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휴일이라고 비가 내리는데도 나이트는 무척이나 붐볐다. 수일이 혼자 집에 있기 싫다고 하자 두산은 자정쯤 수일을 직접 오성관에 데려다주었다. 기운이 없었던 수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술은 마시지 말고, 찌짐하고 고동 이런 것만 묵고. 알았나?”
“응.”
“니는 사이다 마시고.”
“응.”
“끝나면 삐삐치라.”
“알았어. 운전 조심해.”
바로 밀레니엄으로 가 봐야 하는 두산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잔소리를 했다.
“에헤이, 고마 가나? 뽀뽀라도 해주야지.”
이러면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수일은 차 앞을 빙 둘러 운전석 창으로 고개를 넣고 입을 맞췄다. 쪽쪽, 두 번 짧게 뽀뽀하고 떨어지려 하자 두산이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진득하게 입술을 비볐다. 살짝 입술을 열자 푹신한 입술이 가볍게 포개졌다. 츄웁 츕, 리듬 있게 입맞춤을 한 두산은 코끝에 마지막으로 뽀뽀하고 놓아주었다.
“딴 데 새지 말고.”
“안 그래.”
“삼락 아재한테는 내 미리 연락해 놨으니까 술값은 니가 내고. 돈은 챙깄제?”
“응. 지갑에 잘 넣었어.”
두산은 마음이 안 놓이는지 몇 번이고 딴 데로 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무리 자기가 정신이 없기로 이 비 오는 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수일은 두산의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면서 입술을 실룩였다.
지하 입구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수일이 오성관 가수인 걸 아는지 고개를 까딱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무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던 은아 씨는 수일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대기실에 남아 있었다.
“서울은 잘 댕기왔나?”
“네. 누님은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내야 밸일 있을 기 있나? 끽해야 노래나 부르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퉁명스러운 말투가 참 정겹게 느껴졌다. 수일이 슬쩍 웃자 와? 하며 은아 씨도 웃었다.
삼락 형님의 무대가 끝날 때까지 잠깐 수다를 떨다가 다 같이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이 가자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마스터는 끝내 함께 가지 않았다.
“저 새끼 저거, 내가 돈 안 빌리주따꼬 저란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마자 형님은 마스터 험담을 했다.
“50만 원이 누 집 아 이름도 아이고 내한테 돈 맡기났나 이 말이다.”
“으이그. 됐다. 오빠도 고마해라. 내는 저 양반이 강 이사한테 돈 빌맀을까 바 그기 걱정이다.”
“빌맀다 카든데?”
“진짜로? 하이고, 미칬는 갑다.”
“은아 니 내말 단디 들어라.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마스터는 절때 아이다. 알았나?”
형님의 충고에 은아 씨는 눈을 흘기며 내도 안다, 했다. 그 말을 하는 은아 씨의 얼굴엔 여전히 미련이 엿보였다. 은아 씨도 저처럼 정에 고픈 사람인가 보았다. 그래도 마스터는 아닌데. 참으로 사람 마음이란 게 인력으론 어쩌지 못하는 거구나 싶어 수일은 흐리게 웃었다.
해물파전에 고동까지, 평소 즐겨 먹는 메뉴로 주문을 했다. 삼락 형님과 은아 씨는 막걸리 잔을, 수일은 사이다 잔을 들고 함께 건배했다.
번쩍이는 금반지와 금목걸이, 금시계까지 한 형님이 조금 낯설었다. 오늘따라 형님은 어딘지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허리춤에 차던 삐삐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자주 들여다보았다. 애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병원에서는 머라카데? 이상 없다 카제?”
은아 씨가 당연히 그럴 거라는 듯 물었다. 수일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큰 이상 없대요.”
굳이 수술할 거란 소린 하지 않았다. 수일의 일 아니더라도 걱정거리가 태산인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수술하고 나서 얘기해도 되었다.
“그랄 줄 알았다. 참, 서울 구경은 잘했고?”
“네.”
“내도 난중에 서울 함 놀러가야겠다. 그때 수일이 니가 가이드 해도.”
“네. 그럴게요.”
삼락 형님은 남대문 시장에도 가 보고 싶다고 했고, 남산 타워에도 가 보고 싶다 했다. 63빌딩은 가 봤는데 영 별로였다며, 차라리 남산으로 갈 걸 하고 형님은 지난 방문을 후회했다.
다음엔 종로 금은방도 들르고 간 김에 단성사에서 영화 한 편 보자 했다. 아니면 장충동에서 족발 먹고 충무로 대한극장에 가도 좋다 했다. 북악산 관악산도 가야 하나. 당장 갈 것도 아닌데 형님은 여간 신나 하지 않았다.
“은아 니도 꼭 같이 가자.”
“내도? 말만 들어도 고맙네. 경비는 오빠가 다 내는 기가?”
은아 씨가 웃으며 화답했다.
“말이라꼬. 내가 다 낼 끼니까 니는 몸만 온나. 수일이 니도 몸만 오고.”
“네. 형님.”
수일은 두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세 사람은 빚 얘기나 계약 얘기는 하지 않았다. 돈 걱정도 하지 않았다. 정말 올지 안 올지 모를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며 허황된 얘기를 이어 갔다.
“수일아 내가 말이다, 조만간 인생이 필 것 같다.”
“에이, 형님 인생이야 지금도 황금기잖아요.”
“황금기는 무신. 그거는 쑨 허상이고, 이번이 진짜다. 다들 두고 바라. 은아 니도 그렇고 수일이 니도 그렇고 내 덕에 팔자 핐다는 소리 나오게 해주께.”
삼락 형님은 가슴을 쭉 내밀고 큰소리쳤다. 은아 씨가 소리 내 웃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야, 정 여산가 하는 그 여자하고 진짜로 결혼하는 갑네. 맞제?”
형님의 팔을 잡아 흔들며 답을 재촉했다. 형님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그 아지매 억수로 부자라카드만은, 오빠 진짜로 팔자 핐다. 날은 잡았나?”
“날은 아직이고, 조만간 잡을 거 같다.”
“축하드려요, 형님.”
“축하는 무신. 다 늙어서 재혼하는 긴데.”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형님의 얼굴이 훤했다.
수일은 전에 두산이 형님에게 조심하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어 떨쳐 냈다. 하여간, 두산은 삼락 형님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형님 얘기만 나오면 늘 삐딱하게 굴었다. 이따가 꼭 알려 줘야지. 수일도 은아 씨도 제 일인 양 기뻐했다.
수일의 삐삐가 울렸다. 바지춤에서 삐삐를 꺼내 액정을 보았다. 두산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니 삐삐했나?”
“아, 네. 어제 두산이가 사 줬어요.”
“글마 그거 돈 하나는 잘 쓰네. 내도 함 보자.”
은아 씨가 수일의 삐삐를 가져가서 요리조리 둘러보고 버튼도 눌러 보았다.
“내도 삐삐 하나 하까?”
“그래. 은아 니도 하나 해라. 가을 되면 행사도 많아 질낀데 삐삐 있으면 연락받기도 쉽다 아이가.”
수일의 삐삐를 부러운 눈으로 보는 은아 씨를 삼락 형님이 부추겼다. 수일도 딴 사람은 몰라도 은아 씨는 하나 해도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형님 말대로 주말이면 행사 뛰느라 정신이 없는 은아 씨는 연락을 늦게 받는 바람에 좋은 자리를 여러 번 뺏겼다 들었다.
“하세요, 누님. 가격도 많이 내리고 요금도 싸졌어요. 서울에 친한 동생도 이거 하고 나서 직장 잡았거든요.”
“그래? 안 그래도 내 억수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알았다. 이참에 내도 하나 해야겠다. 참, 수일이 니 번호나 알리도.”
“네. 잠시만요.”
수일은 메모지 두 장을 받아 삼락 형님과 은아 씨에게 삐삐 번호를 적어 주었다. 두산 말곤 연락 올 데도 없는지라 삐삐는 있으나 마나였지만, 그래도 갖고 있으니 괜히 뿌듯했다.
“저 삐삐 좀 확인하고 올게요.”
가게 밖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위에 가림막이 있긴 했지만 바람이 불어 비가 들이쳤다. 수일은 등을 돌리고 서서 음성을 확인했다. 사서함 비밀번호는 0614, 수일이 부산에 내려온 날이었다. 이런 걸 왜 비밀번호로 한 건지 두산도 참 싱거웠다.
[낸데, 아이다, 서방님인데, 잘 놀고 있나? 아픈 데는 없고? 술자리 끝나면 내한테 바로 삐삐치라. 그라고 엥간하면 혼자 있지 말고. 알았제? 먹는 데 돈 아끼지 말고 니 묵고 싶은 거 다 시키무라. 어… 그라믄, 내 또 삐삐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