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7)

극장가 골목은 공연을 관람하러 온 관객들로 붐볐다. 손에 프로그램 북과 여행 책자를 들고서 이 극장 저 극장 기웃거리는 관광객들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건물 외벽에는 공연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제이드는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극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왠지 자신이 올 자리가 아닌 곳에 발을 들인 기분이 들었다.

대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관객들은 하나같이 다 예술과 문화에 조예가 깊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영화관도 몇 번 가 보지 못한 제이드는 멋쩍은 기분을 감추기 위해 괜히 목덜미를 긁적였다.

다행히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그렇지만 늘어진 셔츠에 물이 빠진 청바지, 덥수룩한 머리를 한 이는 제이드 한 명뿐이었다.

“젠장, 포스터에 출연자 얼굴이 안 나와 있잖아.”

낚시할 때 쓰는 벙거지 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해리가 투덜거렸다. 녀석이 이런 가당치도 않은 변장을 한 건 연적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저 망할 놈의 선글라스 때문에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게다가 숀이 짝사랑한다는 남자는 해리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내가 일행인 걸 아무도 몰라야 할 텐데.’

주접스러운 친구가 창피해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그러나 해리는 둘이 일행임을 광고라도 할 생각인지 ‘제이드! 제이드’ 하고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봐, 제이드. 너 ‘홀로페르네스’가 뭔지 알아?”

해리가 복화술 하듯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그도 제이드만큼이나 연극이니 순수예술이니 하는 분야에 문외한이었다.

“난들 알아?”

제이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해리의 손에 팸플릿을 쥐여 주었다. 정 궁금하면 네가 직접 시놉시스를 읽어 보라는 뜻이었다. 사방에 ‘홀로페르네스’라는 글귀가 넘쳐 났다. 오늘 밤 상연되는 연극의 제목이 홀로페르네스임을 강조하듯 포스터와 현수막, 팸플릿 등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홀로페르네스. 구약성서에 나오는 베툴리아를 침공한 아시리아의 장군. 베툴리아인인 유디트에게 반하게 되며, 결국 그녀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해리가 구석에 숨어 팸플릿에 인쇄된 인물 소개를 중얼중얼 읽어 내렸다. 문학이니 역사니 하는 분야에는 까막눈과 다름없는 제이드지만 유디트란 이름은 그도 알고 있었다. 유디트는 살로메와 함께 팜므파탈의 표상으로 거론되는 여인이었다.

“유디트. 벙어리지만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홀로페르네스를 파멸로 이끄는 환상과 두려움의 대상.”

“그만해. 더 알고 싶지 않으니까.”

제이드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해리가 읊어 대는 줄거리를 듣고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 연극을 보지도 않았지만 더럽게 고리타분하고 지루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주인공의 길디긴 이름부터가 그의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문화 마당>이니 뭐니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잠깐잠깐 연극 공연의 한 장면을 보여 줄 때도 제이드는 입이 쩍 벌어지도록 하품을 했다.

“숀이랑 여기서 마주치는 거 아니야?”

찬찬히 로비를 둘러보며 제이드가 물었다. 제이드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해리 입장에선 숀과 맞닥뜨리면 상당히 곤란해질 터였다.

“오늘은 못 올 거야. 부모님이 고향에서 올라오셨다고 들었거든.”

해리가 ‘에헴. 어때, 나 치밀하지?’라는 눈빛으로 제이드를 쳐다봤다. 제이드는 거드름을 피우는 친구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성큼성큼 공연장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때마침 공연이 곧 시작하니 공연장으로 입장하길 바란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제이드는 해리를 뒤에 남겨두고서 혼자 공연장으로 향했다.

“인마, 같이 가!”

해리가 허둥지둥 제이드를 쫓아왔다.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서 따로 입장하고 싶었던 제이드에게는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극장 직원에게 표를 내미는데 오늘의 캐스팅이 적힌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제이드는 별생각 없이 초록색 보드에 적힌 이름을 훑어 내렸다. 안톤 머레이, 니블로스 바넘, 헨리 윌크스, 줄리아 살비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아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 이름이 하나인 걸 보니 아마도 줄리아란 여성이 유디트 역인 것 같았다.

객석에 앉자 금방 불이 꺼졌다. 제이드는 잠이나 한숨 푹 자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의자가 좀 딱딱하긴 했지만 한겨울에 보초를 서면서도 잠을 잤던 그에겐 비 인체 공학적인 의자쯤이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새카만 어둠이 무대와 객석을 짓눌렀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서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반면 제이드 옆에 앉은 해리는 계속 뒤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연적의 얼굴을 볼 생각에 초조해진 모양이었다.

쿠궁, 하는 효과음과 함께 무대 구석에 핀 조명이 떨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갑자기 따가운 조명이 눈꺼풀을 찌르자 제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한 조명이 점점 잦아들며 한 남자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약탈하고, 불 질러라.”

야만인 행색을 한 배우가 드레진 목소리로 외쳤다. 신하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보아 저 남자가 주연인 홀로페르네스인 듯했다.

연극 대사 특유의 과장된 목소리가 한숨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제이드는 계획했던 대로 눈꺼풀을 닫으며 잠을 청했다. 반면 해리는 눈을 부릅뜨고서 출연진 중 누가 숀의 짝사랑 상대인지 수색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얼굴 밝힘증인 숀이 목을 매고 있는 남자이니만큼 단역이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살고 싶다면 너희들이 떠받드는 그 잘난 신에게 침을 뱉어라. 기회주의자, 반역자, 위선자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꼼짝하지 않고 잠을 자는 제이드의 귓가에 주연배우의 목소리가 파도처럼 부서졌다. 해리도 어느새 꾸벅꾸벅 머리를 흔들었다. 제이드의 친구이자 고객님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퍼드덕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도로 졸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숙면을 취하고 있는데 섬뜩한 한기가 제이드의 척추를 쓸어내렸다.

‘뭐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제이드가 흠칫 놀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제이드는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전장 한복판에 버려진 것처럼 혈관의 피가 빠르게 내달렸다.

무대에선 형이상학적인 대사들이 오가고 배우들이 전위예술에 가까운 몸짓을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암전이 되었다. 극에 집중하지 않았던 제이드는 이 상황을 위험신호로 받아들였다.

‘젠장. 비상구.’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제이드가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파르스름한 조명이 팟, 하고 극적으로 오른쪽 무대를 밝혔다.

사락, 하고 부드러운 천이 부딪치는 소리가 무대에 울렸다.

조명이 내려앉은 자리를 향해 베일을 쓴 여인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숨을 죽인 관객들은 직감했다. 드디어 여주인공인 유디트의 등장이었다.

제이드는 넋 나간 사람처럼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총을 찾던 그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가 베일을 걷어 내자 자신이 무엇 때문에 긴장했는지도 잊어버렸다.

파르스름한 조명 때문에 더욱 창백해 보이는 유디트의 손이 제이드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이드가 보인 반응은 숙명의 여인을 만난 홀로페르네스와 동일했다.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아시리아의 장군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이건 운명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다.

제이드의 귓가에 대성당의 지붕까지 울려 퍼지는 맑은 선율의 아리아가 들려왔다. 그는 첫눈에 반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단 사실을 여태껏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세상에 정말 천국이 존재한다면 바로 여기가 지상에서 천국의 문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유디트가 제이드를 바라보며 고요히 웃었다.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온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경건한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비둘기가 퍼드덕 날아오르며 새하얀 깃털을 허공에 뿌리는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날 본 거겠지? 분명 날 본 게 맞을 거야.’

유디트와 눈이 마주친 제이드가 심장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유디트는 그저 객석에 시선을 두고서 연기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착각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차갑고 푸른 그녀의 눈동자가 제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은은한 조명이 드리워진 극장 안에 유디트와 자신, 단둘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제이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극에 집중했다. 다시 잠을 자겠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그의 열렬한 시선은 유디트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그녀의 눈빛, 몸짓, 관능적이면서도 서늘한 표정. 차갑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해골 군마를 이끌고 나타난 밤의 사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대에서 유디트가 가장 크게 보였다.

제이드는 그것이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에게 완벽하게 매혹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유디트가 실제로 무대에 등장한 배우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크다는 사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명 아래로 보이는 곱고 창백한 유디트의 손과 발이 보통 남자들보다 더 큼지막하다는 점 또한 인식하지 못했다.

연극은 유디트의 손에 아시리아의 장군이 목숨을 잃으면서 끝났다. 홀로페르네스는 유디트를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결국 비참하게 스러진 건 그였다.

짝짝짝!

황홀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던 제이드는 손뼉 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막이 내리자 객석을 채운 관객들이 커튼콜을 기다리며 힘차게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배우들 얼굴 사이에서 유디트를 찾았다. 차분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강하고 환한 조명 속에서도 그의 여신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만 잠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밝은 곳에 서 있는 그녀를 보자 어쩐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에이, 착각이겠지.’

제이드는 머리를 흔들며 어렴풋이 떠올랐던 생각을 뇌리에서 지워 버렸다. 상식적으로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어디선가 봤다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하아, 정말 예쁘다.”

헤벌쭉 입을 벌린 제이드는 손뼉 칠 생각도 못 하고 열심히 유디트만 바라봤다. 자신이 얼간이처럼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냥 행복했다. 두 손을 꼭 맞잡고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락 밴드를 눈앞에 둔 소녀 팬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환호와 갈채 속에 배우들이 전부 퇴장했다. 객석에서 손뼉을 치던 관객들도 하나둘씩 출구를 향해 몰려들었다.

제이드는 아쉬움이 잔뜩 묻어 나오는 얼굴을 하고서 터덜터덜 공연장을 나섰다. 밝은 곳으로 나오니 운명이니 뭐니 하며 들떴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커튼콜이 끝나자 그는 냉정한 현실을 깨달았다. 유디트는 배우였고 자신은 일개 관객에 불과했다. 즉, 무대가 아닌 곳에선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으윽, 그 자식이 누군지 도통 모르겠어. 분장 때문에 못 알아본 건가?”

커튼콜 할 때가 다 되어서야 부스스 눈을 뜬 해리가 손톱을 질겅질겅 씹었다. 공연 내내 졸았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충혈이 되어 있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수단이다.”

실의에 빠진 제이드는 해리가 옆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든 깨끗이 무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유디트 역을 맡은 여배우와 한 번 더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까 오늘의 캐스팅이라고 적힌 선간판을 자세히 들여다볼걸, 하는 후회가 스쳤다. 기억력이 크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제이드는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줄리아 어쩌고였던 것 같은데….

“제이드!”

초록색 보드에 공지되어 있던 여배우의 이름을 떠올리며 한숨짓고 있을 때였다.

“왜.”

제이드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상사병 초기 단계에 진입한 그는 온 세상이 잿빛으로 보였다.

“분장실에 가 보자. 거기 가서 그 자식이 누군지 물어보자고.”

해리가 결의에 찬 눈을 하고서 제이드의 양쪽 어깨를 붙들었다. 제이드는 허튼짓하지 말라고 못 박으려다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분장실을 기웃거린다면 줄리아를 만날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가자.”

냉큼 고개를 끄덕인 제이드는 해리와 함께 분장실을 찾아 나섰다. 분장실이 가까워졌음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꽃다발을 안고 있는 사람이 비좁은 통로에 여럿 보였다. 헤드셋을 낀 스태프와 의상을 옮기는 관계자들 때문에 복도는 병목현상을 일으켰다.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자 복도 끝에 문이 하나 보였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문짝이었다. 저 너머에 줄리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이드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잠깐. 남자 분장실?

기대감에 부풀었던 제이드가 푸쉬식, 하고 김빠지는 표정을 지었다. 복도에 문은 하나뿐이었고 거기서 나오는 사람들이 죄다 남자였다. 헤드셋을 낀 남자 스태프와 의상을 챙겨 어디론가 이동하는 분장사들이 들락거리는 곳이 여자 분장실일 리 없었다.

“셋을 센 다음 들어간다.”

분장실 문 앞에 당도한 해리가 결전을 앞둔 권투 선수처럼 훅훅, 하고 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한 제이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딴생각 중이었다. 여배우 분장실을 찾아갈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에라도 분장실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허전한 두 손 때문에 망설여졌다. 문화 공연 쪽으로는 문외한이지만 꽃도 없이 여배우의 대기실을 얼쩡거린다는 게 크나큰 실례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나, 둘!”

해리가 셋을 세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키가 훌쩍 큰 인영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헉.”

멍한 눈을 하고 있던 제이드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장본인, 오늘은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꿈의 여인이 바로 문턱 너머에 서 있었다.

유, 유, 유디트다.

쿵쾅쿵쾅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제이드의 귓가를 소란스럽게 했다. 아직 의상도 갈아입지 않은 그녀는 아까 무대에서 보았던 유디트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 어쩌지? 제이드, 인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공연 잘 봤다, 뭐 그런 칭찬들 있잖아.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너무 긴장이 돼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인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면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게다가 현기증 때문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신이 아득해진 제이드는 여배우인 그녀가 어째서 남자 분장실에서 나온 건지 의문조차 품을 수 없었다. 심지어 코앞에 있는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크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제이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유디트였다. 그녀의 굵직한 목소리를 들은 제이드와 해리는 눈을 부릅떴다. 세기말적인 미모를 소유한 여배우의 음성은 성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울림이 풍부했다.

“…저, 절 아세요?”

다리가 후들거렸다. 목소리도 덜덜 떨렸다. 제이드의 몰골은 여왕의 성은이라도 입은 돼지치기 소년 같았다. 유디트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의 목소리가 보통 남자보다 훨씬 굵다는 사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벌써 절 잊어버리신 겁니까.”

유디트가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제이드의 아랫배가 짜르르하고 당겨 왔다. 정말 죄송하다고 바닥에 엎드려 사죄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기, 죄송한데 말씀 좀 묻겠습니다.”

갑자기 해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벤 굴드라는 분이 누군지 알려 주십시오!”

친구의 어깨를 밀쳐 낸 해리가 과감하게 외쳤다. 적진 앞에서 전쟁 선포라도 하는 기세였다.

아벤 굴드?

해리에 의해 뒤로 밀려난 제이드는 눈썹을 비틀었다. 아벤 굴드. 자신이 아는 이름이었다. 입이 떡 벌어지도록 잘생긴 데다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잠깐.

제이드는 생각을 멈추고서 황급히 유디트를 올려다봤다.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유디트의 얼굴을 담아낸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설마, 설마.

이제야 유디트의 목 중간에 자리 잡힌 목울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슴도 평평했다. 직각으로 벌어진 탄탄한 어깨는 제이드를 품 안에 쏙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내가 아벤 굴드입니다.”

유디트의 대답이 제이드를 소리 없이 절규하게 만들었다.

지금껏 그가 겪어 왔던 그 어떤 실연보다 충격적이고 비극적이었다. 햄릿도, 오셀로도, 맥베스도, 그리고 리어왕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이드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여신님이.

영혼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고결한 마돈나가.

…남자였다.

제이드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서 로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발 누가 이건 꿈이라고 말해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해리는 말라비틀어진 도마뱀 같은 몰골을 하고서 구석 자리에 찌그러져 있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는 쿠릉, 쿠릉 하고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있었다.

“망했어, 제이드. 솔직히 잘생겨 봤자 제까짓 게 얼마나 잘생겼겠냐고 생각했는데…. 이건 인간의 레벨을 뛰어넘었다고.”

해리가 금발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굴드를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얼굴을 보고 난 이상 전의를 상실하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제이드는 좌절한 친구를 위로해 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천장의 조명만 올려다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굴드의 얼굴과 유디트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근데, 너. 왜 그 작자랑 아는 사이라고 나한테 말 안 했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던 해리가 갑자기 따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잘하면 멱살이라도 붙잡을 기세였다.

두 사람은 지금 굴드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식사 초대를 받은 사람은 제이드 한 명뿐이었지만.

“아는 사이라고 할 것도 없어. 전에 딱 한 번 만난 게 전부야. 숀이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친구의 터무니없는 비난에 제이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굴드가 해리의 연적이란 사실은커녕, 연극배우라는 것조차 몰랐다. 해리도 제이드에게 아벤 굴드란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분장실에서 유디트의 모습을 한 굴드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한 번 만난 것치고는 아주 친해 보이던데?”

해리가 흐응, 하고 콧바람을 불었다.

“네 연적이니까 아는 척하고 지내지 말라, 이거냐?”

그렇지 않아도 심경이 복잡했던 제이드는 망할 친구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어졌다. 기실 모든 악의 근원은 해리였다. 해리가 자신을 공연장으로 끌고 오지만 않았어도 그가 비운의 주인공으로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젠장.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이젠 하다못해 존재하지도 않는 여자한테 차였다. 제이드는 자신이 연애 못 하는 저주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물론 굴드와 다시 재회하게 된 건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밥을 얻어먹을 일이 있었는데 자신의 실수로 연락처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는 굴드의 얼굴에서 유디트의 잔상을 볼까 봐 심히 두려웠다.

“누가 아는 척하지 말래?”

해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잘 들어, 제이드. 어쩌면 이건 신이 주신 기회일지도 몰라.”

해리의 눈동자가 교활한 책사처럼 번뜩거렸다.

“그 괴물같이 잘생긴 작자랑 친해져서 약점을 좀 캐 봐. 네가 대놓고 살랑살랑하면 안 넘어올 남자는 없으니까. 네 야한 엉덩이… 끄억.”

이게 바로 매를 버는 주둥이였다.

제이드는 교양이니 체통이니 하는 단어들과 담을 쌓은 친구를 응징했다. 군화에 힘껏 새끼발가락을 밟힌 해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으윽, 뼈… 발가락뼈 부러진 것 같아.”

해리가 신음을 흘리며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엄살떨지 마.”

제이드가 코웃음을 쳤다. 뼈를 부러트리는 일이라면 이골이 났다. 그쪽 방면으로는 전문가라 해도 무방했다. 그가 군홧발로 내리찍은 강도는 절대 뼈가 부러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자, 잔인한… 놈!”

해리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제이드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제이드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다 저 자식이 잘못한 것이니 그가 미안해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오른쪽 발도 자근자근 밟아 줄까?”

“아뇨, 아닙니다.”

제이드가 크르릉, 하고 이를 내보이자 해리는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가 낭창낭창한 제이드는 언뜻 보기엔 싸움이라고는 쥐뿔도 못할 것 같은 외모였다. 하지만 해리는 자신의 친구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이드를 만만히 보고서 시비를 걸었다가 황천길 건널 뻔했던 덩치 큰 갱들을 여럿 목격했다. 제법 세력이 큰 유색인종 마피아들도 어지간해선 제이드를 건들지 않았다.

“어흠, 흠. 나 먼저 가 볼게. 식사 잘해. 부탁한다, 응? 파이팅!”

해리가 천적이라도 마주친 주머니쥐처럼 발을 절뚝거리며 황급히 멀어졌다.

저 자식이 끝까지.

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섰다. 네놈의 부탁 따위 누가 공짜로 들어줄까 보냐,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는 방정맞은 친구의 뒤를 쫓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남자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굴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급하게 나왔는지 머리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오래 기다리긴요. 천천히 나오셨어도 됐는데.”

괜히 머쓱해진 제이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분장실에서 마주쳤을 때와 달리 굴드는 완벽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디트의 그림자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유디트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분장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이 훨씬 더 관능적이었다. 남자에게 고혹적이니 관능적이니 하는 단어를 써도 위화감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지만.

“기다리고 계신다는 걸 빤히 아는데 그럴 수야 없죠.”

굴드는 식사에 술을 곁들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하며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밤거리의 소음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 거리는 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과 공연 관람을 마치고 나온 관객들로 적잖이 혼잡했다.

굴드와 나란히 걷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우뚝 걸음을 멈추고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거나 졸졸 쫓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제이드는 ‘너무 잘생기면 그것도 나름 불편한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딜 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쫓아온다면 신경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들 테고 말이다.

“택시를 타죠.”

이 근방에서 밥을 먹을 줄 알았는데 남자는 택시를 잡았다.

그와 나란히 택시 뒷좌석에 앉은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세수만 한 게 아니라 샤워도 했는지 굴드에게서 깔끔한 비누 냄새가 났다.

“공연장 안에 샤워 시설도 있나 보죠?”

“네. 공연을 하다 보면 땀을 흘리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샤워까지 한 거면 엄청 빨리 나온 거였다.

제이드는 감탄한 얼굴을 하고서 굴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몸을 씻는 건 둘째치고 머리까지 말리긴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대단했다. 얼마나 서둘렀을지 눈에 선했다. 군인들이야 3분 만에 샤워를 뚝딱 해치우기도 했지만, 그건 머리가 짧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택시는 17번가에 위치한 명품 거리에서 멈춰 섰다. 명품 샵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카페와 식당은 아직 불을 밝히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설마 여기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긴장한 제이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입맛이 저렴한 그는 정장을 차려입고서 우아하게 칼질하는 건 영 취향이 아니었다. 그의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남이 사 주는 밥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는 답답하고 불편했다. 저런 비싼 레스토랑에서 한 끼를 먹을 바에는 차라리 저렴한 식당에서 배가 터지도록 요리를 주문하고 2차로 술집에서 위스키를 병째로 시키는 쪽이 백배 나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예 레스토랑을 멀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첫 데이트 장소를 레스토랑으로 잡은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곳들은 재킷 한 장만 걸치면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는 식당들이었다.

“이쪽입니다.”

제이드와 보폭을 맞춰 걸음을 옮기던 굴드가 골목 귀퉁이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가리켰다. 다행히 상류층 이외의 사람은 출입 금지라는 보이지 않는 팻말이 붙은 가게들과 달리 소박한 분위기를 풍기는 식당이었다.

휴, 살았다.

한시름 놓은 제이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굴드를 쫓아갔다. 예약을 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가게인지 서글서글한 인상의 매니저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가게 안의 조명은 은은하고 포근했다. 실내에는 보컬이 매력적인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클래식이 아닌 스페인풍의 느릿한 노래였다. 제이드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바다와 인접한 이국의 어느 식당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마음에 드신 것 같군요.”

굴드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예. 여자 친구가 생기면 꼭 데려오고 싶은 곳이네요.”

제이드가 어린애 같은 눈을 하고서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목을 길게 뽑은 그의 모습은 호기심 많은 미어캣과 흡사했다. 여기를 첫 데이트 장소로 삼으면 식사도 마치기 전에 차이는 비극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 연인이 없으신가 보군요.”

메뉴판을 넘기며 굴드가 말했다. 그의 등 뒤에선 다정한 커플이 촛불을 가운데 두고서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남자끼리 식사를 하러 온 테이블은 제이드와 굴드뿐이었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제이드는 숱하게 차였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는 유디트의 얼굴이 뇌리에 그려졌다. 전자와 후자에 차이점이 있다면 후자는 좋아한다는 마음이 제대로 싹트기도 전에 희망이 짓밟혔다는 사실이다. 고백도 못 해 보고 차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됐어. 이제 그만 생각하자고. 실제로 존재하는 여자도 아니잖아.

제이드는 미련을 떨쳐 버리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넣었다. 설혹 유디트가 정말 여자였다 하더라도 그와 잘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어차피 대시했어도 차였을 게 자명했다. 절세 미녀인 여배우가 백수와 다를 바 없는 가구제작자 겸 해결사를 거들떠볼 리 없었다. 손에 닿지 않는 포도는 신 포도라고 생각하는 쪽이 마음 편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려했던 것과 달리 굴드의 얼굴에서 유디트의 자취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제이드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굴드를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굴드 씨는 어떻습니까?”

메뉴판을 덮은 제이드가 한숨 내쉬듯 물었다. 뭘 고를지 고민하는 게 귀찮아서 메인은 좀처럼 먹기 어려운 포터하우스 스테이크로 정했다.

“저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사를 온 지 이제 겨우 한 달이니까요.”

와인을 고르는 중인지 굴드가 메뉴판에 시선을 두고서 대답했다. 파트너가 없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투였다.

“에이, 굴드 씨 정도면 한 달이 아니라 하루밖에 안 됐어도 사귀는 사람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설마요. 그래도 높게 평가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굴드가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천천히 고개를 젓는 모습이 남자가 봐도 참 근사했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모습도 제이드 안에서 호감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게 했다.

불현듯 ‘그 괴물같이 잘생긴 작자랑 친해져서 약점을 좀 캐 봐’라고 지껄이던 해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콱 눈살을 찌푸렸다.

“언짢아 보이는데 괜찮으십니까?”

사락사락하는 소리를 내며 메뉴판을 넘기던 굴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음. 아닙니다. 뭘 좀 생각하느라.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제이드는 얼른 표정을 풀며 손을 내저었다. 해리 그 자식 때문에 모처럼의 만찬을 앞두고 기분을 망칠 순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건 밥을 사 주는 사람에게도 실례였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앞치마를 두른 웨이터가 종이와 연필을 들고 나타났다. 동글동글하고 붙임성 있어 보이는 외모였다. 종업원도 주인도 다들 가게 분위기처럼 상냥했다. 덕분에 제이드는 해리 때문에 찝찝해졌던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제이드는 포터하우스 스테이크를, 그리고 굴드는 티본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와인 쪽으로는 아는 게 없어서 전적으로 굴드에게 맡겼다. 굴드는 특이하게도 스테이크를 날것에 가까운 상태로 가져다 달라고 요구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레어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참, 근데 말이죠. 예명을 쓰시는 건가요?

전채 요리가 나와서 제이드는 샐러드를 아그작아그작 씹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고기를 섭취할 생각에 식욕이 왕성하게 돌았다. 해리 때문에 저녁도 못 먹고 공연장으로 끌려와서 더 배가 고팠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만.”

웨이터가 따라 준 와인을 들어 올리며 굴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가느다란 와인글라스의 목을 감싸 쥐는 광경이 아찔하리만치 인상적이었다.

“어? 그럼 왜 오늘의 캐스팅에 굴드 씨 이름이 없었던 거죠?”

제이드는 출연진의 이름이 적혀 있던 초록색 보드를 떠올렸다. 거기에 여자 이름이라고는 줄리아밖에 없어서 그는 유디트가 줄리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장실 앞에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제대로 공지가 되지 않았나 보군요. 막이 오르기 직전에 여배우가 갑자기 쓰러져서 급한 대로 제가 무대에 오른 겁니다.”

굴드가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랬구나.”

제이드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대타로 무대에 올랐다는 건 굴드가 연기하는 유디트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가공의 인물이지만 무대 위에서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던 제이드로서는 기운 빠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스테이크가 나왔다.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이드는 금세 낯빛을 바꾸었다. 그가 생각해도 참 단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먹을 것에 약했다. 게다가 테레사에게 차였던 날, 큰맘 먹고 주문했던 스테이크에 손도 대지 못하고 물세례를 맞아야 했다.

고기다, 고기.

제이드는 떨리는 마음으로 육질이 부드러워 보이는 스테이크에 나이프를 가져갔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영접하는 고기님인지 모르겠다. 질기고 퍽퍽한 스테이크가 아니라 어린 송아지의 허리 살을 통째로 베어 낸 부위라는 사실도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단백질을 섭취할 생각에 잔뜩 기분이 들뜬 제이드는 덜그럭, 덜그럭, 달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고아원 출신인 데다 군대에서 10여 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그는 식사 예절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급하게 칼질을 하다가 무심코 굴드의 접시로 시선을 던졌다. 엉망진창으로 고깃덩어리가 해체된 그의 스테이크와 달리 굴드의 접시는 정갈하기 짝이 없었다.

제이드는 손을 멈추고서 굴드가 나이프를 놀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표면도 벌건 빛이 도는 스테이크에 은색 나이프가 닿을 때마다 핏물이 불거져 나왔다. 하얀 접시에 번지는 핑크빛 액체가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마치 남의 침실이라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변태야? 정신 차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야릇한 광경을 뇌리에서 쫓아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포크를 쥐고서 고기를 푹 찍었다. 자신처럼 칼질에 서툴지 않은 굴드가 부러웠다. 그가 나이프를 손에 쥐고서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 써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절대 타인에게 자랑할 거리가 못 되었다. 오히려 거부감을 심어 준다면 모를까.

음악이 바뀌었는지 나른하고 격정적인 탱고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제이드는 육즙이 풍부한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굴드를 흘끔 바라보았다. 제이드는 절반 가까이 접시를 비웠는데 남자는 요리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아니, 스테이크를 썰어 두기만 했을 뿐 아예 입에 대지도 않은 형태였다.

왜 안 먹지? 라고 제이드가 고개를 갸우뚱한 순간이었다.

“제이드.”

스테이크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와인으로 목만 축이던 굴드가 입을 열었다.

“예.”

입 안 가득 고기를 머금고 있던 제이드가 얼른 스테이크를 목으로 넘겼다. 급하게 고기를 삼켰더니 목구멍이 메었다. 그는 흘끔 굴드를 바라보며 물을 마셨다.

“왜 제게 연락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를 주시지 않더군요.”

굴드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듣기 좋은 근사한 음성에는 책망하는 어조가 실렸다. 제이드가 연락을 하지 않아서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아, 그게 말이죠.”

유리잔을 내려놓은 제이드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화제가 수면으로 떠오르리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막상 닥치고 나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날 집에 들어가자마자 깜빡 손을 씻어 버렸어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진짜입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도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에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다. 공짜 밥을 얻어먹을 기회가 날아갔는데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을 리 없었다.

“뭐, 그래도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됐잖아요. 만날 사람은 다 만나게 되어 있나 봐요.”

허허, 하고 겸연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행이군요. 절 만나기 싫어서 일부러 연락을 안 하는 줄 알았습니다.”

굴드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이드의 뺨을 쓰다듬었다.

제이드는 드라이아이스라도 피부에 닿은 것처럼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후회했습니다. 그때 차라리 제가 제이드의 연락처를 받았어야 했는데, 하고 말이죠.”

제이드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가늘고 긴 목덜미 쪽으로 이동했다.

흐드러질 것 같은 농염한 탱고의 선율과 실내를 어둡게 밝히는 로맨틱한 촛불이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게 안에 다른 손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이드는 자신과 굴드 단둘만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거….

제이드는 나른한 미소를 띤 굴드를 바라보며 꼴깍꼴깍 생침을 삼켰다. 그의 피부가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굴드의 손이 차가워서 자신의 체온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굴드의 손이 늘어진 셔츠 아래, 그러니까 쇄골을 향해 내려오는 것 같았다.

“저기!”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던 제이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굴드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피부를 건드리던 손가락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거. 왜 안 드세요?”

제이드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굴드의 시선을 피하며 팔을 뻗었다. 손끝이 가리키는 것은 옅은 색의 피가 소스처럼 고여 있는 흰 접시였다.

“제가 식사를 하지 않아서 신경 쓰이셨던 겁니까?”

스테이크를 내려다본 굴드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예, 뭐. 혼자만 먹는 것 같아서.”

제이드의 피부를 어루만지던 차가운 손이 떨어졌다.

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뺨을 긁적거렸다. 그의 눈길은 보기 좋게 썰어 놓기만 했을 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스테이크에 꽂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금방 식욕이 생길 줄 알았는데.”

굴드가 은색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진짜 은 식기인지 이 레스토랑의 포크와 나이프는 무게가 묵직했다.

“입맛이 없으면 억지로 드시지 마세요. 체할지도 모르잖습니까.”

제이드가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입맛이 없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공연을 마치고 나왔으니 당연히 허기를 느끼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제 것도 드셔 주셨으면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굴드가 은 식기를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먹지 않아도 된다는 제이드의 말에 바로 손을 놓는 걸 보니 확실히 식욕이 없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돼요?”

아깝다는 얼굴을 하고서 스테이크를 흘끔거리던 제이드가 반색했다. 정신없이 고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은 탓에 그의 접시에는 이제 아스파라거스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 접시를 비웠지만 배가 차려면 아직 멀었다. 먹성이 좋은 제이드로서는 굴드의 제안이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셰프에게 좀 더 익혀 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입을 헤벌쭉 벌리며 좋아하는 제이드를 바라보며 굴드가 미소 지었다. 내숭 떨지 않고 복스럽게 밥을 먹는 연인을 눈앞에 둔 남자 같은 눈빛이었다.

“오해 사기 좋은 성격인데.”

제이드는 웨이터에게 접시를 건네는 굴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속 꽤나 끓였을 것 같았다. 굴드가 바람기 다분한 성격인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만난 게 오늘이 두 번째이니 굴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굴드는 연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워낙 잘생긴 데다 친절해서 의도치 않게 사람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제이드의 뺨을 쓰다듬던 행동만 봐도 그랬다. 만약 제이드가 여자거나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싱숭생숭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는 말을 들었다면 누구라도 홀딱 넘어갔을 게 분명했다.

웨이터가 알맞게 익은 티본스테이크를 다시 내왔다. 제이드는 냉큼 고기 조각들을 입 안으로 몰아넣었다. 혀끝에 번지는 고소한 육즙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

제이드가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스테이크를 야무지게 입가로 가져갈 즈음이었다.

“가볍게 맥주를 마실까 하는데, 제이드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말입니까?”

입을 아, 벌렸던 제이드가 포크를 든 손을 멈췄다. 굴드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의아한 색이 가득했다. 이런 가게에서 와인이나 샴페인 말고 다른 술을 팔 리가 없었다.

“네.”

굴드가 웨이터에게 눈짓을 보내며 대꾸했다. 오픈된 주방을 서성이던 웨이터는 냉큼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으잉? 정말 맥주를 파네. 아까는 왜 못 본 거지?

웨이터가 가져다준 메뉴판을 펼친 제이드는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맨 뒷장에 맥주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가짓수는 많지 않았지만 병맥주를 판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드실 건가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메뉴판을 살피는 제이드에게 굴드가 물었다.

“네.”

제이드는 뜸 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이크로 배를 채우고 거기다 맥주까지 곁들이다니, 이보다 더 환상적인 조합은 없었다.

“여기 정말 마음에 드네요.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낸 겁니까.”

차가운 병맥주를 손에 쥔 제이드가 감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웨인 시티에 살기 시작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된 굴드가 이렇게 멋진 장소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가게 인테리어부터 흐르는 음악, 거기다 맥주까지. 그는 단골이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우연히 발길이 이쪽으로 향하더군요.”

굴드가 맥주병을 입가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제이드는 신기하다는 눈을 하고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최소 50년은 된 와인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을 것 같은 남자가 기분 좋게 맥주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제이드는 어쩌면 굴드가 자신과 취향이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을 같이하거나 대화를 많이 나눈 건 아니지만 이 사람과는 친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함께 있을 때 편한 기분이 드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또 길을 잃었다가 발견한 거 아닙니까?”

제이드는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불현듯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

“아니라고 잡아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군요.”

“진짜요? 완전 의왼데.”

제이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리 반듯하고 지적으로 생긴 남자가 길치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실망을 느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았다. 지나치게 완벽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라 제이드는 지금까지 그가 조금 어려웠다.

“더 의외인 구석도 많습니다.”

굴드가 싱긋 웃으며 제이드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그게 뭔데요?”

제이드가 눈을 반짝 빛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비밀입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만 알려 주시죠.”

제이드가 테이블 모서리에 턱 하고 팔을 걸쳤다. 그 모습은 코 묻은 중학생의 지갑이나 노리는 어설픈 동네 깡패를 연상케 했다.

“다음번에 또 오게 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약속하는 겁니다?”

제이드가 협상 타결을 알리듯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단순한 제이드는 자신이 굴드의 술수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 우선 연락처부터 교환해야겠군요.”

굴드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웨이터를 불렀다. 펜과 메모지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웨이터가 압생트라는 가게 이름이 인쇄된 메모지와 펜을 가져다주었다. 압생트는 19세기에 예술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술 이름이었다. 연극배우인 굴드와 압생트라는 이름의 조합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손잡이인 겁니까?”

종이에 또박또박 전화번호를 적고 있는데 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굴드를 바라보았다. 굴드가 펜을 쥔 제이드의 오른쪽 손목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오른손잡이인데요.”

제이드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굴드에게 메모지를 내밀었다.

“시계를 오른손에 차고 있어서요.”

굴드의 대답을 들은 제이드는 그제야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오른손잡이는 왼손에 시계를 차는 게 보통이었다. 꼭 그러라는 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개는 자주 쓰는 손의 반대편에 시계를 찼다.

“뭘 좀 가리고 있는 겁니다.”

제이드가 이마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상처… 같은 것 말입니까?”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굴드가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뭐, 비슷합니다. 하지만 칼로 손목을 그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세요.”

제이드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며 맥주를 집어 들었다. 굴드가 마시다 만 맥주병에 자신의 것을 부딪쳤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였다. 시계가 가리고 있는 건 사실 흉터가 아니라 문신이었다.

“다행이군요.”

흐린 표정을 하고 있던 굴드가 안심했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시계에 대한 화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이드는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흘끗 곁눈질했다. 시계 아래 감추고 있는 뱀 문신. 그 뱀은 마치 제이드를 구속하고 있는 것처럼 손목을 휘감고 있었다.

그도 어쩌다 오른쪽 손목에 문신이 생긴 건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더욱 기묘한 사실은 그 문신이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문신을 굳이 시계로 감추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자신의 손목을 노출하고 다니는 게 꺼려졌다. 그의 피부에 새겨진 뱀 문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날까 봐….

이런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는 문신을 알아보는 사람과 만나게 된다면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원래 그는 미신이나 징크스 같은 것 따위에 연연하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라틴풍 음악이 들려왔다. 레스토랑 주인이 서비스라며 나초와 웨지감자를 가져다주었다. 술과 공짜로 제공된 안주, 듣기 편한 음악. 문신에 대한 상념이 희미해졌다. 제이드는 흐뭇한 얼굴을 하고서 맥주를 비웠다. 도심 속의 휴양지가 따로 없는 환경이었다.

맥주 한 병으로 기분 좋게 식사를 마무리한 제이드는 굴드와 함께 압생트 밖으로 나왔다. 밥을 먹는 동안 잠깐 비가 왔는지 노면이 가로등의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도 축축했다.

“공연이 끝나면 늘 혼자 오곤 했는데, 역시 동행이 있는 쪽이 좋군요.”

큰길로 향하며 굴드가 말했다. 인도를 따라 걸음을 내딛는 그의 옆모습은 마치 외로운 객지 생활 끝에 친구를 사귀게 된 소년 같았다. 제이드는 그를 흘끔 바라보며 보기보다 외로움을 타는 성격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지하철 입구가 보이는 신호등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굴드가 예상 밖의 제안을 했다.

“굴드 씨 집하고 제가 사는 동네하고 거리가 꽤 멀 텐데요.”

제이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굴드가 당연히 메이슨 가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메디슨 가는 값비싼 고층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지역이었다.

“아뇨. 저도 9번가에 삽니다.”

굴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9번가? 9번가 어디요.”

제이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 뜻밖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굴드의 아파트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웃이네요.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제이드는 굴드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하니까 굴드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동네 술친구라도 얻은 기분이었다.

“타시죠.”

때마침 노란 택시가 길 건너편에 멈춰 섰다. 굴드가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먼저 택시에 접근한 굴드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왠지 에스코트라도 받는 것 같아서 제이드는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뒷좌석에 함께 앉았다. 손님에게서 행선지를 들은 택시가 매연을 뿌리며 출발했다.

택시가 빠른 속도로 거리를 달렸다. 노란색 차량이 지나친 건물 귀퉁이에서 검은 인영이 스륵 빠져나왔다. 놈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본 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괴한의 발걸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소심했다. 잇몸도 입술을 훔친 손등도 선혈로 시뻘건 빛을 띠었다. 습기와 안개,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기괴한 그의 모습을 흐릿하게 감추어 주었다.

수상쩍은 인물이 빠져나온 비좁은 골목엔 검은 비닐 봉투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야옹야옹하고 고양이가 불길한 노래를 불렀다. 고양이와 떠돌이 개가 주변을 맴돌 때마다 검은 비닐 봉투 위에 고인 빗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먹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는 으슥한 골목에 달빛이 깃들었다. 매니큐어를 바른 손이 검은 봉투 사이로 삐죽 나와 있었다. 피가 죄 빠져나간 것처럼 피부가 파리하게 질린 손은 마네킹보다 뻣뻣했다.

쓰레기차가 다가와 철제 쓰레기통을 뒤집었다. 쓰레기통 맨 위에 놓여 있던 손은 빗물과 함께 쓰레기차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골목에 누군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도시의 진정한 주인인 쥐와 벌레, 그리고 까마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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