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81)

수일은 꿈을 꾸었다.

거인만큼 커다래진 해피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는 꿈이었다. 해피는 지금 모습 그대로 크기만 커졌고 말도 했다.

‘아버지, 출발합니다. 단디 잡으이소.’

네댓 살 아이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단어는 분명 두산이 쓰는 그것과 같은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귀엽고 앙증맞은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실제보다 훨씬 부드러운 털을 양손에 움켜쥐자 해피가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해피는 잠시 후 큰 귀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해피가 웃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분 좋을 때만 내는 ‘크릉 크릉 킁킁’ 하고 돼지처럼 킁킁대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수일도 따라서 킁킁댔다. 함께 웃었다.

해피 등에 올라 구경하는 세상은 참으로 작았다. 저렇게 작은 세상에서 아등바등 죽지 못해 잘도 살았구나, 수일은 생각했다. 멀리서 보면 별것 아닌 것을, 세상을 무서워하고 사람을 무서워하며 벌벌 떨었다.

이 좋은 날 웬 청승인지. 수일은 해피에게 미안해서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아버지는 이제 다 괜찮아. 잠깐 신세 한탄 좀 한 거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피가 더 높이 더 멀리 날았다. 수일은 해피 털을 꽉 쥐고 몸을 바짝 낮췄다. 보드라운 털이 두 뺨을 간지럽혔다. 해피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등을 온몸으로 느꼈다. 좋아서 킁킁대는 소리를 들으며 행복에 잠겼다. 다음엔 두산도 같이 타면 좋겠다. 너무 무거워서 해피에게 무리가 가려나. 싱거운 생각을 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양 볼에 눈물이 흘렀다. 별일이었다. 작년 백태섭의 장례식 이후 눈물이 씨가 마른 수일은 웬만해선 우는 법이 없었다. 두산을 만난 이후로 좋은 일에도 울고 슬픈 일에도 울고 고마워도 울고 미워도 울었는데, 그날 이후 웃기만 했다. 좋아도 웃고 슬퍼도 웃고 고마워도 웃고 미워도 웃었다. 울음이 종류가 다르듯, 웃음의 종류도 달랐다.

수일은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조금 전 꿈을 되새겼다. ‘아버지.’라고 부르던 귀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우리 해피도 사투리를 쓰는구나. 그 앙증맞은 목소리는 아마도 두산의 네 살 먹은 조카 목소리일 거였다. 수일이 아는 유일한 어린아이 목소리였으니까. 생일이 늦어 발음이 엉성한 조카아이와 달리 꿈속 해피는 분명하고 또렷하게 말했었다. 아버지. 수일은 입 밖으로 그 소리를 따라 내며 웃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뻑뻑했던 눈이 눈물 덕택에 부드럽게 떠졌다. 정신이 몽롱했다. 어제저녁 운동장을 다녀온 뒤로 체기가 올라왔다. 소화제를 먹고 손까지 딴 다음, 이른 잠을 청했다.

‘병원 안 가 봐도 되겠나?’

두산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면서 손은 수일의 팬티 속으로 넣고 성기를 조몰락댔다. 하여간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수일은 손을 쳐 내는 것도 귀찮아서 ‘응 괜찮아.’ 하고 말았다. 슬슬 크기를 키워야 옳은 성기가 그대로 있자 두산이 혀를 찼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거야.’

수일이 변명했다.

‘지랄.’

‘정말이라니까.’

‘이 정도 주물렀으면 일단 서기는 해야지.’

‘정신력이 육체를 이겼어.’

구차한 변명을 하다 괜히 버럭 소리쳤다.

‘그만하구 잠이나 자. 축구 선수. 월드컵.’

수일은 팬티 속에서 배회하는 두산의 손을 잡아 무 뽑듯 세차게 빼 버렸다. 두산이 입맛을 다셨다. 이후 두어 번 더 손이 들어왔다가 뽑혀 나가자 만질 것도 없는 가슴을 더듬었다. 두산의 숨소리가 옅어질 때쯤이 되어도 수일은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자꾸 뒤척이자 두산은 수일을 제 품에 꼭 끌어안고 자장가도 불러 주고 등도 토닥여 주었다. 자장가는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았고 토닥이는 손길은 지나치게 세서 등이 아팠다. 그래도 좋았다.

수일은 잠을 청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먼저 잠이 든 건 두산이었다.

좋은 일이 있으니 제일 먼저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해피를 누구보다 귀여워해 주셨을 거였다. 친손주 타령이야 했겠지만, 강아지라도 수일의 자식이라고 말해 주면 좋아서 춤을 추실 분이었다. 물고 빨고 사랑으로 키워 주셨겠지.

아버지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어머니는 사진으로만 본 탓에 세 번째로 생각이 났다. 문득 죽은 연화도 떠올랐다.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면 못 해도 열 살이었을 거였다. 자연스레 지훈이 떠올랐다. 통통하고 작은 아이. 빨간 뿔테 안경을 끼고 똑똑한 소리만 하는 아이. 수일과 연화, 하물며 두산도 닮지 않아서 상상은 더 뻗어 나가지 못했다.

상엽이 생각나는 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15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수일이 유일하게 친구라고 불렀던 녀석이었다. 지금은 발목 하나를 잃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미싱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전화 통화도 했다.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했고, 말투 또한 결코 다정하지 않았지만 그와 대화하는 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 삼락 형님. 마지막은 늘 그였다. 그가 살인자라고 단정 지었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조금만 더 믿어 줄걸. 수일은 자신이 경험한 그 좁은 세계의 법칙대로 삼락 형님을 재단했다. 형님은 수일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며 그럴 수도 있지, 했다.

살집이 있던 체구는 쪼그라들었고, 잘생긴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까맣고 숱 많던 머리는 빈 곳이 는 데다 새하얗게 변했다. 이도 몇 개 빠져 웃을 때마다 꼭 이가 썩은 것처럼 군데군데 검었다. 그럼에도 삼락 형님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두산과 이주공 형사의 도움으로 청송 교도소에서 부산 교도소로 이감한 것에 크게 고마워했다. 비록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자신을 위해 재심 신청까지 해 준 것에 감동했다. 다음이 있을 거라고, 분명 자신의 무죄를 밝힐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수일은 매달 은아 씨와 함께 면회를 다녔다. 은아 씨가 바쁠 때는 혼자서도 다녀왔다.

대화는 주로 밤무대 생활에 관한 거였다. 그때 그 지방에서 수일과 처음 만난 날, 같이 자장면을 먹었던 얘기를 하고 또 했다. 은아 씨와 셋이서 오성관에서 있었던 일도 주고받았다. 그도 아니면 각자가 생각하는 최악의 여관방, 최악의 손님, 최악의 나이트, 최고의 손님, 최고의 팁 등 매번 주제를 바꿔 가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셋은 교도관의 제지를 받을 만큼 크게 웃을 때가 많았다. 셋 다 무대를 떠났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아니면 추억이 미화되어 그런 건지 몰라도 자주 그리운 감정을 드러냈다.

삼락 형님이 계셨더라면 해피 돌잔치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개 팔자가 상팔자.’라며 호탕하게 웃었을 것이다. 난생처음 개 조카가 생겼다며, 멋들어지게 정장을 빼입고 턱 하니 돌 반지를 선물했을 거였다. 노래 한 곡조 뽑겠다며 마이크를 잡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남자였다.

어제 은아 씨에게 돌잔치에 꼭 오라고 연락을 넣었을 때도, 다른 말을 나누다가 삼락 형님 얘기에 이르렀다. ‘그 오빠야가 있었으면 참말로 좋았을 낀데.’ 아쉬움을 토로했다. 평생 해 본 적 없는 고된 일을 하느라 울화병이 왔던 은아 씨는 셋 중 가장 무대를 그리워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노래꾼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그게 시골 장터가 되었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회갑연이 되었든 다 좋았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 앞에 떳떳한 지금에도 가끔 아니 자주 무대에 서는 꿈을 꾼다고, 쓸쓸하게 웃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쉬이 잠들지 못했다. 밤을 꼬박 지새우다 아주 잠깐 잠이 들었고, 선물처럼 해피와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

조금만 더 있다 깨지. 아쉬운 마음에 괜히 베개를 툭툭 두드렸다. 새벽 5시가 막 넘은 시각이라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수일은 좀 더 꿈을 음미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자 팬티만 입은 두산이 해피 집 앞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엉덩이며 매끈한 등이 보기 좋았지만, 자세 때문인지 흉하게 느껴졌다. 두산은 수일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고개만 돌려 수일을 쳐다보았다.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술 위에 세웠다. 표정이 참으로 진지했다.

혹시 아픈 건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일은 두산의 맞은편으로 자리 잡고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기와집 입구에 쳐 놓은 발을 슬쩍 들추자 해피가 짜가 호돌이 인형을 벤 채로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일정한 속도로 하얀 배가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출입구 쪽에 밀려난 꿈돌이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흰색의 곰 인형, 자잘한 주먹만 한 크기의 인형들이 가득한 집 안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픈 건 아니지?”

수일이 속삭였다.

“어. 피곤한갑다.”

두산이 일어나면 자동으로 부스스한 머리로 기와집에서 걸어 나오던 녀석이 웬일로 잠잠하길래 엎드려서 확인하고 있었다고 했다.

지난 한 달 추석을 쇠고, 절에도 가고, 바닷가를 거닐고, 가족사진을 찍었으며 돌잔치용 한복을 맞추고 독사진을 찍는 둥,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저 작은 몸이 피곤할 만도 했다.

두산이 기지개를 켜며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수일도 조심히 일어났다.

“쫌 잤나?”

“응.”

수일과 두산은 쪽 뽀뽀를 했다. 두산이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는 니 때메 한숨도 몬 잤다.”

잘만 잤으면서 엄살을 피웠다.

“뭐래. 내가 너 잠든 거 다 봤는데.”

“잠든 척한 기다.”

“잘도. 나야말로 새벽에야 겨우 잠들었든?”

둘은 누가 누가 더 잠을 설쳤는지 내기라도 하듯 자기 말만 했다.

“참, 나 좋은 꿈 꿨어.”

수일이 자랑했다.

“내 꿈 꿨나?”

“아니. 해피 꿈. 해피가 말도 했다!”

“에이, 개꿈이네.”

두산이 웃었다. 해피가 나오는 꿈이니 개꿈이기는 했다.

“해피 말은 잘하드나?”

“응. 엄청. 근데 말투가 너하구 똑같았어.”

“그래? 이왕이면 서울말 배우든가 안 하고.”

그게 뭐라고 아쉬워했다. 서울 말씨를 쓰는 해피를 떠올리며 수일은 웃었다.

“전복죽 데우까?”

“응.”

밤새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가 배가 고팠다.

“내는 토스트 묵어야지!”

어련하려고. 좋은 날 잔소리하기 싫어서 수일은 그러라고 했다.

“숙모님도 깨워야 하는 거 아냐?”

“개안타. 배고프면 일 나긌지.”

“말이라도 해야지.”

8시에 미용실 예약을 해 두었으므로 지금쯤은 깨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며 ‘숙모님, 일어나셨어요?’ 했다. 대답이 없었다. 조심히 방문을 밀어 빼꼼 방 안을 훑었다.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어? 숙모님 안 계신데?”

“그래? 나가는 소리 몬 들었는데?”

“어디 가셨지?”

“새벽같이 산뽀를 나갈 양반은 아이니까 목욕 갔는갑다.”

두산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목욕탕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온통 머릿속이 목욕탕으로 가득했다.

“우리도 목욕탕 다녀올까?”

정말 목욕탕에 가고 싶었다. 뜨거운 탕 안에서 손가락 지문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몸을 담그다가 머리를 감고 때를 민 다음 마지막으로 시원한 바나나우유 하나를 사서 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목욕탕에 못 간 지도 1년이 넘었다.

기대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두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욕조에 뜨끈한 물 받아 주께.”

“목욕탕하고 욕조는 차원이 다르지. 그리구 목욕 끝내고 바나나우유 마시면 얼마나 맛있는지 너두 알잖아. 두산아, 우리도 가자. 응?”

“그라믄 가든가.”

“정말?”

수일이 반색했다.

“어. 가자. 해피 혼자 두고.”

아뿔싸. 두산은 곧장 수일의 약점을 찔렀다. 수일은 절대 해피를 혼자 두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피곤해서 늦잠까지 자고 있지 않은가.

“숙모님 언제 오시려나.”

수일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제 막 문 열었을 낀데, 1시간은 있다 안 오겠나. 맞다. 우리 조모 목욕탕 가면 2시간은 기본인데.”

“그래?”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가서 바나나우유라도 사 와. 목욕하고 마시게.”

“알았다. 지금 문 연 점빵이 있을라나?”

“목욕탕 문 연다며? 거기 가서 사와.”

“오. 똑똑한데.”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두산이 얄미웠다.

“밥은?”

“목욕하고 먹지 뭐.”

“알았다. 내 퍼뜩 갔다 오께.”

두산은 좋다고 팬티 바람으로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옷 입구 나가야지!”

“아. 맞네.”

두산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도로 놓았다. 어떻게 자기가 벗고 있는 걸 모를 수가 있을까. 한숨 쉬기도 지쳤다.

두산은 옷방으로 들어가더니 체감상 1초 만에 추리닝을 입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나갔다.

“하여간에 조심성이라곤 없어요.”

수일은 투덜대며 혹여 해피가 깼을까 봐 기와집을 살폈다. 다행히 기척이 없었다.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컵에 따랐다. 슬슬 이가 시린 걸 보니 정말 가을이 온 모양이었다. 물병을 제 자리에 넣고 주방을 둘러보다가 이 여사 방 근처에 밥상보를 씌워 둔 밥상을 발견했다.

어젯밤에도 못 봤던 거라 의아해하며 밥상보를 들췄다. 흰 쌀밥이 가득한 밥그릇 세 개와 미역국이 담긴 국그릇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접시에 도라지와 고사리, 시금치를 데친 나물도 보기 좋게 담아 두었다. 물그릇을 비롯하여 숟가락과 젓가락도 세 쌍씩이었다. 삼신상이었다.

수일은 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동이 트기 전 삼신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축문을 읽던 것을 떠올렸다. 수일이 백일 나던 날을 기점으로 돌을 지나 열 살이 될 때까지 매년 그렇게 상을 차렸다. 나물은 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맛이라곤 없었지만, 워낙 없이 살던 시절이라 미역국에 보리밥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그저 좋기만 했었다.

조심스레 그릇들을 만져 보았다. 밥그릇과 국그릇이 아직 식지 않은 걸 보면 만든 지 오래된 것 같지 않았다.

해피 돌잔치만 아니었어도 해피를 위한 삼신상 대신 자신의 생일상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추석이 하필 9월 말이었고 그 나흘 뒤가 수일의 생일, 바로 닷새 뒤가 해피 생일이었다. 조모가 돌잔치 얘기를 7월부터 들먹이는 바람에 수일은 생일의 시옷 자도 꺼내지 못했다. 아니 꺼내지 않았다. 두산이 알면 해피 돌잔치고 뭐고 없던 일로 하고 대신 수일의 생일잔치를 크게 열자며 난리 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매년 찾아오는 게 생일이었다. 게다가 작년 말 주민 등록상 생일 때 두산에게 과분할 정도로 축하받지 않았던가. 수일은 아버지가 돼서 이런 일로 서운해하면 안 된다고, 진짜든 가짜든 축하만 받으면 되었지 날짜가 무슨 상관이냐고 자기 합리화 했다.

두산이 돌아왔다.

“머 샀는지 함 바라.”

이번에도 큰 소리로 말했다. 수일은 쉿, 하고 검지를 입에 댔다.

“와?”

두산이 조금 낮지만 여전히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숙모님이 차리신 건가 봐.”

수일이 밥상을 가리켰다.

두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와서 쓰윽 훑어보고 갔다.

“삼신상이네.”

“너두 이거 뭔지 아는구나?”

“당연하지. 조모가 내 생일 때만 되면 새벽에 이거 채린다꼬 꼭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아이가. 니 맛 내 맛도 없는 거를 먹으라꼬 해서 을매나 싫었는데.”

“그래? 난 좋았는데.”

할머니가 계시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이거 오늘 중으로 먹어야 해. 우리 숙모님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침으로 저거 먹자.”

“싫다!”

당연히 그래 할 줄 알았던 두산이 웬일로 거절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싫은 눈치였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맛 읍따.”

“고추장에다가 비벼 먹으면 되잖아. 미역국이야 뭐, 김치 맛으로 먹으면 되구.”

“내 빵 묵고 싶다꼬!”

두산이 안 하던 밥투정을 했다.

“그럼 저걸 누가 먹어, 해피가 먹어?”

“조모가 만들었으니까 조모가 무야지.”

“어으 진짜. 갈수록 떼만 늘어. 니가 애야?”

“애가 아니니까는 하는 말 아이가. 그 머꼬, 내가 묵고 싶은 거 묵을 권리가 있다 내는.”

그때 토독 토독,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해피가 크게 하품을 하고 쭈욱 팔다리를 폈다. 그리고 욕실로 가 문을 긁었다. 거기서 볼일 보는 걸 알면서도 조모는 습관적으로 욕실 문을 닫아 두었다.

“얼른 문이나 열어 줘.”

“하아, 새끼.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두산은 괜히 해피에게 화풀이를 하며 욕실 문을 열었다.

“드가라.”

욕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해피가 볼일을 보고 나오자마자 샤워 호스로 바닥을 씻었다.

볼일도 다 봤겠다, 해피는 나갈 채비를 했다. 채비래 봤자 먼저 현관문 앞으로 가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나 먼저 목욕한다?”

“하든가 말든가.”

두산은 입을 한 발이나 내놓고 일부러 온갖 소음을 내며 준비물을 챙겼다. 신발장 안에서 깜장 봉지와 노란색 테니스공 그리고 목장갑을 꺼내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바지 주머니가 보기 싫게 볼록해졌다.

“그럼 너는 토스트 먹어. 내가 숙모님이랑 삼신상 먹을 테니까.”

“그랄래?”

두산이 반색하며 물었다. 토스트에 금을 발라 둔 것도 아닌데 저리도 좋을까. 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피 아무거나 주워 먹지 않게 잘 감시하구, 발 밟지 말구.”

“알았다.”

“오늘 중요한 날이니까 잘 감시해.”

“걱정도 팔자다.”

언제 그랬냐는 듯 두산이 싱글벙글 웃었다.

“참, 봉다리에 든 거 챙기라. 내가 니 목욕탕 분위기 나게 엔간한 거는 다 사 왔다.”

두산은 해피를 안아 들며 턱으로 식탁 위에 놓인 봉지를 가리켰다.

“어디.”

봉지 안에는 초록색의 때밀이 수건과 1회용 샴푸와 린스, 지우개 크기의 비누가 들어 있었다. 물론 제일 중요한 바나나우유도 잊지 않았다. 조모 먹을 것까지 우유는 세 개였다. 수일이 웃었다. 두산은 뭐든 부탁한 것만 사 오는 법이 없었다. 그의 센스에 매번 감탄했다.

“내 갔다 오께.”

수일은 현관으로 달려가 두산을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와요.”

출근할 때만 하는 말도 해 주었다. 두산이 쪽 뽀뽀를 해 준 뒤, 해피를 옆구리에 끼고 현관을 나섰다.

수일은 바나나우유를 냉장고에 넣은 뒤 봉지를 들고 쫄래쫄래 안방으로 갔다. 욕조에 좀 뜨겁다 싶게 물을 받았다. 욕실 안 거울에 서리가 끼었다. 손바닥으로 서리를 닦았다. 거울 속 남자가 웃고 있었다. 큰 눈이 웬일로 반짝반짝 빛났다. 다 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욕조에 몸을 담그며 아저씨처럼 ‘어으, 시원하다.’를 연발했다. 실상은 뜨거워서 몇 번 튀어 올랐다. 어느 정도 온도에 적응하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손가락 지문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몸을 담갔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때수건에 비누를 묻혀 슬슬 밀었더니 하얀 때가 밀려 나왔다. 양은 많지 않았으나 매일 목욕하는 데도 때가 나와서 마음이 좀 상했다. 깨끗하게 씻는다고 씻었는데 부족했나 보았다.

수일은 살갗이 벌게지도록 때를 민 다음 욕조 물을 빼고 머리를 감았다. 물때가 끼면 안 되니까, 알몸으로 욕조 청소도 재깍 했다. 땀이 줄줄 흘렀다. 마지막으로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흰 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섰다.

당당하게 냉장고로 가 바나나우유를 꺼냈다. 탁 소리 나게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들이켰다. 혀를 스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우유가 어찌나 달콤한지 수일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감격에 겨워 코끝마저 찡했다. 이번에도 눈물을 흘리는 대신 웃었다.

“달다.”

낮게 중얼거렸다.

수평선 너머 어슴푸레 새벽빛이 보였다.

6시 반쯤, 조모가 두산과 해피와 동시에 집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다고 했다.

조모 품에 안겨 있는 해피 주둥이에 흙이 묻어 있었다.

“이 문디 자슥. 주디 바라. 먹을 꺼 천진데 만다꼬 흙을 퍼묵노? 어이?”

조모가 흙을 털어 주며 잔소리를 해 댔다. 해피는 힐끔 쳐다볼 뿐 모른 척했다.

“흙 퍼 묵은 거 아이다. 지렁이 잡겠다고 지랄발광하다가 그리된 기다.”

“지렁이는 무신. 백 프로 흙이다, 흙.”

조모의 주장을 듣던 두산이 진절머리를 냈다.

“해피나 주소. 아 씻기고 밥 묵게. 배고프다.”

“아나. 이 새끼 하는 짓이 니 영판이다. 두사이 저것도 애릴 때 으찌나 흙을 퍼묵던지 걱정이 돼서 병원에도 몇 번 데리고 갔다 아이가.”

조모가 수일을 쳐다보며 말했다.

“또 그 소리.”

두산이 투덜댔다.

두산도 흙을 먹었구나. 수일은 나이도 어리고 집도 잘살아 그러지 않을 줄 알았던 두산이 자신과 비슷하게 흙을 먹었다는 말에 동질감을 느꼈다. 흙을 먹은 이유야 달랐겠지만, 그래도 세대가 아주 다르지만은 않구나 싶었다.

“우리 때야 흙 마이 무찌. 수일이 니도 그랬제?”

“네. 그땐 먹을 게 없으니까 땅에 떨어진 것도 주워 먹고 그랬는걸요.”

“맞다. 사탕 묵다가 흘리면 그거 물에 씻을 생각은 몬 하고 침으로 씻어 묵고 그랬다 아이가.”

조모가 맞장구를 쳤다. 부잣집 딸인 조모도 그랬구나. 수일은 이게 뭐라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참, 삼신상은 언제 일어나서 차리셨어요? 두산이도 소리 전혀 못 들었다고 하던데.”

수일은 조모에게 바나나우유를 내밀며 물었다. ‘두산이가 샀어요.’ 덧붙였다.

“어제 느그들 볼일 보러 나갔을 때 미리 사 놨다. 이 여사가 보면 손질할까 봐 내 방 옷장에 숨기 났다가 새벽 3시에 일나서 나물 손질하고 밥하고. 물도 끓이고. 그래가 상을 차맀다 아이가. 자고 있는 해피 들어다가 방석 우에 올리놓고 같이 삼신 할매한테 빌었다.”

조모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조목조목 새벽에 한 일을 일러 주었다.

“내가 두사이 때도 그래했거든.”

“저희 할머님도 그러셨어요.”

“그랬나? 그래서 니가 이래 곱게 컸나 보네.”

조모가 수일의 볼을 쓰다듬어 주며 위로했다. 칭찬이었으나 수일에게는 위로로 들렸다. 좋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조모는 늘 수일을 칭찬해 주었다. 수일은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욕실이 조용했다. 수일은 살짝 욕실 문을 열어 뭐 하나 지켜보았다. 두산은 해피를 신생아용 욕조에 담그고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마사지를 해 주고 있었다. 마사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해피가 눈을 반쯤 감고 음미하고 있었다. 유난도 저런 유난이 없다고 수일은 또 한 번 생각했다.

물에 젖은 해피는 흡사 할아버지 같았다. 그건 얼굴만 말한 거고, 몸은 털을 다 뽑아 놓은 생닭과 비슷했다. 사람이 옷발이 있듯, 강아지도 털이 중요하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물에 젖은 해피는 정말 못생겼지만 그 나름대로 귀엽기도 했다.

수일은 조심히 욕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삼신상을 거실 정중앙으로 옮겼다. 조모는 목욕으로 한층 뽀얘진 얼굴로 함께 먹을 반찬을 꺼내고 비벼 먹기 좋게 대접도 꺼냈다. 어제 두산이 본가에서 가져온 잡채까지 데워서 올리자, 빈 상이 어느새 명절 상처럼 풍성해졌다.

“목욕 다 끝나 가나?”

욕실로 간 조모는 다 씻긴 해피를 커다란 타월에 안고 나왔다.

“아이구, 우리 해피 장하다. 우찌나 얌전하게 있던지 양반이 따로 없드라.”

아. 내가 해피 털 말리려고 했는데. 밥상을 차리느라고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조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일은 너무 조심하는 바람에 오히려 해피 다루는 일에 서툴렀지만, 딱 하나 털 말리는 것만은 자신 있었다. 빗질도 제법 했다. 조모로 말할 것 같으면 다소 거칠었다. 조모 나이대 어르신들이 그렇듯 본인이 거칠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빗질에도 영 소질이 없었다.

추리닝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 올린 두산이 뒤늦게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내 목욕한다.”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수일은 모른 척했다.

“씻고 와.”

“수건 챙기 주야지.”

“욕실 장 안에 있어.”

“읍따.”

두산이 이러면서 수일의 팔을 잡아끌었다. 딸려가지 않으려고 해도 워낙 힘이 좋아 어림도 없었다.

“숙모님 제대로 털 말리실까? 해피 컨디션에 악영향 끼치는 거 아니겠지?”

수일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낮게 속삭였다.

“내 컨디션이 안 좋다.”

“왜?”

수일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몰라. 으슬으슬 춥다.”

하면서 수일의 손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워낙 열이 많은 두산이라 아파서 뜨거운 건지 평소와 다름없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두산이 아픈 걸 본 적도 없어서 비교할 건더기가 없기도 했고. 느닷없이 아프다는 걸 보면 꾀병이 분명했다.

“어떡해. 약이라도 먹을래?”

수일은 꾀병인 걸 알면서도 걱정하는 척했다. 어제오늘 되지도 않는 투정을 부리는 걸 보면 관심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았다. 아직 애였다.

“약까지는 필요는 없고, 내 힘이 하나도 없는데. 니가 내 목욕시키 주면 안 되겠나?”

두산은 슬금슬금 몸을 붙이며 수작을 부렸다. 웃음이 났다.

“그럼 목욕만 하는 거다. 딴 건 안 돼.”

“알았다. 목욕만 시키도.”

수일은 못 이기는 척하며 두산과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때라도 밀었나? 머 한다꼬 이제 나오노? 사람 바빠 죽겠는데.”

조모가 한참 만에 나온 두산과 수일에게 핀잔을 주었다.

“식사나 하입시다!”

두산이 못 들은 척하며 밥상에 앉았다. 수일의 손을 끌어 제 옆에 앉혔다.

다들 목욕한 지 얼마 안 돼 보송보송했다. 해피는 털까지 빗어 귀공자 같았다. 밥 먹을 때 가슴 털에 국물을 흘릴까 봐 신생아용 턱받이도 해 주었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 같았다.

조모는 해피를 위해 직접 만든 황태미역국을 잘 식혀 삼신상 옆에 내려놓았다.

“해피야 생일 축하한다. 맛있게 묵고 건강하게만 자라라.”

조모의 말 한마디면 족했다.

조모는 대접에 밥과 나물들을 옮겨 담은 뒤 고추장을 넣고 팍팍 비볐다.

“옛날에는 아 탈 날까 봐 아무것도 없이 고마 무따 아이가. 알고 봤더니 내만 그랬대.”

“저희 할머니도 그러셨어요. 복 나간다구 고추장이고 간장이고 일절 없이 차린 그대로 먹게 하셨거든요.”

수일도 고추장에 밥을 비비며 답했다.

“먹을 만하지? 참기름도 듬뿍 넣고 비벼 봐.”

곧 죽어도 토스트를 먹겠다던 두산은 목욕을 시켜 주었더니 마음을 바꿔 삼신상을 먹었다. 해피를 위한 상이라 그런지 평범한 비빔밥인데도 꿀맛이었다.

다만 어젯밤부터 속이 울렁거리더니 오늘은 더 심했다. 조모도 그런지 삼신상을 모두 비운 뒤에 수일은 조모와 함께 까스활명수와 소화제를 나눠 마시며 속을 달랬다.

“뭐가 긴장된다꼬 그라노.”

두 사람과 달리 해피와 두산은 잘도 밥을 먹었고, 해피는 기분 좋게 트림을 하며 늘 하던 대로 자기 별장으로 가 옆으로 누웠다.

“밥 먹고 바로 누면 소 되는데. 이 소리 하지 마라.”

두산이 선수를 쳤다. 수일은 그 생각도 못 할 정도로 긴장한 상태라 ‘뭐래’ 하며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했다.

“꾸물거릴 시간 읍따. 퍼뜩 준비하고 미용실 가자.”

설거지고 뭐고 다들 마음이 급했다. 8시까지 아직 여유가 있는데도 조모는 회관에서 갈아입을 한복을 챙기느라 수선을 피웠고, 해피 기저귀며 인형, 간식 등을 넣었다 뺐다 하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결국, 조모가 원하는 건 모두 챙겨서 잠이 들락 말락 하는 해피를 담요에 싸 서둘러 집을 나섰다.

60평은 될 법한 넓은 미용실에는 신랑 신부로 보이는 남녀와 화장과 머리를 하러 온 그 가족들로 붐볐다. 화장하는 직원 셋, 머리하는 직원 셋,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는 직원이 둘이었다. 원장을 포함 데스크에 앉은 아가씨까지 직원만 열 명이었다.

조모는 원장에게 예약해 두었다며 원장이 보이는 소파로 가 앉았다. 우리 차례가 오려면 멀었는데도 조모는 원장 주위를 알짱거렸고, 자꾸 우리 급하다, 빨리해 도. 했다.

“니 진짜로 잘해 주야 된다. 오늘 억쑤로 중요한 날이다.”

“아이, 김 사장님도. 그래 말하면 섭하지. 내 실력 못 믿습니까?”

“믿으이까 니한테 온 거 아이가.”

“걱정하지 마이소. 내가 오늘 20대로 보이게 해 드리께예!”

미용실 원장은 호탕하게 받아치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서 밋밋하던 신부 얼굴이 입체적으로 변했다. 결혼식 준비로 피곤해 보이던 부모님과 여동생의 얼굴도 환해졌다. 자리를 옮겨 머리까지 하고 나자 모두 딴사람이 되었다.

제일 오래 걸리는 조모부터 의자에 앉았다. 해피는 두산의 품 안에서 잠들었고, 수일은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고 계속 밖을 들락날락했다.

“그만 쫌 왔다 갔다 해라. 정신이 한 개도 읍따.”

“긴장돼서 그러지. 마실 것 좀 사다 줘?”

“김 양아! 여 손님들한테 마실 것 쫌 내다 드리라, 여태 안 드리고 뭐 했노?”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어찌 알아들었는지 원장은 조모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면서 소리쳤다. 음료수를 핑계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수일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데스크 아가씨가 오렌지주스 두 잔을 따라 왔다. 수일은 잔을 들어 두산의 입가에 먼저 대 주었다. 두산이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해피 잘 자네.”

수일은 담요를 톡톡 두드렸다. 이 정도 시끄러우면 잠깐 깰 만도 한데, 해피는 코까지 골며 잘만 잤다. 개치고도 잠귀가 어두운 편이라고 한 이 여사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얼마나 편하면 그러겠냐고, 사랑으로 키워 그런 거라고 고스톱을 치러온 동장 사모님이 말했다. 그러면 괜히 뿌듯해졌다.

담요에 싸인 해피를 신생아인 줄 알고 다가오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아빠가 아를 다 안고 있고. 참 드물다.”

자기 볼일을 마친 중년 여자 손님 하나가 다가오며 이렇게 말했다. 드물기는 했다. 경상도에선 특히 드물다고 벌써 세 번이나 같은 소릴 들었다.

여자는 ‘엄마야! 강새이네!’ 하며 깜짝 놀랐다. 놀라는 것도 잠시, 가시나냐 머스마냐 물었다.

“머스맙니다.”

“참 귀엽게도 생깄다. 몇 살인교?”

“오늘 돌입니다.”

돌이라는 말에 여자가 크게 웃었다.

“강새이한테 돌이라꼬 하니까 억수로 웃기네. 형제는 있고?”

“예. 삼 남매.”

“엄마가 짝은 갑다. 아도 참 짝네.”

이러면서 담요를 슬쩍 들춰 보았다.

“예. 야는 즈그 엄마 닮아서 이래 꼽쓸이고 즈그 누나는 아빠 닮아서 직모라.”

또 시작이었다. 누나는 직모고, 해피는 곱슬인데 성격도 완전 다르다는 얘기. 여자는 두산의 말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꼽슬이면 고집이 쎄긋다.”

이러면서 자고 있는 해피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야야, 니 최가가?”

“아입니다. 백갑니다.”

두산이 대신 답했다.

“다행이네. 최가에 꼽쓸이었으면 고집이 말도 몬 했을 낀데.”

수일은 두산이 백가라고 하는 말을 듣자마자 입술을 실룩대다가 여자가 동의를 구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바람에 마지못해 웃었다.

사실 수일도 두산이 한 말 그대로 서예 학원이나 길에서 만난 이웃 주민들에게 하고 다녔다. 열에 아홉은 해피에게 최가냐고 물었고 그럴 때마다 수일은 ‘윤가’라고 답했다. 그래도 그렇지, 자신이 있는 앞에서 백가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게 얄미웠다.

조모의 화장이 1시간여 만에 끝이 났다. 원래도 고운 사람이 화장을 하니 더 고와 보였다. 조모가 옆자리로 머리를 하러 옮기자 원장이 수일을 불렀다.

“사장님, 조캅니까? 이래 잘생긴 조카 있다는 소리 와 안 했어예? 내는 탈렌트가 와 있는 줄 알았다.”

의자에 앉자마자 원장이 호들갑을 떨며 칭찬했다. 조모가 뿌듯한 얼굴로 ‘내하고 마이 닮았제?’ 하고 물었다.

“닮다 뿌입니까? 누가 보면 모자지간인 줄 알겠다. 그래도 조카 쪽이 쪼매 더 서구적으로 생깄네. 꼭 아랑드롱 같다.”

아랑드롱이란 말을 듣는 순간 오늘 사회를 볼 덕규가 떠올랐다. 덕규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은 수일이 왜 웃는지도 모른 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수일을 돌아보았다.

“웃으니까 훨씬 잘생깄다.”

수일은 괜히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수일을 쳐다보고 있던 거울 속 두산이 자기 칭찬을 들은 양 뿌듯해하는 게 보였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해피를 안고 있는 두산이 참으로 안정돼 보였다. 조신하기까지 한 자세임에도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사나워 보이는 얼굴도 한결 온화해 보이는 효과까지 있었다.

“몇 살입니까?”

“서른일곱입니다.”

“세상에, 내는 스물 일고여덟인 줄 알았는데. 진짜 서른일곱 맞아예?”

“네.”

“아인데, 절대 그 나이일 리가 없는데.” 

원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수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피부가 백옥 같다. 뭐 바르는 거 있습니까?”

“그냥 로션 하나 바르고 있어요.”

두산이 사다 준 갈색 병을 로션처럼 바르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엄마야 목소리도 억수로 좋다. 서울 사람입니까?”

“네.”

“어데 목소리만 좋그로? 성격도 사근사근 하이 여 갱상도 사내들하고 차원이 다르다!”

조모가 그 큰 드라이 소리를 뚫고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시장통같이 시끄러운 미용실이 조모 탓에 더 시끄러워졌다. 그렇게 귀가 먹은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서로 고함을 질러 가며 대화하고 웃고 하다 보니 수일의 화장과 머리도 끝이 났다.

수일과 비슷한 시간에 끝난 조모가 두산에게서 해피를 받아 들었다. 두산은 까맣긴 해도 피부가 좋아서 원장에게 피부 칭찬을 연신 들었다. 어디 피부 칭찬뿐이랴. 몸과 체격에 관한 칭찬은 더 오래 계속되었다. 원장은 화장을 해 주면서 두산의 몸을 여기저기 쓰다듬었고, 두산은 그러면 아주 대놓고 만지라고 자세를 고쳐 주었다. 저렇게 몸 자랑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졌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처음 만난 원장과 두산은 화장이 끝났을 무렵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두 시간여의 단장이 끝나고 넷은 바로 회관으로 이동했다. LA 갈비가 유명하다는 이곳은 최근 결혼식장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한 층에 서너 쌍씩 결혼식이 열리는 여타 예식장과 달리 이곳은 한 층당 한 쌍씩 결혼을 했다. 그 탓에 가격이 비쌌지만, 웃돈을 주고도 예식장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인기였다. 보다 쾌적한 환경과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는 광고 전단이 회관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회관 제일 꼭대기 층이 해피 돌잔치가 열릴 장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황금색 자수가 새겨진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매니저가 그들을 맞았다. 식장 복도에는 벌써 화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모와 두산은 리본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며 누가 보냈는지 얘기를 나눴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네 사람을 식장 안으로 안내하며 매니저가 물었다.

“예. 주이소. 으차피 식 진행하는 동안에는 잘 묵도 몬할 거 같은데.”

“그래. 두사이 말이 맞다. 밥부터 묵자.”

“아니.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을마 안 되기는.”

말을 하다 말고 두산이 우뚝 멈춰 섰다. 조모가 ‘엄마야’ 했고, 수일은 작게 탄성을 질렀다.

기다란 리본으로 매달아 둔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파스텔, 금박, 은박으로 된 리본들은 작은 움직임에도 하늘거리며 춤을 췄고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사방으로 귀여운 깃발과 장식품들이 비치되어 눈을 즐겁게 했다. 하얀 테이블보가 씌워진 둥근 테이블마다 채도가 높은 종이로 만든 꽃들이 화병 가득 꽂혀 있었다.

빈 돌상이 올라간 무대 좌우에는 사진관에서 설치한 액자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추석에 찍은 가족사진이 무대 왼쪽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했고, 오른쪽에는 해피 독사진들로만 아기자기하게 장식해 두었다. 물론, ‘경 한글날 축’, ‘세종 대왕님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도 있긴 했지만, 손바닥만 한 데다가 구색을 갖추려고 대충 걸어 두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두산이 뿌듯한 표정으로 ‘경 해피 첫돌 축’ 플래카드를 바라보았다. 조모는 한복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찍었다. 수일도 감격스러워 눈가가 뜨거워졌다.

“믓지제?”

“응.”

“마음에 드나?”

“말이라구.”

해피를 안고 있던 조모는 해피 사진으로 꾸며진 곳으로 다가가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해피야, 저것 쫌 봐라. 다 니다, 니!”

잠에서 깬 해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크게 하품했다. 사진을 보기나 하는 건지, 분홍색 혀로 입가를 핥고 또 하품했다. 두산이 다가가 쓱 눈곱을 떼 주자 짧은 다리를 쭉 뻗었다. 멀뚱멀뚱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야 먹을 것도 있나?”

조모가 매니저에게 물었다. ‘야’는 해피를 말했다.

“예. 있습니다. 고기는 종류별로 다 있는데, 뭘로 갖다 드릴까요?”

“한우로 주라. 고기만 주지 말고 채소도 쫌 썪어 주고. 참, 아 먹기 좋그로 짤라 주는 거 잊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가족분들은 뭘로 드시겠습니까?”

매니저가 메뉴를 읊으려 하자 조모가 되는 대로 다 가져다 달라고 했다.

매니저와 자리를 바꿔, 이번엔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테이블을 세팅했다. 행사가 열리기 전 가족들이 대기할 수 있는 곳도 알려 주며 짐을 대신 가져다 놓겠다고 말했다. 두산이 자동차 키를 넘겨주었다.

잠시 후 해피 몫의 음식을 시작으로, LA갈비와 냉채족발, 동태전, 김밥 등이 줄줄이 나왔다. 수일은 속이 더부룩했으나 음식을 보니 급 식욕이 돌았다.

LA갈비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맛있었고, 냉채족발은 텁텁한 입 안을 깔끔하게 헹궈 주었다. 동태전과 김밥을 김치에 싸서 먹으니 그건 그것대로 맛있었다.

“이것도 묵고, 이것도 무 바라. 억수로 맛있네.”

두산은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수일의 접시로 부지런히 날랐다. 조모가 먹으려고 젓가락을 뻗을 때마다 두산이 선수를 쳤다. 몇 번 젓가락이 얽히고설키더니만, 조모가 탁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야이 새끼야, 내 입은 입이 아이고 주디가?”

조모가 두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에헤이, 말을 해도 꼭. 조모도 마이 무라. 아나.”

두산이 조모의 접시에다 척척 음식들을 내려 주었다. 조모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두산을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화를 풀었다.

수일을 신경 쓰는 와중에도 두산은 틈틈이 해피도 챙겼다.

“꼭꼭 씹어 무라.”

이건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 몰라 수일이 먹다가 잠깐 멈췄다. 아무래도 둘 다에게 하는 말인 듯했다.

“당근도 묵고.”

“접시 닳겠네 닳겠어.”

이건 해피고.

“짭다. 밥도 쫌 무라.”

이건 수일이었다.

“아침에 때 빼고 광냈는데 입에 다 묻었네.”

수일과 해피가 동시에 두산을 쳐다보았다. 수일은 냅킨을 들고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입가를 닦았다. 해피는 혀로 입 주변 털을 핥았다.

정작 조모에게 한 말이었다는 건 두산이 조모에게 냅킨을 건넬 때 알았다. 잘 먹긴 해도 웬만해선 흘리거나 묻히지 않는 조모가 갈비를 뜯느라고 입가에 양념이 묻은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배부르다. 어데 가서 한숨 자면 딱 좋겠네.”

“대기실 가서 자라.”

“머리도 하고 화장도 했는데 우찌 자노. 참아야지.”

조모는 행여 머리가 망가질세라 조심하며 수일에게 한숨 자라고 말했다.

“수일이 니 피곤해 보인다. 가서 쪼매 눈 좀 붙이고 있으라.”

“아니에요. 괜찮아요.”

수일은 잠이고 뭐고 슬슬 걱정이 밀려들었다. 어젠 사람들 뒷말이 그렇게 신경 쓰이더니 지금은 해피가 걱정이었다. 해피가 손님들 앞에서 돌상을 엎거나 응가를 하고 쉬를 싸면 어쩌나. 강아지들이 여럿 오기로 했는데 그것들끼리 물고 싸우면 어쩌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손님들 쫌 마이 올 끼다. 내가 현금은 됐고 금으로 달라꼬 했는데 금붙이가 을매나 들어올랑가 모르겠네.”

조모는 금 받을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욕심도 많다. 고마 빈손으로 오라 카지.”

“니하고 내하고 같나? 내가 갖다 바친 돈이 얼만데. 결혼식이야 돌잔치야 회갑이야, 수억은 뿌맀다. 이참에 거둬들이야지.”

“알았다. 조모 니 다 가지라.”

“머라카노? 잘 모아 놨다가 해피 장개갈 때 쓸 끼다.”

조모 입에서 장개라는 말이 나오자 두산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입에서 나올 말이 뭔지 아는 수일이 다급히 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조모는 아직 해피가 고자인 걸 몰랐다. 해피는 왜 불알이 없냐고 몇 번 묻기는 했으나, 작은 강아지 불알은 생후 1년쯤 되어야 내려온다고 알려 주니 곧이곧대로 믿어 주었다.

“머시고, 맥스? 그 쥐좆만 한 아도 벌써 세 번이나 장개를 갔담서? 씨내리도 아이고 그라믄 되나. 우리는 고마 참한 처자 하나 델꼬 와서 기와집에서 새끼 낳고 오손도손 살게 하자. 내가 첩이라서 그란지 일부일처로 행복하게 사는 기 그래 부러울 수가 없더라.”

조모는 신세 한탄과 소망을 동시에 말하며 웃었다.

“새끼 없이 둘이서 살아도 되지. 우리처럼.”

두산이 웬일로 옳은 말을 했다.

“너거들이 와 새끼가 없노? 듣는 해피 서운크로. 그라고.”

조모가 다음 말을 하려는데, 직원이 후식을 내왔다. 아이스크림이었다. 초코와 딸기 바닐라 3종이 산 모양으로 옹기종기 담겨 있었다. 다들 후식에 정신이 팔려 조금 전 대화는 까맣게 잊었다. 오랜만에 먹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은 입에서 살살 녹았다. 해피가 먹고 싶어 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 조모가 간식을 하나 까서 주었다. 평소라면 눈치를 줬을 두산도 이번에는 가만있었다.

“현금 다 필요 없고, 재산은 무조건 금이다 금.”

조금 전까지 해피 장가 얘기를 하던 조모가 경제 얘기로 주제를 바꿨다.

“내는 금에 관심 읍따. 난중에 미국 가서 살라꼬 딸라 모으고 있다.”

“으이그. 이 바보야. 딸라고 엔화고 요새 똥값 아이가. 금을 모아라. 조모 말 허투로 듣지 말고.”

“그래 좋으면 조모나 마이 모으소.”

두산은 서른다섯이 되면 모든 걸 털고 미국으로 갈 거라고 했다. 그 계획에 수일과 해피가 포함되어 있는 건 알지만, 아직은 실감 나지 않았다. 9년이나 남은 먼 미래였다. 언제 계획이 바뀔지 아무도 몰랐다. 처음엔 미국 가서 뭐 먹고 사냐부터 해서, 해피는 영어를 못하는데 친구나 사귀겠냐 또박또박 따지고 들었던 수일은 이제 그러려니 했다. 가끔 신문이나 잡지에서 하와이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 여기가 좋겠다고 혼자 상상하는 정도였다.

“참, 조모는 금융 실명제 그거 했나?”

금융 실명제 소리에 조모가 인상을 구겼다.

“미칬다고 그거를 하나. 하다 하다 정부에서 서민들 돈 뺏아 갈라꼬 별짓을 다 한다.”

“그기 정확하게 뭔데?”

“절도다 절도!”

조모가 흥분했다. 가만 듣고 있던 수일이 끼어들었다.

“숙모님, 그런 거 아니구요, 돈세탁하는 나쁜 사람들 때문에 만든 정책이에요.”

“수일아 그거를 믿나? 니도 참 순진하다.”

조모가 탄식했다.

“떳떳한 돈이면 정말 아무 문제 없어요. 물론 세금은 좀 내야 하겠지만요.”

수일은 힘없이 말했다. 금융 실명제 하면 해피 통장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두산은 1월부터 수일에게 월급봉투를 모조리 갖다주었다. ‘니 쓰라.’ 그 말이 다였다. 집에만 있던 수일은 그런 큰돈이 필요 없었다. 게다가 두산이 힘들게 번 돈이 아니던가. 월급을 처음 받았던 1월과 2월에는 한 푼도 쓰지 못하고 봉투째로 서랍에 넣어 두었더랬다. 그러다 두산의 성화에 못 이겨 만 원씩 꺼내 쓰기 시작했고, 괜히 은행도 기웃거려 보았다. 난생처음으로 상담이란 것도 받았다. 은행원은 친절했다. 음료수까지 내주며 이율에 대해 알려 주고 투자 상품을 소개해 주었다.

수일은 제일 먼저 해피 이름으로 된 적금 통장을 만들었다. 적금을 넣고 남은 돈으로 상엽에게 담뱃값을 부친 후 삼락 형님 영치금을 넣었다. 은아 씨를 만나 배 터지게 삼겹살을 먹은 날, 헤어지는 길에 은아 씨 아이들과 어머니를 위해 고기를 넉넉하게 사서 보냈다. 어디 그뿐이랴, 서예 학원 어르신들에게 주전부리를 사 가지고 갔으며, 컴퓨터 학원을 오갈 때마다 지훈과 함께 군것질을 했다. 이 여사와도 1주일에 한 번씩 중국집에서 자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먹었다.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만지 계산하며 전전긍긍하지 않고, 온전히 베풀 수 있는 상황이 뿌듯했다. 더 드세요. 실컷 먹어요. 별거 아니에요. 약소한걸요. 이런 말을 술술 내뱉었다. 원래부터 그랬던 사람인 양 흉내를 냈다.

그 기분이 무척 좋아서, 수일은 지금까지도 매달 월급날이 되면 상엽의 담뱃값을 부치고 삼락 형님의 영치금도 넣었으며 은아 씨와 함께 삼겹살을 먹었다. 서예 학원에는 계절에 맞춰 주전부리를 바꿔 가져갔다. 지훈은 얻어먹기만 하는 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며 3번에 한 번꼴로 자기가 샀다. 이 여사와는 여전히 중국집에서 매주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먹었다.

신기했다. 써도 써도 통장에 돈이 쌓였다. 보물단지 같았다. 수일은 하루에 열두 번씩 통장을 들여다보았고 거기에 적힌 숫자를 체크했다. 꿈을 꾼 걸까 봐, 자신이 0 하나를 잘 못 세었을까 봐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확인했다. 숫자가 맞아떨어지면 희열을 느꼈다. 몰래 미소 지으며 서랍에 고이 통장을 숨겨 두었다.

그러던 8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금융 실명제라는 정책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11월까지 은행에 신분증을 가지고 가서 본인 확인을 끝내야만 돈을 찾을 수 있다는 뉴스였다. 수일이야 숨겨 둔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장이라도 가서 실명제를 할 수 있었지만, 해피 통장이 문제였다. 해피는 주민 등록증도 없고 출생 신고서도 없었다. 해피 통장에 꼭 천만 원을 저금해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들 이름 그게 대수냐고, 돈이 중요하지라고 할 거였다. 하지만 수일에겐 이름이 돈만큼이나 중요했다. 강아지를 사람 취급 한다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해피 이름으로 된 통장을 지키고 싶었다.

수일은 당장 은행에 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안 된다’였다. 되는 건 윤수일 이름 하나뿐이었다. 수일은 그날 종일 은행이란 은행에는 다 들어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방법이 없냐 물었지만, 정부 정책이라서 은행원들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들에겐 강아지보다 항의하러 온 고객들을 상대하는 일이 더 급했다. 몹시 지쳐 있는 은행원들에게 더 따질 수도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수일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이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나간 신문들까지 깡그리 모아 정독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적이 있나 싶게 금융 실명제에 대해 파고들었다. 급기야 정책과 관련된 내용은 눈을 감고도 줄줄 읊을 수 있게 되었다. 정책이 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해피 이름으로 된 통장을 보존할 길이 없었다.

수일은 제법 큰돈이 들어가 있는 해피 통장을 그대로 두었다. 아마 11월이 지나도, 해피가 어른이 되고 장가를 가도 통장은 그대로일 거였다. 찾지만 않으면 그건 해피 통장이었다. 그래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모와 두산은 어느새 단풍놀이에 대해 떠드는 중이었다. 그렇게 짧은 식사가 끝나자, 홀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뒤편에 마련된 뷔페 접시에 음식을 날랐다. 강아지용 음식은 별도라 혹시 사람들이 먹을까 봐, 강아지 전용이라는 팻말을 크게 붙여 두었다.

박 실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의 여성이 자리로 찾아와 행사 진행 순서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대기실로 이동하실까예?”

“오야. 야들아, 가자.”

회관 대여비며 돌잔치 비용 일체를 부담한 조모는 박 실장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앞장섰다.

대기실은 신부 대기실로 쓰이던 곳인지 화사한 분홍색 벽지와 흰색의 레이스 천을 씌운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좋은 향기도 났다. 바닥에 내려간 해피는 킁킁 냄새를 맡으며 낯선 곳을 탐색했다.

“의상 갈아입고 편하게 쉬고 계십시오. 비디오 촬영 기사랑 사진사도 조만간 도착할 겁니다. 도착하는 대로 대기실로 보낼 테니까, 요구 사항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하시고예.”

박 실장이 대기실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세 사람은 그제야 옷을 갈아입었다. 조모는 단정한 한복을 꺼내 속치마부터 입기 시작했다. 수일과 두산은 이번에 주문 제작한 턱시도를 꺼냈다. 두산은 화이트, 수일은 검은색 턱시도였다.

해피가 흰색인데 흰색 옷을 입으면 어쩌냐고 수일이 구박했지만, 담요에 싸서 안고 있으면 된다며 두산은 곧 죽어도 흰색 턱시도를 주장했다. 수일에게도 흰색을 입자고 졸랐지만, 수일은 이왕 맞추는 거 클래식한 검은색 턱시도가 입고 싶었다. 제임스 본드가 입던 딱 그 스타일로 말이다.

반대한 게 무색할 정도로 두산의 구릿빛 피부에 흰 턱시도가 무척 잘 어울렸다. 은근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양복점 사장에게서 배운 대로 서로의 나비넥타이를 매 주었다. 조모만 없었다면 입이라도 맞췄을 텐데, 두 사람은 은근한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며 넥타이를 매만지고 어깨를 털어 주었다.

“너거들 그래 있으이까 꼭 신랑 신부 같네.”

새 한복을 갖춰 입은 조모가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숙모님도 새색시 같으세요.”

“그래? 뭐, 내가 생각해도 이번 한복이 쫌 잘 어울리는 거 같기는 하다.”

조모가 자화자찬하며 소녀처럼 웃었다.

“조모 안 바쁘나? 볼일 읍나? 밖에 쫌 나갔다 오지?”

두산이 대놓고 나가 달라고 말했다. 칭찬이라도 한마디 하면 오죽 좋아, 애가 참 직설적이었다.

“으이그, 저 새끼 저거. 내가 볼일이 있어도 니 좋아하는 꼴 보기 싫어서 여 있을 끼다.”

조모가 드러눕다시피 소파에 앉았다. 수일이 두산의 팔을 잡아당겼다. 눈짓으로 잠깐 나가자고 했다. 조모가 아니라 우리가 나가면 되지. 왜 그 생각은 못 할까.

“여긴 계단 없어?”

수일의 말에 두산이 바로 비상계단을 찾았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층마다 결혼식이 열리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거니와 하필 옥상에 야외 카페가 있었다. 제일 꼭대기 층이라 전망이 좋아 결혼식 온 김에 다들 들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수일과 두산을 흘끔거렸다. 턱시도를 입은 두 남자가 계단에 서 있으니 시선을 끌 만도 했다. 게다가 드물게 두산이 흰 턱시도를 입어서 더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수일이 봐도 감탄이 날 만큼 흰색이 잘 어울렸다. 평소라면 얼른 돌아가자고 했을 텐데, 이번만큼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들의 시선이 즐거웠다. 수일의 심정도 모르고 두산은 사람이 많다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턱시도 맞추길 잘했다. 그지?”

수일은 낮게 속삭였다.

두산의 손가락을 슬쩍 잡았다 놓았다.

“억수로 잘 어울린다.”

“너두.”

돌잔치에 턱시도를 입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어느 부모가 아이 잔치에, 빌리는 것도 아니고 직접 턱시도를 맞추기까지 하겠는가. 상담을 했던 양복점 사장도 의아해했지만, 한 번뿐인 돌잔치니까 수일은 두산의 제안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올해 들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화자찬했다.

복작거리는 계단에 오래 있을 수는 없어서 수일은 두산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침 대기실에 사진사와 카메라맨이 도착해 있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대기실 장면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았다. 카메라맨이 편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괜히 긴장됐다. 고작 5분 정도의 촬영이었으나 카메라가 돌아가는 내내 미소 짓고 있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촬영 중에도 연신 삐삐가 울렸다. 두산과 조모의 것이었다. 수일의 삐삐만 얌전했다. 삐삐를 확인하고 간단하게 통화하던 두산은 볼일도 보게 할 겸 해피를 데리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조모는 두산이 삐삐를 확인할 때만 빼고는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그녀가 제일 바빴다. 긴장은커녕 웃느라고 광대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어째 수일만 긴장하는 모양이었다. 속이 답답해서 셔츠 단추를 풀고 나비넥타이도 느슨하게 했다. 직원이 청심환을 건넸기 망정이지 아주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대에도 섰던 사람이 와 이리 긴장하노?”

“무대하고 같니?”

“다를 건 뭐꼬.”

두산이 커다란 손으로 수일의 어깨와 팔을 주물렀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 호흡하는 법을 가르쳤다.

“자, 내 따라 해 바라.”

두산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코로 들이마실 때 배가 뽈록하게 나와야 되고. 아니, 그기 아이고. 배가 나와야지. 배. 입으로 말고 코로 들이마시라. 옳지. 3초간 숨을 참고, 천천히 내뱉아라. 뽈록한 배가 드가제? 그렇지.”

이게 복식 호흡법이라는 것으로 숨을 들이쉴 때 배를 부풀리는 게 키포인트라고 했다. 배에 신경을 쓰다 보니 오히려 숨쉬기가 어려워졌지만,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청심환 약효가 돌아서 그런 건지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똑똑, 누군가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리더니 덕규가 큰 소리로 인사했다.

“행님들, 김 사장님. 돌잔치 축하드립니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화장까지 한 덕규는 은갈치색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돌잔치에 입고 오기에는 좀 과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신경 써서 입고 와 준 게 고마웠다.

“사회 봐 줘서 고마워요, 덕규 씨.”

차마 멋지다는 말은 못 했다.

“쌔끼. 옷 좋네. 새로 샀나?”

“예. 행님이 준 돈으로 큰맘 먹고 한 벌 장만했습니다.”

“잘 어울린다. 그거 입고 소개팅 나가면 여자들 뻑 가긌다.”

두산의 말에 덕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설마 하니 그려러고.

수일은 두산이 빈말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뭐 쫌 묵으면서 준비하고 있으라.”

“예, 행님. 오늘 최고의 돌잔치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덕규가 힘차게 다짐했다.

11시 반부터 손님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대기실에서 쉬고 있던 세 사람은 손님을 맞으러 식장 입구로 나갔다. 밖에서 홀을 촬영하고 있던 비디오 촬영 기사와 사진사가 동행했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부터 식장 입구까지 화환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여전히 화환이 들어오고 있었다. 수일과 두산은 잔치가 열릴 홀 입구 바로 앞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첫 손님은 두산의 둘째 형 가족이었다. 두열은 주차 중이라며 둘째 형수와 아이들이 먼저 와서 인사했다. 메리가 두산과 수일을 보자마자 앙칼지게 짖었다.

“이 가시나 또 이라네. 삼촌들 아이가. 얼마 전에도 봤는데 그새 까뭇나? 동생한테도 인사해야지. 해피야, 생일 축하한데이.”

둘째 형수가 빠르게 말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리야, 생일 축하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렴.”

“왕왕! 아르르르, 왕!”

수일의 축하 인사에 메리가 더욱 사납게 짖었다.

메리는 둘째 형수를 정말 좋아해서, 타인이 그녀 근처만 가도 공격으로 간주하고는 저렇게 짖었다. 메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들었던 손을 수일은 조심히 물렸다.

“야들아, 서울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아이들은 수일이 여전히 낯선지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했다.

“안녕하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첫째가 인사했다. 나이 어린 둘째는 형 뒤에 숨어 입만 뻥긋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안녕, 와 줘서 고마워.”

“이 새끼들, 꼭 수일 씨 앞에서만 이래 부끄럼을 타네. 너거들 꼬추 떨어지긋다. 큰 소리로 말 몬 하나?”

둘째 형수의 성화에도 애들은 쭈뼛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두산에게 달려들었다.

“삼촌! 삼촌, 내 업어도! 내 뱅기 태아도!”

“아이다. 내 먼저다!”

두 아이들이 두산의 다리에 매달렸다. 해피를 안고 있던 두산은 먼지 털듯 아이들을 털어 내며 ‘저리 가라’ 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고, 다시 두산의 다리에 매달렸다. ‘저리 가라꼬.’ 하며 두산이 재차 털어 냈다. 아이들은 소리 내 웃으며 털려 나갔다가 자석처럼 찰싹 들러붙기를 반복했다.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는가 보았다. 수일은 두산의 흰 바지에 때라도 묻을까 봐, 주름이 지면 어쩌나 걱정하며 아이들이 그만 좀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수일 씨는 우째 볼 때마다 잘생겨집니까?”

둘째 형수의 칭찬이 아니었다면 정말 아이들을 떼러 갔을지도 몰랐다.

“아유, 아닙니다. 화장을 해서 그런가 봐요.”

“화장도 화장인데, 옷까지 그래 입고 있으니까 꼭 새신랑 같다.”

수일은 새신랑이란 말에 황급히 손을 내저었으나 내심으로 기뻐했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다 보니 둘째 형수 품에 안긴 메리가 해피와 가까워졌다. 메리는 해피를 보며 가차 없이 이를 드러냈다. 해피도 질 수 없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분위기상 해피가 밀리고 있었다. 조카들은 두산의 다리에서 놀지, 해피는 메리에게 밀리지. 수일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아이들과 강아지들을 주시했다.

“행님, 축하드립니다.”

언제 왔는지 두열이 수일을 향해 인사했다. 두열에게 형님이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일은 흠칫흠칫 놀랐다. 연휴 전에도 몇 번 만났었고, 집까지 초대받아 갔으면서도 이상하게 적응되지 않았다. 티 내면 서운해할까 봐, 태연한 척 맞절을 하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화답했다.

“빈손이가?”

두산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물었다. 좋은 날 좀 좋게 말하면 어디 덧나나. 수일은 애들 앞에서 욕설이라도 오갈까 봐 긴장했다.

“빈손이겠나? 아나, 금송아지.”

두산의 손에 푸른색 벨벳 통이 건네졌다. 두산이 통을 두어 번 흔들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가벼운데?”

“열 돈이 머가 가볍노?”

“에이, 열 돈이 머꼬? 셋째 행님은 스무 돈 해 줐는데.”

두산의 말에 두열이 눈을 치켜떴다.

“진짜가? 하아, 그 새끼. 뒤통수 칬네. 내하고 열 돈씩 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러면서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됐나?”

수표 석 장을 내밀었다. 두산이 그제야 씨익 웃었다.

“참, 큰행님은?”

“주말인데 바쁘겠지.”

어머니 눈치 때문이 아니더라도, 두협은 정치 행보의 일환으로 이름 좀 있다 하는 정치인이나 검경, 기자, 지역 유지 자녀들의 결혼식과 돌잔치, 회갑연에 다니느라 주말마다 바빴다. 눈도장을 찍는 게 중요해서 적게는 서너 군데, 많게는 일고여덟 군데를 찾아다녔다. 그러기 위해선 첫째 형수의 도움이 필요했다. 오늘도 부부가 장소를 나눠 잔칫집을 돌고 있을 거라며 두열이 설명했다.

“안 그래도 금은빵 갈 시간 없다꼬 현금으로 주드라.”

이러면서 두열이 봉투를 내밀었다.

두산은 봉투 입구에 후 하고 입김을 불어 넣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어 수일에게도 보라며 눈앞에 쓱 내밀었다. 봉투 안에 빳빳한 흰색 수표가 가득했다. 수일의 눈이 커지자 두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가 달라졌다.

“행님, 행수. 아들 델꼬 드가서 밥부터 무라. LA갈비 억수로 맛있드라.”

“새끼. 좋단다.”

웬일로 두 형제가 욕 하나 없이 평화롭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통화하다 조금 늦게 온 조모는 메리에게 손을 뻗었다가 사납게 짖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메리도 많이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아이그, 저 가시나는 누구를 닮아서 저래 썽질이 드럽노. 하여간에 예쁜 기 장땡이다.”

투덜대며 한복 치마를 훔쳤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아는 얼굴이 거의 없었지만, 수일은 웃으며 손님맞이를 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드시고 가세요. 나갈 때 꼭 수건도 받아 가세요. 입에 단내가 나도록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고개를 숙이자,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행님.”

“축하드려요, 오빠.”

“현철 씨, 정애 씨. 와 주셔서 고마워요.”

수일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두산아, 축하한다.”

“고맙다, 행님아. 차 안 막히드나?”

“요 앞에만 쪼매 막히고 개안았다.”

정애 씨도 두산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해피를 만지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두산이 안고 있어서 달란 소리는 못 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수일이 그런 정애 씨를 위해 두산에게서 해피를 뺏어 와 정애 씨 품에 안겼다.

미용실에서 몇 번 봤다고 해피가 얌전히 안겨 있었다.

“해피야, 잘 있었나? 나 기억나제? 니 이발해 준 이모야 아이가. 정애 이모.”

정애 씨는 조근조근 해피에게 말을 걸었다.

“생일 억수로 축하한데이. 아버지 말씀 잘 듣고, 밥도 잘 묵고,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해라. 이모야가 다음에도 머리 이쁘게 짤라 주께.”

“해피야, 대답해야지. 감사합니다, 이모.”

수일은 뿌듯한 표정으로 해피 대신 대답해 주었다.

무뚝뚝한 현철은 이번에도 혼자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놓고 정애 씨를 기다렸다. 나란히 가면 오죽 좋아. 수일은 현철이 조금만 더 다정했으면 하고 생각하며 정애 씨에게 해피를 돌려받았다.

밀려드는 손님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사이 301호 동장 사모님이 맥스를 데리고 나타났고, 서예 학원 공 여사님이 그녀의 남편과 팔짱을 끼고 등장했으며, 박 영감과 이 영감도 손주들을 대동하고 축하 인사를 전했다. 김 영감님은 자기 반만 한 복순이를 등에 업고 아내의 도움을 받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 여사가 시어머니와 남편, 막내딸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나머지 아이들은 다 커서 놀러 다니느라 바쁘다고 했다. 수일은 이 여사가 내민 봉투를 안 받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받았고, 곱게 차려입은 마산댁이 돌잔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인 걸 알고 기겁하는 걸 두산이 달래 안으로 모셨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 수일은 연신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내 잔치라서, 손님들 모두 하나같이 축하 인사를 건네고 덕담을 해 주어서 기뻤다. 좋은 말만 들으니 제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좋은 착각이라고, 수일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웃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어린아이 둘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지훈아! 여기, 여기.”

수일이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흰 셔츠에 멜빵 반바지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한 지훈이 어른들 틈에서 수일을 알아보고 의젓하게 걸어왔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비슷하게 차려입은 친구와 함께였다. 두 사람 손에는 조잡하게 포장된 선물이 들려 있었다. 지훈이 말한 해피 선물인가 보았다.

수일은 미소를 띠며 둘을 맞았다.

“햄, 해피는 어디 갔어요?”

“저기 대기실에.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예민해져서 쉬고 있어.”

“그래요? 해피 보고 싶었는데.”

지훈이 서운해했다.

“대기실 가서 보면 되지. 손에 든 건 뭐야?”

“해피 선물이요.”

“옆에는 친구?”

“안녕하십니까. 이지훈 친구 나승환입니다.”

아이는 국어책 읽듯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했다.

“반가워요, 승환 친구.”

수일은 작은 손과 악수를 나눴다. 긴장했는지 아이의 손이 축축했다.

“지훈아, 저기 방 보이지?”

“예.”

“저 안에 해피 있으니까 가서 보구 와.”

“선물 전해 줘도 돼요?”

“그럼. 거기 두산이 형 있어.”

두산의 이름을 꺼내자 지훈이 급 표정을 굳혔다.

“그 행님 무서븐데….”

“뭐가 무서워. 두산이 형이 너 얼마나 귀여워하는데. 해피도 너 보면 무척 반가워할걸?”

수일의 꼬임에 지훈이 금방 넘어갔다.

“알았어요. 함 가 볼게요.”

“그래. 얼른 해피 보구 가서 밥 먹어. LA갈비 진짜로 맛있드라.”

“예!”

갈비 얘기에 지훈의 표정이 환해졌다. 옆에 선 승환의 얼굴에도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둘은 서로를 쿡쿡 치며 종종걸음으로 대기실로 걸어갔다. 잠시 후, 두산이 아이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 직접 테이블로 안내하는지 두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수일이 손님을 맞는 틈에 어느새 곁으로 돌아왔다.

“해피는 어때?”

“영 저기압이길래 복수이 불렀다.”

“잘했어.”

“지훈이랑은 인사 나눴구?”

“복수이가 있어서 그란지 아는 척도 안 하던데?”

“해피도 참, 복순이가 그렇게도 좋을까.”

“좋겠지. 지랑 놀아 줘, 먹을 것도 노나 줘, 지 새끼맨키로 핥아줘. 안 좋으면 이상하지.”

듣고 보니 복순이가 해피에게 하는 짓이 꼭 두산이 수일에게 하는 짓과 똑같았다. 놀아 주고 먹여 주고 핥아 주고. 재워 주고. 그리고. 수일은 망측한 생각에 이르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대기실에 둘만 냅두고 온 거 아니지?”

“원장님 계신다. 순돌이가 겁을 먹어서 내가 들어가 있으라 켔다.”

“잘했어. 우리 해피 엄청 신났겠네.”

“신났다 뿌이가. 아주 난리가 났다.”

이렇게 말하는 두산의 재킷도 난리가 났다.

“넌 안에서 해피랑 뒹굴었니? 옷이 왜 이래. 구겨진 것 좀 봐. 흰옷에 뭐라도 묻었음 어쩔 뻔했어.”

수일은 잔소리하며 두산의 삐뚤어진 나비넥타이를 똑바로 해 주고 구겨진 재킷도 펴 주었다. 여기저기 개털도 묻었지만 흰색이라 눈에 띄지는 않았다. 수일의 손길에 두산이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멀쩡한 수일의 넥타이를 잡아 바로 매 주는 척했다.

“이래 있으이까 꼭 우리 결혼식 같다.”

두산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뭐래.”

하며 수일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턱시도 정장을 갖춰 입고 있으니 그렇기는 했다. 하필 두산이 흰색을 입고, 수일이 검은색을 입은 탓에 컬러로만 보자면 영락없는 신랑 신부였다. 그래서 일부러 흰색을 입겠다고 우긴 걸까. 수일은 괜스레 가슴이 설렜다.

둘은 슬쩍 손가락 장난을 치고 몸을 붙였다 뗐다 하며 손님을 맞았다. 슬슬 두산의 회사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토요일은 2시까지가 근무 시간이었으나 회사 창업주 손자이자 상무인 두산이 여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11시 반까지 단축 근무를 한 모양이었다. 일찍 퇴근해서 그런지 다들 표정이 밝았다. 직원들은 축하 인사와 함께 대전 엑스포 이후 처음이라며 수일을 반가워했다. 그때는 부끄러워 말도 채 걸지 못했던 아이들도 수일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거구의 남자들도 대거 등장했다. 대부분 두산의 손님들이었고 간혹 조모의 손님들도 섞여 있었다.

해피가 사람인 줄 알고 온 손님들은 입구 앞에 떡하니 서 있는 해피 독사진을 보고 황당해했다. 나이가 있는 분들 열에 아홉은 말세다, 했지만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12시 반까지 입구에서 손님을 맞은 수일이 먼저 대기실로 쉬러 갔다. 양 원장 대신 김 영감이 쪼그리고 앉아 강아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르신, 식사는 하셨어요?”

“어. 무따. 니는 아직이제?”

이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는 먼저 먹었어요.”

“그래? 잘했다.”

“복순이는요? 뭐 좀 먹였어요?”

“어. 양 원장이 순돌이하고 진수이 먹을 꺼 챙겨 오면서 복수이꺼도 갖다주따.”

“맛있게 먹던가요?”

“맛있게 먹다 뿌이가. 허덕허덕 하드라.”

“다행이네요. 나중에 복순이 먹일 음식 좀 싸 드릴 테니까 꼭 가져가세요.”

“그라믄 나야 좋지.”

김 영감이 반색했다.

“수일이 니 여 있을 끼가?”

“네. 제가 애들 보고 있을 테니 나가 보세요. 사모님 기다리시겠어요.”

“고맙다. 우리 복수이 좀 잘 봐도.”

“네.”

수일은 소파에 앉아 강아지 네 마리가 노는 걸 지켜보았다. 순돌이는 수일을 경계하며 구석으로 가 앉았고, 진순이는 그런 순돌이를 위해 놀이를 포기하고 곁을 지켰다.

해피는 복순이에게 덤볐다가 목을 물렸다. 아니 물려는 시늉에 깨갱깨갱하며 엄살을 부렸다. 사실 둘은 논다기보다 복순이가 주로 참아 주는 관계였다.

왜 그런지 몰라도 해피는 큰 개들과 놀고 싶어 했는데, 큰 개들은 작은 해피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물릴 뻔한 위기를 여러 번 넘기고도 해피는 계속 큰 개들에게 들이댔다. 그러다 진짜로 물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을 때 복순이가 해피를 구해 주었다. 그러니 반할 만도 했다.

세 살 연상인 복순이는 참을성이 많았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해피와 다치지 않을 정도로 놀아 주었고, 다치지 않을 정도로 물었으며,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핥았다. 사람도 하기 힘든 배려를 했다.

수일은 아직은 큰 개가 무서워서 복순이나 진순이, 순돌이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셋 다 순하다는 것만은 잘 알았다. 크다고 다 사나운 게 아니구나, 그들을 보며 깨달았다.

잠시 후 두산도 대기실로 들어왔다. 오자마자 ‘개판이네’ 하며 소파로 몸을 던지더니 수일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무거워.”

“안 무겁다. 내 피곤하다.”

칭얼대며 수일의 허벅지에 뒤통수를 비볐다. 뼈가 부러질 것 같았지만 피곤하다는 사람을 밀어 낼 수가 없었다.

“근데 현수 씨랑 종국 씨가 안 보이네?”

“쪼매 늦을 끼라 했다.”

“그래? 밥은 먹구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전에 온다.”

수일은 스프레이를 뿌려 뻣뻣한 두산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두산이 그런 수일의 손을 잡아 입 맞췄다.

“은아 누야는 안 오나?”

“누님도 조금 늦으실 거래. 주말이라 가게 빼기가 쉽지 않나 봐. 돌잡이 전엔 무조건 온다 그랬는데, 괜히 무리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올만 한 께나 그리 말했겠지. 그라고 그 정도 편의도 몬 봐주는 사장이면 관두는 기 낫다.”

“너두 참. 말이 쉽지,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행여나 누님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몬 할 말 한 것도 아인데.”

두산이 투덜댔다.

“암튼 하지 마.”

“알았다. 안 하께.”

그러마고 대답한 사람의 입이 한 발이나 나왔다.

수일은 철없는 두산을 내려다보았다. 철이 없어서 그런 건지, 생각을 안 하고 살아서 그런 건지 두산의 눈이 참 맑았다. 부루퉁한 모습이 어째 삐진 해피 표정과 똑같았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와?”

“그냥. 예뻐서.”

“에헤이, 서방님한테 별말을 다 한다. 잘생깄다고나 해 주지.”

두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잘생겼단 말 안 했어?”

수일이 능청스레 물었다.

“어. 한 번도 한 적 읍따.”

“그래? 왜 그랬지?”

“또 바라. 말 돌리는 거. 니 눈에는 내가 그래 못마땅하게 생깄나?”

“누가 못마땅하대?”

“그라믄.”

두산이 벌떡 일어나 앉아 수일을 마주 보았다.

“대답해 바라.”

“뭘?”

“내 우찌 생각하냐꼬?”

“어떻게 생각하긴.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수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턱시도를 입고 있어서 그런가, 사람이 뻔뻔해졌다. 두산의 말문이 막혔다.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가 횡설수설했다.

“아니, 뭐 갑자기 그런 말을… 사람 참… 솔찌키 내가 잘생깄다 소리 마이 듣는데, 니는 그런 말도 안 해 주고… 사랑이야… 하긌지.”

그러다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내도 사랑한다.”

수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쪽, 하고 입맞춤을 했다. 수일은 두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었다. 타다닥, 우다다다, 강아지들이 뛰어다니고 짖는 소리를 배경 삼아 둘만의 짧은 로맨스를 즐겼다.

“뭐 하노? 손님들 기다린다. 나온다.”

조모가 벌컥 대기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마침 떨어져서 손만 잡고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홀로 나갔다. 내내 손님을 받느라 돌상이 차려진 것도 몰랐던 수일은 무대 한가운데 자리 잡은 돌상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돌상은 거창했다. 전통식과 현대식이 고루 섞인 상 위에는 무지개떡과 백설기를 겹겹이 쌓고, 그 곁에 수수팥떡과 인절미, 오색 송편을 예쁜 그릇에 올려 두었다. 국수와 쌀, 대추와 미나리를 비롯해 제철 과일도 그득했다. 하얀 생크림으로 만든 3단짜리 생일 케이크까지, 하나같이 윤기가 흐르는 게 먹기 아까울 정도였다.

수일과 두산은 조모 뒤를 따라 손님들 테이블을 돌며 인사했다. 언제 왔는지 해피 엄마 공주와 형제 프린스도 와 있었다. 공주는 분홍색 리본 핀을 꽂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프린스는 유약한 마마보이답게 엄마 곁에 꼭 붙은 채였다. 두산과 수일이 다가가자 경계하며 짖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진사와 카메라맨이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인사하는 장면을 찍었다. 손님들에게 축하 멘트도 따는 모양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반 시민들이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누가 어떤 멘트를 남기려나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슬쩍슬쩍 돌아보았다.

은아 씨는 언제 오려나. 갑자기 일이 생겨 못 오는 건 아닌가 괜히 걱정되어 목 빠지게 기다렸다.

“수일아! 쫌 늦었제?”

은아 씨가 손을 흔들었다. 예전 오성관에서 일할 때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타났다. 연보라색 투피스에 진주 목걸이까지 하고 있으니 부잣집 사모님이 따로 없었다. 수일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누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오셨어요?”

“오랜만에 뽄 좀 지아 봤다. 개안나?”

“괜찮다뿐이겠어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은아 씨는 수일의 칭찬에 모델 포즈를 취했다.

“참, 여는 내 소중한 장녀 그라고 여는 말썽쟁이 아들 새끼.”

은아 씨 키만큼 자란 중학생 딸과 국민학생 아들이 수일을 향해 꾸벅 절을 했다. 수일을 한 번 본 적 있는 은아 씨 모친은 손을 잡아 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근데 니 턱시도 입으이까 진짜로 인물 사네. 새로 맞찼나?”

“네. 두산이랑 같이 맞췄어요.”

다른 테이블에서 인사하고 있는 두산을 보며 수일이 말했다. 은아 씨가 ‘두사이는 흰색이네?’ 하며 넋 놓고 쳐다보았다. 평소 두산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은아 씨도 이번 의상은 확실히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돌잔치에 턱시도가 쪼매 과하기는 한데, 머 어떻노? 잔친데. 수일이 니한테 억수로 잘 어울린다. 참 보기 좋다.”

은아 씨는 이렇게 말하며 수일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좋은 날 왜 그러세요, 누님.”

“그라이. 이 좋은 날 무슨 청승이고.”

은아 씨는 새끼손가락으로 눈물을 찍고 웃었다.

수일은 직접 은아 씨 가족들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은아 씨네는 현철 부부와 합석했다.

“핸처리 니 오랜만이네. 신수가 훤하다.”

“누님도 보기 좋습니다. 어머이, 일로 앉으이소. 야들아 어서 앉아라.”

사람 좋은 현철과 정애 씨가 은아 씨 가족을 살뜰하게 챙겼다. 여섯이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는 걸 보며 수일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은아 씨를 마지막으로 올 사람이 다 와서 마음이 놓였다. 수일은 서예 학원 동기 어르신들과 컴퓨터 학원 어린이 친구 지훈을 돌아보고 음식은 입에 맞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일일이 챙겼다.

지훈은 수일을 보며 엄지척을 했다.

“햄! 진짜로 맛있어요! 내 여태 묵은 고기 중에 최고다! 승환아 맞제?”

고개를 박고 먹고 있던 작은 승환이가 지훈의 물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지, 엄지.”

엄지도 들어 올렸다. 입가에 갈비 양념이 묻어 엉망진창이었지만 아이들이라 귀엽게만 보였다.

“나중에 좀 싸 줄 테니까 억지로 먹지 말구. 그러다 배탈 나면 큰일 나.”

“내는 배탈 안 나요.”

“그래두. 천천히 먹어. 사이다 같은 것도 가져다 마시구.”

“예. 걱정하지 마세요.”

수일이 자리를 뜰 때까지 승환은 입 안 가득 찬 음식을 씹느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마주 보고 웃고, 저들끼리 엄지를 들어 올리다가 갈비뼈로 장난을 쳤다.

양제일 원장과 두산이 대기실에서 강아지들을 데리고 나오는 게 보였다. 순돌이는 어느 정도 사람에게 적응했는지 아까보다 훨씬 안정돼 보였다. 진순이는 원래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당당하게 홀을 돌아다녔다. 복순이는 해피가 두산에게 안겨 있자 그 주위를 맴돌았다. 어쩜 저렇게 의젓한지, 복순이를 볼 때마다 수일은 감탄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삐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에 이어 덕규가 마이크에 대고 말을 했다. 그 순간, 강아지들이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짖기 시작했다. 특히 크기가 큰 순돌이와 진순이 복순이가 목청껏 짖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귀빈 여러분.”

컹컹컹컹. 월월월월. 왕왕. 앙앙!

“거 더럽게 시끄럽네. 조용히 안 하나?”

“여 봐라. 여 개새끼들 쫌 조용히 시키라.”

“영감님, 개새끼가 뭡니까?”

개도 시끄러워 죽겠는데, 잔치에 모인 사람들마저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쳤다.

간신히 장내를 조용히 시킨 덕규가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을 했다.

“귀빈 여러분, 해피 돌잔치에 귀한 발걸음.”

앙앙앙앙! 아르르르컹! 월월, 월월월월.

수일은 귀를 막았다.

자신의 말소리보다 큰 강아지들의 짖음 탓에 덕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두산에게 마이크를 뺏겼다.

두산은 거침없이 덕규가 할 멘트를 직접 전했다.

“귀빈 여러분, 우리 해피 돌잔치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1시부터 돌잡이가 거행될 예정이오니 뭐 잡는지 꼭 보고 가십시오. 소정의 선물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끝까지 자리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

목청 하나는 참으로 좋았다.

물론 두산이 말하는 동안에도 개들은 끊임없이 짖었다. 마이크 탓에 흥분했던 개들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현수와 종국이 나타난 건 돌잡이 시작 10분 전이었다. 몸에 잘 맞는 백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입은 현수는 검은색 정장 차림인 종국과 무대에서 대기 중이던 수일에게 다가왔다. 현수야 자주 봤지만, 종국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특히 이런 평범한 장소에서 그를 보는 게 신기했다.

“수일이 행님. 축하드립니다.”

현수는 넉살 좋게 인사하며 알은체를 했다. 그 옆에서 종국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와, 개판이네.”

현수가 말 그대로 개판인 홀을 둘러보며 웃었다. 수일은 옅은 한숨을 쉬며 개들을 내려다보았다. 진짜로 개판이었다.

개는 총 여덟 마리였다. 해피와 해피 생모 공주, 공주의 자식이자 해피의 형제인 메리 그리고 프린스, 김 영감네 복순이, 제일 가축 병원 양제일 원장의 진순이와 순돌이, 301호 동장 사모님이 데려온 맥스까지. 크기도 종도 성격도 다들 딴판이었다.

여덟 중 가장 작은 맥스가 성격이 제일 불같았다. 맥스는 사람이고 개고 간에 일단 짖고 보았다. 그러다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면 새침하게 손을 주고 얼굴을 주었다. 두 번째로 성격이 사나운 건 메리였다. 메리는 동생인 해피고 프린스고 간에 근처에 오기만 하면 물 듯이 달려들었다. 물론 가장 사랑하는 둘째 형수가 쓰다듬어 주면 세상 온순할 수가 없었다.

성격이 가장 좋은 건 진순이었고, 가장 소심한 건 여덟 중 가장 사납게 생긴 순돌이였다. 복순이는 용맹하나 사납지는 않았고, 적당한 선에서 작은 개들의 도전을 무시했다.

해피로 말할 것 같으면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였다. 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개가 짖으면 따라 짖다가 혼자 풀어져서 사방을 돌아쳤다. 다른 개가 늑대처럼 울부짖으면 따라 울다가 또 혼자 어리둥절해하며 수일이나 두산을 올려다보았다.

먹는 건 다 좋아했고, 복순이는 그다음으로 좋아했다. 엄마 공주에게 잠깐 흥미를 보였으나 대차게 까인 뒤로 아예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해피가 현수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수일이 깁스를 하는 동안 오후 세 시 경이면 집에 와서 해피를 데리고 근처를 돌아친 덕분이었다. 현수는 두 손으로 해피를 안아 들어 제 얼굴로 가져갔다.

“해피! 잘 있었나?”

“…….”

“삼촌 안 보고 싶었나?”

“아르르르!”

높이 들어 올린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꼬리를 흔들면서도 해피가 으르렁댔다.

“그래. 내도 보고 싶었데이.”

현수가 해피에게 뽀뽀했다. 그러다 대뜸 종국의 얼굴에 해피를 쑥 들이밀었다. 종국이 얼어붙었고 해피도 마찬가지였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해피가 어색한 표정으로 종국을 쳐다보았다. 종국은 해피를 쓰다듬어 주지도 그렇다고 알은체를 하지도 않았다. 해피가 먼저 종국을 향해 ‘앙!’ 하고 짖었다. 종국이 흠칫 놀라는 듯했다.

“니 와 아 인사를 안 받아 주노?”

현수가 놀리듯 말하자, 종국이 낮게 ‘치아라’ 했다. 치우라는데 치우기는커녕 아주 해피를 종국의 볼에 갖다 댔다. 종국이 상체를 뒤로 물리며 두 번째로 ‘안 치우나?’ 하고 낮게 경고했다.

“니 그라는 거 아이다. 우리 해피 서운크로.”

현수는 해피를 품 안에 안고 어린아이한테 하듯 둥가둥가를 해 주었다.

“행님들 왔나?”

해피 입힐 한복을 가지러 갔던 두산이 현수와 종국을 반겼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다며 달려간 조모도 뒤따라 무대로 왔다.

“두산아. 축하한다. 이야, 니 옷 기깔 나게 빼입었네. 하얀색 턱시도 죽인다.”

현수는 이렇게 칭찬하며 수일과 두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래 보이 두 사람 결혼식이라 케도 믿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바람에 수일은 얼굴이 빨개졌고, 두산은 좋다고 광대를 실룩댔다.

“김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오늘 여서 김 사장님이 최고로 미인이십니다.”

현수가 낯간지러운 칭찬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으며 조모를 기쁘게 했다.

“핸수 니 요새 연애하나? 볼 때마다 인물이 좋아지네.”

조모의 칭찬에 현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연애는 무슨.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이상형 함 말해 바라. 내가 참한 처자 있는가 알아보께.”

조모는 현수와 수다를 떨며 자연스레 현수의 손에서 해피를 가져왔다. 현수가 아쉬운 듯 해피를 쓰다듬어 주었다.

“니도 참 별거를 다 한다.”

현수가 두산에게 말했다.

“유행을 선도하는 남자 아이가.”

“뭐, 보기는 좋네.”

현수는 의외로 돌잔치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두산에게 돌잔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무대 근처에 설치된 해피 독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종국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사진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대꾸도 반응도 없는 게 속상하지도 않은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반면 종국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현수가 떠드는 내내 입을 닫고 무표정하게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와 준 게 어딘가. 어쩌면 여기까지 오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수일은 생각했다. 밝은 곳이라 그런지 종국의 얼굴에 난 상처가 더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방문이 고마웠다.

드디어, 1시가 되었다. 서둘러 해피에게 한복을 입혔다. 푸른색 비단 위에 금박이 박힌 전복과 같은 스타일의 복건을 쓴 해피는 옷이 불편한지 내내 벗으려고 안달이었다. 두산이 담요에 싸서 안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모조리 벗어 던졌을 터였다.

행사 진행을 하려고 덕규가 말을 할 때마다 개들은 여전히 짖거나 늑대 울음을 울었다. 덕규는 처음처럼 당황하지 않고 두산이 하던 대로 막무가내로 멘트를 이어 갔다.

“귀빈 여러분, 해피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다 같이 노래를 부릅시다.”

덕규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일 축하 노래 간주가 흘러나왔다. 홀 안의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수일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해피를 안고 있는 두산을 돌아보며 웃었다. 조모도 감동한 표정으로 눈물을 훔쳤다.

“자 그러면 해피 군의 할머님이신 김정숙 여사님의 덕담이 있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덕규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박수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두산도 곁에 서서 휘파람을 불었다.

“아아, 잘 들리십니까? 저는 김정숙이라꼬 합니다. 여 있는 해피 할매 되는 사람입니다. 다들 강새이 돌잔치는 처음이시지예?”

조모의 물음에 ‘예’라는 대답이 터졌다.

“저도 처음입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제가 들어 보이까는 세상 말세다 카고, 돈이 썩어 나는갑다 하데예. 뭐 저라도 똑같은 말을 했을 낍니다. 제 동년배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가 삼시 세끼 먹고 산 지 몇 년 돼도 안 했다 아입니까. 개새끼 줄 밥이 어딨었노? 사람 물 것도 없었는데.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 개 키우면서 밥 굶긴 사람 있습니까? 도저히 사람 물 것도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굶겼겠지만 우리 부모님도 이웃들도 개밥은 그리 잘 챙깄습니다. 왜냐? 식구니까! 짐승이라꼬 생각한 기 아이라, 내 식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겠습니까? 내 말이 맞지요?”

여기저기서 ‘옳소’라는 소리가 들렸다. 공감의 끄덕임을 보여 주었다. 맞다, 맞네. 하며 저마다 조모의 말에 동의했다.

조모가 저렇게 말을 잘했던가. 수일은 감탄하며 그녀의 연설에 귀 기울였다.

“다들 일본이라 카믄 치를 떠실 줄은 압니다만, 선진국이니까 배울 건 또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다. 일본에서는 강새이를 식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자식처럼 키우고, 손주가 없는 사람들은 손주처럼 키우더라꼬예. 우리가 우리 자식들, 손주들한테 아낌없이 퍼 주고 가들한테 쓰는 돈 안 아까워하듯이, 일본에서는 강새이들한테 그랍디다. 그래서 내가 용기를 내서 돌잔치를 해 보자꼬 내 손주 백두사이하고 사랑하는 조카 윤수일이를 설득했습니다. 젊은 아들이라 금방 이해를 해 주고 이 조모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습니다. 이참에 박수 좀 쳐 주이소.”

조모가 손을 뻗어 수일과 두산을 가리켰다. 홀에 가득한 사람들이 크게 박수 치고 환호했다. 수일은 허리 굽혀 인사했고, 두산은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소리쳤다. 두산의 품에 안겨 있던 해피도 얼떨결에 인사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사람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연설이 쪼매 길었습니다. 덕담하러 나왔으니까 덕담하고 물러나겠습니다.”

조모가 해피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해피야, 할매다. 우리 해피 우리한테 와 줘서 정말 정말 고맙데이. 니 덕분에 내가 웃음이 가실 날이 없다. 니만 생각하면 힘들다가도 웃고, 슬프다가도 웃는다. 그라이까 이 할매보다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라. 밥도 잘 묵고 잘 싸고 잘 자고. 잘 놀고. 아프면 아프다고 꼭 말하고. 하기 싫은 일은 절때로 하지 말고. 평생 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멋대로 살아라. 그래 살다가 우리 다음에는 같이 개로 태어나든가 같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시 만나자. 그때도 내는 할매로 태어나서 우리 해피 곁에서 보살펴 줄끄마. 그라이까 아무 걱정 말고 지금 이 생에서 행복하게 살자. 해피야, 생일 진심으로 축하한데이!”

뭉클했다. 연신 미소를 짓고 조금은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조모가 주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울림이 있었다. 수일은 두산의 손을 꼭 쥐었다. 둘은 마주 보았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모가 말한 대로 해피를 키우자고 무언의 다짐을 했다.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크게 환호하는 게 보였다. 은아 씨도, 현철과 정애 씨도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박수를 쳤다. 조모의 손님들이 브라보를 외쳤다. 개들이 짖었고 늑대 울음을 울었다. 해피도 앙앙 하고 짖었다. 조모의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돌잡이가 시작되었다. 해피는 한복이 불편한지 재차 몸을 털고 뒷다리로 긁었다. 그 바람에 복건이 벗겨졌다. 수일이 얼른 복건을 집어다가 다시 씌웠다.

해피는 흰색의 명주실 타래와 만 원권, 야구공, 연필, 청진기를 주의 깊게 살폈다. 코로 킁킁 냄새도 맡으면서 건드려 보았다. 수일은 실패를 잡기를 원했고 조모는 청진기를, 두산은 야구공을 원했다.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해피가 입에 하나를 물었다.

해피는 장수의 상징 명주실을 물고 두산을 쳐다보았다. 같이 놀자고 했다.

“새끼. 여서 내를 배신하나? 니 공놀이 제일 좋아한다 아이가.”

“쯧쯧. 우리 집안은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는갑다. 우째 하나같이 청진기나 연필 잡을 생각을 안 하노.”

배신감과 아쉬움을 토로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수일만 신이 났다.

“지금부터 기념 사진을 찍겠습니다. 먼저 직계 가족부터 나오십시오.”

두열의 가족이 메리를 안고 돌상 앞으로 나왔다.

“잠깐만, 우리 메리하고 해피 독사진부터 찍자.”

둘째 형수의 제안에 사람들이 모두 비켜섰다. 해피와 메리는 피곤한지 둘 다 으르렁대지 않고 남처럼 떨어져 있었다.

“메리야, 엄마 봐야지 옳지! 엄마 여 있다.”

“해피! 쫄지 말고. 가슴 딱 피고!”

불빛이 번쩍대는 통에 해피도 메리도 바짝 얼어붙었다. 덕분에 사진은 무사히 찍었다.

“공주랑 프린스도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해피랑 메리 가족이잖아.”

수일의 제안에 두산이 중년의 여성을 불렀다.

“이모! 공주하고 프린스 쫌 델꼬 온나. 사진 찍게.”

공주만큼이나 우아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개를 양 옆구리에 끼고 가운데 섰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야들 친할매 아이가. 그라이까 내도 같이 찍으께.”

“그라이소.”

세 자녀의 친모인 공주는 자식들이 귀찮은 모양인지 근처에 보이기만 해도 이를 드러냈다. 친할머니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찍기는 했으나, 강아지들은 모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다음 진짜 가족사진을 찍었다. 조모가 가운데 서서 해피를 안았고, 그 오른편에 두산과 수일이, 그녀의 왼편에 두열의 가족이 섰다. 키가 작은 아이들이 조모 앞에 나란히 섰다. 균형이 딱 맞았다.

이후로는 지인과 친구들을 불러 단체 사진을 찍고 마지막으로 강아지들 여덟 마리끼리 모아서 사진을 남겼다. 다들 주인이 앞에 있으니 얌전했다. 주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강아지가 잘 나오길 바라며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애썼다. 비디오가 돌고 플래시가 번쩍거렸다. 고함 소리와 개 짖는 소리, 웃고 떠드는 소리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섞여 들었다. 음식 냄새에서마저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수일은 소동 한가운데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손 닿을 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가슴 벅찼다.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과거가, 늘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럼 외따로 떨어졌던 인생이 주마등과 같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안 피곤하나?”

두산이 물었다. 커다란 손이 수일의 등을 쓸었다.

“응. 하나도 안 피곤해. 좋아.”

수일은 두산을 향해 웃었다. 평생 외로웠노라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응석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내가 제 곁에 서 있었다. 수일도 그런 남자가 되고 싶었다. 두산이 언제든 응석 부릴 수 있는 사람, 늘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 주고 싶었다.

“넌 괜찮아? 회사 일 하랴 돌잔치 준비하랴 정신없었을 텐데.”

“내가 한 일이 있나. 다 조모가 알아서 했는데. 아이고, 우리 조모도 양반은 몬 되겠네.”

잠깐 자리를 비웠던 조모가 두 사람 곁으로 왔다.

“와? 니 내 욕했나?”

“욕은 무신. 조모 고생했다꼬 칭찬하는 중이었는데.”

“니가 그랄 리가 없는데. 수일아, 진짜가?”

조모가 웃음 띤 얼굴로 두산을 흘겨보며 수일에게 물었다.

“네. 진짜예요. 근데 해피 안 무거우세요?”

“4키로뿌이 안 나가는 데 머가 무겁노? 개안타.”

“아인데. 팔이 밑에 있는 거 보이 무거운데.”

“안 무겁다!”

해피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우리 해피는 우찌 이리 순할꼬. 잠도 잘 자고. 수일이 니 닮았는갑다.”

“먼 소리고! 순한 거는 내 닮았거든? 내 어릴 때 울도 안 하고 억수로 순했다꼬 조모가 말했다 아이가.”

“맞다. 니가 순하기는 억수로 순했지. 밥만 주면 울도 안 하고 기저귀에 똥칠갑을 해도 가만있고.”

“에헤이, 잘 나가다가 또.”

다 같이 웃었다. 해피가 잠깐 뒤척였다. 해피가 깰세라 셋은 숨을 죽였다.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눴다. 도란도란, 소곤소곤. 지칠 줄을 몰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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