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81)

마스터는 마지막 무대를 끝낸 최삼락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길 기다리며 대기실 앞을 어슬렁거렸다. 50만 원 정도야 빌려주겠지. 맘 같아선 100만 원을 빌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친한 사이는 아니다 보니 50만 원에서 마무리하자, 혼자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세 번째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국민학교 5학년생이었다. 제 자식 중 나이가 제일 어리고 공부도 곧잘 해서 눈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전처들에게 30만 원씩 생활비를 주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가끔 여윳돈이 생기면 꿍쳐 뒀다가 그 아이에게 몰래 찔러 주었다.

얼마 전에도 아이에게 용돈을 줄 겸 만났는데 또 야구 교실 얘길 꺼냈다. 마스터도 아이도 롯데 자이언츠 광팬이었고 둘은 만날 때마다 올해는 가을 야구 보지 않겠냐며 야구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그런 아이가 야구 교실에 등록하고 싶다고 처음 말을 꺼낸 게 두 달 전이었다. 한창 야구 교실 붐이 붙은 데다 선생이 전직 야구 선수라는 점 때문에 참가 비용은 무척 비쌌다. 1주일에 겨우 한 번 하는데 유니폼을 맞춰야 했고 야구 장비도 거기서만 사야 했다.

그냥 해 보는 소리려니 했는데, 만날 때마다 징징대니 마스터도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돈을 꾸러 다녔지만, 이미 빌린 돈도 있어서 빌릴 사람이 없었다. 사채를 쓰려니 배보다 배꼽이 커서 꺼려졌다. 저에게 호감이 있는 은아를 구슬려 봤지만, 그 여자도 제 코가 석 자라 한 푼도 빌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은아의 입에서 최삼락의 얘기가 나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마스터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삼락이 이번에 만나는 사모는 보통 부자가 아닌 듯했다. 최근 비싼 최고급 승용차를 선물로 받았고, 메이커 정장만 입었다. 어제 보니 28k 금목걸이에 금반지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 최삼락에게 50만 원은 별거 아니겠지. 마스터는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행님. 이제 드가십니까?”

“어. 니가 여 웬일이고? 퇴근 안 하나?”

“해야지예.”

삼락은 편한 추리닝 차림이었다. 작은 손가방을 든 손가락에 굵은 금반지가 반짝였다.

“어. 그라믄 드가라.”

“행님, 날씨도 꾸리한데, 술 한잔하실랍니까?”

“술은 무신. 됐다. 고마 드가서 쉬라.”

귀찮은 표정을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술값도 굳고 다행이었다. 마스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절은 매몰찼다. 당연히 빌려줄 거라고 생각했던 마스터는 삼락의 닫힌 호텔 방문을 노려보았다. 주먹 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방문을 발로 차고 욕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개새끼, 니 을매나 잘 사나 두고 보자.”

마스터는 이를 갈았다.

삼락은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사람 소리가 나는지 가만 듣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육중한 소리에 침대로 가 누웠다.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마스터가 평소답지 않게 저를 기다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에이, 씹할.”

금반지, 금목걸이 얘기까지 꺼내며 마스터 개새끼는 돈을 빌려 달라고 들러붙었다. 철면피가 따로 없었다. 그러게 누가 애새끼를 넷이나 싸지르고 결혼을 세 번이나 하라 했냔 말이다.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쯧. 삼락은 혀를 찼다.

먹고 죽으래도 땡전 한 푼 없었다. 돈을 모두 정 여사에게 타 쓰는 삼락은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빚을 갚았다. 사채업자와 강 이사에게 빌린 돈이었다. 해운대 사모 남편에게 뺏긴 천만 원 중 일부는 강 이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었다. 모아 둔 돈 모두 탈탈 털리는 바람에 생활비가 없어서 그건 사채업자에게 빌렸다.

정 여사가 웬만한 경비를 다 쓰는 덕에 빌린 돈은 부지런히 갚아 가고 있었다. 그래도 싸나이 가오가 있지 커피나 음료까지 정 여사가 사게 할 순 없어서 팁으로 받은 돈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엔 꿈에서 나는 소린 줄 알았다. 하지만 벨은 끈질기게도 울렸다. 짜증이 확 올라왔다. 정 여사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급히 그 2층 양옥집 앞에서 보자는 말이었다. 너무도 다급한 목소리라 거절할 수 없어서 삼락은 그 차림 그대로 차에 올랐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양옥집 앞엔 전과 같이 정 여사의 차는 없었다. 개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오늘로 세 번째였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부른 시간대였다. 지난 두 번은 새벽 5시였는데 오늘만 새벽 3시였다.

비가 세차게 자동차 천장을 내리쳤다. 유달리 비가 많이 왔다. 서늘한 기운이 들어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이번에도 정 여사는 나타나지 않았고, 30분이 지나자 삐삐가 왔다. 삼락은 욕을 하며 정비소 앞 공중전화 박스로 가서 음성을 확인했다.

정 여사의 변명은 매번 달랐다. 늦잠을 잤다, 감기 기운이 있다. 이번엔 가는 길에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고 했다.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삼락은 웃어넘겼다.

삼락을 바람맞힌 날이면 정 여사는 백화점이나 금은방으로 데려가서 비싼 옷을 사 주고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사 주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차 안에서 30분 앉아 있는 보상치곤 무척 알찼다. 오늘은 현금을 좀 받아야겠다고 삼락은 생각했다.

평소라면 변명 후 오성관 호텔 로비에서 만나자는 얘기로 음성 메시지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정 여사는 2층 양옥집에 불이 켜져 있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미리 말을 하든가. 그랬으면 두 번 걸음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욕이 터졌다.

“하, 씨팔, 이 여편네. 내하고 지금 장난 까나? 진짜로 한마디 해야겠네.”

비가 많이 와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바지와 운동화가 홀딱 젖었다. 차 카펫이 젖은 운동화에 더러워져 짜증이 났다. 안 가고 거짓말을 해도 되었다. 그런데 그건 삼락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보자 보자 하니까 보자기로 보이나. 삼락은 투덜대며 차를 움직였다. 와이퍼를 작동시킬 때마다 착착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앞 유리의 물기가 깨끗하게 닦였다. 역시 좋은 차는 달랐다. 또 차의 성능에 감탄하며 삼락은 상한 기분을 물리쳤다.

새벽 3시 45분. 차에서 내려 양옥집 외관이 보일 위치까지 뒤로 걸었다. 다행히 담장이 높은 편이 아니어서 2층은 잘 보였고, 1층은 반만 보였다.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이상하지. 당연하게도 1, 2층 모두 불빛 한 점 없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집은 제법 비싸 보였다. 분명 전문가가 손 봤을 성싶은 잘 가꾼 소나무가 대문 바로 옆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팔짝팔짝, 두어 번 점프해서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정원도 있었다.

저런 데서 살면 좋겠네. 와중에 실없는 생각을 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이 무슨 염병인지 몰랐다.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삼락은 껄껄 웃었다. 천천히 차로 발길을 옮겼다. 운동화에 물이 들어차 걸을 때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적막한 골목엔 삼락이 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비가 조금씩 내리는 한낮의 수영장엔 제법 사람이 많았다. 기온이 어제보다 떨어져 쌀쌀했지만, 물은 많이 차지 않았다. 수일은 두산이 사 준 그 할아버지들이나 입을 수영복 바지를 입고 물놀이를 했다. 두산의 등에 올라타거나 목을 끌어안고 놀았다. 반들반들한 살갗이 닿는 느낌이 너무도 적나라해서 반쯤 발기하기도 했다.

수영장 안 수심이 구역마다 다를 거라고 생각도 못 한 수일은 혼자 사람이 별로 없는 쪽으로 갔다가 갑자기 발이 닿지 않아 깜짝 놀랐다. 당황하는 순간 몸이 굳어 몇 번 어푸어푸하다가 옆으로 자빠졌다. 두산은 버둥대는 수일을 보며 재밌다고 소리 내어 웃은 다음에야 수일의 허리를 안아 수면 위로 번쩍 올렸다.

수일은 헉헉대며 두산의 목을 끌어안고 놀란 심장을 다스렸다.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두산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쪽쪽, 뽀뽀하고 수일을 안은 채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두산은 수심이 깊은 곳에서도 발이 닿아서 제멋대로 수일을 데리고 다녔다.

두산에게 안겨 있으니 의외로 물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찰방거리는 수면도 젖은 몸이 물속에서 서로 닿는 느낌도 야릇했다. 두산은 등에 수일을 업고 헤엄쳐서 수영장 한 바퀴를 돈 다음, 코알라 안기로 안아 들고 또 뒤로 한 바퀴 돌았다. 이렇게 물속에서 오래 논 적이 처음인 수일은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 웃고 두산에게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두 겹을 입었어도 두툼한 중심부는 수일의 맨살이 닿을 때마다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저 같으면 창피해서 밖으로는 못 나갈 듯한데, 두산은 거리낌 없이 척척 올라가서 선베드에 앉아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돌아왔다.

외국 손님 하나가 엄지를 치켜들고 눈짓을 할 정도였으니 두산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수일은 입술이 파래질 정도로 두산과 놀다가 물에서 나왔다. 선베드에 앉아 타월로 몸을 닦고 맥주를 마셨다. 물기를 머금은 수영복 바지가 축 늘어져 걸리적거렸다. 수일은 두산의 세련된 수영복과 노인정 스타일의 제 것을 비교하며 입을 실룩거렸다.

“이거 억수로 재밌네. 여 야외 수영장이 그래 인기가 많다 케서 내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좋긴 좋다. 그쟈?”

“응. 여기 맥주도 맛있어.”

호텔 수영장은 처음인 수일도 이곳이 무척 좋았다. 사람도 적당하고 물도 맑았다. 선베드에 앉으면 멀리 도시와 푸른 나무, 잔디가 보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치 외국 휴양지에 와 있는 느낌에 기분도 둥둥 떠다녔다.

“춥나?”

“조금.”

“방에 드가까?”

“아냐, 좀만 더 놀자.”

두산은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진 수일의 차가운 손을 잡더니 호호 입김을 불었다.

“두산아, 나 맥주 한 잔만 더 줘.”

“술 마이 마시면 안 된다.”

“딱 한 잔만 더.”

수일이 부탁하자 두산은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제 것까지 두 잔을 가져왔다. 수일을 마주 보고 앉은 두산은 두툼한 발을 수일의 발등에 척 올렸다.

“무거워.”

“엄살은. 내 힘 안 주따.”

미간을 구긴 두산은 마르고 창백한 발을 제 발로 덮어 슬슬 문질렀다. 수일은 가만 발을 내려다보다가 맥주를 홀짝였다. 곰 발바닥 같은 발은 집요하게 수일의 발등을 간지럽혔다. 두산이 은근한 스킨쉽을 해 왔지만, 수일은 비가 많이 떨어지기 전에 수영장에서 조금 더 놀고 싶었다.

“나 업고 또 한 바퀴 돌아 줘.”

“그래 좋나?”

“응. 억수로 재밌어.”

수일의 말에 두산이 픽 웃었다. 곰 발바닥이 조금 더 마른 발등을 쓸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두산은 아쉬운 듯 콧등을 찡그렸다가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다. 내 한 바퀴가 아이라 열 바퀴라도 돌아 주께. 가자.”

커다란 손을 내밀어 수일을 잡아당겼다. 수일은 환하게 웃으며 두산에게 찰싹 붙어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수일은 검게 그을린 두산의 등에 거북이처럼 올라타고 목을 꼭 끌어안았다. 수일이 잘 잡았나 확인한 두산은 물살을 가르며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찰방찰방, 헤엄칠 때마다 물줄기가 수일과 두산의 몸 사이를 가득 메웠다. 부드럽고 미끈거리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오전에 병원에서 들었던 수술 얘기에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이른 조식을 먹고 두 사람은 병원부터 찾았다. 유명 의사라더니 정말로 사람이 많았다. 지방에서 올라와 무작정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눈이 안 좋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예약한 덕에 거의 첫 번째로 검사를 하고 진료를 보았다.

“혹시 오른쪽 눈 다친 적 있으세요?”

“네? 아뇨. 다친 건 왼쪽 눈인데.”

“왼쪽 눈은 이상이 없구요, 소견서대로 오른쪽 눈이 문제가 있어요.”

다친 왼쪽 눈에 이상이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부산의 안과 의사가 시력 손상을 걱정한 눈이 오른쪽 눈이란 걸 알고 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데가 이상합니까?”

두산이 물었다.

“아, 그게 오른쪽 눈에 미세한 손상이 있는데, 최근 상처는 아니구요. 무척 오래된 것 같아요. 파편 같은 게 스치면서 낸 상처구요, 워낙 미세해서 당시에 병원에 가셨다고 해도 잘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요? 마이 안 좋습니까?”

두산은 인상을 구기며 따지듯 물었다. 수일은 두산의 손을 꼭 잡아 말렸다.

“꼭 그렇지만은 않구요. 다친 눈이 오래되긴 했는데 다행히 망막 박리가 심한 편이 아닙니다. 윤수일 씨 같은 경우는 왼쪽 눈이 워낙 좋아서 오른쪽 눈이 나빠진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셨을 거예요. 이대로 내버려 둬도 그냥 눈이 나빠지는구나 하고 말아요. 근데 이 망막 박리라는 게 방치하면 실명까지 가거든요? 더 심하면 안구 적출도 해야 되구. 지금이라도 발견했으니 다행이죠. 뭐, 여하튼 그렇습니다.”

의사는 정밀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거의 확신한다고 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아주 늦진 않았다고 말했다. 마침 좋은 기계도 들어왔으니 조만간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다.

물론 수술한다고 해서 시력이 백 프로 회복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더 이상의 시력 저하와 안구 위축을 막을 수 있었다. 수일의 경우 안경을 쓰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다고 했다.

족제비에게 왼쪽 눈을 다치지 않았다면 눈 검사를 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수일은 저도 모르는 사이 오른쪽 시력을 잃었을 터였다. 아이러니했다. 무자비한 폭력의 결과로 수일은 눈 하나를 살릴 수 있었다.

안경을 쓴 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너무 큰 테는 꺼벙해 보였고, 너무 작은 테는 얍삽해 보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신에게 어떤 안경테가 어울릴지 두산과 의논했다. 두산은 어제 그 잠깐을 제외하고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수일을 대했다. 역시 두산이 이상했던 게 아니었다. 별로 힘들지도 않은 펠라티오에 눈물을 흘린 자신이 이상한 거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실컷 물놀이를 하고 맥주도 두 잔이나 마셨더니 수일은 금세 지쳤다.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호텔 방으로 올라왔다. 팬티만 입은 채 둘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안락한 침대에 눕자마자 수일은 눈이 감겼다.

두산의 입술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 졸려.”

“자라.”

“넌 뭐 하려구?”

“니 얼굴 뜯어먹을라꼬.”

“그게 뭐야.”

수일은 피식 웃고는 두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진 피부 위로 뜨거운 두산의 몸이 닿자 한겨울 온돌방처럼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졌다.

“좋다.”

엷은 미소를 띤 수일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 두산은 제 쪽으로 수일을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앞으로 오성관 나가지 마라.”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아직 계약 남았는데?”

“안 나가도 된다.”

“그러면 나 실업자 신세야. 뭐 먹고 살라구?”

“내가 먹여살리야지.”

두산이 쪽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말이라도 듣기 좋았다.

“생각해 볼게.”

수일은 두산이 농담을 한다 생각했다. 경상도 남자들은 유독 허풍이 심했다. 수일이 여태 만났던 사람들도 그랬고, 삼락 형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두산은 아직 어리니 더욱 심하겠지. 게다가 백사파를 등에 업고 있는 조폭이 아니던가?

수일에게 오성관 나이트가, 거기서 받는 월급이 어떤 의민지 두산은 잘 몰랐다. 성인 나이트는 수일의 유일한 밥벌이였고,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평생 묶여 있던 강아지들은 목줄을 풀어 줘도 잠깐 날뛰기만 할 뿐 도망가지 않는다고 했다. 수일도 그 강아지들과 다름없는 신세였다. 늘 평범한 샐러리맨을 꿈꾸지만 그건 그저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

수일은 밤무대에서 일하지 않는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긴 했다. 한 번도 들어 보지도 해 주지도 못한 말을 두산이 해 주었다.

말뿐이라도 수일은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비겁하고 가난한 남자. 그게 수일이었다.

“내 먹여살리께. 부산 가면 니는 살림이나 해라.”

“나 요리할 줄 모르는데?”

“에헤이, 누가 니한테 밥하라나? 고마 집에 얌전히 있으라꼬.”

“생각해 본다니까.”

수일은 놀리듯 답했다.

“고마 예, 서방님 할 것이지.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다.”

구시렁대며 이마를 쿵 찧었다. 그런 두산이 사랑스러워 수일은 웃었다. 고개를 들어 예쁜 입술에 뽀뽀를 했다. 두산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배에 닿은 자지도 크기를 키웠다. 어쩜 이리도 잘 서는지 몰랐다.

수일은 짧게 웃었다. 웃음소리를 입술이 덮치더니, 곧 두산의 커다란 몸이 수일을 덮쳤다. 무거워. 수일의 말에 ‘엄살은’ 하고 돌아왔다.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7시쯤 상엽이 일하는 나이트로 갔다. 혹시나 술을 마실까 봐 택시를 탔다. 후지다는 상엽의 말대로 유흥업소 밀집 지역 나이트치곤 허름한 편이었다. 평일이고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하는 사람 멀리 불러내는 건 민폐라며 호텔로 상엽을 부르려는 두산을 간신히 말렸다. 수일의 다음 일자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든 나이트 사장에게 인사는 하고 가고 싶었다.

이제 막 청소를 끝내고 홀 단장을 마친 상엽과 종업원들이 손님인 줄 알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손님은 손님이지만, 여기서 술을 마실 생각은 없어서 괜히 미안했다. 웨이터 복장을 한 상엽이 달려 나와 반갑게 맞았다.

“형! 이게 얼마 만이야? 맨날 통화만 하구. 얼굴 못 본 지 1년 다 돼 가지, 우리?”

수일을 꼭 껴안고 두 손을 부여잡았다.

“그르게. 너 얼굴 좋다.”

“형두 좋네. 아팠던 사람 맞아?”

상엽은 싱글벙글 웃으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머리통이 따가워 올려다보니 두산이 미간을 구기고 수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여긴 내가 말했던 백두산이라구, 부산 동생.”

수일은 두산의 등을 토닥이며 인사를 시켰다.

“안녕하세요, 임상엽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백두산이라고 합니다.”

두산은 상엽과 악수를 하고 본 적 없는 영업용 미소를 띠었다. 별일이었다.

“두산 씨, 형, 여기 좀 앉아 계세요. 나 하던 일 마무리하면 바로 나가요, 우리.”

“상엽아, 나 화장실 좀.”

“어, 형. 내가 데려다줄게. 복잡하지두 않은데 이상하게 많이들 헤매.”

전화상으로 미리 짠 대로 상엽은 화장실 위치를 알려 주겠다며 구석 복도로 데려갔다. 두산이 안 보는 걸 확인한 다음 상엽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형, 복도 끝에 사장실이라고 적혀 있어. 지금 계시니까 가서 인사하구. 나는 저 친구 못 일어나게 말 좀 시키고 있을게.”

“응. 고맙다.”

“뭘. 나두 형이랑 함께 일하면 더 좋지. 옛날 생각난다. 얼른 가 봐.”

수일은 상엽의 뒷모습을 보고 서둘러 복도 끝으로 향했다.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이 순간은 늘 긴장되었다. 들어와. 소리에 수일은 문을 열고 들어가 90도로 인사했다. 사장은 낡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수일이라고 합니다.”

“어, 어서 와. 상엽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일자리 구한다구?”

“네.”

수일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역시나 낡아서 가죽이 벗겨진 소파로 안내했다.

“일루 앉아서 얘기하자.”

“네.”

특색 없는 얼굴에 키가 작고 배가 나온 사장은 기름기 도는 얼굴로 수일을 훑어보았다.

“상엽이보다 형이라더니 어째 더 어려 보인다? 서른도 안 돼 보여. 관리 잘했네.”

“감사합니다.”

“가수라며?”

“네.”

“얘기 들어서 알겠지만, 우린 가수는 필요 없구, 홀에 서빙할 웨이터만 필요한데 괜찮겠어?”

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수일의 새하얀 나이키 신발을 흘끔 쳐다보았다. 괜히 신고 왔나, 수일은 저도 모르게 발을 모았다.

“네. 상관없습니다. 전에 웨이터도 하구 청소도 하구 별걸 다 했었거든요.”

“그렇담 다행이구. 근데 자기 너무 말랐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네. 건강합니다.”

수일은 힘주어 말하며 사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도 크게 떴다.

“부산 계약은 언제 끝난다구?”

“9월 중순이요.”

“뭐 그럼 10월부터 일하면 되겠네. 근데 오래 일할 수 있지? 몇 달 하구 관두고 그러면 안 쓸 거야. 여기 애들이 하도 자주 관둬서 내가 골머리가 아파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나가라고 할 때까지 일하겠습니다.”

오래 일해 달라니, 수일의 입장에선 오히려 고맙기까지 한 제안이었다.

“그래! 그런 자세 좋다. 내가 상엽이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얼굴을 딱 보니까 성실하게 생겼네. 일단 그렇게 하구, 자세한 계약 내용은 나중에 서울 와서 얘기하자.”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수일이 얘기만 끝내고 일어나려고 하자 사장은 벌써 가냐며 아쉬워했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그래도 그렇지. 자기두 참 정 없다.”

“죄송합니다. 일행만 없었으면 더 오래 있었을 텐데….”

두산을 괜히 데리고 나왔나. 수일은 후회했다. 상엽의 소개로 일자리까지 얻었는데, 바로 일어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사장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지. 같이 일하게 되면 종일 볼 텐데, 그래 그럼. 부산 돌아가니?”

“네.”

“조심해서 가구, 상엽이 통해서 연락할 테니까 그리 알구.”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수일은 여러 번 인사하고 뒷걸음질 쳐서 나왔다. 문 앞에서 긴장으로 굳었던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직장을 구했다. 그것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단발성 계약이 아니라 장기 직장이었다. 기쁨에 겨워 함박웃음을 짓고 몸을 돌렸다.

저 복도 끝에서, 두산이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수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엽인 어딜 가고 두산이 저기 서 있는지 몰랐다. 수일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수그리고 천천히 두산을 향해 걸었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내가 배가 좀 아파서. 아까 맥주 마신 게….”

중얼중얼 되지도 않는 변명을 했다. 두산은 고개를 삐뚜름히 하고 수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에서 광선이 나온다면 그게 아마 지금의 두산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형, 두산 씨, 우리 나가자! 나 두 시간밖에 시간 못 빼. 얼른.”

“어? 어. 그래.”

수일은 두산의 눈치를 보며 상엽에게 답했다. 두산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혀를 찼다. 가소롭다는 듯 상엽과 수일을 한 번씩 돌아보고 ‘가입시다’ 했다.

어두운 선술집은 퇴근 후 바로 달려온 듯한 직장인 한둘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다. 여기도 상엽이 일하는 나이트만큼이나 허름했다. 술값은 싸서 좋았다.

“같은 나이트에서 일한다면서요?”

상엽은 두산에게 존대를 했다. 평소라면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했을 두산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수일은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좀 전에 들킨 것 때문에 가시방석이었다. 안 그런 척 쾌활하게 구는 상엽도 냉랭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았다.

“예.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었습니다.”

“근데 어쩌다 친해졌어요? 우리 형 낯가림이 심해서 웬만해선 사람 못 사귀는데.”

신기하다는 듯 상엽이 물었다. 두산은 수일을 향해 씨익 웃었다.

“수일이 행님이 워낙 성격이 좋아서예. 따르다보이 그래 됐습니다.”

거짓말. 수일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두산을 슬쩍 노려보며 제 앞에 놓인 콜라를 홀짝였다.

“우리 형이 너무 물러요. 세상 물정도 잘 모르구 사람 잘 믿구. 내가 옆에서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천성인지 안 변해. 나 처음엔 형이 어디 모자란가 했다니까.”

상엽은 소리 내 웃으며 수일의 등을 쓰다듬었다. ‘농담이야, 알지?’ 웃음 가득한 얼굴이 수일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 행님이 쪼매 그런 면이 있지예. 지금도 모지린지 아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죠? 으하하하, 나만 그런 거 아니구나. 형, 들었지?”

두산의 말에 크게 동의하며 수일을 놀렸다. 상엽이야 그렇다 치고, 두산마저 뭐가 재밌다고 실실 웃었다. 괜스레 마음이 상한 수일은 과자만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이 친구 되게 재밌다. 형이 왜 좋아하는지 알겠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상엽은 담배를 꺼내 입에 하나 문 다음 수일에게도 권했다. 상엽은 수일이 담배를 안 피운 지 반년이 넘었다는 걸 몰랐다. 10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그사이 수일이 감기로 고생하고 폐렴으로 죽을 뻔한 걸 상엽이 알 턱이 없었다. 수일은 오랜만의 담배라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두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앙상하고 창백한 손가락에 담배가 걸렸다. 상엽이 나이트 이름이 적힌 일회용 라이터를 켜고 제 담배에 먼저 불을 붙였다. 그사이 두산이 지포 라이터를 수일의 담배 앞에 갖다 댔다. 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곧 불이 올라왔다. 수일은 눈을 내리깔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산의 시선이 수일에게 꽂혔다가 사라졌다.

수일은 입으로만 짧게 담배를 빨아들인 뒤 후, 연기를 내뱉었다. 가슴에 약한 통증이 일었다.

두산도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더니 수일을 보고 ‘불’ 했다. 수일은 제 담배를 두산의 방향으로 돌렸다. 뱀같이 번들거리는 눈이 수일을 훑었다. 두산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수일의 담배에 제 담배를 맞댔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담배를 빨아 불을 붙이는 모습에 열이 올랐다.

담배가 반 정도 타들어 갈 동안 둘은 서로를 의식하며 담배를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뱉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의 시선이 점점 오래 맞붙었다. 술집에선 나미의 <슬픈 인연>이 흘렀다.

옆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던 상엽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부산에 언제 돌아가?”

“내일 오전.”

“참, 병원에선 뭐래?”

“괜찮대.”

“그지? 그럴 줄 알았어.”

두산은 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근데 상엽아, 나 혹시 사고 난 적 있었니?”

“형이? 그럴 리가. 그리구 사고가 났으면 형이 그걸 왜 기억 못 하겠어?”

“그렇지?”

“왜? 뭐 생각나는 거 있어?”

생각나는 거 있냐고 묻는 상엽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났다. 그게 옆에서 무게를 잡고 앉은 두산 때문이라 생각한 수일은 팔꿈치로 치며 눈치를 주었다. 소리 없이 입으로 말 좀 해, 했다.

“아니, 생각은 무슨. 니 말대로 사고가 났으면 내가 알았겠지.”

“당연하지.”

상엽은 큰소리로 맞장구쳤다. 순간, 두산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듯 보였다. 뭐라고 말을 하려나 싶었지만, 두산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없이 연기를 뿜었다.

별거 아닌 과거 얘기가 오가는 동안 커다란 손이 테이블 밑으로 내려와 수일의 허벅지를 꼭 쥐었다. 수일은 짐짓 모른 체하며, 밑으로 손을 내려 두산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한참 동안 수일의 허벅지 위에 있던 손은 상엽의 눈길이 두산에게로 향하자 떨어졌다. 두산은 상엽과 건배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수일도 맥주를 마시고 싶은데 두산이 허락을 안 해서 콜라만 마셨다. 그 모습이 내심 못마땅했던지 상엽이 빈정댔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형도 어지간하다. 의사들 말 다 들을 필요 없어. 그거 쑨 병원비 받아 내려고 하는 소리지.”

“엔간히 배운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들어야지예.”

“아이, 그게 살다 보니까 꼭 다 들을 필요가 없더라구요.”

“수일이 행님은 나이도 있는데, 조심하라면 조심해야 안 되겠습니까?”

“뭐, 건 그렇죠. 그런데….”

두산은 상엽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담배 끝에 빨간 불꽃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상엽은 한마디 더 하려다가 그 모습에 입을 닫았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두산이 화장실 간 사이 상엽은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불평불만을 쏟아 냈다.

“와, 저 새끼 겁난다, 형. 어뜨케 저런 애랑 친해진 거야? 협박당하고 있는 거 아니지?”

“협박은 무슨. 쟤 원래 성격 무지 좋은데 가끔 낯가림을 좀 해.”

“아니 저게 낯가림이야? 씨팔, 누군 성격이 없어서 참고 있나.”

“마음 풀어. 어색해서 저러는 거지 정말루 좋은 애야.”

낯가림이 없어도 너무 없는 앤데, 지금은 유달리 날카로웠다. 상엽과 내외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아까 사장실에 갔다고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상엽과 짜고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할 테니 오죽할까 싶었다.

나중에 호텔로 가서 솔직히 말을 해야 하나. 수일은 몇 번이나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말하자. 서울로 같이 가자고 물어볼 때, 그때 말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두산도 없는데 삐삐가 울렸다. 놓고 갔나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상엽이 청바지에 꽂아 둔 검은색 삐삐를 들어 올리며 번호를 확인했다.

“너 삐삐 샀어?”

“어. 얼마 안 됐어. 이게 편한 줄 알았더니 족쇄야 족쇄. 이거 봐, 사장한테서 온 거잖아.”

“아… 요샌 얼마나 하니? 아직도 비싸지?”

“옛날에 비하면 엄청 내렸어. 요금도 생각보다 안 비싸구. 그 왜 나 노가다 뛸 때 나이트 자리 났는데 연락 안 돼서 놓칠까 봐 산 거거든. 확실히 있으니깐 편해.”

수일은 부러운 눈으로 삐삐를 바라보았다. 두산이 언제 화장실을 갔다 왔는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번호 좀 알려 줘. 담부턴 삐삐에 음성 남길게.”

“그럴래? 잠깐만.”

상엽은 주머니를 뒤지다가 볼펜이 없자,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와? 니도 삐삐 갖고 싶나?”

“아니, 그런 거 아니구….”

두산이 짧게 웃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수일의 볼을 툭 하고 쳤다.

“거짓말도 몬 하는 기. 부산 가면 하나 사자.”

“아냐. 뭐 하러. 나는 뭐 어디 가는 데도 없구.”

수일은 눈알을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두산은 하이고, 하고 웃었다.

“어떤 기 갖고 싶노?”

“필요 없는데… 굳이 산다면 너랑 같은 걸루.”

“알았다.”

“…응…. 근데 나 정말 필요 없는데.”

수일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콜라 잔을 만지작댔다. 상엽이 제 번호가 적힌 냅킨을 수일에게 내밀었다.

“형, 나 먼저 들어가 봐야겠다.”

“벌써?”

“벌써가 뭐야, 두 시간두 넘었어.”

“미안. 바쁜 사람 붙잡아 둬서.”

“미안하긴. 다음에 형 서울 오면 종일 볼 텐.”

상엽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실수한 걸 깨닫고 아차 싶었는지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다음에 보자, 형. 두산 씨도 조심해서 내려가요. 다음에 만나면 그땐 편하게 얘기하구.”

“예. 행님도 조심히 드가이소.”

두산은 상엽과 있던 시간 중 가장 밝은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금방 헤어진 게 서운해서 수일은 한참을 상엽이 나간 문을 흘끔거렸다. 손이 다가와 수일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다음에 또 보면 된다.”

“응.”

두산은 검지로 수일의 턱을 어루만져서 달래고 생맥주 두 잔을 시켰다.

“아깐 마시면 안 된다더니.”

“와? 마시기 싫나?”

“아니.”

“반만 마시라. 다 마시지 말고.”

“응.”

맥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수일은 두산과 건배를 했다. 반만 마시라고 해서 한 모금씩 아껴 마셨다.

“오늘까지만이다. 앞으로는 수술 전까지 금연, 금주다. 알았나?”

“응.”

금연 금주라고 힘주어 말한 두산은,

“니 담배 잘 피데?”

했다. 생각해 보니 두산의 앞에선 담배를 한 번도 피운 적이 없었다.

“왜? 싫어?”

수일의 물음에 두산이 웃었다. 싫기는. 두산은 이렇게 말하고 셔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더 필래?”

“응.”

담뱃갑을 쥔 손목에 스냅을 주자 담배 하나가 튀어 올랐다. 그 상태로 수일에게 내밀었다. 수일은 하나를 집어 손가락에 끼웠다. 두산이 라이터를 열고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저도 담배를 입에 물고 ‘불’ 했다.

“라이터 있으면서.”

수일은 구시렁대며 담배를 가까이 가져갔다. 두산의 눈이 수일을 훑었다. 이번엔 더 끈적하고 집요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산이 다가왔다. 붉은 조명 때문에 그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늘진 얼굴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수일은 넋 놓고 두산을 바라보았다.

“불.”

담배를 문 입술의 요구에 수일은 더 가까이 다가가 불을 붙여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맞담배를 피웠다. 시선은 서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두산의 올라간 입꼬리에 미소가 번졌다. 담배를 끼운 커다란 손이 수일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예쁘니까 봐준다.”

수일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나 어디가 그렇게 예쁘니?”

“다.”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다?”

“어. 싹 다.”

“참, 너두 정상은 아니다.”

“남 말하네.”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렇게 담배를 마저 피우고, 맥주 반 잔을 마신 뒤 두산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몇 발자국 걷다가 테이블 위에 상엽이 준 냅킨을 두고 온 게 생각났다.

“나 얼른 갔다 올게. 여기 있어.”

“내가 가까?”

“아냐, 바로 요 앞인데 뭐.”

수일은 종종걸음으로 조금 전 나왔던 선술집에 발을 들였다. 순간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고, 그 속에서 최 군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온몸이 굳어 꼼짝도 못 하고 서 있다가 용기를 내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가게 안 어디에도 수일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냅킨만 얼른 집어 나왔다. 쫓기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수일을 두산이 지척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몸에 닿자 소름 끼칠 정도로 싫은 감각이 깨어났다. 그 추웠던 밤, 겨울비. 수일은 갑자기 이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2