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81)

수일은 늦잠을 잤다. 잠이 깼을 땐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잠깐 당황했다. 눈을 빠르게 껌뻑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제 병원 검사 후 잡은 여관이란 걸 깨닫고 다시 눈을 감았다. 여관 특유의 꿉꿉한 느낌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늘 이런 싸구려 여관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곳에서 살았던 수일은 하루도 안 되어 이곳에 익숙해졌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달콤한 꿈을 꾸었다. 해가 잘 들던 넓은 거실과 늘 뽀송뽀송했던 이불과 침대, 그리고 욕조가 있던 욕실까지. 먹기는 또 얼마나 잘 먹었던지. 생전 처음 홍삼에 녹용이 든 보약을 먹었다. 뭐 하나 수일에게 과분하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두산 덕에 뜻하지 않게 호사를 누렸다.

고생만 하다 갔던 할머니나 아버지에 비한다면 서러운 인생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싸구려 여관도 냄새나는 이불도 수일은 감사히 여겼다. 평생 이런 것밖에 모르다 갈 수도 있었는데 세상에 얼마나 좋은 게 많은지 알았으니 되었다.

어제 수술 전 검사를 위해 8시간 공복을 지키느라 물밖에 먹지 못했던 수일은 검사를 마친 후 여관부터 잡았다. 병원 근처는 비싸서 두 정거장을 걸어갔다.

허기가 져서 쓰러질 것 같았다. 짐만 놓고 나가서 뭐라도 먹으려 했는데, 막상 여관에 들어가니 너무 지쳐 나갈 힘이 없었다. 잠깐 쉬다 가야지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고, 깼을 땐 한밤중이라 어딜 가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자고 또 자고 지금에야 일어났다. 잠병이라도 난 것 같았다.

내리 잠만 자니 좋은 점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하루를 보냈다는 거였다. 슬슬 일어나려는데 현기증이 났다. 그러고 보니 30시간 넘게 공복 상태였다. 물 몇 모금 마신 게 다였다.

차디찬 방바닥에 손을 짚고 눈을 꼭 감았다. 어지럼증이 잦아들자 끙, 하고 한 번에 일어났다. 여관에는 칫솔이 없었다. 치약을 손가락에 짜서 대충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거울 속 남자는 무표정했다. 어찌 보면 맹해 보이고 또 어찌 보면 아파서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창백한 안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수일은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제야 사람답게 보였다.

귀중품이라곤 통장과 지갑밖에 없었지만 여관에 두고 가자니 불안했다. 수일은 허리춤엔 통장을, 주머니엔 도장을 넣고 상의를 바지에서 빼 가렸다. 지갑에는 현금 만 원만 두고 나머진 양말 안에 넣었다.

의사 말론 수술 후 적어도 한 달은 힘을 주거나 무거운 걸 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한 수술인데 돈 몇 푼 벌자고 눈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10월 중순까진 일하길 포기해야 했다.

수일은 내일모레까지만 여관에 있다가 전에 살던 동네로 가서 방을 구할 예정이었다. 비교적 저렴한 방이 많고 익숙한 동네라 한 시간이면 달세방을 구할 수 있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일할 곳을 찾는 게 목표였다. 한두 달은 모아 둔 돈으로 생활해야 했으니 최대한 돈을 아끼는 편이 좋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었다. 딱 백만 원 있던 통장에 사장에게서 받은 월급 33만 원이 추가되었다. 90년 이후 하루가 다르게 달세가 뛰었지만 전에 살던 세 평 남짓한 방이 12만 원이었으니 이번에도 그 정도 가격으로 숙소를 잡으면 되었다. 연탄을 쓰면 추운 겨울도 제법 따뜻하게 날 수 있을 테고, 먹는 것만 최대한 아끼면 추가된 금액만으로도 두 달은 버틸 수 있었다.

30만 원 정도의 여윳돈만 있어도 이렇게 마음이 편한데 수일은 그동안 이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 살았다는 게 조금 씁쓸했다. 백만 원은 절대 손을 대지 말아야지. 보험은커녕 의료 보험증도 없는 수일은 아프면 끝이었다. 병원비에 약값, 어느 것 하나 비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은 건강한 것만으로도 복 받은 거였다.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았다. 벽을 붙들고 간신히 밖으로 나간 수일은 눈앞에 보이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주문부터 했다. 모래를 씹는 것처럼 입 안이 까슬까슬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허기를 달래기에만 급급했다.

뜨거운 국물에 혀가 데고 입천장이 까졌지만 수일은 개의치 않았다. 이 몸뚱이는 아낄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해하면서까지 망가지게 할 마음도 없었다. 사지 멀쩡한 몸뚱이가 있어야 일을 하고 일을 해야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5년. 딱 5년 살 만치만 몸을 간수하면 되었다. 그러니 입천장쯤 백번 까진들 무슨 상관이랴.

시간이 남아돌았다. 슈퍼에 들러 칫솔을 사고 간식으로 먹을 크림빵도 하나 샀다. 내일 아침 첫 수술이라 밤 9시 이후부터는 금식해야 했다. 당장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맥주 한 잔도 안 된다고 의사가 경고했었다. 안압이 올라가면 수술을 못 할 수도 있으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수일은 할 일 없이 동네를 배회했다. 걸을 때마다 주머니 속 동전이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공중전화 두 대를 지나쳤다. 서울에 돌아왔다고 연락할 만한 친구도 지인도 수일에겐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지독한 외톨이였단 걸 또 한 번 절감했다. 일을 하면 좀 나아지려나. 세 번째 공중전화기를 지나쳐 가려다가 발길을 되돌렸다.

지인이라 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상엽의 안부를 묻기 위해 수일은 전화기 앞에 섰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었다. 제 손으로 직접 끊어 낸 인연이었으므로, 다정한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그저 나 서울 왔다, 잘 사냐 정도만 얘기할 생각이었다. 상엽이 소개해 준 나이트에 갈 마음이 없다는 의사도 전달해야 했고.

없는 전화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잘못 눌렀나 싶어 수일은 버튼을 천천히 눌렀다. 번호를 인식하지 못할까 봐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렀다. 역시나 없는 전화번호였다.

88올림픽 때쯤 상엽이네는 그 비싼 집 전화를 개통했다. 전화기를 잠가 둔 채 꼭 필요한 때 말곤 쓰지 않았다. 거는 건 무조건 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그래도 그 주변에서 전화기가 있는 집은 상엽이네가 유일했다. 급한 연락을 받아야 하는 이웃들에게 돈을 받고 전화번호를 빌려주었다. 그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도 제법 쏠쏠하다며 상엽이 웃던 게 생각났다.

이사라도 갔나? 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엽의 삐삐 번호를 적어 둔 수첩을 놓고 와서 하는 수 없이 여관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여관 입구에도 공중전화가 있어서 이번엔 그걸 이용했다. 삐삐도 없는 번호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나쁜 예감이 들었다.

결국, 7시쯤 상엽이 일하던 나이트로 찾아갔다. 전에 방문했을 때 잠깐 인사했던 지배인이 수일을 알아보았다.

“어! 10월부터 출근이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안녕하세요. 저기, 상엽이는….”

수일은 청소 중인 실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상엽이 걔? 일 관둔 지 좀 됐는데 몰랐어요?”

“어디 다른 데로 갔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구.”

지배인은 주위를 흘끔거리며 수일에게 바짝 다가왔다. 속삭이듯 말했다.

“다쳤대요. 사고라 그러는데, 나도 잘은 모르겠고 보름 전에 발목을 절단했다 그러더라구. 일한 만큼 돈 받으러 걔 여동생인가가 찾아왔었어요. 그래서 사장이 돈 주면서 위로금도 조금 줬다 그러던데.”

수일은 멍했다. 보름 사이에 멀쩡하던 상엽이 다쳤다. 그것도 발목이 절단될 정도로 큰 사고를 당했다. 사정이 빤한 상엽이네였다. 늘 그랬듯 급전이 필요해서라도 수일에게 연락하고 남았을 텐데 상엽이나 그의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아니면 두산이 중간에서 소식을 가로챘을 수도 있고. 수일은 보름 전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수일에겐 보름 전 일보다 차라리 10년 전 일이 더 또렷했다.

“오늘 사장님 좀 늦으실 건데 기다릴래요?”

“아, 아닙니다. 저 그만 가 볼게요.”

“그래요 그럼. 담에 놀러 와요. 여기 내 명함.”

지배인은 영업용 명함을 내밀었다. 수일은 명함을 받아 들고 나이트를 나선 다음 보는 사람이 없을 때 길바닥에 버렸다.

아무리 상엽을 미워했어도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다. 교통사곤가? 한숨이 났다. 수일은 상엽이네 집으로 바로 찾아가 봐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앞도 안 보고 터덜터덜 걷다가 수일은 홱 몸을 돌렸다. 나이트에서부터 저를 따라다니는 중년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왜 자꾸 따라오세요?”

“아이고, 들킸네.”

전혀 놀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일부러 들키려고 대놓고 쫓아다니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는 ‘우리 얘기 좀 하입시다’ 했다.

“누구세요? 저기 혹시 사모님께서 보내신 거면.”

“아입니다. 일단 커피숍이라도 드가실랍니까?”

수일은 한숨을 쉬었다. 고작 하루 만에 사람이 붙었다. 사모님이 아니라면 어르신일 테고 어르신도 아니라면 두산일 터였다.

질렸다.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지긋지긋했다. 적어도 하루만이라도 잊고 살게 해 주면 안 되는 걸까. 자신에게 왜 이렇게 모질게 구는지 몰랐다.

다부진 체격의 남자는 수일과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상엽이 일하던 나이트가 워낙 후져서 근처에 있는 커피숍이라 봐야 다방과 다를 바 없었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낡아서 솜이 튀어나온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수일은 오렌지 주스를 시키고 남자는 쌍화차를 시켰다.

“내는 황용재고예, 고마 다들 황 씨 아이면 황씨 아재 이래 부릅니다. 편한 대로 부르이소.”

“…….”

“임상엽이 찾아왔는 갑지예?”

수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조폭 냄새가 물씬 났다. 인상은 좋았지만, 나이에 비해 탄탄한 체격도 그렇고 까무잡잡한 건강한 얼굴도 예사롭지 않았다. 흥신소 아니면 대부업체 쪽인 것 같았다. 혹시 상엽이 빚이라도 진 걸까.

“저 돈 없어요.”

수일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황 씨가 허허, 하고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돈 받으러 온 거 아입니다.”

마침 음료가 나왔다. 수일은 앞에 앉은 남자를 경계하며 마실 거엔 손도 대지 않았다. 반면 황 씨는 날계란을 한입에 먹고 후루룩 소릴 내며 차를 마셨다. 수일더러 먹으라고 손짓했다.

“누가 시켜서 저 미행하신 거예요?”

“두사이요.”

“저는 두산이한테 볼 일 없습니다. 이만 가 볼게요.”

“에헤이, 잠깐만 앉아 보이소.”

황 씨는 일어나려는 수일을 급히 잡아당기며 잠깐이면 된다고 했다.

“진짜로 잠깐이면 됩니다.”

잡아당기는 힘이 어찌나 센지 수일은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 아침 7시 수술이라면서예? 전신마췬데 보호자도 없고 해서 두사이가 저보고 가달라고 했습니다. 뭐 낼 아침에 보는 것보다야 미리 얼굴이라도 익히는 기 좋지 않겄나 싶어서 따라왔고예.”

“아뇨. 그러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보호자 없어두 된댔어요. 전신 마취라도 금방 깰 거고 네다섯 시간만 있으면 약 기운도 다 빠져서 운전만 안 하면 괜찮대요.”

“그래도 정신이 없을 낀데, 눈까지 하나 막고 우예 먼 데를 걸어가실라고예? 가다 자빠지기라도 하면 안 된다 아입니까?”

“누가 걸어간대요? 택시 탈 겁니다. 그 정도 쓸 돈 있어요.”

수일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지만 눈을 피하진 않았다. 볼 것도 없는 수일의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보았다. 쌍화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맛을 다셨다.

“두산이가 제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요, 이제 저한테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전해 주세요. 저 정말 괜찮습니다.”

괜히 앞에 있는 남자에게 짜증을 낸 것 같아서 수일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라믄 눈 회복되고 나서 우리 사무실에서 일 안 할랍니까? 힘쓰는 일 아이고예 고객 전화 응대하고 필요한 데 연락 돌리고, 우체국하고 은행도 댕기오고 머 그런 일입니다. 가끔 급한 용무 있으면 야근도 할끼고예. 월급은 나이트에서 일하는 것보다야 짝겠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 지장없을 만치 드립니다.”

황 씨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수일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수일은 인상을 썼다.

“두산이 아는 사람한테 도움받으면서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뭐 두사이가 시켜서 찾아온 거는 맞는데예, 일자리 주란 소린 안 했습니다. 요거는 제 순수한 의도로 제안 드리는 기지 다른 뜻 일절 없습니다.”

조금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황 씨가 반박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그러시면 저는 또 다른 데로 도망가야 하는데, 제가 너무 힘듭니다. 평생 나고 자란 곳에서 살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수일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음료값을 계산하려는 수일을 황 씨가 극구 말렸다. 워낙 목소리가 큰 남자라 자꾸 거절하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이번은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었다. 한 모금도 안 마셨으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수일은 커피숍을 나섰다.

손에 들린 황 씨의 명함을 버리려다가 일단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두산이 아는 사람이라서 마음이 약해졌다. 이러는 자신이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제게 잘해 준 것 없는 상엽조차 끊어 내질 못하는데 사랑했던 남자는 오죽하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겠지. 수일은 여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상엽이 걱정되긴 했지만, 일단 내일 있을 눈 수술이 우선이었다. 얼마나 돌아다녔다고 수일은 금세 지쳤다. 여관으로 돌아가서 사 둔 크림빵 하나만 먹고 자기로 했다. 잠을 자야 잡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산한 지하철에 앉아 멍하니 앞사람을 보았다. 연인인 남녀가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두산과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다가 수일은 정색했다. 손잡았던 사람이 두산만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바보같이. 한숨 대신 눈을 감았다.

“에헤이, 손이 와이리 찹노? 이리 도.”

귓가에 두산의 커다란 음성이 들렸다. 수일은 놀라지 않았다. 자기가 불러낸 소리였으니까 놀랄 필요가 없었다. 상상 속의 두산은 여전히 뜨거웠다. 차갑던 손에 온기가 돌았다. 이러는 자신이 우스워서 고개를 저었다. 수일은 눈을 떴다. 옆자리 앞자리 그 어디에도 두산은 없었다.

“너 왜 이래? 미쳤어?”

수일은 혼잣말을 하며 저를 나무랐다. 목소리가 생각한 것보다 컸던지 앞의 연인이 눈을 크게 뜨고 수일을 쳐다보았다.

“뭘 봐요?”

수일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릴 역이 아닌데 일단 내렸다. 창피했다.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며 수일은 계속 혼잣말을 했다.

“씨발, 너 자꾸 이럴래? 누가 보면 10년 사귀다 헤어진 줄 알겠다. 정신 차려, 윤수일.”

이번에도 목소리가 컸다. 오늘따라 제 목소리 크기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니면 수술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수일은 손바닥으로 제 입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렇게 해야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말을 막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찰싹거리던 소리가 어느새 퍽퍽 소리로 바뀌었다. 수일의 손바닥에 피가 묻어났다.

“미친놈.”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다음 열차가 도착했다. 멍하니 있던 수일은 문이 닫히기 전 간신히 열차에 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수일에게 한 번씩 머물다 갔다. 수일은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피를 닦으며 흔들리는 지하철에 몸을 의지했다.

혹시 몰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그 황 씨라는 남자가 이 광경을 목격하지나 않았나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를 미친놈으로 보면 어쩌나, 두산에게 이상한 소리를 해서 걱정 끼치면 어쩌나. 수일은 이 와중에도 두산 생각만 했다.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은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수일은 미치지 않았고, 조금 전 일도 그저 어린애 장난 같은 거였다. 사소한 자해. 칼로 몸을 그은 것도 아니니 이런 것쯤 괜찮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자기 뺨을 때리는 사람도 있고 주먹으로 치는 사람도 있는데, 고작 입술 몇 대 때렸다고 이상한 놈 취급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을 집었다. 명함에도 피가 묻었다. 황용재. 황 씨. 마시진 않았지만, 오렌지 주스값을 내게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누굴 거지로 아나. 나도 그런 것쯤 낼 돈 있는데.”

또 목소리가 크게 나갔다. 수일은 손을 들어 입을 때리려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지하로 다니느라 검게 변한 유리문에 인영이 비쳤다.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얼굴이 거슬려 돌아보자 아무도 없었다. 유리문에 비치는 남자는 윤수일,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이목구비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걸까. 그새 눈이 먼 건 아니겠지. 수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른 여관으로 돌아가서 잠을 자야 했다.

피곤하니까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싶어 한심했다. 수일은 손바닥으로 다 터진 입술을 가렸다. 지하철은 심하게 요동쳤다. 몸이 버티지 못하고 몇 번이고 세게 문을 들이받았다.

아팠다. 몸이 너무 아파서 얼른 내리고 싶었다. 다행히 금방 내릴 역에 도착했고, 수일은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급히 빠져나갔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자 살 것 같았다.

수일은 지상으로 나와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슬프지도 않은데 눈에서 물이 나왔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얼른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밑에서 발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걸음을 떼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 마! 씨발, 잡지 말라구!”

수일은 울부짖었다. 한번 터진 눈물은 이유도 없이 계속 흘렀다.

“피곤해 죽을 것 같단 말야. 제발 좀 내버려 둬.”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몰랐다. 조금 전까지 시원했던 공기가 너무 차게 느껴졌다. 한기가 들었다. 수일은 두 팔로 제 어깨를 끌어안고 간신히 한 걸음씩 발을 옮겼다. 외로웠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약속한 5년 중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수일은 사는 게 지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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