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오후 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제이드는 아직도 녹색 모포를 둘둘 휘감고 있었다. 낡은 소파에 뺨을 댄 채로 잠을 자고 있는 그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열한 시쯤 잠시 눈을 뜨긴 했다. 게으른 제이드는 일어나는 대신 그대로 더 잠을 청했다. 원체 잠이 많은 데다 새벽까지 야간 공사 교통 요원 일을 하고 와서 피곤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굵은 빗줄기도 소파 위에서 빈둥거릴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오전 다섯 시 반만 되면 기상하던 시절이 꿈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하루에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비상대기를 해야 했던 일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민간인이었다. 더 이상 선잠을 잘 필요도, 언제 울릴지 모를 공습경보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위층에서 또 오디오를 틀었는지 웅장하고 비장한 클래식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제이드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 단조> 오케스트라 버전이었다.
악곡이 도입부를 지나 절정으로 치달았다. 불안을 조장하는 음악 소리 때문에 편히 잠들어 있던 제이드의 이마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상승하는 현악기의 선율과 함께 포탄이 터지는 광경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끊어질 듯 가녀린 울림이 마지막 전투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비명, 피, 살점, 끊이지 않던 총성….
이맛살을 찌푸린 제이드는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커다란 성당과 붉은 글씨가 가득한 벽이 흑백필름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폭음과 함께 발밑이 흔들렸다. 기억이 뒤엉키더니 그는 어느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디찬 지하실에 쓰러져 있었다.
구멍 난 모래 포대처럼 붉은 피가 허벅지에서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분명 캄캄한 어둠 속인데도 시뻘건 눈동자와 새하얀 송곳니가 보였다.
빌어먹을, 오지 마.
제이드는 꿈틀꿈틀 몸을 비틀었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지만 검은 그림자는 결국 무대의 커튼처럼 그를 휘감았다.
납덩이처럼 차가운 뭔가가 피부에 닿았다. 공포에 질린 제이드는 숨을 헐떡거렸다. 그를 덮친 존재에게선 심장이 뛰는 소리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목에서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단단한 턱을 가진 늪지대의 악어가 그를 물어뜯는 느낌이었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뇌리에 펼쳐졌던 모든 영상들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때르릉, 때르릉.
눈을 부릅뜨고서 주변을 살피는데 전화가 울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제이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현실이다.
황량한 자신의 아파트를 두 눈으로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드는 셔츠를 움켜잡고 있던 손을 풀며 모포를 옆으로 치웠다. 악몽을 꾸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목덜미가 축축했다.
때르릉, 때르릉!
전화가 집요하게 울려 댔다. 그는 전화 쪽으로 다가가며 손목시계를 찼다. 잠을 잘못 잤는지 오른쪽 손목이 저릿했다. 제이드는 때때로 피부를 휘감고 있는 뱀 문신이 살갗 안으로 파고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여보세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힘없이 입을 열었다. 저혈압인 데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악몽의 여파 때문에 기분이 좋질 않았다.
- 뭐야, 왜 이리 전화를 안 받아. 또 자고 있었어?
해리였다. 제이드는 이 녀석일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래’라고 대답했다.
- 쯧쯧, 나무늘보도 아니고.
해리는 핀잔을 늘어놓은 뒤 용건을 밝혔다.
- 그날 어떻게 됐어?
“그날이라니?”
배가 출출했다. 제이드는 찬장에서 시리얼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아벤 굴드! 그 작자랑 어떻게 됐어? 바로 알려 주리라 생각했는데 바쁘다고 잠수 탔잖아, 너.
제이드는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시리얼을 퍼먹었다. 굴드와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날부터 생활비를 버느라 정신이 없었다.
- 데이트 잘했어?
“데이트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제이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우적우적 씹던 시리얼을 통째로 뿜어낼 뻔했다. 그는 그저 강도를 당할 뻔했던 굴드를 도와준 답례로 식사 대접을 받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데이트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비약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었다.
- 남자끼리 밥을 먹으면 데이트지 뭘. 하여튼 분위기 어땠어? 친해지기 힘들 것 같아? 당연히 숀에 대해선 물어봤겠지?
“아니. 안 물어봤어.”
제이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숀에 대해 캐 보지 못한 게 조금 전까진 미안했다. 굴드와 식사를 할 때 경황이 없어서 미처 숀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용의자 취조하듯 다다다 쏘아붙이는 해리의 말투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싹 달아났다.
- 안 물어봤다고? 그럼 도대체 둘이서 뭘 한 거야. 내가 그렇게 친해지라고 당부했잖아.
해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펄펄 뛰며 언성을 높이는 순간이었다.
뚜-, 뚜.
인터폰이 울렸다. 건물 입구에서 507호를 호출하는 소리였다.
누구지?
싱크대에 서서 시리얼을 먹던 제이드가 숟가락질을 멈췄다. 그의 집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통화 중인 해리와 집주인, 그리고 우체국 집배원 정도가 다였다.
“잠깐만, 누가 왔나 봐.”
- 뭐 시켰어?
해리도 인터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호기심을 드러냈다.
“아니야.”
제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불이 깜빡깜빡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아벤 굴드입니다.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해리도 전화기를 통해 굴드의 이름을 들었다.
집 주소를 어떻게 안 거지?
당황한 제이드는 손톱을 세워 벅벅 이마를 긁었다. 전에 식사를 마치고 택시로 데려다줄 때 굴드가 집 앞까지 오긴 했었다. 하지만 몇 호에 사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 뭐야, 너! 집까지 찾아올 사이가 됐으면서 나한텐 입도 뻥끗 안 한 거야?
“잠깐만, 조용히 해 봐.”
제이드는 전화기를 얼굴에서 멀리 떼어 내고서 인터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30년도 더 된 건축물이라 통화 버튼에서 손을 떼면 밖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굴드 씨?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흠, 하고 기침을 했다. 하지만 목을 가다듬은 보람도 없이 목소리가 흔들렸다. 자다 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목이 꽉 잠겨 있었다.
- 우선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비가 너무 많이 오는군요.
굴드의 낮은 목소리 뒤로 잡음처럼 빗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가차 없이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한밤중인 것처럼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입김을 흘리며 서 있는 굴드의 모습이 뇌리에 그려졌다. 전화기를 통해 굴드의 목소리를 들은 해리는 ‘얼른 들어오라고 해’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럼, 일단 들어오세요.”
제이드는 좀 조용히 하라니까, 라고 전화기에 을러댄 후 건물 출입문이 열리는 버튼을 눌렀다. 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가 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람.
제이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굴드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가 오는 날 여기까지 걸음을 했다는 게 이상했다.
- 제이드, 실~망이다.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저 아래쪽에서 해리가 흐응, 하고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던 제이드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움찔 어깨를 튕겼다.
“…뭐가 실망이야.”
수화기를 다시 귓가로 가져온 제이드가 대꾸했다.
- 나 몰래 둘이서 몇 번이나 더 만났어. 같이 식사를 한 뒤로 또 만났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그 짝이네.
“어이, 오해하지 마. 그 뒤로 만난 적 없어.”
골치가 아파 왔다. 하필이면 해리와 전화 통화를 할 때 굴드가 찾아오다니 타이밍이 지독히도 나빴다.
- 부끄러워서 그러는구나? 괜찮아, 괜찮아. 화내는 거 아니야.
해리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냈다.
- 둘이 친해졌지? 이 형님한테 솔직히 다 털어놔, 응?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면 제이드의 집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털어놓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안 만났다니까? 전화 통화 몇 번 한 게 다라고.”
- 오호라, 만나진 않았지만 전화는 했단 말이지?’
해리가 눈을 희번덕거리는 모습이 뇌리에 그려졌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제이드는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에 앞으로 무척 성가셔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며칠에 한 번씩 전화해? 막 매일 밤 하는 거 아니야?’
해리가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하는 짓이 꼭 친구의 연애담을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중생 같았다.
젠장.
- 한번 통화하면 얼마나 오랫동안 하는지 말 좀 해 봐. 전화는 번갈아 가면서 걸어? 그 작자, 아니, 굴드 씨가 먼저 걸지?
이젠 굴드를 부르는 호칭까지 달라졌다. 제이드는 왈칵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느닷없이 태도를 바꾼 해리의 꿍꿍이가 뭔지 당최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왜 이리 신이 난 거야. 별거 없었다고!”
꼬치꼬치 캐묻는 친구 때문에 골이 아파 왔다. 해리의 추리대로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굴드가 맞았다. 하지만 통화를 한 건 두어 번뿐이었다. 대화 시간도 5분을 넘지 않았다. 그들이 나눈 이야기라고는 압생트에 언제 또 갈지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게 전부였다.
-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 몰라? 정색하니까 더 수상한데.
해리가 으흐흐, 하고 웃는 소리가 B급 좀비 영화에 나오는 좀비 목소리처럼 들렸다.
띵-동.
벨 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황급히 현관문을 바라봤다. 해리도 갑자기 조용해졌다. 벨을 누를 사람은 굴드밖에 없었다. 건물 입구에서 5층까지 걸어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확실했다.
- 왔다! 얼른 문 열어 줘, 제이드.
해리가 설레 죽겠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친구가 하도 오두방정을 떨어서 그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누구세요?”
제이드는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방문객에게 말을 걸었다. 해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누구긴 누구겠어!’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만 끊는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 인마! 잠깐만.
그는 해리의 외침을 깨끗이 무시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친구가 계속 전화를 걸까 봐 아예 코드를 빼 버렸다. 괜히 조마조마했다. 현관문 너머에 굴드가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굴드입니다.”
안정적인 저음이 복도의 벽을 타고 울렸다. 상자 같은 걸 들고 있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 예. 들어오세요.”
제이드가 어색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자물쇠를 풀었다. 문이 열리는 짧은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길게 느껴졌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키가 헌칠한 남자가 현관문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굴드의 손에는 24개들이 머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아까 들렸던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머핀 상자를 포장한 비닐이었다.
먹을 거다!
머핀 상자를 발견한 제이드가 눈을 번쩍번쩍 빛냈다. 푸석푸석한 시리얼로 배를 채우고 있던 그로서는 온 신경이 굴드의 손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그가 느끼고 있던 어색한 감정도 일시에 증발했다.
코어즈 머핀이라는 마크가 제이드의 시야에 들어왔다. 전에 해리가 유명한데 좀처럼 사 먹기 힘드네, 어쩌네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머핀의 브랜드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제이드는 굴드가 먹을 걸 사 왔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는 코어즈 머핀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하루에 정해진 수량만 판다든지, 머핀 주제에 비싸기는 더럽게 비싼 데다 아침부터 줄을 서는 사람이 넘쳐난다든지 하는 잡다한 정보 또한 그의 관심 밖이었다.
“어떤 맛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종류대로 골라 왔습니다.”
이해해 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굴드가 상자를 내밀었다.
“먹을 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해요.”
제이드는 입을 헤벌쭉 벌리고서 굴드가 내민 상자를 냉큼 받아 들었다. ‘먹을 걸 사 주는 사람 이퀄 좋은 사람’이다. 굴드에 대한 호감도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다행이군요.”
굴드는 온화하게 웃으며 우산을 벽에 세워 두었다.
제이드는 상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방금 가게에 들렀다 왔는지 종이 상자가 아직 따끈했다. 폭우를 뚫고서 머핀을 사 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굴드의 성의가 감동적이었다. 해리 놈은 백날 놀러 와도 감자 칩 하나 사오는 법이 없었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굴드는 조금 전까지 밖에 있었던 사람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두도, 어깨도 젖어 있기는커녕 물기 하나 없이 멀끔했다. 그가 벽에 세워 둔 우산도 표면이 건조하긴 마찬가지였다.
“혹시 주무시고 계셨는데 제가 깨운 겁니까?”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물끄러미 굴드를 살피는데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뇨.”
부정을 하고 나서야 제이드는 자신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퍼뜩 깨달았다. 까치집을 한 머리, 뺨에 생긴 눌린 자국, 입가에 말라붙은 침, 구겨질 대로 구겨진 추리닝. 막 자고 일어났다고 광고라도 하고 있는 꼴이었다.
윽.
자신의 추레한 몰골에 당황한 제이드는 황급히 눈곱을 떼었다.
그는 원래 다른 사람에게 너저분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얼굴을 붉히거나 하는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이드가 민망한 감정을 느낀 것은 갑자기 굴드의 얼굴에서 유디트의 흔적까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눈앞에 있는 사람이 굴드가 아니라 유디트였다면 그는 울면서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갔을지도 몰랐다.
“앉아 계세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눈곱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제이드는 머핀 상자를 도로 굴드에게 넘겼다. 좋아하는 여자의 친오빠 앞에서 후줄근한 모습을 보인 기분이었다.
“예, 기다리겠습니다.”
제이드의 뒷모습을 보며 굴드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거대한 육식동물이 사육사 앞에서 발톱을 감추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이드는 굴드의 시선도 느끼지 못하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마음이 급한 그는 허리를 숙이고서 샤워기를 머리에 갖다 댔다. 아까 굴드에게 품었던 의문은 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얼른 씻고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읏, 차거.”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차가웠다. 이 오래된 아파트는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온수가 나오질 않았다. 군대식 샤워에 길들여진 제이드는 부들부들 어깨를 떨며 5초 만에 비누칠을 끝냈다. 그의 욕실에는 샴푸나 바디 워시 같은 제품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제이드는 욕실에 들어간 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수건으로 물기를 털며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급하게 씻어서 그런지 개운한 맛이 없었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제가 507호에 산다는 건 어떻게 아셨고요.”
제이드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며 굴드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의자로 사용한 건 군대에서 주워온 간이침대였다.
“전에 택시로 데려다 드릴 때 몇 층에 불이 들어오는지 살펴봤습니다. 불쾌하신가요?”
굴드가 보고서를 읽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그럴 수도 있죠, 뭐.”
머리를 말리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제이드는 잠시 뜸을 들인 끝에 고개를 저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스토커 새끼, 라고 외치며 멱살부터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굴드는 근사한 외모 때문인지 스토커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좀 적극적인 성격이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여자도 아닌 그에게 왜 이리 적극적인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한시름 놨습니다.”
굴드가 어깨에서 힘을 빼며 웃었다. 제이드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까 봐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안도하는 그의 모습이 소년처럼 순진하고 순수해 보였다. 굴드 앞에 앉아 있는 제이드까지 기분이 화사해지는 미소였다. 고딕 미술품처럼 고전적이면서도 퇴폐적인 미모라고 생각했는데, 저리 상큼하게 웃으니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머핀은 나중에 드실 겁니까?”
제이드가 멍하니 넋을 빼고 있으려니 굴드가 눈짓으로 탁자 위의 상자를 가리켰다.
“아뇨, 먹어야죠!”
제이드는 그제야 자신이 머핀을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냉큼 뚜껑을 열어젖혔다. 먹을 걸 앞에 두고 한눈을 파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잘 먹겠습니다. 굴드 씨도 드세요.”
제이드의 눈길은 이미 줄느런히 상자를 채운 머핀에 못 박혀 있었다. 입 안에는 침이 고였다. 각양각색의 24개들이 머핀의 색깔이 곱디고왔다. 잠시 머핀의 자태를 감상한 그는 날렵한 사냥꾼처럼 상자에 손을 뻗었다.
굴드는 제이드가 상자에 달려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마치 흙으로 만든 경단이라도 앞에 둔 사람처럼 무미건조한 눈으로 머핀을 무시했다. 남자의 시선은 제이드의 오른쪽 손목과 훤히 드러난 쇄골 부근만 느릿하게 맴돌았다. 두 군데 모두 맥박이 뛰는 장소였다.
크, 달다.
제이드는 온기가 느껴지는 따끈한 머핀을 덥석덥석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말랑했다. 주먹보다 큰 녀석들이 실하기까지 했다. 알알이 박힌 찐득찐득한 초코 칩이 그를 탄복하게 했다. 고디바 초콜릿처럼 맛이 풍부하고 진했다. 사람들이 왜 새벽같이 코어즈 머핀 가게 앞에 줄을 서는 건지 단박에 이해가 되는 맛이었다.
“참,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거라고 했죠?”
당분을 섭취했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머핀을 세 개나 해치운 제이드는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쪽쪽 빨았다. 비도 오니 진한 커피를 마시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대비에 푹 잠긴 유리창 위로 가로등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핑계를 생각해 놨는데,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굴드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실내를 잠식했다.
“다른 이유 없이 제이드 씨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저를요? 왜요?”
머핀을 지금 하나 더 먹을까, 아니면 커피를 끓인 후 먹을까 고민하던 제이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굴드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의아하다는 기색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대본을 외우다가 불현듯 당신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많이 멋쩍은지 그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이드도 덩달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운이 남는 공허한 저음, 그리고 서늘하면서도 무거운 향수 냄새가 그를 긴장시켰다.
“아마도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굴드가 제이드의 목덜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지독하게 유혹적이었다.
닿을 듯 말듯 쇄골 위를 더듬는 손길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기분이 이상했다. 외로워 보이는 굴드의 눈빛이 그를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제이드는 납처럼 차가운 손이 자신의 피부를 어루만지던 순간을 떠올리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왜 절….”
“근래에 함께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제이드밖에 없었으니까요.”
테이블을 짚은 남자가 제이드 쪽으로 불쑥 상체를 기울였다.
우리가 몇 번이나 만났다고, 라는 말이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굴드는 두 손을 뻗어 제이드의 뺨을 감싸 쥐었다. 실내 공기가 차가워서 그런지 남자의 손이 생각보다 싸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굴드의 입술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머릿속이 혼곤했다. 왜 이러는 거냐는 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굴드의 숨결을 의식하며 몸을 뻣뻣하게 굳히는 것뿐이었다.
“제이드, 긴장 풀어요.”
입술이 닿기 직전 굴드가 속삭였다. 제이드의 손이 남자의 어깨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움찔거렸다.
입술에서 나는 젖은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빗소리가 시끄러운데도 타액이 마찰하는 기척이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굴드의 재킷이 부스럭거리는 미세한 소음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키스하고 있는 건가?
약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그의 모든 감각은 부드럽게 엉켜드는 굴드의 혀에 죄다 쏠려 있었다. 밀쳐 내야 하는데,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굴드가 제이드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제이드의 숨결이 더 거칠어졌다. 굴드의 적극적인 키스 탓에 등허리가 저릿하게 울렸다.
굴드의 입술이 자신의 체온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위험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제이드가 여태껏 해 보았던 입맞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농염했다.
형광등이 치직, 치직 소리를 내며 깜빡거렸다. 교체할 때가 다 된 낡은 형광등은 실내에 어슴푸레한 빛을 뿌렸다.
제이드는 몽롱한 눈을 하고서 남자의 팔에 기댔다. 아직 그는 키스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굴드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띠고서 발그족족해진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
“혀가 마비될 만큼 달군요, 제이드.”
허스키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제이드의 귀를 간질였다. 목적어는 생략되었지만 뭐가 달다는 건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야 키스하기 전에 초콜릿이 잔뜩 박힌 머핀을 먹었으니까….”
제이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노곤한 빛을 띠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자신이 굴드와 무슨 짓을 한 건지 자각한 것이다.
‘뭐야, 뭐냐고!’
파드득 놀란 제이드는 뒷걸음질로 간이침대를 뛰어넘었다. 굴드와 멀어진 제이드는 눈을 부릅뜨고서 거친 콧숨을 내쉬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남자는 배가 부른 눈을 하고서 손가락을 날름 혀로 핥고 있었다. 제이드의 입술을 만졌던 바로 그 손가락이었다.
“내, 내, 내가 왜 당신이랑.”
뒷말은 생략했다. 차마 키스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제이드는 이성적으로 당최 납득이 가지 않는 현실에 소리 없이 절규했다.
굴드와 연출했던 장면이 자꾸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이건 말도 안 됐다. 맨정신으로 남자랑 입술을 비벼 대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도망치는 겁니까.”
굴드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어두컴컴한 성당에 울려 퍼지는 듯한 경건한 음성이었다.
“다, 당신.”
제이드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현기증이 나도록 아름다운 굴드의 외모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섬세하고 커다란 손과 목젖, 그보다 넓은 어깨를 외면하기란 불가능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제이드는 나이 많은 누님에게 첫 키스를 강탈당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서 울먹거렸다. 절망이 엄습했다. 여자에게 스무 번, 아니, 열아홉 번이나 차이더니 종국엔 남자와 쪽쪽 입술을 빨아 댔다. 유디트의 얼굴이라도 필사적으로 찾아보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흔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짓이라니요?”
굴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관능적인 남자였다.
“모, 몰라서 물어! 머핀에 이상한 약을 탔지?”
제이드는 확신에 찬 어조로 외쳤다. 약을 탄 게 아니라면 자신이 해롱해롱하며 굴드의 입술을 받아줄 리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가 보이는 반응도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났다. 평소대로라면 굴드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치거나 주먹질을 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제이드는 굴드의 멱살을 잡기는커녕 남자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에게 손을 뻗을 엄두는 더더욱 나지 않았다. 여긴 자신의 집인데 왜 이리 불안하고 초조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요. 난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굴드가 고개를 저은 순간이었다. 가물가물하던 형광등이 꺼졌다. 조명이 사라진 실내에 빗소리만 가득했다.
헉.
떨리는 손끝으로 삿대질을 하던 제이드가 숨을 삼켰다. 그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굴드의 숨결이 느껴졌다.
“내가 두려운 겁니까.”
어스름 속에 잠긴 남자가 그를 두 팔 안에 가뒀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이봐, 두려운 게 아니라!”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모양이군요.”
발끈해서 외치는 제이드의 손등에 굴드가 입을 맞췄다. 농밀한 입맞춤을 나눴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듯 그의 입술에 희미하게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런 기분은 나도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충동적인 행위를 고백하는 굴드의 음성은 담담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후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키스, 싫었습니까?”
제이드의 젖은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남자가 속삭였다. 톡톡,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귓가에 휘감기는 은밀하고 관능적인 목소리가 제이드를 헐떡이게 했다.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싫지 않았다고 대답하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남자와 입술을 비볐는데 싫지 않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대답해 주실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군요.”
굴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벽을 짚었던 손을 떼어 냈다. 지금 상황에선 억지로 밀어붙여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한 기색이었다.
살았다.
남자가 한발 물러서자 숨통이 트였다. 제이드는 고산지대에 올라선 사람처럼 참았던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굴드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남자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가 거두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러한 굴드의 행동이 서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하는 느낌을 주었다.
혼란스러운 건 제이드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굴드도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 모두 성인이었지만 우발적인 사고에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서로 성별이 달랐다면 모든 것이 명쾌했겠지만, 굴드와 제이드 둘 다 같은 성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굴드의 기척이 멀어졌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실내에 홀로 남은 제이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굴드와 키스를 하게 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머핀을 먹을 때만 해도 별다른 조짐이 없었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으냐고.
제이드는 낙제를 받은 수학 시험지를 감추려는 아이처럼 어둠 속에서 전전긍긍했다. 기분이 나빴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에퉤퉤, 하고 입술을 문지른 뒤 굴드를 족치면 끝날 일이었다.
그렇지만 굴드와의 입맞춤을 즐겼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 어떤 키스보다 좋았다. 입술이 맞닿았을 때 역겹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굴드가 남자만 아니었더라면 바로 분위기에 휩쓸려 베드 인 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다. 그의 정체성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완벽한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스트레이트가 아니었던 걸까?
제이드는 초조하게 손톱을 씹었다. 없던 버릇이 생겨날 만큼 불안했다. 출구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궁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파트 구석에 쪼그려 앉은 상태로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그는 어느새 굴드의 입술이 닿았던 감촉을 되새기고 있었다. 치열을 가르며 들어온 혀와 허리를 받치던 커다란 손, 뺨에 닿았다 떨어지던 굴드의 피부, 흐트러질 듯 말 듯 한 숨소리. 당시엔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으악, 악! 그만.”
제이드는 자신이 설렜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캄캄한 아파트에 벌러덩 드러누워 허공에 발차기를 하는 자신이 볼썽사나웠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안 되겠어. 일단 전구부터 갈자.
제이드는 헉헉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곳에 혼자 있으니까 사고가 더 꼬이는 느낌이었다. 이성적으로 돌아오려면 불부터 밝히는 게 좋을 듯싶었다.
형광등을 찾으려고 창고를 뒤졌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끝에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마분지 상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형광등을 길쭉한 상자에서 뽑았다. 여분의 전구가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폭우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을 것이다.
형광등을 교체하자 따닥,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사위가 환해졌다.
한숨 돌린 그는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무심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움찔 제자리에 멈춰 섰다. 탁자 위에 펼쳐진 머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디단 머핀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렸다. 입술이 달다고 속삭이던 굴드의 유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안 돼. 생각하지 마.
제이드는 비명이라도 지를 기세로 허둥지둥 머핀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간신히 굴드와 키스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또다시 그 기억에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심호흡을 하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도저히 머핀 상자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이드는 과감히 머핀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게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았다. 머핀을 볼 때마다 굴드를 연상할 게 분명했다.
근데 꼭 버려야 하나.
하얀 상자를 들고 일어선 제이드는 제자리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제 손으로 머핀을 쓰레기통 속으로 보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머핀에게는 죄가 없었다.
제이드는 뚜껑을 슬쩍 열어 보았다. 아몬드, M&M 조각, 초콜릿, 블루베리, 설탕 시럽 등을 잔뜩 입힌 자태가 고왔다. 전자레인지로 살짝 데우면 따뜻한 식감을 즐길 수 있었다. 사실 데울 것 없이 이 상태로 먹어도 맛있을 것이다.
못하겠어! 이걸 어떻게 버려.
제이드는 곱게 키운 송아지를 끌어안듯 머핀 상자에 뺨을 비볐다. 썩거나 곰팡이가 피었다면 모를까, 멀쩡한 음식을 버린다는 건 그에게 있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일단 머핀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두기로 했다. 머핀은 상온에 사나흘쯤 보관해도 상하지 않는 기특한 음식이었다. 수분이 사라져서 좀 딱딱해지긴 하겠지만.
상자를 찬장에 감춘 제이드는 지친 얼굴로 소파 밑에 앉았다. 머릿속이 방송이 끝난 TV 화면처럼 텅 비었다. 굴드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소음이라도 들리면 좀 나을 것 같아서 그는 TV를 켰다.
코딱지만 한 TV는 소파와 마찬가지로 길가에 버려진 걸 주워 왔다. 연식이 오래된 제품이라 화면이 흑백으로 나오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지지직, 지직.
비 때문에 전파가 잘 잡히지 않는지 TV에 노이즈가 가득 끼었다. 뉴스가 방영 중인지 데스크에 앉은 앵커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빨간 테두리가 둘러진 자막이 빠르게 흘러갔다. 주식 시세가 아니라 살인, 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여기가 바로 시신이 발견된 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