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81)

조모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일은 되도록 두산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 남자와 두산을 닮았다고 생각한 자신이 싫어서였다. 남자를 떠올리던 중에 마침 두산을 봐서 착각하는 거라고 수일은 확신했다.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았다. 삼락 형님은 가수 남진과 고향도 성도 달랐지만 쌍둥이처럼 닮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여배우 정윤희를 닮았다고 했고, 그 말을 듣고 자란 수일은 어쩐지 어머니가 정윤희로 보였다. 수일도 어릴 적엔 누군가와 닮았단 소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가, 동명이인인 가수 윤수일이 유명해지고부터 쌍꺼풀진 큰 눈이 닮았단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니 두산이라고 누구를 닮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하필 그 남자와 닮아 보였던 건, 하필 그때 두산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조모가 족발에 소주 한잔하자 케서 그라자꼬 했다.”

“응.”

그런데도 수일은 두산을 볼 자신이 없었다. 집요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니 와 아까부터 내 안 쳐다보노?”

“…내가 언제?”

“은제기는. 오성관에서부터 쭉 그랬지. 지금도 내 안 쳐다본다 아이가.”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아닌데…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건데. 오늘 새 가수들 만났는데 정말 별루였거든.”

정곡을 찔린 수일은 뜨끔했지만, 아니라며 길게 변명했다. 두산이 씩씩대는 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두산을 보았다.

잘생긴 코에 시선을 두며 천천히 두산의 얼굴을 훑었다. 전혀 달랐다. 아깐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저 우연이었다. 역시 남자를 떠올리던 중에 두산이 들어왔던 것뿐이었다. 수일은 두산을 외면한 게 미안해서 손을 뻗어 두산의 볼을 쓰다듬었다. 두산이 슬쩍 돌아보았다.

“그래 별로였나?”

“응. 정말 별루였어.”

“손님도 없더만은 노래는 불렀고?”

“있으나 없으나 불러야지. 부르는 중에 들어올 수도 있구. 그리고, 사장님이 홀에서 듣고 계셨어.”

“씨발, 박 사장 죽을상 하고 있었겠네.”

오성관이 망하길 고대하는 두산은 밝은 표정으로 수일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내가 미쳤지. 수일은 속으로 자책했다.

그나저나 그 남자는 기둥서방과 어떤 관계였길래 그 시간에 거기 들어왔던 걸까?

답이 없는 의문은 계속 늘어만 갔다.

라디오에선 자정 뉴스가 나왔다. 오늘도 낮 기온이 30도를 넘을 거란 소식을 전하며, 아나운서는 오존층 파괴가 불러올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알렸다.

집으로 들어가자 조모는 거실 바닥에 상을 펴 놓고 벌써 족발을 먹고 있었다. 셋이 먹을 건데 잔칫상처럼 푸짐했다. 손이 큰 건 이 집안 내력인가 보았다.

“퍼뜩 온나. 내 묵고잡아서 먼저 한술 뜨고 있었다.”

화장을 다 지운 조모는 머리에 반짝이 헤어밴드를 하고 잠옷 바지를 입었다.

“에헤이, 같이 시작해야지.”

“니도 나이 들어바라. 배고픈 기 참아지는가.”

조모는 두산을 째려보며 한입 가득 족발을 넣었다. 수일은 조모 맞은편에 두산과 나란히 앉았다. 베란다도 열고 창이란 창은 모두 열어 두었지만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선풍기 두 대가 달달 소리를 내며 뜨거운 바람을 쏟아 냈다.

“수일이 니 마이 무라. 그래 애비서 몬 쓴다. 여자고 남자고 살집이 쪼매 있으야 보기도 좋다.”

“네. 잘 먹겠습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수일은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족발을 먹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두산이 화를 내며 욕을 뱉었다.

“아, 씨발! 정신을 어따 두고 댕기노? 밥도 안 맥이고! 돌았네 돌았어.”

“두사이 니 내 들으라꼬 하는 소리가?”

수일은 저한테 하는 소린가 싶어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조모가 버럭 소리를 쳤다.

“아인데. 내한테 하는 말인데.”

두산이 뚱하게 답했다.

“쯧쯧. 혼잣말 소리가 커지면 미칬다는 증거라 카드라. 니 조심해라.”

조금 전 화를 냈던 조모는 키득거리며 두산을 놀렸다.

“두산아 나 괜찮아. 아까는 배 안 고팠어.”

부지런히 족발을 씹으며 수일은 두산을 달랬다. 두산은 수일의 먹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내가 미칬다.”

먹는데 자꾸 한숨을 쉬고 뚫어지게 쳐다보니 방해가 되었다. 수일은 두산에게 족발을 먹이고 소주잔을 쥐여 주며 달랬다. 족발이 입맛에 맞는지 두산은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었다.

조모가 두 사람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참, 좋을 때다.”

술을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셋이서 건배를 하고 소주를 홀짝였다. 족발은 맛있었고 소주는 달았다. 더워서 땀이 나는데도 전혀 싫지가 않았다. 분명 어려운 자린데, 수일은 별 얘길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했다. 조모는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내하고 우리 영감님하고도 억수로 인연이 깊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조모는 두산의 할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에헤이, 조모. 하지 마라. 내 듣기 싫다.”

“듣기 싫으면 방에 드가서 디비자라. 내는 수일이하고 오순도순 얘기할라니까.”

조모는 수일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수일아, 우리 영감님은 두사이 쟈처럼 경박스럽지가 않다. 으찌나 무게도 있고 남자답고 어른스러운지, 내가 두협이 돌잔치 갔다가 영감한테 반해서 쫓아다닜다 아이가.”

“조모, 하지 마라. 징그럽다. 내 벌쌔로 닭살 돋은 거 안 보이나?”

두산은 호들갑을 떨며 조모에게 팔을 내밀었다. 매끈한 살에 닭살이 돋았다고 우겼다. 듣기 싫다, 징그럽다, 소름 끼친다. 조모의 말에 일일이 반응하는 게 꼭 국민학생 같았다.

“수일아, 내 하지 마까?”

“아니에요, 숙모님. 듣고 싶어요.”

“하이고, 참 말도 예쁘게 한다. 살살 녹는다 녹아.”

조모는 수일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시선이 두산에게 옮겨 가자 조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래 얌전한 아가 우짜다가 니 같은 꼴통한테 코가 뀄나 모르겠다.”

“얌전하기는.”

두산은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닫았다. 괜히 민망해진 수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조모는 할아버지 얘길 이어 나갔다.

“내 여동생이 주옥이하고 친한 친구였다. 내도 언니 동생 하면서 주옥이 하고 잘 지냈고. 결혼식은 일이 있어서 몬 갔고, 두협이 돌잔치를 비싼 고깃집에서 한다 케서 밥이나 얻어먹을라꼬 갔지. 거서 우리 영감님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아이가. ‘아! 내는 꼭 저런 남자하고 결혼할 끼다.’ 이 생각밖에 안 들드라. 그때 영감이 서른아홉인가 마흔인가 그랬는데 내가 여태 본 남자 중에 제일로 믓쪘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남자답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여기까지 말한 조모는 소주잔을 한 번에 비웠다. 캬악,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수일이 이번엔 조모의 잔에 술을 따랐다.

“우리 집에서 시집 안 간다꼬 으찌나 달달 볶아싸턴지. 선본 사내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제, 가시나가 퇴짜 놨다꼬 욕은 듣제, 콱 죽어삐고 싶드라. 솔찌키 영감님 같은 남자가 으데 있노? 읍지. 내는 이대로 노처녀로 늙어 죽겠구나 이 생각을 했는데, 우째 인연이 닿아서 딱 11년 뒤에 영감님하고 백년해로를 맺었다 아이가.”

스물둘의 김정숙은 두산의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11년 뒤인 서른셋에 비록 첩이긴 해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조모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아직도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하는 티가 났다.

“백년해로 좋아하네. 그거는 우리 할매하고만 맺었지. 조모는 호적에도 몬 올라갔다 아이가.”

“확마, 니는 꼭 그래 내 아픈 데를 콕콕 찔러야 쓰겄나?”

가끔 수일은 두산이 어디까지 막말을 하는지 놀랄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아무리 그래도 한참 어른이고 할아버지의 여자였다. 수일을 맡길 정도로 친한 사이라지만 두산은 정말 예의가 없었다.

“너 자꾸 왜 그래?”

수일은 두산의 팔을 꼬집고 작은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두산은 대놓고 아야, 하며 엄살을 부렸다. 조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거 저거, 수일아, 니는 야 말고 그래 사람이 없드나?”

안타까운 눈으로 수일을 보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 웃기만 했다.

“머라카노? 내하고 수일이 행님하고는 천생연분인데. 조모야말로 우리 할배 말고 그래 사람이 없드나?”

“그래. 읍따. 내는 다시 태어나도 우리 영감님하고 살 끼다.”

“하이고, 조모도 참 정성이다.”

빈정거리는 두산의 말투엔 애정이 묻어났다. 왠지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조모는 농담도 곧잘 하고 잘 웃었다. 두산의 버릇없는 말과 행동에 싫은 티 한번 내지 않았다. 지금도 고운 얼굴인데 스물둘엔 얼마나 예뻤을까. 이상형의 남자를 기다리며 그 시대에 시집가기를 포기했다는 게 왠지 멋있었다.

다만 그 결과가 안타까웠다. 애가 일곱이나 딸린 남자의 첩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남자와 가정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수일이 뭐라고 저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나 싶었다. 사람 마음이 산수처럼 척척 맞아떨어지면 오죽 좋겠냐만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수일은 옅은 한숨을 쉬며 술을 들이켰다.

셋이서 새벽 4시까지 소주 일곱 병을 나눠 마셨다. 주로 두산과 조모가 대화를 했고 수일은 가끔 묻는 말에 답했다. 조모가 가장 먼저 취했다. 다른 얘길 하며 웃다가 갑자기 격앙된 어조로 다시 할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내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읍따. 떳떳하다. 다들 내가 불륜이라도 저지른 줄 아는데, 내는 우리 사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영감님을 만났다. 그래도 사람들이 내를 보는 눈이 이상하데. 내가 주옥이보다 두 살밖에 안 많다꼬, 재산 노리고 접근한 줄 알고 색안경을 끼고 보드라 이 말이다.”

“조모. 조모! 우리 일 절만 하입시다. 자, 내 술 한 잔 받으이소.”

두산은 울먹거리는 조모를 달래며 술을 따라 주었다.

“오야. 일 절만 하께. 수일아, 내가 두사이를 와 좋아하는지 아나? 두사이 이거는 아가 단순무식해가지고 고마 생각을 안 해. 생각을 안 하니까 색안경도 안 끼는 기라. 와? 생각을 안 하니까!”

조모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두산을 향해 삿대질하며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두산이 생각 없어서 단순무식하다는 소릴 자꾸 들으니 수일은 기분이 상했다. 두산은 조금 폭력적이긴 해도 배려가 깊은 애였다.

수일은 혼자 마음이 상해서 취기가 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소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 그러다 꾸벅꾸벅 졸았다.

“야야, 그만 자자.”

조모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두산이 조모를 부축하려 하자 손을 뿌리쳤다.

“참, 너거들 얌전히 자라. 내 귀 억수로 밝대이.”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면서 수일과 두산을 향해 소리쳤다. 소리 나기만 해 봐라, 하며 조모는 깔깔 웃었다.

수일은 너무 졸려서 부끄러워할 힘도 없었다. 두 팔을 등 뒤로 짚고 쉬면서 두산이 술상 치우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먼저 씻고 있으라. 내 다 치우고 가께.”

“응.”

수일은 끙 소리를 내고 일어나 욕실로 가서 느릿느릿 이를 닦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눈이 퀭했다. 어떻게 치웠는지 두산은 1분도 안 돼서 벌컥 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왔다. 뭔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칫솔을 들었다.

“나 이만 닦고 그냥 잘 거야.”

“고마 잔다꼬?”

“응. 졸려.”

“그래. 가만 누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하께.”

“아냐, 그냥 잘 거야. 너두 그냥 자.”

“니는 자라. 내는 알아서 하께.”

“어우, 뭘 알아서 하니?”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나오면 더러워서 안 한다고 할 텐데, 두산은 포기란 걸 몰랐다. 하여간 애가 이상했다. 생각을 안 해서 좋다던 조모의 말이 떠올랐다. 이를 다 닦은 두산은 옷을 훌러덩 벗고 수일의 옷도 벗겼다.

“숙모님 들어오시면 어쩌려구?”

“들어오기는. 지금쯤 꼬꾸라져서 잠들었을 끼다.”

이러면서 수일의 손을 잡아끌었다. 수일은 한숨을 쉬며 따라 움직였다.

샤워기 아래 서서 물을 틀자 미지근한 물이 흘러내렸다. 두산은 수일의 허리를 안아 제 아랫도리에 바짝 붙였다. 옷을 벗을 때쯤엔 이미 발기한 두산의 자지가 수일의 배를 찔렀다.

두산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수일에게 입을 맞췄다. 샤워기의 물과 두산의 혀가 함께 입으로 들어왔다. 평소와 같은 키스였지만, 물기 때문에 몹시 질척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났다.

“하아.”

술기운 때문에 금세 흥분됐다.

수일은 턱을 치켜들고 입을 벌렸다. 두산이 수일의 턱선을 따라 쪽쪽 소리를 내며 짧게 입을 맞췄다. 혀를 길게 빼물고 수일의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수일은 가만 눈을 감고 두산을 느꼈다. 배를 찌르는 두산의 자지가 뜨거웠다.

귓불을 깨물리자 수일은 흠칫 몸을 떨었다. 신음이 절로 흘렀다. 귓바퀴를 따라 혀가 움직이더니 곧 두산은 귀를 통째로 입 안에 넣고 쭙쭙 소리 내 빨기 시작했다. 성감대를 자극당한 수일은 쾌감에 전율했다. 눈을 뜨자 욕정 어린 시선이 수일을 내려다보았다.

수일은 발꿈치를 들어 두산의 아랫입술을 물고 키스했다. 빈틈없이 입을 겹치고 혀를 넣어 두산의 입 안을 휘저었다. 물컹한 살덩이를 섞고 얽으며 희롱했다. 하체를 붙여 몸을 비틀고 흔들었다.

“씨발, 환장하겠네.”

두산이 사정없이 덤벼들었다. 수일의 고개가 뒤로 꺾일 정도로 입술을 밀어붙이며 격렬하게 키스했다. 커다란 두 손이 수일의 얼굴을 감싸 쥐자 수일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두산의 팔목을 잡았다. 키스는 거칠고 숨 막혔다. 샤워기의 물과 침이 뒤섞여 입 안을 넘나들었다.

수일은 두산의 자지를 잡아 흔들었다. 두산도 수일의 자지를 잡았다. 엄지로 귀두를 긁고 손으로 기둥을 훑었다. 발기한 것을 흔드는 경박한 소리는 헐떡이는 숨소리에 묻혔다. 두 사람은 위로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물고 빨며 키스했고, 아래론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처음엔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이성이 날아가 버리자 지금 여기가 어딘지 누구네 집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두산아! 얼른… 나 쌀 거 같애!”

“씨발, 쪼매만 참아라. 내하고, 흡, 같이 가자.”

“흐읏! 나 정말, 쌀… 거, 같애.”

사정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두산이 귀두를 막아 버렸다. 수일은 당장 사정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싸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두산은 들은 체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일은 두산의 자지를 마구 흔들어 재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아플 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귀두를 손톱으로 자극하고 기둥을 긁고 조였다. 빨래를 짜듯 온 힘을 다해 두산의 자지를 비틀었다. 고통스러운지 두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으흑! 큭… 니 뭐 내한테 화나는, 일 있나? 윽! 씨발, 억수로 좋네.”

좋다고 말하면서 수일의 자지도 똑같이 쥐어짰다. 안 그래도 사정하기 직전이던 수일은 쥐어짜이기까지 하니 기절할 것 같았다. 온몸을 바르르 떨며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악, 아퍼, 누르지 마.”

“엄살은.”

둘은 다시 키스했다. 입술을 비비고 대충 혀를 내밀어 아무렇게나 핥았다. 손은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탁탁탁, 빠른 속도로 성기를 쳐 댔다.

“읏!!”

“씨발!!”

간발의 차로 수일이 먼저 사정하고 두산이 뒤를 이었다. 자지를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전신의 근육이 쾌락으로 날뛰었다.

수일은 두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숨을 고르면서 두산의 자지를 몇 번 더 쥐어짰다. 수일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두산의 탄탄한 근육들이 잘게 떨렸다. 두산은 수일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뜨거운 숨을 뱉어 냈다.

수일은 두산의 머리를 안아 주었다. 두산도 수일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화려한 침대는 아직 낯설지만, 두산이 함께 있으니 포근하게 느껴졌다.

“숙모님은 혼자 사셔?”

“어.”

“느네 할아버지는?”

“지금은 애인하고 있지.”

“숙모님 서운하시겠다. 할아버님 많이 좋아하시던데.”

“조모 입장에서는 그란데, 뭐 알고 시작했으니까 어쩔 수가 읍지. 우리 할배는 사랑때메 목숨 내놓는 스타일은 아이거든.”

두산은 이렇게 말하며 수일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알고 시작한 관계여도 기대하는 게 없진 않을 텐데, 조모는 어떻게 외로움을 참을까 궁금했다. 평생 한 남자만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쌍방이 아니라 일방이었다. 수일이라면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벨 소리에 수일은 눈을 떴다. 커튼 때문에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두산은 쌕쌕 소리를 내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벨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조모도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수일은 두산이 깨지 않도록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울리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전화기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수일은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수일아! 거기서 나와. 안 그럼 너, 죽어. 거기 있다간 너 죽어! 거기서 나와야 해.

“경… 식이니? 여보세요?”

- 수일아, 빨랑 나오라니까! 너 거기 있으면 안 돼!

수일은 목소리를 알아듣고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곧 손을 덜덜 떨었다. 손에서 수화기를 놓치자 쾅,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과 부닥쳤다.

경식이 여기 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한 건지 몰랐다. 알 턱이 없었다. 게다가 어제, 아니 그제 상엽이 저한테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경식도 하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상엽이라면 그런 말을 해도 이해가 갔지만, 경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에 들었던 상엽의 전화가 환청이었단 말인가. 수일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머리끝이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꿈일 거야. 아니, 꿈이어야 했다.

그때, 인기척이 났다. 수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니 거서 머하노?”

“아니, 그게, 전화가… 와서.”

이렇게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다보는데, 수일의 발밑에 뽑힌 전화선이 있었다.

“씨발!”

두산이 낮게 신음했다. 수일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수일은 절망했다.

수일은 사시나무 떨듯 덜덜 몸을 떨었다. 두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떨어진 수화기를 집어 제자리에 놓고 수일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커다란 손이 수일의 볼을 톡 하고 건드렸다.

“개안나?”

“경식이가 나한테 분명 전화했는데, 걔가 여기 번호를 알 리가 없잖아. 그지? 그 생각이 드니까 너무 이상한 거야.”

수일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그랬는데 이거 봐. 전화선이 뽑혀 있었어. 내가 분명 전화벨 소리 듣고 나와서 전화를 받았는데 어떻게 그래.”

뽑힌 전화선을 집어 보란 듯 내밀었다. 두산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옅은 한숨을 쉬고 다시 들었다.

“씨발, 경식이는 또 누고?”

두산이 인상을 썼다.

“어? 나하구 같이 호스트로 일했던 애야.”

“친했나?”

지금 왜 이런 걸 물어보지는 몰랐지만 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엔 친하게 지냈었다. 그래도 속마음을 터놓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에덴동산에서 만난 동료들은 경식을 포함해서 다들 그랬다. 서로 의지했지만, 분명한 선이 있었다. 대부분 여자에게 몸 파는 걸 쪽팔려 했고 필요한 돈만 모이면 당장이라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거긴 그런 곳이었다.

“친한 새끼들도 많다.”

“내가 뽑힌 전화기에서 전화를 받았다는데, 너는 왜 딴소리를 하니?”

수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 돌리지 마라. 니 경식이 그 새끼하고 지금도 연락하나?”

“아냐! 가게 망하구 나서 연락 끊겼어. 그러니까 내가 놀라지.”

“뭐, 그라믄 됐고.”

두산은 수일을 안아 일으키려 했다. 수일은 온 힘을 다해 두산을 밀어 버렸다.

쪼그리고 있던 두산은 예상치 못한 반격에 뒤로 넘어갔다. 수일은 몸을 일으키는 두산을 쏘아보며 씩씩댔다.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선도 뽑혀 있는데 전화를 받아. 내가 미쳤으니까 받았지!”

“꿈이다.”

두산이 이렇게 반응할수록 수일만 상처받았다.

“그렇게 넘어가지 마. 니가 자꾸 그러면 내가 더 불안해. 미쳤냐고 화내고,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려야지. 정신 병원에 처넣을 거니까 입 닥치라고 나한테 그래야지. 그게 정상이잖아? 그게 보통 사람들 반응이잖아!”

두산의 잘못도 아닌데 수일은 두산에게 핏대를 올렸다. 마구 소리쳤다. 지금은 괜찮아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두산도 질릴 게 뻔했다. 질리다 못해 진저리치다가 저를 버릴 게 분명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을 꿈이라고 하면서 넘어가 버리니 수일은 더욱 미칠 것 같았다.

“씨발, 정신병원은 미친개이들이나 가는 덴데 니가 거를 와 가노? 니 안 미칬다.”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두산이 말했다. 그만 자자, 하고 수일의 팔을 잡았다. 수일은 두산의 팔을 뿌리쳤다. 여태 화를 내지 않던 두산은 수일이 제 손을 뿌리치자 사나운 눈빛으로 수일을 쏘아보았다. 다시 팔을 뻗어 수일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이거 놔! 실은 나 환청도 듣고 헛것도 보고 그래.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아냐. 이젠 어느 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어.”

수일은 차마 자신이 보는 헛것이 연화를 죽인 남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또 그 남자와 두산이 겹쳐 보였다. 두산에게서 자꾸 그 남자를 보는 자신이 끔찍하게 싫어서 입에 담기도 싫었다.

잊고 싶었던 기억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처음 최 군의 일을 떠올리기 전처럼, 묻어 두고 싶었던 참혹한 과거가 생각나서 몸과 마음이 본능적으로 막아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일과 상관없이 미쳐 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확신이 서질 않았다.

“너두 알잖아. 나 이상한 거. 그래서 여기 데려온 거잖아. 그런데 왜 자꾸 아니라구만 해.”

수일은 너무 지쳤다. 팔이 잡힌 채 두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산에게 화를 내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 남자는 무슨 죄를 지어서 저 같은 거 때문에 이 고생을 할까.

“미안해, 두산아.”

수일은 고개를 푹 숙였다. 두산이 짧게 웃었다. 하이고, 하더니 수일의 턱을 움켜잡아 자기를 보게 했다.

“내 누고?”

“…….”

“내 이름 말해 바라.”

낮게 으르렁댔다.

“…백, 두산.”

“니는?”

“윤수일.”

“우리 언제 만났노?”

“6월 14일.”

“그래. 다 기억하네. 내가 눈지 니가 눈지 우리가 언제 만났는지 그것만 안 이자뿌면 된다. 씨발, 니가 헛거를 보든 헛거를 듣든 내는 다 개안타. 내 옆에만 있으면 내만 안 이자뿌면 미치도 개안타꼬!”

수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그만 웃음이 터졌다.

눈앞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는데, 정작 자기는 미쳐 가는 게 딱했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을 저는 왜 잡았다 도로 뺏기는지 몰랐다.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웃음은 울음으로 변했다.

“울지 마라.”

두산이 수일을 꼭 안아 주고 등을 토닥였다. 수일도 두산을 꼭 끌어안았다.

“흐윽, 너 정말 이상해.”

“남 말하네.”

저에겐 더없이 과분한 사람이라서 수일은 죽을 만큼 미안했다.

“나 버리지 마. 나 미쳐도 버리지 마, 두산아.”

“하이고, 별소리 다 한다. 니가 물건이가? 내가 버리게.”

“혹시라도 내가 싫어지면, 그때는 적선한다 생각하고 나 정신 병원에 보내 줘. 길에다 버리지 말구. 응?”

“어이, 윤수일이. 니 자꾸 이랄래?”

수일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애틋했다.

“내가 개안타고 몇 번을 말하노? 니 절때로 안 버린다.”

“그래두. 니가 나 싫어지면, 그때 그렇게 해 준다고 약속해. 그냥 약속만 해 줘. 미친 상태로 길에서 죽고 싶지는 않아. 그러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두산이 싫다는데도 수일은 고집스레 답을 요구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수일은 객사하고 싶지 않았다. 미쳐서 길을 헤매고, 모르는 사람들의 동정과 괄시를 받다 죽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제 시신을 거둬 주지 않아서 이름 모를 누군가와 함께 화장터에서 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자기가, 윤수일이 누군지 아는 사람 품에서 죽고 싶었다. 설령 그게 정신 병원일지라도.

두산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안았던 팔을 풀고 두 손으로 수일의 얼굴을 붙잡았다. 수일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하고 박았다.

“알았다. 그랄 일 없지만, 니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께.”

“각서 써 줘.”

“그래. 각서 쓰자. 일단, 니 진정부터 하고.”

“응. 고마워 두산아.”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거실이 환해졌다. 전화선이 뽑힌 걸 봤을 때는 앞이 캄캄했는데, 이제야 수일의 마음도 조금 밝아졌다.

두산은 수일을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잠깐 나갔다 들어와서 수일에게 물과 알약을 건넸다. 수일은 얌전히 두산이 주는 수면제를 먹었다. 두산에게 푹 안겼다.

“니 안 미칬다. 내가 안다.”

“…….”

“진짜다.”

두산의 말대로 미친 게 아니었으면 하고 수일은 진심으로 바랐다.

사고와 관련된 기억이 모두 돌아오면 정말로 이 환청과 환영이 끝이 날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수일은 잠을 청했다.

***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아내는 딸랑딸랑 울리는 종소리에 습관적으로 인사를 했다.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하자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인화한 사진을 비닐 포장지에 넣고 있던 공정훈은 문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하이고 마, 무슨 날씨가 이래 덥노.”

까무잡잡한 피부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중년 남자는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다. 반팔 와이셔츠에 속이 비치는 여름 잠바 차림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면 보통 열에 아홉은 길 가다 급히 증명사진을 찍으려고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증명사진 찍으시게요?”

“이야, 사장님 점쟁입니까? 우째 딱 보자마자 맞추지?”

“제가 사진만 23년을 찍었어요. 그런 것두 모르면 장사 접어야지.”

정훈은 남자의 과장된 반응에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조명 옆에 놓아둔 의자를 가리켰다.

“저기 앉으세요.”

“여 억수로 마이 바뀠네. 내가 11년 전에 이 근처에 자주 왔었거든예. 친한 마담이 하나 있어가지고.”

“그래요? 11년 전이면 근방이 죄다 요정이고 룸쌀롱이고 그러긴 했었죠. 지금이야 거의 다 없어졌지만.”

“맞지예? 내는 길 잘못 찾은 줄 알았다 아입니까.”

“오랜만에 오신 분들은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와, 마이 변했다. 삘딩도 들어서고, 길도 다 딲이고. 그때 여 땅이나 쫌 사둘 꺼로 괜히 이상한데 투자해서 돈만 날맀다.”

남자는 정훈이 대꾸해 주자 신이 나서 과거 얘기를 떠들어 댔다. 시끄럽고 경박스러운 남자였다. 처음엔 장사꾼처럼 보였는데 나이에 비해 다부진 체격을 보니 왕년에 주먹깨나 쓰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별일 아니겠지만, 그래도 입조심해야 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한정숙의 가게에서 일했던 윤수일이라는 남자가 전화를 해 왔었다. 전화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당장에 평생 써 왔던 ‘행복사진관’ 간판을 ‘보람사진관’으로 바꿔 달고 비싼 돈을 들여 전화번호까지 바꾸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윤수일에 이어 조폭 출신의 남자가 온 건 정말 우연이겠지만, 정훈은 기분이 영 찜찜했다. 얼른 사진이나 찍어 주고 남자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님, 잠바 벗으셔야죠?”

“아, 예.”

정훈은 남자가 벗어 준 잠바를 받아 아내에게 건넸다.

“잘 좀 찍어주이소.”

“참, 내 정신 좀 봐. 증명사진이죠?”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됐다고는 하나, 아직 여권을 만드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게다가 이런 남자가 해외에나 갈 일이 있을까 싶었다.

“여권. 아르헨티나에 찾을 사람이 있어서 겸사겸사 가볼라꼬예. 거서 사업을 한다카나 머라카나. 돈 받을 것도 쫌 있고.”

남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촤르르 소리를 내며 사진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정훈 대신 사진 정리를 하던 아내가 떨어트린 거였다. 아내는 사진을 주울 생각도 않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정훈을 쳐다보았다.

“아이쿠, 사모님께서 손이 미끄러짔는갑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내 대신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주웠다.

“여보, 뭐 해? 사진 안 주워?”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 서 있는 아내가 정훈은 짜증스러웠다.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정훈도 손이 달달 떨렸다. 사진을 다 주운 아내는 가게에 딸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굴까?

11년 전 사기 전과 4범이던 정훈의 친형 공기훈이 정훈에게 사업 제안을 하나 해 왔다. 당시 아내의 병원비를 대고 사진관을 차리느라 빚을 많이 냈던 정훈은 내키진 않았지만 형님과 모종의 동업을 했다.

출소한 뒤 백수로 뒹굴던 형님은 사진관에 놀러 왔다가 근처 술집에 들렀던 모양이었다. 거기서 만난 마담에게 자신을 사업가라 속이고 술을 외상으로 얻어먹었다. 하룻밤에 도는 현금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직접 눈으로 목격한 형님은 이 근처 마담들을 상대로 사기 칠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두 푼 먹고 감옥에 가느니 크게 한탕 하고 해외로 튈 계획을 세웠다.

생각보다 사진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진을 맡기러 오던 손님 중에 한정숙이 단연 눈에 띄었다. 한정숙을 대신해서 사진관에 들른 에덴동산 종업원들에게 앨범도 선물로 주고 먹을 것도 줘 가면서 정보를 얻었다. 그중 김경식이라는 남자가 정훈에게 유독 많은 얘기를 해 주었다. 그렇게 타깃이 정해졌다.

형님은 사기 전과 4범답게 자유자재로 자아를 바꿀 줄 알았다. 이번엔 아르헨티나에서 온 잘나가는 의류 사업가 마르코 김으로 변신했다. 이민 2세처럼 어설픈 서울 말씨에 책에서 외운 스페인어를 간간이 섞어 썼다. 정훈이 보기엔 정말 감쪽같았다.

정훈은 그가 한정숙에게 먼저 접근할 줄 알았는데, 형님은 역시 한 수 위였다. 마담이 아닌 기둥서방 문일준에게 접근했다. 먼저 문일준이 자주 가는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 사우나에 등록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은 공간을 들락거리며 들으라는 듯 사업 얘기에 열을 올렸다. 종업원들에게도 넉넉한 팁을 주며 호감을 샀다. 문일준은 한 달도 안 되어 형님에게 말려들었다.

문일준은 돈 많은 아버지를 둔 별 볼 일 없는 사내였지만, 인맥이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인근 유흥업소 마담들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고객으로 소개해 주고 심지어 부산에서 오는 사업가들도 접대했다. 지갑엔 현금이 넘쳐 났다. 형님은 제대로 된 물주를 문 것이다.

그렇게 문일준과 친구가 된 형님은 어디서 구했는지 아르헨티나에 있는 의류 공장 사진을 보여 주며 실은 한국에 투자할 거리가 있어서 돌아왔노라고 은밀히 말했다. 사업엔 관심 없는 척하던 문일준은 형님이 대통령 측근을 만났다는 말을 흘리자 눈을 반짝였다.

쐐기를 박은 건 정훈이 합성해 준, 대통령과 형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문일준이 미끼를 덥석 물었고 한 마담은 주변 상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훈에게도 한 마담이 사업 설명을 하러 왔었다. 그가 공기훈의 친동생일 거라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열정적으로 투자를 권했다. 정훈이 속으로 얼마나 한 마담을 비웃었는지 몰랐다. 다들 속고 있다는 사실에 쾌감까지 느꼈다.

역시 형님의 선견지명이 옳았다. 문일준은 보통 마당발이 아니었다. 고작 6개월 만에 투자금을 15억 넘게 모은 형님은 아주 신이 나 있었다. 정훈에게도 2억을 떼 주겠노라 약속했다. 이제 축배를 들일만 남았다고 여겼다.

형님은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아르헨티나가 아닌 필리핀으로 도피하기로 했다. 돈을 어떻게 해외로 빼돌릴까, 그 생각만 하며 투자금으로 매일 비싼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사 입었다. 정훈에게도 사진 찍으러 온 척하며 현금을 마구 쥐여 주었다.

그때 아내에게 들켰다. 분명히 돈 나올 구석이 없는 걸 아는데 정훈이 자꾸 돈을 가져다주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훈은 아내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처음에 기겁하던 아내도 집에 현금이 쏟아지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도리어 2억은 너무 적으니 형님에게 3억은 꼭 받아 내라고 정훈을 압박하기까지 했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문일준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형님도 정훈도 간과했다는 거였다. 허허실실 형님의 말에 다 속아 넘어가 주던 문일준은 15억이 모이자 돌변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형님의 사기 전과와 본명도 알아냈다. 형님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정훈은 들키지 않았다. 당시 사진관은 아내 명의로 되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았던 아내는 거의 집에서만 지내 주변 상인들조차 정훈을 아내 이름인 이항복으로 알았다. 왜 그랬는지 정훈도 딱히 반박한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천운이었다.

성이 특이해서 자칫 형제인 것이 들통날 수도 있었는데, 아내 이름 덕에 형님과 자신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형님이 사진관에 들렀던 두 번을 제외하고 따로 통화를 하거나 만난 적도 없었다.

1981년 12월 중순, 형님이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정훈은 애써 외면했다. 한정숙이 목매달아 자살하고 주변 상인들이 사기로 돈을 잃고 곡소리를 낼 때도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렇게 11년을 잘 숨기고 살았다.

플래시가 번쩍 터졌다. 세 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다 됐습니다, 손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장님, 제가 쫌 급해서 그라는데, 오늘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가만 보자. 많이 급하세요?”

“예. 오늘 꼭 받아야 되는데. 우째 안 되겠습니까?”

남자의 부탁에 정훈은 일부러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속으론 얼른 보내 버리고 싶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짐짓 침착하게 굴었다.

“어쩔 수 없죠, 뭐. 지금이 10시 반이니까 이따 저녁 6시쯤에 오시면 제가 다 해 놓고 있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남자는 정훈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정훈은 억지로 웃었다.

사진값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밀자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아입니다. 얼마 안 되지만, 제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주이소.”

이러면서 만 원짜리 두 장을 더 건넸다.

“이러시면 제가 더 곤란한데.”

“곤란할 끼 머가 있습니까? 부탁드린 건 전데예.”

손에 억지로 쥐여 주는 통에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았다.

“부탁하는 김에,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르세요.”

정훈은 카운터 아래 책상에 놓아둔 전화기를 위로 올렸다. 남자는 수화기를 들어 숫자를 눌렀다. 곁눈질로 번호를 살폈다. 부산으로 거는 시외 전화였다.

“어, 두산아 난데, 찾았다. 사장님 여 상호가 우찌됩니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정훈은 찾았다는 남자의 말에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설마, 저를 찾으러 온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었다.

“사장님, 상호예?”

“예? 그게, 행복사, 아니 보람사진관이요. 보.람.사.진.관.”

딴생각을 하던 정훈은 저도 모르게 옛 상호를 뱉을 뻔했다. 너무 놀라서 입을 막았지만 다행히 남자는 정훈의 행동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기 보람사진관이라꼬 우리 약속 장소에서 가깝다. 내 사진도 찾아야 되니까, 일곱 시에 보자. 오야, 드가라.”

남자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바로 문을 나섰다. 딸랑딸랑, 종이 울렸다.

“참, 사장님.”

남자가 문을 잡고 손가락으로 간판을 가리켰다.

“내 부탁도 들어주고 고마워서 하는 말인데예, 여 간판에 목매달아 죽은 여자가 하나 있다. 대롱대롱 매달리서 사장님을 째리보네예. 이라믄 장사에 방해가 된다 아입니까. 그지예? 부적 하나 사서 붙이이소.”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딸랑딸랑. 문이 닫히면서 종이 울렸다.

놀란 정훈은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 여보! 여보!!”

바닥을 기어가며 아내를 불렀다.

***

“수일아 밥 묵자.”

방문이 벌컥 열리고 조모가 들어왔다. 깜짝 놀란 수일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얼이 빠져 있었다. 조모는 거침없이 수일의 이불을 들쳤다.

“밥 묵자, 일나라.”

“아, 예… 예. 일어, 나요.”

수일이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조모는 방을 나가고 없었다. 잠이 덜 깨 비틀거리면서 수일은 식탁으로 향했다. 두산인 출근했는지 보이질 않았다.

식탁 위엔 고봉밥 두 그릇과 김치찌개, 김 그리고 계란프라이가 차려져 있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국이 된장찌개하고 김치찌개뿌이 읍따. 솔찌키 이거 두 개만 먹어도 평생 살지, 안 글나?”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골이 깨질 듯 아팠다. 수일은 눈만 겨우 끔뻑거리며 조모와 마주 보고 앉았다.

“내 원래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억수로 좋아했다. 근데, 참치 야를 한 번 넣고 나니까 천국의 맛인 기라. 돼지한테는 미안한데, 참치 이거 먹은 뒤로 돼지를 버맀다 아이가. 진짜 사람들 머리 좋제? 우째 이런 거를 다 만들었을꼬?”

조모도 목청이 참 컸다. 참치가 이렇게 흥분할 일인가 싶었지만, 멜론 맛 아이스크림에 흥분하던 두산이 겹쳐 보여 수일은 웃었다. 조모는 김치찌개부터 맛보았다. 자기가 한 음식이지만 끝내준다며 엄지를 치켰다.

“니도 퍼뜩 무라.”

“네.”

수일은 먼저 물 한 잔을 마시고, 밥을 한 숟갈 떴다. 조모가 눈을 반짝거리며 수일을 쳐다보았다. 계란프라이부터 먹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이 김치찌개를 먼저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숙모님.”

“맞제? 억수로 맛있제?”

“네. 억수로 맛있어요.”

두산의 어머니보단 확실히 맛이 덜했지만, 그래도 만들어 준 정성이 고마워 수일은 연신 ‘맛있어요’ 했다. 그럴 때마다 조모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바로 앞에 있는 계란프라이를 수일의 밥 위에 올려 주고, 김치찌개 안에 든 참치 덩어리도 찾아다가 건네주었다. 김에도 싸 먹어 보라며 재촉했다. 수일은 쉴 틈도 없이 밥을 먹었다. 반 공기를 넘게 먹었을 즈음 조모도 배가 고팠는지 자기 밥 먹는 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수일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저기, 숙모님. 아침에요….”

조모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침? 어느 아침?”

“그게, 여섯 시 조금 넘어서….”

“내사 마 오랜만에 밤새 술을 마셔서 콱 죽어삐따 아이가. 눈떠 보이 2시가 넘었드라.”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조모는 수일보다 더 쌩쌩했다.

“아, 그러세요?”

“와? 너거 둘이 먼 짓 했나?”

조모는 은밀한 미소를 띠며 장난스레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잠만 잤어요.”

“에이, 아인 거 같은데? 니는 몰라도 두사이 글마가 고마 잘 아가 아이지. 피 끓는 청춘 아이가 청춘.”

수일은 괜히 귀까지 벌게져 손사래를 쳤다. 조모는 재밌다고 깔깔 웃었다.

조모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속으로 안심했다. 만약 수일이 환청을 듣고 그 난리를 피운 걸 알면 조모도 지금처럼 마주 앉아 밥 먹을 생각은 못 했을 터였다. 그 생각이 들자 잘만 넘어가던 밥이 목구멍에 콱 막혔다. 수일은 꾸역꾸역 남은 밥을 삼켰다.

조모는 수일과 함께 밥을 먹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내일은 낙지볶음 해주까?”

“전,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이유 모를 죄책감에 겨우 말을 뱉었다.

“그라믄 밥묵고 같이 자갈치 시장 가서 싱싱한 놈으로 한 마리 사자.”

“네.”

조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일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웃었다.

“참, 맞다. 수일이 니 정은아라꼬 알제?”

“네? 네.”

조모의 입에서 별안간 은아 씨의 이름이 나왔다.

“자갈치 시장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네. 내 그제 은아 가를 만나고 왔다. 원래는 안 만날라꼬 했는데 혜서이가 으찌나 부탁을 해쌌던지, 뭐 사람 만나는 기 어렵나 싶어서 만났지. 내도 예전에 오성관에서 봤을 때 예쁘장했던 기억도 있고. 근데, 영 몬 쓰겄드라. 들어보이 사정은 참 딱한데 그렇다고 아무나 쓸 수는 없다 아이가.”

거기가 뭐 하는 덴 줄 뻔히 알면서도 은아 씨가 조모를 만났다.

커피숍에서 눈도 못 마주치고 돈만 받아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벼랑 끝에 내몰린 은아 씨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혜선에게 연락했겠지 싶어 수일은 속상했다. 한편으론 조모가 거절해 줘서 고마웠다. 은아 씨가 오죽하면 그랬겠냐만, 그래도 생활력이 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을 것 같았다.

수일은 한숨을 쉬었다. 삼락 형님도 은아 씨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저는 어쩌다가 미쳐 가고 있는 걸까. 하늘이 보기에 셋 다 영 못마땅한가 보았다. 그도 아니면 셋 다 전생에 죽을죄를 지었거나.

조모는 수일의 한숨을 모른 척하며 마저 밥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조모가 극구 말렸다. 두산처럼 힘으로 밀어내는 바람에 수일은 하는 수 없이 먼저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숙취와 수면제의 여파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두통약을 하나 챙겨 먹고 조모가 준비하길 기다렸다.

조모는 오랜만의 데이트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조모 나이대의 여자와는 늘 손님으로 만나서 그런지 수일은 이 상황이 조금은 어색했다. 자기를 제비로 보는 건 괜찮았지만, 남들이 조모를 이상한 눈으로 볼까 봐 걱정되었다.

조모의 차를 타고 자갈치 시장으로 갔다. 낮의 열기로 거리도 시장통도 숨 막힐 듯 더웠다. 어디로 갈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수일의 팔짱을 끼고 조모는 성큼성큼 걸었다. 비린내와 짠 내가 동시에 코를 찔렀다.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수일은 최대한 입으로만 숨을 쉬었다.

“하이고, 아들이 엄마하고 영판이네. 억수로 잘생깄다.”

“그지예? 솔직히 내도 소싯적엔 예쁘단 소리 마이 들었는데, 우리 아들에 비하면 명함도 몬 내민다.”

시장 상인들은 조모와 수일을 모자지간으로 보았고 조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일을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수일을 낳느라 고생을 했다는 둥, 자라면서 속 한 번 안 썩인 착한 아들이라는 둥 거짓말을 덧붙였다.

조모 나이대의 여자와 다닐 때 받던 삐딱한 시선이 없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괜히 조모에게 죄송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던 수일도 나중엔 내심 즐길 정도였다.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함께 다니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 가슴이 뭉클했다.

“숙모님 젊으실 적 사진 보고 싶어요.”

“그래? 뭐 니 소원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집에 가서 보여 주께.”

조모는 수일이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한 게 기뻤나 보았다.

“내 자랑은 아인데, 내 진짜로 예뻤다. 뭐, 주옥이보다야 몬했지만, 내도 미스코리아 나가란 소리 만날천날 들었다 아이가.”

“지금도 고우세요.”

“아이고, 우리 아들.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조모는 수일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고 뺨에 뽀뽀도 해 주었다. 아들이란 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은 거구나. 죄책감이고 뭐고 수일은 이 순간이 벅찼다.

낙지 한 마리만 산다던 조모는 구이를 할 거라며 고등어 두 마리를 사고, 비싼 전복도 샀다. 그걸 사고도 부족한지 수일의 팔짱을 끼고 시장 안을 휘젓고 다녔다. 새벽에 막 들여왔다는 대하도 3kg이나 사 버리고 이따가 야식으로 먹자며 회도 한 마리 떴다. 수일은 이걸 누가 다 먹으려나 싶은데, 조모는 그런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해산물을 아이스박스째로 냉장고에 넣고, 각자 일 나갈 채비를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수일은 차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불안한 얼굴로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조모가 달려 나와 전화를 받았다.

“아나, 두사이다.”

화장을 하다 말고 나온 조모는 수일에게 수화기를 안겨 주고 바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 내다.

“어디야?”

- 밖.

“누가 그걸 묻니? 언제 와?”

- 내 오늘 마이 늦을 꺼 같으니까 먼저 자라.

“얼마나? 우리 자갈치 시장 가서 너랑 같이 먹으려구 회도 떴는데.”

수일은 늦을 거란 두산의 말에 시무룩해졌다.

수일의 앞에선 미쳐도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으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일 때문이 아니라 저를 보기 싫어서 안 들어오는 거면 어쩌나, 속으로 별생각이 다 들었다.

- 알았다. 내 최대한 빨리 드가께. 핸수 행님 보냈으니까 행님 차 타고 출근했다가 집에 오고. 알았제?

“응. 빨리 와요.”

수일은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두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하고 두산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말 바쁜가 보았다. 괜히 아쉬워서 수일은 한참을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야구장을 다녀온 뒤로 현수는 유독 수일에게 살갑게 굴었다. 수일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행님, 토요일에 쌍방울하고 경기하는데 가실랍니까? 내 표 구해났다.”

“어, 그게, 그러니까… 그것말구 더 큰 경기 하면 그때 보러 가요.”

눈치껏 거절하긴 했지만, 두산처럼 현수에게도 씨알도 안 먹힐까 봐 수일은 조마조마했다.

“쯧. 맞다. 순위도 다 정해진 마당에 굳이 갈 필요는 없지. 그라믄 다음에 가입시다.”

다행히 현수는 말이 좀 통했다.

“오성관 거 아직도 합니까? 차라리 호프집으로 개조하지 만다꼬 나이트를 할꼬. 호텔도 손님 다 떨어짔다 카드만은. 참, 강 이사님 거서 짤린 거 들었지예?”

“네? 강 이사님이 오성관 주인 아니에요?”

“뭐, 주인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에 징계 먹어서 손 다 뗐습니다. 박 사장 그 양반만 덤탱이 썼다.”

박 사장은 바지사장이고 실제 주인은 강재욱이라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오성관은 여전했다. 보기 싫은 구성택과 채시라는 밴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희는 텅 빈 홀에 멀찍이 혼자 앉아 있었다.

현수는 웬일로 돌아가지 않고 수일을 쫓아다녔다. 볼일 보고 오라고 해도 괜찮다며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수일이 리허설 하는 동안 그를 반가워하지 않는 영희 테이블로 가서 수다를 떨었다.

현수는 수일에게도 그쪽으로 오라 손짓했다. 하는 수 없이 그 테이블에 가 앉았다. 삐삐가 울리기 전까지 현수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수일이 행님, 어데 가지마이소. 내 퍼뜩 삐삐 쫌 확인하고 오께예.”

현수가 가 버리자 정적이 흘렀다.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 영희가 먼저 말을 걸었다.

“행님은 곧 계약 끝나지예?”

“네. 9월 16일이요.”

“딴 데 갈 데는 있습니까?”

딱히 걱정해서 묻는 건 아니었다. 다들 그렇듯 영희도 별 뜻 없이 하는 말이었다.

“아니요. 천천히 생각해 보려구요.”

오성관을 끝으로 밤무대 생활을 청산한다는 말을 하려다 그냥 이렇게만 답했다. 왠지 배부른 소리 같기도 했고, 친하지 않은 영희에게 말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일인 것 같았다.

“영희 씨는 왜 여기 있어요? 충분히 다른 데 가고도 남을 텐데.”

수일의 질문에 영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소속이 따로 있어서 거서 있으라 카믄 있어야 됩니다.”

“소속사 사장님한테 다른 데로 옮겨 달라고 해요. 여기는 영희 씨가 일하기엔 너무 별로예요.”

영희가 가만 수일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고 얘기하기는 또 처음이었지만 나름 함께 일했다고 어색하진 않았다. 영희가 먼저 수일의 시선을 피했다. 곱게 화장한 얼굴을 투박한 손으로 긁적였다. 손등에 상처가 많았다.

“내도 가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있으라 케서 어쩔 수가 없어예.”

이렇게 답하는 얼굴이 고단해 보였다.

오늘도 현수 말고는 손님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이래서야 월급이나 받을 수 있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일은 화장도 지우지 않고 옷만 갈아입은 채 현수의 차에 올랐다. 오늘따라 오성관에 있고 싶지 않았다.

현수는 조모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 살핀 다음 수일을 들였다. 수일이 화장을 지우고 씻는 동안에도 현수는 집에 남았다. 다 씻고 나가자 현수가 막 들어서는 조모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행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모님도 편안한 밤 되십시오.”

“오야. 드가 바라.”

“현수 씨 수고 많으셨어요. 운전 조심해요.”

수일의 인사에 현수는 이번에도 손을 크게 흔들었다. 수일은 아직 현수를 대하기 조심스러워 소심하게 손만 들었다 내렸다.

조모는 화장도 지우지 않고 맥주부터 꺼냈다. 수일에게도 캔을 하나 따서 건넸다.

“캬아, 시원하다. 내 원래 약속이 하나 더 있었는데, 니하고 회 먹으면서 씨부릴라꼬 고마 들어와삤다 아이가.”

그녀는 자리에 선 채로 맥주를 마시며 수일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수일도 맥주를 홀짝였다. 조모가 편하고 좋은데, 이상하게 외로웠다. 두산이 보고 싶었다.

맥주를 다 마신 조모는 낮에 한 이야기가 생각난 듯 급히 앨범을 찾아들고 거실로 가 앉았다.

“일루 와 바라. 내 엔간해선 사진 안 보여주는데 니한테만 특별히 보여주께.”

깜빡하고 있었던 게 미안할 정도로 조모는 사진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바닥에 앉아 앨범을 펼치는 조모 옆에 수일도 앉았다.

집이 잘살았는지 흑백 사진 속의 조모는 인형처럼 예쁜 한복을 입고 있었다. 부모로 보이는 남녀와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부유한 티가 났다. 자라면서 한복은 원피스로 교복으로 바뀌었다. 조모가 커 감에 따라 부모님의 얼굴도 조금씩 늙어 갔다. 두 분 모두 인상이 참 좋았다.

조모의 20대 사진 사이에 돌잔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기 두협이 돌잔치. 내가 영감님한테 반해서 주옥이한테 겨우 쫄라서 얻었다 아이가.”

조모가 가리킨 사진엔 두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린아이를 가운데 두고 활짝 웃고 있었다. 두산은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두산이 나이 들면 이렇게 변하겠구나. 생각보다 멋져서 수일은 기분이 좋았다.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두사이하고 마이 닮았제?”

“네. 쌍둥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쟈? 요새 두사이 보면 우리 영감님 이십 대는 요래 생깄겠구나 싶어서 감회가 새롭다.”

“정말 멋지세요.”

“실물은 더 멋졌다. 근처만 가도 내뿜는 기가 으찌나 센지 내 앞에서는 숨도 몬 쉬따 아이가.”

조모가 가슴께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아직도 이래 떨린다. 주책이제?”

이렇게 말하는 조모가 홍조를 띠었다.

수일은 꼼꼼히 사진 속 할아버지를 살폈다. 정말 신기했다. 두산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그러다 눈물이 핑 돌았다. 두산과 함께 늙어 가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모가 앨범을 넘겼다. 이번엔 가족사진이었다. 여기에도 조모는 없었다.

“이거는 우리 두협이 성년 된 기념으로 찍은 사진. 내가 이 사진 갖고 있는 거는 아무도 모린다. 기념사진 찍은 줄은 알았는데 참 서운 터라. 내보다야 우리 행님이 더 서운하겠지만, 그래도 십 년을 넘게 같이 살았는데 조모라고 부르면서 가족사진 찍을 때는 안 부르데.”

수일은 조모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 남자가 여기 있었다. 남자를 본 순간 온 혈관의 피가 모두 얼어붙었다. 차게 식다 못해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이어 제멋대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한과 공포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그 남자였다. 그 남자는 두산의 할아버지와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4형제가 든든한 가림막처럼 남자의 뒤를 에워쌌다.

조모가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두사이 아버지다. 여가 두사이. 열둘인가 열셋인가 그랬는데, 벌쌔로 지 행님들만큼 크다. 징그럽제?”

이럴 리 없었다. 이 남자가 여기 있을 리 없었다. 수일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내가 주옥이 신랑, 두사이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억수로 싫어한다. 뭐 내한테도 몬했고 성격도 내하고 안 맞고. 그래도 즈그 가족한테는 끔찍하게 잘했다. 특히 주옥이한테 잘했지. 지 마누라를 금이야 옥이야 을매나 예뻐했는지 모른다. 그라니까 주옥이가 저라고 있지.”

조모가 한숨을 쉬었다.

수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가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어 기어서 현관으로 향했다.

“수일아. 수일아! 니 지금 머하노?”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말 이럴 수는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입에서는 영문 모를 소리가 튀어나왔다. 울음도 비명도 말소리도 아닌 짐승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엄마야, 니 와 이라노?”

수일은 저를 잡는 조모의 손을 뿌리치고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다 몇 번을 굴렀다. 이대로 굴러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가 흘러 눈 앞을 가렸지만, 수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를 벗어나야 했다. 여기만 아니면 좋았다. 수일은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어어어억, 흐윽… 안 돼… 어흑. 안 돼.”

수일은 울부짖었다. 모든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남자는 두산의 아버지였다. 하필, 연화를 죽인 그 남자가 두산의 아버지였다.

추웠다. 너무 추워서 수일은 오들오들 떨었다.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수일은 소매로 피를 닦았다. 하나뿐인 봄 잠바 소매가 피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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