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81)

수일은 일어나자마자 구석구석 깨끗이 몸을 씻었다. 두산이 사 준 검은색 정장도 차려입고 머리도 보기 좋게 무스로 넘겼다. 거울 속 남자는 수척하긴 해도 멀끔했다.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어 보였다.

콘도는 실내가 아파트처럼 생겼고 고풍스러웠다. 창문 너머로 해운대도 내려다보였다. 제 평생 이렇게 좋은 곳에서 차례를 지내게 될 줄은 몰랐다.

수일은 어제 시장에서 사 온 음식들을 작은 상 위에 올렸다. 어르신이 그릇들을 마음껏 써도 된다고 했으나 남들도 쓸 접시에 차례 음식을 올리는 게 미안해서 봉지째로 올려 두었다. 형편없어 보여도 돌아가신 분들은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 주겠거니 했다.

차례상에 위패를 올려야 하지만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대신 앨범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을 꺼내 비스듬히 세워 두었다. 아기인 자신을 포함해서 가족 모두 밝게 웃고 있었다. 저도 언젠가 따라갈 테니 차례상에 제 얼굴이 들어가는 건 상관없었다.

수일은 소주잔 세 개를 나란히 놓고 술을 따랐다. 향을 깜빡했다. 제사며 차례를 지낸 지 너무 오래되어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준비한 게 이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무새를 고치고 절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론 남의 장례식장에서나 해 봤지, 이렇게 가족들을 위해서 절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할머니 몫으로 따라 놓은 술을 마셨다.

“할머니 나 수일이야. 오랜만이지? 미안해. 내가 그동안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런 거 하나 못 했어. 거기는 좋아? 나 없으니까 편하지. 맨날 새벽마다 일어나서 내 밥 차려 주고 일 나가느라 힘들었을 거야. 그지? 그때 요리라도 좀 배워 둘걸, 왜 그렇게 부엌에 가기 싫었나 몰라. 안 그래도 종일 청소하느라 할머니 피곤했을 텐데, 나 밥 차려 준다고 오자마자 또 부엌에서 일했었잖아. 그런데도 나한테 짜증 한 번, 화 한 번 안내고 어쩜 그렇게 살았어? 나 같으면 얄미워서 쥐어박기라도 했을 텐데, 우리 할머니 천사였나 봐.”

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목이 메었다. 수일은 떨어지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닦았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하늘에서도 속상해할까 봐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뱉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할머니, 내가 정말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거든. 올해는 그 사람하고 할머니 보려고 했었는데 잘 안됐어. 그래서 나 혼자야. 늘 혼자였는데 이번엔 좀 힘들어, 할머니. 나도 사람답게 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네.”

수일은 힘없이 웃었다. 지난 3개월 동안 두산과 함께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었다. 평생 누릴 호사도 다 누렸고 사랑도 듬뿍 받았다. 이렇게 짧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두산에게 좀 더 잘해 줄 걸, 이제 와 후회했다.

“나 할머니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내가 지은 죄가 커서 가지를 못해. 정말 할머니 만나고 싶은데, 나만 이렇게 외롭게 사는 거 너무 힘든데 갈 수가 없어. 이대로 가 버리면 다음에도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살까 봐 무서워. 그래서 죗값 다 치르고 갈라구.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나 잊지 말고 내 자리 꼭 마련해 줘, 할머니.”

수일은 가슴을 치다가 무릎을 꿇은 채로 엎드려 울었다. 소리 내서 울면 사진 속 할머니와 부모님이 슬퍼하실까 봐 차마 소리 내지도 못했다. 이를 악물고 흐느꼈다.

아무리 비싼 양복을 입어도 수일의 마음은 가난했다. 외로웠다. 엎드려서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껜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괜히 원망만 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부모님 몫의 술을 모두 마시고, 상 앞에 퍼질러 앉아 가족사진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두산은 어르신이 알아서 잘 달래겠다고 했으니 걱정 없었다. 서울에 가기 전에 한 번은 꼭 만나게 해 준다고 약속도 받았다. 계약 마지막 날 무대에도 설 수 있게 해 준다고도 했고, 월급도 받게 도와준다고 했다.

수일은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조용히 죽을 날이 올 터였다. 그사이 두산은 양갓집 아가씨를 만나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겠지. 청첩장이라도 날아오면 좋겠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두산의 모습을 상상하며 수일은 웃었다. 얼마나 멋질까? 어르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으니 결혼사진이라도 한 장 받아야겠다 다짐했다.

그거면 되었다. 수일은 두산이 행복하다는 증거인 결혼사진 한 장과 추억만 있으면 살 수 있었다.

‘악연은 끊어야 한다. 괜히 악연이라 부르는 기 아이다. 니하고 두사이가 만난 것도 우째 보면 악연이고. 그라이까 이참에 끊자. 니가 돈이 필요하다 카면 돈을 줄 끼고 집이 필요하다카면 집을 주께. 살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내한테 얼마든지 연락해라. 대신, 내 며느리하고 약속한 것만 지키도. 이번 생 악연은 니하고 내하고만 이어가자.’

두산의 할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은 조모의 앨범 속 사진보다 나이가 들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빛났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멋진 남자였다. 조모가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수일도 알 것만 같았다. 두산도 늙으면 자기 할아버지처럼 멋지게 늙어 가겠지. 수일은 싱거운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었다.

그는 자신을 의원님이라 부르라고 했지만 수일은 의원님이란 말에 기둥서방이 생각나서 어르신이라 부르기로 했다. 어르신도 선뜻 그러라고 허락해 주었다.

백태섭은 제 아버지의 풍채와 외모는 닮았으나 성품은 하나도 닮지 못했다. 어르신은 제 아들이 얼마나 못된 남자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일이 우연찮게 휘말렸을 뿐, 그는 언젠가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팔자였다고 제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사고는 그저 사고이니 죄책감은 가지지 말라고 일렀다. 그 일로 충분히 너도 괴롭지 않았냐며 되레 위로해 주었다.

말이라도 고마웠다. 그래도 제 아들을 그렇게 만든 원수인 수일에게 필요하면 돈도 주고 집도 주겠다고 한 말이 감사했다.

‘어르신,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어르신 말씀대로 악연은 여기서 끊었으면 좋겠어요. 연락도 하지 말고 얼굴도 보지 말고, 만난 적 없는 사이처럼 지내고 싶습니다.’

수일은 이들에게 돈이고 집이고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지은 죄가 있는데 죗값은 못 치를망정 금전적인 혜택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긋지긋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줄은 알지만, 이 악연의 고리가 지긋지긋했다.

고작 열흘도 못 되게 알고 지낸 남자로 인해 겪은 일들이 지난 10년간 수일의 몸과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차라리 그 속을 다 먹어 버리게 둘 것을, 괜히 끄집어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수일은 백태섭이 제게 한 말들이 자꾸 떠올라 너무 힘들었다. 낳아 주고 길러 준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신이 몹시도 싫었다. 무엇보다 백태섭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보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더 큰 제가 짐승처럼 느껴져서 이들을 마주하는 게 괴로웠다. 수일의 죄책감은 오로지 두산의 어머니에게로만 향했다.

‘딱 하나 부탁이 있습니다, 어르신. 제가 눈이 한쪽이 안 좋아요. 수술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대요. 저 서울 가면 눈 수술부터 하고 싶습니다. 돈이 많이 들 텐데 제가 수술비를 댈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것만 어르신께서 내주십시오. 그거 하나면 됩니다.’

두산이 가장 좋아하던 눈이었다. 딴 건 몰라도 이건 살리고 싶었다. 눈이 멀어서 훗날 두산의 사진을 받아도 보지 못하면 억울할 것 같았다. 염치없지만 눈 수술만은 하고 싶었다. 그다음은 수일이 알아서 하면 되었다. 어떻게든 살아졌다.

누구처럼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 입에 풀칠만 하면 되니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다. 힘없는 여자도 애까지 키워 가며 잘만 사는데 제 한 몸 간수하는 게 뭔 대수랴.

‘그래. 서울 가자마자 수술할 수 있게 해주마. 그거면 되나?’

‘네. 그거면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일은 콘도를 나서는 어르신에게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인사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술하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일은 닫힌 문에다 대고 계속 감사 인사를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드넓은 백사장에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제법 오고 갔다. 이 시간이면 다들 차례를 올릴 텐데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족도 있는 모양이었다. 교회에 다니면 그런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수일은 비싼 양복을 벗어서 잘 개어 두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직은 여름옷을 입어도 문제없었다. 바깥 공기라도 좀 쐬고 오면 답답함이 가실까 싶어서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자 문 앞에 덩치 둘이 간이 의자에 앉아 지키고 있었다.

“뭐 필요한 거 있습니까? 식사 갖다드리까예?”

“저기, 잠깐 나갔다 오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의원님께서 외출은 자제시키라꼬 해가지고예. 식사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이소.”

덩치 하나가 수일을 문 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오늘만이겠지. 수일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치우지 않은 차례상 앞에 앉았다. 그냥 버리려니 아까웠다. 차마 멀쩡한 음식을 버릴 수가 없어서 수일은 밥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부엌에 전자레인지가 있었지만 사용법을 몰랐다. 아무거나 눌렀다가 혹시라도 비싼 기계를 망가트릴까 봐 수일은 찬밥을 입에 떠 넣고 역시나 차디찬 나물과 산적, 튀김을 반찬 삼아 아침을 먹었다.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갔다. 수일은 두산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식욕이라면 길바닥에 나앉아 개밥을 던져 줘도 맛있게 먹을 것 같았다. 절대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수일은 히죽 웃었다.

“할머니, 나 진짜로 먹을 복이 있나 봐. 이런 거 먹어도 배탈 한 번 안 나.”

혼잣말을 하며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명절 음식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

두산은 미친 듯이 수일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수일은 없었다. 여관방엔 수일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었다. 분명 오성관에 출근해서 리허설까지 마쳤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중년의 미인이 찾아와서 함께 나갔단 소리에 당장 조모를 찾아갔지만, 조모도 아는 게 없었다. 저녁만 먹고 헤어졌다고 했다. 오성관 숙소에도 두산의 집에도 수일은 없었다.

“씨발!!”

산에 시체라도 묻고 온 사람처럼 두산은 흙투성이였다. 거기에 땀까지 흘렸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상태로 밤새 길거리와 유흥업소, 식당 등을 돌았다. 미친놈처럼 수일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추석 전날이라 수일에게 미행도 하나 붙여 놓지 않았다. 명절 쇠러 집에 간 형님들을 불러낼 수도 없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 미친개이 이거, 도대체 어데로 갔노?”

시커멓던 밤거리에 여명이 밝아 왔다. 혹여 강재욱이 납치라도 했을까 봐 두산은 초조했다. 그 씨발롬이 창고를 떠나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밥이나 처먹겠다고 손재환을 따라나선 저를 욕했다.

강재욱의 거처로 찾아가려고 마음먹은 순간 문득 할배와 어머니 생각이 났다. 왜 이제야 그 생각이 들었나 몰랐다. 지하실에 자기를 가둘 이유가 수일밖에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벽까지 뚫고 탈출했다. 두산은 커다란 손으로 퍽퍽 소리 나게 머리를 때렸다.

“개새끼야, 니는 대가리가 그래 안 돌아가나?”

자책하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어느덧 아침이었다. 두산은 씩씩대며 거실로 들어섰다. 식구들은 안방에 있는 모양인지 향냄새만 날 뿐 쥐죽은 듯 조용했다. 쿵쿵대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차례상을 차려 놓고 온 가족이 모여 절을 하고 있었다. 조카들이 두산을 보자마자 더러운 것도 모르고 ‘삼촌’ 하며 반갑게 달려들었다. 두산은 애들을 다 밀어냈다.

“씨발, 저리 가라!”

애들 앞이란 것도 잊고 욕부터 뱉었다.

“할배! 엄마! 수일이 어데 있노?”

두산은 씩씩댔다. 달려오느라 땀에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대충 닦았다.

할배 곁에 서서 절을 하던 형님들이 두산의 등장에 절을 멈추고 돌아보았지만, 할배는 묵묵히 절을 마저 했다. 두산은 그런 할배에게 다가가 냉큼 팔을 잡았다.

“할배!! 수일이 어딨냐꼬?”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친할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주먹이 나갔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두산은 흥분한 상태였다. 할배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산의 손을 뿌리쳤다.

“이 새끼 바라. 차례상 앞에서 머 하는 짓이고?”

할배가 엄하게 꾸짖었다.

“씨발, 차례상이 머?? 다 죽었는데!”

두산은 배를 내밀며 대들었다. 할배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렸다. 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던 형님들이 바로 막아섰다. 형수들은 입을 틀어막았고, 아이 중 하나는 소리 내 울었다.

“할배 쫌 참으이소.”

“할아버지, 아들 앞에서 이라믄 안됩니다.”

두협이 할배 팔을 잡고 두열이 할배 몸통을 끌어안아 두산에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가만 보고 있던 어머니가 쭈르륵 서 있던 며느리와 손주들을 모두 거실로 내쫓고 방문을 닫았다.

“두협이하고 두열이 느그들도 나가 있으라.”

단호한 어머니의 말에 할배를 말리던 형님들은 눈치를 살피다가 얌전히 방을 나갔다.

차례상이 차려진 안방엔 할배와 어머니 그리고 두산, 셋만 남았다.

“일단 앉아라. 앉아서 얘기하자.”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두산을 타일렀다.

“내 할 얘끼 읍따! 수일이나 내놔라.”

두산은 이를 악물고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무작정 수일과 저를 떼어 놓으려는 어머니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수일이가 다시는 니 안 본다 카드라.”

손까지 올리며 두산을 때리려 했던 그 기백은 어디로 가고 할배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힘없이 말했다. 보나 마나 연기였다. 두산은 할배고 어머니고 믿을 수가 없었다. 지하실에 갇힌 그 순간부터 제 편은 아무도 없다고 단정했다. 두 사람 입에서 나온 얘긴 다 걸러 들을 생각이었다.

“내가 직접 만나서 수일이 입으로 들을 끼다. 그라니까 어데 있는지 말해도.”

두산은 고집스레 같은 말만 반복했다.

“고마해라! 가족들 다 모인 명절날 이기 머 하는 짓이고? 내가 니를 그리 키았드나?”

참다못한 어머니가 두산의 등을 후려갈겼다. 눈물을 글썽이며 야단을 쳤다.

“엄마야말로 이기 머 하는 짓이고? 조모고 수일이고 명절날 보내 삐니까 기분 좋나? 딴 날도 아이고 추석이다. 명절 단 하루도 같이 있게 몬 하겠드나? 그기 그래 힘들드나?”

두산은 북받치는 울분을 터트렸다. 이번 명절은 저하고 같이 보낼 줄 알고 잔뜩 기대하던 수일의 얼굴이 떠올라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수일의 가족이면 처가댁 어르신이라며 설레발을 떨었는데, 결국 차례상은커녕 제대로 된 밥 한 끼 함께 먹지를 못했다.

마지막으로 먹은 밥이 이틀 전 그 맛없는 콩나물 해장국이었던 게 화가 났다. 수일은 그것도 맛있다고 어찌나 잘 먹던지, 두산은 열불이 터졌다. 씨발. 씨발.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몰랐다.

저건 왜 저렇게 속도 없이 착하기만 한지 두산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모든 걸 알게 된 후 처음으로 초조하고 불안했다.

미쳐 있을 땐 충분히 제 손으로 제어가 가능한 남자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단단한 껍데기로 중무장한 수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차분했다. 두산의 거짓말이나 감언이설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도 맞고 살아서, 심지어 제 아버지에게도 맞았던 남자라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두산은 속수무책이었다.

같이 있어도 불안해 미칠 것 같은데 할배와 어머니가 짜고 수일을 떼어 놓았다. 두산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 이 새끼야. 속 편하다, 와? 행복해 미치겄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치 기쁘다. 됐나?”

어머니가 울부짖었다.

“두사이 니, 그라는 거 아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우찌 느그 아버지 저래 만든 아 편을 드노? 으이?”

“내한테는 아버지였던 적 한 번도 읍따. 백태섭이 그 개새끼, 내 한 번도 아버지라꼬 생각해본 적 읍다꼬!”

“이 망할 놈의 새끼가. 아이고, 할 말이 있고 몬 할 말이 있지…. 아이고… 두협이 아부지… 아이고. 니는 니 애미 가슴에 이래 못을 박아야 쓰겄나? 흐으윽… 내가 니를 우찌 키았는데… 아이고.”

어머니는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방바닥을 쳤다. 아이고아이고 하는 곡소리에 방문이 열리고 형들이 들어오더니 우는 어머니를 달래며 방에서 데리고 나가려고 애썼다.

할배는 혀만 끌끌 차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오늘은 고마 하자. 내 조만간 수일이 글마 하고 만날 날 잡아 줄 테니까 그때 바라.”

“와 사람 말은 안 듣노? 씨발, 지금 보고 싶다꼬 내 몇 번을 말하노?”

주먹이 날아들었다. 불시에 당한 폭력에 두산의 고개가 한쪽으로 꺾였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두산은 손으로 제 볼을 만졌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할배와 마주 보았다.

“지금 본다꼬 달라지나? 어차피 헤어질 꺼 내말 들으라. 내가 당장 손 쓰면 니가 찾고 싶어도 가 절때 몬 찾는다. 다시는 얼굴 몬 보다꼬. 알겠나? 그라이까 얌전히 있으라, 내가 만나게 해줄 때까지.”

할배가 단호하게 말했다.

두산은 배신감에 덜덜 떨었다.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할배는 저와 한 약속이 있었다. 아버지가 몇십 억대 사기를 치고 사람을 죽이는 데 일조한 일에 대해서 입 다무는 조건으로 수일을 용서한다고 했었다. 받아들이겠다고 했었다. 그랬는데 이제 와 말을 바꿨다.

“내편 들어준다꼬 했다 아이가! 할배 내하고 약속했다 아이가. 근데 와 말을 바꾸노? 수일이하고 미국도 보내준다꼬 했고, 정 그기 힘들면 서울이라도 먼저 가 있으라꼬 내한테 말했나 안 했나? 근데 와 약속 안 지키는데??”

치가 떨렸다. 씨발, 저만 바보축구1)처럼 약속을 지켰다. 어머니를 위한다고 아버지에게 죽을 뻔한 일에 대해서 15년간 입을 다물었고, 할배를 위해 아버지의 과오를 덮어 주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할배의 배신이었다. 어머니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말과 행동이었다. 두산이 원한 건 윤수일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걸 제게서 빼앗아 가려 했다.

“씨발!!”

두산은 그대로 차례상을 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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