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랑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수일은 얌전히 두산의 차를 타고 집으로 함께 돌아갔다.
“이 일 해결할 때까지 내는 본가에 있으 끼다.”
“그래.”
“그라니까 니는 전처럼 여서 편히 있으라. 니 계약 끝나기 전까지 내 다 해결하께.”
“응.”
수일은 선뜻 그러겠다고 답했다.
어차피 그 말대로 하지 않을 거라서 두산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두산의 어머니는 계약 만료 전까지 부산에 남는 걸 허락한 거지 함께 지내는 걸 허락한 게 아니었다. 두산도 이미 들어 아는 듯했다. 다만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뿐이었다.
제 어깨에 기대 눈시울을 적시던 두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태연해졌다. 허둥대던 모습도 온데간데없었다. 다시 자신만만하고 조금은 심드렁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어리고 건강했다. 그게 백두산이었다. 수일은 가만 두산을 올려다보았다.
두산은 두 손으로 수일의 얼굴을 감싸 안고 키스했다.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이런 일은 시련도 아니라는 듯 예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다 볼이 부은 걸 깨닫고 화를 냈다.
“씨발, 내도 손 한 번 안 댔는데.”
제 딴엔 그게 그렇게 억울한가 보았다.
“너 나 한 번 때렸잖아.”
수일이 기억하기론 두산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었다. 한번은 태욱의 일로 두산을 말리다 얼결에 맞았으니 때렸다고 할 순 없었다.
“은제?”
두산이 도끼눈을 뜨고 물었다.
“오성관 숙소에 있을 때. 삼락 형님이 소고기 사 온 날. 그때 니가 나 때렸잖아. 아니야?”
“에헤이, 머라카노? 내 니 안 때맀다.”
“근데 왜 내 볼이 아팠어? 부은 것 같았는데.”
“와, 씨발, 이제 와서 생사람 잡네.”
두산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안 때렸나? 분명 수일은 그때 두산에게 맞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뭐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두산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니가 정 아니라면 믿어 줄게.”
수일의 말에 두산이 입을 실룩거렸다. 수일은 짧게 웃었다. 두산이 장난스럽게 수일의 머리를 쥐고 흔들었다.
“이 미친개이를 우짜믄 좋노.”
“하지 마.”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수일은 손을 들어 두산의 볼을 쓰다듬었다. 많이 어렸다. 두산의 어머니 말씀대로 지금이야 제게 미쳐 있어서 헤어지면 몇 달 난리를 치겠지만, 저 같은 건 금방 잊을 터였다. 조금 섭섭하긴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 여기 있을 테니까, 그만하구 집에 가.”
어린아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두산은 수일의 손목을 꼭 붙잡고 손바닥에 제 볼을 비볐다.
“쪼매만 참아라.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하께.”
“응.”
두산은 수일을 꼭 끌어안았다. 아까 대폿집 앞에서처럼 수일의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대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킁킁 냄새도 맡았다.
“씨발, 천치도 아이고. 이런 거를 예상도 몬 하고. 좆같네.”
이 일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그게 아닌데, 두산은 자기가 이런 상황을 막아 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건 애초에 백태섭과 수일의 문제였다. 진즉에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가 많이 늦은 것뿐이었다.
“니 잘못 아냐.”
수일은 두산을 안아 주는 대신 등을 토닥였다.
“어데 나가지 말고 여 있으라.”
“응.”
“대답은 잘한다.”
“내 특기잖아.”
수일의 말에 두산이 웃었다. 두 팔로 몸이 으스러질 만큼 강하게 안았다. 자기만 믿으라고, 다 알아서 하겠다고 다시 한번 더 말해 주었다.
수일은 두산을 배웅하지 않았다.
그 길로 짐을 쌌다. 라면 박스에 든 것들을 검은색 여행 가방에 옮겨 담았다. 새로 장만한 앨범을 바닥에 깔고 오래된 일기장과 수첩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낡은 겨울 외투와 스웨터는 잘 챙겨 넣었다. 무대복 두 벌과 곧 있으면 입지 못할 여름옷 한 벌도 챙겼다. 그 외 두산이 사 준 건 옷이며 나이키 운동화며 구두까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어제 백화점에서 산 검은 정장만 빼고.
제 능력으론 미래에도 이렇게 좋은 정장을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염치 불고하고 가져가기로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죽을 때만은 좋은 옷을 입고 싶었다. 좋은 옷에 낡은 구두를 신자니 마음에 걸려서 결국 새 구두도 가져가기로 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죽을 땐 조금 사치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갑과 통장, 도장까지 챙기니 가방이 꽉 들어찼다. 작은 여행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가는 제 인생이 참 볼품없었다. 부산에 내려올 때처럼 갈 때도 단출했다.
수일은 혹시 두고 가는 건 없는지 살펴보았다. 안방을 휘 둘러보는데 두산과 오성관 숙소 앞에서 찍었던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산은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이 안 보이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일은 마지막으로 그 사진이 담긴 액자를 가방에 넣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유흥가 근처라 불이 밝았다. 뒷골목에 여관이 제법 있었다. 일단 하룻밤만 여기서 자고 내일은 오성관 근처 여관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돈도 아껴야 했다.
수일은 여관방에 누워 빗소리를 들었다.
우산 쓰고 장 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무거운 장거리들을 조모 혼자 어찌 드나. 수일은 가지도 못할 시장 걱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조모께 죄송하단 말도 전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잘할게요’라며 괜한 기대감을 줘서 더 미안했다. 두산이 어련히 알아서 얘기해 주겠지. 수일은 막연히 이렇게 생각했다.
수일은 어제 일을 수십 번도 더 되뇌었다. 두산의 어머니가 했던 말들이 생생하게 기억나서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어머니가 뱉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가 되어 제게로 박혔다. 용서라는 이름의 가시들은 살 속을 파고들고 몸속 깊이 박혀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었다.
수일의 거짓말에 어머니는 오열했다. 왜 아무도 자기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느냐며 통곡했다. 달래 주고 싶었지만, 그저 무릎을 꿇고 앉아 ‘죄송합니다’란 말밖에 해 줄 수가 없었다.
‘니가 고아라서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남편 저리되고도 여태 살아 있는 이유가 다 우리 가족 때문이다.’
겨우 진정한 두산의 어머니는 이렇게 운을 뗐다.
수일도 고아가 되기 전에 가족이 있었는데, 할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었는데 가족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 취급받아서 조금 서운했다. 소중하고 너무 절실해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수일은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었다. 남들 다 손가락질하는 몸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낳을 꿈을 꿨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두고 아무것도 몬 하는 심정을 니가 알겠나? 얼마 전까지 내하고 웃고 울고 지지고 볶던 사람이 이제는 말 한마디 몬 하고 웃지도 울지도 몬 하는 거를 곁에서 지키보는 내 마음을 니가 상상이나 하겠나? 10년 동안 누 있는 내 남편을 아들 아빠를, 수천 번씩 속으로 직있다가 살맀다가 하는 그 찢어지는 심정을 니가 알겠나?’
어머니는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없던 수일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두산이 백태섭처럼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다고 생각하자 너무도 끔찍했다.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더는 ‘수일아’ 하고 부르는 저 큰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늘 집 안을 쿵쿵거리며 돌아다니는 발소리도 듣지 못할 거라 상상하니 숨이 콱 막혔다. 안아 주지도 입 맞춰 주지도 못하고, 그 예쁜 입으로 웃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이런 데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수일의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년간은 내도 희망을 품고 살았다. 언젠가 남편이 눈을 떡하니 뜨고 ‘주옥아, 여보’ 하고 부르는 날이 있겠지. 을매나 그런 날을 고대했는지 모린다. 병원서 살다시피 했다. 우리 연애할 때 얘기, 신혼 때 얘기, 첫째 낳고 몸조리하러 친정 갔을 때 아가 아이라 내 보고 싶다꼬 우리 집 문턱이 닳도록 왔다 갔다 했던 얘기. 그기 3년이 되고 4년이 되고, 점점 내도 지치드라.’
죄송합니다. 수일은 이 말을 입 밖으로 뱉지도 못했다. 어머니의 고통에 비한다면 ‘죄송합니다’란 말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수일은 자기혐오로 구역질이 일었다. 살아 숨 쉬는 공기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왜 저는 죽고 남았을 그 험한 일들을 겪고도 죽을 생각 대신 살 생각만 했을까. 수일은 고통에 둔하고 무딘 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닌데 악착같이 삶에 집착한 과거가 미치도록 싫었다.
‘고마 콱 죽어야지. 그 생각도 안 해 본 기 아이다. 근데 도저히 그랄 수가 없드라. 자식새끼가 넷씩이나 있는데 어미가 돼서 우예 죽노. 애비도 저래 누가꼬 꼼짝을 몬 하는데 내라도 가들 버팀목이 되주야지. 그쟈? 죽고 싶어도 내 새끼들 보면서 참고 또 참았다. 그래 참으이까 내한테 어머님이라꼬 부르는 며느리들도 생기고 할머니라꼬 부르는 손주들도 주렁주렁 달맀데.’
어머니는 여기까지 말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손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잔뜩 구겨졌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든든한 가족을 자기편으로 둔 사람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아들 넷에 며느리와 손주들까지, 남편이 몸져누워 있어도 어머니의 얼굴에 그늘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신세 한탄이 쪼매 길었네.’
어머니는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내 경찰에 신고도 안 할 끼다. 이미 사고라꼬 결론 난 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고. 내 딴 거 안 바란다. 두사이 하고 헤어지라. 내가 우리 두사이를 제일로 예뻐하는데 그 옆에 니가 있는 꼴은 죽어도 몬 보겠다. 니가 우리 두사이를 사랑하는지 아이믄 이용하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다시는 얼굴도 보지 말고 말도 썪지 말고 죽었는가 살았는가 소식도 모른 채 그래 살아라.’
‘…….’
‘그라고 내한테 사죄하는 마음으로 우리 남편 누 있었던 그 10년만큼 죽지도 말고 누구 만나지도 말고 혼자서만 살아라. 이게 내가 니를 용서하는 방법이다. 알겠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수일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연히 헤어지란 말을 할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식으로 천벌까지 내릴 줄은 몰랐다. 두산 없이 앞으로 10년을 더 살라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수일이 얼마나 외로웠는데, 어머니는 수일에게 그 외로움을 10년 더 연장하라고 일렀다.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수일은 절망했다.
‘와 대답이 없노?’
‘…네.’
‘니야 고아라서 혼자 사는 거 밸로 어렵도 안 할 끼다. 물론 외롭기야 하겠지. 친구도 애인도 안 만들고 그래 살라 카믄 외로울 낀데 그래도 우야겠노. 벌은 받아야지. 아프면 꼭 병원 가고 치료받을 돈이 없으면 내한테 연락해라. 딱 10년 동안 죽지 말고 살아만 있으라. 내가 니 몬 믿는 건 아인데, 그래도 사람 붙일 끼다. 누구 만나기라도 하는 날엔 당장 찾아가서 니가 한 짓 다 까발리고 헤어지라고 협박할 끼다. 알겠제?’
‘네. 잘 알겠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가혹한 벌을 받아야 할 만큼 자신이 지은 죄가 크다는 걸 수일은 이제야 깨달았다. 용서가 더 아플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오늘부로 이 집에서 나가라. 계약 끝나면 3일 안에 짐 싸서 서울 올라가고.’
‘네. 사모님.’
‘혹여나 두사이가 니 하고 몬 헤어진다 지랄해도 니는 내 말만 따라라. 그 새끼가 니를 가두든 때리든 붙잡아 둘라꼬 별 지랄을 다 해도 니는 내하고 약속한 대로만 해도. 안 그라믄 내가 죽을 끼다. 농담 아이다. 내는 지금 가도 어미로 내 할 일 다 해서 여한이 읍따. 여자 인생 끝난 지가 10년도 넘었는데 이 세상에 미련이 뭐가 있겠노? 니도 차라리 내가 죽는 기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니가 적어도 사람 새끼면 이번만큼은 내 시키는 대로 해야 안 되겠나. 그쟈?’
‘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수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떨리는 손을 숨기려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꽉 쥐었다.
‘그 새끼가 지금이야 니 좋다꼬 저래도 한 몇 달 술 처먹고 속앓이 쫌 하고 나면 다 이자삘 기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어머니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일아.’
어머니가 처음으로 수일의 이름을 불렀다. 저 같았으면 절대 입에 담지도 않았을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었다. 수일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수일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죄인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두사이가 하도 니를 좋아해서 내도 니 좋게 생각했는데 이래 돼서 내가 다 안타깝다. 다음 생애는 우리 좋은 인연으로 만나자.’
어머니의 마지막 말에 수일은 무너져 내렸다. 마음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수일에게 남은 건 죄책감뿐이었다. 백태섭을 향한 울분도 분노도 사라지고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그 사고로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좌절, 외로움도 모두 죄책감 뒤에 꼭꼭 숨어 버렸다.
제게 그런 감정들이 있었나 싶게 두산을 향한 욕심도 자취를 감췄다. 백태섭이 아니라 자기가 저기 누워 있었어야 하는 건데, 수일은 제 질긴 목숨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이불 위로 흘렀다. 수일은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았다.
이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여관방에 누워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88올림픽쯤 나이트크럽은 호황기를 맞이했다. 어디 나이트크럽뿐이랴. 온갖 유흥업소들이 신이 나서 장사를 했다.
수일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었다. 전국 팔도에 있는 여관방이란 여관방에서 다 자 본 것 같았다. 나이트에서 방을 잡아 주기도 했는데 그럴 경우 한 방을 여러 명과 함께 써야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잠자기 바쁜 수일과 달리 사람들은 그때부터 활발하게 움직였다.
고스톱을 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동네 매춘부들을 옆에 끼고 앉아 술판을 벌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고스톱도 여자를 끼고 노는 것도 싫어했던 수일은 하는 수 없이 여관 옥상으로 올라가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았다. 비가 오면 계단으로 내려와 비 내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때 참 좋았는데. 몸은 힘들어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좋았었다. 손에 쥐는 돈도 여느 때보다 많아서 빚 갚는 날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여관에서 자도 좋았다. 돈 걱정 없이 몸 누일 곳이 있어서 행복했었다.
아. 두산이 없을 때도 행복했던 적이 있었구나. 수일은 그 생각을 하며 도무지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불을 적셨다.
눈을 떴을 땐 옆에 두산이 자고 있었다. 수일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두산은 이불도 덮지 않고 팬티 바람으로 대자로 누워 쌔근쌔근 숨을 쉬었다. 수일의 까만 여행 가방 옆에 두산의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등산 가방이 놓여 있었다.
꿈인가? 눈을 비볐다. 두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수일은 멍하니 두산을 바라보았다. 크긴 참 컸다. 혼자 있을 땐 넓어 보이던 여관방이 꽉 찼다.
수일은 배탈이라도 날까 봐 제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다가 두산에게 덮어 주었다. 쭈그리고 앉아 두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꼭 개구쟁이 같았다.
수염은 언제 깎았는지 멀끔했다. 짙은 눈썹과 위로 올라간 눈, 잘생긴 코. 그리고 수일이 제일 좋아하는 시원한 입매까지. 수일은 눈에 하나하나 담아 두었다. 사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생생한 두산을 가슴에 새겼다. 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투둑투둑, 눈물처럼 떨어졌다.
불쑥 팔이 다가와 수일을 잡아 끌어안았다. 자다가 저 때문에 깬 모양이었다. 수일은 두산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어우, 왜 이래?”
“가만 쫌 있어 바라.”
두산은 두 팔로 수일을 단단히 고정했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힘만 세서는.”
“딴 것도 쎈데. 함 보이 주까?”
“뭔 말을 못 해.”
수일은 두산을 밀어내려다 포기하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산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차갑던 볼이 두산이 전해 주는 열기로 금세 달아올랐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두산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내면의 소리를 모른 척했다.
“우리 이래 있으니까 오성관 숙소 생각나네.”
“그르게.”
“그때 니 내한테 존댓말 했었는데. 함 해 줄래?”
“싫어.”
“한 번만 해도. 두산 씨 하고 한 번만 불러도.”
“싫다니까.”
수일은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두산에게서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몸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자, 수일은 두산을 밀어내는 대신 꼭 끌어안았다.
“근데 너 언제 왔니?”
어떻게 들어왔냐는 말은 해 봐야 무의미했다.
“내? 새벽에.”
“새벽 언제?”
“니가 집 나갔다는 소리 듣고 내도 짐 싸서 몰래 나왔지.”
“니 짐은 왜?”
“왜긴 왜야? 니하고 여서 같이 살라꼬.”
하는 짓이 영락없는 애였다. 막내라더니, 이제야 막내 티가 났다. 지가 무슨 가출 청소년도 아니고 등산 가방에 짐을 싸 들고 그 새벽에 집을 나왔다. 웃음만 났다. 두산다워서 수일은 기뻤다. 두산이 아직은 상처받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수일아.”
“응?”
“내 하고 싶다.”
수일은 피식 웃었다. 고개를 들어 두산을 마주 보았다. 두산이 수일에게 입을 맞췄다. 쪽쪽쪽, 빠른 속도로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간지러.”
“하자.”
“안 돼.”
“와?”
“이 일 다 해결하면, 그때.”
수일은 두산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두산이 잡으려 했지만 이번엔 수일이 빨랐다. 아니면 두산이 일부러 놓아주었든가.
“하, 내 진짜 하고 싶은데.”
두산은 허탈한지 천장만 쳐다보았다. 조르면 해 줄 줄 알고 버텼지만 수일은 해 줄 마음이 없었다.
“더 잘 거야?”
“…….”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아, 밥! 씨발, 그라고 보이 내 어제 저녁도 안 먹었다.”
꾸물대던 두산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긴 팔을 뻗어 벗어 둔 옷가지를 집었다.
어제 그 일을 겪고도 수일은 먹고살겠다고 백반을 먹었는데, 두산은 쫄쫄 굶은 모양이었다. 저 덩치에 한 끼를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플까. 수일은 괜히 두산이 안쓰러웠다.
욕실로 들어가 대충 세수를 하고 일회용 칫솔로 이를 닦았다. 두산이 옆으로 와서 저도 세수를 했다. 이는 치약을 묻힌 손가락으로 대충 문질렀다. 더러운 거울 속에 비친 두 사람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두산이 소변을 보는 동안 수일은 이불을 개고 짐을 챙겼다.
“짐은 와?”
“오성관에서 너무 멀어서 근처로 옮기게.”
“그래.”
두산도 선뜻 들고 왔던 등산 가방을 그대로 어깨에 둘러멨다. 수일의 손에 들린 짐 가방도 제 손으로 가져갔다.
비가 제법 많이 왔다. 이대로 비를 맞고 갈 수가 없어 두산이 가방을 내려 두고 슈퍼로 뛰어가서 비닐우산 하나를 사 왔다. 작은 우산 아래서 몸을 겹치다시피 하며 거리를 걸었다. 아침인데도 밤처럼 거리가 어두컴컴했다.
수일은 두산의 허리를 안으려다 말았다. 아까 그 한 번만으로 족했다. 더 욕심을 냈다간 백태섭뿐만 아니라 두산의 어머니마저 앓아눕게 할지도 몰랐다. 두산은 수일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우산을 최대한 수일의 쪽으로 기울여 주었다.
일찍 문을 연 가게는 죄다 해장국집 아니면 돼지국밥집이었다. 둘은 콩나물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두산이 우산을 접을 때 보니 왼쪽 어깨가 흠뻑 젖어 있었다. 수일은 가게 여주인에게 수건을 빌려 젖은 어깨를 닦아 주었다.
“이러다 감기 걸려.”
“내 평생 감기 걸린 적 읍따.”
“그래두. 건강할 때 챙겨야지.”
물기 가득한 목덜미와 왼쪽 팔도 쓱쓱 닦아 주었다. 두산이 그런 수일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여주인은 그새 음식을 내왔다. 고춧가루가 듬뿍 든 콩나물국이 뚝배기에서 펄펄 끓고 있었다.
“계란은 요령껏 풀어드시소.”
“감사합니다.”
두산은 수일의 뚝배기에 계란 두 개를 모두 풀어 준 다음, 저는 밥부터 말았다.
“사장님, 여 계란 하나 더 주이소.”
여사장은 군말 없이 하나를 더 내주었다. 두산이 수일을 보고 씨익 웃었다. 자기 뚝배기에도 계란을 풀어 휘휘 젓고 바로 국물부터 떠 넣었다.
“이야, 직이네.”
“천천히 먹어. 이건 내가 살게.”
“우리 윤수일 씨 돈 번다꼬 막 쓰네?”
“막 쓰긴. 니 입에 들어가는 밥이 왜 막이니?”
수일은 두산을 슬쩍 흘겨보고 숟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김이 풀풀 올라왔다. 수일이 여태 먹어 본 그 어느 콩나물 해장국보다 맛있었다.
“다시 집에 들어갈 거지?”
“니 하고 약속한 게 있는데 당연히 드가야지. 오늘내일 중으로 해결할 끼다.”
“가서 잘해. 이렇게 막 새벽에 나오지 말구.”
“남 말하네.”
두산은 수일을 힐끗 쳐다보고 밥을 퍼 넣었다. 배가 무척 고팠던지 한 그릇으론 부족해 보였다. 자기가 먹을 거였다면 공깃밥만 추가했겠지만, 두산의 입에 들어갈 거라 수일은 하나를 새로 주문했다.
“조모가 마이 서운해하드라.”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
“어. 당연히 말했지.”
“괜히 말했나 봐. 기대라도 안 했으면 모르겠는데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조모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제게 한 말이었다. 이번 추석만큼은 제대로 보낼 수 있을 줄 알고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물론 수일에겐 실망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 일본 갈래?”
뜬금없는 말에 수일은 두산을 쳐다보았다.
“조모가 혼자 살기 외롭다꼬 이참에 같이 일본 가자 카든데. 니 생각은 어떻노?”
“일본은 무슨 일본이야. 밥이나 먹어.”
수일은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단번에 거절했다. 속마음이야 일본이 아니라 그 어디라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더는 기대를 하고 싶지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이고, 윤수일이 광녀이 시절이 참 좋았는데. 내가 미칬다꼬 니를 정상으로 돌리삤네.”
두산의 영감 같은 한탄에 수일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구더러 광년이래?”
두산이 손을 뻗어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굵고 투박한 손가락이 수일의 눈썹을 따라 움직였다.
“눈썹도 우째 이래 예쁘게 났노?”
“그게 뭐 별거라구.”
수일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당연히 별거지. 니처럼 이래 예쁘게 태어나기가 쉽나?”
“목소리 좀 낮춰. 부끄럽게.”
수일은 손님도 없는 가게를 빠르게 둘러보며 두산에게 투덜댔다. 두산은 그런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밥을 먹었다. 수일에겐 둘이 마주 보고 앉아 밥 먹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다. 평소와 달리 수일은 최대한 느린 속도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멈출 수는 없으니 조금이라도 늦추려 최선을 다했다.
***
강재욱은 무사히 건설사 사무실로 출근했다. 하필 비가 내리는 바람에 우산 쓴 사람들로 평소보다 사무실 주위가 더 산만했다. 주의 깊게 살핀 결과 미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덩치 셋이 재욱을 에워싸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잠해도 너무 잠잠했다. 재욱은 그게 영 찜찜했다.
예상과 달리 영감은 재욱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나중이야 어찌 되었든 일단은 들어주겠거니 했는데, 무슨 자신감인지 연락조차 없었다.
자신이 김대순과 정춘자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엮어 봐야 고작 최삼락에게 정춘자를 소개해 준 정도였고, 더 쥐어짠다 해도 마스터 전석모에게 거짓 증언을 시킨 정도였다. 그건 얼마든지 커버 가능했다. 경찰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삼류 밴드 마스터 말보다야 당연히 제 말을 더 믿을 터였다.
영감이 노망이 들지 않고서야 불도저를 경찰에 넘길 리도 만무했다. 불도저는 백사파 소속 해결사였다. 이번 살인 사건뿐 아니라 여러 건의 살인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 새끼를 넘기는 순간 걸려들 간부가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그건 영감에게도 위험 부담이 컸다.
그런데도 영감은 무슨 생각에선지 재욱의 제안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재욱이 이틀 사이에 대단한 걸 찾지 못하리라 여긴 듯했다. 아니면 최삼락 일로 협박한 게 먹힐 거라 생각했든가.
나이를 먹더니 영감도 어쩔 수 없이 감이 많이 떨어졌다. 영감이 키운 호랑이 새끼가 이 강재욱이건만 지나치게 얕잡아 보고 있었다. 물론 재욱도 돈과 권력에 경계가 무뎌져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하긴 했지만, 사람이란 위기가 찾아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되어 있었다.
이번 일엔 운도 따라 주었다. 백태섭의 친척이자 사고 현장에 있었던 문일준 주변만 죽자 살자 파다 보니 하나가 걸려들었다. 경찰서에서 찾아낸 문일준의 사고 경위서가 바로 그거였다. 더 놀라운 건 문일준뿐 아니라 백태섭도 같은 경위서를 썼다는 사실이었다.
재욱은 교통사고 당시 백태섭이 심하게 다쳐서 저 지경이 된 줄 알았었다. 분명 영감이 그렇게 말했었기에 백태섭의 자필 경위서를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위조 서류인 줄 알았다. 사고 목격자 진술까지 읽고 나서야 백태섭이 진짜로 멀쩡했음을 믿게 되었다.
그럼 백태섭은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을까? 설마하니 영감이 아들을 죽이려고 윤수일을 졸로 썼는데 그게 실패한 걸까. 실패 후 다시 사람을 썼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밝히기엔 정보도 없을뿐더러 시간이 촉박했다.
문일준과 백태섭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교통사고로 다 죽어 가는 윤수일을 방치한 채 침을 뱉고 택시를 타고 도주했으면서 자정이 조금 지난 8일 새벽 당당하게 경찰서로 찾아가 살인 미수죄로 윤수일을 신고했다.
백태섭의 본모습을 몰랐던 재욱은 증거들을 보고 조금은 놀랐다. 나이 어린 재욱과 그 또래 조직원들을 모아 놓고 맛있는 걸 사 주고 보스 행세를 할 때부터 그 끼가 보이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뭐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재욱이 임상엽에게 했던 짓을 가르친 사람도 백태섭이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문일준의 경위서 하나로 막혔던 혈이 뚫리자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야기에 피와 살을 붙이는 덴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실제 경찰이 보관하고 있던 교통사고 사진을 봐선 운전석을 제외한 다른 좌석은 큰 피해가 없었지만 재욱은 제 입맛에 맞는 사고 사진을 찾아내었다. 사고 당시 백태섭이 크게 다쳤다고 영감 입으로 말했으니 재욱은 영감이 말한 대로 놀아 주기로 했다. 그 사실에 반박할 사람은 재욱이 아니라 바로 영감이었으니까.
윤수일이 구급차를 타고 실려 갔던 병원에 백태섭이 함께 실려 갔다는 내용의 응급실 서류를 조작하는 덴 돈 10만 원밖에 들지 않았다. 사고 당시 윤수일 혼자 이송된 병원은 말이 종합 병원이지 의료진이나 시설이 삼류였다. 삼류인 윤수일에게 딱 어울리는 병원이었다. 그런 병원에서 머리 수술까지 받고 특별한 후유증 없이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편지 속 윤수일에 대해서도 문일준과 백태섭의 비방 섞인 경위서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윤수일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서술한 윤수일은 천하의 파렴치한 인간이었다. 문장마다 악의가 가득했다.
같은 이야기라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쪽의 반응은 첨예하게 달라졌다. 재욱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듯 증거물들의 순서까지 고려해 가며 진짜와 가짜를 정교하게 섞어 나갔다. 위조품과 진품을 섞어 두면 모두 진품으로 보이기 마련이었다. 마지막 손편지는 어찌나 잘 썼던지 스스로도 감탄할 지경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사모님이자 원앙 부부라 불릴 정도로 백태섭과 사이가 좋았던 김주옥은 재욱의 편지에 바로 걸려들었다. 전화는 재욱이 직접 받지 않았다. 예상 질문을 미리 뽑아 답변을 준비해 두었기에 재욱의 대타는 물 흐르듯 김주옥을 구워삶았다. 김주옥은 불쌍할 정도로 울고 분노했다. 그 정도까지 했다면 영감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났는데도 영감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김주옥 다음은 신문 기사였다. 재욱은 기자들에게 던져 줄 자료를 미리 만들어 둔 상태였다. 영감이 세게 나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며느리야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있으면 그만이지만, 기사까지 나가면 손주들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테고 사돈에 팔촌까지 모두 이 일을 알게 될 것이다. 그건 영감 얼굴만 먹칠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자기가 영감이었다면 여기서 마무리 짓고 재욱이 원하는 걸 들어주었을 텐데. 그는 전화 한 통화 없었다.
“씨팔, 이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애가 타들어 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결재할 서류들을 쌓아 두고만 있었다. 금요일마다 하던 회의를 추석 연휴 때문에 오늘로 바꿨다는 비서의 말을 전해 듣고도 책상에 가만 앉아 있었다. 덩치들은 하품까지 해 가며 지루한 시간을 참고 견뎠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재욱은 덩치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건설사 건물 앞에서 제 차를 기다리는데 검은 세단이 섰다. 문이 열리고 고 비서가 내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재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강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회장님께서 같이 점심 식사나 하시잡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고 비서가 그를 차로 안내했다.
재욱은 차에 타기 전 덩치들에게 영감을 만나러 간다고 일렀다. 둘은 차를 타고 저를 쫓아오라 일렀고, 나머지 하나에겐 3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욱이 미리 지정해 준 경찰에게 신고하고 서류도 신문사에 보내라고 일렀다.
그리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엔 운전기사와 고 비서밖에 없었다. 영감이 먼저 가 있는 모양이었다. 재욱은 뒷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짜증 나던 비조차 운치 있게 느껴졌다. 라디오에선 이은하의 <봄비>가 흘렀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비 노래라 생각하며 재욱은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응시했다.
냉동 창고가 즐비한 동네로 차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재욱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씨팔. 어디 삼류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을 영감이 하고 앉아 있었다. 이런다고 겁먹을 강재욱이 아니었다.
차는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았다. 이쪽 지리는 나름 훤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도 돌다 보니 여기가 어딘지 감이 오질 않았다. 재욱은 늘 지표로 삼는 커다란 간판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거대한 창고 앞에 흰색 그라나다가 서 있었다. 영감이 아니라 백두산이었다. 고 비서가 저를 속였다.
강재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현수는 넓디넓은 창고 앞에서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던 종국이 불을 붙여 주었다.
“두사이 이 새끼, 사람 하나 잡는데 머 이래 큰 창고를 쓰노?”
아까부터 현수는 반응도 없는 종국을 앞에 두고 혼자서만 말하고 있었다.
“날씨 한번 조오타! 일 끝내놓고 삼겹살에 소주 한잔 빨면 그기 천국 아이겠나? 그쟈?”
역시나 답이 없었다. 늘 있는 일이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신나는 척해 봤지만, 오늘따라 담배가 입에 썼다. 곧 한때 모시던 형님이 무너지는 꼴을 봐야 해서 입맛이 씁쓸했다. 저 양반이 어쩌다가 저리 망가졌나. 후, 연기를 뿜었다. 이 바닥만 유독 그런 건지 몰라도 사람은 부와 권력을 얻는 순간 변했다. 곱게 변하면 어디가 어때서, 꼭 분수도 모르고 설치다가 조용히 뒷방 신세가 되었다.
현수는 적어도 강 이사는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매사 일 처리가 칼 같았고 감정에 휘둘리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귀신같이 자기 사람을 알아보는 눈썰미도 있는 남자였다. 나이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저 사람이다 싶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발탁해서 키웠다. 높으신 분들의 반대가 있어도 어떻게든 설득했다.
현수가 가장 높이 샀던 점은 그 누구보다 조직을 위하는 마음이 깊었다는 거였다. 그랬던 남자가 저도 안 할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물심양면으로 자기를 밀어 준 영감님 등에 칼을 꽂았다.
“두사이는 안 나오나?”
“...”
“불도저 절마 기절 안 했나?”
“했지.”
“근데 머할라꼬 저 있노? 나와서 담배나 피우지.”
구시렁대는데 창고 문이 열리더니 두산이 나왔다. 저놈도 양반 되긴 글렀다. 현수는 입꼬리 하나를 올려 웃었다.
“행님들, 내 담배 한 대만.”
두산은 주머니도 없는 검은색 티셔츠 가슴께를 습관적으로 더듬으며 담배를 찾았다. 현수가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번에도 종국이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셋은 나란히 서서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담배 연기가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현수는 두산이 열일곱인가 열여덟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당시 현수는 강 이사 직속이라 강 이사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애송이였다. 두산의 첫인상은 양아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두산은 체격이 좋아서 깡패 일 하기 딱 좋았지만, 이런 일엔 아예 관심도 없었다. 그저 노는 데 바빴다. 나이도 어린 새끼가 나이트야 술집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다. 영감님의 손자라고 해도 강 이사는 특별 대우 같은 걸 하지 않았고, 두산도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애가 넉살이 좋아서 늘 행님 행님 하며 웃고 장난쳤다. 역시나 장난치고 떠드는 걸 좋아하는 현수와 성격이 잘 맞았다. 오다가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현수가 술도 사 주고 밥도 사 주며 친해졌다.
딱 한 번, 애가 하도 심심해하길래 용돈이나 벌게 해 줄 겸 힘쓰는 데 데려간 적이 있었다. 저쪽은 예상외로 인원수를 늘려서 나타났고 이쪽은 고작 셋이었다. 좆됐다고 생각했었다. 괜히 영감님 귀한 손자를 데려왔나 후회하고 있을 즈음 스무 살도 안 된 두산이 겁도 없이 먼저 덤볐다.
초짜들, 특히 힘 좀 쓴다는 10대들은 또래 애들 좀 패고 다녔다고 지들이 대단하다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는 강박에 유독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두산은 달랐다. 이 새끼는 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황을 즐겼다.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해졌다. 그때 처음으로 현수는 두산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실없이 웃고 있어도 현수나 다른 치들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영감님의 손자라서가 아니라 백두산이란 인간 자체가 그랬다.
노선을 갈아타는 일은 전혀 고민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나이 어린 한량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크게 될 새끼였다. 두산을 따르는 건 이상하게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두산도 형님 대접을 잘해 주었다. 강 이사에게선 볼 수 없는 면모였다. 현수는 여전히 강 이사 소속이었지만, 이미 두산의 사람이었다.
“참, 수일이 행님은 우짜고 있노?”
“우짜기는. 여관으로 토낐지.”
현수가 짧게 웃었다. 하여간, 그 형님은 비실비실 걷지도 못하게 생겨서는 잘도 튀었다.
석 달 전, 두산이 전화로 남자와 하는 법을 물어봤을 때만 해도 하다 하다 남자까지 건드리나 했었다.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 새끼라서 놀라지도 않았었다.
이왕 남자하고 노는 거 나이나 어리든가 아니면 정신이나 똑바른 걸 만나지 하필 둘 다 아닌 남자에게 꽂혔다. 어떻게 하면 한 달도 안 돼서 제 목숨도 내놓을 만큼 좋아할까 싶었지만, 뭐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현수도 윤수일은 좋게 생각했다. 정신이 나가 있어서 그렇지 얼굴도 눈에 띄게 잘생기고 키도 컸다. 말씨도 간지럽긴 해도 참 다정했다. 무엇보다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 좋았다. 맨날 그 큰 눈을 굴리며 현수를 의심하는 것도 재밌었고, 겁도 많고 소심한데 그렇다고 할 말을 아주 안 하는 것도 아니라서 웃겼다.
야구장을 다녀와선 부쩍 친해졌는데, 하필 이번에 완전히 돌아 버려서 식겁했었다. 힘도 어찌나 센지 웬만하면 힘에서 밀리지 않는 현수도 두 번이나 자빠졌었다. 어른들 말 하나 틀린 게 없었다. 미친놈은 힘이 셌다.
“하이고, 수일이 행님은 전생이 토끼였나? 멀 그래 빨빨거리고 싸돌아 댕기노. 종국이 니가 찾았나?”
“…재민이가.”
“이제는 미행 안 한다 카드만은 했는갑네.”
종국은 대답 대신 담배 연기를 뿜었다. 두산을 흘끔 쳐다보는 게 다였다.
“참, 준플레이오프 가야지?”
“당연하지.”
두산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종국이 니는? 이번에도 안 갈 끼가?”
종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 쌔끼. 드럽게 비싸게 구네. 올해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데 함 가자.”
졸라도 소용없었다. 집구석에 금송아지라도 숨겨 뒀나, 어째 종국이 저 새끼는 어딜 나가는 법이 없었다. 저 같으면 답답해서 미쳐 버렸을 텐데. 쯧, 이번에도 덕규나 데려가야지. 현수는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담배를 바닥에 던져 비벼 껐다.
치지직, 불규칙한 소음과 함께 무전기가 울렸다. 그라나다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잠시 후 차창이 열리고 재민이 고개를 내밀었다.
“행님들, 지금 오고 있습니다. 꼬리는 뗐답니다.”
“오야.”
현수는 종국을 툭 치고 고개를 까딱했다. 두 사람은 미리 얘기한 대로 창고를 돌아 뒷문으로 향했다.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물이 고여서 발을 디디다가 운동화가 젖었다.
“에이 씨팔, 이거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투덜대며 발 한쪽을 들어 탈탈 털었다. 종국의 발을 봤더니 저 새낀 장화를 신고 있었다. 아까는 분명 워커를 신었던 것 같은데 언제 갈아신었나 몰랐다.
“와, 진짜 의리도 읍따. 니만 장화로 갈아 신었나?”
현수의 말을 무시고 종국은 창고 뒷문을 열었다.
“드가기나 해라.”
“에이 진짜. 말이라도 쫌 해주지.”
“해주면? 장화도 없는 기.”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새끼가 의리가 없었다. 앞으론 차 트렁크에 장화를 싣고 다니든가 해야지. 현수는 운동화 때문에 영 기분이 상했다.
“그라믄 하나 사주야지!”
현수가 버럭 소리를 치자 종국이 귀찮은 듯 미간을 구겼다. 그 바람에 얼굴에 난 흉도 함께 움직였다. 참 신기했다. 저런 흉이 제 얼굴에 있었다면 분명 무서워 보였을 텐데, 종국은 저걸 달고도 사람이 참 착실해 보였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종국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수는 닫히려는 문틈 사이로 급히 몸을 밀어 넣으며 계속 장화 얘길 했다.
창고 한가운데에 기절한 불도저가 앉아 있었다.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현수도 처음이었다. 해결사라고 해서 영화처럼 멋지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평범한 아저씨였다. 저 사람도 해병댄가 특전사 출신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몸매를 보니 영 믿기질 않았다.
얼굴엔 멍 하나 없지만, 속은 종국이 보기 좋게 회를 쳐 놓았다. 슬쩍 장난을 친 게 아니라 정말 회를 쳤다. 상처가 곪지 않도록 소독도 해 주고 옷도 두 번이나 갈아입혔다. 붕대까지 감아 주었다. 기절한 건 전기 충격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두산은 불도저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주먹으로 이겨야 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앞문이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밝았던 창고 안은 문이 닫히자 다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실내는 습기와 퀴퀴한 곰팡내로 가득했다. 키가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에 달린 창문들은 모두 막아 둔 상태였다.
이곳은 예전엔 동태 공장인가를 운영했었는데 사장이 부도를 내고 도망가 버렸다고 들었다. 다른 창고들과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쓸모가 많았다.
현수는 여기 들를 때마다 제가 딛고 선 시멘트 바닥 아래에 시체가 묻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싱거운 상상을 했다. 쾅쾅, 부러 발을 세게 디뎌 보았다. 셋 다 창고 모서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밖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영감님의 운전기사와 고 비서가 강 이사를 데리고 오는 모양이었다. 영감님과 점심이나 하러 가는 줄 알았을 텐데 창고에 도착했으니 강 이사는 아마 상당히 기분 나빠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부터 강재욱의 외침이 들렸다.
“어이, 백두사이. 니가 이란다꼬 내가 겁먹을 줄 아나?”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시커먼 공간에 잠깐 빛이 들었다. 비싼 양복에 비싼 구두로 잘 차려입은 강재욱이 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는 덩치들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머뭇거림도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현수는 새삼 강재욱도 자기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생각해 내고 웃었다.
어두워서 영 답답했다. 불은 언제 켜 주려나 하고 있는데 틱, 소리와 함께 천장의 낡은 형광등들이 요란을 떨며 불을 밝혔다. 저것도 불이라고 눈이 부셔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강재욱은 꼼짝 않고 서서 불도저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을 터였다.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두산은 무표정했다. 돌아보자 종국도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현수만 좀 찔렸다. 아무래도 강 이사 직속은 저밖에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불도저를 바라보던 강 이사가 고개를 돌려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어이, 박핸수. 니를 여서 다 보네.”
말투가 차가웠다. 현수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종국도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종국이 있는 건 의외였는지 강 이사는 눈썹을 꿈틀댔다. 뒤를 돌아서 두산을 보더니 혀를 찼다.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지만 잠시뿐이었다. 강재욱은 지금 앞에 앉은 불도저가 제일 신경 쓰일 테니 여기 창고 안 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강재욱이 걸음을 뗐다. 저벅저벅, 구두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불도저 앞에 멈춰 선 강재욱은 허리를 숙였다. 만지지 말아야 할 걸 만지는 양, 검지로 불도저의 턱을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 상처도 보이지 않자 손으로 셔츠를 들어 올렸다. 아까 감아 두었던 붕대 여기저기에 피가 맺혀 있었다. 강재욱은 인상을 썼다.
“어이! 정신 차리라! 불도저! 정신 차리 바라.”
재욱은 불도저의 어깨를 잡아 흔들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뺨을 때렸다.
“에헤이, 행님. 거 아픈 사람한테 그라믄 안 되지예.”
두산은 더없이 경쾌했다. 어슬렁어슬렁 강재욱 근처로 다가가더니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강 이사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두산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왼손으로 향했다. 현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두산이 손에 쥔 워크맨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행님, 이 일을 부탁한 사람이 정 여삽니다. 내가 아이고예. 행님만 이상타 생각한기 아이고 내도 이상해서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다행히 그 집 땅 기운하고 행님 기운이 상극이라 온갖 잡귀들이 행님만 나타나면 물러날 끼라 했다 안 합니까. 그 머꼬? 손 없는 날 이사 들어가는 거, 그거하고 같은 기라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