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겨 집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샤워만 간단히 하고 침대로 직행했다. 두산이 수일보다 먼저 잠이 들었다. 이틀을 연이어 강행군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했다. 수일은 두산을 품에 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며 토닥였다. 깊이 잠이 들었는지 쌔근쌔근 일정한 숨소리가 들렸다.
“두산아, 너두 경식이가 한 얘기 다 들었니?”
두산이 겉으론 표현하지 않아도 경식의 말에 상처받았을까 걱정이었다.
“그거 다 믿지 마. 니 아버지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다 죽어 가는 나한테 침을 뱉거나 하진 않았을 거야.”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데 그래두 넌 믿지 마. 너 낳아 준 아버지잖아. 아버지 그렇게 미워하면 안 돼. 미워하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니까, 넌 좋은 생각만 해. 좋았던 추억만 떠올리구.”
참 이상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자기 식구들에게 끔찍하게 잘했다면서 어떻게 두산에게만 못할 수가 있는지 궁금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두산은 제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수일을 위해 거짓말하는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 그 남자가 자길 죽도록 미워했다는 얘기를 해 주면서도,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 많이 예뻐해 줄게. 그러니까 아버지 미워하지 마. 그건 내가 하면 되니까.”
수일은 두산의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다.
백태섭을 만나면 단둘이 얘기할 생각이었다. 어찌 되었든 수일이 저지른 짓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 일단 사과부터 해야지. 백태섭은 죽어도 수일을 용서하지 않겠지만, 사실 용서받을 마음도 없었다. 상대가 백태섭이라면 자신을 미워해도 괜찮았다.
두산이 저를 여전히 사랑하니까 백태섭이 뭐라던 수일은 상관없었다. 그저 과거를 청산하고 싶을 뿐이었다. 죽은 여사장이나 기둥서방과는 할 수 없으니 백태섭이라도 만나서 지난 10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과거를 청산하고 싶었다.
이젠 멀쩡한 정신으로 잘 살고 싶었다.
악몽이 멈출 줄 알았는데 아직은 아니었다. 수일은 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는 저를 향해 욕하고 침을 뱉는 두 남자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주 욕해 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수일은 죽어 가고 있었다. 피로 뒤덮여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숨도 겨우 쉴 뿐이었다.
몇 번이고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어느새 동이 텄다. 수일은 먼저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식탁에 가만 엎드려 있었다. 또 그 꿈을 꿀까 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늘 백태섭을 만나서 이 응어리들을 풀어야만 악몽이 멈출 모양이었다.
수일은 쓰다 만 탄원서를 마저 썼다. 삼락 형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유도 모른 채 정신을 놓다가 완전히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상엽이 제가 미쳐 가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제 주검을 맡겼을 테고,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을 터였다.
탄원서를 끝내고 형님에게도 간단하게 편지를 썼다.
형님, 저 수일입니다. 건강은 어떠세요? 먹는 건 입에 잘 맞으시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거기서 주는 밥도 반찬도 여기만큼 맛있진 않겠지만 끼니 거르지 마시고 꼭 챙겨 드세요. 잘 지내시란 말을 하기엔 계신 곳을 알아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래두 잘 지내세요. 조만간 면회 갈게요.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