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7시에 아침을 먹는 시아버지를 위해 김주옥 여사는 가정부 마산댁과 함께 아침상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늘은 시아버지 백영호와 아들들이 모두 참석하는 날이었다. 원래라면 함께 왔어야 할 며느리들과 손주들은 빠졌다.
시아버지께 녹즙을 주고 나오는데 막내 두산의 입이 한 발이나 나와 있었다. 요새 만나고 있다는 밤무대 가수 때문에 집에 오라고 하면 저렇게 싫은 티를 냈다. 지 필요할 땐 잘만 처왔다 가면서 오늘 같은 날 저러는 걸 보니 주옥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이게 다 시아버지 탓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끼고 살면서 오냐오냐하니까 애가 저 모양으로 버릇이 없어진 거였다.
“야이 새끼야, 가시나도 아이고 머스마를 델꼬 산다꼬 내가 니한테 머라한 적 있드나? 해달라는 거 다 만들어 줐으면 고마운 줄이나 알아야지. 인상 안 피나?”
보다 못해 한 소리 하자, 두산은 홱 토라져서 아예 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사이 니 함 그래 해 바라. 내가 다시는 밥을 해주는가!”
“어머니, 참으이소. 꼭두새벽부터 혈압 올라가게 와 그랍니까? 저 새끼 저라는 거 하루 이틀도 아이고.”
첫째 두협이 신문을 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점잖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어머니 좋아하시네. 두협은 요즘 제 할아버지를 쫓아다니며 정치에 입문하겠다고 지랄이었다. 머리도 나쁜 새끼가 허파에 바람만 들어서, 어쩌려고 저러는지 몰랐다. 주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에 다른 음식을 장만하느라 기운이 빠져 오늘 아침은 마산댁 손을 빌렸다. 다행히 며느리들도 정신 사나운 손주들도 없어서 여유 있게 아침상 준비를 마쳤다.
둘째 두열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두열이 이 새끼는 최근 살이 피둥피둥 찌더니 게을러져서 아침 식사에 늦는 날이 많아졌다.
“두협아, 두열이 출발했는가 저나 함 넣어바라.”
“곧 오겠지예.”
“엄마 말에 토 달지 말고 넣으라면 넣어라.”
“…예. 기다리면 올 낀데….”
마지못해 일어난 두협이 수화기를 들었다.
하여간 아들 새끼 중에 마음에 쏙 드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다. 최악은 두성이었지만, 그 새끼는 감옥에 있으니 눈에 안 보여 속이라도 편했다.
주옥은 식탁 위에 인원수대로 숟가락 젓가락을 놓으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곧 시아버지가 나올 시간이었다.
시아버지는 새벽마다 등산을 갔다 와서 서재에 들어가 한 시간 넘게 조간신문을 훑어보고 경제 기사를 읽었다. 필요하면 스크랩도 했고, 외국 서적도 구해다 보았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경제 흐름까지 허투루 넘기는 것이 없었다. 체력은 또 어찌나 좋은지, 요즘 주옥은 자기가 시아버지보다 더 늙은 기분이었다.
주옥은 시아버지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사업체를 몇 개나 가졌는지 잘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제법 많은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건 일찍이 알았지만,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시아버지는 돈에 인색한 남자가 아니었다. 시집와서 한 번도 돈이 부족하거나 떨어진 적이 없었다. 남편이 그렇게 되고 나서도 자신뿐 아니라 애들이 원하는 건 다 해 주었다. 주옥에겐 그거면 되었다.
게다가 이젠 장성한 아들들이 할아버지 밑에서 밥그릇까지 하나씩 꿰차고 앉았으므로, 주옥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철없이 놀러 다니기만 하던 막내 두산도 최근 착실하게 나이트로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두성만 정신 차리면 좋겠지만, 어머니인 주옥이 봐도 그 새끼는 글러 먹었다. 단명이나 안 하면 다행이었다.
7시에 모두 식탁에 모여 앉았다. 시아버지는 두열의 자리가 비었다며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다들 음식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10분 뒤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두열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백두열이. 니 한 번만 더 늦으면 호적에서 파삘끼다.”
시아버지의 경고에 두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됐다. 밥 묵자.”
시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었다. 밥을 먹으면서 첫째 두협과 시아버지는 오늘 오후에 있을 행사 얘기를 나눴다.
두협은 체형은 제 아버지 영판이었고, 얼굴은 주옥을 빼다 박았다. 하필 머리도 자기를 닮아 좀 나쁘긴 했지만 잘생기고 훤칠해서 인기는 좋았다. 성격도 다른 아들들과 달리 주옥의 친정아버지를 닮아 유들유들했다.
시아버지는 두협의 성격이 너무 무르다고 자주 혼을 냈지만, 최근엔 사업보단 정치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며 나서서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두열이 니는 요새 마이 바쁘다매? 느그 조모하고도 자주 만나나?”
“예. 일본 드가면 꼭 만나서 밥 같이 묵고 그랍니다.”
“쪽바리 새끼 중에 게롭히는 아들은 없고?”
“머, 몇 명 거슬리는 아들은 있는데예, 제 손에서 처리 가능합니다.”
지금 보니 두열은 손가락에도 피둥피둥 살이 올라 있었다. 키도 집안에서 제일 작은 새끼가 살까지 찌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열이 니 살 빼라. 돼지 새끼도 아이고 사람이 굴러 댕기면 몬 쓴다. 알았나?”
보다 못한 주옥이 한마디 하자, 두열은 혼잣말로 ‘돼지’ 하더니 재밌다고 웃었다. 옆에서 두산이 ‘돼지 새끼’ 하며 제 형을 놀렸다.
“엄마는. 아들한테 돼지 새끼가 멉니까? 하여간 몬 말린다, 우리 엄마.”
“야이 새끼야, 내가 농담하는 줄 아나? 살 쫌 빼라꼬!”
주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시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민망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었지만, 이젠 주옥도 나이가 제법 들었다고 시아버지 앞에서 고함도 치고 할 말을 다 했다. 시아버지도 예전처럼 주옥에게 엄하게 굴지 않았다. 웬만해선 다 눈감아 주고 편들어 주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아이다. 두열이 니 느그 어머이 말 들었제? 살 빼라.”
“예.”
두열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두산과 두협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엄마가 화났다고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애새끼들도 아니고, 뻔히 다 보이는데 저러니 어이가 없었다.
손주들에게 돌아가며 말을 시키는 시아버지가 두산의 차례는 건너뛰었다. 어제 새벽 함께 등산을 갔다가 할 얘길 다 했는지 아침밥을 먹을 때는 딱히 뭘 물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이거 맛있네. 엄마가 했나?”
더덕 명태 회무침이었다. 두산은 요새 맛있는 것만 먹으면 누가 했냐 물었다. 따로 싸 달라는 소리였다.
“마산댁이 했다.”
“아!”
아깐 입이 한 발 나와 있더니, ‘억수로 맛있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두산이 저 정도로 누군가에게 빠진 건 처음 봐서 주옥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물론 두산 말고 그 남자가.
두산이 욱하는 성격에 때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한 달 전 남자가 병원에 입원했단 소리를 들었을 때도 두산이 때려서 그렇게 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몰랐다.
다만 그 남자 병간호를 하느라 살이 많이 내린 건 영 보기 거슬렸다. 본인이 좋아서 하는 연애니 주옥도 따로 할 말은 없었지만, 먹는 거나 제대로 챙겨 먹었으면 싶었다.
주옥의 눈에 두산은 아직도 애였다. 덩치만 컸지 애교도 많은 막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다. 성격만 좀 유하면 좋겠는데, 그건 지 할아버지를 닮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들들은 하나같이 식성이 좋았다. 덩치도 키도 커서 식비는 많이 들어도 주옥이 해 준 음식은 뭐든 잘 먹고 좋아했다. 언제 이렇게들 나이를 먹었나, 다 같이 모여 밥을 먹을 때마다 주옥은 감개무량해졌다. 나도 늙긴 늙었구나, 주옥은 속으로 웃었다.
평소보다 아침상이 조용했다. 시아버지가 잔소리할 손주며느리도 증손주도 없어서 그런 건지 식사도 빨리 끝났다. 아니면 오늘이 그날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상을 물리고 다들 거실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막내 두산은 차 같은 건 싫어해서 아침부터 혼자 초록색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주옥도 그걸 먹고 싶었지만, 시아버지 앞이라 참고 녹차를 마셨다.
“바로 갈 끼가?”
“예, 아버님. 그랄라고예.”
“오야. 잘 댕기온나. 내는 난중에 따로 갈란다.”
“예.”
시아버지는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얼른 가 보라는 무언의 배려였다.
“퍼뜩 갈 채비들 해라. 이도 잘 닦고 세수도 한 번 더 하고. 두열이 니, 옷 그거 입고 갈 끼가? 주터지기 전에 갈아입으라.”
장성한 아들들에게 주옥은 손주들에게나 할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들들은 꼭 이럴 때만 친한 척했다. 저들끼리 ‘엄마 저기압’ 사인을 주고받으며 재빨리 이를 닦고 옷도 챙겨 입었다.
주옥도 방으로 들어가 남편이 제일 좋아했던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평소엔 잘 끼지 않는 결혼반지와 목걸이를 걸었다. 52살이지만, 본인이 봐도 여전히 예쁜 얼굴이었다. 어딜 가도 미인이란 소리를 들었다. 관리도 잘 받아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이 얼굴을 10년째 썩히고 있었다. 처음엔 막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다짐했건만, 사람 일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엄마! 가자!”
두산의 재촉에 주옥은 손가방 하나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
음치 새끼들.
주옥은 인상을 쓰다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애들도 따라 웃었다. 남편만 웃지를 못했다.
남편은 10년째 주렁주렁 인공호흡기와 기계를 꽂고 누워 있었다. 의식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몇 번 고비를 넘겨 가면서 살아남았으나 저 기계만 끄면 죽을 사람이었다.
집안이 평범했다면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진즉에 기계를 껐을 터였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병원비를 감당했고, 주옥도 남편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를 살려 두고 있었다.
주옥은 매년 남편의 생일날 아이들을 모두 끌고 와서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생일 파티를 했다. 그 초가 43개에서 53개가 되었다. 재작년까진 며느리와 손주들도 데려왔지만, 작년부터 남편은 욕창이 심해지고 얼굴빛도 부쩍 나빠졌다. 기계와 약물에 의존한 지 10년이 넘어가니 부작용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주옥은 남편의 체면을 지켜 주고 싶어서 아들들만 데려오기 시작했다.
남편 대신 촛불을 끄고, 간병인과 함께 다들 둘러앉아 케이크를 먹었다. 다섯 번째 간병인인 남 여사는 4년째 남편을 돌봐 주고 있었다. 성격도 밝고 호탕해서 간호사와도 잘 지냈다.
“두협이 아버지. 아들 다 왔습니다. 아이다, 두성이는 깜빵 가서 몬 왔고예, 두협이하고 두열이, 두사이 이렇게 셋만 왔습니다. 내 오늘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보라색 원피스도 입고 왔어예. 살이 찠는가 쪼매 찡긴다.”
“마이 찡기는데.”
두산이 뒤에서 한마디 툭 던졌다. 저 눈치 없는 새끼. 주옥은 두산을 째려보았다.
“하이고, 두사이 쟈는 누구를 닮아가 저래 꼴통인지 모르겠어예.”
“엄마 닮았지.”
“확마, 주디1)를 꼬매삘라. 엄마 말하고 있다 아이가.”
주옥이 두산과 티격태격하자, 둘째가 킥킥대며 ‘엄마 닮은 거 맞네’ 했다. 으이그, 저 웬수들. 남편과는 나중에 애들 다 내보내고 둘이서만 오붓하게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주옥은 남편의 마른 팔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얼굴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골고루 닮았던 남편은 나이가 들자 아버지를 많이 닮아 갔다. 처음 만났을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오늘 보니 유독 시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71살인 아버지와 이제 겨우 53살인 아들의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주옥은 울컥했다. 남편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만 자신을 놓아 달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주옥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 팔자 한번 참 기구하다. 내야 좋은 거 다 보고 다 누리면서 사는데, 당신은 이기 머꼬?
주옥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아들들 틈에 끼여 케이크를 먹었다.
남 여사와 동료 간병인, 담당 의사, 간호사들에게 돌릴 케이크와 음식들도 푸짐하게 준비해 두었다. 평소 휑해 보이던 1인실은 보통 큰 게 아닌 아들들 덕에 오랜만에 꽉 찼다. 웃음꽃이 피었다.
이렇게나 든든한 아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남편은 뭐가 아쉬워 서울로 갔을까? 주옥은 아직도 남편의 결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진 건 눈치챘지만, 그렇다고 집을 뛰쳐나갈 일이었는지 두고두고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자신이 미워서 나갔다면 이 정도로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주옥과 시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간 남편은 석 달 만에 혼수상태가 되어 돌아왔다.
케이크를 다 먹은 두산이 남편의 침대로 향해 걸어갔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건들거리며 기계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편은 제 아버지를 꼭 닮은 두산을 어려서부터 유독 엄하게 대했었다. 그럴수록 두산은 아버지보단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남편은 점점 두산을 멀리했다. 그 어린것에게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는지 주옥이 다 서러울 지경이었다. 애가 버릇이 나빠진 데에는 남편의 탓도 컸다.
문득, 주옥은 두산이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다 하다 막둥이에게 몹쓸 짓을 시키려 하다니, 자기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두산이 주옥을 불렀다.
“와?”
“여 정전되면 우찌 되노?”
“머 밸일 읍따카던데? 병원 안에 발전기가 있어서 개안타 카더라.”
“아.”
두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옥에게로 걸어왔다. 주옥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품 안을 파고들었다. 덩치나 작은 놈이 그러면 말을 안 했다.
“징그럽다, 저리 가라.”
주옥은 두산을 밀어내며 싫은 척했지만,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막둥이. 애새끼가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서 그렇지 여전히 주옥이에겐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막내의 등을 토닥이며 주옥은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몇 년만 더 살아 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
선잠이 들었던 수일은 두산이 나가는 소리에 깼다. 이 시간에 정신이 번쩍 든 건 오랜만이었다. 한동안 꼼짝도 할 수가 없어서 가만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한번 떠오른 기억들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수일은 이불을 돌돌 말고 앉아 여사장에게서 받은 사진 속의 인물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누구였을까? 사진 속의 남자는. 여사장은 왜 그 사진을 자신에게 주었을까? 주면서 뭐라고 말을 했던 걸까? 생각나는 건 없고 궁금증만 늘어갔다.
가만 앉아 머리를 쥐어짠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수일은 당시 연락하고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옷방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려다가 앨범이 기억났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부산에 내려올 때 수일이 가지고 온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수일은 이제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앨범과 수첩을 챙겨 소파에 앉았다. 수첩엔 남아 있는 연락처보다 줄이 그어진 것이 더 많았다. 세 번째 장에 여사장의 연락처가 있었다. 역시나 줄이 그어진 상태였다. 밑으로 줄줄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가게 동료들과 주류업체 배달원의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지만, 하나같이 ‘없는 번호’라고 메모가 되어 있었다.
그중 연화가 일했던 가게 마담의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똑같이 줄이 그어진 번호 옆에 작은 글씨로 ‘연락하지 말라고 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인즉 통화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퇴원한 이후 마담의 가게로 한번 찾아갔던 것도 같았다. 물론 마담을 만난 기억은 없었다.
마담의 연락처 밑으로 연화를 통해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몇 개 있었지만, 역시나 모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메모조차 없었다. 다음 장으로 넘기려는데, 의원님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유독 더 까맣게 칠해져 있어 언뜻 보면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의원님이었다. 수일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글씨가 맞는데 적은 기억도 지운 기억도 없었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번호를 사용하고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기둥서방 혼자 살던 집이 아니라 가정집이었던 기억이 언뜻 났다. 웬만한 가정집은 전화번호를 자주 바꾸지 않으니, 잘하면 연락이 닿을 수도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이제 겨우 아침 7시, 전화하기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딱 한 시간만 더 기다렸다가 전화하자. 수일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시간도 문제였지만, 상대가 전화를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둥서방의 이름도 성도 모르면서 대책 없이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수일은 전화기를 노려보며 아이디어를 짜내려 애썼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 눈이 앨범으로 옮겨 갔다. 예전에는 무심결에 넘긴 사진이었지만, 지금 보면 달리 보일 수도 있었다. 뭐라도 찾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앨범을 열었다.
어릴 적 흑백사진들이 제일 첫 장에 들어 있었다. 사진으로만 기억하는 어머니가 아기인 수일을 안고 있었다.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기. 온 가족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부모님 모두 지금의 수일보다 어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수일이 커 가면서 가족사진 속 인원은 셋에서 둘이 되었고, 나중엔 그마저도 없었다. 달랑 네 장뿐인 가족사진과 소풍 때 찍었던 단체 사진 몇 장 그리고 졸업 사진 세 장이 수일의 유일한 학창 시절 기록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단둘이서 찍었던 사진이 가족사진의 끝을 장식했다.
다음 장을 넘기자, ‘에덴동산’이라는 빨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을 새로 단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경식과 어깨동무를 한 어린 수일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1981. 05. 04. 찍은 날짜 위로 최 군이 한껏 장난스러운 포즈로 서 있었다. 열 명 남짓한 남자 직원들 가운데 여사장 한정숙이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웃고 있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김치!’
찰칵 소리와 함께 여사장이 외쳤다.
‘사장님, 잠깐만요. 나 눈 감은 거 같애. 한 장만 더.’
그래! 사진관!
수일은 앨범을 덮었다. 앨범 뒤, 행복사진관이란 이름 밑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여사장은 기둥서방과 이상한 사진들을 많이 찍었는데, 가게 근처 행복사진관에만 인화를 맡겼다. 일, 이 주에 한 번꼴로 필름 대여섯 통을 맡겼으므로 여사장은 사진관의 제법 쏠쏠한 수입원이었다.
그 덕에 기념사진이나 단체 사진을 찍을 일이 있으면 언제든 와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자주 인화 심부름을 다녔던 수일은 사진관 사장과 제법 말을 텄고, 추석 땐가 사진관 이름이 박힌 이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당시 수일에겐 아버지가 쓰던 다 낡은 사진첩밖에 없었다. 내지는 접착력이 떨어진 지 오래라 사진을 끼워 두고만 있었는데, 공짜로 새 앨범을 선물 받아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사진관 사장은 별로 좋은 게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문제없이 잘 쓰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행복사진관은 아직도 문을 열고 영업 중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 기억을 되찾을 단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이자 갑자기 허기가 졌다. 수일은 압력밥솥에 밥을 올려 두고 몸을 씻었다. 압력솥이 스팀을 뿜어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냉동실에서 곰국과 파를 꺼내 약한 불에 느긋이 데웠다. 밥과 함께 먹을 김치와 밑반찬들도 꺼내 접시에 옮겨 담았다.
기쁨도 잠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전화를 받아도 문제, 안 받아도 문제였다. 엉키고 뭉친 기억의 실마리를 잡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다가도 그 실마리가 수일이 원하지 않던 기억이면 어쩌나 겁이 났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두산의 어머니가 해 준 음식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 수일은 시간을 들여 억지로 다 먹었다. 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끝내도 시계는 더디게 움직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시간이 안 갔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어차피 사진관은 9시나 되어야 문을 열 테니 잠시 눈을 붙여도 될 것 같았다. 수일은 안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을 땐 잠깐이 아니라 아주 오래 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12시가 넘어 있었다. 수일은 하품을 하며 서둘러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잤나?
두산이었다. 목소리가 커서 수일은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떨어트렸다.
“응. 지금 일어났어.”
- 내가 깨았나?
“아냐. 일어나려구 하던 참이야. 어디야?”
- 집 앞. 내리 온나.
“무슨 일 있어?”
- 으데. 고마 내리 온나.
집 앞인데 왜 안 들어오고 전화를 하나 몰랐다.
“알았어. 10분만 기다려. 세수 좀 하고 나갈게.”
- 고마 오지?
“5분만.”
- 알았다. 지금부터 5분 센다. 1초 늦을 때마다 뽀뽀 한 번씩이다.
수화기 너머로 키득대는 두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수일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얼른 욕실로 가 눈곱만 떼고 이를 닦았다. 먹고 바로 잤더니 얼굴도 눈도 부어 있었다. 정신이 멍했다. 잠을 자는 게 아닌데. 속으로 후회를 하며 셔츠만 대충 껴입고 내려가자, 두산이 수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 늦었지?”
“7분 23초. 2분 23초 늦었으니까, 2분은 120초, 더하기….”
“어우, 됐어. 뭘 그런 걸 다 세니?”
농담인 줄 알았더니 진짜로 시간을 재고 있었나 보았다. 수일은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지 않았다.
“143초, 뽀뽀 143번.”
포기할 줄 모르고 끝까지 숫자를 셌다. 얄미워서 노려보는데, 두산이 등 뒤에서 백합 한 다발을 내놓았다.
“이거 뭐야?”
백합 향이 짙었다. 수일은 꽃향기를 맡으며 미소 지었다.
“지나가다가 예뻐서 샀다. 손이 두 개뿌이 없어서 니 불렀다 아이가.”
두산은 이렇게 말하며 차 트렁크에서 케이크 상자와 보자기를 꺼내 양손에 들었다.
“누구 생일이었어?”
“어. 아빠.”
“아버지 생신인데 이렇게 빨리 와도 돼?”
“어. 개안타.”
두산이 하도 아버지 얘기를 안 해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살아 계신 모양이었다. 표정이 영 심드렁한 게 사이가 안 좋은 듯했다. 수일은 더 묻지 않았다.
“배고프제? 드가자, 내 밥 해주께.”
“나 밥 먹었어.”
“은제?”
“아까. 너 나가고 나서. 잠이 깨 가지구.”
“에이, 억수로 맛있는 거 싸 왔는데.”
“이따 저녁에 먹음 되지.”
수일은 백합을 안고 두산의 뒤를 졸래졸래 쫓아가며 케이크 먹자, 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수일은 두산에게 뽀뽀했다.
“이걸로 퉁쳐.”
“와, 쑨 사기꾼이네. 뽀뽀 143번 퉁칠라믄 이걸로 안 되지. 내 꽃도 사 왔는데.”
두산은 목청을 높였다. 엘리베이터가 다 울렸다.
“예뻐서 샀다며?”
“아니, 예뻐서 사긴 샀는데, 니 어제는 내한테 손도 안 댔다 아이가.”
“피곤해서 그랬지.”
시무룩한 두산을 보니 수일은 괜히 미안해졌다.
갑자기 떠오른 연화와의 기억으로 수일은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때 느꼈던 비참함과 좌절감이 어제 일처럼 너무도 생생했다. 무대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르고 내려왔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한낮부터 야유회라고 무리한 탓도 있어서 수일은 차 안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잠이라도 자야 살 것 같았다.
“일단 들어가.”
대문 앞에서 두산이 ‘열쇠’ 하며, 오른쪽 골반을 수일에게 내밀었다. 수일은 두산의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손만 한번 넣었는데, 앞을 보니 바지 주름이 판판해졌다. 올려다보자 두산이 씨익 웃었다. 하여간 못 말렸다.
두산이 식탁 위에 짐을 내려놓는 동안 수일은 서둘러 테이블 위를 치웠다.
“그거는 와?”
수일의 손에 들린 앨범을 보고 두산이 물었다.
“그냥 좀 보려구. 참, 너 이거 왜 여기 있는 줄 알아?”
앨범을 들킨 김에 혹시나 해서 물었다. 두산의 입에서 ‘니가 갖고 왔다’란 소리를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내가 갖고 왔는데?”
그럼 그렇지. 이 무거운 걸 들고 부산까지 내려왔을 리가 없었다. 수일은 안도와 함께 궁금증이 일었다.
“어떻게?”
“상엽이 그 새끼가 갖고 있다 케서 내가 달라 켔다.”
“언제 상엽이랑 그런 말까지 했니? 너두 참, 나한테 말 좀 해 주지. 갑자기 앨범이 보여서 깜짝 놀랬잖아. 그리구, 상엽이한테 그 새끼가 뭐야. 너보다 한참 형님이야.”
서울에서부터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티를 내더니 말을 참 못되게 했다.
“받고 나서 말한다는 거를 까묵었다.”
수일의 잔소리엔 대꾸도 하지 않고, 두산은 딱 제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케이크 묵자.”
“응.”
케이크 상자를 열자 빵 위에 눈처럼 새하얀 생크림과 과일이 듬뿍 올라가 있었다. 너무 예뻐서 먹기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버님 드실 것 들고 온 거 아니지?”
“으데. 니꺼는 내가 따로 샀다. 니 케이크 맥일라꼬.”
“뭐 하러 그랬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꽃에 케이크까지 자기를 챙겨 주는 두산이 고마웠다. 수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운 과거 일을 잠시 잊어버렸다. 화병에 물을 담아 백합을 옮겨 두고, 케이크를 잘라서 예쁜 접시에 한 조각씩 담았다. 수일이 케이크를 자르는 동안 두산은 뒤에서 수일을 껴안고 어깨에 턱을 괴었다.
“무거워.”
“내 살 빠짔는데?”
“그래두 무거워.”
무겁다고 말을 해도 두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쪽쪽, 목선을 따라 두산이 입을 맞췄다.
“우리 머 쫌 하다 묵으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케이크 먼저 먹고 하지.”
수일은 투덜대며 플라스틱 빵칼을 내려놓았다. 두산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귓불로 향했다. 입술로 살짝 잡아당긴 다음, 귀를 입 안에 통째로 넣고 빨았다. 수일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두산의 애무를 받았다. 기분 좋은 신음이 흘렀다.
두산은 귀를 애무하면서 손으로는 수일의 배를 쓰다듬었다. 배꼽 주위를 맴돌던 뜨거운 손바닥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아랫배를 훑다가 음모를 손가락으로 갈랐다. 잠깐 음모로 장난을 치던 손이 성기를 쥐었다.
“흐음….”
“좋나?”
“응. 좋아.”
수일은 한 손을 뒤로 돌려 두산의 바지 앞섶을 쓸었다. 바지 지퍼를 내리자, 손에 닿는 팬티가 벌써 축축이 젖어 있었다. 두산의 몸에 체중을 실으며 수일은 발기한 성기를 꺼내 쥐었다. 두산도 수일의 성기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크기를 키워 나갔다.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두산이 뱉어 내는 숨결이 뜨거웠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두산이 수일과 속도를 맞추려고 손을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수일은 제 손바닥에서 팔딱팔딱 뛰는 두산의 것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래위로 흔들며 기둥을 쓸었다가 엄지와 손톱으로 귀두를 긁었다.
“아흐, 씨발.”
두산이 낮은 신음을 뱉었다. 탄탄한 몸이 수일의 손짓에 들썩였다. 숨을 헐떡이면서 몸을 더 바짝 붙여 왔다. 두산은 수일의 가랑이 깊숙이 손을 밀어 넣어 회음부를 간지럽혔다. 고환을 움켜쥐었다가 성기를 희롱했다.
“읏! 흐으… 살살… 아윽.”
두산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수일의 민감한 부위만 건드렸다. 버티고 선 다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수일은 최대한 세게 두산의 성기를 거머쥐고 주무르다가 제 등에 성기를 바짝 붙였다. 그리고 몸을 더 두산에게 밀착했다. 그 상태에서 등으로 두산의 성기를 누르고 비볐다.
수일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두산의 입술이 수일의 입술을 삼켰다. 입을 열기도 전에 혀가 밀고 들어왔다. 서로의 혀를 얽어 물고 빨았다. 타액이 섞이고 젖은 입 안을 빠는 음란하고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수일은 손과 등을 써서 두산의 성기를 애무했고, 두산은 손으로 수일의 아랫도리를 맘껏 주물렀다. 점점 두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신음이 커졌다.
“하으, 씨발, 환장하겠네.”
“두산아, 나두.”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두산만 보고 살고 싶었다. 두산이 그러라고 허락했는데도 수일은 미련하게 과거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냥 잊고 살면 될 것을, 왜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10년 전 일을 들추려 하는지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좋은 일도 아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수일은 고통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과거의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괴롭기만 했다.
그만하자. 수일은 자신을 타일렀다. 두산의 손짓에 헐떡이고, 쾌락에 몸을 맡기며 이제 좀 편안하게 살자고 자신에게 말했다. 평생 언제 이런 호사를 누리겠냐며, 한 달도 남지 않은 짧은 시간만이라도 잊고 살자고 다짐했다. 제발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과거의 악몽이 저를 찾지 말았으면 했다.
수일은 몸을 돌렸다. 두산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더듬었다. 두산의 혀를 삼키고 온 힘을 다해 빨았다. 두산이 수일을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다.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꼭 맞추고 뜨겁게 키스했다. 혀와 입술이 얼얼해질 정도로 물고 빨았다. 발기한 아랫도리를 수일의 배에 비비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두산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수일의 하의를 모두 내리고 성기를 입에 물었다. 수일은 간신히 버티고 서서 두산의 머리를 두 손으로 꼭 안았다. 쭈웁, 쭈웁, 흡입하듯 두산이 자지를 빨아올렸다.
“읏! 두산아… 아아, 앗. 아윽!”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찔한 쾌감이 온몸을 감쌌다.
“하으… 두산아. 쌀, 거… 으읏, 같애.”
수일은 잡을 것도 없는 두산의 짧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온몸에 열이 오르다 못해 뜨거워 터질 것 같았다. 수일은 바들바들 떨리는 두 다리로 버티다가 결국 주저앉으며 사정했다.
두산이 제 얼굴로 수일의 구부러진 상체를 받치며 양 허벅지를 꼭 쥐었다. 무너지지 않게 잡아 주었다. 입 안에 여전히 수일의 성기를 담은 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빨아냈다.
두산이 빨아 댈 때마다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수일은 녹아내릴 듯한 아찔한 흥분에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입에선 끊임없이 신음이 터졌다. 한참을 두산에게 의지한 채 간신히 서 있다가, 정신이 들어 두산을 내려다보았다.
저 강한 남자가 수일을 위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수일은 등을 구부려 두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비릿한 정액 맛이 났다. 두산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내가 해 줄게.”
“내는 두 번 해도.”
비장하게 말하는 두산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알았어. 두 번 해 줄게.”
수일은 느리게 웃으며 두산에게 키스했다. 두산이 눈을 휘어 웃었다. 다시 한번 키스했다. 이번엔 좀 더 깊게.
***
오랜만에 평일 행사를 뛴 정은아는 보건소가 문 닫기 직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어제 날짜로 보건증 유효 기간이 만료되었다. 협회장이 하루 정돈 눈감아 주어서 행사를 뛰었지만, 내일은 행사가 두 개나 있으니 갱신된 보건증을 꼭 제출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때마침 퇴근을 준비하던 보건소 간호사가 은아에게 직접 결과지를 건넸다.
“아이고, 숨차다.”
헉헉대며 결과지를 받아 든 은아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졌다. 결과지 맨 위에 적힌 이름과 주민 등록 번호를 재차 확인했다. 자기 것이 맞았다.
“이거 결과 제대로 나온 거 맞습니까? 머 써끼고 그란 거 아니지예?”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서 한 번 더 물었다. 간호사는 한숨을 쉬며 ‘정은아 씨 꺼 맞아예’ 했다. 흔히 보는 반응인지 간호사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임질과 매독 모두 양성 반응이 나왔다. 보건소 간호사는 성병 예방법이 적힌 쓸모없는 전단을 다섯 장이나 주면서 병원 세 곳을 추천했다. 꼭 들러 정밀 검진을 받아 보라고 권했다. 말을 하면서도 자꾸 시계를 흘끔거리는 게 퇴근을 방해하는 은아가 얼른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은아는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서서 결과지를 노려보았다.
특별 손님을 받았다고 좋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손님을 한두 번 받은 것도 아니었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못 했었다.
요정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노래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혼자 애 둘 키우며 빚 갚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며 자기 합리화를 했었다. 한때는 <귀여운 여인>의 쥬리아 로버츠처럼 손님 중 멋진 남자를 만나길 고대한 적도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몸 판 걸 부끄러워하라고 결과지가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은아는 입을 굳게 다물고 보건소를 나왔다.
당장 보건증 갱신은 글러 먹었고, 내일 두 건이나 있는 행사를 어떻게 뛸지 그 궁리부터 했다. 깐깐한 협회장이 내일도 봐줄지는 은아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제법 돈이 되는 행사라 꼭 가고 싶은데, 일단 졸라 봐야지 했다.
차 안에 혼자 있자 은아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하룻밤에 몇 달 치 월급을 벌어 좋아했더니, 이젠 그 몇 달 치 월급보다 더 많은 병원비가 나가게 생겼다. 일도 끊길 터였다. 당장 한두 달 치료로 새 보건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독의 경우 완치 판정까지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아무도 몰랐다. 평생 노래만 했는데, 앞으로 이걸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미친년. 적당히 했었어야지. 니 그랄 때부터 알아봤다.”
남 탓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 자기 탓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으나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 낸 은아는 번진 마스카라를 티슈로 닦아 냈다. 이렇게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은아는 일단 보건소에서 추천해 준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시간 동안 은아의 감정은 널뛰었다. 하고 많은 손님 중에 왜 하필 그런 쓰레기들이 걸려서 이런 우사를 당해야 하는지 몰랐다.
“개새끼들아! 이 씨발 잡놈의 새끼들아!”
은아는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렀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시 눈물이 흘렀다.
당장 이번 달에 내야 할 집세와 공과금이 생각났다. 9월이면 첫째 육성회비도 내야 하고 둘째 새 축구화도 사 주기로 했는데 그 돈을 다 어디서 충당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미 은행 빚은 만선이었고, 사채도 끌어 쓸 만큼 끌어 써서 더 빌릴 수도 없었다. 아쉬운 소리를 할 사람도 떠오르지 않았다. 앞이 캄캄했다. 숨이 턱 막혔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혜선이 일본으로 오라고 할 때 갔었어야 했는데. 은아는 후회했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 자신이 비참했다. 제게 이런 시련을 안겨 준 전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몸까지 팔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으아아아!!!”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은아에게 돌아온 결과는 너무도 가혹했다.
***
두산이 수일의 몸을 씻어 주었다. 겨드랑이에 손이 들어오자 간지러워서 웃음이 났다. 수일은 몸을 비틀어 두산의 손을 피했다. 간지러운 건 자긴데, 왜 두산이 슬슬 크기를 키워 가고 있는지 몰랐다. 사람이었으면 한 대 쥐어박았을 두산의 자지를 바라보며 수일은 인상을 썼다.
“또 또! 나 이제 못 해.”
“니는 몬 해도 내는 하지.”
두산이 능글맞게 웃으며 알몸을 비벼 왔다. 비누칠한 몸이 미끈거렸다. 두산은 수일을 안아 배를 꼭 맞댔다. 바짝 선 성기가 수일과 두산의 배 사이에서 기분 좋다고 울었다.
두 사람이 키스하자 촉촉한 젖은 소리가 났다. 쪽, 소리가 나다가 츕 소리가 났다. 맞닿은 몸에선 좀 더 농염한 접촉음이 났다. 깊숙이 혀를 빨았다가 장난스레 혀끝을 놀렸다.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배가 벌게질 정도로 성기를 비볐지만, 두산은 사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수일은 하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손과 입으로 풀어 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턱이 빠질 것 같았다. 그냥 섹스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사정 후 기분이 좋아진 두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일을 마저 씻기고 커다란 타월로 몸을 닦아 주었다. 수일은 이제 두산의 앞에서 알몸으로 있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두산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멋진 몸이 꿈틀댔다. 수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탄탄한 복근을 만지다가, 아차 싶었다. 또 설까 봐 얼른 손을 뗐다.
“와 만지다 마노?”
“아냐. 만진 거 아니구 뭐가 묻어서 그랬어.”
“지랄. 물 말고 묻을 게 머가 있노?”
“그런 게 있어. 넌 하던 거 해.”
수일은 이렇게 말하며 두 팔을 들었다. 당연히 몸을 닦아 줄 줄 알았는데 두산은 냉큼 머리를 들이밀고 젖은 겨드랑이를 빨아올렸다.
“아, 간지… 흐으.”
여린 겨드랑이 살을 입 안에 머금은 두산은 혀를 세워 주위를 둥글렸다. 수일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하읏. 아, 두산아….”
수일은 두산의 어깨를 꼭 쥐었다. 두산은 갈비뼈가 다 드러난 수일의 마른 몸통을 꽉 쥔 채 양쪽 겨드랑이와 젖꼭지를 번갈아 희롱했다. 안 그래도 사정해서 기운도 없는데 수일은 흥분돼서 미칠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쾌감에 몸을 떨었지만, 아랫도리는 얌전했다. 두산은 빨 것도 없는 젖을 모아 쭙쭙 소리 내 빨았다. 성감대를 자극받자 온몸이 흥분과 쾌감에 달달 떨렸다. 와중에도 역시나 아랫도리는 반응이 없었다. 두산이 수일의 몸에서 입을 뗐다. 수일을 한번 보고 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 이거 와 이라지? 이 정도로 빨았으면 반은 올라와야 정상인데.”
“…아까 사정해서 그래.”
“한번 뿌이 더 했나?”
“내가 그때 정말루 오래 버텼거든?”
나름 우겨 보았지만, 수일은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평소 두 번은 거뜬했는데 이게 왜 안 서나 수일도 의문이었다. 민망함을 감추려 수건 끝으로 젖은 겨드랑이와 가슴을 닦았다. 두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문제다 문제’ 했다.
얄미워서 두산의 손에 들린 수건을 뺏으려고 힘을 주었다. 그냥 잡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힘을 꽤 주고 있었는지 수일은 앞으로 튕겨 나가 두산의 가슴에 얼굴을 처박았다.
“아야!”
정말 아팠다. 뭔 놈의 사람 몸이 이렇게 딱딱한지 몰랐다. 마치 벽에 얼굴을 박은 기분이었다. 두산이 수일을 한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가지가지 한다.”
무뚝뚝하게 말하면서도 두 손으로 수일의 얼굴을 들어 혹시 다친 데가 없는지 확인했다.
“개안나?”
“응. 코가 좀 아파.”
“어데 보자.”
두산이 손가락으로 코를 살살 만지더니 개안타, 했다. 코끝에 뽀뽀를 한번 해 주고,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무슨 생각인지 수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바짝 갖다 댔다.
“일 타 이 피.”
헛소리를 하더니 드라이기를 켰다. 그렇게 이마를 맞댄 채 두산은 탬버린을 흔들 듯 드라이기를 흔들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스워서 둘은 얼굴을 마주 보며 킥킥댔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두산은 푹신한 입술로 뽀뽀도 하고 키스도 했다. 뜨거운 바람과 달콤한 키스에 기분이 몽롱했다.
삐삐가 계속 울렸다. 두산이 음성을 확인하는 동안 수일은 옷을 갈아입었다. 옷방에서 나오려다 다시 발길을 돌렸다. 잊기로 했는데도 서랍을 보자 궁금증이 일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수일은 앨범 뒤편에 있는 행복사진관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거실로 나가자 두산이 그제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 지금 가바야 된다. 덕구 부를 테니까 덕구 차 타고 가라.”
“그냥 택시 타고 갈게.”
두산은 수일의 말 따위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어 덕규를 불렀다.
최근 셔츠만 입던 두산은 웬일로 재킷까지 차려입었다. 검은색 정장이 참 잘 어울렸다. 수일은 얼른 두산에게 다가갔다. 셔츠와 재킷 깃을 정돈해 주고 가슴을 한번 쓸었다.
“넌 넥타이는 안 매니?”
“어. 답답해서.”
수일이 피식 웃고 두산을 올려다보자 입술이 다가왔다. 가볍게 입을 맞추다가 키스했다. 수일은 손가락으로 두산의 입술을 따라 선을 그렸다. 두산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다시 입맞춤했다. 촉촉한 입술 안 점막에서 치약 맛이 났다. 자신한테도 같은 치약 맛이 나겠지 싶어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나중에도 덕규 씨가 와?”
“봐서. 덕구 보내든가 아이면 핸수 행님 보내든가 하께.”
“너는?”
재킷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두산이 웃었다.
“와?”
“그냥. 너는 못 오나 해서.”
“우짜까?”
“니가 와.”
“어. 알았다.”
얼른 가 봐야 한다더니 두산은 현관 앞에서 수일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삐삐가 두 번 더 울리고서야 두산은 ‘씨발’ 하고 등을 돌렸다.
수일은 뒤따르며,
“어른들 말씀 잘 듣구. 참, 조심히 다녀와요.”
했다. 수일의 말에 두산이 바로 뒤돌아서 수일을 꼭 끌어안았다. 쪽쪽쪽, 수일의 얼굴 아무 데나 쪼아 댔다. 온 얼굴이 두산의 침으로 범벅이 되었다.
“내 진짜로 간다.”
“어우, 알았어. 그만 좀 가.”
수일은 얼굴에 묻은 침을 닦으며 두산의 등을 찰싹 때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맞춤을 하고서야 두산이 계단을 내려갔다.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두산을 보내고 혼자 남은 수일은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메모지를 꺼냈다.
소파에 앉아 후후, 숨을 크게 몰아쉬고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두 번이나 번호를 잘못 눌렀다. 세 번째 시도 만에 겨우 제대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안 받아서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데,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 행복사진관입니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 여보세요? 행복사진관입니다. 말씀하세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 저기. 사장님… 계신가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 지금 일하시는 중인데. 사진 맡기신 거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아, 아닙니다. 지금 바쁘시면, 나중에… 그게, 제가 다시 걸게요.”
- 잠시만요. 끊지 마세요. 여보! 여기 손님이 당신 찾아요.
여자가 남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수일은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고 자신을 달랬다. 사진관 사장이 아는 거라고 해 봐야 여사장의 가게가 어찌 되었나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 전화 받은 여자가 그때 그 사진관 사장의 아내란 법도 없었다. 10년은 긴 시간이니 사진관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을 수도 있었다.
- 전화 바꿨습니다, 말씀하세요.
나이 든 목소리긴 했지만 분명 수일이 아는 사진관 주인이었다. 수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는 윤수일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기억하실지… 10년 전에 그 근처 에덴동산에서 일했었는데.”
- 아! 네, 기억하죠. 기억하다마다요. 아유,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사장의 목소리엔 반가움보다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네. 안녕하셨어요? 별안간 연락해서 놀라셨죠?”
- 아니 뭐, 그렇긴 한데. 와,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이야? 에덴동산이라니.
“그르게요.”
먼저 전화를 건 주제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수일은 난감했다. 그 흔한 인사치레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오래전의 인연이기도 했고, 그저 말을 트고 지냈을 뿐 따로 교류가 있었던 사이도 아니라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상대편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수일은 이대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용기 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기, 그때 저희 사장님 기억하세요? 한정숙이라구.”
- 아유, 당연히 기억하지. 그 여자야 뭐 워낙 유명했잖아요.
“갑자기 전화해서 이런 걸 물어서 죄송한데요, 그때 저희 가게 왜 문을 닫았는지 아시나 해서요.”
- 어? 그때 윤수일 씨는 없을 때였나? 난 또 다 같이 쫓겨났나 했더니. 그 여자 자살했잖아. 목매달아서.
자살이라니. 뜻밖의 말에 수일은 멍해졌다.
왜 전화했나 싶어 잔뜩 경계하던 사진관 사장은 어느새 신이 나 있었다.
- 그 여자가 보통 여자는 아니잖아. 같이 뽀르노 사진 찍던 그 남자하고 헤어졌나 어쨌나 그랬나 보던데, 글쎄 그 남자가 소개해 준 사기꾼한테 돈을 싹 다 털렸대요. 지 혼자만 털린 것두 아냐. 아는 마담들 돈까지 죄 끌어다가 투자했나 보더라구요. 근처 상인들도 몇몇 털리구, 우리 집에도 왔었다니까. 투자 한번 해 보라고. 어찌나 말을 잘하던지. 내가 그때 돈만 있었으면 나도 털렸을 거야.
여사장과 포르노 사진을 찍던 남자라면 기둥서방이었다. 수일의 기억에는 여사장이 기둥서방과 헤어진 일은 없었다. 당시 두 사람은 같이 산 지 1년이 넘었는데도 마치 어제부터 사귄 사이처럼 늘 끈끈했었다.
“그 남자하고 헤어졌대요?”
- 아이 뭐, 나도 자세히는 잘 모르구. 누군 남자가 죽었다고도 하고 누군 그 사기꾼하고 짜고 돈 먹고 날랐다고도 하고, 소문이 워낙 많았어요. 아무튼, 그게 82년도였나, 설 연휴 끝나고 나서 거기 직원이 가게에서 그 여자가 목매 죽어 있는 걸 발견했거든. 그날 경찰 부르고 구급차 부르고 난리 났었지. 다들 그때 알았다니까, 그 여자가 돈 다 날린 것두.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은 사람도 있는데, 책임질 사람이 있어야지. 여자는 죽었지. 남자하고 사기꾼은 날랐지. 정말 난 년이야 그년. 솔직한 말루 보통 변태였어요? 윤수일 씨도 알죠? 어휴, 내가 별 사진을 다 봤지만, 그 사람들 좀 심했어. 그런 변태 년놈들을 믿은 사람들이 잘못이지. 거기서 일하는 사람 중에 정상이 있었겠어요? 쑨 못 배워 먹은 것들이 몸 팔고 그러는 거 아냐.
수일은 거기까지 듣고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진관 사장은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상세히 전하면서 하지 않아도 될 소리까지 했다. 군말 없이 여사장의 사진을 인화해 주고 수일에게도 친절해서 무던하고 편견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남들과 똑같이 가게에서 일하던 자기들과 여사장을 경멸하고 있었다.
긴장이 탁 풀렸다. 수일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사장이 자살했다는 사실보다 그 이유가 충격적이었다. 수일이 아는 여사장은 귀가 얇은 부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독할 정도로 자기 것에 예민하게 굴었다. 사람이든 돈이든 예외가 없었다.
기둥서방이 가게 직원들에게 함부로 구는 것도 끔찍이 싫어했고, 더욱이 자기 돈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하루는 기둥서방이 카운터에서 현금 몇만 원을 챙긴 걸 가지고 경찰까지 부른 적도 있었다. 둘은 쌍욕을 하며 싸우다가 화해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지냈다.
그런 여사장이 기둥서방에게 사기를 당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게 사람 일이었다.
수일은 저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돈을 벌게 해 준 여사장이 자살했다는 데 되레 안도했다. 혹여나 자신이 차를 몰다 난 사고로 죽었을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고 당시 수일은 혼자 타고 있던 게 맞았나 보았다.
사진관 사장의 말이 조금 씁쓸하긴 했으나, 그래도 사진관에 전화하길 잘했다고 수일은 생각했다. 홀가분했다. 괜히 걱정했다며 웃었다.
덕규는 시간 맞춰 도착해 수일을 오성관에 데려다주었다. 응급실 이후 처음 본다며 반가워했다. 그사이 덕규도 신수가 훤해진 것 같았다.
오성관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전보다 직원들끼리 사이가 좋아 보였다. 야유회 덕에 병태파와 기존 직원들 사이에 돌던 묘한 거리감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덕규는 수일의 사양에도 굳이 수일의 무대복과 짐을 들어 대기실로 함께 걸었다.
“와, 여는 억수로 올드하다. 요새 이런 데도 손님이 옵니까? 장난 아이네. 문 닫아야 되는 거 아이가?”
나이트를 둘러보며 무심결에 속에 있는 말을 하던 덕규가 흠칫 놀랐다.
“아이, 그기 아이라요, 행님, 제가 말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요 뭐.”
“아입니다. 죄송합니다, 행님.”
덕규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가며 사과했다. 수일이 더 민망했다.
오성관은 문을 연 지는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기존 나이트를 조금 손보고 칠만 새로 한 낡은 곳이었다. 이보다 더 후진 곳도 다녔던 수일이야 상관없지만, 화려한 밀레니엄에서 일하는 덕규 눈엔 어떻게 보일지 뻔했다.
덕규는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였다. 대기실 테이블에 수일의 짐을 내려놓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은아 씨가 한창 화장을 하다 덕규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쟈는 누고?”
목이 잠겨 있었다.
“두산이 아는 동생이요. 누님 감기 걸리셨어요? 목소리가….”
“감기는 아이고, 낮에 행사 뛰고 왔더니만 목이 좀 갔네.”
은아 씨는 인삼차를 홀짝이며 화장을 마저 했다. 행사를 뛰고 오면 늘 기분이 좋은 은아 씨였는데 오늘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안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행사장에서 진상을 만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은아 씨가 저 정도로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면 보통 진상이 아니었나 보았다.
이럴 때 삼락 형님이 있었다면 큰소리로 상대를 욕해 주고, 우스갯소리를 해서 은아 씨의 기분을 풀어 줬을 텐데 아쉬웠다.
형님은 감옥에서 잘 계실까? 그나마 한겨울에 들어간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은 수다를 떨 때 한 번씩 고생담을 얘기했는데, 그중 반 이상이 추위 얘기였다. 얼마나 추우면 자다가 입이 돌아간 사람도 있다고 했다.
“참 수일이 니 내가 준 명함 갖고 있제? 늦기 전에 퍼뜩 연락해바라. 그거 서로 한다꼬 난리다.”
“네. 그럴게요.”
협회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수일은 명함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은아 씨는 리허설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마스터도 어제부터 출근하지 않아서 은아 씨를 달래 줄 사람이 없었다. 수일이 나서서 아무 말이나 시켜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답형이라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집에서 두산과 함께 저녁을 먹고 나온 수일은 리허설이 끝나고 갈 곳이 없어 오성관 근처를 맴돌았다. 그러다 슈퍼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은아 씨를 보았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서 나눠 먹어야지 하고 슈퍼로 들어가는데 은아 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10시까지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군지 몰라도 은아 씨는 전화기에 대고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누님,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어? 내는 아이스크림 말고 빵 좀 사도.”
“네.”
수일은 은아 씨가 저녁도 건너뛰었다는 게 생각나서 우유도 같이 샀다. 슈퍼 평상에 나란히 앉아 수일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은아 씨는 빵을 먹었다. 하나로는 부족해 보여 빵 하나를 더 사 왔다. 빵 두 개를 먹고 우유까지 마신 은아 씨의 얼굴이 밝았다.
“수일아, 내 미안한데, 니한테 부탁이 하나 있다.”
“무슨 부탁이요?”
“내 돈 쫌 빌리도. 한 30만 원만.”
미안하다 하면서도 망설이는 기색은 없었다. 수일에게 부탁하는 거로 봐선 정말로 돈이 궁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없는데, 내일 드려도 돼요?”
“내일 아침까지 안 되겠나? 내 10시까지 꼭 써야 할 데가 있는데.”
아침 10시쯤이면 다행히 두산이 없을 시간이었다.
“네, 어디루 가면 되나요?”
“아이다. 내가 가께. 어차피 행사 뛰야 돼서 차 끌고 갈 끼다. 난중에 주소나 적어도.”
“네. 그럴게요.”
“고맙다 수일아. 내 니뿌이 읍따.”
은아 씨가 수일의 팔짱을 끼고 흔들며 웃었다. 은아 씨 기분이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돈 몇백 원이 없어서 종일 굶은 적이 많았던 수일은 은아 씨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사치하는 사람이었다면 절대 빌려주지 않았겠지만, 은아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긴히 필요한 일이 있어서 하는 부탁이라고 여겼다.
나이트는 갈수록 손님이 줄었다. 살인범이 노래를 불렀던 곳이라는 소문이 나서 그렇다고 종업원들끼리 투덜댔다.
형님은 살인범이 아니라 오해가 생겼을 뿐이었다. 나중에 형님이 출소하면 나이트는 인기가 많아질지도 몰랐다. 누명을 썼던 잘생긴 가수 최삼락을 보러 온 손님들로 허름한 나이트가 꽉 들어찰지 누가 알겠는가. 수일은 싱거운 상상을 하며 무대에 올랐다.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고 얼마 뒤, 팟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더니 조명이 모두 꺼졌다. 홀 안이 깜깜했다. 웅성거리며 종업원을 부르는 손님들의 소리만 들렸다. 정전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수일은 어둠 속에서 여사장의 얼굴을 보았다. 수일에게 사진을 내밀며 여사장이 말했다.
‘니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붉은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