기로 마음먹었다.

“어이. 셋 중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나 여자 친구 없어.”

단골 술집 멤버가 입을 열기 전에 제이드가 선수를 쳤다. 으름장을 놓듯 단단히 못을 박는 어조였다.

- …….

수화기를 타고 침묵만이 들려왔다. 제이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들이라면 바로 반응이 왔을 것이다. 아무래도 벤 일당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아닌 모양이었다.

- 다행이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굵은 저음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어?

제이드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귀에 익은 듣기 좋은 목소리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그가 전화가 걸려 오길 줄곧 기다렸던 굴드였다.

“…아, 그게! 친구들이.”

제이드는 속으로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야 하는데 입술이 버벅거렸다. 하루가 바뀌기 전에 굴드의 목소리를 들어서 기쁘다는 생각과 그가 자신의 발언을 이상하게 여기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세탁기 속 빨래처럼 뒤엉켰다.

- 참고로, 나도 여자가 없습니다. 제이드 당신처럼.

남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정색하거나 기분 상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굴드가 껄끄러운 화제를 매끄럽게 받아쳐 준 덕분에 무안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자신의 말실수로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전에 말했잖습니까.”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제이드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철퍼덕 소파에 주저앉았다. 서로 대뜸 여자 친구가 없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이 웃겼다.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굴드의 입을 통해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확인받은 느낌이었다.

- 그랬습니까? 당신이 날 의심해서 떠보려고 한 줄 알았는데.

굴드가 짐짓 진지한 말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음성에서 짓궂은 기운이 풍겼다.

“떠보긴 뭘 떠봅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긴장이 풀린 제이드는 픽 웃었다. 결코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듣고 보니 결과적으로는 굴드의 말대로 된 느낌이 들었다.

- 자고 있었습니까? 목소리가 잠겨 있어요.

굴드가 부드럽게 물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콘트라베이스를 연상케 하는 깊게 가라앉은 저음에 가슴이 수선스러워졌다. 평소보다 더 관능적이었다.

“아까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깼어요.”

제이드는 소파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나쁜 친구들이군요.

남자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치 그런 못된 친구들은 만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굴드도 전화를 했잖아요. 벤이 아니었다면 당신 때문에 잠에서 깼을걸요.”

제이드는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한 건 굴드도 마찬가지였다. 벤 일당에게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하지만 잠들기 직전인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뭐야, 일부러 이 시간에 전화한 겁니까?”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던 걸 생각하니 굴드가 무척 괘씸해졌다.

- 제이드 탓입니다. 잠에 취한 당신 목소리가 무척 섹시하니까요.

굴드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자못 당당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왠지 야간 기차를 탄 것처럼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졸려서 웅얼거리는 그의 음성이 듣기 좋다고 말해 준 사람은 굴드가 처음이었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깬 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제이드는 내심 설렜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남자란 동물은 이상하게도 사소한 곳에서 자존심을 찾았다.

- 제이드가 잠들 때까지 계속 통화를 할 겁니다.

나지막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굴드는 잘 자요, 라는 말 대신 수화기를 든 채로 잠든 그의 숨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졸리면 바로 끊어 버릴 겁니다.”

제이드는 어림도 없다는 듯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대로 굴드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평온한 휴식처럼 느껴졌다.

- 매정하군요.

굴드가 섭섭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게 연기인 걸 알고 있는 제이드는 흥, 하고 코를 울렸다.

“매정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난 잠이 많다고요.”

- 알고 있습니다. 저혈압이라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제이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굴드의 저음이 지독하게 퇴폐적으로 들렸다. 마치 나체인 그의 몸을 구석구석 눈으로 훑으며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 모닝콜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탁해도 됩니다.

“…음, 왠지 공짜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이드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목소리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굴드가 겉보기만큼 신사적인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다. 굴드에게는 영악하고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앗, 하는 사이에 사람의 혼을 빼놓는 술수에도 능했다.

- 그래서 싫습니까? 많은 걸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많은 걸 요구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어째 더 위험하게 들린다.

“근데 모닝콜을 할 수 있긴 한 거예요? 당신은 낮 시간 동안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는 야행성이잖아요.”

- 집에 있다고 해서 자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제이드는 모닝콜 화제를 두고 굴드와 한참 동안 아옹다옹했다. 시답지 않은 일로 서로 유치하게 고집을 부리는 게 왠지 즐거웠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제이드는 어느새 수화기를 얼굴에 갖다 댄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제이드, 듣고 있습니까?

“응… 듣고 있어요. 가스레인지 청소를 언제 했냐고 물어봤잖아요.”

잠에 취한 제이드가 횡설수설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TV 화면에선 찌든 때를 마법처럼 없애 준다는 세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벽 네 시까진 너끈히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금방 졸음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달콤하게 귀를 울리는 굴드의 목소리가 원인인 것 같았다. 남자의 차분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흡사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확실히 안 듣고 있었군요.

한숨을 흘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진 제이드는 ‘응… 맞아요’ 하고 웅얼웅얼 맞장구를 쳤다. 잠꼬대와 다를 바 없는 대답이었다. 반쯤 잠들어서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내일부터 모닝콜 해도 됩니까?

“어, 으… 응.”

- 성인 장난감으로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요?

“… 응.”

- 아직 구매하지 않았는데 종류별로 하나씩 몇 개 사 둬야겠군요.

“…….”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굴드가 들고 있는 수화기에서 색색거리는 제이드의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후 제이드의 뺨에 얹어져 있던 전화기가 스르륵 흘러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살짝 입술을 벌리고서 잠에 빠져든 것이 분명했다.

- 제이드.

굴드는 까무룩 잠이 든 청년의 이름을 낮게 속삭였다.

- 내 사랑스러운 성배.

무거운 정적 때문에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이 한층 더 음산하게 울렸다. 인간이 아닌 존재임을 증명하듯 천장까지 뻗은 남자의 그림자가 절규하듯 몸부림쳤다.

- 그대가 완벽하게 내 것이 된다면 미치도록 황홀하겠지.

남자는 광택을 띤 붉은 피가 자신의 일부가 되는 순간을 상상했다. 제이드의 뜨끈한 피가 탐욕스러운 혀를 적신다고 생각하자 성욕과 흡사한 흥분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심장이 멈춘 지 몇 세기가 흘렀건만 이 순간만큼은 갈비뼈 아래서 펄떡펄떡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오직 성배의 피만이 지긋지긋한 갈증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제이드가 성배라는 사실에 관계없이 그가 마음에 들었다. 웃는 모습도, 콧잔등을 찌푸리는 모습도, 호기심 어린 검은 눈동자도 죄다 만화경처럼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남은 시간 동안 제이드를 최대한 소중하게 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때때로 성배가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그는 제어하기 어려운 흉포한 기분에 휩싸였다. 부드럽고 달콤한 존재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 때문에 숨결이 거칠어졌다. 날카로운 흉기로 난도질당하듯 분별력이 사라졌다.

제이드를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면 그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었다. 강하게 끌어안으면 부러질까 봐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는 멀지 않은 유예의 종말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살아 숨 쉬는 제이드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굴드는 점점 줄어드는 유예의 시간이 더욱 애틋하고 의미 있게 느껴졌다.

***

문을 걸어 잠근 암실에서 독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실내가 어둑하고 불그스름했다. 남자는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사진을 집어 들었다. 빛을 받으면 안 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 형광등은 켤 수 없었다.

수세 작업을 거친 사진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는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사진을 집게에 꽂았다. 암실에는 수십여 장의 사진이 가느다란 줄에 걸려 있었다.

“흠.”

남자는 자신이 인화한 사진들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진 속에 담긴 풍경은 포탄과 폭탄으로 붕괴된 수도원의 잔해였다.

그는 시선을 왼쪽으로 옮겨 갔다. 옆으로 이동할수록 폐허의 비중은 작아지고 갈기갈기 찢긴 군인들 시체가 클로즈업되었다. 로드리고 형사가 비공식 루트로 손에 넣은 사진과 흡사한 컷이 많았다.

로드리고 형사가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는 사진과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비슷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가 사진을 인화하는 데 사용한 필름이 바로 신문사 편집장이 잃어버린 필름 원본이었다.

“후우, 후… 흐흐.”

황홀한 표정으로 사진을 감상하던 남자는 바지 앞섶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벌름거리는 콧구멍 사이로 뜨끈한 숨을 내쉬었다. 예술적으로 완벽한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성욕이 솟구쳤다.

남자는 서랍을 뒤지며 바지 지퍼를 내렸다. 자신의 작품을 기록한 사진들을 보면서 자위하고 싶었다.

그는 책상에 사진을 늘어놓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냄새나는 노인, 늙은 창녀, 젊고 탱탱한 남창. 다들 동공이 탁했다. 사진에 찍힌 인물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고통이 박제되어 있었다.

남자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훑으며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성기를 속옷 밖으로 끄집어냈다. 손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해 봤자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남자는 짜리몽땅한 제 페니스를 철제 서랍에 끼워 넣었다. 서랍의 차가운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허억, 헉! 후욱, 훗.”

남자는 소중하고 즐거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실실 웃었다. 축 늘어진 엉덩이가 빠르게 흔들렸다. 철제 책상이 남자의 용두질에 맞춰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들썩거렸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듯한 만능감이 그를 취하게 했다. 불완전한 피사체들을 아름답게 치장해 준 건 자신이었다. 화보를 찍기 전 모델을 화장시키듯, 결점을 감추고 가장 완벽한 상태로 꾸며 주었다.

언제 길바닥에서 나자빠져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그저 그런 시시한 인생들이 가치 있는 존재로 바뀌었다. 피사체들은 모두 자신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면 자신의 몸으로 극상의 미를 재현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테니까.

“아으으, 아읏!”

남자가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사정감이 몰려왔다. 여드름이 난 엉덩이가 꽉 조여들었다. 마스터베이션을 시작한 지 2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서랍에 왈칵 정액을 쏟아 냈다.

“헤엑, 헥.”

남자는 거친 숨을 흘리며 시들시들 쪼그라든 자신의 음경을 쓰다듬었다. 노인의 그것처럼 시원치 않은 물건이었지만, 남자의 망상 속에선 야만족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울퉁불퉁하고 훌륭했다.

책상에 축 엎어진 남자는 정액 묻은 손으로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아직 건조가 덜 끝난 사진을 집게에서 뽑아내, 자신의 작품과 비교해 보았다.

“의상에 변화를 줘 볼까.”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작품에 부여하느라 모델들에게 군복을 입히지 않았다. 하지만 원작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남자는 근래에 슬럼프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눈을 뜨게 만들어 준 거장의 작품을 모방하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는 쓰레기 처리장에서 발견된 조잡한 아류작과 자신의 작품을 같은 것으로 매도한 매스컴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다행히 카피캣은 그 뒤로 자취를 감췄지만, 그의 고유한 창작물과 아류작이 비교 선상에 섰단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휘적휘적 암실에서 나온 남자는 부엌으로 향했다. 야식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얼마 전, 항구 쪽에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원래 그는 세트를 꾸미는 데 한계가 있는 실내보다 야외 작업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근래에 남자가 연출한 작품의 인기가 너무 높아졌다. 불가피하게도 야외 작업은 당분간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땅콩버터를 듬뿍 바른 샌드위치를 갈색 봉투에 넣었다. 집에서 나온 남자는 스튜디오로 향하기 전에 각종 군복과 군용 장비를 판매하는 상점으로 향했다.

남자는 실망한 얼굴로 가게를 나왔다. 포린트 군의 전투복을 구하려면 일주일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가게 주인의 대답 때문이었다. 헛걸음을 한 남자는 다음 주에 도착할 군복에 예약금을 걸어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암시장을 벗어난 남자는 갈색 봉투를 흔들며 항구에 위치한 창고를 찾아갔다. 그의 거대한 스튜디오는 군데군데 녹이 슬고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다. 남자는 쇠사슬로 칭칭 묶은 건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열쇠로 자물쇠를 풀기 위함이었다.

어두운 실내에 발을 들인 남자는 더듬더듬 전깃불을 켰다. 탁, 소리와 함께 백열전구가 켜졌다.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창문은 꼼꼼하게 덧창으로 막아 놨다. 원래는 전기가 끊겼던 장소지만 자주 사용할 곳이라 남자가 약간 손을 봤다. 스탠드에 전력을 공급하는 건 자동차 배터리였다.

남자는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갈색 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랩으로 뒤덮은 샌드위치를 까며 그는 실내 정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자에 다가갔다.

상자는 두꺼운 암막 커튼을 두르고 있었다. 커튼 아래로 쇠창살이 보였다. 상자라기보다는 작은 동물을 가둬 두는 우리에 가까웠다. 사람도 들어갈 순 있겠지만 몸을 잔뜩 웅크리지 않으면 머리와 등이 천장에 닿을 크기였다.

남자는 우적우적 샌드위치를 씹으며 커튼을 들췄다.

“흐읍, 흐읍! 읍!”

입에 재갈을 문 청년이 우리 속에 있었다. 피도 통하지 않을 만큼 온몸을 옹송그린 청년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된 상태였다. 머리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 좁은 공간 속에서 청년은 제발 살려 달라는 눈빛을 남자에게 보냈다.

“긴장 풀어. 오늘은 날이 아니니까 안심해. 중요한 소품도 다음 주에 도착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거든.”

남자는 청년을 무심히 바라보며 샌드위치 조각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의 조력자가 작품 완성을 며칠간 미뤄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우리 속 모델에게 알려 줄 이유는 없었다.

“으읍, 읍! 읍, 읍!”

우리에 감금된 청년이 흐느껴 울었다. 남자는 빵가루가 묻은 손바닥을 털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랩을 바닥에 던진 왜소한 남자는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져다 둔 탁자 위에는 톱, 도끼, 전기톱, 쇠줄 등의 공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뜬금없지만 낡은 카세트 라디오도 탁자 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테판, 음악 틀어 줄까?”

탁자 앞에 앉은 남자가 카세트 라디오에 손을 얹었다.

“아니면 풋볼 중계방송?”

남자가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재차 물었다. 하지만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스테판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암막 커튼 너머에서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유행가도, 스포츠 중계방송도 아닌 쇼팽의 폴로네이즈 3번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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