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81)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잖아.”

두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수일은 울컥했다.

***

정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라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이 켜지자 나가려던 손님 중 일부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공포에 벌벌 떨던 수일은 무대 조명이 들어오고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자 기계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일이 몸에 익으면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죽을 만큼 아파도 하게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한가했던 홀은 정전으로 텅 비다시피 했다. 수일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제 몫의 노래를 모두 마쳤다. 박수는 없었다.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은아 씨가 ‘수고했다’ 말해 주고 등을 쓸었다. 수일은 억지로 웃어 보이고 대기실로 향했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니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보나 마나 연화를 죽인 남자였다. 수일이 그토록 찾아 헤맬 때는 모른 척하더니 왜 갑자기 그 남자의 사진을 건넸을까? 분명 다른 말도 했을 터였다. 달랑 사진 한 장만으로 남자의 주소나 행방을 찾을 능력이 수일에겐 없었다.

여사장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배우가 꿈이어서 그랬는지, 항상 연기하듯 과장되게 행동했다. 어떤 날은 지나치게 잘해 주었고 어떤 날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수일과 동료들은 그녀의 기분을 맞추려 늘 애를 먹었다.

연화가 일했던 가게 마담과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둘 사이도 뜨거웠다 차가워지기를 반복했었다. 내내 뜨거웠던 사이는 기둥서방이 유일했다.

수일은 여전히 사진 속 남자가 기억나질 않았다. 하필 머리를 다쳐서는 바보같이 띄엄띄엄 기억하는 자신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수일은 여사장과 관련 있었던 사람들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담과 기둥서방 외에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을 태우고 갔던 장소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겨울바람과 얼어붙은 도로만이 수일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아… 상엽이.

그래. 상엽은 분명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 여사장에게 끈질기게 일자리를 구걸하지 않았던가. 상엽이라면 수일이 사고를 당한 이후에도 여사장을 찾았을 확률이 높았고, 그녀의 죽음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못해도 사진관 사장처럼 들은 소문 정도는 있겠지 싶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문득 상엽이 수일의 교통사고나 여사장의 죽음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먹고살기 바빠서가 아닐 수도 있단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수일은 초조했다. 얼른 상엽에게 전화를 걸어 봐야지 했는데,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자신이 어디까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상엽에게 물어볼 말도 정리해야 했다. 대책 없이 얘길 꺼냈다간 상엽이 아주 입을 다물 수도 있었다.

처음 기억이 떠올랐을 때부터 수일의 마음은 수십 번도 더 바뀌었다. 굳이 10년 전 일을 캐서 어쩌자는 건지, 이런 고민을 한다는 자체에 회의감이 들었지만 모두 잊자는 다짐은 하루도 못 갔다. 어쩌면 상엽이 현명한 건지도 몰랐다. 잊을 건 잊고 살아야 했다.

심신이 지쳐 갔다. 수일은 화장을 지울 생각도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어서 멍하니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무대를 마친 은아 씨가 수일에게 말을 걸었지만 소리는 귀에서 윙윙거리기만 했다. 별 얘기 아니었는지, 은아 씨는 평소처럼 화장을 지우고 짐을 챙겨서 퇴근했다. 나가기 전 돈 얘기를 한 번 더 꺼냈다.

“참, 내일 아침에 돈 잊지 마라. 내 시간 맞차 꼭 가께.”

“네, 누님. 들어가세요.”

“오야. 니도 퍼뜩 드가라.”

가수들의 무대가 모두 끝나고도 두산은 오질 않았다. 삐삐도 감감무소식이었고, 보낸다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뒤 정신이 좀 든 수일은 뒤늦게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원래는 쓰면 안 되는 손님용 화장실에서 몰래 세수를 하고 볼일을 봤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려니 두산이 데리러 오겠다고 한 말이 생각나 섣불리 나가지도 못했다. 1시까지 안 오면 그땐 택시를 타야지 하고 있는데, 두산이 어슬렁거리며 대기실로 걸어 들어왔다. 수일을 보자마자 씨익 웃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잖아.”

두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수일은 울컥했다.

“썽났나?”

“아냐.”

“에이, 썽났는데?”

두산은 능청스레 웃으며 수일에게 장난을 걸었다.

“아니래두.”

기운 없이 대꾸하자 두산이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웠다. 손을 뻗어 수일의 이마를 짚어 보고, 볼을 쓰다듬었다.

“와 이리 몸이 찹노?”

이렇게 말한 뒤 고개를 숙여 수일과 눈을 마주 보았다.

“미안타. 내 진짜로 일찍 올라 켔는데 몬 가게 한다 아이가. 마이 기다맀제?”

“괜찮아. 나 피곤하니까 그만 가자.”

수일은 애써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산이 수일의 소지품과 무대복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수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으데. 회의.”

“어른들 말씀 잘 들었어?”

“뭐 영감들 잔소리는 마이 들었지.”

두산의 철없는 대답에 긴장이 풀렸다. 그제야 수일은 제대로 숨을 쉬고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살 것 같았다.

“니한테 삐삐 칠라꼬 했는데 보내 주야 치지. 다들 으찌나 씨부리 싸턴지. 내 돌아삐는 줄 알았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

“이야, 이래 말하니까 우리 윤수일 씨 어른 같네?”

“그럼 내가 어른이지.”

수일은 투덜대는 두산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두산이 쪽 볼에 뽀뽀해 주었다.

두산과 함께 있으니 든든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수일은 뭐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하면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수일은 옛날얘기 하듯 10년 전 일을 꺼냈다.

“두산아, 나 말야, 10년 전에 교통사고가 났었거든?”

“어.”

“엄청 심하게 다쳐서 석 달인가 넉 달을 병원에 있었어.”

“그래? 클 날 뻔했네.”

두산이 수일을 흘끔 쳐다보며 맞장구쳐 주었다.

“근데 그때 머리를 다쳐 가지구, 기억이 많이 사라졌어.”

“기억 쪼매 사라짔다꼬 사는데 지장 읍따. 니는 내만 기억하면 된다.”

수일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 기억이 사라지고도 10년을 멀쩡히 살았으니까.

“만약에 말야, 사라진 기억이 무지 중요한 거면 어떡하지?”

“안 중요한께나 사라짔지.”

“정말 그럴까?”

“어.”

“니가 어떻게 알아?”

“다 알지.”

두산은 수일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천진난만해 보였다. 두산의 말대로 안 중요한 기억이라 사라진 것 같았다.

“두산아.”

“어?”

“오늘 할래?”

“어!”

“대답 한번 빨라요.”

수일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두산이 좋다고 웃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두산은 수일을 안아 침대로 던졌다. 침대 위를 구르며 수일이 소리를 질렀다.

“나 아직 다 안 나았거든?”

“아, 씨발, 미안. 내 그새 까무따.”

두산은 사과하면서 훌러덩 옷을 벗어 던졌다. 수일도 일어나 앉아 바지를 벗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손이 그렇게 느린 편도 아닌데, 늘 두산이 더 빨랐다. 그는 어느새 홀딱 벗고 수일에게 달려들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몸이 뒤집혔다.

바짝 엎드려 있던 수일의 골반을 두산이 잡아 세웠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축축한 혀가 닿았다. 두껍고 힘센 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덩이 골을 가로질렀다. 맛있는 거라도 되는 양 사정없이 혀로 핥고 입술로 빨았다. 쭙쭙, 어찌나 소리를 내던지 수일은 목까지 벌게졌다.

“흐으… 앗… 아아.”

혀는 끊임없이 구멍 주위를 맴돌았다. 두산은 쓰윽쓰윽 소리가 날 정도로 혓바닥을 쭉 빼고 길게 핥아 올리다가, 살살 구멍을 혀끝으로 건드렸다. 침으로 적신 손가락이 혀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발가락을 오므리며 수일은 엉덩이를 들썩였다.

“씨발, 니 구멍이 제일 예쁘다.”

거기서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건만 두산은 또 엉덩이에 입을 대고 말을 했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미치겠네.”

“아니, 넌 왜 거기서 말을 하니?”

“말이 나오니까 말을 하지.”

뜨거운 입김 대신 다시 혀가 닿았다. 어디서 저렇게 많은 침이 나오나 싶게, 두산은 끊임없이 침으로 엉덩이를 적시고 혀로 핥아 댔다. 수일은 척추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온몸이 오그라들다 못해 발발 떨었다. 엉덩이가 사정없이 떨렸다. 끙끙 앓았다.

혀가 떨어지더니 쿵쿵대는 발소리와 함께 꽃향기가 방 안에 퍼졌다. 몇 걸음 만에 다시 수일에게 당도한 두산은 역시나 아낌없이 오일을 쏟아부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와 동시에 구멍으로 오일이 떨어졌다. 차가운 감촉에 수일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천천히 해.”

“어.”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갔는데 곧장 두 개로 숫자를 늘렸다. 수일은 인상을 썼다. 아프다고 하면 멈출까 봐 이를 악물었다.

“개안나?”

묻는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으응….”

오일 덕에 조금 편해졌지만 두산은 예전처럼 안을 오래 풀어 주지 않고 일단 성기를 구멍에 갖다 댔다.

“씨발, 콘돔.”

다시 쿵쿵 소리가 들리고, 두산이 서랍을 여는 건지 뜯는 건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수일은 엎드린 채 고개를 돌려 두산을 쳐다보았다. 이로 포장을 뜯다가 콘돔까지 찢어서 하나를 더 뜯고 있었다. 바보 같았다.

“빨랑 와.”

“알았다.”

바짝 서서 하늘을 찌르는 성기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두산은 겨우 포장을 뜯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번들거리는 성기 위에 콘돔을 씌우고, 그 위에 다시 오일을 치덕치덕 발랐다. 그리고 수일의 뒤에 앉아 구멍 안으로 귀두를 밀었다.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 엉덩이 위로 미끄러지기만 했다. 두산은 손가락을 넣어 다시 안을 풀어 준 다음,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아앗… 두산아, 깊… 어.”

“얼마 안 들어, 윽, 갔다.”

반도 더 들어온 것 같은데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한껏 솟은 엉덩이는 두산의 양손에 꽉 잡혀 있었다. 두산이 몸을 내려 수일의 등을 덮었다. 점점 체중이 실리는가 싶더니, 성기가 아까보다 더 들어왔다.

“아, 아퍼.”

“머시 이래 쑥 들어가노?”

“뭐래? 흐으, 니가 넣, 읏, 잖아?”

“아이그든. 씨발. 힘. 쫌. 빼라.”

수일이 느끼기에도 너무 안이 꽉 들어차, 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프면 자기가 아팠지 두산이 아플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두산은 숨을 헐떡이며 사이사이 깊은 신음을 토해 냈다.

아파서 욕이 나올 것 같았다. 수일은 이를 악물며 등에 닿은 두산의 뜨거운 몸에만 신경 쓰려 애썼다. 두산이 제 얼굴을 수일의 옆얼굴에 맞대었다. 수일은 두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산이 키스했고 수일이 입을 벌려 혀를 받았다.

흥분한 두산이 입술을 잘 못 맞춰 이가 자꾸 부닥쳤다. 두산은 키스를 포기하고, 수일의 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귀를 입 안에 모두 넣고 혀를 세워 핥고 물고 빨자 수일도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수일아, 씨발, 내, 후으, 좋아, 미치겠다.”

두산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졌다.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처럼 수일을 싸게 해 주면 좋겠는데 아직은 아프기만 했다. 두산만 좋다면 이런 고통은 참을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온몸에 전류가 찌르르 흘렀다. 수일은 그대로 자지러지며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거기였다. 두산이 드디어 그곳을 찾아 잘게 찧기 시작했다.

“하으으으, 아, 아윽, 읏!”

구멍이 미친 듯이 움찔거렸다. 두산의 입술이 수일을 찾았다. 수일은 고개를 돌려 두산에게 입 맞추었다. 고통스러운지 잔뜩 미간을 찌푸린 두산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정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은 수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수일은 신음을 뱉으면서 하염없이 두산을 불렀다. 두산도 수일의 이름을 불렀다. 둘은 혀를 섞고 타액을 섞으면서도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수일의 손등 위로 두산이 손바닥을 올렸다. 마르고 앙상한 손가락 사이사이에 두산의 굵고 투박한 손가락이 깍지를 꼈다. 그렇게 손을 꼭 붙잡고 키스했다. 수일이 먼저 절정에 올랐다. 두산의 허리 짓에 온몸을 파닥거리다가 흐느끼며 사정했다.

“하으, 하아, 하… 아.”

“윽, 씨발.”

두산이 움직임을 잠깐 멈췄다. 어찌나 구멍이 움찔대는지 수일은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았다. 엉덩이와 아랫배가 끊임없이 요동쳤다. 허벅지는 경련하듯 떨렸다. 두산은 깍지 낀 손 하나를 풀어 수일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아읏!”

손만 닿았을 뿐인데 몸이 튀어 올랐다. 두산은 사정없이 떨리는 수일의 아랫배와 젖은 음부를 살살 쓰다듬었다.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에 신음도 떨림도 어느새 잦아들었다. 전신이 나른해질 때쯤 두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일의 등에 가슴을 바짝 붙인 채 조금씩 움직이던 두산이 몸을 일으켰다. 힘이 빠져 아래로 축 처진 수일의 엉덩이를 잡아 세우더니 그대로 사정없이 찔러 왔다.

“악!”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수일은 이를 악물었다. 잠깐 아팠을 뿐, 두산은 다시 그곳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 아으, 흑… 읏!”

“허읍! 씨발, 윽… 하으.”

오랜만에 느끼는 쾌락에 머리가 하얘졌다. 수일은 이불을 쥐어뜯고 비명을 질렀다. 흥분에 자지러지다가 흐느껴 울었다. 두산도 아주 끙끙 앓았다. 다시 두산이 수일의 등에 제 가슴을 바짝 갖다 댔다. 땀에 젖은 몸이 미끄러웠다.

둘은 아무렇게나 혀를 내밀어 짐승처럼 서로를 물고 빨았다. 짜릿한 쾌감에 헐떡이며 섹스에 몰두했다. 수일은 제 안으로 들이치는 두산의 성기가 너무나도 좋았다. 구멍이 미친 듯이 움찔댔다. 두산의 자지를 끊어먹을 듯 바짝 조였다.

두산이 헉헉대며 수일의 이름을 불렀다. 키스를 하자 배 속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사정한 건지 오줌을 싼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수일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제 성기에서 뭐가 계속 나오는 기분이 들었지만, 부끄러움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아흐흐흐, 두산아… 주… 글 것 같애.”

“씨발, 내 쪼매. 크읍, 만.”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목이 쉬다 못해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쯤 두산이 씨발, 하고 사정했다. 이미 전신에 힘이 빠진 수일은 사정한 뒤에도 계속 들어왔다 나가는 두산의 움직임에 하염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두산이 주는 자극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떨고 신음을 흘렸다. 짜릿하다 못해 온몸이 녹아내리듯 흐물거렸다.

성기를 빼낸 두산은 수일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손가락에도 하나씩 뽀뽀했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게 느껴졌다. 수일은 흐리게 웃으며, 두산이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두산은 엎드려 있는 수일 옆에 발라당 천장을 보고 누웠다. 땀에 젖어 얼굴에 들러붙은 수일의 머리카락을 떼 주며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번 더 하까?”

“좀 있다가.”

수일의 대답에 두산은 눈이 안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쪽쪽, 뽀뽀를 했다.

“그렇게 좋아?”

“어. 억수로 좋다.”

“나두.”

이번엔 수일이 뽀뽀했다. 둘은 마주 보고 웃다가 키스했다. 가볍게 서로의 입술을 머금었다가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 두산은 수일을 꼭 끌어안아 제 몸 위에 올렸다. 긴 키스 끝에 수일은 두산의 배 위에 앉았다.

“이번엔 내가 할게. 넌 움직이지 마.”

수일의 제안에 두산은 씰룩이는 광대를 주체하지 못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산통이라도 깰까 봐 걱정됐는지, 웬일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이 웃겨서 수일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었다. 두산은 따라 웃지 않으려고 애쓰다 제 생각에도 이 상황이 웃긴지 결국 소리 내 웃었다.

웃느라 두산의 몸이 들썩였고, 수일의 몸도 함께 들썩였다. 두산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수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수일이 그 손을 맞잡았다. 깍지를 꼈다.

“오늘 안 재울 끼다.”

“누가 잔대?”

수일의 대답에 두산이 또 눈을 휘며 웃었다.

“어우, 못났어 정말.”

수일은 괜한 트집을 잡으며 깍지 낀 손을 제 가슴으로 당겨 꼭 안았다. 두산이 그런 수일을 다정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다른 손을 들어 수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씨발, 내만 불리하네. 이래 예쁜데, 몬생깄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

투덜대는 목소리가 어찌나 달콤한지 수일은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랑해. 차마 밖으로 소리 낼 수 없어서 속으로 말했다.

두산아, 사랑해.

수일은 두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

은아는 식당 일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오랜만에 요리하고 상을 차렸다. 그저 다 같이 모여 앉아 밥을 먹을 뿐인데도 애들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많이 미안했다. 주말에라도 아침은 꼭 함께 먹어야지 다짐했다.

설거지는 첫째에게 맡기고, 늘 입는 분홍색 추리닝 차림으로 은아는 집을 나섰다. 오전 10시까지 위조 보건증을 받으러 가기로 했다. 30만 원. 보건증 하나 가격치곤 비쌌지만 정말 감쪽같다고 했다.

친하게 지내는 같은 협회 소속 언니 소개였다. 은아의 한탄에 자기 경험담을 풀더니 은밀히 업자를 소개해 주었다. 불법이라면 무조건 경계하던 은아도 곤궁에 처하니 별수 없었다. 그런 정보라도 준 걸 감사하게 여겼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이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게다가 착한 수일이 선뜻 돈까지 빌려줘서 한시름 놓았다.

보건증 문제가 해결되자 다음은 성병 치료가 걱정이었다. 어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보건소 검사 대상이 아닌 성병이 하나 더 발견됐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행이라면, 매독은 여전히 2기 초반이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임질도 심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셋 중 두 개가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성병이었다.

병원 간호사들이 저를 두고 뒷말하는 것 같아서 은아는 자존심이 상했다. 몸 파는 여자 아니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몸 팔다 이렇게 되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나마 잘한 일은 혹시 몰라 집하고 멀리 떨어진 보건소에서 검사받은 거였다. 이것도 나이트에서 일하다 만난 동료 가수가 알려 준 방법이었다. 그래야 만에 하나 성병이 발견되더라도 동네에 소문날 일이 없다고 했는데, 정말 현명한 충고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덧 수일이 적어 준 주소에 도착했다. 8층짜리 건물은 크고 비싸 보였다. 여기가 맞나 싶어서 은아는 다시 한번 건물 이름과 주소를 확인했다.

이 금싸라기땅 좋은 건물이야 당연히 백사파 소유일 테지만, 어떻게 두산이 여기 살고 있는지 의아했다. 건물 관리자로 들어앉힌 걸 보면 두산은 나름대로 이름 좀 날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애가 왜 오성관 같은 후진 나이트에서 일을 도와줬나 몰랐지만 말이다.

“부럽다 부러버.”

은아는 1층 엘리베이터에서 막 출근하는 회사원들과 마주쳤다. 정장 차림의 남녀 사이에 있으니 은아의 추리닝이 눈에 띄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붙은 층별 안내 표시판에는 빼곡하게 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인쇄소와 출판사, 무역회사, 대리점 등 업종도 다양했다. 달마다 들어오는 월세만 해도 제법 될 것 같아서 무척 부러웠다. 다음 생애엔 저도 남자로 태어나 깡패나 해야겠다고 은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서며 회사원들을 날랐고, 은아는 7층에 혼자 내렸다. 왼쪽으로 돌아보자 8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육중한 대문이 있었다. 세련된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문이었다. 양각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똬리를 튼 뱀 하나였다. 왠지 섬찟해서 소름이 돋았다.

은아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벨을 눌렀다. 응답이 없었다. 두세 번 더 눌렀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자나?”

속이 탔다. 어제는 은아도 정신이 없었지만, 수일도 넋을 놓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볼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모른 척했었는데, 물어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 큰돈을 선뜻 내주는 수일 같은 사람이 어딨다고, 지 필요할 때만 찾았다. 괜히 미안했다.

한참 만에 인터폰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두산이었다. 이제 막 일어났는지, 목이 잠겨 있었다.

“내 은아 누얀데 수일이 있나?”

잠시 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두산이 계단을 내려왔다. 대문은 여전히 닫아 둔 채 두산이 말했다.

“이 시간에 여는 먼일입니까?”

“내 수일이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지금 잔다. 내한테 하이소.”

문이라도 좀 열 것이지. 은아는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누가 깡패 새끼 아니랄까 봐 분위기가 싸늘했다.

“아니, 내 수일이하고 약속한 일이 있어서 그란다. 수일이 쫌 불러도.”

“그라니까 내한테 말하라꼬. 먼데?”

“니도 참. 고마 불러주면 안 되나?”

“안 되는데.”

나이트에선 나름 친근하게 굴던 두산이 오늘따라 남처럼 굴어 은아는 짜증이 났다. 여기서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얼른 보건증을 받아서 협회에 제출하고 행사를 뛰러 바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야 했다. 아쉬운 건 자기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기, 내가 수일이한테 돈을 쫌 빌리기로 했는데.”

“을마?”

“삼십만 원. 어제 얘기는 다 됐다.”

두산은 대꾸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내려왔다. 이번에는 대문을 열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수표 세 장을 꽂아 은아에게 내밀었다. 은아가 돈을 가져가려고 손을 뻗는 순간, 두산이 제 손을 뒤로 물렸다. 짜증이 치밀었다.

“아이씨, 내 지금 장난할 시간 읍따.”

“장난 아인데?”

고개를 치켜들자 매서운 눈이 은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눈만 번득였다. 은아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달리 조폭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 센 은아라도 두산에겐 어림도 없었다.

“그, 두산아, 내 지금 급해서 그란다.”

“수일이 행님 돈 없는 거 누야도 알제?”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는 내 돈이다. 행님한테는 내한테 빌맀단 소리 하지 말고, 누야가 알아서 말 지아내라. 알았나?”

“…오야.”

“그라고 다시는 수일이 행님한테 돈 빌리지 말고. 걸리믄 내 가만 안 있는다.”

“오야.”

“여 왔다 간 거는 말 하께.”

두산이 다시 돈을 내밀었다. 이번엔 뒤로 빼지 않았다. 은아는 잽싸게 돈을 가로채 손에 쥐었다. 잘 가란 인사 한마디 없이 대문이 닫혔다. 은아는 두산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개새끼. 쌍노무 새끼. 은아는 속으로 욕을 끌어 부었다. 어쩌다 저런 깡패 새끼한테 수일이 걸려들었나 몰랐다. 지금 자는 게 아니라 맞아서 못 일어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최근 수일의 얼굴은 멀쩡했지만 온몸에 멍이 들었을지도 몰랐다.

수일은 맞고 살아도 한마디도 못 할 애였다. 되레 두산의 편을 들겠지. 그런 걸 주위에서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꼭 착하고 순해 빠진 애들한테만 저런 새끼들이 꼬였다. 덩칫값도 못 하는 야비한 새끼들이었다.

은아는 계단에 침을 뱉었다. 다시는 여기 오나 봐라, 오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이를 갈았다.

가까운 은행으로 가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고, 업자가 일러 준 주소로 차를 몰았다. 건물도 없는 공터였다. 은아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흙이 잔뜩 묻은 파란 트럭에서 남자 하나가 내렸다. 중년 남자는 겉으로 보기엔 노가다나 뛰는 사람으로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자 몸에서 쉰내가 났다. 은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남자는 은아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손을 내밀었다.

“이거 사기 아니지예?”

“몬 믿겠으면 고마 가든가?”

느릿한 말투에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내한테 사기 칠 생각 절때 하지 마이소. 내 백사파하고 친한 사이다. 알겠습니까?”

은아가 협박하듯 큰소리로 외쳤다.

남자는 눈빛만큼이나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손을 다시 내밀었다. 영 마음에 안 들었지만 별수 없었다. 현금이 든 봉투를 건네자, 남자는 그 자리에서 돈을 꺼내 셌다. 손톱에 때가 끼어 시커멨다.

아이 씨팔, 머 저런 새끼를 소개해 주노?

은아는 속으로 욕을 하며 남자가 혹시라도 돈을 들고 튈까 봐 예의 주시했다. 돈을 확인한 남자는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위조 보건증을 내밀었다.

“엄마야, 진짜로 똑같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은아가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위조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보건소에서 새로 발급해 준 거라 믿었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생긴 것만 저렇지 전문가가 맞긴 맞나 보았다. 은아는 꾸벅 절을 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입이 귀에 걸렸다. 은아는 30만 원에 인생을 구제받은 기분이었다.

라디오를 틀자 남진의 <님과 함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 코가 석 자라 최삼락의 일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삼락 오빠야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은아는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협회 사무실로 차를 몰았다.

***

수일은 코끼리에게 밟혔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허리 아래로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새벽에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잘 알았지만, 그래도 두산이 원망스러웠다. 나이도 한참 어린 놈이 적당히 봐주면서 해야지, 죽자고 덤비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하자고 먼저 말한 걸 후회하며 수일은 ‘아이고’ 곡소리를 냈다. 돌아눕는 것조차 힘겨웠다. 침대에 고개를 처박고 끙끙 앓았다. 지도 피곤했던지, 두산은 웬일로 안 나가고 수일의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수일은 꼼지락 몸을 움직여 두산의 옆에 바짝 붙었다. 팔을 타고 뜨거운 기운이 전해져 왔다. 노곤해서 스르륵 다시 잠이 들었다.

한약 냄새에 눈을 떴을 땐 벌써 한낮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아까보단 몸 상태가 나았다. 욱신욱신하긴 해도 살 만했다. 킁킁, 한약 냄새를 맡던 수일은 눈을 번쩍 떴다. 녹용과 인삼이 든 저 보약, 저게 원흉인 것 같았다. 저걸 먹은 뒤부터 이상하게 기운이 났다. 몸에 열이 나고 살도 찐다더니, 성욕만 늘었다. 다른 것도 든 게 분명했다.

예를 들면, 흥분제?

하지만 어제 한 번밖에 발기하지 못한 일이 떠올라서 고개를 저었다. 수일은 혼자 킥킥대다가 살림을 때려 부수는 두산의 조심성 없는 움직임에 인상을 썼다. 골이 아팠다. 혹시라도 비싼 혼수 그릇을 깨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두통약이라도 좀 먹어야지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제야 은아 씨가 생각났다. 수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 10시까지 돈 쓸 데가 있어 아침에 찾아온다고 했었는데, 그걸 깜빡하고 있었다. 급한 돈인 걸 뻔히 알면서도 못 일어난 자신이 한심했다.

“두산아… 두산아!”

“와?”

“일루 좀 와 봐.”

수일이 갈 처지가 못 되어 두산을 불렀다. 쿵쿵 발소리와 함께 두산이 방으로 들어서자 한약 냄새가 진동했다. 몸에 약을 쏟아부었나 싶을 정도로 강했다.

“와?”

“혹시 아침에 은아 누님 찾아왔었니?”

“어. 와?”

“아니, 그게….”

아차 싶어 수일은 입을 닫았다. 두산은 은아 씨도 삼락 형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없는 처지에 언제 받는다는 기약도 없이 30만 원이나 빌려주는 걸 알면 난리 칠 게 뻔했다. 두산은 늘 새벽에 나갔다가 점심 무렵에 돌아와서 변명거리조차 생각해 두질 않았다.

“별말 없으셨어?”

“어. 잘 해결됐다꼬 그 말만 하고 갔다.”

“정말?”

“어.”

“정말 해결됐대?”

“어.”

두산은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은아 씨가 갑자기 30만 원이 어디서 생겼을까? 자기에게 말할 정도면 정말 급한 돈이었을 텐데. 혹시 두산이 쫓아낸 건 아닌지 수일은 걱정이 됐다. 그러다 은아 씨에게 돈을 빌려줄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은아 씨라면 주위에 친구가 넘쳐 날 것 같았다. 같은 협회 사람일 수도 있고, 예전 나이트 동료일 수도 있었다. 어제야 당장 주위에 수일밖에 없으니 일단 말이라도 꺼내 본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내심 서운했다.

두산이 보약 그릇을 들고 왔다. 손엔 자두 맛 사탕도 쥐고 있었다. 안 먹으려고 했는데, 기운이 너무 없어서 일단 약을 받아 마셨다. 빈 그릇을 내밀자 두산이 사탕을 까서 입에 넣어 주었다. 사탕은 역시 자두 맛이지. 쭙쭙 사탕을 빨다가 수일은 다시 누웠다.

“내하고 놀자.”

“뭘 놀아?”

“공원이라도 가까?”

“넌 양심도 없니? 나 지금 일어서지도 못해.”

“와?”

수일의 옆에 눕더니 정말 모르겠다는 눈으로 두산이 물었다.

“맛있는 거 무러 가자.”

“집에 먹을 거 많잖아.”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묵자.”

“뭐 먹을 건데?”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 이후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성욕이란 게 참으로 신기했다. 기운도 하나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몇 번이나 섹스를 했나 몰랐다.

수일은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두산을 따라 나갔다. 현관을 나서며 두산이 말했다.

“내 밀레니엄 그만두따.”

별일 아니라는 투였다. 너무 태연해서 수일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산이 수일을 돌아보았다.

“잘렸니?”

하이고, 하고 웃었다.

“으데.”

“근데?”

“내 담주부터 사무실 나간다.”

“사무실 어디?”

“무역 회산데 일 쫌 배울라꼬.”

수일은 두산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무역 회사가 국민학교만 졸업한 사람을 고용한단 말인가? 사무실 일이 노가다도 아니고, 어림도 없었다. 수일이 그런 말을 믿을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진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에 두산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할배 회사. 빽으로 들어간 기다. 회사 댕기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든 해야지.”

검정고시란 말에 수일은 눈을 크게 떴다. 연이은 충격에 그저 어리둥절했다. 두산이 밀레니엄을 관두고 무역 회사에 들어간다. 듣긴 들었는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건만 당황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이 컸다.

“깡패 그만둘라꼬.”

두산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여 웃었다.

수일은 두산이 깡패를 관둔단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해야 했지만, 되레 가슴이 턱 막혔다. 귀가 먹먹했다. 두산에게 좋은 일이 생겼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왜 그런지 몰랐다.

“잘됐네.”

수일은 두산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올려다보며 거짓으로 웃었다.

“정말 잘됐어. 축하하는 의미에서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오늘은 내가 살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솔직히,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일을 길 가던 사람에게 말하듯 제게 쉽게 던지는 두산이 미웠다. 마주 보고 앉아서 차분하게 얘기하지 않고 통보하듯 말하는 게 너무나 서운했다. 서운해하면 안 되는데, 알면서도 서운했다. 수일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몰랐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보았다. 유달리 허기가 졌다. 수일은 아픈 건지 고픈 건지 모를 허기에 배를 움켜쥐었다. 팔짱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수일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다. 자신만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이 바닥 사람들과 정말로 똑같아졌다. 심지어 그 상대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 남자의 출셋길이 열렸는데 그걸 시기하고 질투했다.

출발선이 다른 누군가를 부러워한 적은 있어도 나보다 잘나간다는 이유로 미워하거나 시기한 적이 없었던 수일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당혹스러웠다. 서운하다는 말로 포장했지만 이 감정이 시기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남도 아닌 두산이 잘되는 일인데,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게 너무 부끄럽고 서글펐다.

같은 회사원일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와 데이트하는 두산이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회사 사장 손자인데 학력이 무슨 흠이 될까 싶었다. 게다가 두산은 사교성도 좋아서 누구하고도 잘 어울릴 터였다. 수준에 맞는 여자든 아니면 남자든 골라서 사귀게 되겠지. 그 생각을 하자 속이 뒤틀렸다.

그러고 보니 수일은 은아 씨에게도 두산에게도 통보를 받았다. 한심하게 저 같은 걸 존중해 주길 또 기대했다. 어떻게 매번 이럴까. 배우는 것도 없이 늘 같은 기대를 하고 실망을 했다. 자기 존재가 필요할 때만 찾는 일회용 칫솔 같은 건 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늘 이랬다.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포기를 몰랐다. 헛웃음이 났다.

수일은 은아 씨에게 빌려주려고 챙겨 둔 30만 원을 두산에게 쓰기로 했다. 두산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니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아니 해 줘야 체면이 설 것 같았다.

두산은 자갈치시장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회를 먹고 싶은 건가 아니면 장어가 먹고 싶나 했는데, 양곱창집으로 데려갔다.

“에이 씨발. 쪽바리 새끼들 단체 관광 왔는 갑네? 맛있는 거는 알아가지고.”

두산이 가고 싶어 하던 가게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다른 데도 맛있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 전체가 양곱창집으로 가득했다. 자갈치시장 안 횟집도 그렇더니, 양곱창집도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일본인 관광객이 제법 드나드는 모양인지 가게 벽면이나 유리문에 일본어로 적힌 전단을 붙인 곳이 많았다.

조금 한산한 두 번째 가게로 들어섰다. 두산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부터 했다. 가게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다. 테이블은 기름때로 미끈거렸고, 물잔도 마찬가지였다. 수일은 기름 뜬 보리차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몇 가지 안 되는 밑반찬과 양념장, 채소들이 먼저 나왔다. 곧 연탄불이 들어오고 그 위로 석쇠를 올렸다. 흰색과 붉은색의 살덩이가 담긴 쟁반은 두산이 가져갔다. 능숙하게 석쇠 위에 고기부터 올린 두산은 맥주를 한 잔 따라 수일에게 주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고 있던 수일은 ‘축하해’ 하고 잔을 부딪쳤다. 눈도 못 마주치고 한 번에 술을 모두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들어가자 답답하던 속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두산은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가만 수일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 갔다. 수일은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두산이 고기를 굽고 일일이 먹여 주었다. 평소처럼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을 씹어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점심은 내가 와서 차리 주 끼고, 저녁도 퇴근하고 와서 같이 물 끼다. 이제 나이트 출퇴근도 다 내가 시키주께.”

“어떻게 그래? 직장 동료도 있고 상사도 있을 텐데. 서로 친하게 지내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지. 그리구, 너 아무리 할아버지 빽이라도 거기 가면 막내야.”

“막내는 무신. 그라고 내가 할 줄 아는 기 있나? 고마 한 몇 달 커피나 타긋지.”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두산은 농담을 했다.

넌 뭐든 쉬워서 좋겠다.

수일은 속으로 생각하며 고기를 받아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졌다. 그래도 축하하는 자린데 저만 먹기 미안해서 수일은 점점 입을 벌리는 횟수를 줄여 갔다.

“오랜만에 묵으니까 억수로 맛있네.”

“많이 먹어. 내가 사는 거야.”

수일은 두산의 손에 들린 집게를 뺏어서 자기가 구웠다. 두산이 하는 것처럼 잘 굽진 못해도 그럭저럭 흉내는 냈다. 먹여 달라고 입을 벌리는 두산에게 고기를 넣어 주고, 쌈을 싸 주었다.

억지로 웃으려니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수일은 맥주 한 잔을 더 마셨다. 술이 들어가면 경련도 줄었다. 식당과 제 몸에 밴 기름 냄새가 역했다.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애쓰며 수일은 고기를 굽고 중간중간 술을 홀짝였다.

“깡패 짓 때리치았다는데 니 반응이 와 이렇노?”

“내가 뭘.”

“좋은 거 맞나?”

“당연히 좋지. 그냥 좀 갑작스러워서 그래.”

“아인 거 같은데?”

이럴 땐 눈치 빠른 두산이 싫었다. 그냥 좀 넘어가면 오죽 좋을까.

“머가 그래 맘에 안 드는데?”

“내가 맘에 안 들 게 뭐가 있니? 좋아, 진심으루. 사장님, 여기 맥주 한 병 더 주세요.”

두산이 피식 웃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수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람을 관찰할 때면 늘 하던 버릇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니 진주에서 내가 깡패라꼬 싫다 켔다 아이가. 얼마 전에는 검정고시라도 보라 켔고. 맞나?”

“두산아.”

“와?”

“그만하면 안 될까? 나 지금 좀 피곤한데.”

수일은 정말 지쳤다. 제 감정의 치부를 모두 알아채는 두산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비참했다. 식당 주인이 내오는 맥주병을 들려는데 두산이 먼저 가로챘다. 뚜껑을 따서 수일의 빈 잔을 채웠다.

“하이고 마, 가시나 맨키로 그래 삐끼 있으면 우짜노? 쯧. 술이나 마시라.”

두산은 수일을 별거 아닌 일로 삐진 사람 취급했다. 순간, 역정이 솟았다.

“니가 내 맘을 어떻게 다 알아?”

수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바로 후회했다. 차라리 삐져 있다고 착각하게 둘걸. 수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수표 한 장을 식당 주인에게 던지듯 건네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은 채 가게를 나와 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두리번거리다가 아까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온통 기름 냄새였다. 제 입에서 몸에서 나는 고기와 기름 냄새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수일은 최대한 빨리 걸었다. 주차장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곧 대로변이 눈에 들어왔다.

“니 오늘 일 나가기 싫나?”

언제 따라왔는지 뒤에서 두산이 낮게 으르렁댔다. 협박이었다. 너 이러면 일 못 나가게 하겠다는 두산의 협박. 평소였다면 무서워 벌벌 떨었겠지만, 오히려 화가 치밀었다. 가만 좀 두라는데, 사람 말을 지지리도 안 들었다. 수일은 바로 휙 돌아 두산을 노려보았다.

“개새끼야, 니가 뭔데 남더러 일을 가라 마라야?”

수일은 이를 악물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넌 니 맘대로 하면서 왜 나는 내 맘대로 못 하게 하냐구? 니가 뭔데?”

두산은 짧게 웃었다. 팔이 잡힌 것도 그때였다.

“내가 은제 니 맘대로 몬 하게 하드나?”

묻는 말투가 의외로 덤덤했다. 두산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수일이 왜 이러는지 당황하는 눈치였다. 수일조차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데 누군들 알아챌까. 조금 전처럼 으르렁대고 협박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미안하지도 않았을 텐데, 수일은 두산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내 니한테 말 안 하고 관두서 그라나?”

“…….”

“그라믄 도로 밀레니엄 드가까?”

“응.”

“깡패도 다시 하고?”

“응.”

수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라고 답했다. 정말로 두산이 도로 밀레니엄에 들어가고, 다시 깡패가 되었으면 했다. 부자 할아버지를 갖고 있든 말든 저와 수준이 맞게 건달이었으면 했다.

팔 길이만큼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수일은 본능적으로 몸을 잔뜩 움츠렸다. 두산은 수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알았다. 내 그라께.”

이렇게 말하면서 수일을 제 옆구리에 바짝 붙였다. 닿은 몸이 뜨거웠다.

“진작에 그래 말하지. 니가 사주는 고기 다 남기고 왔다 아이가. 아깝그로.”

수일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잔돈은 받아왔다. 내 잘했제?”

수일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고 두산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지금 수일은 창창한 두산의 앞길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면서도 차마 농담이었다고, 나는 깡패도 싫고 밀레니엄도 싫으니 회사를 다니라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전처럼 건달인 백두산과 밤무대 가수인 윤수일로 지내고 싶었다. 계약이 남은 동안만이라도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오성관으로 가는 동안 두산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새벽 얘길 슬쩍 꺼내며 억수로 좋았단 말을 했다. 신호 대기가 걸리면 수일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고 넌지시 몸은 괜찮은지 물었다. 은연중에 오늘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수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었다.

“오늘은 안 돼. 누구 죽일 일 있어?”

“안 죽는다.”

“난 죽어.”

“내 살도 빠짔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구 너 아직도 무겁거든?”

“씨발, 더 빼까?”

“아니. 빼란 소리가 아니구….”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희희낙락했다.

“내 11시까지 몬 갈 거 같으면, 덕구 보내께.”

“응. 너무 무리하지 말구.”

“니나 무리하지 말고.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대충해라.”

“손님 없다고 어떻게 대충하니?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니는 대충해도 된다. 얼굴이 먹어준다 아이가.”

두산의 헛소리에 수일은 피식 웃었다. 두산이 쪽 뽀뽀를 했다. 아깐 못 느꼈는데, 두산의 옷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양곱창집에서 묻어 온 냄새였다. 아마 수일에게도 같은 냄새가 나겠지만, 수일은 곧 무대복으로 갈아입을 거라 괜찮았다.

“넌 옷 갈아입고 출근해. 냄새나니까.”

“어. 뽀뽀.”

두산이 입을 쭉 내밀었다. 수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바로 뽀뽀해 주었다. 두산은 씨익 웃으며 수일의 볼을 툭 하고 건드렸다.

“딴 생각하지 말고.”

“안 해, 그런 거.”

“지랄. 내 간다.”

“응.”

조심히 다녀와요, 하고 말을 하려는데 은아 씨가 복도로 걸어 들어왔다.

“수일아, 내 빵 쫌 사 왔는데 같이 묵자.”

은아 씨가 수일을 향해 하얀 봉지를 들어 보였다.

“네. 그래요.”

“수고하이소.”

“오야.”

둘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건성으로 말하고 건성으로 답했다.

수일은 두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복도에 서 있었다. 두산은 복도 끝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웃어 주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웃었다.

“하아….”

눈가가 뜨거웠다. 수일은 차가운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손에서도 기름 냄새가 났다. 두산의 새 출발을 축하하기 위해 간 자리에서 수일은 축하는커녕 초만 치고 왔다. 한없이 초라하고 옹졸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꼴도 보기 싫었다. 숨 쉬는 공기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아직 나이트 오픈 전이라 수일은 손님용 화장실로 가 비누로 손을 씻었다.

수일이 대기실로 들어가자 은아 씨는 봉지에서 빵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내 오늘 행사 뛰러 간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빵집에서 사 왔다. 여 크림빵이 예술이다.”

“잘 먹겠습니다.”

수일은 은아 씨의 맞은편에 앉아 빵을 받았다.

“참, 두사이한테 들었나? 남동생 그 새끼가 웬일로 사람 구실을 했다. 어제 집에 가서 얘기를 좀 했드만은 꿍치논 돈을 꺼내서 내 주드라꼬. 암만 그래도 니한테 빌리는 것보다야 동생 돈이 안 낫겠나 싶어서.”

“잘됐네요, 누님.”

은아 씨 남동생이 속을 썩인단 말을 여러 번 들었었는데, 이젠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누나에게 돈까지 챙겨 주다니 수일이 다 기뻤다.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크림빵은 부드럽고 맛있었다. 달콤한 걸 먹어서 그런지 또 허기가 졌다. 양곱창을 그렇게 먹어 놓고도 배가 고팠다. 수일은 염치없게도 빵 하나를 더 얻어먹었다. 남은 빵들은 밴드 몫이었다.

수일은 리허설을 가기 위해 일어섰다. 은아 씨도 밴드에게 줄 봉지를 들고 따라나서는데,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사장이 들어왔다.

“너거들 보건쯩 다 갖고 있제?”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번에 최삼락이 그 새끼가 살인죄로 잡히서 갱찰들이 여 단속 나온다 카드라. 안 짤리고 싶으면 단디 해라. 알았나?”

“은제 나오는데예?”

은아 씨의 질문에 사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와? 읍나?”

“에이, 없으면 행사를 우째 뛰노? 고마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다음 주 평일. 날짜는 내도 모리고. 돈 쫌 찔러주고 넘길라 켔드만은. 최삼락이가 큰일 했다 큰일 했어.”

사장은 골이 잔뜩 나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닫힌 문에 대고 은아 씨가 주먹 욕을 날렸다.

“근데, 누님. 형님 언제 나온단 소식 같은 건 없어요?”

“내도 요새 정신이 없어가 잘 모르겠다. 난중에 밥 묵고 오는 길에 슈퍼에서 석간신문 하나 사지 머.”

“네.”

수일은 나중에 두산에게 한번 알아봐 달라고 해야지 생각했다. 담당 형사들과 친분이 있으니 신문보다야 두산을 통해 알아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오늘도 마스터는 없었다. 마스터 자리에 지난번에 대타를 섰던 중년 남자가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원래 자기 자리였던 양 위화감이라곤 없었다. 나이트에서 하는 일이 다 그랬다. 꼭 마스터가 아니어도, 수일이 아니어도 누구든 와서 언제든 할 수 있는 일. 그런 연유로 직원들은 멀쩡히 출근했다가도 사장의 말 한마디에 쉽게 잘렸다. 수일도 숱하게 겪어 이젠 대수롭지 않을 일인데 오늘따라 그 꼴이 보기 싫었다. 마치 제 자리를 뺏긴 기분이었다.

리허설을 마친 수일은 허기로 쓰러질 것 같았다. 은아 씨 리허설이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대폿집 파전도 먹고 싶어서 결국 수일은 혼자서 그곳을 찾았다.

파전을 먹으니 자연스레 막걸리가 당겼다. 한 주전자를 순식간에 비운 수일은 나이트로 돌아가야지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막걸리를 또 시키고 있었다. 알딸딸하니 기분이 좋았다. 역시 혼자가 편했다. 가족도 집도 절도 없는 자기는 혼자인 게 딱 어울렸다. 수일은 히죽히죽 웃다가 잠깐 밖으로 나가 두산에게 음성을 남겼다.

“두산아, 나 수일인데, 너 나이트 관두고 깡패도 하지 마. 알았지? 아깐 내가 심통이 나서 거짓말한 거야. 니가 나하고 상의도 없이 결정해서 삐진 거 맞아. 삐진 거 들키니까 챙피해서 또 아닌 척한 거구. 그러니까 다음 주부터 회사 꼭 나가. 음… 아까 그렇게 말해서 정말 미안해. 그리구 커피 심부름 좀 하면 어떠니? 드라마에서 보면 다 그러던 걸 뭐. 나는 그것두 부럽더라. 나 이만 가 봐야겠다. 은아 누님이 들어가자고 조르셔. 너두 뭐 좀 챙겨 먹구. 끊을게.”

한마디 한마디 모두 거짓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하나만 빼고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거짓말도 하면 는다고, 이젠 떨지도 않았다. 수일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주전자를 비우고 세 번째 주전자를 채웠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양곱창집에서 했던 못난 일들이 자꾸 떠올라서 괴로웠다. 그냥 좀 잊으면 좋겠는데, 어째 이런 일들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기억이 나나 몰랐다.

상엽이 생각 난 것도 그때였다. 개새끼. 돈이며 먹을 거며 다 처받아 가더니, 지난 10년 동안 여사장 일도 교통사고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수일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쥐뿔도 없는 새끼가 저보다 약하다고 자신을 막 대했다. 그걸 다 받아 준 제가 등신이지. 수일은 헛웃음을 웃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공중전화 앞에 섰다. 지갑에서 상엽이 줬던 명함을 꺼내 나이트에 전화를 걸었다.

나이트 직원 하나가 전화를 받았고, 곧 상엽을 바꿔 주었다. 요란한 트로트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 어, 형? 이 시간에 웬일이야?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너 여사장 죽은 거 알고 있었지?”

수일은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상엽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근데 왜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했어? 어?”

- 형, 술 마셨어? 왜 이상한 소릴 하구 그래?

막다른 상황에 몰리면 상엽은 늘 이런 식으로 말을 돌렸다. 무조건 수일의 탓을 했다. 마치 수일이 못 할 말을 한 것처럼 굴었고, 가끔은 수일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내가 너한테 우리 사장 얘기 몇 번이나 물었었는데? 너 알고 있었잖아, 어? 왜 대답을 못 하니?”

- 아이, 씹할, 그게 뭐가 중요한데? 이미 죽은 년 얘기는 형한테 해서 뭐 해? 기억도 못 하면서

“그래두! 한마디 정돈 해 줄 수 있었잖아??”

- 좆도 관심 없어서 그랬다, 왜?

수일이 몰아붙이자 상엽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개새끼, 연화 땐 잘만 와서 지껄이더니.”

- 아으, 짜증 나. 술 처먹었으면 집에나 들어가. 일하는 사람 불러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예상보다 반응이 유했다. 평소라면 벌써 전화를 끊고도 남았을 애였다. 그런데 전화기를 붙들고 수일을 상대하고 있었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구, 나 기억났어. 교통사고. 니가 병원으로 나 찾아온 것도 다 기억났다구!”

- 뭐… 뭐, 라… 는 거야…. 형 미쳤어? 왜 이래 정말?

“너 그때 왜 찾아온 거야?”

- 아이, 씹할, 형 정말 미쳤구나? 형, 사고 난 적 한 번도 없었다고!

상엽인 끝까지 오리발이었다. 다 기억이 났는데, 죽어도 아니라고 수일을 미친놈으로 몰아갔다. 분노가 폭발했다. 개새끼.

“거짓말. 거짓말!!”

수일은 수화기로 공중전화를 내리쳤다.

퍽퍽퍽. 얼마나 내리쳤는지 몰랐다. 하늘색 파편이 여기저기 튀어 올라 수일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있는 힘껏 전화기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개새끼! 씨발 새끼!!”

이 분노는 상엽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자기를 향한 거였다.

그냥 죽지, 저런 쓰레기 같은 새끼가 아니면 시신을 거둬 줄 사람조차 없는 삶을 산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면서, 온갖 수모를 참아 가며 꾸역꾸역 질긴 목숨을 이어 간 윤수일이란 남자를 향한 분노였다.

수일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웃음만 났다. 수일은 미친놈처럼 킥킥대며 웃었다.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났다. 너무 웃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윤수일이란 남자의 인생은 한마디로 코미디였다. 삼류 코미디.

수일의 주위로 사람들이 지나쳐갔다. 누군 인상을 쓰고 누군 욕을 했다. 또 누군 손가락질을 했다. 그들 사이에서 여사장이 사진을 내밀었다. 수일은 손을 뻗어 사진을 받았다.

‘니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임 군이 어디 있는지 알아. 가서 물어봐.’

‘네. 사장님.’

수일은 여사장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자 그녀가 미소 지었다.

‘죽이진 말구.’

‘네. 안 그럴게요.’

수일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 뒷면을 돌려 보았다. ‘행복사진관’이라고 날려쓴 메모가 있었다. 글씨가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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