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위는 부상당한 동료를 부축하며 긴 복도를 달렸다. 14세기경 건축된 성당 수도원의 천장이 돌가루를 부스스, 흘리며 흔들렸다. 적군이 설치한 폭발물이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적을 가차 없이 붕괴시키고 있었다.
막다른 벽이 보였지만 중위는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등 뒤에서 적군이 쫓아오고 있었다.
적군이 쏜 총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중위는 무너진 기둥 잔해에 숨어 반격했다. 하지만 곧 탄창이 바닥을 드러냈다.
피융, 투다다다, 핑, 핑!
“빌어먹을. 하인츠! 총알 남은 것 있어?”
철컥, 철컥, 공허한 소리를 내는 소총을 내던지며 동양인 중위가 물었다. 2년간 같은 막사에서 생활했던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창녀를 지독하게 밝히던 전우의 머리에서 피와 함께 뇌수가 흘러내렸다.
“젠장.”
중위는 이를 악물었다. 부대원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전사한 하인츠의 품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죄다 꺼내 챙겼다. 죽은 이에겐 장전된 권총도, 나이프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탈출할 수 있을까.
차가운 전율이 중위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가진 화기는 하인츠가 소지하고 있던 권총 한 자루뿐이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중위도 동료의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악마들과 종교전쟁을 치르는 광경을 담은 작품이었다.
중위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작전은 실패했고 상부는 그들을 버렸다.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부대원이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개죽음을 당하리라는 건 확실했다.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적군을 죽이고 뒈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우르릉 콰광-.
다시금 성당이 뒤흔들렸다. 머저리 같은 적군이 마구잡이로 폭발물 스위치를 눌러 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실내에 부옇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적군도 중위가 보이지 않는지 잠시 총성이 멎었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하던 중위의 등 뒤에서 가느다란 바람이 느껴졌다.
성녀의 그림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비밀 공간이 노출된 모양이었다. 오래된 수도원이니 설계 도면에 표시되지 않은 비밀 통로가 있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중위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운이 좋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그로서는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결과가 허무할지라도 이대로 가만히 종말을 기다리는 것보단 나았다.
중위는 망설임 없이 바람이 새어 드는 귀퉁이로 기어 들어갔다.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를 찔렀다. 빛이 깃들지 않는 암실이라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새끼 어디로 튄 거지? 시체가 하나뿐이잖아!”
성난 적군의 목소리가 비좁은 구멍을 통해 들려왔다. 아직 중위가 숨어든 공간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그들도 곧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중위는 포복 자세로 계속 어둠 속을 기어 나갔다. 적군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라이터를 꺼내 주변을 밝혔다. 비릿한 흙냄새가 더욱 강렬해졌다. 벽에는 주문 같은 기괴한 기호들이 빼곡하게 결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공간이 점점 높아지고 넓어졌다.
중위는 꿀꺽 침을 삼키며 벽에 그려진 고대의 문자를 살폈다. 뜸을 들일 시간이 없었음에도 붉은 문자에서 눈을 떼어 내기가 어려웠다. 피로 작성된 것이 분명한 문자들은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땀이 나야 정상인데 한기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마치 그의 피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혀로 핥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오싹한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불길한 장소에 발을 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순 없었다. 중위가 개구멍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적군의 총구가 불을 뿜을 것이었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군모를 쓴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중위는 어느 순간부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라이터의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붉은 피로 그려진 문자들이 중위를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인도했다. 괴이쩍은 고대의 문자들은 흡사 이단과 배덕을 찬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당 아래에 왜 이런 공간이….
속이 메스꺼웠다. 계단을 가득 채운 붉은 문자들이 전부 피로 그려졌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이 거대한 결계를 완성하기 위해 도대체 몇 명이나 희생되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쪽이다! 추격해.”
“쥐새끼 같은 베라 놈.”
거친 고함 소리와 랜턴의 불빛이 저 높은 곳에서 쏟아져 내렸다.
“제길.”
라이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나치게 독특한 벽 장식에 얼을 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중위는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언제든 뒤를 돌아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권총을 꽉 움켜쥐었다.
“보인다! 던져.”
퉁, 퉁.
수류탄이 벽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위는 순간적으로 벽에 군용 나이프를 박았다. 나이프를 선택한 탓에 권총은 버려야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가 벽에 매달린 순간, 발치에서 쇠문이 찢기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큭!”
폭발의 여파로 그의 한쪽 다리가 피로 물들었다. 나이프를 손에서 놓친 중위의 몸이 몇 미터 아래로 추락했다.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중위는 부상을 입은 다리를 질질 끌며 날카롭게 이를 드러낸 두꺼운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안 보여.
정신이 혼미했다. 등 뒤에선 적군이 그를 쫓아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중위가 지나간 자리에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숨겨진 방이 비스듬히 기울기라도 했는지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들이 스멀스멀 벽 쪽을 향해 이동했다.
제발.
중위는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궁창이 나와도 좋고 백골이 쌓여 있는 납골당이 나와도 괜찮으니 부디 달아날 탈출구가 있기를 바랐다.
“개새끼! 더럽게 끈질기군.”
손전등의 불빛이 교도소의 탐조등처럼 중위의 등을 비추었다. 제단이 마련된 벽에 중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중위는 입술을 깨물며 전사자에게서 강탈한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캄캄한 지하실의 공기는 냉동고처럼 싸늘했다. 실내를 밝히는 불이라고는 적군이 들고 있는 손전등뿐이었다.
“우리를 개고생시키다니, 곱게는 못 죽여.”
대여섯 명의 군인이 유일한 출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으드득 이를 가는 목소리는 그들이 흙 범벅이 된 중위를 잔인하게 고문할 것을 예고했다.
“씨발! 저게 뭐야.”
중위가 흐트러진 호흡을 정돈하며 뒤를 돌아보려던 찰나였다. 적군 중 하나가 기겁하며 중위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뭘 보고 저러는 거지?
중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손전등의 불빛이 비추고 있는 것은 벽 위로 늘어진 사람의 손이었다.
“진정해, 마일리. 그냥 미라일 뿐이잖아!”
상사 계급장을 단 남자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그도 기분이 찜찜하긴 마찬가지인지 먼지투성이인 뺨이 씰룩거렸다.
손전등의 불빛이 여러 개 겹친 장소에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못 박혀 있었다.
수백 년도 더 된 것 같은 미라를 고정하고 있는 물체는 거대한 창이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기다란 창은 오래된 시체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창의 표면에는 현대인들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가 빈틈없이 새겨져 있었다.
“젠장, 분위기 한번 더럽게 으스스하군.”
적군이 가래침을 뱉었다. 정신없이 중위를 추격하던 그들은 그제야 천장과 벽을 빼곡하게 장식한 붉은 글씨를 발견했다.
피로 쓰인 고대의 문자들은 시체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수류탄에 걸레 조각이 된 두꺼운 쇠 문짝에도 예외 없이 붉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중위는 누가 이런 방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시체를 봉인하기 위해 결계를 짠 것만은 분명하단 생각을 했다.
“윽.”
중위는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뒤를 돌았다. 그의 귓가로 나지막한 이국의 언어가 들려왔다. 희미한 속삭임은 바람이 만들어 낸 환청임이 분명했기에 중위는 애써 정면에 보이는 적들에게 집중했다.
“대충 죽여 버리고 빨리 나가자. 여기는 어쩐지 재수가 없어.”
마약중독자 같은 눈빛을 한 군인이 동료들을 재촉했다. 겁먹은 그의 눈동자가 벽에 매달려 있는 오래된 시체에 고정되었다. 피로 그려진 문자 때문인지, 아니면 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미라 때문인지, 실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흘렸다. 어쩌면 이곳은 이교도들이 비밀스럽게 집회를 가지던 타락한 신전일지도 몰랐다.
“제길.”
중위는 적군들이 포위망을 조심스레 좁혀 오자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등 뒤로 딱딱하게 말라붙은 시체의 손이 닿았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미라 따위에 겁먹을 때가 아니었다. 죽은 자가 일어난다는 건 고약한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빌어먹을 베라 놈아. 여기가 네가 뒈질 장소다.”
동료의 부추김에 넘어갔는지 상사가 불안한 얼굴로 중위에게 총을 겨누었다.
개자식들. 지옥에나 떨어져.
중위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십여 발의 총알이 그의 팔다리를 꿰뚫었다. 중위의 몸이 뒤틀릴 때마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벽에 매달린 시체의 피부 위에도 핏방울이 끼얹어졌다. 중위의 온기를 머금은 피는 검게 말라비틀어진 미라의 입술 또한 적셨다.
지하실에 화약 냄새가 그득해졌다.
“으….”
총성이 멈추자 총알로 넝마가 된 중위의 몸이 비틀비틀 앞으로 고꾸라졌다. 출구 반대편에서 똑바로 서 있는 것은 벽에 못 박힌 오래된 미라뿐이었다.
아무도 벽에 매달린 시체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적군의 시선은 전부 베라군 소속의 중위에게 쏠려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200년 전 죽은 송장이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날름 핥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더불어 놈이 중위의 피를 탐욕스럽게 꿀꺽 삼키는 광경도 목격하지 못했다.
“으, 윽.”
총을 맞고 계단에 쓰러진 중위의 몸이 꿈틀꿈틀 뒤틀렸다.
“목숨 한번 질긴 새끼군.”
적군의 상사가 확인 사살을 위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는 중위의 피는 어쩐지 제의에 이용된 산 제물의 흔적 같아 보였다.
“어이, 바싹 잘 마른 친구.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어쩌다 이런 곳에 버려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몇백 년 만에 동료가 생겼잖아?”
벽에 매달린 시체를 흘끗 올려다보며 상사가 히죽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소총의 총구는 중위의 정수리에 닿아 있었다.
“이 녀석 덕분에 더 이상 쓸쓸하지 않, 컥!”
적군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이었다. 꼼짝 않고 늘어져 있던 시체가 팔을 뻗어 상사의 목을 졸랐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이런 염병할! 봤어? 저 망할 미라가 움직였다고!”
포린트군이 괴성을 내질렀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중위의 귀에는 적군의 외침이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불분명하게 들렸다.
“크억, 끅.”
조금 전까지 박제에 불과했던 시체의 손아귀가 상사의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상사는 눈을 까뒤집고서 몸을 뒤흔들었다. 중위의 머리를 겨누었던 소총은 계단 위로 떨어졌고, 그의 군화는 허공에서 버둥버둥 헛발질을 했다.
상사의 목을 부러트릴 듯 옥죄고 있는 미라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피부와 뼈가 서로 달라붙은 놈의 모습은 좀비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흉측하게 말라비틀어져 있어야 할 놈의 피부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괴물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삼킨 중위의 피를 음미했다.
“사, 사, 사령부 나와라. 여기는 31사단, 빌어먹을! 무전이 안 통해!”
“젠장, 알 게 뭐야, 그냥 쏴!”
공황 상태에 빠진 포린트군이 마구잡이로 총을 갈겨 댔다. 아군인 상사의 생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의 본능이 지금 저 괴물을 거꾸러트려야 한다고 웽웽거리며 경고하고 있었다.
두다다다다! 탕탕탕!
“빌어먹을 좀비 새끼, 뒈져 버려!”
총알 세례를 받은 미라의 몸에서 검게 썩은 피가 울컥울컥 흘러내렸다. 벌집이 된 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단의 벽도, 아군에 의해 시체가 되어 버린 상사의 몸뚱어리도 사격장의 과녁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주, 죽었나?”
포린트군의 발치에 텅 빈 탄피가 수북하게 쌓였다. 사격을 멈춘 그들은 억눌린 숨을 삼키며 주춤주춤 앞으로 나아갔다.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건 베라군의 군복을 입은 중위뿐이었다. 중위의 녹색 군복은 피에 젖어 검붉은 빛을 띠었다.
언제 겁먹었냐는 듯 털북숭이 군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별 거지 같은 게 사람을 놀라게 만들….”
그러나 득의에 찬 그의 얼굴은 금세 공포로 일그러졌다. 고요하게 늘어져 있던 미라의 총상이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하, 하느님 맙소사.”
“우, 우어어! 다시 쏴!”
“죽여, 죽이라고!”
낯빛이 파리하게 질린 포린트 군인들이 다시 총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땡그랑.
축 늘어져 있던 미라가 히죽 웃으며 심장에 박혀 있던 창을 뽑아냈다. 놈이 군인들을 공격한 것은 쐐기 역할을 하던 은의 창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아아아아!”
“끄억!”
분쇄기 안에 던져진 마론 인형처럼 군인들의 팔다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바닥을 구르는 손전등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그림자의 궤적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붉은 글씨가 그려진 벽은 갈기갈기 찢어진 포린트 군인들의 피로 오염되어 형체가 불분명해졌다.
“하아, 하아….”
살육은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총상을 입은 중위는 숨을 헐떡거리며 계단을 기어 내려갔다. 콧속으로 역한 피비린내가 흘러들었다. 바닥에 번진 손전등의 불빛이 참혹한 광경을 부분적이나마 비추었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육체의 파편들이 중위에게 도살장의 풍경을 연상케 했다. 하얗게 도드라진 갈비뼈와 바닥에 널브러진 내장, 눈을 부릅뜬 적군의 머리….
이제 괴물은 중위를 다음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 분명했다.
저벅, 저벅.
피 웅덩이 위를 맨발로 걸으며 괴물이 중위에게 다가왔다. 찰박, 찰박하고 붉은 수면이 흔들리는 소리가 중위의 심장을 움츠러들게 했다.
고개를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 바닥에 납작 쓰러진 중위는 놈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흐으, 흐으’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놈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쪽이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발목만 보이는 괴물의 피부는 고목나무처럼 쪼글쪼글했다. 놈의 얼굴 또한 무덤에서 갓 일어난 시체처럼 징그러울 것이 뻔했다.
“빌어먹을. 오, 오지 마.”
중위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의 성배.”
괴물이 숭배자처럼 중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놈은 중위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서 입을 맞췄다. 기겁한 중위가 손목을 잡아당겼지만 부상당한 몸으로 괴물의 괴력을 당해 내긴 무리였다.
손등에 입을 맞춘 괴물이 계단을 적신 중위의 피를 혀로 핥기 시작했다. 가뭄으로 고통받던 짐승이 잿빛 물웅덩이를 발견한 것처럼 경건하고 탐욕스럽게.
“으윽. 큭.”
중위는 혐오스럽다는 눈을 하고서 괴물을 바라봤다. 놈이 할짝할짝 피를 마시는 모습이 그를 참을 수 없이 두렵게 했다. 바닥의 피가 다 마르면 놈은 아직 다 해소하지 못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중위의 싱싱한 살점을 뜯어 먹으려 할 것이었다.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 제물이여. 이 순간을 내가 얼마나 고대했는지 그대는 모를 거다.”
필사적으로 몸을 뒤트는 중위를 바라보며 괴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손전등의 빛이 거슬리는지 괴물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말을 멈춘 괴물이 길게 자란 손톱으로 허공을 훑었다. 그러자 지하실의 벽을 비추던 손전등이 팟, 소리를 내며 꺼졌다. 손전등의 유리가 깨졌는지 파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음도 들렸다.
손전등이 꺼지자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빌어먹을!”
공포에 짓눌린 중위가 눈을 질끈 감고서 소리쳤다.
괴물이 그의 몸을 뒤집었다.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나의 피, 나만을 위한 제물.”
중위를 달래듯 괴물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나를 파멸로 인도할지도 모르는 운명의 주인.”
청년의 피로 목을 축인 괴물은 시간이라도 거스르듯 형체가 달라졌다. 썩어 가는 시체에서 늙은이의 모습으로.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중위는 괴물의 변화를 알아챌 수 없었다.
“개자식아. 죽일 거면 빨리 죽여.”
어금니를 깨문 중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사이에도 출혈은 계속되었다.
“재촉할 것 없어. 곧 그대의 바람을 들어줄 테니까.”
괴물이 중위의 뺨을 쓰다듬었다. 녹슨 톱니바퀴처럼 쇳소리가 나던 놈의 목소리가 어느새 사람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사, 사람 가지고 놀지 마.”
놈은 역시 자신을 죽일 작정이었다. 억울함이 깃든 눈물이 중위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대는 우는 모습조차 아름답군.”
물끄러미 중위를 응시하던 괴물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위험해.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괴물은 이제 주름 한 점 없는 청년이 되었다.
“가엽게도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군.”
괴물이 중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아윽.”
날카로운 통증이 중위의 손목에서 일었다. 송곳 같은 뭔가가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중위는 마치 겁탈이라도 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허벅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그의 핏속에 괴물이 흘려보낸 타액이 녹아들었다.
“흐읏, 흣. 흡!”
마약이 혈관을 잠식하듯 중위의 몸이 나른해졌다. 곧이어 군복을 흥건하게 물들이던 출혈이 멈췄다.
괴물이 아쉬운 표정을 하고서 입술을 떼어 냈다. 그의 이가 닿았던 자리에 뱀의 형상을 띤 문신이 휘감겼다. 중위에게 남긴 표식이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성배. 그대에게 조금 흥미가 생겼어.”
괴물, 아니, 이제 인간의 모습을 취한 뭔가가 중위에게 입을 맞췄다. 괴물의 입술은 시체처럼 싸늘했다. 하지만 중위의 입 안을 헤집는 혀는 그 어떤 과즙보다 달콤했다.
“너….”
중위는 목을 졸린 사람처럼 의식을 잃었다.
구르릉, 구르릉 하고 지하실이 흔들렸다. 성당을 파괴하고 있는 폭발의 여파가 저주받은 성소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남자가 중위를 안아 올렸다.
그림자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컴컴한 어둠이 지하실을 삼키고 있었지만 남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태연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인간이 아닌 그는 빛에 구애받지 않았다. 남자는 태양 아래를 거니는 것보다 달 하나 뜨지 않은 칠흑의 밤이 더 친숙하고 익숙했다.
오랫동안 자고 일어났더니 허기가 졌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성배의 피로 갈증을 해소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배의 생명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성배의 피를 마셔 완벽한 존재가 되기를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해 왔으면서.
기이한 일이었다.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피를 갈구하는 욕망 외에 다른 것을 우선순위에 둔 적이 없었다. 유황불보다 뜨거운 목마름을 씻어 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피를 원하는 욕구를 억누르고 있었다.
자신의 상태가 낯설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갈증을 충족시키고 싶다는 충동 이외의 감정을 느낀 건 정말이지 오래간만이었다.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것 같군.”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중위의 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손끝의 온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 변덕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다.
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낀 지상으로 올라오자 목마름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그렇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누군가 그를 위해 마련한 것처럼 싱싱한 먹이들이 저 위에 널려 있었다. 쿠궁, 하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남자의 귀에 축포처럼 들렸다.
“뭐야, 민간인인가?”
괴이쩍은 옷을 입은 인간이 그에게 쇠막대기를 겨누었다. 남자는 차분하게 웃으며 손톱으로 허공을 갈랐다.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 고민하던 군인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남자는 분수처럼 치솟는 붉은 피를 보며 입술을 핥았다. 저급한 피 냄새지만 그의 식욕을 돋우었다. 배가 고프면 부패한 쓰레기조차 맛있어 보이기 마련이었다.
남자는 낮은 곡조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품 안에 안고 있는 중위는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