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었다. 늘 그랬듯 올해도 수일은 생일 케이크는커녕 미역국도 먹지 못했다. 어제 너무 속상해서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신 수일은 아침 겸 점심상으로 북엇국을 받았다. 물론 식당에서 배달한 음식이었다. 그게 다였다.
다행히 혼자는 아니었다. 남이긴 해도 덩치들이 같이 있었고, 오성관에 출근하면 밴드와 영희 그리고 숙소 동생들까지 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수일이 지나온 생일 중 나름대로 좋은 날에 속했다.
수일은 내일 새벽 첫차로 서울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어르신 말론 가자마자 병원으로 가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18일 오전 수술이 잡혀서 수술 전 검사를 해야 했다. 수술 시간도 1시간 남짓이었고, 입원할 필요조차 없었다. 4, 5시간 마취가 깰 때까지 병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수일에겐 돌아갈 집이 없으니 검사를 마치면 병원 근처에 여관이라도 잡아야 했다. 떠돌아다녔던 수일에겐 그런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수일은 쌀 짐도 없었다. 두산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그 까만 여행 가방 하나만 들고 가면 되었다. 어제 두산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더러워진 여름옷들은 덩치들이 바로 세탁소에 맡겨 주었다. 오늘 중으로 찾아온다고 약속했다.
두산과 마지막 데이트도 못 하고 마지막 무대도 혼자 올라야 하겠지만, 그거면 되었다고 수일은 생각했다. 호텔을 나서기 전 두산이 예쁘게 웃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거면 충분하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어머니에게 굴복한 일은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머니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어르신께서 제게 한 약속이었지 어머니가 한 약속이 아니었다. 아무리 수일이 무릎을 꿇고 빌어도 그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였다.
어르신의 감언이설에 속은 것도, 두산을 호텔에 버리고 온 것도 수일이었다. 음성을 남긴 것도 자신의 선택이었다.
수일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았다. 바보 같을 정도로 앞뒤가 꽉 막힌 것도 알았다. 자신이 이런다고 세상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을 것도 알았고, 두산의 할아버지나 어머니가 진심으로 용서하며 대견해하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갖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가정을 두 번 깨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일은 혼자고 저쪽은 다수였다. 저야 혼자 괴로워하다 혼자 죽으면 그만이지만 수일이 자기 말을 지키지 않으면 한 가족이 고통받았다. 집안의 가장인 어르신과 어머니가 제일 고통받을 테고 그 아래로 자식들과 손자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야 했다.
아무리 두산이 괜찮다고 해도 두산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한창때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그 심정을 누가 헤아리랴.
대신 5년을 벌었으니 수일은 더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뭐라 말해도 두산에겐 비겁한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노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수일은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 옳은 선택을 한 거라고 주문을 외듯 되뇌었지만 괴로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한참을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다.
벽에 걸린 붉은색 무대복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저걸 입고 무대에 선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마지막 무대인 만큼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났으면 했다. 정신이 나가서 울고불고하던 마르고 볼품없는 사내가 아니라 쏟아지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남자로 기억하길 바랐다. 원래는 두산이 그래 주길 바랐는데, 그럴 수 없으니 자신이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다.
밤무대 가수 윤수일은 마지막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웠노라고 당당히 말하리라. 자신은 늙어 죽을 일은 없으니, 죽기 전에 이날을 떠올리면 딱 좋을 것 같다고 수일은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다대포에서 만나자고 했던 말들과 호텔에 남겨 둔 쪽지가 마음에 걸렸다. 괜히 써 두었다고 자책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잘됐다. 제가 두산이라면 어제 그 일을 겪고 음성까지 들었다면 정이 뚝 떨어지다 못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왕 미움을 받을 거 확실하게 받는 편이 더 좋았다.
수일은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두산아.”
겨우 말을 뱉었다.
“정말 미안해.”
수일은 울지 않았다.
덩치들은 수일을 태우고 오성관으로 향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림자처럼 수일을 따라다녔다. 수일은 대기실에 무대복을 내려놓고 사장을 찾아갔다. 같이 들어오려는 두 사람을 겨우 문 앞에 세워 두고 혼자 들어갔다.
사장은 흘끔 수일을 쳐다보았다. 후루룩 소리 내며 커피를 마셨다.
“사장님, 죄송하게도 오늘이 제 마지막 무대가 될 것 같습니다.”
수일의 말에 사장은 귀를 후볐다.
“여 니 월급. 일한 날 수만큼만 넣었고, 5만 원은 뽀나스다.”
사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흰 봉투를 집어 내밀었다. 수일은 천천히 다가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래. 가 바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장은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젓기만 했다. 수일은 얇은 돈 봉투를 손에 꼭 쥐고 방을 나왔다. 여기도 이젠 안녕이었다.
수일은 슈퍼에 들러 일회용 카메라를 샀다. 오성관 외부 사진도 찍고, 내부도 찍었다. 보는 사람마다 작별 인사를 하며 한 장씩 사진을 찍었다. 누군 흔쾌히 응했고 누군 끝까지 마다했다.
현철이 무척 아쉬워했다. 현철도 다음 달부턴 오성관을 떠나 본격적으로 도배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수일은 누구보다 현철의 결정을 반겼다.
“갈 데는 있습니까? 행님.”
“네. 있어요. 참, 정애 씨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예. 걱정하지 마이소. 정애도 행님 가는 거 알면 억수로 서운해할 낍니다. 내도 서운코예.”
“저두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야말로 행님 아이었으면 장개나 갔겠습니까? 혹시 부산에 오시면 연락주이소. 제 명함 여 있습니다.”
현철은 명함 뒤에 연락처를 적어 주었다. 은아 씨처럼 자기 집 전화번호를 거리낌 없이 알려 주었다. 고마웠다.
“이따가 행님 무대 보러 내리가께예.”
“네. 꼭 와요.”
수일은 영수와 다른 숙소 동생들에게도 일일이 인사하고 다니며 마지막 무대니 보러 오라고 일렀다.
“오늘 마지막이시라면서예?”
키보드 웅이가 물었다.
“네.”
“아, 아쉽다. 행님처럼 잘생긴 가수하고 은제 또 무대에 서보겠습니까?”
“말이라도 고마워요.”
“진짠데. 그나저나 갈 데는 있습니까?”
“네.”
“맞다, 이 부산 바닥보다야 서울이 낫지.”
다들 갈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한곳에 머무는 게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직업이라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누가 누굴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정 갈 데가 없다 하면 직업소개소 명함이라도 내밀었다. 물론 수일은 그런 걸 받아 본 적이 손에 꼽지만 말이다.
수일은 마지막 무대에서 부를 노래 리스트까지 적어 와서 밴드와 꼼꼼하게 리허설을 했다. 두산이 올 경우와 아닐 경우를 나눠 마지막 노래 두 곡을 선정해 두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다 같이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수일이 밥을 샀다. 탕수육에 깐풍기를 시키고 고량주도 한 병 나눠 마셨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요리도 하나씩 시켰는데, 수일은 자장면을 먹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한 그릇을 금세 해치웠다.
다들 수일이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 줄 알았다. 갈 곳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니 쉽게 속았다. 비싼 고량주를 한 병 더 시키고 마지막 남은 음식들을 싹싹 긁어 먹고 나왔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영희가 많이 아쉬워했다.
“행님,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왜 그러세요, 영희 씨. 영희 씨가 저한테 죄송할 게 뭐가 있다구요.”
“당연히 있지예. 친해질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다 막았다 아입니까.”
“저도 마찬가진 걸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웃으면서 헤어지니 얼마나 좋아요.”
“그래도….”
수일은 영희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영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 관해 몰랐으니 아쉬운 마음도 더 큰 게 아닐까 싶었다.
“근데, 그 옷 어데서 샀습니까? 행님한테 억수로 잘 어울리네예.”
“고마워요.”
“행님, 일루 와 보이소. 오늘 화장은 제가 해드리께예.”
영희는 괜찮다는 수일을 잡아다 앉히고 제 화장품을 써서 정성스레 화장을 해 주었다. 머리도 드라이를 다시 해 주고 무스도 직접 발라 넘겨 주었다. 솜씨가 수일보다 훨씬 좋았다. 거울 속 윤수일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이야, 참말로 잘생깄다.”
영희가 평소 하지 않던 칭찬까지 해 주며 웃었다. 덩치들도 덩달아 한마디씩 거들었다. 수일은 민망하면서도 좋았다. 무대복을 입은 영희와 수일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어깨동무도 했다. 수일은 환하게 웃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일은 10시 타임에 무대에 올랐다. 외부 손님들은 없었고, 다들 오성관 직원이었다. 영수가 꽃다발을 갖다 안겼다. 숙소 동생들은 하나같이 수일의 반짝이 무대복이 멋지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최근 전기세를 아낀다며 켜지 않던 사이드 조명까지 오늘은 특별히 켜 주었다.
무대에 올라가자 반짝이 의상은 그야말로 빛을 발했다. 비싼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수 윤수일의 노래 다섯 곡을 불렀다. 7년간 해 왔던 레파토리였지만 처음 하듯 최선을 다했다. 땀이 날 정도로 율동도 크게 하고 목청도 드높였다. 이후 수일은 할머니가 좋아하던 <동백 아가씨>를 부르고 아버지의 애창곡이었던 <마이웨이>도 불렀다.
<마이웨이>를 부르다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지금 수일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그 사고 당시에도 같은 노래를 떠올렸기 때문에 부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 잠깐이나마 아버지를 원망했던 게 죄송했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수일은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직원들의 환호 아래 어느덧 마지막 곡을 부를 차례가 되었다.
두산이 왔었다면 불러 줄 노래가 따로 있었는데,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수일은 밴드에게 다가가 마지막 곡을 알렸다. 우울한 노래로 청승맞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수일에게 두산은 좋은 추억이자 행복 그 자체였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난 기억합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