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81)

수일은 미쳐 있었다. 자기를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뒹굴었다. 누가 손만 대면 비명을 질렀다.

“행님! 수일이 행님! 내 핸숩니다, 핸수! 도대체 와 이랍니까? 정신 좀 차리이소! 하, 씨팔, 미치겠네.”

귀에 익은 목소리에도 수일은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

“으아아아, 안 돼… 안, 돼.”

10년간 묻혔던 기억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조모의 집을 뛰쳐나오던 순간엔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사진 속 백태섭은 연화를 죽인 남자로 수일에게 기억되었다.

“안 돼.”

하지만 곧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안심하던 것도 잠시, 그 남자가 수일에게 가했던 무자비한 폭행과 폭언이 생각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 남자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살을 가장한 살인.

“안 돼.”

백태섭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끔찍해졌다. 그가 얼마 전 두산을 포함한 자기 가족들과 생일 파티도 했다는 게 생각나자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버지가 저를 그토록 혐오하고 자살을 감행하게 한 남자란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전신이 갈가리 찢기면 이런 기분일까.

시야가 흐려지고 귀가 먹먹해졌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꼴깍꼴깍 숨이 넘어갔다. 속에 든 걸 모두 게워 내고도 메스꺼워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우엑우엑. 더는 넘어올 것이 없는데도 바닥에 엎드려 헛구역질했다.

이젠 뭐가 안 되는지,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수일이 행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현수였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병원인 듯했다. 수일은 현수에게 등을 돌려 누우려다 자신이 꼼짝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목과 발목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양손이 묶여 있었다. 두 발도 묶여 있었다.

“행님, 그거는 행님이 경기를 일으키가 어쩔 수 없이 해 논 깁니다.”

그러고 보니 입에도 수건이 물려 있었다.

누굴 미친놈으로 아나. 수일은 화가 나서 손목을 마구 비틀고 입에 물린 손수건을 뱉어 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침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현수가 당황해 수일의 몸을 잡아 눌렀다.

“행님, 행님! 그라지 마이소. 이기 다 행님이 흥분해서 일시적으로 해 논 깁니다. 안정되면 풀어줄 끼라예.”

수일은 막힌 입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으으, 소리밖에 나지 않았지만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수일을 붙잡고 달래던 현수는 도저히 안 되겠던지 빠르게 간호사를 외쳤다. 바쁜 발소리에 이어 간호사가 등장했다. 간호사는 수일의 팔에 연결된 링거 줄에 주사를 놓았다. 곧 수일은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아무도 없었다. 침대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여전히 손목은 묶여 있었고, 입엔 손수건인지 거즈인지 모를 것이 들어찼다. 침이 질질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커튼 사이로 커다란 남자가 보였다. 수일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두산이란 걸 알았다.

단편적으로 끊겼던 기억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현수가 저를 붙들었고, 억지로 차에 태워 병원으로 왔다. 그러는 동안 수일은 미친놈처럼 발길질을 하고 고함을 질렀다. 있는 힘을 다해 울부짖었다.

정신이 들었다가 말았다가 했다. 그사이 두산이 도착했고, 수일은 두산만 보면 경기를 하고 발작을 했다. 간호사가 진정제를 놓아 주면 잠이 들었다가 또 두산을 보면 같은 짓을 반복했다. 한번은 혀를 깨물어 피가 났다. 그래서 간호사는 수일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자해할까 봐 손목도 묶었고, 밖으로 뛰쳐나갈까 봐 두 다리도 묶어 두었다.

수일은 하염없이 울었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한낱 악몽에 지나지 않았으면 했다.

차라리 처음 그 엉킨 기억대로 두산의 아버지가 연화를 죽인 나쁜 놈이었으면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두산에게 변명거리라도 있었겠지. 당당히 니 아버지가 내 애인을 죽여서 복수한 거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빌어라도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백태섭은 연화에게 손끝 하나 댄 적 없었고, 수일을 때리고 폭언을 서슴지 않았지만 죽여야 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었다. 수일에게 험하게 굴었던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나. 그저 시기가 나빴다.

하필 그날 숙소에 불이 나지만 않았어도 수일은 그깟 모욕 정돈 속으로 삼켰을 터였다. 혹은 옷만 제대로 갈아입고 운전을 했더라면 쓸데없이 욕을 들어먹지도 않았을 테고, 기둥서방도 백태섭도 기분 좋게 목적지로 갔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여사장이 경식에게 운전을 시켰더라면 셋 다 아무 일 없이 나이를 먹고 서로에 대해 잊고 살았겠지 싶었다.

수일은 후회했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살의를 행동으로 옮긴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그러다가도 그럴 만했다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했을 거라고 과거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백태섭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거였다. 그 사고로 자기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어쩌면 기둥서방도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상엽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사기꾼 때문이 아니라 기둥서방 때문에. 그 생각을 하자 안도가 들면서도 불안했다.

두 남자가 자기를 여태 찾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저처럼 머리를 다쳐 사고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렸나 아니면 심한 장애를 얻어 복수할 겨를이 없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날 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수일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얼어붙은 길에 차가 미끄러져 사고가 났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10년 전에도 비슷한 얘길 경찰에게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수일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을 했을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상엽이 알려 줬을까? 아니면 경식이었나? 도무지 거기까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제가 왜 길이 미끄러웠다고, 차에 결함이 있었다고 자세한 거짓말을 지어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산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수일은 백태섭을 보았다. 머리를 쥐어박고 악담을 퍼부었던 그 남자가 성난 눈으로 수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일은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살려 달라고, 저 남자가 제게 손대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짐승 같은 비명을 토해 냈다. 물린 재갈 탓에 말이 되지 못한 소리는 울음이 되었다.

두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게 안타까워 수일은 울면서 두산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나는 괜찮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수일은 꽁꽁 묶여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수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두산이 다가왔다.

하아. 안도하는 순간 두산은 다시 백태섭으로 바뀌었고, 일그러졌던 얼굴은 표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백태섭이 수일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개새끼, 씨발 새끼, 쓰레기, 인간 말종. 벌건 눈으로 쏘아보며 침을 흘렸다.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수일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회복되기도 전에 기둥서방을 향하던 주먹이 수일에게 날아들었다. 수일의 고개가 뒤로 홱 꺾였다. 남자가 한 대씩 머리를 때릴 때마다 몸이 심하게 요동쳤다. 고압 전류가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상체가 튀어 올랐다. 수일은 기절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귓가에 일정한 박자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냄새와 열기 가득한 몸. 두산의 품 안이었다. 차마 고개를 들어 두산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두산은 알까? 내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는 걸. 그보다도 그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기억이 너무 끔찍해서 죄책감보다 두려움이 앞선다는 걸 두산은 알까. 그래서 감히 두산을 쳐다볼 수도 없다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눈만 감고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다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수일은 이대로 눈이 멀어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이 기억하는 두산의 본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싶었다. 무표정하면 사나워 보이다가도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 소년처럼 변했다. 그 환하고 시원한 미소가 떠오르자 수일은 참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약 그 사고로 백태섭만 살고 기둥서방이 죽었다면 수일은 살인자였다. 백태섭은 수일을 감옥에 처넣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가 크기를 키우면 어느새 저 새끼들이 자초한 일이니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다른 목소리가 아우성쳤다.

수일이 깬 걸 알았는지 두산의 커다란 손이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에 쪽 하고 뽀뽀를 해 주었다. 어느새 발작도 멎었다.

“이제 개안타, 수일아.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자자.”

“두산아.”

목이 쉬어 두산을 부르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

“너는 몰라. 다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모르면 어떻노?”

“모르면 안 되는 거면? 꼭 알아야 하는 거면?”

“세상에 그런 기 어딨노? 몰라도 잘만 살았다 아이가. 앞으로도 그래 살면 되지.”

두산은 수일을 꼭 끌어안았다.

“내는 다 몰라도 된다. 니만 보고 살 끼다.”

목이 메어 수일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너만 보고 살고 싶었는데, 이젠 그러기 힘들 것 같아.

수일은 두산을 밀어낼 의지도, 안아 줄 힘도 없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자꾸 눈이 감겼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두산의 심장 소리에만 집중했다. 그의 심장은 어김없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건강하게 박동했다. 자신의 몫까지 오래오래 뛰어 주길 속으로 빌었다.

***

강재욱은 백영호를 찾아갔다.

임상엽을 족치고 바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어떤 사건인지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임상엽은 무슨 큰 비밀이나 발설하는 것처럼 부풀려 말했지만 알고 보니 그 새끼가 아는 것도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문일준과 한정숙은 백태섭을 치려고 했었다. 이게 백영호가 사주한 것인지 아니면 둘만의 계획이었던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뒤져도 먼지 하나 없었다. 백태섭이 왜 잘 재직하던 중학교 교사를 관두고 서울로 갔는지도 백영호만 알고 있었다. 더럽게도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은 당시 윤수일에게 백태섭을 예전 애인을 때려죽인 남자라고 속였다고 했다. 지렁이도 꿈틀댄다고 윤수일도 꿈틀댔다고 말했다. 그 결과가 교통사고였다. 문일준과 한정숙에게 삼백이나 받은 주제에 다른 건 하나도 모른다고 발뺌했다.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처음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리가 썰리고도 임상엽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새끼가 아는 비밀이라곤 문일준과 한정숙이 거액의 사기를 쳤다는 사실과 사기 공범이 돈을 들고 해외로 튀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문일준, 한정숙 그리고 사기꾼 셋이서 비싼 레스토랑과 고급 바에서 술을 마신 얘기를 전했다.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백태섭에 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사고가 있기 열흘 전 사진으로 처음 봤고, 한정숙과 기둥서방이 무척 싫어했다는 것 정도가 다였다.

다만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교통사고 이후 임상엽은 누군가에게 지속적인 협박을 받았다. 협박한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몰랐다. 고작 전화 한 통화를 받았을 뿐이었다. 매년 한정숙이 목을 매 자살한 1월 25일이 되면 임상엽이 어디에 있든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음성 변조기를 사용한 목소리였고, 녹음기를 튼 듯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있었다고 했다.

- 에덴동산에 대해 발설하지 마라. 82년 1월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하라. 그러지 않으면 넌 죽는다. 니 가족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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