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가 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
전날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점심 겸 저녁은 라면이었다. 동료들은 거실에 커다란 상 하나를 펼쳐 두고 대충 끼어 앉았다.
“아, 지겹다 지겨워. 형, 우리 고기 언제 먹어요? 사장님 너무한다. 12월엔 고기 자주 사 주시더니.”
“주는 대로 처먹어, 새꺄. 이런 것도 안 주는 데 많아.”
점심 담당인 이 군에게 박 군이 투정을 부리다 되레 핀잔만 들었다. 제 형 신분증으로 취직해서 돈을 버는 박 군은 이제 겨우 열여덟이었다. 최 군이 실종된 뒤 그 빈자리를 채운 친구였다.
“수일아, 찬밥 남은 거 없냐?”
“잠깐만요.”
어제 먹고 남은 밥을 양재기에 담아, 비닐에 잘 싸서 베란다 창틀 위에 올려 두었다. 밖이 냉장고보다 더 시원했고 냄새도 배지 않아서 좋았다.
상 한가운데에 밥그릇을 올리자마자 숟가락들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수일은 손이 느린 막내 박 군 몫을 챙겨 건넸다.
“감사합니다. 역시 형밖에 없어요.”
“투정 부리지 말구 일단 많이 먹어 둬.”
최 군 생각이 나서 수일은 박 군이 신경 쓰였다. 경식이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다.
“근데 형들, 나 그 의원이란 남자 너무 싫어요. 변태 같애. 자꾸 더듬고 뽀뽀해서 미치겠어.”
라면을 후루룩 먹던 박 군이 기둥서방 얘길 꺼내며 인상을 썼다. 경식의 표정이 굳었다.
“야, 박 군아. 너 그 새끼가 어디 가자고 하면 따라가지 마. 알겠어?”
“아우 씨, 안 따라가요. 내가 그런 새낄 왜 따라가?”
“돈 준다고 해도 가지 말라구 새꺄.”
“돈? 얼마나 주는데?”
누군들 안 그러겠냐만, 돈이 궁한 박 군은 경식의 돈 얘기에 곧장 호기심을 보였다.
“얼마 주면? 따라가서 좆이라도 빨게? 하, 이 새끼 못쓰겠네!”
경식이 정색하며 소리를 질렀다. 험한 말을 들은 박 군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 갔다.
“묻지도 못해요?”
영 기분이 나빴는지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 넌 애한테 뭔 소릴 그렇게 하냐?”
나름 연장자인 이 군이 경식의 어깨를 밀치며 한 소리 했다. 그러자 경식이 목소리를 더 키웠다.
“형도 알면서 왜 그래? 왜 다들 없었던 일처럼 구냐고! 씨팔.”
최 군이 가출했다는 여사장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불문율처럼 아무도 최 군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타로 들어온 박 군이 앞으로 당할지도 모를 험한 일에 대해 다들 모른 척했고, 경식인 그 태도에 화를 냈다.
“새꺄, 뭐가 잘나서 큰소리야? 너는 뭘 했는데? 최 군이 그 씨발놈한테 당하고 가출할 때까지 뭘 했냐고! 어디서 지랄이야 지랄이. 어차피 다 똑같잖아. 니가 박 군 대신 기둥서방 좆 빨아 줄 거 아니면 가만있어. 나대지 말구.”
이 군의 말에 이번엔 경식이 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분위기가 냉랭해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라면을 먹었다.
“이 밥 내가 먹어도 되지?”
박 군과 경식이 남기고 간 밥까지 탐냈다. 다들 배고프고 돈이 없어서 남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일은 저 먹으려고 사다 둔 크림 빵을 들고 박 군에게 갔다. 한창 먹을 나이라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하는 애가 점심도 먹다 말았으니 오죽할까 싶었다.
“이거. 냉장고에 우유 있으니까 같이 먹어.”
“어? 혀엉. 정말 고마워요.”
울상을 하고 있던 박 군은 빵 하나에 금세 밝게 웃었다.
“그리구 경식이가 한 말 너무 맘에 담아 두지 마. 쟤가 성격이 불같아서 그렇지, 너 싫어서 한 얘기 아냐. 알지?”
“아이, 아는데, 그래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죠.”
“아무튼, 맘 풀어.”
“네. 잘 먹을게요, 형.”
역시나 배가 고팠는지 수일이 방문을 닫기도 전에 빵 봉지를 뜯는 소리가 났다. 수일은 피식 웃었다.
경식인 내복 차림으로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너는 왜 그러냐?”
“내가 뭐?”
“좀 좋게 말할 수도 있었잖아.”
수일도 경식이 옆에 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말이 곱게 나가냐? 최 군 그 새끼도 기둥서방이 돈 준다 그래서 쫓아갔다가 당했단 말야.”
“…그랬어?”
“어. 그랬어요. 넌 그때 연화하고 헤어져서 만날 술 마시고 처우느라 알 턱이 없었겠지만.”
“것두 그렇구, 최 군이 나 별로 안 좋아했잖아.”
“맞다. 그랬었지?”
과거를 회상하며 경식이 씁쓸하게 웃었다.
숙소 전화가 울렸다.
“수일이 형, 상엽이 형 전화.”
수일은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나중에 피울 요량으로 꽁초를 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 형! 왜 나 안 찾아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상엽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니가 왜 날 기다려?”
- 아니, 어제 한 마담이 덜덜 떨면서 전화했더라구. 형한테 그 새끼 사진 보여 줬더니 당장 일 칠 것 같은 얼굴로 나갔다면서, 나 만나러 갔으니까 잘 다독이라구. 근데 어디 갔던 거야? 설마 그 새끼한테 바로 간 건 아니지?
수일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내가 그 새끼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서?”
-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그거 내가 다 알아, 형. 우리 이러지 말구 만나서 얘기하까?
“아냐, 그냥 얘기해. 어떻게 찾은 거니?”
수일이 무심하게 답하자 저쪽에서 안달이 났다.
- 와, 형, 내가 진짜루 그 새끼 찾느라고 무지 고생했다. 찾고 나서 얼마나 손 떨렸는지 알어?
“니가 왜 찾으러 다녔는데?”
- 왜긴 왜야. 형이 너무 슬퍼하니까 내가 다 억울하고 분한 거야. 연화는 고통스럽게 맞아 죽었는데 정작 때린 새끼는 잘만 살고 있을 생각 하니까 도무지 잠도 안 오구. 다행히 내가 흥신소 다니는 아는 형님이 하나 있거든. 사정사정해서 알아봤지. 그랬더니 글쎄 그 씨발놈인 거야. 봤지? 눈매 사납게 생긴 거? 딱 사람 죽이게 생겼드라. 체격도 무지 크구.
여기까지 듣자 수일은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여사장에게서 얼마를 받았길래 상엽은 앞뒤 재지도 않고 허튼소리를 나불거리는 걸까.
짜증이 치밀었다. 왜 이런 쇼까지 해 가면서 자기를 도발하려는 건지, 그 의도가 너무 분명해서 화가 났다. 나름 정을 붙이고 지낸 친한 동생이건만 상엽은 돈이 더 중한가 보았다. 섭섭했다.
수일이 대답이 없자 상엽인 옳다구나 하고 본론을 꺼냈다.
- 형, 우리 오늘 밤에 그 새끼 치러 갈래? 나 다 준비됐어. 복면도 사 뒀으니까 우린 줄 아무도 모를 거야. 새벽에 몰래 가서 그 씨발놈한테 본때를 보여 주자구.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수일은 전화를 끊고, 다시 전화해도 벨이 울리지 않도록 수화기를 삐뚤게 내려놓았다.
여사장이 꼴 보기 싫어서 가게엔 느지막이 나갔다. 여사장은 수일을 보자마자 팔을 잡아당겼다. 꼬집듯 팔을 비틀었다.
“수일이 너 상엽이 안 만났니?”
그새 상엽이 여사장에게 이른 모양이었다.
“네. 그냥 통화만 했어요.”
“어머, 얘. 너 연화 사랑한 거 아니야?”
“네?”
“니가 정말로 연화를 사랑했다면 이러구 있으면 안 되지. 나 같았으면 상엽이 만나서 당장 그 새끼 어딨는지 알아낸 다음 찾아가서 죽자사자 팼어. 내가 너한테 왜 죽이지 말라 그랬는데. 어제 너 사진 보자마자 꼭 그 새끼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단 말야. 근데 만나지도 않았다구? 너 왜 이러니, 증말??”
말을 하는 중에 점점 화가 나는지 여사장은 수일에게 악을 썼다. 잡힌 팔이 아팠다. 여사장은 핏발 선 눈으로 수일을 한껏 노려보며 씩씩댔다. 저더러 어쩌라는 건지 수일은 한숨만 났다.
최 군과 연화의 일로 술이 없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수일은 여사장이 이럴수록 기운이 빠졌다. 기둥서방의 가차 없는 폭력과 폭언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수일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도 죽기보단 살고 싶어 하는 남자였다. 분노를 느끼면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보다 자기 탓을 하는 것이 더 쉬운 사람이었다. 그게 수일이었다. 수일이 느끼는 살의나 분노는 그저 어린아이 투정과도 같았다. 천성이 그랬다.
그런데 여사장이 자꾸 건드렸다. 어떻게든 수일을 도발해서 백태섭에게 무언갈 해 주길 원하고 있었다. 그 폭력적이고 소름 끼치는 남자에게 수일을 먹잇감으로 던져 버리려 하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걸 보니 계획대로 안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쌤통이었다. 수일은 저들을 위해 꼭두각시 노릇을 할 마음이 없었다. 50만 원, 아니 100만 원을 준대도 저 두 연놈을 위해선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고작 3만 원을 주고 저 지랄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오늘은 상엽이 만나러 갈 거지?”
여사장이 화를 꾹꾹 누르며 겨우 말을 뱉었다.
“아뇨. 날도 추운데 어딜 가요.”
“헛. 어이가 없어 가지구. 너 정말 이럴래? 연화 생각 안 해?”
“그만하세요, 사장님. 자꾸 죽은 사람 얘기 꺼내면 저만 가슴 아파요.”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수일은 여사장의 팔을 뿌리치고 손바닥만 한 탈의실로 들어갔다. 뒤통수에 대고 여사장이 쌍욕을 퍼부었다.
“가슴이 아프면 가서 무슨 짓이라도 하라구, 씹새끼야! 어우, 답답해.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려, 증말.”
하아. 한숨을 푹 쉬고 실크 셔츠로 갈아입었다. 박 군이 수일을 따라 들어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다른 거로 갈아입었다. 선물 받은 옷인지 태그가 붙어 있었다. 가격표를 보고 웃던 박 군은 수일과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지 여사장 얘기를 꺼냈다.
“아니 사장님은 왜 형한테만 저래요? 심하다, 진짜.”
과장된 연기였다.
“원래 저러시잖아.”
“뭐, 그건 그런데….”
할 말이 없는지 박 군이 눈치를 살폈다. 어색해하는 박 군을 뒤로하고 수일은 손님을 받기 위해 대기실로 가 앉았다.
박 군은 옷 자랑을 하며 빙빙 돌았다. 패션쇼하듯 좁은 방 안에서 모델처럼 폼을 잡고 걸었다. 경식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내내 썩은 표정을 했다.
수일은 여느 때처럼 손님에게 억지로 웃고 관심 없는 얘기에 귀 기울이는 척을 했다.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인 얘기에 함께 들어온 동료들은 배꼽을 잡고 소리 내 웃었다. 수일은 아직 그렇게까지는 연기하지 못해서 왜 웃지 않냐며 핀잔을 들었다.
취기가 빨리 올라 머리가 핑핑 돌았다. 정부의 통금 해제를 기념하여 새벽 1시까지 손님을 받고 당당히 걸어서 숙소로 향했다.
평소엔 방에 들어가서 자던 수일은 이 날따라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꿈인지 생신지 전화벨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눈을 겨우 떴다. 무슨 일인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몸이 붕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거실에 있는데 왜 이렇게 벨 소리가 작게 들리는지 이상해하며 수일은 기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이 새벽에 상엽이 술에 잔뜩 취해 전화를 걸었다.
- 수일이 형! 윤수일! 개새끼야! 그냥 좀 쉽게 쉽게 가면 안 되냐? 너 연화 좋아했잖아.
“임상엽, 너 취했어. 그만 끊어.”
- 아휴, 끊긴 뭘 끊어. 나 그 새끼가 묵는 호텔 앞이야. 형 당장 와. 당장 와서 같이 쳐들어가자. 응? 형 안 오면 나 혼자라도 갈 거야. 나 혼자 거기 갔으면 좋겠어? 연화 일인데? 아니지?
상엽에게 화를 내려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눈이 매워 눈물이 났다. 수일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콜록콜록, 연신 기침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실이 온통 연기로 가득했다. 불이었다.
“불이야! 불이야!!”
수일은 당장 방으로 돌진했다. 불이 어디서 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방 안은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만큼 연기가 차 있었다. 수일은 기어서 손에 집히는 아무나 흔들어 깨웠다. 경식도 깨우고 이 군도 깨우고 이 방 저 방 미친 듯이 달려가서 무작정 소리를 쳤다. 사람인지 베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발로 찼다.
우왕좌왕하면서 다들 현관으로 빠져나가기 바빴다. 수일도 기어서 겨우 집 밖으로 나갔다. 맑은 공기를 마시자 살 것 같았다. 누군가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는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제 살았다. 연기로 시꺼메진 얼굴로 경식과 함께 웃으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박 군이 없었다.
“박 군은?”
“몰라. 걔 안 들어왔을걸?”
“무슨 소리야. 걔가 갈 데가 어딨다구?”
“됐어. 일단 나가자. 우리부터 살고 봐야지.”
경식이 수일을 잡아끌었다.
창고. 거길 확인해 보지 않았다. 박 군은 가끔 거기서 혼자 잠들었다. 평생 자기 방 생기는 게 소원이라던 박 군은 아무도 안 쓰는 손바닥만 한 창고를 치워 제 방으로 만들었다. 보일러도 돌지 않아 냉골이나 다름없었지만, 거기서 담요를 둘둘 말고 잠자기 일쑤였다. 그러다 입 돌아간다, 자다 얼어 죽는다고 겁을 줘도 이상하게 고집을 피웠다.
수일은 다시 계단을 뛰어올랐다. 시커먼 연기가 집어삼킨 집 안으로 무작정 뛰쳐 들어갔다.
“윤수일! 너 미쳤어? 수일아! 거기서 나와. 안 그럼 너, 죽어. 그러다 니가 죽는다고 새꺄. 수일아!”
경식이 수일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수일은 입고 있던 내복을 벗어 입과 코를 틀어막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났는데 어디에서도 불꽃이 보이지 않았다. 집 안은 시커멓다 못해 지독한 냄새를 품은 연기로 가득했고 뜨거웠다. 수일은 기다시피 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박 군이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아니 죽었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일은 박 군의 옷을 잡아 질질 끌었다. 펑펑, 어디선가 터지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차가운 물이 집 안으로 들이쳤다. 온몸이 젖은 채 수일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박 군을 끌고 집 밖으로 나갔다.
정신을 차리자 병원이었다. 콜록콜록,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하, 이 새끼. 너 진짜 미친놈이야. 알아?”
경식이 울 듯한 표정으로 수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단 불은 껐어. 소방관 말론 운이 엄청 좋았대. 불은 안 번졌는데, 유독 가스가 어마어마하게 나왔나 봐. 니가 그렇게 빨리 발견 못 했으면 우리 다 질식해서 죽었을 거래.”
“박 군은?”
경식이 한숨을 쉬었다.
“중환자실.”
“다행이네.”
정말 다행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거야 다행인데, 병원에 입원해서 돈이 많이 들면 어쩌나, 여사장이 돈을 대 주려나, 그 걱정부터 앞섰다.
수일은 상의를 탈의한 채 내복 바지 차림이었다. 수일이 간단한 검사를 받는 동안, 경식은 엉망인 숙소로 돌아가서 수일의 짐과 옷들을 챙겨 나왔다. 신기하게 젖은 것은 없었다. 독한 연기 냄새가 밴 자신의 낡은 스웨터와 얇은 봄 잠바를 걸치고 수일은 경식과 함께 가게로 갔다. 갈 데가 거기밖에 없었다.
다른 동료들도 가게 룸을 숙소 삼아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수일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새벽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기침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피곤한데 잠도 오지 않았다.
여사장은 건물 주인과 한창 실랑이 중이었다.
“그러니까, 소방관 말이 우리 잘못 아니래. 건물이 하도 낡아서 합선이 일어난 거래요. 합선! …지금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요? 사장님! 그런 식으루 나오면 우리도 다 방법이 있어. 콩밥 먹어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응… 응… 뭐, 정 그러시면 삼백이요. 더는 합의 못 해요. 삼백도 싸다. 솔직히 사람 목숨값이 삼백이면 거저지. 그죠?”
여사장은 깔깔 웃었다. 삼백이 누구의 목숨값인지 몰라도 수일은 미칠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불길에 뛰어들었을 때보다 더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벌컥벌컥 찬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는 중에도 기침이 나서 수일은 몇 번이고 물을 뿜었다.
언제 통화를 끝냈는지 여사장이 수일을 툭 쳤다.
“어우, 냄새. 빨랑 목욕하고 와. 갈 데 있어.”
“…저기, 좀 쉬었다….”
“쉬긴 뭘 쉬니? 여태 쉬었잖아, 병원에서. 얼른 목욕하고 와. 운전할 사람 너밖에 없어.”
“제가 갈게요, 사장님.”
잠든 줄 알았던 경식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넌 됐어. 곧 영업해야지. 그리구, 의원님이 수일이를 찾아.”
이제 겨우 정신이 들어 병원에서 나왔는데, 그 독한 연기를 마시며 동료들을 깨우고 박 군을 살렸는데 여사장은 수일의 안위보다 기둥서방의 운전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사장님, 저 진짜 힘들어요. 좀 쉬면 안 돼요?”
“어머, 얘 좀 봐. 너 그렇게 하기 싫으면 계약금 물어 주고 나가. 안 말려.”
여사장은 가차 없었다. 이 정도로 수일에게 매몰찬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사진 이후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상엽을 만나는 시늉이라도 할걸.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수일은 여사장이 준 이천 원을 쥐고 일어났다. 콜록콜록, 억지로 가게 밖을 나왔다. 공기가 어찌나 찬지 저도 모르게 팔뚝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가 옷에서 나는 연기 냄새에 질색하며 팔을 도로 치웠다. 밖은 어느덧 밤이었다. 어젯밤 눈이 와 얼어붙은 길이 미끄러웠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목욕탕으로 향하면서 몇 번을 쉬었다. 명치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하아, 하아.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쏟아졌다.
수일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대들지도 관두지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겨울 잠바 하나 살 돈이 없어서 이 추운 날 오들오들 떠는 비루한 제 처지에 화가 났다. 그러다 수일은 습관처럼 체념했다. 어쩔 수 없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남은 돈으로 바나나 우유를 사서 마셨다. 그게 뭐라고 기분이 나아졌다.
덜 말린 머리가 얼어붙을 정도로 공기가 차가웠다. 라디오에서 영하 7도까지 떨어졌단 소리를 들었는데, 체감상 영하 20도는 되는 것 같았다. 수일은 에덴동산 간판 아래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둥서방의 차가 오길 기다렸다.
기둥서방은 자신이 운전해도 괜찮을 때도 꼭 에덴동산 직원을 불러 운전기사로 썼다. 그렇게 운전기사가 쓰고 싶으면 돈을 주고 고용을 할 것이지 여사장을 이용해 공짜로 사람을 부렸다.
검은색 그라나다가 가게 앞에 섰다. 운전석에서 기둥서방이 내렸다. 그 바로 뒤에 백태섭이 앉아 있었다. 수일은 얼른 뛰어가 인사를 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기둥서방은 보조석 뒤에 자리를 잡았다. 추운 바깥에 있다가 히터가 나오는 따뜻한 차 안으로 들어가자 살 것 같았다.
“어우, 냄새. 씨발 새꺄, 너 옷 안 갈아입고 왔어?”
기둥서방이 코를 틀어막으며 욕을 했다. 뒤에서 백태섭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눈물이 핑 돌았다.
“머 이런 새끼가 다 있노? 니 당장 옷 갈아입고 온나!”
“죄송합니다, 선생님.”
“씨팔, 돌아 버리겠다 증말. 늦었어. 얼른 출발이나 해.”
“죄송합니다.”
옷을 갈아입고 올 생각을 전혀 못 했다. 수일은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새벽에 들이마신 연기 때문에 아직도 기침이 났다.
뒤에 앉은 두 사람은 연기 냄새가 지독하다며 계속 욕을 했다. 수일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 알면서도 차 안 누구도 수일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열어 둔 창문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손이 꽁꽁 얼어붙었다.
수일은 분노와 서러움을 잊으려고 머릿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애써 밝은 노래만 생각했다. 그러다 아버지 애창곡이었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가 떠올랐다. 왜 하필 이 곡일까.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몰랐지만, 대화 주제가 수일에게로 넘어왔다. 백태섭이 수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찌나 세게 때리던지 이마가 핸들에 닿을 정도로 흔들렸다. 수일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러면 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야이 새끼야, 니 같은 쌍놈들은 아를 낳으면 안 돼. 낳아봐야 니하고 똑같은 인간 말종이 나올 거 아이가. 세상에 하나도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들. 그라고 보이 느그 아버지도 니를 낳으면 안 됐지. 이래서 애비가 문제다. 쥐뿔도 가진 것도 없는 연놈들이 얼라들을 잘만 낳아요. 쓰레기가 쓰레기를 낳고, 인간 말종이 인간 말종을 낳고.”
백태섭의 말에 기둥서방이 손뼉을 쳤다.
“태섭이 니가 웬일로 옳은 말을 다 하냐? 저 새끼 저거 빚도 많은 새끼가 술집 다니는 년 꼬셔다가 결혼할려구 그랬잖아.”
이번엔 기둥서방이 수일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야! 윤수일, 넌 그년이랑 그게 하고 싶었어? 하긴, 그년도 너랑 하고 싶었겠냐. 그냥 돈 좀 주니까 했겠지. 둘 다 몸 파는 주제에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하여간, 이 씨발놈들은 머리가 안 돌아간다. 내가 대통령이었으면 이런 새끼들은 아를 몬 낳게 했고, 낳으면 바로 소각장에 갖다 버맀을 끼다. 그래야 이 세상이 깨끗해지지. 안 글나? 어? 개새끼야.”
백태섭은 다시 수일을 쥐어박았다. 수일의 이마가 힘없이 핸들에 부닥쳤다. 두 사람은 그걸 보고 낄낄댔다.
수일은 가난해도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게 꿈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무슨 짓을 해서든 고생시키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수일에겐 그만큼 소중하고 간절한 꿈이었는데, 뒤에 앉은 두 사람이 수일의 꿈을 조롱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아이를 농락했다.
저들의 비웃음을 살 만큼 수일은 잘못한 적이 없었다. 하루에 2, 3시간만 잠을 자며 미친 듯이 일을 했고, 지금은 여자에게 몸을 팔면서까지 열심히 빚을 갚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굴 원망해 본 적도 없고 누구 탓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이 빚은 수일과 아버지가 진 빚이었고, 그걸 갚는 것도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인간 이하 취급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버지도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매일 술로 달래다가 간암을 얻으신 건가.
겉으론 멀쩡해 보였지만 수일은 점점 미쳐 가고 있었나 보았다. 아니 벌써 미쳤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늘 그랬듯 체념할 줄 알았는데 수일은 분노했다.
살의가 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칼을 쥐고 있었다면 심장을 찔렀을 테고 돌을 쥐고 있었다면 머리를 내리쳤을 터였다. 맨손이었다면 눈알을 파내고 입을 찢었을 터였다. 수일은 운전 중이었으므로 액셀을 밟았다. 바닥에 닿을 정도로 페달을 세게 누른 채 가로수로 돌진했다. 수일은 동반 자살이란 이름으로 살인을 감행했다.
그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별 볼 일 없던 수일의 인생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와 보냈던 시절을 제외하면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곧 천국에서 밴드를 하고 있을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수일은 환하게 웃었다.
천천히 가기로 약속했는데, 그걸 못 지켜서 조금은 죄송한 마음도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할머니를 만나면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해 줘야지. 그리고 아버지에겐 가수가 못 되어서 죄송하다고, 실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속마음을 전해야지 했다.
굉음과 함께 차가 부서졌다. 수일의 몸은 장난감처럼 튕겨 나가다가 안전벨트 때문에 의자에 주저앉았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수일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