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27)

어떡하지.

제이드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한동안은 절정의 여운 때문에 정신이 멍했다. 이렇게 격렬한 쾌감을 느낀 게 정말 오랜만이라 기운이 쑥 빠져나갔다. 어쩐지 갈취를 당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죄악감과 혼란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남자의 입에다 사정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남자에게 블로우잡을 받았다. 머릿속에 폭우를 동반한 태풍이 휘몰아쳤다. 소도, 집도, 트럭도 마구잡이로 날아다녔다. 제대로 사고를 친 제이드는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제이드.”

굴드가 턱을 낚아챘다. 입가엔 흉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

제이드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갑자기 현실로 내동댕이쳐져서 화들짝 놀랐다. 항의라도 하듯 심장이 쿵쾅쿵쾅 행패를 부렸다.

“딴생각하지 마십시오.”

낮게 으르렁거린 굴드가 오금을 잡고 제이드의 몸을 반으로 접었다. 허벅지가 가슴에 닿자 제이드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불길했다. 경계심이 솟구쳤다. 하지만 제이드가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굴드의 중지가 애널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악!”

야한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비명 소리가 제이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물어져 있어야 할 곳에 뭔가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프고 불편했다. 게다가 그냥 들어와 있기만 한 게 아니라 앞뒤로 슬슬 움직이며 안쪽의 점막과 입구 주변을 자극했다.

“굴드, 잠깐만. 이 손 빼요. 미안하지만 난 당신이랑 애널 섹스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큿!”

처음에는 좋게 말로 해결하려고 했다. 싫다는 의사 표현을 하면 굴드가 그만둘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행위를 멈추기는커녕 엉덩이를 유린하는 손가락 숫자를 하나 더 늘렸다.

“빌어먹을, 그만두란 소리 안 들립니까?”

화가 치밀었다. 가급적 폭력은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엉덩이의 정조가 위험했다. 일단 주먹부터 휘두르고 보는 게 당연했다.

“어?”

그러나 허공에서 손목을 붙잡혔다. 당황한 제이드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자신이 기습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난 당신을 가지고 싶은데?”

제이드의 손목을 움켜잡은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굶주린 짐승처럼 음험하고 위험한 눈빛이었다.

…가지고 싶다고?

제이드가 꼴깍 침을 삼켰다. 굴드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가 갑자기 파우스트를 유혹하던 메피스토펠레스처럼 느껴졌다.

“이 짓을 그만둘 생각이 없단 뜻입니다.”

굴드는 빈틈을 보인 제이드를 다시 소파로 쓰러트렸다.

“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이드가 굴드를 떨쳐 내려고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전력을 다해 몸부림쳐도 체력만 빠져나갔다.

“하아, 하아. 제길….”

제이드가 이를 갈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어느 부대로 전출되든 몸싸움으로 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온 힘을 다했음에도 굴드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윤활제를 사 온다는 걸 깜빡했군요.”

분해서 씩씩대고 있는데 굴드가 탁자에 손을 뻗었다. 연유를 손바닥에 쏟아 그것을 제이드의 애널에 가져갔다. 미끄덩한 액체가 여린 살에 닿자 몸서리가 쳐졌다.

‘이렇게 깔리고 마는 건가.’

제이드의 얼굴에 두려움과 거부감이 떠올랐다. 굴드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게 될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게이 섹스까지는 고려해 보지 않았다.

“젠장. 당신 이거 억지로 하는 거야. 절대 합의하에 이뤄진 게, 아윽!”

제이드가 진저리를 쳤다. 굴드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애널에 귀두를 욱여넣었기 때문이었다.

“아파! 아프다고, 이 개자식아.”

날카로운 통증이 꼬리뼈와 애널에서 일었다. 크기로 보나 부피로 보나 들어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사이즌데 페니스가 어떻게든 길을 넓히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합의가 아니라니 곤란하군요. 억지로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말입니다.”

억지로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는 도대체 뭔데?

할 수만 있다면 굴드의 멱살을 짤짤 흔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남의 엉덩이에다 페니스를 박아 넣고 지껄일 말은 절대 아니었다.

“제이드, 당신을 안아도 된다고 말해요.”

“아흑!”

굴드가 허리를 한껏 뒤로 당겼다가 강하게 퍽 쳐올렸다. 굵직한 것이 뿌리까지 박혀 들어오자 눈꺼풀 안쪽에서 번갯불이 번뜩였다.

‘제길, 젠장!’

눈물이 줄줄 나왔다. 언행일치 좀 이루라는 말을 내뱉을 정신조차 없었다. 이를 악문 제이드의 이마 위로 혈관이 도드라졌다. 관자놀이와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서 허락한다고 말해요. 이렇게 간절히 당신을 원하고 있는 내가 안쓰럽지도 않습니까.”

굴드는 구애라도 하는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제이드의 귀를 혀로 애무했다. 이마에 달라붙은 제이드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는 손동작도 다정했다.

하지만 제이드의 내벽을 빠르게 찔러 대는 허릿짓은 포로를 대하듯 가학적이었고, 무자비했다. 길게 빠져나와 귀두만 걸어 둔 채로 다시 푹 찔러 넣으며 한계까지 벌어진 애널이 다물어질 틈을 주지 않았다.

“아윽!”

“제이드, 어서.”

협박이라도 하듯 굴드가 으르렁댔다. 당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자신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어조였다. 쓰레기통에 던져진 알루미늄 캔처럼 소파 구석에 구겨진 제이드는 눈앞이 노래졌다. 굴드가 그의 성기와 고환을 한꺼번에 움켜쥐고서 손아귀에 힘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해! 하라고. 해도 되니까, 아흣. 그만….”

이 나쁜 놈아.

복수라도 하듯 굴드의 어깨를 깨물었다. 가슴과 맞닿은 다리에 쥐가 났다. 두껍고 긴 페니스가 들락거리는 그곳에선 우악스러운 통증이 일었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낭심을 붙잡힌 제이드로서는 고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착한 아이군요.”

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상이라도 주는 것처럼 제이드에게 입을 맞췄다. 굴드의 혀가 입술을 벌리고 들어와 제이드의 뜨끈한 살덩이를 휘감아 빨아들였다. 폭력적이기만 하던 허리 짓도 한 템포 느려졌다. 살살 달래듯 얕은 삽입을 반복하자 서럽게 울던 제이드의 울먹임이 잦아졌다.

“으, 으….”

“많이 아픕니까?”

굴드가 제이드의 피부를 입술로 간질이며 물었다. 빨갛게 익은 제이드의 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속눈썹, 잔뜩 찌푸려진 이마, 그리고 굴드의 가슴 사이에 끼어 접힌 다리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아픈 게 당연하지!’

속으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굴드가 풀이 죽은 제이드의 페니스를 손에 쥐었다. 손바닥으로 기둥을 몇 번 훑어 주기만 했을 뿐인데 제이드의 페니스가 지조도 없이 다시 빳빳해졌다.

“읏.”

“다루기 쉬운 몸이군요.”

닥치라고 말하고 싶은데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굴드가 요도 주변을 엄지손가락의 지문 부분으로 빙글빙글 문질렀을 땐 하마터면 그대로 또 사정할 뻔했다.

“하아, 하아.”

제이드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얼굴에는 야릇한 기운을 띤 홍조가 피었고 혀를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페니스를 만지던 굴드의 손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고양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제이드의 몸은 이제 다른 방향으로도 착실하게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가 좀 덜 고집스러워졌군요.”

굴드는 페니스를 물고 있는 근육 주변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무식하게 두껍고 큰 페니스를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애널이 화가 풀린 것처럼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으….”

굴드가 도톰하게 부어오른 애널을 간질이는 바람에 겨드랑이 안쪽이 오싹오싹했다. 제이드는 소파 팔걸이를 쥐어뜯을 기세로 손에 힘을 줬다. 애널의 바깥 부분과 훨씬 더 여리고 촉촉한 안쪽이 스스로 움찔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날 부추기는 겁니까?”

굴드가 엉덩잇살을 한 움큼 쥐고서 빠르고 강하게 왕복운동을 했다. 제이드의 그곳을 퍽퍽 치받는 움직임엔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으.”

제대로 된 단어가 아닌 말들이 제이드의 입 속에서 뭉그러졌다. 페니스가 깊게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강렬한 빛이 머릿속에 번졌다. 허리 짓 속도에 맞춰 발가락이 쫙 펴졌다가 오그라들고, 뒤로 한껏 젖혀진 목의 목울대가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제이드의 유두는 두 사람의 육체가 맞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그 사이에서 비벼지고 튕겨졌다.

“굴드….”

제이드가 숨을 할딱이며 굴드의 뺨을 쓰다듬었다.

굴드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오만한 태도로 제이드를 농락하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제이드는 자신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굴드는 자신이 뭘 일깨웠는지 어렴풋이 인식했다.

위험해.

시간 끌지 말고 네 것으로 흡수해 버려.

이게 널 위협하는 약점이 될지도 몰라.

타나토스가 부여한 반쪽짜리 본능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한 타락한 심장은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존재가 되길 종용했다. 굴드의 또 다른 자아는 제이드를 처음부터 불길하게 여기고 있었다.

위협이라. 과연?

굴드가 코웃음을 치며 입술을 핥았다. 흡혈을 갈망하는 욕구가 그를 충동질했다. 벽에 드리워진 흉물스러운 그림자들이 전에 없이 사납게 날뛰어 댔다. 굶주린 지옥의 괴수들이 날뛰는 듯한 광경이었다.

“제이드, 제이드.”

“제길, 아읏.”

제이드가 주먹을 쥐고서 허리를 뒤틀었다. 농염하고 자극적인 체취가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사내의 몸 아래 깔려 흐트러진 눈빛을 보내는 한시적 연인은 음탕하지만 정결했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끝을 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당장에라도 제이드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었다. 혈관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광경을 눈앞에 그리자 주체할 수 없이 흥분이 되었다.

성배 안에서 찰랑거리는 붉은 액체. 그 피로 목을 축이기만 하면 모든 것은 끝났다. 하지만 굴드는 선뜻 성배에 입술을 가져갈 수가 없었다. 갈증보다 더 큰 욕구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흣.”

처음 느껴보는 쾌락의 구렁텅이에 내던져진 제이드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라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겨드랑이까지 말려 올라간 셔츠, 숨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 가늘게 떨리는 늘씬한 허벅지.

한 번도 남자에게 범해진 적 없는 순연한 육신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졌다. 사내를 허락한 적 없는 단단한 육체가 제단 위에서 더럽혀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품 안에서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절정에 이르게 해 주고 싶었다. 그 배덕한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이대로 시드는 건 가여운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성배의 첫 남자였다. 아이를 받은 대부가 탯줄을 끊듯 그에겐 제이드의 뱃속에 정액을 가득 들이부어 줄 의무가 있었다.

“굴드, 제발….”

제이드가 달뜬 숨을 내쉬며 남자의 팔뚝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굴드의 셔츠가 잔잔한 물결을 이루었다.

“아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눈물로 발갛게 젖은 눈동자로 제이드가 ‘제발’이란 말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천장까지 솟구친 남자의 그림자가 뱀의 혀처럼 두 갈래로 나눠졌다. 부글부글 맹렬하게 부풀어 오른 그것들은 성마른 기세로 제이드의 그림자 위로 달려들었다.

“아윽, 악!”

제이드의 허벅지를 비튼 굴드가 칼로 난자하듯 늘씬한 몸을 사정없이 찔러 댔다.

“하읏….”

성기가 단숨에 저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제이드는 진저리를 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쾌감과 통증이 동시에 느껴졌다. 굴드는 제이드의 발목에 걸쳐져 있던 하의를 잡아 뜯어 버릴 기세로 벗겨 버렸다.

“응, 하윽!”

여린 유두가 꼿꼿하게 일어섰다. 제멋대로 내벽을 후비고 휘젓는 굵직한 성기 때문에 다시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안구 안쪽에서 섬광이 번뜩거렸다. 남자의 입술이며 손길, 그리고 그곳을 거칠게 들락거리는 성기가 지독하게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뒤로 느낀다는 건 그로서는 처음 맛보는 감각이기 때문이었다.

굴드는 제이드를 난폭하게 찍어 눌렀다. 성기를 조이는 뜨끈한 내벽 때문에 그는 여유가 없었다. 제이드의 그곳에서 찌걱찌걱하는 음란한 소리가 났다. 그는 제이드의 애널에 바른 연유가 애액 같다는 생각을 했다.

“흑, 그만… 이상해.”

제이드의 관자놀이가 눈물로 흥건하게 젖었다. 굴드는 쉼 없이 제이드를 몰아붙였다. 남자를 받아들이는 게 처음인 제이드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쾌락이 버거웠다. 그는 필사적으로 쾌감을 거부하려고 노력했다. 이 생경한 환락에 발목을 붙잡히면 자신이 망가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제이드. 큿, 당신 여기. 빌어먹게… 좁아.”

잔뜩 갈라진 거친 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굴드는 제이드를 우악스럽게 끌어안고서 피스톤질을 반복했다. 낡은 티 하나만 남기고 하의를 전부 탈의한 제이드와 달리, 굴드는 단추만 몇 개 풀었을 뿐 완벽하게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안 돼.

제이드는 덜컥 위기감을 느꼈다. 뒤로 절정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로 손을 뻗었다. 팽팽하게 달아오른 성기는 맑은 액체를 눈물처럼 흘리고 있었다.

“누가 그걸 만져도 된다고 했지?”

“싫… 아윽!”

굴드가 으르렁대며 제이드의 손을 잡아당겼다. 굴드는 비열하게도 그가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도록 손목을 하나로 모아 버렸다.

공기 중에 방치된 제이드의 성기가 힘겹게 끄덕거렸다. 분출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고환과 음경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굴드는 제이드의 손목을 짓누른 채 그에게 입을 맞췄다. 제이드의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겼다. 정체 모를 소유욕과 독점욕이 그를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굴드는 제이드가 감히 제 성기를 만질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가파른 속도로 내벽을 휘저었다.

“아흑! 악, 아으읏.”

제이드의 몸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는 발가락을 꽉 조이고서 비음 섞인 신음을 쏟아 냈다. 등허리에서 치닫는 쾌감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퍽퍽 하반신을 쳐대는 남자의 가학적인 행위가 그의 도주를 훼방 놓았다.

제이드는 눈을 질끈 감고서 굴드의 몸을 느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전신을 뒤흔드는 쾌락에서 달아날 수가 없었다. 아랫도리에서 끈적끈적한 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헉!”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찔한 쾌감이 들이닥쳤다. 턱이 덜덜 떨리고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어둠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굴드의 체취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등을 어루만지는 커다란 손, 쇄골을 핥는 혀, 나지막한 속삭임. 그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과부하가 걸린 퓨즈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제이드가 의식을 잃자 적막이 실내에 내려앉았다.

굴드는 제이드의 몸을 탐하던 행위를 멈추고서 침묵을 지켰다. 제이드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굴드의 시선은 제이드의 납작한 배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다.

굴드가 땀에 젖어 축 늘어진 제이드의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제이드를 품은 두 팔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이상했다. 그가 권능을 사용했다면 제이드는 쉽게 쾌락을 느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첫 관계에 힘겨워하던 제이드의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저 밑바닥에서 들끓었다. 피를 갈망하는 욕구와는 사뭇 다른 충동이었다.

사내를 모르는 순진한 육체를 자신이 가졌다. 자신이 제이드의 처음이라 기뻤다. 혈관을 내달리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그러나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봐,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성배의 피로 목을 축일 차례야.

두 갈래로 나뉜 그림자 중 하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굴드는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그림자의 목을 비틀었다. 그림자가 뱀이 내지르는 것 같은 비명을 토해 내며 다른 그림자에게 잡아먹혔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천만에. 그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제이드의 몸을 한 번 탐한 것 가지곤 격정적인 탐욕과 흥분을 가라앉히기엔 부족했다.

남자는 제이드의 목덜미에 자신의 소유라는 낙인을 찍으며 토정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제이드의 아랫배 깊은 곳까지 도달하도록 온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굴드는 제이드의 몸속에 자신의 씨를 가득 부어 망령을 잉태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애먼 처녀를 마녀로 몰아 화형시키던 시절처럼 뱃속의 태아를 인질 삼아 그를 완벽하게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사내와 배교의 잔을 마신 자의 교미로 인하여 태어나는 건 오직 공허뿐이었다. 자궁이 있는 여자라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썩지 않는 육체를 가지게 되었지만 자손은 남길 수 없었다. 이는 타나토스가 거두어들인 정당한 대가이자 그에게 내린 저주였다.

***

“허억, 헉! 오지 마! 싫어! 나 하나쯤은 살려 줘도 되잖아.”

산발을 한 여자가 맨발로 골목을 내달렸다.

뾰족한 그녀의 구두가 언제 벗겨진 건진 알 수 없었다. 골목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시큼한 땀이 창백한 피부를 뒤덮었다. 하지만 펄떡펄떡 몸부림쳐야 할 심장은 나무토막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녀의 뒤를 쫓는 건 험상궂은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짐승을 도축하는 데 사용할 법한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자극적인 호르몬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남자들은 약탈자처럼 흥분해 있었다. 그들은 이미 한 차례 피를 보았다. 여자의 가족을 토막 치고 머리채를 휘어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성가시군.”

여자를 사냥하는 무리 중 하나가 가늘고 날카로운 것을 던졌다.

“끼야아악!”

혼비백산해서 도주하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차가운 쇠붙이에 석둑 잘려 나간 발목이 보도블록 위에 피를 뿌렸다.

검붉은 피가 종아리 절단면 아래로 울컥울컥 흘러내렸다.

“허으으, 누가 좀 도와줘.”

양쪽 발목이 절단된 여자가 보도블록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주인님 어디 계세요, 제발.”

그녀는 추하게 울부짖었다. 얼마 도망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기를 쓰고 바닥을 기었다. 기적이 필요했다. 그녀가 영원한 젊음을 손에 넣었을 때처럼.

밤하늘에 뜬 손톱 달이 뾰족하게 붉었다.

“이젠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겠지.”

날렵한 체구의 추격자가 철제 쓰레기통 앞으로 뛰어내렸다. 남자는 뺨을 씰룩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날붙이를 갈무리했다. 가죽옷을 입은 그의 형제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여자가 남긴 자취를 따라 걸었다.

서두를 건 없었다. 밤은 길었다. 여자는 필사적으로 기었지만 거리는 점점 좁혀 들었다. 그들을 훼방 놓을 존재는 이 도시에 없었다.

“운이 좋았어. 개종한 지 20년도 안 된 찌꺼기긴 해도 우리가 건질 수확물이 남아 있다니 말이야.”

삼인조 추격자 중 제일 덩치가 좋은 남자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헐떡거리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요. 한발 늦어서 정식 팬저들이 여왕개미까지 죄다 솎아 냈을 줄 알았는데.”

삼 형제는 반신반의한 상태로 웨인 시티에 발을 들였다. 신문 기사를 발견한 게 늦어 그들의 몫이 남아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교구에 소속된 팬저들과 달리 그들은 주교원의 인가를 받은 헌터가 아니었다.

피가 모두 소실된 채로 쓰레기 처리장에서 발굴된 시체.

멍청한 보도기관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사건을 연쇄살인과 엮어서 기사를 내보냈다. 삼 형제가 구울에 관한 정보를 뒤늦게 접한 것도 바로 언론의 성급한 실수 때문이었다. 별 의심 없이 신문 기사를 흘려 읽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세간은 쓰레기 처리장 사건을 연쇄살인의 모방 범죄라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여자의 피를 쥐어 짜낸 건 카피캣의 소행이 아니었다. 이쪽 세계에 발을 담근 이들은 알 수 있었다. 쓰레기 처리장에서 발견된 시체는 구울이 웨인 시티에 소리 소문도 없이 증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형님, 냄새를 맡은 게 우리가 처음 아닐까요? 팬저 놈들, 주교원 소속이라고 으스대긴 하지만 능력은 쥐뿔도 없잖습니까.”

삼 형제의 막내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여자의 발을 툭 걷어차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우리 형제는 뒷북을 친 게 아니다. 오히려 팬저들도 눈치채지 못한 실마리를 캐낸 실력자들이다’라고 뿌듯해하는 기색이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어. 아니, 네 말이 확실한 거 같다. 우리도 이제야 탐색을 시작했는데 폼만 잡기 바쁜 팬저 놈들이 먼저 쑤시고 다녔을 리 없지. 암, 으하하.”

첫째가 누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일반 헌터에 불과한 삼 형제가 팬저를 제치고 선수를 쳤다는 사실이 통쾌했다. 구울을 창조한 여왕개미까지 추격해서 잡고 나면 팬저들도 그들을 우러러볼 것이 분명했다.

“자, 말해. 네 주인은 어디 숨어 있지?”

웃음을 뚝 그친 첫째가 구울의 머리를 밟으며 을러댔다. 후미진 골목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사위가 고요했다.

대도시에는 어디든 사람이 기생하기 마련이었다. 지하철이 달리는 다리 아래에도, 미로를 방불케 하는 하수구에도. 한데 이 근방에는 인기척은 물론이고 그 흔한 쥐 한 마리조차 얼씬대지 않았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유기 동물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지하철이 달리지 않았다. 거리는 저주에 걸린 도시처럼 고요했다.

“모, 몰라! 몰라요. 부탁이에요. 살려 주세요. 나도 이런 몸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란 말이에요.”

흙바닥에 뺨이 뭉개진 여자가 도리질을 쳤다. 그녀는 절박하게 헌터의 발에 매달렸다. 그러나 살려 달라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그녀는 이미 죽은 존재였다. 영원히 늙지 않기 위해 구울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 지껄이지 말고 불어. 너 따위한테 낭비할 시간 따윈 없으니까.”

짜증을 느낀 첫째가 장검으로 구울의 팔을 날려 버렸다.

“아아악!”

구울이 어깻죽지를 움켜잡고서 바닥을 뒹굴었다. 찢어질 듯 벌어진 그녀의 눈동자에 절망이 번졌다. 손가락 사이로 소중한 피가 콸콸 쏟아졌다. 더 이상 피를 잃으면 안 된다. 하지만 최하층민인 그녀는 자신의 몸을 재생하는 힘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살고 싶지? 주인이 있는 곳을 말해. 숙주를 넘긴다면 너 하나쯤은 눈감아 줄 수 있어.”

둘째가 구울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를 살살 꼬드겼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다정했다. 웨인 시티에 뿌리 내린 서번트를 잡으려면 구울의 인도가 필요했다.

변변한 능력도 없고 괴력도 없는 구울과 달리 서번트는 단독으로 추적하긴 어려웠다. A급 팬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높으신 분들과 삼 형제의 급이 같을 리 없었다. 그들은 서번트는 고사하고 구울 서너 마리만 뭉쳐 있어도 도망치기 바쁜 삼류에 불과했다.

한때 여자였던 구울은 주인의 위치를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렇지만 구울들은 본능적으로 서번트에게 도달하는 방법을 안다. 구울의 육신에는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관성이 흘렀다. 피의 끈을 거슬러 올라가면 헌터들은 수월하게 서번트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정말… 사, 살려 줄 건가요?”

여자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울먹였다. 창백한 몸뚱이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두 발로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 살고 싶었다. 죽는 게 지독하게 두려웠다. 어렵사리 불멸의 육체를 얻었다. 그녀는 늙지 않는 젊음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다.

“그래. 신을 걸고 맹세하지. 서번트는 어디 있지?”

둘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을 걸고 하는 맹세 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역 십자가를 등에 새긴 헌터들은 거짓을 밥 먹듯 입에 올리는 작자들이었다.

“주인님을 만나려면….”

헌터의 꼬드김에 넘어간 구울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녀 앞에서 실실 웃던 삼 형제들의 소매 밖으로 지저분한 벌레들이 밀알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끄어억!”

“컥.”

헌터들이 사지를 비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이 그들의 피부를 뒤덮었다. 잔뜩 벌어진 입과 숨구멍, 항문에서 날카로운 턱을 가진 벌레들이 무더기로 기어 나왔다. 스스스, 스스스. 벌레들이 저희끼리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신선한 내장을 파먹은 작은 벌레들이 헌터들의 피부도 먹어치웠다. 벌레로 까맣게 뒤덮인 헌터들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서번트를 잡겠노라고 큰소리를 치던 삼 형제가 허망하게 스러졌다.

“주인님!”

눈을 부릅떴던 여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환희를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구울의 육과 영을 소유한 주인이 나타났다. 처참한 몰골로 망가진 그녀의 몸도 주인이 고쳐줄 것이 분명했다.

“와, 와 주셨군요. 절 도와주러 오실 거라 믿었어요.”

어둠 저편에서 주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삐쩍 마른 남자를 향해 기어갔다. 비록 그림자에 가려 주인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미리암. 안녕, 내 혈육.”

창백한 손을 가진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미리암의 눈가에 감격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여인의 모습을 한 구울은 주인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져 줄 것이라 확신했다.

“발목이, 어깨가 불타는 것처럼 아파요. 어서 절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 아악!”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남자는 구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어린애 목소리를 내며 징징거리던 미리암은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우두둑, 뽑혀 나가는 소리가 생생했다.

“물론 그럴 생각이야. 앞으로 다시는 통증을 느낄 일이 없도록 만들어 줄게.”

구울 앞에 쪼그려 앉았던 남자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길고 풍성한 미리암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서 그녀를 자루처럼 질질 끌어당겼다.

“주, 주인님. 왜 이러세요.”

덜컥 겁이 났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미리암은 남자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절단된 발목과 팔이 저만치 멀어졌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선실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서, 설마 아까 그것 때문에 그러세요? 마, 말도 안 돼요. 제가 주인님을 배신할 리 없잖아요. 네?”

주인이 자신을 처분하려 하고 있었다. 미리암은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지만 비실비실 억지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동요를 내비치면 배신할 생각이었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자는 음산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골목 끄트머리로 걸음을 옮겼다. 터널의 끝이 희뿌옇게 밝아져 왔다. 비정상적으로 비틀린 공간의 출구였다.

“진짜로 주인님의 거처를 밝힐 생각은 없었어요. 믿어 주세요! 전 그저 놈들을 속이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미리암은 간절함을 호소하기 위해 두 손으로 싹싹 빌려고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깨에 남은 건 왼팔 하나뿐이었다.

“있지, 미리암. 넌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널 없애려고 하는 건 네가 날 배신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야. 네 존재 자체가 나한테 위협이 되고 있거든. 원망하려면 제이콥을 원망해. 이미 죽어 버렸지만.”

남자가 몹시 유감이라는 투로 말했다. 제이콥은 헌터들이 웨인 시티에 눈길을 돌리도록 원인을 제공한 구울의 이름이었다.

제이콥이 흡혈 후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살인 사건이 방송을 탔다. 쓰레기 처리장에서 발견된 시체. 예전 같았다면 뉴스거리도 못 될 일이었다. 하지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매드 버쳐의 연쇄살인 때문에 제이콥이 저지른 범행도 덩달아 방송국의 주목을 받았다.

어리석고 광대 같은 매스컴은 제이콥이 저지른 일과 매드 버쳐의 예술품을 비슷한 것으로 치부했다. 단지 시체에 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쓰레기 처리장에서 발견된 시체는 매드 버쳐의 실수도, 매드 버쳐를 숭상하는 카피캣의 소행도 아니었다. 별개의 사건이 하나로 엮인 일에 대해 남자는 참으로 유감이라 생각했다.

삼 형제의 착각과 달리 웨인 시티를 방문한 헌터는 그들이 처음이 아니었다. 남자는 제이콥 때문에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그는 제이콥의 멱을 딴 팬저들의 추격을 받았고, 건물 옥상에서 굴드를 만났다.

치명적으로 아름답고 오만한 오서독스.

그는 굴드를 만난 순간 운명적인 전율을 느꼈다. 굴드는 남자가 만난 그 어떤 주검보다 강했다. 그는 신의 권능을 훔친 오서독스라서 강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순서는 반대가 되어야 했다. 지나치게 완벽하기 때문에 오서독스가 될 수밖에 없는 배덕한 존재였다.

타고난 귀족, 아니, 지배자. 신을 조롱하는 고고하고 고귀한 혈통.

미리암의 주인은 굴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처럼 눈동자가 달떴다. 그의 입가에는 음침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남자는 태생적으로 잘나 빠진 귀족들이 싫었다. 그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고상해질 수 없는 밑바닥 인생이기 때문이었다.

자신만 추저분한 삶을 사는 건 억울했다. 남자는 잘나고 고상한 것들을 만나면 자신과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직성이 풀렸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구역질이 치밀었다.

세상은 모름지기 공평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는 고아한 부인을 음탕한 창부로 타락시키고, 행복한 작자는 빚더미에 치이다 제 아이를 사창가에 팔아넘기도록 독려했다. 누구는 깨끗하고 누구는 천박하다면 그건 정의가 아니었다.

남자는 성품이 선한 목자가 어린 사내아이의 장기를 파헤치는 추악한 범죄자로 몰락했을 때 희열을 느꼈다. 한때는 우러러봐야 할 존재였지만 결국엔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어진 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게 극도로 즐거웠다.

남자는 굴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얼마나 황홀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한 번도 좌절해 본 적 없는 이가 절망하는 광경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울 것이었다. 핏발 선 눈으로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 또한 달콤할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굴드를 철저히 파멸시킨 후 자신의 동반자로 만들길 갈망했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해보기에 굴드는 너무 먼 존재란 사실이었다. 남자는 비겁한 술수에 능했다. 그렇지만 굴드는 그가 여태껏 상대하던 경쟁자들과는 아예 다른 차원에 속한 거물이었다. 조잡하고 비열한 수작 따위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세상에 몇 없는 존귀한 오서독스께서는 자비심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은 위험한 괴물이었다. 그의 곁을 얼쩡거린다는 사실을 들켰다간 순식간에 제거당할 것이 자명했다. 그는 변명을 지껄일 틈도 없을 거라 확신했다. 감히 귀족의 사냥터에 손을 댄 농민의 목을 베는 것처럼 말이다.

발할라의 문턱을 넘을 뻔했던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남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심혈을 기울여 굴드의 주변을 탐색해 나갔다. 다소 지루한 작업이긴 했지만 남자는 인내심이 강했다.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정황을 살피는 건 그가 노상 해 오던 일이기도 했다.

남자는 약했다. 먹이사슬 관계에서 그는 늘 맨 아래층에 위치했다. 포식자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으려면 기척을 죽이고, 도망치고, 서슴없이 타인을 이용해야 했다.

그가 지저분한 노역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화물선을 타고 웨인 시티로 이주해 온 건 8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오줌 냄새가 찌든 좆을 빨고 엉덩이를 대 주는 구멍 노릇을 했다.

그는 어디서나 가장 약하고 비천한 존재였다. 강자 앞에선 일단 허리를 굽실거려야 했다. 그렇지만 남자는 살아남았다. 구차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빌붙어 지내며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강하다고 으스대는 놈들 따위,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거였다. 제 능력을 과시하는 족속 중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는 놈은 보기 드물었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을 업신여기며 얼굴에 침을 뱉는 놈들이 죄다 우스웠다. 마지막 순간, 목숨이 꺼져 가는 그들의 잘린 머리에 오줌을 갈기며 능욕하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굴드를 뒤흔들 카드는 이미 확보해 두었다. 거미줄처럼 가는 실을 뿜어 놈의 주변에 쳐두었다. 그는 그놈이 의식 못 하는 사이에 칭칭 휘감을 준비를 마쳤다. 앗,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놈의 머리는 그의 턱에 씹어 먹히고 있을 것이다.

“주, 주인님! 주인님, 혼자라서 외로우시잖아요. 절 버리면 후회하실 거예요.”

절박하게 매달리는 미리암의 목소리가 남자의 상념을 깨트렸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남자는 딸과 다름없는 구울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목숨을 구걸하는 미리암이 참으로 사랑스러우면서도 같잖았다.

외로운 건 지긋지긋했다.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구울을 만들어 곁에 두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창조한 피조물에게 애착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살점을 떼어 내 구울을 만든 건,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놀이였을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헌터들의 추적을 받기 싫었다. 성가시기 짝이 없는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면 싹을 도려내는 게 최선이었다. 구울 따위는 또 언제든 만들 수 있었다.

“이러지 마세요. 주인님, 제발! 저만큼 주인님을 이해하는 존재가 또 있을 거 같으세요? 제이콥처럼 눈에 띄는 일 없이 얌전히 지낼게요.”

미리암이 간질 환자처럼 입에 거품을 물었다. 마론 인형의 머리카락처럼 그녀의 갈색 머리가 두피에서 한 움큼 뽑혀나갔다. 그녀는 주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광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움직임은 미미했다. 서번트의 노예인 구울은 주인의 의지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만 좀 꽥꽥거려. 암퇘지 주제에.”

쾌활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둔탁해졌다. 남자는 싸늘한 눈을 하고서 미리암의 머리카락을 내팽개쳤다. 주인이 발휘한 억제력 때문에 혀가 굳은 어린 구울은 신음 소리도 내지 못했다.

헌터를 흔적도 없이 해치운 벌레들이 바닥을 까맣게 물들이며 남자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스스스, 스스슥. 거무튀튀한 벌레들이 남자를 지나쳐 구울의 몸을 뒤덮었다.

눈을 부릅뜬 미리암의 입 속으로 벌레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여자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까뒤집었다. 식도와 위장에 구멍을 낸 벌레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제정신인 채로 내장이 사라지는 고통을 느끼는 것은 날붙이에 의해 발목이 잘리는 통증보다 끔찍했다. 그리고 구역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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