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81)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수일은 두산과 해피가 운동 나간 사이 일어났다. 평소엔 눈도 뜨지 못할 시간이었지만, 돌잔치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긴장돼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한 다음 식탁에 앉아 할 일 리스트를 만들었다.

어젯밤에 누웠을 때만 해도 엄청 많았던 것 같은데 어째 생각나는 게 별로 없었다. 몇 번 머리를 긁적이다가 ‘은아 누님께 연락하기’ 하나만 겨우 추가했다. 지난주에 초대장을 미리 건네기는 했으나, 잔치 전날 전화 한 통 넣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건 어젯밤 조모가 전화 돌리는 걸 보고 떠오른 생각이었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부산에 있는 직원을 시켜 우편 또는 인편으로 돌잔치 초대장을 보낸 조모는 전화번호가 적힌 오래된 수첩을 꺼내 들고 혹시 모른다며 전화를 돌렸다. 가벼운 안부 인사를 나누고 수다를 떨다가 전화를 끊기 전 내일 있을 돌잔치에 꼭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개 손주가 생깄다 아이가. 개소주 아이고 개 손주. 손주! 개! 강새이 말이다 강새이. 참 별일이제?’

이러면서 까르르 웃었다.

두산이 듣기 싫다고 TV 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조모는 무선 전화기를 든 채 방으로 들어갔다. 조모가 전화를 끊으면 수일도 은아 씨에게 전화를 넣어야지 했는데 2시간 넘게 통화가 계속되는 바람에 너무 늦어져 포기했다.

일찍 일어났더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모처럼 아침을 준비하려고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작은 냄비에 ‘해피북어국’이라고 적힌 메모가 붙여져 있었다. 그 옆에 큰 냄비도 있었는데 열어 보니 사람 먹을 북엇국이었다. 어제 이 여사가 퇴근 전 만들고 간 건가 보았다.

닭백숙에 이어 북엇국이라니, 사람이 먹기에도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서예 학원 어르신들이 봤다면 세상 말세라고 한탄을 했겠지만, 수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신은 굶을지언정 자식들만은 어떻게든 먹이던 부모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해피가 너무 작아서 더 많이 먹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수일은 쌀부터 씻었다. 물 맞추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양푼 냄비에다 혼자 먹을 밥만 해 본 게 다라 세 사람 먹을 물 양이 이게 맞는지, 몇 번이나 물을 넣었다 뺐다 했다. 압력 밥솥에 불을 올리고 베란다 문이며 안방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시켰다. 어제 종일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갤 모양이었다.

베란다로 나가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훤하던 밖은 상당히 어두웠다. 그 어둠을 뚫고 손 닿을 곳에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섬 한가운데 떠 있는 것처럼 사방이 고요하지만, 고개만 돌리면 이웃 아파트가 있었다. 수일처럼 일찍 일어난 이웃들이 켜 둔 불빛이 창문을 통해 흐리게 새 나왔다. 평생 꿈도 꾸지 못할 장소에 자신이 서 있는 게 믿기지 않아서 수일은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렇게 서서 수평선 근처가 붉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압력솥 추가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달려갔다. 냉장고에서 냄비 두 개를 모두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차례로 올리고 약불로 해 두었다. 거실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수일은 일출을 놓칠세라 다시 베란다로 가 섰다. 붉은 해가 조금씩 머리를 들이밀었다. 딱히 뭘 믿는 건 아니었지만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세요.”

수일은 작게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세세하게 덧붙였다.

“우리 해피 말썽 부려도 좋으니까 아프지 말고 무럭무럭 잘 자라게 해 주시구요, 숙모님은 일본하구 부산 오가는 동안 사고 없이 무사히 다닐 수 있게 해 주세요. 우리 두산이는 그냥 착하게만 살게 해 주세요. 애가 워낙 건강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처럼만 건강하고 씩씩하면 돼요. 어… 그리구, 저는 괜찮아요. 저는 지금도 바랄 게 없어요. 여기서 더 바라면 제가 사람이 아니죠.”

지난 추석 때도 같은 걸 빌었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지금도 충분하다가 늘 마지막 기도였다. 지금보다 더 바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그때와 똑같았다. 수일은 이런 소원을 빌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여태 빌었던 소원은 죄다 의식주에 관한 거였다. 오늘은 밥 한 끼 제대로 먹게 해 주세요, 이번 달은 달세라도 벌게 해 주세요, 병원비 낼 돈 없으니까 그만 아팠으면 좋겠어요, 일거리가 떨어지지 않게 도와주세요 등. 먹고 살기 빠듯해서 소원도 늘 이런 식으로 빠듯한 것들이었다. 당장 닥친 것들,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그렇게 살았던 자신이 돈도 끼니도 일자리 걱정도 없이 누군가의 건강을 빌었다. 하루아침에 바뀐 처지가 낯설었다. 그리고 기뻤다.

“꼭두새벽부터 염불 외우나?”

문 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느새 두산이 해피를 안고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뛰다 왔는지 짙은 색 피부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왔어?”

수일은 맞잡았던 두 손을 풀고 돌아보았다. 해피 발이 까맸다.

“더 자지 만다꼬 벌쌔로 일났노?”

“다 잤어.”

두산이 베란다로 와 수일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두산의 옆구리에 일수 가방처럼 껴 있는 해피도 어쩔 수 없이 같은 방향을 향했다. 수일은 다시 수평선 너머 해를 쳐다보았다.

“예쁘지?”

“니가 더 예쁘다.”

두산은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옆얼굴에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두산이 일출 대신 수일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쪽, 기다렸다는 듯 뽀뽀를 해 왔다. 참 다정했다. 수일은 손바닥으로 두산의 양 볼을 감싸 안고 발끝을 들어 올려 입 맞췄다.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가벼운 입맞춤은 키스가 되었다.

낑낑, 해피가 울었다. 딸그락딸그락, 칙칙. 압력솥도 그새를 못 참고 밥이 다 되었다고 요란하게 알렸다.

둘은 입술을 맞댄 채로 웃었다.

“얼른 씻고 와.”

“어. 씻고 와서 내가 아침 차릴 테니까 가만있으라.”

“빨랑 가기나 해.”

수일은 두산을 밀었다. 여전히 두산의 옆구리에 낀 해피가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수일을 쳐다보았지만 외면했다. 저 발로 카펫을 밟고 다니게 둘 수는 없었다.

“가자!”

“앙!”

두산은 반항하는 해피와 함께 욕실로 씩씩하게 걸었다.

압력 밥솥의 김을 빼고 뜸을 들이는 동안 약불에 올려 둔 냄비들도 보글보글 끓었다. 해피가 먹을 북엇국을 먼저 떠 두었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사람 수대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맞췄다. 먼저 씻은 해피가 급박한 발걸음으로 욕실에서 튀어나왔다.

저렇게도 물이 싫을까.

“해피 발 쫌 말리 주라.”

“알았어.”

욕실 문이 닫혔다.

수일은 해피가 몸을 터는 사이 재빨리 다가가 붙잡았다. 발버둥 치는 게 여간 힘이 세지 않았지만 그래 봤자 한 줌이었다. 안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방문부터 닫았다. 해피를 내려 두고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가져왔다. 해피가 나가고 싶어서 방문을 긁었다.

“해피야, 발 말리자. 말리고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달래 봐도 도망가기 바빴다. 어찌나 행동이 잽싼지 수일은 몇 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해피를 붙잡았다. 양발 사이에 해피를 끼고 앉아 뜨겁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발을 말려 주었다. 처음엔 싫다고 몸부림치던 해피도 뜨끈하고 좋은지 슬슬 얌전해졌다.

“우리 해피 착하지.”

수일은 해피 정수리에 뽀뽀해 주며 발이 다 마를 때까지 부지런히 드라이기를 움직였다.

“다 됐다. 가자.”

수일이 방문을 열어 주자마자 해피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아이고, 우리 해피 여 있었네!”

간신히 탈출했건만 강적을 만났다. 어느새 조모에게 붙잡힌 해피를 보며 수일은 웃었다.

“숙모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야. 니도 잘 잤나?”

“네. 참, 두산이가 욕실 쓰고 있으니까 안방 화장실 쓰세요.”

“개안타. 안 급하다.”

조모는 이렇게 말하며 해피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쮸쮸쮸쮸, 내 새끼 잘 잤나? 어이구 이뻐라. 아이구 내 똥깡아지.”

“아르르르.”

“배고파서 화났어요? 퍼뜩 맘마 주께. 수일아, 해피 밥 아직 멀었나?”

“다 됐어요. 좀만 식히면 돼요.”

“들었제? 다 됐단다.”

“아르르르르.”

해피가 아무리 으르렁대도 조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온 두산은 팬티 위에 뭐라도 입으면 덧나는지 또 달랑 팬티 한 장만 걸친 채였다. 수일은 ‘가서 옷이나 입어’ 하며 두산의 등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내 옷 다 입었는데.”

여기서 뭘 더 바라느냐는 눈빛으로 수일을 쳐다보았다.

거시기라도 작으면 모를까 조모 앞에서 민망하지도 않은가 보았다. 수일은 그런 그를 두 팔로 밀었다. 어어, 하며 두산이 밀렸다. 작정하고 버티면 절대 밀리지 않을 두산이었지만 수일의 뜻에 따랐다. 다 수작이 있어서 그랬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수일을 꼭 끌어안고 여기저기 뽀뽀했다. 밀어 내려고 했지만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몸 때문에 손이 미끈거려 두산을 매만지는 꼴이 되었다.

“이 아저씨 와 이라지? 어어. 거는 위험한데. 자꾸 만지면 우짭니까. 큰일 날 사람이네.”

두산이 능글맞은 소리를 하며 미꾸라지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좋다고 웃었다. 수일은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우, 한 대 팰 수도 없구.”

구시렁대며 간신히 두산을 벗어났다.

두산이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느라 분주히 오가는 사이 수일은 아침상을 차렸다.

“에헤이. 내가 한다니까 그새를 몬 참고 상을 차맀나?”

처음 차리는 상인데도 두산이 씩씩댔다.

“뭐 별거라구. 누가 보면 내가 맨날 차리는 줄 알겠네. 얼른 앉아.”

“그래도. 니도 참 말 안 듣는다.”

“누가 할 소리.”

둘이 말다툼을 하는데 조모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해피 밥 아즉 멀었나?

“다 됐어요.”

수일은 해피 밥그릇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제 괜찮으려나?”

“함 보자.”

두산이 수일이 한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넣었다.

“아이다. 쪼매 더 있어야 된다.”

“그래? 다 된 거 같은데.”

“해피 혀 딘다.”

“알았어.”

대답은 이렇게 하고선 10초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또다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에헤이, 멀었다.”

“아니, 다 식은 거 같아서.”

수일은 다시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두산은 북엇국이 충분히 식을 때까지 수일을 감시하고 있다가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에 도달했을 때야 해피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해피! 밥 무라.”

“숙모님, 식사하러 오세요.”

둘이 동시에 말했다.

조모는 그제야 해피를 내려 주고 식탁으로 와 앉았다. 타다닥, 발소리가 급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나 보았다. 수일은 해피가 제 밥상으로 가는 걸 보고는 두산과 나란히 앉았다.

“어이구, 시원하다.”

맞은편에 앉은 조모가 북엇국 국물을 떠먹으며 감탄했다.

“영도댁 음식 솜씨 참 좋다.”

“그렇죠? 간도 슴슴하니 짜지도 않구. 못 만드시는 게 없어요.”

“그라이. 이런 사람이 갈 데가 없어서 몇 달 놀았다는 기 말이 되나?”

두산은 뭐가 불만인지 입을 꾹 다물고 밥을 먹었다.

“숙모님, 혹시 오늘 약속 있으세요?”

“내? 약속이야 늘 있지.”

“그러시구나.”

오전에 조모에게 해피를 맡기고 나가려고 했는데 어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두산이 알아서 말을 했을 텐데 웬일로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수일이 팔꿈치로 툭 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우리 나가야 된다. 그라이까 조모 니가 해피 보고 있으라.”

어찌나 퉁명스러운지 저게 부탁하는 자세인가 싶었다. 절로 한숨이 났다.

“오전에만요. 이 여사님이 볼일이 있어서 점심때나 오신다고 했거든요. 해피 데리고 나가기엔 둘러볼 데도 많구, 해피도 피곤할 것 같구.”

수일이 주저리주저리 덧붙였다.

“걱정도 팔자다. 내가 알아서 델꼬 있으께. 해피하고 내하고 둘만 있는데 약속이 있어도 취소해야지.”

조모가 흔쾌히 허락했다.

두산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프라이팬을 집어 들었다.

“내 계란후라이 묵을 건데 조모도 물래?”

“좋지. 내는 두 장.”

“알았다.”

왜 저리 심각한가 했더니 계란후라이를 생각하고 있었나 보았다.

“나는 하나만.”

수일도 한 장 주문했다. 주문하고 보니 식탁 위 반찬이 풀 천지였다. 그래서 입이 한 발이나 나와 있었나 보았다. 하여간에 애였다.

두산이 잽싸게 계란후라이 여섯 장을 부쳐 주문한 대로 배급했다. 그사이 밥을 다 먹은 해피는 아쉬운 듯 그릇을 핥았다.

“내 새끼 벌쌔로 다 뭇나? 양이 쫌 짝드나?”

조모가 이러면서 수일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충분히 줬어요.”

어째 변명조로 들렸다.

“수일이 하고 두사이 너거들, 의사 말만 듣고 너무 그래 각박하게 굴지 마라. 야가 살면 을매나 산다꼬 그래 먹을 꺼를 아끼쌌노.”

“으차피 우리 나가면 간식이야 밥이야 다 줄 거면서.”

두산이 툴툴댔다. 속마음을 들킨 조모가 ‘아이고 계란 맛 좋네.’ 하며 말을 돌렸다.

상 치우는 건 두산이 했고, 설거지는 이번에도 조모가 하겠다고 나섰다. 극구 만류해도 ‘너희들은 나갈 준비나 하라’라며 등을 떠밀었다.

못 이기는 척 수일은 두산과 함께 나갈 채비를 했다.

“넌 웃도리도 챙겨.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하잖아.”

“잠깐 떡만 돌리고 올 낀데 마이는 무슨.”

“그래두.”

수일은 두산 대신 재킷을 들어 손에 걸쳤다.

“내 차로 갈 거지?”

“그라든가.”

“내가 운전할 거야.”

“알았다.”

수일은 거의 2주 만에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조모! 간식은 주도 되는데 사람 먹는 거는 절때로 주지 마라.”

두산이 단단히 일렀다.

조모의 ‘걱정도 팔자다.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하는 대답이 미덥지 못했다.

두산은 해피 없이 둘만의 데이트가 오랜만이라며 들떴다. 종일 밖으로 나다녀야 하는데 뭐가 좋다고 싱글벙글했다. 사실 수일도 좋기는 했다. 해피를 사랑하지만 수일에겐 두산이 늘 1순위였다. 그런데 해피가 있으면 이상하게 녀석에게 신경이 쓰여 1순위인 두산에게 소홀해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수일은 그게 속상했고, 두산도 아마 속상하지 않을까 했다.

“퍼뜩 해치우고 방 잡으까?”

두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두 참. 숙모님이랑 얼른 교대해 줘야지.”

“이 여사 온다 아이가.”

“오후에 오실 건데 어떻게 그때까지 맡겨 둬. 숙모님 약속 있으시다잖아. 어젯밤에 통화하는 것만 봐도 만날 사람들 천지더라.”

수일의 말에 두산이 부루퉁해졌다.

“이틀이나 몬 했는데.”

“방을 잡아도 오늘은 안 돼. 부정 타.”

수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노?”

두산이 버럭 했다.

“두산아, 너 축구 선수들이 월드컵 나가기 전에 금욕하는 거 들었지?”

“여서 축구 얘기가 와 나오는데?”

“내 말은 중요한 일 있을 때는 하면 안 된다구. 나도 하고 싶지. 하고 싶은데,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월드컵에 나가는 선수도 한 달 넘게 참는데, 평생 한 번 있는 돌잔치 때 못 참아서야 되겠니? 우리가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유지해야 해피가 복을 받아.”

두산을 설득하기 위해 꺼낸 개소리였는데, 말하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정화수를 떠 놓지는 못할망정 섹스라니. 안 될 일이었다.

“와, 진짜 너무하네. 내 벌쌔로 뒷방으로 밀맀나?”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 내가 널 언제 뒷방 늙은이 취급 했다구.”

“방금.”

“아니, 이번은 특수한 경우라니까. 평생 한 번 있는 일이잖아.”

두산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래서 아가 생기면 부부 사이가 멀어지는갑다.”

“누가 그래?”

“다들 그라지.”

“애기 있어도 행복하게 사는 부부들 많아.”

“행복이야 하긋지. 대신 사생활이 없다 아이가. 섹스도 맘대로 몬 하고.”

“다들 해. 그러니까 서너 명씩 낳는 거 아냐.”

단칸방에 살아도 자식은 늘 많았던 이웃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섹스를 했나 싶기는 했다. 상상하자 조금 망측해졌다.

“하기야 하긋지. 근데 키스를 하겠나 애무를 하겠나. 고마 넣고 싸고 끝일 꺼로.”

“너는 말을 해도 꼭.”

수일이 두산을 흘겨보았다.

“내 말 틀맀나?”

“왜 얘기가 자꾸 거기로 새니? 암튼 너 뒷방 아니구, 해피 돌잔치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런 거니까 억지 부리지 좀 마.”

“억지 아인데. 다들 의리로 산다카든데.”

“의리도 애정이 있어야 생기는 거야. 애정 없는 의리는 배신으로 끝나.”

배신이란 말에 갑자기 두산이 흥분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신자는 바로 처단이다. 그기 을매나 나쁘면 사람들이 손가락 발가락을 자르겠노.”

“아이, 배신이 엄청 나쁜 거기는 한데 그렇다구 손가락 발가락 자르는 건 좀….”

어쩌다 보니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운전할 거니까 이제부터 말 시키지 마.”

시동을 켠 지가 언젠데 얘기하느라고 5분 넘게 차 안에 가만 앉아 있었다. 기름값이 얼만데. 사실 얼만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비싸겠지 했다.

“운전 몬하는 사람들이 꼭 그라드라.”

“내가 너보다 운전 더 오래했그등? 부산 도로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여긴 도로가 엉망진창이야. 방심하면 다른 길로 빠지기나 하구.”

수일은 운전이라면 자신 있었다. 하지만 이놈의 도로는 도무지 적응되지를 않았다. 차선을 잘 따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이 없어지질 않나, 분명 직진이었는데 가다 보면 좌회전이나 우회전 표시가 나타났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몇 번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그 좋아하는 음악도 라디오도 듣지 않게 되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겨우 원하는 곳으로 시간 맞춰 갈 수 있었다.

수일은 액셀을 밟아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단지 안에서는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운전했다.

“사람들이 말야, 아파트 안에선 좀 천천히 달렸으면 좋겠어. 내가 해피랑 오다 가다 보니까 다들 운전을 너무 막 해.”

수일이 불만을 토로했다.

“며칠 전에도 네 살 먹은 애가 치였다던데, 그 소리 듣고 얼마나 놀랬게.”

“그래? 내가 우리 아들 풀어서 함 잡으까?”

“아우, 됐어. 그 정도까진 아니고.”

제가 말을 꺼내 놓고 두산이 사고라도 칠까 봐 금세 말을 바꿨다. 두산이 푼다는 애들이 귀여운 애들이 아니라 덩치들이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지 않은가.

단지를 벗어나자마자 수일은 속도를 올렸다.

“자, 까자.”

두산이 새우깡을 뜯어 수일의 입에 넣어 주었다. 해피가 없으니 이런 건 참 좋았다. 과자를 먹으면 해피가 자기도 달라며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을 보고 안 줄 수가 없었다. 주고 나면 탈이라도 날까 봐 매번 조마조마했다. 결국 차 안에서 먹는 간식은 해피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오이나 당근, 계란 아니면 고구마 정도였다. 알배추 잎도 곧잘 먹어서 배춧잎도 가끔 같이 먹었다. 본의 아니게 건강식만 먹게 되는 건 좋았지만, 그래도 과자도 먹고 싶고 호떡도 먹고 싶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다.

“다른 과자는 없어?”

“쌀로별.”

“너두 참, 입맛이 왜 그러니?”

“내 꺼 아인데. 조모 꺼 쌔비 온 기다.”

“역시. 숙모님이 과자 보는 눈이 좋으시네. 쌀로별 우리 쌀로 만든 거 맞지? 하나 줘 봐.”

괜히 조모 험담을 할 뻔했다. 두산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모른 척했다.

“아나. 무라.”

수일은 시선은 여전히 도로를 보면서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짠 걸 먹고 단걸 먹으니 생각보다 조화로웠다. 오물오물 두산이 주는 대로 받아먹다 보니 목이 말랐다.

“마실 것 좀 살까?”

마침 슈퍼가 보였다. 두산도 봤는지 내릴 준비를 했다.

“옆에 바짝 붙이 바라. 내 퍼뜩 사 가꼬 오께.”

수일은 잽싸게 도롯가에 차를 붙였다. 빠아앙, 하고 긴 크락션이 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도 이제 부산 사람 다 되었다고, 속으로 웃었다.

두산이 차에서 내려 슈퍼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군살 없이 매끈한 뒤태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 하여간에 몸 하나는 좋다니까.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으쓱해졌다.

하지만 비상 깜빡이를 켜고 아무리 기다려도 두산이 나오지를 않았다. 또 저기서 수다를 떨고 있나 보았다. 말을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처음 보는 사람과도 10년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잘도 떠들어 댔다. 목은 마르고, 자꾸 크락션은 울리고. 차에서 내려 잡으러 갈까 싶다가도 곧 오겠지 하며 기다렸다.

그렇게 슈퍼에 들어간 지 10분 만에 두산이 나왔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손에 든 봉지도 뭐가 들었는지 두둑했다.

“이야, 슈퍼 아지매 여장부다 여장부. 있다 아이가, 저 집에 아들만 셋이 있는데.”

두산은 자리에 앉자마자 슈퍼 얘기에 열을 올렸다. 수일은 괜히 얄미워서 급출발을 했다. 안전벨트를 안 매고 있던 두산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에헤이, 사람 잡을 일 있나. 천천히 쫌 가라.”

뒤늦게 안전벨트를 매며 두산이 투덜댔다.

“아니, 음료수 사러 간 사람이 10분 넘게 안 나오면 어떡하니? 하여간에 어디 들어가기만 하면 함흥차사야.”

“사람이 정이라는 게 있지 우찌 딱 볼일만 보고 나오노.”

“처음 보는 아주머니하고 정이랄 게 뭐가 있어?”

“다 있지.”

“음료수나 내놔. 목말라.”

“아! 맞다. 내 정신 쫌 봐라.”

두산은 서둘러 봉지를 뒤져 오렌지주스 병을 땄다. 빨대를 꽂아 수일의 입술 가장자리에 가져다주었다. 수일은 빨대를 쪽쪽 빨았다.

“맛있나?”

두산이 옆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주스를 빨던 수일은 더 마시고 싶었지만, 두산을 위해 두어 모금 남겼다.

“너두 마시고 싶으면 마셔.”

그러자 두산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눈치가 없어도 니 정도 없으면 사람이 아인 거 아이가.”

“뭐래. 사람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아이라는 거지.”

“내가?”

“아니, 말이.”

두산은 체념한 듯, 남은 오렌지주스를 빨아 마셨다.

요새 두산은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회사를 다니면서 신문도 읽고 배우는 것도 많아져서 그런 모양이다. 전처럼 아주 무식한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하고 수일은 생각했다.

사진관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부산에서 사진을 제일 잘 찍는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간 곳이었다. 직접 운전한 건 아니지만 한 번 와 봤다고 가는 길이 제법 수월했다. 금요일 오전 도로는 출근하는 차들로 붐볐지만, 두산과 도란도란 얘기도 나눌 수 있어서 교통 체증마저 즐거웠다.

둘만 있으니 꼭 데이트하는 기분이었다. 두산도 그런지 수일에게 치대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어리광도 부렸다. 덩치는 산만 해도 아직 어렸다.

사진관은 주택가에 있어서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었다. 수일은 두산이 알려 준 곳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함께 걸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두산이 자연스레 수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런 날 놀러 가면 딱인데.”

“그르게. 바닷가에서 맥주 한잔하면 좋겠다. 그지?”

“마시면 되지.”

“그르까?”

“어.”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은 없겠지만 말만으로도 좋았다.

사진관 주인 부부가 도로 앞을 쓸고 사진관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두산이 큰 소리로 인사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그리고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시간 딱 맞차 오셨네예.”

사진관 부부가 출입문을 열어 주며 수일과 두산을 안으로 들였다.

“쪼매만 기다리십시오. 청소 다 끝나 갑니다.”

남편 쪽이 이렇게 말하며 도로 밖으로 나가 빗자루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실 것 좀 드릴까예?”

먼저 들어온 안 사장이 물었다.

“개안습니다. 마시고 왔습니다.”

안 사장은 양해를 구하며 커튼이 쳐진 곳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바깥 사장이 청소를 마치고 들어와 조금 전 안 사장이 들어간 커튼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손에 커다란 액자를 들고 나왔다. 그는 여러 번 들락거리며 다양한 크기의 액자를 내려놓았다.

액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해피 독사진 다섯 개와 집 안팎에서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것을 인화한 중간 크기 두 개, 공중 부양을 하며 웃고 있는 큰 사진 하나, 그리고 지난 추석 때 조모와 함께 찍은 제일 큰 가족사진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족사진 크기의 대형 액자 두 개를 내려놓으며 바깥 사장이 말했다.

“워낙 인물이 좋아서 다 잘 나왔습니다.”

사진관에서 따로 찍은 해피 독사진 중 제일 잘 나온 사진이었다. 액자 속 해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은으로 된 목걸이를 하고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곱슬거리는 털에 윤기가 흘러 제법 태가 났다.

“사진 정말 잘 나왔다, 그지?”

“어. 좋네.”

일반적인 사진 사이즈로만 보다가 키워 놓고 보니 새삼 해피가 참 귀엽구나 싶었다.

해피는 새침하고 예쁘게 생긴 누이 메리와 달리 약간 맹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같은 배 속에서 났는데 메리는 귀도 뾰족하고 털도 풍성한 직모인 반면, 해피는 곱슬에다가 귀도 크고 말랑했으며 그것도 반만 서다 말았다. 전체적으로 곱슬이었지만 얼굴 털에는 직모도 섞여 있었다. 5개월쯤 되었을 무렵, 주로 직모로 된 털이 뭉텅이로 빠졌더랬다. 그 모습이 흡사 바람에 날려 반만 남은 민들레꽃 같았다. 어찌나 못생겼던지 지금 떠올려도 심란했다. 그래도 까맣고 커다란 바둑알 같은 눈과 역시나 까맣고 촉촉한 코는 예쁜 제 누이와 꼭 닮았다.

해피는 수일처럼 쌍꺼풀도 있고 속눈썹도 길었다. 그게 참 신기했다. 자신과 하나도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아닌 강아지가 어째 눈이 저를 닮았을까. 맹해 보이는 인상도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면 어째 총명해 보였다. 이건 수일만이 아니었다. 두산도 해피가 이쁜 짓을 할 때면 다 자신을 닮았다고 우겼고 미운 짓을 하면 수일을 닮았다고 흉을 보았다.

강아지가 이럴진대, 진짜 아기였다면 어떤 심정일까. 수일은 자기를 빼닮은 아이를 상상해 보려 했지만, 그림자조차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반면 두산을 닮은 아이는 금세 눈앞에 그려졌다. 두산과 똑같이 생긴 우람한 사내아이가 분홍색 잇몸을 보이며 웃고 있는 모습이 생생했다. 그러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두산이 언젠가 자신의 아이를 원하는 날이 오면 수일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수일은 괜히 액자 위 해피를 쓰다듬었다.

“작은 액자들은 청동이고, 이거는 메탈인데 조명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기 억수로 예쁩니다. 우리 사진관에서 요새 제일 잘나가는 액자 중 하납니다.”

바깥 사장은 크기별로 다르게 준비한 액자의 재질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돌잔치가 열릴 회관의 조명 강도와 색깔에 맞춰 액자를 골랐다고 덧붙였다.

“찬찬히 보시고 결정하십시오. 마음에 안 드시면 사진도 액자도 얼마든지 바꿔 드릴 수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당사자 의견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사장은 액자에 담기지 못한 사진들을 테이블 위에 좌르륵 펼치며 수일과 두산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어떻노? 마음에 드나?”

두산이 수일에게 물었다. 수일은 액자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이대로 하면 될 것 같아.”

“이걸로 하입시다. 내는 우리 행님이 좋다 카면 다 좋습니다.”

두산의 말로 돌잔치에 쓰일 사진과 액자가 모두 결정되었다. 사진관 부부는 두산과 수일을 배웅하며 내일 오전에 회관에다 보기 좋게 설치해 두겠다고 약속했다.

“와? 사진이 별로가?”

주차장으로 걷는 중에 두산이 물었다.

“아니. 너무 좋드라.”

“좋은데 표정이 와 그라노?”

두산이 고개를 숙여 수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산아. 너는 너 닮은 애가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

두산은 고민도 없이 답했다.

“왜?”

“왜긴 왜야. 내는 내 하나만 있으면 된다.”

“농담하지 말구.”

“농담 아인데. 진짠데.”

얼굴에 ‘진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와? 아 갖고 싶나?”

묻는 목소리가 사뭇 날카로웠다. 섹스할 때는 잘도 아기를 만들자는 둥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더니만, 정작 이럴 때는 기분이 상해하는 것이었다. 알다가도 모를 남자였다.

“아니. 해피두 저렇게 예쁜데 너 닮은 애면 얼마나 이쁠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수일의 말에 사납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난 또 머라꼬. 내 닮은 아야 만들면 되지? 방 잡으까?”

“아으, 진짜.”

“와? 만들러 가자메?”

“됐어. 하여간에 생각하는 거라곤.”

수일이 두산을 흘겨보았다.

“니는 제발 생각 쫌 하지 마라. 내하고 약속했다 아이가.”

두산이 수일의 머리를 제 이마로 콩 찧었다. 아팠다.

“어떻게 생각을 안 하니? 사람인데.”

“사람이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 고마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그라믄 속 편하다.”

커다란 손이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살 달래듯 하더니 장난스레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근데 우리 해피 사진 잘 나왔지?”

“어. 내를 닮아서 늠름하드라.”

“뭐래. 나 닮아서 신사답던데.”

“에이, 그거는 아이지.”

둘은 티격태격했다. 덕분에 수일은 마음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도 수일의 근심을 앗아가 주었다. 수일은 자동차 키를 두산에게 넘기고 조수석에 앉았다. 두산이 떡집 방향으로 차를 돌리는 동안 과자 봉지를 뒤졌다. 포테토칩과 양파링, 초코하임, 웨하스 딸기 맛 그리고 수일이 좋아하는 꿀꽈배기가 들어 있었다.

“초콜렛 과자는 왜 샀어?”

“이랄 때 무야지. 집에서는 몬 묵느다 아이가.”

“살 거면 이거 말고 그냥 초콜렛으로 사지, 얘는 부스러기가 많이 떨어지잖아. 해피가 주워 먹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그래.”

“안 흘리고 무면 된다. 내 하나 도.”

두산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수일은 연약한 과자가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과자 봉지를 깠다. 얼마 만에 맛보는 초콜릿인지 몰랐다.

두산에게 하나를 통째로 물려 주고 수일도 봉지를 하나 까서 입에 물었다. 과자는 부드러웠고, 초콜릿은 달았다. 봉지 과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확실히 맛이 있기는 했다.

“아우, 입이 너무 달아.”

과자 한 박스를 순식간에 해치운 수일은 봉지를 뒤져 생수병을 꺼냈다. 한 모금 마시고 빨대를 꽂아 두산에게도 내밀었다. 두산이 고개를 살짝 가져와 쪼옥 소리 내 빨대를 빨았다.

“아….”

이제야 아까 두산이 왜 침을 꼴깍 삼켰나 알 것 같았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대를 빠는 모습이 좀 야했다. 수일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물을 와 주다 마노?”

“다 마신 거 아냐?”

“마시고 있었다 아이가.”

“자. 더 마셔.”

수일은 다시 물병을 갖다 대 주고 고개는 앞을 보았다.

“에헤이, 주디가 여 있는데 와 콧구멍에 쑤시노?”

아닌데, 하며 돌아보니 두산이 몸을 최대한 당겨 쪽하고 뽀뽀했다. 그러곤 돌려 달라는 듯, 입술을 쭈욱 앞으로 뺐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어렸다. 수일은 어이가 없어 웃으며 쪽하고 뽀뽀를 돌려주었다.

라디오에서는 요즘 인기가 한창인 김수희의 <애모>와 김건모의 <첫인상>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수일은 <애모>보다는 <첫인상>이 참 맘에 들었다. 가수 생김새는 영 별로였지만, 목소리가 독특한 데다 가사가 좋았다.

흥얼거리며 <첫인상>을 따라 부르고 있으니 이 가수도 언젠가 모창 가수가 생기려나 하는 싱거운 생각을 했다. 반면 김수희의 <애모>는 듣자마자 은아 씨가 떠올랐다. 은아 씨라면 분명 무대에서 이 노래를 맛깔나게 불렀을 거였다. 나이트에서의 일이 그리운 건 아닌데, 사람들이 직접 부르던 노랫소리가 불쑥 그리워졌다. 요샌 노래 연습장이다 뭐다 해서 밤무대 가수들의 설 곳이 줄어드는 듯했다.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그러다 노래 같지도 않은 서태후 어쩌고 하는 남자애들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수일은 황급히 라디오 채널을 바꾸려고 했으나 늦었다. 두산이 간주부터 아주 큰 소리로 따라 불렀기 때문이었다. 어깨가 들썩이도록 몸을 움직이며 따라 부르는 통에 차체가 흔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거 듣자.”

“너를 볼 때마다 내겐 가슴이 떨리는 그 느낌이 있었지. 난 그냥 네게 나를 던진 거야 예이예이예이예이예.”

두산은 싫다는 말을 대신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사실 노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음치인 두산이 따라 불러도 음치로 들리지 않는 게 어찌 노래란 말인가.

“하여간에 요새 애들은 왜 이런 걸 좋아하나 몰라.”

가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음률에 맞춰 속사포처럼 말만 쏟아 내는 게, 꼭 장터에서 물건 파는 상인들이나 할 법한 노래였다.

작년부터 이 그룹에 빠진 두산은 앨범과 잡지란 잡지는 모조리 사 모았다. 더해, 듀엣인가 하는 2인조 댄스 그룹도 좋아해서 춤까지 따라 추고 난리 부르스였다. 보아하니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굉장한 인기몰이 중인 것 같았고, 나이트크럽에서도 여간 인기가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럴 때 세대 차이가 느껴졌다.

수일은 정신없는 노래가 얼른 끝나길 기다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니 차에도 야들 테이프 한 개 사서 둬야겠다.”

“됐어. 나는 그 서태훈가 하는 애들 안 좋아해.”

“서태후가 아이고 스태지와 아이들.”

“스테이지?”

“아니. 스태지!”

“암튼 사지 마. 난 관심 없으니까.”

수일은 딱 잘라 거절했다.

“참, 안 넘어오네. 청춘들의 쏘울이 안 느껴지나?”

“쏘울은 흑인들이 부르던 블루스에서나 느끼는 거구. 이건 노래도 아냐.”

수일은 두산의 말에 또박또박 따지고 들었다.

“스태지 때문에 레코드 가게 매출도 억수로 늘었는데.”

“그래?”

매출 얘기에 귀가 쫑긋했다.

“어. 열 배는 늘었을 거로. 테이프야 씨디야, 없어서 몬 판다 아이가. 잡지도 사 놓는 족족 다 나가 삐고. 얼마 전에는 핸수 행님이 서울까지 가서 공수해 왔다 카든데.”

“그 정도야?”

“어. 장난 아이다.”

“그래?”

바지 사장이긴 해도 자기 이름으로 하는 레코드 가게의 매출이 는다는데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 기울여 음악을 듣고 보니 아주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하나 사다 놔 봐. 좋은 노래 있나 함 들어 보게.”

“오케이!”

수일의 허락이 무슨 대단한 수확인 양 두산이 좋아 죽었다. 콘서트도 같이 가자길래 말을 돌릴 겸, 현수도 내일 돌잔치에 참석하려나 궁금해서 물었다.

“현수 씨도 내일 와?”

“당연하지. 참, 종국이 행님도 같이 온다.”

“종국 씨두?”

의외였다.

“어. 그 행님이 안 올라 카는 거를 내하고 핸수 행님이 억수로 쫄랐다 아이가. 평생 한 번 있는 아 돌잔치에 빠지면 되나, 그랬드만은 온다 카데.”

“종국 씨는 해피가 강아진 건 알아?”

“모를 꺼로.”

두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설마. 이름만 들어도 사람 아닌데.”

“그 머꼬. 배 속에 있을 때 부르는 거.”

“태명?”

“그래, 그거. 아마 그걸로 알 끼다. 협력 업체 사람들도 태명인 줄 아는 사람 많다.”

“아이, 그러면 니가 제대로 말을 해 줘야지.”

“뭐, 어떻노. 오는 데 의의가 있지.”

“그건 그렇긴 한데.”

두산의 말대로 착각을 했든 제대로 알고 왔든 간에 축하해 주는 사람이야 많으면 좋았다. 하지만 모르고 왔다가 서예 학원 영감님들처럼 ‘세상이 말세다’ 한탄하면 어쩌나. 그 생각을 하니 간이 콩알만 해졌다.

“설마 사람들이 신문사나 방송국에 제보하고 그러지는 않겠지?”

수일이 걱정스레 물었다.

“뭐를?”

“해피 돌잔치 말야.”

“어! 그 생각을 몬 했네!”

두산의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지금이라도 제보하까? 신문에도 나고 방송도 타면 좋다 아이가! 해피 돌잔치가 전국에 생중계된다꼬 생각해 바라. 억수로 믓찌네!”

아닌데, 저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수일은 두산이 진짜로 제보할까 봐 아찔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와? 내는 억수로 좋은 아이디어라꼬 생각한다. 내 아는 신문 기자들 있그등. 방송국은 할배나 두열이 행님한테 말하면 연결해 줄 끼고.”

“아냐. 그냥 가족끼리 오붓하게 해.”

초대장 500장을 돌렸으니 오붓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신문과 방송은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수일은 두산을 말리느라 식은땀이 다 흘렀다.

아파트 단지 근처 ‘남천 방앗간’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원래는 사진관에 들렀다가 답례품 가게도 경유해서 올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점심시간 전에 회사 사람들에게 떡을 돌릴 생각에 답례품점은 건너뛰고 바로 떡집으로 내뛰었다.

조바심이 난 수일과 달리 두산은 느긋하게 떡을 받고 맛을 보면서 방앗간 사장님과 수다를 떨었다. 30년째 홀로 방앗간을 운영하는 사장님은 두산만큼이나 말이 많았다. 오고 가며 자주 얼굴을 봤던지라 차마 얼른 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어머이, 이거는 백설기가 아이라 천설기네. 억수로 맛있다.”

두산이 오버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수일에게도 한 덩이를 떼서 주었다. 맛있기는 했다. 이제 막 나왔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천설기? 하이고 마, 그 말 참 듣기 좋다. 니는 어데서 그런 기발한 말을 생각해 내노?”

방앗간집 사장이 소리 내 웃었다.

“내 자랑은 아인데, 말 잘한다는 소리 마이 듣습니다.”

“츤재다, 츤재야.”

이러면서 방앗간집 사장은 수일의 반응을 기대하며 쳐다보았다.

“정말 맛있네요.”

수일은 이렇게만 답하고 두산의 팔을 툭툭 쳤다.

눈치 없는 건지 아니면 없으려고 작정한 건지, 두산은 거기서도 한참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내일 시간 잘 맞차서 갖다주이소. 어머이만 믿습니다.”

“오야. 걱정하지 마라. 내 최고로 맛있게 해서 갖다주끄마. 드가라.”

친모자 사이라도 되는 양 둘은 애틋하게 헤어졌다. 서비스로 시루떡과 인절미를 받아 나왔다.

“늦었어.”

“안 늦었다.”

“늦었대두?”

“안 늦었다. 11시 전에만 갖다주면 된다.”

“우유 찾구 봉지에 일일이 넣으면 11시가 뭐야. 12시도 빠듯하겠다.”

“충분하다.”

두산은 혼자 여유가 넘쳤다. 안달해 봐야 수일만 손해였다.

“저 집 행님이 고시 준비하다가 살짝 맛이 갔다 아이가.”

우유 보급소로 차를 몰고 가면서 두산이 말했다. 시루떡을 먹던 수일은 손가락에 묻은 고물을 쪽쪽 빨다가 심각해졌다.

“그래? 안됐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면 사람이 미칠까. 아들이 미쳤으면 어머니 마음도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닐 텐데, 늘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는 방앗간집 사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고마 포기하면 편할 낀데 그 행님 지금도 고시 책 끼고 산다 카드라.”

“어쩜 그래. 나 같으면 책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을 텐데. 약은 먹는대니?”

“묵다 안 묵다 할 꺼로. 뭐, 니도 잘 알겠지만 미친 사람은 지가 미친 줄 모른다 아이가.”

이러면서 은근슬쩍 수일을 쳐다보았다.

수일이 입술을 실룩댔다. 작년에 잠깐 정신이 혼미했기로, 그걸 진짜로 미친 사람과 비교하다니 괜히 꽁했다. 그렇다고 반박하기에는 한 짓이 많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우유 보급소에 가자마자 수일은 딸기우유 하나를 받아 마셨다. 두산은 초코우유를 마시면서 앉은 자리에서 얻어 온 떡을 펼쳤다. 보급소 사장님이 가세했다. 이건 뭐 가는 곳마다 친구를 만들 기세였다. 수일은 두산을 재촉하는 걸 그만두고 떡이나 먹고 우유나 마셨다.

“내가 도아주께. 이리도.”

뜻밖의 아군을 얻었다.

손이 빠른 우유 보급소 사장이 까만 봉지에 우유를 담아 건네면, 두산과 수일이 그 안에 백설기를 넣었다. 손발이 척척 맞는 게, 공장이 따로 없었다. 200여 개 남짓한 봉지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완성되었다.

두산네 회사 직원 수는 서른여섯이었지만, 같은 건물에 상주하고 있는 하청 업체들에도 돌릴 예정이라 수량을 넉넉하게 준비했다.

보급소 사장이 카트까지 빌려준 덕분에 수월하게 봉지를 싣고 회사로 갈 수 있었다. 두산이 박스들을 척척 카트에 올려 엘리베이터 앞에 옮기는 걸 수일이 지켜보았다.

“같이 드가자.”

“너 혼자 갔다 와.”

“같이 가서 인사하자. 우리 직원들은 엑스포 때 다 봤다 아이가.”

“내일 볼 텐데 뭐.”

“같이 가자.”

“이럴 시간 없어. 얼른 갔다 와.”

수일은 두산에게 재킷을 입혀 주며 등을 떠밀었다.

두산을 올려 보내고 점심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과자야 떡을 계속 집어 먹었더니 속이 니글거렸다. 얼큰한 것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이 좋은 셔츠에 빨간 국물이 튀는 건 원하지 않았다. 하얀 국물이 뭐가 있더라.

콩나물해장국이 딱인데, 무슨 일인지 두산은 잘만 먹던 콩나물해장국을 먹지 않았다. 두산에게 이유를 물어봐도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자기와 떨어져 있던 사이 먹고 크게 체했나 보다 하고 유추할 뿐이었다.

남은 건 미역국이나 돼지국밥 정도였다. 돼지국밥이라면 수일도 이제 제법 먹을 줄 알았다. 수일은 두산처럼 깍두기 국물을 부어 먹거나 다대기를 넣는 대신 맑은국에 새우젓으로 간하는 걸 좋아했다. 빨간 국물이 눈에 아른거렸지만 이번엔 돼지국밥 먹어야지, 했다.

해피랑 조모는 잘 있으려나. 근처에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동전 몇 개를 챙겨 들고 차에서 내릴까 말까 고민했다. 둘이 산책을 나갔을 수도 있고, 피곤해서 자고 있을 수도 있었다. 괜히 자는 사람 깨우는 걸까 봐 그만두었다.

떡만 돌리는 게 아니라 인사도 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터였다. 말하기 좋아하는 두산이라면 온종일 걸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라디오라도 듣고 있으면 덜 심심하겠지만, 기름이 아까워서 시동을 켜지 않았다.

수일은 혼자서 <첫인상>을 흥얼거렸다. 요즘은 이런 경쾌한 곡들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가수 윤수일의 노래도 슬프기보다 즐거운 곡들이 많았다. 특히 80년대 곡들이 그랬다.

“오! 아름다워. 오 그대가 아름다워. 아름다워. 그대 모습이 아름다워.”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튕겼다. 열어 둔 차창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노래 몇 곡을 부르고도 한참 뒤에 두산이 나왔다.

수일이 조수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두산도 손을 흔들며 입었던 재킷을 벗었다.

“밥 무까?”

“응. 국물 있는 거 먹자.”

“그래.”

수일은 두산의 손에서 재킷을 받아 개서 무릎에 올렸다.

“어디로 모실까요?”

두산이 존댓말을 하며 공손하게 물었다. 수일은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을 웃었다.

“돼지국밥 먹을까?”

“예.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두산은 메뉴를 말하면 척척 맛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배만 채우면 그만인 수일에 비해, 미각이 제법 예리한 편이었다. 어딜 가서 무얼 먹든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접대를 많이 한 것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역시 부족함 없이 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은 붐볐다. 그래도 금방 자리가 났다. 군것질한 탓에 밥은 반도 채 먹지 못했지만 국물은 모조리 비웠다. 두산은 수일이 남긴 밥을 가져다가 먹었다. 깍두기를 부어 빨개진 국밥을 먹는데도 어디 하나 튀는 곳 없이 정말 깔끔하게 먹었다. 꼭 묘기를 보는 것 같았다. 수일은 뭐가 묻었는지도 모르면서 틈틈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두산을 훔쳐보았다.

정오가 되자 기온이 가파르게 올랐다. 습도 하나 없이 건조하고 맑은 공기가 상쾌했다. 초여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좀 걸을까?”

수일의 제안에 두산은 ‘그래’ 했다.

해운대가 지척에 있었으므로 두산은 차를 바로 그리로 몰았다.

모래 위를 걷다 보니 절로 해피 생각이 났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해피는 발자국이 모래에 찍히지 않았더랬다. 가벼워서였다. 셋이 같이 걸어도 해피만 발자국이 남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8개월 때부터는 몸무게가 부쩍 늘어 작은 발자국이 찍혔다. 젖은 모래를 걸으면 그 흔적이 더 선명하게 보여서 일부러 바다 가까이로 걸었다.

“해피도 같이 오면 좋았을걸.”

“내 생각이나 해라.”

두산이 퉁명스레 말했다.

“니 생각이야 맨날 하지. 지금도 하는걸?”

수일은 툭툭, 두산의 팔을 쳤다. 부루퉁한 얼굴에 금세 미소가 걸렸다. 두산이 수일의 팔짱을 꼈다. 커다란 몸을 수그리며 수일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무거워.”

수일이 두산을 밀어 내며 웃었다.

“날씨 참 좋다. 그지?”

“어. 좋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모래 위를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점심을 먹고 나온 직장인들은 손에 음료수를 들고 수다를 떨었고, 엄마와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은 힘차게 뛰어놀았다. 그들 속에 수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서 걷고 있었다. 팔짱을 낀 두산의 든든한 팔뚝과 뜨거운 체온을 느끼면서, 행복해했다.

자신도 전생에 좋은 일을 좀 한 모양이었다. 아주 조금이라, 남들보다 늦게 복을 받았나 보았다. 수일은 감격에 겨워 푸른 바다를 돌아보고 드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산아.”

“어?”

“우리 서울 가면 한강에서 자전거 타자.”

“그래.”

“가서 배도 타자. 유람선.”

“어. 타자.”

“유람선에서 밥도 먹을 수 있대.”

“그라믄 밥도 먹어야지.”

두산은 수일이 하자면 뭐든 좋다고 했다.

해피 수술 때문에 가는 건데 철없이 한강 유람선이 타고 싶어 저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설령 이번에는 유람선을 타지 못해도 말을 꺼내 본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기약 없는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 공수표를 날린 것이 아니라, 정말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수일을 기쁘게 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건 천지 차이였다. 늘 포기하고 살았던 수일에겐 그 차이가 주는 마음의 무게가 남달랐다.

두산의 삐삐가 연달아 울렸다. 허리춤에 끼워 둔 삐삐를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이젠 저 모습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수일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 삐삐 쫌 확인하고 오께.”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래. 얼른 다녀와.”

수일은 성큼성큼 백사장을 가로질러 올라가는 두산을 지켜보았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두코로 모래 장난을 치다 그만 구두 안에 모래가 들어갔다. 모래를 털기 위해 모래밭을 가로질러 계단으로 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았다.

구두를 벗어 모래를 털고 양말에 묻은 것도 털었다. 두산이 간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생각보다 금방 두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지 화나 보였다. 무표정해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그가 수일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수일은 손을 들어 두산을 불렀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에도 두산은 금세 수일을 찾아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내 잠깐 어데 들렀다 와야 된다. 집까지 델따주께.”

“뭐 하러. 택시 타고 가면 돼.”

“그래도 되겠나?”

두산이 이렇게 묻는 경우 바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럼. 얼른 가 봐.”

“답례품은 내 갔다 오면 같이 가서 확인하자.”

“내가 보고 와도 돼. 어차피 물건 개수랑 상태만 확인하면 되는 거잖아.”

수일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실제로 별거 아니기도 했다.

“혼자 가도 개안켔나?”

“너두 참. 그런 것쯤은 나도 해.”

수일이 삐진 척을 했다. 두산이 웃었다.

“알았다. 볼일 보고 바로 집에 드가고.”

“알았어.”

“난중에 보자.”

“응.”

두산이 택시를 잡아 수일을 태웠다. 씨익 웃으며 손바닥에 입맞춤을 실어 보냈다. 수일도 똑같이 해 주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수일은 고개를 돌려 두산을 바라보았다. 그가 점점 작아지다가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수일은 한숨을 쉬었다. 두산이 회사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어딜 갈 때면 매번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가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아닌 걸 아는데도 그랬다. 아무리 부자 할아버지를 두었어도 전에 하던 일이 참 험했다. 혹여 그때 두산에게 당한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상념이 가슴 한곳에 똬리를 틀고 이럴 때마다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 번 건달은 영원한 건달, 나이트 다닐 때 직원들끼리 자조적으로 말하고는 했었다. 건달 자리에는 삐끼, 딴따라, 사기꾼, 기둥서방, 창녀 등 여러 단어가 교대로 사용되었다. 그땐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현철은 정애 씨와 만나 새 삶을 살고 있었고, 막내 영수도 나이트를 관두고 기술을 배우러 구미로 갔다고 했다. 은아 씨도 자의는 아니었지만 자갈치 시장과 식당에서 평범한 일을 하고 있었다. 적은 숫자지만 그래도 방향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산도 엄연히 해운업체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수일은 나쁜 생각을 떨쳐 내려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홀로 답례품 가게로 갔다.

답례품은 수건이었다. 흰색의 강아지 자수와 함께 ‘祝 해피 첫돌, 1993년 10월 9일.’이라고 새겨진 하늘색과 연분홍색 수건 두 장이 노란색 선물 상자에 담겨 있었다. 수건은 비싼 돈을 준 만큼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선명하게 찍힌 글자와 달리 강아지 자수가 조금 엉성하긴 했지만 그래도 개처럼은 보였다.

수건은 넉넉하게 700박스를 준비했다. 하나씩만 집어 가라고 해도 꼭 2개씩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라 남아돌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수일은 답례품점 사장이 챙겨 주는 수건 열 박스를 미리 챙겨서 다시 택시에 올랐다. 수건 상자 하나를 열어 계속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런 좋은 수건에 ‘축 윤수일 회갑’이라는 글자가 새겨지는 것도 보게 될까. 그땐 수건 말고 다른 걸 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유 없는 불안을 떨쳐 냈다.

***

집에서 호출이 왔다. 발신인은 셋째 백두성이었다. 두산은 기분이 팍 상했다. 8282까지 써 가며 삐삐를 날린 걸 보면 급한 일인 거 같은데, 솔직히 급하거나 말거나였다. 무시하려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셋째는 무시당하면 집요하게 귀찮게 구는 새끼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공중전화 부스로 가 음성을 확인했다. 뭐 할 얘기가 많다고 음성을 세 개나 넣었나 했더니만, 이 새끼가 호출 하나당 한 단어씩 말하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 진짜.”

두산은 이를 갈았다.

용건은 간단했다. ‘당장, 집에, 온나.’였다. 집이라면 할배 집을 말했다. 출소한 뒤로 원래 살던 곳으로 갈 줄 알았던 두성은 할배 집에 머물면서 놀고 있었다. 할배가 두성을 시켜 호출했을 리는 없으니, 그 새끼가 집에서 뒹굴뒹굴하다 두산을 불러낸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장례식 이후 친정으로 가 있다가 설 쇠고부터 장남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를 닮은 유일한 아들이기도 했고, 네 형제 중에서 제일 마음이 약한 놈이기도 해서 제 마누라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이후 할배는 마산댁과 두성과 함께 살았다. 조모를 불러들여 함께 살 만도 한데,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독한 양반이었다.

수일은 예의 그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추었다. 뭐가 저리도 불안할까. ‘집’이나 ‘셋째 행님’이라는 말 한마디면 안심할 남자였지만, 불안해하는 모습이 꼴려서 두산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산은 수일의 차를 몰고 오랜만에 본가로 향했다. 차 안은 오전에 산 과자와 받아 온 떡을 제외하면 참으로 깨끗했다. 잘 몰고 나가지도 않으면서 매일 청소를 하는 모양인지 먼지 한 톨 없었다. 혼자서 차 안을 쓸고 닦을 수일을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광녀이.”

두산은 피식 웃었다.

라디오를 켜자 마침 듀스의 <나를 돌아봐>가 나왔다. 두산은 빠른 비트에 맞춰 핸들을 쳤다. 입으로는 간주부터 소리 내 따라 불렀다. 나이트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싶었다. 돌잔치 끝나면 클럽에서 몸 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가자면 수일은 보나 마나 싫다고 하겠지만 두산이 우기면 못 이기는 척 은근슬쩍 따라 나올 것이다. 참 쉬운 남잔데, 정작 쉬워야 할 때는 쉽지 않은 남자였다.

수일과의 생활은 환상 그 자체였다. 부산에 데려왔을 때부터 비실거렸고 영양실조에다가 다리까지 쓰지 못해서 두산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 여사가 삼시 세끼를 챙겨 줬지만 나머지는 온전히 두산의 몫이었다. 입히고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마른 몸에 나날이 살이 붙는 걸 제 피부로, 손으로 입으로 혀로 직접 맛보고 느낄 수 있었다.

첫 3개월은 정신이 자주 오락가락했다. 어느 날은 멀쩡하다가도 어느 날은 자신이 어딨는지 잘 몰랐다. 독한 약에 취해 악몽을 자주 꿨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좋을 리 없었을 수일은 늘 사과만 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두산은 그런 수일을 안아 다독이고, 수일에게 앞으로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몇 번이고 해 주었다. 그렇게 재우고 나면 수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비가 오면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지금이야 밖에라도 나가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일은 방 안에 꼭꼭 숨어 날이 개기만을 기다렸다. 어제도 집에 올 시간이 다 됐는데 오지 않아서 혹시 정신이 나갔나 싶어 마중을 나갔다. 다행히 멀쩡해 보였지만 눈빛과 표정이 영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일의 가방 안에 컴퓨터 학원 광고지가 그득했다. 도대체 이걸 왜 가져온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궁금해하지 않았다. 수일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였다. 그 결과가 설령 도둑질이라도 두산은 개의치 않았다. 수일이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다고 수일이 전과 다름없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있었다. 두산이 제일 아쉬워하는 것이기도 했다. 눈물. 항상 눈물이 고여 있던 수일은, 툭하면 울던 수일은 이제 우는 대신 웃었다. 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울리려고 하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두산은 그러지 않았다. 수일의 눈물을 앗아 간 사람이 자기 가족이었으니까 그대로 두었다. 수일이 편하다면 그걸로 족했다.

수일 덕분에 두산은 느슨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악몽을 꾸는 수일을 보며, 눈물이 사라진 수일과 살면서 복수를 꿈꿨다.

두산은 회사 일을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하긴 했으나 전념하지는 않았다. 할배가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될 경우, 할배가 키운 이사들의 전방위 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할배의 또 다른 자아였다. 평소엔 서로를 견제하느라 바쁘다가도 두산이 나타나면 똘똘 뭉치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었다. 언제든 등을 찌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할배의 주선 아래 재계 인사들과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검경의 웃대가리를 만나는 것과는 별도로 두산은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려고 애썼다. 그러기 위해서 신생 업체나 다름없는 백영 해운을 떠맡았다. 할배의 인맥이 거의 닿지 않는 영역이었다. 두산은 조선 항만의 실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서슴없이 뇌물을 주었고, 접대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쪽에서 잔뼈가 굵은 조직의 규모가 얼마인지, 어느 조직이 실세인지 파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다음 한 일은 할배 소유의 유흥업소의 규모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매일 매일 현금 다발을 갖다 바치는 돈줄이건만 할배는 업소를 등한시했다. 그쪽 일은 이사들에게 맡겨 두고 자신은 고상한 일만 하고 싶어 했다. 이를테면 정치와 사업이 그것이었다. 이사들이야 그런 할배에게 ‘걱정하지 마시라.’라며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척 생색을 냈지만,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두산은 발이 넓은 현수를 이용했다. 오랫동안 여러 업장을 돌아 가며 관리를 도맡아 했던 현수는 누구보다 이쪽에 빠삭했다. 사업 현황을 꿰뚫어 보는 눈도 좋았다. 현수는 이사들의 담당 업장을 분류하고 각 업장에서 하룻밤에 벌어들이는 현금을 파악했다. 그들이 경찰과 검찰에게 바치는 상납금의 규모와 그 인물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훑었다.

현수가 알아낸 인물들의 뒷조사를 하고 도청하며 약점을 잡아내는 건 종국의 몫이었다. 두 사람은 한 조를 이뤄 지금까지도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뒤에서 애쓰는 동안 두산은 전면에 나서서 이사들을 만나고 다녔다. 대놓고 사업에 관해 물었다. 당연히 그들의 반응이 좋을 리 없었다.

두산이 자신의 힘만으로 세력을 넓히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어려울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할배가 그물망처럼 쳐 놓은 인맥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이사들의 눈과 귀과 되어 주는 꼬리들도 많았다. 섣불리 나섰다가 손발이 묶일 수도 있었다. 셋째처럼 말이다.

그래서 조모를 불렀다. 조모는 숨은 세력가였다. 할배는 조모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무사히 물장사를 하는 게 다 자신의 비호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했다. 실상은 할배와 엮이기 전부터 조모는 자신만의 든든한 우군을 두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에 밝은 장사꾼이었고, 오랫동안 쌓아 온 인맥들이 있었다. 자신만의 거래처가 존재했다. 거래처가 있다는 건 그 거래를 안전하게 만들어 주는 조직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하지 않은 딸에게 그걸 물려주었다. 원체 성격도 좋고 화끈한 조모는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았다. 무시당할 만하면 보란 듯이 쳐 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할배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모의 업장이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했겠지만, 일단 여자가 하는 일이라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을 양아치 정도로 낮잡아 보았다. 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모시는 보스의 첩이자 물장사하는 나이 든 여자 정도로 조모를 평가했다. 일본에서 그녀가 얼마나 많은 업장을 보유하고 있는지, 그 세력이 얼마만큼 큰지 전혀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조모를 따라, 자주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틈에 끼었던 두산은 조모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조모가 그걸 자랑하지 않았기에 두산도 가만 입 다물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수일을 잃었던 두산은, 할배에게 속았던 두산은 가만 앉아 콩고물이나 얻어먹을 시기를 지났다. 할배를 이용해 인맥을 만들고 세력을 넓히겠다는 허황된 생각도 접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할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급하게 발버둥 치지도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했다.

두산은 조모를 불러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조모는 조금 놀란 듯했으나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자기가 죽으면 그 많은 업장을 누구에게 물려줘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고 했다. 기꺼이 두산을 위해 자신의 인맥을, 아는 사람 모두를 연결해 주었다.

만남은 대놓고 이루어졌다. 조심하면 오히려 이사들의 의심을 샀기에, 일부러 할배의 업소로 불러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여자들을 붙여 주었다. 잠깐 경계하던 이사들은 두산이 조모 치마폭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 발광한다고 생각했다.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그들을 안심시킨 다음,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을 추렸다. 이번엔 황 씨가 은밀하게 나섰다. 추가적인 만남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할배를 칠 만큼 세력을 키우기 전까지는 꼬리를 잡히면 안 되었다. 두산은 자주 일본으로 건너갔다.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가끔 조모를 대동했고, 가끔은 혼자 만났다.

일은 순조로웠고, 두산은 점점 애송이 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외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만남이 생겼다. 조모도 몰랐으면 하는 만남이었다. 그러기 위해 두산은 아예 부산으로 조모를 불러들였다. 수일의 핑계를 대며 조모에게 수일을 부탁했다. 조모는 두산의 부탁에 감동했다. 두 달 넘게 가게 일을 남에게 맡겨 두고 오로지 수일의 회복에 힘썼다. 내 아들, 조모는 수일을 그렇게 불렀다.

차라리 간병인을 붙일 걸, 뒤늦게 후회했다. 조모가 온 뒤로 수일의 병세는 급격히 좋아졌다. 비가 올 때마다 악몽을 꾸고, 자주 감기에 걸리고, 출근하는 두산에게 빨리 오라고 애원하던 수일은 온데간데없었다. 깁스를 푼 뒤에도 늘어난 인대가 잘 낫지 않아 고생하던 수일은 어느새 재활 훈련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 것이다.

수일이 혼자 힘으로 걷고 씻고 심지어 뛰기까지 했을 때는 너무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건강해진 덕분에 섹스하는 횟수가 늘어서 분노는 금세 가라앉았지만 말이다.

“보고 싶네.”

조금 전 돼지국밥을 먹으면서 두산을 흘끔거리며 냅킨으로 입술을 닦는 모습이 떠올랐다. 셔츠에 튈까 봐 어찌나 조심하던지, 괜찮다고 말해 줘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소맷단에 김칫물이 튀었다. 다행히 수일이 눈치채지 못했고, 두산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깨끗하게 먹은 걸 뿌듯해하던, 기름에 번들거리는 입술이 참 붉었다. 빨아 보고 싶었다. 아랫도리가 불끈했다.

“참아라, 새끼야. 여는 아이다.”

한숨 섞인 불만을 토해 냈다. 할배 집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집 앞에 차를 대충 대 놓고 벨을 눌렀다. 마산댁이 누구냐고 물었다.

“두사이.”

“엄마야, 두사이 니가 이 시간에 웬일이고. 어여 들어온나.”

철컹, 육중한 문이 열렸다. 돌계단 몇 개를 뛰어올라 가자 너른 정원이 보였다. 할배답게 어찌나 완벽하게 가꾸었는지 푸른 잔디와 커다란 나무들은 하나같이 크고 싱싱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산댁이 반갑게 두산을 맞았다.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이고? 집에 쫌 자주 온나. 얼굴 이자뿌긋다.”

“잘 지냈습니까?”

“잘 지냈지. 사모님이 안 계셔서 집이 쪼매 휑한 것만 빼면.”

마산댁이 아차 싶었는지 두산의 눈치를 살폈다.

“밥은 뭇나? 밥 채리 주까?”

얼른 말을 돌렸다.

“아입니다. 먹고 왔다. 두성이 행님은 지 방에 있나?”

“어. 2층으로 올라가 봐라.”

마산댁이 한숨을 쉬며 턱으로 2층을 가리켰다. 어지간히도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두사이 니 좋아하는 양과자하고 커피 준비해 놓으까?”

“예. 알아서 주이소.”

두산은 쿵쿵 소리 내며 2층으로 올랐다. 두산이 쓰던 방 바로 옆이 두성의 방이었다. 헤비메탈을 듣고 있는지 웬 남자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진동했다. 하여간에 취향도 꼭 저 같은 쓰레기였다.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미친놈이 기타 치는 시늉을 하며 대가리를 뱅뱅 돌리고 있었다. 꼴사나웠다. 뒤늦게 방문이 열린 걸 알아챈 두성이 큰소리로 외쳤다.

“왔나?”

귀가 먹었나.

두산은 커다란 전축으로 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새끼. 클라이막스에서 끄면 우짜노?”

두성이 짜증스레 말했다.

“클라이막스고 나발이고, 와 불렀는데?”

“아, 목마르다. 물 쫌 갖고 온나.”

“니가 갖다 무라.”

“갖고 온나. 그래야 내가 용건을 말해 주지.”

이러면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개새끼가.”

두산은 씩씩대다가 2층 거실에 있는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왔다. 두성은 물병에 입을 대고 잘도 꿀꺽꿀꺽 마셨다. 목젖을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캬아, 시원하다.”

물병을 도로 두산에게 내밀었다. 두산은 신경질적으로 받아서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허리에 양손을 짚은 채로 삐딱하게 서서 두성을 내려다보았다. 용건이 있으면 얼른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했다.

“니 요새 소꼽장난한다꼬 바쁘담서?”

두성이 실실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뭔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별거 아니기나 해 바라. 내 가만 안 있는다!”

두산이 화를 내든 말든 두성은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재미가 좋아도 그렇지, 개새끼 돌잔치가 머꼬? 그 행님하고 살드만은 니도 돌았나?”

“그 행님 안 돌았다!”

두산이 버럭 소리쳤다.

두성은 ‘그 행님 안 돌았다’를 그대로 따라 하며 낄낄댔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배꼽을 잡고 굴렀다. 사레까지 걸릴 정도로 웃는 바람에 얼굴이 빨개졌다. 벌게진 면상이 두산을 더 열받게 했다.

수일에게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고민은 짧았다.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두성이 침대 머리맡 탁자에서 무언가를 집어 내밀었다. 금은방에서 쓰는 새빨간 통이었다. 부루퉁한 얼굴로 통을 받아 들었다. 잠금장치까지 있는 게 크기도 크고 제법 묵직했다.

“부주.”

두성이 말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샛노란 금 거북이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강새이 모양으로 할라꼬 했는데 만드는데 시간이 쫌 걸린다 케서 고마 거북이로 했다.”

두산은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말아 쥔 주먹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빨간 케이스를 공손히 붙잡았다.

“몇 돈인데?”

“스무 돈.”

“묵직하이 좋네.”

“새끼, 쪼개는 거 바라.”

“내가 은제?”

반박하는 두산의 얼굴이 웃음으로 실룩댔다.

두성이 파리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 가 보라는 소리였다. 피차 낯간지럽게 고맙네 어쩌네 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두산은 곧장 등을 돌렸다. 문을 닫기 전 한마디 더 했다.

“내일 두열이 행님 편으로 떡하고 수건 보내 주께.”

“필요 읍따.”

두성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방문을 쾅 닫았다.

빵에 갔다 오더니 사람 됐네.

두산은 싱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식탁 위에는 두산이 좋아하는 양과자와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마산댁은 싱크대에서 두산에게 줄 음식을 바리바리 싸고 있었다. 두산이 슬쩍 뒤로 가서 눈으로 살폈다.

“오늘 끓인 소고기뭇국하고 잡채하고 전복죽 쫌 쌌다. 얼은 거는 떡갈비. 온다꼬 미리 연락했으면 갈비찜이라도 해 줐을 낀데. 다음에는 꼭 저나해라.”

“에이, 우리 옥 여사 뭇국만 있으면 내는 다 필요 읍따.”

다른 건 몰라도 마산댁이 만든 소고기뭇국 하나만큼은 전국 팔도에서 따라갈 자가 없었다. 두산의 가족뿐 아니라 수일도 조모도 사족을 못 썼다.

“손에 든 거는 머꼬?”

마산댁이 눈으로 케이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선물.”

생일도 아닌데 웬 선물이냐는 듯, 마산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내 할배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내일 점심때 돌잔치 오이소. 부페다.”

“돌잔치?”

마산댁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집에 들른 것도 그렇고, 두성의 방에 들렀다가 금은방 용 케이스를 받아 내려온 것도 심상치 않아 보였을 거였다. 선물에 돌잔치라. 마산댁은 이내 함박웃음을 웃으며 두산을 흘겨보았다.

“으이그. 이 화상아. 그새 사고 쳤드나?”

“뭐, 그래 됐다.”

“아들이가 딸이가?”

“아들.”

두산은 검지로 코를 쓱 쓸었다.

“내 그랄 줄 알았다. 우리 막내, 축하한데이!”

“고맙습니데이. 참, 낼 올 때 꼭 빈손으로 온나. 봉투 같은 거 갖고 오면 내다 버리 삐끼다. 농담 아입니다.”

두산의 말에 마산댁이 ‘알았다’ 하며 등을 쓰다듬었다.

“내가 두사이 니 새끼도 다 보고.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이고, 또 운다 울어. 좋은 날 와 우노?”

“그라이. 내가 쪼매 청승맞제?”

“어. 마이 청승맞다. 아무튼 간에 내일 곱게 하고 오이소.”

“오야. 내 최고로 좋은 옷 입고 갈끄마.”

두산은 눈물을 찍는 마산댁을 살짝 안아 주고 식탁에 앉았다.

커피가 알맞게 식었다. 버터를 많이 써서 만든 양과자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맛있는 걸 먹으니 자연스레 수일이 떠올랐다. 여기서 혼자 처먹을 게 아니라 집에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옥 여사, 내도 커피.”

방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줄 알았던 두성이 언제 내려왔는지 맞은편에 앉았다. 두산은 두성을 흘끔 쳐다보았다.

놀면서 운동만 했나, 출소 직후보다 몸이 더 커졌다. 키도 큰 새끼가 몸까지 크니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웃고 있는데도 인상이 매서웠다. 보통 사람들이 두성만 보면 슬금슬금 피하는 이유였다.

두산은 두성이 빤히 저를 쳐다보는 게 못마땅했다.

“와?”

삐딱하게 물었다.

“불도저 아직도 몬 찾았담서?”

두성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두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뿐이었다. 그가 어떻게 불도저 일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두산은 수일을 제외하고 세상 누구도 믿지 않았다. 조모를 많이 좋아하고 그녀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조모도 백 프로 믿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제 형제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 새끼. 행님이 묻는데 대답은 해야지.”

“우짜라꼬?”

두산은 이렇게 쏘아붙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두성의 앞에 커피 잔이 내려왔다. 마산댁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내가 요새 몸이 근질근질해서 글마나 찾아볼까 싶은데.”

두성이 아까운 과자를 손가락으로 잘근잘근 부수며 말했다. 두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과자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아래께, 내가 불도저 한 놈을 조샀다 아이가.”

두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 불도저 말고. 딴 놈.”

두성도 불도저가 여럿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조직 일이라면 털끝만큼도 관심 없던 그였다. 혼자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직에 끄나풀이 있거나, 그도 아니면 끄나풀을 만들었다는 소리였다. 출소 후 납작 엎드려 있는 척하면서 물밑 작업을 벌인다는 건 알고 있었다.

두성을 경계하는 이유는 그가 경쟁자라서가 아니었다. 혹여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 형제 중, 유일하게 속을 알 수 없는 남자가 두성이었다. 애초에 할배 집에 들어와 있을 인간이 아니었다.

두성은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방랑벽이 있어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툭하면 집을 떠나 팔도를 떠돌아다녔다. 다만, 다혈질이라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게 문제였다. 사고 뒷수습을 하며 두성을 유심히 지켜본 할배는 무슨 생각에선지 예고도 없이 나이도 어린 두성에게 리조트 사업을 맡겼다. 투자 대비 손해나 안 나면 다행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리조트 사업이 크게 번창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콘도야 골프 회원권을 사들였다. 수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사들이 눈독을 들인 것도 그때쯤이었다.

하지만 백두성이 누구던가. 기본적으로 남과 소통할 생각도 할 줄도 모르는 독불장군이었다. 사탕발림이 통하는 장남이나 둘째가 아니었고,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막내도 아니라서 이사들은 어떻게 구워삶지도 못하고 전전긍긍 앓기만 했다.

그러던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두성이 평검사 하나를 죽도록 팬 것이다. 이사들이 들고일어났다. 평검사 나부랭이 주제에 무리한 부탁을 한 걸 모르는 바 아니었고, 평소 하던 대로 부장 검사를 통해 조용히 마무리 지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사들은 그러는 대신 두성의 징계를 요구했다. 본보기로 삼자고 했다. 검찰에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던 할배는 이사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백두성은 감옥에 갇혔다. 징역 9월형이었다.

그가 감옥에 갇힌 사이 리조트 사업은 이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할배의 묵인하에 공동 경영이란 이름을 달고 땅따먹기를 했다. 두성의 출소가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그들은 두성의 출소일이 다가오자 미리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두성의 뒤에 꼬리가 여럿 붙었다. 그래서 두성이 납작 엎드렸다. 할배 집으로 자진해서 기어들어 갔다.

“글마 담당이 최 이사하고 박 이사데.”

최 이사는 강재욱 다음으로 젊은 새끼였다. 신사인 척하는 강재욱과 달리 대놓고 깡패인 남자였다. 박 이사는 조직 내에서 존재감은 약했지만 실속파였다. 즉 자기 재산 불리기에 도가 튼 개새끼였다. 할배의 팔다리는 아니지만, 손가락 발가락 정도는 되는 인사들이었다.

두산은 대꾸 없이 두성을 쳐다보았다.

“우리 회사에 이사들이 쫌 많다는 생각이 안 드나?”

두성이 뜸을 들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두성이 커피 잔을 움켜쥐었다. 상처 가득한 오른손 안으로 할배가 아끼는 비싼 커피 잔이 사라졌다. 저 새끼는 뜨겁지도 않나. 두산은 제 손도 아닌데 인상을 찌푸렸다.

“한 마리 낚으이까 줄줄이 딸리 나오는 기 억수로 재밌드라. 그래서 불도저 낚시나 해 볼라꼬.”

마침내 의중을 드러냈다. 불도저를 잡아서 이사들을 정리하겠다, 라. 말이 정리지 치겠다는 소리였다. 할배에게 두성을 빵에 넣도록 부추긴 것이 그들이었으니 복수를 꿈꿀 만도 했다.

할배 밑에 숨어들어서 신중하게 움직인 이유가 이거였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더니, 드디어 제대로 된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하필 그 기회를 자신의 적일지도 모를 두산과 공유했다.

믿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두산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니 맘때로 해라.”

그러다 눈을 가느스름히 떴다.

장남은 정치인 되려고 혈안이었고, 둘째는 그놈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조직을 물려받을 사람은 두성 아니면 두산이었다. 할배는 후계자에 두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두성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자리에 관심 없는 그가 설령 변덕을 부려 조직을 차지한다 해도 그 성격에 할배처럼 체계적으로 운영하지 못할 거였다. 그는 한 번 꼭지가 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화가 나면 되레 차가워지는 두산과 달리 애비 애미도 몰라봤다. 그 탓에 꼬리가 길었다. 그런 두성이 할배의 손가락 발가락을 시작으로 팔다리를 자르는 순간, 조직은 급격히 와해 수순을 밟을 거였다. 조직이 무너지면 두성도 무사하지 못했다. 할배가 저를 위해 무마한 사건이 몇 갠데 그걸 아는 이사들이 입 다물고 앉아 독박을 쓰겠는가. 즉, 그 또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게 두성이 원하는 건 아닐 테고, 누군가와 손을 잡을 인간도 아니니 결론은 하나였다.

나를 밀어주겠다?

두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두산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쫄리나?”

두성이 물었다.

“쫄리기는. 행님 니 꼬리가 문제지.”

“그거는 니가 알아서 짤라라.”

“내가 행님 니도 짜를 수 있는데 개안켔나?”

“머. 어쩔 수 없지.”

두성이 덤덤하게 답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었을 터였다. 이사들에게 들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니 형제에게 배신당하는 일쯤은 각오했겠지.

“알았다. 끝까지 가 보자.”

두산은 단호하게 말했다.

형제애라는 감상에 젖어 한 말은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산이 지금 당장 못 도와주겠다고 거절한들 뭐라 할 셋째 형이 아니었지만, 얘기를 들은 이상 그가 홀로 싸우게 둘 수는 없었다.

이제 한배를 탔으니 실리를 따져 볼 때였다. 당연히 성공이 실패보다 유리했다. 그러니 두산은 두성이 실패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걸 물었다.

“와 낸데?”

두성은 대답 대신 관자놀이에 검지를 가져다가 뱅뱅 돌렸다.

두산이 씨익 웃었다.

두성의 손안에서 커피 잔이 산산조각 났다.

두산은 마지막 남은 양과자를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 여사! 내 갑니다!”

큰 소리로 마산댁을 불렀다. 멀리 있었는지, 두어 번 더 크게 불렀을 즈음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마산댁은 식탁 위 깨진 커피 잔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두산을 위해 싼 보자기를 내밀었다. 두산은 단단하게 묶인 보자기의 리본을 집었다.

“낼 꼭 시간 맞차 오이소.”

“오야. 걱정하지 마라.”

원치 않았던 방문치고는 수확이 꽤 좋았다.

“금이하냥!”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

고작 1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수일은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두산의 얼굴을 보자마자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두산이 양손에 무언가 들고 있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두산은 던지듯 물건들을 내려놓고 수일을 끌고 안방으로 갔다. 방문을 채 닫기도 전에 쪽쪽, 입술이 닿는 곳은 아무 곳이나 입을 맞췄다. 수일이 나지막이 웃었다. 몸을 틀었다.

“가만히 쫌 있어 바라.”

두산이 안달했다. 가벼운 입맞춤은 진득한 키스로 변했다. 몸이 달았다. 수일은 두 팔로 두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리가 허공에 들렸고 이내 침대로 직행했다. 조심히 내려놓으면 어디가 덧나는지 이번에도 던져 버리는 바람에 수일의 몸이 크게 튕겨 올랐다.

‘살살 좀 해’라고 말하려는 순간, 두산이 그 큰 몸으로 덮쳤다. 두툼하고 강인한 혀가 수일의 입 안을 훑었다. 수일은 낮게 신음하며 두산의 혀를 제 혀로 얽었다.

참 이상했다. 매일 출퇴근할 때는 아홉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떨어져 있어도 불안하지 않은데, 함께 있다가 아주 잠깐이라도 가 버리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었다. 수일은 자신의 막연한 불안감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그저 그가 예고 없이 사라지면 불안했고, 다시 돌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참 입을 맞춘 두산은 얼굴을 들어 수일에게 은근히 말했다.

“참, 내 금이하냥했다.”

한자에 까막눈인 애가 사자성어까지 쓰고 참 별일이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금 받아 왔다꼬.”

“금?”

“잠깐만.”

두산은 벌떡 일어나 안방 문을 열었다.

“여사님, 이거는 소고기뭇국하고 잡챕니다. 전복죽이랑 떡갈비도 있다 카니까 저녁은 차리지 마이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타다닥, 타다닥, 분주한 발소리의 주인공이 두산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왔다.

“이거!”

두산의 손에 붉은색 벨벳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수일은 얼른 케이스를 받았다. 손이 아래로 축 처졌다.

해피가 침대 프레임에 두 다리를 대고 서서 뭔지 보려고 애썼다. 두산이 그런 해피를 한 손으로 안아 들고 수일의 곁에 앉았다. 해피는 먹을 건 줄 아는지 기대에 찬 까만 눈으로 케이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킁킁, 코를 벌렁댔다.

상자를 열자 샛노란 거북이가 나타났다. 해피가 목을 쭉 빼고 혀를 날름거렸다. 혀끝에 닿는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금세 뒤로 물러났다.

“세상에, 이게 대체 몇 돈이야?”

“스무 돈. 셋째 행님이 해피 돌잔치라꼬 주더라.”

스무 돈이란 말에 수일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돌았다.

금이야 두산도 많았지만, 해피 돌 선물로 받은 첫 금이라서 감회가 남달랐다.

“느네 형님 되게 다정하시다.”

두산보다 몇 배는 사나워 보이던 셋째 형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기와 달리 굉장히 배려심 깊은 남자구나, 생각했다. 수일의 말에 두산이 인상을 구겼다.

“안 다정하다!”

“아냐, 이렇게 챙겨 주시는 게 어디 쉽니? 엄청 다정하신 거지.”

“안 다정하다꼬!”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지 자기 형제 칭찬을 하는데도 두산의 입이 한 발이나 나왔다. 수일은 옅은 한숨을 쉬며 ‘그래, 안 다정하셔.’ 하고 맞장구쳐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금 거북이로 시선을 돌렸다. 기름이라도 발랐는지 번지르르 윤이 났다. 참 탐스러웠다.

“내일 돌 반지도 좀 들어오려나?”

수일이 기대에 차서 물었다.

“당연하지. 그거 녹여서 니 목걸이 하나 하까?”

“뭐래. 잘 보관해 뒀다가 해피 장가갈 때 써야지.”

“고자가 먼 장가고?”

두산의 말에 수일은 미간을 구겼다. 두산에게 안겨 있는 해피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해피가 내려가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수일은 손을 뻗어 해피를 내려 준 뒤 두산을 노려보았다.

“너는 말 좀 가려서 해.”

“해피 절마도 다 안다.”

“알든 말든. 아빠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신경해서 어따 쓰니?”

버럭 화를 냈다.

하여간에 동장 사모님도 그렇고 두산도 그렇고 해피 앞에서 너무 막말을 했다. 해피가 사람 말을 잘 알아먹는 걸 알면서도 굳이 저러는 건 심히 무신경해 보였다. 팔짱까지 끼고 씩씩대자 두산이 마지못해 사과했다. 그러면서 수일의 손을 꼭 잡았지만 수일은 흥이 떨어져 손을 뿌리쳤다.

차임벨이 울렸다. 한복집에 새로 맞춘 한복을 찾으러 갔던 조모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 여사가 문을 열어 주는 소리를 들으며 수일은 안방을 나섰다. 두산이 수일을 애처롭게 쳐다보며 침대에 누웠지만 모른 척했다.

“이 무슨 냄새고?”

조모 손에 차분한 쪽빛 치마에 아이보리색 저고리가 들려 있었다. 여태 본 조모 한복 중에서 가장 차분한 색이었다.

“숙모님, 한복이 정말 예뻐요.”

수일이 감탄했다.

“조모가 웬일이고? 이래 고상한 걸로 다 해 입고. 빤짝이가 한 개도 읍네?”

두산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며 한마디 던졌다.

“명색이 할매가 돼 가지고 물장사할 때 입는 거를 돌잔치 때 입으면 되겠나?”

상기된 얼굴로 조모는 한복이 끌리지 않게 반으로 접어 자기 방으로 가져갔다. 뒷모습에 설렘이 잔뜩 묻어났다. 해피가 웬일로 조모를 뒤따랐다. 웬일은 아니지. 조모 곁에 있으면 먹을 게 나오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참, 떡은?”

“떡?”

“아까 받아 온 거 있잖아. 차 안에 뒀어?”

“아.”

“아, 가 아니구 상해. 얼른 갖고 와.”

“알았다.”

두산은 슬리퍼를 꿰신고 느긋하게 현관을 나섰다.

시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가 점심 이후 돌아온 이 여사는 부지런히 집 안을 오가며 청소며 빨래를 했다. 집안의 대소사가 있기 전날 늦게 출근한 것이 미안했던 모양인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아이고 영도댁, 그만하고 쫌 쉬라. 우리 과일이나 묵자.”

“예. 사모님.”

베란다 창틀을 닦고 있던 이 여사가 걸레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욕실로 가 걸레를 씻고 먼지가 묻은 앞치마를 벗어 새걸로 갈아입었다. 사람이 어찌나 깔끔한지 수일은 저렇게 살라고 해도 못 하겠다 싶었다.

다과상은 거실에 차려졌다. 이 여사는 그냥 먹어도 상관없을 떡을 데우고, 사과를 깎았다. 해피 먹일 사과 반 개도 채 썰듯 얇게 썰어 접시에 따로 담았다. 수일은 해피 사과 접시를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저건 내 거다. 속으로 외쳤다.

수일은 해피가 과일 먹을 때마다 아삭아삭 씹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다. 어금니로 야무지게 씹어 먹는 모습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과일은 늘 수일이 먹였다. 하지만 조모가 있으면 말이 달라졌다. 경쟁이 치열해졌다. 다른 건 다 어른에게 양보하는 수일이 유일하게 양보할 수 없는 게 저 접시였다.

“영도댁도 온나.”

“개안습니다.”

“온나. 이거 묵고 고스톱 치자.”

고스톱이라는 말에 이 여사의 눈이 반짝였다.

“또 치나?”

두산이 한 소리 했다.

“뭘 또 쳐? 오늘 처음 치구만은.”

조모는 고스톱 중독이었고, 이 여사는 고수였다. 두산은 마음만 먹으면 판을 휩쓸 것 같았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고, 수일은 마음만 앞섰지 잘하지 못했다.

수일의 병간호를 위해 조모가 함께 살던 때에 집에서 하루가 멀다고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 이 여사를 필두로 동장 사모님과 그녀의 친구들이 드나들었다. 판돈은 10원으로 소소했으나 분위기만은 흡사 전문 도박꾼들의 장이었다. 수일은 어깨너머로 구경하면서 가끔 광을 팔았고, 음료수 심부름을 해 주며 용돈을 벌었다.

고스톱 얘기 이후로 이 여사의 손길이 바빠졌다. 아침에 받은 백설기와 시루떡, 인절미가 먹기 좋게 잘린 상태로 올려졌다. 작은 접시와 식혜도 인원수에 맞게 상 위에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이 여사가 사과 접시를 양손에 들었다.

수일은 해피 과일 접시를 받기 위해 미리 손을 내밀었으나, 이 여사는 수일 대신 조모 손에 접시를 넘겨주고 사람 먹을 접시를 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빈손을 물렸다.

두산이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고 있다가 조모 앞에 놓인 해피 접시로 팔을 뻗으려 했다. 수일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두산을 말렸다. 워낙 힘 차이가 커서 수일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하지 마,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쩌다 보니 몸싸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만날 보는데도 그리 좋나? 고마 방에 드가 있지 와 나왔노?”

조모는 둘이 애정 행각이라도 벌이는 줄 알고 혀를 찼다. 아닌데, 수일은 괜한 오해를 산 것이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쭈그렁 할배도 좋아 죽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인데.”

가만히 있을 것이지 두산이 툭, 말을 던졌다. 조모가 입술을 실룩대며 두산을 흘겨보았다.

“니는 수일이가 쭈그렁 할배가 되면 안 좋아할 껀가 부지?”

“당연히 좋아하지!”

“말하는 뽄새를 보이까는 아인 거 같은데.”

이번엔 두산이 조모를 노려보았다.

“내는 수일이 행님이 대머리가 돼도 좋아할 끼다! 가발도 내 머리카락 길러서 만들어 줄 끼고!”

두산의 말에 조모가 코웃음을 쳤다.

“어디 그라는지 두고 보자.”

어째 대화가 수일이 진짜 대머리라도 될 것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두산아. 나 머리숱 괜찮아. 그리구 우리 집안에 대머리 없어.”

“말이 그렇다고.”

“아니 말을 해도 꼭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뭐가 되니? 다들 오해하시겠다.”

“개안타. 나이 들면 머리카락이 빠질 수도 있지.”

벽에다 대고 얘길 해도 두산보다 나을 지경이었다.

대머리 얘기 덕분에 싸움으로 번지지 않은 건 다행이었으나, 수일만 기분이 꽁해졌다. 두산은 괜히 조모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사과를 먹다가 뜬금없이 ‘나는 평생 수일이 행님을 사랑으로 보필할 거다’라는 선언을 했다. 듣는 수일은 민망해서 떡을 집어 두산의 입에 물려 주었다.

“떡이 참 맛있더라구요.”

수일은 어색하게 말을 꺼내며 오물오물 떡을 씹어 먹었다.

이 여사까지 넷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떡과 사과를 먹고 식혜를 마셨다. 해피는 조모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그녀가 주는 사과를 받아먹었다. 수일은 해피가 아삭아삭 사과 씹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지만 대화가 끊이지 않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성이가 금 거북이를 줐다꼬?”

“어.”

“그래. 글마가 우리 집안에서 심성이 제일 착하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두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성격이 마이 급해서 그렇지, 우리 집안에서 성이처럼 욕심 없는 아가 어딨드노?”

“욕심이 없는 거는 맞는데 착한 거는 아이지.”

수일은 새로운 정보에 귀 기울였다.

“글마 아즉도 놀제?”

“어.”

“에휴, 성이 심정이 말이 아닐 끼다. 지가 키운 사업을 눈뜨고 뺏깄으이 뭔 의욕이 있겠노.”

조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에 감옥 갈 짓을 와 하기는?”

두산이 퉁명스레 반박했다.

“니는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정 없게 해야 쓰겄나? 그라는 니는 와 중학교 때 소년원 갔는데?”

수일은 조모의 입에서 소년원 소리가 나오자마자 이 여사 눈치를 살폈다. 혹시 놀라지나 않았나 싶었지만, 이 여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떡을 집어 먹고 있었다.

“여서 소년원 얘기가 와 나오노?”

“저 봐라.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란다꼬. 지 얘기 하니까 발끈하는 거 바라.”

“솔찌키 그때 내는 진짜로 억울하게 드갔다. 행님하고는 다르다꼬!”

“억울한 소리 하고 자빠짔네. 그래 따지면 감옥 갈 사람 하나도 없다!”

두산과 조모가 옥신각신 또 싸우기 시작했다.

둘도 없이 친한 사인 건 분명한데, 만나기만 하면 말싸움이었다. 조모가 실랑이하느라 해피에 소홀한 사이 수일은 몰래 자기가 먹던 사과 조각을 이로 잘라 해피에게 내밀었다. 조모 곁에 있던 해피가 사과를 보고 쪼르륵 수일에게로 왔다. 수일은 해피의 뜨겁고 까칠한 혀가 손가락을 핥으며 사과를 가져가는 걸 느끼고는 몰래 웃었다. 사각사각 말소리 사이사이 씹는 소리도 들렸다.

말싸움이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이 여사가 쓰윽 자리에서 일어섰다. 못다 한 일거리를 찾아 움직이려나 보았다. 그러자 조모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두산의 등짝을 때렸다.

“니 때문에 고스톱 몬 칠 뻔했다 아이가. 영도댁, 이제 시작할 끼다. 어여 앉아라.”

“예.”

이 여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천 원짜리 한 장을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내 조모에게 내밀었다.

“두사이 니도 돈이나 내놔라.”

“오늘 내가 다 딸 끼다. 두고 바라.”

두산은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며 이를 갈았다.

“따 보시든가.”

조모가 코웃음을 쳤다. 벌떡 일어나 방으로 가서 가방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초록색 손가방 가득 10원짜리 동전이 들어 있었다. 조모는 인당 100개씩의 10원짜리 동전을 오차 없이 나눠 주고, 수일에게는 50개를 공짜로 던져 주었다.

“수일이 니는 광 팔아라.”

“네.”

조모가 패를 돌리는 동안, 수일은 자기가 먹던 사과를 잘게 쪼개 또 해피에게 내밀었다.

“행님, 그만 주라. 아 설사한다.”

언제 봤는지 두산이 참견했다.

“얼마 안 줬어.”

“안 주기는? 조모가 준 것만 해도 몇 갠데.”

“어우 알았어. 이것만 주고 안 줄게.”

수일은 시무룩해져서 ‘해피야, 이게 마지막이야. 느네 아빠가 주지 말래.’ 하며 두산의 핑계를 댔다.

고스톱 판은 흥미진진하게 돌아갔다. 두산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자 고수인 이 여사의 눈에 불이 켜졌다.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한 패 한 패 신중하게 내려놓았다. 셋 중 가장 약체인 조모는 설사를 싸고, 피박에 광박까지 쓰는 등 일진이 좋지 않았다. 수일은 광을 판 동전을 해피 저금통에 부지런히 넣었다.

3시쯤 앉았는데, 어느덧 사위가 어둑해졌다. 6시가 퇴근 시간인 이 여사는 늦게 출근한 것도 모자라 고스톱까지 친 것이 미안했는지 근무 시간이 지났는데도 굳이 저녁상을 차려 주고 퇴근했다. 수일은 오늘 받아 온 답례품용 수건 다섯 박스를 미리 챙겨 주고, 내일 꼭 가족과 함께 오라고 신신당부하며 이 여사를 배웅했다.

조모는 어느새 식탁에 앉았다.

“출출하네. 어여 밥 묵자.”

“행님도 앉아라. 밥 묵자.”

수일은 세 사람이 고스톱을 치는 내내 떡을 주워 먹어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소고기뭇국 냄새에 숟가락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낮부터 먹고 싶었던 얼큰한 국물을 보니 부른 배와 상관없이 군침이 돌았다.

두산은 해피 밥을 식히는 중이었다. 후후, 입김을 불었다. 평소라면 옆에서 알짱거리며 꼬리를 흔들었을 해피도 배가 부른지 거실 가운데 아무렇게나 누워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해피! 밥 무라!”

두산이 밥그릇을 숟가락을 치며 해피의 주의를 끌었다. 해피가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침에 먹었던 북엇국이었다. 킁킁 냄새를 맡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챱챱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조모와 수일은 목을 빼고 그런 해피를 쳐다보았고, 두산이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같이 묵지, 와?”

“너두 참. 해피 밥을 어떻게 뺏어 먹니?”

“그라이. 도둑도 양심이 있으야지. 아이구, 잘 묵는다.”

두산은 말을 말자, 하며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캬아. 직이네.”

그의 말에 수일도 조모도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역시 마산댁이었다. 종일 느끼했던 속이 빨간 소고기뭇국 하나에 씻긴 듯 내려갔다. 매콤한 국물도 부드러운 무도, 크게 썬 대파와 아삭아삭 씹히는 콩나물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수일은 밥을 말아 먹었다. 편한 옷을 입고 있어서 튈까 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정신없이 먹느라 입 주위에 다 묻었는지 두산이 쓱 손을 내밀어 엄지로 수일의 입술을 닦았다. 손가락에 묻은 빨간 양념을 쪽 빨아먹었다. 두산이 씨익 웃었다. 수일은 ‘못 말려’ 하며 뒤늦게 티슈를 꺼내 입술을 쓱쓱 닦았다.

조모가 못 본 척하며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자 조모는 8시 반에 하는 KBS 드라마를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았다. 수일과 두산은 해피를 데리고 근처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해피는 모양도 크기도 좋은 예쁜 응가를 세 덩이 쌌고, 오줌도 누었다. 두산이 똥을 검정 봉지에 넣었다.

이 시각 국민학교에는 저녁 운동을 하러 나온 아파트 주민과 근처 동네 주민이 한데 모여 주로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수일과 두산처럼 개를 데리고 나온 집도 제법 되었다. 큰 개와 작은 개들이 엉켜 싸우기도 하고 놀기도 했다.

“아재요. 똥 안 치우고 갑니까? 내 다 봤는데?”

두산은 황구가 싸고 간 똥을 모른 척하고 가는 사내를 붙잡아 세웠다. 그는 두산의 말을 무시하다가 어깨를 잡히자 대들려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곳에 두산의 얼굴이 있었고, 체격도 자신의 두 배나 되는 걸 알아채고는 금방 사과를 했다.

“내가 똥 치울 꺼를 안 들고 왔는데.”

“자요. 이거 쓰이소. 얼라들 다니는 학교에 개가 똥을 싸면 되긌나?”

두산은 충고 한마디와 깜장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사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개똥을 치웠다.

두산은 의외로 깔끔한 구석이 있었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많아도 개똥 치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수일은 두산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사실 유난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매일 밤 해피 이를 닦이고, 발톱이 길면 발톱을 깎아 주었으며 귀 청소야 똥꼬 청소까지 아이 돌보듯 했다. 사는 집은 또 어떻고. 진돗개 두 마리가 살 만큼 큰 걸로 그것도 진짜 기와를 얹어 만들어서 왔다. 얼마 전에는 전용 밥상까지 주문 제작했다. 유난도 유난이었고, 어찌 보면 극성맞았다. 수일은 운동장을 거닐며 똥 싼 개를 찾는 두산을 쳐다보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복순이를 데리고 나온 김 영감이 멀리서 다가왔다. 그걸 알아본 이유는 해피가 난리 법석을 떨었기 때문이다.

“오늘 쪼매 늦었네. 돌잔치 준비한다꼬 정신없제?”

김 영감은 두산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자기 키만큼 떨어져서 큰 소리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안 그래도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이는 게 싫은 모양인지 늘 저랬다. 수일은 해피 목에서 목줄을 빼 준 뒤 복순이와 해피가 만나서 서로의 엉덩이 냄새를 킁킁 맡는 것을 지켜보았다.

“업체에서 다 알아서 해 주는데 정신없을 끼 뭐가 있습니까.”

“건 글타. 내는 운동장 쫌 돌고 올란다. 복수이 쫌 잘 봐도.”

“예. 걱정 마시고 운동하고 오이소.”

“서울 총각. 내하고 같이 운동장 돌자.”

“네. 어르신.”

두산이 가지 말라고 눈치를 줬지만 수일은 어른이 부탁하는데 거절하기 뭣해서 두어 바퀴만 돌 생각으로 김 영감을 뒤따랐다.

김 영감은 학원 계단을 오를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돌았다. 경보와 다름없는 그의 보폭을 따라잡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수일이 뒤처지면 김 영감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춰 주었다.

“마이 아팠담서? 두사이가 그라드라.”

“이제는 다 나았어요.”

“그래. 젊은 친구가 참 고생이 많았다.”

하며 뜻 모를 소리를 했다.

“해피 절마도 고생 많았고. 서울 총각 같은 좋은 아버지 만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으이 을매나 귀한 생명이고. 돌잔치 할 만하다.”

“아… 네.”

‘구사일생’ 뜻을 잘못 알고 계실 분이 아닌데. 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해피 엄마가 해피를 낳다가 큰일 날 뻔했었나. 두산이 그런 얘길 김 영감한테만 했을 리가 없어서 그가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되묻기도 전에 김 영감이 저만치 앞서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돌아오는 길에 김 영감이 한 말을 두산에게 전했으나 두산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고마 하는 소리겠지.”

“그렇겠지?”

“어.”

두산은 실컷 놀아서 지친 해피를 옆구리에 끼고 수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해피 신나게 놀았나 봐.”

“신났다 뿌이가. 어찌나 뛰댕깄는지 털 다 젖었다.”

“어디.”

수일은 손을 뻗어 해피를 쓰다듬었다. 정말 축축하기는 했다. 강아지는 땀샘이 없다는 걸 양제일 원장에게 들어 알면서도 ‘정말이네’ 하며 두산의 말에 동의했다. 실은 복순이가 핥아서 저렇게 된 걸 텐데 말이다.

“참, 덕규 씨는 몇 시에 온다 그랬지?”

“11시 반.”

“여자 친구도 같이 온다 그랬나?”

“헤어짔다.”

“아….”

둘은 미주알고주알 사소한 것들을 얘기하며 걸었다. 돌아가서 해피는 발만 씻기고 목욕은 내일 시키자는 둥, 우리도 조모처럼 한복을 새로 맞출 걸 그랬다는 둥, 요새는 정장이 대세라서 정장을 입는 게 맞는다며 당장 내일 있을 돌잔치 복장에 대해 고민했고, 그러다가 뜬금없이 주말 드라마 <엄마의 바다> 얘기를 꺼냈다.

드라마도 보지 않으면서 동네 아주머니들의 반응을 주워듣고 수일에게 전해 주었다. 고씨 중에 미인이 많은 것 같다며 드라마에 자매로 출연 중인 고현정과 고소영을 과하게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드라마 얘기에서 어쩌다 가수들 얘기로 빠졌다. 두산은 갑자기 듀스의 춤을 보여 주겠다며 길 한복판에서 해피를 들고 현란하게 웨이브를 탔다.

해피가 ‘앙, 앙!’ 짖으며 그만하라고 소리쳤고 수일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게 브레이크 댄스라는 거다. 내 억수로 잘하제?”

“어우, 남사스러워.”

수일은 남이 볼까 창피해서 두산을 얼른 자기 옆으로 잡아당겼다.

“와? 이제 시작인데.”

두산이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수일은 두산에게 매달리며 못 하게 했다.

“됐어. 집에나 가.”

“그라믄 집에 가서 보여 주까?”

“그래. 가서 춰.”

큰 덩치에 비해 몸이 가볍기는 했다.

수일은 혹여 또 망측한 춤을 출까 봐 한쪽 팔을 꼭 껴안고 물었다.

“춤 이름이 뭐라구?”

“브레이크 댄스.”

브레이크 댄스라. 처음 보는 춤과 음악이 TV와 라디오를 장악하고 있었다. 세상이 휙휙 바뀌는 중이었다. 그 변화가 너무 빨라서 수일은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는데, 두산은 원래부터 제 것인 양 자연스레 품었다.

수일은 두산만 있으면 새로운 세상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두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코로 들이쉬는 공기는 분명 가을이었으나, 전해지는 체온은 여름이었으며, 마음은 봄이었다. 세상은 수일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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