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81)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상엽은 수일이 맡기고 간 짐 상자가 생각났다. 고작 라면 박스 하나였지만, 혹시 예전 사고를 떠올릴 만한 게 있나 싶었다. 수일이 다치기 전에 찾아왔던 흥신소 남자도 수상했고, 최근 들어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아까 술집에서 대화하면서 수일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돌아왔을까 봐 긴장까지 한 탓에 머리가 아팠다.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그 기억은 돌아오면 안 되었다. 그래야 형도 살고 저도 살았다.

좁아터진 집이라 수일의 상자는 손바닥만 한 창고에 처박아 두었었다. 상엽은 삐걱거리는 녹슨 대문을 열고 들어가 제 방 대신 창고로 향했다. 불을 켜자 전구가 깜빡거렸다. 곰팡내에 코를 막고 짐이 쌓일 대로 쌓인 창고를 뒤적였다. 분명 삼양라면 박스였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를 않았다. 코딱지만 한 곳에서 사라질 리가 없었다.

상엽은 땀을 뻘뻘 흘리며 창고를 뒤지다 포기하고 곧장 마루로 올라갔다.

“어머니! 엄마!”

새벽 6시에 일을 나가는 어머니를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서로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벌컥 안방 문을 열고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옆에 주무시던 아버지가 먼저 깼다.

“아이, 이 시간에 뭐 하는 짓이야?”

“죄송해요, 아버지. 엄마, 어머니, 좀 일어나 봐요!”

“왜 그러는데?”

“창고에 있던 수일이 형 짐이 없어져서. 엄마!”

시체처럼 잠이 들었던 어머니가 겨우 눈을 떴다. 이 새벽에 갑자기 남의 짐 타령을 하는 아들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며 하품을 했다.

“그건 왜?”

“아니, 형이 달라고 할까 봐 미리 옮겨 놓게.”

“뭘 옮겨. 그거 월요일에 찾아갔어.”

“월요일? 누가? 형이?”

“아니, 어떤 남자가 와서 수일이가 짐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줬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냥 줬다고? 엄마두 참! 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지 그랬어?”

“수일이 짐을 수일이가 달라는데 너한테 왜 물어보니?”

맞는 말이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남의 짐을 덥석 준 어머니의 행동에 짜증이 치밀었다. 월요일이면 수일이 퇴원한 날이었다. 어제 서울에 올라왔다는 형이 미리 짐을 찾아 달라고 사람까지 썼다는 게 상엽이로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씨팔, 짐을 받았을 때 한번 열어나 보는 건데. 저 없는 사이에 짐을 미리 찾아갔다는 말에 안이 더 궁금해졌다. 앨범 하나 하고 수첩 서너 개가 전부였다. 쓰다 만 가계부도 있었고, 옷가지가 있었던가? 겨울 외투와 스웨터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상엽은 제 방으로 돌아와 예전에 뒤졌던 기억을 상기시켜 보았다. 수일이 짐을 맡긴 일이 두어 번 정도 있었는데, 돈이 궁했던 상엽은 혹시 현금이나 팔 만한 물건이 들어 있을까 싶어 안을 뒤진 적이 있었더랬다. 당시 돈이 될 만한 건 하나도 없었고, 당장 버려도 될 쓸모없는 잡동사니들만 있어서 김이 샜던 기억만 났다.

수일이 그 부산 남자와 영 이상한 관계인 것도 마음에 걸렸다. 남자가 마치 애인을 대하듯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사람이 바보같이 착해서 문제였다. 딱 봐도 조폭 같은 애와 어쩌자고 저러나 몰랐다.

수일은 상엽이 열아홉 살이던 무렵 처음 만났던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뭐 그랬으니 여태 제가 벗겨 먹기도 하고 속이기도 했지만.

하지만 그 일은, 상엽이 수일에게 했던 나쁜 짓 중에서 최악이었다.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평생 후회할 일이었다. 알면서도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어서 그랬었다. 차라리 길바닥에 나앉는 건데. 상엽은 매일을 후회했다.

이용하긴 했어도 상엽은 수일이 잘되길 바랐다. 누구보다 심성이 착했고, 그 이유로 더 고생한 사람이었다. 저야 가족이라도 있지, 평생 혼자서 외롭게 살았던 남자였고 늘 정에 고팠다.

만나는 여자마다 이용이나 당하고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형은 그걸 몰랐다. 자기가 이용만 당했다는 것도 몰랐고,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연화가 그랬다. 연화는 수일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돈만 주면 상엽과도 자고 형의 친구들하고도 자고 다녔다. 누가 돈이 조금이라도 많다는 소리만 들려도 그 남자에게 들러붙었다.

형은 연화에게 싸구려 보험이었다. 근데 형은 몰랐다. 호스트 일까지 해서 번 돈으로 빚을 갚고 남는 건 모두 연화에게 주었고 결혼까지 생각했었다. 아플 때 병간호조차 해 준 적이 없는 여자를 대신해 변명까지 했다.

어린 상엽의 눈에도 수일이 호구로 보였으니 연화는 오죽했을까? 사귄 지 1년 후 돈 많은 유부남을 물어서 헤어졌을 때, 상엽인 누구보다 기뻐했다. 드디어 저 악독한 년에게서 벗어나는구나. 물론 수일은 이별 통보에 정신을 못 차렸고, 연화가 일하던 가게와 집까지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한 번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한 번은 연화를 통해서 들었다. 그녀는 제발 좀 수일을 막아 달라고 상엽에게 통사정을 했다. 그 남자가 알면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연화는 겁에 질려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연화에게 관심도 없어서 설령 그랬다고 해도 상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수일은 몇 달을 연화에게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건 냉대뿐이었다. 그렇게 형의 첫사랑은 끝이 났고, 연화가 죽었다.

‘그년 팔자도 기구하지. 하필 맞아 죽냐?’

형에게 연화 소식을 전하면서 했던 말이었다.

“기억이 돌아오면 안 되는데, 어쩌지?”

상엽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잠자코 있는 수밖에.

***

수일은 밤새 끙끙댔다. 온몸이 아팠다. 두산은 수일에게 술을 마시게 해서 그렇다고 자책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란 걸 수일은 잘 알았다. 최 군의 웃음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수일은 오한에 덜덜 떨었다.

하필 왜 최 군이 생각난 걸까. 수일은 요즘 들어 이상한 꿈만 꾸었다. 꿈은 대부분 호스트 시절 여사장과 그녀의 기둥서방에 관련된 것이었고, 이젠 최 군까지 등장했다.

의미 없는 악몽이 수일을 괴롭혔다. 악몽에서 깨자 두산이 어루만져 주었고, 수일은 그런 두산에게 매달려 키스하고 애무했다. 알몸으로 누워 뜨거운 두산의 몸에 제 몸을 비볐다. 동이 틀 무렵 사정을 하고 나서야 단잠에 빠졌다.

느긋하게 일어난 두산은 룸서비스를 시켰다. 밥을 먹고 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몸도 정신도 개운했다. 한 시간 정도 배를 꺼트린 다음, 수영을 한 번 더 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이젠 부산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두산은 서울에 있는 동안 일수 가방에 일회용 카메라를 넣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딱히 관광지를 간 건 아니었지만 호텔 수영장과 레스토랑에서 둘이 함께 또는 따로 사진을 찍었고, 호텔 앞에서도 벨보이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었다.

“이번엔 나 잘 나온 걸루 뽑아. 너만 잘 나온 거 말구.”

“니가 사진빨이 안 받는 거를 내한테 머라하면 우짜노?”

두산은 자동차 안에서 수일이 운전대 잡은 모습을 찍으며 대답했다. 고속도로 진입 전까지만 수일이 운전하기로 했다.

“용두산에서 찍은 사진은 그렇다 치고, 숙소 앞에서 찍은 거는 액자 만든 것보다 다른 게 더 잘 나왔었잖아.”

“액자로 만든 기 더 잘 나왔다.”

“아니거든? 나 바보같이 웃고 있잖아.”

“백치미 흐르고 좋지. 앞 보고.”

“말을 해도. 이대로 확 박아 버릴까부다.”

수일은 투덜대며 액셀을 밟았다. 오랜만의 운전이긴 했지만, 익숙한 감각에 금세 적응했다. 그 시절에는 비싼 차라서 늘 안전 운전 했고, 혹시 어디 박을까 봐 얼마나 조심을 했던지 몰랐다.

두산은 수일의 방향으로 몸을 틀어 앉아서 운전하는 걸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우, 부담스러워. 고개 치워, 좀.”

“운전 자알 한다.”

“그럼 잘하지.”

“손에 면장갑만 끼면 딱 여사님이네 여사님.”

“너 지금 욕하는 거야?”

“그래. 이래 천천히 달리가꼬 은제 서울을 나가겠노?”

두산의 말에 계기판을 보니 속도가 50을 간신히 넘었다. 액셀을 밟는다고 밟았는데 왜 속도가 안 나지. 의아해서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어를 1단에 둔 상태였다.

“진즉에 말을 하지.”

수일은 얼른 기어를 4단으로 바꾸고 속도를 높였다.

수일이 운전하는 걸 좋아하자 두산은 고속도로 타는 것도 허락했다. 딱 한 시간뿐이었지만 신이 났다. 그라나다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쌩쌩했고, 관리를 잘해서 전혀 옛날 차 같지 않았다. 두산은 가끔 핸들을 잡아 주거나, 앞차와 너무 가까이 붙으면 ‘브레이크’ 너무 떨어지면 ‘기어’ 했다.

“알아서 해.”

초보도 아닌데 자꾸 그러지 마. 투덜대긴 했지만 저를 신경 써 주는 게 고마워서 속으론 좋았다. 이 순간의 분위기와 냄새를 기억하려고 수일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경기도 어디 휴게소에 내려 요의만 해결하고 두산이 핸들을 잡았다. 두산은 거침없이 달렸고, 수일은 진이 빠져 그대로 잠이 들었다. 두산이 ‘밥 묵자’ 하고 깨울 때까지 꿈 하나 꾸지 않고 단잠에 빠졌다.

그렇게 또 6시간을 넘게 달려 부산에 도착했다. 두산은 제 동네에 왔다고 이리저리 차선을 변경하며 번화가 전파상으로 향했다. 잠에 겨워 눈도 못 뜨는 수일을 억지로 깨우고, 전파상에 데리고 들어가 수일의 명의로 삐삐를 하나 개통했다.

아는 사이인지 형님 동생 하며 둘은 야구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제 경기가 우천 취소된 바람에 오늘은 OB베어스와 더블헤더가 있었다. 라디오에선 해설자들이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지금은 7:4로 롯데가 이기고 있어서, 그 형님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서비스로 음료수를 주고 기기값도 많이 깎아 주었다. 요금제도 할인율이 높은 거로 골라 주었다. 물론 두산은 설명만 듣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했지만, 그래도 하하 호호 잘 마무리되었다.

전파상 남자는 수일이 궁금한지 대놓고 흘끔거렸다. 두산이 수일을 ‘모시고 있는 형님’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더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모시고 있는 형님. 꼭 조폭이 된 기분이었다. 세 보이니 그런대로 나쁘진 않았지만, 조폭의 ‘ㅈ’도 상관없게 생긴 수일을 보고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수일도 삐삐가 생겼다. 두산과 같은 브랜드였고 기종은 더 최신이었다. 담뱃갑 정도의 작은 크기에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그래도 주머니에 꽂아 둔 삐삐를 보니 기분이 들떴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맞다. 잠깐 기다리 바라.”

두산은 차로 가기 전, 공중전화 박스로 향했다. 잠시 후 수일의 삐삐가 울었다. 수일은 바지 주머니에 채워 둔 삐삐를 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0124.

“공일이사. 뭐야?”

두산이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이거 무슨 뜻이야?”

“0124. 영, one, 이, 사.”

“영원이사? 모르겠는데?”

수일의 반응에 두산이 인상을 썼다.

“영원히 사랑해, 약자다 약자.”

“그게 뭐야. 영원이사, 그럼 랑해는?”

“생략 아이가. 생략.”

두산이 언성을 높였다. 수일은 귀가 따가워 조금 멀어진 다음 피식 웃었다.

첫 삐삐를 두산에게서 받았다. 그냥 음성 녹음도 아니고 ‘영원히 사랑해’라고 약어를 써서 보냈다. 요즘 친구들은 이러고 고백하나 보다. 수일은 액정에 뜬 0124란 숫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영원히 사랑해.

수일은 작게 중얼거렸다.

“잘 안 들린다. 크게 얘기해라.”

언제 다가왔는지, 두산이 큰 몸을 수그려 수일의 입술에 제 귀를 갖다 댔다. 수일이 화들짝 놀라자 두산이 키득거렸다. 두꺼운 팔이 수일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가자, 집에.”

“응.”

수일은 두산을 올려다보며 허리에 손을 둘렀다. 두산은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수일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두산의 광대가 실룩이는 거로 봐선 좋아 죽는 눈치였다.

영원히 사랑해.

삐삐로 사랑 고백을 받았다.

***

서울에서 내려올 때 두산의 삐삐가 울렸는데 그게 현철인가 보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고 수일의 퇴원 기념 겸 겸사겸사 저녁을 먹기로 했다. 현철이 출근하기 편하도록 오성관 근처 고깃집에서 만났다.

수일이 입원한 동안 친한 동생들과 친구들을 모아 결혼식 대신 피로연을 한 건 두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집에 초대받았을 때만 해도 어머니의 허락을 기다릴 줄 알았는데 갑자기 결혼했다기에 놀랐었다.

어머니의 반대가 생각보다 극심했던 모양이었다. 결혼식은 언감생심이란 걸 깨달은 현철은 그날로 혼인신고를 했고, 바로 여행사로 찾아가 신혼여행 패키지를 끊었다. 그렇게 제주도로 3박 4일의 신혼여행을 떠난 두 사람은 그제, 그러니까 수일과 두산이 서울로 간 날 오후 늦게 부산으로 돌아왔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 본 정애 씨는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며 진저리를 쳤지만, 여행이 좋았는지 제주도 얘길 할 때마다 홍조가 일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선물로 돌하르방 두 개도 사 왔다. 두산이 야한 농담을 하려는 걸 겨우 말리고 정애 씨에게 물었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저는 천지연 폭포예. 그래 큰 폭포는 처음 봐 가지고. 저희 간 날 무지개도 뜨고 억수로 예뻤습니다.”

“행수, 그 머꼬, 허니문 베이비 그거는 만들었습니까? 그기 제일 중요한데.”

그렇게 눈치를 줬건만 말이 비는 사이 두산이 냉큼 물었다. 정애 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현철인 허허 웃으며 눈썹을 긁적였다.

“곧 좋은 소식 안 있겠나?”

아무 말 안 할 줄 알았는데, 현철은 의외로 덤덤하게 덧붙였다.

“이거 수상한데? 벌쌔로 얼라 들어 선거 아이가?”

“아유, 아이라예. 아는 무신.”

정애 씨는 엄한 현철의 팔을 찰싹 때렸다. 하여튼 저놈의 입방정. 수일도 두산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야야, 무슨 놈의 손이 이래 맵노? 행수, 내 수일이 행님한테 이래 맞고 산다.”

두산이 어찌나 엄살을 피우던지 그 모습에 다들 웃고 넘겼지만, 수일은 혼자 민망해서 애먼 냅킨만 쥐어뜯었다.

막 개통해서 연락 올 데가 하나도 없는 걸 알면서도 대화 중간중간 삐삐가 잘 있는지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현철은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성관이 외진 곳이기도 했고 병태 때문에 많이 힘든가 보았다. 이직이래 봤자 또 어디 나이트 기도겠지만, 경기가 호황이어서 직장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기술이라도 배우러 댕길까 싶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하나 배워야 늙어서도 밥 벌어 먹고살지. 안 글나?”

“뭐 배우실 거예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수일이야말로 기술을 배웠어야 했는데 입에 풀칠하기 급급해서 그런 생각조차 못 하고 30대 중반이 되었다. 수일의 질문에 두산이 돌아보았다.

“용접도 있고 미장에 도배. 생각보다 많더라고예. 일단 쫌 더 알아보고 적성에 맞는 걸로 배울 생각입니다. 그라고 정애도 미용학원 끊었습니다.”

“그래요? 정애 씨라면 잘하실 것 같아요.”

정애 씨는 미용사가 오랜 꿈이라고 했다. 너무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시도조차 못 해 봐서 미련이 많이 남았는데, 현철에게 말을 꺼냈더니 흔쾌히 학원을 끊어 주었단다. 다음 주가 학원 첫날이라고 말하는 정애 씨는 흥분으로 들뜬 얼굴을 하고 제 꿈을 허락해 준 현철을 보며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

수일은 두 사람이 부러웠다. 지금은 별 볼 일 없더라도 미래를 위해 기술을 배우려는 시도가 멋졌다.

꿈. 수일은 자신에게도 꿈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진 선생님이 되고 싶었었다. 교탁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상상을 자주 했었는데.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면서 수일의 꿈은 가수로 바뀌었다. 수일의 꿈이 아니라 아버지의 꿈이었지만,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 말에 따랐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가수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몰래 학력고사라도 볼걸. 고등학교 졸업식 날 자신보다 등수가 한참 낮았던 친구가 대학에 붙어서 좋아하는 걸 보고 얼마나 질투가 났는지 몰랐다. 노래는 대학 들어가서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강변가요제도 있고 대학가요제도 있는데.

수일은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의 선택을 원망했다. 물론 그 원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은 맘대로 원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넌 꿈이 뭐니?”

고깃집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수일이 물었다.

“내? 니하고 잘 묵고 잘 사는 거.”

“농담하지 말구.”

“농담 아인데?”

두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좀 진지하면 어때서. 이럴 때 꼭 어린 티가 났다.

“그럼 어떻게 먹고살 건데?”

수일이 따지듯 물었다.

“다 계획이 있다. 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얌전히만 붙어 있으라.”

“기술이라도 배우든가, 아니면 검정고시라도 쳐야지. 너도 언제까지 나이트 기도로 일할 순 없잖아. 현철 씨도 늦었지만, 기술 배운다 그러구.”

“에헤이, 다 생각이 있다. 니 내 몬 믿나?”

“믿게 해 줘야 믿지. 맨날 놀러나 다니면서.”

수일은 구시렁대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다 두산이 너무 자주 일을 빠졌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근데 너 이렇게 자주 빠져도 되는 거야? 설마 잘린 거 아니지?”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두산이 혀를 찼다. 얼핏 저를 한심하게 보는 것도 같았다. 그러면 무슨 말이든 지어내서라도 안심시켜야지, 고작 구겼던 인상을 풀고 짧게 웃기만 했다. 커다란 손이 수일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어데서 이런 꼴통이 나왔을꼬.”

두산은 되레 한숨을 쉬었다.

버릇없는 건 이제 못 고치려나. 수일은 두산을 한심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오성관 들렀다 갈까? 삼락 형님이랑 은아 씨한테 인사도 좀 하게.”

“월욜날 봤는데 머할라꼬? 니 피곤하다. 고마 드가자.”

“나 괜찮은데….”

“갠찮기는. 눈밑이 시커멓다. 가자.”

두산은 손가락으로 수일의 눈가를 쓱 쓸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피곤이 몰려왔다. 다리에 힘도 풀렸다. 수일은 일부러 아쉬워하는 척하며 얌전히 차에 올랐다.

“오늘은 출근해?”

“어. 니 집에 놓고 잠깐 가 바야 된다.”

“가서 열심히 해.”

“알았다. 잘 하께.”

두산이 웬일로 말을 잘 들었다. 현철이 정애 씨 말을 잘 듣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았나 보았다. 진즉에 이럴 것이지. 착하다는 의미에서 두산의 등을 토닥여 준 수일은 연락 올 데도 없는 삐삐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버튼을 눌러 불도 켜 보고 아까 두산이 보낸 암호도 보았다.

두산은 그런 수일을 힐끔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수일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아침에 호텔에서 수영까지 한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두산이 쫓아와 선풍기를 틀고 이불을 덮어 준 뒤 냉장고에서 시원한 보리차를 꺼내 수일에게 약봉지를 내밀었다. 수일은 약을 털어 넣고 다시 누웠다.

두산은 침대에 걸터앉아 수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몸을 숙여 쪽쪽 입을 맞췄다.

“내 퍼뜩 갔다오께.”

“응.”

“어데 나갈 생각하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삐삐치라.”

“응. 조심히 다녀와요.”

수일은 오랜만에 이렇게 말해 주며 고개를 들어 뽀뽀했다. 두산이 환하게 웃었다. 커다란 손으로 수일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옷 갈아입고 가. 고기 냄새 나니까.”

“안 그래도 그랄라꼬 했다.”

“가서 말 잘 듣구.”

“어.”

다정한 눈이 저를 내려다보았다. 수일은 볼품없이 마르기만 한 손가락으로 잘 뻗은 코를 쓸었다. 이번엔 코끝에 뽀뽀했다. 두산이 예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두산아.”

“와?”

“저기, 기분 나쁘게 듣지 말구….”

수일은 말을 끌었다. 손가락으로 두산의 입술을 따라 선을 그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 말야, 중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두산이 하이고, 하고 웃었다. 수일의 손을 잡아 제 볼에 갖다 대고 키득댔다.

“중학교. 당연히 졸업할 수 있지. 그라믄 나 군대 가야 되는데 니 개안켔나?”

“군대? 아… 군대.”

“3년 동안 나 없이 살 수 있나?”

수일은 군대를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스물다섯이니 중학교 졸업장을 따면 바로 군대에 끌려갈 터였다. 사실 두산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3년은 별거 아니었다. 두산이 공부할 마음만 있다면 수일은 3년이 아니라 5년도 기다릴 수 있었다.

“가야 하는 거면 가야지. 근데 이왕이면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가. 중학교만 졸업하고 가기 아깝잖아.”

당장 몇 시간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은 주제에 수일은 짐짓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두산은 그런 수일의 얼굴을 가만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니 고무신 거꾸로 안 신을 자신 있나?”

“당연하지. 내 걱정 하지 말구, 니 걱정이나 하시지?”

정말 자신 있었다. 수일은 두산에게 잡힌 손을 움직여 볼을 쓰다듬었다. 두산이 웃었다. 수일의 손을 입술로 가져가더니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 푹신한 입술이 닿고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내도 고무신 거꾸로 안 신을 자신 있다.”

다정한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

마스터와 삼락의 기 싸움으로 홀 안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돈이 없다며 50만 원을 거절했던 삼락이 오늘 금시계를 하고 나타나자, 마스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삼락의 멱살을 잡았다. 왜 그렇게 울화가 치미는지 몰랐다.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매달 갚겠다고 했고 이자도 주겠다고 했는데 자기도 돈이 없다며 매몰차게 거절당했었다.

“둘이 얼라들도 아이고 이기 머하는 짓이고?”

은아가 중간에서 겨우 말려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았다. 일본으로 간 혜선 대신 새로 온 스물한 살짜리 가수 복희는 사장에게 이 사실을 이르러 달려갔고, 팔짱을 끼고 선 영희는 그들이 제 리허설 시간을 잡아먹어 짜증이 난 상태였다.

“마스타, 돈은 강 이사님한테 빌리소. 뭐하러 여서 기운을 뺍니까?”

사장의 부름으로 달려온 병태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마스터에게 일렀다.

“강 이사한테 빌리면 그기 사채 아이가. 내는 사채는 싫다.”

“사채예? 와, 말 함부로 한다. 강 이사님을 멀로 보고 사채라꼬 하노?”

병태가 입을 비틀어 올리며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뱅태 니는 그만 가바라. 머할라꼬 우리 일에 끼드는데? 리허설 해야 된다. 퍼뜩 가라.”

괜히 마스터에게 바람을 넣을까, 은아는 병태의 팔을 잡아 내보내려 했다. 병태가 그런 은아의 팔을 쳐 내고 양복 소매를 매만졌다.

“누님, 함부로 만지지 마이소. 내 알아서 한다.”

“내가 몬 만질 데를 만짔나? 뭘 그래 기분 나빠하노?”

“쯧. 이래서 암탉이 울면 안 된다카이.”

병태는 은아를 실컷 째려보고 마스터와 삼락도 한 번씩 둘러보았다.

“소란 피우지 마이소들. 오늘만 고마 넘어갈 끼다.”

“그래. 뱅태 니 볼일 바라. 우리 싸운 거 아이다.”

삼락이 병태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마스터의 손을 잡았다. 마스터는 삼락의 손을 뿌리치고 무대 위로 올라가 기타를 들었다. 은아는 병태가 사라질 때까지 씩씩대며 노려보았다.

“와, 기도 새끼가 겁도 없이 가수들한테 명령을 하네.”

“은아 니도 고마 참아라. 저 새끼 강 이사 빽 믿고 저란다 아이가.”

“강 이사고 나발이고. 여는 우아래도 없고 규칙도 없습니까? 오빠야, 강 이사하고 친하다 아이가. 한마디 쫌 해라. 이라다간 우리가 저 새끼 발아래 있겄다.”

“알았다. 내 한마디 하께.”

삼락은 은아의 어깨를 주무르며 기분을 풀어 주려 했다. 그사이 복희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홀로 돌아와 영희 옆에 딱 섰다.

“야 이년아, 니 사장한테 한 번만 더 이르러 가면 내가 머리카락을 다 뽑아삘끼다. 알았나?”

은아가 병태를 불러들인 복희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삼락이 은아를 말리는 틈에 복희는 영희의 등 뒤에 숨어 메롱 했다.

스무 살 송이보다 철없고 혜선보다 눈치 없는 복희는 은아의 말에 겁을 먹기는커녕 약을 올렸다. 은아더러 언니가 아니라 ‘아지매’라 불러서 은아는 안 그래도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겼는데, 너 오늘 잘 만났다 싶었다.

은아는 그대로 복희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쥐었다. 복희가 저보다 작은 은아를 떨어트리려 발광을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재미난 일이라도 생긴 듯 싸움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은아는 풍성한 파마머리를 한 움큼 뜯어내고서야 복희에게서 떨어졌다. 속이 다 시원했다.

복희는 입만 살았지 싸움은 못했다. 복희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아 울려고 하자 마스터와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밴드 연주에 복희의 거짓 울음이 묻혔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고함을 질러도 소용없었다. 은아는 무대 위로 올라가 신나게 <울릉도 트위스트>를 불렀고, 마스카라가 다 번지도록 눈물을 쥐어짠 복희는 다시 사장실로 달려갔다.

이 순간만은 삼락도 마스터도 은아도 마음이 통해서 서로를 보며 웃었다. 언제 싸웠냐는 듯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리허설이 끝날 즈음 때마침 강 이사가 오성관을 찾았다. 모두 저녁을 먹으러 나간 사이 마스터는 병태의 말대로 사장실로 가 노크를 했다. 사장과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강 이사만 있었다.

“마스터, 뭔 일 있습니까?”

침착하고 당당한 목소리에 마스터는 주눅이 들었다. 그보다 고작 한 살 많은 강 이사는 TV에서 보던 대기업 임원처럼 위엄 있어 보였다. 꾸벅 인사를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사님, 그기 제가 돈이 좀 필요해서예. 마이도 필요 없고 딱 100만 원만 빌리주십시오. 이자까지 쳐서 열심히 갚겠습니다.”

“아이고, 백만 원 그기 머시라꼬. 당연히 빌리드리야지예. 이자는 됐고 돈 생기면 그때 갚으이소.”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는 강재욱의 말에 마스터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오히려 당황해 감사하단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인사를 했다. 입이 귀에 걸렸다. 속으로 50만 원이 아니라 100만 원을 부른 자신의 선택을 뿌듯해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자 강 이사가 껄껄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마치 방문을 예상했다는 듯 지갑에서 10만 원짜리 수표 열 장을 꺼냈다. 마스터는 기쁨에 들떠 그 돈을 받았다.

이제 아들을 야구 교실에 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여윳돈도 생겼다. 이 돈으로 야구장에도 데려가고 용돈도 쥐여 주어야지. 마스터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며 방을 나섰다.

강재욱은 마스터가 나가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 등신 같은 새끼. 낮게 욕을 했다.

마스터가 돈이 필요하다는 건 말 많은 삼락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어제 정 여사와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삼락은 정 여사가 사 준 금시계를 자랑하며 요란을 떨었다. 그러다가 마스터 얘기가 나왔는데, 생각해 보니 잘만 요리하면 나름 쓸 만하겠구나 싶었다.

재욱은 병태와 영희를 통해 말을 넣어 두었다. 혹시 마스터가 돈을 빌리려 하면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라 전했다. 계획은 적중했고,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마스터가 찾아왔다.

하여간 거지 근성을 가진 새끼들은 이래서 안 되었다. 돈이 필요하면 낮에 노가다라도 뛰어야지, 널린 게 일자린데 빌릴 생각만 했다. 쯧. 혀를 차며 지갑을 도로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정 여사에게 전화가 온 건 그때였다.

“아이고, 여사님. 여 있는 건 우찌 알고 전화 주셨습니까?”

- 강 이사, 내 억수로 서운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서운하다는 말에 역정이 났지만, 재욱은 그런 티를 하나도 내지 않고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로 정 여사를 대했다.

“우리 여사님이 뭐가 그리 서운하셨을꼬?”

- 그 땅 말인데, 사람시키서 알아봤드만은 곧 개발 들어간다카대?

“개발이요? 누가 그랍디까?”

- 누가 그라기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드만은. 그 얘긴 와 내한테 쏙 빼 놨노?

“하이고, 우리 여사님이 이래 순진하다. 그거 쑨 사기꾼들이 하는 말입니다. 진짜로 개발 들어가는 거면 내가 와 여사님한테 말을 안 했겠습니까?”

- 내사 마 그런 거 모르겠고, 내 입으로 말한 게 있으이까 안 준단 소린 안 하께. 대신 딱 반만 넘길라니 그리 알아라.

“여사님,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우리 만나서 얘기 하입시다. 내 안 그래도 불란서에서 들여온 향수도 선물할 겸 만날라 켔는데 마침 잘됐네.”

정 여사는 만남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재욱이 어르고 달래 겨우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재욱은 전화기를 집어 던졌다. 만만치 않은 불여시인 줄은 알았지만, 고새 사람을 써서 땅에 대해 알아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법 돈을 들여야 나올 수 있는 고급 정보였다.

영감 몰래 진행한 일이었다. 정 여사와 계획했던 일은 절대 틀어지면 안 되었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여자였다. 씨팔. 재욱은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를 주워 불도저에게 전화를 넣었다.

예상보다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 그러면 영감 귀에 들어갈 터였다. 아직은 아니지만, 정춘자 저년은 수틀리면 영감을 찾아가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재욱의 얼굴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다. 잘생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섬뜩하기가 악마 같았다.

오성관에서 찬찬히 밀린 일을 보려 했던 재욱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제 캐비닛에 넣어 둔 검은 봉지도 챙겼다. 복도 끝 쪽문을 열자 공터가 나왔다. 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올려다본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 낼 것처럼 검은 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내일 새벽이 좋겠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차라리 잘됐다. 재욱은 매무새를 고치고 검은 세단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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