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은 꼭두새벽부터 해피를 끼고 자갈치 시장에 나갔다. 그렇게 잘 먹던 수일이 도통 음식을 먹지 못했다. 흰죽도 욕심껏 먹어 봐야 반 그릇이었다.
의사가 당분간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해서 흑염소는 미뤄 두고, 장어탕에 꼼장어구이를 사서 수일에게 먹일 생각이었다. 해피를 집에 놓고 가려다가 혹시라도 수일을 깨울까 봐 장바구니에 담아 왔다.
새벽바람이 찼다.
“해피 니도 엄마 오니까 좋제? 내도 억수로 좋다.”
“앙!”
“새끼. 니 내 없는 동안 느그 엄마한테 잘해라.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앙! 앙!”
두산이 말만 하면 해피는 짖어 댔다. 마치 다 알아들었다는 듯 저러는 게 참 신통방통했다. 두산은 바보처럼 헤헤거리며 성큼성큼 걸었다. 비린내조차 향긋했다. 단골 가게에서 장어탕과 장어구이를 기다리는 동안, 가게 사장이 서비스로 준 연탄에 막 구운 노가리를 해피와 함께 뜯었다.
“어! 이거 억수로 맛있네. 니도 맛있제?”
해피는 노가리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장님, 노가리 이거 열 마리만 주이소. 아이다, 스무 마리”
“스무 마리나 머할라꼬?”
“집사람하고 술 한잔할 때 안주로 먹을라꼬예.”
“어이구야, 총각인 줄 알았드만 벌쌔로 결혼했나?”
“예. 얼마 안 됐습니다.”
두산은 목덜미를 쓸며 바보같이 웃었다. 집사람이란 말이 이렇게 쑥스러운 줄 몰랐다.
맛있는 걸 먹으면 자연스레 수일이 떠올랐다. 딴 장기는 몰라도 간은 멀쩡하다고 했으니, 잘 구운 노가리에 맥주 한잔 정돈 괜찮겠지 싶었다. 두산은 당장 한 잔 마시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해피가 제 몫을 다 먹고 더 달라고 달려들었지만, 강아지 새끼한테 이런 걸 많이 먹이면 안 좋을 것 같아서 두산은 저만 먹었다. 그 모습에 해피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웃긴 놈이었다.
양손 가득 음식과 해피를 챙겨 들고 두산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밖은 여전히 깜깜했다. 혹시라도 수일이 눈을 떴다가 저나 해피가 없는 걸 알고 슬퍼하면 어쩌나, 두산은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수일은 곤히 자고 있었다. 깊이 잠들어 두산이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가스레인지에 장어탕을 올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압력밥솥에 밥을 안쳤다.
아침이 준비되는 동안 두산은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몸도 얼굴도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새끼, 니 억수로 잘생깄네.”
수일에겐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두산은 제가 봐도 자기가 좀 잘난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씨익 웃었다.
압력밥솥 추가 일정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장어탕도 먹기 좋게 보글보글 잘 끓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두산은 심장 부근을 벅벅 긁었다. 어슴푸레 밝아 오는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기지개를 켰다. 두산이 움직일 때마다 해피가 부산스레 주위를 맴돌았다. 타닥타닥, 짧은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맨발에 닿는 카펫이 여름용이었다. 두산은 발끝으로 아이보리색 카펫을 툭툭 쳤다. 아무리 아파트 난방이 잘 된다 해도 수일에겐 추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트리도 샀는데 이참에 미국 영화에서 봤던 그런 두툼한 겨울용 카펫을 하나 들여야지 했다.
거기서 섹스도 하려면 얼룩이 잘 지워지는 것으로 사야 하려나. 씨발. 두산은 콧잔등을 쓱 쓸며 괜히 쑥스러워했다.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김경식의 음성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이 누리는 이 행복이 몇 년은 더 늦어졌으리라. 아니, 그전에 수일이 죽고 없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두산도 이 세상에 없었을 터였다.
두산은 그 골방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곰팡내 가득한 방 안에는 온기라곤 없었다. 누군가 살고 있다는 흔적인, 방구석에 놓인 다 낡은 침낭과 버너 위 냄비를 보고도 두려움에 숨이 턱 막혔다. 수일이 살아 있다는 걸 들어 아는데도 살풍경한 방 안 모습에 오한이 났었다. 내려달라고 낑낑대는 해피를 풀어 주면서 느꼈던 절망감과 자기혐오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수일이 제게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만약 하루만 늦게 수일을 찾아갔다면, 그 차가운 골방에서 살아 숨 쉬는 수일이 아니라 수일의 시체를 발견했을 수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두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
두산은 김경식의 음성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서울로 향했다. 임상엽이 한 마담에게서 받았던 삼백만 원이란 큰돈이 늘 거슬렸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일준과 한 마담이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모종의 계략을 짜고 있었으므로, 두산은 해결사를 보낸 사람이 문일준이라 확신했다. 하필 현장을 목격한 것이 임상엽이고 그걸로 협박해 돈을 뜯어냈겠지. 그 사실을 뒤늦게 할배가 알고 사람을 시켜 문일준을 죽였을 테고. 다른 사람도 아닌 친척 사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었다. 씨발. 할배가 왜 10년 동안 입을 꾹 다물다 수일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는지,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오랜만에 본 임상엽은 사람 꼴이 아니었다. 머리는 목덜미를 덮을 만큼 길었고 수염도 깎지 않아 보기 흉했다. 목욕 한번 하지 않았는지 가까이 다가가자 지린내가 진동했다.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들이 멀리할 정도로 폐인 신세였다.
그 씨발 새끼는 두산을 보자마자 누런 이를 드러내고 쪼갰다.
‘담배 있어요?’
황 씨가 미리 준비해 온 담배 한 보루를 흔들어 보였다. 흐리멍덩하던 눈에 광채가 돌았다.
‘나 진짜 할 말 없는데.’
‘오늘은 생각 날 끼다.’
황 씨는 자기가 부리는 남자와 함께 임상엽을 휠체어에 앉혀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두산은 그 뒤를 어슬렁대며 따라나섰다.
11월인데 서울은 시베리아 벌판이 따로 없었다. 부산에서 영하 1, 2도에 춥다고 난리를 치던 두산은 생경한 추위에 얼어 뒤질 것 같았다. 낮 기온이 영하 5도라니 씨발. 이런 날 수일은 공사판에서 노가다 중이었다. 두산은 그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를 찾아 물었다.
엄동설한에 환자가 병실을 나가든 말든 막는 간호사도 의사도 없었다. 삼류 병원의 좋은 점이었다. 얇은 환자복만 입은 채 밖으로 끌려 나온 임상엽은 춥다고 지랄을 떨었다.
두산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 광경을 침묵으로 지켜보았다.
‘씨팔, 추워 죽겠네. 얼른 담배나 하나 줘요.’
‘알았다. 말만 잘하면 담배 이거 싹 다 니 주께.’
‘어으. 좆까구 있네.’
욕을 하면서도 임상엽의 시선은 담배를 쥐고 있는 황씨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백태섭이 죽던 날 새벽.’
‘아직도 그 얘기야? 씨팔, 내가 몇 번을 말해요. 나 아는 거 없다니까!’
‘백태섭이 죽던 날 새벽, 니 그 호텔 앞에서 머 했노? 누구 봤노?’
황 씨의 물음에 임상엽이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버버 댈 뿐 제대로 된 단어를 뱉지 못했다. 덜덜 몸을 떨었다. 추위에 떠는 건지 아니면 겁에 질려 떠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씨팔! 누가 호텔에 있었대? 추워 뒤지겠으니까 얼른 들여보내 주기나 해요!’
‘니 보이까 한정숙이한테 백 만원 받고 나중에 이백 만원 더 받았대? 그 돈 와 받았노?’
‘받을 만하니까 받았지!’
두산은 짧게 웃었다. 지금 임상엽의 개소리나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바람이 춥다 못해 얼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 씨발롬이. 니 그때 백태섭이 방에서 나오는 해결사 봤제?’
두산은 성큼 다가가 휠체어를 발로 넘어트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휠체어가 힘없이 쓰러졌고 임상엽이 그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짚었는지 팔이 아프다고 난리를 피웠다. 황 씨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임상엽을 급히 일으켰다.
‘하이고, 니도 참 어지간하다.’
되레 두산에게 한마디 했다.
임상엽은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구경하는 사람은 있어도 다가와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문일주이가 입 닫으라는 조건으로 주드나?’
두산은 다시 발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임상엽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팔이 부러졌는지 임상엽은 아프다고 끙끙대며 눈물 콧물을 쏙 뺐다. 소리 내 울었다.
‘하, 씨발! 말 안 하나?’
휠체어를 향해 다리를 뻗자 황 씨가 급히 두산을 말리고 임상엽에게 다가가 다그쳤다.
‘팔 병신까지 되야 말 할 끼가? 으이?’
‘어흐, 씹, 맘대로 해!’
‘느그 아버지 요새 병원 잘 안 오제? 며칠 전에 쓰러지서 그렇다.’
더러운 얼굴이 고개를 들어 황 씨를 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씨발 새꺄. 우리 아버지 멀쩡해!’
‘멀쩡하기는. 니도 안다 아이가. 니 병원비 대느라꼬 집도 팔고 전화기도 팔고, 있는 거 싹 다 판 거. 그것도 모자라서 느그 아버지 새벽에 우유배달까지 하다가 쓰러짔다. 병원 갈 돈이 없어서 집에서 가만 누 있기만 한다. 니 이래 고집 피울 일 아이다. 느그 아버지 죽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말해라. 똑바로 말해 주면 병원비 싹 다 대주께. 전에 살던 집도 다시 사주께.’
씨발. 황 씨의 말에 두산은 낮게 욕을 뱉었다.
저 개새끼한텐 10원짜리 하나 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임상엽에겐 당장 돈이 필요했고 두산은 임상엽의 정보가 필요했다.
‘나 죽어두 우리 가족한테 집 사 주고 병원비 내준다고 약속해 주세요. 우리 가족 보호해 준다고 각서 써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보호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보호. 두산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그래. 말만 해라. 다 들어 주께.’
‘어흐, 씹할. 죽겠네.’
얇은 병원복 팔뚝에 눈물을 닦은 임상엽은 결심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 목구멍에 풀칠은커녕 가족이 죄다 저 때문에 죽게 생겼는데 돈 나올 구멍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살기 위해선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임상엽은 백두산에게 돈을 받아 내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은 두산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날 임상엽은 김경식 말대로 해결사를 목격했다. 한정숙의 지시에 따라 자정 무렵부터 호텔에 죽치고 있을 때였다. 무슨 말로 윤수일을 그곳으로 불러내나, 어떻게 들쑤셔야 윤수일이 백태섭을 칠까 고민하던 중에 남자가 먼저 백태섭의 방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 설마 했지만, 의심은 곧 백태섭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백태섭은 당당하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그 늦은 시각 룸서비스까지 시켰다. 임상엽은 막연히 남자가 백태섭의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문일준이 추락사하고 나서야 자신이 본 사람이 해결사일지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상하게 문일준이 남자 얘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더라니.
협박 전화를 받은 뒤론 확신했고, 두려움에 떨며 10년 동안 입을 닫았다.
게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오던 협박 전화가 두산과 재욱에게 납치되기 전에도 왔었다고 했다. 이번엔 삐삐 음성이었다. 남자는 임상엽을 지켜보고 있었고 지시를 내렸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시나리오를 미리 짜 주었다. 제 목숨이야 그렇다 치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동생들이 결혼해서 조카들까지 있었다. 임상엽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두산에게 고문을 당하고 강재욱에게 다리가 썰리고도 거짓말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씨발. 두산은 상상도 못 한 임상엽의 말에 미친놈처럼 웃었다. 잘 못 들은 줄 알고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황 씨가 안쓰러운 눈으로 두산을 쳐다보았다.
문일준이 해결사를 고용한 게 아니었다. 사고 전에 실종된 공기훈은 죽었을 게 분명하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임상엽을 협박할 사람도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할배, 백영호.
설마하니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을 줄이야.
정말 좆같았다.
‘암튼, 혹시 몰라서 그 남자가 탄 차 번호를 적어두긴 했어요.’
임상엽이 두산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할배에게 놀아나고 있었던 걸까. 두산은 그것도 모르고 설치고 다녔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지 생각만 해도 쪽팔렸다. 아니 분했다.
더 듣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황씨가 그만 가려는 두산을 만류하며 더 들어보자고 했다.
임상엽 씨발롬은 눈치도 없이 윤수일을 배신하고 문일준의 개가 된 얘기를 길게도 말했다. 지겨워서 하품이 나려던 찰나,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누구?’
묻는 두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씨발,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연이은 충격에 어안이 벙벙했다.
문홍길. 할배의 사촌 형님이자 문일준의 아버지. 할배와 달리 진즉에 아들 문일준을 내치고 연락마저 끊었던 남자였다. 문일준의 주검을 거두긴 하였으나, 장례식날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교통사고 전후로 할배와의 교류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이 사고에서 배제했었는데, 그 남자가 아버지의 병실로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기둥서방 아버지 같던데요? 생긴 게 많이 닮아서 기억하고 있어요. 둘이 친척이라더니, 뭐 병문안 왔나 했죠.’
‘씨발! 좆같네.’
두산은 헛웃음을 웃었다.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갔다. 문홍길은 흥신소 뒷조사에서조차 흔적이 나오지 않을 만큼 비밀스럽게 할배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친척끼리 그런 식으로 교류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 했다. 뒤가 구리다는 증거였다. 아버지도 문일준도 할배의 단독 범행이 아닐지 몰랐다.
‘이놈의 집구석, 잘 돌아간다.’
두산은 한숨 섞인 말을 뱉으며 병원을 나섰다.
문홍길은 집에 없었다. 가족들 말론 몇 년 전 홀로 지방으로 내려갔고 서울엔 간간이 들른다고만 했다. 자식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며 사는 곳 주소도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더 조르진 않았다.
두산은 일단 부산으로 내려갔다. 황 씨와 종국을 시켜 임상엽이 적어 두었다는 차 번호판을 조사하고 문홍길을 찾아다녔다. 정말 숨으려고 했던 건지 노인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열흘 만에 겨우 노인을 찾았다. 초로의 남자는 체구가 작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노인은 백두산을 보자마자 백영호의 손자임을 알았다.
‘내가 죽어서 젊은 시절 영호를 보구 있나 했네. 어쩌면 이렇게 쌍둥이처럼 닮았어, 그래. 목소리두 똑같애. 허허.’
한 번도 두산과 만난 적도 얘기한 적도 없었지만, 문홍길은 원래 알던 사이인 양 다정하게 대했다. 백두산은 무릎을 꿇고 과거 그 사고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니 진실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모든 걸 시인했다.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었다. 할배에게 전화까지 걸어 나무랐다.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호통을 쳤다.
두산은 그날 생전 처음 본 노인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운 게 아니라,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이제 할배와 담판을 짓고 수일을 찾아오는 일만 남았다. 그게 일주일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더는 할배에게 속아 넘어가 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
치이이익!!!
압력밥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해피가 스팀이 빠져나오는 소리에 신이 나서 뱅뱅 돌았다.
“하, 이 새끼. 누가 즈그 엄마 자식 아니랄까 봐, 우째 미친개이 짓도 똑 닮았노.”
두산은 혀를 차며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커다란 국그릇에 맑은 장어탕을 나눠 남고 갓 지은 밥을 밥그릇에 조심히 담았다.
안방 문을 열자 해피가 부리나케 달려 들어갔다. 앙! 앙! 하고 짖어 댔지만, 수일은 눈을 뜰 줄을 몰랐다. 두산은 먼저 두꺼운 커튼을 걷었다. 어두웠던 방 안이 금세 환해졌다. 침대에 조심히 앉아 수일을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 옅은 숨을 쉬고 있었다. 가지런히 내려앉은 긴 속눈썹에 슬쩍 입을 맞췄다. 파르르, 눈썹이 떨렸다. 이번엔 입술에 꾹 입을 맞췄다.
“흐으.”
귀찮은지 예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시 속이 간질간질했다. 두산은 심장 부근을 벅벅 긁으며 삐죽빼죽 아무렇게나 잘라 놓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두산은 수일이 아파서 좋았다. 물론 영양실조란 말엔 열이 받긴 했지만, 수일의 몸이 허약한 건 제겐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다리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금상첨화였다. 수일은 두산이 없으면 꼼짝도 못 했다. 두산이 안아 주고 씻겨 주고 먹여 주어야 했다. 이런 걸 두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나 보다.
두산은 씨익 웃었다.
“수일아. 수일아!”
“…으응.”
다시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간신히 눈을 떴다. 커다란 눈을 몇 번 끔뻑끔뻑하고 두산에게 초점을 맞췄다.
“어디 가?”
잠에 취해 잠긴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출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니?”
“어. 같이 밥 묵고 니는 다시 자라.”
“응.”
두산이 그대로 수일을 안아 들고 주방으로 가 식탁 의자에 앉혔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곱도 떼 주었다. 수일이 하품을 했다. 쪽쪽쪽, 귀찮아하는 수일에게 입을 맞추고 자리에 앉았다.
해피는 그릇에 사료를 담아 주자 바로 덤벼들었다. 아까 노가리도 뜯은 주제에 마치 오늘 처음 먹는 음식인 양 아작아작 잘도 깨 먹었다.
수일은 밥을 먹고 있는 해피를 내려다보며 이름을 불렀지만, 해피는 대꾸가 없었다.
“해피! 엄마가 부른다 아이가.”
두산이 해피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 새끼는 먹을 땐 두산도 모른 척했다.
“나 엄마 아냐. 나두 아빠야.”
“지랄. 내가 아빤데.”
“나두 아빠라니깐.”
“에헤이, 같은 이름으로 부르니까 해피가 헷갈리서 대답을 안 하지.”
두산은 수일에게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그럼 나는 뭐라구 해?”
“엄마!”
“싫어.”
“그라믄 아버지 하든가.”
“어우, 아버지가 뭐야? 정 없게.”
“여하튼 아빠는 내니까 니 알아서 해라. 엄마를 하든 아버지를 하든.”
“아버지가 뭐야, 아버지가….”
수일은 구시렁대며 입에 국물을 떠 넣었다. 맛이 좋은지 좀 전까지 찌푸리고 있던 얼굴이 펴졌다.
“내 새벽에 자갈치 가서 막 사온 기다.”
“뭐 하러 그랬어, 출근하는 사람이.”
“니 맥일라꼬 그랬지. 맛있제?”
“응. 엄청 맛있어.”
“밥도 묵꼬.”
“응. 너두 얼른 먹어.”
빨리 먹지도 못하면서 급하기만 했던 예전의 수일은 어디 가고 숟가락질이 느려 터졌다. 힘이 없어 밥도 겨우 조금만 떴다.
“내 먹여 주까?”
“아냐. 난 알아서 먹을 테니까 너 먹어.”
“장어구이도 샀으니까, 그거는 점심때 데파 무라.”
“응. 그럴게.”
수일은 두산을 보며 웃었다. 기운이 없어 보여서 그렇지 표정은 밝았다. 두산은 옆으로 자리를 옮겨 수일을 제 쪽으로 당겼다. 장어탕에 밥을 말고 수일에게 한 입 한 입 먹여 주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수일은 겨우 세 숟가락만 먹고 고개를 저었다.
“와 이리 몬 묵노. 입맛에 안 맞나?”
“아냐, 이제 깨서 그런가 봐.”
두산은 수일을 꼭 끌어안았다. 입을 맞추고 이마를 쓸어 주었다. 씨발, 정력에 좋은 보약을 한 첩 지을 생각이었는데, 일단 몸보신용으로 지어야 할 것 같았다.
“먼 일 있으면 바로 사무실에 전화하고, 내 읍따 카면 삐삐치라. 알았제?”
“응. 걱정하지 마. 나 해피랑 잘 있을게.”
“쓸데없이 돌아댕기지 말고. 목발 이거 조심히 짚어라. 넘어진다.”
“알았어. 얼른 출근이나 해.”
두산은 소파에 수일을 앉혀 놓고 벌써 10분째 같은 말을 했다. 뽀뽀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면서 수일과 어떻게든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 두산은 안달이 났다. 두산의 마음과 달리 수일은 슬슬 귀찮은지 자꾸 가라고 밀었다. 서운했다.
“가긴 갈 낀데, 니는 내 안 보고 싶겠나?”
“보고 싶지, 당연히. 근데 너 출근할 거잖아. 그러니까 얼른 갔다가 얼른 와요.”
“어. 뽀뽀.”
“뽀뽀.”
둘은 쪽쪽 입을 맞추었다. 수일은 앉은 자리에서 ‘조심히 다녀와요’ 하며 손을 흔들었다. 해피가 눈치 없이 짖어 대며 쫓아왔다.
두산은 쪼그리고 앉아 해피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니 느그 엄마 말 잘 들어라. 똥, 오줌 잘 가리고. 알았나?”
“앙!”
“니만 믿는다.”
“앙!”
출근하는 데 영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만 있고 싶어서 가정부를 일부러 들이지 않았는데,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저 다리로 수일이 점심을 어떻게 챙겨 먹냔 말이다. 회사라도 가까우면 두산이 매번 들러서 챙겨 주고 할 텐데 지금은 그것도 힘들었다. 게다가 아파트라 감시를 붙이기도 껄끄러웠다.
두산은 출근하자마자 직업소개소에 전화를 걸었다.
“거 여사님들 중에 말 없고 무뚝뚝하다 싶은 사람 있습니까? 예. 우리 집사, 아니 행님이 낯을 많이 가리서 씨부리는 거 좋아하는 여사님은 힘들어합니다. 다리도 쪼매 안 좋아서 움직이지도 몬 하고예.”
다행히 두산이 찾는 사람이 있었다. 일은 참 잘하는데 싹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잘린 적이 많은 여사님이라고 했다.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두산은 그 자리에서 조건을 맞추고, 일단 내일부터 출근하도록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침은 늘 바빴다. 8시부터 1시간가량 회의를 하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두산은 현장에서도 시간만 있으면 간이 사무실 전화기를 이용해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안방에 무선 전화기를 두어서 수일은 손쉽게 전화를 받았다. 한 네 번쯤 했더니 목소리가 언짢았다.
“아니, 내는 걱정이 돼서 그라지.”
- 아무리 그래두 그렇지. 30분에 한 번씩 전화하면 어떡하니? 그리구 전화벨 소리가 너무 커. 나 깜짝깜짝 놀란단 말야.
“알았다. 내 집에 가서 소리 쫌 줄아주께.”
두산은 입이 한 발이나 나와서 전화를 끊었다.
“백 상무님! 점심무러 가입시다.”
“예.”
백영해운은 해운 항만 쪽에서도 후발주자라 누군가의 하청이었다. 당연히 하청을 준 업체 간부들과 사장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점심에도 술이 빠지지 않았다. 영업과장과 부장에 말단 사원들까지, 모두 업체의 비위를 맞추느라 빠르게 술잔을 돌렸다. 술에 취한 적이 없는 두산은 멀쩡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니 다른 직원들의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접대가 끝나면 2차로 해장국을 먹고 약국에 들러 약도 지어 먹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어느덧 오후 2시 반이 넘었다.
수일에게 전화를 한 번 더 걸어 점심을 먹었는지 확인하고 마침 시간이 맞은 현철과 통화를 했다.
“행님, 미용실이 어데라꼬?”
- 전에 우리 동네 와 봤제? 그때 차 세았던 데서 백 미터 밑으로 쭈욱 내리가면 있다. 미미쌀롱이라꼬.
“알았따. 행님도 일 마치고 바로 글루 오끼가? 아이믄 내가 행수님 데리고 행님 있는 데로 가까?”
- 아이다. 내도 오늘은 일찍 마치고 갈 테니까, 거서 보자. 근처에 굴 잘 하는데 있다.
“굴 좋지. 그라믄 저녁에 보자. 수고하소.”
- 어, 니도 수고 해라.
전화를 끊고 두산은 새로 공부하기 시작한 책을 펼쳤다.
공부하는 중에 내일 저녁 회식 때 만날 업체 사장의 연락처를 찾아 미리 전화를 돌렸다. 두산은 전문지식은 부족하지만 조선 해양 관련 업체 이름과 그 업체의 주요 사업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부장급 이상 간부들의 여자 취향, 술 취향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딴 건 몰라도 접대 하나는 끝내주게 할 수 있는 게 지금 두산의 업체가 가진 유일한 강점이었다. 물론 찔러 줄 현금도 많았고.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두산은 습관처럼 30분마다 수화기를 들었고, 짜증을 내던 수일도 포기했는지 군말 없이 전화를 받았다.
- 두산아.
“어?”
- 너 안 바빠?
“바쁘지!”
- 근데 왜 이렇게 전화 자주 하니?
“니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라지.”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간질간질, 두산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벅벅 긁었다.
- 몇 시에 데리러 올 거야?
“다섯 시.”
- 그렇게 일찍 와두 돼?
“어. 되지.”
- 그럼 얼른 일해. 지금부터 다섯 시 될 때까진 전화하지 말구.
수일의 말에 시계를 보았다. 앞으로 한 시간만 있으면 다섯 시였다. 수일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내 안 보고 싶나?”
- 보구 싶지.
“내도 억수로 보고 싶다.”
보고 싶다는 말을 계속했더니, 수일이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야속했다.
“씨발. 보고 싶은데 보고 싶단 말도 몬 하나.”
쿵, 하고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수일과 함께 나누는 사소한 일상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종일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이유 없이 열이 올라서 차가운 책상에 얼굴을 굴려 가며 열을 식혔다. 서운함도 잠시, 두산은 너무 좋아서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직통으로 온 전화라면 업체 사장이거나 수일이었다.
“백영해운 백두산입니다.”
- 내다.
둘 다 아니었다. 할배였다.
- 느그 아버지 안 볼래?
“됐습니다.”
-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두산은 눈썹을 꿈틀했다. 마지막이라. 드디어 할배가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됐습니다. 할배나 실컷 보이소.”
- 후회 안 하겠나?
“예.”
- 그래. 알았다.
수화기 너머 옅은 한숨 소리가 전해져 왔다.
“할배.”
- …….
“엄마는 아나?”
- 말해야지.
“어.”
- 일 바라.
“할배.”
두산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다 이내 경쾌한 투로 말을 이었다.
“내 대신 아빠한테 전해 도. 어릴 때 내 목 졸랐던 거 그거 용서한다꼬. 다른 건 용서 몬 하는데 그거는 용서한다꼬 꼭 전해도. 알았제?”
- 오야. 내가 잘 전해 주끄마.
속이 후련했다. 이젠 담아 둘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수일에게 한 짓은 용서 못 하지만, 자신에게 한 짓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었다.
갑자기 용서하다가 영어로 뭔지 궁금해서 한영사전을 펼쳤다.
“용서하다. 용서. 포, 기, 브. 씨발! 이거 알고 있었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forgive를 빈 종이에 적었다.
아버지의 생명이 다하는 동안 두산은 용서란 단어를 채워 나갔다. 밝았던 표정이 어느새 어두워졌다.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두산은 팔등으로 눈을 가렸다.
“씨발.”
사과가 먼저여야 했는데, 끝내 아버지에게 사과받지 못했다. 왜 저를 미워했는지 그 이유도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두산은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거면 족했다.
두산은 팔뚝을 내리고 다시 영어 단어를 적어 나갔다. 어두웠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빈 종이에는 용서란 단어 대신 윤수일이란 이름이 가득했다. 윤수일. 두산은 수일의 이름을 낮게 속삭이며 환하게 웃었다.
***
아침에 먹은 장어탕이 문제였는지 설사를 하다 진이 빠진 수일은 약을 먹고 종일 잠만 잤다. 점심도 해피 것만 겨우 챙겨 주고 건너뛰었다.
두산은 끊임없이 전화했다. 일하는 사람 방해할까 봐 수일이 일부러 전화를 빨리 끊긴 했지만, 그래도 자주 전화해 주어서 고마웠다. 수화기 너머 보고 싶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했다. 큰 집에 혼자 있어도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조용하다 싶으면 타닥타닥 발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수일은 슬쩍 미소 지었다. 해피를 두고 혼자라고 생각한 게 미안해졌다.
해피는 주로 거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안방 문턱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사라졌다. 그저 평온했다. 체력이 좀 따라 주면 좋으련만 아직은 힘들었다. 갑자기 편해져서 늘어진 듯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이 몸으로 공사장을 누빈 걸 보면 확실히 마음의 문제가 분명했다. 자신도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누울 자릴 보고 다리를 뻗나 보았다. 열심히 일하고 있을 두산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깜빡깜빡 졸다가 커다란 전화벨 소리에 놀라 깨기를 반복했다. 무선 전화기 덕에 침대에 누운 채 전화를 받을 수 있어 편했지만, 잠이 들 만하면 벨이 울려서 나중에는 조금 귀찮아졌다. 그래도 두산이니까 좋았다. 늘 ‘내다’로 시작하는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좋았다. 목청이 커서 수화기를 조금 멀리해야 하는 것도 좋았다.
전화를 끊고 나면 잠깐 정신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수일은 병원에서 준 피부과 연고를 부지런히 발랐다. 가벼운 동상 증상까지 있었던 손등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얼굴의 튼 자국도 많이 없어졌다. 바짝 마르고 하얀 딱지가 일어난 입술은 바세린을 듬뿍 바른 덕에 언제 그랬냐는 듯 촉촉했다. 물론 실핏줄이 터진 데는 여전히 울긋불긋했지만, 이젠 사람 같아 보였다.
두산은 어디서 프랑스제 화장품도 사다 주었다. 과학실에서나 봤던 갈색 병에 스포이드로 짜서 쓰는 제품이라 처음엔 화장품이란 생각도 못 했다. 은근 귀가 얇은 두산이 약장수한테 속아서 사 왔나 싶었지만, 하도 좋은 거라고 우겨서 하는 수 없이 발랐다.
마지막 통화 이후, 수일은 전화기를 가슴에 품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 한 시간 남짓한 단잠이었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눈을 떠 보니 두산이 입술을 금붕어처럼 오므리고 후후 입김을 불어 수일을 깨우는 중이었다. 수일은 웃었다.
“왔어?”
“어. 더 자고 싶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다.
“아냐, 실컷 잤어.”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다가 수일은 손을 뻗어 두산의 볼을 만졌다. 이제 막 들어왔는지 볼이 찼다. 두산이 수일의 손목을 쥐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근데, 와 점심은 안 뭇노?”
들어오자마자 부엌부터 들린 모양이었다. 두산이 서운한 표정으로 물었다.
“배가 안 고파서.”
“에이, 그래도 무야 빨리 건강해지지.”
수일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사 왔는데 정작 당사자가 먹지를 않았으니 서운할 만도 했다.
“이상하게 가만있어도 배가 불러. 너하구 같이 살아서 그런가 봐.”
기분이라도 좋으라고 이렇게 말해 주었더니 두산의 입꼬리가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그냥 해 본 소리긴 했지만, 뱉고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예전에 같이 살 땐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서 그랬는지 두산과 함께 한 매 순간이 소중했어도 허기를 채우진 못했었다.
위가 줄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인대가 끊어져 아파 죽을 지경인데도 라면 죽을 먹겠다고 그 다리를 끌고 슈퍼까지 갔던 수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심신의 안정이 제 위에도 영향을 미친 듯했다.
“내일부터 가정부 오기로 했으니까 밥하고 간식 챙기주면 잘 묵고. 알았제?”
“뭐하러 가정부를 들였어. 나 집에서 놀구 있는데.”
“놀기는. 니는 고마 챙기주는 밥 묵고 건강 생각만 해라. 내가 니 때메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바쁜 사람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수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이 나면 목발을 짚고 돌아다니는 건 일도 아닐 테니 그때 가정부를 내보내면 되었다.
“근데 나 장어탕 먹구 설사했어. 기름져서 그런가 봐.”
수일의 말에 두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어에 기름이 어데 있노?”
“어디 있긴? 장어가 기름 덩어리지.”
“그기 무슨 기름이고? 다 영양분이지!”
두산은 장어에서 나온 기름은 기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참 이상한 논리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잔뜩 구긴 두산은 ‘씨발, 기름 아인데’ 하며 끝까지 수긍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밥 많이 먹구 잘 쉬면 될 것 같애. 그러니까 그런 거 사 오지 마.”
“니 몸이 밥 가지고 되나? 보양 되는 거를 묵어야 낫지. 거참, 이상하네. 일단 알았다. 내 잘 알아보께.”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라 수일은 일어나 앉았다. 두산은 수건에 물을 적셔 와 수일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두산이 움직일 때마다 해피가 따라다녔다. 두산이 ‘저리 가라’ 하며 해피를 발로 쓰윽 밀었지만, 그래도 좋다고 난리였다. 하마터면 해피가 두산의 발에 밟힐 뻔한 것을 보며 오늘은 꼭 해피 목에 달 방울을 사야지, 하고 수일은 생각했다.
누워 있어서 눌린 뒷머리에 물을 묻혀 두산이 드라이를 해 주었다. 얼굴과 손등에 연고도 바르고 옷을 챙겨 왔다. 수일은 도톰한 내복에 부드러운 스웨터를 입었다. 깁스한 다리 때문에 바지는 여전히 통 넓은 추리닝 차림이었다.
두산도 입고 있던 와이셔츠와 정장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 니트 위로 은근히 드러나는 근육이 멋스러웠다. 수일의 시선이 제 몸에 머무는 것을 알고 두산이 능글맞게 웃었다.
“와? 좋나?”
슬쩍 니트 아랫단을 잡고 위로 올려 보였다. 탄탄한 복부가 드러났다.
“너는 왜 내복도 안 입구 그러니? 감기 걸리면 어쩌려구.”
“요새 누가 내복을 입노? 그런 거는 할배들이나 입는 기다.”
“그럼 나는?”
수일은 두산을 흘겨보았다.
“에헤이, 니는 아픈 사람 아이가. 건강한 내하고 다르지.”
두산은 대충 변명하고 수일을 등에 업었다.
“젊은 사람은 추위가 피해 간다니? 말두 안 돼. 추우면 내복 입는 거지, 할아버지들만 입나, 뭐.”
중얼중얼 투덜대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두산은 ‘해피! 가자’ 했다. 이름을 듣고 해피가 쪼르륵 달려오자 두산이 냉큼 집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내복 얘기에 기분 상한 것도 잠시, 두산의 등에 업혀서 수일은 기분이 좋았다. 킁킁, 목덜미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회사에선 별일 없었어?”
“어. 없었지.”
“오늘두 현장 나갔어?”
“어. 맨날 나가지.”
“추운데 고생했어요.”
수일은 두산의 목에 쪽쪽 뽀뽀를 해 주었다. 두산의 웃음이 등으로 전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입구로 나가려는데 막 순찰을 돌고 들어온 경비원과 마주쳤다. 나이 지긋한 경비원은 두산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수일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경비가 있는 아파트라니, 아직은 이런 상황이 낯설어서 수일은 쭈뼛댔다.
기온이 내려가려는지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그래도 서울에 비하면 여전히 봄 날씨 같았다. 두산이 그랜저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 은색 그랜저는 볼수록 멋스러웠다.
수일은 해피가 든 시장바구니를 안고 조수석에 앉았다. 두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구 두리번거리던 해피는 운전석에 앉는 두산을 향해 자세를 고쳐앉았다.
무릎 위 해피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수일은 조심히 손을 가져가 슬쩍 털을 건드렸다. 부드러운 털이 손끝에 스쳤다. 생각만큼 어렵지 않아서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엔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자 해피가 홱 고개를 돌려 수일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밥을 챙겨 줄 때 건드린 걸 빼면 수일이 제대로 해피를 만진 건 처음이었다. 해피도 그걸 아는지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손을 떼면 어느새 시선이 두산을 향했다. 그러다가 수일이 쓰다듬으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일을 올려다보기를 반복했다.
수일은 해피가 올려다보면 작게 ‘내가 니 아빠야, 아빠’ 했다. 그럴 때마다 두산이 귀신같이 알아듣고 아빠는 자기라고 큰소리쳤다. 두산이 소리치면 어김없이 해피도 짖었다. 시끄러웠다.
라디오에선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며 연신 캐롤을 울렸고, DJ는 애청자들이 보낸 크리스마스날 있었던 사연들을 소개해 주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줄은 몰랐다. 연말은 유흥업소의 대목이라 수일은 그저 돈 벌기 바빴었다.
캐롤을 흥얼거리는 두산은 평소와 같으면서도 조금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나 하기엔 별일 없어 보였고, 별일 없다고 하기엔 분위기가 이상했다.
“무슨 일 있었어?”
“으데. 아무 일 없었다.”
두산이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니하고 같이 있으니까 좋아서 그라지.”
싱거운 소리를 했다. 그래, 하며 수일은 기어를 잡은 두산의 팔을 쓸었다.
“우리 트리 장식은 언제 하지?”
“낼 하까?”
“응. 내일 저녁 먹구 같이 하자.”
“그래.”
정애 씨가 일하는 ‘미미쌀롱’은 작은 규모의 동네 미용실이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원장으로 보이는 여자와 정애 씨 말곤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두산이 수일을 업고 들어가자 정애 씨가 무척 반가워했다. 해피도 귀여워했다. 내려 달라고 낑낑대는 해피를 바닥에 내려 주자 좁은 미용실 안을 마구 돌아다녔다.
“이래 잘생긴 청년들이 둘씩이나 오고, 이 무슨 복이고?”
아부 섞인 원장의 칭찬에 두산이 더 좋아했다. 수일을 빈 의자에 앉힌 다음 외투를 벗긴 두산은 자기도 외투를 벗어 정애 씨에게 건네주었다.
“엄마야, 운동 했어예? 억수로 몸 좋다.”
원장은 수일보다 두산에게 더 관심을 보이며 슬쩍 팔뚝을 쓰다듬었다. 검은 니트 위로 드러나는 근육이 보기 좋더라니, 역시 사람 눈은 다 똑같았다. 질투가 나기보다 뿌듯했다. 저 남자가 자기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걸 수일은 꾹 참았다.
“예. 이것저것 안 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두산은 큰 소리로 원장과 대화를 나누며 제 몸을 자랑했다. 만지라고 팔을 내밀고 아까처럼 니트를 들어 올려 복근을 보여 주었다. 하여간 겸손이란 걸 몰랐다.
정애 씨는 좋아하는 일을 해서 그런지 표정이 훨씬 밝고 편해 보였다. 살도 좀 붙은 것 같았다. 수일에게 커트 보를 둘러 주며 안부를 물었다.
“수일이 오빠는 어데 아팠습니까? 살이 와 이리 빠졌어예?”
“조금요. 근데 이젠 괜찮아요.”
“괜찮아야지예.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곱니다.”
제법 싹싹하게 말을 걸고 받아쳤다. 분무기로 머리카락을 적신 다음 자기는 아직 수습이라 커트는 힘들다며 원장에게 수일을 맡기려 했다.
“아이다. 니가 함 해바라. 정애 야가 남자 머리는 내보다 잘 짤라예.”
원장의 칭찬에 정애 씨가 ‘아입니다’ 하면서 수줍게 웃었다.
“그럼 정애 씨가 해 주세요.”
수일도 원장을 거들었다. 머뭇거리던 정애 씨는 마지못해 가위를 드는 척했지만, 손짓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현철 씨도 건강하죠?”
“예. 나이트 기도 설 때보다 억수로 좋아졌어예. 참, 오빠는 이제 노래 안 하십니까?”
“행수! 짧게 짜르지 마이소.”
대답을 하려는데 두산이 끼어들어 제 할 말부터 했다.
“예예, 제가 잘 알아서 해보께예.”
“알아서가 아이고, 고마 짧게 짜르지 마이소.”
두산은 단호했다. 괜히 민망해서 수일이 ‘정애 씨도 얼굴이 더 좋아졌어요’ 하며 말을 돌렸다. 정애 씨가 어색하게 웃었다. 두산은 눈치도 없이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두산의 눈빛에 정애 씨는 가위를 한 번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정애 씨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가위질을 시작했다. 사각사각 일정한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어어, 짧다 짧다. 하, 짧은데. 행수, 머를 할라꼬 하지마시고예, 고마 정리한다는 심정으로 쪼매만 짜르이소.”
“아니, 이게, 머리가 하도 삐뚤어가지고예….”
두산이 가위질 한 번에 큰소리로 훈수를 두니 정애 씨는 당황했다. 당황하니 가위질이 더 서툴러졌고, 머리카락은 점점 짧아졌다.
“행수!”
두산의 비명 같은 외침과 동시에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나갔다. 커트 보 위로 생각보다 긴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걸 수일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위를 쥔 정애 씨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귀까지 벌게져서 두산의 눈치를 살폈다. 두산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결국, 보다 못한 원장이 정애 씨의 손에서 가위를 뺏어 들었다.
“아이고, 무슨 싸나이가 이래 말이 많노?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쯧. 근육이 아깝다. 옆에서 그래 훈수를 두니까 우리 정애가 몬 한다 아입니까?”
좀 전까지 두산과 다정하게 말을 주고 받았던 원장은 대놓고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과감히 수일의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어차피 여기저기 잘려 나간 곳이 많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졸지에 스포츠머리가 되어 버린 수일은 울 것 같은 표정의 정애 씨에게 괜찮다고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정애 씨. 안 그래도 짧게 잘라 보고 싶었는데 이 기회에 잘됐어요.”
“죄송합니다, 수일이 오빠.”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이마 내놓으니까 인물이 훤하다. 우찌 이래 잘생깄노?”
원장이 옆에서 잘생겼다며 과하게 칭찬했다. 평소라면 그 소리에 저보다 더 좋아했을 두산은 입이 한 발이나 나와 있었다.
커트 보를 치우고 목덜미에 앉은 머리카락을 스폰지로 털어 낼 즈음 현철이 합류했다. 현철은 먼저 두산과 반갑게 인사하고 수일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현철은 정애 씨 말대로 혈색도 밝고 훨씬 건강해 보였다.
“행님, 머리를 와 이래 짧게 짤랐습니까? 날도 추운데.”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르는 현철이 해맑게 물었다. 그 바람에 정애 씨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원장은 뒷정리를 하고 가려는 정애 씨를 만류하며 얼른 나가 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미용실을 벗어나 현철을 따라나섰다.
굴구이에 굴무침, 굴국밥까지. 굴천지였다. 수일은 생굴을 먹고 싶었지만 두산이 말려서 익은 굴만 먹었다. 굴국밥도 굴구이도 어찌나 신선한지 비린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절로 입맛이 돌았다. 수일이 오랜만에 잘 먹자 두산은 신이 나서 집에서 하듯 계속 먹여 주었다. 그만하라고 해도 정도를 몰라서 수일은 이내 포기하고 넙죽 받아먹었다.
밥 달라고 조르는 해피에겐 생선 살을 발라 흰 쌀밥과 함께 주었다. 맛이 좋은지 해피는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먹었다. 어린데 참 잘 먹었다. 정애 씨도 현철도 해피를 귀여워해 주었다.
현철은 직접 짠 듯 보이는 목둘레만 한 작은 털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동네에서 주워다 모은 털실 자투리로 수일에게 목도리를 떠 준 적이 있었다. 색깔도 모양도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눈이 쏟아지던 날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다 잃어버려서 해가 질 때까지 목도리를 찾아다녔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수일의 시선을 느낀 현철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목도리를 풀었다.
“얼라들 꺼 같지예? 정애가 일할 때 걸거친다꼬4) 이래 만들어줐습니다. 생긴 건 이래도 억수로 편하고 따십니다.”
“아뇨, 보기 좋아요. 목에 딱 맞으니까 귀엽기도 하구.”
“수일이 오빠도 하나 떠드리까예?”
“어우, 아니에요. 종일 집에만 있는데 목도리는 무슨.”
수일은 목폴라로 감싼 목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털실로 짜는 기 뭐 어렵나?”
아직도 마음이 상한 두산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왜 그래, 눈치를 주며 팔뚝을 꼬집었다.
“아야.”
두산은 대놓고 소리 질렀다. 하여간, 버릇없고 못돼 먹은 건 여전했다.
“억수로 쉬워예. 어린아들도 금세 따라 합니다.”
두산의 빈정거림에도 정애 씨는 친절했지만, 자꾸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너 표정 풀어. 안 그러면 가 버릴 거야.”
보다 못해 협박하자 두산은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행수, 술 한잔 받으이소.”
화해를 청하며 두산이 맥주를 따라 주었다. 정애 씨가 밝게 웃었다. 참 성격이 좋았다. 운전해야 하는 두산만 빼고 다들 맥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많이 마시고 싶었지만, 몸을 생각해서 딱 반 잔만 마셨다.
무뚝뚝하기만 한 현철이 웬일로 정애 씨 손을 주물러 주고 이상한 손님은 없었는지 조용히 물었다. 수일은 제 옆자리에 앉은 이상한 손님 두산을 흘낏 쳐다보았다. 피식 웃음이 샜다.
두 사람의 조곤조곤한 대화를 들으며 수일은 자기를 먹이느라 이제야 젓가락을 든 두산을 챙겼다. 두산은 수일이 반찬만 밀어 줘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럴 땐 영락없는 어린애 같았다.
“많이 먹어.”
수일은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 두산의 허벅지를 쓸었다. 두산은 올라가는 광대를 간신히 붙잡고 싱글벙글 웃었다. 입 안 가득 굴을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저 안부를 묻고 시답잖은 얘기를 나눴을 뿐인데도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다음을 기약하며 9시쯤 헤어졌다.
수일을 등에 업은 두산이 다시 머리 얘기를 꺼냈다. 투덜투덜, 이 추운 날 무슨 스포츠머리냐며 혼자 화를 냈다. 수일은 잠이 든 해피가 담긴 장바구니를 꼭 쥐고 두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너는 정애 씨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구니?”
“행수가 니 머리 그 꼴로 만들어서 그렇지.”
“머리가 뭐 어때서? 예쁘기만 하구만.”
“지랄. 그거야 니 얼굴이 예뻐서 그란 기고. 정애 누님은 미용학원 야메로 댕깄나? 우째 그래 머리를 몬 하노? 씨발.”
두산의 목청이 점점 커졌다.
“그러면서 느는 거지.”
씩씩대는 두산의 숨소리를 들으며 밤바람을 맞았다. 손에 들린 해피는 밥을 많이 먹어서 아까보다 무거웠다. 두산도 전보다 커져서 힘든데 해피까지 커지면 어쩌나, 실없는 걱정을 하며 수일은 웃었다.
그저 좋았다. 두산과 함께 하는 일분일초가 소중했다. 행복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좋았다. 수일은 두산의 목덜미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차에 타자마자 두산이 키스를 해 왔다. 저녁을 먹었는데도 숨결이 달콤했다. 물컹한 살덩이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춥춥, 수일은 두산의 혀를 빨아올렸다. 두 사람의 타액이 섞이면서 질척이는 소음을 만들어 냈다.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떨어지지 못하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서로를 물고 빨았다.
“니는 우째 머리통도 밤톨 같노? 머, 얼굴이 잘 보이서 좋긴 좋다.”
그렇게 투덜대더니 은근슬쩍 칭찬을 해 왔다. 쪽쪽 훤히 드러난 이마를 따라 콧날까지, 두산이 입을 맞췄다. 손바닥으로 짧은 머리를 쓸어 주며 ‘이상하네’ 했다.
“뭐가?”
입술을 맞대며 수일이 물었다.
“니하고 내하고 똑같은 스포츠머린데 니는 이래도 예쁘니까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하며 ‘얼굴 참 짝다’ 하고 웃었다. 둘은 다시 키스했다. 좀 전의 키스가 거칠고 투박했다면 지금의 키스는 농염하고 진득했다. 수일은 발기해서 바지를 뚫고 나오려는 두산의 성기에 손을 가져갔다. 바지 위로 쓸어 줄 때마다 두산은 낮게 신음했다. 미간을 좁히며 안달했다.
도저히 못 참겠던지 두산이 수일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수일이 앉자마자 두산은 바지 지퍼부터 내렸다. 갇혀 있던 짐승이 그대로 튕겨 나와 위용을 자랑했다.
“니가 앉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두산을 앉힌 다음 수일은 두산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두산은 수일이 빨기 편하게 상체를 최대한 뒤로 물렸다.
“개안켔나?”
“응. 빨구 싶어.”
“씨발, 미치겠네.”
아직 시작도 안 했건만 두산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입을 벌려 거대한 성기를 무는 수일을 끈적한 시선이 지켜보았다. 원래라면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었겠지만, 잡을 것이 없어서 두산은 수일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손바닥에서 열기가 전해져 왔다.
수일은 입을 크게 벌려 두산을 가득 물었다. 정말 컸다. 입술 새로 침이 흘렀다. 수일은 츄릅츄릅 소리를 내 가며 사탕을 빨듯 맛있게 빨아 댔다.
“흡, 씨발, 아흐… 읏!”
흥분에 겨운 두산이 몸을 비틀었다. 탄탄한 허벅지 근육이 아우성을 쳐 댔다.
겨울이라 캄캄했고 외진 곳이라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다 해도 길가였다.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갈 때마다 차 안으로 불빛이 들어왔지만, 두산도 수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들이 볼 수 있단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일은 입 안 가득 물었던 것을 빼내고 기둥을 핥았다. 불끈 솟아오른 핏줄을 따라 혀를 굴렸다.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는 두산은 한 손으로 천장을 짚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하아, 윽! 씨발, 수일… 아. 수일아.”
숨이 넘어갈 듯 두산은 수일을 불렀다. 턱이 아리도록 빨아도 빨딱 선 성기는 사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다 하다 양손으로 기둥을 잡아 짜내듯 주무르며 귀두를 혀로 핥았다.
이게 뭐라고 수일은 힘이 들었다. 어찌나 열심히 빨고 주물렀던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두산은 몸을 구부려 수일의 땀을 핥았다. 얼굴에 아무렇게나 뽀뽀를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쾌락과 고통에 찬 두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일은 고개를 들어 입을 벌렸다. 두산에게 키스를 요구했다. 힘 좋은 혀가 입 안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팔까지 아파서 이러다간 제가 먼저 지쳐 넘어질 것 같았다. 수일은 두산에게서 입술을 떼 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입 안 가득 성기를 물었다. 있는 힘을 다해 빨았다.
“흐읍! 아… 윽! 씨발!”
뜨끈한 액체가 끊임없이 입 안으로 쏟아졌다. 두산의 손이 수일의 목덜미를 세게 그러쥐었다. 사정없이 몸을 떨며 수일이 제 정액을 삼키는 걸 지켜보았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다 삼키지 못한 정액을 손바닥에 뱉어 내자 두산이 수일을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 바람에 하얀 정액이 두산의 검은 니트에 잔뜩 묻었지만, 두산은 개의치 않았다.
침과 정액으로 범벅인 수일의 턱을 혀로 핥았다. 커다란 것을 빠느라 부은 아랫입술을 입 안에 머금고 살살 달랬다. 쪽쪽 뽀뽀를 해 주고 키스를 했다. 예쁘다고 했지만 아직 짧은 머리가 어색한지 두산은 머리통을 쓰다듬고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땜빵은 없네.”
“그르게. 나 머리 수술했었는데.”
“어. 여긴 갑다.”
두산이 귀 뒤쪽 머리 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쓱 문질렀다. 세 마디 정도 되려나. 흉도 예쁘게 졌다며 또 말 같잖은 칭찬을 했다.
“넌 왜 다 이쁘다고만 하니?”
“예쁘니까 예쁘다고 하지.”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퉁명스러운 말투가 사랑스러웠다. 뭐든 예쁘다고 해 주는 두산이 고마웠다.
시동도 켜지 않고 뒷좌석으로 이동한 바람에 차 안 공기가 차가웠다. 땀까지 쏙 뺀 수일은 갑자기 이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두산이 그런 수일을 꼭 끌어안았다. 얇은 니트 한 장 걸쳤을 뿐인데도 두산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수일은 두산에게 최대한 가까이 몸을 맞대고 온기를 전달받았다.
둘은 다시 키스했다. 두산은 수일의 턱선을 따라 입을 맞추고 귓불도 살짝 깨물었다. 이마를 맞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웃었다. 두산이 손바닥으로 짧은 머리를 또 쓸었다.
“이거 적응될라믄 시간 쫌 걸리겠다.”
“실은 나두.”
수일도 짧은 머리가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훈련소 입소 전에 빡빡 민 이후 가장 짧은 머리가 아닐까 싶었다. 짧은 건 그렇다 치고 귀와 목이 다 드러나 춥기도 추웠다.
“거 바라.”
두산이 콩 하고 이마를 찧었다. 못 본 새 머리도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수일은 조금 찡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쪽. 제가 찧은 부위에 두산이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멈출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