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수일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낡은 형광등과 곰팡이 핀 벽지가 새삼스러웠다. 문틈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었다. 어제 상엽의 방에서 잠이 들었음을 깨달은 건 잠시 후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상엽인 하루 휴가를 내고 광주에 사는 절친한 친구 동준이를 만나러 갔다고 했다. 어머니도 상엽이 남기고 간 쪽지를 보고 알았다.
“하여간 그 새끼는 놀 궁리만 하고 자빠졌어.”
수일의 잠자리를 봐 주며 어머니가 상엽의 험담을 했다. 어차피 안 들어올 테니 자고 가라는 어머니의 제안에 수일은 냉큼 그러겠다고 답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데다가 비까지 맞은 몸으로 장거리 이동을 해서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산꼭대기에 있는 상엽의 집에서 큰 도로까지 걸어 내려갈 엄두도 안 났고.
좁고 지저분한 방이지만 피곤했던 수일에겐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저녁도 잊은 채 잠을 청한 수일은 한 번도 깨지 않고 이 시간까지 푹 잤다. 으슬으슬 돌던 감기 기운도 사라졌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일은 가뿐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불을 개고 마당으로 나갔다. 비는 거의 그쳐서 하늘은 흐리기만 했다. 수돗가로 가 대충 세수를 하고 치약을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았다.
“일어났니?”
“네. 어머니.”
“아침 다 됐으니까 같이 먹자. 니가 사 온 걸루 두루치기도 하고 계란말이도 했어.”
수일에게 수건을 건넨 어머니는 도로 부엌으로 들어가 상을 들고 나왔다. 밥상을 내가자마자 방에 있던 상엽의 아버지가 하품을 하며 네 발로 기어 나왔다.
“어유, 냄새 한번 기가 맥히네. 수일이 니 덕에 오랜만에 포식한다.”
떡 진 머리에 러닝 차림인 아버지는 연신 하품을 하며 젓가락부터 들었다.
“동준이하곤 어째 다시 연락이 됐나 봐요?”
“그르게나 말이다. 아주 상종 못 할 인간이라고 그 난리를 치더니만. 수일이 너는 우리 상엽이하구 오래오래 사이좋게 지내. 알았지?”
수일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어머니는 고기를 집어 먹었다. 상엽을 만나 얘기할 생각을 하자 벌써 긴장이 되었다. 입맛이 써서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수일은 맹탕 같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억지로 먹고, 출근 준비를 하는 상엽의 부모님을 대신해 설거지를 했다.
두 분 모두 봉제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미싱을 돌렸다. 처음엔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자주 다쳐 못 해 먹겠다 노래를 부르시더니, 3년째인 올해는 둘 다 이만한 직장이 없다는 소릴 했다. 볼 때마다 기침이 잦아지는 것만 빼면 두 분 모두 건강한 편이었다.
수일은 마치 그들이 제 부모님인 양 두 사람을 배웅하고 빈집에 혼자 남았다. 이제 겨우 7시 반이었다. 지금쯤 두산이 일어났겠지 싶어서 집 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를 찾았다. 분명 근처에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겨우 공중전화를 찾은 수일은 주머니를 뒤져 백 원짜리 동전을 넣었다. 씻고 있는지 두산은 전화 받을 생각을 안 했다. 속으로 스물까지 숫자를 세고 끊으려는데 두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산아, 나야.”
- 어. 어데고?
이제 막 일어났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잠긴 목소리가 은근 듣기 좋았다. 수일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잤어?”
- 어. 니가 없으니까 잠이 와야 말이지. 여태 깨 있었는데 그새 잠들었는 갑다. 니는 잘 잤나?
수일은 세상모르고 잘 잤지만, 아닌 척하고 잔소리부터 했다.
“너 얼른 씻고 출근 준비해. 신입사원이 빠져 가지구.”
- 남 말 하네. 어데고?
“상엽이네 집 근처.”
- 일찍도 갔다. 만났나?
“아니, 어제 상엽이가 친구 만나러 광주엘 갔지 뭐야. 그래서 상엽이네 집에서 잤어. 너무 피곤해 가지구.”
- 그래? 잘했다.
수화기 너머로 하품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이제 깬 모양이었다. 시간 맞춰 전화를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여태 자고 있었겠다 싶었다.
어제 혼자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 때만 해도 수일은 그렇게 서럽고 무서울 수가 없었다. 상엽을 만나 진실을 알게 된 충격으로 혹시 정신 줄을 놓을까 봐 두산의 이름을 얼마나 외웠는지 몰랐다. 옷이 다 젖도록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릴 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도 했었다. 그랬는데 그와 통화하는 지금은 몸도 마음도 안정되었다. 거리는 멀지만 두산이 곁에 있는 것처럼 든든했다.
- 몇 시 차로 오노?
“아직 잘 몰라. 일단 상엽이를 만나야지.”
- 알았다. 계속 연락하고. 명함에 내 자리 번호 있제? 거기로 전화해도 되고 아이면 삐삐치라. 터미날에 마중 나가께.
“응. 아침 챙겨 먹구 출근해.”
- 어. 니도 밥 잘 챙기 묵고.
“응. 이따 또 연락할게.”
- 그래.
수일은 두산이 먼저 전화를 끊길 기다렸다.
- 머꼬? 벌쌔로 끊었나. 광년아?
“아 왜 자꾸 나더러 광년이래? 나 수일인데!”
- 지랄.
두산이 소리 내 웃었다.
- 벌쌔로 끊은 줄 알았다 아이가. 얘기만 듣고 바로 내리온나. 딴 데 새지 말고.
“안 새.”
샐 데도 없다고 일부러 퉁명스레 답하고 수일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수일은 터덜터덜 슬리퍼를 끌며 깎아지른 오르막을 올랐다. 비가 왔는데도 선선해지기는커녕 날이 더 무더웠다.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마시고, 마루에 멍하니 앉아 상엽을 기다렸다. 집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어 옆집 말소리와 밥 먹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도 끊임없이 들렸다.
상엽이네는 달동네치곤 큰 집이라 방 두 개에 마루와 마당까지 있었다. 어머니는 막내딸이 시집가니 이 집도 넓어 보인다며 싸게 줄 테니 수일더러 들어와 살라고 했다. 상엽의 여동생이 기거했던 방을 세준다고 했는데, 사실 거긴 방이라 부를 수도 없는 창고 같은 곳이어서 수일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수일은 상엽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했다. 어제 입었던 젖은 옷들을 말리려고 걸어 두었지만, 날이 흐려 여전히 축축했다. 부산에 내려가자마자 세탁소에 맡겨야지 하고 하나씩 개서 쇼핑백에 조심히 넣었다. 통장과 도장이 든 소지품 가방도 잃어버리지 않게 같은 곳에 담아 두었다.
끼이익,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일은 마당으로 난 쪽문을 벌컥 열었다.
“왔어?”
상엽은 귀신이라도 본 양 화들짝 놀랐다.
“아이 씹,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미안, 놀랬니?”
“와, 진짜 돌아 버리겠다.”
정말 놀랐는지 상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히 미안했다. 상엽은 몸이 안 좋은지 어기적어기적 걸어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오자 몸에서 지린내가 났다.
“내 방에서 나와.”
수일은 마루로 나와 앉았다. 상엽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얼굴은 멀쩡한데 방으로 오르면서 아주 끙끙 앓았다. 뭘 하는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나올 생각을 안 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방문을 두드렸다.
“상엽아, 괜찮아?”
“…….”
“상ㅇ….”
“아우, 씨팔. 나갈 테니까 부르지 좀 마.”
버럭 고함을 지르는 통에 수일은 입을 다물었다.
동준에게 맞고 온 게 분명했다. 절교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으니 굳이 광주까지 찾아갔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30분도 넘게 방에 머물던 상엽은 옷을 갈아입고 마루로 난 방문을 열었다.
“교통사고 때문에 온 거야?”
이렇게 묻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그 사진. 누구야?”
“사기꾼.”
“사기꾼?”
“그래. 사기꾼.”
상엽의 말에 따르면 사진 속 인물은 기둥서방과 여사장의 동업자이자 사기를 설계한 남자였다. 교통사고가 있기 몇 달 전부터 셋은 주변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리조트 독점 개발권을 따냈다고 속이고 투자금을 모으고 있었다고 했다.
번지르르한 사업 계획서와 대통령의 직인이 찍힌 허가서, 장관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을 미끼로 제법 큰 돈을 모았다. 목적한 돈을 다 모으면 셋이서 외국으로 튈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수일은 행복사진관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여사장이 주변 상인들에게도 투자금을 받았다는 말이 진짜였다.
문제는 사기꾼이 정말 사기꾼이라는 데 있었다. 남자를 믿지 못했던 기둥서방은 사람을 사서 사기꾼의 뒤를 쫓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동업자인 기둥서방과 여사장도 속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기둥서방은 사고로 위장해 사기꾼을 죽이고 싶어 했고, 여사장이 그 일에 수일과 상엽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연화 죽인 새끼라고 속인 거, 그년 생각이었어.”
상엽인 여기까지 말하는 동안 많이 아픈지 몇 번씩 쉬어 갔고, 집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을 떨며 마당으로 난 쪽문을 흘끔거렸다. 왜 그런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이상했다.
“형, 나 물 좀.”
“응.”
물잔을 쥔 손을 어찌나 떨어 대던지 상엽의 입에 들어가는 물보다 쏟는 물이 더 많았다. 씹, 씨팔, 연달아 욕을 뱉은 상엽은 겨우 물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처음엔 나도 여사장 말 믿었지. 근데 영 이상한 거야. 형한테 사진만 주고 나한테는 사진하고 남자 사는 집 주소를 주면서 둘이 잘 상의해 보라는데 안 이상해? 그래서 뒤를 좀 캐 봤더니 연화 죽인 새끼 아니고 사기꾼이더라구. 썅, 우리한텐 그런 일 시킬 거면서 지들끼리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 처먹구 호텔 바에서 술 마시고, 아주 지랄을 하드라.”
“그래서?”
수일의 기억과 일치했다. 여사장은 수일에게 사진만 주고 상엽을 찾으라고 했었다. 아직 기억과 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저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두 진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근데, 내가 뒤를 밟은 걸 둘이 알아챈 거야. 나 잡아다가 때리고 협박하고 그러다가 나중엔 입 다물라고 돈을 주더라. 형두 알지? 그때 우리 집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던 거. 돈 주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알았다고 했어. 근데, 양심에 찔려서 형한테 여사장 말 절대 믿지 말라고 얘기했었어. 진짜야.”
수일을 향해 진심이라고, 정말 그랬다고 호소했다.
“상엽아, 나 담배 좀.”
상엽은 싸구려 담배를 꺼내 하나는 제 입에 물고 하나를 수일에게 내밀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답답했다. 상엽의 얘기를 들으면 바로 기억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여전히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았다. 다만 여사장과 기둥서방에 대한 나쁜 기억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소름 끼치도록 싫었던 기둥서방의 말투와 표정이 떠올라 수일은 진저리를 쳤다. 여사장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긴 했어도 수일과 직원들을 진심으로 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다. 여사장도 기둥서방도 수일이나 상엽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에겐 수일은 한낱 밑바닥 인생이자 언제 죽어도 되는 개돼지보다 못한 인간이었다.
그래. 개돼지보다 못한 인간. 수일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웃었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 연놈들이 형 몰래 계획을 짰더라구. 원래 그 차에 사기꾼이 타기로 되어 있었나 봐. 사람 시켜서 그라나다 브레이크를 고장 냈는데 형은 그것도 모르고 차에 올랐던 거고. 근데 이 사기꾼 새끼도 보통 놈이 아니거든. 알고 봤더니 그 새낀 형만 보내고 지는 택시를 잡아탔더라. 뭐, 뒤에 일어난 일은 말 안 해도 알 테고.”
문턱에 머리를 기댄 상엽을 수일은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의원은?”
“죽었어. 형 사고 나고 삼 일 뒨가, 죽었다더라구. 술 취해서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는데, 뻔한 거 아냐? 사기꾼 새끼가 손 쓴 거지.”
그때부터 상엽은 겁에 질렸다. 그는 세 사람의 사기 행각을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고, 하필 기둥서방이 죽은 다음 날 여사장과 만나는 걸 그 남자에게 들켰다고 했다.
상엽인 남자가 자기도 죽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언제 한국으로 돌아와 저나 가족들에게 해코지할지 몰라서 두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수일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지금, 이 순간도 무섭다고 했다.
“그럼 여사장도 그 남자가 죽인 거야?”
상엽은 고개를 저었다.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뱉었다.
“기둥서방은 죽었지, 사기꾼은 돈 들고 튀었지. 한 마담 그때 제정신 아니었어. 투자금으로 받은 돈이 어디 한두 푼이었어야지. 그 와중에 연화네 마담이 사기 친 거 알아채고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거든. 마담도 지 돈만 투자한 거 아니고 손님 중에 돈 좀 있다는 사람들 죄다 꼬셔다가 투자했었나 봐. 당연히 조폭도 껴 있었고. 형두 알잖아? 그 새끼들 어떤지. 조폭이 협박하니까 그년도 지린 거야. 비빌 언덕이라곤 기둥서방밖에 없었는데, 이젠 뭣도 없으니 지가 별수 있어? 죽는 수밖에.”
여기까지 말한 상엽은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여전히 작은 소리에 놀라고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지만, 수일은 알 수 있었다. 상엽이 제 할 말을 모두 끝냈다는 걸.
수일은 허무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들은 벌써 죽고 없었는데, 수일만 지난 세월 고통받았다. 상엽은 제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 사실을 숨겨 왔던 것뿐이었다. 딱히 잘못한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 정도까지 들었는데도 수일은 그때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것였다. 그게 초조했다.
“사기꾼 이름은?”
“성이 전 씨라는 것밖에 나두 몰라. 지들끼린 전 회장이라 불렀는데, 나이는 기둥서방하고 비슷해 보였으니까 살아 있다면 50대 중후반 정도 될 거야.”
전 회장. 김도식이란 이름을 들었던 때처럼 아무 감흥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뭔가 더 물어봐야 할 것 같았으나,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기둥서방도 죽고 여사장도 죽었다. 사기꾼은 살아남아 돈을 들고 해외로 날랐다. 에덴동산은 공중분해 됐고, 연화네 마담은 돈을 한 푼도 찾지 못하고 망했다. 그래서?
수일은 보리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따위 사실을 몰라서 여태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니 더 막막했다. 과거는 그저 핑계일 뿐이고 머리를 다친 후유증이 심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진짜로 미쳐 가고 있는 거면 어쩌나. 수일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김도식. 한정숙. 전 회장.
뭐든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짰지만, 어느 것 하나 수일에게 새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못했다. 정말 이게 끝인가 보았다.
수일은 상엽의 다리를 넘어 방에서 제 물건을 챙겨 나왔다.
“어디 가?”
“부산.”
전화로 했어도 될 말이었다. 상엽이 조금만 수일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전화로 해 주고도 남았을 말이었다.
“형, 다시 올 거지?”
수일의 등에 대고 상엽이 소리쳤다. 아니. 수일은 한숨처럼 답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게 덧없이 느껴졌다. 이따위 얘길 듣겠다고 악착같이 서울로 올라온 자신이 우스웠다.
버려진 똥개를 키웠어도 이것보단 정이 있을 터였다. 상엽인 도대체 자기를 뭐라고 생각했길래 이렇게까지 굴었을까. 비참했다. 16년을 알고 지냈는데, 자기의 주검을 맡길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러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수일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신발을 신은 채로 마루에 올라 문턱에 기대 있는 상엽을 마구 때렸다. 발로 차고 주먹질을 했다.
“아악, 형, 왜 이래? 억! 크윽… 아프다고 씹새꺄!!”
“개새끼,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했는데 그 얘길 못 해서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어? 넌 사람도 아냐. 씨발 새끼. 죽어, 죽어!!”
수일은 미친 듯이 상엽을 팼다.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부엌으로 가 손에 집히는 것들을 모조리 던졌다. 칼을 쥐었다가 겨우 놓았다. 처음에는 대들던 상엽도 미쳐 날뛰는 수일을 어쩌지 못하고 그저 웅크린 채 폭력을 견뎠다.
“으아아아! 죽어! 개새끼야! 죽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 데… 흐윽.”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수일은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상엽과 함께한 지난 세월이 분하고 억울했다. 그러다가 제가 너무 불쌍해서 울었다. 부모 형제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인생에 애인은커녕 친구 복도 없는 자기가 너무도 불쌍했다. 평생 혼자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존심도 버린 채 간도 쓸개도 다 내준 자신이 너무 등신 같아서 수일은 울었다.
1분 1초도 상엽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수일은 일어나 나왔다.
“형 미안해… 수일이 형!! 진짜 미안해.”
상엽이 흐느끼며 수일의 뒤를 쫓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 구역질 나는 동네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 다짐하며 수일은 하염없이 걸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데도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엎어졌다. 아픈 줄도 몰랐다. 일어날 기운도 의지도 없었다. 수일은 그렇게 엎어진 채로 엉엉 울다가 두산이 보고 싶어 겨우 일어섰다. 손바닥이 까져 피가 났지만, 그것보다 두산이 사 준 옷이 더러워져서 수일은 또 울었다.
“두산아.”
엄마 잃은 아이처럼, 두산의 이름을 부르며 수일은 길을 헤맸다.
***
노종국은 엄지와 검지로 두 눈을 꾹 눌렀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더니 눈이 뻑뻑했다. 무전이 울렸다.
“행님, 양귀비 떴습니다. 11시 버스고예, 버스 번호는….”
종국은 뒷자리에 앉은 두 남녀에게 5만 원씩 건넸다. 어제 윤수일과 같은 버스로 올라온 젊은 여자와 중년 남자였다.
“어제처럼 빨간 모자한테서 표 받으이소. 같은 지역이면 버스에서 만나는 일 천지니까 어색하게 행동하지 마시고예. 나머지 10만 원은 터미날에 도착하면 드리겠습니다.”
둘은 알겠다고 답한 다음 시간 차를 두고 차에서 내렸다.
그나저나 주전부리를 사러 간 재민이 새끼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서울은 처음이라며 어제부터 들떠 있더니, 넓은 고속 터미널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종국도 서울에 두 번이나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행과 도청 전문가인 노종국은 일명 그림자였다. 처음엔 사람을 패거나 고문하는 일에 불려 다녔으나, 얼굴에 커다란 흉이 생기면서 대외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그때 우연히 도청 기술을 배웠고, 특전사 출신이라 행동이 날렵하고 몸을 숨기는 일에 능숙해서 미행도 곧잘 했다.
지금은 백사파에서 자리를 잡아 중요한 일에만 직접 나섰고, 나머진 동생들에게 맡겼다. 자신과 같은 그림자를 키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노종국이 딴 데도 아닌 경찰서에 얼굴을 드러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두산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가지 않았을 곳이었다. 윤수일을 가까이서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드물게 잘생긴 남자였다. 창백한 안색과 마른 체구 탓에 잘생겼음에도 화려해 보이기보단 수수한 느낌이 들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종국의 눈치를 살피던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순둥이라 착각할 정도였지만, 남자는 정말로 미친놈이었다.
아무리 미행에 도가 튼 종국도 미친 사람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예측대로 움직였고, 예외가 있다 해도 커버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윤수일은 달랐다. 미친놈의 돌발 행동에는 예측 따위 통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종국은 원래 하던 방식을 싹 뜯어고쳤다.
이후 윤수일을 놓치는 일이 없었는데, 이번 공중전화 건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그날 두산은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종국에게 서울 출장을 부탁했다.
서울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도청기를 설치하는 일은 서울에서 일하는 황 씨 전문이 아니었던 데다가 두산이 최소한의 인원만 이 일을 알기를 원했기에 종국은 직접 장비를 들고 서울을 찾았다. 터미널에서 황 씨를 만나서 임상엽의 집에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확인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달동네가 좋은 점은 집들이 서로 붙어 있다는 거였다. 아무렇게나 엉키고 뒤섞인 선들 덕에 도청기를 달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임상엽 집 근처 방 하나를 미리 얻어 둔 황 씨는 수신 장비를 그 방에 두도록 했다. 도청 내용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일은 황 씨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맡았다.
황 씨는 말이 많고 다혈질의 영락없는 부산 싸나이였지만, 일하는 게 정말로 꼼꼼했다. 보통 입 싼 새끼들은 하지 말아야 할 말도 분위기를 타면 내뱉기 일쑤였는데, 황 씨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종국이 두산의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작업에 필요한 얘기 외에는 일절 하지 않았다. 종국은 그런 황 씨가 마음에 들었다.
그게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어제 낮, 백화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택시를 기다리던 윤수일이 또 돌발 행동을 했다. 이번엔 좀 심각해 보였다. 보고에 따르면 차도로 뛰어드는 바람에 하마터면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다.
급히 두산에게 삐삐를 치고 종국도 움직였다. 도보와 자가용으로 뒤를 쫓던 미행조가 택시를 탄 윤수일을 놓칠 뻔했지만, 다행히 택시는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동생들이 겨우 윤수일을 잡았다. 두산도 이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시가 내려왔다.
윤수일을 혼자 서울로 보낸 두산은 종국을 데리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행님이 알아서 해도. 내가 나서면 감당 안 될 끼다.’
두산은 지극히 차분한 상태였다. 평소 까불고 말 많던 두산이 차분해지면, 그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얘기였다. 이때 건드리면 뼈 하나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윤수일의 일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종국은 짧게 답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구나 싶어 조금 긴장도 됐다.
짐작대로, 황 씨가 먼저 창고에 임상엽을 잡아 두고 있었다. 의자에 온몸을 묶어 놓고 눈을 가린 채였다. 빤스 한 장 차림으로 앉은 임상엽은 기절해 있었다. 두산은 되도록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종국은 황 씨가 준비해 둔 상하의가 붙은 작업복을 걸치고 가죽 장갑을 꼈다. 준비를 모두 마치자 바로 정강이를 걷어차서 임상엽을 깨웠다.
‘아악!’
그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임상엽은 허세를 부렸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두리번거리고 킁킁 냄새도 맡았다.
‘아이, 씨팔, 니들 누구야? 누군데 나한테 이래? 어? 내가 누군지 알아? 나 건드리면 니들 다 죽어!’
두산이 짧게 웃었다. 돌아보자 광기 어린 눈이 임상엽을 쏘아보고 있었다.
‘보이는 데 빼고.’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한 두산은 종국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너 누구야?’
사람 말소리가 들리자 임상엽이 즉각 반응했지만, 종국이 정강이를 걷어차자 바로 조용해졌다. 종국은 좌우 정강이를 번갈아 가며 찼다. 이어 허벅지와 배, 가슴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임상엽은 눈이 가려진 채 당하는 폭력에 속수무책이었다. 오줌을 지린 것도 그쯤이었지만, 종국은 멈추지 않았다.
종국은 급소를 피해 제일 아픈 곳만 때렸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으윽… 큭, 저… 살려… 아야야야야, 자, 잠깐! 살려 주세요!!’
임상엽은 있는 힘을 다해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두산이 손을 들었고 종국은 멈췄다.
‘아이, 진짜… 흐으윽, 왜 이러세요 정말… 크흡.’
‘문일준, 한정숙, 공기훈 그리고 백태섭. 기억나는 거 있제?’
황 씨가 물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저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했습니다…. 진짜예요. 살려, 주세요. 흐흐흑, 저 정말 한마디도 한 적 없어요.’
종국은 황 씨가 뭘 묻고 있는지 아는 바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다만 백태섭이란 이름이 귀에 익었다. 백씨라면 두산과 친인척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기대 있던 두산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두 손을 맞잡았다.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다. 혀로 입술을 적시는 모습이 꼭 먹이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산짐승 같았다. 두산은 종국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종국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폭행을 재개했다.
이 바닥에 오래 굴러먹은 사람들은 폭행에 이골이 나서 때린다고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나 제 목숨이 걸린 문제라 생각하면 차라리 얻어터지는 쪽을 택했다. 임상엽도 마찬가지였다. 나 죽는다고 난리 치고 발버둥 쳤지만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1시간 동안 폭행은 멈추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종국은 땀을 뻘뻘 흘렸다. 오랜만에 주먹을 쓰니 아무리 가죽 장갑을 끼고 있어도 손에 무리가 왔다.
손목을 돌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두산이,
‘나이프.’
했다. 그러자 황 씨가 잭나이프를 종국에게 던졌다. 진작에 줄 것이지. 종국은 칼을 받으며 두산을 향해 씩 웃었다. 버튼을 누르자 칼날이 튀어 나왔다. 어찌나 잘 갈아 놨는지 번쩍번쩍 광이 났다.
‘문일준, 한정숙, 공기훈, 백태섭. 아직도 생각나는 거 읍나?’
황 씨는 차분한 톤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흐윽, 개새끼들아… 큭, 내가 니들 같은 새끼들 한두 번 만나는 줄 알아? 때려 봐 개씹새들아.’
여전히 입을 놀리는 걸 보니 아직은 살 만한가 보았다. 종국은 칼날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종국이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고문 방식은 날카로운 칼로 스치듯 살을 베는 거였다. 종이에 손가락만 베여도 사람들은 아픔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물며 온몸에 비슷한 상처를 남기면 백중 백 입을 열었다.
칼로 찌르는 것보다 위험 부담은 덜하고, 고통은 더했다. 베인 상처에 알코올이나 물을 부으면 효과는 더 빨랐다. 아니나 다를까, 임상엽도 이런 고문은 당한 적이 없었는지 5분도 안 돼서 똥을 싸며 입을 열었다.
‘마, 마, 말, 할게요. 그, 그게….’
임상엽은 목소리가 잔뜩 쉬어 쇳소리를 냈고, 심하게 떨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황 씨가 그런 남자에게 물을 먹였다.
여태 앉아서 관망하던 두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국은 자신이 나가야 할 시점이란 걸 알았다. 피 묻은 칼을 작업복에 쓱쓱 닦고 칼날을 도로 집어넣었다. 두산에게 칼을 건네주고 밖으로 나왔다.
녹슨 창고 문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주위엔 자재 창고가 가득했다. 서울도 비가 내렸다. 종국은 피 묻은 가죽 장갑을 벗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곧 황 씨도 나왔다.
‘오랜만에 땀 뺐는데 기름 좀 칠해야지.’
‘예.’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황 씨가 앞장섰다. 두 사람은 삼겹살에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딱 2시간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창고로 돌아가자 두산이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 끝났나?’
‘예. 아재요, 저거 집에 보내지 말고 하룻밤 여서 재우시예. 나이트에도 휴가 낸다꼬 대신 연락해주고, 집에는 이 내용으로 쪽지 하나 남겨주이소.’
두산은 뭐라고 휘갈겨 쓴 명함을 내밀었다. 황 씨는 명함을 받아 흘끔 쳐다보고는 곧장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다.
‘절마 친구 이름은 내가 알아서 적으께.’
‘예.’
황 씨는 두산의 어깨를 툭 쳐 주고 창고로 들어갔다.
‘한 시간 전에 휴게소라꼬 삐삐 왔다.’
두산은 가만 고개를 끄덕이며 볼이 팰 정도로 담배를 깊숙이 빨았다. 주먹에 피가 묻은 거로 봐선 참지 못하고 한 대 친 모양이었다.
‘내는 비행기 타고 바로 내리갈라니까 행님은 여 남아서 수고 쫌 해도.’
‘오야.’
‘수일이 행님 미행은 딴 새끼한테 맡기지 말고 행님이 직접 하고.’
‘어.’
‘부산서 보자.’
두산은 비가 고인 웅덩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피 묻은 손을 씻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씨발, 먼 놈의 비가 이래 오노?’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놈이었다. 커다란 몸을 일으킨 두산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 길로 종국은 황 씨에게 간다는 인사도 없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고속 터미널은 너무 넓고 복잡했다. 다행히 윤수일이 하얀 옷을 입고 있어 눈에 띄었다. 윤수일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지만, 그 정신에도 소지품들은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자가용을 몰고 버스를 뒤쫓아온 재민과 동생들을 맘껏 놀다 오라고 보낸 종국은 두산의 말대로 혼자 움직였다.
종국이 보기에 윤수일은 서 있을 힘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미친 새끼라 방심은 금물이었다. 다행히 나이트로 갔다가 얌전히 임상의 집에서 잠을 청했다. 종국은 근처 도청 장비가 빼곡한 방에서 황 씨의 사람인 다른 남자와 밤을 지새웠다. 쪽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방이 너무 좁아 발 뻗고 누울 수도 없었다. 반면 남자는 코를 골고 잘도 잤다.
온몸이 뻐근해서 끙끙 앓았다. 맞은 사람도 아프겠지만 때린 사람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임상엽을 때릴 때 사용했던 오른손이 욱신거려 제대로 팔을 들 수도 없었다. 종국은 부산에 가면 병원부터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을 꼴딱 새운 종국은 황 씨가 제발 임상엽을 빨리 보내 줬으면 했다. 좁아터진 방에서 나가고 싶었고 뭐라도 먹고 싶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임상엽이 나타난 건 오늘 아침 8시쯤이었다. 둘은 차분하게 얘기를 나눴다. 고함 한번 지르지 않았다. 함께 있던 남자는 헤드폰을 쓰고 부지런히 무언가를 받아 적었다. 종국이 볼까 몸으로 공책을 가리기까지 했지만, 종국은 정말 대화 내용 같은 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방에서 나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윤수일이 그 집에서 짐을 들고나온 건 9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골목에 숨어 지켜보던 종국은 중간중간 몸을 풀었다. 골목을 내려가던 윤수일은 무슨 이유에선지 다시 임상엽의 집으로 돌아갔다. 종국도 급히 뒤를 따랐다.
얌전하던 윤수일은 미친 듯이 임상엽을 패고 있었다. 죽으라고 울부짖었다. 손에 집히는 건 뭐든 던졌다. 그러다 칼을 손에 들었을 땐 달려가 말릴 뻔했지만, 다행히 스스로 칼을 놓았다. 종국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기했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임상엽을 실컷 두들겨 팬 윤수일은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게 묘하게 슬펐다. 표정도 울음소리도 꼭 어린아이 같았다. 참 이상한 남자였다.
윤수일은 목놓아 울면서 골목을 내려갔다. 길을 알고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벽에도 부딪히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도 했다. 그러다 돌에 걸려 엎어졌다.
“하이고, 가지가지 한다.”
종국은 헛웃음이 났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되레 안쓰러웠다. 달려가서 일으켜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러면 안 되기에 가만히 두고 보았다. 윤수일은 엎어진 채 울다가 두산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섰다. 그렇게 잘 챙기던 쇼핑백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짐들을 모두 버려두고 두산의 이름을 부르며 걸었다.
하는 수 없이 종국이 쇼핑백을 주웠다. 통장과 돈이 든 가방도 있었다. 이게 없으면 택시는커녕 버스도 탈 수 없었다. 종국은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더 깊숙이 내리고, 윤수일을 잡았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새 눈가며 얼굴이 새빨갰다. 그 큰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초점 잃은 동공은 종국이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거.”
이렇게만 말하고 쇼핑백을 안겨 주었다. 윤수일은 그 와중에도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뒤를 바짝 따라가도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택시에 합승까지 했는데, 윤수일은 뒷좌석에서 팔뚝에 얼굴을 묻고 울기만 할 뿐 종국이 타고 있는 걸 몰랐다.
“두산아, 흐윽, 두산아.”
미친 남자지만 어딘지 불쌍했다. 저 잘생긴 얼굴로 정신을 놓은 게 안타까웠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고서야 윤수일은 울음을 그쳤다. 택시에서 내리면서도 저 혼자 타고 온 줄 아는 듯했다. 종국은 돈 내는 걸 잊은 윤수일을 대신해 택시비를 내고 한 발짝 늦게 내렸다.
표를 파는 창구로 걸어가는 것까지 보고 종국은 재민이 주차해 둔 차로 돌아갔고, 그다음부턴 동생들이 맡았다. 차 뒷좌석에는 어제 윤수일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온 남녀 두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행님, 양귀비 떴습니다.”
무전이 울렸다. 양귀비는 윤수일을 부르는 암호명이었다. 황 씨가 지은 별명이었다. 황 씨는 윤수일을 예쁜 미친개이라 불렀는데, 언젠가 웃는 사진을 보고 양귀비꽃이 떠올랐다고 했다. 두산은 그 별명을 좋아했다. 왜 좋아하는지 종국은 알 수 없었지만, 뭐 그렇게 부르라니 그렇게 불렀다.
버스 출발 시각이 다 되어 가는데도 재민이 이 새끼는 올 생각을 안 했다. 종국은 몇 번이고 뻑뻑한 눈을 꾹꾹 눌렀다.
“이야, 억수로 복잡다. 까딱하믄 미아 되겠네.”
재민이 운전석에 오르며 이렇게 말했다. 종국이 째려보자 ‘죄송합니다, 행님’ 하며 캔 커피부터 내밀었다.
“치아라, 내 잔다.”
“예. 푹 주무십시오.”
“아들 다 태우고 가는 거 잊지 말고.”
“걱정도 팔자다. 놓고 가면 즈그들이 알아서 오겠지예.”
재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스가 막 출발했다는 무전을 받았다. 재민이 차를 움직였고, 종국은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차가 출렁거리며 동생들 둘이 뒷좌석에 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행님, 휴게솝니다.”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동생 셋은 동시에 차에서 내려 화장실로 달려갔다. 종국은 기지개를 펴고 잠깐 정신을 차린 다음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로 향하는데 볼일을 보고 나오는 윤수일과 마주쳤다. 하얀색 추리닝은 진흙으로 더러워져 엉망진창이었다. 울고 있진 않았지만, 여전히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보였다. 사람을 안 보고 다니는지 종국이 지나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윤수일은 종국을 지나쳐 공중전화로 향했다. 같은 버스에 태운 젊은 여자가 핸드백을 뒤지는 척하며 윤수일을 따라갔다.
화장실로 가려다 종국도 발길을 돌렸다. 윤수일이 또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걱정이 돼서 차마 혼자 둘 수가 없었다. 훈련된 여자라 해도 성인 남자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물며 미친 남자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종국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윤수일 근처를 배회했다.
윤수일은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다리가 풀렸는지 부스에 기댄 채로 몇 번이고 주저앉을 뻔했다. 뭐라도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올려 둔 윤수일은 다행히 매점으로 향했다. 오렌지 주스와 빵을 하나 사 들고 버스에 올랐다.
여자도 비슷한 걸 사서 윤수일 다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종국은 그제야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보고 두산에게 음성을 남겼다.
종국이 탄 자가용은 버스 뒤를 쫓으며 또 세 시간을 달렸다.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가는 걸 보고 차에서 먼저 내린 종국은 플랫폼으로 뛰어갔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두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산은 종국을 보고 씨익 웃었다. 종국은 모르는 사람인 양 두산을 스쳐 지나쳤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고개를 돌렸다.
“참, 내가 아까 말하는 거 까묵었는데, 저 양반 엎어지서 손바닥 좀 까짔다.”
두산은 돌아보지 않고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윤수일이 탄 버스가 완전히 멈추고 문이 열렸다. 두산이 앞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어찌 서 있나 싶을 정도로 기운 없어 보이던 윤수일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두산을 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종국은 윤수일이 웃는 걸 처음 보았다. 새삼스럽게 남자가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양귀비.”
종국은 엷은 미소를 띠며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부산엔 여전히 비가 내렸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