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81)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수일은 압력 밥솥 추가 돌아가는 소리에 깨어났다. 물론 아프지 않은 여느 날의 경우였다. 오늘따라 눈꺼풀이 무거웠다. 감기가 오려나. 중요한 날을 앞두고 아프면 안 되는데. 괜한 걱정에 한숨이 났다.

수일은 눈을 감은 채 모로 누웠다. 밖에서 두산과 해피가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수일을 깨우지 않기 위해 제 딴에는 작게 말하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 다 들렸다. 함께 산 지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둘 다 지치지도 않고 수다를 떨었다. 두산이 한 마디 하면 해피가 한 마디 했고, 두산이 두 마디 하면 해피도 두 마디를 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는 두산은 제일 먼저 해피를 데리고 운동을 하러 나갔다. 1시간가량 운동을 마치고는 집에 돌아와 압력 밥솥에 밥을 올리고 샤워를 했다. 그렇게 다 씻고 나올 즈음이면 밥솥이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수일은 주로 그때 정신이 들었는데 바로 일어나진 않았다. 두산과 해피가 떠드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였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두 동물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치이익, 프라이팬에 마가린을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소한 냄새가 안방까지 진동했다. 슬슬 일어나 볼까. 수일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았다.

타다닥,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에헤이, 아직 아이다. 쪼매 있다 가라.”

“앙!”

“아이라꼬. 내 이제 막 시작했다. 일로 온나.”

“앙, 앙!”

“쌔끼. 니 배 마이 고픈갑네.”

낑낑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멀어졌다. 수일을 깨우려고 왔던 해피가 두산의 만류에 돌아가는 소리였다.

해피는 보통 시간 맞춰 방문을 긁었지만, 배가 고픈 날은 음식 냄새가 나기만 하면 안방으로 달려왔다. 신이 나서 왔다가 시무룩해져서 돌아갔을 해피를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흘렀다.

수일은 와인 빛이 도는 실크 잠옷을 탁 소리 나게 펴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인기척에 해피가 고개를 홱 돌렸다. 타다닥, 흰색 덩어리가 빠른 걸음으로 수일에게 달려왔다. 열어 둔 베란다 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해피를 한 번 쓰다듬어 준 수일이 식탁에 앉았다.

“또 그란다.”

아차. 도로 일어나 두산에게 다가갔다.

팬티에 앞치마 차림인 두산은 프라이팬을 들어 빵을 뒤집으면서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 주자 두산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두산은 눈을 맞추며 ‘잘 잤나?’ 하고 물었고, 수일도 ‘응. 너는?’ 하고 되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불 앞에 있어서 그런지 두산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수일이 두산의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었더니 그게 뭐라고 두산의 광대가 실룩댔다.

수일은 프라이팬을 쥔 우람한 팔뚝을 한 번 쓸어 준 뒤 다시 식탁에 앉았다. 뒷모습이 영 보기 흉했다. 그래도 뭐, 팬티라도 입고 있는 게 어딘가.

삐삐삐, 요란한 소리가 났다. 두산은 얼른 전자레인지에서 그릇을 꺼내 찬물에 담그고 압력 밥솥 뚜껑을 열어 김을 뺐다. 그러곤 빵을 급히 뒤집었다. 손이 바빴다.

“도와줘?”

“으데. 다 했다.”

어디서 저런 체력이 나오는지 볼 때마다 신기하고 부러웠다. 수일은 눈을 비비고 식탁 위에 놓인 물 한 잔을 마셨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두산은 프라이팬에 마가린을 더 둘렀다. 고소한 향에 해피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두산의 주위를 맴돌며 안달을 했다. 두산이 발로 해피를 슬쩍 밀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 해피가 깨갱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너두 참. 조심 좀 하지.”

“내가 그란 거 아이다. 지가 와서 밟힜다.”

두산이 볼멘소리로 항변했다. 해피는 앙! 하고 두산을 향해 짖은 다음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여간 해피도 이상한 녀석이다.

두산은 토스트를 만들고 남은 계란을 프라이팬 위에 뿌렸다. 또다시 해피의 꼬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찌나 빨리 흔드는지 저대로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요리를 마친 두산은 먼저 찬물에 식히던 닭백숙을 해피 밥그릇에 담았다. 그다음 압력 밥솥에서 수일의 닭백숙을 옮겨 담고 마지막으로 제 몫의 토스트를 접시에 담았다. 그렇게 세 식구의 아침상이 완성되었다.

수일은 때맞춰 냉장고에서 백김치와 두산이 마실 우유를 꺼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붙여 둔 종이가 펄럭거렸다.

[먹으면 즉사]와 [기타]라고 적힌 두 개의 용지였다. 강렬한 해골 그림 옆에 빨간색 글자로 쓴 [먹으면 즉사]에는 해피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 ‘맵고 짭고 기름진 거’를 포함해서 이를테면 초콜릿, 포도, 양파, 마늘, 과일 씨앗, 닭 뼈, 생선 가시 등이 적혀 있었고, [기타]에는 해피가 먹을 수 있는 음식, 즉 삼겹살을 뺀 온갖 종류의 고기, 밥, 생선, 명태 3종 세트(황태, 북어, 노가리), 삶은 계란, 고구마, 찐 호박, 사과, 당근, 수박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수일은 [먹으면 즉사] 란에 적힌 두산의 삐뚤빼뚤하고도 장엄한 글씨를 보며 매번 놀라고는 했다. 자신이 보아 온 강아지들 대부분은 사람이 남긴 음식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비록 남의 개지만, 수십 마리를 직접 먹이고 키웠던 이 여사도 저런 걸 먹이면 안 된다는 사실에 역시나 깜짝 놀랐다. 먹다 남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 주는 건 예사였고, 매콤한 생선조림에 사람이 발라 남긴 생선 뼈를 섞어 주는 일도 태반이었다. 분명 개에게는 나쁜 음식이니 의사가 말했을 텐데, 즉사까지는 아니어도 그 효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잡아먹어서 몰랐던 것이라고 이 여사는 이해했다.

수일이 리스트에 정신이 뺏긴 사이 두산은 해피 밥상에 밥그릇과 물그릇을 올려 주었다.

“마이 무라.”

퉁명스럽지만 다정했다. 해피가 좋다고 달려와 챱챱 쩝쩝 소리를 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수일도 자리로 돌아가 숟가락을 들었다.

“뜨겁다. 천천히 무라.”

“응. 근데 너두 백숙 먹지 왜 그걸 먹어?”

“종일 밥만 묵는데 아침이라도 빵을 무야지. 사람들이 으찌나 밥만 묵어쌌는지 돌아삐겠다.”

“쯧. 밥이 얼마나 중한데. 요즘 애들은 배가 불렀다니까.”

“예에, 영감님 마이 드이소.”

수일은 입을 실룩대며 숟가락을 놀렸다.

후후, 뜨거운 음식을 식혀 입 안에 넣었다. 자주 먹는데도 먹을 때마다 이 여사의 솜씨에 감탄했다. 압력솥을 올리는 건 두산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찹쌀이며 인삼, 대추, 살만 발라낸 닭고기를 준비해 둔 건 전부 이 여사였다.

“어제 반상회는 잘했나?”

두산의 물음에 수일은 고개를 저었다.

“와? 먼 일 있었나?”

두산의 눈이 번뜩였다. 수일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구.”

“근데 와?”

수일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맥스 있잖아.”

“맥스? 동장 아지매 요꾸쇼 글마 말이가?”

“응. 걔 또 장가간대.”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해피는 의학 용어로는 잠복 고환, 흔히 하는 말로 고자였다. 제일 가축 병원 양제일 원장의 말에 따르면 해피의 고환들은 길을 잃었다. 생후 4개월에서 5개월 사이 생식기 옆으로 딱 내려와 붙었어야 했을 불알이 한 놈은 허벅다리로 가 버렸고, 다른 한 놈은 아예 내려오지를 못했던 것이다. 죽을병인가 싶어 어찌나 떨었던지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아찔했다.

일단은 두고 보자고 했던 양 원장은 일본에서 함께 수학했던 친구 수의사의 충고를 듣고는 수술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다시 전달했다. 어리고 건강할 때 하는 쪽이 좋지 않겠냐는 권유에 수일도 마지못해 허락했다. 수술은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해 서울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고, 날짜는 돌잔치가 끝난 다음 주였다.

아무튼, 해피가 고자인 걸 알면서도 굳이 그 앞에서 장가간단 소리를 하는 동장 사모님이 얄미웠다. 맥스가 처음 가는 장가면 또 모를까, 벌써 세 번째였다. 괜히 안쓰러워 해피를 돌아보니 해피는 세상모르고 밥을 먹고 있었다.

심각한 수일과 달리 두산은 뭐가 재밌는지 키득댔다.

“웃을 일이 아니야. 상처받았을 우리 해피 생각도 좀 해.”

어제 일이 다시 떠올라 열불이 났다. 입맛도 떨어져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이고, 우리 행님 삐낄 일도 많다. 맥스 글마가 해피한테 벌써 자랑했을 꺼로. 아침마다 만난다 아이가.”

“그래? 그래두 그렇지… 암튼, 담 반상회는 니가 가.”

“알았다. 내가 가께. 퍼뜩 밥이나 잡수이소.”

두산은 수일의 손에 다시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수일은 마지못해 한 숟갈을 더 떠서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다 보니 입맛이 되살아났다.

“조모 몇 시에 온다꼬?”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모는 해피 돌잔치를 위해 4일 만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세 시 반쯤. 배 타고 온다고 하셨어.”

두산은 입 안 가득 토스트를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으며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배 타고 오면 보나 마나 한 짐이겠네.”

“설마. 추석 때 엄청 많이 사 오셨는데 또 그러려고.”

“영 불안한데.”

두산이 미간을 좁혔다.

“시간 맞춰 마중 나가는 거 잊지 말구.”

“어.”

“갈 때 해피도 데리구 가.”

“알았다.”

“꼭 데리구 가. 숙모님이 신신당부하시더라.”

“알았다. 안 까무께.”

어째 대답이 건성으로 들렸다.

수일은 두산이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꼴통 같았다. 어느 날은 평범한 회사원 같다가도 어느 날은 건달처럼 보일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딱 건달 타임이었다. 팬티만 입고 있는 건 마찬가진데 왜 그런지 몰랐다.

“너는 일은 좀 하니?”

수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

두산이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접대 말구.”

“한다.”

참으로 당당했다. 그래도 노파심에 한마디 더 했다.

“회사 사람들한테 잘해, 다들 너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잖아. 대전 갔을 때 보니까 아는 것도 많으시구 책도 많이 읽으시더라.”

“내 잘한다.”

“하긴 하겠지.”

“에헤이!”

“어우, 알았어. 그냥 말해 본 거야.”

수일은 두산이 못 미더웠지만,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는 회사원 생활을 관두지 않는 게 어딘가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기특한 면도 있었다. 국민학교만 졸업하고도 몇 달 배우지 않은 영어를 곧잘 했고, 그 어려운 조선 항만과 선박 관련 책을 이해될 때까지 들여다보는 끈기도 있었다. 최근에는 컴퓨터에도 열심이었다.

단, 한자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자기 이름만 겨우 쓰는 정도였다. 수일의 이름은 쓰지도 읽지도 못하다가 최근에야 겨우 읽고 쓰기 시작했다. 맨날 그놈의 옥편을 들여다보는데, 옥편 사용법은 알고나 저러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최근 들어 순 한글 신문도 나오고 해서 앞으로 한자를 못 읽어도 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타닥타닥, 발소리에 두산도 수일도 동시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해피가 촉촉하게 젖은 입술 주위 털을 혀로 핥으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떨어진 건 없는지 밥상 주위를 킁킁대다가 자신의 별장, 즉 해가 잘 드는 거실에 자리 잡은 이불 깔린 소쿠리로 올라가 옆으로 누웠다. 별장용 소쿠리는 생선을 말릴 때 쓰는 대나무 소재 원형 채반으로 두산이 자갈치 시장에서 구해다가 이불을 깔아 준 거였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되는데.”

수일이 해피를 향해 말했다. 매번 같은 말을 하고도 매번 재밌어서 웃었다.

두산이 인상을 썼다.

“왜, 재미만 있구만.”

“어데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욕먹는다.”

“뭐래. 우리 서예 학원 어르신들은 재밌다고 배꼽 잡고 웃으시거든!”

“하아, 그 보내는 기 아이었는데. 갈수록 영감 같아져서 큰일이다 큰일이야.”

어린 녀석이 한탄을 했다. 수일은 그런 두산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버릇없는 건 평생 가겠지. 해피가 닮지 말아야 할 텐데. 속으로 생각했다.

곧 두 사람도 식사를 마쳤다. 수일이 반찬을 냉장고에 넣는 동안 두산은 수건을 들고 해피에게로 갔다.

“니는 와 멀쩡한 주디 냅두고 얼굴로 밥을 먹노. 여 바라. 밥풀 다 묻었네. 아나, 고기.”

“아르르르.”

“새끼, 씅질은. 그라믄 묻히지를 말든가.”

두산이 해피 얼굴 여기저기에 묻은 밥풀과 고기 조각들을 떼어 주며 잔소리했다. 해피는 몇 번 으르릉댈 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매번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툴툴대도 해피를 돌보는 건 9할이 두산이었다. 정성도 저런 정성이 없었다. 두산이 해피를 거두는 동안 수일은 그릇들을 개수대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러자 두산이 호들갑을 떨며 말렸다.

“그릇 치우는 게 어때서. 설거지를 하는 것도 아닌데.”

“하여튼 간에 가만히 몬 있어요.”

두산은 그새 다가와 수일의 손에 들린 마지막 그릇을 빼앗듯 가져갔다.

가만히 못 있기는.

속으로 투덜댔다.

수일은 온종일 가만히 있었다. 최근 들어 서예 학원이야 컴퓨터 학원에라도 다니지, 6월까지는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낫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고, 영양실조에서 회복되는 속도도 더뎠다. 매일 먹는 약이 얼마나 많던지, 이러다 약 때문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의사는 의사였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재활 치료를 받았더니 어느새 정상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왔다.

“보리차 가져갈 거지?”

“어.”

“얼른 출근 준비해. 내가 보온병에 보리차 담아 줄 테니까.”

“알았다.”

두산이 방으로 들어간 사이 수일은 빨간색 보온병에 시원한 보리차를 가득 담았다.

출근 준비라고 해 봐야 이를 닦고 옷을 입으면 끝이었다. 출근 시간이 8시라 빠듯할 만도 한데, 5시에 일어나서 부지런을 떠는 덕분에 두산은 늘 여유가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두산이 칙칙한 색의 한 벌짜리 근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올봄까지 정장을 입고 다녔던 두산은 요즘 현장에 나가지 않아도 근무복을 입고 출근했다. 듣기로 사복을 입는 직원이 전무했고, 원청 직원과 임원은 물론이고 업체 사장들조차 비슷하게 생긴 근무복 차림으로 출퇴근한다고 했다. 심지어 접대 자리에도 입고 나온다는데 두산만 혼자 정장을 빼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색이라도 예쁘면 오죽 좋아. 하필 칙칙한 황토색이었다. 근무복을 입어도 태가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색깔이 영 두산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까만 얼굴이 더 까매 보였고, 인상은 더 사납게 느껴졌다.

“저기, 스카프라도 좀 하고 갈래?”

“스카프는 무슨.”

“그럼 손수건이라도 줄까? 넌 파란색이 잘 어울려서 파란 손수건 목에 두르면 얼굴이 확 살 것 같은데.”

수일의 훈수에 두산이 웃었다.

“그라믄 함 둘러 보든가.”

두산이 수일을 향해 목을 내밀었다.

수일은 얼른 장롱 서랍에서 지리산 국립 공원 지도가 새겨진 파란색 손수건을 꺼냈다. 시장에서 천 원 주고 산 것으로 여름 내내 수일이 잘 두르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걸 허벅지 위에 올려 삼각형으로 접은 뒤 푸른색이 보이도록 둘둘 말았다. 그러곤 두산의 목에 걸쳤다.

두산은 그새를 못 참고 뽀뽀를 해 댔다.

“가만 좀 있어 봐.”

“내 가만있는데?”

이러면서 이번엔 허리를 안았다. 수일은 두산의 방해에도 꿋꿋이 손수건 모양을 잡은 다음, 끄트머리를 두 번 동여매 매듭을 만들었다. 쉽게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당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됐다. 역시 잘 어울려.”

수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두산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그를 거울 앞으로 밀었다. 두산이 이리저리 몸을 돌려 보았다.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포즈를 취했다.

“괜찮지?”

“어. 좋네.”

거울 속 두산이 씨익 웃었다.

해피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볼록한 배가 일정한 속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깨워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두산이 출퇴근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검은색 등산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 나왔다. 수일이 보온병을 내밀자 아무렇게나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해피! 아빠 출근한다!”

고민이 무색하게 두산이 큰 소리로 해피를 불렀다. 수일이 그런 두산의 등짝을 후려쳤다.

“너두 참. 애 자는데.”

하루라도 그냥 가면 안 되는지 꼭 저렇게 깨웠다.

“으차피 절마 종일 잔다 아이가.”

“그래두.”

“해피! 안 일나나?”

집 안이 울리도록 소리치는데 안 일어날 사람 아니 개가 어딨겠는가. 해피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고개만 들어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러다 두산이 출근하는 걸 알아채고는 황급히 일어났다. 맨날 싸우면서도 집을 나서면 아쉬운가 보았다. 수일이 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뛰어오는 해피를 안아 들었다.

“아빠 회사 갔다 오께. 아버지 말씀 잘 듣고 먼 일 있으면 전화하고.”

저놈의 전화하란 말은 빼먹는 법이 없었다.

“네, 아빠. 조심히 다녀오세요.”

수일이 해피 앞발 하나를 들고 대신 대답했다. 아빠란 말에 두산이 좋다고 웃었다.

“아빠 갔다 오께.”

이번엔 수일을 쳐다보며 말했다. 요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서방님 대신 아빠라고 자신을 칭했다. 서방님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어린놈이 아빠라고 하는 걸 듣는 게 영 거북했다. 오래가지 않을 걸 알기에 일단 참았다. 쪽 뽀뽀해 주었다.

“3시에 숙모님 마중 나가는 거 잊지 말구.”

“어. 밥 잘 챙기 묵고. 몸 좀 안 좋다 싶으면 학원 가지 말고 내한테 저나해라.”

“응. 조심히 다녀와요.”

쪽쪽. 뽀뽀를 마친 수일이 이번엔 해피를 들어 두산의 입술에 가져갔다. 두산은 마지못해 해피와 뽀뽀하고는 다시 수일에게 입술을 내밀었다.

“이러다 날 지겠다. 얼른 출근이나 해.”

수일이 두산을 밀었다. 옥신각신 뽀뽀에 뽀뽀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두산이 현관문을 나섰다.

“휴우, 오늘도 지각이네.”

벽시계를 쳐다보며 수일이 중얼거렸다.

분명 여유가 있었다. 보리차를 따를 때만 해도 그랬다. 근무복을 입고 바로 나가기만 했어도, 수일이 손수건을 매 주지만 않았어도, 아니지. 현관 앞에서 뽀뽀만 덜 했어도 정시 출근이 가능했다.

매일 아침이 이런 식이었다. 두산은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세상 여유를 부렸다. 수일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등을 떠밀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두산의 되지도 않는 어리광을 받아 주거나 갑자기 뭐가 생각이 나서 그를 붙잡고 수다를 떨거나 했다. 부족한 게 많은 두산이기에 출근만이라도 제때 시켜 근면 성실한 회사원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출근을 독려하기는커녕 방해하는 꼴이 되었다.

출근이 뭐라고, 두산을 현관문 밖으로 내보내자 수일은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을 해치웠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에 사로잡혔다.

해피가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해피를 도로 별장에 내려 주고 잠이 들 때까지 쓰다듬어 주었다. 배를 만져 주면 무척 좋아했다. 사람처럼 등을 대고 누워 배를 내미는 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수일은 두 손을 모두 이용해서 가슴과 목덜미를 쓸어 주고 머리와 귀도 만져 주었다. 하루에 딱 한 번 있는 기회를 마음껏 이용했다.

해피가 완전히 곯아떨어지자 수일도 부족한 잠을 청하러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수일과 해피가 오전 잠을 자는 동안 이 여사가 출근했다. 오자마자 온 집을 환기시키고 세탁기를 돌렸다. 방과 거실을 청소기로 한 번 쓴 다음 물걸레질을 했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창틀과 문틈, 방문 손잡이까지 광이 나도록 닦았다. 청소하는 사이 다 된 빨래를 베란다에 널고 나면 해피 집 청소에 착수했다.

거실에서 자고 있던 해피는 자기 집 청소를 할 때면 잠에서 깼고,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집 주위를 맴돌았다. 이 여사가 인형과 담요를 꺼내 터는 순간 그녀를 향해 ‘앙! 앙!’ 하고 짖었다. 그 소리에 매번 수일이 깼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피가 짖었고 수일은 이 여사의 출근을 알아차렸다.

단잠을 자 개운할 만도 한데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정말 감기에 걸린 건가. 수일은 예방 차원에서 약국에서 지어다 놓은 감기약을 한 제 먹고 방을 나섰다.

“오셨어요?”

“예.”

이 여사가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답하며 해피 집 청소를 마무리 지었다.

해피가 잽싸게 자신의 기와집으로 들어가 인형들은 잘 있는지, 사라진 물건은 없는지 코를 킁킁대며 확인했다. 수일은 잠깐 쭈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서예 학원에 갈 채비를 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빠진 건 없는지 체크했다. 그러곤 제일 중요한 초대장 뭉치도 잘 챙겨 넣었다.

“해피야, 학원 가자.”

수일이 가방을 흔들어 대자 해피가 기와집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밖에 나가는 걸 알고는 후다닥 달려 나왔다.

해피와 함께 서예 학원에 등원한 지도 어언 두 달째였다. 매번 두고 가기가 안쓰러워 쫓겨날 각오를 하고 데려갔는데, 의외로 어르신들이 좋아했다. 가끔 손주들을 학원에 데리고 오는 어르신들은 해피가 여기저기 오줌을 싸고 다녀도 개의치 않아 했다. 덕분에 해피는 공짜로 서예 학원을 다니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괜히 컨디션이 나쁜 게 아니었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만 되면 수일은 아팠다. 마음의 문제라고 애써 무시했지만, 귀신같이 몸이 안 좋았다.

평소라면 그냥 집에서 쉬었겠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게다가 해피도 저렇게 좋아하지 않는가. 고작 비 때문에 해피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라서 수일은 노란 우비를 입고 자전거에 올랐다. 익숙한 골목을 지나 학원가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는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끌었다.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 뛰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우비 속 크로스 백에 매달린 해피가 낑낑댔다.

“알았어. 내려 줄게.”

수일은 바구니에 넣어 둔 학원 가방을 핸들에 걸고, 가방에서 타월을 꺼내 바구니 바닥에 깐 다음 해피를 그 위에 앉혔다. 해피는 두 발로 바구니를 잡고 앉아 세상 구경에 몰두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해피의 콧구멍이 평소보다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하얀 털에 물방울이 맺혔다.

“좋은 냄새 많이 나지?”

수일도 해피를 따라 킁킁 코를 벌렁거렸다. 비에 젖은 흙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서예 학원 건물 입구에 자전거를 잘 채워 두고 학원 가방을 손목에 꼈다. 거추장스러운 우비도 벗었다. 그런 다음 해피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새 털이 축축했다. 감기 걸릴세라 해피를 안은 채로 털부터 닦아 주었다.

정심서예학원은 집 근처 유일의 서예 학원이었다. 오전 수강생 일곱의 평균 연령은 58세쯤 되는 것 같았다. 수일 덕에 그나마 평균 연령이 많이 낮아졌다. 오후 시간대는 주로 국민학생과 가정주부들이 다녔는데, 최근 들어 컴퓨터 학원이나 영어 학원으로 빠져 전체 원생이 스무 명을 간신히 넘었다. 처지가 비슷한 같은 건물 주산 학원 원장이 가끔 찾아와 신세 한탄을 했지만, 낙천적인 원장은 나날이 줄어드는 원생들 숫자에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오늘도 엘리베이터는 ‘공사 중’이었다. 수일은 해피를 안아 들고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최대한 천천히 올라갔다.

“서울 총각, 내 먼저 간데이.”

언제 왔는지 같은 학원 원생 김 영감이 수일을 지나쳐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우산에서 비가 뚝뚝 떨어졌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오야. 천천히 온나.”

“네.”

수일은 땅딸막한 김 영감의 뒷모습을 보며 잠깐 숨을 돌렸다. 젊은 자신은 계단 몇 개 오르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저렇게 빨리 올라가는지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턱 끝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해피의 코였다. 얼른 가자고 재촉하는 코.

“다 왔어.”

그 소리를 한 다섯 번 할 때쯤 3층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해피를 바닥에 내려 주자마자 빠르게 몸을 털었다.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타다닥 소리를 내며 서예 학원으로 달려갔다. 어르신들이 반갑게 해피를 맞는 소리가 들렸다. 뒤따라간 수일을 보고 알은척을 하긴 했지만, 시선은 작은 생명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운하기보다는 뿌듯했다. 우리 해피가 귀엽긴 하지. 속으로 웃었다.

어르신들과 인사를 마친 해피가 코를 킁킁대며 학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동안, 수일은 학원 가방에서 천 기저귀를 꺼내 모서리마다 깔아 두었다. 기저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물그릇을 놓아두면 해피를 위한 준비는 끝이었다.

평소라면 바로 자기 자리로 가 앉았겠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었다. 수일은 주섬주섬 벼루와 먹이 든 학원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해피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먹을 건 줄 알고 냉큼 달려와 주위를 알짱댔다. 그런 해피를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봉투를 돌렸다. 심장이 어찌나 뛰는지 손까지 덜덜 떨렸다.

“저기 어르신들, 이번 주 토요일 한글날에 잔치를 열어요. 저희 숙모님께서 세종 대왕님을 존경하셔서 매년 크게 잔치를 하시는데요, 마침 해피 생일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돌잔치도 해요. 재미 삼아 초대장도 만들어 봤습니다. 제가 만든 건 아니구, 두산이가요. 애가 참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건다니까요. 그렇게 말렸는데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있죠. 어르신들 시간 되시면 들러서 밥도 먹고 기념품도 받아 가세요. 여기 부페가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LA갈비는 부산에서 최고라네요.”

수일은 준비한 멘트를 속사포처럼 쏟아 내며 초대장을 건넸다. 열이 올라 귀까지 뜨거웠다.

“머라카노? 한 개도 몬 알아듣겠다.”

“귀가 뭇나? 해피 돌잔치 한다 안 카나?”

“머라꼬? 개새끼 돌잔치를 한다꼬? 이야, 세상 말세다 말세야.”

원생 중 가장 불평불만이 많은 이 영감이 혀를 찼다. 그러자 그의 절친 박 영감도 거들었다.

“전국 팔도에 아즉도 굶는 아들이 천지빼까린데, 개새끼한테 잔치를 해 주는 기 말이 되나? 서울 총각 니 그래 살믄 안 된다. 돈이 차고 넘치면 고아원에나 갖다주라.”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그럼에도 수일은 기가 팍 죽었다. 안 그래도 이런 소릴 들을까 봐 1주일째 초대장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더랬다.

사실 수일도 조모가 돌잔치를 제안했을 때 상당히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조모 말에 따르면 일본은 80년대부터 애완동물 붐이 일어서 관련 사업의 규모도 거대하다고 했다. 조모가 사 온 것만 봐도 별의별 게 다 있었다. 강아지 전용 분유와 샴푸, 린스에 치약 칫솔은 평범한 축에 속했고, 전용 침대와 전용 옷, 장신구까지 없는 게 없었다. 간식도 장난감도 심지어 사치품까지 웬만한 어린아이 용품 뺨치게 많았다. 듣자 하니 최근에는 생일 파티도 경쟁이 붙어 제법 화려하게 열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일본 사정이었다. 해피를 자식처럼 키우는 수일이 듣기에도 어딘지 위화감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던 수일은 그녀가 내민 잡지 사진을 보자마자 마음을 사로잡혔다. 사진 속 강아지들이 사람 아이들처럼 고깔모자를 쓴 채 생일잔치를 열었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에게 축하받고 있었다. 사진 속 강아지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저들도 좋은 걸 아나 보다 하고 수일은 생각했다. 안 된다는 소리가 쏙 들어갔다. 퇴근하고 돌아와 뒤늦게 얘기를 들은 두산은 수일이 하고 싶다고 하자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러자고 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요, 어르신. 그러니까, 세종 대왕님이 주인공이고 우리 해피는 깍두기루다가.”

횡설수설 변명했다. 얼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다행히 얼굴이 터지기 전 유일한 여성 원생 공 여사가 수일 편을 들었다.

“고마하소. 영감들이나 술 처먹는 돈으로 고아원에다 갖다주든가 하지 먼 잔소리가 그래 많노. 서울 총각이 어련히 알아서 할라꼬. 공짜 밥 먹기 싫으면 안 가면 된다 아이가. 안 그렇나 해피야?”

해피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아무렇게나 빚은 수제비 같은 귀를 쫑긋 세우며 올려다보았다.

수일은 괜히 안쓰러워 해피를 쓰다듬어 주려 했으나, 수일의 손에 간식이 없는 걸 알고 쌩하니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하여간 눈치 없는 건 두산을 닮았다.

“우리 복수이도 데꼬 가도 되나?”

백구 복순이를 키우는 김 영감이 신경 쓰지 말라고 눈짓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할머님이랑 복순이랑 다 같이 오세요. 강아지들 먹을 음식도 따로 준비하거든요.”

애써 밝게 답하며 교탁에도 초대장을 올려 두었다. 욕을 들어 먹기는 했으나, 이것으로 수일은 자신이 아는 사람 모두에게 초대장을 돌린 셈이었다.

이 노인과 박 노인은 ‘세상 말세다’를 스무 번쯤 외치면서 해피 돌잔치에 대해 투덜댔다. 신문사에 제보해야 한다는 둥, 동네 부끄럽다는 둥 별소리를 다 하는 바람에 수일의 간이 콩알만 해졌다.

다행히 원장이 들어와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그것도 험악하게. 그는 열혈 삼성 라이온즈 팬으로, 정규 시즌 2위를 한 팀의 팬답게 의기양양했다. 마침 해피 돌잔치 날 LG 트윈스와 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번 시즌 6위를 차지한 롯데 팬들에게 그의 야구 얘기가 즐거울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롯데 팬들의 신경을 긁는 소리를 해 대며 삼성 칭찬에 열을 올렸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피 돌잔치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약을 올리는 그가 오늘만큼은 참 고마웠다.

수업은 여느 때처럼 느릿느릿 지나갔다. 수일은 야무지게 팔 토시를 끼고 벼루에 먹부터 갈았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같은 단순한 것만 석 달 가까이 연습하다가 지난달부터 짧지만 문장을 썼다.

원장은 매주 월요일 칠판을 둘로 나눠 한 편에는 수일과 같은 초보자들이 그 주에 연습할 속담 다섯 개를 적었고, 다른 편에는 중급과 고급 과정인 어르신들을 위한 한자 시구를 적었다. 간략하게 뜻을 알려 주면서 어디를 중점적으로 신경을 써야 하고, 어디를 조심해야 하는지 일러 주었다.

다섯 개의 속담을 반복해서 쓸 동안 먹은 총 세 번을 갈았고, 화선지는 실수한 것을 포함하여 모두 열 장을 썼다.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서예를 배운 지 넉 달이 되었다고 제법 반듯한 글자들이 화선지를 가득 메웠다. 뿌듯한 마음으로 마지막 획을 긋고 붓을 내렸다.

수일이 서예에 매진하는 동안 해피는 설렁설렁 교실을 배회하며 혼자 놀다가 어르신들과 놀다가 했다. 그중 유독 김 영감을 좋아해서 매번 놀아 달라고 떼를 썼다. 김 영감님한테서 개 냄새가 나서 친근한가 보았다.

“서울 총각, 니 오늘 콤쀼따 학원 가제?”

학원 가방에 붓과 서진, 다 쓴 화선지를 넣고 있는데 원장이 물었다.

“네.”

“세 시라 켔나?”

“네.”

“그라믄 이것 쫌 갖다 놔라. 전단진데 그짝 아들 중에도 서예에 관심 있는 아들이 안 있겠나.”

이렇게 말하며 서른 장 될까 말까 한 종이 뭉치를 수일에게 건넸다. 일일이 손 글씨로 쓴 전단은 명필이었다. 아이들이 읽지도 않고 버릴 생각을 하니 아까웠다. 몰래 한 장을 빼 두어야지 하며 가방에 조심스레 넣었다.

수일은 집에 안 가려는 해피를 간신히 붙잡아 안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저놈의 엘리베이터는 언제 고치려나.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속으로 투덜댔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자전거 페달을 좀 더 세차게 밟았다. 돌잔치 초대장 때문에 긴장을 했던지라 평소보다 더 배가 고팠고, 해피도 그래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오셨습니까?”

수일은 품에서 파닥거리는 해피를 얼른 내려 주고 신발을 벗었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하여간에 귀신같았다.

“제가 받을게요.”

수일은 안방으로 들어가 무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밥은?

다짜고짜 묻는 말이 늘 이 모양이었다.

“먹어야지. 너는?”

- 내도 묵으러 갈라꼬. 메뉴는?

“지금 막 와서 모르겠어. 잠깐만.”

수일은 킁킁 냄새를 맡았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정확히 무슨 음식인지는 모르겠다. 말을 돌렸다.

“3시에 숙모님 마중 가는 거 잊지 마.”

- 도대체 몇 번을 말하노. 내가 까마귀가, 그거를 까묵게.

“아니, 비 오니까 걱정돼서 그러지. 괜히 급하게 간다고 과속이라도 하면 어쩌나 해서. 길도 미끄럽잖아.”

괜한 말을 하며 살살 두산을 달랬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콧바람이 불었다.

- 알았다. 조심하께.

목소리만 들어도 두산이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참, 초대장은 다 돌맀나?

“그럼. 복순이 할아버지는 복순이도 데리고 오신다 그랬고, 공 여사님도 남편분이랑 같이 온다 그랬어.”

- 잘됐네. 그 머꼬….

“사장님, 식사하러 오이소.”

두산이 뭔가 더 말하려는데 이 여사가 불렀다.

“네. 나가요. 나 밥 먹으러 가. 너두 맛있게 먹어.”

- 에헤이, 내 아직 말 시작도 안 했는데.

“이따가 해. 밥 식어.”

- 알았다. 그라믄 밥 다 묵고 삐삐 치라.

“응.”

수일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주방으로 나갔다.

이 여사의 손에 해피 밥그릇이 들려 있었다. 점심은 사료였다. 사료도 좋다고 해피는 꼬리를 흔들어 대며 제 밥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일의 점심 메뉴는 열무비빔밥과 된장찌개였다. 갖은 나물과 열무김치 위에 계란후라이를 얹고 참기름을 두른 덕에 먹음직스러웠다. 두부며 호박이 가득 든 된장찌개도 냄새가 기가 막혔다. 절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열무김치가 아직 남았나 봐요?”

수일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이게 끝입니다.”

“아….”

“맛있게 드이소.”

“네. 여사님도 맛있게 드세요.”

수일이 숟가락을 들자 이 여사도 점심을 먹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중고기는 해도 두산이 넣어 준 TV와 라디오가 있고, 덮고 잘 이부자리 한 쌍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이 여사는 밥을 먹거나 쉬는 동안 방에서 유선 방송으로 드라마 재방송 보는 걸 좋아했다. 평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그녀가 유일하게 크게 웃거나 혀를 차거나, 욕을 하는 시간이었다. 본인은 소리가 밖에 들리는 걸 모를 정도로 드라마에 심취했다.

아주 가끔 혼자 먹기 적적하단 생각을 하다가도 배우들의 목소리와 이 여사의 추임새가 들리면 괜찮아졌다. 게다가 ‘챱챱, 쩝쩝. 까드득.’ 소리를 내며 그릇에 고개를 박고 얼굴로 밥을 먹는 해피도 있지 않은가.

고추장을 한 숟갈 퍼 넣고 된장찌개도 한 숟갈 보태 밥을 비볐다. 자신은 이제 시작인데 어느새 사료를 다 먹은 해피가 밥상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말이 점심이지 구색을 갖추기 위해 아주 적은 양을 주기 때문에 아쉬울 만도 했다. 해피가 수일을 올려다보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수일은 이때만큼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수일이 반응이 없자 해피는 별장으로 가는 대신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베란다 밖을 쳐다보았다.

수일은 놓았던 숟가락을 다시 집어 들고 밥을 마저 비볐다.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천천히 재료들을 음미하며 꼭꼭 씹어 먹었다. 예전처럼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두산이 걱정하지 않을 정도, 즉 한 그릇은 거뜬히 비웠다.

집에 가만히 있을 때는 반 그릇도 비우기 어렵더니, 밖으로 나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식욕이 부쩍 늘었다. 수일의 회복을 제일 반긴 건 두산이 아니라 의외로 이 여사였다. 두산이 어찌나 성화를 부렸던지, 매 끼니를 고심해서 만들던 이 여사가 한시름 놓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괜히 미안해서 요새는 웬만하면 밥을 남기지 않았다.

원래라면 개수통에 다 먹은 그릇들을 넣고 식탁을 정리했겠지만 이 여사는 자신의 영역에 손대는 걸 무척 싫어했다. 안 그래도 할 일도 많지 않은데 자기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대놓고 말했다. 그다음부터 수일은 절대 그녀가 할 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산 적이 있어야 말이지.

수일은 여전히 불편한 마음으로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수건을 들고 해피에게로 다가갔다. 사료를 먹어 아무것도 묻은 것이 없는데도 잔소리를 했다.

“넌 왜 입이 있는데 얼굴로 밥을 먹니?”

두산을 흉내 내며 해피 얼굴을 닦았다. 두산은 입 대신 ‘주디’라는 사투리를 썼지만, 아무튼 잔소리의 내용은 같았다.

수일은 조심조심 입 주위를 닦고, 사료 찌꺼기를 털었다. 해피가 귀찮은지 후딱 일어나더니 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운했지만 귀찮을 만도 하다고 애써 합리화하며 아무것도 묻지 않은 수건을 털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잠잠하던 바다도 제법 사나워졌다. 숙모님은 지금쯤 배를 탔으려나. 멀미로 고생하지는 않으시려나. 추석 때도 이것저것 많이 사 오셨는데 설마 이번에도 사 오진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다 서재로 갔다.

갈 수 있는 방이 많아서 참 좋았다. 잠자는 방 따로, 옷 입는 방 따로, 책 읽는 방 따로. 노래 부를 수 있는 방까지 다 따로 있었다. 평생 단칸방 신세였던 수일이 꿈조차 꾸지 못했던 삶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꿈속에서 살고 있었다.

서재에서 책 냄새가 물씬 풍겼다. 폐업하는 비디오방에서 대량으로 구매한 무협지와 만화책을 필두로 문학 전집 수백 권, 올 컬러로 된 어린이 동화책 수십 권, 그리고 두꺼운 백과사전까지 없는 게 없었다. 수일이 텅 빈 책장을 보며 ‘책 좀 살까?’라고 말했더니 두산이 이렇게나 가득 채워 주었다.

두산은 만화책 몇 권만 뒤적거렸을 뿐 책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다 수일을 위한 책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수일도 독서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었다. 어릴 때는 그 나름대로 문학 소년이었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책과 멀어졌다. 한번 멀어졌더니 다시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았다. 집중력도 무척 낮아서 어린이용 동화책이나 한 권 읽을까 말까 했다. 그래도 책이 좋았다. 수일은 손때가 묻을세라 바지에 손바닥을 닦은 다음 유리 장을 열어 책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킁킁, 책 냄새를 맡았다.

유리에 비친 남자는 살이 좀 붙어 예전보다 볼만했다. 두산처럼 씨익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아직은 아니었다. 수일은 마음이 편해졌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게 어려웠다. 거울이 아니라서 다소 왜곡돼 보이는 남자는 자신이면서도 다른 사람 같았다. 아주 볼품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두산의 말처럼 잘나 보이지도 않았다.

수일은 만화책을 끼고 누워 한량처럼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시간이 참 잘 갔다. 깜빡 졸기도 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만화책 몇 장을 넘기다가 했다.

어느새 컴퓨터 학원에 갈 시간이었다. 먹이 묻을까 봐 저렴한 옷을 입고 가는 서예 학원과 달리 컴퓨터 학원을 갈 때는 깔끔한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었다. 팔 토시도 한 묶음에 천 원짜리인 것 대신 면으로 된 좋은 걸 챙겼다. 혹시 몰라 돌잔치 초대장도 한 묶음 집었다.

하여간 손도 참 컸다. 사람도 아닌 강아지 돌잔치 초대장을 오백 장 찍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은아 씨와 이 여사를 포함, 열 장을 간신히 돌린 수일과 달리 두산은 150장을 회사와 협력 업체에 뿌렸고, 100장은 현수를 포함 유흥업소 식구들과 지인들에게 뿌렸다. 남은 건 조모가 처리했다. 조모는 초대장이 부족하다며 전화로 투덜대기까지 했다. 두 사람 모두 그만큼 돌릴 수 있는 지인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설사 부산이 아닌, 나고 자란 서울이라 해도 수일은 열 장도 채 돌릴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여기니까, 학원이라도 다니고 은아 씨라도 있으니까 열 장이라도 나간 거였다. 초대장이 뭐라고 마음이 참 싱숭생숭해졌다.

옷을 차려입고 거실로 나가자 해피가 카펫 위에 서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라도 들리는 건지 귀를 쫑긋 세웠다. 수일은 작고 하얀 강아지의 뒷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몰래 몇 분을 더 훔쳐보다 갈 채비를 마쳤다.

수일이 현관으로 가 구두를 챙겨 신자 해피가 후다닥 다가왔다. 꼬리를 흔들며 올려다보던 해피는 수일의 손에 서류 가방이 들린 걸 보고 실망한 눈치였다. 서예 학원은 수일과 함께 가도 된다는 걸 알지만, 컴퓨터 학원은 안 된다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았다. 천재였다. 그래도 축 처진 뒷모습을 보니 미안해서 수일은 해피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삐진 해피는 수일을 곁눈질하기만 할 뿐 배웅하지는 않았다.

컴퓨터 학원은 비싼 장비가 있어서 음식도 음료수도 반입 금지였다. 하물며 아무 데나 오줌을 싸고 처음 보는 건 무조건 이로 깨물어 보는 강아지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 전에도 해피는 두산이 새로 산 나이키 슬리퍼를 이로 물어뜯었더랬다.

“해피야, 아버지 간다.”

이번에도 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흰자가 많이 보이는 걸 봐선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수일은 바지 주머니에서 간식을 꺼냈다. 일부러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자 심드렁하던 해피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왔다. 수일은 쭈그리고 앉아 해피가 보는 앞에서 간식 봉지를 깠다.

“해피야, 아버지 얼른 갔다 올게. 이거 먹고 조금만 놀구 있어.”

해피가 꼬리를 흔들었다. 입에 간식을 물려 주자 잽싸게 소쿠리로 갔다. 아까와 달리 뒷모습이 신나 보였다. 마음이 편해졌다.

“여사님, 저 컴퓨터 학원 다녀올게요.”

“예. 조심히 다녀오이소.”

비가 내리는데도 아파트 단지는 오가는 주민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비를 맞으며 신나게 뛰어다녔고, 삼삼오오 모인 주부들은 또래 주부들과 수다를 떨었으며,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무리를 지어 운동 중이었다.

수일은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무조건 인사했다. 자기를 알든 모르든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아요.’라든가, ‘벌써 가을이에요.’, ‘하늘이 참 맑아요.’ 같은 말을 하면서. 사교성 없는 수일이 이러는 이유는 두산 때문이었다.

두산은 수일과 함께 다닐 때마다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다가 수일을 소개하고 해피를 소개했다. 선거에 나갈 것도 아니면서 어찌나 사람들에게 알은체를 하던지, 처음에는 창피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수일도 어느새 그를 따라 하게 되었다.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젊은 주부들은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며 수일에게도 말을 걸어 주고 해피를 귀여워해 주는 반면, 조모나 이 여사 또래의 사모님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충 인사만 받았다. 해피한테는 늘 한 입 거리 운운하며 개새끼 취급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인사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놈의 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모른 척하긴 그래서 가볍게 눈인사만 했다.

해피랑 있을 땐 괜찮더니 홀로 남게 되자 과거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어서 괴로웠다. 아까는 우비를 입고 자전거까지 탔으면서 지금은 그보다 가까운 컴퓨터 학원까지 걸어갈 힘도 없었다. 수일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오들오들 떨면서 길을 걸었다.

그러다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두산에게 삐삐 친다는 걸 깜빡했다. 부스로 들어가 두산에게 음성을 남겼다. 목이 메어 동전 몇 개를 날리고서야 간신히 제대로 된 음성을 남길 수 있었다.

“미안 두산아. 밥 먹구 바로 잠이 들었지 뭐야. 숙모님 마중 시간 맞춰 나가고, 갈 때 집에 들러서 해피도 데리고 나가. 비 오니까 운전 조심하구. 아 참, 오늘 점심은 열무비빔밥하구 된장찌개였어.”

수일은 고작 비 때문에 움츠러드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신경 써서 걷지 못한 탓에 애써 차려입은 바지 밑단에 뻘이 튀었다. 그게 뭐라고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한껏 우울해진 상태로 학원 로비로 들어섰다.

로비 테이블에 놓인 전단을 보자마자 원장의 부탁이 생각났다. 서류 가방에서 서예 학원 광고 뭉치를 꺼내 내려놓았다. 서예 학원 전단 옆에는 본원에서 만든 컬러 광고지가 놓여 있었는데, 원장이 쓴 손 글씨가 다른 의미로 눈에 띄었다. 명필임에도 어딘지 초라해 보였다.

갑자기 화가 났다. 왜 노력해서 쓴 전단이 초라해 보이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의미를 부여했다. 수일은 서예 학원 전단이 초라해 보이는 게 싫어서 학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컬러 전단을 모두 집어 자신의 서류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랬더니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더는 서예 학원 전단이 초라해 보이지 않아서 기뻤다.

이걸 보고 서예 학원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혹시 몰라 3시 수업을 듣는 동료 원생들의 책상에도 돌잔치 초대장과 함께 한 장씩 올려 두었다.

“햄, 일찍 왔네요.”

국민학교 5학년생 이지훈 군이 교실 안으로 들어서며 수일에게 말을 걸었다.

매일 1등으로 출석하는 지훈은 방년 12세로 컴퓨터를 켤 줄도 몰랐던 수일에게 켜는 방법을 알려 주면서 친해졌다. 알고 봤더니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럭키약국 막내아들이었다. 어린이용 빨간색 뿔테 안경을 낀 통통한 지훈은 생긴 것답게 똘똘했다. 또래보다 작을 뿐이지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 건 두산보다 어른스러울 때가 많았다.

“아, 이것 때메 일찍 왔구나.”

지난주에 먼저 초대장을 받았던 지훈은 다른 사람의 책상 위에 놓인 초대장을 보며 웃었다.

“해피는 좋겠다. 햄 같은 멋진 아버지가 있어서.”

이러면서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지훈의 말에 수일은 조금 전 자신이 한 짓이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졌다. 분명 뿌듯했었는데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햄, 어디 아파요? 얼굴이 영 안 좋아 뵈는데?”

“아냐. 비가 와서 그른가 좀 처지네.”

“감기 아니에요?”

“그런가.”

수일은 대충 얼버무리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우우웅, 커다란 소리를 내며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컴퓨터 교재를 꺼내다 쑤셔 넣은 전단이 따라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손이 떨려 안경집도 간신히 꺼냈다. 녹음기는 포기하고 말았다.

강의 녹음은 지훈이 알려 준 방법이었다. 비싼 강의를 한 번만 듣는 건 너무 아깝지 않냐며, 자기는 녹음해서 돌려 듣는다고 했다. 그길로 수일도 중고로 녹음기를 장만했다. 강의 시간에 강사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던 수일은 집에 돌아가서 녹음한 걸 들으며 두세 번씩 복습했고, 그 덕에 반절은 알아먹을 수 있었다.

가끔 녹음이 망하면 지훈이 빌려주기도 했고, 반대의 경우 수일이 빌려주기도 해서 어느새 둘도 없는 학원 동무가 되었다.

“햄 녹음기 갖고 오는 거 까먹었어요?”

지훈이 작게 속삭였다.

“어? 응… 깜빡했어.”

“괜찮아요. 내가 녹음해서 빌려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수일은 행여 지훈이 볼세라 가방을 꼭 잠갔다. 머리가 멍했다. 교실로 사람들이 들어와 초대장을 보고 한마디씩 던졌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지훈이 대신 대답해 주는 걸 보고도 고맙단 말도 하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참 좋지요?”

강사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비가 오면 다들 우울하다꼬 하는데, 실은 공부하기 참 좋은 날씹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바로 수업 시작합시다!”

그는 거침없이 책을 펼쳤다. 칠판에 오늘 배울 주제를 큼직하게 쓴 뒤, 딱 소리 나도록 분필을 꺾었다.

수일은 바짝 긴장했다. 괜히 입이 마르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뭐라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강사가 시키는 대로 타자를 치고, 글자들을 뿌려 대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허둥댔다. 3시간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햄, 선생님들한테 돌릴 초대장도 갖고 왔어요?”

“어?”

“해피 돌잔치요. 아까 교실에 돌렸던 거.”

“아. 그거. 가져왔지.”

수일은 가방을 열려다가 아차 싶어 등을 돌렸다. 이 와중에 돌잔치 초대장을 돌리겠다고 가방을 뒤지는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못난 아버지라도 아버지였다.

“햄, 몸도 안 좋아 뵈는데 내가 돌릴게요. 햄은 앉아서 쉬고 계세요.”

지훈은 열 장 남짓한 초대장을 쥐고 강사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들! 저는 화목 3시 반 수업을 듣고 있는 이지훈이라고 합니다.”

지훈이 자기소개를 하는 목소리가 로비에까지 들렸다. 어린 녀석이 어찌나 싹싹하게 말을 하고 초대장을 돌리는지 대견했다.

아까 분명 몽땅 집어서 가방에 쑤셔 넣었는데, 어느새 컬러로 프린트된 컴퓨터 학원 전단 뭉치가 다시 올려져 있었다. 수일이 그토록 신경 써서 올려 두었던 서예 학원 전단은 사라지고 없었다. 기분이 묘했다.

“햄, 가요!”

수일은 무기력하게 지훈을 따라 학원을 나섰다. 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초대장을 대신 돌려 준 지훈에게 감사의 뜻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극구 만류하는데도 과자도 한 봉 들려 주었다. 수일은 입맛이 없어 나란히 걷기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그걸 깨려고 지훈이 애쓰는 게 미안해서 수일은 돌잔치 얘기를 꺼냈다. 그것 말곤 당장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훈아.”

“예. 햄.”

“니 생각에도 강아지 돌잔치가 이상하니?”

“내도 이런 거는 첨이라 잘 모르겠는데요. 근데 우리 엄마가 미칬다고 하긴 했어요.”

죠스바를 쭉 빨며 지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미쳤대?”

“예. 근데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엄마는 다 미칬다고 하거든요. 아빠도 미칬고 내도 미칬고 우리 햄이랑 누나도 미칬고. 자기 빼고 다 미칬다 해요.”

“아… 그렇구나.”

지훈이 흘러내린 빨간 안경을 가운뎃손가락으로 쓰윽 올렸다.

“너 친구 없다 그랬나?”

“있긴 있어요. 두 명.”

“걔들한테도 말했어?”

“예.”

“친구들은 뭐래?”

“거기 부페 간다니까 부럽다 카든데요.”

어느새 새파래진 입술로 또박또박 답했다.

“그것 말구. 강아지 돌잔치에 대해선 뭐라 안 그래?”

“해피 돌잔치 한다고 하니까 해피가 누구냐고 묻기는 했어요. 햄, 거기 엘에이 갈비 나오는 거 맞죠?”

아이라 그런지 온통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수일은 피식 웃었다.

“응. 부모님이랑 형이랑 누나도 같이 와도 돼. 친구들 데려와도 되고.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몸만 오구.”

몸만 오라는 말을 하자마자 지훈이 별소릴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수일을 올려다보았다.

“에이, 어떻게 몸만 가요. 내가 해피 선물 하나 샀어요.”

쪼그만 게 맹랑했다.

“니가 돈이 어디 있어서.”

“저 돈 많아요.”

배까지 내밀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귀여워서 잔소리하지 않기로 했다.

“좋겠다.”

“햄도 일해서 벌면 되죠. 기운 내세요.”

“…그래.”

열두 살짜리에게 기운 내라는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걱정하는 지훈에게 나도 바지 사장이긴 해도 레코드 가게랑 노래 연습장 사장이라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솔직히 가게들은 개업식 때 가 본 게 다였고, 그나마 레코드점은 집과 가까워 오가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햄 오늘은 쫌 알아들었어요?”

“아니, 뭐. 그냥.”

지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갈림길에 다다랐다.

“녹음테이프 복사해서 내일 학교 가는 길에 우편함에 넣어 놓을게요.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하세요. 밤 9시까지는 괜찮아요.”

“그래. 고마워.”

“햄. 내 가요.”

“응. 토욜 날 보자.”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헤어지기 전, 지훈은 허리를 반이나 접어 크게 인사했다. 햄이라 부르며 격 없이 대할 땐 언제고 헤어질 때만 되면 저러는 게 웃겼다. 수일은 지훈의 작은 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섰다가 발길을 돌렸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비가 잦아들어 우산을 쓴 사람 반 안 쓴 사람 반이었다. 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중고등학생 무리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지나갔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아이들은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그들 사이에 퇴근하는 가장들도 하나둘 보였다.

이 시간이면 나이트로 출근 준비를 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옷차림만 보면 회사원과 다를 바 없었다. 서류 가방 안에 든 컴퓨터 책도, 남들과 같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문득 낯설었다.

애써 담담하려 해도 이럴 때면 코끝이 찡해졌다.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새삼스러웠다. 외양이야 어떻게든 흉내 낼 수 있지만, 매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흉내 낸다고 될 것이 아니었다. 맞는 것보다 굶는 것이 무서웠고, 아픈 것보다 병원비가 무서웠던 수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두산이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조모가 호들갑을 떨며 수일을 맞을 것이고, 해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힐끔 쳐다볼 것이다. 부스럭 소리를 내면 꼬리를 흔들겠지.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웃음이 났다.

그런데 마음이 무거웠다. 구겨진 전단이 가득한 이 가방을 버리면 마음이 가벼워질까, 구차하고 비겁했던 자신의 행동이 없던 일이 될까. 수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걸어서 오늘 중으로 집에 가겠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 왔는지 두산이 앞에 서 있었다.

“왜 나와 있어?”

수일은 두산이 반가워 웃었다.

“올 때가 됐는데 하도 안 와서 나와 봤지.”

“어련히 알아서 가려구.”

“알아서 안 온께나 문제 아이가. 다리 아프나?”

두산이 턱으로 다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 그냥 날씨가 너무 좋아서 천천히 걸었어.”

컴퓨터 강사처럼 말했다.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두산이 다가와 수일에게서 가방을 낚아채려 했다. 수일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가방을 꽉 쥐었다. 두산이 잠깐 멈칫하다가, 가방을 한 번 쳐다보고 수일을 쳐다보았다. 수일이 방심한 사이 휙, 힘들이지 않고 제 손에 쥐었다.

“묵직하네.”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가방 없는 팔로 수일의 어깨를 안았다. 수일은 가방을 좇았다. 저도 모르게 두산의 눈치를 살폈다. 조모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어색한 침묵이 계속 이어질 뻔했다.

“참, 숙모님은?”

“해피하고 놀고 있다.”

“이번에도 많이 사 오셨어?”

“말도 마라. 와 비행기 안 타고 배로 오나 했드만은 박스가 열 개가 넘는다. 보따리장수도 아이고. 나 참.”

두산이 혀를 찼다.

“뭘 또 그렇게 사 오셨대.”

“몰라. 아직 뜯어 보도 몬했다.”

보나 마나 해피 용품이 반절은 넘을 터였다.

뭔 개새끼를 키우냐며 탐탁지 않게 여기던 조모는 수일의 병간호를 자처하며 두 달 정도 같이 살았다. 그때 해피에게 홀딱 빠졌다. 해피 발이 땅에 닿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물고 빨고 안고 다녔다. 해피는 그다지 조모를 좋아하지 않는 듯했으나, 조모가 간식이며 먹을 걸 끊임없이 주는 걸 알아채자 그녀에게 충성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400g이나 쪄서 살을 빼는 데 두 달 가까이 고생했더랬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찌려나.

사실 수일은 해피가 통통한 것이 좋았다. 아이들도 통통해야 귀엽듯이 강아지도 통통해야 보기 좋았다. 근데 제일가축병원 원장은 정기 검진을 갈 때마다 해피 몸무게가 불어 있으면 잔소리를 했다. 강아지도 고혈압이나 당뇨병에 걸린다, 심장병도 생길 수 있고 암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게 다 몸무게 탓이다, 라고 하는데 겁을 집어먹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엘리베이터에 둘만 있자 두산이 뽀뽀를 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구.”

“우리 둘밖에 더 있나.”

이러면서 다시 또 쪽쪽 뽀뽀를 하는 것이었다. 수일도 싫지는 않아서 가만 입술을 내밀었다. 제일 꼭대기 층에 사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둘은 느긋하게 입을 맞추고 눈을 마주 보았다.

“비 와서 기분이 안 좋나?”

“안 좋을 게 뭐가 있어. 그냥 빈데.”

수일은 속에 없는 말을 했다.

“그래. 고작 비 아이가. 비가 오면 우산 쓰면 되고, 우산 못 쓸 정도면 자가용 타면 되고, 그래도 안 되겠으면 집에 있으면 되지.”

“…응.”

“밖에 나갔는데 기분이 영 별로면 고마 집에 온나. 억지로 뭘 할라꼬 하지 말고.”

말하지 않아도 두산이 알았다. 수일은 그런 그가 고맙고 또 미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 정신을 차리자고, 어른답게 굴자고, 사람답게 살자고 다짐할 뿐이었다. 두산을 꼭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등을 토닥였다.

등을 쓸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더니 엉덩이를 쥐었다. 하여간에, 무드가 참 없었다.

“지금은 안 돼.”

수일은 그새 부풀어 오른 두산의 앞섶을 툭 쳤다. 두산이 ‘헉’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혔다.

“거를 때리면 우짜노? 자극되그로.”

“애국가라도 불러.”

띵, 소리와 함께 수일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두산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따라 나왔다. 수일이 눈치를 주자 그제야 가방으로 대충 가리는 시늉을 했다. 조모 보기 민망하지도 않나, 속으로 투덜대며 현관문을 열었다.

집을 잘못 찾아왔나 했다. 입구부터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이민 가방 크기의 박스만 다섯 개가 넘었고, 라면 박스 크기의 자잘한 것들이 일곱 개 정도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뭘 이렇게나 많이.”

입이 떡 벌어졌다.

“너두 참, 좀 치워 두지.”

괜히 두산에게 투덜댔다.

“으차피 뜯을 건데 만다꼬.”

수일은 구두를 벗고 박스들을 비집어 겨우 안으로 들어섰다.

“수일이 왔나?”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조모가 수일을 맞았다.

“네. 숙모님. 오시느라 힘드셨죠? 뱃멀미는 안 하셨어요?”

“어. 잘 왔다. 자고 일났더니 부산이드라.”

조모는 여독으로 피곤할 만도 하건만 내색하지 않고 쌩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들은 갈수록 인물이 훤하네.”

수일을 아들이라 부르며 조모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수일을 볼 때마다 안아 주고 뽀뽀도 해 주던 조모는 두산을 보고 버둥거리는 해피를 어떻게든 품에 안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수일은 웃음이 났다.

“아 쫌 내리나라.”

“머를 내리나. 좋다고 안겨 있는 거 안 보이나?”

조모가 해피를 뺏길까 봐 뒤로 숨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두산이 성큼 다가가 조모 손에서 해피를 뺏어서 바닥에 내렸다. 해피는 재빨리 몸을 턴 뒤, 잡힐세라 후다닥 자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해피야. 이리 온나. 할매가 까까 주께.”

조모는 눈으로는 두산을 흘겨보면서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해피를 불렀다.

“까자는 무슨. 저녁 무야지.”

“아. 맞네.”

저녁 소리에 조모가 반색했다. 미리 메뉴를 정해 뒀는지 냉큼 전화기를 들더니 수일에게 물었다.

“아구찜 시킬 건데 개안나?”

“네. 저는 좋아요.”

“내가 마산 실비집 아구찜이 으찌나 묵고 싶던지 꿈에도 나왔다 아이가.”

4일 전에도 드셨다고 하려다 수일은 입을 다물었다.

“조모, 시키는 김에 낙지볶음하고 탕도 같이 시키라.”

“오야. 집에 소주 있나?”

“어.”

“맥주는?”

“있지.”

조모가 신이 난 목소리로 주문을 하는 사이 수일은 서재에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두산이 쪼르륵 따라 들어오더니 뒤에서 끌어안았다. 쪽쪽,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

“에헤이, 가만 쫌 있으라.”

“간지럽대두?”

“니 좋으라꼬 이란다 아이가.”

능글맞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좋기는 했다. 쪽쪽, 목덜미를 따라 귓불까지 도장을 찍은 두산은 수일의 어깨에 턱을 괴고 수일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게롭히는 아들은 없었고?”

“내가 애야? 누가 괴롭히게.”

“아니, 니한테 말 걸고 하는 새끼는 없었냐꼬. 거 대학생도 있다메?”

“아. 말 거는 사람? 있었지.”

“누구?”

두산이 순식간에 고개를 들더니 수일의 몸을 홱 자기 쪽으로 돌렸다. 수일은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다잡았다.

“누구??”

묻는 두산의 표정이 제법 심각해 보여 수일은 웃었다. 좀 더 놀려 줄까 싶었지만, 두산의 질투심이 어떤지 아는지라 시작도 하기 전에 끝냈다.

“이•지•훈•.”

“하, 그 새끼 안 되겠네.”

지훈의 이름을 듣자마자 두산은 금세 풀어져 실실 웃었다.

“너도 알다시피 수업 시간에 말 시키고 할 틈이 어딨니? 진도 따라잡기도 버거운데.”

“건 글타.”

그러더니 수일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예쁘긴 참 예쁜데. 쯧, 아이다.”

하며 뒷말을 생략했다.

수일은 손바닥으로 두산의 볼을 툭 쳤다.

“너한테나 예쁘지.”

발뒤꿈치를 들어 입 맞췄다. 두산이 좋다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수일은 그 모습이 좋아서 또 쪽쪽 뽀뽀를 해 주었다. 두산의 광대가 치솟았다. 은근한 눈길로 수일을 내려다보며 두산이 수일의 셔츠 단추를 마저 풀었다. 안에 입은 흰색 메리야스를 보고는 두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것 쫌 입지 마라. 영감님도 아이고.”

“이런 거라니. 원래 남자들 입으라고 나온 거야. 드라마 봐도 회사원들은 다 이렇게 입더라, 뭐.”

“중년 아재들이나 그래 입는다. 팔 있는 면티 입으라. 내가 사 놨다 아이가.”

“그건 웃옷이구.”

“하아. 답답네. 니는 우째 옷을 입을 줄을 모르노?”

“어이없어. 사람들이 나더러 옷 잘 입는다고 얼마나 칭찬하는데.”

두산과 티격태격하는데 조모가 방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 금송아지 숨기 놨나? 와 이리 안 나오노?”

“와?”

밖으로 나가면 될 걸 두산은 선 채로 큰 소리로 되물었다. 귀가 따가웠다.

“퍼뜩 실비집 갔다 온나. 배고프다.”

“알았다.”

두산이 퉁명스레 답했다.

“내가 그거를 찢어 버리든가 해야지 안 되겠다.”

두산은 수일의 메리야스를 노려보며 방을 나섰다.

메리야스가 어때서.

투덜대며 편한 추리닝을 걸치고 바지도 세트로 된 걸로 갈아입었다.

조모가 사 온 박스들을 잊었던 수일은 거실로 나가자마자 시야를 가로막는 그것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당장 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손댄 걸 알면 두산이 잔소리할 게 뻔했다. 잔소리를 참아 내느냐 아니면 답답함을 견디느냐 고민하며, 미련을 못 버리고 근처를 맴돌다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해피 집 앞에서 쭈쭈 소리를 내던 조모는 수일을 보자 ‘끙’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새끼는 한번 드가면 나오지를 않네.”

“오늘 좀 피곤한가 봐요.”

“지가 머가 피곤하노. 가만 안기 있으면 되는데.”

조모는 혀를 찼다.

“그나저나 뭘 저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많기는. 박스만 크지 안에는 별거 안 들었다.”

“추석 때도 많이 사 오셨으면서.”

“그거는 추석이고.”

추석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는 걸 조모는 잊었나 보았다. 저게 다용도실에 다 들어가려나. 수일은 가늠해 보았다.

“상 피자.”

“네. 제가 할게요.”

수일은 커다란 밥상을 가져와 거실 가운데 폈다. 조모가 자연스레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고, 수일은 그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바람이 선선하니 참 좋다. 그쟈?”

“그르게요. 추석 때는 더웠던 것 같은데.”

“맞다. 하필 찌짐 부칠 때 비가 와 가지고 문도 제대로 몬 열고. 억수로 후텁지근했다 아이가.”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추석을 떠올렸다.

설 때는 수일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조용히 보냈다가 추석 때야 비로소 셋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차례 음식을 만들고 송편과 만두를 빚었더랬다. 이른 추석인 데다 추석 전날 비가 오는 바람에 공기가 텁텁했었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비 냄새와 다른 집에서 올라오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세 사람도 부지런히 수다를 떨고 음식을 장만했었다.

과거의 아픈 일들을 웃으며 반추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으면서 별일 아니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현재를, 다가올 미래를 기약하며 서로에게 달콤한 약속을 주고받았다. 그다지 덥지 않았는데도 불 앞이라 더웠는지 두산은 추석 다 지나서 거실에도 에어컨을 달았고, 수일은 돈 낭비라고 두산을 구박했다.

“내년 추석 때는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수일은 거실에 달린 벽걸이 에어컨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거는 또 언제 달았노?”

“연휴 끝나자마자 바로요.”

“하여간에, 두사이 저 새끼 뒷북치는 거는 알아주야 된다. 뭐, 덕분에 내년에는 쾌적하겠네.”

둘은 1년이나 남은 추석이 바로 코앞인 양, 에어컨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요란하게 차임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이 장난을 할 사람은 두산밖에 없었다.

“아이그, 저 새끼 저거 언제 철들겠노?”

조모가 한숨을 푹 쉬었다.

수일이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두산이 큰 소리로 ‘배달 왔습니다’ 했다. 자기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해피가 두산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달려 나와 꼬리를 흔들었다.

“식사하입시다!”

두산은 철가방을 거실까지 들고 와 그 안에서 아귀찜과 낙지볶음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조모가 아귀탕을 냄비에 옮겨 담고 가스레인지에 올리는 동안 수일은 수저를 준비하고 사람 수에 맞게 밥을 펐다. 셋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일사불란하게 자기 몫의 일을 찾아 움직였다. 해피도 타다닥 발소리를 내며 두산을 따랐다가 조모를 따랐다가 했다. 수일은 이런 사소한 순간에 자꾸만 목이 멨다. 누구 하나 눈치를 주지도 않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안정된 일상이 새삼스러웠다.

“해피 저녁은 뭐 줄 거야?”

“사료 맥이야지.”

“우리는 맛난 거 먹는데 해피만 어떻게 사료를 줘.”

“으차피 조모가 간식 줄 거 아이가.”

“그래두.”

“간식만 주겠나.”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수일은 괜히 미안해서 해피 밥그릇에 사료가 담기는 걸 시무룩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해피도 시무룩해 보였다.

그것도 잠시, 셋이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귀찜과 낙지볶음을 먹는 순간 해피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도 먹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맛있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부지런히 밥 위에 올려 먹고 비벼 먹었다. 아귀탕이 팔팔 끓자 두산이 냄비째로 가져왔다. 뜨거운 국물을 그릇에 담아 배급했다. 매콤한 아귀찜과 낙지볶음에다 맑은 아귀탕으로 입가심했다.

“자, 건배하자 건배.”

조모가 맥주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해피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조모가 선창했다.

“해피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두산과 수일이 재창했다.

세 사람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도 꿀맛이었다. 배가 부를까 봐 한 모금씩 홀짝이는 수일과 달리 두산과 조모는 벌써 한 잔을 다 비우고 소주로 옮겨 갔다.

낮은 TV 소리와 바람 소리, 까드득 까드득 해피가 사료 먹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조용히 밥만 먹는 세 사람을 에워쌌다. 가끔 조모가 ‘억수로 맛있네, 그쟈?’라고 물으면 수일과 두산이 ‘그렇다’고 답했고 ‘낙지볶음도 맛있다.’ 하면 또 수일과 두산이 ‘그렇다’라고 답하는 게 다였다.

조모는 어느새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다시 밥 한 공기를 담았다.

“내도.”

두산이 밥그릇을 내밀었다.

“수일이 니는?”

“저는 괜찮아요.”

수일은 아직 반 이상 남은 밥그릇을 들어 보이며 마다했다. 조모와 두산이 안쓰러운 시선으로 수일을 바라보았다.

“언제 두 공기를 묵겠노. 걱정이다 걱정이야.”

“그래도 요새 마이 좋아짔다. 설에는 반도 몬 무따 아이가.”

“맞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안 켔나. 언젠가는 좋아지긌지.”

열심히 먹는다고 먹었는데 두 사람의 성에 차지 않은가 보았다. 수일은 보란 듯 숟가락 그득 밥을 퍼 입에 넣었다.

사료를 다 먹은 해피가 밥상 주위를 배회하다가 조모 곁에 붙었다.

“이거 물에 씻어 주면 안 되나?”

말과 동시에 조모는 아귀 한 덩이를 떼서 물에 씻었다.

“주지 마라!”

“물에 씻어서 개안타.”

“개안키는. 먹으면 즉사! 저거 안 보이나?”

“그래서 씻었다 아이가.”

두산과 조모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해피만 안달이 났다. 급기야 상에 앞다리를 턱 하니 올려 서기까지 했다.

“숙모님, 해피 간식 주면 돼요. 제가 간식 챙겨 올게요.”

수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이미 물에 씻은 아귀를 해피에게 준 뒤였다. 흰살생선이니 괜찮으려나. 걱정이 되었지만 해피는 쩝쩝 맛있게도 먹었다.

“봐라. 잘 묵는다.”

“해피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라나!”

두산이 ‘죽는다’라는 과격한 표현을 쓰며 소리치는 통에 다시 한 조각을 떼서 주려던 조모가 멈추었다.

“수일아, 간식 쫌 갖고 온나. 어디 두사이 무서버서 아한테 머를 줄 수가 있나.”

“다 주 놓고 말만.”

“쥐똥만큼 준 거 가지고 억수로 머라카네.”

조모가 입술을 실룩댔다.

수일은 냉동실에서 해피가 제일 좋아하는 노가리를 꺼냈다.

“해피야, 노가리 먹자.”

냉장고로 갈 때부터 이미 수일을 따라나선 해피는 노가리를 꺼내자 난리가 났다. 타다닥, 타다닥, 발소리가 요란했다. 세 조각을 꺼낸 수일은 하나를 그 자리에서 준 다음 나머지는 들고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셋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재차 밥 먹는 데 집중했다. 노가리 한 조각을 다 먹은 해피가 이번에는 수일의 곁에 와서 알짱거렸다. 수일은 밥 한 숟가락에 아귀찜과 낙지를 집어 먹고 국물도 떠먹은 다음 해피에게 노가리 한 조각을 다시 주었다. 그렇게 세 조각의 간식을 얻어먹은 해피는 그래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번엔 두산의 허벅다리에 붙어 엎드렸다. 두산은 귀찮아하면서도 커다란 손으로 벅벅 해피를 긁어 주었다.

저녁을 해치우고 대충 상을 치웠다.

밥 두 공기에 소주와 맥주 각 한 병씩을 마신 조모는 크게 하품했다.

“숙모님, 이부자리 봐 드릴까요?”

“필요 읍따. 이 여사가 다 알아서 해 놨다.”

조모 대신 두산이 답했다.

“비도 오는데 행님 니도 쉬고 있으라. 내는 해피 델꼬 나갔다 오께. 이 새끼 방구 뽕뽕 끼 샀는기 곧 싸긌다.”

두산은 해피를 번쩍 들고 일어섰다.

“밥상은 내가 갔다 와서 마저 치우께.”

“그래.”

수일은 일단 그렇게 답했다. 두산이 나가면 천천히 치우면 되었다.

밖이 어두우니까 밝은색 우산을 챙겨 주었다. 두산이 나가자마자 방으로 가서 잘 줄 알았던 조모가 나서서 상을 치웠다.

“제가 할게요. 들어가서 쉬세요.”

“개안타. 배불러서 그란다.”

이러면서 척척 그릇을 쌓아 올리더니 한꺼번에 싱크대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대로 설거지를 했다. 수일이 뒤늦게 만류했지만, 조모는 이미 물 묻힌 손이라며 오히려 수일더러 쉬라고 했다. 수일은 하는 수 없이 상을 닦고 거실을 치웠다.

둘이 나눠서 일을 하니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두사이 금방 들어오나?”

“좀 걸릴 거예요.”

“그라믄 우리도 잠깐 돌아 볼래?”

“그러실래요?”

“어. 나가자.”

두 사람은 그대로 신발을 꿰신었다.

여전히 비가 흩날렸다. 비는 우산을 안 쓰기엔 많고 쓰자니 적었다. 수일은 조모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되어 우산을 들었다. 조모가 우산을 들지 않은 수일의 다른 손을 꼭 잡았다. 아이처럼 손을 잡고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손등을 쓸었다.

“손이 아직도 꺼칠하네. 로션은 잘 바르나?”

“네.”

“그 겨울에 고생한 기 여즉 안 낫는갑다.”

“다 나았어요.”

“다 낫기는.”

수일은 정말 다 나았다고 강조했다.

웬만한 상처는 모두 나았어요. 마음만 나으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속으로 말했다.

“저거 해피 아이가?”

몇 미터 앞에 흰 덩어리가 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더니 자리를 잡고 쭈그리고 앉는 게 보였다.

“우리 해피는 얼굴이 하얘서 멀리서도 잘 보이네.”

조모가 뿌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흰 덩어리 옆에는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구분되는 커다란 남자가 노란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옳지, 잘한다.’라는 말이 여기까지 들렸다. 수일은 웃었다.

“두산아!”

큰 소리로 불렀다. 손을 흔들었다.

네 식구가 다시 만났다. 우산을 나눠 쓰고 밤 산책을 했다. 빗길을 걸었다. 조모 손을 잡고 걷던 수일은 돌아올 때 두산의 손을 잡고 걸었다.

두산이 수일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어깨 한쪽이 다 젖는 것도 모르고 오로지 수일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내가 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준다꼬 약속했다 아이가. 하나도 안 튀었제?”

이렇게 말하며 두산이 수일을 향해 윙크했다.

그 밤, 집으로 돌아온 수일은 서류 가방 안에 있던 컴퓨터 학원에서 훔친 전단을 끄집어냈다. 구겨진 것들은 무거운 책으로 눌러두고 멀쩡한 것들은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사과할 용기까지 생길지는 미지수였지만, 내일 학원에 도로 갖다 놓기로 했다. 그러곤 가방을 정리했다. 원래대로 컴퓨터 교재와 녹음기, 필통, 그리고 안경집을 가지런히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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