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인간 폐기물들이 득시글거렸다.
잡범, 살인 용의자, 열일곱 살짜리 차량 절도범, 총기 소지법 위반자, 보호관찰 기간에 또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전과 3범의 중년 남자.
짙은 화장을 한 창녀들도 경찰서의 단골손님 중 하나였다. 밑바닥 인생이긴 하지만 그녀들은 이래저래 쓸모가 많았다.
시끌벅적한 난장판 속에서 로드리고는 기름진 감자튀김과 햄버거로 끼니를 때웠다. 당뇨로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남미 출신의 혈통에,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주말마다 교회를 나가는 종교인이었고, 미스터 슈퍼 마리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패미콤의 인기 게임인 슈퍼 마리오를 빼다 박은 둥글둥글한 외양과 콧수염 때문이었다.
형사는 내심 자신의 별명이 불만이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친숙하고 소탈한 이미지가 때때로 자신의 일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탐문 수사를 나가 겁에 질린 목격자의 입에서 진술을 받아 내야 할 때, 그의 성격 좋아 보이는 외모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그렇다고 로드리고의 호감 가는 겉모습이 만인에게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몇몇 예리한 감을 가진 이들은 형사의 수더분한 외모 속에 감춰진 차가운 본성을 꿰뚫어 보곤 했다. 예를 들자면 제이드라는 동양인 청년. 척박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내답게, 곧 용의자가 될 남자의 검은 눈동자는 사람 고기 맛을 아는 들짐승 같은 분위기를 흘렸다.
로드리고는 콧수염에 소스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었다. 형사의 시선은 몇 장의 사진에 고정되었다. 남자는 손끝으로 사진을 옆으로 밀며 피사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책상은 어둑했다. 다른 형사들과 마찬가지로 서류들이 파티션 대신 성벽을 이루며 난잡하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뭘 그리 열심히 보고 있어요.”
매드 버쳐 수사팀 소속의 닉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다가왔다. 짙은 밤색 머리에 성실해 보이는 타입의 신입 형사였다.
“직접 봐.”
로드리고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바퀴 의자를 뒤로 밀었다. 감자튀김이 담긴 갈색 봉투는 무릎으로 가져갔다. 닉이 감자튀김을 주워 먹는 상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형사는 식탐이 강했다.
“참나, 먹을 거 가지고 좀스럽게 굴지 좀 마십쇼. 콜레스테롤 수치 때문에 다이어트해야 한다는 양반이.”
서글서글한 인상의 형사가 혀를 차며 책상 쪽으로 손을 뻗었다. 못마땅한 심기를 고스란히 내비치던 그는 사진을 보자마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광경이 인화지 위에 뿌려져 있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추가 희생자라도 발생한 겁니까?”
닉이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고서 사진을 훑었다. 농담 투로 말했지만 표정은 심각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사건과 사진 속 풍경이 몹시도 유사했다.
“게다가 죄다 군복 차림이네요.”
“내가 전에 말했던 그거야. 그린텔발트를 떠도는 괴담.”
로드리고는 닉이 옆으로 치운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그 모습을 본 닉이 대뜸 눈썹을 비틀었다. 감자튀김은 숨겼으면서 남의 커피는 마음대로 먹다니, 얌체가 따로 없었다.
“역겨울 정도로 범행 수법이 비슷하네요.”
로드리고를 흘겨보던 닉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라이트급 복서 출신인 그는 미간을 모으고서 사진을 휙휙 넘겼다. 이역만리 전쟁터와 웨인 시티를 연관시키는 선배의 가설을 시답지 않다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생각을 정정해야 할 듯싶었다.
“확실히 그렇지?”
미스터 슈퍼 마리오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의자를 빙빙 돌렸다. 블라인드가 드리워진 벽 너머에서 왁왁 소리를 지르는 기척이 들렸다.
“빌어먹을 여편네 손 좀 봐 준 게 무슨 잘못이야!”
수갑을 찬 폭력 남편이 흥분해서 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룩진 민소매 셔츠에 체크 남방, 맥주에 취해 불그스름한 눈.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루저였다. 살인 사건 외에는 관심이 없는 로드리고는 무심한 눈을 하고서 바깥 상황을 외면했다.
“근데 이건 도대체 어디서 구한 겁니까?”
“은퇴한 신문사 편집장의 개인 소장품. 특종을 때릴 생각이었는데 윗선에서 압력을 가해서 흐지부지되었나 봐. 그걸 몰래 찍은 종군기자하고 연락을 해 보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연락 두절이라더군.”
로드리고는 기름이 밴 종이봉투에 손을 넣어 감자튀김을 꺼냈다. 차게 식었지만 중년 남자는 개의치 않고 감자튀김을 우적우적 맛있게 먹어 치웠다.
“뭐, 종군기자라는 족속들이란 원래 한곳에 붙어 있질 않으니까요. 참, 필름 원본은요?”
“화재가 일어나서 소실. 고로, 앞뒤 꽉 막힌 반장한테는 이 사진을 들이밀지 못해. 조작된 사진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로드리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갈색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났다. 닉에게는 짐짓 사진을 확보한 보람이 없다는 듯 굴었지만 소득은 분명 있었다. 매스컴과의 인터뷰에만 신경 쓰는 반장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어렵게 입수한 이 사진 덕분에 자신이 용의자로 점찍은 남자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충격적인 사건의 생존자가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행위를 벌이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로드리고는 냅킨으로 덥수룩한 수염을 닦으며 서류철을 펼쳤다. 클립으로 고정한 사진에는 동양인 청년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다.
로드리고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진 속 주인공이 목재를 톱질하는 모습에서 어떤 행위가 연상되었다. 사진 속 남자는 진지했다. 그는 목재를 다루는 것처럼 사람 시체도 능숙하게 재단할 것이 분명했다.
***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제이드는 숨을 쉴 생각도 못 하고 눈알을 재빠르게 굴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낯설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니었다. 그는 소파가 아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새하얀 시트를 보고도 안도할 수 없었다. 허리에 감긴 묵직한 팔이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어떡하지?
머리카락 사이로 식은땀이 솟구쳤다. 벌떡 일어나 지상으로 뻗어 있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싶었다. 등 뒤로 굴드의 존재감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서늘한 체온, 익숙한 체취, 목덜미에 닿은 입술. 그는 남자의 품 안에 폭 파묻혀 있었다.
사위가 고요했다. 지하라서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억눌린 숨소리만 귓가에 들렸다. 그를 끌어안고 있는 굴드는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굴드의 품 안에 안겨 있어서 그런지 어젯밤 저질렀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제이드의 얼굴이 핼쑥해지고 땀샘이 폭발했다. 하필이면 자신이 허리를 들썩이며 행위를 조르던 낯부끄러운 광경이 뇌리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미쳤어. 제대로 미친 거라고.
제이드는 눈을 부릅뜨고서 주먹을 깨물었다.
어젯밤, 그는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화끈하게 넘어 버렸다. 수염 덥수룩한 폭주족들이 심야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환호하는 모습이 뇌리에 그려졌다. 그들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제이드의 대담성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는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순진했던 건가 싶어 자괴감이 일었다. 물론 하룻밤을 보내자는 말을 듣고 혹시? 라는 의혹은 품긴 했었다. 제이드와 굴드 두 사람 모두 신체 건강한 성인 남자였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데 성적인 화학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숨에 갈 데까지 가리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허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최대치는 페팅이었다. 요즘 들어 굴드 때문에 정체성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는 어쨌든 자신을 헤테로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굴드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이드는 불안한 눈을 하고서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굴드의 손을 바라봤다. 남자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성애자였다. 성적으로 심하게 개방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동성 간의 성행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굴드는 섣부르게 터부를 범한 선택을 후회할지도 몰랐다. 마치 폭음한 다음 날, 술에 취해 저지른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는 것처럼.
어젯밤 일은 실수였다고 말하는 굴드의 눈빛을 상상하자 제이드는 갈비뼈 안쪽이 따끔거렸다.
일단 바람 좀 쐬고 오자.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제이드는 달팽이가 미끄러지는 속도로 침대를 빠져나왔다.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던 굴드의 팔도 조심조심 시트에 내려놓았다.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카펫에 발을 디디자 날카로운 통증이 그의 하반신을 관통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황급히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온몸으로 신음을 토해 낼 뻔했다.
목구멍 아래로 비명을 삼킨 제이드는 구부정한 자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옷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했다. 다행히 실내는 무덤처럼 캄캄하진 않았다. 간접조명이 어렴풋하게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어쩐지 어둑한 호텔 복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파 어딘가에 뒹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었다. 굴드가 정갈하게 정리해 둔 것이 분명했다. 제이드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속옷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한 번 입었던 속옷을 또 입는다는 게 찝찝했지만 이런 상황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으윽.
꼬리뼈부터 정수리까지 통증이 내달렸다. 제이드는 통곡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간신히 바지 단추를 채웠다. 굴드가 어젯밤 그의 몸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엉덩이 안쪽이 묵직했다.
그는 신발을 손에 들고서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까마득한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저길 올라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난간을 붙잡았다. 계단을 두어 칸 올라갔을 즈음 갑자기 원망이 치솟았다. 아랫도리가 아픈 건 순전히 굴드 탓이었다.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불뚝불뚝한 굴드의 물건이 어젯밤 자신의 그곳을 거칠게 벌리고 들어….
“어딜 가는 겁니까.”
숙면을 취하고 있어야 할 굴드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찔렀다. 제이드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낡아 빠진 군화가 퉁, 소리를 내며 철제 계단에 떨어졌다. 그의 머릿속에 흐르던 적나라하고 선정적인 영상이 싹둑 멈춰 버렸다.
“…나, 때문에 깼어요?”
“네.”
남자는 차갑게 대꾸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제이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눈빛이 선명했다. 조금 전까지 눈을 붙이고 있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혹시 일부러 잠을 자고 있는 척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 정도였다.
“미안해요. 조용히 나가려고 했는데.”
제이드는 난간을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상의를 탈의한 남자가 그의 코앞에 서 있었다.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굴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역시 내가 잠든 사이에 몰래 도망치려고 했던 겁니까. 실망입니다, 제이드.”
입꼬리만 올려 웃는 모습이 다른 사람처럼 섬뜩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도 캄캄한 감옥에 울려 퍼지는 교도관의 것 같았다.
“엥?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바깥 공기 좀 쐬고 오려고 했던 겁니다. 아, 나간 김에 갈아입을 속옷도 사고요.”
배탈이라도 난 것처럼 아랫배가 살살 아팠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배꼽 부근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화장실부터 갈까, 하고 생각하는데 수중에 지갑이 없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다. 아무래도 속옷은 집에 가서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배가 아픈 겁니까?”
오해가 풀린 표정은 아니었지만 제이드의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굴드가 물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제이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열이 있는지 확인하는 손길 같았다.
“아픈 것까진 아니고 조금 불편한 정도?”
제이드는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큼직하고 모양새 좋은 저 손이 어젯밤 그의 몸을 만졌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도 자꾸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리 와요. 샤워부터 하는 게 좋겠군요. 어젯밤 수건으로 닦긴 했는데 안쪽에 남은 건 다 긁어내지 못한 모양입니다.”
굴드가 한숨을 내쉬고는, 제이드의 허리에 팔을 감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깐만. 긁어내? 뭘? 설마… 으악!
굴드의 품에 덥석 안긴 제이드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그러고 보니 땀과 체액으로 끈적끈적해야 할 피부가 멀끔했다. 관계 중 까무룩 혼절했던 그가 샤워를 했을 리 없었다. 그의 보송보송한 몸 상태는 남자가 뒤처리를 해 줬다는 증거였다.
모르는 게 정신 건강상 이로울 사실을 굴드의 입을 통해 듣고 말았다. 관계 중에 기절한 탓에 제이드는 그 이후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수건으로 몸을 닦아 준 것까진 그러려니 했다. 그렇지만 정액을 긁어냈다는 소리에 제이드는 평정심을 잃었다. 남자가 젖은 수건으로 그의 허벅지 안쪽을 꼼꼼히 닦는 광경과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내벽을 긁는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열이 오르나 봅니다. 얼굴이 빨개요. 샤워 말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게 낫겠습니다.”
남자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가 감기에 걸릴까 봐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젠장, 저 인간은 왜 쓸데없이 매너가 좋은 거야.
고개를 푹 숙였다. 제이드의 얼굴이 붉어진 건 감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마 굴드의 오해를 정정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얼굴이 왜 빨개졌는지 이유를 밝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굴드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태연했다. 그런 남자 앞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여기서 갓 동정을 뗀 얼간이처럼 어리바리한 태도를 내비친다면 꼴이 우스워지고 말았다. 성적인 일에 대해서만큼은 경험 많은 척, 능수능란한 척 허세를 부리고 마는 게 남자들의 슬픈 습성이었다.
콸콸-.
욕조에 뜨거운 물이 가득 차올랐다. 욕실의 벽에 수증기가 맺혔다. 희한하게도 거울은 보이지 않았다. 제이드는 욕조에 손을 넣어 온도를 맞추는 굴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훌렁 상의를 벗었다. 아까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셔츠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제 옷을 빌려 드릴 테니까 그건 이리 주십시오. 세탁하고 건조하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할 겁니다.”
벗은 옷을 어디에 걸어 두나 두리번거리는데 굴드가 그의 손에서 셔츠를 가져갔다. 분명 상냥한 표정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사악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의 과한 배려와 친절 때문에 곤란한 기분을 느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일 터였다.
“시계는 안 풀 겁니까?”
굴드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 방수 시계라서 괜찮아요.”
제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샤워를 할 때는 시계를 몸에서 떼 놓긴 했지만 지금은 굴드가 눈앞에 있었다. 어차피 남자의 눈에는 문신이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손목을 남에게 보이는 게 불편하고 어색했다. 이건 기분상의 문제였다. 마치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으려고 비틀비틀 애쓰는 것처럼.
“흉터가 있다고 했었죠. 깜빡했습니다.”
전에 식사를 하면서 꺼냈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는지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쩐지 제이드가 흉터를 감추려고 해서 기분이 상한 기색이었다. 실제로 그가 감추고 있는 건 흉터가 아니었지만.
“저기, 미안해요.”
“제이드가 미안할 게 뭐가 있습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오히려 내가 무신경했던 겁니다.”
굴드가 괘념치 말라는 듯 으쓱 어깨를 추어올렸다. 차분한 목소리와 온화한 표정이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움찔 움츠러들었던 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등을 폈다.
뒤끝이 없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남자의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그는 굴드가 이 일을 마음에 담아 둘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전에 사귀었던 여자들 중에서 몇몇은 흉터를 보여 주지 않는 제이드를 쏘아붙이듯 비난하며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청바지와 속옷을 바구니에 넣고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다리에 휘감기자 부르르 어깨가 떨렸다. 피부가 화끈거리긴 해도 근육에 누적된 긴장과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굴드가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제이드는 욕조에 푹 잠겨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근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창고를 개조해 만든 그의 궁색한 아파트에 욕조 따윈 없었다.
고아원에 살던 시절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군대에서도 공용 샤워장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중위 계급을 달고 개인 방이 생긴 후에는 그도 욕조란 물건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옹색한 플라스틱이었고, 군데군데 금이 간 욕조에 몸을 담그는 기쁨도 그리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다. 진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를 결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헤헤 웃으며 최고급 호텔의 욕실을 연상케 하는 욕조를 매만졌다. 왠지 오랫동안 꿈꿔 왔던 미래가 현실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몸은 나른하고 천장에선 수증기가 흐물흐물 춤을 추었다. 몽상에 취하기엔 그야말로 완벽한 환경이었다.
제이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품어온 꿈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네에 집을 짓는 거였다. 큼지막하고 세련된 욕실에서 물장구를 치며 아들과 목욕하고, 여름밤 앞마당에선 바비큐를 굽는 화목한 가정. 그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손에 닿을 리 없는 불가능한 희망이지만 꿈을 꾸는 건 자유였다. 막막한 순간을 버텨 내도록 도와주는 신기루 같은 역할도 했다.
곤죽이 되도록 원장에게 얻어맞고서 골방에 감금되었을 때. 그리고 적군에게 포위당한 채 새벽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열대림의 깊은 밤. 제이드는 전원주택을 손수 꾸미는 자신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거품 목욕을 하면 정말 최고일 텐데.
한참을 혼자서 히죽거리던 제이드가 수면 아래로 잠수하다시피 했다. 눈만 빠끔 내민 제이드의 얼굴엔 아쉬움이 떠올라 있었다. 큰 욕조에 몸을 담글 땐 장미향 풀풀 나는 거품 목욕을 하는 게 정석이었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곧잘 나오곤 했다.
하지만 여긴 남의 집이었다. 욕실을 빌려 쓰고 있는 주제에 이러쿵저러쿵 투정을 부릴 순 없었다.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욕조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물놀이에 심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더듬더듬 샤워 볼과 비누를 찾았다. 허리가 뻐근했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사타구니 안쪽에서 무직한 통증이 일었다.
제이드는 슬그머니 다리를 벌려 허벅지 쪽으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흡사 수학 시험지를 확인하는 표정 같았다.
으익.
적나라한 광경을 목격한 제이드는 황급히 무릎을 닫았다. 출렁, 하는 물소리가 욕실 벽을 타고 울렸다. 허벅지 안쪽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런 건 도대체 언제 만든 거야.
그는 이를 악물고서 샤워 볼에 비누를 문질렀다.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원흉이 들이닥치기 전에 얼른 씻고 나갈 작정이었다.
욕조가 비눗물로 탁한 빛을 띠었다. 세안과 목욕, 머리 감기까지 비누 하나로 단숨에 해치웠다. 하지만 제이드는 욕조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의 몸속에 아직 남아 있는 굴드의 흔적을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머뭇머뭇 사타구니 사이로 팔을 뻗었다. 시선을 딴 데 둘 필요는 없었다. 욕조 물이 탁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이드의 손가락은 그곳에 닿지 못하고 방황했다. 도톰하게 부은 입구를 벌리고, 또 그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머리로는 이 행위를 해야 한다고 납득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천을 하려니 거부감이 일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서 손끝을 갖다 댄 순간이었다.
“제이드, 아침 식사를 만들 건데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아니면 선호하는 메뉴라든지.”
굴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그의 팔에는 정갈하게 개켜진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어, 아침이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제이드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누가 녹아든 욕조 물이 출렁출렁 흔들렸다. 그의 두 손은 부산하게 딴청을 부렸다.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굴드에게 감추기 위함이었다.
“아직 다 씻은 게 아니군요.”
하지만 그의 어설픈 연기는 굴드에게 통하지 않았다. 굴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옷장에서 꺼내 온 옷들을 세면대에 내려놓았다. 애초에 연극배우인 사람을 속이려고 한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지금 나갈 거예요. 더 씻을 것도 없어요.”
허둥지둥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굴드의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비눗물이 타일 위로 쏟아졌다.
“정말 구석구석 다 씻은 겁니까.”
가벼운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남자가 제이드의 사타구니 사이로 불쑥 손을 넣었다. 모양새 좋은 손가락이 은밀한 곳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제이드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굴드는 상의가 흠뻑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긴 건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아흣! 됐어요. 그냥 내버려, 흣!”
아랫도리를 헤집는 손가락의 질량이 늘었다. 첨벙첨벙하고 물이 튀는 소리가 요란했다. 손가락으로 주름을 벌린 그곳에 비눗물이 닿아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어린애처럼 투정 부리지 마. 제대로 뒤처리를 안 하면 고생하는 건 당신이니까.”
제이드의 가슴을 힘껏 찍어 누른 굴드가 손가락으로 내벽을 마구 휘저었다. 굴드의 눈빛이 화장실 조명을 받아 차갑게 번들거렸다. 목소리도 음산하고, 말투도 상냥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긴장한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미끌미끌한 비눗물 때문인지, 아니면 어젯밤 가졌던 격한 정사의 여파인지 제이드의 그곳이 쉽게 벌어졌다. 흐물흐물한 입구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굴드의 손가락을 네 개나 집어삼켰다.
“읏.”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욕실 바닥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제이드는 눈을 질끈 감고서 굴드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내벽을 긁어 대는 손길 때문에 눈앞이 아찔했다. 물색없는 주니어 놈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려고 했다.
인마, 분위기 파악 좀 해.
그는 다리를 들썩거리며 철딱서니 없는 분신을 다그쳤다. 이러다 아침부터 굴드와 또 뒹굴게 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와 몸을 겹치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허겁지겁 서로의 몸을 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그에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녔지만 제이드는 육체관계에 있어서 생각보다 보수적이었다. 원나잇도 지양하는 성격이었다.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분별력 없이 육욕에 휩쓸리는 건 싫었다.
“하읏, 흣.”
제이드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손길은 농밀해져만 갔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벌어졌다. 그의 몸은 굴드를 받아들였던 행위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요. 다 끝났으니까.”
남자가 제이드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언제 거칠게 굴었냐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제이드가 숨을 헐떡거리며 굴드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상앗빛 성기는 거의 직각으로 기립해 있었다.
“안에 물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군요.”
굴드가 깜빡했다는 얼굴을 하고서 제이드의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쪽 다리만 들린 탓에 엉덩이가 빠끔 벌어졌다.
중심을 잡을 수 없는 불안정한 자세였다. 제이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굴드는 그런 제이드의 등허리 아래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발그스름한 그곳에 남자의 손가락이 또 파고들었다.
입구를 넓게 벌리자 제이드의 몸속에 고여 있던 비눗물이 정액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힉!
제이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랑이 사이에서 뭔가가 빠져나온다는 사실도,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감촉도 지나치게 생경했다.
굴드가 다리를 놓아주며 속삭였다.
“속옷을 사 왔습니다. 사이즈는 아마 맞을 겁니다.”
그는 어깨를 굳히고 있는 제이드의 몸을 푹신한 타월로 덮어 주었다.
“…그랬어요?”
제이드는 타월을 허리에 두르며 머뭇머뭇 뒤를 돌았다. 굴드가 턱짓으로 가리킨 옷가지와 비닐 포장지가 보였다. 그가 목욕을 하는 동안 밖에 나가서 사온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고맙다는 뜻으로 슬쩍 고개를 숙이고서 포장지에 손을 뻗었다.
“저도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군요.”
굴드가 상냥하게 웃으며 포장지를 대신 뜯어 주었다. 그의 셔츠와 바지가 물기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포장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남자의 얼굴에선 성적으로 흥분한 기색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욕실에 홀로 남은 제이드는 멋쩍은 얼굴로 드로어즈를 펼쳤다. 굴드가 자신을 덮칠 것 같을 분위기라 긴장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안도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시무룩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굴드가 어젯밤 일을 후회하는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제이드는 그가 자신보다 더 당황해서 얼굴을 보지 말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워낙 신사적인 사람이라 타인에게 상처 줄 일은 하지 않을 성격이긴 하지만.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허리에 두른 타월을 치웠다. 꼿꼿하게 고개를 쳐든 성기가 드러났다. 아까 굴드와 마주 보고 있던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성기를 팬티 속으로 넣었다. 바지를 입는데 사타구니가 평소보다 몇 배는 불룩했다. 제이드는 주책없이 부풀어 오른 분신이 어서 힘을 잃기를 바랐다.
냄새 좋다. 섬유 유연제를 쓰나?
셔츠 단추를 채우다가 코를 킁킁거렸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음식 재료를 고르는 일은 중학생 남자아이보다 서툰 남자가 이런 부분에선 또 섬세하단 사실이 재밌고 신기했다.
엄청 큰데?
제이드는 무의식적으로 거울을 찾았다. 바지가 헐렁해서 자꾸 허리춤 아래로 옷이 내려갔다. 제이드는 품이 낙낙한 셔츠의 소매를 접었다. 거울이 없어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분명 사촌 형의 옷을 빌려 입은 사내애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굴드의 키가 크긴 엄청 크구나.”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굴드에게 안길 때도 느낀 바였지만 체격 차가 정말 여실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그의 옷까지 걸치고 있으려니 기분이 색달랐다.
제이드는 바로 욕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뜸을 들였다. 속옷 안에 밀어 넣은 성기가 축 늘어지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전은 아닐 것 같았다. 참 오래도 잤다. 원체 잠이 많은 체질이긴 했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싶었다.
아까 아침을 준비했다는 굴드의 말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저녁 일곱 시긴 하지만 끼니로 따지자면 아침이 맞기는 했다.
머리도 대충 다 말랐는데 멍하니 시간을 죽이려니까 지루했다. 결국 제이드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 성기가 힘을 잃고 푹 고꾸라진 건 아니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티가 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몸을 갖다 비빌 게 아닌 이상 굳이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그가 문밖으로 걸음을 내딛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방에선 치이익, 하고 팬에 둘러진 기름이 튀는 소리가 났다.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터라 식욕이 맹렬하게 솟구쳤다. 공기 중에 떠도는 고소한 음식 냄새도 그의 허기를 자극했다.
목에 수건을 두른 제이드는 만년 백수인 동네 청년처럼 어슬렁어슬렁 굴드를 향해 다가갔다. 요리를 하고 있는 건장한 뒷모습이 화보처럼 근사했다.
“뭐 도와줄 거 없어요?”
굴드가 만들고 있는 건 스크램블 에그였다. 옆에서 기웃기웃 프라이팬을 내려다보는데 군침이 돌았다. 말캉말캉한 알갱이들이 은색 스테인리스 판을 구르고 있었다.
“음. 냉장고에서 베이컨 좀 꺼내 줄래요?”
굴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제이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목이 푹 파인 셔츠를 입고 있어서 쇄골과 탄탄한 가슴근육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평소 같았다면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텐데, 굴드와 자고 난 뒤라서 그런지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거면 돼요?”
그는 괜히 민망해져 허둥지둥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장고 문을 활짝 열자 서늘한 냉기가 쏟아졌다. 제이드는 찬 공기를 정통으로 맞으며 냉장고를 뒤졌다. 냉장실과 냉동실을 한꺼번에 열어 놓고 냉기를 쐬니까 목덜미에 닭살이 돋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동요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어디 있는지 못 찾겠습니까?”
제이드가 한참 동안 냉장고 앞에서 고사를 지내자 굴드가 그의 등 뒤로 슥 다가왔다. 남자는 제이드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바로 베이컨을 꺼냈다. 제이드의 팔뚝을 움켜잡은 손은 냉동 팩만큼이나 차가웠다.
“여기 있네요.”
굴드가 피식 웃으며 제이드의 젖은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눈초리를 휘며 웃는 미소가 사람 잡을 것처럼 상큼했다.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짚은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제길, 페로몬 좀 그만 흘리쇼. 그렇지 않아도 설레 죽겠으니까’라고 투덜거렸다.
굴드가 다시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잡았다. 제이드는 또 거들 게 없나 그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서 베이컨이 지글지글 익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먼저 앉아 있어요. 거의 다 됐으니까.”
굴드가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매력적인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짜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제이드는 하마터면 ‘흣’ 하고 야릇한 신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 그래요? 도와줄 게 없나 보네.”
점점 수그러들던 물건이 또 발끈 고개를 쳐들려고 했다. 제이드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 식탁에 앉았다. 아랫도리 사정을 잊어버리려고 허기진 배에 집중했다. 워낙 배가 고픈 상태라서 딴생각을 하는 게 크게 어렵진 않았다.
‘ㄷ’자형 주방 테이블 위에는 식탁보와 냅킨이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왼편에는 유리병에 담긴 우유와 컵이 보였다. 제이드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반질반질한 포크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아침 풍경이었다. 햇살까지 창문으로 깃든다면 좋았겠지만 지하 3층을 밝혀 주는 건 어둑한 간접조명밖에 없었다.
“배가 고파서 지친 겁니까.”
먼눈을 하고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굴드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 됐어요?”
퍼뜩 정신을 차린 제이드가 머쓱한 얼굴을 하고서 굴드가 내민 접시를 받았다.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포크를 손에 쥐며 요리가 담긴 그릇을 살폈다.
스크램블 에그, 두툼한 베이컨, 프렌치토스트, 살구 잼과 삼각형으로 자른 슬라이스 치즈, 머핀, 접시를 장식한 브로콜리, 얇게 저민 토마토. 호텔 조식이 부럽지 않은 구성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이 아침 메뉴인 줄 알았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제이드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만들었습니다. 양이 많으면 남겨도 돼요.”
“에이! 남기긴 뭘 남겨요. 이 정도 양이 딱 좋아요.”
제이드는 흥분해서 손을 내저었다.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이렇게 윤택한 아침식사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홀아비처럼 궁상맞게 아침을 때우던 입장으로서는 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굴드가 여자였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청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그는 실없는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접시에 코를 박았다. 뭘 먼저 먹을지 고민하다가 일단 아까부터 눈독을 들였던 스크램블 에그에 포크를 가져갔다. 말랑말랑하고, 달고, 고소했다. 제이드는 감격한 얼굴을 하고서 허겁지겁 접시를 비웠다. 프렌치토스트도 바삭하면서 부드러운 것이 식당에서 파는 음식 못지않았다.
슬슬 배가 찼다. 정신없이 포크를 놀리던 제이드는 식사를 하다 말고 흘끔 굴드를 곁눈질했다. 같은 남자가 봐도 여러모로 참 완벽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대극장에서 주연을 맡는 걸 보면 연극배우로서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능력 있지, 잘 생겼지, 매너 좋지. 심지어는 요리까지 잘했다. 굴드와 잠시라도 사귀었던 연인들은 아마 다른 사람을 쉽게 만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먼저 결별을 고한 쪽이 누구든 간에.
그런데 만약 헤어지자고 한 사람이 여자였다면 이유가 뭐였을까.
딱히 이별을 결심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굴드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애인을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밤일 문제로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문제는 자신이 직접 확인해 봐서 장담할 수 있었다. 그게… 워낙 크고 두꺼워서 삽입할 땐 많이 아프긴 했지만 테, 테크닉은 좋았다. 처음인 그가 행위 도중에 정신을 잃을 만큼 느꼈으니까.
‘젠장,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제이드는 누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데 지레 민망해져서 굴드가 따라 준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아까부터 계속 성적인 쪽으로만 사고가 돌아갔다. 어젯밤 적나라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언짢은 일이라도 생각난 겁니까. 이마에 주름이 잡혔어요.”
굴드가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은 머리가 복잡한데 저쪽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어젯밤 일에 대해 의식하는 기색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굴드에겐 그와 몸을 섞은 일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사건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전보다 깊어진 것 같기도 했지만…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아뇨. 그냥, 굴드 씨랑 사귀었던 애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매일 이런 아침을 먹을 수 있었을 테니까.”
제이드는 포크로 브로콜리를 찌르며 쭈뼛쭈뼛 말했다. 굴드의 접시가 깨끗했다. 먹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언제 식사를 마친 건지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피자를 먹을 때도 남자가 피자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는 광경은 목격하지 못했다.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요리를 한 건 당신이 처음이니까.”
미심쩍은 눈빛으로 맞은편 접시를 노려보던 제이드가 움찔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었다. 심상하게 읊조린 굴드의 한마디가 그를 설레게 만들었다.
진짜일까?
가슴이 수런거렸다. 하지만 제이드는 들뜨지 않으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단순히 기회가 닿질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요리를 해 줄 일이 없었던 것뿐일 수도 있었다. 굴드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혼자서 지레짐작하는 건 금물이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접시에 얼마 남지 않은 토마토와 치즈를 한꺼번에 입 안으로 몰아넣었다. 제이드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도망치는 사내애처럼 포크를 우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불안정했다. 굴드의 눈짓, 말 한마디에 동요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조울증 환자도 아닌데 감정 기복이 오르락내리락 초고속 롤러코스터를 탔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겁니까.”
지저분해진 접시를 집어 드는데 굴드가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별로 안절부절못하고 그런 거 아닌데요.”
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발뺌했다. 굴드에게 붙잡힌 손목에서 맥박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었다.
“참, 세탁이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는 굴드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제이드는 차가운 바닥에 닿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이 와중에도 그는 굴드의 깊은 푸른색 눈동자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부엌의 은은한 조명 때문에 바다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더욱 신비로워 보였다.
“건조가 끝나면 알림 벨 소리가 울리겠죠. 그건 왜 궁금한 겁니까.”
제이드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으며 남자가 물었다. 그는 어중간한 자세로 서 있는 제이드를 품 안에 가두듯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버둥거리던 제이드는 결국 굴드의 어깨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그렇죠.”
머뭇머뭇 대답했다. 굴드를 내려다본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눈높이가 달라진 것뿐인데도 느낌이 색달랐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숨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고혹적인 분위기와 퇴폐적인 눈빛, 허리를 감싸고 있는 강인한 팔. 굴드는 때때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난 당신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데.”
굴드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언제 의자에서 일어났는지 어느새 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제이드를 응시하는 굴드의 눈빛이 위협적이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제이드가 입고 있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헤쳤다. 여기가 굴드의 집이고, 어젯밤 그와 밤을 보냈으며, 제이드가 자신의 옷을 걸치고 있다는 상황을 각인시키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 하하. 이 사람 참, 농담 한번 진지하게 하네.”
경직된 웃음을 흘리며 굴드의 손을 콱 움켜잡았다. 단추를 푸는 손길을 제지하기 위함이었다. 제이드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과 힘줄이 불거졌다.
“농담처럼 들렸습니까?”
굴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손목을 저지하고 있는 제이드의 손을 가뿐히 휘어잡았다. 제이드가 군대에서 죽도록 익힌 체술을 사용할 틈조차 없었다.
“저기, 굴드. 나 진짜 가 봐야 해요. 쓰레기도 산처럼 쌓였고 우편물도 확인해야 한다고요.”
제가 듣기에도 핑계가 궁색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나는 변명거리가 없었다. 개, 고양이, 하다못해 햄스터라도 길렀다면 둘러댈 말이 있었을 텐데, 그의 집에 서식하는 건 자취생의 영원한 말벗인 바퀴벌레뿐이었다.
이럴 때 전화라도 울리면 좋을 텐데.
궁지에 몰린 제이드는 진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한 걸음 물러서면 굴드가 성큼 거리를 좁혔다. 흐릿한 조명 때문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그림자는 마치 소리 없는 음악에 맞춰 음산한 왈츠를 추는 듯한 광경을 연출했다.
“한 열흘쯤 침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당신 몸속에 내가 구석구석 남아 있겠지.”
굴드는 음산하게 속삭이며 앙증맞은 제이드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제이드의 은밀한 그곳을 자신의 흔적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열흘?
“이봐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십쇼. 나도 생업이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억!”
제이드가 항의를 하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몸이 갑자기 뒤로 쓰러진 탓이었다.
출렁, 하고 등짝 아래에서 스프링이 흔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굴드가 몸 위로 올라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내기에서 이긴 대가를 아직 받지 못했군요.”
스탠드 조명이 침대 머리맡을 가로질렀다. 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제이드의 손에 깍지를 꼈다.
내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만세 자세로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제이드가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의 얼굴엔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어젯밤 장서를 가지고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휘발되어 버려 내기 이야기가 뜬금없게 들렸다. 제이드는 내기를 먼저 제안한 사람이 자신이었단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잠깐만… 설마, 어젯밤 그거?
제이드가 기함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굴드가 그의 손을 짓누르고 있어서 머리만 까딱하고 도로 침대에 드러누워야 했다. 빙글빙글 웃으며 내려다보는 굴드가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만큼이나 치사하게 느껴졌다.
“제길, 뭘 주면 되는데요.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나 돈 별로 없습니다. 금딱지 시계 같은 걸 요구해 봤자 사 주고 싶어도 못 해 줘요.”
제이드는 선전포고라도 하듯 콧김을 쉭쉭 뿜어 댔다. 굴드는 그런 제이드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잔뜩 골이 난 골든리트리버라도 응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당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굴드가 나지막하게 입술을 떼었다. 어둑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제이드의 오른쪽 손목에 시선을 못 박고 있었다.
남들 앞에선 절대 떼어 내는 법이 없는 낡은 시계. 제이드는 큰 흉터를 가리기 위해 시계를 찬다고 말했지만 굴드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시곗줄 아래 감추고 있는 것은 그가 새긴 낙인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
“당신? 나 뭐요. 중간에 잘라먹지 말고 끝까지 말을 해요. 뭘 받고 싶은지.”
제이드가 퉁명스럽게 뒷말을 재촉했다. 굴드가 속을 태우려고 의도적으로 말을 하다 멈춘 것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방금 말한 그대로입니다.”
굴드는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제이드를 응시하며 웃었다. 그는 제이드가 이렇게 가끔씩 어수룩한 면모를 내비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즐거웠다. 겉모습은 슈크림처럼 부드러워 보이지만 내면은 외양만큼 말랑말랑한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기의 대가로 당신을 받아 가야겠습니다.”
그는 짓궂은 표정을 하고서 제이드의 턱을 붙잡았다.
“엥?”
제이드가 눈썹을 비틀며 의아하단 눈빛을 보냈다.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요구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제이드는 이내 곧 상황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일주일간 노예로 부려 먹기. 참나, 간단하게 말해도 될 걸 가지고 왜 이렇게 빙빙 어렵게 돌려서 말한 겁니까.”
당당하게 자신을 나무라는 제이드의 모습에 굴드는 실소하고 말았다. 엉뚱한 발상이기는 했지만 어떤 면에선 영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는 제이드의 착각을 정정해 주는 대신 장단에 맞춰 주기로 결정했다.
“일주일보다는 길 겁니다.”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 사소한 유희가 언제 끝날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아벤 굴드’라는 배역에 한동안은 심취해 있을 것 같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이거 순 제멋대로네. 언제 끝난다, 기간을 정해야죠!”
눈을 부릅뜨고서 항의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굴드는 이런 자신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 그는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다는 행위를 용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당신 잘못이야. 날 미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굴드가 섬뜩하게 웃으며 제이드의 바지를 벗겼다. 매끈한 다리 사이로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국부가 보였다. 주먹 하나가 들어갔다 나올 만큼 하의가 헐렁해서 바지를 벗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으악, 갑자기 왜 또 이래요. 그 손 멈춰요, 읏.”
조각가처럼 커다란 굴드의 손이 사타구니 쪽으로 향하자 제이드가 허둥거렸다.
“당신 몸속에 또 들어가고 싶어. 따뜻하고 좁아서 기분 좋아.”
굴드는 제이드가 반항할 틈을 주지 않고 비부에 성기를 갖다 댔다. 속옷을 벗길 여유가 없어서 끝자락만 살짝 들췄다. 제이드가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싶었다.
“아윽! 난 한다고 동의한 적 없, 큿!”
굵직한 성기가 막무가내로 제이드의 입구를 벌리고 들어왔다. 어젯밤 충분히 길을 들인 데다 욕실에서 손가락으로 그곳을 풀어 준 덕분에 삽입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제이드가 느끼는 통증은 별개의 문제였다. 두툼하게 부푼 귀두는 내벽을 문지르며 제이드가 느끼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당신의 동의는 필요 없습니다. 제이드 당신 입으로 내 노예가 되기로 했지 않습니까.”
제이드가 느끼는 곳을 사정없이 찔러 댔다. 욕실에서 나올 때부터 반쯤 흥분했던 제이드는 자지러질 듯 비음을 흘렸다. 절제력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아랫도리가 벌름벌름 주름을 조이며 굴드의 물건을 반겼다.
“아흑!”
젠장, 신사적이고 매너 좋다는 말은 다 취소다.
굴드의 성기에 꿰뚫린 제이드가 끙끙 앓는 신음을 흘리며 굴드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기회주의자. 메피스토펠레스보다 사악한 협잡꾼! 별것도 아닌 내기 때문에 엉덩이를 저당 잡혔다는 사실이 원통하고 분했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1파운드의 살을 바쳐야 하는 안토니오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기, 무효야. 무효라고! 아흣. 이러는 거 하나도 안 좋단, 아응.”
“음란한 주제에 솔직하지 못하군요. 내 손길에 흥분해서 여기를 잔뜩 세웠던 주제에.”
굴드가 코웃음을 치며 속옷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제이드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강제로 쾌락을 느끼고 있는 탓에 귀두에서 맑은 애액이 흘러나왔다. 속옷 중앙 부위도 끈적끈적한 액체 때문에 검게 젖어 있었다.
뭐야, 다 본 거였어?
굴드가 욕실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제이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욕실에서 그가 발기했던 걸 굴드가 봤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남자 왜 이렇게 음흉해!
제이드는 배신감을 느꼈다. 발기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태껏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때리다니, 정말 얄미웠다.
“내가 말했잖습니까. 의외인 부분이 많을 거라고.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음흉한 성격을 감추고 있었던 겁니다.”
제이드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했는지 굴드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속았어! 이건 사기라고.
제이드는 사람을 잘못 봤다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렇지만 과거를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억울함을 토로해 봤자 들어줄 이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뺨치는 굴드밖에 없었다.
“아응, 힉! 으으읏.”
원망도, 탄식도 점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굴드의 허리 짓에 흔들리기 바쁜 제이드는 정신없이 남자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감당하기 힘든 격렬한 쾌감이 그를 잠식했다. 도무지 다른 생각이란 걸 할 겨를이 없었다.
제이드가 눈시울을 발갛게 물들이고서 굴드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굴드의 페니스가 그의 아랫도리를 들락거리는 광경이 너무 적나라하고 외설적이었다.
“좋아요? 난 미칠 것 같은데.”
굴드가 상냥한 목소리로 계속 물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허리 짓은 거칠기만 했다.
“…….”
제길, 누가 좋다고 말할 줄 알고?
제이드는 이를 악물고서 도리질을 쳤다. 입구를 후비는 굵은 성기 때문에 눈앞이 아찔했다. 아랫배가 빈틈없이 가득 찬 느낌이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대답 안 할 겁니까.”
완강하게 버티는 제이드가 괘씸했는지 굴드가 몸속에서 성기를 뽑아 버렸다. 질척질척해진 제이드의 그곳이 벌름거리며 달콤한 통증을 호소했다. 쑤셔지고 흔들리고 싶은데 굴드가 성기를 넣어 주지 않았다.
제이드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허전한 감각 때문에 몸서리가 쳐졌다. 누군가 끊임없이 깃털로 발바닥을 간질이는 것처럼 괴로웠다.
“빌어먹을! 좋아. 좋다고.”
결국 엉엉 울면서 남자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어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또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 제이드는 학습 능력이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염려가 되는 건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굴드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녹진녹진한 그곳에 천천히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하아.”
단단한 것이 배 안을 채우자 안정감이 느껴졌다. 제이드는 등줄기를 내달리는 관능에 허덕거리다 진득한 정액을 굴드의 가슴에 뿜었다. 사정을 했지만 아랫도리에 지펴진 열락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그는 굴드의 몸에 깔린 채 몇 번이고 절정에 다다랐다. 제가 싸지른 정액과 굴드가 내보낸 정액으로 아랫도리가 흥건했다. 결합 부위에서 질질 새어 나오는 점액질 액체는 시트도 더럽혔다. 황폐한 사막에 물을 들이부은 느낌이었다.
‘응?’
제이드는 관계를 가지다 불현듯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서 아랫배에 손을 가져갔다. 이상한 감각이 일었다.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는 피부 안쪽이 뜨거웠다. 굴드를 받아들이기 위해 벌리고 있는 다리를 오므리고 싶어졌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안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굴드, 저기….”
그의 몸속에 굴드가 쏟아 낸 정액이 어딘가로 흘러들었다. 덜컥 겁이 난 제이드는 굴드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갈증을 해소하려고 자신의 몸이 본능적으로 배 안에 가득 찬 액체를 꿀꺽꿀꺽 삼키는 듯한 감각이었다.
“딴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집중해요.”
하지만 굴드는 그가 엄살을 피운다고 생각했는지 옅게 웃으며 목에 이를 세웠다. 잘근잘근 씹히는 피부가 따가웠다. 제이드는 결국 깊게 파고드는 굴드의 허리 짓에 정신을 빼앗겼다.
굴드의 성기가 또다시 제이드의 내밀한 곳에 싸늘한 것을 들이부었다. 아랫배를 채우고 있는 굵직한 물건이 울컥울컥 뭔가를 쏟아 내는 감각이 적나라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이유도 없이 두려워진 제이드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굴드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마을처럼 그도 약탈당하는 것 같았다. 활짝 벌린 다리 사이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들이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굴드. 제발, 그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혼란을 담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굴드와 맨몸으로 피부를 맞댄 제이드는 자신이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제이드의 그곳은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초콜릿을 혀로 핥아 올리듯 굴드의 물건을 탐욕스럽게 휘감았다.
“제이드. 내, 성배.”
굴드가 숨을 헐떡이며 제이드의 어깨에 입술을 가져갔다. 탄식이 섞인 갈라진 목소리였다. 하반신뿐만이 아니라 땀으로 젖은 가슴까지 빈틈없이 밀착했다. 언제나 싸늘하기만 하던 굴드의 몸에서 희미하게 온기가 느껴졌다. 따끈따끈한 제이드의 피부가 그의 육신과 오랫동안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느껴집니까? 당신이 날, 얼마나 옭아매고 있는지.”
쾌감을 참기 힘든지 굴드가 잇새로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제이드의 등을 어루만졌다. 피아노 건반을 훑어 내리듯 절박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제이드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굴드의 몸에 매달렸다.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감각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사실이 모순적이었다.
굴드는 사정하는 도중에도 제이드의 몸을 느리게 찔러 올렸다. 감당하기 힘든 쾌락 때문에 머릿속이 흐릿했다. 경칩에 녹이 슨 것처럼 사고가 돌아가질 않았다.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여유가 없어지자 제이드는 저 안쪽이 젖어 드는 느낌을 쾌감의 일종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