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하루가 지났다. 밤사이 일들이 한낱 소동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평온했다. 느긋하게 자고 일어나 맛있는 걸 먹고 두산과 함께 집에서 뒹굴다 출근했다.
나이트도 예전과 똑같았다. 마스터는 출근했지만 수일에게 유달리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것만 빼면 삼락 형님이 있던 날과 차이는 거의 없었다. 다들 형님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전 국민이 시청하는 9시 뉴스 시각, 오성관 식구들은 시끄러운 나이트에서 대기하다 제 차례가 되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그래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있다 보면 수일은 가끔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어제가 그랬다. 겨우 이틀 지났을 뿐인데도 삼락 형님이 경찰서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혀 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대에 서고 두산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
늦잠을 자려던 건 아니었다. 분명 괜찮았는데, 이틀 동안의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수일은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땐 시계가 오후 3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개운했다.
한약 냄새가 온 집 안을 가득 메웠다.
“뭐야?”
수일은 두산의 등을 안으며 물었다.
“보약.”
“나 먹던 거?”
“으데. 그거 말고 녹용하고 인삼하고 머 써끈 거.”
“그건 또 왜?”
“니가 몸이 억수로 찹다 아이가. 의원님한테 갔드만은 이것만 묵으면 몸에 열도 나고 살도 찌고 그란다대. 일주일만 먹어도 티가 난다 카드라.”
수일을 향해 몸을 돌린 두산은 의원이 해 줬다는 말을 줄줄 읊었다. 어디 서커스단 약장수에게 들은 얘기처럼 신빙성이 떨어졌다. 애가 똑똑한 줄 알았더니, 귀가 많이 얇은 것 같았다.
물론 녹용과 인삼이란 말에 솔깃하긴 했다. 둘 다 몸에 좋다고 소문난 것들 아니던가. 수일의 형편엔 제때 감기약이라도 지어 먹으면 다행이었기에, 실제로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 보약도 많이 남았는데 또 보약을 지어 온 건 돈 낭비 같았지만 한편으론 두산 덕에 평생 먹어 본 적 없는 귀한 걸 자꾸 먹게 되어 우쭐해졌다.
수일은 눈을 비비고 두산에게 입을 맞췄다.
“너는? 너두 먹어야 할 거 같은데.”
그냥 해 본 소리였다. 어제 새벽엔 그렇게 초췌했는데, 벌떡벌떡 잘 서는 걸 보니 그저 병원 조명이 어두워서 그렇게 보인 듯했다. 수일의 말에 두산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안 지으려 했다며 긴 변명을 한 다음 자기 것도 지었다고 말했다. 그 나이에 보약을 먹는 게 좀 쪽팔리는 모양이었다.
“평생 보약 먹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의원님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묵는 기 좋다 케서 억지로 지았다.”
“잘했어. 건강은 미리미리 챙겨야지.”
수일은 두산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며 칭찬했지만, 아무래도 그 의원한테 속은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다음번엔 한의원에 꼭 따라가야겠다고 수일은 다짐했다.
두산은 하얀 사발 두 개에 중탕한 제 몫의 보약과 수일의 보약을 따랐다.
“건배.”
막걸리라도 되는 양 잔을 쥐여 주고 건배를 외쳤다. 정력에 좋다는 그 보약보다 덜 쓰고 맛도 더 좋은 것 같았다. 두산은 세상 맛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일의 입에 청포도 맛 사탕 하나를 넣어 주고 저는 자두 맛 사탕을 먹었다.
“저기, 나 지금 기운 좀 있는데….”
사탕을 쪽쪽 빨며 수일이 말했다. 일부러 눈알도 굴려 보고 없는 애교를 부리며 몸을 배배 꼬아도 봤지만, 두산은 덤벼들기는커녕 그 자리에 서서 수일을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웃었다. 기껏 해 준다고 말하는데도 왜 저러는지 몰랐다. 김이 샜다.
“내도 하고는 싶은데, 기운 애끼라. 삼락 아재 면회 갈 끼다. 은아 누님 만나서 같이 밥 묵고 가자.”
“아. 맞다! 바보같이 깜빡하고 있었네.”
수일은 많이 민망했다. 자기가 면회 가고 싶다고 졸라 놓고 그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두산은 벌써 나갈 채비를 끝낸 상태였다. 수일은 서둘러 샤워하고 얼굴에 로션도 발랐다. 일부러 밝은색 셔츠에 연한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칙칙할 경찰서에 어두운색 옷을 입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밝은색 옷을 입으면 체격이 조금 커 보이고 건강해 보였다.
새로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청바지가 그새 또 헐렁했다. 혁대로 허리를 조이자 나름 입을 만했다.
“얼른 가자. 나 배고파.”
집을 나서기 전에 수일은 자두 맛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두산이 수일이 다가가자 한 팔로 허리를 안아 쪽 입을 맞췄다.
“달다.”
“나 자두 맛 더 좋아해.”
“알았다. 담엔 자두 맛 주께.”
수일은 두산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입 안에 있던 사탕이 두산의 입으로 옮겨 갔다. 두산이 한번 빨고 다시 수일의 입으로 넣어 주었다. 이번에 수일이 빨았다. 입술을 맞물어 사탕이 빠져나갈 구멍을 봉쇄한 뒤 둘은 혀를 얽어 가며 사탕을 공유했다. 달콤한 사탕 사이로 방금 먹은 쓴 한약 맛이 났다.
두산의 물건이 반응을 시작하는 것 같아 수일은 급히 몸을 뗐다.
“그르게 해 준다고 할 때 말 들었어야지.”
형님을 잊은 민망함을 핀잔으로 얼버무리며, 수일이 먼저 집을 나섰다. 두산이 따라오며 헛웃음을 웃었다.
은아 씨를 집 근처 대로변에서 픽업해 식당으로 향했다. 무대에 서지 않을 땐 늘 분홍색 추리닝 차림이었던 은아 씨도 오늘은 연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다. 부잣집 사모님처럼 머리를 틀어 올리고, 우아한 진주 귀걸이도 귀에 달았다.
기운도 차릴 겸 칼칼한 소고기 낙지 전골을 먹었다. 두산이 수일의 접시에 먼저 낙지와 소고기를 퍼 주었다.
“두사이 니는 장유유서 그런 말도 모르나?”
“알지. 누야가 수일 행님보다 동생 아이었나?”
능글맞게 웃으며 다음 접시에 은아 씨 몫을 펐다.
“하이고, 말이라도 몬 하면.”
듣기 싫지 않았는지 은아 씨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수일도 따라 웃다가 문득 제가 나이 들어 보이나 싶어 속으로 뜨끔했다. 그것도 잠시, 배가 고파서 깊게 생각할 새가 없었다.
수일은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을 떠먹고, 낙지와 불고기는 겨자를 푼 간장에 찍어 먹었다. 두산도 배가 고팠는지 덥석덥석 잘 먹었다.
“내 주변에 경찰서에 안 끌리간 인간이 없다. 우리 아들 아빠 그 새끼도 사기죄로 3년 갔다 왔고, 내도 갈 뻔 했다 아이가.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때 을매나 무섭던지. 수일이 니도 내 말 먼 말인지 알제?”
“네.”
“내까지 깜빵 갔으면 우리 아들을 누가 키았긋노? 생각도 하기 싫다.”
은아 씨는 진절머리를 치며 미나리에 싼 낙지를 입 안 가득 넣었다.
셋 중 누구도 심각한 사람이 없었다. 삼락 형님이 살인 피의자로 잡혀 있다는 걸 알지만 수일은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저러다 풀려나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했다. 두산이야 원래도 삼락 형님에게 관심이 없었고 말이다.
“두사이 니 덕에 몸보신 잘했다.”
어제도 김밥으로 저녁을 때운 은아 씨는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먹었다며 좋아했다. 친정어머니가 최근 식당 일을 나가서 예전처럼 밥을 차려 주지 못한다고 했다. 덤덤하게 말했지만, 고단해 보였다.
맛있게 밥을 먹고 삼락 형님이 구금된 경찰서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박카스와 오렌지 주스를 한 상자씩 사고, 빵집에 들러 형사님들에게 줄 빵과 형님이 좋아하는 팥빵도 샀다. 분위기는 마치 나들이 가듯 가볍고 산뜻했다.
사건 조사가 아직 진행 중이라 경찰 입회하에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안경 쓴 형사가 면회에 참석했다.
“손 형사님 이래 불러야 되나?”
“하모. 여서 내한테 행님 이라믄 클난다.”
“클나기는. 내 조 형사한테도 아재라꼬 부르는데?”
“그 선배하고 내하고 같나? 조 형사님이야 짠밥도 마이 무따 아이가. 내는 아직 신참이고. 그라고 그 일때메 내 이 형사님한테 욕 엄청시리 들었다. 몸사리야지.”
“지랄.”
유치장으로 향하면서 둘은 티격태격했다. 손 형사는 가끔 뒤따르는 수일을 돌아보았다. 누군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직접 묻지는 않았다.
유치장엔 평범해 보이는 남자들이 드러눕거나 앉아 있었다. 앞을 지나자 다들 아는 사람이라도 왔나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삼락 형님은 담요 위에 대자로 누워 코를 골았다.
손 형사가 철창으로 된 문을 열자, 그 소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형님을 보자마자 수일은 눈시울을 붉혔다. 반가워서 그랬다. 형님은 얼굴이 좀 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머꼬? 멀쩡하네?”
은아 씨의 말에 삼락 형님이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그라믄 멀쩡하지? 이 최삼락이 아직 안 죽었다.”
“형님, 괜찮으세요?”
“수일이 니도 왔나? 만다꼬 이런 데까지 찾아오노? 쪽팔리그로.”
말은 그래도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최삼락 씨, 일루 나오이소. 접견입니다.”
“예. 손 형사님.”
형님은 나이트에 있을 때처럼 편해 보였다. 수일을 껴안아 주고, 은아 씨와도 포옹했다. 두산과는 눈인사만 나눴다. 면회 장소에 두산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왜 안 들어와?”
“아재하고 내하고 안 친한데 머할라꼬? 드갔다 온나. 내 여서 기다리께.”
“응. 뭐 좀 마시고 있어.”
“어. 드가라.”
두산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고 수일이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형님과 마주 앉은 수일은 손 형사의 허락하에 팥빵 두 개와 우유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머 이런 거를 다 사오노? 맛있게 무께.”
형님은 기분 좋게 웃으며 빵을 집었다.
“오빠야, 참말로 개안나? 이 먼 일이고?”
입 안 가득 빵이 들어서 형님은 말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손 형사는 옆에서 오렌지 주스 한 캔을 따서 마셨고, 은아 씨는 형님 목이 막히지 않도록 우유를 뜯어 내밀었다. 형님은 빵 하나에 우유 한 갑을 다 마시고서야 입을 열었다.
“일이 쪼매 꼬인 거는 같은데, 변호사님이 걱정하지 말라꼬 했다. 다 알아서 해줄 끼다.”
“변호사도 샀나?”
“어. 억수로 똑똑한 양반이다. 내 억울하게 당한 일 싹 다 해결해 주신다꼬 했다.”
“다행이네요. 걱정 많이 했어요, 형님.”
접견실의 삭막한 분위기에 얼어 있던 수일은 그제야 웃었다. 그럼 그렇지. 형님이 누군데.
“내도 첨엔 당황해가꼬 막 헛소리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쪼매 정신이 든다. 그라이까 뉴스에서 나오는 말 한 개도 믿지 마라. 다 경찰이 퍼트리는 헛소리다. 알았제?”
삼락 형님은 옆에서 주스를 마시던 손 형사를 보며 말했다. 민망한지 손 형사가 헛기침을 했다.
“우리야 뉴스 볼 시간이 있나? 내는 아직도 오빠야 나온 뉴스도 몬 봤다.”
“언제 풀려나세요?”
“일단 구속영장 나오는 거 봐서 구치소 갔다가 나갈 수도 있고, 아이믄 여서 바로 나갈 수도 있고. 하필 담당 검사가 장모상을 당해가 어제, 오늘 자리에 없다카대? 뭐 다른 일도 아이고 상이 났는데 내가 참아야지.”
형님은 팥빵 한 봉지를 더 뜯었다.
“먹고 싶으신 건 없으세요? 필요한 거라든가?”
“읍따. 우리 어머이가 여 와 있어서 때 되면 사식 넣어 주고 한다.”
“그럼 이거라두.”
수일은 두산이 몰래 챙긴 돈 봉투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냈다. 손 형사에게 줘도 되냐고 묻자 영치금은 자기에게 맡기라며 삼락 형님 대신 받았다.
“됐다. 수일이 니가 돈이 어딨다꼬 그걸 주노?”
“그래두요.”
“오빠야 내도. 얼마 안 되는데, 간식이라도 사 묵으라.”
옆에 앉았던 은아 씨도 핸드백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손 형사에게 건넸다.
면회는 30분간이었지만 할 얘기가 별로 없었다. 죽은 정 여사 얘길 하기도 그랬고, 유치장에서 뭘 했나 묻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살인 사건 얘긴 더더욱 꺼낼 수가 없었다. 셋은 오성관 얘기를 좀 하다 말았다. 30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 단디 챙기라. 눈 감으면 코 베가는 세상 아이가.”
“말이라꼬. 내 두 눈 똑바로 뜨고 있으께.”
“형님, 건강만 신경 쓰세요.”
“그래. 다들 와 주서 고맙다. 나가믄 같이 밥이나 묵자. 걱정들 하지 말고.”
마치 병문안을 왔다 가듯 다들 홀가분한 표정으로 헤어졌다. 형님은 다시 유치장으로 들어갔고, 은아 씨와 수일은 손 형사를 따라 경찰서 출구로 향했다.
“근데 니는 얼마 넣었노?”
“10만 원이요.”
“마이도 넣었다. 내는 3만 원 넣었는데.”
“에이, 그것도 많죠. 저는 형님한테 빚진 것도 갚을 겸 겸사겸사 넣은 거예요.”
수일은 멋쩍게 웃으며 한쪽 볼을 쓸었다.
경찰서 밖에서 조 형사와 담배를 피우며 웃고 떠들던 두산이 문을 나서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직 30분 안 됐는데, 와 이리 빨리 나왔노?”
“할 얘기도 없고, 곧 나올 끼라케서 고마 왔다.”
은아 씨의 말에 조 형사가 한숨을 쉬었다. 웃고 있던 얼굴을 구기며 두산을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다. 두산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를 비벼 껐다.
출근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은아 씨를 도로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형님 말이 변호사가 다 알아서 할 거래. 정말 별일 아니었나 봐.”
“어.”
두산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여기 해운대랑 가깝지? 우리 바다 보고 갈까?”
“그래.”
피서철이 끝난 해운대는 한적했다. 어제오늘 비도 오고 날도 흐려 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모터보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수일은 두산과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바람이 약하게 불었다.
힘든 일은 다 지나간 것 같았다. 갈비뼈도 낫고 있는지 가슴 통증이 줄었다. 삼락 형님 일도 잘 풀릴 모양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정신없긴 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 두산 덕이었다. 수일은 두산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는지 두산과 눈이 마주쳤다.
“두산아.”
“어?”
“고마워.”
“별소리 다 한다.”
“진심이야. 정말 고마워.”
“쯧. 하지 마라.”
“듣기 싫다.”
수일은 선수를 쳐 두산이 할 말을 대신했다. 두산이 인상을 썼다. 수일은 소리 내 웃으며,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오늘은 너두 출근해. 나 괜찮으니까.”
“봐서.”
“보긴 뭘 보니? 너두 제대로 직장 생활 해야지. 노는 거 습관 들면 안 좋아.”
“강요하지 마라.”
수일의 잔소리에 두산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강요야. 월급 받으면 당연히 일해야지. 너 혹시?”
“또 그란다. 짤린 거 아이고, 월급도 받는다. 됐나?”
“잘리기만 해 봐.”
수일은 두산을 흘겨보며 낮게 으르렁댔다. 두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쥐어박으려고 손을 들었다가, 수일이 어깨를 움츠리자 급히 주먹 쥔 손을 펴 머리를 쓰다듬었다.
“겁도 많은 기 덤비기는.”
두산이 구시렁댔다. 나 겁 안 많은데. 작게 웅얼거리며 수일은 멋쩍게 웃었다.
사실 수일도 땡땡이치고 싶었다. 두산과 손잡고 해변을 거닐다 맥주 한잔 마시며 놀고 싶었다. 혀끝에 ‘출근하지 말까?’ 하는 말이 맴돌았지만, 이내 포기했다.
땡땡이칠 생각을 하다니 자기 자신이 낯설었다. 덜컥 겁이 났다. 미친놈. 수일은 두산 덕에 여유가 좀 생겼다고 그새 나태해진 자신을 나무랐다. 평생 없이 살았으면서, 겨우 두 달도 안 돼 비루한 제 처지를 잊고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기운이 빠졌다.
“그만 가자.”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며 수일은 두산의 손을 잡아끌었다.
“와? 시간 남았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안 가려는 두산을 한 번 더 잡아당겨 앞만 보고 걸었다.
문득 삼락 형님이 떠올랐다. 형님도 그랬을까? 부잣집 사모들과 어울리며 여유가 생기자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렸던 걸까? 그 기억이 너무 달콤해 감옥을 갔다 오고도 또 같은 짓을 반복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다 제 꾐에 빠져 이런 일에까지 연루되었겠지.
수일도 두산이 선사하는 이 모든 여유가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이렇게 살고 싶었다. 좋은 걸 먹고, 편한 잠자리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싶었다. 형님도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이 들자,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신도 언젠가 형님처럼 부잣집 사모를 쫓게 될까 봐 두려웠다.
호스트 생활도 자의로 관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고 나니 더 그랬다. 만약 가게가 문을 닫지 않았다면 수일은 그 생활을 계속했을지도 몰랐다. 젊은 여자들에서 나이 든 사모로 갈아타고, 그걸로도 부족해 당시 동료들처럼 아버지뻘 되는 남자를 만났을지도 몰랐다.
동병상련과는 별개로 삼락 형님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본 것 같아 수일은 절망스러웠다. 끔찍하고 비참했다.
수일은 옆에서 느껴지는 두산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의 여유도 경계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불쌍했다. 평생을 따라다닌 가난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두산이 멈춰 섰다. 수일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딸려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일은 돌아볼 수 없었다. 추한 속마음을 들킬까 봐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두산은 몰랐으면 했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남자인지 제발 몰랐으면 했다. 수일은 두산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
오전 10시쯤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강재욱은 윤수일이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심한 척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통화가 끝나자마자 전화기를 던졌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세 덩치 중 하나가 전화기를 주워 왔다.
“씨발! 너거들 일 제대로 안 하나? 윤수일이 글마가 우째 그 시간에 응급실에 갔노?”
재욱은 고함을 지르는 대신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쇳소리가 났다.
“그럴 일 없습니다, 이사님. 아들 다 7층에서 지키고 있었는데예?”
강재욱은 그날 불도저에게 일을 시작하라고 전화를 넣자마자 윤수일이 집에 있는지 사람을 시켜 확인했다. 잘못 찾아간 것처럼 7층 대문의 벨을 눌렀고 윤수일이 집에서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는 것까지 직접 목격했다. 그때부터 1분도 1초도 놓치지 않고 감시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건물 주위를 어슬렁대면 두산의 귀에 들어갈까 봐 엘리베이터가 마지막으로 서는 건물 안 7층에서 감시했다. 비상계단도 7층까지라 뛰어내리지 않고서는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윤수일이 집을 나갔다. 집 안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소리였다.
“개새끼 머리 쫌 썼네.”
재욱은 헛웃음을 웃었다.
어차피 윤수일이 목표는 아니었기에 그가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서 아쉽긴 해도 그렇게까지 화나진 않았다. 재욱은 윤수일의 일에 두산이 어디까지 나서는지,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영감은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두산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재욱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두산이 사람 패는 일 말고 다른 일은 얼마나 잘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게다가 일이 제대로 풀리면 두산의 최대 약점을 잡을 수도 있었고.
그걸 알기도 전에 정보를 흘린 놈이 있었다. 쥐 죽은 듯 있으라고 했는데 쥐새끼가 흘러들었다. 그게 괘씸했다. 감히 자기를 두고 백두산에게 붙다니, 잡아 족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누가 그 갔노? 싹 다 불러라.”
재욱은 사무실 바닥에 공사용 비닐을 깔아 두고 감시자들을 불러 앉혔다. 아무리 족쳐도 자백하는 놈이 없었다. 겁 많은 피라미들이 이 정도까지 버틸 이유는 없었다. 즉, 이들 중엔 쥐새끼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얘기가 샌 걸까?
덩치 셋을 의심하기엔 그들과 지내온 세월이 길었다. 그래도 사람 일이란 몰랐다. 강재욱은 따로 사람을 시켜 덩치 셋의 뒷조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재욱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제 사람이라는 확신은 있지만, 그걸 한 번 더 확인하는 일이 앞날을 위해 필요하다 여겼다.
1시에 강력반 형사 둘과 면담할 예정이었다. 어제 출장을 다녀오는 바람에 오늘로 미뤘다. 분위기 좋게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자 했더니 그 늙은 여우가 거절했다. 좆같은 늙은이.
시간이 촉박했다. 재욱은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욕실에서 대충 몸을 씻고 피 묻은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었다. 머리를 잘 말려 포마드로 넘기자 언제 사람을 팼나 싶게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재욱이 씻는 동안 피떡이 된 조무래기들과 비닐이 사라지고 방 안엔 장미 향만 가득했다. 덩치들도 내보냈다. 넥타이를 고쳐 매고 소파에 앉자마자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재욱은 신문을 손에 들었다.
“이사님, 형사님들 오셨습니다.”
이번에 새로 뽑은 비서가 경쾌한 목소리로 형사들의 방문을 알렸다.
“어. 들어오라 케라.”
형사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손에 든 신문지를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회의가 있어 가지고 부득이 여로 불러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 멀지도 않은데 개안습니다.”
조 형사가 밝은 목소리로 답하며 악수를 청해 왔다. 재욱은 두 손으로 조 형사의 손을 맞잡았다. 이 형사는 고개만 까딱할 뿐 악수는 하지 않았다. 재욱은 그들을 소파로 안내한 뒤 비서에게 냉커피 석 잔을 부탁했다.
이 형사는 사무실 안을 휘 둘러보면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장미 냄샙니까? 좋네예.”
“예. 새로 온 비서 아가씨가 홀아비 냄새 난다꼬 그래 신경을 써줍니다. 요새 아가씨들 참 당차다.”
“맞습니다. 요새 아들은 우리 때 하고 마이 다릅니다.”
묻기는 이 형사가 물었지만, 사람 좋은 조 형사가 대꾸해 주었다.
늙은 여우는 공기 중의 다른 냄새까지 맡은 모양인지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재욱도 옅은 피 냄새를 맡았다. 씨팔, 여기서 처리하는 게 아니었는데. 재욱은 조급한 제 성미가 오늘따라 영 못마땅했다.
질문은 뻔했다. 대주상사 부부와 최삼락과의 친분에 관한 거였다.
“최삼락 그 양반은 오성관 가수긴 해도 저하곤 처음부터 아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매출 올려 준다꼬 오성관 들렀던 정 여사가 남진 팬이라서 소개해 달라 카데예. 그래서, 따로 만나게 됐습니다. 주선 자리에서 같은 기장 출신이라꼬 하길래 반갑기도 하고, 동향이라서 더 잘해준 건 맞습니다. 근데 알고 봤더니 진주 출신이더라고예. 뭐 솔찌키 여 사람들 공갈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그 양반은 쪼매 심했습니다.”
재욱의 말을 두 형사가 수첩에 메모했다.
“정춘자 씨가 자동차를 선물했다던데, 그 정도면 두 사람 깊은 관계 아니었습니까? 최삼락 씨 말로는 결혼 얘기도 오갔다고 하고예. 뭐 들은 얘기 없습니까?”
이 형사가 물었다.
“하이고, 말도 마이소. 그 양반이 헛소리도 마이 하고, 같이 있으면 골 아픕니다. 정 여사도 처음에는 잘생깄다꼬 좋아하드만은 집착이 으찌나 심한지 학을 뗐다 아입니까. 정 여사가 모는 차도 그래 탐내는데, 무서버서 어쩔 수 없이 주따 카데예.”
이 형사가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기분이 상했다. 재욱은 화를 억누르며, 이 형사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 이사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정춘자 씨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 농담도 참 잘하시네예. 정춘자 씨 웬만한 사내새끼들도 깨갱하는 성격 아입니까? 만나는 남자도 한둘이 아이었고, 질리면 조폭들 고용해서 빤쓰 한 장까지 다 뺏아오시던데, 그 여사님이 우째 최삼락 씨를 겁냈을까예? 사람이 영 시원찮아 보이던데.”
이 형사는 능글맞게 웃으며 재욱의 심기를 건드렸다. 커피를 후루룩 마시고 대답을 기다렸다. 재욱은 손을 들어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서장 개새끼, 이빨 빠진 늙은 여우라더니 전혀 아니었다.
젊은 형사들이야 왕성한 혈기와 의협심 때문에 말이 안 통하기도 했지만, 경력이 오래된 형사들과는 한 번도 문제가 없었다. 재욱은 은퇴를 몇 년 앞둔 이 형사도 그들과 같은 과라 생각했다. 그들은 대체로 무능하고 안일했다. 돈도 참 좋아했다. 전화로 간단히 면담했을 때도 별말 없길래 재욱은 확신했었다.
“하이고, 마 다 들키삤네. 제가 고인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돌려 말했는데, 역시 형사님이라 다르시네예. 솔직한 말로 대주상사 그 양반들 저도 감당이 안 되는 분들이었습니다. 사업 때문에 알고 지내긴 했지만, 보통 성격들도 아이고예. 정 여사가 최삼락하고 얼마나 깊은 관계였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 여사님도 거짓말에 도가 튼 양반이고, 최삼락이도 글코예. 형사님들도 조사해보셨겠지만, 제가 요새 회사 일로 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출장 댕기느라꼬 부산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변명이 길었다. 길어도 제대로 된 변명이었다. 조 형사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이 형사도 달리 딴지를 걸 만한 얘기가 없는지 조용했다. 누가 들어도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이었다.
무당, 굿, 귀신. 최삼락의 입에서 나왔다는 헛소리에 강재욱은 일부러 크게 웃었다. 자기가 만들었지만 참 황당하고 기가 막힌 알리바이였다. 뿌듯했다.
“쯧쯧, 그 양반 우짜노? 클 났네. 정신 병원에 먼저 보내야 하는 거 아입니까? 내 듣다 듣다 그런 소리는 또 첨입니다.”
강재욱의 말에 이 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혀 모르는 얘기라 딱 잡아떼니 더는 물어볼 게 없는 모양이었다. 재욱의 알리바이는 명확했고, 최삼락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최삼락의 말뿐이었다. 그것도 상식을 벗어난.
“전석모 씨하고는 어떤 관계십니까?”
의외의 질문에 재욱은 미간을 구겼다. 씨팔, 쥐새끼 때문에 일이 단단히 꼬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들은 말로는 최삼락이한테 돈을 빌릴라다 까이고, 강 이사님께 빌맀다던데. 맞습니까?”
“뭐 저한테 돈 빌리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예. 마스터뿐이가? 거 일하는 기도 아들하고, 댄서들 심지어 박정배 사장까지 돈 안 빌리 준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또 같이 일하는 직원들한테는 마음이 약해서예.”
윤수일이 빠져간 줄도 모르고, 재욱은 준비해 둔 거짓 제보 전화를 지시하고 전석모까지 경찰서에 보냈었다. 설마하니 집 안에 비밀 통로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가 생각해도 꼴값을 떤 셈이니, 늙은 여우에겐 얼마나 멍청한 짓으로 보였을지 불 보듯 뻔했다.
재욱은 그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형사들 앞에서 이 무슨 개 쪽인지 몰랐다. 누군지 몰라도 쥐새끼를 꼭 잡아내리라. 재욱은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형사들이 재욱에게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전석모 건으로 찔러 봤자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었고, 제보 전화도 남포동 번화가 공중전화를 이용했기 때문에 시간대나 인물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입맛이 떨어진 재욱은 형사들을 내보내고 사무실에 처박혀 있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불도저에게 다시 한번 실수가 없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후 네 시가 넘은 시각, 영감이 찾아왔다. 뜻밖의 방문에 재욱은 놀랐다.
올해 71살인 백영호는 기골이 장대하고 건강했다. 누가 봐도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몸은 웬만한 젊은 사람들 뺨치게 좋았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데다가 식생활 관리도 철저히 했다. 몸에 좋다는 보양식만 찾아 먹는 하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감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가 내뿜는 기운에 재욱은 질식할 것 같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재킷 단추를 푸는 손이 우아했다. 재욱이 저 남자의 신임을 얻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 양아치 새끼 하나가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대주상사 니가 했나?”
영감은 밥 먹었냐 묻듯 그리 물었다. 예전 같으면 겁을 집어먹었을 재욱은 대답 대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와 안 하던 짓을 하노? 손을 썼으면 깨끗하게 처리해야지, 이기 머꼬? 느그 애비 생각나서 그랬나?”
애비란 말에 재욱은 발끈했다.
“아닙니다.”
“아니기는. 풀어줄 거 아이믄 단디 처리해라. 내 이 일은 고마 안 넘어갈 끼다.”
재욱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영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로 말해도 될 걸 굳이 찾아왔다는 건 영감이 화가 많이 났다는 의미였다. 강재욱은 이를 악물었다.
“다 뜻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재욱은 영감을 따라나서며 변명했다. 제 치부를 들킨 게 부끄러웠다.
“됐다. 니 뜻 한 개도 안 궁금하다. 이사회 소집 전까지 다 마무리해 나라.”
재욱의 여비서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고 비서는 영감의 등장에 서둘러 잔을 내려놓았다. 재욱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영감을 에스코트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고집스러운 영감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재욱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씨발. 재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일은 영감의 말대로 재욱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안 하던 짓을 한 게 맞았다. 평상심을 잃은 재욱이 저지른 실수였다.
애초에는 대주상사 부부만이 목표였다. 정춘자와 손을 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원래는 그 땅만 넘어오면 정춘자도 칠 생각이었다. 시기의 문제였다. 그게 조금 빨리 진행됐을 뿐이었다.
문제는 최삼락을 끌어들인 데 있었다. 최삼락을 보면 볼수록 재욱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재욱에게 사생아란 꼬리표를 달아 준 아버지도 제비였다.
최삼락을 처음 만났을 때, 삼락의 행동과 말투, 외모까지 모든 게 감옥에서 봤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미칠 것 같았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저런 새끼들을 한둘 본 것도 아닌데 재욱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간통죄로 두 번을 살다 왔으면서 또 유부녀를 꼬셨고, 머리에 고속도로가 난 채 재욱에게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해운대 사모의 남편에게 복수해 달라고 무릎까지 꿇었다. 개새끼였다.
아버지를 향한 살의를 최삼락에게도 똑같이 느낀 재욱은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저것들은 그냥 죽이기도 아까웠다.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옳았다. 재욱은 저도 모르게 정춘자와 최삼락을 엮었고,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최삼락에게 누명을 씌웠다.
절대 들킬 리 없지만, 만에 하나 쥐새끼가 경찰을 찾아가는 날엔 강재욱도 자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했다. 이성이 날아간 것 같았다. 어떻게 올라온 자린데 실수를 저질렀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바보 같은 짓인 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백영호가 직접 찾아왔으니 조용히 넘어가진 못할 터였다. 재욱이 최삼락과 윤수일을 이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영감은 사적인 일에 조직 사람 쓰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설령 허락한다 해도 조직에 해가 될지 모르는 일을 벌이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재욱은 영감 몰래 조직의 해결사를 쓴 것도 모자라 살인에 일반인까지 끌어들이는 위험천만한 짓을 했으니, 백영호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재욱은 최후의 보루인 백두산에게 음성을 넣었다.
“어이, 백두사이. 나 쫌 보자. 긴히 할 말이 있다.”
10년 전, 서울에서 윤수일을 본 일을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 영감이 시켜서 들렀던 그 병원, 의식 없이 누웠던 윤수일에 대해 백두산과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았다. 윤수일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몰랐지만, 적어도 백영호가 그 일과 연관이 있다는 말은 전해야 했다.
물론 미끼를 무느냐 마느냐는 백두산의 선택이었다. 재욱은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수를 만회하기엔 늦었으므로, 실수를 덮을 다른 인물이 필요했다. 그게 백두산이었다.
***
“하, 저 미친개이. 돌아삐겠네.”
두산은 수일을 나이트에 넣어 주고 혼잣말을 했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꼼짝도 안 하는 걸 어르고 달래서 겨우 차에 태웠다. 딱 봐도 정신이 없어 보이는데 곧 죽어도 출근하겠다는 걸 하는 수 없이 데리고 왔다.
“내도 출근한다. 먼 일 있으면 삐삐치고.”
“응.”
씨발년, 대답은 잘했다.
두산은 손을 뻗어 수일의 볼을 툭 쳤다. 우울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꼴렸다. 쪽 뽀뽀를 하자, 수일이 팔을 벌려 두산을 안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두산은 수일을 토닥이며, 간신히 그를 나이트 안으로 보내 주었다.
혼자 남은 두산은 킁킁 제 몸에서 나는 수일의 체취를 쫓았다. 이상하게 수일에게선 좋은 냄새만 났다. 같은 밥을 먹고 똥오줌을 싸는데, 어떻게 한결같이 살냄새가 좋은지 몰랐다. 몸에 열이 많은 자신과 달리 몸이 찬 수일이 땀을 잘 안 흘려서 그런가 싶었다.
두산은 차에 올랐다.
윤수일은 잘 웃다가도 울었고, 멀쩡하다가도 한 번씩 돌았다. 아니, 돌아 있다가 한 번씩 멀쩡한 건가? 아무튼,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남자였다. 정신도 온전치 못한 사람이 수술 이후 몸까지 더 약해졌다. 그 바람에 제 손을 많이 필요로 해서 두산은 환장할 정도로 기뻤다. 더 꼴리고 짜릿했다. 같이 사는 재미도 쏠쏠했다.
수일이 병원에 입원했던 그 한 달은 진짜로 좋았다. 섹스만 할 수 있었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쉬웠지만, 수일을 종일 제 옆에 끼고 살아서 두산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랐다. 퇴원하는 게 유감일 정도였다.
퇴원 후 수일은 정신도 전보다 멀쩡해진 것 같았고, 애교도 훨씬 많아졌다. 수일의 눈 검사도 할 겸, 황 씨 아저씨가 받아 둔 수일의 소지품도 보고 조사한 얘기도 들을 요량으로 서울로 향했다.
유흥업소에서 별 얘길 다 듣고 다 보고 살았지만, 두산이 들은 수일의 인생은 생각보다 참혹했다. 죽은 연화 년과 상엽이 개새끼도 처죽이고 싶을 정도로 쓰레기였다. 두산은 수일의 일기장과 가계부 그리고 죽은 년에게 쓴 애절한 연애편지에 울화통을 터트렸다.
그리고 교통사고. 두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는데. 씨발. 10년 전 일로 자신과 수일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두산은 제 선에서 삼킬 수 있는 건 모두 삼키기로 했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다만 서울을 다녀온 뒤로 몽유병에라도 걸렸는지 수일은 안 하던 짓을 했다. 자다가 울었다. 벌떡 일어나 바닥을 기거나 살려 달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한번은 어떤 새낀지 몰라도 ‘최 군’을 부르며 베란다 난간에 올라가기도 했었다.
만약 그 시간에 두산이 깨어 있지 않았다면, 수일은 8층에서 떨어져 죽었을지도 몰랐다. 얼마나 식겁했던지 그날만 생각하면 두산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런데 하필 그날 아침 나이트로 출근하겠다고 베란다로 뛰어갔으니 두산이 화가 안 나고 배기겠는가. 두산의 인생에 그렇게 놀란 적은 또 처음이었다. 아니 두 번짼가. 창살을 달아 두니 그나마 살 만했다. 이제 베란다든 창문이든 수일이 자다가 뛰어내릴 일은 없었다.
물론 본인은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베개만 닿으면 푹 자던 두산은 이제 수일이 조금만 움직여도 깼다. 벌벌 떨면서 우는 걸 달래 다시 재우느라 3시간도 채 못 자는 날이 많았다. 살이 빠진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산이 살이 빠진 가장 큰 이유는 제대로 된 섹스를 못 해서였다. 거의 6주째였다. 기네스북에 올려 달라고 해도 될 기록이었다. 차고 넘치는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두산이 찾아낸 방법은 운동이었다. 매일 아침 6시나 7시부터 세 시간 넘게 도장에서 살았다. 몸을 혹사해야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원래도 운동을 많이 하긴 했지만, 최근엔 더 했다. 안 하는 운동이 없었다. 유도, 합기도, 태권도, 복싱에 검도까지. 날을 잡아서 한 종목씩 달려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할배와 등산도 다녔다. 살이 쪽쪽 빠졌다.
그것 때문에 가족들, 특히 엄마에게 오해를 사긴 했지만, 최근 수일이 제 걱정을 하며 보약도 같이 먹어서 좀 기뻤다. 운동만 멈추면 금세 찔 몸무게였다. 그래도 한동안은 수일에게 엄살 좀 피우고 걱정하는 그의 모습을 구경할 겸 두산은 운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얼른 섹스나 좀 하고 싶었다. 저렇게 예쁜데, 보기만 해도 환장하겠는데, 고작 대가리만 넣을 수 있다니 통탄할 일이었다. 두산은 그날을 위해 부지런히 오일을 모으고, 수일에게 입힐 란제리도 두 벌 더 샀다.
둘째 형에게 부탁해 기구도 몇 개 마련해 두었다. 하여간 쪽바리 새끼들은 이상한 건 잘도 만들었다. 혹시 몰라서 이번엔 서양 포르노 테이프도 구해 두었다. 누드집도 동서양 골고루 장만했다. 수일이 워낙 체력이 약하고 싸기도 금방 싸서, 기회를 잘 포착해야 했다.
오늘, 황금 같은 기회를 두산이 거절한 이유는 삼락 아재를 면회한 수일이 울다 지쳐 또 정신을 놓을까 봐서였다. 제 앞에서 놓는 건 쌩큐였지만, 남 앞에서 그러는 건 싫었다. 두산만 봐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제 새벽엔 이 형사 앞에서 수일은 정신 줄을 놓았다.
교통사고 얘기를 꺼냈다고 했다. 수일은 이 형사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웅얼거리다가 갑자기 춥다며 벌벌 떨었다. 난로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 형사는 수일의 상태가 심각한 걸 알고 이마를 짚었는데,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고 했다. 한여름에 사람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을지 몰랐다며, 병원에서 두산에게 말을 전한 늙은 형사는 몇 시간 새 더 늙어 보였다.
처음 겪었으니 오죽할까. 두산도 처음엔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서 피식 웃었다. 수일을 생각하니 또 보고 싶었다.
“고마 집에서 놀면 오죽 좋노? 내 같으면 집에 있었다.”
쯧. 구시렁대다 혀를 찼다.
워낙 힘들게 살아서 저런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별말은 안 했지만, 얼른 집에 들어앉히고 싶어서 두산은 안달이 났다. 제비처럼 발목을 똑 부러트릴 수도 없고, 수갑을 채우자니 비인간적인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어떻게 해야 수일이 집에 들어앉을까 두산은 강재욱에게 가는 내내 고민했다. 엄마에게 맡기자니 안 그래도 겁 많은 수일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갈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씨발, 우짜지? 대가리가 이래 안 돌아가나.”
두산은 답답한 나머지, 신호 대기 중에 제 머리를 손바닥으로 쳤다.
강재욱의 삐삐를 받은 후로 기분이 묘했다. 씨발롬이 겁도 없이 윤수일에게 작당을 걸려고 했었다.
“개새끼가 누군 누명 씌울 줄 몰라서 안 하나?”
두산은 이를 갈았다. 맘 같아선 당장 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켜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귀찮은 일들이 많이 생겨서 참았다. 무엇보다 윤수일의 정신 건강을 위해 참아야 했다. 하여간 미친년을 데리고 살려니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다 제 팔자려니 했다. 두산은 키득댔다.
“하이고, 오늘따라 와 이리 보고 싶지?”
참말이었다. 최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는지 두산은 유달리 수일이 보고 싶었다. 차갑고 보드라운 살에 뽀뽀하고 키스하고 싶었다. 꼭 껴안고 맨몸을 비비고 싶었다. 수일의 감촉이 떠오르자 아래가 슬슬 묵직해졌다. 두산은 손을 들어 제 뺨을 때렸다.
“똘개이야, 참아라 쫌.”
곧 강재욱의 사무실이었다. 반쯤 발기한 상태로 들어가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두산은 할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1초도 안 되어 사그라들었다. 두산은 바보같이 웃었다.
못 보던 아가씨가 있었다. 강재욱, 이 새끼는 비서도 자주 바꿨다. 전문대를 졸업했다던 그 아가씬가 보았다. 하여간 조폭 새끼가 되지도 않게 고학력자를 밝혔다.
비서는 두산을 보자마자 긴장했다.
“아이스커피 주이소.”
두산은 바로 강재욱 방으로 들어갔다. 강재욱은 책상에 앉아 장부를 뒤적이고 있었다.
“왔나?”
“와 사람을 오라가라 합니까? 고마 밀레니엄에서 보지.”
“새끼,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란다. 거는 시끄럽다 아이가.”
“시끄럽기는. 목청 키우면 다 들리는데.”
두산은 구시렁대며 소파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방 안에서 옅은 피 냄새가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강재욱이 사무실에서 피 냄새가 날 정도로 사람을 패다니 별일이었다.
비서가 들어와 커피를 내려놓았다. 두산은 목이 말라 커피부터 마셨다. 커피 타는 교육을 따로 받나, 여기 비서들이 타 주는 커피는 유독 맛있었다. 두 모금 만에 모두 마시고 얼음을 입 안에서 굴렸다.
강재욱이 뜸을 들였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개새끼, 그냥 대주상사 부부만 처리할 것이지 왜 하필 최삼락을 끌어들여 제 무덤을 파는지 몰랐다. 사생아가 뭐 어때서, 지 애비가 제비인 게 최삼락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저렇게 미친 짓을 했나 싶었다.
두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강재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만큼 올라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지위를 위험에 빠트릴 만큼 최삼락이 그렇게 꼴 보기 싫었을까. 멀쩡한 척해 봤자 강재욱도 미친놈이었다.
“니는 내가 우쨌으면 좋겠노?”
“머를?”
“최삼락이.”
“행님이 알아서 해라. 내는 관심읍따.”
강재욱이 짧게 웃었다. 몸을 두산 쪽으로 당겨 앉았다.
두산은 귀를 후비며 눈을 찡그렸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진범을 자수시키지 않는다면 최삼락은 빼도 박도 못했다. 물론 본인은 아직도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최삼락의 어머니가 고용했다는 변호사가 돈만 밝히는 허접쓰레기란 소리를 조 형사를 통해 들었다.
“10년 전에 내가 윤수일을 서울에서 봤었다. 병원에서.”
씨발!
두산은 강재욱을 노려보았다. 두산의 반응에 그제야 안심한 듯, 긴장했던 강재욱의 표정이 밝아졌다.
“계속하까?”
“원하는 게 먼데?”
“말도 안 했는데 그래 묻는 걸 보이 니도 아는 게 쫌 있나 보네?”
강재욱이 두산을 떠보았다. 씨발롬이 어디서 수작질인지 몰랐다. 두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피 잘 마싰다.”
“영감님이 가보라 켔다, 내한테. 그 병원에.”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며 강재욱이 느긋하게 말했다.
두산도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교통사고 뒤에 할배가 있었단 말인가? 왜? 무엇 때문에? 수일이 어떻게 할배를 알게 됐을까? 물음표가 머리 위에 떠다녔다.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강재욱이 저를 떠보는 건가, 아니면 진짜 뭐가 있었나. 두산은 미간을 구기며 강재욱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러나저러나 그 사고에 대해 강재욱도 알고 있단 소리였다. 씨발, 좆같았다.
“간다.”
“곧 이사회 소집 있을 끼다. 영감님한테 말 잘해도. 니 말이면 껌뻑 죽는다 아이가.”
두산은 문을 열었다.
“참, 내일 오성관 야유회 있다. 윤수일이도 온다 켔으이까 니도 같이 온나.”
등 뒤에 대고 강재욱이 말했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 목소리에 여유가 넘쳤다.
완전히 미친 새끼였다. 사람 하나를 살인범으로 몰아 놓고 야유회라니,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두산은 엘리베이터에서 미친놈처럼 키득댔다.
“하이고, 씨발. 미친개이들이 천지빼까리네.”
두산은 그대로 할배한테 가려다 말았다. 이 시간에는 영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인하고 있는지 첩에게 갔는지 그것도 아니면 별장에서 사람을 불러 파티를 할 수도 있었다. 남의 파티에도 곧잘 갔으니 영감을 찾으러 다니느니 차라리 내일 아침 집에 들러 같이 밥을 먹는 게 나았다.
두산은 머리가 아팠다. 일이 복잡해지면 안 되는데. 씨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제 선에서 삼키고 모른 척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일 아침 일찍 할배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두산은 수일이 보고 싶었다. 그 미친년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저를 향해 웃어 주는 걸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두산은 밀레니엄으로 가는 대신 오성관으로 차를 돌렸다.
리허설을 끝내고 저녁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은아 누님과 맛있는 걸 먹으라고 돈을 줬는데 잘 먹고 있는지 몰랐다. 두산은 공중전화 앞에 차를 세웠다. 비상 깜빡이를 켜 두고 수일의 삐삐에 번호를 남겼다.
2626 0124
지금 간다. 사랑해.
수일이 알아보려나? 두산은 고개를 저었다. 0124 말곤 못 알아볼 게 뻔했다. 저를 보자마자 ‘2626이 무슨 뜻이니?’ 하고 묻겠지. 두산은 나긋한 수일의 말투를 떠올리며 실없이 웃었다.
차에 오르기 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서 걱정할 필요 없었다. 할배가 끼어들었든 아니든 두산은 뭐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수일만 모르면 되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막아야 했다. 두산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놈의 몽유병인지 꿈인지가 문제였다. 제발 수일의 꿈에서 그 일이 떠오르지 않기만을 두산은 바랐다.
담배가 입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