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님, 수일이 행님!”
수일은 저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현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기가 누운 곳이 어딘지 헷갈렸다.
“현수 씨가… 여긴 웨… 웬일로.”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라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퍼뜩 일나이소. 내하고 같이 가입시다.”
“…예? …아니… 어디, 루요?”
“퍼뜩예.”
현수는 수일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다가 침대 밖으로 끌려 나온 수일은 정신이 들지 않아 두어 번 주저앉았지만, 현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맨발로 질질 끌려서 간 곳은 집 밖이 아니라 보일러실이었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여기서 저를 죽이려는구나. 수일은 문고리를 잡고 버텼다. 수일의 팔목을 잡고 있던 현수가 버티는 힘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이고, 미치고 팔짝 뛰겠네. 행님, 이라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여긴 보일러실이잖아요.”
수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수는 잡았던 손을 놓고 보일러실 한 귀퉁이에 난 작은 문을 열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문으로 현수가 몸을 반쯤 밀어 넣었다.
“퍼뜩 오이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저기에 왜 들어가는 건지도 몰랐다. 현수가 손을 내밀었다.
“퍼뜩예. 이거 두사이가 시키서 하는 일입니다.”
두산이란 말에 수일은 주춤주춤 현수 가까이 다가갔다. 손닿을 곳에 수일이 서자 현수는 그대로 손목을 낚아채서 잡아당겼다. 버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눈 깜짝할 새 안으로 처박힌 수일은 좁아터진 그곳에 혼자 갇히는구나 했다.
나가려고 버둥거리는데 현수도 몸을 구겨 넣었다. 손으로 문을 닫고 안에 설치된 빨간 버튼을 누르자 들어선 곳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은 엘리베이터였다. 작긴 했지만 분명 엘리베이터였다. 왜 이런 게 집 안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을 꾸는 건가. 이 상황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엘리베이터는 1층 인쇄소 창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거기서 내린 현수는 비품실로 수일을 데려갔다. 비품실에 또 작은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자 밖이 나왔다. 건물 뒤편인지 옆인지 하여간 좁은 골목이었다.
이건 꿈이 분명했다. 수일은 손을 들어 제 뺨을 때렸다. 현수가 그런 수일을 돌아보며 습관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맨발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수일은 흠칫 몸을 떨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한여름인데도 입에서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
‘수일아, 일어나 봐. 큰일 났어. 얼른 일어나 봐.’
합숙소에서 생활하던 수일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추위에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잠들었던 수일은 간신히 눈을 떴다. 경식이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래?’
몇 번이고 눈을 비벼 시계를 보니, 자정 12시 33분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왜 사람을 깨우고 난린지 몰랐다.
‘최 군이 없어졌어.’
‘근데?’
‘하이 씨팔, 너 걔가 왜 없어진 줄 몰라서 물어?’
‘무슨 말이야?’
‘빨리 찾아야 해. 안 그럼 그 새끼 깜빵 갈지두 몰라.’
수일은 최 군과 그리 친하지 않았다. 최 군은 수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얼굴만 반반하지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수일을 여사장이 감싸고 돌아서 그랬다.
저는 남자 손님까지 받고, 심지어 기둥서방의 변태 짓도 참아야 했지만 수일은 한 번도 그런 일에 불려 가지 않았었다. 연화와 헤어지고 갈 데가 없어서 다시 숙소로 돌아온 수일을 제일 반기지 않은 사람도 최 군이었다.
그런 최 군이 사라졌다. 경식의 말론 최 군이 기둥서방을 죽일 거라고 벼르고 있다고 했다. 기둥서방 그 새끼가 최 군에게 심한 짓을 했다는 소린 들었지만, 그게 얼마나 심한 짓인지 수일은 알 길이 없었다. 모두 쉬쉬했다. 여사장도 쉬쉬했다. 경식은 알고 있었지만, 최 군을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경식뿐 아니라 숙소 동료들이 다들 최 군을 찾으러 나섰다.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다. 날씨를 핑계로 따라 나오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내키진 않았지만 수일도 밖으로 나왔다.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비치곤 제법 거세게 내리는 통에 점퍼를 입고 있어도 수일은 추워서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눈비로 축축해진 길바닥에 낡은 운동화가 젖어 발도 시렸다. 비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수일은 소름 끼치도록 싫은 감촉에 몸을 떨었다.
개발이 한창인 동네라 큰 도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산이 있었다. 작은 동산이라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지만, 이런 날씨에 이 시간이면 개새끼도 가지 않을 터였다. 수일은 경식과 함께 다니다가 어느새 혼자가 되었다.
그러다 산에서 깜빡거리는 불빛을 본 것 같았다. 이 날씨에 저기까지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비명을 들었다. 분명 최 군이었다. 최 군은 목소리가 특이했다. 허스키하고 톤이 높았는데 의외로 매력적이었다. 수일도 매력적이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짧게 한 번으로 그쳤다. 수일은 저도 모르게 산으로 향했다. 산에서 굴렀을지도 모른다. 길이 미끄러워 그러고도 남았다. 산이라고 해 봐야 높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 날씨에 조난이라도 당하면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수일은 발이 젖는 것도 모르고 산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낡은 운동화가 진흙으로 뒤덮였다. 손과 발이 추위에 곱아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산에는 최 군만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엔 그 남자, 그 새끼, 기둥서방이 제가 부리는 덩치들과 함께 있었다. 최 군은 그들에게서 도망쳐 나온 모양이었다.
기둥서방 무리가 최 군을 찾는 동안 수일도 최 군을 찾으러 다녔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고 찾으려 최대한 바닥을 기었다. 손바닥이 까지고 피가 나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최 군을 발견했다.
최 군은 피투성이였다. 팬티 하나만 입은 채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수일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고 속삭였다. 수일은 제 겨울 점퍼를 벗어 최 군에게 입히고 운동화도 벗어서 신겨 주었다. 입김이 새어 나올까 입을 틀어막고 두 사람은 진흙으로 변한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두 사람 주위로 발자국 소리와 플래시가 한참을 머물다 갔다.
‘하, 씹할. 이 새끼 어디로 간 거야? 쥐새끼 같은 놈. 야, 니들 빨랑 안 찾아?’
기둥서방은 덩치들에게 고함을 쳤다. 최 군의 이름을 부르며 잡으면 죽여 버릴 거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두 사람은 바닥에 엎드린 채 그 새끼가 하는 험한 말들을 모두 들어야 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던 최 군을 수일이 흔들었다.
지금이었다. 덩치도 기둥서방도 모두 사라졌다. 수일은 고개를 빼고 불빛이 향한 곳을 체크했다. 산도 둘러보았다. 한창 체력을 키우려 하루가 멀다고 올라왔던 곳이라 누구보다 지리에 밝았다.
수일은 손으로 뛰어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최 군은 두려움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추위에 얼어붙어 이를 부닥쳐 가며 달달 떨기만 했다.
‘최 군아, 이러다 잡히면 죽어. 일단 도망가자. 도망가서 살자. 응?’
불빛이 다시 산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금을 놓치면 수일도 최 군도 위험했다.
‘혀엉, 나 무서워. 나 죽을지도 몰라… 요. 어뜨케.’
최 군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쩔 줄을 몰라 울기만 했다.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얼마나 맞았는지 광대가 부어올랐고, 앞니는 모두 빠져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나 여기 잘 알아. 나만 따라와. 알았지?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나만 따라와. 그래야 살아. 알았지?’
수일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몰랐다. 머리가 맑아졌다. 시야도 밝아졌다. 추위에 꽁꽁 얼었으면서도 힘이 났다. 기운을 내서 최 군을 여기서 벗어나게 하자, 수일은 그 생각밖에는 없었다. 최 군이 저를 미워했든 싫어했든 그런 건 하등 상관없었다.
점점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수일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빠르게 하나씩 접었다. 하나, 둘, 셋. 셋과 동시에 수일은 제가 아는 지름길로 달렸고, 최 군도 수일을 뒤따랐다. 소리 없이 달릴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덩치들과 남자도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 속도대로만 뛴다면 충분히 따돌리고도 남았다.
수일은 달렸다.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고 양말만 신은 발에 날카로운 것이 박혀도 달렸다. 당연히 최 군이 따라오는 줄 알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뒤가 허전해서 돌아보자, 최 군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발목을 접질렸는지 바닥에 엎드려 끙끙 앓았다. 수일은 왔던 길을 돌아 최 군에게로 향했지만, 이미 늦었다.
덩치 하나가 최 군의 뒷덜미를 잡았다. 최 군이 특유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순간 남자가 나타나 구둣발로 최 군의 얼굴을 걷어찼다. 기절했는지 죽은 사람처럼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남자가 수일의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눈은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수일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죽였다. 남자와 덩치들은 최 군을 어딘가로 끌고 갔다. 수일은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최 군이 살아남지 못할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살릴 수 있었는데, 지금 이 길로 조금만 더 가면 따돌릴 수 있었는데, 하필 최 군이 넘어졌다. 손을 잡고 뛸걸, 그랬다면 조금 느렸겠지만 그래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수일은 자책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겨울비로 젖은 바닥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눈이 섞인 비가 몸에 닿을 때마다 수일은 싫은 감각에 진저리를 쳤다. 저만 살아남은 죄책감에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
쪽문 바로 앞에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인쇄소 트럭이었다. 현수가 수일을 보조석에 태우자마자 트럭이 출발했다. 현수는 비를 맞으면서 골목 어귀로 사라졌다. 돌아보니 운전석에는 덕규가 앉아 있었다. 덕규도 수일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불안으로 떨렸다.
“덕규 씨, 무슨 일이에요?”
“저도 잘 모릅니다. 마이 놀라셨지예?”
“네.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병원이예.”
“병원이요?”
병원이란 말에 수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수일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최 군의 일이 모두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그때의 그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가는 곳이 병원이라니. 설마 두산이 다친 건가? 불안으로 사색이 된 수일을 흘끔 쳐다보던 덕규가 급히 말을 이었다.
“두사이 행님이 다친 건 아이고예. 행님 갈비뼈가 안 좋다고 해서 응급실 데려가는 깁니다.”
외국어도 아니고, 뭐라는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네?”
“아니, 그라니까, 행님 갈비뼈가 아파서 지금 병원 가는 길이라고예.”
덕규도 답답한지 한숨을 쉬었다.
“형님 누구요? 저요?”
“예. 수일이 행님이예.”
“아니 그게 무슨… 저 괜찮은데.”
“아이라예. 응급실 가면 가슴 아프다꼬 꼭 말씀하셔야 됩니다.”
“아닌데. 나 괜찮은데….”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수일은 자신의 뺨을 한 번 더 세게 때렸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분명 꿈은 아닌데, 상황이 너무도 이상해서 수일은 눈만 크게 떴다.
두산이 다친 게 아니라니 천만다행이었지만, 멀쩡한 저를 응급실로 왜 데려가는지 몰랐다. 그것도 인쇄소 트럭을 타고서. 비와 함께 천둥 번개가 쳤고, 트럭 안 시계는 12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수일은 덕규의 말대로 가슴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 인상을 쓰며 어설픈 연기까지 했다. 덕규가 호들갑을 떨면서 간호사와 의사를 찾았고, 접수를 마치자마자 의사가 수일의 침대로 왔다.
퇴원한 지 일주일도 안 지났던지라 응급실 간호사가 수일을 알아보았다. 수일은 엑스레이를 찍고 간단한 체크를 한 다음 침대에 눕혀졌다. 하늘에서 비가 퍼부었고, 응급실 곳곳에 놓인 붉은색 양동이가 새는 빗물을 받고 있었다.
수일의 팔뚝에 링거가 꽂히자마자 덕규는 전화 한 통 하고 오겠다며 나갔다. 삐삐가 울렸다. 바지춤에 꽂아 두고 그대로 잠이 든 걸 까먹은 수일은 삐삐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근처에 두산이 있나 돌아보다가 제 것에서 나는 소리라고 뒤늦게 알아챘다.
액정에는 ‘0124 230’이 찍혀 있었다. 0124는 알았지만 230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수일은 덕규가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렸다. 전화 통화를 하고 온 덕규는 긴장했던 아까와 달리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덕규 씨, 이거. 무슨 뜻이에요?”
수일이 삐삐 액정을 덕규 쪽으로 돌려주자, 덕규가 성큼 다가와 번호를 보았다. 얼굴에 미소가 일었다.
“0124 이거.”
“아, 그건 알아요! 그것 말구 그 옆에 꺼요.”
수일은 황급히 덕규의 말을 낚아챘다. 민망하게 덕규의 입에서 ‘영원히 사랑해’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예. 이삼공. 이거는 이상 무. 아무 일 없다 이 뜻입니다.”
“아….”
그러니까 두산은 수일에게 ‘사랑해, 이상 무’ 이렇게 보낸 거였다. 그게 뭐라고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수일의 침대 가까이 의자를 가져와 앉은 덕규도 숨을 고르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오밤중에 뭐 하는 짓인지 몰랐다. 첩보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현수에 덕규까지 왜 이러는지 수일은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단서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덕규도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밀레니엄에서 서빙을 보던 중 갑자기 불려 나왔고 그때부터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다. 덕규를 부른 건 현수가 아니라 종국이란 남자였다. 수일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남자였다.
너무 놀라서 실제로도 갈비뼈가 아팠던 수일은 두산의 삐삐에 긴장을 풀었다. 덕규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 같지가 않았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눅눅한 시멘트 냄새가 아니었다면 수일은 분명 계속 꿈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꿈이든 현실이든 참으로 기이한 밤이었다. 그리고 괴로운 밤이기도 했다. 최 군은 그날 이후 종적을 감췄다.
***
무대를 마치고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최삼락은 코알라와 마주쳤다. 코알라는 강 이사가 삼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특별한 손님의 방문 이후 오성관에 발길을 끊다시피 한 강 이사가 웬일로 이 시간에 방문했을까. 고개를 갸웃하며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엔 강 이사 혼자 있었고,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전에 정 여사가 말했던 그 기괴한 지령을 오늘 받은 것이다.
“강 이사, 내 안 하면 안 되나? 영 찜찜해서 그란다.”
“행님, 이 강재욱이 몬 믿습니까?”
“아니, 몬 믿는 기 아이라, 솔찌키 글타 아이가. 누가 봐도 이상하단 생각 안 하겠나? 내 정 여사가 새벽에 부르는 것도 맘에 걸맀는데, 이거는 넘의 집까지 드가야.”
“하기 싫다 이 말씀입니까, 지금?”
삼락의 말을 자르며 강 이사가 사납게 노려보았다. 목소리도 어찌나 날카로운지 삼락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기 아이고 이유나 쫌 알았으면 해서 그란다.”
“뭐 싫으면 관두이소. 밸 일도 아인 거 가지고 이래 호들갑을 떨면 내도 싫습니다. 이런 말까진 안 할라고 했는데예, 정 여사님하고 헤어질 각오는 하시는 기 좋을 깁니다.”
“머라꼬? 헤, 헤어져? 거 먼 소리고?”
정 여사와 헤어질 각오를 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삼락을 최 사장이라 부르는 여자였고, 삼락이 소유한 모든 금붙이며 빤쓰 한 장까지 다 사 준 여자였다. 제 목숨 줄이자 돈줄인 여자와 헤어지라니 얼토당토않았다.
삼락의 반응에 강 이사는 사나운 표정을 풀고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행님, 이 일을 부탁한 사람이 정 여삽니다. 내가 아이고예. 행님만 이상타 생각한 기 아이고 내도 이상해서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이어지는 말들이 가관이었다. 정 여사가 끼고 사는 무당이 하나 있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의지하는 줄은 몰랐다. 하필 그 양옥집에 붙은 잡귀가 전남편을 불러들였다. 삼락은 전남편이란 말에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던 그 밤, 남자의 사진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도 자신의 호텔 방 어딘가에 있을 그 사진.
“다행히 그 집 땅 기운하고 행님 기운이 상극이라 온갖 잡귀들이 행님만 나타나면 물러날 끼라 했다 안 합니까. 그 머꼬? 손 없는 날 이사 들어가는 거, 그거하고 같은 기라예.”
강 이사의 구구절절한 설명에도 삼락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남들처럼 깡패나 풀어 겁을 주면 안 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마치 삼락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강재욱은 정 여사의 전남편은 깡패 따위에게 겁을 먹지 않는 남자라고 덧붙였다.
삼락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무당말이 맞다고 치자. 이유가 그거라면 정정당당하게 대낮에 부를 것이지 왜 비 오는 새벽에만 저를 그 밖에 세워 뒀냔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왜 하필 이 오밤중에 가란 건지 삼락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흘낏 본 벽시계는 12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삼락이 여전히 내키지 않아 하자, 강 이사의 표정은 다시 차갑게 굳었다. 둘 사이엔 침묵만 흘렀다. 헤어지란 소리만 안 했어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삼락은 강 이사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강 이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예. 하지 마이소. 정 찜찜하면 안 하는 기 좋지예.”
“참말로 안 해도 되나? 내가 엥간하믄 하겠는데 이거는 진짜로 몬 하겠다.”
삼락은 속으로 안도했다. 정말로 안 해도 된다면 안 하는 게 제 신상에 좋을 것 같았다. 역시 강 이사라며 삼락도 따라 웃었다.
“예. 안 하셔도 됩니다. 남자가 어데 행님 밖에 없는 것도 아이고 다른 남자 또 소개해주면 되지 안 그렇습니까? 참, 그 자가용 그것도 정 여사님 명읜 거는 아시지예? 당장 돌려주셔야 할 깁니다.”
말투는 정중했고,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만 가 보라며 팔을 휘휘 저었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드가이소. 내도 갈랍니다.”
홀가분한 표정의 강 이사와 달리 삼락은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딴 건 몰라도 자가용은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최고급 세단이었고, 자기를 누구보다 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는 물건이었다. 거기다 딴 남자라니. 턱도 없는 소리였다.
“딴 남자? 그기 통할 끼라꼬 생각하나? 우리 춘자 씨는 내밖에 읍따.”
삼락의 말에 강 이사가 코웃음을 쳤다.
“행님, 정 여사님을 누가 소개시키줐습니까? 그때 딴 남자 만나고 있던 거 행님도 아시지예? 이번 일 특별히 정 여사님이 부탁한 긴데 행님이 안 한다 카믄, 그 여사님이 다른 남자 안 찾겠습니까? 머리가 그래 안 돌아가나?”
삼락이 아무리 떠들어 봤자 지는 싸움이었다. 강 이사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정 여사를 소개받을 당시 그녀가 제 또래의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던 걸 삼락도 알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론 사람을 시켜 그 남자에게 선물한 걸 모두 받아 냈고, 그중 일부는 삼락에게 선물로 주었다. 삼락은 그 남자처럼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강 이사의 팔을 붙잡았다.
“에헤이, 강 이사. 무슨 말을 그래 섭하게 하노? 당연히 내가 해야지. 정 여사가 내를 믿고 부탁한 일인데, 내 말고 누가 할끼고? 안 글나? 어허허허허.”
마음 한구석에서 이건 아니라고 소리를 쳤지만, 삼락은 애써 그 소리를 지워 버렸다. 지금 자기가 누리고 있는 걸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제 짝을 만났고, 삼락의 인생은 꽃이 피기 시작했다. 마흔둘.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에 그토록 바라던 최 사장님이 될 기회를 잡았는데 이런 일로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삼락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 여사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행님 잘되라꼬 이라지 괜히 이라겠나. 안 그렇습니까?”
“다 안다. 동생이 정 여사 소개시키주고 내 이래 잘 되게 해준 거 다 알지.”
“최 사장님, 일 잘되면 한턱 쏘이소.”
강 이사의 입에서 나온 최 사장님이란 말에 삼락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라고, 이거는 비밀인데예, 지금 가는 그 집 말입니다, 곧 행님 명의가 될 깁니다. 정 여사님하고 원앙새처럼 잘 살 생각만 하십시오.”
그렇게 좋은 집이 자기 명의가 된다니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몰랐다. 삼락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그 집으로 자기를 보냈었구나. 강 이사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사님한테는 비밀입니다.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음속에 피어올랐던 두려움과 걱정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삼락은 곧 부자가 될 터였다. 이 지긋지긋한 밤무대 생활도 이제 끝이었다. 진짜로 최 사장님이 되면 그때는 수일을 운전기사로 삼아야지. 맛있는 것도 맨날 사 주고, 좋은 데로 드라이브 가서 같이 놀아야지 했다.
삼락이 아는 사람 중에 수일만큼 성실하고 착한 사람도 드물었다. 게다가 괜히 부산으로 부르는 바람에 안 해도 될 고생을 시켰으니 그렇게라도 보상하고 싶었다.
은아에겐 뭘 해 주면 되나. 머릿속으로 온갖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삼락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강 이사에게서 받은 검은색 점퍼와 추리닝 바지로 갈아입고 검은 모자를 썼다.
별거 아니었다. 도둑처럼 들어가란 것도 아니었다. 벨을 누르면 가정부가 문을 열어 줄 거라고 했다. 가정부는 문만 열어 주고 도로 자러 들어갈 테니 일부러 찾아가지는 말라고 했다.
그래. 그 집에 사람이 안 사는 것도 아니고 가정부까지 있었다. 그녀가 삼락의 방문 사실을 안다는 건 정말 별일 없다는 소리였다. 삼락은 자기는 귀신을 쫓는 강인한 사내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시동을 걸었다.
밖으로 나가자 두꺼운 빗방울이 천장을 세차게 때렸다. 어찌나 비가 많이 오던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와이퍼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삐 움직였고, 삼락은 네 번째로 2층 양옥집 앞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바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삼락은 차 안에서 신나는 트로트 두어 곡을 듣고 10분가량을 마음을 다잡는 데 썼다. 차에서 내리기 전 손바닥으로 양 볼을 ‘찹찹’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쳤다.
“최삼락, 할 수 있다!”
삼락은 검은 우산을 쓰고 2층 양옥집 앞에 섰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하고 묻는 소리조차 없이 삐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삼락은 대문을 닫기 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오밤중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도배한 남자가 집으로 들어가면 수상쩍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대문이 닫혔다. 돌계단을 오르자 작고 예쁜 정원이 나왔다. 집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 넓었다. 잔디도 나무들도 하나같이 전문가가 가꾼 솜씨였다. 여기가 제 집이 될 거란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관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문이 열렸다. 불은 훤하게 켜져 있었다. 운동화를 신은 채 들어가려다 다시 현관으로 내려와 운동화를 벗었다. 젖은 양말도 벗어 운동화에 돌돌 말아 넣고 비싸 보이는 마루 위를 맨발로 걸었다.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내부도 고풍스럽기 그지없었다. 멋들어진 산수화 옆에 어탁도 걸려 있었다. 삼락은 집 안을 둘러보다 밤색 가죽 소파에 조심히 앉았다.
강 이사에게 받은 지령은 딱 하나였다. 거실에 1시간 정도 앉아 있다 나올 것. 단, 절대 방문을 열어서도 집 안을 돌아다녀서도 안 됨.
생각해 보니 쉬운 일이었다. 방문을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꾹 눌러 담았다. TV 옆 장식장엔 비싼 술이 진열되어 있었다.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먹지 말란 소린 하지 않았으니 술 한잔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삼락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에서 제일 비싼 양주를 꺼내 잔에 따랐다. 크리스탈 잔에 담긴 양주는 색깔마저 영롱했다. 천천히 소파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등받이에 팔을 하나 걸치고 양주를 음미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멋스러웠다. 여기가 내 집이라니. 삼락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비싼 술이라 술맛도 남달랐다.
2시까지만 있다 가면 되었다. 삼락은 술이 너무 맛있어서 술병을 아예 테이블 위에 놓고 마셨다. 취하면 곤란하니 딱 두 잔만 더 마셨다. 생각보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삼락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몸이 옆으로 넘어가는 느낌에 놀라 깬 삼락은 거실의 불이 꺼진 걸 깨달았다. 정전인가. 거실에 세워 놓은 커다란 시계가 새벽 3시 20분을 향해 달려갔다. 아. 씹할. 잠이 들었나 보았다. 삼락은 서둘러 집 밖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쏟아붓고 있었고,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정전된 게 분명했다. 한 발짝 떼려다 우산을 두고 나온 게 생각났다.
“정신 차리라!”
자신에게 화를 내며 도로 집으로 들어가 신발장 옆에 놓아둔 우산을 집었다. 순간, 삐걱, 하고 마룻바닥이 울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삼락은 숨을 죽이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집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방문은 여전히 모두 닫혀 있었다. 정말로 귀신 들린 집인가? 삼락은 부르르 몸을 떨며 서둘러 현관문을 닫았다.
도망치듯 밖으로 나온 삼락은 검은 우산을 쫙 펼쳤다. 비는 우두두 거친 소리를 내며 우산 위로 떨어졌다.
***
수일은 눈을 떴다. 옆에서 졸던 덕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두산이 앉아 있었다. 눈이 충혈된 거로 봐선 잠을 한숨도 못 잔 모양이었다. 그런 것 치곤 안색이 밝았다.
수일과 눈이 마주치자 두산이 씨익 웃었다.
“왜 웃어?”
“내 맘이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두산은 몹시 신나 보였다. 새벽에 그 난리를 쳐 놓고 혼자 신난 게 얄미웠다. 링거 바늘이 꽂혀 있던 자리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여전히 비가 많이 왔다. 붉은색 양동이는 물이 반이나 차서 똑똑 소리를 내며 제 존재를 알렸다.
“새벽에 있었던 일, 무슨 일이야?”
“아. 별거 아이고, 그 머꼬, 민방위 훈련 같은 기다.”
수일은 인상을 썼다.
“이게 왜 별게 아니니? 집 안에 엘리베이터도 있구, 인쇄소로 통하는 문도 그렇구. 이상한 점투성이잖아!”
다른 때 같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새벽에 있었던 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놀라기도 많이 놀랐고, 기억하기 싫은 과거 일을 생각나게 만들어서 수일은 많이 언짢은 상태였다.
두산은 수일을 가만 보며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고민하는 눈치였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입을 뗐다.
“수일아.”
“응.”
“새벽 일은 다 이자뿌고, 딱 한 가지만 기억해라. 니는 갑자기 갈비뼈가 아파서 응급실에 온 기다. 알았나?”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해야 되냐구?”
“아팠나 안 아팠나?”
두산은 수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묻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두산은 지금 제가 한 말을 수일에게 강요하는 중이었다. 눈빛이 묘하게 무서웠다. 수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팠어.”
“그래. 니 아팠다. 의사가 조심하라 카드나?”
“응. 아직은 조심해야 한대.”
사실이었다. 응급실 의사는 수일의 엑스레이를 보고 거의 다 붙긴 했지만, 아직은 조심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무조건 쉬어야 하는데, 혹시 퇴원 후 운동을 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수영장에서 논 거 말곤 없어서 수일은 고개를 저었다. 의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일렀다.
수일의 대답에 두산은 볼을 톡 두드려 주며 잘했다, 칭찬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더 묻지 못하게 하는 거로 봐선 자신이 알면 안 되는 일이 있나 보았다.
언짢긴 했어도 굳이 비밀을 캐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수일도 없었다. 눈치는 없어도 입을 닫는 건 잘했다.
두산은 수일의 볼을 몇 번 더 쓰다듬어 주고, 밤중에 고생 많았다고 여러 번 토닥였다. 그런다고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지만, 수일은 괜찮은 척했다.
“밥 무러 가자.”
“이 새벽에 문 여는 데가 있어?”
“어. 칼국수 집.”
칼국수란 말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제 이른 저녁을 먹고 잠만 자다가 새벽에 봉변을 당했더니 체력이 다 떨어졌다.
“거기 파전도 해?”
“어. 한다.”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맨발이었다. 두산이 발을 보고 인상을 썼다.
“신발은?”
“없어. 급하게 나오느라.”
“씨발. 니 여서 쪼매 기다리바라. 딸딸이라도 빌리오께.”
두산이 말한 딸딸이가 슬리퍼라는 건 알지만, 여전히 들으면 민망한 단어였다. 왜 경상도에선 슬리퍼를 딸딸이라고 하는 걸까.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수일은 혼자 얼굴을 붉혔다. 발을 들어 발바닥을 보니 연탄이라도 밟았는지 시꺼멨다. 차에서 내릴 때부터 맨발로 걸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상처 하나 없는 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두산은 병원 이름이 적힌 병실용 슬리퍼를 수일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이런 거 웬만해선 안 주는데. 두산이 얼마나 난리를 부렸을지 안 봐도 훤했다. 수일은 슬리퍼를 신고 두산을 따라 복도로 나갔다. 일부러 문을 열어 놓은 병원 입구로 비가 들이쳤다.
병원 입구 바로 옆에 그라나다가 서 있었다. 두산은 차로 뛰어가 후진을 해서 수일의 바로 앞에 세웠다. 입구를 막고 선 차 때문에 나가려다 길이 막힌 환자와 그 가족이 욕을 퍼부었다.
“니 장난하나? 여따 차를 세우면 우짜노?”
“죄송합니다. 여 마이 아픈 환자가 있어가지고예. 바로 나갈 깁니다. 죄송합니다.”
두산은 큰소리로 사과하더니 수일에게 퍼뜩 타라, 했다. 수일은 후다닥 뒷좌석에 올랐다. 개념 없는 운전자의 동승자여서 삿대질과 욕을 같이 들어야 했다. 수일이 문을 닫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수일은 뒤에서 보조석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덕구 그 새끼가 니 맨발로 돌아댕기게 냅두더나?”
“어? 아니… 덕규 씨도 정신이 없어 가지구….”
“하, 새끼. 지 신발이라도 벗어주야지 영 안 되겠네.”
두산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괜찮다고, 다친 데도 없다고 덕규 편을 들었지만 두산은 덕규를 족칠 생각만 했다. 하는 수 없이 말을 돌렸다.
“멀어? 나 배고픈데.”
“마이 고프나? 쪼매만 참아라. 거의 다 왔다.”
새벽 6시가 가까워졌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밖은 여전히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렸다.
두산이 데려간 곳은 시장통 한 귀퉁이에 있는 낡은 식당이었다. 근처에 일일 노동자들을 위한 인력 사무소가 있어서 식당 안이 제법 붐볐다. 비가 오면 공치는 날이었다. 혹시나 비가 그칠까 싶어 나왔던 남자들은 새벽부터 막걸리에 파전을 먹고 있었고, 가끔 칼국수로 요기를 했다.
수일과 두산이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다가왔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문이 열리면 습관처럼 고개를 돌려 입구를 보았다. 관심이 아니라 습관이었다. 혹여 이런 날에도 일손이 필요한 누군가가 문을 열고 사람을 찾을까 봐서였다. 수일도 해 봐서 알았다.
여름은 겨울보다 훨씬 형편이 나았다. 뙤약볕이긴 해도 적어도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위는 참을 수 있었지만 추위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사장님, 여 칼국수 두 개 하고예, 찌짐 하나 주이소.”
“이런 덴 어떻게 알고 오는 거야?”
“내? 에릴 때 밤새 술 마시고 놀다가 출출해서 문 연데 어데 없나 하고 돌아 댕기다가 발견했다. 여 칼국수 맛 직인다.”
지금도 어리면서 어릴 때라고 말하는 두산이 웃겼다. 수일은 피식 웃고는 낡았지만 청결한 테이블과 바닥을 눈으로 훑었다. 메뉴판엔 칼국수, 만두 그리고 해물파전이 전부였다. 그 옆에 ‘콩국수’라고 적힌 종이가 선풍기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두산의 말대로 칼국수 맛은 죽여줬다. 파전엔 해산물도 듬뿍 들었다. 두산은 먹기 좋게 파전을 찢어 주고, 해산물은 모두 수일의 앞에 올려 주었다.
칼국수를 먹다가 갑자기 설움이 몰려왔다. 죄책감과 부끄러움도 함께 들이닥쳤다. 수일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화장실을 핑계로 밖으로 나갔다.
바로 옆 인력 사무소 앞에 쳐진 천막은 텅 비어 있었다. 수일은 천막 안, 파란색 간이 의자에 앉았다. 천막은 위에서 내리는 비를 막아 줄 뿐 옆에서 들이치는 바람과 비는 막지 못했다. 마치 커다란 우산 아래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우두두 거친 빗소리가 머리 위에서 연신 울렸다.
언제 나왔는지 두산이 수일의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와? 맛 없드나?”
“아니. 그냥.”
가만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두산아.”
“어?”
“나 정말 비겁한 놈이야.”
수일은 비겁했다. 너무 비겁해서 다음 날 산으로 올라가 최 군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비겁해서 경찰서로 가서 어제 동료 하나가 나쁜 남자들에게 끌려갔다고 신고하지 못했다. 그가 이도 몇 개나 부러지고 맞아서 형편이 없었다고 전하지 못했다. 적어도 경식에겐 말했어야 했는데 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일은 그날부터 3일을 감기로 끙끙 앓으면서도 절대 산에서 최 군을 보았노라 말하지 않았다. 최 군의 짐이 그대로 있다는 걸 경식을 통해 들었을 때도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정말로 최 군이 죽은 게 사실일까 봐 그게 너무 싫어서 수일은 입을 닫았다. 최 군이 사라지고도 수일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돈을 벌기 위해 웃었다. 최 군이 도망갔다는 여사장의 말에 토를 달지도 않았다. 정말로 여사장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최 군은 산속으로 끌려갔지만 살아남았다. 많이 맞아 이가 부러지고 발목을 접질렸지만, 다행히 걷는 덴 아무 문제 없었다. 수일이 준 점퍼와 운동화를 신고 어딘가에 숨겨 둔 비상금을 찾아 멀리 도망갔다고 수일은 상상했다. 입 밖으로 그날 일을 꺼내지만 않으면 정말로 그렇게 된 것만 같았다. 최 군은 살아 있다. 수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두산은 묘한 얼굴로 수일을 바라보았다. 충혈된 눈에 잠이 어려 있는데도 수일을 걱정하느라 티를 내지 못했다. 수일은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을 들어 두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두산아, 나 어쩌면 좋니?”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우짜기는? 내하고 살아야지.”
“그래. 너하고 살아야지, 그지?”
“어. 니는 내만 보고 살면 된다.”
수일은 웃었다. 아니 찡그렸나?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산이 환하게 웃어 주지 않았다면, 눈을 휘어 저를 보지 않았다면 수일은 자신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마치 따라 하라는 듯 두산은 도톰한 입꼬리를 올렸다. 수일도 입꼬리를 올리려 애썼다.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제대로 따라 한 것 같았다. 입꼬리를 올리자 자연스레 눈이 작아졌다.
수일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울고 있는 게 아니다. 웃고 있는 거다. 수일은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두산의 커다란 손이 수일의 눈가를 쓱 쓸었다.
“집에 가서 푹 자자.”
“응.”
두산이 일어서서 수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투박하고 두툼한 손은 오늘따라 더 까칠해 보였다. 집에 가면 로션이라도 발라 줘야지. 수일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 손을 잡았다. 두산의 힘에 끌려 가슴에 안겼다. 두산은 수일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좋은 것만 생각해라. 좋은 것만 묵고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보고. 알았제?”
“응.”
“내가 그래 해 주께.”
“응.”
수일은 두 팔을 뻗어 두산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한번 터진 울음이 쉬이 그치질 않았다. 두산은 모르는 과거 일로 이렇게 울고 싶지 않았다. 청승맞게 빗속에서 뭐 하는 짓인지 몰랐다. 수일은 울음을 그치려 애를 썼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하이고, 우리 윤수일 씨, 요새 와 안 우나 했다.”
두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실컷 울어라. 두산은 제 품에 수일을 가두고,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수일은 마음껏 울었다. 그날, 그 추웠던 겨울밤, 누구보다 무섭고 아팠을 최 군의 몫까지 울었다.
집에 가자마자 두산은 수일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여태 참고 있었던 게 용할 정도로 어찌나 격렬하게 물고 빠는지 수일은 연신 아, 소리를 냈다. 씻지도 못하고 밤새 병원에 있어서 냄새도 날 텐데 괜찮으려나. 수일은 그 생각을 하면서도 쉽게 두산을 물리치지 못했다. 수일도 두산의 몸이 무척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수일을 탐하던 두산은 그대로 안아서 침대로 향했다. 쪽쪽, 뽀뽀하는 중에 제 몸에 걸친 옷들을 모두 벗고 수일의 옷도 하나하나 벗겼다.
“샤워하고 올까?”
“안 해도 된다. 냄새 좋다.”
두산은 킁킁 냄새까지 맡아 가면서 좋다를 연발했다. 입에서 떨어져 나간 두산은 목덜미와 귓불을 희롱했다. 목선을 따라 혀로 길게 핥았다.
“근데 두산아, 의사 선생님이 나 조심하라 그랬는데.”
“어. 내도 들었다.”
들었다면서 두산은 바로 수일의 몸 위에 올라탔다. 무릎을 꿇은 채로 수일의 몸을 두 다리 사이에 가두고 커다란 몸을 구부려 다시 키스했다. 벗은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얘는 여름엔 참 덥겠다. 수일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말캉한 혀를 받았다. 혀와 점막이 만나 내는 젖은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한참을 서로를 물고 빨던 두 사람은 입술을 떼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산의 충혈된 눈과 저를 만지는 거친 손이 자꾸 신경 쓰인 수일은 두산을 살짝 밀어냈다.
“빨랑 로션 가져와.”
“로션? 어! 알았다.”
손에 발라 주려고 말한 건데 두산은 뭐가 좋다고 황급히 튀어 나갔다.
로션 가지러 간 두산은 오지 않고 갑자기 물소리가 났다. 수일은 침대에서 일어나 가만 귀를 기울였다. 분명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였다.
“아니, 로션 가져오라니까 뭐 하는 거야.”
수일은 구시렁대며 이불을 당겨 벗은 몸을 감쌌다. 침대에 눕자 포근한 감촉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악몽을 꾼 건 아니었지만 새벽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었다. 마음 같아선 자고 싶었지만, 이대로 잠들면 두산이 서운해할까 봐 수일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도저히 안 돼서 도로 일어나 앉았다.
잠시 후, 쿵쿵 소리와 함께 두산이 들어왔다.
“물 좀 닦고 나오라니까.”
“알아서 마른다.”
욕실에 두고 몸이 건조할 때 가끔 바르는 커다란 로션 통을 들고 온 두산은 기대에 찬 눈을 하고 수일을 바라보았다. 저건 또 섰네. 로션 가져오랬더니 샤워를 하질 않나, 거기다 세워 오다니. 대체 무슨 경운지 몰랐다. 수일은 로션 통을 받아 손에 쭉 짰다. 두산이 갑자기 수일의 앞으로 다가와 제 하체를 들이밀었다.
“뭐해? 손 줘.”
“손은 머할라꼬?”
“너 손이 너무 거칠어서 발라 주려구.”
“알았다. 손부터 바른다 이 말이제.”
“손부터 바르긴, 손만 바를 건데.”
수일은 웅얼거리며 두산의 두툼한 오른 손등에 먼저 로션을 펴 발랐다. 두 손으로 두산의 손을 잡고 빈틈없이 로션을 치덕치덕 발라 주는데, 저놈의 성기가 까딱까딱 난리를 쳐 댔다. 크기도 참 컸다. 저런 걸 어떻게 넣었나 몰랐다.
오른손을 끝내고 이번엔 왼손에다 발랐다. 똑같이 로션을 부드럽게 펴 바르고, 두 손으로 잡아 골고루 조몰락댔다. 두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침을 꿀꺽 삼키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혀로 핥자 입술이 붉어졌다.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너 감기 걸린 거 아냐?”
“아이다. 머꼬? 벌쌔로 끝났나? 쪼매만 더 발라도.”
바를 만큼 발랐는데 두산이 아쉬워했다. 더 발라 달라고 조르는 통에 수일은 다시 한 손씩 번갈아 가며 듬뿍 로션을 발랐다. 거칠었던 손이 부들부들해졌고 좋은 냄새도 났다.
“이제 됐지?”
“어.”
그리고 다시 하체를 들이밀었다.
“빨아 달라고?”
“으데. 로션.”
“어우, 너는 애가 왜 자꾸 이상한 생각만 하니?”
“이상하기는. 원래 다 그란다.”
“다 그러긴.”
수일은 두산을 흘겨보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자리를 잡았다. 두산이 수일의 가랑이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너무 가까워.”
“어. 알았다.”
다시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마련한 두산은 기대에 부푼 눈을 하고 수일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또 귀여워서 수일은 피식 웃었다.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
투덜대며 손바닥에 로션을 듬뿍 짰다. 두 손바닥에 골고루 펼쳐 바른 다음 두산의 발기한 성기에 가져갔다.
“흡!”
손이 닿자마자 두산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엄지를 맞대고 손바닥 안에 성기를 가둔 다음 힘있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좌우로 문지르다가 상하로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찌걱찌걱 음란한 접촉음이 났다.
“하으… 읏… 씨발.”
두산의 시선은 수일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수일은 턱을 위로 치켜 올려 입을 벌렸고, 두산이 몸을 숙여 키스했다. 성기를 주무르는 손에서도 맞닿은 혀와 입술에서도 젖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로션을 발라 좋은 냄새가 나는 손이 수일의 턱을 잡았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꼭 쥐고 길게 혀를 빼서 입 안 구석구석을 핥았다.
두산은 숨을 헐떡이다 못해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수일에게서 입술을 떼지 못했다. 쾌락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흥분으로 붉었다. 입 안을 핥던 혀를 길게 빼물고 수일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더러워.”
“더럽기는.”
갓난쟁이를 핥아 주는 어미들처럼 두산은 수일의 온 얼굴을 핥아 주고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워 고개를 돌리려 해도 턱을 쥔 손 때문에 도망갈 수가 없었다. 자꾸 터지는 웃음에 수일은 마사지하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두산은 깊은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구부렸던 상체를 곧게 펴자, 허벅지 근육들이 보기 좋게 떨렸다. 파르르 떨리는 미세한 근육들의 움직임이 아름다웠다. 수일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기를 두 손에 꽉 쥐고 위아래로 흔들면서 귀두 끝을 혀로 눌렀다.
“흐읍!! 씨발!!”
귀두에서 액이 쏟아졌다. 성기를 잡고 흔들자 마치 물속에서 자위라도 하는 것처럼 철벅거리기 시작했다. 수일은 입 안에 귀두를 넣고 한 손으론 고환을 주무르며 다른 한 손으론 기둥을 흔들어 댔다. 두산은 아주 끙끙 앓았다.
“수일아. 윽! 수일아… 씨발, 내는 니밖에 읍따.”
머리카락 안으로 들어온 두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아프게 할까 봐 머리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주었다 하며 두산은 하염없이 수일의 이름을 불렀다.
“씨발!!”
경련하듯 온몸을 떨어 대던 두산은 끈적한 정액을 쏟아 냈다. 수일의 입 안에 든 성기를 빼내고 손으로 잡아 수일의 얼굴을 향해 남은 정액을 뿌렸다. 뜨끈한 하얀 점액질이 수일의 얼굴과 입술을 적셨다. 두산은 헉헉대면서 여전히 힘이 남은 성기를 수일의 입술 위로 눌렀다. 수일은 부드러운 귀두를 혀로 핥아 주고 정액을 먹었다.
두산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뀔 때쯤 수일은 애무를 멈추고 두산을 올려보았다. 두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일에게 입을 맞췄다. 손으로 수일의 얼굴에 묻은 정액을 쓱 닦아 주면서 쪽쪽, 작은 입맞춤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제 자기 차례라는 듯 수일의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나도 씻고 오면 안 되니?”
“머할라꼬?”
“아니, 너는 씻었는데… 아….”
사람 말을 좀 기다려야지, 두산은 수일을 뒤로 넘어트린 뒤 허벅지를 양손에 잡아 다리를 벌렸다. 순간, 엉덩이가 허공에 붕 떴다. 그 빈틈으로 두산의 얼굴이 들어왔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수일은 이불을 그러쥐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엉덩이 골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흐으… 아… 윽….”
나른하고 기분 좋은 느낌에 수일은 옅은 신음을 뱉었다. 눈을 감자 엉덩이에 닿는 혀의 감촉이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절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고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허공에서 대롱대는 두 다리가 갈 곳을 잃고 파닥거렸다.
“빨리… 하아, 입에, 넣어.”
배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수일은 미칠 것 같았다. 그만 핥고 제 성기를 입에 넣으면 좋겠는데, 두산은 엉덩이가 꿀단지라도 되는 양 그렇게 물고 빨았다. 혀가 한 번씩 왔다 갈 때마다 수일은 움찔움찔 몸을 떨었고, 입에선 신음이 터졌다.
성에 찰 때까지 핥아 대던 두산이 입술을 떼고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던 수일은 두산이 침대 위에 놓인 로션을 집는 걸 보았다. 자기가 두산에게 해 준 것처럼 두산도 로션을 손바닥에 쭉 짜서 그대로 수일의 성기로 가져갔다. 반쯤 발기했던 것이 손이 닿자마자 금세 부피를 키웠다.
“흐읏!!”
허리가 튕겨 올랐다. 수일은 침대를 짚고 있는 두산의 오른팔을 꽉 잡았다. 두산은 수일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성기를 쥐고 아래위로 움직였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수일의 아랫배가 요동쳤고, 팔을 잡은 손엔 힘이 들어갔다. 흥분과 괴로움에 고개를 흔들다가도 두산과 마주 보고 싶어 수일은 눈을 감지 않으려 애썼다.
로션 냄새가 이렇게나 좋았던가? 수일은 제 성기와 두산의 성기에서 나는 향에 더 흥분했다. 쯔물거리는 소리를 내며 수일의 성기를 잡아 누르던 두산은 수일의 옆에 모로 누웠다. 수일도 두산을 향해 몸을 틀었다. 두산은 수일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집어넣었다. 수일은 좀 더 자세를 틀어 다리를 더 밀착시켰다.
두산은 성기에서 손을 떼고 수일의 허리를 안아 제 쪽으로 더 가까이 당겼다. 쪽쪽 입을 맞추면서 두산이 상체를 들었다. 좀 더 자세를 잡으려 다리와 허리를 비틀더니 가랑이와 가랑이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마치 가위처럼 두 다리가 크로스 되었다. 두껍기로 치면 수일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근육질의 다리가 거침없이 수일의 가랑이를 파고들었다.
두산은 로션을 더 짜서 수일의 고환과 회음에 치덕치덕 바른 다음 제 것에도 똑같이 발랐다. 그리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산은 가랑이끼리 밀착시켜 비비다가 탁탁 소리가 나도록 쳐올렸다. 그럴 때마다 고환이 부딪혔고 그 반동에 성기가 거세게 흔들거렸다.
“아윽! 두산아… 살살.”
두산이 몸을 부딪쳐 올 때마다 수일은 그 힘에 못 이겨 뒤로 밀렸다. 그러자 두산은 아예 수일의 다리 하나를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로션으로 범벅이 된 가랑이는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비벼졌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처음인 수일은 민망한 자세에 고개도 못 들었다가 생각보다 강하게 밀어닥치는 쾌감에 몸서리쳤다. 두산이 허리를 쳐올리는 걸 보는 것도, 저 단단하고 두꺼운 다리가 제 몸을 감은 걸 보는 것도 자극적이었다. 키스에 로션 냄새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행위에 수일은 흥분으로 들떴다.
“하읍! 씨발! …이거 억수로, 좋다.”
“흐으… 이상… 해… 읏! 아냐, 좋아… 나두….”
수일은 간신히 버티고 누워 제 성기를 손에 쥐었다. 두산도 허리를 쳐올리며 제 것을 손에 쥐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자위하는 중에도 두산은 가랑이를 비비고 쳐 댔고 그때마다 수일은 자지러졌다. 두산도 씨발거리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 침대도 버티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스프링이 터지는 건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침대는 흔들렸고, 흔들릴 때마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격하게 울었다.
절정에 다다랐을 때쯤 갈비뼈에 통증이 일었다. 의사 선생님이 무리하지 말라 그랬는데. 수일은 걱정을 하면서도 몰아치는 쾌락에 그만하란 소릴 하지 못했다. 그저 두산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읏!”
수일이 사정을 하자마자 움직임은 더 격해졌다. 사정 후 힘이 빠진 수일은 세차게 밀어붙이는 두산의 움직임에 종잇장처럼 흔들렸고, 오랜 접촉으로 가랑이도 고환도 아팠다. 얼른 사정시켜야 자기가 살 것 같아서 수일은 손을 뻗어 두산의 성기를 함께 잡았다. 커다란 것을 흔들고 귀두 끝을 엄지로 부지런히 쓸었다.
“씨발!!!”
힘이 빠지다 못해 아주 죽을 것 같을 즈음에야 두산이 사정했다. 두산은 사정 후에도 허리 움직임을 이어 갔다. 절정을 맞은 두산의 성기와 온몸의 근육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안 수일은 침대에 널브러진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숨을 몰아쉬는 중에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웃었다.
“에헤이, 아저씨요, 거서 머 하는교?”
“하아, 하. 장난… 하으… 지. 마.”
“그래 힘드나?”
“…어….”
두산은 한 몸처럼 맞붙었던 하체를 풀고 수일을 향해 엎드렸다. 땀으로 흠뻑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올려 주었다.
“이래 체력이 약해서 우짜겠노.”
“나 아파서 그런 거야.”
“에이, 말은 바로 해야지. 니 안 아플때도 그래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도 니 나이 땐 좋았어, 뭐.”
“공갈치시네. 딱 보이 그때나 지금이나 밸반 다를 거 없었을 거 같은데.”
“뭐래. 나 그때 진짜 체력 좋았는데….”
우기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좋진 않았던 것 같았다. 수일은 정곡을 찔린 게 조금 분해서 두산을 노려보았다. 두산은 그런 수일의 이마에 쪽 뽀뽀를 하고 입술에도 쪽 뽀뽀를 했다.
“개안타. 체력은 내만 좋으면 되지. 니는 좋아 봐야 망구1) 쓸데없다. 니가 체력까지 좋았으면 전국 팔도를 도망댕깄을 낀데, 니 잡으러 댕기는 내는 무슨 죄고?”
이러면서 일부러 한숨을 푹 쉬었다.
“나 한 번밖에 도망 안 갔어.”
“한번은 도망 아이가?”
“그리구 전국 팔도를 도망 다닐 돈이 어딨니?”
“니는 돈이 없어도 갈 안께 그라지.”
두산은 제 이마로 수일의 이마를 콩 찧고 입을 맞췄다.
자기가 도망갔던 게 그렇게 힘들었었나. 수일은 가만 두산을 올려다보았다. 충혈된 눈이 더 벌게졌다. 손만 까칠한 게 아니라 얼굴도 까칠해 보였다. 수일은 두산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그만 자자, 했다.
두산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액을 닦을 생각도 없이 둘은 그대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이번엔 수일이 두산을 안아 주었다. 제 심장 가까이에 두산의 머리를 갖다 대고 등을 토닥였다. 두산은 수일의 품 안에 들어오려 몸을 말았다.
“잘 자.”
“어. 니도 잘 자라. 내 꿈 꾸고.”
수일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너두 내 꿈 꿔.”
일정한 박자로 등을 토닥이자 잠시 후 두산은 잠이 들었다. 쌔근쌔근 어린아이처럼 곤히 잠든 모습을 수일은 가만 바라보았다. 신기했다. 때로는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무척 어려 보였다. 수일이 아는 사람 중에 제일 강한 남자건만, 지금은 한없이 유약해 보였다.
수일은 두산의 이마에 뽀뽀를 해 주고 다시 일정한 박자로 등을 토닥였다. 아이를 재우듯 나지막이 노래도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