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종이 줄까아 파란 종이 줄까아.”
수일은 양손에 넥타이를 하나씩 들고 으스스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랄. 빨간색.”
좀 맞춰 주면 어때서. 두산은 단박에 수일의 장난을 잘라 내고 붉은색 넥타이를 골랐다. 수일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파란색을 옷장에 도로 넣었다. 두산이 고개를 숙이자 수일은 두산의 목에 넥타이를 걸었다.
“오늘부터가?”
“응. 성룡 지배인 말로는 가수들도 새로 온대. 참, 지난번에 뱀쇼 했던 아가씨 기억나지?”
“어. 짤맀다 아이가.”
“근데, 연락해서 다시 와 달라구 했나 봐. 댄서들 뽑을 때까지는 뱀쇼로 메꾼대.”
오랜만에 출근할 생각에 조금 들뜬 수일과 달리 두산은 심드렁했다.
“나도 가고 싶어서 가는 거 아냐. 계약이 남았으니까 가는 거지.”
수일은 변명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이번엔 수일에게 운이 좀 따라 주었다. 오성관은 수일이 서울로 간 날부터 어제까지 자체 휴업이었다. 무대에 설 가수도 댄서도 없었거니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 성매매 알선 혐의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 바람에 사장은 계속 불려 다니며 경찰 조사를 받았다. 보건증 위조 혐의로 걸렸던 댄서들과 은아 씨는 성매매 혐의로도 조사를 받았다. 인정하는 사람도 증거도 없었으므로 처벌을 받진 않았지만, 나이트는 문을 닫아야 했다.
경찰 조사를 마무리 짓고 과태료까지 낸 사장은 재개관을 할 거라며 지배인에게 전화를 돌리라고 했다. 전속 계약을 한 수일이나 갈 데가 없는 몇몇을 제하면 벌써 다른 직장을 찾았기에 떠난 직원들이 반 이상 되었다.
무슨 소문인지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오성관에 대해 괴소문이 퍼져 누구도 일할 생각을 안 한다며 성룡은 친하지도 않은 수일을 붙잡고 우는소리를 했다.
수일이 넥타이를 매는 동안 두산은 뒷짐을 지고 서서 흐뭇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원래는 뽀뽀를 하고 난리를 쳤는데, 다시는 넥타이 안 매 준다는 협박을 한 이후로는 저렇게 얌전히 서 있었다. 그게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넥타이를 다 맨 수일은 쪽 뽀뽀를 해 주었다. 두산의 광대가 실룩거렸다.
두산은 오늘도 수일이 사 준 남색 재킷을 들었다.
“너 또 이거 입어?”
“어.”
지난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일을 내리 입었다. 토요일 퇴근 후에 세탁소에 맡기는 걸 깜빡해서 어제 갖다주려고 했는데 두산이 어제도 입고 나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지난주부터 내내 이것만 입었잖아.”
“그래봤자 네 번 뿌이 더 입었나? 한 달씩 입는 사람도 있다.”
“어우, 얼른 벗어. 날도 더운데 가을 양복을 입구 다니면 어떡하니? 이거 다 내가 욕먹는단 말야. 빨랑.”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산이 입술을 살짝 말아 물고 웃음을 참았다.
“뭐 그렇긴 하겠다.”
재킷을 벗어 주면서 ‘그래, 내가 이라믄 집사람이 욕먹지’ 하고 뜬금없는 소릴 했다.
“뭐래. 바지는? 그것두 벗어.”
두산은 바지를 벗으라는 말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수일은 헛웃음을 웃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말이 무색하게, 팬티를 뚫고 나올 듯 아랫도리가 서서히 크기를 키웠다. 아침마다 애 등교시키는 것도 이것보단 쉬울 것 같았다. 수일의 입에서 잔소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내가 못 살아! 지금 8시 45분이거든? 딴생각하지 말구 얼른 바지 입어!”
단호한 표정으로 바지를 던져 주자 두산은 입을 한 발이나 내밀며 구시렁댔다.
“와, 이래 무뚝뚝해도 되나? 광녀이 시절엔 애교가 넘칬는데.”
수일은 두산을 잔뜩 노려보며 검은색 재킷을 들었다. 두산이 몸을 돌려 팔을 하나씩 끼웠다. 어깨까지 제대로 걸쳐 주고 두산을 돌려세워 와이셔츠와 재킷 깃을 정리했다. 가슴을 쓱쓱 쓸어 주자 두산이 다가와 입 맞추었다.
“내 오늘은 점심 약속 있으니까 밥 잘 챙기 묵고.”
“걱정하지 마세요. 나 먹는 건 잘 챙겨 먹어.”
“알았어요.”
두산은 수일의 말투를 흉내 내며 어깨를 안아 함께 현관을 나섰다.
뽀뽀를 스무 번도 더 한 다음에야 엘리베이터에 오른 두산은 결국 다시 내려 수일을 꼭 끌어안아 준 후 출근했다. 오늘도 보나 마나 지각인 것 같아 수일만 발을 동동 굴렀다.
수일은 문득 두산이 여태 서류 가방도 없이 맨몸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하는 일 없는 막내라도 남 보기 좀 그럴 것 같아서, 나중에 가방 사러 가자고 해야지 했다.
집으로 돌아와 안방 침구를 정리하고 옷방에서 두산이 벗어 둔 남색 양복을 꺼내 놓았다. 까먹기 전에 얼른 세탁소에 갖다주려고 수일은 서둘러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날씨는 다시 한여름이었다.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아침 기온도 높아 잠을 뒤척일 정도였다. 그런 날씨에 두산은 수일이 사 줬다는 이유만으로 춘추복 정장을 매일 입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수일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회사 가면 벗어 둘 게 뻔하기도 했고. 답답하다는 소리 한번은 할 줄 알았던 넥타이도 어찌나 잘 매고 다니던지, 예뻐 죽을 것 같았다.
“미련 곰탱이.”
수일은 혼잣말을 하며 웃었다.
서울을 다녀온 뒤로 수일은 마음을 완전히 고쳐먹었다. 두산을 떠날 거란 생각을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 버렸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수일에게 이젠 돌아갈 곳이 없었다.
상엽을 때리고 나온 그 순간, 수일의 마음과 몸은 너덜너덜했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악착같이 버텼던 자신이 그렇게 미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세월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평생 혼자였단 생각에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수일을 살린 건 두산이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갑자기 두산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러자 자기가 부산을 떠나올 때 두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빨리 돌아올게.’
‘나 진짜루 금방 올 거야.’
무슨 정신으로 택시를 타고 버스표를 샀는지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오로지 두산을 만나러 부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없었다. 의지가 무의식이 되어 수일을 이끌었다. 휴게소에서 내려 두산의 목소리를 듣던 순간에야 비로소 수일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 정도로 수일에겐 두산이 간절했고, 두산이 그의 전부였다.
교통사고에 대해선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지만 수일은 더 궁금해하지 않았다. 상엽과는 아예 연락을 끊었다. 상엽이 보냈다는 자신의 짐이 든 라면 상자를 열어 보지도 않고 보일러실에 처박아 두었다.
두산은 모르겠지만, 저 작은 라면 상자 하나가 수일이 가진 전부였다. 두산에게 자신의 빈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수일은 그것을 버려도 되는 물건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하지만 수일의 전부였고 그 사실이 참 쓸쓸했다.
혼자 있으니 또 생각이 많아졌다. 분명 세탁소에 가려고 준비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수일은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에 두산의 양복을 쥐고서.
삐삐가 울렸다. 은아 씨였다.
[수일아, 내 은안데, 1시간 정도 늦을 것 같다. 미리 나오지 말고, 시간 맞차가 나온나. 미안하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