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81)

야유회 가는 날이라 수일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최근엔 늦잠을 자는 날이 많아서 눈을 뜨면 늘 두산이 집에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집 안이 적막했다. 갑자기 서운했다.

괜히 일어나기 싫어서 꾸물거리다가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두산이 없으니 기운도 없었다. 이도 겨우 닦고 몸도 대충 씻었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아침 프로가 한창이었다. 재미없어서 꺼 두고 멍하니 브라운관을 바라보았다.

두산과 함께한 지 겨우 두 달이건만 수일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동네라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옷방으로 가 윗도리만 갈아입었다. 지갑을 꺼내려 소지품을 넣어 두는 서랍을 열었다가 수첩이 사라진 걸 알아챘다. 항상 지갑 옆에 뒀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없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퇴원 후 지갑을 내려놓을 때도 없었던 것 같았다.

손때가 묻은 낡은 수첩엔 수일이 아는 모든 사람의 연락처가 담겨 있었다.

“어디 갔지?”

예전 숙소에 있을 때 몇 번 밖으로 갖고 나간 것 말곤 손을 댄 적이 없었다. 분명 소지품 가방 안에 같이 넣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가방을 뒤지고 서랍을 뒤져도 나오질 않았다. 여기로 이사 올 당시 정신이 없어서 놓고 왔나 싶었지만 따로 물건을 빼 두는 성격이 아니라 그럴 리가 없었다.

수일은 혹시나 하고 다른 서랍을 뒤지다가 상엽에게 맡겨 둔 앨범을 발견했다. 앨범 옆에 수일의 수첩이 놓여 있었다. 이 앨범이 왜 여기 있는 걸까? 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부산에 내려올 때 이 무거운 걸 들고 온 기억이 없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수일은 일단 수첩만 챙겨 제 서랍에 옮겨 두었다.

“왔어?”

“어. 일찍 일났네?”

“응. 어디 갔다 왔어?”

“집.”

두산은 양손에 든 보자기를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입술을 쭉 내밀었다. 수일은 두산에게 다가가 쪽 뽀뽀했다.

“나갈라꼬?”

수일의 옷차림을 흘끔 쳐다보며 두산이 물었다.

“어. 그냥 요 앞 슈퍼에.”

대충 얼버무리며 두산을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뭐야?”

“국하고 밥.”

식탁 위에 보자기를 풀자 사각형의 바구니에서 홍합미역국과 갈치구이, 밥그릇이 나왔다. 나머지 바구니엔 밑반찬들이 있었다. 도라지무침과 멸치볶음, 연근 조림, 오징어 젓갈에 오이소박이까지, 푸짐했다. 그런데 밥그릇이 하나뿐이었다.

“너는?”

“내는 묵고 왔다. 퍼뜩 앉아라.”

분명 하나도 배고프지 않았는데, 꼬르륵 소리가 났다. 수일은 얼른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두산이 맞은편에서 갈치 살을 발라 입에 넣어 주었다. 고소하고 맛있었다.

“천천히 무라.”

“응.”

밥을 한가득 퍼서 입 안에 넣자 또 갈치 살이 들어왔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라지무침과 연근 조림도 미역국도 다 정갈하고 맛있었다. 오징어 젓갈에 밥을 조금 비벼 갈치와 함께 먹어도 꿀맛이었다.

“진짜루 맛있어.”

“담에는 같이 가서 무까?”

“응?”

“우리 집.”

그 말을 듣자마자 수일은 사레가 들렸다. 두산이 급히 보리차가 담긴 물컵을 건넸다.

“에헤이, 천천히 무야지. 클난다.”

이렇게 말하며 수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퍼, 살살.”

“엄살은.”

두산은 이번엔 손에 힘을 빼고 살살 두드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산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수일은 염치없지 않았다. 아니, 집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할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잘만 넘어가던 밥이 목구멍에서 꽉 막혔다. 일부러 나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수일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마시듯 먹었다.

“쫌 천천히 무라.”

두산의 타박에도 수일은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었다. 양쪽 볼이 불룩할 정도로 음식을 입에 문 수일을 두산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 오늘 거기서 수영해?”

수일은 급하게 음식을 씹어 삼키고, 야유회 얘기를 꺼냈다.

“안 된다. 물도 마이 찹고, 니 몸도 안 좋은데 감기 걸린다. 고마 발만 담가라.”

“응.”

“내 뽀뜨는 태아주께.”

“응.”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던 지난번 밀레니엄 야유회와는 달리 이번엔 보트도 타고 보물찾기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 아는 동생들이었고 은아 씨도 있어서 수일은 기분이 좋았다.

“오늘 보물찾기 하는 거 들었지?”

“어.”

“나 보물 잘 찾아.”

수일이 뻐기듯 말했다.

“진짜야.”

“알았다. 그라믄 내는 니만 졸졸 따라댕길 테니까 니가 다 찾아라.”

“응. 나만 믿어.”

실은 어제 막내 영수가 수일에게 몰래 보물 숨겨 둘 장소를 몇 군데 알려 주었다. 병태가 모든 장소를 알고 영수는 그중 일부만 안다고 했다. 1등 선물은 자동카메라라며 ‘행님이 꼭 타십시오’ 했다. 수일은 경품보다 학창 시절에나 하던 보물찾기를 한다는 데 신났다.

두산이 마지막 남은 갈치 조각을 수일에게 먹여 주었다. 볼을 한번 쓰다듬고 더 물래? 물었다. 수일은 고개를 저었다.

이를 닦고 나와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입원하기 전 딱 한 번 신었던 샌들도 꺼냈다.

“딴 거 신어라.”

지는 검은색 샌들을 신어 놓고 수일에겐 신지 말라고 했다.

“왜? 사 두고 한 번밖에 못 신었는데. 아깝잖아.”

“아깝기는. 내년에 신으면 되지.”

“해변에 가는데 나두 이거 신으면 안 되니?”

수일은 시무룩한 얼굴로 샌들을 내려다보았다. 두산이 한숨을 쉬었다. 이내 못마땅한 말투로 ‘신어라’ 했다. 수일은 곧장 두산의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며,

“고마워요.”

했다. 두산이 바보같이 웃었다.

다대포는 두산과 함께 간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괜히 설렜다. 그땐 이런 사이가 될 줄 몰랐는데, 어느새 두산이 없으면 수일은 허전하고 외로웠다. 가끔은 곁에 있어도 그립고 보고 싶었다. 참 이상했다.

가는 길에 은아 씨를 태웠다. 은아 씨는 선글라스에 짧은 청반바지를 입고 진분홍색의 화려한 민소매 티를 입고 나타났다. 오랜만의 물놀이라며 들떠 있었다.

숙소 동생들은 봉고 두 대에 나눠 타고 왔고, 복희와 영희는 사장과 함께 왔다. 강 이사는 예의 덩치 셋과 현수를 대동했다. 현수는 수일을 보고 고개만 까딱했다. 현철은 정애 씨를 데려왔고, 막내 영수도 애인을 불렀다. 못 보던 얼굴은 오성관 직원들의 애인이거나 친구였다. 다들 신나 보였다.

하늘이 흐리긴 했지만 기온이 높아서 놀기 좋았다. 바닷바람도 차지 않았다. 삼락 형님도 함께였으면 좋았으련만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곧 감옥에서 나올 테니 그때 보면 되지 싶었다.

커다란 파란 천막을 두 개 치고, 그 밑에 간이 테이블을 놓았다. 근처에서 바비큐도 만들었다. 숙소 동생들이 돌아가며 삼겹살과 소시지를 구웠고, 정수를 포함 홀 직원들이 서빙을 했다.

수수하게 차려입은 정애 씨는 현철이 바쁜 바람에 수일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정애 씨에게 자리를 양보한 두산은 뚱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마음에도 없는 양보를 한 게 티가 나서 수일은 정애 씨 보기 민망했다.

“두산아, 먹을 것 좀 더 가져와.”

“어? 어.”

두산은 정애 씨를 한번 노려보고, 어슬렁거리며 바비큐장으로 걸어갔다. 하여간 애는 애였다. 바다를 보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정애 씨에게 수일은 사이다를 건넸다.

“미용 학원은 재밌으세요?”

“예. 쪼매 힘들기는 한데, 아직까지는 억수로 재밌어예.”

“나중에 커트 연습할 사람 필요하면 저 부르세요.”

“예.”

수일의 말에 정애 씨는 수줍게 웃으며 사이다를 마셨다. 은아 씨가 접시 한가득 삼겹살과 소시지를 담아 테이블에 합석했다.

“오랜만이네. 정애 씨는 결혼하고 나서 얼굴이 더 좋아짔다.”

“아이라예.”

“아이기는. 인물이 훤하다.”

은아 씨의 칭찬에 정애 씨가 배시시 웃었다. 수일도 따라 웃으며 두산이 뭘 하나 돌아보았다. 그러다 주위를 맴도는 마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형님, 여기 와서 앉으세요.”

“마스터, 거서 머하노? 온나, 와서 앉아라.”

그제부터 마스터는 이상하게 굴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앉고도 남았을 사람이었다. 설마 은아 누님하고 사귀는 건 아니겠지? 괜스레 걱정되었다.

“아이다. 내는 뺀드들 하고 같이 있을란다.”

마스터는 정애 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다들 아내나 애인을 대동해서 자리가 없었다. 마스터는 그 옆 빈 테이블에 청승맞게 혼자 앉았다.

“하이고, 저 양반은 또 와 저라노? 쯧. 내가 가주야지 밸수 있나?”

은아 씨는 접시를 들고 마스터가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말만 험했지 마음은 제일 약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마스터는 아닌데. 수일은 두 사람 테이블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언제 왔는지 두산이 접시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았다가 의자를 들고 수일의 옆으로 와 앉았다. 영화관도 아니고 셋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영 이상했지만, 두산에게 가라고 할 수 없어서 그냥 두었다.

간이 무대와 마이크 설치가 끝나자마자 강재욱이 단상에 올랐다. 잘나가는 사업가처럼 차려입은 강재욱은 잘생긴 얼굴을 선글라스로 가리고 있었다. 단상에 오르면서 선글라스를 벗자, 정애 씨가 작은 목소리로 ‘엄마야, 억수로 잘생깄다’ 감탄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다.

“안녕하십니까, 오성관 식구 여러분. 강재욱입니다.”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사장이 제 연설 차례를 기다리며 손이 터져라 손뼉 쳤다.

“우리 오성관이 문을 연 지 5개월이 넘었는데, 이제야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오성관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마이 묵고 마이 웃고, 재밌게 놀다 가이소. 감사합니다.”

연설은 짧고 간결했다. 다들 박수를 치며 ‘강재욱’을 연호했다. 수일도 따라서 박수를 치다가 두산에게 손이 잡혔다. 인상을 쓰고 있어서 얌전히 두 손을 내렸다.

이번엔 사장 차례였다. 강재욱에겐 자발적으로 박수를 치던 직원들은 태도를 바꿔 마지못해 환호했다. 사장은 그것도 모르고 손까지 들어 가며 박수를 제지했다. 연설을 하러 나온 정치인처럼 굴었지만, 강재욱에 비하면 볼품없었다.

연설은 길었다. 정애 씨가 하품을 했고, 두산은 발장난을 쳤다. 하얀색 샌들에 자꾸 모래를 뿌리고 맨발로 발등을 훑었다.

“하지 마.”

“와? 억울하면 니도 해라.”

수일도 샌들 한쪽을 벗고 두산의 발등에 제 발을 턱 하니 올렸다. 그러자 두산이 발을 빼서 수일의 발등에 커다란 발을 올렸다. 둘은 서로 밑장빼기를 하며 아웅다웅 발장난을 했다. 모래가 사정없이 튀었고, 두산이 뒤로 자빠질 뻔도 했다. 앞에서 연설하는 사장 눈치를 보며 수일은 풉, 하고 웃었다.

5분도 넘게 구구절절 이어지는 사장의 연설에 다들 정색했지만, 사장은 눈치채지 못했다. 지루한 연설의 끝에 지금부터 보물찾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하는 순간 열렬한 박수가 터졌다.

보물찾기를 알리는 소리에 수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어 둔 샌들을 서둘러 신고 두산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애 씨도 현철을 찾아 헤맸다. 두산은 수일에게 딸려 오면서 짧게 웃었다.

“빨랑.”

“알았다. 간다.”

두산이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수일의 힘으론 끌어내지 못했다. 두산은 수일의 걸음에 맞춰 함께 움직였다.

모두 어린아이처럼 소리치고 웃었다. 누구는 몸싸움을 하며 숨겨 둔 보물 쟁탈전을 벌였다. 보물인 오성관 성냥갑을 가장 많이 모은 사람이 1등이었다.

수일은 두산의 손을 잡고 영수가 알려 준 장소로 가 보물 세 개를 먼저 찾았다. 열심히 보물을 찾는 동안 두산은 수일의 엉덩이를 쥐거나 허리를 안고 뽀뽀를 했다. 처음엔 누가 볼까 밀어냈지만, 두산의 말론 해변이 워낙 넓어서 아무도 못 봤다고 했다.

“아이고, 눈꼴시러버라. 그래 좋나?”

두산이 또 엉덩이를 움켜쥐는 순간 뒤에서 은아 씨의 말소리가 들렸다. 수일은 허겁지겁 손을 쳐 내고 보물 찾는 시늉을 했다.

“누야 참 눈치 읍따.”

“눈치 좋아하네. 저만치서 다 보이드라. 뽀뽀하고 안고 난리부르스를 치더만은, 어데 애인 없는 사람 서러버서 살긋나.”

수일은 허리를 펴 두산을 잔뜩 노려보았다. 본 사람 없다고 해 놓고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누님은 보물 많이 찾으셨어요?”

목까지 벌게진 수일은 화제를 돌리려 은아 씨에게 물었다.

“한 개 뿌이 몬 찾았다. 니는?”

“저는 네 개요.”

“벌쌔로? 내 한 개만 도.”

은아 씨가 손을 내밀었다. 수일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성냥갑 하나를 꺼냈다.

“에헤이, 수일이 행님이 고생해서 찾은 긴데 으데 뺏아갈라 카노? 누야가 직접 찾아라.”

“염병. 느그들은 둘이서 찾았다 아이가, 내는 혼자고.”

“여기, 하나 가지세요.”

“안 된다.”

은아 씨에 건넨 성냥갑을 두산이 바로 뺏어서 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너 왜 그래?”

“와 그라긴.”

“됐다. 드러버서 안 받으 끼다.”

은아 씨는 찰싹 소리 나도록 두산의 팔을 때리고, 머리 위에 올려 둔 선글라스를 내려 썼다. 날이 흐리긴 했지만 오후 2시가 넘어가자 수일의 얼굴도 빨갛게 익어 갔다. 두산은 어디서 모자를 하나 구해 와서 수일에게 씌어 주었다.

1시간 가까이 진행된 보물찾기가 끝났다. 수일은 3등을 해서 참치 선물 세트를 받았다. 기념사진도 찍었다.

출출하면 천막으로 가 삼겹살과 소시지를 먹었고, 목마르면 맥주를 마셨다. 과자와 과일, 다른 음료수도 넘쳐 났다.

수일은 두산과 해변을 거닐며 조개껍질을 주웠다. 그러는 동안 두산은 카메라를 든 사람이 보이면 불러서 사진을 찍게 했다. 단둘이서 찍고, 정애 씨와 현철 커플과도 찍었다. 은아 씨와 셋이서도 찍었다. 다들 환하게 웃었다.

두산은 약속한 대로 모터보트를 빌렸다. 정애 씨와 은아 씨 그리고 수일을 태우고 다대포 해변을 세 바퀴 돌았다. 장난친다고 일부러 배를 한쪽으로 많이 기울여 운전하는 바람에 수일은 바다에 빠져 죽는 줄 알았다. 어찌나 좌우로 흔들어 대면서 험하게 운전하던지 멀미도 나서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그 순한 정애 씨가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두산은 비명이 들리면 재밌다고 깔깔 웃었다. 한 대 치고 싶었다. 수일은 보트를 꽉 붙들고 울기 직전까지 갔다. 보트가 멈추자 은아 씨가 재밌었다며 한 번 더 타자고 졸랐다. 수일과 정애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수일아, 내하고 한 번만 더 타자.”

“누님 혼자 타세요.”

땅이 다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내린 은아 씨는 두고두고 한 번 더 못 탄 걸 아쉬워했다.

“넌 왜 운전을 그렇게 하니?”

속이 계속 울렁거려 열이 받은 수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두산은 입을 비죽 내밀 뿐 반성하는 기미가 없었다. 미운 짓만 골라 했다.

해변에선 비치 발리볼이 한창이었다. 두산이 경기에 끼어들었다. 수일은 은아 씨와 모래사장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두산은 맨 먼저 웃통을 깠다. 역시 몸은 두산이 최고로 좋았다. 수일은 땀에 젖어 가는 두산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늘 억수로 기분 좋다. 오랜만에 콧구멍에 바람도 쐬고 이래 맛난 것도 묵고. 미우나 고우나 오성관이 제일이다. 그쟈?”

이렇게 말하는 은아 씨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수일도 은아 씨와 같은 생각을 했다. 익숙하고 정겨운 얼굴들과 이렇게 야외에 나와 웃고 떠들고 사진을 찍는 건 수일에게도 드문 일이었다. 마음 편하고 가슴 따뜻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수일에게도 오성관은 좋은 직장이었다. 계약이 한 달밖에 안 남은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수일은 무릎에 턱을 괴고 눈으로 두산을 좇았다. 두산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수일도 두산을 향해 손을 흔들고 미소 지었다.

“수일아. 미안하다.”

술에 잔뜩 취한 마스터가 비틀거리며 수일을 향해 다가왔다. 웬일로 강재욱의 덩치 중 하나가 근처를 배회했다.

“마스터, 치했으면 가서 자라. 여 와서 분위기 깨지 말고.”

수일을 대신해서 은아 씨가 마스터에게 핀잔을 주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마스터는 침까지 질질 흘렸다. 얼굴은 뻘겋다 못해 터질 듯했다. 저러다 큰일 날 것 같았다.

“형님, 많이 취하셨어요. 그늘에서 좀 쉬세요.”

“그래, 오빠야, 가서 쫌 쉬라.”

둘은 동시에 일어나 마스터를 양쪽에서 부축했다.

“아이다. 내 안 치했다. 수일아 진짜로 미안타. 내가 니한테는 그라믄 안 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저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다고….”

“내가 니를 갱찰에다가.”

“마스터! 지금 뭐 하십니까?”

근처에 있던 덩치가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목소리가 크던지 주위에 앉아 경기를 보던 동료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덩치는 사정없이 마스터의 어깨를 잡더니 그를 질질 끌고 갔다.

“미안하다, 수일아!”

덩치에게 끌려가면서 마스터가 울부짖었다. 울고 있었다. 경기하던 선수들까지 당황해서 마스터가 끌려가는 걸 지켜보았다. 멀리서 강재욱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놓고 끌려오는 마스터를 보며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걸까.

수일은 그 이유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두산을 돌아보자, 마스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면 강재욱인가? 둘 다 비슷한 위치에 있어서 두산이 바라보는 게 누군지 수일은 알 수 없었다. 두산이 웃었다. 하이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삐뚜름히 하고, 예쁜 입매를 비틀었다. 뱀 같은 눈이 번뜩였다.

***

저녁 8시경, 전석모가 경찰서로 이 형사를 찾아왔다. 마르고 볼품없는 남자는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연락을 받지 않아서 오성관으로 찾아갔는데, 하필 오늘이 야유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 먼 데까지 가서 허탕을 쳐 짜증이 난 이 형사 앞에 때마침 제 발로 나타났다. 이 형사는 커피를 뽑아 접견실로 그를 안내했다.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어지간히도 마신 모양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전석모가 겨우 입을 뗐다.

“그, 제가 말실수를 한 게 있어가지고예….”

남자는 최대한 똑바로 얘기하려고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무슨 실수 말입니까?”

“그기, 전에 여서 말씀드렸던 윤수일 얘기예.”

어젯밤 구속 영장이 발부된 최삼락은 아침 일찍 부산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정작 최삼락 본인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병신 같은 변호사가 헛소리만 늘어놨고, 최삼락은 그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

오죽했으면 이 형사가 최삼락의 어머니를 따로 불러 다른 변호사를 찾아보라고 명함까지 건넸겠는가. 하지만 최삼락의 어머니는 이 형사가 보는 앞에서 명함을 찢어 버렸다. 아들처럼 변호사의 감언이설에 벌써 넘어간 상태였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최삼락이 진범인지 아닌지 이 형사도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짓도 40년이 다 되어 갔다. 억울하다 울부짖던 평범한 가장들이 잔인한 살인범이었던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정말 이 남자는 누명을 쓴 거라 확신하며 발이 부르트도록 사건을 쫓았다가,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다른 살인까지 찾아낸 일도 있었다. 아픈 부모와 마누라, 자식 이름까지 걸며 무죄를 주장한 강간 살인범은 또 어떤가.

사람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이 형사는 형사 일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고, 더는 감정에 휩쓸려 동정하거나 쉽게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 사건은 최삼락이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고 형사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입증할 방법도 증거도 없었다. 살인이 일어났을 당시 최삼락이 그 집에 있었다는 건 본인 입으로도 확인된 사실이었다.

강재욱이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연결 고리가 약했다. 게다가 왜 잘나가는 조폭 사업가가 삼류 밤무대 가수를 중심으로 판을 짰는지 도무지 납득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강재욱이 싫어서 이 형사가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 건지도 몰랐다.

“씹할, 머가 먼지 도대체가 모르겠네.”

이 형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건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이 형사에게 남은 유일한 실마리는 거짓 제보를 한 전석모였다. 그 사람이 지금 제 앞에 있었다. 이 형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라도 하나 쓸 만한 걸 건지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했다.

“말씀하이소. 듣고 있습니다.”

“그기, 제가 착각을 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여서 한 말이 다 거짓말이라 이 말입니까?”

“그건 아이고예, 윤수일 얘기만 거짓말입니다.”

“최삼락 씨 얘기는 맞고?”

“예.”

전석모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죄책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재판소에서 증언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왜 하필 윤수일 씹니까? 혹시 돈 같은 거 받았습니까?”

“돈이예? 아이고, 그런 일 절때로 없었습니다. 고마 제가 착각했습니다.”

“우째 그런 착각을 하셨을까예? 여러 번 작당 모의하는 거를 들으셨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치면 최삼락 씨 얘기도 거짓말 아닙니까?”

“최삼락은 맞습니다. 윤수일만 착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사님.”

논리가 하나도 맞질 않았다. 전석모는 고집스레 최삼락은 맞고 윤수일만 틀리다 반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쪼아 보고 협박해 보아도 입을 꾹 다물었다. 잡을 지푸라기는커녕 머리카락 하나 없었다. 이 형사는 한숨을 쉬었다.

“고마 가셔도 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짓 하지 마이소. 거짓 제보도 공무집행방해죄로 감옥에 드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형사님.”

전석모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일어나 고개를 꾸벅하고 접견실을 나갔다.

이 형사는 경찰서 문을 나서는 전석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당 검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했는데, 쓸데없는 짓이었다. 이 사건은 찜찜함만 남기고 이대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야유회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직원들은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나이트에 도착했다. 숙소 동생들과 홀 담당 종업원들은 급히 내부를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허둥댔다. 당연히 리허설 할 시간도 없었다. 마스터를 제외한 밴드 멤버와 수일 그리고 은아 씨는 술도 깰 겸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었다.

슈퍼 안 작은 TV에서 9시 뉴스가 한창이었다. 서울 뉴스가 끝나고 부산 스튜디오로 넘어가자마자, 대주상사 부부 살인범의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소식이 제일 먼저 떴다. TV 화면엔 삼락 형님이 푸른색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채 호송 차량에서 내리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

다들 TV를 올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형님은 당당해 보였다. 큰소리로 ‘억울합니다. 저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외치는 소리가 마이크에 잡혔다. 경찰서에서 바로 풀려나지 못하고 구치소까지 갔다가 풀려나려나 보았다. 수일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며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은아 씨가 ‘말 한번 잘한다’ 하며 형님 편을 들었다.

“삼락 아재 화면 빨 잘 받네.”

웅이가 싱거운 농담을 했다.

“근데 저 사람들도 팔자 한번 사납다. 뉴스 보이 그래 잘살았다 카드만은 하필 칼에 맞아 죽노?”

“저기 다 지 팔자아인교. 죽으면 돈 그기 먼 상관이고?”

밴드가 한마디씩 주고받는 걸 수일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그때 귓가에,

‘걔 죽었대. 그년 팔자도 기구하지. 하필 맞아 죽냐?’

하는, 상엽의 말소리가 들렸다. 수일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야, 벌쌔로 이래 됐나? 퍼뜩 드가자. 10시 다 됐다.”

은아 씨의 말에 다들 오성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금 전 그 목소리는 뭐였을까?

수일은 소름까지 돋은 팔을 쓱쓱 문지르며 밴드와 은아 씨를 따라 어두운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

‘걔 죽었다고.’

수일은 우뚝 멈춰 섰다.

불현듯 제 머릿속에 이런 게 있었나 싶던 기억이, 그날 일이 또렷이 생각났다. 상엽에게서 연화의 죽음을 들었던 그날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최 군이 사라지고 한 달 뒤, 상엽이 가게로 찾아왔다. 여사장은 상엽을 반기면서도 은근 하대했다. 여기서 일하게 해 달라는 상엽의 부탁은 언제나 그렇듯 매몰차게 거절했다.

‘임 군아, 너는 얼굴이 안 되잖니. 그러면 키라도 크든가, 아니면 몸이 좋든가. 뭐 하나 되는 게 없어요. 그리구 그 여드름 자국두 우리 손님들은 싫어해.’

‘에이, 사장님두. 이거야 화장으로 가리면 된다니까 그르네? 그리고 나 정도면 키 크지?’

‘어우, 됐어. 아무튼, 넌 안 돼. 거울 좀 보고 제발 정신 좀 차려. 응?’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날이었다. 가게 입구에 커다란 트리 장식을 놓고 캐롤을 틀어 두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수일은 갑작스러운 상엽의 방문에 의아해했다. 지난번 돈을 빌려 달라는 걸 거절한 뒤로 상엽은 한 달 넘게 수일의 연락을 받지 않았었다. 안 그래도 미안해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화가 좀 풀린 모양이었다.

‘형, 시간 돼?’

‘어. 잠깐이면.’

‘얘, 너 곧 손님 올 거야. 짧게 끝내.’

‘네. 사장님. 저기 방에서 얘기해도 되죠?’

‘그래. 이왕 여기 온 거 서비스루 맥주 한 병 들고 가.’

‘감사합니다.’

수일은 주방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과 잔 두 개를 꺼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 붙여 둔 꼬마전구가 반짝반짝 귀여운 빛을 발했다.

‘하, 씹할, 저년은 왜 나한텐 일자릴 안 주지?’

방문을 닫자마자 상엽이 욕을 쏟아 냈다. 수일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작년부터 수일의 핑계를 대며 가게를 들락거렸던 상엽은 여기서 일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호스트는 나이트에 비하면 몇 배나 수입이 많았고, 게다가 손님들 대부분이 어리고 예쁜 업소 종사자들이었다. 돈을 줘야 겨우 잘 수 있는 그녀들에게 돈을 받고 잠까지 잔다며 상엽은 수일을 몹시도 부러워했다.

‘형, 솔직히 여기 나보다 못한 애들 많잖아. 그지? 근데 왜 나만 안 된대?’

수일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맥주를 따르며 말을 돌렸다.

‘연락 안 되길래 걱정했는데…. 별일 없었지?’

‘어, 좀 바빴어. 형은?’

‘나야 늘 그렇지.’

상엽인 자리에 앉는 대신 방 안을 돌아다니며 손으로 트리 장식들을 하나씩 건드렸다. 표정이 밝았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아니. 그냥 크리스마스 분위기 나고 좋아서. 일단 맥주 한잔하자.’

언제 뗐는지 장식 하나를 손에 든 상엽이 수일의 맞은편에 앉아 잔을 들었다. 둘은 건배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수일은 나중을 위해 한 모금만 마셨고, 상엽인 한 잔을 모두 비웠다.

‘형, 연화 얘기 들었어?’

상엽은 아직도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하는 수일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연화 얘길 꺼냈다. 수일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상엽이 얄미웠다. 그냥 갔으면 했다. 무슨 얘긴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 남자와 잘 살고 있더라, 옷들도 전부 백화점표로 사 입고 신수 훤해졌더라. 그러니 형도 얼른 잊어라. 상엽이 위로랍시고 전하는 소식들은 수일의 자존심을 뭉갰다. 그는 언제나 소식 뒤에 연화의 욕을 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자기가 수일을 대변한다 착각했다.

수일의 표정을 살핀 상엽이 피식 웃었다.

‘왜? 안 궁금해?’

‘별루. 니가 그랬잖아, 잘 산다며?’

수일은 심드렁하게 답하고, 맥주잔을 들어 잔에 담긴 술을 모두 마셨다. 술이 들어가도 속은 답답했다. 상엽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걔 죽었대. 그년 팔자도 기구하지. 하필 맞아 죽냐?’

수일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상엽이 천천히 한 번 더 말을 했다.

‘연화 걔 맞아 죽었다고.’

동네 개가 죽었다는 말을 전하듯 상엽의 얼굴엔 그 어떤 안타까움이나 슬픔이 없었다.

수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소파에 기댄 채 수일을 올려다보는 상엽을 보자 눈이 뒤집혔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디다 풀어야 할지 몰랐다. 상엽이 저를 놀리는 건지도 몰랐다. 이 새끼는 그러고도 남았다.

‘개새끼가. 어디서 헛소리야?’

‘하, 씹할. 진짜야. 내가 뭐 하러 비싼 밥 먹구 형한테 거짓말을 하니?’

‘거짓말하지 말라구, 씨발 새끼야!’

‘이게 미쳤나 증말. 가서 물어봐 그럼? 죽었는지 살았는지?’

상엽은 수일의 격한 반응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손버릇이 좀 나쁘긴 하지만 연화에게 끔찍하게 잘한다고 여사장에게도 들었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맞아 죽었을 리 없었다. 수일은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 여사장에게로 갔다.

카운터 앞에 서서 장부를 보던 여사장이 하얗게 질린 수일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얘? 너 왜 그러니?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이래?’

‘사장님, 연화. 잘 있죠? 죽은 거 아니죠?’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무슨 소리야 그게? 연화가 죽긴 왜 죽어?’

‘상엽이가 그러는데, 연화 맞아 죽었대요.’

수일은 자신의 입에서 제대로 소리가 나오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충격이 크면 이런 걸까? 온몸이 마비되다 못해 혀까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여사장은 붉은색 루주가 칠해진 입술을 깨물었다. 썅, 하고 욕을 뱉고 상엽이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여사장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비틀거리며 복도를 걸어온 여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느이 사장 바꿔.’

입술 색과 같은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여사장은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수일은 장승처럼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했다.

‘무슨 소리니? 연화 걔 죽었다는 말. 임상엽이 그 새끼가 어디서 듣고 와서 씨불이잖아.’

다짜고짜 이렇게 말한 여사장은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에 곧 잠잠해졌다.

‘알았어. 끊어!’

여사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수일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4일 정도 됐대. 연화 일 너무 맘 쓰지 마. 죽은 걸 어쩌겠니? 산 사람은 살아야지.’

여사장은 벌게진 눈으로 이렇게 말하며, 눈물에 마스카라가 번질까 봐 고개를 위로 들었다.

‘어우, 쌍년. 돈 많은 남자 물었으면 잘 살기나 할 것이지. 왜 맞아 죽고 지랄이야 지랄이.’

수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명치를 주먹으로 치며 컥컥댔다. 차라리 울음이 나오면 편하겠건마는, 수일은 울지도 못하고 가슴만 쳤다. 이 심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사장이 수일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등을 쓰다듬었다.

연화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수일은 없는 돈을 쪼개 적금을 넣고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보내지 못할 편지도 썼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연화가 돌아오겠지 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다시 잘해 보자 할 줄 알았다. 그녀가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랬노라며 수일에게 안아 달라고 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두 사람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 누구보다 예쁠 터였다. 수일은 연화와 자신이 찍은 유일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딸 하나 아들 하나씩 낳는 날을 고대했다.

수일은 연화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서 홀로 버티는 자신과 연화는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화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술집에서 빼 올 순 없었지만, 적어도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게 위로가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연화는 수일에게서 자신을 보는 게 싫다고 했다. 진저리를 쳤다. 자기와 쌍둥이처럼 닮은 비루한 인생을 사는 남자와 함께 있는 게 고문 같다고 말했었다. 헤어지자고 하던 날, 연화는 수일과 함께 살았던 그 1년이 살아온 날 중 제일 끔찍했다며 비명을 토했다.

그랬던 연화가 죽었다. 그것도 남자에게 맞아 죽었다. 수일은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바보 천치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어떻게 숙소로 돌아갔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눈을 떠 보니 경식이 있었고, 그가 수일에게 꿀물을 타 주고 북엇국을 끓여 주었다. 동료들은 수일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구는 한심하게 보는 것도 같았다.

수일은 다음날부터 연화를 죽인 사람을 찾아다녔다. 왜 그랬는지 몰랐다. 복수하고 싶었나 보았다. 연화가 일했던 술집 마담을 만났지만, 누가 죽였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같이 살았던 남자가 누군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 경찰서란 경찰서는 다 돌아다녔다. 혹시 맞아 죽은 여자에 대해 아느냐며, 그 여자를 죽인 남자는 어디 잡혀 있는지 물었다. 연화와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수소문해 보았지만, 경찰은 수일을 미친놈 취급했다. 삼청 교육대로 보내 버리기 전에 썩 꺼지라고 협박했다.

연화의 죽음은 신문 한 귀퉁이는커녕 뉴스에도 보도되지 않았고, 그녀를 죽인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개죽음이었다. 사람이 맞아 죽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호스트바 여사장도 입을 꾹 다물었다.

장례식이라도 참석하고 싶어 연화의 집에 찾아가 봤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새 이사를 가고 없었다. 딸이 죽었는데 가족들은 이사를 갔다. 무슨 돈인지 안 봐도 뻔했다. 딸의 목숨값을 받은 연화의 가족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수일만 미쳐 가고 있었다.

여사장은 수일의 손님을 줄여 주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3일 휴가를 주었다. 수일은 크리스마스 연휴 내내 경찰서와 파출소를 헤맸고, 허탕을 치고 돌아와 술을 마셨다. 최 군에게 벗어 준 옷이 유일한 겨울 잠바였던 수일은 그 추운 날 얇은 봄 잠바를 입고 다녔다. 추운 줄도 몰랐다. 손이 터서 쩍쩍 갈라지고, 입술에서 피가 났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쥐뿔도 가진 것 없는 수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 군 때처럼 이번에도 소리 죽여 울어야 했다.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최 군과 연화를 보며 수일은 절망했다. 자신도 저들과 다를 바 없다는 비참한 현실에 울부짖었다.

수일은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자고 또 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빚을 갚아야 할 날이 돌아왔고, 수일은 제 발로 일어나 가게로 나갔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손님을 맞았다. 웃고 떠들며 술을 팔고 몸을 팔았다. 여사장의 말대로,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수일은 자신이 짐승보다 못하다 느꼈다. 당연히 죽고 싶어야 하는데, 반대로 살고 싶어졌다. 무슨 심본지 몰랐다. 그저 살고 싶어 이를 악물었다. 살기 위해 납작 엎드렸다.

연말 저녁 여사장이 외출한 사이 기둥서방은 수일을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차고에서 최 군을 들먹이며 겁을 주고 모욕을 가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보란 듯 가게에서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희롱하기 시작했다. 수일은 남자를 볼 때마다 살의를 느꼈다.

최 군의 실종과 연화의 죽음 그리고 기둥서방의 폭력과 폭언으로 수일은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려 보려 해도 술이 없으면 잠도 자지 못했다.

그렇게 미치기 일보 직전이던 1982년 1월 5일, 수일은 여사장에게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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