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81)

수일은 식탁에 엎드려 아침을 만드는 두산의 등을 가만 바라보았다. 음정 박자도 맞지 않아 무슨 노랠 흥얼거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두산은 아까부터 콧노래를 불렀다. 가끔 가사를 내뱉기도 했다. 수일이 작게 키득거리면 귀신같이 알아채선 홱 뒤를 돌아보았다.

“와 웃노?”

“넌 귀가 소머즈니? 별걸 다 들어.”

“다 들리니까 듣지.”

“맘대로 웃지도 못해.”

수일이 작게 중얼거렸다.

“에헤이, 그것도 들린다.”

두산은 이렇게 말하며 마가린 밥을 접시 두 개에 나눠 담았다.

빵 사는 걸 잊어버려서 두산이 먹을 토스트용 식빵이 없었다. 접시를 하나씩 앞에 놓은 두산이 김치와 우유를 꺼냈다.

“씨발, 유통기한 다 지났네.”

“어디 봐.”

두산은 보여 주지도 않고 우유를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일어나서 빈 우유갑을 보니 유통 기한이 일주일밖에 안 지나 있었다. 냄새도 안 나고 상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걸 왜 버리나 몰랐다.

“먹을 수 있는데 왜 버리니? 너 나중에 다 벌 받아.”

“니가 멀쩡하면 내도 안 버맀다. 니 그 몸으로 우유 잘못 먹고 병 걸리면 죽는다 죽어.”

“내가 그 정도로 약한 건 아니거든?”

“맞거든?”

두산은 수일의 말투를 흉내 내며 혼자 키득거렸다. 수일은 입을 비죽거리며 식탁에 앉았다.

“아나, 이거나 마시라.”

두산이 오렌지 주스를 따라서 수일에게 건넸다.

수일은 주스 한 모금부터 마시고 마가린 밥을 떠 넣었다. 역시나 맛있었다.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점심때 회사 앞으로 나온나. 백화점 가서 추석에 입을 양복도 사고 거서 밥도 먹고 하게.”

“응.”

“참, 처가댁 어르신들 매장했나 아이믄 화장했나?”

너무도 자연스럽게 수일의 가족들을 처가댁이라 불렀다. 수일은 피식 웃었다.

“세 분 다 화장했어. 그건 왜?”

“왜긴? 매장을 했으면 성묘 가서 풀 벨라꼬 했지. 그라믄 집에서 차례상만 차리까?”

밥을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두산이 말했다. 수일은 가만 두산을 쳐다보았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 몰라서 조금 놀랐다. 수일은 사는 게 바빠서 차례상은커녕 기일도 챙긴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가끔 보름달을 보며 안부를 묻는 게 다였다. 차례상이라니. 두산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뭐 하러. 넌 집에 가서 명절 보내구 와. 올 때 먹을 것 좀 싸 오구.”

“조모가 상 차리기로 했다.”

“무슨 상?”

설마 조모에게 자신의 가족 차례상을 부탁한 건 아니겠지 싶었다. 아무리 두산이라도 그런 부탁을 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수일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연히 차례상이지. 내 말 몬 들었나?”

“어우, 넌 왜 상의도 없이 그런 걸 부탁하니?”

수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직은 조모를 보기가 너무 민망하고 죄송했다. 미친놈처럼 뛰쳐나간 게 엊그젠데 무슨 면목으로 조모를 본단 말인가.

“그리구 숙모님 김치찌개하고 된장찌개밖에 못 하신다고 하셨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인데. 조모 집이 종갓집인가 장손인가 그래가지고 에릴 때부터 명절에 전 부치고 나물 하고 다 했다 카든데.”

“어쨌든 그런 거 부탁하지 마. 나 싫어.”

“싫든가 말든가 벌쌔로 부탁한 걸 우짜노. 거절하고 싶으면 니가 전화해라. 하이고, 우리 조모도 참 복도 읍따. 만날 혼자서 명절 쇠다가 이번에 우리하고 쇤다꼬 억수로 좋아했는데. 쯧. 니가 그래 싫으면 우짤 수 읍지.”

거절 못 할 소리를 해 놓고 두산은 입 안 가득 밥을 퍼 넣었다. 보란 듯 김치도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수일은 두산이 얄미워서 한껏 째려보았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수일도 배가 고파서 화를 풀고 밥부터 먹었다.

3일 앞으로 다가온 추석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수일에겐 명절이라고 해 봐야 평일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는데 이젠 차례상도 차리고 함께 보낼 가족도 생겼다. 기분이 묘했다. 울컥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수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물을 마시고 다시 밥을 떠 넣었지만, 목구멍이 꽉 막혀 삼키질 못했다.

“와?”

“…배불러서.”

“지랄. 내 니 먹성을 아는데 그거 묵고 배가 부를 리가 읍따.”

하여튼 눈치는 빨라서 변명도 안 먹혔다. 수일이 제대로 먹질 못하자 두산도 속도를 늦췄다. 다 안다는 듯 손을 뻗어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도 톡 쳐 주었다.

“퍼뜩 무라. 니가 무야 내도 묵지.”

“응.”

두산의 말 한마디에 다시 밥이 넘어갔다. 수일은 천천히 씹어 삼키며 시장 보러 언제 가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그냥 다들 명절 전날에 음식을 만드니 시장은 내일 보러 가겠구나 했다. 무거운 것도 있는데 조모가 혼자서 시장에 가지 말고 꼭 전화를 해 줬으면 하고 수일은 생각했다.

두산을 출근시키고 수일은 사진 정리를 마저 했다. 제겐 아픈 추억이 된 에덴동산 동료들과 찍은 사진은 예전 앨범에 그대로 두고 몇 장 되지 않는 남은 사진을 옮겼다. 어제 병원에서 훔쳐 온 두산의 사진도 넣었다.

알몸으로 앉은 아이가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웃는 입매가 지금과 똑같았다. 어찌나 통통한지 몸이 울퉁불퉁 굴곡졌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오동통했다. 수일은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며 웃었다.

지금이야 앨범에 빈칸이 많지만 살면서 두산과 함께 찍은 사진들로 모두 채우리라 수일은 다짐했다. 미국 가서도 찍고 해피랑도 찍고 조모하고도 찍어야지.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정말 기회가 된다면 두산의 가족들과도 사진을 찍고 싶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노이로제에 걸린 것처럼 수일은 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히 수화기를 집었다.

- 거 윤수일 씨 계십니까?

여자였다.

“네. 전데요.”

- 내다. 조모, 아니 숙모!

목청이 컸다. 수화기 너머 조모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며 핀잔을 들었다.

“죄송해요, 숙모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 안녕 몬 했지? 니 같으면 안녕하겠나?

“아… 죄송합니다. 그게….”

그녀는 수일의 사과에 호탕한 웃음소리로 답했다.

- 농담이다, 농담. 내야 잘 지냈지. 딴 기 아이고 내일 시장 보러 가자꼬 전화했다. 두사이한테 얘기는 들었제?

“네.”

- 새벽 장을 가야 신선한 거를 마이 산다. 내일 6시까지 갈 테이까 준비하고 있으라.

“네.”

- 내 손 큰 거 알제? 억수로 마이 살 끼다. 각오하고.

“걱정 마세요. 제가 다 들어 드릴게요.”

음식 장만하느라 고생일 텐데 그런 건 생각지도 않는 듯 조모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그 꼴을 보고도 사람 좋은 조모는 수일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저기, 숙모님… 그때 정말 죄송했습니다.”

- 죄송은 무신. 살다 보면 그랄 수도 있지. 지금은 개안체?

“네. 괜찮아요.”

- 그라믄 됐다. 그 일로 두사이가 내한테 으찌나 썽을 내던지 다시는 내하고 말 안 할 줄 알았다 아이가. 그란데 어제 전화해서 이번 추석은 우리하고 같이 지내입시다 하는데 하이고 마, 내 친손주도 아인데 그래 고맙드라.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명절마다 외로웠던 건 조모도 마찬가지였나 보았다.

“숙모님, 감사합니다. 저 정말 잘할게요. 진짜로 잘할게요.”

- 오야. 내도….

조모는 말을 잇지 못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과장된 목소리로 급한 볼일이 있다며 전화를 끊었다. 수일도 뜨거워진 눈시울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두산에게 고마웠다. 두산의 제안을 선뜻 허락해 준 조모도 고마웠다.

늦장을 부렸는지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수일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이번엔 제대로 셔츠 단추를 잠갔는지 손가락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새 양말에 새 구두도 신었다. 빼놓은 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밖으로 나가자 비가 오려는지 날이 흐렸다. 밀레니엄 방향으로 몇 발자국 걷는데 차가 빵빵거렸다. 수일은 옆으로 비켜서서 걸었다. 그랬는데도 지나가지 않고 자꾸 빵빵거려 오른쪽을 돌아보자 흰색 그라나다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요, 거 억수로 잘 생기서 그라는데 전화번호 쫌 주실랍니까? 아이다, 내 차에 함 타보이소. 내 나쁜 사람 아입니다.”

차창으로 고개를 쭉 뺀 두산이 실없는 농을 던지며 차를 세웠다.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멈춰 돌아볼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수일은 너무 창피해서 얼른 차에 올라탔다.

“빨랑 가.”

“저를 아십니까?”

“뭐래. 빨리.”

“에이, 같이 쫌 마차주고 해야 재밌지. 이래 사람이 진지하다.”

두산이 투덜대며 차를 움직였다.

라디오에선 오늘도 추석 물가에 대해 떠들어 댔다. 선물은 뭐가 인기인지 알려 주었고, 기자가 직접 시장으로 나가 차례상에 올라갈 생선과 과일값을 조사해 알려 주었다. 평소라면 흘려들었겠지만 수일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백화점에서 양복부터 샀다. 두산은 가을 양복이 없는 수일에게 양복 두 벌을 사 주었다. 하나는 차례 지낼 때 입을 검은색, 하나는 평상시에 입을 네이비색이었다. 넥타이도 검은색과 붉은색 두 개를 샀다. 두산은 나이트 기도 할 때 입던 양복이 널렸다며 자기 건 사지 않았다.

하룻밤 새 뻔뻔한 귀신이라도 들어왔는지 수일은 처음으로 옷 가격표를 보지 않았다. 점원이 권유해 주는 대로 입고 두산이 예쁘다 하면 샀다. 부잣집 사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수일은 사람들이 보건 말건 두산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게 기분이 좋았는지 두산은 내내 환하게 웃었다.

식당가로 올라가 소불고기 전골을 먹었다. 두산은 신이 나서 미국 얘길 했다.

“미국 비자 받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라 카대. 업체에서 다 알아서 해준다꼬는 했는데 요샌 빨라야 3개월이고 보통은 6개월 정도 걸린다 카드라. 그동안 니는 살 좀 찌우고 서예 배우고 해라.”

“너는 요리 배우고?”

“어. 내는 요리 배우고 선박 자격증 하나 딸라꼬.”

“너 보트 몰잖아.”

“모타뽀트 말고 쪼매 큰 거.”

“그건 왜?”

“왜긴. 미국 부자들은 크다란 보트 타고 댕긴다. 우리도 함 타 바야지.”

“허파에 바람만 들어가지구. 가서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지 그 생각부터 해야지. 미국 가서도 놀러만 다닐 거야?”

“어.”

두산은 아주 당당했다. 한숨이 나야 정상인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수일도 웃었다. 매사 여유 있고 당당한 두산이 보기 좋았다. 수일이 가지지 못한 걸 두산이라도 가져서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걱정은 제가 하면 되니 두산은 근심 따위 없이 지금처럼 살았으면 했다.

불고기 국물에 밥을 비벼 당면과 함께 먹었다. 아침엔 잘 넘어가지 않던 밥이 술술 넘어갔다. 두산은 수일이 먹는 걸 신경 쓰며 숟가락에 고기를 얹어 주고 반찬이 떨어지면 잽싸게 ‘사장님’을 불렀다. 수일의 입가에 뭐가 묻으면 꼭 제 손으로 닦아 그 손을 쪽 빨아 먹었다.

수일은 행복했다. 행복이 뭐 별거냐 싶었는데 겪어 보니 정말 별거였다. 온전한 정신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일이 그동안 왜 그렇게 힘들었나 몰랐다. 불안감도 없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으레 나쁜 일부터 걱정하던 버릇도 이번엔 잠깐 숨어 버렸다.

두 사람은 밥을 먹다가도 마주 보고 웃고 웃다가 또 밥을 먹었다. 그저 밥 한 끼 먹을 뿐인데 수일은 정말 행복했다.

***

같은 시각 김주옥은 점심 식사 후 어제 녹화해 둔 드라마를 보면서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마산댁이 방으로 소포를 갖다주기 전까지.

“우체부는 아이고 심부름으로 왔다 카면서 주고 가데예.”

“누구 심부름?”

“그건 내도 모르고예. 먼 말을 해야 알지. 고마 탁 던지고 가뿠다.”

마산댁 말대로 소포엔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적혀 있지 않았다. 서류 봉투 안에 누런색 파일이 들어 있었다.

“이기 머꼬? 내한테 온 거 맞나?”

주옥은 미간을 좁히며 파일을 끄집어냈다. 사무실에서나 쓸 법한 황색의 파일이 영 어색했다. 파일 안에 공문서 같은 것들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문서마다 숫자로 순서를 표기해 두었고 빨간펜으로 메모도 되어 있었다. 일단 쫙쫙 뒤로 넘기는데 문서 사이에 ‘사진’이라고 적힌 봉투가 숨겨져 있었다.

주옥은 글자를 읽기 싫어서 사진부터 꺼냈다. 잔뜩 찌그러진 자동차 사진이었다. 교통사고가 났는지 차는 운전석과 바로 뒷좌석까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베이지색 시트는 온통 피로 얼룩져 더러웠다. 몇 장을 살펴보았지만 전부 그런 사진이었다. 기분이 상한 주옥은 인상을 찌푸리며 남은 사진은 대충 넘겨보았다. 

마지막에 작은 증명사진이 하나 나왔다. 젊고 잘생긴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 뒤를 돌려 보자 ‘윤수일’이라고 역시나 빨간펜으로 메모가 되어 있었다.

윤수일, 지금 두산이 만나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동명이인이라기엔 두산의 방에서 본 사진과 똑 닮아 있었다. 낡은 증명사진 속 윤수일은 끽해야 스무 살은 되었을 법한 앳된 얼굴이었다. 이 사진이 어떻게 여기 들어 있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옥은 1번이라고 적힌 문서부터 차분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복사한 것인지 글자들이 흐릿했다. 1982년 1월 7일에 일어났던 교통사고 관련 자료란 걸 알게 되었다. 도대체 이걸 왜 저한테 보낸 건지 주옥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님한테 보낸 자룐가? 주옥은 한숨을 쉬며 다음 장을 넘겼다.

문일준이란 남자가 경찰에 제출한 교통사고 경위서였다.

“문일준이라. 마이 들어봤는데….”

주옥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1년 전 돌연 서울로 갔던 남편이 자주 어울려 다닌다던 그 친척 남자 이름이었다.

81년 9월 말, 추석을 쇠자마자 서울행을 결심했던 남편은 시아버지와 크게 싸운 뒤 바로 짐을 쌌다. 남편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니 주옥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었다. 뜯어말리고 울어도 봤지만 10월 8일 끝내 남편은 집을 떠났다.

서울에 간 첫 한 달 동안 남편은 이삼일에 한 번씩 주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잔뜩 들뜬 목소리로 누굴 만나고 뭘 하는지 자랑하듯 알려 주었다. 그때마다 문일준이란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아버님의 고종사촌 형님의 아들 중 하나라 듣긴 했어도, 남편과 어떤 사이인지 주옥은 알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주옥은 바깥일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시댁은 정치인 집안답게 행사가 많아 늘 바빴지만, 그녀는 시집살이라고 부를 만한 험한 고생은 하지 않았다. 처음에야 시아버지의 깐깐하고 엄한 성격이 무서워 벌벌 떨었고, 감정 기복이 심한 시어머니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일찍 시어머니를 여의고, 혼자된 시아버지를 오랜 세월 모시다 보니 거기에도 익숙해져 되레 친절하면 어색할 지경이었다.

허허실실 웃기만 하던 친정아버지가 남편의 능력을 조금 무시하긴 했지만, 주옥에겐 그런 건 별로 상관도 없었다. 아버지가 뭐라 해도 남편은 존경받는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시아버지 덕에 늘 사모님이란 소릴 듣고 살았고 어딜 가도 대접을 받았다. 친정도 잘살았고 시댁도 잘살아 돈으로 속앓이한 일도 없었다.

게다가 여고 동창생의 남편들과 달리 제 남편은 주옥에게 정말 잘했다. 모임 때마다 다들 부럽다 부럽다 이 소리만 하고 갈 정도로 남편은 가정적인 남자였다.

유일한 골칫거리라면 아이들이었다. 아들만 넷인 주옥은 그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어찌나 활동량이 많은지 가정부를 둘씩 두고도 밤이면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어릴 때만 그럴 줄 알았는데 커서도 사고를 치고 다녀 하루도 고함을 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잔소린 항상 주옥의 몫이었고 남편은 좋은 아버지 노릇만 했다. 가끔 그런 모습이 밉긴 했지만, 원래 가정은 여자가 돌보는 거라 배운 주옥은 그 모습에서 행복을 느꼈다.

물론 남편이 100% 잘했단 소린 아니었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시아버지와 사이가 급격히 나빠져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화도 많아졌다. 이상하게도 그 화를 어린 두산에게 풀었다. 두산의 일로 두 사람은 다툼이 잦았다.

심하게 싸운 날은 몇 날 밤을 각방을 쓰기도 했다. 부부싸움 후엔 늘 먼저 주옥을 달래 주던 남편이 점점 고집스럽게 변해 갔다. 싸움 후에 사과도 하지 않고 달래 주지도 않을 즈음 서울로 가 버렸다.

추억은 미화된다고 했던가? 남편이 저리되고 나서 더 애틋해진 것도 있었다. 주옥은 그걸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20년이 넘도록 별 탈 없이 함께 산 남자였다.

그 오랜 세월 중 미워했던 시간보다 사랑했던 시간이 월등히 많았고, 행복했던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저 남자와 결혼해야지 할 정도로 주옥은 결혼 생활에 만족했다. 남편을 사랑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서울로 갔을 당시 주옥은 그가 바람났다고 확신했다. 눈물까지 보이는 아내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갔으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옥은 절망했다.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시아버지께 술주정까지 했다. 왜 남편을 말리지 않았냐고,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막아 주지 그랬냐고 울부짖었다.

그게 아니란 것은 남편의 전화를 받고서야 알았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시아버지 볼 낯이 없었다. 주옥은 안심하며 남편이 돌아와 주길 고대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상한 사업에 미쳐 있었다. 서울행을 선택하면서 중학교 선생 일을 때려치운 것도 주옥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손을 써서 휴직계로 바꾸긴 했지만, 남편은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주옥이 들어도 남편의 사업은 황당했다. 상식적으로 뭘 하길래 그 짧은 기간 십억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버지껜 남부끄러워 차마 말도 못 하고 주옥은 남편이 얼른 정신을 차리기만을 바랐다.

주옥은 한숨을 쉬었다. 문일준이란 이름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주옥은 사고 경위서를 읽어 나갔다. 경위서에 낯익은 이름이 하나 더 등장했다. 아니 두 개 더 등장했다. 백태섭과 윤수일. 설마 그 윤수일일까? 주옥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빨간펜이 그렇다고 알려 주었다. ‘현재 부산의 한 나이트크럽에서 가수로 재직 중’이란 글자를 보고 주옥은 사진을 뒤져 증명사진을 손에 쥐었다.

다시 한번 이유 모를 불안이 엄습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겨우 붙잡고 주옥은 두산의 방으로 달려갔다. 두산은 가끔 자고 갈 때마다 사진을 하나씩 가져와 제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주옥은 자동차 안에서 찍은 듯 보이는 사진을 집어 들고 얼굴을 확인했다. 맞았다. 이 남자가 낡은 증명사진 속 그 남자였고, 10년 전 문일준이 쓴 교통사고 경위서에 이름을 올린 남자였다. 윤수일이었다.

사진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옥은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서류들을 꼼꼼히 읽었다. 경위서는 사고 다음 날인 1월 8일 작성되었다.

교통사고 당시 운전을 했던 사람이 윤수일이었고 문일준은 윤수일을 살인 미수로 고발하고 있었다. 고의적인 사고, 문일준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살인 미수라고 생각한 연유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경위서에 적힌 대로라면, 사고 며칠 전 남편에게 심하게 맞고 모욕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윤수일은 그날 차를 몰다가 갑자기 ‘죽어! 죽어!’ 외치면서 곧장 가로수로 돌진했다. 윤수일의 돌발 행동에 놀란 두 사람은 말릴 틈도 없이 사고를 당했다. 문일준은 본능적으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던져 살았지만, 남편과 윤수일은 중상을 입었다.

주옥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교통사고 사진들을 다시 보았다. 운전석뿐 아니라 그 뒷좌석도 피범벅이었다. 운전석보다 더 심하게 파손된 뒷좌석은 차창마저 산산조각이 났고 깨진 유리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저 피가 남편의 피였다니, 주옥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다음 장은 윤수일이 입원했던 병원의 기록이었다. 남편이 병원에 실려 간 것과 똑같은 날 윤수일도 같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물론 남편은 곧 국내 최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윤수일은 그 병원에 그대로 남아 수술을 하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뒷장엔 윤수일의 병원비를 낸 사람들의 이름이 있었다. 거기에 시아버지 백영호의 이름이 등장했다. 서류에 따르면 시아버지의 이름은 4단계의 보안을 뚫고서야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비밀스럽게 입원비를 내야 했던 이유가 뭐였을까.

전신이 오들오들 떨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주옥은 남편이 누군가 고의로 낸 사고에 당했을 거라곤 추호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남편이 운이 나빴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아버지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콱 막히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서류 마지막 장엔 누가 썼는지 모를 편지가 있었다.

김주옥 여사님께,

지금 이 문서들을 보며 많이 당황하셨으리라 사료됩니다. 문일준과 윤수일이 어떻게 엮이게 된 건지, 부군 백태섭 씨와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시겠지요.

과거 윤수일은 문일준 씨 애인이었던 한정숙이 운영하던 룸살롱에서 종업원으로 일하였습니다. 본디 성정이 음흉하고 말이 없었던 윤수일은 한정숙에게도 골칫거리였습니다. 빚이 어마어마했던 윤수일은 애인이 죽자 심하게 우울해했습니다. 사고 한 달 전부터 자주 자살을 암시하곤 해서 문일준 씨와 한정숙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사고가 일어났던 날 새벽, 윤수일이 머물던 숙소에서 불이 났는데 그 불을 낸 사람도 윤수일이 틀림없습니다.

백태섭 씨가 서울에 상경했던 당시 하필 윤수일은 문일준 씨 소유의 그라나다 차량 운전도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불안정하고 음흉한 남자에게 운전을 맡긴 그들을 이제 와 원망하면 무엇하겠습니까.

사진에서 보듯 차량은 심하게 찌그러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듭니다. 부군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저로선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 사고를 낸 범인이 바로 윤수일입니다. 문일준 씨가 조서에 서술한 대로 윤수일은 백태섭 씨의 사소한 폭행에 악의를 품고 고의로 사고를 냈습니다.

윤수일은 백태섭 씨를 현재 상태에 이르게 한 범인이나, 그 사실을 알고도 백영호 의원님께서는 윤수일의 병원비 일체를 지불하였으며 경찰 조사에도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부군께서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지난 10년간 윤수일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사회생활을 영위하였고, 현재 백영호 의원 소유의 한 나이트크럽에서 일하며 막내아드님 백두산에게 돈을 뜯어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입니까.

사모님께서 이를 전혀 모르고 계시기에 이런 방법으로 알려 드리게 되었습니다.

윤수일은 한 가정의 든든한 가장을 무너트리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잔악무도한 사내입니다. 그에게 벌을 주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백태섭 씨를 해한 죗값을 받도록 힘써 주십시오.

부군 백태섭 씨는 저에게도 존경하는 선배님이자 상사였습니다. 늘 가슴 한구석에 찜찜함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라도 범인을 밝혀 낸 것에 저는 흥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부디 사모님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시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제가 누군지 몰라 여태 한 얘기들을 의심하실지 모르겠으나 이 서류들 모두 서울에서 직접 찾아낸 공인된 문서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점 용서해 주십시오. 전면에 나서기엔 잃을 것이 너무 많아 비겁하게 뒤에 숨었습니다만, 제 진심은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아래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백태섭 씨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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