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제이드.
낡아 빠진 술집의 단골손님들은 바에 엎어져 훌쩍거리는 청년을 측은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힘내, 제이드. 첫 데이트 때 차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그래. 여자는 별처럼 많아. 그리고 별처럼 멀지.”
팔뚝에 털이 복슬복슬한 남자들이 위로인지 약을 올리는 건지 모를 말을 건네며 제이드의 등을 두드렸다.
이 도시에 정착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청년이 실연을 당한 건 오늘이 열아홉 번째였다. 열아홉 번이나 차였다고 해서 그가 못생겼다거나 매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여자들이 선호하는 남자 축에 속했다. 사연 많아 보이는 눈빛에 섹시한 눈초리, 거기다 참한 몸매까지 가졌으니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했다. 특히 엉덩이가 훌륭했다. 그럼에도 제이드에게는 첫 데이트 때마다 차이는 징크스가 있었다.
“톰슨, 내가 뭘 잘못한 겁니까?”
제이드가 맑은 콧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 년 애정도 식을 만한 모습이었지만 펍의 남자 손님들은 제 새끼 보듬듯 휴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크응, 팽! 내가 장미꽃을 안고서 테레사의 아파트 문을 두드릴 때까지만 해도 분명 분위기가 좋았단 말입니다.”
톰슨이 내민 휴지로 거창하게 코를 풀며 제이드가 말을 이었다. 펍에 구비된 싸구려 화장지라 코끝이 까끌까끌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장미꽃을 발견한 테레사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 제이드.’
남미 출신임을 증명하듯 매끈한 초콜릿 피부를 가진 그녀는 감격한 얼굴을 하고서 제이드를 꽉 끌어안았다. 더불어 아파트 주민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에서 정열적인 키스도 퍼부었다.
“당연히 그랬겠지.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지?”
삐쩍 마른 체구에 M자형 탈모가 진행 중인 그렉이 위스키를 마시며 물었다.
“그야 택시를 타고서 레스토랑으로 향했지. 티본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와인도 시켰고, 식당 종업원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어.”
“한 잔 마시게.”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나이 지긋한 마스터가 제이드에게 얼음물을 내밀었다. 펑펑 울고 난 탓에 금붕어처럼 눈이 부어 있었다.
“정석이군.”
“난 낯간지러워서 절대 못 할 짓이지만, 나쁘지 않아.”
각양각색의 피부색을 가진 남자들이 제이드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75점 주겠어. 너무 구태의연한 데다 촌스러워.”
빨간 립스틱을 칠한 올리비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술집 가수가 직업인 그녀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실은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식사 도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억센 동유럽 악센트를 가진 세르게이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딱히 특별한 건 없었어. 밥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그리고 테레사가 갑자기 일어섰지.”
차갑게 돌변한 테레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제이드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부터 언짢은 기색을 보이던 그녀는 급기야 ‘나한테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고 쏘아붙이며 제이드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바이올린 연주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물론 형편없는 연주긴 했지만 그 웨이터, 친절하고 서비스도 좋았는데.”
제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지폐를 꺼냈다. 10달러짜리 지폐를 본 마스터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슬프지만 이게 오늘의 마지막 주문이 될 것 같았다. 장미꽃에 레스토랑까지 예약하는 무리를 한 덕분에 빈털터리 상태였다. 제이드의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마스터에게 거슬러 받은 지저분하고 생선 비린내 나는 1달러 50센트가 전부였다.
“…저기 제이드.”
톰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친절한 웨이터 이야기가 나오자 손님들은 서로 재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어쩌다 데이트가 꼬이게 되었는지 실마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예, 말하세요.”
마스터가 건네준 호박색 액체를 홀짝거리며 제이드가 대답했다. 새치름한 눈매를 가진 청년이 맹하게 대꾸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젠장, 귀엽잖아.
제이드를 에워싼 사내들이 입술을 깨물며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가슴 털이 부숭부숭한 그들은 당장에라도 제이드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 싶은 격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 충동을 실행으로 옮겼다가는 주먹이 날아올 게 뻔했다.
성격은 허술하지만 제이드는 살벌한 격투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전역하기 전까지 마지막 몇 년을 보냈던 임지가 그린텔발트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린텔발트는 악명 높은 전쟁터였다. 지뢰나 폭탄 테러로 하루에도 수십 명씩 불구가 되고 시체가 되어 들것에 실려 나갔다. 민간인, 군인 할 것 없이 전부 참혹한 일을 겪었다. 제이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이드.”
그나마 이 자리에서 제일 이성적인 그렉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요망한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성을 시험에 들게 했다. 코끝은 빨갛고 눈꺼풀은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서 제이드는 더욱 무방비해 보였다.
정신 차리자.
그렉이 눈꺼풀을 꾹꾹 누르고서 말을 이었다.
“혹시 그 바이올린을 켠 웨이터가 연락하고 싶다면서 쪽지를 주지 않았어?”
“맞아.”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제이드가 눈에 힘을 주었다.
역시.
마스터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계속 널 쳐다봤겠지.”
“남자 손님들이 괜히 네 곁을 얼쩡거리거나, 은근슬쩍 어깨를 부딪쳐서 관심을 끌려고 했을 테고.”
그렉이 물꼬를 트자 기다렸다는 듯 손님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다들 용하네. 설마 단체로 내 뒤라도 밟은 거야?”
“제이드, 어쩔 수 없어. 네 운명을 탓해라.”
톰슨이 눈을 휘둥그레 뜬 제이드의 어깨를 두들겼다.
“운명을 탓하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그게 말이야. 여자들은… 후, 아니다. 잊어버려.”
톰슨이 말을 하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그 어떤 여자도 데이트 자리에서 애인이 자신보다 주목받는 걸 용납할 리 없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둔감한 제이드는 설명해 줘도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뭐야, 왜 말을 하다 맙니까.”
톰슨이 말을 얼버무리자 제이드가 답답하다는 듯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난 여자랑 안 될 모양이야.”
홧김에 술잔을 비운 제이드가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자포자기에 빠지긴 아직 일러. 너 좋다는 여자가 한두 명이야?”
“그래, 제이드. 넌 아직 젊어. 자신감을 가지라고.”
방황하는 십 대 같은 매력을 가진 제이드는 여자들에게 모성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실제 성격은 고독이니 고뇌니 하는 것들과 거리가 먼 단세포였지만, 하여튼 외모만 보면 그랬다.
깔끔한 얼굴과 우수에 젖은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 발레리노처럼 곧고 늘씬한 체격은 여자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넋 나간 눈으로 그의 엉덩이를 훔쳐보는 게 여자들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더 최악인 건 자신이 여자들에게만 노려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제이드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현실이었다.
술집은 왁자지껄했다.
제이드는 올리비아와 손님들이 건네는 위로와 칭찬을 흘려들으며 술잔을 빙빙 흔들었다. 얼음밖에 남지 않은 유리잔에서 달칵달칵하는 소리가 났다. 이 얼음들도 시간이 지나면 형체도 없이 녹아 버릴 터였다.
“이참에 확 성향을 바꿔서 남자랑 잘해 볼까.”
지친 눈을 한 제이드가 천장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안 돼!”
“절대 안 돼.”
제이드의 혼잣말을 들은 손님들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호 할아버지처럼 하얀 눈썹을 가진 마스터도 눈꺼풀을 커다랗게 벌렸다.
“제이드, 정신 차려. 그렇지 않아도 엿 같은 이 동네를 생지옥으로 만들 작정이야?”
흐뭇한 표정으로 제이드의 늘씬한 허벅지를 감상하던 올리비아가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다.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그녀는 손톱이 망가지든 말든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다들 왜 이리 과민 반응이야. 그냥 한번 해 본 소린데.”
취기가 단번에 가셨다. 제이드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님들의 절박하고 다급한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장난이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몰라?”
“해도 되는 농담이 있고 하면 안 되는 농담이 있는 거야. 네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기나 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손님들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철없는 마왕의 손에서 세계 평화라도 지켜 낸 사람들 같은 얼굴이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먼저 일어납니다.”
제이드가 으쓱 어깨를 추어올리며 재킷을 집어 들었다. 혼잣말 한번 잘못했다가 기분만 더 심란해졌다. 술을 더 마시고 싶어도 돈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장미꽃만 사지 않았어도 서너 잔은 더 너끈했을 텐데…. 하지만 뒤늦게 후회해 봤자 시간을 되돌릴 순 없었다.
거리로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확인했다. 다행히 붕어눈을 하고 있던 눈꺼풀이 많이 가라앉았다. 다만 한바탕 질질 짜고 난 후유증으로 골이 조금 지끈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와 마스터에게 냅킨을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코를 팽, 푸는데 막 펍에 들어온 손님 두엇이 테이블에 앉았다.
“연쇄살인의 조짐이 보인다는 소리 들었어?”
“아, 전기톱에 당한 것처럼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는 노숙자들 말하는 거지? 사체에 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던데. 무슨 수를 쓴 거지?”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 맥주로 목을 축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코를 푸느라 정신이 없던 제이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딸랑, 하는 종소리를 들으며 거리로 나왔다. 술집 간판을 뒤로한 제이드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1달러 50센트면 아슬아슬하게 차비를 낼 수 있지만 버스가 끊긴 시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택시를 탈 형편이 못 되는 제이드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임에도 형광이 도는 네온사인이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번화가를 벗어나 음침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갱들이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으슥한 슬럼가에 뚜벅, 뚜벅 하는 군홧발 소리가 났다. 훈련받은 군인들 특유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였다.
군화를 신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제이드였다. 전역한 지 일 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운동화나 구두보다 군화가 훨씬 편했다. 열여덟 때부터 군에 몸담아 왔던 터라 민간인이 된 이후로도 그는 예전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안개가 자욱했다. 광활한 늪지대를 메운 땅 위에 세운 도시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기후가 이따위인 건지, 웨인 시티는 툭 하면 안개가 끼었다.
낮에도 해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비가 자주 내리는 것도 아닌데 하늘엔 늘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웨인 시티의 범죄율이 타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건 음울하고 음습한 날씨 탓일지도 몰랐다.
사위가 고요했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대부분의 건물에 불이 꺼져 있었다. 차들도 다니지 않았고 행인은 제이드뿐이었다. 안개 낀 거리를 어슴푸레 밝혀 주는 건 먼지와 날벌레가 잔뜩 쌓인 가로등밖에 없었다.
하수구에서 역한 냄새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쥐를 입에 물고 총총 사라졌다. 짙은 안개, 인적 없는 거리, 타르처럼 녹아내리는 어둠. 범죄를 저지르기 딱 좋은 밤이었다.
“가진 거 다 내놔!”
비좁은 골목의 정적이 깨졌다.
귀를 쫑긋 세운 제이드는 걸음을 멈췄다. 얼른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동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약에 찌든 눈을 한 삼인조 강도가 한 남자를 협박하고 있었다.
이런, 이런.
제이드의 눈동자에 생기가 반짝거렸다. 술도 다 깨버리고 기분도 엉망진창이었는데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뚜둑, 뚜둑 손가락을 꺾으며 망설임 없이 골목으로 굽어 들어갔다. 지독하게 운이 없는 삼인조 강도를 손봐 주기 위함이었다.
괴한들은 전형적인 마약중독자들이었다. 강도들에게 에워싸인, 곧 피해자가 될 처지인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의 그림자가 남자를 비스듬히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할 자식아, 지갑 없어? 그럼 시계랑 신발, 억!”
침을 튀겨 가며 칼을 흔들던 강도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접근한 제이드가 그의 목덜미를 낚아챈 것이다.
“뭐야, 이 자식! 억!”
전직 군인인 제이드는 신속하게 강도들을 제압했다. 한 놈은 바닥에 메다꽂은 뒤 얼굴을 군홧발로 걷어찼고, 다른 한 놈은 뒤에서 팔뚝으로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담벼락을 넘기 위해 쓰레기통 위로 뛰어오르는 마지막 하나까지 가뿐하게 처리했다.
“후, 괜찮아요?”
제이드가 개운한 얼굴을 하고서 손바닥을 털었다. 봉변을 당할 뻔했던 남자는 아직도 짙은 어둠 속에 머물렀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고급 수제화와 견고해 보이는 어깨뿐이었다.
“예. 덕분에.”
건물 그림자 밖으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제이드는 순간적으로 입을 떡 벌렸다. 키가 무척 크고 균형 잡힌 체격을 가진 미형의 남자였다.
남자는 불길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예쁘장하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름답다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잘생겼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둠을 녹인 것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밖에 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오케스트라를 탄탄하게 받치는 콘트라베이스처럼 울림이 풍부했다. 클래식한 옷차림과 절도 있는 걸음걸이, 그리고 지적인 눈동자는 그가 하이클래스의 교육을 받은 사람임을 증명했다.
뭐야,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닐 것 같은 사람이 왜 이런 동네에 있는 거지?
제이드는 차분하게 미소 짓는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강도를 당할 뻔했던 사람답지 않게 침착하고 태연했다. 흡사 밤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분위기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흰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아뇨, 뭘.”
저도 모르게 넋을 빼놓고 남자를 쳐다보던 제이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같은 성별인데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매혹적인 외모였다. 그에게 내밀어진 손은 피아니스트처럼 길쭉하고 우아했다.
“만나서 반갑…?”
헤헤거리며 손을 맞잡던 제이드가 흠칫 어깨를 튕겼다.
섬뜩한 감각이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섬세하고 고혹적이라 생각했던 남자의 손이 시체 안치소에 보관된 시체보다 차가웠다.
남자는 움찔 놀라는 제이드를 고요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저기, 음. 그쪽, 경찰에 신고할 겁니까?”
제이드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손을 잡아 뺐다.
흉한 일을 당할 뻔했잖아.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도 당연해, 라고 머릿속으로 되뇌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뇨. 금전적인 피해를 본 것도 아니니까 됐습니다.”
제이드를 물끄러미 관찰하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슬쩍 손을 뺀 행동에 대해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도 제대로 수사를 해 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남자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아, 확실히 그렇긴 하죠.”
경계하는 눈초리로 남자를 곁눈질하던 제이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짓궂은 표정을 짓자 거짓말처럼 긴장이 풀렸다. 조금 전 느꼈던 꺼림칙한 느낌도 일시에 사라졌다. 서늘한 첫인상과 달리 나름 유쾌한 면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동네에 발을 들인 겁니까.”
제이드는 청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으며 물었다.
묻고 나니 수상쩍었다. 어쩌면 저 남자는 매춘부를 사기 위해 우범지대까지 흘러든 것일지도 몰랐다.
솔직히 상류층으로 보이는 남자가 슬럼가를 찾을 이유는 그것밖에 없지 않나? 고상한 얼굴을 하고서 창녀를 학대하는 페티시는를 가진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때로는 창녀가 아니라 남창을 괴롭히는 변태들도 있었다.
“혹시….”
의혹 가득한 눈길로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런, 아닙니다.”
남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길을 잃은 것뿐입니다.”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걸 알고 있는지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제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의 우려대로 해명을 믿지 않는 기색이 다분했다.
“거, 남자끼리인데 점잔 빼지 맙시다. 어떤 타입이 좋아요? 금발? 빨강 머리?”
제이드가 히죽 웃으며 남자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모범적이고 금욕적인 도련님을 어떻게 해 보려고 시도하는 노련한 삐끼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부탁이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남자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은 그는 이사 온 지 아직 한 달도 안 되었다는 말을 혼잣말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이사 왔어요?”
능글맞은 말투로 남자를 쩔쩔매게 만들었던 제이드가 눈썹을 비틀었다.
“네. 일이 바빠서 아직 짐도 제대도 못 풀었습니다.”
이 근방이 초행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이드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남자를 꼼꼼히 살폈다. 밤 산책을 나왔다가 길을 잃어버린 게 맞는지 옷차림이 많이 단출했다.
슬럼가에서 창녀를 물색하는 돈 많은 고객들은 특징이 있었다. 검은색으로 통일한 옷, 도수 없는 안경, 모자. 그들이 위와 같은 차림을 고집하는 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지갑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이드는 남자가 아까 강도들에게 위협을 당하던 상황을 떠올렸다. 지갑을 소지하고 있지 않았던 그는 지갑 대신 시계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무리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됐어도 그렇지, 이 동네가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는 친구도 없었습니까?”
제이드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세상 물정 모르는 금수저 도련님이라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운 좋은 줄 아십쇼. 이 동네에서 잘못 걸리면 속옷까지 다 털린단 말입니다.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려도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하기는커녕 창문 한번 안 열어 보고.”
“저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동의했다. 마치 이렇게 우연히 당신처럼 친절한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난 행운아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흠, 흠. 하여튼 앞으론 조심하십쇼. 그렇게 부티 나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이런 놈들한테 또 걸리기 십상이니까.”
괜히 쑥스러워진 제이드가 바닥에 쓰러진 강도들을 툭툭 찼다. 이어서 그는 일단 여기서 나가자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골목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여태 이름도 묻지 않았군요.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남자가 보폭을 맞춰 걸으며 말했다. 제이드보다 다리가 긴 그는 다소 느릿하게 걸음을 떼었다.
“제이드.”
“옥玉이라는 뜻이군요. 부모님이 지어 주신 겁니까?”
동양적인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눈빛을 하고서 남자가 물었다.
“아뇨. 아마 고아원 원장님이 지어 줬을 겁니다. 어쩌면 공무원이 골라 준 걸 수도 있고.”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그는 고아원 출신이었다. 태어나자마자 탯줄도 제대로 자르지 않은 상태로 버려졌다. 하지만 부모 없는 자신의 인생을 비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이라 유년 시절엔 한없이 즐거웠다.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동네를 휘젓고 다니느라 바빴다. 청소년기엔 다소 엇나가긴 했지만 그가 고아라는 사실과는 관계없었다.
“그랬군요.”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대꾸였다.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름 모를 저 남자는 그를 불쌍한 사람 보듯 바라보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그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는데, 고아란 소리를 들으면 안쓰럽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제이드는 의문스러웠다. 왜 자신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걸까. 단지 고아란 사실 하나 때문에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을 거라 멋대로 짐작하는 눈빛이 불편했다.
그런데 무시무시하게 잘생긴 저 남자는 달랐다. 유난스럽게 굴지도 않았고 남의 과거를 제 입맛대로 재단하지도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그저 담담하게 정보를 받아들였다. 제이드는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반응에 깊은 호감을 느꼈다.
골목을 벗어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은 서로 정반대였다.
“절 도와주신 분을 이대로 보내기가 그렇군요.”
그럼 이만 먼저 가 보겠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남자가 제이드의 팔을 붙들었다.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데이트라도 신청하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그런 의도는 절대 아니겠지만.
“이 시간에 말입니까?”
제이드가 썩 마뜩잖다는 표정을 하고서 턱을 만지작거렸다.
공짜 밥이야 당연히 기꺼웠다. 그는 남이 사 주는 밥을 거절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생각해 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흘끗 손목시계를 확인한 남자가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럼 식사 대신 술은 어떠십니까.”
“술, 좋죠. 근데 돈은 있습니까?”
제이드가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돈이라면 당연히 지갑에…….”
지갑을 꺼내기 위해 재킷 주머니를 더듬던 남자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파트에서 지갑을 챙겨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바보 같군요.”
커다랗고 창백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남자가 실소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 연락처를 알려 드릴 테니까 시간 되실 때 전화 주십시오.”
재킷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더니 제이드의 손을 잡아끌어 손바닥에 쓱쓱 전화번호를 적었다. 손목에 닿은 남자의 손끝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벤 골드?”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의 필체는 몇 세기 전의 문인처럼 고풍스러웠다.
“아니요, 아벤 굴드입니다. Gould. 발음이 골드와 비슷하긴 하죠.”
철자를 짚으며 굴드가 정정해 주었다. 정말이지 죽여주게 근사한 목소리였다. 그의 출신 성분을 강조하는 귀족적이고 엄격한 악센트가 초콜릿처럼 귀에 착착 감겼다.
전화번호까지 받았으니 이젠 정말 헤어져야 할 때였다.
“꼭 연락 주십시오.”
아쉬움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굴드가 말했다. 뒷걸음질로 멀어지는 제이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엄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달곰했다. 만약 굴드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면 만인에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애인 때문에 속 좀 끓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하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도 할 거니까 걱정 마십쇼.”
제이드가 킥킥 웃으며 뒤로 돌았다. 차마 굴드에게 화는 내지 못하고 혼자서 근심 어린 나날을 보내는 여자 친구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굴드의 그녀는 섬세한 온실 속 화초처럼 여성스럽고 청순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굴드, 또 강도랑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슬림한 몸매의 제이드가 등 뒤로 손을 흔들며 지저분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물론 조심해야죠, 제이드.”
빈민가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수제화를 신은 남자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상냥하고 신사적이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제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음험하게 번들거렸다.
창백한 안개와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증기가 도로를 축축하게 적셨다. 제이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남자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금방 강도를 당할 뻔했으면서 주변을 경계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제이드에게 얻어맞았던 괴한들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삼인조 강도가 골목을 빠져나오는데도 남자는 느긋하게 밤 산책을 즐겼다. 거리는 스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죽은 자들을 위해 건설된 도시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세 명의 괴한이 흐느적흐느적 남자의 곁을 지나쳤다. 동공이 풀린 그들은 짙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달도 뜨지 않은 도시 어디에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매일 밤 벌어지는 살인 사건 중 하나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들은 금요일 밤은 좀 쉬게 해 달라고 투덜거리며 경찰차에 올라탔다. 서두르는 건 죽은 자의 살을 파먹으려고 모여드는 구더기와 초파리들뿐이었다.
***
“컹컹컹! 컹컹.”
“왈! 왈!”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비글, 핏불테리어, 자이언트 슈나우저, 그레이하운드, 잭러셀테리어, 도베르만, 치와와.
제이드는 총 일곱 마리의 개를 이끌고 공원을 빙빙 돌았다. 그가 키우는 개들은 아니었다. 양쪽 손에 잔뜩 힘을 주고서 호숫가를 도는 이유는 심부름 서비스 중이기 때문이었다.
번쩍번쩍한 마천루 빌딩들이 공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튜브탑 차림을 한 여자가 음악을 들으며 힘차게 트랙을 돌았다. 푸릇푸릇한 잔디밭이 펼쳐진 구역에선 연인들이 돗자리를 깔고서 애정 행각을 벌였다.
개님 팔자가 상팔자라니까.
양손에 개 줄을 몇 겹씩 휘감은 제이드가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제이드는 성깔이 보통이 아닌 일곱 마리의 개들에게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주인 잘 만나신 개님들은 사람인 제이드보다 귀하신 대접을 받았다. 매끼 A++등급 등심을 제공받았고 오가닉 채소와 비타민으로 건강을 관리받았다. 자이언트 슈나우저의 미용비는 제이드의 두 달 치 생활비에 육박했다.
현재 밥값과 렌트비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알바 중이지만 제이드의 본업은 따로 있었다.
출장 목공 기술자 겸 심부름센터의 소장.
알바도 심부름센터로 들어온 의뢰니 알바는 아닌가?
제대를 결심했을 때 그는 누구의 명령도 들을 필요가 없는 프리랜서가 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이십 대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탓에 정규직이니 고용 관계니 하는 것들에 구속되는 건 싫었다. 매일 아침 각이 잡히도록 다려야 하는 제복과 상명하복의 상하 관계도 지긋지긋했다. 견고하고 경직된 관료 사회, 조직 생활은 이미 겪을 만큼 겪었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는 느슨한 삶!
민간인이 된 제이드는 부푼 꿈을 안고 사회에 한 발을 내디뎠다. 고객들에게 오더를 받아 수제 가구를 제작하는 프리랜서가 되겠다고 결정했다. 고등학교 때 목공업을 가르치는 직업학교에 다닌 적도 있는 데다 군대에서 공병 일도 해 봤다. 목재를 자르고 못질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제이드에게 예술적 감각이 전무하단 사실이었다. 디자인을 해 본답시고 괴발개발 스케치를 끼적거렸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제이드는 현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는 고심 끝에 해결책을 찾아냈다. 반제품 DIY 가구를 만들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여성들이나 노인들을 대신해 나무를 재단해 주거나 가공 코칭을 해 주는 출장 대행으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공방을 차릴 필요도 없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제이드는 자신이 천재가 아닐까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기대했던 것만큼 돈벌이가 되질 않았다. 예상보다 수요가 많지 않았다. 세상은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너덜너덜한 통장이 가여웠다. 제이드는 마음을 고쳐먹고 대행업의 영역을 넓혔다. 즉, 심부름센터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직원은 하나도 없었고 여전히 사무실을 차리지도 못했다.
심부름센터라고 하면 듣기에 거창하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일거리는 잡다한 뒤치다꺼리가 전부였다. 아르바이트 대타, 개 산책, 장보기 대행, 애인 대역, 혼자 사는 할머니 댁에서 수다 들어 주기, 집 나간 고양이 찾아 주기 등등.
비록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먹고살 만은 했다. 레스토랑을 잡거나 장미꽃을 사는 등의 과소비만 하지 않는다면….
“이봐, 제이드! 오늘은 여기서 점심 안 먹을 건가?”
트럭에서 핫도그를 파는 마누엘이 제이드를 향해 외쳤다. 제이드는 개를 산책시킬 때마다 칠리 핫도그로 배를 채우는, 마누엘의 단골이었다.
“일주일간 외식 금지. 나 완전 개털이야.”
제이드가 서글픈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팠지만 주머니엔 50센트짜리 동전 하나 없었다.
이게 다 며칠 전 그를 뻥 걷어찬 테레사 때문이었다. 장미꽃과 레스토랑 예약에 재산을 탕진했건만 그에게 돌아온 건 물세례와 일방적인 이별 통보뿐이었다.
“이번 달도 거지가 된 거야?”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마누엘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웃지 마, 나 진짜 심각하다고.”
제이드가 도베르만처럼 크르릉, 이를 내보였다. 기력이 죄 빠진 상태라 위협적인 느낌은 없었다.
“월월!”
“멍! 멍!”
제이드가 잠시 틈을 보이자 일곱 마리의 개들이 이때다 싶어 좌우로 마구 움직여 댔다. 걷는 속도도 다르고 선호하는 코스도 각자 달라서 개들을 통제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젠장!”
막무가내인 개들을 쫓아가기 위해 제이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개들은 혀를 길게 내밀고서 신나게 트랙을 내달렸다. 공원의 풍경이 휙휙 뒤로 밀려났다. 목줄을 쥔 제이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사람이 애완견들을 산책시키고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개들에게 달리기 테스트를 당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허억, 헉.”
한참을 광란의 질주를 하고 나서야 몸값 비싸신 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켜 놓고 놈들은 해맑은 눈망울로 애교를 피웠다. 턱을 긁어 달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눈빛이었다.
제이드는 숨을 헐떡거리며 일곱 마리의 개들을 노려봤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개들을 가리키며 ‘엄마, 저 강아지 귀여워!’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일곱 마리의 혈기왕성한 애완견들이 악마의 소환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다음 주에 봬요.”
유치원생 귀가시키듯 개들을 집으로 모셔다드렸다. 수돗물로 대충 땀을 씻은 제이드는 다음 행선지인 소피의 집으로 향했다.
소피는 올해 아흔일곱의 귀여운 할머니로 정신이 살짝 오락가락했다. 제이드의 역할은 간단했다. 십 대 소녀로 회귀한 소피와 티타임을 가지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게 실질적인 임무였다.
지하철을 타는 대신 지름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제이드는 밤이 되면 핫팬츠를 입은 창녀들이 인도를 서성거리는 거리로 향했다.
방송국 보도 차량과 경찰차가 잔뜩 모여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둘러진 노란 테이프와 경찰들이 보도진과 행인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또 사지가 절단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산 채로 찢긴 피해자의 신원은 매춘에 종사하는 이리나라는 32세 슬라브계 여성으로, 이번에도 발견 당시 사체에는 피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이크를 든 미녀 아나운서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현장을 중계했다.
“연쇄 살인마의 출현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는 가운데 경찰 당국은 여전히 말을 아끼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방송국들도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며 경쟁적으로 노란 선 너머의 풍경을 촬영했다.
살인 사건은 언제나 높은 시청률을 보장해 주었다. 시민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뉴스 화면을 응시하면서도 내심 잔인한 연쇄 살인마의 등장에 희열을 느꼈다. 지루한 일상에 매몰되어 가는 그들은 흥미를 돋우어 줄 자극적인 어떤 것이 필요했다.
어차피 연쇄살인의 희생자는 창녀나 노숙자,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 등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이나 주변인이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 도시 사람들에겐 살인 사건도 그저 유희거리에 불과했다. 스너프 필름이나 공포 영화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스릴 있는.
제이드는 언짢은 표정을 하고서 취재 현장을 벗어났다.
사람이 죽었는데 스포츠 뉴스 전하듯 흥미 위주로 사건을 대하는 기자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지긋지긋해서 도시에 정착했지만 여기나 전장이나 삭막하긴 매한가지였다. 어떤 면에선 전쟁터보다 더 사람 목숨을 싸구려 취급하는 곳이 바로 대도시였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제이드는 소피의 집이 가까워져 오자 인상을 폈다. 모범적이고 평온한 동네 분위기 덕분에 궂은 날씨처럼 일그러져 있던 그의 기분이 누그러졌다.
자전거를 타고 경주를 하는 학생들과 스쿨버스에서 내리는 어린애들, 잔디를 깎는 노부부. 황폐한 환경에서 자라고 생활한 그는 생기 넘치는 주택가의 공기를 좋아했다.
목적지에 당도한 제이드는 흑백영화 주인공처럼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찰스, 어서 와요.”
고운 인상의 할머니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맞아 주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제이드를 첫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녀는 제이드를 늘 찰스라고 불렀다. 아마 찰스라는 남자도 흑발이었던 모양이었다.
따스한 빛깔로 물들어 있는 주택에 발을 들인 제이드는 소피에게 초코 케이크와 과자, 홍차를 대접받았다. 티 테이블에 차려진 간식들은 전부 다 그녀가 직접 구운 것들이었다. 치매를 앓고 있지만 그녀의 음식 솜씨는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가정의 요리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소박하고 다정한 맛이었다.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찰스, 언제 또 날 만나러 오실 건가요.”
어깨에 손수 뜬 레이스를 두른 소피가 두 손을 맞잡고서 물었다.
“다음 주 목요일에요, 소피. 그때까지 몸 건강히 지내요.”
제이드는 뿌듯한 얼굴을 하고서 백발 여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이는 많지만 소피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고아원 출신이라 부모도, 조부모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는 소피가 이상적인 외할머니처럼 느껴졌다.
“음음, 역시 소피가 만들어 준 과자가 최고야.”
소피가 선물로 안겨 준 컵케이크와 쿠키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단 음식을 잔뜩 먹은 덕분에 허기가 싹 가셨다. 소피가 아니었다면 그는 통조림과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로 배를 채워야 했을 것이다.
하루에 일을 두 탕이나 뛰었더니 졸음이 솔솔 밀려왔다. 그는 낮잠을 청하기 위해 스펀지가 누렇게 드러난 소파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농땡이를 부리지 말라고 언성을 높이는 상관이 옆에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갔다. 나무늘보의 피가 흐르는 제이드는 노을이 지는 것도 모르고 끝도 없이 잠을 잤다. 태생적으로 잠이 많은 그는 군인이던 시절, 아침에 일어나는 게 가장 고역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은 정말이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제이드!”
누군가 낡아 빠진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혔다.
제길, 아까 문을 잠그는 걸 깜빡했네.
찾는 이가 많지 않은 제이드의 조용한 공간에 무단으로 침입한 남자는 이 건물 주인의 외손자인 해리였다. 제이드는 언젠가 십 대 펑크족에게 구타당하는 남자를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저 친구였다.
“…왔냐.”
쿵쿵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제이드는 몸을 일으켜 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성의 없이 인사를 건넸다. 숨을 헐떡이며 해리가 들이닥쳤지만 보나 마나 언제나처럼 시답지 않은 용건일 게 분명했다.
“너 또 차였다면서.”
쪼르르 제이드 곁으로 다가온 해리가 속을 뒤집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남자를 동정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래, 차였다.”
제이드는 쿠션의 위치를 조정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혈압이 올랐지만 막 일어난 상태라 화를 낼 기운이 없었다.
“이번이 스무 번째던가? 심각하네.”
“스무 번이 아니라 열아홉 번째야.”
눈꺼풀을 비비던 제이드는 언짢은 표정을 하고서 소파 팔걸이에서 머리를 떼어 냈다.
“너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을지도 몰라.”
“심각하지. 그래서 이젠 여자 대신 남자를 만나 보려고.”
저 밉상 자식.
제이드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 원수와 엮이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소파에 똑바로 앉았다. 뒷머리를 만져 보니 잔뜩 눌려 있었다. 실컷 낮잠을 자고 난 후유증이었다.
“그래, 그래. 그것도 좋은… 잠깐, 뭐?!”
고개를 주억거리던 해리가 꿱, 소리를 질렀다.
“남자? 잠깐. 너, 너, 너… 지금 남자랑 사귀겠다고 한 거야?”
제이드를 가리킨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눈앞에 좀비라도 있는 것처럼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농담이야!”
제이드가 이맛살을 구겼다. 헤테로도 아닌 해리까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가 남자랑 사귀면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믿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았다.
“…응? 뭐야, 농담이었어?”
손으로 허공에 십자가를 긋던 해리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졸지에 퇴마의 대상이 된 제이드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휴, 다행이다. 하마터면 애 떨어질 뻔했네.”
애는 무슨 놈의 애냐고 제이드가 한 소리 하려는 순간, 해리가 뒷말을 이었다.
“이봐, 제이드. 만약에 네가 정말로 남자를 사귈 마음이 있다면 나는 제발 그 대상에 넣지 말아 줘. 물론 네가 나한테 고백한다면 정말 황홀하겠지. 하지만 젊은 나이에 황천길 가는 건 사양이다. 너랑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면 일주일도 안 돼서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거야. 질투에 눈이 먼 놈들이 날 항구로 끌고 가 실컷 분풀이를 한 다음에 산 채로 바다에 수장시키려 들겠지. 아니다, 히트맨을 고용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 버리려나?”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제이드는 진지하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해리를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찼다.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이라지만 차마 친구를 쥐어 팰 순 없었다.
“오늘은 또 왜 온 거야. 설마 내가 차였다는 소리를 듣고 촐랑촐랑 뛰어온 건 아닐 거 아니야.”
소파에서 일어난 제이드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아, 맞다.”
그제야 제이드를 찾아온 용건을 기억해 냈는지 해리가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제이드, 나 어떡하면 좋지? 숀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해리가 울상을 지으며 제이드의 접이식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숀은 해리가 일 년 넘게 몰래 좋아하고 있는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이었다.
금발인 해리는 하는 행동과 겉모습만 보면 한없이 가벼운 바람둥이로 오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그는 저래 봬도 뚝심 있는 순정파였다. 한 사람에게 꽂히면 절대 한눈을 팔지 않았다. 마음 있는 사람에겐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소심한 성격이라 짝사랑 전문가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지만.
“숀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제이드는 좌불안석인 친구를 위해 이 빠진 머그잔을 하나 더 꺼냈다.
해리는 연애 전선에 이상이 생기면 늘 그를 찾곤 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두 사람은 몇 년째 애인 없이 지낸다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는 처지였다.
“엄청 잘생긴 연극배우래. 셰익스피어 전문이라나 뭐라나. 젠장.”
많이 초조한지 해리가 오른쪽 다리를 덜덜 떨어 댔다.
“숀이 그 자식을 보려고 매일 극장을 들락거리고 있대. 뒤를 캐도 뾰족한 정보가 나오질 않는 걸 보니까 이쪽 커뮤니티 사람은 아니야. 스트레이트라는 소리지.”
부글부글, 뿌우우!
시꺼멓게 그을린 자국으로 뒤덮인 주전자가 김을 뿜어냈다.
이성애자라. 뭐, 심각한 상황은 아니네.
제이드는 금발 머리를 쥐어뜯는 해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해리가 하도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는 숀에게 애인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뭘 그리 걱정해. 둘이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제이드는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서 해리에게 커피 잔을 내밀었다. 숀이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하루 이틀이냐는 투였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외모를 가진 숀은 금세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길 반복하며 해리의 속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었다.
“인마, 그렇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평소와는 다르단 말이야.”
뜨거운 커피 잔을 받아든 해리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평소와 달라?”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숀이 진심인 것 같아.”
해리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진심? 그 숀이? 앗 뜨뜨!”
홀짝 커피를 마시다가 혀를 데고 말았다. 제이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몸을 비비 꼬았다.
“칠칠맞지 못하긴.”
자기도 아무 생각 없이 커피를 마시려고 했던 주제에 해리가 제이드를 비웃었다. 친구의 실패를 발판 삼아 우아하게 까만 액체 위로 후, 입김을 부는 모습이 여간 아니꼬운 게 아니었다.
“시끄러버. 아까 하더 마리나 계소 해바.”
제이드가 해리를 힘껏 노려보았다.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혀를 식히느라 발음이 줄줄 샜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 연극배우인지 뭔지 하는 자식에게 단단히 빠진 것 같아. 이 남자 저 남자하고 놀아났어도 한 번도 진지해진 적은 없었는데…. 엄청 지극 정성이야.”
제이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낄낄대며 좋아하던 것도 잠시, 해리의 얼굴빛이 다시 우중충해졌다.
“밤마다 놀러 가던 클럽도 안 찾고 직접 만든 요리까지 바리바리 싸서 그 자식을 쫓아다니나 봐. 나도 숀이 만든 도시락 먹고 싶은데.”
흠. 숀 테일러가 클럽을 끊었다라.
화끈거리는 혀의 통증이 가신 제이드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해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자유연애 주의자를 표방하며 해피 게이 라이프를 즐기는 꼬맹이가 바로 숀이었다. 녀석이 난잡한 사생활을 청산했다는 소리는 솔직히 믿기 어려웠지만.
“너무 불안해할 것 없어. 상대방이 스트레이트라며.”
전전긍긍하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성애자라고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배우들 중에는 잠재적인 바이 성향을 가진 사람이 차고 넘친다고.”
편견에 가득 찬 발언이었지만 제이드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연극배우라는 남자가 숀을 거절하면 끝나는 문제 아닐까. 취향이 아니라거나, 혹은 애인이 있다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렇게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남자를 누가 거절해. 숀이 유혹하면 백이면 백 다 넘어오게 되어 있다고!”
해리가 발끈하며 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제이드는 예예, 하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려고.”
짝사랑의 대 위기를 맞은 친구에게 제이드가 물었다. 삼각관계는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그로서는 아무런 조언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찾아가야지.”
해리의 눈동자가 번쩍하고 광채를 뿜었다.
“찾아가? 어딜? 그리고 뭐하러.”
제이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서 내 연적이 어떻게 생겼는지 봐야 할 것 아니야. 그러니 제이드, 당장 외출 준비해. 표는 미리 사 놨다.”
해리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제 전복을 부르짖으며 시민을 선동하는 게릴라 혁명가 같은 눈빛이었다.
“어이, 갑자기 나는 왜 끌어들이는데!”
“남자 혼자 꼴사납게 어떻게 연극을 관람해. 난 너랑 달리 곁에 누가 없으면 밥도 못 먹는 사람이라고!”
해리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싫어. 연적한테 선전포고를 하든, 얼굴만 보고 쭈구리처럼 돌아오든 너 혼자 알아서 해.”
제이드가 왈칵 표정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자식이 뜬금없이 나타날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는데 빌어먹게도 직감이 맞아떨어졌다. 그의 예상대로 해리는 성가신 부탁을 하러 예까지 행차한 거였다.
“왜애! 너 내 친구잖아. 친구라면 같이 가서 용기도 불어넣어 주고 편도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 남자한테 멱살이라도 붙잡히면 어쩌려고 그래.”
누가 곱게 자란 도련님 아니랄까 봐 해리가 그의 팔에 매달려 징징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도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외모가 아까웠다.
“다시 말하는데, 싫어. 여자 친구랑 함께 가는 거라면 모를까 남자랑 연극 관람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제이드는 질색하며 팔을 흔들었다. 손에 커피 잔을 들고 있어서 녀석을 힘껏 밀쳐 내진 못했다. 그는 여태껏 살면서 영화관 말고는 문화 공간이란 곳엔 한 번도 발을 들여 본 적이 없었다. 음악회, 미술관, 박물관, 연극 공연장, 기타 등등 전부 다 그와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영화관을 찾은 것도 두어 번 정도였다.
“젠장! 내가 너 고용한다. 얼마면 돼! 돈 내면 되잖아.”
어디서 본 건 많은 해리가 씩씩대며 지갑을 꺼냈다. 그러나 당당한 기세는 금방 수그러들었다. 탁자에 커피 잔을 내려놓은 제이드가 눈썹을 크게 비틀고서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왜, 왜 그래. 무섭게.”
제이드의 날카로운 눈빛에 겁을 먹은 해리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목을 움츠린 친구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제이드의 표정은 진지했다. 점심은 소피 덕분에 그럭저럭 넘겼지만 저녁은 황폐한 식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음 주까지 피클과 옥수수 캔으로 연명해야 하는 제이드에겐 자신을 고용하겠다는 해리가 구세주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