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했다. 피곤과 취기에 절어 잠들 때와는 다른 숙면이었다. 두통도 고통도 없었다. 악몽도 사라졌다. 머리는 더없이 맑았고 마음도 편했다. 자신이 살인자란 걸 알게 된 남자건만 양심이 없나 싶을 정도로 수일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 빼면 말이다.
두산은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눈에는 붕대 대신 검은 안대를 씌워 놓았다.
“죽부터 묵고 약 묵고 병원 가서 이마 치료하고 바로 인천으로 갈 끼다.”
“인천?”
“어.”
“거긴 왜?”
“만날 사람이 있다.”
“경찰서는?”
두산은 수일의 질문에 아무 대꾸 없이 냉장고 문을 열어 반찬을 꺼내 담았다. 조심성 없는 행동은 여전했고 수일은 저러다가 혼수 접시에 흠집이라도 날까 조마조마했다.
“좀 살살 해. 왜 그렇게 막 담니? 그러지 말구 너 방에 잠깐 들어가 있을래? 내가 담을 테니까.”
“다 했다.”
반찬 통을 도로 냉장고에 넣는 것 같은데, 이번엔 냉장고를 부술 기세였다. 수일은 인상을 썼다. 눈을 가리면 청각이 예민해져서 영 별로였다. 물론 후각도 예민해졌다. 킁킁, 냄새를 맡자 고소한 참기름 향기가 났다. 군침이 돌았다.
“그럼 경찰서는 언제 가?”
“김경식, 안 봐도 되겠나?”
두산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수일은 귀를 쫑긋 세웠다.
“경식이? 나랑 같이 일했던 애? 김경식?”
“어. 찾았다.”
반가운 이름이었다. 사고를 기억해 낸 이후에도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추억되는 유일한 남자였다. 이름을 부르자 갑자기 그리웠다.
“경식이 보고 싶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씨발, 가지 마까?”
귀도 밝았다. 두산이 버럭 소리쳤다.
“니는 내 앞에 두고 딴 새끼가 보고 싶단 소리가 나오나? 어?”
“아니, 그게…. 니가 먼저 말 꺼냈으면서….”
흥분한 두산이 씩씩대는 소리가 들렸다. 수일은 괜히 서운해서 입을 실룩댔다.
“여태 니를 찾지도 않은 새끼가 그래 보고 싶나?”
“사는 게 바빠서 그랬겠지.”
두산의 말을 듣고 보니 서운하긴 했다. 수일이야 기억을 잃어서 그렇다 쳐도 경식인 의지만 있었으면 수일을 찾고도 남았다. 분명 사는 게 바빴을 테고, 수일을 떠올릴 만큼 형편이 좋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형편이 너무 좋아져서 저 같은 건 잊고 지냈을 수도 있었고.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수일은 생각했다.
“근데 걔를 니가 왜 찾은 거니?”
“니 사고 난 뒤에 병문안도 갔었고 여사장 자살할 때까지 일했던 사람 아이가. 뭐, 니가 들어야 할 말도 있고.”
두산은 덤덤하게 말했다. 후후 소리가 났다.
“아.”
“아.”
입 안으로 숟가락이 들어왔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나는 부드러운 죽이었다. 어찌나 많이 퍼 주는지 한 번에 삼키지 못한 죽이 흘렀다. 두산이 엄지로 턱을 닦아 주고 쪽쪽 빨아 먹었다.
“아.”
“조금만 줘. 아.”
이번에도 역시나 많았다. 아직도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전복죽이다.”
수일은 세 번째 숟가락을 받아먹다가 전복죽이란 말에 조모와 함께 샀던 전복이 떠올랐다.
그제 조모와 함께 시장을 다니며 아들 노릇을 했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뻘 되는 여자와 모자지간으로 다닌 적은 처음이라 수일은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정신만 멀쩡했었더라면 응급실에서 사지가 묶이는 대신 조모와 마주 앉아 회에 소주를 마시고 즐겁게 지냈을 터였다. 앞으로 오지 않을 날을 그렇게 날려 버려서 안타까웠다.
“어떡하지, 숙모님? 별말 안 하셨어?”
현수조차 수일을 감당하지 못해 당황했으니 그날 조모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말 안 해도 뻔했다.
“고마 쫌 놀랬지.”
걱정하는 수일과 달리 두산은 불퉁했다. 조모한테 안 좋은 말이라도 들었나 싶어 괜히 미안했다.
각자 죽 한 그릇씩을 해치우고 두산은 수일을 욕실에 넣어 주었다.
수일은 안대를 풀고 거울을 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초라하고 창백한 건 여전했지만 하나 달라진 점이 있었다. 늘 흐리멍덩하던 남자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정신이 나가 있던 남자도 이제 사람다웠다.
수일은 이를 닦고 이마의 상처를 피해 세수를 했다. 두산이 바르는 로션도 촵촵 바르고 문 앞에 서서 다시 안대를 했다. 문을 더듬어 문고리를 찾아 돌리자 두산이 수일의 손을 잡아 거실에 앉혀 주었다. 이번엔 두산이 씻으러 들어갔다.
라디오에선 추석 물가에 대해 떠들어 댔다. 이른 추석이라 과일값이 금값이라며 걱정하는 주부의 인터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5일 뒤면 추석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론 명절을 제대로 챙긴 적이 없어서 수일에겐 아무 의미 없는 날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명절 음식을 아예 못 먹었던 건 아니었다. 인심 좋은 몇몇 나이트 사장은 꼭 떡이나 전을 싸 와서 직원들에게 돌렸고, 행사가 있어 시골에 내려가면 동네 경로당이나 면사무소에서 잔치를 했기 때문에 거기 꼽사리 껴서 얻어먹었다. 남의 음식이긴 해도 나름 먹을 복은 있었다.
“두산아.”
“어?”
“나 추석 쇠고 경찰서 갈까 봐.”
당장 가도 시원찮을 판에 수일은 며칠 미룰 생각을 했다. 추석 얘길 들으니 이번 추석만큼은 두산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두산이 집에서 가져온 전하고 떡을 나눠 먹고 마주 앉아 두런두런 덕담을 나누고 싶었다. 두산의 조카가 몇 명이나 될까? 용돈이라도 쥐여 보내 줘야지. 수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라믄 내 혼자 명절 쇠게 할라꼬 그랬나?”
두산이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수일의 손을 잡았다.
“늦었다. 퍼뜩 움직이자.”
차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인천 가는 길에 먹으려고 싼 도시락 냄새인가 보았다. 언제 준비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애가 참 부지런도 했다.
먼저 병원에 들렀다. 안대를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누가 ‘안대는 와 했는교?’ 하고 묻기까지 했다.
“쌍까풀 수술한 지 을마 안 돼가지고예 눈티 밤티2) 아입니까. 영 보도 몬 한다.”
수일은 두산의 방향으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허공만 갈랐다. 두산이 키득키득 웃었다.
“넌 이게 재밌니?”
“어. 재밌다.”
“하여간 애가 못됐어.”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도 모를 병원에서 수일은 두산의 손을 꼭 잡고 대기했다. 수일의 이름이 호명되자 두산은 수일을 안으로 넣어 주었다.
“안대 빼고 치료 받은 다음에 안대 하고 나온나.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께.”
“응.”
저벅저벅 발소리가 멀어지자 수일은 안대를 풀었다. 얼마간 눈이 침침해서 불편했지만, 곧 빛에 적응했다. 의사가 수일의 상처를 대충 보고 간호사에게 소독을 해 주라고 일렀다.
“엄마야, 억수로 예쁘게 됐네예. 어데서 했습니까?”
간호사 하나가 수일에게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물었다. 워낙 두산의 목소리가 컸으니 못 들은 사람이 없겠지 싶었다.
“저 안 했는데요.”
수일의 당당한 대답에 간호사가 영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뭐 다들 그래 말 하더라꼬예.”
“아닌데, 진짠데.”
뭐라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수일은 속으로 두산에게 욕을 했다.
소독은 금방 끝났다. 두 손목과 발목은 진득한 연고 탓에 번들거려 최대한 조심히 양말을 신었다. 수일은 다시 안대를 하고 두산의 이름을 불렀다. 두산이 다가와 수일의 손을 잡아 주었다. 간호사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해도 괜찮았다. 두산의 욕만 하지 않으면 저를 이상한 남자라고 맘껏 떠들어도 수일은 상관없었다.
인천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눈을 가려 앞을 볼 수도 없어서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안대를 벗을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금세 포기했다. 이 상황에서 발작을 하면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두산에게 굳이 수일을 인천까지 데려가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을 테니 얌전히 따라가 주는 게 좋았다.
교통사고든 사고 이후 여사장의 일이든 이젠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경식을 만나면 좋을 것 같았다. 아름다운 마무리랄까.
간 김에 상엽도 보러 가자고 할 참이었다. 아무리 미운 놈이지만 그래도 16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렇게 끝내기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두산이 싫어해도 마지막이라고 우기면 한 번은 데려가 주겠지 싶었다.
휴게소에는 두 번을 들렀다. 두산이 서두른 이유가 있었다. 안 그래도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 텐데 성묘객들까지 겹쳐 도로도 막히고 휴게소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두산은 그들을 헤쳐 수일을 화장실에 넣어 주고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도시락을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등을 돌린 채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었다.
“천천히 무라. 물 마시고.”
두산은 뒤에서 끊임없이 잔소리했다.
“너나 천천히 먹어. 물 마시구.”
마주 보고 앉지 못하는 게 뭐라고, 수일은 서러워서 눈물을 훔쳤다. 맛있는 김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울었다. 손등으로 눈물과 콧물을 훔치고 있자 한 할머니가 수일에게 화장지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소리가 되지 못한 인사를 전하고 수일은 화장지를 받아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안 먹으면 두산이 서운해할까 봐 수일은 꾸역꾸역 마지막 남은 김밥까지 모두 먹었다. 콜라도 다 마시고 도시락통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안대를 눈에 썼다.
“두산아. 가자.”
수일은 뒤를 돌아 애써 밝은 목소리로 두산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두산의 커다란 손이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이 뭇나?”
“응. 맛있었어. 너는?”
“내도.”
“가자.”
그 소란한 틈 속에서도 두산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목소리가 커서가 아니라 수일의 귀가 두산에게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다시 손을 잡고 걸었다.
두산은 호들갑을 떨며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에게 비키라고 소리쳤다. 병원에 입원했던 당시에 하듯 아지매, 할매, 아저씨를 찾았다. 수일은 웃었다.
수일이 잠을 잘 동안에도 두산은 혼자 운전했다. 얼핏 두산이 수일의 안대를 벗기는 느낌이 났지만, 수일은 눈을 뜨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인천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눈엔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유흥업소 밀집 지역인지 최신 가요가 뒤섞여 흘러나왔고 삐끼들의 호객 행위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차 문이 열리고 두산이 나갔다. 잠깐 사이 더운 기운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두산은 누군가와 얘기 중이었다. 가만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목소리, 어디서 들었더라? 이번엔 수일 쪽 차 문이 열렸다. 툭툭, 두산이 수일의 어깨를 쳤다.
“수일아, 김경식이 있는데 델따 줄 테니까 니는 이제부터 종국이 행님 따라가라. 알았제?”
“너는 어디 있을 거야?”
“근처에 있으께.”
“멀리 가지 말구.”
“안 간다. 바로 옆에 있으께.”
수일은 허공으로 두 손을 뻗었다.
“내 간다. 1분만 있다가 안대 벗어라.”
“멀리 가면 안 돼.”
“어.”
두산이 알아서 제 얼굴을 수일의 손에 들이밀었다. 수일은 두산의 볼을 만지고 잘생긴 콧대를 쓰다듬었다. 제일 좋아하는 입술을 매만졌다. 두산이 수일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두산의 손을 잡고 수일은 차에서 내렸다. 곧 두 손이 텅 비었다. 두산이 1분만 기다리라고 했지만, 수일은 당장 안대를 벗었다. 두산은 수일에게 등을 보이고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다. 뒷모습이라도 봐서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수일은 또 눈물을 훔쳤다.
“행님, 가입시다.”
종국은 수일을 기다리지 않고 앞서 걸었다. 오랜만이라든가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도 없었다. 그때 경찰서에서 보고 처음인데 참 무뚝뚝했다. 현수처럼 사교성이 있는 남자는 아닌 듯했다. 종국 말고 자신을 재민이라고 소개한 남자도 하나 붙어 있었다.
수일이 발을 움직이자 두 사람은 자연스레 수일의 앞뒤에 자리를 잡았다.
주말이라고 커피숍도 사람으로 북적댔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 경식이 혼자 앉아 있었다. 세월이 그리 야속하지만은 않았다. 얼굴이 조금 달라지긴 했어도 바로 알아보았다.
“경식아!”
경식도 수일을 한 번에 알아보았다. 얼굴엔 놀라움과 반가움이 서려 있었다. 다행이었다. 저를 보고 전혀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경식인 수일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둘은 악수를 하고 어색하게 포옹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냐? 세상에.”
“그르게. 진짜 이렇게 다시 볼 줄은 정말 몰랐어. 이상하다, 그지?”
“그래. 참 이상한데 반갑구 좋다.”
“나두.”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의자에 앉았다.
“수일이 넌 어째 그대로냐?”
“거짓말. 늙었지, 뭐.”
“살만 좀 빠졌지 정말 그대루야. 세월이 나한테만 왔나부다.”
“어휴, 뭔 소리야. 너 아직도 창창하거든?”
마주 보고 앉아 손을 꼭 붙잡았다. 경식의 시선이 수일의 손목으로 향했다.
“이건 왜 이래?”
“별거 아냐. 내가 좀 아팠어.”
수일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표정이 평화로워서 그랬을까, 경식은 더는 상처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똑같지 뭐.”
경식은 동인천역 근처 유흥가 룸살롱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10년간 호스트바와 룸살롱을 전전했다. 호스트바가 한창 인기를 끌어 작년까지 호스트로 일을 했고, 이젠 더는 못 해 먹겠다 싶어 룸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황을 전하는 경식의 표정에서 고단함이 묻어났다. 그도 수일처럼 삶에 찌들어 있었다. 전보다 살이 좀 붙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생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0년은 경식에게도 녹록지 않았다.
“결혼은?”
“야, 나 에덴동산에서 일하고 있을 때부터 애 아버지였어. 애가 둘이나 있었다구.”
“정말?”
“어. 창피해서 말은 못 했지만, 열여덟에 사고 쳐서 애부터 낳고 살았지. 지금 첫애가 고등학생이다.”
경식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벌써?”
“어.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 해서 나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해. 아주 대들어.”
투덜대면서도 경식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래두 든든하겠다.”
“건 그래. 저거 언제 크나 그랬는데, 지금은 공장에 실습도 나가고 나하고 달리 사람 노릇 하고 살아. 지 엄마 닮아서 어찌나 성실한지.”
여기까지 말하던 경식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같이 사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수일은 더 묻지 않았고, 경식도 자식 얘길 이어 가지 않았다.
경식은 민망한지 얼음물을 들이켜고 말을 돌렸다.
“참, 니 얘긴 대충 들었어.”
이렇게 말하며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종국과 재민이를 흘끔거렸다.
“그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내가 병원에 너 찾아갔을 때 나 알아보는 것 같았거든. 그것도 모르고, 참. 미안하다.”
누구에게 무슨 얘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경식이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그게 어디 니 잘못이니?”
“하, 그 씨발 새끼, 임상엽. 걔가 한마디도 안 했었다며?”
“응.”
“내가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어. 여사장한테도 좆나게 치근덕대더니만. 개새끼.”
경식인 자기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연락처라도 남겼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며 계속 미안해했다.
“처음에 저 사람들이 나 찾아왔을 때 많이 놀랬어. 10년 전 얘기 꺼내는데 소름 끼치더라. 부산에 있는 깡패 새끼들이 왜 한 마담 얘길 그렇게 궁금해하나 했는데 그게 너하구 연관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수긍이 가데.”
여기까지 말하고 경식인 수일을 가만 쳐다보았다.
“수일아, 그 사고, 니가 기억하던 거하구 많이 달라. 너두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깐 말 꺼내기가 왜 이렇게 어렵냐.”
“나 다 기억해. 내 기억이 더 정확하지.”
“아냐.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야 니가 더 잘 알겠지만,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하나도 모르잖아. 그지?”
경식인 어린아이 달래듯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수일을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았다. 뭐가 더 있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나 몰랐다.
수일은 제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시선을 돌리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종국과 눈이 마주쳤다. 단정한 인상의 남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수일과 경식을 살펴보고 있었다. 감시였다.
두산은 어디 있는 걸까?
근처에 있겠다고 한 두산이 보이질 않았다. 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휘 둘러보았다. 수일을 등지고 앉은 커다란 남자가 저 멀리 보였다. 든든하면서도 슬퍼서 수일은 억지로 웃었다. 보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미친놈처럼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경식을 바라보았다. 저만큼 고달픈 삶을 산 경식은 누구보다 정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식아, 니가 하고 싶은 얘기 그거, 나한테 도움이 되는 얘기니? 나 지금 정말 괜찮거든.”
진심이었다. 어느 때보다 정신도 맑고 마음도 차분했다. 두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만 빼면 최근 10년간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은 없었다. 추석만 쇠면 죗값을 받을 예정이었다. 천벌은 충분히 받았으니, 이젠 사람이 주는 벌을 받을 차례였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니가 결정해야지. 그래두 나는 니가 꼭 알았으면 좋겠어. 기둥서방 그 새끼하고 백태섭 그리고 한 마담까지, 얼마나 악마 같았는지 니가 알았으면 좋겠어. 넌 착하니까 늘 니 잘못이라고 생각하잖아. 근데 절대 그러지 마. 그러지 말라구 내가 이 얘길 하는 거야. 솔직히 수일이 니가 더 힘들어질 수도 있는데, 적어도 니가 그 인간들보다 나쁜 사람이란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경식이 답답한지 물을 또 들이켰다. 그리고 셔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수일에게 내밀었다. 수일은 담배 하나를 빼서 입에 물었고, 경식도 하나를 입에 물었다. 룸살롱 이름이 적힌 싸구려 1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수일은 경식의 말은 새겨들을 마음이 없었다. 사고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든 간에 차 안에서 일어난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금 경식이 하려는 말은 그저 수일의 마음이 편해지길 바라는 일종의 위로였다.
아니면, 두산의 배려일 수도 있었다. 제게 등밖에 보이지 못하는 남자의 마지막 배려. 자신의 아버지는 그만 잊고 편해지라는 두산의 용서일지도 몰랐다. 수일은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후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하얀 연기가 공중에 흩어지며 눈앞이 자욱해졌다.
“그날, 사고가 있었던 날, 두 사람 다 돌아왔었어. 투자자 만나서 밥 잘 얻어먹고, 에덴동산에서 새벽까지 술 마시다가 헤어졌다구.”
경식이 담담하게 말을 전했다.
수일은 경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사고는 수일을 한 달 가까이 중환자실에 머물게 할 정도로 컸다. 그런데 어떻게 둘만 멀쩡히 걸어 나가 평소처럼 사람을 만나고 새벽까지 술을 마셨단 말인가. 경식이 날짜를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사고로 너만 심하게 다치고 둘 다 문제없었다고. 뭐,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수일이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하게 다쳤을 때 정작 그 사고를 유발한 새끼들 모두 멀쩡했다. 백태섭은 이마가 살짝 찢어졌고 기둥서방은 충격으로 다리를 약간 절었지만, 둘 다 사고 난 차 안에서 무사히 걸어 나왔다.
평온하기만 하던 감정에 파도가 일었다. 분명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건만, 수일은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개새끼들.
“나도 전혀 몰랐어, 사고가 난 줄은. 그 새끼들이 눈먼 투자자 하나 잡아서 아주 신이 났다는 것만 알았지. 한 놈은 이마에 반창고 붙이고 다른 놈은 다리를 절면서 가게로 들어왔는데, 표정이 아주 좋아 죽었거든. 그래서 나는 지들끼리 쌈질하다 다쳤나부다 했지 설마 니가 그렇게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경식은 자정이 다 되도록 수일이 돌아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겼다. 불안해진 경식이 한 마담에게 수일의 행방에 관해 물었지만, 멀리 심부름 보냈다는 말만 돌아왔다. 당시 경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그래도 하늘이 무심한 건 아니드라. 백태섭 말이지, 멀쩡하게 택시 타고 호텔로 돌아갔는데 다음 날 뇌출혈인지 뇌진탕으로 쓰러져 있는 걸 호텔 청소부가 발견했어. 너두 알지? 나 여사장이 시켜서 그 새끼 호텔 감시했던 거. 구급차 오고 난리가 났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교통사고 때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는데 본인만 이상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 상태에서 양주까지 처마셨으니 쌤통이지 뭐. 근데 죽지는 않았고 혼수상탠가 그랬어. 지금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인과응보. 수일의 세계에선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백태섭은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혼수상태로 실려 갔다가 살아났고, 얼마 전 가족들과 생일잔치까지 벌였다.
수일은 담배를 비벼 껐다.
“나 사고 난 건 어떻게 알았어? 지금 보니까 아예 몰랐던 것 같은데.”
그새 목이 잠겼다. 수일은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흐려져 눈을 비비고 물을 마셨다.
“그게 9일이었나…. 임상엽이 그 새끼는 뭘 알고 있는 눈친데 입도 뻥긋 안 하지, 너는 안 돌아오지. 걱정이 돼서 미치겠는 거야. 그래서 한 마담한테 따졌었어. 너 진짜로 어디 갔냐구. 그랬더니 글쎄 니가 그라나다 타고 가출했대드라.”
경식이 웃었다. 수일도 따라 웃었다. 그만 듣고 싶었다. 그들이 자기를 얼마나 하찮게 취급했는지 그만 알고 싶었다.
“그게 말이 되냐? 씨팔. 속에서 천불이 나더라. 혹시 너도 최 군처럼 실종된 건 아닌지 불안해 죽겠더라구. 그때 마침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었어. 기둥서방 그 새끼가 전화에다 대고 사고 얘길 하면서 목격자가 허위 신고 했다고 아주 길길이 날뛰었었어. 순간 너한테 뭔 일이 났구나 직감했지. 니 이름 자꾸 들먹이는 것도 그렇구. 기둥서방이 전화 끊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처음 전화 받은 새끼한테 어느 경찰선지 물어보고 내가 직접 찾아갔었어.”
여기까지 말한 경식은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차분하기만 하던 경식의 말투가 점점 격앙되었다.
경식은 수일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경찰서로 향하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고 했다. 다른 것보다 저를 무시해서 아무 얘기도 안 해 주면 어쩌나 그게 걱정이었다고 했다. 기둥서방이 워낙 돈 많은 새끼라 그새 뇌물을 먹였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경찰은 경식에게 우호적이었고, 여전히 목격자 편이었다. 목격자 부부가 공무원인 데다 경찰뿐 아니라 119에도 같은 내용으로 신고했으므로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사고 당시, 그라나다를 뒤따르던 차량에 타고 있던 공무원 부부의 말에 따르면 차는 갑자기 미끄러진 것처럼 보였다. 전날 내린 눈과 한파로 도로는 얼어붙어 있었다. 운전하던 남편은 안 그래도 서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라나다가 미끄러졌다고 확신했다. 차는 균형을 잃고 빙글빙글 돌다가 가로수에 충돌했다. 재수 없게도 운전석만 박살이 났다. 소리도 요란했다.
남편은 차를 길가에 세우고 구조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신고부터 해야 하는 건지 아내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라나다 차량 뒷문이 열리고 남자 둘이 내렸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는 컸고 다른 하나는 작았다. 둘 중 작은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렸다. 남편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차 문을 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행동이 기이했다. 큰 남자가 운전석으로 다가가 안을 내려다보더니 찌그러진 운전석을 발로 차고 욕을 퍼부었다. 작은 남자도 절뚝거리며 다가가 운전석에 침을 뱉었다. 뒤에 차가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둘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큰 남자는 돌아서기 직전에 침을 한 번 더 뱉었다.
그다음은 더 이상했다. 실컷 분풀이를 한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아타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범죈가 싶었다고 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아내는 너무 놀라 눈물까지 흘렸다. 그만큼 그들의 반응이 기괴하고 무서웠다고 했다.
남편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근처 공중전화로 뛰어가 119에 구조 신고를 하고 경찰에도 사고 신고를 했다. 당시 그라나다가 워낙 비싼 차였는지라 남편은 필시 저 두 사람이 운전자를 납치, 살해한 줄 알았다.
부상당한 남자는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피범벅이라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옆에 서서 ‘힘내세요, 구급차가 오고 있어요’ 하고 외쳤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수일은 마음씨 좋은 부부에게 구조되었다.
숨이 턱 막혔다. 수일은 주먹으로 명치를 때리며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백태섭과 기둥서방은 마지막까지 수일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했다. 더는 상처받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 두지. 저를 살린 마음씨 좋은 부부조차 원망스러웠다.
“수일아. 너 괜찮니?”
경식이 수일의 손을 잡았다. 한 번도 험한 일을 해 본 적 없는 부드러운 손이 수일의 손을 잡고 멍든 팔목을 감쌌다. 손을 타고 전해 오는 온기에 수일은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다정한 눈이 수일을 바라보았다. 스물다섯의 경식이 눈앞에 있었다.
병실에 누운 수일의 옆에 앉아 다정하게 말을 하는 경식이 있었다.
‘너 사고 났어, 수일아. 교통사고가 났는데 어째 너만 이렇게 심하게 다쳤냐? 눈길에 차가 미끄러졌대. 빙글빙글 돌다가 하필 운전석만 박았지 뭐야. 재수도 없어, 그지? 니가 잘못한 거 아니구 도로가 미끄러웠대. 우리가 타이어 갈아 달라고 몇 번을 얘기했냐? 하여간 그걸 안 갈아 줘서 이 사달이 났어요. 씨팔, 차가 비싸면 뭐 하니? 사람이 이렇게 다쳤는데. 그날, 내가 운전했었어야 하는 건데 왜 그때 고집을 피우지 않았을까? 나 계속 후회해. 너 대신 간다고 우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너 연기 그렇게 들이마시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내 몸 피곤하다고 너를 그냥 보냈어. 정말 미안하다, 수일아. 그러니까 꼭 살아. 살아서 나한테 직접 사과받아. 알았지? 꼭 살아.’
경식에겐 미안하지만, 그때 수일은 죽여 달라고 기도했었다. 살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하느님 제발 죽여 주세요, 하고 빌고 또 빌었다. 너무 아프고 무서웠다. 너무 외롭고 힘들었다. 그래서 수일은 그때 죽여 달라고 간절히 빌고 있었다.
수일도 경식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젠 나이가 들어 스물다섯의 싱그러움이 사라진 얼굴이 저를 보고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너 병문안 세 번 갔었어. 한 번은 중환자실에 있을 때라 넌 기억 못 할 거구, 한 마담 죽고 나서 한 번, 가게 문 닫고 나서 한 번. 너 그렇게 누워 있는데 차마 이 얘긴 못 전해 주겠더라. 그냥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두 그 사고 니 잘못 아니라고, 차가 눈길에 미끄러진 것뿐이라고 갈 때마다 말해 줬어. 나도 한 번인가 두 번 미끄러졌었잖아, 왜. 우리끼리 비싼 차 치고 제값 못 한다고 욕하고, 타이어 갈 때 됐다고 한 마담한테 투정도 부리고 그랬었잖아. 기억나지? 병문안이라고 가서 너한테 해 줄 말이 그것밖에 없더라. 그래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그랬는데, 니가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줄은 몰랐다. 바보같이.”
수일은 교통사고 참고인 조사를 받을 때 자기가 왜 경찰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무의식이 경식의 얘길 기억하고 있었던 거였다.
부드러운 손이 수일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경식이 미소 지었다.
“넌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야. 니가 착한 놈이라 자꾸 이상한 죄책감 같은 거 가지는 거라구.”
수일은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경식은 아무것도 몰랐다. 자기는 전혀 착하지 않았다. 인천에 오기 전까진 분명 죄책감이 들었는데, 지금은 사고에 대한 일말의 책임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두산에게 미안할 정도로 수일은 백태섭을 증오했다. 기둥서방을 미워했다. 죽어 가는 제게 욕을 하고 침을 뱉은 두 남자에게 분노했다.
수일은 경식의 손을 놓았다. 고개를 들었다.
“기둥서방은?”
상엽에게 기둥서방이 죽었다고 듣긴 했지만, 수일은 그의 말은 하나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날 상엽이 제게 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심지어 기둥서방의 이름마저 거짓이었다. 수일은 진실을 알고 싶었다.
“죽었어. 백태섭 그렇게 되고 3일인가 4일 뒨가, 고가 도로에서 떨어져서. 경찰 말론 실족사라 그러던데. 뭐, 그 새끼 술 처먹고 다니는 거 보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지.”
상엽이가 웬일로 맞는 말도 했네. 수일은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이 났다. 도대체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여사장도 그러더니 기둥서방도 진짜로 죽었다. 죽은 지 10년이나 됐는데, 수일은 살아 있지도 않은 두 사람의 환영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보 천치로 만든 장본인들은 10년 전에 벌써 이 세상을 떠나 편히 쉬고 있었다.
수일은 천벌을 받았으니 하늘이 공평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수일이 사는 현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겐 더 가혹하고 많이 가진 사람에겐 더 너그러웠다. 죽음조차 그랬다. 그토록 자신을 살려 둔 이유가 뭘까? 하늘이 자신에게 질긴 생명력만 안겨 준 까닭이 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더는 듣고 싶은 얘기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수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일이 일어나자 옆 테이블에 있던 종국과 재민이도 함께 일어났다.
“경식아, 정말 고마워. 나 만나 준 거 진짜루 고맙다.”
경식이 수일을 올려다보았다.
“고맙기는. 내가 너무 늦었지?”
“응. 조금.”
수일은 힘없이 웃었다. 경식이 조금만 더 일찍 저를 찾아 주었더라면, 이 얘기를 조금만 더 일찍 전해 주었더라면 수일의 인생도 이렇게까지 나빠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못내 서운했다. 최악의 상황에 다다라서야 들을 수 있었던 얘기라 아쉬웠다. 그것도 두산이 찾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얘기.
“미안하다.”
경식인 정말 미안해했다. 제 잘못도 아닌데, 제 책임도 아닌 일인데 진심으로 사과했다.
“아냐, 지금이라도 얘기해 줘서 고마워.”
두 사람은 악수했다.
“잘 살아. 아이들한테도 잘하구.”
“너두. 이번엔 진짜로 잘 살아.”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 잘 살라고 말해 주었다.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까 봐 차마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수일이 먼저 돌아섰다.
종국을 따라 왔던 길로 되돌아가다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두산이 따라오고 있었다. 수일과 멀찍이 떨어져 걸어왔다. 두산도 멈췄다. 가만 서서 수일을 바라보았다.
수일은 굳이 인천까지 데려와서 경식을 만나게 해 준 두산이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수일이 이 얘기를 들어 봐야 백태섭을 더 미워할 뿐이고 그 감정이 두산에게는 전혀 이롭지 않은 줄 알면서도 직접 데리고 와 주었다.
두산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다. 그는 자수하지 말라고 수일을 설득 중이었다. 수일을 붙잡고 윽박지르는 대신 결정권을 넘겨주었다.
늘 강요만 당하고 무시당했던 수일이 받아 본 적 없는 배려였다.
수일은 두산을 향해 달려갔다. 백태섭의 아들 백두산. 제가 증오하는 남자의 아들에게로 뛰었다. 적어도 지금은 두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두산이 수일을 향해 웃고 있었다. 수일이 제일 좋아하는 예쁜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었다.
“두산아.”
“와?”
“나, 백태섭, 니 아버지 만나고 싶어.”
두산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한참을 침묵하던 두산이 씨익 웃었다.
“그래.”
하고, 대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