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엽은 아직도 수일의 전화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렸다. 일하다가 실수도 연발해서 이 나이에 손님에게 쥐어박히기까지 했다.
“아이, 씹, 어뜨케 알았지? 미치겠네.”
수일의 입에서 여사장 얘기가 나오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수일에게 그걸 알려 줄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덴동산 직원들하곤 아예 연락이 끊긴 모양이었는데.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상엽에겐 여사장의 죽음보다 교통사고가 더 큰 문제였다. 수일과 통화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 남자가 이 사실을 아는 날엔 저도 죽고 수일도 죽을지 몰랐다. 아니, 저만 죽나? 씹할, 제 방에 드러누워 있는데도 무서워 오한이 날 지경이었다.
가끔 수일이 과거 일에 관해 묻는 날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상엽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냔 식으로 핀잔을 주고 딱 잡아떼면 수일은 금세 수긍했다.
그때마다 우울해하고 시무룩했지만, 그건 자기가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두는 편이 이용해 먹기도 훨씬 편했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상엽의 변명 따위 먹히지 않았다. 수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바락바락 대들고 소리까지 쳤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으, 씨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미쳐 버리겠네, 진짜.”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하긴 했지만, 대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 의사가 수일의 기억은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자신 있게 말했었고, 상엽도 그걸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교통사고의 ‘ㄱ’자도 꺼낸 적이 없어서 더 확신했다.
그런데 그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잔머리라면 누구보다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던 임상엽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졌다. 늦기 전에 대비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덜덜 떠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너 돈 필요하지?’
1981년 12월 30일, 새해를 이틀 앞두고 여사장은 상엽이 일하는 나이트로 찾아왔었다. 화려한 드레스에 모피 코트를 입고 있었다. 목걸이와 귀걸이가 어찌나 반짝이던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렇게 차려입고 상엽을 나이트 근처 허름한 호프집으로 데리고 가서 대뜸 이렇게 물었다.
‘뭘 당연한 걸 물어봐요?’
‘임 군아, 우리 작업 하나 같이 할까? 큰돈 벌게 해 줄게.’
여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은색 철제 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케이스 전면에는 섬세한 무늬가 세공되어 있었다. 수제품 같았다. 비싸고 멋져 보여 상엽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이 닿기도 전에 여사장이 냉큼 담배 케이스를 핸드백에 넣어 버렸다.
‘무슨 작업?’
입맛을 쩝 다시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큰돈 좋아하시네. 이 여자 말은 오십 프로, 아니 삼십 프로만 믿어야 했다.
‘할 거야 말 거야?’
‘당연히 하죠.’
큰돈이든 아니든 일단 돈이 되면 무조건 오케이였다. 게다가 상엽은 당장 돈이 필요했다. 언제는 안 그랬냐만, 지금은 절실했다. 한겨울에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돈 나올 구멍이 없었다. 유일하게 비벼 볼 만했던 수일은 연화 때문에 돌아 버려서 돈 얘기를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럴 때 마침 여사장이 찾아와서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데 상엽의 처지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감사했다.
여사장은 핸드백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누구예요?’
‘연화 죽인 남자.’
‘에이, 아닌데?’
이년이 어디서 사기를 쳐. 상엽은 연화를 죽인 남자가 누군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비죽 웃음이 배어 나왔다.
‘앞으루 연화 죽인 남자가 될 사람.’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여사장이 씽긋 웃어 보였다.
연화가 돈 많은 유부남을 물었다고 했을 때, 상엽은 남자에게서 돈을 뜯어낼 요량으로 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남자는 30대 후반으로 키가 작았고, 특색 없는 얼굴은 누렇게 떠서 볼품없었다. 생긴 건 돈 없게 생겨서는 연화를 데리고 백화점이나 비싼 레스토랑에 자주 갔고, 연화 빚도 제법 갚아 준 모양이었다.
남자는 마누라에 애도 셋이나 있었다. 그런데 연화와 살림을 차린 것이다. 월척을 물었구나 싶어서 상엽은 들떴다. 맹하게 생긴 게 몇 번 협박하면 돈 몇 십은 그냥 받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남자의 출근길을 따라갔는데 재수 없게도 경찰이었다.
나가리였다. 경찰을 잘못 건드렸다간 삼청 교육대로 끌려가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생긴 것과 달리 악질 경찰로 소문이 자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화를 죽인 후에도 그 일을 간결하게 처리했고 뒷말조차 없었다. 말 많고 기가 센 가게 마담도 여사장도 침묵을 지켰다. 경찰이 무서워서도 그랬겠지만, 돈을 받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상엽만 콩고물조차 없었다. 그게 열 받아서 수일이 일하는 가게로 가 연화의 죽음을 알렸다.
한정숙 그년, 그날 연기를 어찌나 잘하던지 상엽은 웃겨 죽는 줄 알았다. 그것도 모르고 수일은 그년의 위로를 받았다. 여사장은 방으로 들어와서 돈 3만 원을 던지며 욕을 쏟아부었다.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 경찰에게 연락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엽은 3만 원을 챙겨서 기분이 좋았다. 통곡하는 수일과 옆에서 같이 눈물짓던 여사장을 보며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여기, 남자가 묵고 있는 호텔 주소하구 방 열쇠.’
상엽인 여사장이 원하는 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일단 호텔 주소가 적힌 종이와 열쇠를 받았다.
‘가서 때리기라도 하라구?’
‘답답하긴. 수일이한테 말 전하라구. 사진은 내가 줄 테니까, 니가 니 발로 연화 죽인 남자 찾은 것처럼 말하란 말야. 그래야 수일이가 믿지.’
‘형은 왜요? 아이, 그 형은 방해만 된단 말야.’
‘바로 그거야! 내가 원하는 거! 수일이가 방해하는 거.’
‘그게 뭔 소리야? 좀 알아듣게 얘기해요. 자꾸 이렇게 말 돌리면 나 안 해?’
여사장의 종잡을 수 없는 말과 행동은 알아줘야 했다. 그냥 속 시원히 말해 줄 것이지 이 와중에도 혼자 영화를 찍고 앉아 있었다.
‘하기 싫음 말구. 100만 원이나 걸린 건데, 너 말구 경식이한테 시켜야겠다.’
100만 원이란 말에 상엽은 입을 떡 벌렸다. 10만 원, 아니 5만 원만 있어도 숨통이 트이겠는데, 100만 원이라니 이게 웬 횡잰가 싶었다. 상엽은 더는 여사장을 재촉하지 않았다. 여자는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랑하듯 어느 유명 정치인이 개최하는 파티에 간다고 말했다.
여사장을 배웅하는데 검은색 그라나다가 호프집 골목에 서 있었다.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저 연놈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데, 상엽은 그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만 알면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아 안달이 났다. 내일부터 여사장을 미행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상엽은 옷깃을 여몄다. 유달리 추운 날이었다.
***
좁은 파출소 안은 수일처럼 술 취해 기물을 파손하거나 싸움을 해서 끌려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취객들 탓에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순경들은 조서를 작성하다 말고 출동하기 일쑤여서, 수일은 세 시간째 파출소에 갇혀 있었다.
그동안 수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돌아 버릴 것 같아서 숫자만 셌다. 일부터 천까지 세고 거꾸로 천부터 숫자를 까 내려갔다. 그러다 대폿집 할머니께 술값을 주고 오지 않은 게 생각났다. 마음이 불편했다. 얼른 처벌을 받고 술값부터 치르고 싶었다.
아까부터 갓 스무 살도 안 됐을 법한 소년이 수일의 주위를 얼쩡거렸다. 저기 끌려온 남자 중 하나가 아버지인 모양이라 생각했다.
물 두어 잔을 얻어 마시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조서를 쓰기 위해 경찰과 마주 앉았다.
“윤수일 씨, 오랜만입니다. 오성관 맞지예?”
“…네.”
지난번에 봤던 나이 지긋한 순경이 수일을 알은체했다. 오성관 박 사장과 친구라고 했던가. 두산과도 잘 아는 듯 보였었다. 순경의 푸근한 미소에 수일은 민망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에이그, 잘생긴 얼굴에 또 기스가 나삤네. 그래 쓸 거면 그 얼굴 내 주이소.”
이렇게 농담하며 수일의 손에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건넸다. 수일은 고개를 꾸뻑하고 커피를 받았다. 달콤 쌉싸름한 커피를 마시자 정신이 좀 들었다.
“근데 그짝은 누구십니까?”
수일은 고개를 들어 순경의 시선이 향한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 소년이었다. 언제 따라왔는지 수일의 옆에 서 있었다. 소년은 수일을 곁눈질하며 보호잔데예, 라고 말했다.
어리둥절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남자가, 그것도 대가리에 피도 안 말라 보이는 애가 수일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누가 누굴 보호한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순경이 수일을 쳐다보며 아는 사람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처음 보는데….”
“아입니다. 보호자 맞습니다.”
소년은 꿋꿋하게 수일의 보호자라고 주장했다.
“뭐 일단 됐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주말이라꼬 여기저기 싸우고 난리가 났다.”
순경은 조금 지쳐 보였다. 수일은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윤수일 씨, 공중전화 때리 뿌순 거 그거 기물손괴죄에 해당하는 거 아시지예?”
“…네. 죄송합니다.”
“다들 술만 치하면 으찌나 공중전화를 때리 뿌수는지. 특히 그기가 터가 안 좋아. 이번이 다섯 번짼가 그렇다 아입니까. 그기만 갔다 하면 막 쏙에서 파괴본능이 샘솟는 가바예. 그지예?”
순경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소년이 큭, 하고 웃었다.
“죄송합니다.”
수일은 소년을 곁눈질하며 순경에게 연신 사과했다. 순경도 남자애가 거슬리는지 미간을 좁혔다.
“보아하니 초범이시고, 내 우리 박 사장 얼굴 봐서 한 번만 봐 드리께예. 반성문 쓰고, 벌금만 내고 고마 가이소. 돈은 있습니까?”
“얼만데예?”
갑자기 난 소리에 수일과 순경이 동시에 소년을 쳐다보았다.
“거참, 얼마면 니가 내실 겁니까?”
“그기 아이라 바가지 씌울 수도 있다 아입니까?”
어린 친구가 이상한 쪽으로 똘똘했다. 처벌을 안 받게 해 준다는데 왜 저런 걸 묻나 몰랐다. 순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요새 아들은 참 생각이 읍따, 했다. 수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애가 자꾸 끼어드니 신경이 쓰였다. 수일은 소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정말 누구세요? 저 아세요?”
수일의 물음에 소년은 딴청을 피웠다. 시선을 출입구로 향했다.
파출소 안은 난장판이었다. 누군가가 의자를 또 던졌고 욕설과 고성이 오갔다. 의자를 던진 남자는 수갑을 차고 유치장으로 끌려갔고, 그사이 누가 바닥에 토했다. 저런 일이 주말마다 비일비재하다며 노년의 순경은 수일에게 볼펜과 빈 종이를 내밀었다.
수일은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술이 덜 깨서 눈앞의 글자들이 일렁일렁 흔들렸다. 속이 안 좋아 몇 번이고 쉬어 가며 겨우 반성문을 다 쓴 다음 지장을 찍었다. 지갑에서 벌금 10만 원을 꺼내려는데 옆에 섰던 소년이 출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막 파출소 안으로 들어서는 누군가를 반갑게 맞았다.
역시나 처음 보는 남자였으나, 옆에서 알짱거리던 소년과 달리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한 손엔 박카스 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형사님들. 먼저 이것부터 받으이소.”
“그거 내물 아이가 내물!!”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민 박카스를 보고 취객 중 하나가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순경은 쯧, 하고 혀를 찬 다음 박카스 상자를 기꺼이 받았다.
“벌금 얼마 나왔습니까?”
“누구?”
“윤수일 씨 보호자 되는 사람입니다.”
수일은 정장 입은 남자를 돌아보았고, 순경은 수일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자신과 초면인 보호자가 둘이나 나타나서 얼떨떨했다. 벌금을 대신 내려는 남자를 수일이 말려 자기 돈으로 냈다. 남자는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제가 잘못해서 내야 할 벌금을 모르는 남자에게 받을 순 없었다.
남자는 수일보다 약간 컸고 늘씬한 체형이었다. 얼굴에 커다란 흉이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준수했다. 흉만 없었다면 학교 선생님처럼 보였을 단정한 인상이었다.
소년이 그 남자를 졸졸 쫓아 나가면서 조잘댔다. 남자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주자 소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수일은 쭈뼛거리며 오성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폿집에 들러 술값부터 치를 생각이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저기,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
수일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남자는 길가에 삐뚤게 세워 둔 차 뒷문을 열었다.
“타십시오.”
수일이 망설이자 남자가 덧붙였다.
“두사이 부탁으로 왔습니다. 타십시오.”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정중했지만 강압적이었다.
두산이란 말에 수일은 얌전히 차에 올랐다. 두산이 자신에게 화가 나서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시킨 거라고 생각했다. 수일도 자기가 이러는 게 지겨워 죽겠는데, 두산은 오죽할까. 달려와 한 대 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몰랐다.
수일은 미쳐도 단단히 미쳐 가는 모양이었다. 부산에 내려온 뒤로 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모두 기어 나와 활개를 쳤다. 수일조차 자신의 감정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애를 먹었다. 하물며 두산은 그걸 오롯이 지켜봐야 했다.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부산에 내려온 첫날처럼, 아무 생각 없고 아무 감정 없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평생 그렇게 살았는데 석 달을 더 그리 못 살았을까? 그랬다면 두산이 좀 더 편했을 텐데, 자기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인지 몰랐다. 수일은 한숨을 쉬었다.
차 안에서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라디오를 켜지도 않았다. 수일은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싫어서 차창을 열었다. 늦더위인지 공기가 텁텁했다. 습관적으로 얼굴을 만지려던 수일은 따가워서 인상을 썼다. 하필 공중전화 파편에 긁힌 곳에 손이 닿았다. 피딱지가 앉기는 했지만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시트로 손을 내리려는데 허리춤에 삐삐가 만져졌다.
메시지가 두 개, 호출이 세 개였다. 아까 공중전화 앞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을 때 왔거나 파출소에 있던 그 세 시간 사이에 온 모양이었다. 파출소 안이 워낙 난장판이었고, 신고 전화도 시시때때로 울려서 삐삐가 온 줄도 몰랐다. 나중에 집에 가서 확인해야지 하며 삐삐를 허리춤에 다시 채웠다.
어느새 밀레니엄이 보였다. 화려한 불빛이 신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서 와서 놀다 가라고 손짓했다. 입구에는 여느 때처럼 덩치들이 줄을 세우고 하나씩 사람들을 골라냈다. 거절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수일보다 백배는 나아 보였다. 불량품은 따로 있는데, 저기서 불량품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니 제가 다 미안했다.
집으로 갈 줄 알았던 자가용은 밀레니엄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 상태로는 두산을 만날 면목이 없었다.
“저, 저기요, 저기요. 그게….”
“노종국입니다. 저기요가 아이고예.”
남자는 무뚝뚝하게 이름을 말했다. 노종국. 종국이.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인데,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자기가 뭔들 기억할까 싶어 수일은 침울했다.
“저기, 종국 씨, 그냥 집으로 가면 안 될까요?”
대꾸가 없었다. 차가 속도를 늦추자 멈추기도 전에 벌컥 뒷문이 열렸다. 팔 하나가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수일을 밖으로 끌어냈다. 종잇장처럼 딸려 나가자마자 뒷문이 닫혔고 차는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휘청대며 균형을 잡으려 했는데, 팔을 잡은 힘에 몸이 홱 돌아갔다. 두산이 턱을 움켜쥐었다.
“아….”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이대로 턱이 뜯겨 나갈 것 같았다. 턱을 움켜쥐고 두산은 수일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하, 씨발. 스크래치 났네.”
두산은 침을 잔뜩 묻힌 검지로 피딱지가 앉은 곳을 쓱쓱 문질렀다.
“아아… 아… 퍼.”
“지랄. 아프라꼬 그란다. 와?”
“아니… 그게….”
“똑바로 몬 서나?”
낮고 엄한 목소리에 수일은 두 다리에 힘을 줘 버텼다. 하지만 술도 덜 깬 데다가 경찰서에서 세 시간 넘게 기다리는 바람에 녹초가 된 상태였다. 그런 사람을 거칠게 잡아 흔들어 놓았으니 제대로 설 리가 없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강풍에 나부끼는 빨래처럼 수일의 몸이 흔들렸다.
두산이 턱을 놓았다. 그 바람에 몸이 또 휘청댔다. 발을 분주히 움직여 겨우 균형을 잡은 수일은 시선도 맞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까 일도, 공중전화 일도 다 자기 탓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단 말은 두산이 싫어해서 수일은 겨우 다른 할 말을 생각해 냈다.
“내 음성 들었지?”
“…….”
“못 들었어?”
“니는 내 음성 들었나?”
“아니 아직. 온 줄 몰라 가지구….”
둘이 얼굴을 마주한 동안에도 끊임없이 자가용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하고 큰소리로 손님을 맞는 덩치들의 인사말과 자동차 엔진 소리로 주차장이 요란했다. 수일은 영업을 방해할까 봐 두산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옆으로 움직였다.
“니 어데 가노?”
“그게… 입구… 방해되니까….”
두산이 헛웃음을 웃었다. 하이고, 한 다음 추임새처럼 ‘내 팔자야’가 따라 나왔다.
“일단 드가자. 니 여 있으면 내 일 몬 한다.”
“응.”
두산은 수일의 어깨를 안아 옆구리에 꽉 끼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처럼 덩치들이 수일에게 정중히 인사했고, 수일도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맞절을 했다.
밀레니엄은 여전히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눈앞에 보이는 널따란 댄스 홀이 마치 딴 세상 같았다. 그곳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멋졌다. 수일은 홀린 듯이 그들을 보며 두산에게 끌려갔다.
룸에 들어가자마자 두산이 수일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눈을 맞췄다. 두산은 그 상태로 수일에게 쪽 뽀뽀했다. 눈도 입도 웃고 있지 않았지만, 화나 있지도 않았다. 다행이었다.
두산이 수일의 이마를 제 이마로 콩 찧었다. 이마를 맞대고 문질렀다. 그 바람에 정전기가 나서 수일의 머리카락 여러 개가 두산의 이마에 들러붙었다.
“너는 나한테 화 안 나니?”
“나지.”
“근데 왜 화를 안 내?”
“참을 만한께나.”
“내가 이러는데도 참을 만해?”
“어.”
“나는 내가 질리는데….”
“그건 니 사정이고. 내 일하고 오께. 여서 덕구하고 노가리나 까고 있으라. 알았나?”
“…….”
두산은 다시 입을 맞췄다. 수일의 입술부터 시작해 긁힌 상처를 따라 푹신하고 다정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슬쩍 손이 닿기만 해도 따갑던 자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수일의 시야에 일자로 다물렸던 두산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를 향하는 게 보였다. 뭐 기분 좋은 일이 있나 싶었다. 그래서 화를 안 내는 건가. 수일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두산의 이마에 붙은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어 주었다.
***
덕규와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수일은 두산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두산은 화도 안 내고 잔소리도 없었다. 더 눈치가 보였다.
“음성, 지금 확인할까?”
“안된다. 난중에 내 없을 때 해라.”
두산이 정색하는 바람에 수일은 알았다고 답했다. 어색했다.
“목… 욕, 할래?”
“어. 하자.”
두산은 그 자리에서 셔츠 단추를 풀었다. 수일이 다가가 단추를 풀어 주려 하자, 뒤로 물러났다. 허공에 뜬 손이 민망해 열이 올랐다. 화가 나긴 났구나. 수일은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술 마시면 내한테 손 몬 댄다. 알았나?”
“응.”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 먹고 경찰서까지 다녀온 주제에 무슨 염치로 먼저 다가갔나 몰랐다. 수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에이, 씨발, 그라믄 내만 손해 아이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하며 두산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시 수일에게 다가와 가슴을 들이밀었다.
“무효.”
“응?”
무슨 말인지 몰라 올려다보자 두산이 씨익 웃었다.
“방금 한 말 무효라꼬. 만지라.”
수일의 두 손을 잡아 셔츠로 가져갔다. 수일은 두산의 눈치를 살피며 단추만 만지작거렸다. 두산이 손을 올려 수일의 볼을 톡 쳤다.
“단추 께룰2) 줄 모르나?”
“해도 돼?”
“어. 오늘만 봐 주께.”
“지난번에도 그랬으면서….”
수일이 말끝을 흐리며 우물거렸다. 두산은 매번 수일을 봐주었다. 그래도 그땐 잔소리도 하고 화도 냈는데 왜 이번엔 안 그러는지 몰랐다. 그게 더 수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맞나? 내가 대가리가 나빠서 지나간 일은 기억을 몬 한다. 쯧. 니 억수로 운 좋네.”
두산은 이렇게 말하며 수일을 재촉했다. 올려다보자 두산이 씨익 웃었다.
“내 오늘 인수인계 때메 정신이 한 개도 없었다.”
“그런 것두 해?”
수일은 단추를 하나씩 끄르며 물었다.
“어. 내 이래 봬도 보안 팀장 아이가.”
“보안 팀장이면 무슨 일하는데?”
“음… 하는 일 읍지.”
하는 일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해 놓고, 제가 생각해도 그 말이 웃긴지 두산은 혼자 키득거렸다.
“못 말려.”
수일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단추를 여는 수일의 손목을 두산이 세게 거머쥐었다. 아프다고 생각하는 순간 입술이 다가왔다. 두산은 고개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사정없이 덤벼들었다.
허리를 한 손으로 안고 다른 손으론 수일의 얼굴을 쥐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꼭 잡고 수일의 입술을 물어 입 안에 가뒀다. 혀와 입술을 거칠게 빨아올렸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신음을 두산이 모두 삼켰다.
수일도 두 손으로 두산의 얼굴을 쥐었다. 입술과 혀에 닿는 모든 것이 뜨거웠다. 옅은 박하 향이 나는 숨결이 달콤했다. 제게선 고작 시큼한 막걸리 냄새나 날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 수일은 입술을 뗐다. 여러 번 떼어 내도 두산이 자꾸 쫓아와서 키스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두산은 수일이 도망가게 두지 않았다. 다급하게 수일의 혀를 찾아 물었고, 침이 흐르면 쭙쭙 소리를 내며 맛있게 빨아 먹었다.
한참을 키스하던 두산의 입술이 이동했다. 혀를 쭉 내밀어 목을 쓱쓱 핥아 올리고, 귀를 입 안에 넣어 혀로 굴렸다. 귓바퀴와 귓불을 이로 자극했다. 수일은 축축하고 따뜻한 혀와 입김에 흥분되기보다 도리어 노곤해졌다. 열렬한 키스에 남은 힘까지 모두 써 버린 수일은 두산을 겨우 버텼다.
수일은 발기해서 꽉 들어찬 두산의 바지 앞섶을 쓰다듬다가 지퍼를 열었다.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손바닥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아흐, 씨발.”
쓰다듬기만 했는데도 두산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좀 더 세게 만져 줬으면 싶은지 수일에게 연신 키스를 퍼부으면서도 수일의 손목을 잡아 성기를 압박하도록 밀어붙였다. 수일은 서둘러 팬티를 내리고 발기한 성기를 지퍼 밖으로 끄집어냈다. 잔뜩 흥분한 자지를 손안에 넣자, 두산의 손이 그 위를 감쌌다.
두 사람의 손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기둥을 부여잡고 압박을 가하며 팔이 아프도록 흔들어 댔다. 두산은 모든 소리를 수일의 입 속에 뱉었다. 끙끙 앓는 소리, 흥분에 겨운 신음, 짐승처럼 헐떡이다 못해 터질 듯한 숨소리까지 모두 수일의 입 안에 토해 냈다. 탁탁탁,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성기를 쳐올리자 두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크읍! 씨… 발.”
수일은 입을 벌려 두산의 ‘씨발’을 받았다. 세 번인가 네 번쯤 받았을 때, 두산이 깊은 신음을 내뱉으며 수일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아, 앓는 소리는 두산이 삼켰다. 사정의 결과물이 수일의 손바닥을 적시고 두산의 손등으로 튀어 올랐다. 맞닿은 옷가지를 더럽혔다.
커다란 근육질의 몸이 흥분으로 떨렸다. 그 떨림을 수일은 고스란히 제 몸으로 안았다. 두산을 꽉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두산은 수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니때메 몬 산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두산이 말했다. 한숨이 섞인 것도 같았다. 만족스러운지 안타까운 건지 아니면 화가 풀리지 않은 건지 수일은 알 수가 없었다. 두산은 한 팔로 수일의 몸을 끌어안고 한참 숨을 골랐다.
정액이 묻은 손으로 바지를 벗고 둘은 함께 목욕했다. 뜨끈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마주 앉았다. 상처가 덧날까 봐 두산은 수일의 얼굴을 조심히 닦아 주었다.
수일은 자신의 마른 몸이 오늘따라 더 초라해 보였다. 아까 잠깐 거울에 보였던 얼굴은 핏기도 없어서 죽은 사람 같았다. 두산은 이런 얼굴을 보고 어떻게 살까 싶었다. 이런 얼굴을 보고 어떻게 발기하나 싶었다.
두산이 손을 뻗었고, 수일은 커다란 손바닥에 제 얼굴을 기댔다.
“두산아, 내 음성 들었지?”
“어.”
“월요일에 첫 출근 할 때 나 꼭 깨워. 내가 너 배웅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꼭 깨워야 해.”
“안 그래도 깨울라꼬 했다. 내는 니 뽀뽀 받고 출근할 끼다.”
“누가 해 준대?”
“에헤이, 해 주야지. 드라마도 몬 봤나?”
“첫날만?”
“으데? 만날 해주야지. 니 뽀뽀 안 해주면 내 출근 안 할 끼다.”
어린아이처럼 막무가내로 졸랐다. 그게 사랑스러워서 수일은 엷은 미소를 띠었다. 고개를 돌려 두산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래. 매일 해 줄게. 손바닥에 대고 작게 말했다.
목욕을 끝내고 수일은 바로 침대에 누웠다. 두산이 후시딘 연고를 가져와 수일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정신이 좀 들었다. 그러자 오늘 무대에 서지 않은 게 생각났다. 아까 삐삐 음성 중 하나는 왠지 은아 씨일 것 같았다. 호출도 두산이려니 하고 확인하지 않았는데, 거기에 오성관 번호가 있을지도 몰랐다.
“나 오늘 무단결근했어.”
마음이 무거웠다. 두산한테 그렇게 출근하겠다고 우겨 놓고 무대에도 서지 않은 채 나이트를 뛰쳐나왔다. 두산이 표현은 안 해도 저를 한심하게 볼 게 뻔했다. 리허설까지 마쳐 놓고 뭐가 급해서 혼자 대폿집에 간 건지 한숨만 났다. 뭐에 씐 사람처럼 허기가 졌다. 혹시 병인가 싶어서 내심 걱정도 되었다.
욕 들어도 싼 일을 저질렀으니, 사장에게 맞아도 할 수 없었다. 월급에서 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장들은 직원이 그 말을 먼저 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박 사장은 더 그럴 것 같아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문제를 만들어 놓고 뒷일을 걱정하는 자신이 싫었다. 서울에 있을 땐 이 정도까지 한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수일은 파출소 순경의 말을 떠올렸다. 정말 터가 안 좋은가, 혼자서 싱거운 생각을 하며 인상을 썼다.
“잘했다.”
“뭐가 잘했어, 무단결근인데.”
“잘했지. 술만 안 처먹었으면 백 점 만점인데, 그기 쪼매 아쉽네.”
장난스레 말하며 두산은 뚜껑을 닫은 연고를 아무 데나 던져 버리고 수일의 옆에 누웠다.
“그걸 그렇게 던지면 어떡하니?”
“발이 달린 것도 아인데 난중에 찾으면 되지.”
심드렁하게 답한 두산이 팔베개를 해 주었다. 쪽 이마에 뽀뽀하고 제 가슴께로 수일을 바짝 당겨 안았다.
“오성관 단속 떴다 카드라.”
“단속? 무슨 단속?”
수일은 두산을 밀어내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경찰.”
“아… 안 그래도 사장님이 다음 주에 보건증 단속 나온다고 했었는데.”
“쯧. 경찰한테 뇌물을 마이 먹여야 단속 정보도 정확하게 주지. 박 사장 저거는 짠돌이라서 안된다 안돼.”
두산이 혀를 찼다.
유흥업소 사장과 경찰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였다. 두산의 말대로 경찰은 단속 정보를 주고 돈을 받았고, 단속하는 척 왔다가 공짜 술과 접대를 받고 나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박 사장도 당연히 돈을 주고 정보를 산 줄 알았는데, 그 돈이 적었나 보았다.
“별일 없겠지?”
“있을 거로?”
두산은 왠지 신나 보였다.
“걸렸어?”
“그건 내도 모르고.”
“영업 정지 먹으면 어떡하지?”
“우짜기는? 니는 집에서 내 출근 도아주고, 점심 같이 묵고, 퇴근해서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러 가고 그라믄 되지. 맞다, 담주 주말에 빙그레하고 3연전 한다. 우리 그거 보러 가자.”
두산은 막힘없이 줄줄 할 일을 읊었다. 은근 영업 정지 당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먹고사는 데 한 번도 곤란을 겪지 않았던 사람 입에서나 나올 말을 두산이 하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데도 또 서운했다. 수일은 두산에게 안겨 근심에 잠겼다. 생각이 많아졌다.
유흥업소가 호황이라 은아 씨를 포함해서 직원들 모두 어딘들 못 갈까 싶었다. 그래도 영업 정지를 먹을 경우, 수일이 겪은 사장들 모두 월급을 주지 않았었다. 그렇게 떼어먹힌 돈만 수백이었다.
빚이 많은 수일 같은 사람들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떼인 돈을 받아 낼 방법이 없었다. 경찰은 일개 나이트 직원보다 사장 편을 들었다. 어디 하소연할 데조차 없었다.
그러는 동안 빚은 불어났다. 이자가 이자를 낳았다. 어김없이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이 돌아왔고, 수일의 사정 같은 건 누구도 봐주지 않았다. 당장 노가다라도 뛸 수 있으면 다행이었고, 그것도 없으면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했다. 굶어 가며 일을 해도 손에 쥐는 돈은 나이트에서 번 돈보다 훨씬 적었다.
조폭들은 갚는 돈이 적으면 신체 포기 각서를 쓰게 했다. 아니면 또 사채를 쓰도록 강요했다. 맞아 가며 신체를 포기하든 사채를 쓰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가 없는 굴레였다. 빚은 족쇄가 되어 매 순간 수일을 옥죄었다. 죽으면 편했을 텐데 이상하게 살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몰랐다. 최 군이 사라졌을 때도 연화가 죽었을 때도,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었을 때도 수일은 도리어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물론 죽고 싶을 만큼 속상한 날이 있긴 했었지만, 한 번도 빚만 남기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일을 나갈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5년 동안 죽어라 일해서 작년 겨울에 겨우 빚을 다 갚았더니,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빚 갚느라 돈 한 푼 모으지 못했던 수일은 당황스러웠다. 병원비와 약값을 대느라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은 월급을 탕진했고, 일을 못 나가니 굶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매달 돌아오던 빚 갚는 날이 달력에서 사라졌다. 더는 사채업자들에게 맞지 않아도 됐고 신체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장례비만 모으면 그냥 자다가 죽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참 신기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배고픈 건 싫어서 꾸역꾸역 노가다를 나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또 살고 싶어졌다. 삶에 대한 의지도 수일에겐 습관이었다. 전생에 잡초였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수일은 혼자 웃었다.
빚 생각을 하니 상엽이 떠올랐다. 그 애도 평생 부모님이 진 빚에 허덕이며 살았다. 기댈 가족이 있다 뿐이지, 알고 보면 수일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이었는데 아까 너무 몰아붙인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밤사이 있었던 일들이 먼 과거같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상엽에게 분노했을까. 상엽의 말대로 그에게 있어 여사장 일이나 자신의 교통사고 같은 건 좆도 관심도 없는 남 일이었을 터였다.
저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도 질릴 만큼 들어서 익숙했는데, 수일은 그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친 사람에게 미쳤다고 해서 지레 찔렸던 건지도 몰랐다.
날이 밝으면 상엽에게 전화해서 지난밤의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수일에게 일어난 일 중 그 무엇에도 상엽의 잘못은 없었다. 그는 그저 제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목격자가 됐을 뿐, 하나도 책임질 일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물어볼 생각이었다. 여사장이 건넨 사진에 관해 아는 것이 있는지, 공중전화에서 수일이 본 환상이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 그것만 물어볼 생각이었다. 상엽에게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수일은 부산에 있는 동안 교통사고에 관한 일들은 묻어 두기로 했다.
더는 두산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무너지더라도 서울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러자고 결심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두산에게 수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먼 생각을 그래 하노?”
“그냥 옛날 일.”
두산이 수일의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 보았다.
“니는 생각 쫌 안 하면 딱 좋겠는데.”
“사람인데 어떻게 생각을 안 하니?”
“그래도 니는 안 하면 좋겠다.”
“하지 말까?”
“어.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고마 내 말만 들어라.”
“생각해 보구.”
“에헤이, 생각하지 말라카니까.”
수일은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웃으며 두산에게 안겼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 속으로 답하며 두산의 건강한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쩜 이렇게 세차게 뛸까. 수일은 혹시라도 제게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음 생애는 두산의 심장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이 건강하고 뜨거운 몸을 평생 지탱해 주고 싶었다.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뛰놀면서 두산과 함께하고 싶었다. 사람으로는 절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길고 긴 하루였다.
***
눈을 떴을 땐 혼자였다. 수일은 두산의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한참을 뒹굴뒹굴했다. 일어나 앉아 얼굴을 만지려다가 찐득한 연고에 손을 내렸다. 두산이 나가기 전에 또 연고를 발라 준 모양이었다.
식탁 위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붉은색 덮개를 씌어 놓았다. 메모도 써 놓고 갔다.
내 일 보러 나간다. 밥은 밥통에 있고 북어꾹은 까쓰렌지에 올리났으니까 데파 무라. 밥 묵고 보약 묵고 쉬라. 난중에 보자 – 서방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