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7)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 볼까.

택시에 탄 제이드는 등 뒤로 땀을 비 오듯 흘렸다. 옆 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굴드를 의식하느라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반면 굴드는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터널의 조명이 남자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얼굴만 본다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제이드의 잔잔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건 바로 그였는데 말이다.

제이드가 긴장하기 시작한 건 오늘 밤 함께 있어 달라는 말이 다분히 성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제이드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굴드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설렜다. 하지만 불현듯 그가 여자 친구들과 잠자리를 가지고 싶었던 순간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남자가 집에 가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건 상대방을 유혹할 때뿐이었다.

치, 침착해져.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그는 손바닥을 쥐락펴락했다. 여기서 도망쳐 버리면 간신히 회복된 관계가 손쓸 도리 없이 어색해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야릇한 의도를 품고서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건 순전히 그의 추측에 불과했다. 실제로 굴드는 택시에 탄 이래로 성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색을 내비치기는커녕 무덤덤한 태도만 보여 줬다.

“저녁식사 거리와 맥주를 사도록 하죠.”

9번가로 향하던 도중에 택시를 멈춰 세웠다. 그간 공연 때문에 바빠서 냉장고가 새것처럼 비었다는 게 굴드의 설명이었다.

제이드는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생수도 없다고 하니 마켓에 들를 이유가 타당했다. 하지만 어째 굴드가 마켓에 갈 핑계를 일부러 만들었다는 느낌이 희미하게 들었다.

에이, 기분 탓이겠지. 생필품 사는 일 말고 할 게 뭐가 있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굴드의 등을 바라봤다. 상식적으로 마켓을 방문하는 데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쪽이 이상했다.

두 사람은 심야까지 영업하는 창고형 대형 마켓에 나란히 들어갔다. 유리로 된 자동문이 열리자 초록색 바구니를 든 직장인이 몇몇 보였다. 타인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유기농 채소를 고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이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굴드를 따라 움직였다. 밀실이라 해도 무방한 택시에서 나오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어깨가 닿을 때마다 흠칫거리지 않아도 되어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래도 아직은 어색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전개된 상황 때문이었다.

굴드가 선반에 진열된 드레싱 소스를 집어 들었다. 유통기한을 확인하지 않는 모습을 본 제이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살림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장을 볼 때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잠깐만요.”

굴드의 계속되는 만행에 제동을 걸었다. 가능한 참견하지 않으려 했지만 입이 근질거렸다. 우유까지 맨 앞줄의 것을 꺼내는 걸 보고 나니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시죠?”

굴드가 어린 양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어깨 위로 속이 시커먼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가 손을 뻗은 냉장 진열장에선 하얀 김이 쏟아져 내렸다.

“이리 줘 봐요.”

굴드의 손에서 우유를 낚아챈 제이드가 쯧쯧, 혀를 찼다. 냉장 선반 안쪽 제품과 비교해 보자 날짜가 나흘이나 차이가 났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신선 제품은 가장 안쪽에 있는 걸 꺼내야 한다는 것도 모릅니까.”

엉겁결에 핀잔을 들은 굴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혼자 사는 독신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기초적인 상식을 처음 들어본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그랬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굴드는 곧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살지 말해 줘요. 고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제이드는 곧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를 하고서 굴드의 손에서 바구니를 빼앗았다.

이래서 곱게 자란 사람들은 안 된다니까.

전투를 진두지휘하듯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슈퍼에 들어온 이래로 잠자코 있던 제이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하나였다. 생활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굴드가 영 미덥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까 양상추를 고를 때도 답답해 죽을 뻔했다. 눈이 어디에 달렸는지 죄다 상하기 직전인 놈들만 바구니에 주워 담았다. 장을 보는 내내 이렇게 속으로 애를 끓이느니 차라리 그가 발 벗고 나서는 게 나았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굴드가 기분 나빠 하는 기색도 없이 상냥하게 웃었다.

참 속도 좋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굴드가 방긋방긋 예쁘게도 웃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이 어떤 분야에 서투르단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제이드는 굴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도움을 받아들인다는 게 신기했다.

“이건 제가 들도록 하죠.”

앗, 하는 사이에 굴드가 장바구니를 도로 가져갔다. 이쪽이 물건을 고르기 더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제이드는 수긍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왠지 은근슬쩍 주도권을 빼앗아 갔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굴드와 제이드는 상품 진열장이 줄느런히 늘어선 골목을 미로 헤매듯 돌아다녔다. 사야 할 물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한동안 집에서 제대로 식사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게 분명했다.

굴드는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겉보기에 딱히 달라진 건 없었지만 느낌상으로 그랬다. 성황리에 공연을 마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 건지, 혹은 자신과 엇갈렸던 일들이 해결되어서인 건지 제이드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찌하다 보니 바구니가 넘쳐서 카트를 끌고 와야 했다. 바구니 속에는 제이드가 좋아하는 과자들도 섞여 있었다. 염치없이 그가 집어넣은 물건들은 절대 아니었다. 제이드의 어깨 너머로 말도 없이 슥 과자를 집어 든 건 굴드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기척 때문에 움찔 긴장했다. 굴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의 팔이 그의 뺨을 스칠 듯 지나갔을 땐 하마터면 헉, 하고 헛바람을 내뱉을 뻔했다.

“왜 그러시죠?”

굴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아, 아니에요.”

겸연쩍은 기분을 느끼며 얼른 손을 내저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그의 얼굴엔 자괴감이 가득했다. 굴드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자신 혼자 자꾸만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의외로 과자를 좋아하나 봐요?”

번뇌와 잡념을 깨끗이 비우고서 굴드 옆에 다가섰다. 밤을 보내자는 의미를 그렇고 그런 쪽으로 해석하고 있는 이는 자신뿐이란 확신이 서자 제이드는 마음이 편해졌다.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남자는 과자를 입에 댈 것 같은 타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손님을 데리고 가는데 집에 아무것도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굴드가 옅게 웃으며 토마토를 집어 들었다. 카트에 넣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는 얼굴이었다.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이드는 이 눈에 빤히 보이는 연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아예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장 보는 데 서툰 척 연기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흠.”

제이드는 그의 손에 들린 토마토를 보자마자 미간부터 찌푸렸다. 과자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휩쓸려 날아가 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저 사람이 또? 라는 한탄만 가득했다.

굴드가 고른 토마토는 발갛게 익다 못해 터질 것처럼 껍질이 얇았다. 지금 당장은 먹음직스럽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일만 돼도 문드러질 것이 분명했다.

“내려놓으십쇼.”

한숨을 내쉬며 굴드의 손에서 토마토를 압수했다. 토마토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제이드는 매의 눈을 하고서 가장 멀쩡한 놈을 찾아냈다. 파릇한 색깔이 감돌았지만 두고두고 먹으려면 이쪽이 훨씬 나았다.

왜 덜 익은 걸 골랐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굴드는 제이드의 선택에 토를 달지 않았다. 자신은 아는 바가 없으니 전적으로 그를 믿고 맡긴다는 눈빛이었다. 치어리더 여학생에게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카트를 앞세운 두 사람은 커다란 창고형 매장을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냉동 연어도 챙겨 넣고 대형 피자도 샀다. 어디에 쓸진 모르겠지만 칵테일 새우와 레몬도 카트에 투하했다.

계산대에 섰을 땐 어느새 슈퍼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장 보는 일만큼은 어수룩한 굴드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느라 키스라든지 성적 긴장감에 대한 문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띠리릭, 띡띡.

“카드로 결제하시겠어요, 현금으로 하시겠어요?”

바쁘게 바코드를 찍은 계산대 여직원이 물었다.

장난 아니네.

제이드는 계산기가 토해 낸 영수증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새하얀 종이가 끝도 없이 늘어졌다. 굴드와 제이드가 각각 안아 든 갈색 봉투도 쇼핑한 식료품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들만 산 것 같은데 뭐가 많군요.”

“마켓에 오면 원래 다 그렇죠, 뭐.”

제이드는 자동문을 나서며 피식 웃었다. 두 팔이 묵직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그가 산 물건들도 아닌데 어쩐지 부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풍족한 만족감이 일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9번가에 도착했다. 제이드도 9번가에 살고 있지만 그가 사는 동네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할렘 가와 평범한 베드타운 정도의 차이였다.

굴드가 한 건물 입구를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특이하게도 아무도 살지 않는 듯 유리창이 전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시간이 늦긴 했어도 한두 개쯤은 불이 밝혀져 있을 법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여기입니다. 청소를 제대로 못 해서 조금 너저분하겠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굴드가 열쇠를 꺼내기 위해 갈색 봉투를 한쪽 팔로 안아 들었다. 타인을 집으로 초대한 건 이번이 처음인 분위기였다.

“에이, 남자 혼자 사는 집이 깔끔한 쪽이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제이드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의 아파트도 구석에 먼지와 세탁물이 잔뜩 쌓여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해리는 제이드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퀴퀴한 홀아비 냄새가 난다며 코를 비틀었다.

“어두우니까 조심하십시오.”

건물 안으로 먼저 들어간 굴드가 제이드가 들어올 때까지 문을 잡고 서 있었다. 복도는 19세기 건축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고풍스러운 벽지와 벽을 비추는 촛불 때문에 더 어두침침한 느낌이 났다.

굴드는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공기가 바깥보다 찼다. 입주자들이 단체로 잠이 들기라도 했는지 실내에선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고 깊은 지하실 통로가 불길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제이드는 굴드를 따라 캄캄한 계단을 내려가면서 속이 메스꺼운 현기증을 느꼈다. 단편적이고 불쾌한 영상이 동굴 속을 날아다니는 박쥐처럼 눈앞을 어지럽혔다.

끝도 없이 이어진 나선형의 계단. 기괴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붉은 문자들. 그리고….

“불을 켜는 게 낫겠군요.”

제이드가 휘청, 고꾸라질 뻔한 찰나였다.

굴드가 그의 팔을 강하게 움켜잡으며 조명 스위치를 눌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간접조명이 은은하게 사위를 밝혔다. 그 순간 최면이 풀린 것처럼 제이드의 눈동자에도 초점이 돌아왔다.

퉁, 퉁, 툭-.

어라?

갈색 종이봉투에서 흘러넘친 녹색 치즈 가루 통이 저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제이드는 카펫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 멈추는 녹색 통을 바라보며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괜찮습니까?”

염려하는 굴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제이드는 그제야 자신이 하마터면 저 파마산 치즈 가루 통처럼 계단 아래로 추락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십 년 감수했네.”

왠지 모르게 머리 안쪽이 허전했다. 흡사 수업 시간에 깜빡 졸다 일어난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시간상으로 공백이 느껴질 이유가 없는데 앞뒤 기억이 홀연히 휘발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저 놀라서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불 좀 진작 켜지 그랬어요. 장난 아니게 어두웠단 말입니다.”

계단을 내려가며 툴툴 불만을 토로했다. 발을 헛디딜 뻔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나마 바닥으로 떨어진 게 계란같이 깨지는 물건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아, 습관이라.”

굴드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계단을 내려갈 때 불을 켜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누굴 데려온 게 처음이라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 화가 나지 않았기도 했지만 제이드는 금세 마음이 누그러졌다. 굴드의 집에 발을 들인 타인이 그가 처음이란 말 때문이었다.

“구조가 특이하네요. 깊이도 상당하고.”

제이드는 난간을 붙잡고 내려가며 커다란 지하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평범한 건물 아래에 이렇게 큰 빈터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난간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광경이 아찔하리만치 멀었다.

지하에 마련된 실내의 높이가 족히 건물 3층은 되어 보였다. 공간이 워낙 깊고 넓어서 그런지 공연장처럼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철골 계단에서 나는 퉁탕거리는 소음도 무척 크게 들렸다. 음산한 냉기가 실내에 가득 고여 있었다. 인테리어를 제외하고 본다면 지하 공간은 언뜻 폐쇄된 납골당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건물을 구입하면서 전체적으로 손을 봤습니다.”

계단 끝에 다다른 굴드가 바닥에 떨어진 플라스틱 통을 집어 들며 말했다. 굴드보다 한발 늦게 계단에서 내려온 제이드는 눈을 큼지막하게 벌렸다. 지하만 렌트한 것도 아니고 건물을 구입했다는 담담한 대답 때문이었다.

‘아냐, 뭐 그럴 수도 있지.’

처음 봤을 때부터 굴드는 부유한 삶을 산 사람의 분위기를 풍겼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격식 있고 품위 있는 행동들은 한두 해 익힌다고 배어 나오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업타운에 우뚝 솟아 있는 고급 아파트들은 한 채에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매매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9번가의 건물 하나쯤은 통째로 살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굴드가 어째서 업타운이 아닌 9번가에 거처를 마련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건물 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고 해서 새삼스레 놀랄 건 없었다.

“혹시 지하층만 남기고 건물 전체를 비워 둔 건가요?”

문득 컴컴하게 불이 꺼져 있던 창문들이 제이드의 뇌리에 떠올랐다. 심증일 뿐이지만 굴드가 이 건물을 혼자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쩍 들었다. 자신 같은 소시민이야 건물을 놀리는 게 아깝다고 느끼지만 굴드는 그런 부분에 연연하지 않을 것 같았다.

“네. 아무도 없는 쪽이 편합니다.”

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이드에게 캔 맥주를 건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사양하지 않고 마개를 땄다. 알루미늄 캔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표면은 미지근했지만 내용물은 아직 시원했다.

왜 하필 지하에서 지내는 걸까. 취향 한번 독특하네.

맥주를 쭉 들이켜며 눈동자를 굴렸다. 높은 천장과 그림으로 장식된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굴드가 건물 소유주이니만큼 전망 좋은 다른 집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볕도 들지 않는 음침한 지하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뭐,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지만 말이다.

갈색 봉투를 내려놓은 굴드가 뭔가를 찾는 듯 찬장을 열었다. 그가 꺼낸 것은 세로로 큼지막한 유리그릇이었다. 제이드는 남자가 저걸로 뭘 하려는 건가 싶어서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굴드는 유리그릇에 물을 채웠다. 그러고는 제이드에게 받은 - 사실은 그가 강탈하듯 가져간 거지만 - 안개꽃의 포장지를 풀었다. 남자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달은 제이드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도 민망해서 무슨 보관씩이나 하냐고, 그냥 버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겸연쩍은 감정을 감추려고 말없이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지만 그의 시선은 포장지를 푸는 손끝에 닿아 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도 목이 탔다. 손가락에서 눈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움직임이 관능적이었다.

“내일 꽃병을 사서 제대로 장식해 두겠습니다.”

굴드가 안개꽃이 둥그스름하게 핀 유리그릇을 장식장으로 가져가며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는 괜찮다는 뜻으로 붕붕 고개를 저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다정하게 안개꽃을 바라보는 굴드의 눈빛이 그를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다.

부엌에 발을 들인 제이드는 갈색 봉투에서 부스럭부스럭 식료품을 꺼냈다. 굴드도 그의 옆으로 다가와 찬장과 냉장고를 열며 물건들을 수납했다.

한동안 장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냉장고 문 밖으로 허옇게 흘러나오는 냉기에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건조함이 묻어 나왔다.

너저분할 거라는 굴드의 겸양과 달리 실내는 깔끔하고 청결하기만 했다. 침대 밑에 굴러다니는 양말 따윈 보이지도 않아서 제이드는 잠시 배신감을 느꼈다.

벽에 걸린 고가의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책장과 사다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디즈니 영화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개인 도서관 같았다.

실내 인테리어도 잡지에 나오는 집처럼 모던하고 세련됐다. 다만 여기가 정말 사람이 사는 공간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위화감 가득한 모델 하우스가 떠올랐다. 전문가들에 의해 디스플레이된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삭막한 느낌이었다.

물기 한 방울 없는 싱크대, 사용감이 느껴지지 않는 새것 같은 주방 기구들, 개봉되지도 않은 세제. 침대도 인위적인 느낌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식기 전에 먹죠.”

아직 정리가 덜 끝났는데 굴드가 피자 상자를 가지고 소파로 향했다. 굴드의 지하 아파트는 탁 트인 형태라 거실과 주방을 분리하는 벽이 없었다.

밥을 먹는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이드는 찬장을 채우던 손을 멈추고서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이어서 그는 피클과 타바스코 핫 소스, 그리고 냉장실에 넣어 두었던 콜라 캔을 챙겼다.

“잘 먹겠습니다.”

가죽이 독특한 소파에 앉아 손바닥을 비볐다. 자잘한 무늬가 악어가죽을 벗겨 만든 소파 같았다. 굴드가 상자를 개봉하자 기름기가 자글자글한 페퍼로니 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릇한 치즈가 살짝 굳어 있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식욕이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요.”

허겁지겁 피자를 입 안에 욱여넣는 제이드를 위해 굴드가 콜라의 마개를 따 주었다.

“아, 고마워요.”

우물우물 피자를 씹으며 제이드가 빨간 콜라 캔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기름기가 흥건했다. 톡 쏘는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시자 하마터면 트림이 나올 뻔했다.

그는 꺽 소리를 내는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서 흘끗 굴드를 바라봤다. 굴드는 복스럽게 먹어서 보기 좋다는 듯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에 제이드는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해졌다. 한편으론 자신이 너무 게걸스럽게 먹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굴드를 의식한 제이드는 최대한 천천히 먹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습관이란 어딜 가질 않아서 그는 곧 연병장에서 몇 시간이고 구른 훈련병처럼 피자에 달려들었다.

“책이 많네요.”

피자 박스에 기름으로 투명해진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굴드는 커피를 끓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제이드는 탁자를 정리했다. 종이 상자 위에 캔 콜라를 쌓은 그는 어마어마한 책장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예전에 살던 집엔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이사를 오면서 적당히 추려 냈죠.”

굴드가 커피를 내리며 대꾸했다. 장서를 모두 가져오지 못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굴드는 원래 이 지역 사람이 아니었다. 제이드는 불쑥 그가 어느 주에서 살다 왔는지 궁금해졌다. 남자의 집에는 가족사진이나 초상화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나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도 없었다.

“전에는 어디 있었는데요?”

제이드는 종이 상자와 캔 콜라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물었다. 연고지를 묻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입을 뗀 직후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동안 본가를 비웠습니다. 웨인 시티로 오기 전에는 일 년 정도 여행을 다녔죠.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건네며 굴드가 대답했다. 모호한 답변이었지만 제이드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굴드는 그런 제이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근데 저 책들, 다 읽긴 한 거예요?”

아까부터 관심을 끌었던 책장으로 다가갔다.

일리아스, 호메로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전집,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를 비롯한 비극 전집, 플라톤의 국가,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톤, 법률, 티마이오스, 시학, 니코마스 윤리학,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생-클로드에 관한 논고, 봉인장과 국립 감옥에 대하여.

대부분 박물관에 보관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된 책들이었다. 책장을 펼치면 종이가 퍼석, 소리를 내며 부서질지도 몰랐다.

“물론입니다. 읽지도 않은 책을 갖다 놨을 리 없잖습니까.”

“에이, 저 책들 전부를?”

제이드가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굴드를 훑어보았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서적들은 족히 몇천 권은 넘어 보였다. 나이 지긋하고 열성적인 독서가라 하더라도 저 분량을 다 소화하긴 힘들 것이 분명했다.

“미심쩍다면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확인을 무슨 수로 해요. 난 저 책들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제이드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로서는 굴드를 시험할 방법이 없었다.

뒤를 돌며 새카만 커피를 호로록 들이마셨다. 향이 그윽한 건 마음에 들지만 그의 입에는 커피가 너무 썼다. 설탕을 한 스푼 넣으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아무 책이나 꺼내서 읽어 봐요. 그럼 내가 다음 문장을 맞춰 보겠습니다.”

굴드가 제이드의 손에서 컵을 가져갔다.

“시럽을 넣어 드리려는 겁니다.”

제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정말 아무 책이나? 내가 내키는 대로 골라도 상관없습니까?”

말도 안 돼. 제이드는 굴드를 따라 부엌으로 가는 대신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의구심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 다음 문장을 맞춰 보겠다는 건 여기 있는 책들을 다 외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다 읽었다는 말보다 비현실적이고 충격적이었다.

“물론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굴드가 으쓱 어깨를 추어올렸다. 재차 확언을 들은 제이드는 진지한 얼굴로 천장까지 닿아 있는 책장을 올려다봤다. 등 뒤에선 커피에 시럽을 탄 굴드가 찬장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걸 고르지? 가장 안 읽었을 만한 게… 맨 위? 아니면 오른쪽 구석에 있는 저거? 젠장, 모르겠어. 혹시 읽었으면 어쩌지.

제이드는 책을 두고 갈팡질팡했다. 굴드는 초조해하는 제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누가 본다면 테스트를 받는 쪽은 제이드라고 착각할 만한 광경이었다.

그는 잭과 콩나무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을 느끼며 사다리를 딛고 올라갔다. 군에서 제 발로 나온 이후로 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오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제이드는 더듬더듬 책을 꺼냈다 빼기를 반복했다. 자신이 곡예라도 부리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고르다 흘끗 발치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탁자에 커피 잔과 연유를 내려놓는 굴드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기분이 색달랐다.

고심 끝에 책 한 권을 꺼냈다. 사다리를 내려가며 코를 킁킁거렸다. 가죽으로 장정된 고서에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그냥 맞추는 건 재미없으니까 내기를 하는 건 어때요?”

장난기가 발동한 제이드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소한 사건이라도 내기가 걸리면 스릴이 생기는 법이었다.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표지를 가렸다.

“나쁘지 않죠. 뭘 거실 건지는 생각해 두셨습니까.”

굴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늘게 뜬 그의 눈동자 위로 음험한 기운이 도사렸지만 제이드는 알아채지 못했다.

“음. 저녁 내기? 아니면 술?”

“그건 나중에 정하도록 하죠.”

하긴 벌칙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책을 펼쳤다. 휙휙 책장을 넘긴 끝에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나는 그 성하의 루비같이 붉은 생… 식기가 정식 길을 택했음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그는 그 길 입구의 자줏빛 입술을 양손의 엄, 지와 거, 검지로 조심스럽게 열, 흠, 고 들어갔던 거지요. 이 작업은 세 번의 힘찬 찌… 르기로 시작했는데, 그 결과 그의 물, 건은 절반이나 들어갔답니다. 큼.”

뭐, 뭐야 이건!

소리 내어 책을 읽던 제이드가 속으로 움찔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금박을 입힌 표지가 그럴듯해서 철학 서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낯 뜨거운 삽화가 떡하니 눈에 들어왔다. 엉덩이를 깐 여자와 그녀와 교접하려는 신부가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구멍이 작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집어넣으려다가 T. 신부의 명령을 생각하고는 곧 그만두었습니다. 내 손가락으로 구멍의 가장자리를 아래에서 위로 더듬다가 작은 돌기를 마주쳤을 때, 내 몸은 떨렸습니다. 나는 그것을 더듬었고 더 세게 문지르자 곧 쾌감의 절정을 맛보았습니다.”

황급히 페이지를 넘기는데 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에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막힘없이 문장을 암송했다. 귓가에 휘감기는 음성이 감미로웠다. 그러나 경건한 저음과 내용이 지독한 부조화를 이루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실 저 정도 묘사야 음란한 축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은밀한 상상을 부추기는 숨결과 목소리 때문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제이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퇴로를 막고 있는 서가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속았어요. 이거 와, 완전 에로소설이잖습니까.”

책을 방패처럼 껴안으며 굴드의 시선을 피했다. 얼굴 위로 사다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때는 불온서적으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만, 가혹한 평가군요.”

표지에 박힌 제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제이드가 끌어안고 있는 책은 다르장스 후작의 작품으로 알려진 <계몽사상가 테레즈>였다. 저속하지만 혁명기 계몽사상과 자유사상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이끌어 낸, 당시 베스트셀러 소설 중 하나였다.

“다, 다른 책으로 바꿉시다.”

긴장이 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눈에 들어온 책은 <샤르트뢰 수도원 문지기 동 부르그의 이야기>였다. 급하게 페이지를 펼치자 눈이 휘둥그레질 판화가 나타났다. 3P다. 그것도 남색을 주제로 한 외설적인 그림이었다. 여인과 교접하는 수도사 사튀르냉, 그리고 사튀르냉의 몸 위에 늙은 수도원 신부가 올라타 항문을 탐하는 광경이 한 페이지 가득 담겨 있었다.

‘으악.’

제이드는 바로 책장을 덮었다. 굴드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얄팍한 책 한 권으로는 아무런 방어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닿은 것도 아닌데 오금이 저릿저릿했다.

“딴청 피워도 소용없습니다.”

굴드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제이드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서가를 등진 제이드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손에 쥐고 있던 낡은 고서는 저 멀리 내던졌다. 제이드를 체중으로 짓누른 굴드는 거친 입맞춤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굴드의 혀가 거침없이 제이드의 입 안을 헤집었다. 타액이 마찰하는 젖은 소리가 노골적이었다.

숨이 가빠졌다. 제이드는 시계를 찬 손을 가늘게 떨다가 덥석 굴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매달리듯 굴드의 몸에 체중을 실었다. 굴드가 방향을 틀며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등 뒤에서 쿵쿵, 하고 책장이 들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굴드의 탄탄한 등을 더듬으며 키스에 호응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렇지만 풀어헤쳐진 이성을 통제할 정신이 없었다. 제이드는 숨을 헐떡거리며 자극적인 감각을 한껏 받아들였다.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사타구니가 묵직해졌다.

“헉!”

제이드의 몸이 번쩍 들렸다.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건 굴드의 팔이었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제이드의 사타구니를 뒤덮고 있는 청바지가 불룩했다.

굴드가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내던진 책을 성큼 지나쳤다. 왼쪽 팔로는 제이드의 체중을 지탱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결이 고운 머리카락과 상앗빛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 사이에도 농염한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으….”

눈을 감은 제이드는 신음을 흘렸다. 타인에게 안긴 채로 이동하느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그는 굴드의 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피부를 더듬는 손길이 섬뜩하면서도 간지러워 어깨를 움찔움찔 뒤틀었다.

굴드가 제이드를 널찍한 가죽 소파 위로 쓰러트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가죽에 흩어졌다. 제이드는 눈을 번쩍 떴다. 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차가운 손 때문에 부들부들 전율이 일었다.

‘서, 설마.’

반사적으로 굴드의 손을 저지했다. 자신이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지퍼는 어느새 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 활짝 벌어진 자리 아래로 새하얀 속옷과 오목한 아랫배가 훤히 다 드러났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굴드는 입가에 불손한 미소를 띠고서 다른 손으로 셔츠 단추를 목깃부터 하나씩 풀었다. 제이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탄 남자가 눈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는다는 행위가 지독하게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저기… 굴드. 난 아직 이럴 마음의 준비가. 히익!”

커다란 손이 속옷 안으로 무례하게 파고들었다. 헤헤, 비굴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던 제이드는 속절없이 당황했다. 제이드가 어깨를 옹송그린 사이, 굴드는 낡은 청바지와 속옷을 단숨에 발목까지 끄집어 내렸다.

“으악, 잠깐만! 하윽.”

제이드의 매끈한 다리가 공기 중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혼비백산한 제이드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는 소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음을 터트렸다. 그의 팔을 짓누른 굴드가 발갛게 달아오른 성기를 입에 머금은 것이다.

츄릅, 하는 음탕한 소리가 허공을 적셨다.

“그, 그만… 큿!”

제이드는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서 몸을 뒤틀었다. 자신을 덮친 남자를 밀쳐 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끝을 벗어나지 못한 질긴 청바지는 다리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족쇄 역할을 했다.

축축하고 미끄덩한 혀가 성기를 애무했다. 성기를 핥고 문지르는 적나라한 움직임에 제이드는 숨이 턱 막혀 왔다. 굴드가 손톱으로 유두를 긁을 때마다 허리가 저절로 튕겨 올라갔다.

“하악, 아윽!”

그는 고가의 가죽 소파를 할퀴듯 손가락을 세웠다. 굴드의 입 안에서 굴려지는 자신의 성기가 녹진녹진하게 녹아내리는 롤리팝 같았다. 비음을 흘리기 바쁜 제이드는 굴드가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을 음탕하게 주무른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말간 애액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제이드는 귀두에 맺혔던 액체가 회음부를 타고 흐르는 감각에 진저리를 쳤다. 깊은 골을 이루는 엉덩이 안쪽 은밀한 부위가 빠끔빠끔 젖어들고 있었다.

“아흑!”

굴드가 제이드의 유두를 비틀었다. 제이드는 손등을 깨물었다.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이 목덜미와 등을 할퀴었다. 사정감이 밀려와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멈춰요… 헉. 쌀 것 같단…!”

정말 위험했다. 제이드는 필사적으로 굴드의 어깨를 떼밀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찔끔 비어져 나올 뻔했다.

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뿌리부터 귀두까지 강하게 성기를 빨아올렸다. 강렬한 자극에 소름이 끼쳤다. 강압적으로 절정을 맞이한 제이드는 그만 굴드의 입 안에 뜨끈하고 비린 액체를 쏟아 내고 말았다.

“이런 맛이군요.”

굴드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훔치며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광경이 퇴폐적이었다.

굴드는 기척 없이 웃으며 제이드의 무릎을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제이드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싸늘한 정염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개구리를 삼키기 직전인 사특한 뱀 같은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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