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81)

두산이 많이 늦을 거란 연락을 받고 수일은 혼자 잠이 들었다. 얼핏 잠에서 깼을 땐 두산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수일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산에게서 풀 냄새가 났다.

“언제 왔어?”

“방금.”

수일은 여기까지만 말하고 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새 씻고 나왔는지 두산은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넌 왜 물을 안 닦니?”

“하자.”

하자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수일은 잠이 가득한 눈을 비볐다. 두산은 그대로 온몸을 부딪쳐 왔다. 잡아먹을 듯 키스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겼다. 수일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두산의 입술이 엉덩이를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출근해서 피곤했던지, 도무지 잠이 깨질 않아서 수일은 깜빡깜빡 졸았다. 입에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음이 흘렀다. 고개가 침대에 처박히면 가끔 눈을 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 두산은 집요하게 구멍을 혀로 핥고 넓혔다. 손가락이 들어오는 이물감에 수일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흐으… 으응.”

또 졸았다.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수일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을 때 두산은 이미 삽입한 상태였다. 그는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수일의 얼굴에 뽀뽀를 해 댔다.

“수일아, 쫌 일나바라.”

“…응….”

두산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안으로 침범했고, 그럴 때마다 수일은 인상을 썼다. 끈적이는 손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두산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릴 무렵, 아래에 심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두산이 허리를 쳐올렸다.

“악!”

수일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아. 흐읏… 으으… 윽.”

처음엔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몰랐다. 커다란 몸이 저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심한 이물감과 고통을 동반한 쾌락에 신음했다. 상황 파악이 되기 전까지 수일은 본능적으로 두산을 밀어냈지만, 저를 깔고 누운 두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산, 아, 흣… 왜, 이래?”

“수일아, 내는 니 없으면 몬 산다.”

수일은 두산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두산은 수일의 허벅지를 잡아 활짝 벌리고 하체를 더 밀착시켰다. 빠르고 깊게 들어왔다 나가는 성기의 자극에 수일의 고개가 절로 뒤로 꺾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이 마구 흔들렸다.

두산이 키스했다. 멍해서 제대로 반응도 못 하는 입술을 두꺼운 혀로 가르고 안으로 쳐들어왔다. 입 안 곳곳을 혀로 샅샅이 훑었다. 온 얼굴이 자신의 침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두산은 수일을 물고 빨았다.

천천히 삽입을 반복하던 두산은 상체를 세워 수일을 바짝 잡아당겼다. 그 상태 그대로 등을 구부려 제 몸으로 덮어 버렸다. 수일을 완전히 가둔 두산은 미친 듯이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흐. 아으, 읏! 으윽… 아아.”

“흐읍, 씨발!”

어둠에 익숙해지자 두산의 얼굴이 보였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얼굴은 고통과 쾌락으로 점점 일그러졌다. 수일은 두 손으로 두산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들이닥치는 흥분에 신음하며 두산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고 또 빨았다. 두산의 혀가 마음껏 들어오도록 입을 크게 벌렸다. 급하게 혀를 얽고 섞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질질 흘렀다.

두산은 수일이 좋아하는 곳을 잘 알았다. 오랫동안 애를 태우던 거대한 살덩이가 그곳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수일은 아찔한 쾌락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지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성기와 구멍이 마찰하는 질척이고 음란한 소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두산도 아주 끙끙 앓았다. 수일의 입 안에 제 신음을 뱉어 내며 아찔할 정도로 파고들었다.

두산은 수일을 자신으로 채우려고 안달이 났다. 수일의 구멍에 자지를 쑤시는 동시에 입 안이나 귓구멍에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수일은 아래로 성기를 받고, 벌어진 입으론 혀를 받았다. 타액과 땀이 섞여 온몸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수일은 두산의 목을 꼭 끌어안고 미친 듯이 흔들리는 제 몸을 맡겼다.

방 안의 공기는 뜨거웠고 맞닿은 살덩이와 숨결은 흥분과 쾌감으로 터질 듯했다.

언제나 그렇듯 수일이 먼저 사정했다. 사정 후 전신이 경련하듯 떨렸고, 구멍도 덩달아 자지를 물어 댔다. 두산은 숨을 고르며 수일을 위해 움직임을 멈춰 주었다.

“하아, 아아, 아….”

커다란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푹신한 입술로 이마에도 눈에도 코끝에도 뽀뽀를 해 주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입술을 맞물고 쪽쪽 빨았다. 수일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두산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수일은 두 다리로 두산의 허리를 감고 팔로 목을 꼭 끌어안았다. 움직임이 격해지자 이로 두산의 어깨를 깨물었다.

“윽!”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살짝 피 맛이 났지만 수일은 상관하지 않았다. 물었던 곳을 또 물며 사정없이 밀어닥치는 두산의 성기를 받았다. 아픔과 쾌락에 온몸이 전율했다. 발가락을 잔뜩 오므리고, 헐떡이다 못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아흐흐흐, 아으, 윽! 두산, 아! 흐으… 흑….”

“하으! 씨발! 수일아, 내, 니밖에 읍따.”

수일의 눈에선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두산이 혀를 내밀어 눈물을 핥아 주었다. 수일은 두 번째 사정을 했고, 두산도 뒤이어 뜨거운 정액을 쏟아 냈다.

“씨발. 하아….”

땀에 젖은 탄탄한 근육이 수일의 손바닥 안에서 하염없이 떨렸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몸을 수일은 두 팔로 꼭 끌어안아 주었다. 두산이 빠져나가자 정액도 함께 구멍을 타고 흘렀다. 수일은 두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땀에 젖은 얼굴에 뽀뽀를 했다. 수일의 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댄 두산은 숨을 고르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수일아, 내는 니 없으면 몬 산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물었지만, 두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수일에게 안기려고 커다란 몸을 구부려 품을 파고들었다. 젖은 몸을 마구 치댔다. 수일은 피식 웃고는 두산을 최대한 품으려 애썼다.

쌔근쌔근, 서로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두 사람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푹 잔 느낌에 눈을 떴을 땐, 밖이 훤했다. 두산은 여전히 수일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수일은 눈을 몇 번 끔뻑이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9시였다.

“두산아! 일어나! 지각이야, 지각!”

“으으.”

두산은 잠깐 끙끙댈 뿐 세상모르고 잠을 잤다. 수일이 두산을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산아, 너 자는 거 맞아? 왜 이렇게 돌덩이 같니?”

“…….”

“어우, 좀 일어나 봐.”

수일은 두산을 깨워 보려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지만, 침대만 삐걱댈 뿐 두산에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아침이라 기운이 없는데, 남은 에너지를 모두 쏟아 버리는 바람에 금세 지쳐 버렸다. 수일은 깨우기를 포기하고 가만 두산을 들여다보았다.

“어디 아픈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도대체 새벽 몇 시에 들어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다가 일어나 섹스를 했다는 건 알겠는데, 어쩌다가 하게 된 건지는 가물가물했다. 내가 하자고 했나, 아니면 두산이 그냥 한 건가. 수일은 눈썹 끝을 긁적이며 미간을 좁혔다.

한 5분쯤 있다가 두산이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두산도 푹 잤는지 기분 좋은 얼굴로 하품을 했다. 수일을 향해 씨익 웃고 쪽 뽀뽀했다.

“잘 잤어?”

“어. 푹 잤다.”

“너 지각이야.”

“개안타. 새벽까지 일했는데.”

“회사 일?”

“머, 비슷한 거.”

두산은 모호하게 답하고는 수일을 다시 끌어안았다. 뜬금없이 가슴에다 얼굴을 비비더니, 쪽쪽 젖꼭지를 빨기 시작했다.

“읏!”

수일의 몸이 바로 반응했다. 기분이 좋긴 했지만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었다. 수일은 바로 두산의 등짝을 후려쳤다.

“얼른 출근 준비나 해.”

“아야, 먼 손이 이리 맵노?”

두산은 등 뒤로 손을 돌려 맞은 부위를 긁적였다. 커다란 몸이 그제야 수일에게서 떨어졌다. 한결 몸이 가벼웠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 든다 싶었더니 그게 다 두산 때문인가 보았다. 수일은 두산을 슬쩍 흘겨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섹스하고 바로 자는 바람에 남은 정액이 구멍을 타고 흘렀다.

“티슈.”

두산은 수일의 엉덩이를 빼꼼 들여다보고는 냉큼 티슈를 뽑아와 자연스레 밑으로 손을 넣었다. 수일은 두산이 닦아 내기 편하게 두산의 어깨에 손을 짚어 엉덩이를 슬쩍 들어 주었다. 대충 정액을 닦아 낸 두산은 수일을 그대로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둘은 마주 보고 이를 닦았다. 치약 거품을 문 채 쪽쪽 뽀뽀도 하고 키스도 했다. 그러다 치약을 삼켜 콜록댔다.

“오늘은 밥이 없어서 안 되겠다. 토스트 묵자.”

“할 수 없지 뭐.”

늦은 건 늦은 거고, 밥은 밥이기에 두산은 토스트를 만들었다. 수일은 우유와 오렌지 주스를 꺼내 한 잔씩 마시고 식탁에 엎드려 두산의 등을 바라보았다.

식탁 한편에는 어제 사다 둔 앨범과 편지지가 놓여 있었다. 삼락 형님을 위해 탄원서를 써야 하는데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형님이 알면 얼마나 서운해할까, 그 생각이 들자 또 죄책감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수일은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두산아.”

“어?”

“우리 강아지는 어디서 구해?”

“엄마 친구 중에 개 키우는 아줌마가 하나 있다. 그 집 개가 아를 뱄는데, 오늘내일 한다 카드라.”

“그거 우리 준대?”

“어. 내가 벌쌔로 얘기해났지.”

두산은 접시 두 개에 토스트를 여섯 장씩 나눠 담아 하나는 수일의 앞에 내려놓고 하나는 자기가 가져갔다.

“무슨 색인데?”

“모르지. 본 적 없는데?”

“작아?”

“어. 아니, 안 물어밨다.”

당당하게 답하고, 덥석 토스트를 물었다. 수일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지 않았다.

배가 고팠는지 두산은 말없이 토스트를 부지런히 먹었다. 그러다 수일이 먹는 걸 가만 바라보았다. 자꾸 먹다 보니 빵도 생각보다 잘 먹혔다. 수일은 입 안 가득 빵을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빵을 씹으며 두산을 향해 웃어 보였다.

두산도 수일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왠지 쓸쓸해 보였다. 수일은 빵을 씹으며 두산이 왜 저러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새벽에 맡았던 풀 냄새가 생각났다. 급하게 빵을 씹어 삼키고 우유를 마신 수일은 두산에게 물었다.

“새벽에 어디 갔다 온 거야?”

“와?”

“아니, 풀 냄새 같은 게 났던 것 같아서.”

두산이 피식 웃었다.

“개코네.”

“산에 갔니?”

“어.”

“그 시간에 뭐 하러?”

“담력 테스트.”

“뭐래. 장난하지 말구.”

수일의 질문을 농담으로 얼버무린 두산은 팔을 뻗어 머리를 토닥였다.

“밸일 아이다. 고마 한 바퀴 돌다 왔다.”

“회사 사람들 하구?”

“어. 회사 아재들하고.”

수일은 두산의 말이 진짠지 가짠지 확신이 서질 않았지만, 일단 믿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다른 일로 심경이 복잡해서 두산까지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파란 넥타이를 매 주고 검은색 여름 정장을 입혀 주었다. 두산은 수일을 꼭 끌어안고 장난하듯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왜 그래?”

수일은 웃었다. 두산도 수일에게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키스해 주었다.

“수일아.”

“응?”

“내는 니 없으면 몬 산다. 니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니? 무섭게.”

“무섭기는 머가 무섭노? 니는?”

이렇게 묻는 두산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수일은 그런 두산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입을 맞췄다.

“나도 두산이 너 없으면 못 살아.”

“진짜로?”

“응. 진짜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라. 알았제?”

“응.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꼭 붙어 있을게.”

수일은 두 팔로 두산의 허리를 안았다. 두산이 수일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코끝에 입을 맞추고 예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분명 두산은 웃고 있는데 왜 마음이 불안한지 몰랐다. 다 자기 탓인 것 같아서 수일은 좋은 생각만 하려고 애를 썼다.

“참, 가수들 새로 왔나?”

“아니. 오늘 올 거야. 어제도 손님 한 명도 없었어.”

“그래? 호텔은?”

“거기도 없대. 그래두 오늘은 단체 손님 두 팀 받았나 봐.”

“잘됐네.”

수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두산과 오성관 얘기를 나눴다. 정말 큰일이었다. 관두면 그만이긴 했지만,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야 월급이나 제대로 받으려나 걱정스러웠다. 새로 올 가수들이 적어도 삼락 형님이나 은아 씨 수준 정도는 되었으면 바랐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인상 피고.”

두산은 수일의 주름진 이마를 손가락으로 펴 주며 웃었다.

“점심때 밀레니엄 앞으로 나올래? 둘이서 같이 밥 묵자.”

“응.”

“나오기 전에 내한테 미리 전화하고.”

“알았어.”

“뽀뽀.”

두산이 입술을 내밀었고, 수일도 같이 입술을 내밀어 뽀뽀했다.

두산을 보내고 수일은 앨범 정리부터 했다. 거실 탁자에 앨범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사진들을 옮기다가 최 군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그대로 덮었다. 아직은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도 싫어서 두 개를 겹쳐 올리고 그 위로 전화번호부를 펼쳐 가렸다. 순식간에 커다란 물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러니 한결 나았다.

수일은 한숨을 쉬며 일어나 편지를 쓰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식탁에 앉아 변호사가 써 준 탄원서 예문을 참고서처럼 펼쳐 두고 하나하나 받아 적었다. 그러다 적어도 자신만은 삼락 형님이 도움 준 일을 적어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사의 눈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수일 같은 사람에게 삼락 형님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수일은 다시 편지지를 꺼내 ‘존경하는 판사님께’로 시작하는 탄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을 주고 썼던지 볼펜을 쥔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편지지를 채워 나갈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흠칫 놀란 수일은 저린 팔을 탈탈 털며 거실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요새 세상에 전화가 이런 식으로 들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지지직거렸다. 상대방의 말소리는커녕 잡음만 들려서 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보세요?”

여전히 잡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상대방이 말하기 시작했다.

- 형! 나 상엽인데…. 어흑, 형. 거기서 나와. 안 그럼 형, 죽어. 거기 있다간 형 죽어. 흐윽, 미안해, 형, 정말 미안해…. 거기서 나와야 돼. 형.

“여보세요? 상엽아!”

전화가 끊겼다. 수일은 곧장 재발신을 눌렀지만 없는 번호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꿈을 꾼 건가?

너무 놀라 딸꾹질이 났다. 수일은 주먹으로 명치를 치다가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가만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상엽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엔 그의 부모님은 출근해서 집에 없었고, 잠귀가 어두운 상엽은 웬만해선 깨는 일이 없었다. 역시나 전화를 받질 않았다.

나를 놀리려고 저러는 건가. 그렇게 헤어져서 앙심을 품은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상엽이라면 저런 못된 장난을 하고도 남을 새끼였다. 그런데 너무 불안했다. 불안한데 화가 났다. 개새끼. 이제 별걸로 다 사람을 가지고 놀았다.

“개새끼야! 그만 좀 해.”

듣는 사람 없는 텅 빈 거실에 서서 수일은 전화기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발을 동동 구르며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나 좀 내버려 둬, 제발!”

제발. 나도 좀 살자.

수일은 탄식을 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으로 강아지를 생각했다. 색깔도 크기도 몰랐지만 아무 강아지나 떠올려 보았다. 예쁘고 작은 강아지를 키우면서 두산과 함께 평범하게 사는 미래를 그려 보았다. 수일은 애써 불안을 밀어냈다.

수일은 몇 시간을 거실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어느새 강아지 따위는 잊고 상엽의 전화를 곱씹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상엽은 겁에 질려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겁에 질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도 상엽인 지린내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땐 동준에게 맞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상엽이 수일에게 도망가라고 경고한 건 분명 두 사람이 함께 연루된 일 때문이었다.

모든 일의 원흉인 교통사고.

잊고 지내려 아무리 발악해도 결국 도돌이표였다. 그때 상엽이 말해 준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었구나. 수일은 직감했다. 상엽은 절대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 거였으면 벌써 얘기하고도 남았다.

10년을 입도 뻥긋 안 했고, 지난번 그 난리를 쳤을 때조차 거짓말을 했다. 그 정도로 상엽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기꾼이란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길래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더는 기댈 곳이 없었다. 무슨 기억이든지 끄집어내려면 단서를 찾아야 했다. 수일은 벌떡 일어나 보일러실에 넣어 둔 라면 상자를 거실로 가져왔다.

테이프를 뜯어내고 상자를 뒤집었다. 수일의 가난이 묻은 물건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겨울에 입을 내복 한 벌과 낡은 스웨터, 코르덴 바지 그리고 역시나 낡아서 해진 털 잠바가 박스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나머진 잡동사니였다.

10년 전에 쓰다 만 일기장과 가계부, 연화에게 쓴 연애편지, 영화표와 버스표 몇 장이 다였다. 마그네틱이 뜯긴 다 쓴 통장도 있었고, 돈을 빌릴 때 썼던 차용 증서 여러 장과 다 갚고 나서 받은 상환 증서도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수일은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는 1983년 3월 12일을 마지막으로 끊겨 있었다. 앞으로 페이지를 넘기자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자신이 찢은 건지 어쨌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아마 술 처먹고 괴로워 일기를 쓰다 찢어 버렸을 확률이 높았다. 수일은 한숨을 쉬었다.

일기는 불규칙적으로 쓰여 있었다. 어떤 달은 두 번밖에 쓰지를 못했고, 어떤 달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그러다 몇 달을 건너뛰었다. 수일은 혹시 몰라 일기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또 상엽일까 봐 고민하다 받았다.

- 잤나?

“어? 어. 깜빡.”

- 데리러 가까?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그제야 아침에 두산과 점심 약속을 한 게 생각났다.

“아냐, 내가 바로 나갈게.”

-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온나.

“응. 밀레니엄 앞으로 가면 되지?”

- 어. 천천히 온나. 천천히.

“말 안 해도 천천히 갈 거야.”

수일은 일부러 발랄한 톤으로 말했다.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옷장을 뒤져 미색 셔츠에 남색 정장 바지를 꺼내 입었다. 혹시나 두산의 회사 사람을 마주치더라도 단정해 보이고 싶었다.

엘리베이터가 늦게 와서 수일은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숨이 턱까지 찼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까. 분명 앞을 보고 걷고 있는데 자꾸 사람들하고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수일은 연신 ‘죄송합니다’ 사과를 했다. 한 번은 누군가의 어깨에 명치를 부딪쳐 숨이 턱 막혔다. 허리를 숙여 겨우 숨을 고르는데 남자가 쌍욕을 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뭐에 그리 화가 났는지 수일을 밀어 버렸다. 하마터면 자빠질 뻔한 수일은 겨우 균형을 잡았다. 데리러 오라고 할 걸 그랬나 보았다. 수일은 아픈 명치를 쓸어내리며 허리를 폈다. 날은 잔뜩 흐렸고, 공기는 축축하고 후텁지근했다. 어지러워 수일은 몇 번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 두산이 보였다. 두산은 파란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껄렁한 자세로 서 있었다. 수일이 걸어오는 방향을 보다가 수일이 가까워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씨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큼성큼 걸어와 수일을 멈춰 세웠다.

“미안, 늦었지.”

수일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두산은 대꾸도 없이 수일의 팔목을 거칠게 잡았다. 날카로운 눈매가 수일을 아래위로 훑었다.

“이 머꼬?”

“응?”

“신발. 씨발, 그라고 옷은 와 입다 말았노?”

두산의 말에 발을 내려다보니 수일은 양말만 신은 채였다. 어쩐지 발바닥이 아프다 했다. 게다가 셔츠 단추는 두 개만 겨우 잠겨 있었는데, 그마저도 어긋나 있었다.

“아… 내가 너무, 급하게. 그러니까… 이게.”

정말 몰랐다. 분명 제대로 챙겨 입고 나왔는데, 실상은 불난 집에서 뛰쳐나온 사람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두산은 수일을 길 한쪽에 세우고 단추부터 똑바로 잠갔다. 다 잠그고 나서 밖으로 삐져나온 셔츠를 바지 안에 넣어 주었다. 두산이 그러는 동안 수일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머리를 정돈했다.

“업히라.”

“응.”

두산은 수일을 업고 걷기 시작했다.

“하이고, 이 미친개이 이거.”

두산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수일은 두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괜히 미안해서 말을 돌렸다.

“우리 뭐 먹으러 가?”

“갈비탕.”

한낮의 밀레니엄 앞은 한산했지만, 번화가라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식당마다 점심을 먹으러 온 직장인들로 붐볐다. 편한 복장을 한 사람들은 근처 상인들로 보였다. 갈비탕집 안으로 들어가자 삼삼오오 짝을 이뤄 밥을 먹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식당 주인은 두산을 반갑게 맞으며 방으로 안내했다.

열 명은 족히 앉을 방에 달랑 둘만 들어가 앉았다. 두산은 수일을 내리고 발바닥을 털어 주었다. 자잘한 돌멩이와 흙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유리라도 밟았으면 우짤 뻔했노?”

구겨진 인상은 펴질 줄을 몰랐다. 수일은 두산이 제게 했듯 검지로 두산의 주름을 펴 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 안 다쳤잖아.”

“웃지 마라. 내 썽났다.”

퉁명스레 말하며 수일을 방으로 밀어 넣었다.

등 뒤로 방문을 닫은 두산은 수일에게 키스부터 했다. 무작정 입술을 밀어붙이는 두산의 힘에 수일은 뒤로 넘어졌다. 큰 손이 뒤통수를 받쳐 머리를 박지는 않았지만, 도망가지 못하게 꼭 붙들려 입술을 물렸다. 쪽쪽, 소리 나게 빨고 두산이 천천히 떨어졌다. 수일은 가만 두산을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두산은 수일의 손바닥에 제 볼을 갖다 댔다. 손을 겹쳐 잡은 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

“와 그라긴. 배고파서 고기 맛 좀 봤다.”

싱거운 소리를 하며 씨익 웃었다.

두산이 수일을 일으켜 앉히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종업원은 음식 외엔 관심도 없어 보였지만, 수일은 혼자 민망해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고 머리를 매만졌다.

미리 주문을 해 두었는지 종업원은 뚝배기에 담긴 갈비탕을 하나씩 앞에 놓아주고 육회비빔밥은 가운데 놓았다. 밖에서 아줌마, 사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종업원은 던지듯 밑반찬을 내려놓고 서둘러 나갔다.

식당 안은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손님들로 정신이 없었다. 한지를 바른 문은 칸막이 역할만 할 뿐 소음을 막지는 못했다.

두산은 먼저 육회를 비벼 수일에게 먹여 주었다. 입맛이 하나도 없었는데, 고소한 참기름과 부드러운 육질의 고기를 삼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침이 고였다. 두 번 더 받아먹고 수일은 갈비탕을 먹었다. 국물도 시원했고 갈비가 크고 실했다. 수일은 고기부터 뜯었다.

두산도 부지런히 제 몫의 고기를 뜯으며 수일이 잘 먹나 살폈다. 수일이 잠깐 쉬면 얼른 육회비빔밥을 입에 넣어 주었다.

“수일아, 우리 미국 가서 살래?”

반 정도 먹었을까. 뜬금없는 물음에 당연히 장난이라 여긴 수일은 갈비를 뜯으며 고개를 저었다.

“밥은 어쩌구? 나는 밥이 좋은데.”

“에이, 밥이야 다 팔지. 하와이 사람들도 쌀 묵는다. 고추장이야 된장 같은 거는 싹 다 우편으로 받아서 묵을 수 있고. 내가 요리 배아서 먹고 싶은 거 다 해주께.”

두산은 의외로 진지하게 굴었다.

“영어는? 말도 안 통할 텐데 어떻게 살아?”

“살다 보면 금방 늘지.”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갑자기 미국이라니, 무슨 일이 있나 보았다. 수일은 입맛이 달아나 숟가락을 놓았다. 가슴이 답답해서 꼭 체한 기분이었다.

“너 사고 쳤니?”

“에헤이, 몬 하는 소리가 읍따.”

“근데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해? 불안하게.”

조금은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두산을 다그쳤다. 두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불안할 것도 많다. 우리 할배가 하와이나 샌프란시스코에 부동산 살 끼라 카드라. 이왕 집 사는 거 비워 두면 머 하겠노? 니하고 내하고 새 출발 하는 김에 미국 가서 살아도 좋다 아이가. 살다가 정 몬 살겠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

두산은 정말로 미국에 가서 살고 싶어 했다. 새벽에 나던 풀 냄새도 의심스러웠는데 미국 얘기까지 꺼내니 수일은 더 불안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두산이 저러는지 궁금했다.

“무슨 일 있었지? 솔직하게 말해.”

수일은 표정을 굳히고 단호하게 물었다.

“아무 일 없었다. 니도 미국 집 사진 보면 내하고 똑같은 소리 할 끼다. 일단 밥이나 묵자.”

두산은 거기서 말을 끊고 수일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수일은 못 이기는 척 숟가락을 받아들었지만 더는 먹지 못했다.

수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산은 음식들을 깨끗하게 비우고 수일이 남긴 것까지 모두 해치웠다.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굴었다. 그러면서 미국 집에 딸린 수영장이 얼마나 크고 좋은지, 넓고 푸른 잔디밭과 근처 해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나는 아파트가 좋아. 강아지도 키울 거구.”

“알았다.”

답지 않게 힘이 빠져 보였다. 두산은 다시 수일을 업고 집으로 걸었다. 수일은 커다란 등에 머리를 기댔다. 흔들흔들 일정한 속도로 몸이 흔들렸다. 마음도 흔들렸다.

“그렇게 미국에 가고 싶어?”

“꼭 그런 건 아인데, 기회가 좋으니까.”

“가서 뭐 먹구 살아?”

“할배가 내 굶기겠나? 다 방법이 있으니까 내한테 가서 살라 카지.”

“정말 사고 친 거 아니지?”

“에헤이, 이 양반이 속고만 살았나.”

이렇게 말하며 두산은 당장 수일을 떨어트릴 듯 몸을 흔들며 장난을 쳤다. 수일은 안 떨어지려고 발악하다가 실수로 두산의 울대뼈를 눌렀고, 그 바람에 두산이 캑캑거렸다.

“아이고 나 죽네.”

“엄살은.”

수일은 두산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두산이 웃었다.

굳이 집 안까지 따라 들어온 두산은 거실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양말을 벗고 뒤늦게 따라 들어간 수일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수일을 보는 두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집 안은 난장판이었다. 수일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라면 박스에 든 것만 거실 바닥에 쏟았다고 생각했는데, 온 집 안의 물건을 모두 끄집어내 놓았다. 싱크대며 찬장이 모두 열려 있었다.

“어… 그게, 내가 그런 거 아니구. 아니, 내가 그러긴 했는데….”

두산은 한숨을 푹 쉬었다. 거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물건들을 주웠다. 수일도 얼른 무릎을 꿇고 제 물건들을 도로 라면 박스에 쑤셔 넣었다.

“수일아.”

“내가 찾을 게 좀 있어 가지구. 치우려고 그랬는데, 니가 점심 먹자 그래서.”

“교통사고 때문이가?”

두산은 수일의 일기장을 손에 든 채 물었다.

“응. 실은 기억이 안 나서 너무 힘들어.”

수일은 울고 싶었다. 이러는 자신이 죽을 만큼 싫었다.

“니한테는 그기 그래 중요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보다 더 중하나?”

“…아니.”

“근데 와 이라는데?”

두산은 지쳐 보였다. 그 모습에 수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릎으로 기어 두산에게 다가갔다. 무작정 뽀뽀를 하고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사과하며 볼을 비볐다.

“아까 상엽이한테서 전화 왔었거든. 나더러 도망가라고, 여기 있으면 죽는다고. 그 얘길 들으니까 너무 화가 나서, 기억을 못 하는 게 등신같이 느껴져서, 그래서 그런 거야. 너보다 중요해서 그런 거 아냐. 진짜야.”

수일은 두산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고 키스했다. 두 손으로 두산의 얼굴을 잡고 저를 보게 했다. 볼이며 턱이며 입술이 닿는 대로 뽀뽀를 했다. 눈을 바라보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수일은 두산이 자신에게 질렸을까 봐 겁이 났다. 같이 아파트로 이사 가지 말자고 할까 봐, 강아지를 키우지 말자고 할까 봐 무서웠다.

“두산아, 아냐, 너보다 중요한 거 아냐.”

애원하듯 말했다. 이대로 그가 저를 버리고 갈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두산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수일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고 수일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딴 생각하지 말고, 내 생각만 해라. 겁이 나도 내 생각만 하고, 화가 나도 내 생각만 하고. 사소한 일도 니가 감당 몬 하겠으면 내한테 말해라. 내가 다 해결해 주께.”

“응.”

“대답은 잘한다.”

“진짜야. 진짜루 그럴 거야.”

“그래.”

두산이 커다란 손으로 수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수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깜빡 잠이 든 황 씨는 삐삐 알림음에 정신을 차렸다. 두산이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8282가 끝도 없이 찍혀 있었다.

- 임상엽이 그 개쌍노무 새끼한테서 전화를 받았다는데 먼 소립니까?

두산은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은제?”

- 12시 몬 돼서예.

“그랄리 읍따. 그 새끼 아침 9시에 수술 드가서 좀 전에 나왔다. 양귀비가 환청들은 거 아이가?”

- 아재요. 윤수일이가 미친개이처럼 보이도 말 지어낼 아는 아입니다. 확인 좀 해주이소.

“…오야. 알았다.”

황 씨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다. 병원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의자에 앉았다.

오늘 아침 수술에 들어간 임상엽은 왼쪽 다리를 정강이까지 절단했다. 그나마 오른쪽 다리는 살렸지만, 그것도 회복되려면 한참 걸린다고 했다. 수술비를 떠나서 이제 겨우 서른 중반의 젊은 나이에 다리 병신이 되었다.

황 씨와 두산의 실수가 낳은 결과였다. 두산은 죗값을 치른 것뿐이라며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황 씨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두산이 서울에 다녀간 뒤로 황 씨는 도청을 그만두고 임상엽의 주변만 관찰했다. 임상엽은 며칠 휴가를 내고 집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웬 삼류 양아치 새끼가 임상엽을 찾아 나이트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흥신소 사장이었다. 황 씨 밑에서 일하는 두꺼비가 흥신소 사장에게 자기도 빚을 받으러 왔다며 접근했다.

둘은 함께 임상엽을 기다리며 수다를 떨었다. 자신을 일명 ‘쟈니리’라 소개한 흥신소 남자는 임상엽에게 돈을 떼먹혔다고 말했다. 일단 의심이 들어 두꺼비는 남자와 술도 마시고 밥도 먹으며 그를 감시했다. 황 씨는 큰일은 다 지나갔다고 여겨 따로 뒷조사를 하지 않았고, 며칠 남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 두꺼비도 별거 아닌 놈이라 확신했다. 겉멋만 잔뜩 든 피라미였다.

그런데 어제 임상엽이 출근한 날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두꺼비는 남자가 주는 박카스를 먹고 기절했고, 깨어 보니 임상엽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사라졌다면 별다른 의심은 하지도 않았겠지만 두꺼비에게 수면제를 탄 박카스를 먹였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란 소리였다.

밤늦은 시각 깨어난 두꺼비가 이 사실을 황 씨에게 알렸고 황 씨는 그길로 삼류 흥신소 사장을 찾았다. 남자는 볼일을 모두 끝냈는지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황 씨는 남자를 잡아 족치기 시작했다.

삼류의 좋은 점은 폭력에 약하다는 거였다.

‘그게요, 며칠 전에 부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사람 하나 찾아 달라구. 정보를 다 주고 찾아 달라 그랬으니까 어려울 게 없었죠. 근데, 찾아 주고 나니까 나더러 납치해 달라고 그러더라구요. 솔직히 돈을 오백이나 주는데 그걸 안 할 사람이 어딨어요? 당연히 하지. 뭐, 그 장소는 내가 정했습니다. 우리 선산이 그쪽에 있거든요. 그래서 그쪽 지리를 내가 잘 알아요. 톱으로 다리 자른 건 내가 한 거 아니라니까 그르네. 그 새끼가 한 거예요. 완전 미친놈입니다. 나한테는 돼지 피를 구해다가 임상엽이한테 뿌려 두라고 했어요. 겁도 좀 주고 때리고 싶으면 때리라고. 근데, 와, 부산 깡패들 무섭단 소린 많이 들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무튼, 나 내 보내고 지 혼자 애를 썰고 때리고 난장을 지어 놨더라니까. 날도 더운데 창문도 없는 그 컨테이너 안에 몇 시간을 혼자 두고, 우린 근처에 밥 먹으러 갔어요. 난 무서워서 따라갔고. 갔다 오니까 안은 찜통이야. 40도도 넘었을걸요? 기절한 새끼를 깨우더니, 갑자기 도망가라는 거야. 안 그러면 정말 죽일 거라고. 그러는데 누가 안 도망가요. 다리가 다 부러지고 썰렸는데도 도망치데. 산으로 막 올라가더라구. 더 소름 끼치는 건 나더러 돼지몰이 하듯 그 새끼를 산 위로 몰라고 했어요.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고, 나도 살고 싶으니까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황 씨는 두꺼비를 대동하고 쟈니리가 주소를 적어 준 충청도로 향하면서 두산에게도 이 일을 알렸다. 두산과 황 씨는 거의 비슷한 시각에 그 컨테이너 앞에 도착했다. 화가 단단히 난 두산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두산이 데려온 노종국과 똘마니, 두꺼비 이렇게 다섯이서 임상엽을 찾기 위해 산을 샅샅이 뒤졌다.

두 시간 만에 찾은 임상엽은 황 씨 일행을 보고 반쯤 미쳐서 울부짖었다. 살려 달라는 말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는 사람 같았다. 다리는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왼쪽은 이미 썩어서 고름이 가득했고 냄새도 지독했다. 다른 한쪽은 부러지긴 했어도 왼쪽보단 나아 보였다.

당장 업고 내려가도 모자랄 판에 두산은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임상엽을 다그쳤다.

‘개새끼야, 니 강재욱이한테 머라 켔노?’

‘살려 주세.’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임상엽이 옆으로 쓰러졌다. 두산은 넘어진 임상엽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

‘니 강재욱이한테 머라 켔냐꼬? 내하고 한 얘기 다 했나?’

‘예, 예, 어흐흑, 어쩔 수가 없었어요. 죄송, 합니다. 흐흑, 살려 주세요.’

‘그 씨발롬이 머라 카대?’

‘살려 주….’

두산은 멱살을 잡은 채 임상엽의 뺨을 후려쳤다.

‘그 씨발롬이 니한테 머라 카대?’

‘그게요, 흐윽, 그 일에 대해서 입도 뻥긋하지 말구, 조용히 살라고 했습니다. 나대다 걸리면 다음번엔 죽이겠다구 했습니다. 흐으윽.’

임상엽은 흐느껴 울었다. 아파서 끙끙대는 남자의 멱살을 한참 동안 잡고 있던 두산은 씨발, 하며 남자를 놓았다. 두산은 성큼성큼 산밑으로 내려갔고, 그 뒤를 노종국 일행이 따랐다. 임상엽을 그냥 두고 갈 모양이었다. 황 씨는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두꺼비에게 임상엽을 업으라고 시켰다.

자신의 차 뒷좌석에 담요를 깔고 임상엽을 눕힌 황 씨는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산에게로 갔다. 두산은 무척 심란해 보였다.

‘미안하다. 내가 일이 다 끝난 줄 알고.’

‘아재가 미안할 기 머가 있습니까. 일이 이래 될라니까 우리도 놓치고 아재도 놓친 기지예.’

‘상황이 마이 안 좋나?’

‘쯧. 내도 잘 모르겠습니다.’

두산은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얼굴을 잔뜩 구겼다.

‘절마 저거는 병원에 데리고 가께. 즈그 부모한테도 연락하고.’

‘예. 일단 저 새끼 치료받고 나면 내한테 연락 주이소.’

‘오야. 바로 가나?’

‘예. 수고하십시오.’

두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흰색 그라나다에 올랐다. 노종국 일행도 대충 얘기만 전하고 사라졌다.

그 길로 임상엽을 청주에서 나름 큰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으나, 그곳에서는 달리 손 쓸 방도가 없다고 했다. 간단히 응급처치만 하고 임상엽은 구급차에 실려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게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그런 임상엽이 무슨 수로 윤수일에게 전화를 한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커피를 다 마신 황 씨는 커피 한 잔을 더 뽑아 병실로 돌아갔다. 임상엽의 곁을 지키고 앉은 여동생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툭툭, 팔을 치자 여자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이거 드이소.”

“아, 예. 감사합니다.”

거절하지 않고 커피를 받은 여자는 시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잔에 든 걸 몇 번에 나눠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집었다.

“가실라꼬예?”

“네, 원래 오전 근문데 오빠 때문에 시간을 바꿨거든요. 지금 가야 교대를 해 줄 수가 있어서요.”

“부모님은 언제 오십니까?”

“8시 넘어야 도착하실 거예요. 저기, 죄송한데….”

“아, 걱정 마이소. 제가 지키고 있으께예.”

“어머, 정말 감사합니다.”

“머 이런 걸로. 퍼뜩 가보이소.”

“네. 감사합니다.”

여자는 몇 번이고 인사를 하고 바삐 병실을 나섰다.

자면서도 아픈지 임상엽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쯧쯧. 그라이 평소 행실을 똑띠 했으야지. 이기 머꼬? 다 젊은 나이에.”

황 씨는 혀를 차며 임상엽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황 씨도 잘은 몰랐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백두산이 위기에 처했다는 거였다. 두산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머리 회전이 빨라 늘 감탄하게 만들던 두산이었지만, 이번만은 예감이 좋지를 못했다.

다 양귀비 탓이었다. 윤수일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황 씨는 삐걱대는 의자에 앉아 사람들로 붐비는 병실을 무심하게 둘러보았다.

***

집 안에 사람이 있었다.

이질적인 냄새에 두산은 우뚝 멈춰 섰다. 거실 바닥은 수일의 라면 박스와 짐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저건 윤수일이 짓. 두산은 미간을 좁히며 빠르게 집을 훑었다. 나머진 딴 새끼 짓이었다. 흙이 묻은 양말을 벗느라 늦게 들어온 수일이 놀라 멈췄다.

“어… 그게, 내가 그런 거 아니구. 아니, 내가 그러긴 했는데….”

윤수일은 다 지가 한 짓인 줄 알고 당황했다. 두산은 그렇게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씨발. 돌아삐겠네. 수일이 과거 찾기를 다시 시작했다.

서울을 다녀온 뒤로 절망, 아니 실망….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수일은 무척 복잡해 보였다. 원래도 복잡했지만, 이번엔 더 복잡해 보였다. 깨어 있는 시간 외엔 온종일 잠만 잤다. 집 밖을 나가지도 딴짓거리를 하지도 않았다. 상엽이 그 개새끼하고는 아예 연락을 끊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수일은 정신이 맑아 보였다.

행동에도 심경에도 좋은 쪽으로 변화가 생겼다.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둘이서 어쩌자 저쩌자 얘길 하면 늘 입을 다물거나 ‘생각해 보구’ 하며 어물쩍 넘어가던 수일은 며칠 전부터 ‘응’이라고 곧잘 대답했다.

야구장에 가서도 재밌게 잘 놀았다. 물론 격렬하게 응원하던 덕규와 현수, 저를 보고 조금 질린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다음번에 또 가자고 했다. 마산댁이 불쑥 찾아갔는데도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 아파트로 이사도 가고 강아지도 키우자고 했더니, 자기만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두산은 이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고,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느꼈다. 가정, 가장. 그 말들이 좋아서 두산은 혼자 실실 웃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듯했다. 강재욱 그 씨발롬이 나서기 전까지.

분노가 끓어올랐다. 충청도에서 돌아오던 길에 바로 강재욱을 찾아가 죽여 버릴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자기는 감옥에 가고 수일은 혼자 남아 비참하게 죽겠지 하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손찌검 한 번 안 하고 곱게 데리고 있던 수일이 자기가 없는 동안 엉망으로 무너지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내내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 두산은 턱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아침에 바로 할배에게 찾아가 임상엽의 일을 전했다. 강재욱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뻔했다. 밀레니엄 이사직에 다시 오르는 것.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하고 두산을 물러나게 하는 것. 바로 그 두 가지였다. 거기에 더해 할배의 약점을 쥘 수도 있었다. 두산의 약점이기도 했다.

강재욱은 제 잘못은 좆도 모르고 뺏긴 걸 다시 가지려고 들었다. 애초에 제 것도 아닌데 집착하고 있었다. 강재욱은 역시나 비열한 놈이었다.

사실, 두산은 밀레니엄이고 조직이고 다 필요 없었다. 씨발, 평생 써도 다 못 쓰고 죽을 돈이 있는데 뭐 하러 복잡한 일까지 하면서 골머리를 썩여야 한단 말인가.

“할배, 내 미국 보내도. 하와인지 어덴지 집 사 논 거 있다 아이가. 거 수일이 행님 하고 둘이 가서 살란다.”

“하, 이 쌔끼. 그거를 말이라꼬 하나? 일단, 강재욱이 글마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들어보고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생각이고 머고, 수일이 행님 아는 날엔 내 강재욱 그 씨발롬 직이삘 끼다.”

딴 새끼도 아니고 조직의 간부였다. 검경 포함 아는 사람이 지천으로 널린 강재욱을 죽인다는 말에 할배가 인상을 구겼다. 쯧, 혀를 찼다. 할배가 저를 범죄자로 만들지 않을 거란 걸 두산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연히 자신의 수를 읽었겠지만, 할배도 지금으로선 속아 주는 것 말곤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할배는 두산을 어떻게든 조직에 두고 싶어 했으나 두산은 조직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수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사직에 오른 것도 오직 수일을 보호하기 위해 한 할배와의 거래일 뿐이었다.

그런데 만에 하나 강재욱이 진실을 밝히고 수일이 진짜로 미쳐 버리거나 죽는 날이 온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할배니 두산에게 뭐든 해 줄 터였다. 어차피 그 사고는 할배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고 말이다.

할배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두산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성격대로 못 살아서 속에 화가 쌓였나? 두산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수일을 보면 모든 나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늘 함께하는데도 두산은 수일이 보고 싶었다. 그 말간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한 수일이 저만 보면 환하게 웃었다. 창백한 피부에 윤기가 돌고 홍조가 일었다. 수일은 그런 남자였다. 두산만 보면 꽃이 피었다.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두산은 수일을 떠올리며 자위했다. 오늘 새벽 잠결에 저를 받고 매달리던 모습을 되뇌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기다란 속눈썹, 끊임없이 오르내리던 납작한 아랫배를 생각했다. 차가운 몸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혀와 구멍을 느끼며 두산은 사정했다.

같이 점심 먹자고 전화하라 일렀건만 수일은 전화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산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자다 깼는지 수일은 한참 만에야 받았다. 굳이 걸어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내버려 둔 게 잘못이었다. 밀레니엄 방향으로 걸어오는 윤수일이 이상했다.

씨발, 벌써 뭘 들었나?

수일의 행색을 보자마자 퍼뜩 떠오른 생각이었다. 수일은 양말만 신은 채 메리야스도 입지 않고 셔츠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수일이 움직일 때마다 희멀건 살이 드러났다.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두산을 보자마자 수일의 크고 멍한 눈에 광채가 돌았다. 더위에 익은 하얀 피부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억수로 예뻤다. 억수로 예쁜데 열이 받았다. 윤수일이 저러고 나왔다는 건 정신을 놓았다는 증거였다. 강재욱, 그 좆같은 새끼가 돌았나. 거래 없이 터트릴 위인이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두산은 인상을 썼다.

수일은 자기가 어떻게 하고 나온 줄 알자 당황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두산은 뭔가 들었나 싶어 수일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수일은 두산을 멀리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정신만 나가 있었다. 강재욱이 아니라면 기억이 돌아온 건가. 두산은 짱구를 열심히 굴려 보았지만 짐작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돌대가리야, 생각 쫌 하자.

그렇게 밥을 먹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면 박스가 나와 있었다. 두산이 가져다준 뒤로 거들떠보지도 않던 거였다. 다시 과거 찾기가 시작된 것이다. 뭔가가 윤수일을 들쑤셔 놓았다. 지 입으로 실토하게 하는 방법 말곤 없었다.

두산이 인상을 조금 쓰고 한숨을 쉬자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불안에 덜덜 떠는 얼굴이 울음을 참느라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하, 씨발. 두산은 수일이 이럴 때마다 돌아 버릴 정도로 흥분됐다.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아래가 묵직해졌다. 수일은 무릎으로 기어와 뽀뽀를 하고 무작정 혀를 밀어 넣었다. 미치도록 좋았다.

개새끼야, 참아라 쫌. 두산은 속으로 저한테 욕을 했다. 그렇게 수일을 불안하게 만들고 정보를 얻었다.

수일이 정신을 놓은 원인은 임상엽이었다. 어떻게 그 호로새끼가 수일에게 전화를 한 건지 의아했다. 분명 황 씨가 지키고 있었을 테고 무엇보다 지금 임상엽은 전화할 상태가 아니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두산은 수일을 안아 주고 토닥였다. 수일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입술에 닿는 서늘한 피부는 감촉도 냄새도 좋았다. 수일이 가까이 있으니 침입자의 냄새는 더 확연히 구분되었다. 거실과 가까운 곳, 안방이었다.

“내 회사 드가 바야 되는데, 니 혼자 있을 수 있겠나?”

“응.”

대답은 잘만 했지만 수일은 불안에 덜덜 떨었다. 본인이 얼마나 떨고 있는지 알고 있나 몰랐다. 귀여워서 볼을 톡 건드렸다. 수일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두산은 수일에게 키스했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방법만 찾으면 됐다. 일단 집에 있는 놈부터 처리하고.

두산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수일을 안아 일으켰다. 수일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겨드랑이에 딱 끼우자 수일은 두 팔로 허리를 안았다. 하여간, 하는 짓도 예뻤다.

“어데서 이런 기 나왔을꼬.”

“어우, 할아버지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지랄.”

불안에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수일이 예뻐 죽을 것 같았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배웅해 줄 끼가?”

“응. 당연하지.”

“니 진짜로 혼자 있어도 개안켔나?”

“응. 괜찮으니까 얼른 나가기나 해.”

“알았다.”

두산은 현관문을 열고 같이 집을 나서는 척하다가 ‘맞다!’ 하며 멈춰 섰다. 자연스레 수일을 떼어 놓았다.

“먼저 내리가 있으라. 내 머 쫌 챙기 가께.”

쪽, 뽀뽀를 해 주고 귓속말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수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두산은 최대한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걸쇠를 걸었다. 발소리를 최대한 줄여 조심히 움직였다. 칼을 찾아 쥐고 그 위로 수건을 둘둘 말았다.

안방으로 들어가자 냄새가 짙어졌다. 침입자가 있을 곳은 뻔했다. 침대 밑이었다. 두산은 잽싸게 바닥에 엎드렸다.

어쭈 이 새끼 봐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두산은 씨익 웃었다.

“어이 김태욱이, 퍼뜩 나온나. 뒤지기 전에.”

두산은 칼등으로 방바닥을 툭툭 쳤다. 태욱의 입에서 한숨과 욕이 터져 나왔다. 스스슥, 바닥을 기며 태욱이 나오기 시작했다. 두산은 그대로 태욱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반쯤 끌어낸 다음, 가슴에 올라탔다. 온 체중을 실어 태욱을 누르고 칼날을 태욱의 얼굴에 갖다 댔다.

“야이, 씹새끼야! 니 미칬나??”

태욱이 소리쳤다. 예고도 없이 파고드는 칼날에 태욱은 당황하다 못해 겁을 집어먹었다.

“내 미친 거 모르고 들어왔나?”

“개새끼야, 하지 마라!!”

태욱은 칼날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몸을 비틀고 지랄을 떨었다.

“에헤이, 가만 있으라. 다 그어삐기 전에.”

“씨발 새끼야! 하지 말라꼬!!”

두산이 칼날을 슬쩍 움직이자 태욱은 눈물을 질질 짰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이 씨발롬은 아픈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태욱이 우는 이유는 정말로 두산이 제 얼굴을 그어 버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얼굴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올라온 새끼니 그럴 만도 했다. 두산은 피식 웃었다.

“누가 보냈노?”

태욱은 이를 악물며 버텼다.

“마지막이다. 누가 보냈노?”

얼굴을 긋는 것쯤이야 두산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봐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두산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은 태욱은 망설임도 없이 술술 불기 시작했다.

“강 이사.”

“이유는?”

“윤수일이 앨범에 단체 사진이 하나 있는데, 그 사진 밑에 다른 사진이 한 장 더 들어있다 카드라. 강 이사가 내한테 그거 빼오라 켔다. 꼭 필요하다꼬.”

“사진은 어데 있노?”

“몬 찾았다.”

두산은 믿을 수가 없어서 태욱의 옷을 강제로 벗겼다. 빤쓰 한 장 안 남기고 모두 벗겨 냈지만, 정말 없었다.

“앨범은 우쨌는데?”

“모른다, 씹새끼야. 앨범 코빼기도 몬 밨다!”

태욱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랍장이란 서랍장을 모두 뒤졌는데 앨범을 찾지 못해 싱크대며 찬장까지 엎어 놓았던 거였다. 이 와중에도 태욱은 어떻게든 칼 근처에서 벗어나 보려고 두산의 밑에서 발악했다. 태욱이 움직일 때마다 어깨 위 백사도 함께 꿈틀댔다.

앨범은 어디로 갔을까. 두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옷방 서랍장에 넣어 뒀었다. 그걸 못 찾은 걸 보면 수일이 건드린 모양이었다. 미친년이 이럴 때 또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 두산은 속으로 웃었다.

“강 이사한테 전해라. 할 말 있으면 내하고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꼬. 그라고, 니, 한 번만 더 내 집에 몰래 기들어 오면 살아서 몬 나간다. 알았나?”

“알았다. 씨발 새끼야.”

하여간, 근성 하난 알아줘야 했다. 두산은 짧게 웃으며 태욱의 위에서 일어나 섰다. 손에 두른 수건을 풀어 던지자 태욱은 알몸인 채로 수건을 집어 상처 난 얼굴을 눌렀다.

두산은 거실로 나가 휘 둘러보았다. 앨범은 분명 집 안에 있었다. 방에 없다면 거실이었다. 소파 뒤나 옆의 공간을 살피고 아래도 더듬어 보았지만 없었다. 두산은 소파에 앉아 찬찬히 주위를 훑었다.

거실 탁자 위 전화번호부가 눈에 들어왔다. 수일이 어디다 전화를 걸려고 한 건지는 몰라도 펼쳐진 상태였다. 펼쳐진 걸 닫자, 그 자리에 앨범 두 개가 나란히 쌓여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태욱 같은 새끼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았다.

두산은 새로 산 듯 보이는 앨범은 치워 두고 수일의 낡은 앨범을 펼쳤다.

사진을 옮기던 중이었는지 앞 장이 비어 있었다. 빈 페이지를 넘기니 에덴동산 간판 아래서 젊은 남자들이 웃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수일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개새끼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수줍게 웃고 있는 수일이 너무 예뻐서 찢어 버리려다 만 사진이었다.

조심성 없이 접착식 앨범의 필름을 떼어 내자 옆에 있던 다른 사진이 함께 딸려 나왔다. 두산은 에덴동산 사진을 집어 들었다. 태욱의 말대로 정말로 아래에 사진이 한 장 더 있었다. 명함 크기만 한 증명사진이었다.

처음 보는 사진, 두산의 아버지였다. 40대 초반의 젊은 아버지는 비싸 보이는 양복 차림에 점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할배와 할매를 반반씩 닮은 얼굴이었다. 부산에서 찍은 사진은 아니었다. 분명 사고 나기 전 서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뒤집자 글자가 적혀 있었다.

행복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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