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7)

현란한 미러볼 조명이 어둠을 밝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바닥이 쿵쾅쿵쾅 진동했다. 시끄러운 전자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스툴에 앉은 제이드는 미지근한 맥주병을 손에 쥐고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제이드와 함께 클럽을 찾은 벤이 옆구리를 찔렀다. 두툼한 팔뚝을 가진 흑인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은 바 건너편이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제이드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인 그녀는 가슴을 한껏 강조하며 제이드가 말을 걸기만을 기다렸다.

“어서 다가가지 않고 뭐해. 완전 섹시한데.”

두꺼운 갈색 입술을 가진 벤이 제이드의 등을 떼밀었다. 하도 눈을 부릅떠서 흰자만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흑인 남자는 빨간 원피스 때문에 목이 타는지 연방 냉수를 들이켰다.

“…잘 모르겠어.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아.”

제이드는 의자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흘끗 빨간 원피스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확실히 몸매는 끝내줬지만 얼굴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 도대체 어떤 여자를 원하는 거야? 저 정도면 슈퍼모델급이라고.”

벤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으며 민둥민둥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자 쪽에서 먼저 걸어온 작업을 제이드가 그냥 흘려보낸 건 오늘만 벌써 여섯 번째였다.

“슈퍼모델급이라….”

제이드는 맥주병을 빙글빙글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팔순 노인도 벌떡 일어날 만큼 죽여주잖아.”

벤은 저렇게 예쁜 여자를 왜 마다하냐며 펄펄 날뛰었지만 그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제이드의 눈에는 그녀가 B급 SF 영화에 출연하는 악어 인간처럼 보였다.

외계 행성 이주자처럼 보이는 건 비단 빨간 원피스의 여성뿐만이 아니었다. 실내에 있는 다른 모든 여자들도 인형 탈을 뒤집어쓰거나 특수 분장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이, 도대체 뭐가 문제야.”

벤이 한숨을 내쉬며 땅콩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는 울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제이드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퇴짜를 맞은 건 여자들이지 저 동양인 청년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제이드가 상심해 있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클럽에 가자고 먼저 연락한 건 제이드였다. 여자를 만나야 한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제이드는 클럽에 발을 들인 이후로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기만 할 뿐, 의욕이나 의지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내가 저 여자랑 잘해 봐도 돼?”

빨간 원피스에 미련이 많은지 벤이 속닥속닥 귀엣말을 건넸다. 제이드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히도 그는 여기 있는 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생기질 않았다.

왜 이러는 걸까.

벤이 떠나고 홀로 남은 제이드는 테이블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자신도 뭐가 문제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자꾸 굴드 생각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이드는 결국 오늘도 술만 홀짝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행했던 벤은 아까 빨간 원피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서 클럽을 나섰다. 미녀와 뜨거운 밤을 보낼 생각에 즐거운지 건장한 흑인 남자의 얼굴엔 득의에 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홀로 집으로 귀가한 제이드는 헛헛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TV를 켰다. 이틀이나 허탕을 치고 나니 클럽에 가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여자와 데이트를 해서 굴드의 키스를 잊어버릴 심산이었는데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TV를 켜 놓은 채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시름에 잠긴 제이드의 얼굴을 비추었다.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은 삼류 에로 영화였다.

‘아으응, 아응!’

달뜬 교성이 제이드의 무의식을 자극했다. 껌껌하기만 하던 제이드의 꿈속에 야한 옷차림을 한 유디트가 불쑥 나타났다. 제이드는 이 상황이 꿈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디트가 예전부터 좋아했다는 말을 속삭이며 제이드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꿈속에 등장한 유디트는 제이드가 깜짝 놀랄 만큼 적극적이었다. 무대에서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던 모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극본의 유디트는 아름답지만 정숙한 여인이었다.

그렇다고 요염하게 그를 유혹하는 유디트가 싫은 건 아니었다. 얼떨떨하긴 했지만 제이드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머뭇머뭇 손을 뻗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살결을 더듬으려니 무릎이 후들거렸다. 그는 열여섯 살 소년, 유디트는 성숙한 옆집 과부 같았다.

‘당신을 원해요, 제이드.’

유디트가 굵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꿈이라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다.

비록 꿈이었지만 유디트와의 정사는 아찔하리만치 생생했다.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제이드는 입이 째지도록 웃었다. 역시 유디트가 가장 아름다웠다. 제이드는 행복한 표정을 하고서 조금은 빈약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원래 그의 취향은 가슴 큰 여자였지만, 유디트라면 가슴 크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황홀했던 꿈이 한순간 악몽으로 변했다. 꿈의 장르가 달라진 건 자신 옆에 누운 유디트를 등 뒤에서 꼭 끌어안았을 때였다.

제이드의 손길에 눈을 뜬 그녀가 천천히 몸의 방향을 틀었다.

“으아아악!”

제이드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침대를 나눠 쓰고 있던 이는 늘씬한 유디트가 아니라 자신보다 탄탄한 몸을 가진 굴드였다.

“허억, 허억.”

TV 화면에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제이드가 숨을 헐떡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유디트가 꿈에 나온 것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굴드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자 심장이 쿵쾅쿵쾅 제멋대로 날뛰었다. 흡사 공포 영화의 여운에 시달리기라도 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아무리 꿈이었다고는 하지만 기분 좋다고 느꼈던 피부가 남자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를 충격에 빠트렸다. 가장 무서운 건 아까 클럽에서 보았던 여자들보다 굴드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굴드와 키스를 하질 않나, 그의 꿈을 꾸질 않나. 열아홉 번이나 차인 후유증으로 점점 미쳐 가고 있는 걸까.

진정해. 고작 꿈일 뿐이라고.

제이드는 턱에 고인 식은땀을 훔치며 호흡을 정돈했다. 창문이라도 열어 두었는지 발끝이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없었다. 유디트와 굴드는 별개의 인물도 아니었다. 굴드가 분장한 여자가 바로 유디트였으니까.

목이 탔다. 제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부엌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에선 TV 화면의 불빛만이 어둠을 밝혀 주고 있었다.

때르릉, 때르릉

수돗물로 목을 축이는데 캄캄한 어둠 너머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벨 소리를 들은 제이드가 흠칫 어깨를 튕겼다.

한밤중에 전화가 울리다니, 예감이 좋질 않았다. 제이드는 긴장된 표정으로 천천히 전화기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머뭇머뭇 허공에서 움직였다.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저 전화를 받고 나면 잠을 이루지 못하리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때르릉, 때르릉

벨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다.

해리일 거야.

제이드는 지치지 않고 울리는 벨 소리를 들으며 꿀꺽 침을 삼켰다. 굴드가 전화를 걸 리 없었다. 어제도, 오늘 낮에도 그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물론 굴드와 마주하기 껄끄러운 제이드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굴드가 전화를 건 게 맞다 하더라도 이쪽에서 피할 이유는 없었다. 키스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긴 했지만, 그건 우발적인 사고였다. 서로 없었던 일로 치고 넘어가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괜히 전화를 피하거나 시간을 질질 끌면 상황을 더 거북하게만 만들 따름이었다.

문제는 자신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점이지만….

“여보세요.”

그는 결국 고민 끝에 당당하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는데 꼭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힘차게 전화를 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제발 해리의 시답지 않은 수다가 수화기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 제이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조금 전 그가 꾸었던 요상한 꿈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당신을 원해요, 제이드’라고 속삭였던 유디트의 음성에 굴드의 것이 덧씌워졌다.

“…….”

히익!

당황한 제이드는 전화기를 내동댕이치다시피 했다. 머릿속이 쿵쾅쿵쾅 울렸다. 역시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제이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주먹을 물어뜯었다.

때르릉, 때르릉!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또 전화기가 울렸다.

제이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눈을 하고서 귀를 틀어막았다. 오밤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때르릉-.

밤새도록 이어질 것 같던 전화벨 소리가 뚝 멈췄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광고가 흐르는 TV 소리만이 정적을 흩뜨려 놓았다.

안도감이 먼저 찾아왔다. 하지만 그 뒤를 쫓듯 불안이 엄습했다.

제이드는 초조한 기분을 느끼며 전화기 옆을 서성였다.

벨이 다시 울리길 기대하는 마음과 울리지 말았으면 하는 상반된 바람이 소용돌이처럼 갈마들었다. 굴드가 갑자기 전화를 멈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런 상황에선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다이얼을 돌리는 게 보통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굴드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제이드는 전화기 곁을 떠나지 못한 채 현관문을 바라봤다. 혹시나 굴드가 저번처럼 무턱대고 집 앞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어깨를 짓눌렀다. 아무래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려서 굴드의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아무리 당황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굴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곧이어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굴드의 모습도 뇌리에 떠올랐다.

전화를 해 볼까….

제이드는 수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좀 전의 일은 본의가 아니었다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굴드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의 듣기 좋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휘감기면 애써 잊고 있던 악몽이 또 떠오를 것 같았다.

미치겠네.

악몽이라고 표현하니까 괜히 굴드에게 미안했다. 굴드가 꿈속에서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모든 문제는 제이드 본인에게 있었다. 상반신을 탈의한 굴드를 자꾸 떠올리는 자신에게 기겁했다. 민망함은 둘째치고 꼭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TV에서 오래된 흑백영화가 흘러나왔다. 고전 중의 고전인 드라큘라였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악이 스피커를 둥둥 울렸다. 흉측한 분장을 한 드라큘라가 순결한 처녀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이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모포를 가슴까지 덮은 채로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제이드의 모든 신경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전화기와 현관문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밤새도록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어둑한 현관문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도, 벨을 누르는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제이드는 자신이 진정 뭘 기다리고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 새벽이 가까워졌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제이드는 멍하니 회색빛을 뿌리는 TV만 바라보았다.

까마귀 한 마리가 창틀에 앉았다. 붉은 눈을 가진 검은 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문 너머의 광경을 주시했다. 처녀의 침실을 들여다보던 드라큘라 백작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성에가 낀 것도 아닌데 유리창이 불투명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까마귀는 답답하다는 듯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소파에 드러누운 제이드가 뒤척뒤척 몸을 움직였다. 생각이 복잡한 제이드는 자신을 관찰하는 붉은 시선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동이 틀 시간이 다가왔다. 어스름이 조금씩 밀려나자 제이드를 감시하던 검은 새가 퍼드덕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까마귀는 파르스름하게 밝아져 오는 새벽하늘을 피해 빠른 속도로 도시 위를 가로질렀다. 가로등마저 꺼진 동부의 대도시는 절벽에 세워진 거대한 카타콤을 연상시켰다.

***

뚜르르-, 뚜르르.

어둑한 실내에 무덤 같은 냉기가 흘렀다. 외출 준비를 마친 남자는 전화기 앞에 서 있었다. 단조로운 신호음이 수화기를 타고 귓가로 흘러들었다. 수신인이 오늘도 전화를 받지 않는데도 굴드의 입가엔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사위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의 집에는 스탠드조차 켜져 있지 않았다. 남자는 조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양초와 횃불로 어두컴컴한 성의 복도를 비추던 시절부터.

전화기를 앞에 두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제이드의 모습이 그려졌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 광경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사소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뚜르르, 뚜르르.

남자는 어둠 속에서 수화기를 들고만 있을 뿐,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진 않았다. 그는 제이드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제이드가 헉, 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무성의하게 수화기를 잡고 있는 굴드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숨을 삼키는 기척,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버둥거림. 제이드의 반응은 놀라우리만치 그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제이드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전화를 끊었던 최초의 순간, 굴드는 그를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전화를 끊어 버리는 무례한 행동을 자신이 기분 좋게 느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불쾌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참을 수 없이 유쾌했다.

그의 성배가 이다지도 엉뚱하고 독특한 면모가 있는 생명체일 줄은 몰랐다. 궁지에 몰린 쥐며느리가 발라당 드러눕는 것 같은 의외성이었다. 쿡 찌르면 다음번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자지러질 듯 깜짝 놀란다면 깊게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제이드가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울먹거리는 모습을 뇌리에 그려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자존심을 내세우며 입술을 앙다문 표정을 상상했다. 달래 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폭격으로 붕괴되던 자신의 유배지에서 제이드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피로 젖은 밀실에서 그는 성배에게 유예를 주기로 결정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흥미를 자극하는 존재를 발견한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무채색으로 점철된 장송 행렬에서 어릿광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가 ‘아벤 굴드’라는 인간인 척하며 제이드에게 접근하는 즐거움도 상당했다.

남자는 가능한 조심스럽게 제이드의 삶에 스며들 생각이었다. 제이드가 표현하는 다채로운 감정을 천천히, 그리고 하나씩 손에 넣는 희열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이 감정은 가녀린 목을 서서히 조르는 기분과 흡사할 것이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긴박한 맥박, 기묘한 흥분. 더 이상 감상할 것도, 즐길 것도 없어지면 제이드는 그의 품 안에서 차갑게 늘어질 터였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음침한 적막이 차분하게 바닥을 적셨다. 버석버석한 메마른 소리가 굴드의 귓가에 들려왔다. 남자는 언제 입가에 미소를 띠었냐는 듯 무미건조한 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허가 들이닥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저리 쳐질 정도로 긴 세월을 살아온 남자는 인간이었던 시절에 느끼던 감각과 감정을 잃어버렸다.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면 흙을 씹는 것 같았다. 인간들의 미추도 구분할 수 없었다. 손끝에 따스한 피부가 닿아도 정욕이 일지 않았다.

죽음은 그를 비켜 갔다. 썩지 않는 케케묵은 송장에겐 볼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굴드는 어둡고 황폐한 성의 주인이었다. 그를 스쳐 가는 모든 생명은 곧 바스러질 해골에 지나지 않았다.

긴 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들은 자신이 백골인지도 모른 채 웃고 떠들었다. 삭아 없어지기 직전인 페티코트, 포크를 쥔 앙상한 손가락뼈, 검은 눈구멍을 놀이터 삼아 기어 다니는 작은 거미들. 천장에서 기우뚱 늘어진 샹들리에에는 거미줄이 면사포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기쁨,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갈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퇴락한 잿더미. 타나토스가 내민 반쪽짜리 진리의 잔을 붙잡은 대가였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불모지를 떠도는 긴 순례 끝에 그는 성배를 만났다.

묵직한 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공연장에 마련된 연습실로 향했다. 불길하리만치 커다란 달이 빌딩 위에 걸쳐져 있었다. 남자는 해가 지기 전까진 외출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는 태양이 하늘을 지배하는 시간을 혐오했다.

그는 불 켜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다른 배우들과 함께 공연을 연습하는 공간에는 거울이 없었다. 극단의 재정적 후원자인 굴드가 거울을 치워 버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브람스 스토커의 고전에도 일말의 진실은 담겨 있었다. 마늘과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는 허구의 산물이지만, 심장이 뛰지 않는 자들이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는 기술은 사실이었다.

남자는 접이식 철제 의자에 앉아 배우들의 연습 광경을 지켜보았다. 밤이 깊었지만 공연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다들 철야를 고수했다.

굴드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사실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덤불 속에 꼭꼭 숨었다고 믿는 작은 여우를 어떻게 다룰지가 고민이었다. 억지로 끄집어내는 건 간단하지만 시시했다. 놀라게 만들어서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덤불 그림자 아래에서 덜덜 떨고 있는 생명체가 자의로 자신의 품 안에 뛰어들길 원했다.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시간의 흐름은 남자에게 있어서 양초가 타올랐다 꺼져 버리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

찌뿌듯한 날씨가 지긋지긋했다. 온 도시가 칙칙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웨인 시티의 기후가 우중충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요즘 들어 한층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제이드는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오랜만에 DIY 제작 보조와 나무를 재단해 주는 일이 있었다. 가구 제작에 도전하는 이십 대 후반의 여성에게 수수료를 받고 못질과 사포질 코칭을 해줬다. 업무를 끝낸 그는 지금 소피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돌덩이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며칠째 가능한 집에 붙어 있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돌았다. 홀로 집에 있는데 전화가 울리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허리에 팔을 휘감은 연인이 그의 곁을 지나갔다. 다정한 모습에 질투가 났다. 괜히 발이라도 걸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신도 빨리 사귀는 사람을 만들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결혼 자금은 둘째치고 만나는 여자마다 그에게 퇴짜를 놓았다. 지금 상황으로선 결혼은 제이드에게 너무나도 요원한 일이었다.

주머니 속에는 아까 가구를 만들어 준 여자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현관문 앞에 나타난 제이드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힌 그녀는 허둥지둥 머리를 묶고 립글로즈를 발랐다. 여성 고객은 목재를 톱질하느라 근육이 잔물결을 이루는 제이드의 팔뚝에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꼭 연락 주세요.”

고객은 애교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살포시 웃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녀에게 연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호감을 보이는 여자에게 홀딱 넘어갔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펜으로 엉성하게 이목구비를 그려 넣은 허수아비처럼 느껴졌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인들의 옷 색깔이 무채색의 물결을 이루었다. 사람들 어깨 사이로 벽에 나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이 제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제이드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연극 파우스트. 출연 배우 목록에는 아벤 굴드라는 이름이 떡하니 인쇄되어 있었다.

주위의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제이드는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포스터로 다가갔다. 기분이 묘했다. 사진 한 장 없이 이름만 적혀 있을 뿐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굴드가 연극배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체감할 기회는 없었다. 하필이면 그가 유디트로 분장한 채로 무대에 선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극장에 갔던 날 오늘의 캐스트에 굴드의 이름이 올라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제이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연 포스터란 종이를 진지하게 훑어봤다.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공연을 하는지, 어디서 극이 올라가는지, 연출가와 출연진이 누구인지 하는 글귀만 적혀 있었다.

어제부터 공연을 시작했구나.

한참 동안 포스터 앞에 서 있던 그는 상연 날짜를 보고 나지막하게 탄성을 흘렸다. 불현듯 굴드가 자신의 집에 찾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신호가 바뀌고 등 뒤에서 택시가 빵빵, 경적을 울렸다. 어쩌면 굴드는 제이드에게 자신의 연극을 보러 와 달라는 말을 꺼내기 위해 집까지 방문한 것일지도 몰랐다.

“젠장, 왜 길을 막고 서 있어!”

발음이 불분명한 거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강렬한 악취와 술 냄새에 제이드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이가 죄 빠진 부랑자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저리 비켜!”

부랑자는 카트를 밀며 공격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행인들은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남자를 크게 우회해 지나갔다. 행여 옷깃이라도 닿을까 염려하는 얼굴들이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에 말라붙어 있는 이물질, 치렁치렁 기른 머리카락. 사람들이 부랑자를 피해 도망치듯 잰걸음을 치는 것도 당연했다.

지저분한 부랑자 덕분에 현실감을 되찾은 제이드는 어렵게 발걸음을 떼었다. 손목시계가 서둘러야 한다고 그를 재촉함에도 자꾸만 뒤로 돌아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확인하게 되었다. 사진 한 장 박혀 있지 않은 평범한 포스터였다. 그런데 왜 자꾸 미련이 남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빌딩이 빽빽한 번화가를 가로질러 고즈넉한 주택가에 도착했다. 오늘은 소피의 집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제이드는 이 동네를 찾을 때면 언제나 느긋한 걸음으로 온화한 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자신이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평범한 가정과 일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이드는 생각에 잠긴 채 발끝만 바라보며 소피의 집으로 향했다. 앞마당에서 소년들이 농구공을 튀기는 소리조차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간병인의 인도를 받아 커다란 창이 있는 거실에 발을 들였다.

백발의 소피가 눈앞에서 상냥하게 웃고 있는데도 제이드는 좀처럼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소피가 구워 준 쿠키도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앞니로 긁어 먹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건가요, 찰스.”

소피가 홍차를 내려놓으며 제이드를 빤히 바라봤다.

“아! 미안해요, 소피. 그냥 좀 머리가 복잡해서요.”

딴생각에 빠져 있던 제이드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소파에서 엉덩이를 반쯤 뗀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죄책감이 떠올라 있었다. 소피가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기 전까지 제이드는 자신이 한눈을 팔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답니다.”

미안해할 것 없다는 듯 소피가 우아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민이 있다면 털어놔 봐요, 찰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질 거예요.”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서 제이드의 손을 잡았다. 주름으로 쪼글쪼글해진 손이었지만 그녀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갓 구운 빵만큼이나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게, 별일은 아닌데.”

제이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소피의 다정한 시선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녀 앞에서라면 여섯 살 때까지 이불에 실례를 저질렀다는 최고 기밀마저 다 털어놓게 될 것만 같았다.

“조금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어요.”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면 토드 말인가요?”

소피가 누군지 알겠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 토드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 가끔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찰스의 먼 친척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다.

“아니에요. 얼마 전 알게 된 사람인데 연극배우예요.”

제이드는 완전히 헛짚은 소피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는 고매한 수녀님 앞에서 고민 상담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허드슨 부인, 제이드 씨.”

포동포동한 몸집의 간병인이 대화를 방해해서 미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소피가 약을 먹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제이드는 오른손에 둘러진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제이드 씨.”

로사가 소피를 부축하며 수더분하게 웃었다. 사십 대 후반의 간병인은 아이를 다섯이나 낳아 기른 육아의 달인이었다.

“낮잠 자기 싫어요. 어머니, 찰스 오라버니와 더 놀면 안 돼요?”

간병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소피가 투정을 부렸다. 그녀의 표정이며 행동이 꼭 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 같았지만 제이드는 놀라지 않았다. 백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노파가 어린애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100세가 될 소피는 몸은 건강했지만 치매를 앓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기나긴 인생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소피의 눈에는 24시간 함께하는 간병인인 로사가 어머니로, 제이드가 어린 시절 첫사랑으로 비쳤다. 몇십 년 전 사별한 남편이나 그녀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자식들, 그리고 손자들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다.

“허드슨 부인, 제이드 씨를 귀찮게 하면 안 돼요.”

로사가 부드럽게 소피를 타일렀다.

“귀찮긴요. 전 더 있다 가도 괜찮습니다.”

“제이드 씨, 제가 쉬고 싶어서 그런 거랍니다.”

로사가 소곤소곤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제이드는 그제야 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종일 소피 곁에서 수발을 드는 로사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병간호 쪽으로는 무지한 사람이 있어 봤자 로사에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제이드 씨, 안녕히 가세요.”

“잘 가요, 찰스 오라버니.”

제이드는 두 여인의 아쉬움 가득한 인사를 받으며 현관문을 통과했다.

푸른 잔디밭을 지나 흰색으로 페인트칠 된 담장을 빠져나가는데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피부를 휘감는 투박하고 메마른 기운이 제이드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뭐지.

시선이 느껴지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이 동네는 소박하고 한갓진 주택가였다. 흔하디흔한 청소년 불량배도 없었고 수상쩍은 인물이 발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골목 어귀에서 일반인과는 다른 투박하고 거친 시선이 느껴졌다. 제이드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괴이쩍을 수밖에 없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가로수가 심어져 있는 인도 모퉁이에서 제이드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멀끔한 보도블록 위로 누구 것인지 모를 그림자가 삐죽 비어져 나와 있었다.

“특수부대 출신이라서 그런지 역시 감이 좋군요.”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뺨을 긁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뱃살을 살포시 덮은 우중충한 빛깔의 하와이안 셔츠, 낡아 빠진 가죽 재킷, 품이 넉넉한 바지, 겨드랑이 부근에 차고 있는 권총, 그리고 목 위로 길게 늘어트린 경찰 배지. 전형적인 형사 복장을 한 남자는 로드리고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경찰?

제이드는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당혹스러웠다. 경찰이 왜 그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형사는 제이드를 만나러 오기 전에 그의 과거에 대해 꽤 조사를 했는지 그가 군인이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제이드로서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길게 시간을 빼앗진 않을 겁니다.”

흡연 욕구를 참느라 힘들었는지 형사가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졌다. 때마침 스쿨버스에서 초등학생 무리가 우르르 뛰어내렸다. 담배에 막 불을 붙이려던 남자는 아쉬운 얼굴을 하고서 종이 담뱃갑을 도로 집어넣어야 했다.

“용건부터 밝히는 게 순서 아닙니까?”

제이드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경찰이 뒤를 밟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저질렀을지도 모를 경범죄 때문에 형사가 잠복까지 했을 리는 없었다. 대뜸 군인이었다는 말부터 꺼냈다는 점도 거슬렸다.

“워워.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이렇게 불쑥 경찰이 들이닥치면 누구라도 불쾌하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인지 로드리고가 손수건으로 목을 닦았다. 넉살이 좋은 건지 뻔뻔한 건지 아직은 가늠이 가질 않았다.

“미치광이 도살업자 사건에 대해선 알고 계시겠죠?”

올망졸망한 초등학생을 의식해서인지 형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로드리고는 가능하면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압니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 겁니까.”

제이드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걸음을 옮겼다. 대형 날붙이로 사람을 토막 내고 돌아다닌다는 살인범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뉴스에서 아나운서들이 그 사건을 시끄럽게 보도해 댔지만 제이드는 연쇄살인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흥미가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지만 확실히 어린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입 밖으로 꺼낼 화제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언덕길을 내려가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 만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무뚝뚝해 보이는 마흔 줄의 웨이트리스가 바 너머로 보였다. 커피, 도넛, 핫 샌드위치, 수제 버거 등등을 파는 평범한 가게였다.

블라인드가 드리워진 창가 자리에 앉았다. 로드리고는 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를, 제이드는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커피 값은 당연히 형사인 로드리고가 경비로 지불하기로 했다.

“그린텔발트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로드리고가 말문을 뗐다. 과거사를 헤집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제이드는 침묵으로 질문에 대답했다. 화제를 빙빙 돌리지 말고 자신을 찾아온 이유나 밝히라는 눈초리를 로드리고에게 보냈다.

“얼마 전 전역한 제 친구도 잠시 그린텔발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말하길, 요새 벌어진 살인 사건과 약 일 년 전쯤 그 지역 성당에서 벌어진 전투가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하더군요.”

콧수염에 크림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형사가 커피를 마셨다.

“공통점?”

팔짱을 낀 채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 년 전 성당에서 벌어졌던 전투는 그도 참여했다. 제이드의 눈엔 장병들 사이에서 괴담으로 떠도는 사건과 연쇄살인을 연관 짓는 형사가 이상해 보였다.

“대부분의 시체가 깔끔하게 도륙됐다는 점, 사체에 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 제 관심을 끌더군요. 생존자도 몇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 생존자들도 대부분 참사에 대한 기억이 없고 말입니다.”

게임 속 배관공처럼 생긴 형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정보를 얻기 위해 시민과 마주한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용의자를 탐색하는 것 같은 날카롭고 노회한 눈빛을 하고서 제이드를 바라봤다.

“설마 내가 전쟁터에서 겪은 일을 여기서 고스란히 재현해 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로드리고의 속내를 파악한 제이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도 황당하고 어안이 벙벙해서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느닷없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게 당연했다.

“아뇨, 설마요.”

기분 나빴다면 죄송하다는 듯 형사가 손을 내저었다. 용의자로 몰고 갈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표정이었다. 후덕한 슈퍼 마리오처럼 생긴 주제에 로드리고는 보기보다 영악하고 교활한 성격인 듯했다.

“유사성을 좇다 보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조금 조사를 해 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수사팀에서도 제 추론에 대해선 큰 무게를 두지 않고 있고요.”

오늘은 일보 후퇴를 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는지 로드리고가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사소한 정보라도 좋으니 그린텔발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언론이고 상부고 성과를 내놓으라고 하도 쪼아 대니 정말 죽겠습니다, 하하.”

형사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혼자 테이블에 남은 제이드는 언짢은 표정을 하고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로드리고의 뒷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형사는 신경 쓸 것 없다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지만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군대에 몸담고 있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제이드는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이었다. 난데없이 경찰의 방문을 받고, 과거의 행적과 살인 사건에 대한 질문까지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다시는 마주치지 맙시다.

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명함은 혹시 몰라서 챙겨 두었다. 뚱한 표정의 웨이트리스는 계산대에 등을 기대고서 TV만 바라보았다. 웨이트리스가 한동안 청소를 등한시했는지 건너편 테이블에 접시와 읽다 만 신문이 남아 있었다.

의자 너머로 손을 뻗어 신문을 낚아챘다. 그의 일상을 휘젓고 떠난 형사 때문에 왠지 회색빛 종이를 들춰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휙휙, 페이지를 넘겼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The Mad Butcher라고 적힌 헤드라인이 보이질 않았다. 뉴스며 신문이며 하루에도 열두 번씩 지껄여 대던 단어가 눈에 띄질 않다니,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이 상황에 딱 어울렸다.

눈썹을 비틀고서 종이를 넘기던 제이드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를 발견한 건 아니었다. 공연&문화란에서 연극을 홍보하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파우스트. 아까 제이드가 지하철역 근방에서 보았던 포스터와 동일한 연극이었다.

황급히 코를 박고서 기사를 훑었다. 굴드의 이름을 발견한 제이드는 형사와 연쇄살인 사건에 관한 일들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굴드가 나오는 연극을 보라는 계시인 걸까.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제이드는 커피가 차게 식을 때까지 같은 페이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신문지에 밴 잉크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하루에 두 번이나 같은 연극의 홍보물을 보았다. 이쯤 되면 이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남이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돈으로 표를 사서 연극을 볼 생각을 하니 제이드는 괜히 거부감이 일었다.

유디트를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극장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굴드의 연기는 선뜻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제이드는 원래 연극에 흥미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굴드와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얼굴을 마주치기 미묘한 상태이기까지 했다. 굴드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필사적으로 피하는 주제에 공연을 보러 간다는 게 아무리 고민을 거듭해 봐도 모순적이었다.

쓰게 식은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했던 대로 더럽게 맛이 없었다. 하지만 돈 주고 산 걸 남기긴 싫었다. 비록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아니었지만 습관의 문제라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신문지를 챙겼다. 입 안이 텁텁해서 인상이 절로 써졌다. 가게를 나선 제이드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콜라로 입가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쾌한 기분을 씻어 내기엔 양치질이 최고였다. 하지만 커피 맛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치약이 닿으면 혀끝을 맴도는 쓴맛이 한층 더 강해질 게 분명했다.

***

제이드는 처치 곤란이 된 신문을 옆자리에 두고서 전화기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노을이 지던 창밖은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다.

로드리고라는 경찰은 소피의 집이 있는 지역에서 헤어진 이후로 다행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제이드를 감시하거나 미행하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자신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는 형사의 말을 미심쩍어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단순한 조사 차원의 탐문이었다는 로드리고의 말이 사실인 듯싶었다.

발행된 지 며칠이나 지난 신문에 손을 뻗었다 거두길 반복했다. 제이드가 심란한 얼굴로 신문을 바라보는 건 로드리고나 연쇄살인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사위가 고요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신문 대신 전화기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젯밤부터 꼬박 만 하루를 집에서 보냈는데도 전화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연극 홍보 기사가 실린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다시 전화기를 바라봤다. 울려라! 하고 주문을 외어도 전화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선이 제대로 꽂혀 있는지 살펴봤다. 수화기를 들어 신호음이 가는지도 확인했다. 하지만 전화기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연락할 생각이 없는 걸까.

제이드는 굴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풀썩 소파 위로 쓰러졌다. 전화기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기만 했다. 자신이 굴드였어도 전화를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가슴 언저리가 무거워졌다.

제이드는 여러모로 굴드의 얼굴을 보기가 불편해져 꽤 오랫동안 전화를 피했다. 굴드가 아파트 앞까지 찾아와 벨을 누르면 집에 없는 척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 상황을 초래한 건 바로 제이드 자신이었다.

아무래도 먼저 전화를 해 보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제이드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며 어렵사리 전화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하고 신호가 가는데 배 안쪽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러다 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굴드의 목소리에 놀라 전화를 끊어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간 지 한참이 지났다. 발바닥을 가만히 두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던 제이드는 서서히 맥이 풀렸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걸어 보았지만 전화가 연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받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건가.

제이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깨를 늘어트리고서 시계를 확인했다. 팔을 움직이자 손목시계가 가리고 있던 뱀 문신이 슬쩍 비어져 나왔다. 시간은 밤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굴드는 공연 때문에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든 것인지도 몰랐다.

잠을 자고 있는 중이든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든 내일 다시 연락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바심이 난 제이드는 전화기에서 눈을 떼어 내지 못했다. 이러다 영영 교류가 끊기면 어쩌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혼자 있는 게 답답해서 제이드는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청승을 떨고 있는 것보단 방정맞은 그의 친구 해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해리의 얼굴을 본지도 꽤 오래되었다. 심야 경비 일부터 인형 옷을 입고 풍선을 나눠 주는 아르바이트까지 마다하지 않고 밖으로 나도느라 한동안 다른 사람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

거리로 나온 제이드는 해리의 집으로 향하기 전에 24시간 하는 슈퍼에 들렀다. 빈손으로 방문하면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을 터였다. 그가 산 맥주는 여고생보다도 더 잘 삐치는 성격인 해리에게 바치는 일종의 입막음 조 뇌물이었다.

금요일 밤이라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길가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창녀, 패스트푸드점의 드라이브 스루를 지나치듯 차를 몰며 매춘부를 고르는 남자들, 직업여성을 감시하는 조직원 등등.

제이드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비좁은 인도를 따라 늘어선 상점에 손님들이 들락날락했다.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과 부딪칠까 봐 걷는 속도가 한 템포 느려졌다.

불현듯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드리고 형사인 걸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던 제이드의 표정이 삽시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는 마리오를 닮은 형사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를 주시하는 눈길의 기운이 형사의 것과는 달랐다. 살기가 담긴 시선에 목덜미 쪽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제이드는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주변을 경계했다. 미행이 따라붙을 땐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척 연기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를 쫓아오는 기척은 인파 때문에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남성, 키는 5.5~6 피트쯤에 다소 왜소한 체격. 훈련받은 사람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형사 말고 자신을 미행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웨인 시티의 범죄 집단은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아 했고 군 복무 시절 제이드에게 앙심을 품었을 법한 인물들이라면 저리 어설프게 미행을 할 리 없었다.

으슥한 골목 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의 뒤를 밟는 놈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장소를 잘못 골랐다. 인적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골목에는 수상쩍은 남자들이 여럿 보였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서 서로를 곁눈질을 했다. 화대를 가지고 흥정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골목에 있는 남자들은 전부 남창을 사려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족속들이었다.

쳇.

제이드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여섯 개들이 맥주를 고쳐 잡았다.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자신을 미행하던 놈을 족치기엔 주변에 이목이 너무 많았다.

끈질기게 뒤쫓던 발걸음 소리가 증발했다. 제이드가 눈썹을 비틀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늘어진 옷을 입은 십 대 소년과 사십 대 백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후자는 결벽증과 학대음란증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5.5~6피트의 키, 왜소한 체격.

제이드는 머리가 벗겨진 백인 남자를 바라보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저 자식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긴 하지만 저 작자가 그를 미행한 게 분명했다.

놈은 어설픈 미행을 집어치울 생각인지 제이드를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제이드는 남자가 총을 꺼내는 상황에 대비하고자 어깨를 긴장시켰다.

평범한 중년 남자처럼 보였지만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기 전까진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 자살 폭탄 테러범이나 암살자 중에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 것 같은 외모를 가진 자도 많았다. 목표물의 방심을 이끌어 내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제이드 앞에 멈춰 섰다. 제이드는 놈이 무기를 숨겨뒀을 만한 곳을 샅샅이 훑었다.

“…얼마지?”

놈은 주변을 의식하며 소곤소곤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여기까지 쫓아왔어. 솔직히 난 열네 살 이상은 취향이 아닌데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 혹시 추가 요금을 지불하면 스팽킹 플레이도 가능할까?”

처음에는 저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뉴 페이스인 것 같은데. 혹시 몸 팔러 나온 게 처음이야?”

스웨터를 입은 대머리 남자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또 질문을 던졌다. 새끼손가락을 지그시 깨무는 모습이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제이드는 그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미성년자가 좋다는 저 변태 성욕자 자식이 자신을 남창으로 오해한 것이다.

“뭐, 인마? 방금 뭐라고 지껄였는지 다시 한 번 말해 봐. 엉?!”

제이드는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변태 놈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뚜껑이 제대로 열렸다. 허무함, 분노, 짜증이 폭풍우처럼 밀려들었다. 저딴 변태 자식 때문에 긴장한 자신이 머저리 같았다.

“컥, 켁! 왜, 왜 이러….”

“왜 이래? 장의사랑 오순도순 면담하고 싶어서 환장했냐? 시체 안치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시켜 줘?”

변태 자식의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만화에 나오는 드래곤처럼 입에서 브레스라도 뿜을 듯한 기세였다.

“여, 여보시오, 선생. 내가 실례했, 켁.”

삐쩍 마른 대머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 얼굴의 지킬 박사를 연상시키는 제이드의 흉포한 모습에 남자는 겁을 집어먹었다. 우락부락한 체형도 아니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동안이었지만 동양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은 프로 레슬러 그 이상이었다.

퍽, 푸쉬식!

제이드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캔 맥주 팩이 바닥에 떨어졌다. 잔뜩 흥분해서 그쪽에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었다.

바닥과 충돌한 충격으로 맥주 하나가 거품 낀 액체를 뿜어냈다.

“악! 내 맥주.”

제이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알루미늄 캔에서 맥주가 분출되는 소리를 그도 들은 것이다.

마음이 다급해져 변태 놈의 멱살을 내팽개쳤다. 자유의 몸이 된 대머리 백인 남성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제이드의 신경이 바닥에 떨어진 캔 맥주 쪽으로 쏠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앗, 너! 거기 안 서!”

내용물이 줄줄 새는 맥주를 집어 올리던 제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대머리가 순순히 멈출 리 없었다. 제이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점점 멀어지는 변태 놈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젠장, 오늘따라 왜 이리 일진이 꼬이지.

대머리가 골목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맥주로 끈적끈적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라 요즘 들어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손 씻으시려면 저 건물 화장실을 이용하시면 돼요.”

캔 맥주 때문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등 뒤에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음침해 보이는 남자가 손가락으로 으슥한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고맙습니다.”

제이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남자가 너무 병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몹쓸 성병이라도 걸렸는지 몰랐다. 몸 파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사소하든 심각하든 필연적으로 성적인 질병에 감염되기 쉬웠다.

좀 위험해 보이는데.

제이드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 그에게 화장실을 알려준 남자의 옆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남자에게선 당장에라도 얇은 과도로 제 목숨을 끊을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성격도 소심해 보이고 사람들을 살펴보는 행동도 쭈뼛쭈뼛해서 더욱 의혹이 커졌다. 아까 제이드에게 찝쩍거렸던 대머리 변태 놈이 눈을 빛내며 좋아할 만한 타입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볼까.

화장실에서 맥주 캔과 손을 씻고 나왔다. 제이드는 좀 전의 그 남자를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던 남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손님을 따라 골목을 떠난 모양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태우는 남창들에게 다가갔다. 야위고 주근깨 가득한 남자를 아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들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기만 했다. 나이는커녕 이름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런 애가 여기 있었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남창도 있었다.

왜 아무도 모르지.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인 걸까.

제이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였다.

“꼭 걔여야만 해? 난 어때? 당신이라면 돈 안 받아도 괜찮은데.”

가죽 재킷을 걸친 남창이 간드러지는 콧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눈을 게슴츠레 뜬 남자는 제이드에게 매달린 것만으로도 모자라 하반신을 비벼 대기까지 했다.

“바, 바빠서 이만!”

제이드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제야 자신이 오해할 만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구역에서 누군갈 찾는다는 건 그렇고 그런 의미를 뜻했다. 하지만 제이드는 섹스할 사람을 돈 주고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잠깐, 가지 마. 공짜로 해 준다니까!”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머리통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제이드는 잰걸음 치는 속도를 높이기만 할 뿐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명이 용기를 내어 추파를 던지자 다른 남창들도 하이에나처럼 눈빛을 빛냈다. 어떻게든 그를 자빠트려 한번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깃든 눈빛이었다. 제이드는 철조망 없는 사파리에서 도망치는 기분을 간접 체험했다. 자칫 발목이라도 붙잡힐까 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

사창가에서 간신히 탈출한 제이드는 해리가 사는 아파트 앞에 당도했다.

누가 파티라도 열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도 전에 쿵쾅, 쿵쾅 음악 소리가 울렸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 요란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이드가 며칠 전 들락거렸던 클럽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었다.

역시 파티가 열린 게 맞았군.

특이한 점은 방문객들이 죄다 남자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여자도 가뭄에 콩 나듯 몇 명 있긴 했지만 그녀들은 이성애자가 아니었다. 해리의 아파트에서 헤테로인 사람은 제이드를 제외하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시끄럽고 정신 사나웠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떠들썩했다. 잊고 싶은 게 많은 제이드에겐 잘된 일이었다. 다만 옆집에서 항의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이렇게 사람이 북적대는데 해리는 어떻게 찾나,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큰 소리를 냈다.

“우와, 제이드! 당신이 여길 오다니! 웬일이에요.”

본 적 있는 얼굴이 펀치를 꿀꺽꿀꺽 마시며 제이드의 어깨를 쳤다. 록 밴드 스타라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오랜만이야! 여전히 섹시하고 상큼하네.”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제 막 실내에 발을 디딘 제이드는 얼굴만 간신히 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사이인 것 같은데 상대방은 그를 잘 아는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해리한텐 네가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어떻게 지냈어요. 혹시 지금 만나는 사람 있는 건 아니죠?”

하도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서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는 소란을 틈타 은근슬쩍 그의 엉덩이를 더듬거나 팔을 주무르는 사람도 있었다.

“저기, 잠깐만. 일단 해리 좀 보고 올게.”

제이드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양해를 구했다. 파티가 열렸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수다스럽고 활달한 해리의 친구들 덕분에 벌써부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질문을 일일이 다 받아 주다간 새벽까지 붙들려 있어야 할 분위기였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제이드는 자신을 빙빙 에워싼 사람들에게서 풀려나기 위해 진땀을 뺐다.

“해리? 해리는 왜요.”

“에이, 인사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도통 그를 보내 주지 않으려 했다. 제이드는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어깨를 비집어 가며 인간 바리케이드를 벗어났다. 하도 여러 사람이 팔을 잡아끌어서 자신이 좀비 떼에 휩쓸린 조연 B처럼 느껴졌다.

해리 이 자식은 어디 있는 거야.

제이드는 투덜투덜하며 주변을 살폈다. 모델처럼 스키니한 청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숀 테일러였다.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을 발견한 제이드는 옳구나, 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숀이 여기 있다면 짝사랑 중인 해리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예상했던 대로 제이드는 숀의 주변을 맴도는 해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딱 봐도 숀의 관심을 끌지 못해 조바심이 난 표정이었다.

숀은 남자들에게 에워싸여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해리는 안중에도 없는 기색이었다. 해리가 좋아하는 스물두 살짜리 청년은 여러 사람에게 관심받길 좋아하는 도도한 여왕벌과였다.

쯧쯧, 여전하구만.

짝사랑에 고군분투 중인 친구를 보며 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연락이 뜸해서 둘이 잘되어 가는 줄 알았는데 달라진 게 없었다.

해리는 숀에게 구박받거나 천대받는 일이 있으면 전화로 친구를 들들 볶는 취미가 있었다. 숀이 다른 남자에게 홀딱 빠져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리가 제이드에게 시시콜콜 전화를 걸지 않는 건 숀이 그에게 잘 대해 줄 때뿐이었다.

저렇게 자기를 대놓고 무시하는 녀석이 뭐가 좋다는 걸까.

이제 포기할 법도 한데 오기인지 끈기인지, 친구 놈의 마음은 변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제이드로서는 고행을 자처하는 해리의 심리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 제이드 씨다.”

“진짜네. 만나서 반가워요, 제이드.”

숀과 대화를 나누던 남자들이 제이드를 발견했다. 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숀은 사람들의 시선이 타인에게로 옮겨가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가장 늦게 뒤를 돌아본 사람은 해리였다.

“어? 언제 왔어?”

해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작새처럼 예쁘장한 대학생은 도끼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봤다.

“뭐야, 제이드 형이 왜 여길 왔어요?”

숀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대뜸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이, 제이드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흡사 여왕벌 자리를 노리는 라이벌을 견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오면 안 될 곳에라도 왔냐?”

제이드는 건방진 꼬맹이를 바라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해리가 좋아하는 녀석만 아니었더라면 머리를 확 쥐어박았을 것이다.

그는 숀이 자신을 경계하는 이유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저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은 제이드를 볼 때마다 날을 세웠다. 솔직히 말하면 그도 숀이 마뜩잖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리는 제이드의 친구였다. 친구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네. 까놓고 말해서 민폐거든요?”

숀이 기다렸다는 듯 이죽거렸다. 여기가 제집이었다면 제이드를 내쫓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였다.

“말이 심해, 숀.”

“오면 안 될 곳이라니. 해리와 가장 친한 친구인데.”

방금까지만 해도 숀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남자들이 정색하며 그를 나무랐다.

“제이드 씨, 전혀 민폐 아닙니다.”

“그래요, 신경 쓰지 마요.”

호쾌한 인상의 남자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제이드의 비위를 맞췄다. 꼬리가 있다면 산책 나온 개들처럼 힘차게 흔들 기세였다.

“하!”

숀 테일러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날 두고 어떻게 제이드의 편을 들 수 있느냐고 으르렁거리는 눈빛이었다.

“미치겠네.”

숀은 이렇게 되리라 예상은 했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가 뒷전으로 밀려나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존심이 상했다.

저 동양인 남자만 나타나면 꼭 이랬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기분이 나쁜 건 별개의 문제였다.

더 복장이 터지는 건 자신도 제이드가 눈앞에 있으면 시선을 떼어 내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저 밋밋한 동양인 남자가 뭐가 좋은 거냐고 어깃장을 놓고 싶은데, 도저히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다른 걸 다 떠나 숀 본인이 동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제이드는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방비한 게 귀엽긴 했지만 특출하게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양인이라는 점과 어딘지 모르게 맹한 성격만 제외하면 제이드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남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제이드는 사람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앙증맞고 착 달라붙어 요염한 엉덩이라든지 무용수처럼 곧고 섬세한 등, 동양인 특유의 동안인 외모와 벌꿀을 입혀 놓은 것 같은 매끈한 피부. 다소 심심해 보이는 얼굴도 자세히 뜯어보면 흠잡을 곳 없이 오밀조밀했다. 상큼하게 웃고 있는데도 뭐라 표현하기 힘든 요염함을 풍겼다.

‘게이도 아닌 주제에 왜 남자 홀리는 페로몬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거냐고!’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숀은 분통을 터트렸다. 자신이 훨씬 더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제이드에게 질투심을 느껴야 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숀, 난 항상 네 편이야.”

해리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헤헤 웃었다. 점수를 딸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효과는 없었다. 숀은 이를 아득바득 갈며 해리를 흘겨보았다. ‘당신이 편들어 줘도 하나도 안 기쁘거든?’이라고 쏘아붙이는 표정이었다.

숀의 분노는 가라앉기는커녕 더 활활 불타올랐다. 그는 제이드 곁에 들러붙은 불나방 같은 남자들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입을 헤 벌리고 좋아하는 표정들이 하나같이 다 머저리 같았다.

뭐야, 왜 저래.

제이드는 저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라는 눈으로 숀을 쳐다봤다. 군인 출신인 데다 무심한 성격인 그는 숀이 씩씩대는 이유를 당최 짐작할 수 없었다. 제이드는 숀과 달리 주목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이드, 맥주 이리 줘요. 냉장고에 넣어 둘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지근해진 맥주를 따려고 하는데 누군가 상냥하게 말했다.

“칵테일 먹고 싶지 않아요? 내가 타 줄게요.”

또 어떤 사람은 먹고 싶은 칵테일을 말해 보라며 접근했다. 그들의 시커먼 속내를 모르는 제이드는 ‘해리가 아는 사람들은 참 친절하단 말이야. 숀 자식만 빼고’라고 생각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또한 남자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완벽한 헤테로였던 그의 조그마한 머리통에는 남자도 연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아예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동성이 그를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자신이 성적 대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떠올리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다만 굴드를 만난 이후로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그를 만난 이후로 상식과 고정관념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폭풍 전야처럼, 혹은 태풍의 눈 안에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덕분에 제이드는 굴드를 생각하면 과부하에 걸린 기계가 그러하듯 머리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마셔요!”

누군가 다가와 술을 떠안겼다. 제이드는 거절하지 않고 넙죽 펀치를 받아 마셨다. 어차피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해리의 아파트를 찾은 터라 술을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제이드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편승해 열심히 술잔을 비웠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굴드도, 아랫도리에 발생한 심각한 결함도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야, 제이드.”

해리가 기척 없이 뒤에서 다가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남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할 생각인지 그는 복화술 하듯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제이드는 국자로 펀치를 퍼 담던 자세 그대로 해리에게 질질 끌려갔다. 그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지 친구의 표정이 절박했다.

해리를 따라 걸음을 놀리며 신속하게 주변을 살폈다. 촐랑거리는 성격의 해리가 진지해질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즉, 제이드는 숀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 밖에도 숀은 해리의 아파트에 남아 있었다.

잔뜩 삐쳐 있을 줄 알았는데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숀은 언제 불같이 성을 냈냐는 듯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엔 나한테 넘어올 줄 알았다니까.”

숀이 웃음을 터트리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턱을 쳐든 모습이 식민지를 정복한 여왕님 같았다. 저리 기뻐하는 걸 보니 좀처럼 그에게 넘어오지 않던 남자에게서 고백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해리는 제이드를 발코니로 데려갔다. 등 뒤로 유리문을 쾅, 하고 닫은 친구 놈은 공포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이드, 너. 굴드라는 작자랑 어떻게 돼 가고 있어.”

해리가 손을 덜덜 떨며 제이드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손이 떨리는 건 싸늘한 밤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둘이 잘돼 가고 있는 것 아니었어? 응?”

해리가 갑자기 굴드 이야기를 꺼내자 제이드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말문이 막힌 그는 입만 뻥긋댔다. 친구의 입에서 굴드의 이름이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리는 한동안 제이드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숀과 문제가 생기면 득달같이 전화로 떠들어 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연락이 뚝 끊겼다. 해리는 단순했다. 요 며칠 숀과 잘 지내고 있었으니 그의 입장에선 굴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는 연적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 빤했다.

“잘되고 자시고 할 만한 관계가 아닌데….”

“집까지 찾아오는 사이였으면서 웬 발뺌이야! 인마, 네가 그 작자를 잘 간수했어야지. 난 너만 믿고 있었는데… 망했어.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리가 제이드를 원망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흡사 다섯 살짜리 꼬마가 떼를 부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못 알아먹을 소리만 늘어놓지 말고 제대로 설명을 해 봐.”

제이드는 진정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감정 과잉 상태에 빠진 해리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네가 지금 나라면 진정하겠느냐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굴드 그 인간이 숀을 만나러 여기로 올 거래.”

해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비보를 전한 건 굴드의 동료 배우인지 뭔지 하는 작자였다. 숀은 굴드를 찍어 넘기기 위해서 극단 관계자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뒤집어쓴 기사를 쓰러트리려면 말부터 포섭하라는 절대 진리를 충실하게 이행한 결과였다.

“굴드? 그 사람이 여길 왜 와?”

제이드가 눈을 커다랗게 벌렸다.

“낸들 알아?!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결국 해리가 버럭 성을 냈다. 느닷없이 불벼락을 맞은 그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분명 화톳불을 잿더미로 꾹꾹 덮고 잤는데 오밤중에 불길이 번져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는 한동안 연적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놓고 있었다. 굴드가 제이드에게 단단히 빠졌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그 남자가 친구의 집에 찾아온 날 확신이 생겼다.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젠 굴드와 숀이 눈이 맞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이드의 매력에 홀린 남자가 다른 이에게 눈을 돌릴 일은 절대 없었다. 사랑의 연적이 제이드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동안 자신은 상심한 숀을 달래 주기만 하면 되었다.

요 며칠간 해리는 행복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굴드가 넘어오지 않자 숀은 실의에 빠졌다. 모두 그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굴드와 제이드의 관계가 어찌 굴러가고 있는지는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친구가 굴드를 알아서 잘 요리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이드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남자를 휘두르는 요부 체질이었다.

이변이 일어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우려할 부분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해리는 지금 이 상황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야, 제이드. 그 작자랑 싸웠어? 뭐라고 말 좀 해 봐.”

조바심이 나서 엉덩이가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관심을 끄지 않고 친구의 행보를 유심히 살폈어야 했다는 후회가 솟구쳤다.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그 작자가 숀을 만나려 하는 거냐고 제이드의 목을 짤짤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작자 동료인지 뭔지 하는 자식 말로는 뭔가 줄 게 있다는데, 너무 속 보이는 핑계 아니야? 팬한테 냉랭하던 인간이 이제 와 갑자기 사적으로 만나려고 하는 게 이상하잖아.”

해리가 실내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보다 더 크게 울화통을 터트린 순간이었다.

“굴드 씨! 여기예요.”

어둑한 아파트 저 아래에서 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얼굴이 미소로 활짝 만개한 그의 목소리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형님을 맞이하는 피붙이보다 훨씬 더 순수했다.

“젠장, 벌써 도착한 거야?”

잇새로 거친 목소리를 낸 해리가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발코니와 지상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굴드를 향해 뛰어가는 숀이 그의 외침을 듣고 위를 올려다본다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친구의 격한 반응에 제이드도 덩달아 긴장했다. 밤하늘에 우렁우렁 울리던 친구의 목소리가 연기처럼 희미해졌다. 어깨와 목이 뻐근하게 굳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발코니 아래로 시선을 떨어트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다행히 숀은 두 사람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제이드는 꿀꺽 생침을 삼키며 숀의 뒤통수를 눈으로 좇았다. 해리도 그도 숨을 죽인 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발코니 난간에 쭈그려 앉았다.

숀이 차도를 가로질러 굴드와 마주 섰다. 주홍빛 가로등 아래로 굴드의 모습이 보였다. 제이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래간만에 그의 얼굴을 봐서 반갑긴 한데 만감이 교차했다. 숀을 응시하는 굴드의 시선이 크림처럼 부드러웠다.

길 건너편이라 난간 저편으로 귀를 쫑긋 세워도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두 사람의 표정과 몸짓,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뿐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건 전화는 받지 않았던 사람이 저 아래에서 숀과 온화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굴드는 여전히 불길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람을 긴장시키는 그의 매력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외줄을 탈 때처럼 발끝이 불안해졌다. 굴드는 잠을 자고 있거나 부재중이었던 게 아니었다. 제이드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굴드도 전화를 피한 게 아닌가 하는 가능성을 불쑥 떠올렸다.

과민한 추측이었다. 전화기에 제이드의 전화번호가 찍히는 것도 아닌데 미리 알고 피했을 린 없었다. 하지만 한 번 수면으로 떠오른 부정적인 생각을 가라앉히기란 쉽지가 않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간질간질한 봄기운이 풍겼다. 숀은 사춘기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선 굴드는 무대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먼저 들어간다.”

제이드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간 창살에 찰싹 귀를 대고 있던 해리가 ‘야! 가긴 어딜 가’ 하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 순간 굴드가 발코니 쪽을 바라봤다.

굴드와 시선이 마주친 제이드는 숨이 턱 막혔다. 굴드의 파란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악의적이면서도 들뜬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해리가 윽, 하며 셔츠로 머리를 뒤덮는 기척이 아득하게 들렸다.

눈이 마주친 찰나의 시간이 정지 화면처럼 길게 느껴졌다. 남자는 스쳐 지나가듯 제이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보고도 무시한 건지 제이드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대화가 끝나자 굴드는 아파트로 올라오지 않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굴드에게 선물이라도 받은 건지 숀의 손에는 상자가 들려 있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깡충깡충 도로를 건너는 숀의 모습을 보기가 불편해졌다.

실내로 들어온 제이드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고 호들갑을 떠는 해리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숨에 맥주 한 캔을 비웠는데도 술을 마신 것 같지 않았다.

정체 모를 상실감과 탈력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를 외면해 버린 굴드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일부러 모른 척한 게 아니라고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초조한 기분에 휩싸였다. 폐 부근이 뻐근했다. 원래는 내일 다시 굴드에게 전화를 걸 작정이었지만 그럴 용기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굴드가 그의 전화를 반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도저히 수화기를 집어 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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