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81)

삼락은 날이 밝아 오는 호텔 방에서 멍하니 통장을 바라보았다. 최 사장의 꿈은 사라지고 남은 건 위자료로 받은 천만 원이 찍힌 통장이었다. 입금 날짜도 3일 전, 14일이었다.

“망할 여편네.”

더 심한 욕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었다.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헤어졌다고 위자료를 천만 원씩이나 주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렇다는 건 정 여사도 진심으로 삼락을 대했다는 뜻이 아닐까. 삼락은 정 여사를 구워삶은 전 남편이 그렇게 괘씸할 수가 없었다.

어제 오후, 호텔 로비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정 여사를 기다리는데 웨이터가 삼락을 불렀다. 전화가 왔다는 말에 당연히 정 여사인 줄 알고 달려갔으나, 강 이사였다.

- 행님. 내가 말을 한다는 거를 깜빡했는데,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고예, 정 여사가 전남편하고 재결합 할 끼랍니다.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안부 인사도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삼락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전남편과 재결합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강 이사, 그, 그기 먼 소리고?’

수화기를 든 삼락의 손이 덜덜 떨렸다. 강 이사는 마치 준비한 멘트를 읽듯 감정 없이 말을 이었다.

- 정 여사가 행님한테 미리 말을 했어야 하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정리 안 돼서 몬 했다고 내한테 대신 말해달라 카데예. 너무 서운케 생각하지 마시고, 그 금붙이는 행님 하시고 차는 난중에 갖고 갈 끼랍니다. 그라고, 호텔 아한테 통장 하나 맡깄습니다. 정 여사가 특별히 행님 생각해서 준비한 돈이니까 그거 받으시고 마음 푸십시오. 끊습니다.

‘강 이사! 여보세요. 강 이사!’

강재욱은 사라지고 뚜뚜뚜, 소리만이 남았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충격이 너무 커 멍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정 여사가, 정춘자가 제게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서로 얼마나 다정했던가? 숱한 밤을 함께 보내면서 별의별 시중을 다 들었는데 그녀가 이제 와 저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손을 덜덜 떨며 수화기를 들고 서 있는데 누군가 삼락의 앞으로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오성관 호텔 유니폼을 입기는 했지만 가슴에 명찰이 없었다. 처음 보는 종업원이었다. 화려하게 생긴 남자는 삼락을 향해 고개를 까딱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헛웃음이 났다.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렸다. 최삼락, 꼴 좋다. 급작스레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약국에서 먹은 약은 소용없었다. 나눠마시긴 했어도 네 병이나 처마셨으니 술이 안 올라오는 게 이상했다.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삼락은 간신히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통장을 펼쳤다.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자마자 제 눈을 의심했다. 고작 몇십 많으면 몇백만 원 정도라 생각했던 위자료는 공이 일곱 개나 붙어 있었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천만 원.

삼락은 중얼중얼 다시 한번 숫자를 셌다. 정확하게 천만 원이었다. 역시 돈 많은 여편네는 달랐다. 통장을 보자 더 억울하고 원통했다.

이런 여자를 놓친 자신이 한심했다. 돈을 더 썼어야 했는데, 주는 것만 얻어 처먹지 말고 통 크게 선물을 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잘만 하면 고급 승용차도 그 2층 양옥집도 제 명의가 될 수 있었다.

칠십 먹은 노모가 더는 은행 이자와 생활비를 벌려고 식당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은 전국 팔도 밤무대를 떠돌며 모창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일이나 은아는 차치하고라도 인생이 필 수 있는 일생일대의 찬스였다. 그걸 놓쳤다.

삼락은 이 상황이 황망해서 자꾸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2층 양옥집에 전남편하고 살려고 삼락을 귀신 쫓는 데 이용했구나 싶었다. 그 네 번의 방문이 삼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남편을 위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었다.

“망할 년.”

목소리가 제법 커서 주위에 앉은 손님들이 삼락을 쳐다보았으나, 삼락은 지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재욱 새끼는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 밤에 삼락에게 일을 시키려 설득했다. 헤어질 각오를 하라는 둥 차를 뺏길 거라는 둥 온갖 협박을 했었다. 헤어질 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을 걸 알아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게 거짓말을 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강재욱이 새끼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정 여사를 만나고 싶었다. 자기 얼굴을 보면 설득당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긴 했다. 문제는 삼락이 정 여사가 어디 사는지 전혀 모른다는 데 있었다. 늘 오성관이나 밖에서 만났었다. 집 전화번호는 알았지만, 그게 진짜 집인지도 이젠 확신이 없었다. 삐삐를 남겨 봐야 소용없었다.

그러다 문득 두산이 떠올랐다. 전에 대폿집에서 ‘뒷배 있는 아지매’ 어쩌고 하면서 제게 경고한 게 생각났다. 두산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강 이사 밑에서 일하는 새끼니 모를 리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왜 뜬금없이 그런 경고를 했겠는가.

삼락은 두산을 만나기 위해 여섯 시부터 꼬박 3시간을 넘게 오성관 지하 주차장을 서성였다. 리허설도 가지 않고 화장실조차 가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지만,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양복 주머니에 든 통장을 꼭 쥐고 연신 땀을 닦으며 두산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술기운은 가실 줄을 몰랐고, 주차장의 습기와 더위로 몸에는 열이 났다. 거기다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터졌다. 오성관 종업원 새끼가 자꾸 왔다 갔다 하며 말을 시키고 삼락을 흘끔거렸다.

“행님, 뭐 좋은 일 있으십니까? 와 그래 웃어쌌노?”

삼락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저런 하찮은 새끼하고 말 섞을 시간이 없었다. 얼른 정 여사를 만나서 오해를 풀어야 했다. 한시가 급했다.

다리가 아파서 주차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삼락은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차 엔진 소리가 나면 눈을 떴고, 두산의 차가 아니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흰색 그라나다가 서 있었다. 그새 안으로 들어갔으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다행히 엔진이 돌아가고 있었다.

삼락은 급히 일어나 비틀거리며 차로 뛰었다. 툭툭 보조석 창문을 두드리자 수일이 창문을 열어 주었다. 삼락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제 살았다. 정 여사를 만날 가능성이 생겼다. 수일이 차에서 내린 틈에 조수석에 엉덩이를 걸치고 들어가 앉았다.

개새끼. 삼락이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두산은 아는 것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강 이사하고 별반 다를 바 없는 새끼였다. 아니 더 말이 안 통하는 새끼였다.

“두사나, 이거 쫌 바라. 내 위자료까지 받았다. 이거 보이제, 내 이름? 3일 전에 입금했으믄 아직 기회가 있는 거 아이가? 정 여사가 내를 억수로 좋아했다. 그라이 딱 한 번만 만나게 해도. 으이? 니 아는 거 있제? 집 주소 이런 거 말고 주로 가는 데가 어덴지 그거 하나만 알리도. 내 이래 부탁하께.”

삼락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두산은 삼락의 손에 들린 통장을 보자마자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하이고, 돌아삐겠다. 아재요, 고마 내리소. 내는 할 말 읍따.”

마치 못 볼 걸 본 양, 썩은 표정을 지었다. 삼락이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직접 조수석 차 문을 열고 강제로 끌어 내렸다.

“백두사이 이 개새끼야, 니 그래 살지 마라! 짐승 새끼도 니보다 정이 많을 끼다. 으이? 이 개씹할 호로새끼. 퉤. 을매나 잘 사나 두고 보자. 퉤퉤.”

삼락은 주차장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침을 뱉고 욕을 했다. 두산은 웃기만 했다. 삼락이 지랄하는 걸 구경하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남은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인데 저 새끼는 담배나 처피우고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왔다. 우엑. 삼락은 차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허리를 숙여 토했다. 먹은 걸 모두 게워 냈다. 막 차에서 내려 오성관으로 향하던 손님들이 기겁하며 그를 피했다. 아까 삼락에게 말을 시켰던 종업원이 급히 밀대와 양동이를 들고 토사물을 치웠다.

“아이 씹, 아재, 여서 토하면 우짭니까? 손님 떨어지그로. 퍼뜩 화장실로 가이소.”

어린놈의 새끼가 삼락의 엉덩이를 툭툭 찼다. 삼락은 화를 내며 두산을 돌아보았다. 두산은 차에 기댄 채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씨팔. 드런 놈의 새끼. 삼락은 혼잣말을 하며 오성관 안으로 들어갔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자꾸 웃음이 났다.

이런 제 처지가 한심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어째서 그 여자 사는 곳조차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하물며 잘 가는 미용실이라도 알아 뒀어야 하는데.

생각해 보니 정 여사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 많고 돈이 많아 제게 돈을 잘 쓴다는 것밖에 몰랐다. 차를 사 주고 금붙이를 사 주는데 정신이 팔려서 정작 정 여사에 대해 하나도 알아보지 않았다.

노래고 뭐고 호텔 방으로 올라온 삼락은 엉엉 소리 내 울다가 미친놈처럼 웃었다. 그러다 또 울었다. 다른 때와 달리 이번은 상실감이 유독 컸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울다가 웃다가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밤을 꼴딱 새운 삼락은 뻑뻑한 눈을 비비고 물을 한 잔 마셨다. 정신이 맑아졌다. 샤워라도 해야지. 천만 원도 정말 큰돈이었다. 이걸로 일단 은행 빚을 갚고 새로 시작하자. 저를 좋아해 줄 돈 많은 여편네가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겨우 마흔둘, 아직 늦지 않았다.

삼락은 파이팅을 외치고 샤워부터 했다. 깔끔하게 씻고 나오자 아직도 소파 등받이에 그날 입었던 검은색 추리닝이 널브러진 게 보였다. 삼락은 거칠게 옷을 집어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메이커든 뭐든 상관없었다. 꼴도 보기 싫었다. 정 여사 전남편의 사진이 든 노란 봉투도 찾아서 찢어 버렸다. 속이 후련했다.

옷을 갈아입고 횟집 주차장에 두고 온 차를 가지러 나갔다. 오늘 중으로 차를 찾으러 온다 했으니 얼른 가져다 두는 게 좋았다.

송도로 가는 택시 안은 신나는 트로트가 흘렀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사실, 빈털터리가 될 뻔했는데 정 여사가 준 위자료 덕에 가여운 신세는 면했다. 게다가 금목걸이에 금반지, 금시계까지 팔면 몇 백은 공으로 생기는 거나 다름없었다. 차가 제일 아까웠지만, 그까짓 것 없이도 잘 살았는데 뭐 어떠하랴.

삼락은 허허실실 웃으며 택시 기사와 야구 얘기를 나눴다. 늘 그랬듯 이번 실연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터였다.

***

오랜만에 일을 했다고 수일은 나가떨어졌다.

“일 나라! 병원 가자!”

“…으으….”

“퍼뜩!”

두산이 흔들어 깨웠다. 겨우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오전 9시였다. 퇴원 후 첫 검진일이었다. 10시까지 가려면 지금 일어나서 씻어야 했지만, 수일의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씨발, 일나도 몬 하면서 일은 만다꼬 하노?”

투덜대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수일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5분만, 아니 10분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불이 들춰졌고, 두산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수일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영 별로라 수일은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눈도 제대로 못 떠서 멍하니 앉아만 있는데 두산이 달려들었다. 몸이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어우, 왜 이래….”

두산은 수일의 얼굴을 부여잡고 뽀뽀를 퍼부었다. 이도 안 닦고 눈곱도 안 뗐는데 아침부터 왜 이러나 몰랐다.

하고 싶은 만큼 뽀뽀를 다 했는지 입술을 뗀 두산이 수일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씩씩대는 숨결에서 민트 향이 났다. 하여간 부지런했다.

“퍼뜩 준비해라. 검사 다 하고 우리 할 수 있는가 함 물어바야지.”

두산이 왜 아침부터 소란인가 했더니 그걸 물어보고 싶어서였다. 수일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두산을 밀어냈다. 욕실로 가서 이부터 닦고 세수를 했다. 머리가 까치집을 지어서 난리도 아니었다. 물을 잔뜩 묻혀 드라이기로 다시 말리고, 무스를 발라 잘 넘겼다.

두산은 수일이 입을 옷까지 준비해서 침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그렇게도 하고 싶을까. 한숨이 나왔다. 수일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두산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간호사가 두산을 보고 인상을 썼다. 수일은 옷을 갈아입고 피를 뽑은 뒤 엑스레이와 CT를 찍고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뭐가 이렇게 검사할 게 많은지 몰랐다. 각종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수일은 배가 고파서 쓰러질 것 같았다.

대기 시간을 포함해 2시간여에 걸친 검사를 모두 끝내고 드디어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수일에게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두산에겐 억지로 웃어 보였다.

수일은 괜히 서운했다. 간호사도 의사도 두산에게 왜 저러나 몰랐다. 수일은 두산이 서운해할까 봐 손가락을 조몰락댔다. 뚱하니 앉았던 두산은 손가락 장난에 슬쩍 웃었다.

“수술 부위는 깨끗합니다. 유착도 없고 관리도 잘 돼서 이상 없습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쪼매만 찢어진 기라서 또 다치지 않는 한 일상생활 하시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깁니다. 근데, 갈비뼈 이기 쪼매 오래 가네예, 그지예?”

“그라믄 해도 됩니까?”

수술 경과가 좋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산이 물었다. 의사가 흠칫 놀라며 수일의 눈치를 살폈다. 수일은 민망해서 목까지 시뻘게졌다. 의사의 시선을 피해 열이 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아… 그기, 환자분의 경우 비장이 파열된 기라서 가능은 합니다. 그러나 아직 수술한 지 5주밖에 안 됐고 환자의 상태가, 그 갈비뼈도…. 그기….”

두산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당황한 의사가 횡설수설했다.

“그래서 된단 말입니까, 안 된단 말입니까?”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눈빛도 조금 사나워졌다. 의사가 침을 꼴깍 삼켰다.

“보호자님의 경우엔 귀ㄷ, 아니 대가리 정도는… 안 되겠.”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대가리란 말에 두산은 벌떡 일어나 의사의 손을 잡았다. 어휴, 무슨 이런 민망하고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몰랐다. 수일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의사를 볼 낯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의사는 급히 갈비뼈로 화제를 돌렸다. 갈비뼈는 며칠 전 응급실 사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시 벌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무리하면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주어도 없이 갈비뼈에 무리가 가는 자세는 삼가야 한다고 의사는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수일을 먼저 내보내고 두산은 의사와 따로 상담했다. 저럴 거면 저 없는 데서 물어볼 것이지 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지 몰랐다. 수일은 혼잣말로 투덜대며 대기실에 앉아 두산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퇴원하기 전에도 두산은 의사 앞에서 꼬치를 까고 이 정도 크긴데 넣어도 되냐 물었다고 했다. 의사가 식겁하며 안 된다고 손을 휘휘 저었었는데, 오늘은 드디어 대가리는 가능하단 말을 들었다며 두산은 신이 났다. 무슨 노랜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음정으로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아 맞다! 고무 써야 된다 카데. 내 쓰는 거 따로 있으니까 그거 사갖고 가자. 내는 커서 아무거나 몬 쓴다 아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두산은 주차장 가는 길에 큰소리로 외쳤다. 수일은 모르는 사람인 척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걸었다. 그러자 두산은 아예 수일을 보며 뒤로 걸었다. 수일을 향해 대가리가 어쩌고 자세는 강새이 맨키로 하기보다는 바짝 눕는 게 낫겠다 말했다.

수일은 딴청을 부리다가 도저히 부끄러워 지그재그로 걸어도 보았지만, 두산이 그런 수일을 따라 지그재그로 뒤로 걸었다. 몇 번 자빠질 뻔한 두산은 균형 감각이 어찌나 좋은지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너는 왜 걸어 다니면서 이상한 소릴 하니?”

듣다 못한 수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기 머가 이상하노? 남들 다 하는 거 아이가. 그라고 우리가 먼 소릴 하는지 아무도 몬 알아 듣는다. 관심도 없을 꺼로?”

“사람들이 자꾸 쳐다봤단 말야.”

“니가 예쁘니까 쳐다봤겠지.”

실실 웃으며 헛소리했다. 저리도 좋을까. 다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가리만 넣어서 어디다 쓰려고 저러는지 원. 수일은 혀를 찼다.

검사 때문에 빈속으로 와서 아까부터 배가 고팠다. 수술 부위가 좋아졌다 해도 지나치게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 회나 조개 같은 상할 위험이 있는 음식은 삼가라고 했다. 맛있는 걸 잔뜩 먹고 싶은데 두산이 죽어도 죽을 먹어야 한다며 죽집으로 끌고 갔다.

죽이라면 이젠 질렸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그냥 먹어야지 어쩔 수가 없었다. 수일은 이 무더운 날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먹으며 입이 한 발이나 나와 있었다.

“하고 나면 통닭 묵자. 내 두 마리 사 주께.”

“양념 하나 후라이드 하나.”

“어. 알았다.”

“콜라 말고 사이다루.”

“알았다. 무시는 두 개?”

“아냐. 세 개.”

수일은 기름진 거 먹지 말라는 의사의 말은 한 귀로 흘리고 나중에 먹을 통닭 생각에 군침을 흘렸다. 통닭 맛을 상상하면서 죽을 먹으니 나름 먹을 만했다.

죽집 TV에서 낮 뉴스가 흘렀다. 어제부터 저 살인 사건이 라디오고 TV고 계속 나왔다. 피해자들이 지역 유지라 더 그러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범인을 욕하는 소리에 정작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묻혔다.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흥분하는 남자를 두산이 흘낏 쳐다봤을 뿐, 수일도 두산도 사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천천히 무라. 입천장 딘다.”

“천천히 먹고 있어.”

선풍기가 돌아가긴 했으나 뜨거운 걸 먹으니 절로 땀이 흘렀다. 두산이 손을 들어 수일의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닦아 주었다.

아나운서의 입에서 정춘자란 이름이 흘러나왔다. 수일은 귀에 익은 이름에 고개를 들어 TV를 보았지만, 그 뉴스는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춘자.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워낙 흔한 이름이라 못 들어 본 게 이상하지만, 근래 어디서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수일은 고개를 갸웃하며 바닥을 드러내는 죽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집에 도착하니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사람 소리에 안으로 들어가자 현수가 인부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거실 바닥에 앉아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있었다. 수일은 두산을 돌아보았다.

“행님, 다 끝났나?”

“어. 이제 막 끝나서 밥 묵고 있다.”

“내가 일찍 왔는갑네. 우리 요 앞 로망스에 가 있을 테니까 다 묵고 글로 온나. 그라믄 편하게 식사들 하이소.”

현수는 자장면을 입 안 가득 넣고 수일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멀리 베란다를 보자, 은색의 방범 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방으로 갔더니 안방에도 있었다. 작은 방에도 있고 옷방에도 있었다. 창문마다 모두 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가자.”

“저런 걸 왜 달았어? 돈 아깝게.”

창도 많아서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하여간 애가 돈을 못 써서 죽은 귀신이 붙은 모양이었다. 수일의 잔소리에 두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생각해 바라. 와 달았는지.”

농담 한 번 한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반응하다니, 두산은 생각보다 많이 예민한 것 같았다. 제 돈은 아니지만 괜한데 돈을 써서 아까웠다. 수일은 앞서 걷는 커다란 등을 한껏 노려보며 뒤를 따랐다.

두산은 콘돔이 든 일수 가방을 잘 챙겨서 집 근처 카페 로망스로 갔다. 카페는 한산했다. 창가에 자리를 잡자마자 삐삐가 울렸다. 당연히 저한테서 나는 소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수일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삐삐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너 뭐 마실 거야?”

“내는 아이스커피.”

두산이 공중전화로 가기 전 메뉴를 물어본 다음,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여기 아이스커피랑 우유 주세요.”

아침부터 난리를 피우던 두산은 의사에게 대가리 얘기를 듣고 콘돔까지 사자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걸 넣는다고 딱히 좋을 것 같지도 않지만, 본인이 만족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카페 입구에 설치된 공중전화에서 음성을 확인하는 두산은 세상 무심한 표정이었다.

수일은 테이블에 팔을 괴고서 물잔을 만지작거렸다. 두산이 두고 간 일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콘돔이 어떤 건지 자세히 못 봤는데 한번 열어나 볼까, 하고 슬쩍 손을 뻗는데 삐삐가 울렸다. 두산이 아니면 제 삐삐가 울릴 일이 없었다. 수일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고, 짐짓 귀찮은 척 천천히 삐삐를 들었다. 액정에는 1004라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일공공사. 일영영사. 천사. 천사? 뭐야, 내가 천사라는 거야 지가 천사라는 거야.”

수일은 혼잣말을 하며 히죽 웃었다.

어느새 다가온 두산은 삐삐 액정을 바라보고 있는 수일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누가 천사야?”

“당연히 내지.”

“뭐래. 나 아냐?”

“내가 보냈으니까 내지!”

당당하게 자기가 천사라고 우기는 두산은 카페 종업원이 내온 음료수를 한입에 반 이상 들이켰다. 그래 놓고 우유를 시킨 수일에게,

“배고프나?”

하고 물었다.

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9시부터 금식을 했는데 고작 죽 하나 먹었으니 배가 고프고도 남았다. 물론 두산도 같이 금식하고 같이 죽을 먹긴 했지만.

“씨발, 내도 배고픈데 고마 통닭 묵고 하까?”

두산은 남은 커피를 두 모금 만에 다 마시고 물었다.

“응.”

수일도 두산을 따라 서둘러 우유를 마셨다.

하지만 카페에 들어온 지 10분도 안 돼서 나가려니 음료값도 아깝고 현수도 밥을 덜 먹었을 것 같아서 두 사람은 조금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로 했다. 그러나 한번 먹겠다고 생각하자 위산이 마구 분비되어 배에서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났다.

말장난을 하다 지쳐 손을 잡고 놀았다. 수일의 손을 가지고 몇 분을 자분거리던 두산이 대뜸 인상을 썼다.

“이거는 꼬챙이도 아이고, 이래 말라비틀어지가꼬 어따 쓰겠노? 니 손에 힘은 있나?”

“누굴 팔십 먹은 노인으로 알어. 당연히 힘 있지.”

있는 힘을 다해 두산의 손을 잡았더니 갑자기 엄지 씨름 자세를 취했다. 두산이 씨익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하여간 애였다. 하는 수 없이 수일은 손을 맞잡고 엄지 씨름을 해 주었다.

수일이 이길 리 만무했지만, 당연히 시작한 쪽에서 한 번쯤 져 줄 줄 알았는데 두산은 조금도 져 주지 않았다. 세 번을 다 이겨서 토라진 척 등을 돌리자 한 번 더 하자 했다. 이번엔 져 주겠지 했는데 또 두산이 이겼다. 이긴 두산은 혼자 신이 나서 소리 내 웃었다.

“너는 이길 거면서 왜 또 하자고 한 거니?”

“심심하다 아이가.”

“니가 먼저 하자고 했으면서, 좀 져 주고 그래야지. 애가 양보 정신이 없어요.”

“알았다. 이번에는 져 주께.”

“됐어. 안 해.”

괜히 씨름을 해선 힘만 더 빠졌다. 수일이 철퍼덕 테이블에 엎드리자 두산도 같이 엎드렸다. 테이블이 비좁아졌다. 맞닿은 팔등이 뜨거웠다.

“니는 오성관이 그래 좋나?”

두산은 이마를 덮은 수일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올려 주며 물었다.

“누가 오성관이 좋대? 직장이니까 가는 거지.”

“한 달 빠지는 기 그래 어렵나?”

또 그 얘기였다. 볼멘소리에 수일은 한숨을 쉬었다.

“한 달 일을 안 하면 석 달이 힘들어져. 삼사 일 굶는 건 예사고. ”

수일은 덤덤하게 말했다. 거기다 아프기라도 하면 빚을 내야 했다. 악순환의 연속. 끊어 낼 수 없는 가난의 고리였다. 가난이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말하고 보니 구질구질한 제 인생을 떠벌린 것만 같아서 조금 후회됐다.

두산은 가만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하고 짧게 한마디 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어설프게 위로를 해 주지 않아서, 그깟 돈 내가 줄 테니 일 나가지 말란 소릴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팔을 맞대고 엎드렸다가 딱 20분이 됐을 때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왔다. 타이밍 좋게 이제 막 숙소 건물 밖으로 나오는 현수와 마주쳤다.

“로망스로 오라카드만은 와 벌쌔로 나왔노? 문 닫았나?”

“으데. 우리도 점심 몬 무가꼬 배고파서 나왔다.”

“그래? 그라믄 밥 무라. 참, 잡힜다 카드라.”

“어. 들었다. 행님, 수고 많았데이.”

“오야. 맞다. 수일이 행님, 아픈 데는 개안습니까?”

두산과 짧게 수다를 떨던 현수가 수일의 안부를 물었다.

“네? 네. 괜찮대요.”

“잘 됐네예. 드가서 쉬이소.”

“네. 현수 씨도 들어가세요.”

습관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린 현수는 집 앞에 아무렇게나 세워 둔 검은색 차에 올라탔다.

평소라면 지금쯤 일어났을 수일은 벌써 볼일을 다 마치고 들어왔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출근까지 남은 시간도 넉넉했고 정신도 말짱했다. 두산이 전화로 통닭을 시키는 동안 수일은 라디오를 켜고 소파에 앉았다.

한가하고 평온했다. 주문을 마친 두산이 수일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키가 커서 소파 밖으로 다리가 삐져나갔지만, 어떻게든 몸을 구겨 넣고 수일의 무릎에 치댔다.

수일은 두산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니 앞으로 내 편만 든다 켔다.”

대뜸 이렇게 말했다. 쳐다보는 눈이 진지해서 수일도 단호하게 응, 하고 답했다.

“도장.”

두산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수일은 고개를 숙여 쪽 입을 맞췄다. 커피 맛이 났다. 쪽쪽 짧게 입을 맞추고 다시 두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숱 많은 짙은 눈썹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근데 내가 누워야 하는 거 아냐? 나 환잔데?”

“무릎은 안 아프다 아이가.”

“그래두.”

“내 쪼매만 더 누 있자. 이래 있으니까 좋네.”

“알았어. 통닭 올 때까지만.”

선심 쓰듯 허락을 해 주고 두산의 얼굴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서 뽀뽀를 했다가 키스도 했다.

“너 근데, 의사 선생님하고 따로 무슨 얘기 한 거야?”

“아까 전에?”

“응. 나 내보내고서.”

“아. 은제 똑띠2) 할 수 있는지 물어봤지.”

그럴 줄 알았다. 수일은 온화한 표정을 싹 지우고 두산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딱 쳤다.

“너는 그걸 왜 자꾸 그 선생님께 물어보니? 창피해서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그라믄 누한테 물어보노? 그 쌤이 니 수술했으니까 그 쌤한테 물어바야지.”

“그래서? 뭐라 그러던데?”

사실 수일도 궁금했다. 처음엔 아프고 불편한 느낌이 들긴 해도 하면 엄청 좋았고, 거기다 두산을 너무 오래 방치하는 것도 조금 미안했다.

“다음 주에 반에반, 그 다음 주엔 반. 반 넣으면 다 넣는 기나 마찬가지지.”

“다음 주에 반?”

“아니. 다음 주는 반에반.”

반의반이라면 대가리 더하기 대가리 정돈가? 수일은 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근데 너, 오늘 정말 넣을 거야?”

“으데. 그 쌤이 내한테 이번 주는 안 하는 기 좋다 카드라. 실수 한 번에 몇 개월 날릴 수도 있다꼬. 그 말까지 들었는데 내가 짐승도 아이고 그 일주일 몬 참겠나, 5주를 참았는데.”

수일은 몇 년을 안 한 적도 있었는데, 겨우 5주 참았다고 뻐기듯 말하는 두산이 웃겼다.

“근데 콘돔은 왜 샀어?”

“기념으로. 이기 다 니가 회복됐다는 증거 아이가. 을매나 좋은 날이고.”

“그래? 착하네.”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의사한테 부끄러운 소리나 하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대견했다.

“착한 일 했는데 상 안 주나?”

이럴 줄 알았다. 수일은 입을 실룩대며 일부러 퉁명스레 물었다.

“머 받고 싶은데?”

“얘기하믄 해주나?”

“일단 말 해 봐.”

“오일 마사지.”

미리 생각해 뒀는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수일은 두산의 입술을 꼬집었다. 입술이 꼬집히는데도 두산은 좋다고 웃었다.

“어유, 하여간 본 건 많아 가지구.”

“해주끼가 안 해주끼가?”

“몰라. 통닭 먹고 힘 나면 그때 생각해 보구.”

수일은 싫다는 말은 안 했다. 한창땐데 잘 참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 몸 전체에 오일 마사지를 해 달라진 않을 테니까 힘이 많이 들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오일 바르고 대충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낮이라서 배달이 빨랐다. 두산은 양손에 비닐장갑까지 끼고 앉아 후라이드 한 조각 양념 한 조각 번갈아 가며 수일에게 닭을 먹였다. 살에서 떨어져 나간 바삭한 튀김옷도 챙겨서 입에 넣어 주었다. 그다음 꼭 뽀뽀를 했다. 성가시게 자꾸 뽀뽀를 하는 통에 치킨 무 먹을 타이밍을 계속 놓쳤다.

“무우!”

“어. 여 있다.”

수일은 입을 벌려 치킨 무를 받아먹었다. 느끼함을 싹 잡아 주는 아삭아삭 무는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사이다도 한 모금 마셨다.

“너두 먹어.”

“니부터 맥이고.”

“나 배불러. 너 먹어.”

두산은 제일 맛있는 다리는 모두 수일에게 주고 저는 퍽퍽한 가슴살을 먹었다. 목이 막히는지 사이다를 벌컥벌컥 마시고 무를 두 개씩 집어 먹었다. 날개는 날개 먹으면 바람피운다는 속설을 이유로 자기 입에 넣었다. 수일은 마지막 다리 하나를 두산의 입에 가져갔다.

“안 무도 되는데.”

두산은 말만 이렇게 하고 바로 한입 베어 물었다. 치킨 무를 집어 입에 넣어 주자 두산은 손가락까지 쏙 빨아 먹었다. 그리고 또 뽀뽀를 했다. 뽀뽀를 왜 이렇게 좋아하나 몰랐다. 수일은 쪽쪽 입술을 두어 번 찍었다.

“근데 이 집 양념도 맛있다. 그지?”

“어. 그래도 내는 후라이드가 제일 좋다.”

“나두.”

마지막 남은 조각까지 싹 발라 먹고 나자 기운이 나는 게 아니라 기운이 쏙 빠졌다. 오랜만에 일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고 몸이 버티질 못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두산이 음식을 치우는 동안 수일은 식탁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깜빡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 보니 침대 위였다. 식탁을 다 치우고 호들갑을 떨며 깨울 줄 알았던 두산은 수일을 제 가슴에 품고 어린아이 재우듯 토닥이고 있었다.

선풍기가 돌아가는 잔잔한 소음에 두산의 토닥임까지 더해지자 다시 눈이 감겼다. 포근했다. 수일은 팔을 뻗어 두산의 몸을 끌어안았다. 가슴에 얼굴을 비비고 냄새를 맡다가 이럴 애가 아닌데 왜 이럴까 싶어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들자 두산이 눈을 마주쳐 왔다.

“일 났나?”

“응. 너 왜 이래? 상 달라고 조를 줄 알았더니.”

“자는 아를 우째 깨우노?”

“못 깨울 정도로 잤어?”

“어. 뒤로 넘어가는 것도 모르고 자데.”

다정한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수일아.”

“응?”

“내는 니밖에 읍따.”

뜬금없는 고백에 수일은 흐리게 웃었다.

“니는?”

두산이 이마를 콩 찧으며 답을 재촉했다.

“내도 니밖에 읍따.”

두산을 그대로 흉내 내서 답했더니, 인상을 팍 썼다. 수일은 손가락으로 두산의 주름을 펴 주며 웃었다.

“나두 너밖에 없어. 됐지?”

“어. 다 잤나?”

“응.”

“기운은 좀 있고?”

슬쩍 묻는 얼굴에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응. 조금만 더 이따가 너 상 줄게.”

“그래.”

두산은 수일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내려 수일의 콧등을 따라 뽀뽀를 했다. 간지러웠다. 인중까지 내려온 입술에 수일도 고개를 들었다. 도톰하고 폭신한 두산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쪼옥 빨아올리다가 입 안에 머금었다.

“나 씻고 올게.”

“갠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같이 씻으까?”

치약 맛에 비누 냄새까지 나는 걸 봐선 벌써 씻은 게 분명한 두산은 수일을 쫄래쫄래 따라왔다.

“따라오지 말구 가서 기다려.”

“오랜만에 같이 하자.”

결국, 못 이기는 척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수일이 이를 닦는 동안 두산은 알몸으로 욕조에 물을 틀고 입욕제까지 풀었다. 외국 영화에서나 볼 법한 흰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그런 건 언제 샀니?”

“니 퇴원하기 전에.”

“하여간 너두 참 부지런하다.”

“남자는 당연히 부지런해야지. 게으르면 몬 쓴다.”

부지런한 건 두산의 자지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섰는지 발딱 서서 흔들흔들 위용을 자랑했다. 부전자전. 이럴 때 써먹어도 되는 단어인지 모르겠지만, 수일은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풉, 하고 치약을 뱉었다. 두산이 아들과 함께 돌아보았다. 어깨가 들썩이도록 웃자, 두산이 ‘돌았나?’ 하며 혀를 찼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 두고 눈물까지 흘려 가며 웃은 수일은 간신히 입을 헹구고 옷을 벗었다. 그새 욕조 안에 들어가 앉은 두산은 거품 안에서 팔을 벌렸다.

거품이 알몸을 가려 주어 부끄럽진 않았지만, 살이 닿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수일은 두산의 목을 끌어안고 허벅다리 위에 다리를 벌려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허벅지가 벗은 하체에 느껴졌다. 두산이 고개를 틀어 수일의 입술을 맞물었다. 자연스레 입을 벌려 두산을 맞았다.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천천히 또 빠르게 서로 혀를 얽었다. 이로 깨물었다가 츄웁 침을 삼키며 빨아올렸다. 최대한 깊이 맞물려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비틀고 입술을 겹쳤다. 격렬하게 물고 빨았다. 헐떡거리다 못해 안달이 나 서로의 입에선 깊은 한숨과 앓는 소리가 났다. 신음이 깊어질수록, 물이 찰방거리는 소리도 빨라졌다.

두산은 수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꼼짝 못 하게 그렇게 쥐고 숨이 막히도록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어찌나 강하게 입술을 들이미는지 수일의 몸이 뒤로 밀려 등에 물이 닿을 정도였다.

겨우 입술을 떼어 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두산은 숨을 고르는 틈틈이 입을 맞춰 왔다. 입맞춤이 다시 키스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수일은 숨이 차서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두산을 몇 번이고 떼어 내도 사납게 밀어붙이는 키스를 막진 못했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입술이 다 아렸다.

“하, 하으… 나 아퍼.”

아프다는 말에 그제야 키스를 멈춘 두산은 수일을 꼭 끌어안고 목덜미를 따라 어깨선까지 쪽쪽 대며 부족한 키스를 대신했다.

“무슨 일 있니?”

“으데. 아무 일 없다.”

수일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두산이 답했다.

“그럼, 많이 참아서 힘들어?”

“어. 쪼매.”

“미안.”

수일은 오래 아픈 게 미안했다. 멀쩡한 남자를 5주씩이나 굶기다니 다른 사람을 찾아서 해결하라고 할까 싶다가도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질투가 났다. 두산이 저 아닌 누군가와 그런 걸 하는 게 싫었다. 다행히 두산도 다른 사람과 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사과하지 마라. 내 개안타. 담주에 반에반 넣으면 되지.”

“응. 꼭.”

“어. 꼭.”

수일은 몸을 뒤로 빼서 두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이번엔 수일이 키스했다. 누구보다 격렬하고 거칠게 두산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입 안 점막이며 천장, 혀 아래까지 싹싹 훑었다. 키스만 해도 흥분으로 사정할 것 같았다.

수일은 배를 압박하는 두산의 성기와 제 성기를 붙이고 그대로 두산을 끌어안았다. 배와 배, 성기와 성기가 물 안에서 맞닿았다.

수일은 제 가슴을 두산의 가슴에 바짝 붙이고 얼굴을 목덜미에 묻었다. 두 손으로 두산의 양쪽 위팔을 꼭 잡은 채로 천천히 몸을 밀었다. 개구리가 헤엄을 치듯 두산의 배와 가슴 위에서 수일은 헤엄을 쳤다.

수일이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성기는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두 사람의 입에선 음란한 신음이 흘렀다. 욕조 밖으로 비누 거품이 밀려 나갔다.

두산은 어제는 출근한다고 그렇게 화를 내더니, 오늘은 보리차까지 끓여 빨간색 보온병에 담아 주었다. 배가 좀 더부룩하다 했을 뿐인데 호들갑을 떨며 물도 아무거나 마시지 말라고 했고, 혹시 모른다며 소화제까지 챙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일은 침대에 가만 누워 있었다. 얌전히 목욕이나 하는 건데 뭐 하러 나대서 이렇게 기운을 빼나 몰랐다. 욕조에서 먼저 까부는 바람에 두산은 보양식이라도 먹은 양 펄펄 날아다녔지만, 수일은 반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괜히 수술한 곳까지 아픈 것 같아, 옷 안에 손을 넣고 꿰맨 자리를 슬슬 만지작댔다.

“와? 배 아프나?”

출근 준비를 마친 두산이 배를 만지는 수일의 옆에 엎드려 물었다.

“아니. 그냥 수술한 데가 좀 땡겨서.”

“어데 보자.”

“뭘 봐, 보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산은 옷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평범하게 손을 넣거나 옷을 올리면 안 되는 걸까. 절로 한숨이 났다. 곧 왼쪽 갈비뼈 부근에 축축한 혀와 폭신한 입술이 느껴졌다. 개복 수술한 상처의 주변부를 혀로 핥고 뽀뽀했다. 간지러웠다. 수일은 몸을 비틀어 웃었다.

“그만 나와. 늦겠다.”

말을 들어 먹을 두산이 아니었다. 두산은 뾱뾱 소리가 나도록 수일의 살을 입 안에 머금었다 빼내며 배꼽까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내려왔다. 간지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수일은 두산의 등을 찰싹 때렸다.

“얼른 나오래두?”

그제야 두산이 옷 속에서 빼꼼 머리를 빼냈다. 수일은 상체를 세워 두산을 내려다보았다. 두산은 옷을 위로 끌어 올리고는 희멀건 배에 보란 듯 입을 맞췄다. 수일을 향해 씨익 웃었다.

“못 말려.”

“좋으면서.”

수일은 헛웃음을 웃었다. 두산이 몸을 일으켜 수일에게 다가왔다. 자연스레 둘은 입을 맞췄다. 눈을 마주 보고 입을 맞추고 혀로 장난을 쳤다. 쪽,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참, 니 무대복 소매 떨어짔다.”

“어디?”

“왼쪽.”

깜짝 놀라 왼쪽 소맷단을 살펴보니 조금 해졌을 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떨어지긴. 이거 그냥 수선 맡기면 돼.”

“한 벌 새로 할래?”

“뭐 하러. 검은색이라 티도 안 나는데.”

소매 끝에 옷감만 하나 덧대면 몇 년은 더 거뜬히 입었다. 게다가 두산이 입지 말라고 했지만 아이보리색 무대복도 있어서 굳이 비슷한 스타일을 사고 싶지 않았다. 반짝이 옷이라면 또 모를까.

수일은 소매를 살짝 털어 주고, 두산의 팔짱을 꼈다. 두산의 광대가 하늘로 치솟았다. 바로 고개를 돌려 수일에게 뽀뽀했다. 계단 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입을 맞추고 웃느라 리허설 시간에 늦고야 말았다.

급히 차에서 내려 나이트로 향하는데, 지하 출입구에 정수가 제복 경찰과 함께 서 있었다.

“먼 일 있나?”

수일의 짐들을 이고 진 두산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어. 지금 싹 다 모다 놓고 지문 찍는다.”

“지문?”

“어. 퍼뜩 드가 바라.”

정수는 경찰의 눈치를 살피며 ‘살인 사건’ 하고 속삭였다. 어리둥절한 수일을 두산이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오성관 직원들이 두 줄로 서서 지문을 찍고 있었다. 호텔 직원들과 기도들이 먼저라서 뒤쪽에 종업원과 가수들이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들어오시는 분 여 신분증 제출하십시오.”

커다란 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수일을 향해 소리쳤다. 두산이 짐을 내려놓는 동안 수일은 먼저 앞으로 가서 신분증을 내밀었다. 남자도 경찰인가 보았다. 그는 흰 종이에 수일의 이름과 주민 등록 번호를 받아 적고 돌려주었다. 뒤에서 두산이 다가왔다.

“고생 많으십니다, 형사님. 뭔 일 있습니까?”

커다란 목소리로 능청스레 물었다. 두산의 소리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든 남자는 놀란 듯 뒤로 물러났다.

“어! 두사이 니가 여 와 있노?”

놀란 얼굴엔 곧 반가움이 묻어났다.

“와 있기는. 강 이사가 여 주인 아이가.”

“맞나? 이래 후진 데를 강 이사가 한다꼬? 밸일이네.”

대놓고 후지다 말하는 남자는 손을 뻗어 두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잘 지냈나? 니는 요새 얼굴 보기가 와 그래 힘드노?”

“바쁘다 아이가. 여도 왔다가 밀레니엄도 갔다가. 행님이야 말로 와 안 놀러오노?”

“내도 뺑이 친다꼬 바쁘다.”

남자는 뺑이 친다는 말을 할 때 상사로 보이는 옆 남자를 힐끔 쳐다보며 흘러내린 안경을 중지로 올렸다.

“참, 두성이는 나왔나?”

은밀하게 물었다.

“으데. 겨울에 나온다.”

“6개월 아이가?”

“9개월.”

속삭이는 남자와 달리 두산은 목소리가 컸다.

“맞나? 이번엔 쪼매 받았네. 글마 그거 정신차리야 된다. 느그 어무이 고생만 시키고.”

남자가 혀를 찼다.

“내사 모르겠다. 근데 행님, 이쟈 이런데도 다 나오고 진짜로 형사 다 돼삤네.”

두산의 말에 남자는 채신머리 없이 키득거리며 믓찌나? 물었다. 두산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근데 먼일이고?”

“뉴스 몬 밨나? 살인 사건 났다 아이가. 대주상사 사장하고 마누라. 내도 자세한 거는 모르는데, 범인이 여 직원이라 카드라. 조 형사님이 현장에 나갔드만은 칼로 난도질을 이래이래 해가꼬….”

칭찬에 신이 난 남자는 칼을 잡은 것처럼 주먹을 쥔 채 팔을 휘둘렀다. 옆에 있던 상사가 인상을 쓰며 쳐다보자 기지개 켜는 시늉을 하며 두산의 주민 등록증을 돌려주었다.

“신분증 여 있습니다. 뒤로 가서 줄 서이소.”

남자는 두산에게 눈을 찡긋하고 수일을 한번 쳐다봤다. 두 사람의 대화를 뒤에서 가만 듣고 있던 수일은 영문을 몰라 눈만 크게 떴다. 뉴스에서 떠들던 그 살인 사건 범인이 오성관 직원이라니,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이트에서 일하면서 경찰이 들이닥친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던지라 경찰 때문에 놀라진 않았다. 불법 영업 단속, 마약사범 단속, 보건증 단속 등 경찰이 찾아오는 사유도 다양했다. 가끔 돈이 필요하거나 실적이 필요해도 찾아왔었다.

함께 일했던 사람 중에 전과자들도 널렸었다. 나이트를 관리하는 조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직원이나 가수 중에는 도둑질이나 간통죄로 살다 온 이들이 숱하게 많았다. 어떻게 보면 나이트는 범죄자들이 숨어들기 알맞은 환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겁을 먹기보다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문 채취에 응했다. 이런 걸 처음 해 보는 어린 친구들만 서로 농담으로 니가 직있나? 하며 낄낄 웃었다. 그들에겐 마냥 신기하고 재밌는 이벤트로 보일 터였다.

두산은 수일과 함께 은아 씨 뒤에 자리를 잡았다. 은아 씨도 영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형님은요?”

“그 오빠야는 부잣집 싸모님하고 데이트 중이겠지. 여서 제일 상전 아이가.”

껌을 짝짝 씹으며 은아 씨가 답했다.

“맨날 지문 찍히고 맨날 보건소 가서 검사받고. 이 짓도 이제 몬 해묵겄다.”

한숨 섞인 타령엔 진심이 묻어났다.

수일의 차례가 되었다. 수일은 열 손가락에 검은 잉크를 묻히고 지문을 찍었다. 지문만 찍고 끝인 줄 알았더니, 홀에서 대기하라고 알렸다.

“면담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두산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윙크를 했다. 수일은 피식 웃었다.

사장이 어린 여자를 하나 끼고 나타나 경찰들에게 박카스를 돌렸다.

“사장님도 줄 서십시오. 예외 없습니다.”

박카스를 받은 중년의 형사가 사장을 향해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예. 복희야 니도 줄 서라.”

사장은 굽신거리며 복희라는 여자를 데리고 젤 앞에 줄을 섰다. 뒤로 밀린 종업원이 인상을 썼지만, 상대가 사장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저 친구가 새로 온 가순가 봐요?”

“어. 예복희. 저 가시나는 내가 만난 아들 중에 제일 꼴통이다.”

“에이, 송이나 혜선이 때는 뭐 안 그랬나요? 곧 친해지실 거면서.”

수일의 말에 은아 씨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싫은 티가 역력했다.

“혜서이 가자마자 왔는데 여태 안 친해진 거 보면 모리겠나? 쟈는 글러먹었다.”

“그 정도예요?”

“어. 최악이다.”

은아 씨 입에서 최악이란 소리가 나왔으니 어지간한가 보았다. 수일은 평범하고 수더분한 인상의 복희를 보다가 경찰과 따로 얘기하는 병태를 눈으로 따라갔다. 두산의 손이 수일의 얼굴을 제 쪽을 돌렸다.

“쫄지 말고.”

“쫄 게 뭐가 있어. 죄지은 게 없는데.”

“그래. 마음 편히 묵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응. 너나 잘해. 괜히 성내지 말구.”

“내가 바보가? 형사한테 썽을 내그로.”

두산은 수일의 볼을 톡톡 쳤다.

복작거리던 홀이 점점 조용해졌다. 지문을 다 찍었는지 경찰들은 테이블 위 서류들을 정리했고, 면담을 마친 직원들은 서둘러 오픈 준비를 시작했다.

“윤수일 씨.”

이름이 불렸다. 두산의 응원을 받고 수일은 대기실로 향했다. 이제 막 면담을 끝낸 은아 씨가 사색이 되어 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문 앞에 선 제복 경찰에게 이름이 또 불려서 수일은 묻지 못했다.

대기실엔 할아버지뻘 되는 나이 지긋한 형사와 그보다 젊은 중년의 형사 둘이 앉아 있었다. 수일은 형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내는 이주공 형사고, 이짝은 조인환 형삽니다. 윤수일 씨 맞지예?”

“네.”

“긴장하지 마시고예, 묻는 말에 솔찌키 대답하시면 됩니다.”

이주공이라는 형사가 말을 했다. 밖으로 자주 다녔던 듯 주름 가득한 얼굴과 손이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혹시 이 사람들 아십니까?”

이 형사가 수일에게 사진 두 장을 내밀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중년의 여자와 남자 사진이었다. 수일은 고개를 저었다.

“본 적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라믄 김대순, 정춘자라꼬 이름은 들어본 적 있고예?”

수일은 고개를 저었다. 정춘자. 낮 뉴스에서 들었던 이름이었다.

“8월 14일 새벽 12시부터 4시까지 어디 계셨습니까?”

“8월 14일 새벽이요? 어… 그게….”

수일은 머릿속으로 8월 14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오늘이 8월 17일이니까 3일 전 일이었다.

“3일 전이고예 비가 억수로 왔는데 기억 안 납니까?”

생각났다. 그 비 오는 밤 급작스러운 현수의 방문, 그리고 비밀 엘리베이터. 형사들이 물어본 날은 바로 그날이었다.

“아, 비! 그, 그때 병원에 갔었습니다. 가, 갈비뼈, 갈비뼈가 아파서요.”

분명히 두산이 물어본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응급실에서도 물어보고 어제도 수일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왜 이런 걸 형사가 묻는지 알 수가 없었고, 어떻게 두산은 형사가 할 질문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같은 날이 맞나? 수일은 머리가 하얘졌다.

수일의 대답에 두 형사는 서로 마주 보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병원이라… 몇 시에 가서 몇 시에 돌아오셨습니까?”

“여, 열두 시 좀 너, 넘어서 가서 6시에 나왔습니다.”

정확히 12시 33분. 트럭에서 본 시계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 병원 가서 물어보면 기록도 있겠다 그지예?”

“네.”

“병원 이름이 뭡니까?”

수일은 병원 이름을 알려 주면서, 거기서 한 달간 입원했고 퇴원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덧붙였다. 두 형사는 수일이 말하는 동안 각자 수첩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여기 분 아니신 거 같은데, 어데서 왔습니까?”

이번엔 조 형사가 물었다.

“서울이요. 계약 때문에 두 달 전에 왔습니다.”

“따로 묵고 계시는 데는 있습니까?”

“네. 백두산이라고 여기 일했던 친구하고 같이….”

낯익은 이름인지 조 형사가 백두산?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수첩에 또 무언갈 끄적였다.

“병원에는 혼자 갔습니까?”

다시 이 형사가 물었다.

정신이 없었다. 수일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대답하기 바빴다. 그들이 두산과 같은 걸 물으면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머리가 또 하얘졌다. 똑바로 대답해야 한다는 강박에 손바닥이 땀으로 젖었다.

“아니요. 그게, 두산이한테 연락했는데 그, 그 친구가 바빠서, 못 와 가지구,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동생, 덕구 아니 덕규라고 그 치, 친구하고 같이 갔습니다.”

수일은 꼬박꼬박 ‘다나까’ 체를 써 가며 묻는 말에 대답했다. 답을 알고 있었지만 긴장해서 자꾸 말을 더듬었다. 목이 탔다. 수일은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몇 시까지 병원에 있었다고예?”

“6시까지요.”

조 형사가 좀 전에 물었던 걸 또 물었다. 두 사람은 수일을 앞에 두고 귓속말을 했다. 이 형사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턱을 쓸었다. 쓰읍, 하고 침을 삼키기도 했다.

잔뜩 긴장했던 수일은 두산이 알려 준 질문에 모두 답하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두 형사의 반응과 상관없이 마구 뛰던 심장도 정상을 찾아갔다.

“혹시 최삼락 씨하고는 어떤 관계십니까?”

형사들이 뜬금없이 삼락 형님에 관해 물었다. 수일은 의아했다. 게다가 여기서부터는 두산에게 듣지 못한 질문이었다. 당황스럽기보단 머리가 맑아졌다.

“네? 삼락 형님이요?”

“예. 최삼락 씨. 여서는 넘진이라고 부르지예, 아마?”

“어. 네. 그 서울에서 저 여기루 불러 주신 분이십니다.”

“아. 그렇습니까? 여기로 불러줄 정도면 억수로 친하겠네예?”

이렇게 묻는 이 형사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조금 야비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네. 삼락 형님이 워낙 사교성이 좋으셔서 여기 가수로 계시는 은아 누님하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냅니다. 사장님께선 스위트룸까지 내주셨구요, 강재욱 이사님하고도 형님 동생 하는 사입니다.”

수일은 은아 씨와 사장 그리고 강재욱의 이름까지 거론했다.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경험상 윗사람의 이름을 대야 좋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수일의 입에서 나온 강재욱이란 이름에 이 형사가 흥미를 보였다.

“최삼락 씨하고 강재욱 씨하고 친하게 지냈다 이 말입니까?”

“네. 동향이라고 서로 무척 챙기셨습니다.”

제일 높은 사람인 강재욱의 이름이 형사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처럼 느껴져 수일은 한 번 더 강조했다. 이번엔 옆에 앉은 조 형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를 끄적였다. 흐음, 하고 이 형사가 턱을 만지작댔다.

“최근에 최삼락 씨가 눈에 띄게 불안해한다거나 분노를 느낀다거나 아이믄 이상하다 싶었던 적 있습니까?”

“아뇨. 그런 적 없습니다.”

수일은 단호하게 답했다. 형님이 최근 결혼 때문에 들떠 있긴 했지만, 그건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다만 형사들이 왜 자꾸 삼락 형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저 죽은 여자와 관련이 있는 걸까? 머리가 복잡했다.

“일단 잘 알겠습니다. 당분간 어데 멀리 가지 마시고예. 참 서울은 언제 돌아가십니까?”

“한 달 뒤에요. 그때 계약이 끝나서요.”

“시간은 넉넉하네예. 여따 집 주소하고 연락처 적어주시고. 여는 명함. 혹시 생각나는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수일은 조 형사가 가리킨 곳에 두산과 사는 집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냥 나가려다가 아무래도 삼락 형님이 마음에 걸려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저 근데,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조심스레 묻는 수일과 달리 대답은 잔인할 만큼 무심했다.

“살인 사건입니다. 최삼락 씨가 용의자고예. 자세한 내용은 더 말씀 못 드리니까 나가보이소.”

수일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 생각했다. 다시 물으려고 머뭇거렸지만 형사들은 수일에겐 관심이 없었다.

“어이 김 순경, 백두산 씨 들어오라 케라.”

문 앞을 지키고 섰던 제복 경찰이 이 형사의 요구에 두산의 이름을 불렀다.

“저기….”

“수고 많으십니다. 형사님들.”

두산이 커다란 목소리로 인사하며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하, 이 새끼. 골 때리네. 니가 여 와 있노?”

조 형사가 두산을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그러다 곧 아까 그 안경 쓴 형사처럼 웃는 얼굴로 두산을 맞았다.

“두사이 니 살 마이 빠짔네. 어데 아팠나?”

“아프기는. 내가 아플 사람입니까?”

“저기, 죄송한데요….”

수일은 삼락 형님이 정말 살인 용의자로 잡힌 건지 아니면 참고인 정도로 잡아간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도 수일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두산이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선 수일의 어깨를 잡아 대기실 밖으로 내몰고 문을 닫았다.

이제야 은아 씨가 왜 사색이 되어서 방을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멍했다.

형님은 지금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살인 용의자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몰랐다. 정신 빠진 사람처럼 문 앞에 서 있던 수일은 이상한 눈으로 저를 보는 김 순경이란 남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밴드가 리허설 준비를 하려는지 무대 위에 있었다. 지문을 채취하던 형사들도 모두 철수하고 홀도 손님 맞을 채비를 끝낸 상태였다. 나이트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삼락 형님의 일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은아 씨가 수일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수일아! 니 얘기 들었제? 이기 먼 일이고?”

혹시나 누가 들을까 봐 은아 씨는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했다.

“저두 잘. 자세한 얘기를 안 해 주셔가지구 무슨 일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누님. 살인이라니 뭐가 크게 잘못된 것 같아요.”

“내 말이. 절때로 그랄 사람이 아이다 그 양반은. 파리 한 마리 몬 죽일 사람이 살인이라이. 어휴, 내 지금도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명치께에 올리고 있는 은아 씨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이고, 정신이 한 개도 읍따.”

은아 씨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사이는 별말 안 하드나?”

“네. 여태 저하고 같이 있어서 형님 일 하나도 모를 거예요.”

기타와 키보드가 튜닝을 시작했다. 수일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를 들여다보았지만, 두산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속만 타들어 갔다.

“수일이 행님, 퍼뜩 올라오이소. 리허설 해야지예.”

키보드 웅이가 수일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가 없었다. 마스터 대신 다른 중년 남자가 기타를 잡고 있었다. 일단 무대 위로 올라간 수일은 마스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까닥하고 웅이에게 물었다.

“마스터는요?”

“일이 있어서 몬 온다 켔습니다.”

“일이요?”

“예. 그 행님 요새 자주 빠진다. 집안일이라꼬 하는데 먼 일인지는 저도 잘 모르고예.”

시큰둥하게 답하고 웅이는 키보드로 돌아가 건반을 눌렀다.

은아 씨와 수일을 제외하면 아무도 삼락 형님 일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알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었다. 수일은 일단 마이크를 잡았다.

경찰들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밤일을 한다는 이유로 앞뒤 재지도 않고 잡아가고 보는 인간들이 경찰이었다. 지난 18년간 수일은 면담만 수십 번을 받았고 공범으로 조사를 받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경찰에게 맞기도 했고, 나이트 사장이나 조폭의 요구에 거짓으로 진술서를 쓰기도 했었다.

수일은 삼락 형님도 오해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형님이 살인을 했을 리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그저 경찰이 이번에도 무고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뿐이라 확신했다.

내일쯤 형님이 나타나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과장을 섞어 가며 얘기를 해 주겠지. 다 같이 경찰 욕을 하고 형님에게 고생 많으셨다고 따뜻한 말 한마디씩 건네고 지나갈 일이었다. 형님에겐 두고두고 써먹을 아찔한 추억이 하나 더 생기는 걸 테고.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지 몰랐다. 정춘자. 혀끝에 그 이름이 계속 맴돌았다. 혹시 정 여사가 아까 사진 속의 여자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춘자라는 여자는 살해당했다. 정 여사가 살해당했다면 형님이 먼저 알았겠지. 이틀이나 뉴스에 떠들썩하게 나왔는데 형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결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님의 일보다 수일은 지금 두산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형사들의 질문을 알고 있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두산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알고 미리 알려 준 걸까? 응급실 일만 해도 의문점투성이였다.

혹시나 두산이 살인 사건에 연루된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쥔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오늘따라 마이크가 너무 무거웠다. 수일은 땀에 미끄러지는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리허설 중에 면담을 끝낸 두산이 홀로 와서 수일을 지켜보았다. 어두워서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수일은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무대 밑 두산에게 달려갔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두산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출근해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11시쯤 데리러 오겠다고, 자기나 현수가 올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했다.

“저기, 두산아. 형님 일, 그거 너 뭐 아는 거 있지?”

수일은 두산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물었다. 수일의 질문에 두산은 너무도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지도 인상을 쓰지도 그렇다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읍따.”

“근데 그 형사들이 한 질문.”

수일은 여기까지 말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더 낮춰 말했다.

“그거 어떻게 안 거야?”

“무슨 질문?”

“아니, 그게.”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수일은 두산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그제야 형사들과의 면담 자리에 두산이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거. 응급실 얘기. 갈비뼈.”

수일은 기가 죽어서 웅얼거렸다.

“안 들린다.”

“다 들리면서.”

두산이 짧게 웃었다. 커다란 손을 들어 수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고, 내 올 때까지 니는 여 얌전히만 있으라. 알았나?”

“응.”

두산을 배웅하고 꺼림칙한 마음으로 대기실로 가 앉았다. 김밥 한 줄에 인삼차로 저녁을 때우는 은아 씨 곁에 앉아 수일은 두산이 끓여 준 보리차를 마셨다.

“하여간 그 오빠야 팔자도 사납다. 만날 사모들 뒤꽁무니만 쫓다가 이기 먼 우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은아 씨가 삼락 형님의 험담을 했다. 애정 어린 험담에 수일은 조용히 웃었다.

“혹시 그 정 여사님 이름이 뭔지 아세요?”

“내도 모르지. 만날 정 여사 정 여사 이래가꼬. 한 번쯤은 이름을 말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도통 안 난다. 그라고 보이 내도 정 여사네. 정은아.”

“어. 그러네요?”

매번 누님이라 불러 성을 깜빡하고 있었는데, 은아 씨도 정 여사였다.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시간이 지나자 긴장도 풀리고 복잡했던 머리도 한결 나아졌다. 저녁에 있었던 일들이 꿈같이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게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수일은 한가한 홀을 바라보며 제일 먼저 노래를 불렀다. 두산이 없으니 박수 소리도 작았다. 90도로 인사를 세 번 하고 무대에서 벗어났다. 좁은 무대 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은아 씨 뒤로 남자 둘이 보였다. 그중 하나는 두산과 웃고 떠들었던 안경 쓴 형사였다. 은아 씨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윤수일 씨, 저희하고 같이 서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안경 쓴 남자가 말했다.

“네? 무슨 일루….”

“참고인 조삽니다. 서로 가서 얘기 하입시다.”

옆의 남자가 거들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따라가지. 이래 막무가내로 데꼬 가면 됩니까?”

은아 씨가 수일을 대신해 항의했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저 그럼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그럴 시간 없습니다. 고마 가입시다.”

참고인 조사라더니 두 사람은 각자 수일의 양쪽에 서서 팔을 잡았다. 어련히 알아서 갈 텐데, 연행해 가듯 끌고 갔다. 아무 생각 없었던 수일은 이들의 행동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느그들 어디 소속이고? 어느 서고?”

은아 씨가 따라오며 고함을 쳤다. 무대 뒤편 복도에 병태가 서 있었다. 이 모든 걸 미리 알고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경찰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직접 출입문까지 열어 주었다. 은아 씨가 함께 나오려 하자, 병태가 은아 씨를 막아섰다. 그렇게 문이 닫혔다.

모든 게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귀는 먹먹해서 잘 들리지 않았고, 백치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팔이 잡혀 끌려가는 중에 수일은 자꾸 뒤돌아보았다. 한 명이라도 아는 얼굴이 있으면 좋으련만 저를 지켜보는 수많은 눈 중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일은 혼자였다.

***

살인 사건이라면 이골이 난 이주공 형사에게도 오늘은 긴 하루였다.

오성관에서 지문 채취를 끝낸 감식반 직원들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현장에서 나온 지문과 서울 말씨를 쓰는 오성관 직원 세 명의 지문을 먼저 대조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이주공 형사도 조인환 형사도 당황했다. 알리바이가 제일 명확한 윤수일의 지문이 일치한다고 나온 것이다.

“씨팔, 이거 우째 돌아가는 기고?”

“그랄 수도 있지. 돈이야 누군들 몬 만지겄나?”

이 형사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거야 그런데예, 현장에서 나온 돈에서 윤수일이 지문이 나오는 기 쪼매 이상하다 아입니까. 최삼락이야 그렇다 치고, 솔찌키 윤수일은 나오면 안되지예.”

조 형사의 말이 맞았다. 윤수일의 알리바이는 대충 들어맞는 것도 아니고 너무도 명확했다.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대학 병원의 의사 간호사가 밤무대 가수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할 리가 없었다. 이 형사는 주름 가득한 이마를 잔뜩 구겼다.

“일단 윤수일이 델꼬 와서 얘기나 함 들어보자.”

오늘 오전 아홉 시경 최삼락을 체포했을 때만 해도 이번 살인 사건은 참 쉽게 풀린다 여겼다. 치정과 금전이 얽힌 우발적 살인 사건. 처음 예상과 달리 남편 김대순이 짠 판이 아니었다. 간통죄로 두 번이나 깜빵에 갔던 최삼락이 돈 많은 이혼녀 정춘자와 짜고 김대순을 죽이려 했다가 둘 사이가 어긋나서 정춘자까지 살해한 것이다.

김대순과 정춘자는 이혼하긴 했지만, 서류상 얽혀 있는 사업이 두 개나 있었고 다른 투자자가 낀 공동 명의 땅도 법적으로 해결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정춘자가 거의 모든 자금을 댄 땅을 김대순이 거저먹으려 들어서 그 문제로 다투는 일이 잦았다고 동업자가 전했다.

가정부의 말에 따르면 정춘자는 김대순 소유의 2층 양옥집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고 늘 싸우다 돌아갔다 했다. 그러니 그 밤 정춘자가 김대순의 집으로 찾아간 일을 가정부는 대수롭지 않다 여겼다. 김대순이 가정부를 휴가 보낸 것도 의미 없는 행동으로 봐도 무방했다.

아니면 김대순도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든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최삼락을 체포하게 된 계기는 이웃집 할머니의 증언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정춘자 주변 인물을 조사하던 중 최삼락의 이름이 떴는데, 그땐 그저 참고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춘자가 만나고 있던 남자가 최삼락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엊저녁, 김대순의 이웃집을 탐문 수사하던 중 할머니 하나가 최삼락이 몰던 자가용이 새벽 다섯 시쯤 와서 30분 가까이 주차를 해 두고 그 집을 관찰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녀는 7월 17일과 8월 5일 두 번 목격했고, 두 번 다 파출소에 신고까지 했다.

다만, 순경들이 찾아오진 않았다. 하필 그 할머니는 지나가는 개만 봐도 신고하는 상습범이었다. 더욱이 전원주택과 고급 빌라가 즐비한 동네라 자주 순찰을 돌았기 때문에 경찰도 이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자동차 번호까지 적어 둔 할머니의 도움으로 최삼락을 송도에서 검거했을 때만 해도 범인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물론 최삼락은 경찰이 왜 자기를 잡아가는지 그 이유를 짐작도 못 했고, 정춘자가 살해당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척했다. 그게 연기였다면 연기 대상을 받을 정도로 완벽했다.

심문하는 동안 최삼락은 안쓰러울 정도로 비굴하게 굴었다. 정춘자에게 선물 받았다는 금붙이를 모두 내놓고, 심지어 천만 원이 든 통장까지 보여 주었으나 도리어 불리한 증거가 되었다. 그 큰돈을 그냥 줬을 리 없었다. 보나 마나 청부 살인 대금이었다. 호텔 방에서 찾은 김대순의 사진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통장과 사진을 제외하더라도 어차피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도 없었다. 범죄 현장에서 최삼락의 지문이 다수 발견되었고, 심지어 살인 후 거실에 앉아 양주를 마신 흔적까지 나왔다. 개새끼였다. 범행 도구가 든 가방은 비에 젖어 지문이고 피고 싹 다 뭉개지고 뒤섞여 증거로서의 의미는 없었지만, 범행 도구임이 확실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가 바로 이런 놈이구나 싶을 정도로 최삼락은 자신의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 눈물 콧물을 쏙 빼 가며 억울하단 소리만 했다. 그런데 심문을 하면 할수록 이 형사의 마음 깊은 곳에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최삼락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할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재주 좋은 이야기꾼에게 지어내라고 해도 못 만들 정도로 알리바이는 기이하고도 허술했다. 조 형사는 키득대며 웃기까지 했지만, 이 형사는 그럴 수가 없었다. 헛소리라 치부하고 넘겨도 될 만한 그 얘기 속에 강재욱의 이름이 거듭 거론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40년 가까이 형사 생활을 한 이주공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재욱은 기분 나쁜 남자였다. 조폭 새끼가 잘생긴 얼굴에 멀끔하게 차려입는다고 해서 사업가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강재욱은 그렇게 보이도록 잘 연기하고 있었다.

조폭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백사파는 여러 의미로 대단한 조직이었다. 백사파라는 이름도 백사 문신을 보고 경찰이 붙여 준 별칭이었다. 그 이름이 유흥가로 번지면서 통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실제 백사파란 조직은 없었다.

이들은 특이하게 다단계식 점조직으로만 활동했고 정식 조직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실제 조직원이 몇이나 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잡혀도 늘 꼬리들만 잡혔다. 꼬리들은 그저 누구 형님을 따르는 하찮은 건달들이었다.

강재욱을 포함 경찰에 의해 파악된 중간 간부들이 몇몇 있긴 했지만, 이들은 합법적인 기업인이었고 사업가들이었다. 설령 이들이 불법을 저지른다 해도 조직폭력범이 아닌 경제사범으로 조사해야 했다. 게다가 정치인을 필두로 검, 경찰과 친분이 두터웠고 이름 좀 있다는 협회와 조합 중 발을 담그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 강재욱의 이름이 최삼락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했다. 한낱 변두리 밤무대 가수 최삼락과 백사파 중간 보스 강재욱의 친분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 형사가 의심을 해 봤자 어디 가서 얘기할 만한 건더기가 없었다. 모든 증거가 최삼락 하나만을 가리켰다. 용의자에서 피의자 신세가 된 최삼락은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상태였다. 일단 며칠 더 경찰에서 데리고 있으면서 자백을 받아 낼 예정이었다. 안 되면 바로 검찰로 송치하든가.

이 형사가 속한 강력 1반은 살인 사건을 해결했다는 이유로 축하도 받고 점심 반주까지 한잔한 상태였다. 서장은 회식비에 표창까지 예고했다. 다들 기분 좋게 웃고 떠드는 중에도 이 형사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찜찜함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십육 시 삼 분경 경찰서로 제보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번 살인 사건 범인들을 목격했다는 젊은 여자는 그 새벽에 왜 김대순의 집 앞을 지나고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여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새벽 1시쯤, 두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여자는 남자들이 검은색 추리닝 상하의에 검은 모자를 썼다고 상세히 전했다. 전화를 흘려듣던 조 형사가 그 말에 허리를 곧추세웠다.

하나는 체격이 좋았고 하나는 말랐다. 마른 남자가 담장을 뛰어넘어 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 남자가 서울 말씨를 썼다고 했다. 도둑이라 생각한 여자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비도 오고 무서워서 그만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신고했다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여자는 후회스러운 마음에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냈다고 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여자의 말에 따르면 공범이 있다는 소리였다. 안 그래도 최초 현장을 둘러본 이 형사는 공범이 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주저한 흔적이 유난히 많았던 초범이 건강한 성인 둘을 혼자 처리했다기엔 미심쩍은 구석도 있었고,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현금에서 최삼락의 지문 외에도 다른 사람의 지문도 다수 발견되었다. 범행 도구가 든 가방에서 최삼락 사이즈가 아닌 피해자들의 피가 묻은 바지도 있었고 말이다.

혹시나 해서 최삼락에게 물어봤지만 자기가 죽인 게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고, 죽인 게 아닌데 공범은 왜 있냐며 난리를 쳤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는지 최삼락은 변호사를 고용하겠다고 알렸다. 이 형사는 이왕이면 비싼 사람으로 사는 게 좋을 거라 충고했다. 비싼 변호사를 쓴다면 10년에서 15년까지 형이 줄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반성 없이 무죄를 주장하면 형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오지랖 넓게 충고하지 않아도 변호사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어 그 얘기까진 하지 않았다.

후배들은 뉴스를 보고 전화한 미친년의 제보라며 그냥 넘어가자고 했지만, 이 형사가 짚고 넘어가자고 우겼다. 서장은 생각보다 빨리 진범이 잡혀 기분이 좋았는지 웬일로 이 형사가 하자는 대로 해 주었다. 그렇게 감식반을 달고 오성관으로 향했다.

오성관에서 일하는 직원 중 서울 말씨를 쓰는 남자는 셋이었다. 하나는 충청도 출신이었고, 둘은 서울 출신이었다. 하나만 빼고 둘은 알리바이가 없었다. 윤수일, 최삼락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범인으로 가장 유력했던 남자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 알리바이를 백두산이 뒷받침해 주었고, 병원 응급실 기록이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감식반 직원들은 오성관에서 가져온 스무 건이 넘는 지문 중 윤수일을 포함 세 명의 지문을 먼저 감식했다. 그 사이 조인환 형사는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다른 형사들은 증거품들을 정리하고 사건 일지와 사진들을 점검하며 이번 사건을 공부했다.

이십일 시 십오 분경, 한창 오성관 직원들의 면담 내용을 훑어보던 이주공 형사는 이번 살인 사건 담당 형사를 만나러 왔다는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오성관 나이트 밴드마스터 전석모라 소개한 중키의 마른 남자였다. 그는 저녁에 있었던 지문 채취에 응하지 못했다며 지문을 찍으러 왔다고 말했다.

남자는 최삼락과 나이트 오픈 때부터 함께 일을 한 동료였다. 면담을 자청한 남자에게 이 형사는 자판기 커피를 하나 뽑아 주고 접견실에서 얘기를 나눴다. 이 형사의 눈에 전석모는 최삼락을 몹시 시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잘생기고 덩치도 큰 최삼락에 비하면 전석모는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남자였다.

전석모의 입에서 나온 최삼락의 일화는 모두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득했다. 같이 일했던 밴드 직원들이나 가수들과는 상반된 말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다 굉장히 묘한 얘기를 꺼냈다. 연습이라도 한 듯 남자는 거침이 없었다.

“삼락이 행님하고 윤수일이하고 작당 모의를 하더란 말입니다. 삼락이 행님이 만나고 있는 정 여사라는 여자가 집에다 현금을 쌓아 둔단 소리를 여러 번 했거든예. 금고가 어쩌고 그런 소리를 하면서 니하고 내하고 잘만 하면 부자 된다 이카길래 흘려들었지. 근데 이번 사건을 뉴스에서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라예. 저 새끼들이 일 칬네. 형사님도 아다시피 삼락 행님이야 깜빵에도 갔다 온 전과자고, 윤수일이 가도 생긴 것만 얌전하지 밸 거를 다 했을 끼라. 그런 아들이 더 무서버예. 한탕 하고 서울로 토끼면 누가 알겠노? 그지예? 아이 내 말은, 둘이 진짜로 직있다 살인범이다 그 말이 아이고, 고마 제 생각입니다. 들은 기 있는데 이거를 비밀로 하기엔 양심의 가책을 느끼가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오늘 출근 와 안했냐꼬예? 무서버서 안 했지. 생각해 보이소. 살인자가 내보고 행님 하는데 형사님은 안 무섭겠습니까? 이런 얘기 제가 했다꼬 절때로 말하면 안 됩니다. 절때로예.”

마침 감식반에서 윤수일의 지문이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한다는 결과를 알려왔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이주공 형사는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지는 작금의 상황에 혀를 찼다.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젊은 여자의 목격 전화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전석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이건 계획된 모함이었다.

이 모함을 주도한 자가 누구든 간에 윤수일의 응급실 방문에 대해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진범이 잡혔다는 뉴스가 나간 후에 목격 전화를 걸고, 이렇게 늦은 시각에 사람까지 보낼 리 없었다.

단순 모함이 아니었다. 알리바이가 없었다면 윤수일은 꼼짝없이 살인범으로 몰려 최소 10년에서 15년 형을 살아야 했다. 어떤 새낀지 몰라도 윤수일과 경찰을 물 먹이고 있었다. 형사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한 남자의 인생이 걸린 문제였고 동시에 현장에서 뺑이 치는 형사들을 얕잡아 보는 행동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든 공권력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이 형사는 일단 전석모를 돌려보냈다.

윤수일을 참고인으로 부르기 위해 형사 둘을 오성관으로 보낸 다음, 밴드 멤버의 면담 내용을 다시 훑었다. 키보드 담당이라는 김웅의 말이 눈에 띄었다.

사건 이틀 전 마스터가 최삼락에게 돈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함. 그 일로 분노. 강재욱에게 빌린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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