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81)

푹신한 침대와 뜨거운 몸. 낯설지만 익숙한 감촉에 수일은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해피를 자신의 달세방에 둘 수는 없었다. 수일에겐 익숙한 곳이지만, 두산이나 어린 해피가 머물기엔 열악한 곳이었다.

처음에 수일이 그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 하자 두산은 아예 방에 누워 버렸다. 그러면서 자다가 주인의 등 밑에 깔려 죽은 새끼강아지가 많다는 말을 무심하게 던졌다.

두산처럼 크고 무거운 남자가 방을 다 차지하고 누워 그런 말을 하니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것도 모르고 좁은 방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해피를 수일은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늑하고 깨끗한 호텔에 도착하자 졸음이 몰려왔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있었다. 저녁을 먹자는 두산의 말에 그러자고 대답했는데, 눈을 떠 보니 지금이었다.

언제 옷을 갈아입혔는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잠옷이 수일을 감싸고 있었다. 얼굴엔 연고도 바른 모양이었다. 모르고 손을 댔다가 끈적거리는 느낌에 급히 손을 뗐다.

수일은 두산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히 일어났다. 해피는 소파 위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두산의 말론 3개월이라 그랬는데 너무 작았다. 어미와 억지로 떼 놓은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제 더러운 손으로 차마 저 하얗고 순수한 것을 만질 수가 없어서 수일은 어두운 호텔 방 안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잠자는 강아지를 가만 쳐다보기만 했다.

해피. 수일이 붙여 준 이름을 가진 강아지가 눈앞에 있었다.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깼나?”

“…응. 내가 깨웠어?”

“으데. 다 잤다.”

“거짓말.”

괜히 저 때문에 두산이 깬 것 같아 미안했다. 두산이 수일을 뒤에서 안았다. 어깨에 두산의 턱이 내려앉았다. 무거웠다.

“머 보노?”

“해피.”

“내나 보지.”

두산은 퉁명스레 말하고 수일의 목덜미에 쪽 뽀뽀를 했다. 폭신한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이동했다.

“수일아.”

“응?”

“우리 할배하고 엄마 억수로 밉제?”

“아냐.”

“개안타. 실컷 미워해도 된다.”

“아깐 그랬는데 지금은 정말 아냐. 그냥 내가 미워.”

“쯧. 그라지 마라.”

두산은 수일의 허리를 세게 끌어당겼다. 수일은 두산에게 몸을 기댔다.

“내가 그런 마음 안 먹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 당연히 내가 밉지. 내가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으면 어르신이나 어머님두 나를 이용하려고 들지 않았을 거야. 내가 좀 그렇잖아. 오죽하면 상엽이까지 나를 이용했겠니? 그때 사고가 아니었대두 언젠가 몹쓸 일에 이용당했을 거야. 내가 원래 그래.”

말하고 나니 수일은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디 모자란 것도 아니면서 왜 이용당하고만 살았을까. 아니, 당한 게 아니라 당하도록 두었다는 말이 더 옳았다.

“이제 그랄 일 읍따. 내하고 살면 내가 다 지키주께.”

두산은 아까부터 듣기 좋은 말만 했다. 수일은 힘없이 웃었다.

어제 두산에게 사고의 진상을 들은 다음부터 수일은 제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처음엔 어르신이 그랬을 리 없다는 불신이 앞섰고, 두산이 확답을 주자 불신은 분노로 바뀌었다. 수일의 마음속에서 온갖 나쁜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게 한두 번도 아니면서 이번만은 유독 수일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의 크기가 컸다. 상실감. 허무감. 박탈감. 분노. 괴로움. 무엇 하나 맞는 단어가 없었다.

수일은 삶의 의지가 꺾이는 기분이었다. 저를 끌어안고 같이 살자고 말해 주는 두산이 있는데도,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도 수일은 너무 죽고 싶었다. 이런 취급을 당해 가며 뭐 하러 여태까지 살아 있었는지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착하게 산 게 무슨 자랑이라고 두산의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살인자란 소리를 들어도 죗값을 치르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리 인대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밥 한 끼 먹겠다고 라면 죽을 끓이고 극심한 통증을 참고 있었던 제가 그렇게 미련할 수가 없었다.

두산에게 악을 쓰며 죽겠다고 말했지만, 정작 죽지도 못하는 자신이 나약하게 느껴졌다. 죽을 거였으면 진즉에 죽었어야지.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면서 왜 살아 있냐고 수일은 자신에게 다그쳐 물었다.

싸구려 크림빵 하나 사 먹지도 못하면서, 그 아픈 다리를 끌고 라면을 사서 곰팡내 나는 손바닥만 한 방으로 기어갔던 자신이 비참했다.

수일은 어르신을 원망하고 진상을 알려 준 두산을 원망했다. 그냥 쓰레기처럼 살다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두산이 저 어린 해피까지 데리고 저를 주우러 온 건지 몰랐다. 반가운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진상을 알았다고 해도 수일이 그 순간 품었던 살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걸 실행에 옮긴 자신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사고로 살아남았던 백태섭과 문일준은 운이 좋았고 역시나 살아남았던 자신은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평생 지독하게 운이 나빴던 수일은 죽고 싶어서 저질렀던 사고에서조차 운이 나빠 살아남았다. 그러니 이용당해도 싸지. 이런 일을 겪어도 할 말이 없었다.

원망의 화살은 어느덧 윤수일, 자기 자신을 향했다. 새벽이라 그랬을까, 수일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두산의 온기에도 계속 자학만 했다. 이 불운이 두산에게 번질까 봐 두려웠다.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해피를 보는 것조차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젠 어머니와 했던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다.

“두산아. 나 화장실.”

“어? 그래.”

수일은 두산의 도움을 받아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등을 돌린 채 얼른 욕실 문을 닫았다. 조용히 문을 잠갔다.

약속은 깨졌다. 지킬 약속이 남아 있지 않으니 이젠 맘 편히 죽을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생각난 게 참 다행이었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해피도 봤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두산도 봤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평생 지독하게 운이 나쁘더니 마지막에서야 드디어 보상을 받는구나 싶었다. 차갑고 곰팡이 핀 골방이 아니라 비싼 호텔에서 죽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수일에겐 호상이었다.

아무도 제 주검을 거둬 주지 않을까 봐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혼자 객사할까 봐 두려워했던 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안심이었다. 수일은 기쁜 마음으로 수건을 엮었다.

전에 한번 목을 맨 시체를 본 적이 있었는데, 똥오줌을 싸서 냄새가 지독했었다. 그 사람도 그럴 줄은 모르고 목을 맸겠지 싶어서 마개는 열어 둔 채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었다.

입고 있던 부드러운 잠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알몸인 채로 수건을 마저 엮었다. 목에 충분히 두를 만큼 엮자 이번엔 꼼꼼하게 몸에 비누칠을 했다. 미끄러워야 실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다리 하나가 성치 못한 것도 어쩌면 이번에는 꼭 죽으라는 하늘의 계시인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싶었을 때, 벽에 붙은 수도꼭지에 수건을 단단히 두르고 제 목에 걸었다. 전신에 힘을 풀어 아래로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비누 때문에 몸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수건이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생리적 현상으로 생긴 눈물로 눈앞이 흐려졌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흐윽, 윽… 크읍.”

숨이 막혔다. 이렇게 죽는구나. 죽음은 생각보다 쉽고 간단했다.

바보, 천치. 혼자 죽었어야 했는데, 보기 좋은 것도 아닌 자신의 시체를 거둘 두산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두산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다. 미친 새끼. 왜 하필 더러운 제 시체를 두산에게 거두게 하는 걸까.

적어도 두산만은 저와 관련된 좋은 추억만 간직하게 하고 싶었는데, 못 할 짓을 한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머리가 어찌 되었나 보았다. 비참한 말로를 두산에게 보여 줄 생각에 수일은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들었다. 왜 자신은 제대로 된 인생을 누릴 생각은 못 하고 죽으려고만 했을까. 사랑하는 남자가 같이 살자고 미안하다고 말해 주었는데,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죽으려고만 했던 걸까, 수일은 자신이 저지른 마지막 행동을 지독하게 후회했다.

돈이고 시간이고 마음이고, 평생 여유라곤 없이 산 수일은 결국 죽음조차 서둘렀다.

발버둥 쳤다. 이미 늦었지만, 수일은 정말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수일에겐 행운이 따라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왜인지 몰랐지만, 두산을 처음 만났던 그때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화려한 셔츠를 입고 윤수일이란 이름이 적힌 스케치북을 손에 든 두산이 귀찮은 얼굴로 저기에 서 있었다.

“두… 사. 아.”

이름을 듣기라도 한 듯 그가 고개를 돌려 수일을 보았다. 두산이 환하게 웃자 사납던 인상이 소년같이 변했다. 눈부시게 예뻤다.

‘윤수일 행님 맞으시지예?’

두산이 수일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억… 두사, 나.”

목에서 수건을 벗겨 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발버둥을 쳐도 비누를 칠한 몸은 계속 미끄러졌다. 살고 싶은데, 살 수가 없었다. 점점 숨을 쉬기 어려워지기만 하고 정신은 흐려졌다.

미안해 두산아. 나 살고 싶어. 살고 싶은데 이번엔 정말 죽어야 하나 봐.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죽고 싶을 땐 죽지도 못했고, 정작 살고 싶은데 살 수가 없었다. 불운은 언제고 수일을 따라다녔다.

“두사… 나, 미, 아… 내.”

마지막 힘을 짜내 이렇게 말했다. 두산은 듣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사과하고 싶었다. 이런 못난 남자를 사랑한 두산에게 정말 미안했다.

우당탕탕,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수일의 숨이 돌아왔다. 콜록, 콜록, 콜록, 기침이 터졌다. 수일은 산소를 들이마시려 안간힘을 썼다.

“수일아! 씨발!! 수일아!!!”

두산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수일의 목을 조이던 수건을 제거하고 욕조에서 끌어냈다. 수일은 축 늘어진 채로 두산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기침과 헛구역질을 하는 와중에도 수일은 숨을 들이켜고 또 들이켰다. 욕실 바닥에 누운 채 두산의 호흡을 받아들였다. 두산의 뜨거운 숨결이 수일의 몸속으로 폐 속으로 들어오자 수일은 온몸을 덜덜 떨며 두산을 안았다.

“아흑… 나 살고 싶어. 흐으, 두산아, 나 너무 살고 싶어.”

“그래 살아야지. 내하고 살아야지!”

“미안해. 두산아…. 너 때메 죽고 싶었던 거 아냐. 흑… 진, 짜야.”

“안다. 다 안다.”

두산은 있는 힘껏 수일을 끌어안아 입술을 비비고 키스했다. 마르다 못해 뼈만 남은 어깨를 부둥켜안고 입을 맞췄다.

“아흐, 흑. 미안해…. 나두 행복해지고 싶었어”

“다 개안타.”

“정말루 미안해. 두산아. 너한테 상처 주는 일만 해서… 미안해.”

“으데. 내는 개안타. 내 상처 안 받는다.”

제 앞에서 죽으려고 했는데도 두산은 수일에게 험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꼭 끌어안고 괜찮다고 해 주었다.

수일은 제 속을 가득 채웠던 서러움을 모두 토해 냈다. 두산에 대한 미안함을 울음으로 대신했다. 엉엉 울다가 통곡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랐다. 딸꾹질이 날 정도로 울고 나서야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두산의 입술을 더듬어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뜨거운 살덩이를 물고 빨았다. 모자란 호흡을 두산의 숨결로 대신하며 살아 있음을 느끼려고 애를 썼다.

“두산아.”

“어! 내 여 있다. 내 니 꼭 잡고 있다.”

“나두 행복해지고 싶어.”

“그래. 내가 행복하게 해주께.”

두산은 수일에게 웃어 보였다. 쪽쪽쪽, 온 얼굴이며 온몸에 입 닿는 대로 뽀뽀를 해 주었다.

“이제 개안타. 내 여 있다.”

두산은 수일을 깨끗이 씻기고 머리를 말려 주었다. 수일은 두산이 씻기고 말리는 내내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두산에게 매달려 사과하고 또 사과했으며 행복해지고 싶다고, 너하고 잘 살고 싶다고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차갑던 몸에 온기가 돌고 힘들었던 호흡도 안정을 찾아갔다.

침대에 누워 두산의 품에 꼭 안겼다. 울음이 쉽게 그치질 않았다. 두산은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끝났다. 다 끝났다.”

스물다섯의 두산은 서른여섯이나 먹고도 철이 들지 않은 수일을 위로해 주었다. 상처투성이인 수일의 마음을 달래 주고, 수일이 꼭 지금의 두산의 나이일 때 저지른 일을 모두 감싸 주었다. 눈앞에서 죽으려고 했던 바보 같은 저를 안아 주었다.

“수일아.”

“응?”

“내 니하고 헤어지고 나서 발기부전에 걸맀다.”

수일은 울었다.

“거짓말.”

“진짜다.”

“너 지금 섰어. 흐윽… 어디서, 거짓말하니?”

“진짠데. 내 니하고 헤어지고 나서부터 이기 안 서서 딸도 몬 칬다 아이가.”

“어흐… 어떻게 믿어. 지금… 두, 흑, 섰는데.”

수일의 눈물이 두산의 옷을 모두 적셨다. 두산이 키득거렸다.

두산은 제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우는 수일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눈물 때문에 두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두산은 웃고 있었다.

“니는 우째 우는 것도 이래 예쁘노?”

쓰윽쓰윽, 혀로 눈물을 핥아 주었다. 조금 전 수일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누구보다 놀랐을 두산은 하나도 티를 내지 않았다. 헤어질 때는 분명 어린아이 같았는데, 어느새 단단한 남자가 되었다.

그 어떤 불안도 불운도 더는 수일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두산이 든든하게 막아 주고 있었다. 수일에게 온전히 평온한 마음만 남도록 애써 주었다. 수일은 두산에게 안긴 채 잠이 들었다.

***

“앙! 앙!”

“하, 이 새끼. 조용히 해라. 느그 엄마 잔다.”

“앙! 앙! 앙!”

“조용히 쫌 해라! 느그 엄마 잔다 아이가. 니는 와 말귀를 몬 알아 듣노?”

해피와 싸우는 두산의 소리에 수일은 잠이 깼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팔다리가 뻐근하다 못해 쑤셨다. 목 주변으로도 압박감이 심하게 느껴졌다. 새벽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 진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일은 많이 당황했다.

“깼나?”

“어? …응.”

수일은 인상을 쓰며 일어나려 애썼다.

“에헤이, 무리하지 말고. 일단 밥부터 묵고 병원 들렀다 내리가자. 그 기부쓰한 데 물 들어간 것도 봐 달라꼬 하고.”

“응.”

수일은 저도 모르게 목에 손을 뻗었다. 두산이 목 주변을 쓱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씨발, 피멍 들었네. 그래도 내가 입고 온 목티 입으면 가리는 지긋다.”

“앙! 앙!”

“알았다. 새끼야! 밥 주께.”

“두사… 나.”

목이 콱 막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자 두산이 급히 물컵을 가져와 내밀었다. 수일은 물을 모두 마시고 헛기침을 했다.

“해피는 뭐 먹어?”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차 안에 사료 있다”

“우… 유는?”

“물하고 사료만 있으면 되지. 야 얼라 아이다.”

“무슨 소리야. 아직 어린데.”

“얼라 아인데. 그라고, 니는 말하지 마라.”

“우유… 주자.”

“쯧. 알았다.”

수일이 사료를 가지러 나가려는 두산을 불렀다.

“두산아.”

“어?”

“저기 새벽에….”

“됐다. 목 아프니까 말하지 마라.”

문을 열고 나가려다 돌아선 두산은 수일에게 다가와 쪽,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씨익 웃었다.

“내 퍼뜩 갔다 오께. 얌전히 있으라.”

“응.”

이번엔 수일이 두산에게 뽀뽀를 했다.

해피가 두산을 따라 나가려다가 문이 닫혀 낑낑댔다. 발로 몇 번 문을 긁다가 돌아서서 수일을 올려다보았다.

“아빠한테 올래?”

수일의 쉰 목소리가 무서운지 해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정신없이 호텔 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조금 서운했지만, 한번 만져 준 적도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피야, 나두 니 아빠야.”

수일이 해피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해피는 생각보다 체구가 작아서 아무래도 종을 달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사람들이 실수로라도 밟지 않지. 수일은 해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잠시 후 두산이 사료를 들고 나타났고, 10분쯤 뒤에 룸서비스가 나왔다. 두산과 수일이 먹을 아침에 우유가 곁들여 있었다. 두산은 제 몫으로 나온 접시에 사료를 한 움큼 내려놓고 우유를 부었다.

“해피! 밥 무라.”

두산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해피를 부르고 던지듯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에 수일이 슬쩍 흘겨보자 ‘머?’ 하고 소리 없이 말했다. 해피는 좋다고 접시에 달려들었다.

반질거리는 은색 뚜껑을 열자 팥죽이 나왔다. 수일은 오랜만에 허기가 아닌 식욕을 느꼈다.

“니가 영 밥을 몬 묵길래 함 시키봤는데, 안 땡기믄 딴 거 시키주까?”

“아냐. 좋아.”

“뜨거우니까 천천히 무라.”

“응.”

수일은 서둘러 숟가락을 쥐었다. 숟가락을 든 손이 달달 떨렸다. 새벽에 죽자 살자 발버둥 쳤으니 몸이 말을 안 들을 만도 했다. 샌드위치 한 조각을 두 입에 해치운 두산이 입 안 가득 빵을 물고 다가와 수일의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 들었다.

“천천히 먹어.”

“어.”

우걱우걱 입에 든 걸 씹으면서 두산이 수일의 입에 팥죽을 떠 넣어 주었다. 팥죽은 눈물 나게 달았다. 두산은 한 손으론 샌드위치 조각을 쥐고 다른 손으로 수일에게 팥죽을 먹였다. 해피가 챱챱 소리를 내며 우유와 사료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이 모든 걸 다시는 못 볼 뻔했다는 생각에 갑자기 오한이 났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너무도 절실히 와닿자 수일은 음식을 삼킬 수조차 없었다. 두산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서 정말 미안했다.

수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 두산아. 나는 왜 멍청한 짓만 저지르는지 모르겠어. 왜 바보 같은 선택만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나 정말루 미쳤나 봐.”

“에헤이, 미안하단 소리 하지 마라. 듣기 싫다. 머, 니가 미친 거는 맞는데 그기 큰 흠이가?”

두산의 말에 수일은 웃었다. 미친 게 흠이 아니라고 말해 주어서 고마웠다.

“자, 아! 팔 아프다, 아!”

수일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고 팥죽을 마저 받아먹으려 입을 벌렸다.

“아.”

“옳지, 잘 묵는다. 아!”

“아! 너두 먹어 봐. 진짜루 달아.”

“알았다. 아!”

“아….”

이번엔 팥죽 대신 샌드위치가 수일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두산이 커다란 손으로 수일의 얼굴을 대충 닦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며 코까지 풀어 주었다.

자살 시도로 쑤시던 근육과 목을 제외하고 다른 곳의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수일은 이제야 눈물에 터서 갈라진 얼굴이 따갑다는 걸 알았다. 튼 손등도, 인대가 끊어졌다던 다리도 심하게 아파 왔다.

통증이 무척 반가웠다. 수일은 살아 있다는 벅찬 감동에 어쩔 줄을 몰랐다. 두산이 떠 주는 팥죽을 한 입 또 한 입 받아먹었다. 입 안 가득 단내가 진동했다.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두산의 얼굴을 매만졌다.

내 사랑.

수일은 세상에서 제일 단 두산에게 입을 맞췄다.

병원에 들러 잠깐 체크만 하고 부산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수일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피검사, 소변 검사에 엑스레이까지 찍고 혹시 모를 후유증에 대비해서 뇌와 척추 MRI까지 찍었다. 역시나 깁스한 곳엔 물이 들어가서 석고를 모두 잘라 내고 치료 후 새로 깁스를 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응급실 의사 하나가 두산을 따로 불렀다. 결과가 나쁘게 나왔나 싶어 두산은 답지 않게 긴장했다.

“보호자님.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구요, 아무래도 윤수일 환자를 정신과에….”

“정신과? 지금 우리 행님이 미칬다 이 말입니까?”

두산은 의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버럭 소리 질렀다. 의사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미쳤다는 말이 아니구요. 그게 자살 시도하신 건 맞으시죠?”

“예. 사람이 힘든 일이 있으면 욱해서 그랄 수도 있지예.”

얼굴을 들이밀고 얘기하는 두산을 피해 의사가 뒷걸음질 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 말은요,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상담이라도 받아 보시라는.”

“하, 씨발! 누굴 미친개이로 아나? 우리 행님 힘든 일 다 끝나서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게, 한번 자살을 시도했던 분들은 다시 시도할 확률….”

“고마 됐습니다!”

“아, 네…. 정 그러시다면.”

몇 번 더 진료를 권하던 의사는 두산이 계속 화를 내자 이내 포기했다.

“결과는 은제 나오는데예?”

응급실 의사는 피곤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쳐다보고 간호사를 불러 검사 시간을 확인했다.

“30분 정도면 나올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일단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이고 해서 입원 치료하셔야 할 겁니다. 가볍긴 해도 피부에 동상 증상도 있구요.”

“MRI 결과 이상 없으면 부산에 델꼬 가서 치료해도 되지예?”

“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잘 알겠습니다.”

두산은 방금 상담한 의사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씨발. 누굴 미친 사람 취급하고 지랄이었다. 두산이 수일을 미친개이 광년이라 부르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기분 나쁨이었다.

“정신과 좋아하시네.”

저딴 소리를 수일이 듣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두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시끄러운 응급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병원에 들어온 지 벌써 네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오랫동안 차를 타고 이동하기엔 수일의 몸 상태가 받쳐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비행기를 예약해 두었는데, 이렇게 지체하다간 비행기 시간이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새벽의 일은 수일의 잘못이 아니었다. 두산이 성미가 급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지난 3개월간 힘들게 살았던 수일의 상태를 잘 알면서도 그저 빨리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일단 말을 꺼내고 본 두산의 잘못이었다. 잘 달랜 다음 천천히 말을 해야 했는데. 씨발.

“돌대가리 새끼야. 니는 그래 머리가 안 돌아가나.”

두산은 저를 탓하며 수일이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수일은 두산을 보자 환하게 웃었다. 두산도 씨익 웃었다. 수일의 가느다란 목에는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의사 선생님이 뭐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수일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30분 뒤에 결과 나온다꼬 그때 얘기하자 카드라.”

“응. 저기, 나 괜찮으니까 나가서 뭐라두 좀 먹구 와.”

“내도 개안타. 결과 나오면 같이 밥 묵자.”

“응.”

앙상한 손가락이 두산의 손을 꼭 쥐자 두산은 수일의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입을 맞췄다. 간지럽다며 수일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약 때문인지 아니면 기운이 없어서 그런 건지 수일은 자꾸만 눈을 감았다. 두산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일은 쌕쌕거리며 잠이 들었다.

링거를 맞고 있는 팔엔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주사를 잘못 놓았다 싶어 두산은 눈에 불을 켜고 담당 간호사를 찾아 따졌지만, 영양실조로 인한 현상이라는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씨발, 좆같네.”

두산은 손바닥으로 짧은 머리를 앞뒤로 쓸었다.

응급실 침대 옆에 서서 곤히 잠든 수일을 내려다보았다. 핏기 없던 얼굴에 어제보다는 홍조가 일었지만, 여전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처음 응급실 의사의 입에서 영양실조라는 말을 듣고 두산은 하도 어이가 없어 미친놈처럼 웃었다.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던지 고작 3개월 만에 수일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황 씨가 사진을 보내다 만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헤어지고 첫 한 달, 두산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첫사랑의 실패는 두산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그날 수일이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아서 미칠 것 같았고 지켜 주지 못해서 화가 났다. 제가 이 정도로 무능한 새끼인 줄 몰랐던 두산은 할배나 어머니가 아닌 자신에게 분노했다.

그동안 할배의 전폭적인 지지와 어머니 치마폭 아래서 편하게 산 줄도 모르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두산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살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남들보다 눈치가 빨랐을 뿐 철없는 스물다섯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능력이나 경험으로는 자기 발톱의 때만큼도 못한 새끼가 할배를 등에 업고 지랄하고 다녔으니, 강재욱 본인은 얼마나 열이 받았을까.

씨발, 하다 하다 강재욱 입장에서까지 생각해 보려던 두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강재욱 그 씨발롬을 이해하려고 하다니 자신이 돌아도 단단히 돌은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처자빠져 있다간 아무 일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돈과 권력을 무기로 꼴리는 대로 살았으니 두산은 다시 그렇게 살면 되었다. 창피함은 잠시였다. 뭐 어쩌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애초에 수일이 저를 사랑하든 말든 상관도 없었으면서, 뒤늦게 수일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었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언제부터 미친개이 윤수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씨발. 두산은 수일을 너무도 사랑했고, 그 진심 하나면 충분했다.

부산 시민 모두가 롯데자이언츠의 한국 시리즈 우승으로 들떠 있던 10월 14일 토요일, 백두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일 먼저 할배에게 찾아가 정식으로 일을 배우고 싶다고 알렸다. 제 몫의 재산을 나눠 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했다. 기다렸다는 듯 할배는 밀레니엄 호텔과 나이트 소유권 및 운영권을 넘겨주었다. 조직 소속인 현수와 종국을 제 사람으로 달라고 하자 이번에도 흔쾌히 허락했다. 의아할 정도로 할배는 두산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런다고 또 속을 두산이 아니었다. 할배는 천년 먹은 능구렁이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두산은 이제 그를 믿지 않았다. 애초에 일이 이 지경까지 온 데에는 할배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종국을 시켜 할배가 사람을 써서 자신을 미행이나 도청하는지 알아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일단 미행하는 사람은 하나 있었지만, 도청은 없었다.

할배가 직속으로 데리고 있는 전문가들에 비하면야 한참 못 미치겠지만, 노종국도 특전사 출신의 실력자였다. 두산은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다.

현수는 예의 그 서글서글한 인상과 말솜씨로 불도저가 알고 지냈다는 아가씨들을 찾아다녔다. 처음에 경계하던 아가씨들은 현수와 몇십 분 얘기를 하더니 아는 걸 하나둘 털어놓았다. 그 정보를 가지고 불도저의 뒤를 쫓았고, 황 씨와 긴밀히 연락해 임상엽에게 얻을 정보가 또 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자신이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사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두산은 저를 백영물산 이사직에 앉히려는 할배를 만류했다. 대신 뒤늦게 할배가 힘을 쏟고 있던 해운 항만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어차피 맨땅에 헤딩하는 거라면 사무실에 앉아 있느니 밖으로 나다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할배는 누구보다 두산의 결정을 반겼다. 씨발, 뭐만 하면 좋아했다. 미친 할배였다. 아무튼 두산은 유명 대기업에서 과장으로 일했다던 사람을 과외 선생처럼 곁에 두고 해운 항만 전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해운업은 외국인들도 자주 만난다는 말에 중학교 때 포기한 영어를 a, b, c부터 다시 외웠다. 미모의 영어 선생이 매일 두 시간씩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고 수일을 아예 방치한 건 아니었다.

지난여름 석 달, 그가 얼마나 공들여 먹이고 입혔는데 두산의 품을 떠나자마자 수일은 거지꼴로 살았다. 2억이 든 통장에선 한 푼도 꺼내 쓰지 않았다. 두산은 수일이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사고 남은 돈을 생활비로 썼으면 했었다. 그렇게 1, 2년 살고 있으면 모든 걸 해결하고 데리러 가려고 했었다. 더는 수일을 괴롭힐 사람이 없도록 깔끔하게 처리하고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수일은 두산의 기대대로 살지 않았다. 사는 집은 열악했고 먹는 건 더 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병원에 꼬박꼬박 다니며 얌전히 눈 치료를 받고 집에서 쉰다는 거였다.

처음에 두산은 저나 황 씨 대신 수일을 만날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수일은 임상엽 그 씨발 새끼를 제외하고 친구나 지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 김경식을 떠올렸고 그에게 수일과 한 번만 만나 달라고 부탁했다. 김경식은 안 그래도 수일의 거처를 알아보려고 두산에게 연락할 참이었다고 했다. 10년 전 일로 수일에게 한번 사과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일을 만나 준다니 그것만으로도 두산은 쌩큐였다. 수일은 예상대로 김경식을 쫓아내지 않았고, 둘은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김경식의 말에 따르면 수일은 그때 평온해 보였다.

안도한 것도 잠시, 수일은 다음날부터 인력 사무소를 통해 노가다를 뛰기 시작했다. 그 힘든 일을 하면서 겨우 라면 세 개로 12일을 버텼다. 매번 찬 보리밥을 섞어 먹는다는 황 씨의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1년이 아니라 몇 개월 만에 수일이 굶어 죽거나 공사판에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는 수일의 모습에 두산은 돈이라도 좀 쓰고 살라고 말하려고 수일을 직접 찾아갔다. 조금은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웬걸.

두산을 보자마자 수일은 미친놈처럼 고함을 지르고 발악했다. 입에 거품까지 물고 두산을 밀어냈다. 급기야 눈을 까뒤집더니 기절을 하고 말았다. 제 앞에서 쓰러져 경련하던 수일을 보고 두산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제 손으로 수일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수일은 그날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건 참 다행이었지만, 두산은 더는 수일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수일을 서울로 보내고 처음 그랬던 것처럼 몇 번이고 서울에 올라가 먼발치에서 수일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공사장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쭈그리고 앉아 등신처럼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왜 그렇게 수일 앞에서만 한없이 나약해지는지 몰랐다.

결국 황 씨를 시켜 쌀을 주고 그놈의 라면도 안겼는데, 수일은 그걸 던져 버리고 대신 자취를 감췄다. 방을 빼고 여관을 전전했다. 좆같았다. 수일은 절대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더 두산을 안달하게 했다. 1, 2년 뒤 좋아하시네. 두산은 죽을 맛이었다.

하루에 세 시간도 잘 수가 없었다. 수일이 어떻게 사는지 뻔히 아는데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주 심각한 일까지 벌어졌다. 수일의 얼굴만 떠올려도 발딱발딱 잘만 서던 것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씨발, 스물다섯에 발기부전이라니 두산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지 않았다. 이 무슨 쪽팔린 일인가 싶었지만, 어차피 수일이 아니면 쓰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미친놈처럼 일만 했다. 부지런히 회사를 나갔고, 사업이든 영어든 닥치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밤에 홀로 돌아와서 외로움에 침대를 뒹굴었다. 수일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기 일쑤였다. 매번 헤어질 당시, 그가 서울로 돌아가던 상황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단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강재욱에게서 아버지 일에 할배가 연루되었다는 말을 듣고 바로 할배를 찾아갔던 날을 두산은 몇 번이고 떠올렸다. 하나뿐인 아들 백태섭을 그렇게 만든 사고에 대해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할배는 10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았었다. 사고와 연루된 수일을 보호해 달라고 했을 때도 너무도 쉽게 두산과 약속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할배도 자신처럼 아버지에게 정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날 등산을 하면서 할배는 수일에게 지나치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 했더라.

‘글마도 죽다 살아났다. 그만치 고생했으면 보상받아야지.’

그래. 보상. 할배는 분명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을 했었다. 할배는 좋은 사람이긴 해도 박애주의자는 아니었다. 불우 이웃 돕기 성금조차 실리를 따져가며 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들을 저렇게 만든 수일의 병원비를 내준 것도 모자라 보상이라니. 실수든 사고였든 가해자에게 보상을 논하는 일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당시 두산은 할배와 의견이 일치하는 게 기뻐서 할배 말을 귓등으로 들었지만, 분명 다른 게 더 있었다. 두산은 확신했다. 문제는 할배 말고 그 일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다 죽고 없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사진관 그 씨발롬까지 찾아가 다시 조졌지만, 그놈은 들은 소문은커녕 제 형 일에 대해 아는 게 좆도 없었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하나도 없었다. 두산은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경식이었다. 수일이 입원한 병원에 세 번이나 찾아가서 위로해 줬던 그 남자. 지난 일을 사과하고 싶다며 수일을 만나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던 그 남자에게서 뜻밖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11월 23일이었다.

[안녕하세요. 두산 씨. 저기, 김경식입니다. 그게요, 제가 최근에 뭐가 생각이 났거든요.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그…교통사고 난 날 새벽에요, 아무래두 백태섭 방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제가 본 것 같습니다. 그날도 백태섭을 뒤쫓아서 호텔로 따라갔었거든요. 저는 비상계단 쪽에 숨어서 감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 거예요. 마침 백태섭 방으로 룸서비스가 들어가길래 그 사람만 나오면 화장실 가야지 했는데, 호텔 직원 나오고 얼마 뒤 방에서 남자가 하나 나왔어요. 하마터면 마주칠 뻔해서 똑똑히 기억합니다. 온통 시커먼 옷에 시커먼 모자를 쓰고 있길래 호텔 손님치곤 옷이 좀 이상하다 했죠. 그땐 당연히 다른 방 손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두 그 남자가 나온 방 위치가 백태섭 방이 맞는 것 같아요. 그리구, 좀 찜찜한 게 하나 더 있는데…그게, 그 새벽에 호텔 앞에 임상엽이가 서 있었어요. 잘하면 그 새끼도 그 남자를 봤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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