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일은 오성관 근처로 옮긴 여관방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두산이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하건만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도 잠그지 않고 기다렸다. 어제처럼 자다 일어나면 옆에 있으려나 싶어 수일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곁이 비어 있었다.
함께 옮겨 둔 두산의 커다란 등산 가방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수일은 힘없이 웃었다. 떠나기 전까지 매일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다 욕심이었나 보았다.
햇볕 들어오는 방 안에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가 수일은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좁아터진 욕실로 가서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벽에 걸린 무대복을 한번 털어 주고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공기가 맑았다. 슬슬 기온이 떨어질 줄 알았더니 낮에는 여전히 여름 날씨였다. 낮의 변두리 유흥가는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어제 내린 비에 젖어 찢어지고 구겨진 전단들이 길바닥에 더럽게 엉겨 붙어 있었다.
식당마다 추석 연휴 휴무를 알리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 매직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썼다. 문을 닫지 않은 분식집에 들어가서 김밥 한 줄을 사 먹었다. 기본으로 나오는 맑은 콩나물국과 김치를 반찬 삼아 한 끼를 때웠다.
여기도 내일은 쉬는 모양이었다. 김밥을 싸면서 또는 서빙을 하면서 아주머니들은 제사 음식을 만들 생각에 벌써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여기서 종일 남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집에 가면 또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조상 제사상을 차려야 한다며 한탄을 했다.
원래 이런 얘기를 들어도 아무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 추석은 차례를 지낼 생각이었던 터라 수일도 뭐라도 하고 싶었다. 만들 줄은 모르니 시장이라도 가서 만들어 놓은 걸 사 와야 할 것 같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이 근처에 전이나 과일 같은 거 살 만한 시장이 있나요?”
수일은 식당을 나오며 물었다.
“차례상에 올릴 전 찾습니까?”
“네.”
“잠깐만예. 보자보자, 여서 가까운 데가 어데 있드라.”
김밥을 싸다 말고 아주머니는 약도까지 그리며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었다. 규모가 작은 곳이니 거기에 없으면 아예 남포동으로 나가는 걸 추천했다. 구경거리도 많고 먹을 것 천지니 뭐라도 사 올 수 있지 않겠냐며 웃었다.
남포동에 가게 되면 그 김에 은아 씨라도 보고 올까 했지만, 괜히 바쁜 사람 방해할까 봐 명절이 지나고 나서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남는 게 시간이라 수일은 걸어서 시장으로 향했다. 정말 작은 곳이었지만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어제 시장을 다 보고 깜빡한 재료들을 사러 나온 사람들이 많은지 다들 손이 가벼웠다.
작은 곳이긴 해도 다행히 튀김과 전을 팔았다. 명태전과 산적, 고구마 튀김, 새우 튀김을 사고 고추 튀김은 공짜로 하나 얻었다. 내일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을 테니 끼니로 먹을 겸 넉넉히 샀다.
떡집에서 송편 두 주먹을 사고 사과와 배도 하나씩 샀다. 올 추석이 빨라서 과일들이 제법 비쌌다. 마지막으로 식당에서 비빔밥 두 그릇과 생선구이까지 포장하고 나오니 정말 차례상을 차리는 기분이 났다.
수일은 양손 가득 까만색 비닐봉지를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거리는 한산했다. 여관으로 돌아간 수일은 손바닥만 한 냉장고에 음식을 차곡히 쌓아 두었다. 조용한 방이 싫어서 TV를 켜 두고 차례상에 올릴 분량만 빼고 송편을 먹었다.
두산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이 일 해결하면 그때 섹스하자고 한 걸 후회했다. 어차피 두산이 해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제가 정말 마지막일지도 몰랐는데 왜 안 했을까.
수일은 이마를 긁적이다가 꿰맨 자국을 알아챘다. 연휴가 지나면 잊어먹지 말고 꼭 실밥을 뽑아야지 다짐하며 팥이 듬뿍 든 송편을 깨물었다. 기분과 달리 혀는 달았다.
깜빡 졸았다. 꿈에서 두산이 등산 가방을 멘 채 수일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수일도 따라가고 싶은데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수일은 늪에 빠져 점점 진흙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일아, 퍼뜩 온나. 버스 놓치겠다.”
두산은 언제 왔는지 바로 앞에 선 버스에 올라탔다.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며 기사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수일도 가고 싶었다. 정말 가고 싶었는데 턱밑까지 진흙에 가라앉았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여기서 이대로 죽을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두산이 저를 두고 혼자 가 버릴까 봐 무서웠다.
“두산아! 나 좀 데려가 줘. 제발 나 좀 데려가. 두산아.”
아무리 소리쳐 봐도 소용없었다. 버스는 수일을 남겨 둔 채 두산만 싣고 사라졌다. 수일은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깼다.
울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불이 다 젖었다. 엉엉 울면서 두산의 등산 가방을 두산인 양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어제 하자고 할 때 할 걸, 또 후회했다. 두산의 품이 그리웠다.
어느덧 밖이 어두워졌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수일은 무대복과 소지품 가방을 손에 들고 오성관까지 걸었다. 유흥업소는 명절 연휴 하루 전날이 제일 한산했다. 길거리도 종업원들로 보이는 사람들만 오고 갔다. 나이트 입구에 영수와 다른 덩치가 있었다. 그들도 지루한지 끝말잇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이라도 하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리허설을 하고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다 보면 외로움 같은 건 느낄 새가 없었다. 적어도 나이트에 있는 시간만큼은 수일도 혼자가 아니었다.
수일은 먼저 리허설을 마친 뒤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모가 찾아왔다. 수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편하게 차려입은 조모는 썰렁한 홀 안을 휘 돌아보며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랬제? 지금 시간 되면 저녁이나 같이 묵자꼬.”
“네. 숙모님.”
수일이 앞장섰다. 웬만한 식당은 죄다 문을 닫았는데, 다행히 고깃집은 장사를 하고 있었다.
둘은 마주 앉았다. 소주 두 병에 삼겹살을 시키고 고기가 익는 동안 술부터 마셨다. 조모는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안주로 김치를 집어 먹었다.
“얼굴 마이 상했네.”
“죄송합니다.”
“쯧. 니가 죄송할 기 머가 있노? 사람 일이 어데 맘먹은 대로 되드나?”
“그래두….”
“내만 서운켔나. 니도 서운치.”
조모는 이렇게 말하며 수일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두 사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기를 먹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내 내일 일본 드간다.”
명절 아침 갈 곳도 불러 주는 곳도 없는 조모는 일본행을 택했다.
“내가 니라도 델꼬 일본으로 갈라켔는데, 주옥이가 그라믄 내 얼굴 안 본다 카데. 내가 니보다 주옥이하고 더 오래 알고 지낸 사이고 첩이기는 해도 가 시엄마 아이가. 우째 며느리 가슴에 못을 박겠노.”
“다 이해해요, 숙모님.”
수일은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세상에 흠 없는 사람이 어데 있노, 그쟈? 다 실수하고 사고 치고 그래 사는 거 아이겠나. 근데 참 세상 돌아가는 기 내 맘 같지가 않다. 평생을 부족한 거 없이 살아서 그라는가, 주옥이 가가 지 남편 흠은 몬 보고 남의 흠만 본다. 그래 내하고 허물없이 말도 잘 통하던 아였는데, 이랄 때만 도덕책만치 앞뒤 꽉 막히서 말이 안 통하더라.”
조모는 한숨을 푹 쉬었다. 속상한지 연신 술을 마시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우리 영감님이라도 내 편 들어주면 오죽 좋노? 근데 내 서운크로 지 며느리 편만 들었다. 내 이 나이에 영감 앞에서 울었다 아이가. 와 당신은 내 편 안 들어주냐꼬? 웃기제?”
수일은 흐리게 웃었다. 20년 가까이 함께 살아도 가족이 되지 못하는 조모의 심정을 저 같은 것이 어찌 알까. 조모의 처지에 수일은 제가 더 서운하고 씁쓸했다. 그녀를 챙기지 않는 두산의 할아버지가 괜히 미웠다.
“그래도 니는 내보다 낫다. 두사이 글마 그기 성격이 쪼매 드러버서 그렇지 니한테 하는 거 보이 지 할배보다 백배 천배는 낫더라. 그라니까 서운해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우야든 둥 둘이 꼭 붙어 살아라. 내처럼 평생 뒷모습만 보고 살지 말고 이래 마주 보고 살아라. 알겠제? 주옥이가 니한테 머라 켔는지는 내도 모르겠는데, 그 말 새겨듣지 말고. 지난 10년간 가슴에 사무친 거를 니한테 화풀이했다 생각해라. 시간이 지나면 지가 한 말이 부끄러버서 니 얼굴도 몬 쳐다볼 날이 올 끼다.”
조모의 위로에 수일은 그저 웃기만 했다. 네, 그럴게요, 하고 쉽게 대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가 죽는단 소리만 안 했으면 수일도 두산을 따라 어디든 도망갔을 텐데. 다음 생에는 좋은 인연으로 만나잔 말만 안 했어도 가슴이 찢어질 만큼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수일도 조모처럼 평생 사랑하는 사람 뒷모습만 보고 살아야 할 팔자인가 보았다. 술이 물처럼 들어갔다. 둘은 네 병을 나눠 마시고 헤어졌다.
택시에 오르기 전 조모는 명함을 건넸다.
“돈 필요하면 내한테 꼭 연락해라. 내 이래 봬도 돈 억수로 잘 번다. 자존심 세우지 말고 꼭 연락해라. 잘 먹고 살아야 나쁜 생각도 안 들지. 그래야 난중을 기약할 수 안 있겠나? 그라이까 꼭 연락해라. 알았제?”
“네. 숙모님. 감사합니다.”
“내도 고맙다. 내 아들 노릇도 해주고.”
조모가 환하게 웃었다.
“건강하세요.”
“그래. 니도 건강하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오야. 또 보자.”
수일은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길가에 서 있었다. 다시는 못 볼 사람이라 택시라도 눈에 담고 싶었다. 알딸딸하니 술기운이 돌았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수일은 무대에 오르려 오성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두산이 보고 싶었다.
***
두산은 갇혔다. 예상 밖의 일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씨발, 어제 그 창고에 갈 때부터 영 찜찜하더라니,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둘째 형님의 절친 손재환이 찾아왔을 때 반갑게 맞이하긴 했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일개 형사가 찾아온단 말인가.
손재환 말로는 할배가 주소를 알려 주며 자기가 경찰 간부들을 접대하는 동안 가 보라고 했단다. 손재환도 가라고 하니 오긴 했는데 여긴 뭐 하는 곳이냐 물을 정도로 영문을 몰랐다. 아니면 그런 척했던가.
‘참, 니는 몬 들었제? 내 10월에 장개간다.’
손재환이 수줍게 웃으며 기쁜 소식을 알렸다.
‘진짜로?’
‘어. 10월 10일, 토요일 1시. 안 그래도 청첩장 줄라꼬 어머이한테 저나했드만은 점심 무러 오라 카데. 마침 잘됐네. 니도 아직이면 내하고 같이 집에 가서 밥이나 묵자.’
‘그래.’
두산은 흔쾌히 허락했다. 긴장한 게 무색할 만큼 재환은 정말 아무 꿍꿍이도 없어 보였다.
‘행님들! 미안한데 내 이 행님하고 밥 무께. 둘이서 맛있는 거 사무라.’
두산은 차 키를 현수에게 던져 주고 재환의 차에 올랐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머니와 담판을 지으려면 어차피 집에 가야 했다.
재환은 집으로 가는 길에 아내 될 사람 사진도 보여 주고 맞선을 본 얘기도 세세히 전했다. 선을 본 지 3개월 만에 날짜까지 잡은 재환은 스물아홉에 겨우 장가를 가게 됐다며 신나 있었다.
뒤로 흰색 그라나다가 큰일이나 난 줄 알고 따라오고 있었다. 두산은 웃었다. 두산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그들도 안심한 듯 차를 돌려 사라졌다.
그렇게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평소와 다름없이 두산을 맞았다. 뒤따라 들어오는 재환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재환아, 축하한데이. 엄마야, 니가 장개를 다 가고 참말로 느그 어머이는 좋겠다. 우리 두성이도 출소하면 참한 아가씨한테 장개나 보내야지.’
참한 아가씨가 미쳤다고 이제 출소한 형님과 결혼할까. 두산이 그 생각을 하는 찰나 목덜미가 따끔했다. 손으로 목 뒤를 만지며 돌아보자 손재환이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로 두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두사나.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기 아이고, 의원님하고 어머이가 하도 부탁을 해가지고 어쩔 수가 없었다.’
빠르게 변명했다.
역시 제 직감을 믿었어야 했는데. 집이라고 방심한 게 탈이었다.
‘씨발. 엄마! 이기 머하는 짓이고?’
두산은 어머니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머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머하는 짓이기는? 다 두사이 니 위해서 이라는 기다. 재환아, 고생 많았다. 밥이나 묵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두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깨어 보니 요 위였다. 익숙한 지하실이었다. 지금은 안 쓰는 가구들과 공구들, 그리고 어릴 때 두산의 형제들이 사용했던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창고였다. 자주 드나들던 공간이지만 이렇게 갇힌 건 열한 살 이후 처음이었다.
지하실이라 창문조차 없었다. 씨발. 좆됐다.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어이가 없어서 두산은 미친놈처럼 웃기만 했다.
이불에 요강까지 있었다. 요 주변으로 2리터짜리 생수병이 열두 병이나 서 있었고, 빵과 과자도 종류별로 상자 두 개에 가득 채워 놓았다. 음료수는 상하지 않는 오렌지 주스와 사이다였다. 탈출할 기회를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였다. 철저히 준비를 해 두었다.
“씨발, 좆같네.”
좆같다는 말을 스무 번 넘게 해 봐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허무했다. 수일을 위해 그간 얼마나 애를 썼는데, 결국 강재욱 그 새끼 편지 하나에 모든 게 무너졌다. 어머니가 아니라 제가 먼저 봤대도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게 쓴 편지였다. 함께 동봉한 서류와 사진은 또 어떻고. 두산은 예상치 못한 일에 무척 당황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할배의 잠깐 떠나 있으라는 제안을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할배 말대로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그길로 두산은 등산 가방 안에 현금을 가득 채우고 제 몫의 통장도 챙겼다. 서울 어디에 할배가 사 뒀다는 아파트 문서도 받았다. 몇 년은 돈 걱정 없이 수일과 지낼 수 있었다.
미련 없이 바로 떠나 버릴 걸, 강재욱 그 씨발롬을 어떻게든 처단하고 싶어서 남은 게 화근이 되었다. 두산은 제 손으로 죽을 때까지 강재욱을 때리고 너덜너덜해진 그 새끼를 물고기 밥으로 던져 줄 생각이었다.
보트까지 섭외해 두었는데 할배가 불도저를 비장의 카드로 내밀었다. 할배가 누구보다 똑똑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던 두산은 그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저뿐만 아니라 현수와 종국도 할배의 지략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었다.
종국이 도청한 강재욱과 최삼락 그리고 불도저와의 통화 내용을 더하면 굳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다. 강재욱은 누구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새끼였다. 자존심을 짓밟히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였다. 살인 교사로 경찰 조사를 받고 제비였던 애비까지 언론에 까발려진다면 강재욱은 차라리 죽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감옥에 보내고 그 안에서 처리해 버리면 되었다.
게다가 최삼락의 누명도 벗길 수 있었다. 어머니와의 일로 상처받은 수일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고 점수도 따고 싶었다. 두산은 할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능적으로 이상한 기운을 느낀 건 창고 안에서였다. 불도저와 얘기가 다 되었다고 할배에게 들었는데 남자는 세 사람을 보자마자 반항했다. 해결사도 사람이니 막상 감옥 갈 생각에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이해했지만, 그래도 찜찜했다.
두산은 불도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재요, 우리 할배하고 얘기 다 된 거 아이가?’
두산의 물음에 남자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뿐이었다. 종국이 회를 치고 나서야 남자는 순순히 자수를 결심했다. 강재욱을 처넣을 수 있는 증거가 있다고 말해 주었다. 두산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영 별로였다. 혹시 모를 도망에 대비해 전기 충격기로 기절을 시켰다.
씨발, 함정인가. 기절한 남자를 앞에 두고 두산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불도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심한 고문까지 견딘 걸 보면 함정은 아닐 거라 애써 긍정했다. 그때 제 직감을 믿고 그 자리를 벗어났어야 하는 건데 할배가 뒤통수칠 리가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가 이 시점에 저를 속여서 얻을 게 없다고 단정해 버렸다.
그 결과가 여기였다. 할배가 엄마와 힘을 합쳐 두산을 속였다. 결혼을 코앞에 둔 손재환까지 끌어들였다.
“씨발, 노망난 할배 같으니라고.”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보니 꼬박 하루하고 반나절을 처자고 있었다.
두산은 허름한 여관방에 혼자 있을 수일이 걱정이었다. 말은 안 해도 저를 기다릴 게 분명했다. 다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을 수일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두산은 몸을 돌려 두 팔로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하나!”
큰소리로 숫자를 외치며 팔 굽혀 펴기를 했다.
“둘!”
분명 방법이 있을 터였다. 여기를 나갈 방법이.
“셋!”
두산은 씨익 웃었다.
넷. 찾았다.
***
쿵. 쿵. 쿵.
연신 벽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온 집 안이 흔들렸다. 지하에서 나는 소리였다. 차례 음식 준비를 모두 끝내고 다 같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들려온 굉음에 명절을 쇠러 온 손자며느리에 증손주들까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고 있던 아이가 놀라서 울기까지 했다.
“이 무슨 소립니까?”
첫째 손주 며느리가 물었다. 흔들리는 식탁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두산이 얌전히 있을 놈은 아니었지만, 약을 맞고 잠들었다 정신이 든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힘을 쓰고 있었다.
쯧. 백영호는 혀를 차고 숟가락을 놓았다. 며느리 주옥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그들은 밥 묵고 있으라. 우리 볼일 쫌 보고 오께.”
주옥은 평온한 목소리로 제 며느리들과 손주들을 향해 말했다.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던 두협과 두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나섰다.
주옥이 앞장섰다. 뒤로 아들들을 대동하고 지하실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그동안에도 쿵. 쿵. 쿵. 벽을 치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집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주 때려 부술 모양이었다. 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어머니, 우리 이래까지 해야 합니까? 딴 날도 아이고 추석인데예.”
두협이 마음 약한 소리를 했다. 다른 날도 아닌 명절날 막내를 가두는 게 영 걸리는 모양이었다. 두열도 거들었다.
“그라이까. 이거는 쫌 심하다. 엄마, 고마 풀어주라. 우리 아들도 삼촌 어데 갔냐꼬 찾더라. 글마들한테 느그 삼촌 지하실에 갇힜다꼬 말하까?”
“시끄럽다! 두사이 나오면 느그들이 잘 잡아라.”
“에헤이, 엄마도 참. 두사이 저 새끼를 우리가 우예 잡노? 저거 힘 억수로 세다.”
주옥이 고개를 돌려 째려보자 두열이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제 형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백영호가 창고 문을 열었다. 손자들도 며느리 주옥도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아버님, 쪼매만 기다리시지예? 지가 알아서 튀 나올 낀데.”
주옥이 말렸지만 백영호는 지하실 불을 켜고 계단을 내려갔다.
기다리고 말 것도 없었다. 벽 상단이 뻥 뚫려 있었다. 철근까지 잘도 끊어 놓았다. 흙더미가 지하실 안으로 밀려와 바닥을 더럽혔다. 지하실 상단 일부가 외부에 노출된다는 걸 이용해서 그쪽만 집중적으로 가격했다.
구멍 앞에 곡괭이와 오함마가 널브러져 있었다. 백영호는 곡괭이를 발로 툭툭 찼다. 지하에 공구들이 있다는 걸 간과했다. 고작 불이나 지르려나 했는데 벽을 뚫고 도망갔다.
하여간 무식한 새끼. 식구들이 모두 잠들면 어련히 알아서 문을 열어 주려고 했더니만, 성격도 급했다. 백영호는 피식 웃었다.
“아버님! 저하고 약속한 거 꼭 지키셔야 합니다. 저는 죽어도 우리 두사이가 윤수일이 글마하고 같이 있는 거 몬 봅니다. 아시겠지예?”
분노로 며느리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백영호는 뒤를 돌아 사색이 된 그 얼굴을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요 며칠 새 부쩍 야윈 제 며느리에게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두산은 어디를 가도 윤수일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당연히 제 발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백영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는 손자들을 뒤로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입맛이 달아났다. 이 상황에서는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내일 아침 차례를 지내고 나서 만나려고 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이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대기하라고 일렀다.
이게 다 아들 간수를 못 한 제 잘못인 것 같아서 백영호는 착잡했다.
내 아들 태섭이. 백태섭은 백영호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백영호의 아버지는 정치 깡패이자 유흥업소를 호령하던 유능한 장사꾼이었다. 유쾌하고 대범한 남자였다. 백영호도 아버지 밑에서 어려서부터 일을 배웠다. 집에는 늘 현금이 넘쳐 났다.
아버지는 정치인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썼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었다. 어느 집단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그런 아버지가 부산에서 알아주는 정치인의 딸과의 혼사 자리를 물어 왔다.
그렇게 열일곱에 백영호는 아내 차영애와 결혼해서 1남 4녀를 두었고, 첩들에게서 딸만 둘을 보았다. 김정숙과는 자식이 없었다.
아내는 고생 한번 해 본 적 없는 여자였다. 부잣집에서 나고 자라 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했고 가난을 알지 못했다. 장인어른에게 물려받은 선민의식까지 가지고 있어서, 가난하고 못 배운 자들에 대한 혐오가 뼛속 깊이 박힌 여자였다.
정치인의 딸이자 아내로서 남들 앞에 서면 특유의 온화한 모습을 보이며 호감을 샀지만, 뒤에선 늘 폭언에 가까운 험담을 했다. 그 일로 싸우는 일도 잦았다.
그렇다고 백영호와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무뚝뚝하고 거친 백영호에게 아내는 더없이 다정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면이 있어서 백영호가 야단을 치면 눈물을 보이고 얼른 사과했다. 자신의 못된 생각과 버릇을 고쳐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계속 노력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백영호가 보는 앞에선 최대한 말을 아끼던 아내는 태섭과 단둘이 있을 때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던 모양이었다. 거기에 장인어른까지 가세했다. 아들은 아쉽게도 아내의 그런 성정과 백영호의 고집과 폭력성, 즉 단점만 물려받은 아이였다.
뒤늦게 아들을 고쳐 보려 애썼지만 조금만 엄하게 굴어도 아내가 울었다. 장인어른의 간섭도 심했다.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되었는데, 그때는 백영호도 고작 20대였다. 아버지라기엔 너무 어렸다.
태섭의 뒤로 줄줄이 딸을 낳자 아내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날로 심해졌다. 아들의 성품 또한 나날이 악화했다. 여동생들에게도 어찌나 못나게 굴던지 백영호는 하루가 멀다고 태섭을 혼냈다.
태섭은 아버지를 무서워하기 시작했고, 마음속에 자리 잡은 두려움은 자라면서 음침한 분노와 열등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백영호는 알면서도 방관했다. 그저 소년의 한때 반항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바깥일이 무척 바빴던 것도 아들을 방치하는 데 한몫했다. 선거철엔 잠만 자러 집에 들어갈 정도로 백영호는 가정에 소홀했다. 게다가 장인어른의 권유로 첩까지 두는 바람에 집안일엔 아예 간섭하지 않고 아이들을 아내에게 맡겨 버렸다.
남자라면 으레 그래야 한다고 배워 왔던 백영호는 자신이 없어도 아이들이 무럭무럭 바르게 잘 자라리라 착각했다. 자기가 그랬으니 제 아들도 그러리라 믿었다.
태섭은 키가 크고 바른 외모 덕에 인기가 많았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으나 정치인인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선거철엔 대견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태섭은 예쁘기로 소문난 며느리 주옥과 결혼을 했다. 며느리도 아내와 비슷한 온실 속 화초였으나 친정아버지를 닮아 쾌활하고 구김이 없었다. 백영호를 무서워하면서도 애교도 곧잘 부렸다.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결혼한 해에 첫째 두협을 낳았고 이어 둘째와 셋째까지 줄줄이 아들을 낳았다. 아내는 자기 아들인 양 손자들을 예뻐했고, 태섭도 제 아내와 자식에게 누구보다 잘했다. 그땐 백영호도 아들과 사이가 좋았다.
계속 그러리라 믿었다. 문제가 생긴 건 백영호가 장녀이자 둘째인 태희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자식 중 가장 똑똑하고 외모부터 성격까지 백영호를 꼭 빼닮은 태희는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유학해 명문 여대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이후 결혼도 미루고 백영호가 시작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태희는 머리 회전이 놀랍도록 빠르고 사업에 일가견이 있었다. 입사 5년 만에 간부 자리를 꿰찰 정도로 유능했고 회사를 키우는 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무식한 백영호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고 경제 경영 전반에 대해 가르친 것도 태희였다.
당시 백영호가 돈으로 사 준 중학교 윤리 선생 노릇을 하던 태섭은 여동생에게 제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태희를 심하게 질투했고, 제가 다니는 중학교 선생 중 한 놈에게 시집보내려고까지 했었다. 아내 또한 회사를 장남이 아닌 딸에게 물려줄까 봐 전전긍긍했다.
백영호는 단호했다. 제 아들이지만 태섭인 정치를 할 깜냥도 사업을 할 그릇도 못 되었다. 그 일로 아내와의 사이가 틀어졌는데, 하필 그때 아내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겨우 마흔아홉이었다. 충격이 컸다. 마지막까지 아내와 태섭의 일로 싸웠던 백영호의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백영호는 아내의 유언에 따라 태섭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했었다. 태희가 태섭과 외출했다가 추락사하지 않았더라면 무조건 그렇게 했을 터였다.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아내가 죽은 지 석 달 만에 제일 아끼던 딸이 죽자 백영호는 그 충격으로 쓰러졌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가장 사랑하던 자식이 아내의 뒤를 이어 허무하게 가 버렸다. 태희가 서른, 두산이 세 살 때였다.
백영호는 태섭이 그랬다고 확신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설마 하는 망설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리 미워해도 그렇지 아들이 친동생을 죽였다고 의심하는 아비가 된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백영호는 혼란에 빠졌고 슬픔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아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 좀 더 단호하게 태섭을 다그쳤어야 했는데, 전후 사정을 살펴 악의 꼬리를 끊었어야 했는데 연이은 죽음으로 비탄에 잠겨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도 더 태섭을 죽였다. 제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에게 살의를 느끼다니,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괴로워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 백영호에게 두산은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이었다. 하늘이 준 선물 같았다. 어린아이였지만 떡잎이 보였다. 평생 아이들을 아내에게만 맡겨 두고 소홀하게 대했던 과거를 뉘우치며 뒤늦게 두산에게 애정을 쏟았다. 두산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태섭은 두산에게 심한 질투를 느꼈다. 미친 새끼. 제 아내가 배 아파서 낳은 제 자식이건만 남 보듯 하며 구박했다. 그럴수록 백영호는 두산을 더 싸고돌았다. 다행히 며느리는 바른 어머니였다. 늘 두산의 편이었다. 막내가 구박을 받을 때면 얌전히 입 다물고 있지만은 않았다.
백영호는 삐뚤어진 아들을 며느리가 말려 주리라 애써 믿었다. 겉으론 그렇게 보였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늘 그렇듯 그는 아들 일을 회피했다.
백영호는 정치에 잠시 관심을 접어 두고 조직과 사업을 키우는 데 몰두했다. 죽은 딸 아이가 악착같이 키운 회사를 버려둘 순 없었다. 아버지가 키운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밖에서만 만났던 간부들이 집 안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태섭도 조직에 관심을 보였다. 마침 개봉했던 영화 <대부>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태섭은 틈만 나면 조직 사람들과 만나 술을 사 주고 형님 노릇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새끼가 보스 행세를 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몰라도 조직이 자기 것이 될 거라 믿었고 중학교 선생 일은 잠복근무라며 농담까지 하고 다녔다.
백영호는 더는 아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사업이며 조직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막아 버렸다. 완전히 차단했다. 그럴수록 아들은 더 악착같이 끼어들려고 발버둥쳤다. 막으면 막을수록 아들의 분노는 커졌고 어떻게든 자신을 알리려고 무던히 애썼다. 아들의 내면은 나날이 포악해져만 갔다.
태섭은 백영호가 있는 곳에선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서울행을 결심했다. 그게 1981년 9월쯤이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인지, 제 몫으로 나눠 준 집까지 팔았다. 그 자금으로 서울에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겠다며 통보했다.
당연히 반대했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계획이었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의 망상에 불과했다. 더욱이 삼청 교육대에 끌려 들어간 깡패들이 수십 수백 명이던 시절이라 자칫 잘못하다간 아들도 백영호의 조직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태희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백영호는 아들 태섭과 단둘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며 설득했다. 사실 백영호는 아들 걱정을 한 게 아니라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었을 뿐이었다. 열심히 손자들을 키우고 제 시중을 드는 며느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앉은 자리였다.
대화가 될 리 없었다. 태섭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건 백영호도 마찬가지였다. 벽과 벽. 두 사람은 각자의 벽을 방패 삼아 서로를 밀어냈다.
그렇게 태섭은 서울로 떠났고 백영호는 미행과 도청을 붙였다. 예상한 대로 태섭은 사촌 형님 아들 중 제일 질 나쁘고 무능한 문일준에게 붙었다. 끼리끼리 알아보았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살던 일준은 백영호에겐 나름 쓸 만한 녀석이었다. 특히 귀한 손님들을 접대할 땐 그만한 녀석이 없었다. 그래서 사촌 형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신 거두었건만, 일이 이런 식으로 되고 보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영호는 아들 태섭의 일로 사촌 형님을 찾았고, 형님은 일을 키운 백영호를 나무라는 대신 함께 책임지려 했다. 백영호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일준이 애인 한정숙, 사기꾼 공기훈과 짜고 몇십 억대의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사람 하나를 죽인 일도 알게 되었다. 그걸 부추긴 게 태섭이었다. 아들은 비겁하게 전면에 나서진 않고 입으로만 나불거렸다.
사촌 형님도 백영호도 공기훈까지 죽자 이제는 나서야 할 때란 걸 깨달았다. 더는 자신의 아이들이 위험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야 했다. 시기를 점치는 중이었다.
일이 예상치 못하게 돌아간 건 문일준과 한정숙이 태섭을 죽이려고 해결사를 고용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한정숙이 운영하던 룸살롱 종업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고, 누명을 씌울 증거를 만들고 있었다. 하다 하다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윤수일이었다.
이 일로 사촌 형님과 많은 의논을 했다. 저 아이들이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또 잡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문제는 아무리 미워도 자식들 일이라 망설임이 길었다는 데 있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이미 결론을 내렸으면서 ‘그래도 내 아들’ 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팔이 안으로 굽었다.
그때 교통사고가 났다. 좀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윤수일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백영호는 후회했다. 일준과 태섭이 타고 있던 그라나다를 뒤쫓으며 도청했기 때문에 윤수일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잘 알았다. 애석하게도 길이 미끄러워 차가 돌았고, 윤수일만 크게 다쳤다.
사고 이후 두 아이가 한 일은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비열하고 야비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한 것도 모자라 살인 미수죄로 신고까지 했다. 공무원 부부가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윤수일만 당할 뻔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어 백영호가 나섰다. 더 일찍 나섰어야 했는데 이제야 나선 게 미안했다.
태희가 그렇게 되었을 때 처리했어야 했다.
적어도 두산이 열 살 무렵 제 아비에게 목이 졸린 일을 바로 얘기했었더라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터였다. 윤수일이라는 남자가 태섭을 만날 일도 없었다. 오래전에 백영호 손에서 모든 일이 끝났을 텐데, 그 일을 알고 있던 김정숙도 태섭이 혼수상태가 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심지어 두산은 태섭이 저렇게 누워 있을 때조차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렇게 1982년 1월 8일 늦은 새벽 4시 반, 술에 취해 호텔로 돌아온 백태섭을 백영호가 고용한 해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틀어진 건 호텔 직원 때문이었다. 태섭이 룸서비스를 시킨 줄 몰랐던 해결사는 갑작스러운 직원의 방문에 당황했다. 처리를 마치지 못하고 황급히 방을 떠나야 했다. 태섭이 혼수상태로 살아남은 이유였다.
그 해결사가 태섭의 방에서 나오는 걸 목격한 자가 임상엽이었다. 임상엽은 자신이 본 남자가 태섭을 그렇게 만든 해결사란 생각은 못 하는 듯했지만, 일준은 누군가 자기들을 노린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일준을 처리하는 일이 늦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한정숙의 룸살롱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대신 임상엽을 돈으로 구워삶아 주변을 감시하고 몰래 도망갈 궁리를 했다. 그 와중에도 임상엽과 윤수일을 살인 공모와 사기 가해자로 만들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불러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백영호가 나섰다. 백영호의 전화에 일준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태섭이 그렇게 된 게 백영호의 짓이란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태섭 때와 달리 일준은 제대로 처리했다. 1982년 1월 11일 늦은 밤, 문일준이 죽었다.
임상엽이 뒤늦게 해결사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겁에 질려 있어 살해 협박 전화만으로도 충분히 입 다물게 할 수 있었다. 쉬운 남자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일준이 숨겨 둔 돈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무능을 근거로 당연히 통장에 들었겠거니, 아니면 집 안 어딘가 금고에 있겠거니 하고 안일하게만 생각했었다. 적어도 한정숙은 알고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일준이 살던 집 정원까지 파헤쳤지만 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가 얼마를 투자했는지 적어 둔 장부와 함께.
일준이 죽고 나자 한정숙은 반쯤 미쳤다. 그렇게 둘이 좋아 죽었으면서 한정숙조차 돈의 행방을 몰랐다. 일준이 한정숙에게 알려 줬다는 장소에도, 한정숙을 위해 따로 빼 두었다던 통장에도 돈이 없었다. 한정숙은 그야말로 배신당했다. 알거지였다.
빚쟁이들이 하루가 멀다고 그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기 피해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깡패에 해결사까지 들이닥쳐 험한 일을 당했다. 섬에다 팔아 버리겠다, 장기를 모두 빼내 버리겠다, 협박은 점점 수위를 높여 갔다. 한정숙은 버티지 못했다. 누군들 버틸 수 있었을까. 백영호가 손쓰지 않아도 한정숙은 알아서 자살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돈의 행방을 몰랐다.
백영호가 윤수일을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지 못한 건 아들 태섭과 일준을 처리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필 아들도 살아남아 윤수일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윤수일이 실려 간 병원을 찾았을 땐 수술이 끝난 뒤였고, 의사는 윤수일의 상태에 회의적이었다. 의료 시설이 지금처럼 좋을 때가 아니어서 함부로 옮겼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그대로 두고 계속 돈을 냈다.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 병원에 딱 한 번 강재욱을 보낸 적이 있었다. 온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던 윤수일을 방문해 상태를 확인하게 했다. 재욱은 막연하게 백영호의 졸이라고 오해한 듯했지만 재욱의 생각과 달리 백영호는 함부로 졸을 쓰지 않았다. 더욱이 저런 일반인들은 절대 쓰지 않았으며 설령 쓰더라도 쉽게 버리지 않았다.
그게 강재욱과 자신의 차이였다. 백영호가 여태까지 평탄하게 조직을 운영한 이유이기도 했다. 강재욱은 그걸 몰랐다. 자기가 함부로 졸을 쓰듯 백영호도 같은 방식으로 쓸 거라 착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윤수일의 처지는 거기서 거기였다. 백영호와 사촌 형님이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꾸물대는 바람에 윤수일은 졸 아닌 졸이 되었다. 지금은 백영호를 대신해 며느리의 원수가 되었다.
백영호는 두산에게도 자신이 해결사를 고용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태섭이 사고 다음 날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말했다. 사고 후유증이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도록 손을 썼다.
윤수일에게 미안하지만 차마 며느리나 손자에게 자신이 그랬다고 밝힐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사촌 형님까지 얽힌 문제이기도 했다. 비겁하지만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의원님, 다 왔습니다.”
백영호는 차에서 내렸다. 윤수일이 있을 자신의 콘도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