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제법 내렸다. 운치 있었을 비 내리는 풍경은 두산이 단 창살 탓에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이른 시간임에도 번쩍 눈이 떠진 수일은 침대 옆자리가 빈 것을 보고 일어나 앉았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보니 두산이 씻는 모양이었다. 7시 반. 이쯤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면 되는 거린가 보았다.
아침은 무얼 먹여 보내야 하나, 수일은 냉장고를 기웃거렸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얼린 곰국을 끓이자니 30분도 넘게 걸릴 것 같았다.
“뭐 하노?”
수건을 목에 두른 두산이 수일에게 다가오더니 뽀뽀부터 했다.
“너 아침 뭐 먹어?”
“토스트.”
“토스트? 식빵?”
“어.”
“그걸루 아침이 되니?”
“어. 니도 물래? 내 토스트 억수로 잘하는데.”
“아니. 너 먹어. 나는 밥이 좋아.”
두산은 물을 닦는 법을 못, 아니 안 배운 모양이었다. 수건까지 둘렀는데 머리와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일은 두산의 목에서 수건을 빼 직접 닦아 주었다.
“얼굴.”
수일의 말에 두산이 얼굴을 갖다 댔다. 어린아이를 닦듯 꼼꼼하게 닦았다. 물도 안 닦고 나와서 얄미운데 틈만 나면 뽀뽀를 하려고 해서 수일은 수건으로 두산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머리.”
이번엔 머리를 숙였고, 수일은 머리를 탈탈 털어 잘 말렸다. 두산이 좋다고 웃었다.
“생긴 것도 예쁜 기 하는 짓도 예쁘네.”
“헛소리하지 말구. 정말 식빵 먹을 거야?”
“에헤이, 서방님이 말씀하시는데 헛소리가 머꼬? 이거 안 되겠네.”
짐짓 엄하게 꾸짖는 시늉을 한 두산은 수일의 엉덩이를 움켜쥐다가 손을 꼬집혔다.
입이 한 발 나온 두산은 수일을 식탁에 억지로 앉히고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렸다. 프라이팬이 달궈지자 마가린을 한 덩이 잘라 넣었다. 치이익, 마가린이 녹으면서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저기다 식빵을 구울 건가 했더니, 밥통에서 밥을 퍼서 프라이팬에 넣고 살살 볶았다. 그다음 달걀 두 개를 풀어 같이 볶은 다음 간장을 반 숟가락 넣었다. 냄새가 기가 막혔다. 입에 침이 고이고 배에서는 꼬르륵 난리가 났다.
두산은 프라이팬을 통째로 들어 접시에 밥을 옮겨 담았다. 어디서 배웠는지 조미김을 잘게 부숴 볶음밥 위에 올리고, 마지막으로 깨소금까지 잔뜩 뿌려서 수일의 앞에 턱 하니 내놓았다. 수일은 침을 꼴깍 삼키며 두산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내는 토스트.”
두산은 말이 끝나자마자 양푼에 달걀 다섯 개를 풀고 빠르게 휘휘 저었다. 그다음 식빵을 대각선으로 잘라 계란물에 푹 담갔다. 달궈진 프라이팬을 화장지로 쓱쓱 닦더니 그 위에 다시 마가린을 바르고 계란물을 입힌 식빵을 올렸다.
두산이 요리하는 동안 수일은 백김치를 조그만 접시에 담았다. 당장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해 준 사람 성의도 있어서 꾹 참았다.
수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두산은 후딱 토스트 여섯 장을 구워 접시에 쌓았다. 우유를 꺼내 수일에게도 한 잔 따라 주고 자기도 한 잔 따랐다.
“너 이런 거 언제 배웠어?”
수일은 밥을 한 숟가락 떠 넣으며 물었다. 들어간 것이 별거 없는데도 상상 이상으로 맛있었다. 눈을 크게 뜬 수일은 한 숟갈을 더 떠 입에 넣었다.
“누군지 기억은 안 나는데 전에 사깄던 가시나 하나가 내한테 이거 해주따. 맛도 좋고 만들기 쉬워 보이길래 바로 배았지.”
“아.”
“이것도 함 무 바라. 야도 억수로 맛있다.”
두산이 토스트도 하나 먹으라고 줘서 수일은 얼른 입 안에 든 음식을 삼키고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었다. 설탕까지 뿌려져서 달콤하니 맛있긴 했지만, 역시 마가린 밥이 더 맛있었다. 수일은 우유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밥에 집중했다. 느끼할 때쯤 아삭하고 상큼한 백김치를 올려 먹으면 꿀맛이었다.
“너도 한번 먹어 봐. 진짜 맛있어.”
수일은 제 숟가락에 밥을 퍼서 두산에게 내밀었다. 두산은 빵을 씹다 말고 냉큼 받아먹었다. 젓가락으로 백김치까지 하나 먹여 주자 두산이 엄지를 올렸다.
“내가 했지만 억수로 맛있네.”
“응. 그 여자분한테 상 줘야겠다.”
“니도 갈키주까? 억수로 쉬운데.”
수일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산은 손을 뻗어 수일의 입에 묻은 김을 떼서 먹었다.
“니 아침마다 밥 챙기 줄라 카믄 전날에 미리 준비해 놔야겠네. 만날 마가린밥만 멕일 수는 읍다 아이가.”
“뭐 하러, 나 오늘만 먹는 거야. 너 첫 출근이니까.”
“에헤이, 같이 밥 묵고 나 출근하면 니는 도로 자믄 되지. 먹고 바로 자면 살도 찌고 좋다.”
“어떻게 맨날 그래. 너 요리할 줄도 모르는데.”
“다 방법이 있다.”
두산은 마지막 남은 토스트를 한입에 깔끔하게 삼켰다. 수일이 밥알 한 톨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을 때까지 기다린 두산은 설거지까지 자기가 했다.
“여기서 가까워?”
“어. 밀레니엄 앞에 있는 빌딩 있제? 10층짜리. 거다.”
“정말 가깝구나.”
“점심때도 오께.”
“아냐. 나 피곤해. 오늘은 늦잠 잘 거니까 나 신경 쓰지 말구 회사에서 점심 먹어. 저녁은 같이 먹자.”
수일은 두산을 따라 옷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두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밀레니엄에 출근할 때도 늘 정장 차림이었던지라, 두산은 별 고민 없이 잘 다려진 셔츠 하나를 꺼내 걸쳤다. 수일은 두산의 앞에 서서 단추를 하나씩 채우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커피 심부름 시킨다고 화내지 말구, 화난다고 소리치지 말구. 특히 넌 덩치가 커서 위협적이니까 여자들한텐 말 예쁘게 하구. 알았지?”
역시나 대답이 없어 올려보자 두산이 웃고 있었다.
“왜 웃니?”
“좋아서. 내가 말 했었나? 니 아침에 일났을 때가 제일 예쁘다꼬.”
눈곱만 겨우 뗀 얼굴이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몰랐다. 낯간지럽긴 해도 두산의 칭찬이 싫지 않아서 수일은 조용히 웃었다.
수일이 단추를 잠그는 동안 두산은 끊임없이 뽀뽀를 퍼부었다. 입술로도 모자라 단추를 채우는 손을 낚아채서 손가락에도 뽀뽀했다.
“좀 가만있어.”
두산이 하도 여유를 부리는 통에 수일만 마음이 바빴다.
“9시까지 아냐?”
“어.”
“8시 반 넘었어. 얼른 가.”
“차 타면 금방이다.”
“그래두. 신입이 첫날부터 9시 딱 맞춰 오면 누가 좋아하니?”
“지들이 안 좋아하면 또 우짤낀데.”
“어우, 시끄러워. 얼른 가.”
수일은 두산의 등을 두 손으로 밀었다. 두산이 알았다 하며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신었다. 깨끗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닦아 둘 걸 그랬다고 속으로 아쉬워하며 수일은 두산을 따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출근이 한창인지 엘리베이터는 연신 띵띵 소리를 내며 바쁘게 오고 갔다. 계단을 통해 사람들의 말소리나 구두 소리도 들렸다. 두산은 수일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나 가고 나면 더 자라,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삐삐쳐라, 하고 조곤조곤 말을 했다. 수일은 그런 두산을 올려다보며 응, 응 대꾸했다.
“내 갔다 오께.”
“응. 상사들 말씀 잘 듣구.”
수일은 두산의 목을 끌어안고 뽀뽀했다. 쪽쪽쪽, 빠르게 세 번 해 주자 두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엔 두산이 진득하게 입술을 비벼 왔다.
띵,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수일은 발꿈치를 들어 두산에게 다시 한번 뽀뽀했다.
“조심히 다녀와요.”
“어. 난중에 전화하께.”
수일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두산도 따라 손을 흔들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상체를 내밀어 수일에게 뽀뽀하려다 문에 끼였다. 퍽, 몸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음에도 두산은 끄떡없이 뽀뽀를 세 번 해 주고 환하게 웃으며 출근을 했다. 태연한 척해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아프다고 호들갑을 떨지도 몰랐다. 수일은 그 생각에 혼자 웃었다.
대문을 닫고 계단을 올라가는 이 시간이 낯설면서도 설렜다. 두산이 남들처럼 9시에 출근하는 게 괜히 뿌듯했다.
수일은 하품을 하며 집으로 들어가 좀 전에 두산이 설거지한 그릇들을 다시 꺼내 꼼꼼히 씻었다. 어찌나 험하게 설거지를 하던지 그릇이 깨질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혹시 이가 나간 게 있나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그래도 혼수 그릇인데 두산은 너무 조심성이 없었다. 그릇들을 잘 정리해 올려 두고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두산이 말한 예쁜 남자는 거울 속 어디에도 없었다. 세면대에 찬물을 틀고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 좋은 날 청승맞게 웬 눈물인지 몰랐다. 너무 좋아도 울음이 난다더니,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았다.
수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웃어 보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그치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세면대에 얼굴을 박고 울었다.
피부가 얼얼할 때까지 세수를 했다. 고개를 드니 그새 얼굴도 눈도 벌게졌다. 수일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삐죽이 삐져나온 머리에 물을 묻혀 요리조리 잘 말렸다. 머리 모양은 거기서 거기지만 미장원에서 자른 게 더 관리하기 수월한 것 같았다.
두산이 바르는 왁스까지 발라 머리를 잘 정돈한 뒤 수일은 거실로 나가 앉았다. 삼락 형님 관련 뉴스가 나올까 봐 TV도 라디오도 틀 수 없어서 두산이 녹음해 줬던 테이프를 들었다.
빗소리와 사랑 노래를 함께 들으니 울적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수일은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 눈을 감았다. 백화점이 10시에 문을 여니까 11시쯤 가면 좋을 것 같았다.
두산이 하도 옆에 붙어 있어서 몰래 선물을 사러 갈 시간이 없었다. 양복 한 벌쯤 해 주고 싶은데, 두산의 체격에 맞는 국산 메이커가 있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넥타이는 어떤 색깔로 살까. 왠지 푸른색이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푸른색이 있으면 붉은색도 있어야 짝이 맞을 테니 적어도 두 개를 사는 게 좋겠다.
넥타이를 선물하면 두산은 틀림없이 뭐 하러 이런 걸 샀냐고 투정할 것이다. 넥타이는 답답하다고 싫어했지만, 수일이 사 주면 그래도 하고 다니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노래를 듣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당연히 두산이려니 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상엽이었다.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 형, 뭐 해?
“그냥 집에 있어.”
- 자는데 깨운 거 아니지?
“아냐.”
상엽은 유난스레 다정한 말투로 수일의 안부를 물었다. 수일은 얼굴을 찌푸렸다.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무슨 전화를 그렇게 끊어 버리냐? 사람 무안하게?
“…….”
- 정말 오해야, 형.
“무슨 오해?”
- 그거, 여사장이 사진 준 거. 정말 준 적 없어.
“너 내 사고도 알고 있었고 여사장 죽은 것도 알았잖아. 나한테 분명히 그랬어. 좆도 관심 없어서 말 안 했다고. 근데 니 말을 내가 어떻게 믿니?”
수일은 차갑게 내뱉었다.
- 아니, 그게… 아이, 그게 아니라니깐 그르네. 형, 수일이 형, 정말루 오해야. 우리 진짜 아무 일 없었어. 형두 그냥 재수 없게 사고가 난 거지 그거 여사장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진짜야!
상엽의 변명을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난번처럼 이성을 잃을까 봐 수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상엽이라면 기둥서방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너, 기둥서방 이름 알지? 기억하지?”
수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상엽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 어? …어, 당연히 기… 으흠, 아니, 내, 내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 형네 사장….
“구라 까지 마, 개새끼야. 기둥서방 이름이나 말해. 아니면 바로 경찰서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경찰에 얘기할 거리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수일은 일부러 세게 나갔다. 자신이 모든 걸 기억해 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편이 상엽을 다루기 더 쉬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로 상엽의 깊은 한숨과 욕설이 들렸다.
“끊어?”
- 아이, 씹, 좀 기다려라. 나도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지, 그게 뭐 척 하면 착 하고 기억이 나?
상엽인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하려 시간을 끌었지만, 변명을 떠올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푹푹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기둥서방의 이름을 말했다.
- 김도식.
흔한 성씨에 흔한 이름이었다. 이름을 들으면 뭐라도 기억이 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실망감에 한숨이 났다.
- 됐지? 형, 우리 전화로 이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응? 거기 계약 곧 있으면 끝나지? 그때 우리 얼굴 보고 차분하게 얘기해. 경찰서 가네 마네 그런 소리 하지 말구.
상엽은 애원하다시피 했다. 어떻게든 수일의 기분을 맞추려 애를 쓰고 있었다. 상엽이 저러면 저럴수록 수일은 점점 불안해졌다. 교통사고나 여사장의 죽음이 남 일이어서, 먹고살기 바빠서 잊었던 거면 좋았을 텐데 일부러 말을 안 했다는 말로 들려서 더 그랬다.
“그래. 만나서 얘기하자.”
- 어. 형. 잘 생각했어. 우리 만나서 얘기해. 우리가 일이 년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이런 일로 오해 생기는 거 나도 정말 싫어. 내 맘 알지?
만나서 얘기하잔 한마디에 상엽은 안도한 듯 웃고 있었다. 개새끼.
“끊어.”
- 그래. 들어가.
김도식. 누구도 기둥서방을 김 의원님이라 부른 적이 없었다. 여사장도 늘 의원님 아니면 자기야 하고 남자를 불렀고, 하다못해 김도식이란 이름으로 우편을 받은 적도 없었다.
남자의 이름을 알아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상엽을 만나서 직접 듣는 것 말고 수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무기력감이 수일을 덮쳤다.
어제처럼 몸이 축 처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밖으로 나갈 기운도 없어질 것 같아서, 수일은 손바닥으로 제 뺨을 두어 차례 때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한 대 더 때렸다.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시간은 어느덧 10시 반을 향해 갔다. 어물대다간 점심 먹으러 나오는 두산과 마주칠지도 몰랐다. 수일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새벽에 몰래 두산의 목둘레를 잴 때 쓴 실을 챙기고, 혹시 몰라서 옷장을 열어 두산이 입는 양복 재킷의 메이커와 사이즈를 살폈다.
“많이 비싸면 어쩌지….”
수일은 영어로 된 메이커 이름을 메모지에 적으며 걱정부터 했다.
백화점 점원에게 얕보일까 봐 수일은 자신이 가진 옷 중에 제일 좋아 보이는 셔츠와 정장 바지를 걸쳤다. 들고 나갈 만한 가방이라곤 나이트에 가지고 다니는 소지품 가방밖에 없었다.
그 흔한 싸구려 서류 가방조차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지금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서 수일은 소지품 가방 안을 비운 뒤 그걸 메고 나왔다. 새 구두도 신으려다가 비가 와서 포기했다. 대신 낡은 구두를 구두약으로 꼼꼼히 윤이 나게 닦았다.
비가 쏟아졌다. 수일은 검은색 우산을 쓰고 가까운 은행부터 들렀다. 얼마를 쓰게 될지 몰라서 일단 오십만 원을 뽑았다. 이 돈이면 웬만한 메이커 양복 네다섯 벌은 사고도 남았지만, 국내 메이커에는 두산의 체격에 맞는 옷이 없을 것 같았다. 수일은 조금 무리하더라도 두산에겐 좋은 걸 사 주고 싶었다.
50만 원을 출금하고도 통장엔 제법 돈이 있었다. 여윳돈이란 걸 가져 본 적이 없던 수일에겐 통장에 찍힌 금액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돈을 보고 든 생각이라곤 올겨울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겠구나 정도였지만. 수일은 보물이라도 되는 양 통장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주고, 비닐 커버에 잘 넣어서 소지품 가방 깊숙이 넣었다.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던 지갑도 일부러 앞주머니에 넣고 손을 넣어 꼭 쥐었다. 대로변으로 나가는 길에 두산이 일하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10층짜리 건물은 오늘따라 왠지 더 멋져 보였다. 간판이 없어서 몇 층에 두산의 사무실이 있는지 몰랐지만, 저 건물 어딘가에서 두산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괜히 제가 다 설레고 떨렸다.
어디서든 잘 적응할 남자라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만 직장 상사나 동료들이 첫인상 때문에 두산을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무서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비에 구두가 젖을까 봐 수일은 걸음을 재촉했다. 나이트를 지키고 선 건달도, 줄을 선 손님들도 없는 낯선 밀레니엄 건물 앞 대로변에서 수일은 택시를 잡아탔다. 두산과 함께 갔던 백화점 이름을 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상엽은 무얼 숨기고 싶어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까. 상엽과의 대화를 곱씹던 수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두산의 선물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나쁜 생각,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백화점에 혼자 온 건 처음이라 긴장됐다. 엄청 비싸고 좋은 호텔에 두 번이나 묵어 봤으니 여기서도 잘 해내리라 다짐하며 수일은 혼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일은 지갑이 잘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안내 데스크로 가 적어 온 메이커가 있는지부터 물어보았다. 제복을 입은 안내원이 그렇다고 답하며, 친절하게 층수까지 알려 주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점점 긴장이 되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 몇 번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수일이 잘 차려입어서 그랬는지 백화점 점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역시나 국내 메이커에는 두산의 사이즈가 없었다.
“선물하실 분 체형이 막말로 미제네예. 이 층에 있는 메이커 싹 다 둘러봐도 몬 살 깁니다. 수입 메이커 파는 데로 가보십시오.”
수일은 조금 긴장한 채로 수입 메이커가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
매장 분위기가 다른 층과 확연히 달랐다. 친절하긴 했으나, 수일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눈이 많았다. 수일이 가격표부터 보자 조금 무시하는 듯한 눈길을 보낸 것도 같았다. 자격지심이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수일은 제일 친절한 매장에서 춘추복으로 나온 남색 양복 한 벌과 셔츠 두 벌 그리고 푸른색과 붉은색의 넥타이 두 개를 샀다. 사다 보니 50만 원으론 어림도 없어서 지갑을 뒤졌다.
택시비만 빼고, 은아 씨에게 빌려주려고 뽑았다가 남은 돈까지 탈탈 털어 간신히 금액을 맞췄다. 넥타이핀 살 돈이 없어서 은행이라도 다녀와야 하나 했는데, 점원이 기분이라며 넥타이핀에 양말 두 개도 챙겨 주어 수일은 신이 났다.
몇 달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을 썼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양손 가득 든 쇼핑백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두산에게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수일은 그칠 줄 모르는 비를 바라보았다. 백화점 입구는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자신이 그들 중 하나인 게 괜히 좋아서 수일은 일부러 택시 몇 대를 양보했다.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이 오려나.
멍하니 비를 바라보다가 수일도 옆 사람을 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척하며 택시가 오는 방향으로 손을 내밀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빠앙, 하고 클락션이 울렸다. 순간, 귓가에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행님, 도식이 행님, 퍼뜩 오이소! 차 출발한다.”
수일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오한이 난 것처럼 전신이 떨렸다. 이가 서로 부딪치며 딱딱 소리가 났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수일은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빵빵.
“도식이 행님, 일루 오라 카니까 어데로 갑니까?”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기둥서방을 만날까 봐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키 작고 뚱뚱한 남자가 수일의 곁을 지나 도로로 뛰어들었다. 택시 바로 뒤 검은 세단에 앉은 중년 남자가 창밖으로 목을 빼고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아, 미안 미안. 택시 때메 몬 밨다.”
뒤뚱거리며 차에 오른 남자가 바로 검은 세단 속 남자가 찾는 ‘도식이 행님’이었다. 그들은 둘 다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기둥서방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수일은 안도 대신 절망했다. 더는 이렇게는 살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순간이 지옥 같았다. 최 군이 그 시작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피가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나가 헛짓거리를 하기 일쑤였다. 이런 식이라면 서울로 가기 전에 정말로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수일은 그게 더 두려웠다.
얼마나 겁에 질렸던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수일은 두산의 옷이 든 쇼핑백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은행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비를 뽑아 서울로 가자. 지금이라도 상엽을 만나 이 고통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조흥은행이 보이자 수일은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길을 건넜다. 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운전자가 욕을 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은행으로 들어서자 경비가 ‘손님, 잠깐만요’ 하며 불러 세웠다. 수일은 앞을 가로막는 경비를 밀치고 바로 데스크로 돌진했다.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데도 무작정 가방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내 내밀었다. 내민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20만 원 주세요.”
은행원의 난처한 표정을 보고도 수일은 꿋꿋하게 20만 원을 외쳤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은행원은 담당하고 있던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일에게 만 원짜리 스무 장을 건넸다.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냥 나가려는데 경비가 수일의 손에 신경질적으로 통장과 도장을 쥐여 주었다.
수일은 그것들을 그대로 쥔 채 도로로 나가 무작정 손을 들었다.
“택시! 택시!!”
차들은 수일의 옆을 쌩쌩 지나쳐 갔다. 천천히 다가오던 빈 택시가 수일의 몰골을 보고 속도를 올리며 사라졌다.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몰랐다. 비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수일을 측은하게 여긴 택시 한 대가 섰다. 노인은 혀를 찼다.
“아이구, 그라다가 골로 갑니다. 나이 믿고 비 맞고 그라믄 안되예.”
“기사님, 서울로 가 주세요.”
“서울로 가면 억수로 좋지예. 돈도 벌고 콧구멍에 바람도 쐬고. 근데 제가 눈이 침침해가 장거리를 몬 뜁니다. 내리실랍니까? 아이믄 시외버스터미날로 가드리까예?”
기사는 친절했다. 수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터미널로 가 주세요’ 했다. 이 택시도 겨우 잡은 데다 비를 맞아 으슬으슬 추웠다. 수일은 쇼핑백을 가슴에 바짝 당겨 안았다. 비에 젖어 종이 냄새가 나는 쇼핑백에 얼굴을 묻었다.
뚝뚝, 수일의 온몸에서 물이 떨어졌다.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터미널로 가는 동안 수일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깜빡하고 놀라서 택시 안을 둘러보기도 했고, 꼭 끌어안은 쇼핑백이 누구 건지 몰라 당황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 안에 든 것이 두산에게 선물할 양복이란 걸 깨닫고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두산만 생각하면 늘 이랬다. 수일은 자기가 사 준 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두산을 상상하며 혼자 웃었다.
평일 낮이라 터미널은 한산했다. 수일은 서울 가는 버스표를 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든 쇼핑백은 제법 젖었지만, 다행히 양복이 든 쇼핑백은 덜 젖었다. 양복에 씌운 커버 덕에 옷도 무사한 것 같았다.
수일은 신줏단지 모시듯 쇼핑백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앞만 보고 있었다. 문득 두산에게 음성을 남겨야지 했다가, 서울 도착하고 나서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교통사고와 여사장의 죽음. 수일은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다. 수일이 망가지는 계기가 된 사고이기도 했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꽉 막힌 과거 때문에 10년 넘게 이렇게 산 게 억울했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비어 있던 서울행 자리에 버스가 들어왔다. 20분 뒤에 출발하지만 수일은 얼른 달려가 표부터 내밀었다. 비에 젖은 수일을 보고 버스 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표는 난중에 받을 깁니다. 가서 앉아계시소.”
기사는 이 말을 남기고 버스에서 내렸다. 수일은 텅 빈 버스 중간 자리로 가서 복도 쪽 의자에 앉았다. 쇼핑백들은 창가 쪽 의자에 내려 두고 안전벨트를 먼저 매 주었다. 여태 손에 들고 있던 통장과 도장도 소지품 가방 안에 깊숙이 넣었다. 양복이 젖었을까 다시 걱정이 되어서, 수일은 양복 커버를 열고 손으로 옷을 더듬었다.
양복은 정말 좋아 보였다. 괜히 비싼 게 아니었다. 손끝에 닿는 천의 촉감도 부드러웠고, 색깔도 무척 세련됐다. 내일 두산이 이걸 입고 출근할 수 있게 우체국에 들러 우편으로 보내 주고 올 걸 그랬다고 수일은 조금 후회했다.
얼굴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일은 소맷자락으로 연신 물기를 닦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젖은 시멘트 바닥은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해 보였다. 승객이 탈 때마다 버스가 출렁거렸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수일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혹시 잠이 들까 봐 뻑뻑한 눈을 억지로 뜨고 있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승객은 수일을 포함해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출발 5분 전 버스 기사가 운전석에 올랐고, 기사 뒤로 남자 둘도 급히 버스에 탔다. 수일은 그들을 흘끔 쳐다보고 다시 비 내리는 터미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툭툭, 누군가 수일의 어깨를 쳤다.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 좀 전에 기사 다음으로 버스에 탔던 그 남자들이었다.
“윤수일 행님 맞으시지예?”
수일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윤수일 씨 아입니까?”
“아니에요.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수일이 귀찮은 듯 인상을 쓰자,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뒤에 선 다른 남자가 버스 안을 돌아다니며 손님들 얼굴을 하나씩 확인했다.
“맞는데?”
버스를 돌던 남자의 말에 수일의 앞에 선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이고, 행님도. 장난도 잘 치신다. 저희랑 같이 가입시다.”
“저 윤수일 아니라구요!”
수일은 언성을 높였다.
“출발 시간 다 됐습니다. 버스 안 탈 끼믄 내리이소.”
기사가 버스 복도를 가로막고 선 두 남자에게 소리쳤다.
“진짜로 죄송합니다. 볼일 끝나면 바로 내리겠습니다.”
뒤에 선 남자가 기사에게 다가가며 사람 좋게 말했다. 인원 체크를 하러 온 터미널 관계자가 버스에 올랐다. 버스표를 넘겨받은 관계자는 기사 옆에 서서 무슨 일인지 지켜보았다.
“행님, 이라지 말고 나가서 얘기하입시다. 버스 출발도 몬 하고 이기 무슨 민폡니까?”
남자가 다시 수일의 어깨를 건드렸다. 수일은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창가 의자 손잡이를 미리 잡았다. 혹시라도 끌고 갈까 봐서였다.
“그냥 가세요. 전 그쪽하고 할 얘기 없어요.”
“거참, 말로 해서 안 되겠네.”
한숨과 함께 우악스러운 손길이 수일을 잡았다. 수일은 일부러 아프다고 난리를 치며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관계자가 끼어들었다.
“너거들,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영업을 방해하고 그라노? 경찰 부르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딱 1분이면 됩니다 1분.”
다른 남자가 기사와 터미널 관계자를 달래는 동안 수일의 앞에선 남자가 수일을 잡아끌었다. 수일은 온 힘을 다해 버텼다.
“정말 왜 이러세요?? 나 윤수일 아니라고!!”
수일은 발악을 했다. 남자에게 딸려 가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고 손잡이를 꽉 쥐고 버텼다. 하지만 수일보다 남자가 힘이 더 셌고, 손잡이를 잡은 손이 터질 것처럼 아파 왔다. 수일은 마지막 발악을 하며 두 발로 남자를 찼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 사람들한테 잡혀가면 저 죽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수일의 살려 달란 말에 승객 두어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 파악에 나섰고, 가만 보고만 있던 버스 기사와 터미널 관계자도 놀랐는지 몸을 움찔하며 수일에게 다가오려 했다. 수일을 잡고 있던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짧은 머리를 앞뒤로 쓸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선지 창가 자리에 놓아둔 쇼핑백을 낚아챘다.
수일은 저도 모르게 쇼핑백을 향해 두 손을 뻗었고,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쉽게 수일을 끌어냈다. 수일은 버스 바닥에 드러누워 발버둥 쳤지만, 쇼핑백이 다른 남자의 손에 넘어가는 걸 보고 바로 저항을 멈췄다. 모든 걸 단념하자 순식간에 몸이 축 처졌다. 힘이 빠진 수일을 일으켜 세운 남자들은 양쪽에서 부축하듯 질질 끌고 갔다.
한바탕 소동에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난 양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일은 고개를 들어 그저 쇼핑백이 잘 있는지만 눈으로 확인했다. 눈앞이 흐려졌다. 눈을 비비자 손등에 물이 묻었다. 빗물인지 아니면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들은 수일을 터미널 식당에 앉혀 놓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앞과 옆을 가로막은 덩치들 때문에 수일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모, 여 오뎅 아홉 개 하고예, 국수 세 개 주이소.”
“저 안 먹을 건데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만 둘 중 누구도 수일의 말을 들은 체하지 않았다.
불친절한 손이 국수와 오뎅 9개가 든 그릇을 던지듯 내놓았다. 수일의 맞은편에 앉은 덩치가 수일의 몫을 내밀었다.
“두산이가 시켰죠?”
“식습니다, 뜨실 때 잡수이소.”
남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기다란 꼬챙이에 꽂힌 오뎅도 한입 베어 물고 국물도 마셨다.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는데, 맛있게 먹는 소리에 갑자기 식욕이 돌았다.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수일은 가만 눈치를 보다가 젓가락을 쥐었다. 두 젓가락쯤 먹고 있는데 수일을 둘러싼 남자들이 제가 먹던 그릇을 들고 급히 옆 테이블로 이동했다. 고개를 드니 두산이 있었다. 수일은 한숨을 쉬고 다시 젓가락을 움직여 국수를 입에 넣었다.
끼이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두산이 앞에 앉았다.
“사장님, 여 물국수 꼽배기 하나 하고 오뎅 세 개 주이소.”
성의 없는 손길이 두산에게 음식을 내왔다. 두산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고 오뎅을 반찬 삼았다. 고개를 들어 수일에게 한마디씩 툭 던졌다.
“맛 좋나?”
“…….”
“그래. 마이 무라.”
목소리는 화가 난 것도 같았지만, 어이없어하는 느낌이 더 강했다. 감히 쳐다볼 수가 없어서 수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국수를 먹었다. 가끔 두산처럼 오뎅을 반찬 삼고 김치도 집어 먹었다. 차가운 몸에 뜨거운 음식이 들어가자 살 것 같았다.
두산이 먼저 그릇들을 깔끔하게 비우고 아직 먹는 중인 수일을 바라보았다.
“한 번 사는 인생 억수로 버라이어티하게 사네. 그래 물에 빠진 쌩쥐 꼴을 해가꼬 이번엔 으데로 갈라 켔노?”
“…서울.”
“와?”
“볼일이 있어서.”
“백화점에서 쇼핑 잘하다가, 갑자기 서울에 볼일이 생깄드나?”
“그게 아니라, 상엽이하고 할 중요한 얘기가 생각나서….”
“갑자기?”
“…어… 니. 그게 갑자기는 아니구…. 원래도, 생각했었는데….”
갑자기였다. 원래는 계약이 끝나면 만나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말문이 막힌 수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젓가락으로 얼마 남지 않은 국수를 뒤적였다.
“무슨 얘기?”
“내 교통사고 얘기.”
“임상엽이 그 개새끼가 사고 냈나?”
“그게 아니구, 나는 사고 난 것만 기억하고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거든. 근데 상엽이는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단 말야. 다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어.”
“지금 서울 가면 상엽이 그 새끼가 다 말해 준다 카드나?”
이렇게 묻는 말투가 삐딱했다.
“말하게 해야지.”
수일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말하게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수일은 살 수가 없었다.
“두산아, 내가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거든? 그러니까 그냥 서울에 갔다 오면 안 될까? 응?”
울컥한 수일은 두산에게 애원했다.
두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일을 가만 응시했다. 화를 내지도 한숨을 쉬지도 않았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수일은 겁이 났다. 안 보내 준다고 하면 어쩌나. 수일은 초조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두산이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리고 결심한 듯 경쾌하게 말했다.
“가라. 니가 그래 가고 싶으면 가야지.”
수일은 두산의 허락이 진짜 허락인지 아니면 비꼬는 말인지 몰라서 눈치를 살폈다.
“나 정말루 궁금한 것만 물어보고 바로 돌아올 거야.”
두 손을 모아 두산에게 빌었다.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허락해 줬으면 했다. 두산은 셔츠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여백에 무언가를 적었다.
“서울 가면 여서 묵어라. 내가 예약해 두께.”
내민 명함엔 백두산이라고 쓰여 있었다. 직책은 따로 없었고 ㈜백영물산이란 회사 이름만 덩그러니 적혔다. 수일은 두산의 명함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바보같이 미소 지었다.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그냥 좋아서 웃음이 났다.
“이거 니 명함이야?”
“어. 오늘 받았다. 니한테 제일 처음 주는 기다.”
“고마워.”
두산이 쑥스러운지 턱으로 쇼핑백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니 옆에 있는 그거, 내 꺼 아이가? 새벽에 내 목에 실 걸고 염병하드만은?”
“어? 어. 맞아.”
“근데 와 안 주노?”
“집에 가서 주려고 했지.”
“지랄. 서울로 들고 튈라꼬 했으면서. 주 바라.”
수일은 두산의 말에 쇼핑백을 건넸다. 두산은 조심성 없이 쇼핑백을 뒤적여 양복부터 확인했다.
“이야, 믓찌네.”
이어, 넥타이 두 개를 꺼내 제 목에 이리저리 대보았다. 상상한 대로 푸른색 넥타이가 정말 잘 어울렸다.
“우리 행님, 돈 쫌 썼겠는데?”
“뭐 조금. 어때, 마음에 들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억수로 좋다. 니 서울 갔다 오면 내 이거 입고 출근하께.”
“응.”
수일은 자신이 산 선물을 좋아하는 두산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헤헤거렸다. 두산이 손을 뻗어 얼굴을 만졌다. 뜨거운 손이 닿자 차가운 볼에 온기가 퍼졌다.
“여서 잠깐 기다리라. 내 퍼뜩 갔다 오께.”
두산은 두 덩치에게 수일을 맡겨 두고 어디를 다녀왔다. 손에 쇼핑백이 들린 걸 보니 터미널 위 백화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이걸로 갈아입고 가라. 감기든다.”
쇼핑백 안에는 수건과 속옷, 흰색의 추리닝 세트가 들어 있었다. 수일은 화장실로 가 수건으로 젖은 얼굴과 몸을 닦고 속옷까지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살에 닿는 옷의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그제야 좀 오한이 가셨다. 젖은 옷들을 잘 개서 쇼핑백에 넣고 나오자 두산이 수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도착하면 전화하고.”
“응.”
“돈은 있나?”
“응. 20만 원 찾았어.”
“밥 잘 챙기 묵고.”
수일은 두산을 꼭 끌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킁킁대며 두산의 냄새를 맡았다.
“나 빨리 돌아올게.”
“그래. 일 잘 보고 온나.”
“응.”
두산은 수일을 내려다보며 잠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씨익 웃으며 수일의 볼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하이고, 우리 광녀이. 보고 싶어서 우짜노?”
“하루면 되는데 뭐. 정 보고 싶으면 내 사진 보구 있어.”
보고 싶단 말에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수일은 일부러 밝게 말했다. 두산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마침 서울행 버스가 터미널 안으로 들어섰다. 두산은 쇼핑백 하나를 더 내밀었다.
“슬리퍼 넣었으니까 그걸로 갈아신고, 내일 신을 양말 하고, 쌍화탕하고 먹을 것 쫌 샀다. 버스 타자마자 쌍화탕부터 묵고. 감기든다.”
“응. 나 진짜루 금방 올 거야.”
“그래. 먹을 거 준다꼬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두산은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거운 농담을 했다.
“고마워, 두산아.”
두산을 한 번 더 안아 보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아서 수일은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랐다.
영화에서 본 건 있어서 두산이 청승맞게 비를 맞으며 창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가. 비 맞아.”
조그만 창문을 열어 손을 내밀자 두산이 손을 꼭 잡았다. 손을 맞잡은 채 입김으로 창문을 뿌옇게 만들더니 하트 모양을 그려 넣었다. 수일을 향해 눈이 안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수일은 두산이 고맙고 또 미안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벌써 두산이 보고 싶었다. 수일은 애써 미소 지으며 손을 마구 흔들고, 창문에 입김을 불어서 똑같은 하트를 그렸다.
두산은 손등에 뽀뽀를 하고 손을 놓아주었다. 곧 버스 문이 닫히고, 차가 서서히 후진하기 시작했다. 두산이 멀어져 갔다. 수일은 부산에 내려왔던 그날처럼 혼자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괜히 눈물이 나서 팔뚝에 얼굴을 묻었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두산을 보러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미치는 한이 있어도 꼭 돌아오리라. 서울로 가는 여섯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수일은 속으로 백두산과 부산을 수천, 수만 번 되뇌었다. 그 두 가지는 절대 잊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뼛속에 새기고 싶었다.
두산이 사 준 옷이 눈물로 흠뻑 젖어 갔다. 수일은 입술을 꾹 다물고 소리 없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