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81)

“조 형사, 김 순경 어데 갔노?”

은퇴까지 3년 7개월이 남은 이주공 형사는 아까부터 김 순경을 찾아다녔다. 어제 살인 사건 현장에서 나온 물건들을 다시 보고 싶은데 그걸 넣어 둔 박스가 어디 갔는지 영 보이지를 않았다.

“김 순경 밥 무러 갔는데예?”

시계를 보니 1시 10분 전이었다.

“무신 밥을 한 시간씩이나 처묵노?”

“요새 아들은 다 그란다 아입니까. 선배님이 참으이소.”

이번 사건에 함께 배정된 후배 조인환 형사가 이 형사를 달랬다.

쯧. 못마땅한 이 형사의 표정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생각났을 때 봐야 뭐가 떠오르는데. 아쉬운 대로 사건 현장을 기록해 둔 수첩을 펼쳤다. 먼지가 잔뜩 묻어 뿌연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어 나갔다.

피해자들이 하필 이 지역 유지라 골이 아팠다. 그냥 유지도 아니고 경찰 간부들에게 돈을 뿌리던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돈줄이 둘씩이나 죽어 버렸으니 경찰서장 이하 간부들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주검을 처음 발견했던, 휴가에서 돌아온 가정부를 밤새 조사했지만 여자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살해된 김 씨가 직접 휴가비를 챙겨 주며 이틀 놀다 오라고 했고, 그렇게 휴가를 다녀왔더니 저 사달이 나 있었다고 했다. 여자는 알리바이도 확실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정부 주변 인물들을 조사 중이었다.

죽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있는 사람들이 더하다고 이 부부가 딱 그랬다. 두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척을 지고 다녀서 원한 가진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조폭과 손잡고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둘 다 성격이 어찌나 센지 이혼 소송을 거하게 치러 신문 기사에도 날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헤어진 사람들이라 절대 안 보고 사는 줄 알았더니, 어째 한날한시 한집에서 죽었다. 부부의 인연이긴 했나 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둘 사이엔 자식은 없었다.

사건 현장은 우발적 강도 살인의 정석이었다. 강도 살인의 경우 범인 대부분이 당황해서 증거를 없애려 허둥대다가 되레 증거를 남겼다. 이 사건이 딱 그랬다.

현장엔 증거가 널려 있었다. 지문도 넘쳐 났고 집 주변 쓰레기장에선 범행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도구가 담긴 가방과 현장에서 입었을 확률이 높은 피 묻은 바지까지 발견되었다. 멍청한 놈이었다.

이제 피해자 김 씨의 사업 파트너와 내연녀, 최근 다툼이 있었던 지인 등 참고인들의 지문과 현장의 지문을 대조하면 되었다. 일일이 작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범인을 찾는 건 떼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 형사를 거슬리게 하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강력계에서 살인 사건만 30년 넘게 맡아 온 이 형사는 피해자 상태와 현장의 부조화에 고개를 갸웃했다.

주저한 흔적은 셀 수 없이 많은데, 정작 방어흔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자다 죽은 것처럼 피해자들의 피부, 손톱과 치아 등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술 냄새도 나지 않았고, 묶인 흔적도 없었다. 독극물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수면제라도 먹고 자지 않고서야 이렇게 흔적이 없을 수 없었다.

처음엔 남편 김 씨가 강도와 짜고 전 아내를 먼저 살해한 뒤, 일이 틀어져 자신도 죽임을 당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피해자를 살펴본 뒤로 확신은 추측으로 바뀌었다. 어째서 김 씨는 저항을 하지 않았을까. 원수보다 더한 사이였던 두 사람이 왜 한방에서 자고 있었을까.

이 형사는 침을 묻힌 검지로 수첩 한 장을 넘겼다.

비싼 양주와 잔 하나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현장 일지를 빠르게 훑었다. 더 빠트린 건 없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선배님, 김 순경 왔습니다.”

“어. 알았다.”

이 형사는 수첩을 덮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같은 시각 최삼락은 그제부터 연락이 닿지 않는 정 여사 때문에 안달이 나 있었다. 집에다 전화해도 받지 않았고, 삐삐는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서 강 이사에게 연락했더니 시골에 땅 보러 갔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틀씩이나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멀리 지방으로 갔다는 소리였다.

억수같이 비 내리던 그 새벽, 내키진 않았지만 정 여사가 시킨 일이라 잠자코 했는데 정작 그녀는 고맙단 소리 한마디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음성은 넣을 수 있지 않냐 이 말이다. 힘든 일은 삼락에게 맡겨 두고 지는 땅을 보러 출장이나 가다니 몹시 괘씸했다.

“망할 여편네.”

삼락은 일단 일어나 씻기부터 했다. 화나는 건 화나는 거고, 언제 정 여사가 나오라고 할지 모르니 준비는 하고 있는 편이 좋았다.

2층 양옥집에 갈 때 입었던 검은 추리닝이 소파 등받이에 널려 있었다. 강 이사가 가지든지 버리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버리려고 했는데 비싼 메이커였다. 버리자니 아깝고 가지자니 찜찜해서 이틀째 방치 중이었다.

비가 참 지긋지긋하게도 오더니 오늘은 모처럼 하늘이 맑았다. 비를 싫어하지 않았던 삼락은 최근 일어난 일련의 일들로 비가 끔찍하게 싫어졌다.

특히 그 새벽, 집 안에서 들었던 마루가 삐걱대던 소리가 자꾸 생각나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샤워하는 중에도 그 소리가 들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분을 잡친 삼락은 차를 몰고 송도 단골 횟집으로 향했다.

한때 케이블카도 다니고, 여름이면 피서지나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던 송도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흉물처럼 멈춰 선 케이블카를 보며 삼락은 전처와 신혼여행으로 이곳에 왔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참 행복했었는데. 청승맞게 왜 그때 일이 떠오르나 몰랐다.

“사장님, 여 아나고 한 사라에 소주 한 병 주이소.”

“최 사장, 애인은 우짜고 혼자 왔는교?”

정 여사를 데리고 두어 번 찾아왔더니 횟집 사장이 그걸 기억하고 말을 걸었다.

“어디 보자, 얼굴 보이 싸웠네. 사랑싸움?”

횟집 사장의 농담에 삼락은 억지로 웃었다. 사랑싸움이면 차라리 좋겠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삼락은 며칠째 잠잠한 제 삐삐를 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나고 회를 초장에 푹 찍어 오독오독 씹어 먹고, 소주까지 한잔 마시니 우울했던 기분이 싹 가셨다. 누굴 하나 데려오는 건데. 입이 영 심심해서 결국 횟집 사장과 마주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회를 다 먹은 뒤 얼큰한 매운탕이 나오자 소주 한 병만 마시기는 성에 차지 않았다. 딱 한 병만 더 마시자 하고 시킨 게 세 병이 되고 네 병이 되었다. 취기가 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혀도 꼬이고 눈도 흐려졌다.

그때 삐삐가 울렸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액정을 보니 정 여사였다. 집 전화번호 옆에 8282가 함께 찍혀 있었다.

“하, 이 여편네. 이제사 연락하네.”

퉁명스레 뱉었지만, 삼락은 크게 안도했다. 하도 연락이 없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었다. 귀찮은 일 다 해치웠으니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그때 그 남자처럼 사람을 시켜 삼락에게 준 선물들을 모두 뺏어 가면 어쩌나 많이 불안했었다.

지금 삼락에겐 진주에 있는 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것도 은행에 담보대출을 받고 산지라 반 이상은 은행 거였다. 모친이 살면서 이자를 갚고는 있었지만, 삼락의 빚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정 여사는 돈을 잘 쓰긴 해도 절대 현금을 주진 않았다. 물론 선물 받은 금붙이들을 팔아서 용돈으로 쓰면 되었지만, 이제 막 선물 받은 걸 팔면 너무 없어 보일까 봐 꾹 참고 있었다.

전화를 걸러 일어나려는데 몸이 휘청댔다. 삼락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어. 최 사장. 니 개안나?”

“당여니 개안취.”

빨리 전화해 줘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발음이나 제대로 되려나. 정신없는 와중에 푸르르 소리를 내며 입을 풀었다. 몇 번을 주저앉았다가 일어나길 반복한 삼락은 횟집 사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전화기 앞까지 갔다.

전화번호도 한 번 잘못 눌러서 상대편에게 쌍욕을 들었다. 씨팔, 이놈의 손가락은 왜 말을 안 듣고 지랄인지 몰랐다. 겨우 맞는 번호를 눌렀으나 그새 어딜 나갔는지 정 여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에이 씨팔. 와 이리 전화를 안 받노?”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빨리빨리 전화하라고 했는데, 너무 지체했나 보았다. 삼락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얌전히 호텔에서 기다릴 걸 그랬다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정 여사와는 주로 오성관 호텔 로비에서 만났으니 거기로 가면 되겠다 싶었다. 빨리 전화하라고 해 놓고 벌써 나간 이유도 호텔로 갈 예정이라 그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늘 만나던 곳이니 정 여사도 삼락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삼락은 계산을 하고 근처 약국에서 술 깨는 약을 지어 바로 먹었다. 마침 놀고 있는 택시도 있어서 그걸 타고 오성관으로 향했다. 연락을 받았다는 기쁨에 삼락은 택시 기사에게 팁까지 건네주었다.

왠지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정 여사가 날을 잡자고 말을 꺼낼지도 몰랐다. 삼락은 콧노래를 부르며 제 방으로 올라가 찬물에 샤워하고 물도 많이 마셨다. 어느 정도 술은 깼는데 얼굴 빛깔은 여전히 붉었다. 하는 수 없이 화운데이션을 얇게 펴 발랐다.

“잘생깄네.”

솔직한 말로 가수 남진보다 잘생긴 것 같았다. 제 얼굴에 만족한 삼락은 양복 중에 제일 비싼 거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로비로 내려가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다리를 꼬고 앉아 스포츠신문을 펼쳤다.

어제 롯데가 삼성과의 더블헤더에서 2연패 하는 바람에 신문 1면엔 부정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다. 연승으로 2위를 해도 모자랄 이 중요한 시기에 2연패가 웬 말인가? 야구에 별로 관심 없는 삼락은 기사를 대충 훑고 신문을 내려놓았다.

삼락이 내려놓자마자 또래의 남자가 다가와 신문을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흔쾌히 그러라고 답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아직 정 여사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느낌이 좋았다. 곧 올 것 같았다. 아니, 늦어도 1시간 안에 올 것 같았다. 삼락은 여유 있게 커피를 홀짝이며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

[어제 오전 10시 반 경 부산 XX구 XX동 사업가 쉰두 살 김 씨 자택에서 김 씨와 김 씨의 전처 정 씨가 숨져 있는 것을 그 집 가정부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부산 문화 방송 이OO 기자가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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